트로트의 여제 주현미가 데뷔 35주년을 맞아 새 앨범을 발표한다. 통산 20번째 주현미 정규앨범으로, 총 12곡의 '인생 이야기'가 담겼다.
올해 데뷔 35주년을 맞아 전국 투어 일정에 발맞춰 지난 봄 발표될 예정이었던 이번 앨범은, 최근 코로나19의 여파로 공연이 연기되면서 발매 시점을 늦추게 됐다.
이에 총 12트랙의 수록곡을 6월부터 월 2곡씩 디지털 싱글의 형태로 선공개한 뒤 11월 모든 곡의 발표가 끝난 뒤 아날로그 방식으로 리마스터링 된 LP 음반을 발매할 예정이다. 첫 음원 공개는 6월 15일 월요일 오후 6시에 이뤄진다.
6월에 선보이는 두 곡은 '여인의 눈물'과 '꽃 피는 청계산'이다. 첫 번째 곡인 '여인의 눈물'은 6/8박자의 리듬에 오케스트라 편곡이 빛을 발하는 노래로 주현미의 파워풀한 보컬이 돋보인다.
두 번째 트랙은 '꽃 피는 청계산'으로 가수 주현미의 인생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이 담긴 곡이다. 요즘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정통 트로트 곡으로, 유난히 산을 제목으로 하는 노래를 많이 불러온 주현미의 개인적인 추억을 표현함과 동시에 우리에게도 친근한 명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수 주현미는 "저를 사랑해주시는 팬들께 가장 '주현미'다운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라며 ”시대를 역행할지라도 트롯의 원류(源流)를 찾아가는 것이 이 앨범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주현미의 트로트를 향한 진심은 최근 보여준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2018년 11월부터 시작된 유튜브 채널 '주현미TV'를 통해 130여곡에 달하는 우리 전통가요를 직접 불러 업로드하고 있다. 최근 각각 노래의 사연을 고증해 기록한 노래 이야기를 엮어 에세이 ‘추억으로 가는 당신’을 펴내기도 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미래에셋자산운용과 미래에셋캐피탈 주주총회에서 확정된 2019년도 배당금 전액을 기부한다. 박 회장은 2010년부터 미래에셋자산운용 배당금을 기부하고 있다.
올해는 미래에셋캐피탈 배당금까지 더해 17억 원을 기부했으며, 10년간 누적 기부금은 총 250억 원 수준이다. 기부금은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통해 장학생 육성 및 사회복지 사업에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미래에셋 해외 교환장학생 프로그램은 한국의 인재들이 넓은 세계에서 지식 함양 및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외 교환학생 가운데 우수한 인재를 매년 700명씩 선발해 학비와 체재비를 지원하는 교환학생 장학사업이다. ‘젊은이들의 희망이 되겠습니다’란 기치 아래 2007년 1기 선발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50개국에 5817명의 학생들을 파견했다.
또한 국내장학생 3475명을 비롯해 글로벌리더대장정 같은 글로벌 문화체험 프로그램과 전국 초등학교로 찾아가는 스쿨투어 및 가족이 함께하는 경제교실, 희망듬뿍 도서지원 등 다양한 국내외 교육프로그램 및 사회복지사업을 통한 참가자도 30만 명(31만5119명)이 넘는다.
미래에셋그룹은 교육부와 교육기부 MOU를 체결해 금융분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인재 육성에 앞장서고 있다. 적극적으로 인재육성 사업을 진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제1회 교육기부대상 장관상을 수상하고, 2013년에는 교육기부 인증마크를 획득했다.
박 회장은 2000년 75억 원의 사재를 출연해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설립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은 ‘배려가 있는 자본주의 실천’을 위해 나눔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2020년도 한 달이 지났다. 시간의 속도가 빠르게 느껴지는 만큼이나 자기 인생도 스스로 매니지먼트하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마음일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의 모습을 알아야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기가 더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낸 ‘트렌드 코리아 2020’을 읽었다. 책에서 이야기한 여러 트렌드 중에서도 ‘공간의 재탄생, 카멜레존’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성수동은 변해 있었고, 변해 가는 중
지난해 우리 사회에 나타났던 도심의 낡은 시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선해 새로운 공간으로, 새롭게 만든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다. 책에서는 공간을 재해석하고, 체험형 성격 중심으로, 서로 다른 성격의 업종들을 모아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이런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트렌드라고 예측했다.
책에서 언급한 여러 사례 중 서울 성수동에 있는 ‘성수연방’을 찾아갔다. 내 기억 속의 성수동은 사각형 모양의 2층으로 된 건물과 마당을 가진 영세한 공장들, 구두가 가득 진열된 쇼윈도의 수제화 점포들이 밀집해 있는 주거, 공업 지역이었다.
지하철 2호선 성수역에서 내린 후 만난 ‘성수이로 길’은 기억의 성수동과 달랐다. 여전히 많은 소규모 공장과 차량 정비공장, 공장 창고, 수제화 점포들이 대세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에 있는 거리의 을씨년스러움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달라질 정도로 해일이 몰려와 거리를 바꿔놓은 것은 아니었다. 옛것의 낡음을 재해석해서 탈바꿈시킨 몇몇 공간과 건물들이 길의 풍경을 바꾸는 중이었다.
창고의 외벽을 그대로 살린 채 투박스러운 나무로 꾸민 카페는 세상살이에 꽁꽁 얼어붙은 사람들의 날 선 경계심을 조금씩 늦춰 주고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가 어려운 그림 전시장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했다.
가난한 화가 지망생의 캔버스가 되어버린 골목길 어귀의 담장 스페이스는 자꾸 눈길을 끌었다.
길 건너편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공간의 세련된 음식점들이 계속해서 나를 유혹했다.
이제 ‘성수이로 길’에서는 뉴욕 브루클린(Brooklyn)의 향기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억지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서 천천히 바라볼 수 있어 더 많은 시간의 모습이 보였다. 길을 걸을 때 어깨에 살포시 내려온 겨울 햇살이 지나간 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켰다.
삶 속에서 나를 안아주는 길. 그런 길을 또 하나 찾은 2월의 오후였다.
화학공장에서 변한 ‘성수연방’의 모습
‘성수연방’은 화학공장이었던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든 곳이다. 성수동의 랜드마크가 된 이곳은 ‘ㄷ’자 모양의 3층 건물이 양옆으로 서 있으며, 건물과 건물 사이의 1층 공간은 정원과 파빌리온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건물 2층 양 끝에는 건물을 서로 연결해 주는 통로가 있다. 새로운 트렌드의 복합문화공간 ‘성수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간을 소개한다.
띵굴마켓(Thinggool)
Better day, Better living가 컨셉인 라이프스타일 편집 숍이다. 각종 주방용품부터 생활용품, 음식까지 각 카테고리의 상품들을 예쁘게 잘 정리 해놓았다. 가격과 디자인 모두 실용성을 추구하는 매장이나 편집 매장의 특성상 만만한 가격은 아니다. 하지만 전시된 제품과 인테리어를 보면서 일상생활을 꾸밀 상상을 한다면 행복해질 것이다.
인덱스(index caramel): 수제 캐러멜 판매 매장. 설탕 대신 100% 사탕수수 등 천연재료로 자연스런 단맛을 내는 12가지 캐러멜을 판매하는 매장.
리카리카(likalika): 반려동물 토탈라이프 스타일 제품 판매 매장. 반려동물과 관련된 음식, 봉제품 등 판매.
샤오쟌: 구아바오 등 대만식 음식 전문점
창화당: 만두, 튀김, 떡볶이를 판매하는 익선동 맛집으로 유명한 곳
JAFA 브루어리: 소규모 맥주 제조 시설을 갖춘 브루어리, 도수가 가볍고 마시기 쉬운 독일식 맥주를 지향해 만든다. 품질이 검증된 재료로 한정된 수량만을 생산한다.
아크앤북: 전문 큐레이션에 의해 취급 도서와 관련 제품을 선정해서 판매하는 편집형 서점이다. 현재 전국에 4개 매장이 오픈되어 영업 중이다. 성수연방의 카테고리 콘셉트는 마일(Mile 책과 독자 사이의 거리를 의미한다).
- 1마일: 평소 독자가 늘 곁에 두고 보는 책과 소품들
- 10마일: 생활 관련 도서와 집을 나설 때 드는 물건들
- 100마일: 국내 여행, 문학 관련 책. 밖에 나가서 놀고, 쉬고 싶을 때 사용하는 가볍고 단순한 소품들
- 1000마일: 해외 여행 관련 책과 소품, 가방들,기타 미술 등 전문 서적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서 외에 액세서리, 캐리어, 일상 소품과 자체 브랜드인 ‘로우로우(RAW ROW)’의 잡화도 취급하고 있다.
존 쿡 델리 미트: 오픈형 공장 형태로 매장을 꾸민 육가공 식품 전문회사. 햄, 소시지 등 다양한 가공식품을 판매하며, 제조 생산 과정을 이곳에서 다 볼 수 있다. 플레트 메뉴를 취식할 수 있는 테이블도 구비되어 있으며, 소시지 제조 클래스 수업도 진행한다.
천상가옥: 명실공히 성수동의 핫 플레이스인 예쁜 카페. 투명한 천장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압권이다.
그 섬에 서면 느리게 출렁이는 시간을 본다. 느릿한 바람 속에서 태고와 현재가 넘실거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가을이면 풍성한 갈대와 억새꽃이 군락을 이루어 눈부신 곳 ,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무인도 비내섬에서 알싸한 겨울을 맛보는 건 자신에게 때 묻지 않은 겨울을 선물하는 시간이다.
억새꽃 피어나던 섬으로 떠나는 겨울여행
충주에서 앙성면의 비내섬까지는 자동차로 약 30분 정도 달리면 나타나기 시작한다. 차창 밖으로 남한강 줄기와 함께 어우러진 섬이 보이고 벌써부터 가슴이 탁 트인다. 입구의 섬을 향한 다리를 건너서면 바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사구 형식의 99만 2천㎡(약 30만 평)의 광활한 무인도가 펼쳐진다. 울퉁불퉁한 길에는 요즘 어디든 놓인 그 흔한 인위적인 데크길이나 여행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문도 없다. 초입의 길 옆에 비내쉼터 하나 있을 뿐이다. 오지(奧地)와도 같은 비내섬의 자갈밭과 흙길을 따라 억새의 숲에 파묻힐 일만 남았다.
인적이 드물다. 한적함이 어울리는 섬이다. 언제까지나 덜 알려져서 늘 이랬으면 싶다. 숨겨놓고 나만 알고 싶은 곳, 그 섬에 들면 금방 자연 속으로 푹 잠기는 자신을 본다. 억새 사이로 난 부드러운 흙길에 사람의 발자국과 자동차 바퀴 흔적이 있다. 드넓은 갈대숲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취하는 조용한 휴식도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갈대와 억새꽃이 만발한 가을에 비해 겨울 들판에 서면 자연스럽게 차분함을 장착시켜 준다. 그 사이로 군데군데 서 있는 버드나무 뒤로 섬을 휘감아 도는 남한강 줄기가 흐른다. 산이나 들에서 주로 자라는 억새와 습지나 물가에서 자라는 갈대가 이곳에서는 사이좋게 공생을 한다. 사람들의 손 타지 않은 이런 풍경 덕분에 드라마 사극이나 사색적인 배경의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엔 이곳 비내섬과 이 지역의 탄금호 무지개길에서 촬영된 배우 현빈과 손예진 주연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방송되고 있는 중이다.
비내는 갈대와 나무가 무성해서 비어(베어) 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는 큰 장마가 지는 바람에 내(川)가 변했다 해서 비내라고 불린다는 말도 있다. 갈대숲을 지나던 마을 어르신이 “예서 뭐 볼게 있어서 이렇게 왔남? 하면서 가던 길을 익숙하게 지나가신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갈대와 억새가 무리를 이루어 일렁인다. 그 너머로 강변을 끼고 나지막한 산과 들이 배경을 이룬다. 그리고 멀리 몇 채의 시골집과 다 따낸 휑한 사과밭이 겨울 속에 오롯하다. 모든 것을 비운 사람의 멋을 떠올리며 꽃도 잎도 열매도 떨군 겨울 풍경을 본다. 우리 기억 속의 유년기의 마을 풍경처럼 아련하다. 이 모든 것이 제각각 따로 분리되어 보이지 않고 시간이 멈춘 듯 순하고 평화로운 정취로 눈에 들어온다.
발길 닿는 대로 옮기다
이토록 때 묻지 않은 이 섬에는 생태자원이 풍부하다. 람사르 습지 보호지역으로 관리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지자체의 입장이다. 생물의 다양성과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서식·도래 지역, 지형·지질학적 가치를 위해 환경부에 비내늪의 습지보호지역 지정을 건의 검토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군사 훈련과 캠핑 차량 통행 등에 따른 훼손이 아직 남아있는 문제로 알려져 있다.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헤매듯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끝없이 호젓하다. 바스락거리며 흔들리는 억새 수풀 사이에서 길을 잃고 싶다는 생각조차 든다. 천천히 걷다 보면 간간이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나 곤충들의 조용한 움직임이 숲의 정적을 깬다. 이곳이 계절마다 찾아오는 철새도래지이기도 하다. 비내섬 갈대밭의 자연은 우주만물이 공생하는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신경림 시인은 ‘갈대’를 이렇게 노래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한겨울이다. 실내에서만 옹송거리다 보면 몸과 마음이 경직되기 쉽다. 하루 코스로 훌쩍 떠나볼 수 있는 곳 충주 비내섬을 향해 달려보자. 그 섬의 억새 수풀 속에 서서 아스라한 태고의 겨울바람 소리를 들어보라. 뒤엉킨 머릿속이 은은하게 평정된다. 그리고 차분한 겨울 추억의 결을 하나 더 보태는 날이다.
-비내섬 : 충북 충주시 앙성면 조천리 412
△가볼 만한 곳
충주 ‘중앙탑’
비내섬에서 자동차로 20분쯤 거리에 중원 탑평리 칠층 석탑(일명 중앙탑)이 있다. 넓은 잔디밭에 사적공원(史跡公園)이 멋지게 조성되어 산책을 하거나 휴식공간으로 더없이 좋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국보 6호 중앙탑이 시원하게 우뚝 선 공원엔 예술적 조각 작품들을 비롯해서 야외음악당, 음악분수대, 향토민속자료관 등 볼거리가 많다. 호수 쪽으로 걷기 좋은 코스 탄금호 무지개다리가 있고, 호수 저 편에 [대한민국 중심고을 충주(CHUNG JU KOREA)]이란 글자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이 나라의 중간 지점이다.
탑 주변을 벗어나면 그 옆으로 한옥이 보인다. 의상 대여소 '입고 놀까'는 중앙탑공원에서 인싸 되기 놀이마당이다. 이미 sns상에서 핫플레이스로 이슈가 되고 있다. 거길 나오기 전에 술박물관도 들러볼 만하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세계무술공원이 있다.
*중앙탑: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남한강 물길의 중심 목계나루, 그리고 종댕이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지만 그 옛날 남한강 수운을 따라 물류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충주가 전국 동서남북 교통의 요지가 되는 역할을 했던 엄정면 쪽의 목계나루터. 오늘날 그 가치를 살리고자 복합 문화공간이 형성되었고 목계나루의 옛 추억을 되살려 볼 수 있다.
*목계나루: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산35-8
그리고 산책 코스로 좋은 충주호 종댕이길은 1~3코스로 30분에서 4시간까지의 코스의 트레킹이 가능한 행복한 둘레길이다. 2코스의 조망대에서는 해맞이를 할 수 있고 출렁다리도 있다.
*충주공용버스터미널 농업기술센터 정류장에서 514번(용관,시외버스터미널), 515번(터미널,국민은행) 버스 타고 마즈막재 삼거리 주차장 하차.
그 외에도 시내 중심의 충주 호암저수지, 관아공원은 물론이고, 잘 알려진 탄금대와 이화령을 지나 멋스러운 한지박물관과 주변의 문경까지 냅다 달려 볼 수 있다. 하루나 이틀쯤 선비의 풍류가 흐르는 곳 충주에서 겨울여행을 즐긴다면 정감 어린 힐링의 시간이 될 것이다.
충주의 맛
뭐니 뭐니 해도 사과를 빼놓고는 충주의 맛을 이야기할 수 없다. 충주의 사과 작가로 유명한 강병미 화가는 말한다. 대학교 때부터 사과를 그리다 보니 운명처럼 사과의 고장 충주에 와서 살게 되었고 이곳에서 사과 그림 작업은 당연한 일상이라고.
충주시 농업기술센터와 농업회사법인 페트라가 공동 개발한 사과빵이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하면 오븐에서 직접 구워 식혀서 포장해 준다. 호두과자에는 호두가 들어있듯 사과 빵에는 당연히 충주 사과가 들어간다. 부드러운 빵 속에 상큼한 사과 필링이 입안 가득 퍼지는 맛, 따뜻할 때 더 맛있다.
*애플스토리 : 충북 충주시 지현동 963
(충주휴게소, 수안보 휴게소, 주암휴게소, 수안보 상록호텔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가을에 수확한 사과는 사시사철 먹을 수 있도록 저장도 하지만, 충주에서는 다양한 제품으로도 나온다. 사과 한과, 사과 손약과, 사과 강정 외에도 사과 국수와 주스나 와인 등이 있다. 충주 버스터미널 안에 충청북도 우수 판매전시장이 있어서 귀갓길에 구입할 수 있다.
맛있는 한 끼
올갱이(다슬기)요리는 주로 충주와 괴산에서 먹을 수 있는 맛이다. 푸르스름한 올갱이국이 일품이다. 그리고 충주 부근으로 드라이브 삼아 나가면 그 산에서 나는 산채비빔밥집이 많다. 직접 발효한 효소를 넣은 양념장과 청포묵을 넣은 비빔밥의 맛.
만일 여유있게 하루나 이틀쯤 머문다면 숙소는 비내길에서 20분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앙성 탄산온천지역이 있다. 수안보 온천도 멀지 않아서 온천욕을 하며 편안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겨울여행의 알찬 마무리다.
1955년생, 베이비붐 세대로서 1978년에 데뷔해 올해로 예순다섯 살. 그러나 이치현의 모습에서 그 세월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1980년대를 휘어잡던 순간의 ‘이치현과 벗님들’ 리더 이치현이 세월을 뛰어넘어 그대로 내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여전한 젊음과 변치 않은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음악적으로는 더 성숙하고 테크니컬해진 그의 라이브를 보면 시간을 거꾸로 먹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다. 심지어 신곡을 준비하면서 내년부터는 ‘전투를 치르듯’ 전국 라이브 투어를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그를 만나 그의 음악과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눠봤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밴드로 올해로 벌써 41년째 롱런 중인 이치현과 벗님들은 흔히 ‘한국의 비지스’라 불린다. ‘당신만이’, ‘사랑의 슬픔’, ‘다 가기 전에’, ‘집시여인’ 등의 히트곡들은 이국적이면서도 세련된 밴드 사운드의 진가를 보여주는 곡들이며 여전히 애청되고 애창되는, 시대를 초월한 명곡들이다. 이치현과 벗님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치현에게는 여전한 젊음과 특유의 우수가 있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수에 젖었다기보다 ‘이 일이 내가 맞는 건가,(웃음)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하며 생각이 많아서 그런 표정이 나오는 거죠.”
반쯤은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그는 사실 가수가 될 꿈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만든 명곡들과 그의 감미로운 음색을 생각하면 의외의 얘기였다.
어쩌다 가수가 된 기타리스트
“내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산타나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연주자가 활동하기가 어렵잖아요? 더구나 유명하지도 않았으니 누구에게 곡을 줄 수도 없었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불러야지.(웃음)”
산타나는 1960년대부터 활동한 라틴 록 기타리스트의 전설이다. 사실 잘 살펴보면 이치현이 그에게 영향을 받은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탁월한 기타리스트로서 여전한 실력을 유지하고 있는 점, 대표 히트곡 ‘집시여인’, 그리고 그의 최근 라이브에서 들려주는 노래들이 라틴 스타일로 더욱 세련되게 편곡됐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라틴 록과 밴드 사운드에 기반을 뒀지만 그가 한 가지 장르만 했던 것은 아니다. 팝 발라드에서부터 신스 팝, 로큰롤까지 다양한 음악적 접근을 해왔다. 그룹사운드를 하면 한 장르를 계속 파야 하지만, 그보다는 음악적 변화를 시대에 따라 맞춰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음악 그만둘까’ 싶었던 순간들
그렇게 대중가요 가수이지만 밴드 사운드에 기반하고 있는 그가 끊임없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밴드를 뚝심 있게 이끌어간다는 것은 외국처럼 장수하는 밴드가 없다는 점을 봐서도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위기는 자기 자신과의 갈등에서 와요. 경제적인 위기는 능숙해요. 워낙 바닥을 치며 올라갔고 무명생활도 오래해서.(웃음) 가장 힘든 게 ‘내 스타일의 음악을 계속해야 하나? 그만둘까?’ 하면서 내 음악에 한계를 느낄 때죠.”
그가 자신의 음악에 한계를 느끼는 것은 시대적인 문제와도 결부된다. 라이브 밴드를 추구하는 음악인들이 설 자리가 많이 사라졌고 가요계의 주류도 밴드 사운드를 유지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변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얼마 전 7080세대에게 논란이 됐던 KBS의 ‘콘서트 7080’ 폐지 건이 그렇다. 그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콘서트 7080’이 폐지된 데는 물론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죠. 7080시절 음악했던 사람들을 막상 찾아보면 지금 음악을 안 하는 사람들이 더 많거든. 새 앨범을 내지 않고 ‘추억팔기’만을 하는 가수들이 출연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시청률이 떨어지게 됐고요. 음악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어야 하고 뮤지션은 신곡 활동도 꾸준히 병행해야 하잖아요.”
지나친 쏠림 현상 안타까워
요즘 사회나 기업체들을 보면 7080세대가 주류가 됐다. 이치현과 같은 시대의 가수들이 각광받는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미스트롯’의 성공으로 트로트가 7080세대의 음악적 대세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 물결이 너무 거세다 보니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라이브 밴드가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현실에 그는 더욱 힘들어하고 있었다.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인 차원, 음악적 현실에 대한 고통이었다.
“시대의 변화이겠지만, 요즘 가수들은 거의 탤런트가 돼야 해요. 사람들에게 어필해야 하고. 난 그러고 싶진 않거든요. 내 음악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꾸준히 하고 싶은 거니까요. 그래서 억지로 비즈니스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다 보니 이 모양이지.(웃음)”
변화된 음악 현실에 방황도 깊어졌다. 그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2년간 계속 방황했다.
“작년 가을과 겨울 사이 미국을 네 번 왔다 갔다 했어요. 한국에 있기 싫어서 미국에서 공연하려고요. 환경이 안 변하면 내가 못 살겠기에. 곡은 안 써지니 밤마다 괴롭고…. 내가 해야 할 음악의 장르를 못 잡는 거예요. 안 그랬거든요.”
소극장 투어로 팬 저변을 넓히다
그래도 그는 마침내 결론을 냈다. ‘좋은 경치를 봤다고 좋은 곡이 나오는 건 아니다’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내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중이다. 우선 2016년에 내놓은 정규 앨범 14집 이후 오랜만에 싱글 앨범을 제대로 준비해 선보일 계획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전에 나섰다. 바로 소극장 공연 투어다.
“한 해가 끝날 때 되면 ‘올해 잘 보냈나?’ 싶죠. 나이가 드니 비보도 많이 듣게 되고, 시간도 확 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버킷리스트는 아니더라도 머릿속에 있는 걸 실행하자고 결심했어요. 그게 내년 3월부터 시작할 전국 소극장 공연이죠. 깨질 때도 있고 힘든 상황도 있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부딪쳐볼 거예요.”
그는 이미 1984년부터 5~6년간 무려 1000회가 넘는 소극장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즉, 소극장 무대의 맛과 즐거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사실 그래서 작년에는 그런 소극장 무대를 다시 한 번 부활시킨 적도 있다.
“관객들이 예전에는 학생들이었는데 이젠 다들 어른이 되어 주차장이 없어서 힘들어했는데(웃음) 공연은 꽉 차서 끝났어요. 그분들이 말하길 불편해도 시간이 지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소극장에서 얼굴 표정을 다 읽고 땀 흘리고 그러는 걸 보면서 함께 공연하는 거니까요.”
음악은 밥 먹고 숨 쉬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본 그의 성정에 대해 생각해보면 짐작 가능하겠지만, 그는 앞으로 나와서 ‘나대는’ 성격이 전혀 아니다. 자신의 성향과 다르게 행동하는 걸 너무 싫어하는 쪽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성향이 남아 있기에, 그의 젊은 시절은 지금보다 더했을 수밖에 없다.
“가수는 꿈에도 없었는데, 운명이란 게 있는 듯해요. 제게 음악은 밥 먹고 숨 쉬는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어요. 원래 남 앞에 못 서는 성격인데도 한 거니까요. 그래서 1984년에 4집 앨범 녹음하며 방송을 접고 대학로에 들어갔죠.”
그의 소극장 공연은 대박이 났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가 인간적으로 변화하게 된 계기였다.
“물론 여대생들 앞에서 1000회를 공연한다는 게,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런데 그때 성격이 변했어요. 대화하는 법을 억지로 힘들게 익힌 거예요. 지금도 저는 제가 봐도 어색해요. 그래서 방송 녹화한 게 있으면 가족들하고 안 보죠. 나 혼자만 보면서 반성할 게 뭐 있나, 왜 저랬을까 합니다. 그게 본 성격인 거 같아요.”
무대와 객석은 구분되는 게 품격
그는 프로답게 자신이 대중음악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터뷰 내내 계속해서 ‘음악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말한 것과도 관련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느리긴 해도 끊임없이 자신을 대중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 노정이 어쩌면 이치현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좀 까다로워서 무대 같지 않으면 안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작년부터 후배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라이브 카페 같은 데서 공연하기도 했죠. 당연히 환경이 열악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좋아하고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잘되는 걸 보니 거기서 매력이 느껴지더라고요. 대중과 마주하되 자신의 격만 안 떨어뜨리면 되겠다 생각한 거죠. 물론 무대와 객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게 품격이니까요.”
칠순이 다가오는 나이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는 그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역시 팬들이다. 그의 팬클럽은 회원 수 1500여 명이 가입한 ‘늘벗회’다. 1980년대부터 꾸준히 그를 지지해준, 역사가 깊은 탄탄한 팬들로 그의 공연에 항상 힘이 되어주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즐거움이자 위안 아닐까.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가 될 것
음악이 운명이라는 말처럼, 그의 딸 둘도 음악과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딸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지 목소리가 바뀌었다.
“첫째 딸은 플루트를 해요.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와서 올해 동창하고 결혼했죠. 결혼 안 시키려 했어요. 들어간 돈이 얼만데.(웃음) 사실 재밌게 살고 있어요. 둘째도 원래는 음악하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어해서 음악심리학으로 바꿨어요. 작은애는 지 편한 대로 자유롭게 살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과 가족들 모두가 음악과 관련이 있지만, 정작 다시 태어나면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음악은 본인과의 싸움이 너무 심해요.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가 되고 싶어요.”
건축가라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그는 중학교에서 미술 관련 상을 휩쓴 기대주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예고에 진학하지 못해 미술인으로서의 꿈은 접혔다. 하지만 아직 미련이 남아서 지금도 외국에 나가면 건물의 건축 재료를 살펴보고 두들겨본다고 한다.
“음악은 사람을 너무 좁게 만들어요. 물론 음악의 세계는 굉장히 넓죠. 그러나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좁아요. 음악 대신 빌딩 하나 지어보고 싶고 그렇죠.(웃음)”
아름다운 황혼의 시간을 기다린다
이치현의 가족들 중 음악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그의 아내다. 교육학과를 나온 아내는 도서관에서 살며 자녀들 교육에 평생 매달렸다. 요즘 그는 부쩍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아내에게 못해준 게 너무 많아요. 젊었을 때는 같이 못 놀아줬고 ‘여보, 여보’ 하며 살갑게 다가가는 성격도 못 되고…. 우리나라 부부들이 나이를 먹으면 각자 놀잖아요? 그런데 유럽에 가보면 서로 목도리를 해주며 손잡고 다니면서 카페에 앉아 다정하게 대화하는 흰머리의 노부부가 많아요. 그래서 저도 칠십부터는 같이 손잡고 다니면서 외롭지 않게 해줘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음악은 같은 감성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는 확고한 철학을 가진 그는 감성과 추억으로 버무리고 채워질 소극장 라이브를 준비하면서 벌써부터 신이 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거듭 아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아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그리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우선 그가 도달해야 할 음악적 성공의 지지자로 응원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가 아내와 함께 만들게 될 아름다운 황혼을 기대한다. 그 희망이 오늘 이치현을 또 설레게 할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 블루스계의 전설 같은 남자.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이런 표현을 싫어할 아티스트. 바로 신촌블루스의 엄인호가 그 주인공이다. 김현식, 한영애, 이광조, 이정선 등 대가의 경지에 도달한 뮤지션들과 함께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휘어잡았던 신촌블루스의 영원한 리더인 그는 여전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 어느새 40년에 도달한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드러나는 걸 싫어하는 천성 때문일까. 여전히 은자(隱者)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찾아 공연 전 술자리에서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만났다.
한국 가요사를 말할 때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밴드가 있다. 바로 신촌블루스. 이름 그대로 신촌 지역에 거점을 잡고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휘어잡았던 신촌블루스는 가요와 블루스의 결합이라는 실험을 통해 다수의 명반을 만들었다. 김현식, 이정선, 한영애, 이광조, 강허달림, 이은미 등 한국 가요사에 묵직하게 새겨진 이름들이 한 번씩 거친 밴드이기도 하다. 신촌블루스에는 ‘아쉬움’, ‘골목길’, ‘그대 없는 거리’, ‘이별의 종착역’ 등 들으면 잊히지 않는 노래를 부른 네임드 멤버들이 있다. 엄인호는 바로 그 핵심 인물이다.
그러나 신촌블루스가 갖는 음악적 무게감과 밴드를 거쳐간 솔로 아티스트들의 화려한 면면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중심을 지킨 엄인호는 대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데뷔한 지 올해로 40년이지만 아직도 숨겨진 인물이며 야인으로서 존재한다. 자칭 타칭 히피로서의 삶과 언더그라운드라는 포지션, 그리고 쇼비즈니스에 대한 거부감이 많은 그의 천성 때문일 것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그리고 40년
엄인호를 만난 것은 지난 10월 3일. 서울 청파동 코리아블루스씨어터 공연을 앞둔 시간이었다.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그가 씩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공연 전에는 물과 술 외에는 아무것도 안 먹는다는 그는 술을 마셔서 그런가…. 눈이 유난히 초롱초롱했다.
“얼마 전에 백내장 수술을 해서 시력이 좋아졌는데, 안경을 벗으면 내 이미지가 아니라 안경을 쓰는 거지. 수술 덕에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노안이라 가까이 있는 건 잘 안 보여요.”
그에게서 백내장 수술 얘기가 나오다니 세월이 참 많이 흐르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청춘처럼 보였던 그도 나이를 먹긴 먹었다. 물론 동료들도 함께.
“(신촌블루스) 멤버들과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요. 각자 세컨드 일을 하고 있으니까. 한 친구는 지방에서, 한 친구는 서울에서 가게를 합니다. 기타리스트 노병기는 자기 블루스 밴드가 있는데 이번 라이브 녹음을 위해 세션으로 초대했죠.”
‘장발 전과 27범’이 만든 새로운 음악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도향 등이 포진해 있던 명동의 쎄시봉이 포크로 1970년대 가요계를 휘어잡는 동안 신촌은 변방이었다. 그리고 변방인 만큼 마이너리티들이 모이는 지역이 됐다. 그들은 OX, 츄바스코, 하렘 등 몇몇 음악감상실에 모여 술과 음악에 빠져 살았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양친을 잃고 독학으로 기타를 배운 엄인호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KBS 합창단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하고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프로그램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았던 추억도 있었다. 사춘기에 염세주의에 빠진 적도 있었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중현 노래를 듣고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974년에는 부산에 내려가 DJ 생활을 하다 그 후 전국을 유랑하며 한국형 히피로 살았다. 장발단속령이 떨어졌던 그 시절, 히피족 같았던 장발은 그를 ‘장발 전과 27범’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는 “거의 유치장에서 살았다”며 웃으며 추억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때와 같은 장발이다.
문화의 새로운 시대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가 개척해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1979년, 엄인호는 신촌에서 만난 이광조, 이정선과 함께 ‘풍선’이라는 이름으로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하지만 활동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어서 박동률, 라원주, 양영수 등 신촌 멤버들과 함께 ‘장끼들’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했고 3년여의 활동 후에 해체됐다. 그리고 1986년, 신촌블루스가 탄생한다. 이정선, 이광조, 한영애와 함께 신촌의 레드 제플린이라는 카페에서 활동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 집결하다
“(레드 제플린은) 원래 선배가 운영하던 카페였는데 장사에 신경 안 썼지. 그래서 망해가던 곳이었는데 나한테 운영을 해달라고 했어요. 그때 나는 돈이 없어서 운영권 대신 출연해서 가게를 유지해가면 되겠다 싶어 오케이했죠. 그래서 다 살려놨는데 손님이 많아지니 가게를 다른 주인한테 넘겨버리더라고요. 섭섭했지. 그래도 그렇게 인기가 있어서 관객이 점점 많아졌고 ‘공연을 뭐 이 따위로 하냐 극장이라도 빌려서 해라’는 주위 지인들의 권유로 동숭동 파랑새 소극장을 빌렸어요. 당시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계단에 앉아서 보기도 하고 그럴 정도였죠. ‘역시 인호 형이 끼니까 뭔가 다르네’ 하는 말도 듣고요. 거기서 시작된 거예요 신촌블루스는.”
그렇게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이 시작됐다. 1집을 성공시킨 뒤 2집은 개그맨 전유성의 소개로 알고 지냈던 김현식이 참여해 또 명반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적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신촌블루스는 엄격하게 조직된 밴드가 아니어서 다소 느슨한 공동체처럼 운영됐다. 그래서 멤버들이 수시로 바뀌었고 보컬과 여러 명의 객원 보컬들도 동원됐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질적인 성향의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단적인 예로 신촌블루스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멤버인 엄인호와 이정선만 비교해도 그렇다. 일렉트릭 기타 블루스와 포크의 조화,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이별과 만남을 거듭하며 음악적 자장을 넓혔다.
“신촌블루스 멤버 중 저를 성장하게 한 사람은 이정선 씨죠. 악보에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으니까요. 원래 악보 보는 법을 몰랐거든. 그런데 작곡하는 사람이 악보도 못 그린다는 게 웃기잖아요. 그래서 이정선 씨에게 악보 보는 법을 배웠고 덕분에 쓰는 법도 알게 됐죠. 여러모로 내게는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이거 나 죽으라는 노래냐?”
“전에 발표했던 ‘이별의 종착역’을 블루스로 꼭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촌블루스 3집에 싣기 위해 김현식에게 죽기 얼마 전에 불러 달라고 부탁하니까 현식이가 ‘이거 나 죽으라는 노래네?’ 하더라고.(웃음) 그런데 흔쾌히 허락했어요. 단칼에. 가사 기억이 잘 안 나니까 가사만 알려 달라고 하고 스튜디오에 아들과 함께 와서 한 번에 불렀죠. 김현식에겐 그런 매력이 있었어.”
엄인호는 아련한 듯 김현식을 추억했다. 생각해보면 그를 거쳐간 가수가 참 많았다.
“현식이, 한영애, 정경화, 이은미 등등 정말 준비된 가수들이었죠. 오랫동안 그 고집으로 쭉 버텨왔고. 나는 오버하는 가수는 싫어해요. 너무 멋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멋 부리지 않고 자기 색깔대로 부르는 가수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계산된 창법은 안 좋아해요. 연주도 그렇죠.”
자연스럽고 절제된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그의 신조는 그의 음악적 애티튜드였다. 없는 듯 있으면서, 시간과 사연의 흐름을 타고 살아온 그의 인생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올해로 40년째 음악인으로서 살아왔다. 10년 전 그는 거의 은퇴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갑자기 다 싫은 거야. 내가 쉴 때가 됐나보다 하고는 미국에 가서 거의 일 년을 놀다 왔지. 한편으로는 그대로 거기서 눌러살까 생각도 했고. 그런데 그러려면 미국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 과연 내가 정착할 수 있을까 싶었지. 그러다가 아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한국에 다시 들어왔다가 안 나가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할 것도 많았고.”
뮤지션에 대한 관객들의 예의
그의 아들 엄승현 씨도 현재 세션 기타리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아들의 실력을 인정했다.
“그런데 나하곤 일을 안 하려고 해. 야단맞으니까.(웃음) 참견하고 싶지 않아요. 가끔 조언을 해주고 싶은데 거절하더라고.(웃음) 뭐 음악이라는 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는 자신처럼 라이브 공연으로 살아가는 후배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본이나 해외 어디든 가서 공연하면 관객이 너무 부러워요. 뮤지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거든. 특히 예의를 지킬 줄 알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관객들은 뮤지션에 대한 존경심이 없고 소모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더러 있어요. ‘너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니까요. 관객이 밴드를 최대한 응원하고 자극하면 더 즐거운 공연이 될 수 있는데, 그걸 몰라요.”
얼마 전 클럽에서 연주를 하는데, 관객 중 한 명이 갑자기 무대로 올라왔다고 한다. “‘골목길’은 내가 더 잘 불러” 하면서. 또 무대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공연에 방해가 될 정도로 떠드는 관객도 있단다. 우리나라 공연 문화가 아직 낮은 수준임을 알게 해주는 상황들이라고 그는 안타까워한다.
“결국 뮤지션들은 그런 무대를 기피하게 돼요….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어휴, 입에서 욕이 나오려고 해.”
신촌블루스 원년 멤버 공연
그렇다면 그는 요즘 가요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소위 아이돌 위주로 재편되는 가요계 현실에 대해 그는 덤덤해했지만, 한 가지 주문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어차피 대중음악은 유행 따라 흘러가는 것이기에 큰 불만은 없어요. 단지 우리가 예전에 갖고 있던 감성이 없다 보니까, 마치 아이들 일기에 쓸 법한 가사들만 나오니까… 물론 작사가들이 제대로 쓴 건 다르겠죠. 그런데 요즘 작사하는 친구들 보면 포커스를 모두 중학교 아이들에게 맞추는 거 같아요. 아무리 작곡을 잘해도 가사가 너무 자극적이거나 유치하면 불만스러워요. 안타까운 거라면 그거예요.”
현역으로서, 그는 데뷔 40주년을 맞이해 오는 11월 23일에 그의 음악적 고향 신촌에서 한발 떨어진 홍대 하나투어 브이홀에서 신촌블루스 공연을 하기로 했다. 이번 무대가 특별한 이유는 원년 멤버인 이정선과 한영애가 함께 자리하기 때문이다. 과거 신촌블루스의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기대가 된다.
“11월에 제 생일이 있기도 하고…. 김현식이 떠난 달이기도 한데, 그때가 되면 기분이 가라앉고 방황하게 되니까, 올해가 마침 데뷔 40주년이니 공연이나 해야겠다 싶었어요. 김현식과 함께 불렀던 노래 ‘바람인가 빗속에서’, ‘이별의 종착역’을 불러볼까 해요. 한영애, 이정선 씨도 함께하기로 했는데, 사실 귀찮아요. 그 친구들 나오면 연습도 따로 해야 해서요.(웃음) 그래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까 현식이를 추모하며 그간 서운한 감정 있으면 다 없애고 가끔 이렇게 뭉치자고 하고 싶어요.”
자연스럽게 살다 가고 싶다
덤덤하게 사는 그는 딱 하나,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다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못해본 게 있는 거 같아요. 또 음악이지. 히트곡? 그런 건 아니고. 뭔가 엄인호다운 것.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그런 스타일이 있거든요. 음악적으로 세련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데 그게 내 생각대로 쉽게 되는 건 아니거든.”
그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꿈이란 것도 결국 음악이었다. 모호하고 바로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욱 좇고자 하는 음악의 경지였다. 그렇듯 엄인호라는 사람은 끝까지 음악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아티스트다.
엄인호는 신촌블루스 안에서 더욱 빛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주도한 그는 우리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을까.
“누구에게 날 기억해 달라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살다 가자. 그거면 돼요.”
가슴에서 훅 뜨거움이 쳐 올라와 냉큼 막걸리 잔을 비웠다. 공연이 끝난 후 우리의 술잔은 다시 못다 한 이야기와 함께 넘쳐흘렀다.
가족과 함께하는 싱그러운 5월, 이달의 추천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공연) 나빌레라
일정 5월 1~12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출연 강상준, 이찬동, 진선규, 최정수 등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나빌레라’는 ‘다음(Daum)’ 웹툰 연재 순위·독자 평점 1위에 오른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발레를 소재로 청년과 노인의 교감과 성장을 그려낸 이 작품은 ‘세대 간 소통’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축제) 제45회 보성다향대축제
일정 5월 2~6일 장소 한국차문화공원 (보성차밭 일원)
보성다향대축제는 영화 및 CF 촬영지로 유명한 보성차밭 일원에서 열린다. 이번 축제에는 전국사진촬영대회, 녹차요정 퍼포먼스, 녹차 스탬프 투어, 화관 상상 무도회 등의 프로그램이 신설됐다. 이외 녹차비누·녹차향초 만들기, 한지공예 등 다채로운 체험도 할 수 있다. 잔디공원에는 관광객이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그린티 쉼터’도 마련돼 있다.
(콘서트) 2019 조수미 콘서트 ‘Mother Dear’
일정 5월 8일 장소 롯데콘서트홀
늘 재미있고 즐거운 감동을 주는 성악가 조수미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주제로 한 공연을 선보인다. ‘맘마미아’, 이탈리아의 어머니 노래, 한국의 창작가곡 등 서정성이 돋보이는 곡들을 중심으로 따뜻한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테너 겸 기타리스트인 ‘페데리코 파치오티’도 함께한다.
(오페라) 오페라가 들리는 48시간 이탈리아 여행
일정 5월 12일 장소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출연 소프라노 홍혜란, 테너 최원휘, 해설 김문경
휴양의 도시이자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공연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와 푸치니의 작품 위주로 구성되며 해설자 김문경이 음악 중심의 이탈리아 5개 지역 명소를 소개하며 숨은 이야기도 들려줄 예정이다. 따스한 봄, 낭만적인 음악 여행을 떠나보자.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일정 5월 17일~7월 14일 장소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구 삼성전자홀) 출연 김소현, 김우형 등
톨스토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 주인공 ‘안나’를 통해 보편적인 삶의 가치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실제 스케이트장 같은 무대 연출, 원작 공연에 출연한 러시아 스케이터도 참여해 풍부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오페라) 가족과 함께하는 금난새의 오페라 이야기
일정 5월 26일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출연 금난새, 김순영, 김성현, 유동직 등
베르디의 걸작 ‘라 트라비아타’를 ‘콘서트오페라’로 특별 구성했다. 콘서트오페라는 무대 장치와 의상 없이 콘서트 무대에서 하는 공연이다. 이번 공연은 지휘자 금난새가 지휘와 해설을 맡아 보다 쉽고 재미있게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다. 줄거리를 따라 작품 속 숨은 이야기를 들으며 아름다운 아리아의 선율에 빠져보자.
한국 육상 단거리 최초 아시안게임 금메달, 최초의 아시안게임 2연패, 아시아 육상 최초 유니버시아드대회 메달 수상 등 그의 이름 앞에는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1980년대, 육상 불모지인 한국에서 오롯이 두 다리로 최초의 기록들을 세운 장재근(張在槿·58) 서울시청 육상 감독을 만났다.
무관심 속 탄생한 한국 스프린터
장재근은 스스로 자신을 ‘육상계의 깜짝 스타’라고 표현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로 운동을 시작했지만, 배구부가 없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이게 된 종목이 육상이었다. 그때의 선택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그 당시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잘하는 선수가 한 명 가면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 한 명이 같이 가는, 일종의 ‘원 플러스 원’ 같은 관행이 있었어요. 그렇게 껴서 간 선수가 저였죠. 제 딴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못해서 맞기도 많이 맞았죠.”
3000m 장거리도, 허들도 해봤지만 성적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카드로 뽑아 든 게 단거리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200m 3위를 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단거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스프린터로 주목을 받게 된 건 1982년부터다. 그해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장재근은 뜻밖의 메달 소식을 전했다. 놀랍게도 한국 최초로 아시안게임 단거리 종목에서 200m 금메달과 100m 은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메달 유력 후보 이름이 나왔는데 제 이름은 없었어요. 경기를 응원하러 온 사람도 없었고요. 저도 메달을 딸 거라고는 생각 못했죠. 그야말로 ‘우당탕탕’ 하고 보니 제가 메달을 땄더라고요. 한순간에 스타가 됐죠.”
‘최초’라는 단어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그의 말처럼 하루아침에 명예와 부, 인기를 모두 얻은 한국 육상계의 깜짝 스타가 됐다. 당시 뛰어난 스포츠 선수만 후원하기로 유명한 스포츠용품 브랜드 ‘나이키’가 그를 선택한 일화는 그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선수였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나이키 멤버라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이 컸죠. 용품 지원은 물론이고 엄청난 대우를 받았거든요. 해외 투어를 가면 공항에서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더 큰 대회에 나가면 나이키 멤버만 사용할 수 있는 호텔을 따로 마련해주기도 했죠. 그리고 대회에 나가면 은근히 나이키는 나이키 멤버끼리, 아디다스는 아디다스 멤버끼리 모이는 분위기가 있었어요.(웃음)”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이후에도 그의 기록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선 아시아 선수 최초로 3위를 기록했고, 1985년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선 200m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뿐만 아니라 이듬해 열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 육상 단거리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했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은 순간
그러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의 육상 인생에도 암흑의 시기가 찾아왔다.
“아시안게임 3연패를 목표로 하고 나간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예선전을 뛰는데 직감이 오더라고요. ‘아, 안 되겠구나’ 하고요. 결국 결승에서 7위를 하고 그날 저녁 감독님과 상의도 없이 바로 은퇴선언을 했어요. 주위에서 말렸지만 제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정말 건방졌어요. 은퇴 후 한전에 입사하고 나니 현실이 보이더군요.”
평생을 트랙에서 보낸 사람에게 회사는 감옥이었다. 큰 고민에 빠져 있던 그에게 때마침 SBS에서 에어로빅 강사 요청 섭외가 들어왔다.
“제 한 달 월급이 50만 원이었는데 출연하면 하루에 10만 원을 준다는 거예요. 그때 든 생각이 ‘그럼 1년만 하고 돈을 모아 유학을 가자. 그리고 골프를 배워서 다시 복귀하자’는 거였어요. 근데 견물생심이라고, 돈이 들어오니까 그만두질 못하겠더라고요. 저 때문에 에어로빅센터는 정말 많이 생겼어요. 그만큼 전 욕을 먹었고요.(웃음) 돈에 미쳐서 옷 홀딱 벗고 저 짓 한다고요.”
유학에 대한 목표 하나로 욕쯤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순 있었지만 이마저도 어느 순간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순전히 돈 때문에 시작한 에어로빅은 더 이상 하기 싫었고, 체육계로 돌아가자니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득 겁이 났어요. 그때 쇼핑호스트 제의가 들어왔죠. 홈쇼핑 방송에서 러닝머신 한 번 뛰니까 또 잘 팔리더라고요. 졸지에 이번엔 물건 파는 놈이 됐죠.”
육상 선수에서 에어로빅 강사로, 그리고 홈쇼핑 판매자로, 웬만한 사람들은 도전할 수 없는 분야에서 손만 대면 대박을 터뜨렸다. 그를 만능 재주꾼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단했던’ 육상 선수 장재근을 ‘돈에 환장한’ 장재근으로 바꿔 불렀다. 결국 그는 홈쇼핑에서 발을 뗐다. 그 후 한국 육상 국가대표 코치로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또 한 번의 고비를 맞는다. IMF가 터지면서 모든 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앉게 된 것이다.
“토요일 오전까지는 선수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오후엔 방송국에 가서 홈쇼핑 촬영을 했어요. 밤엔 방송국 지하주차장에서 잠을 자고 그다음 날 새벽에 또 촬영을 했고요. 그렇게 하루도 안 쉬고 2년을 일하면서 빚을 다 갚았어요. 어른들이 그러잖아요, 돈은 쫓아다니면 도망간다고요. 근데 어린 시절의 저는 너무 돈만 바라봤던 것 같아요. 모든 걸 다 내려놓으니까 깨닫게 되더라고요.”
33년 만에 깨진 한국 신기록
2018년, 장재근이 1985년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200m 20초41 한국 신기록이 0.01초 차이로 무려 33년 만에 깨졌다. 서운할 법도 할 텐데 그는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반응이다.
“몇 년 못 가서 깨졌으면 섭섭했을 텐데 30년 넘게 가지고 있었으면 오래 해먹은 거죠.(웃음) 사실 그날 밤은 잠을 좀 설쳤는데 하루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이왕 깨진 기록, 차이라도 크게 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점이죠.”
30년 넘게 기록 방어자로 살아온 장재근. 그는 요즘 도전자로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며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0.01초를 당기기 위해서 33년이란 시간이 걸렸잖아요. 이 기록이 또 오랫동안 정체될까봐 그게 걱정돼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도 20초 초반까지는 계속 선수들끼리 경쟁하고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내면 좋겠어요. 물론 제가 지도한 선수가 기록을 깨면 더 바랄게 없겠지요.(웃음)”
그는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육상 코치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큰 성적을 바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잖아요. 기본기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전수해주면서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점심 먹고, 퇴근하는 길에 헬스장에 가서 운동 좀 하고. 그러면 제 노년 생활이 참 행복하겠단 생각이 들어요.”
수도권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날, 부산역에 도착했다. 위쪽 지방보다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은 부산은 아직 초겨울 같았다. 평소대로라면 부산역 옆 돼지국밥 골목에서 국밥 한 그릇 말아먹고 여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오늘은 초량이바구길에서 시래깃국을 먹기로 했다. 구수한 시래깃국을 호호 불어가며 먹을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걷기 코스
부산역 ▶ 옛 백제병원(브라운핸즈백제) ▶ 남선창고 터 ▶ 동구 인물사 담장 (초량초등학교) ▶ 이바구정거장 ▶ 168도시락국 ▶ 168계단과 168모노레일 ▶ 전망대 ▶ 이바구놀이터와 6·25막걸리 ▶ 이바구충전소 ▶ 당산 ▶ 이바구공작소 ▶ 장기려더나눔센터 ▶ 스카이웨이전망대 ▶ 유치환의 우체통
부산의 산동네와 산복도로
한국전쟁 발발 두 달 뒤, 최후 방어선이었던 부산이 피란수도가 되었다. 전국의 피란민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전쟁 전 40여 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100만 명으로 늘었다. 전체 면적의 절반이 산지인 부산은 폭증한 인구를 수용할 만한 땅이 부족했다. 피란민들은 부산항과 부산역에서 가까운 산동네로 몰려들었다. 산비탈을 깎아 판잣집을 짓고 부두 노동자로, 자갈치 시장 일꾼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산동네에 정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동네가 지금의 감천문화마을, 아미동 비석마을, 영도 흰여울마을, 초량동 산복도로 마을 등이다.
부산에 산동네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산중턱을 지나는 산복도로(山腹道路)가 생겼다. 실핏줄처럼 산동네를 연결하며 부산의 상징이 되었다. 부산 동구에서 산복도로가 처음 개통된 초량동에 부산의 근대 역사를 담은 ‘초량이바구길’을 조성했다. ‘이바구’는 이야기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까꼬막이 천지삐까리’ 초량이바구길
초량이바구길은 부산역에서 산복도로까지 걷는 길이다. 짧은 코스이지만, 부산말로 “까꼬막(오르막길)이 천지삐까리다(아주 많다).” 급경사 계단에는 모노레일이 있으니 앞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부산역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첫 목적지인 옛 백제병원에 도착한다. 백제병원은 1927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종합병원이었다. 폐원된 이후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현재 1층에 카페 브라운핸즈백제가 입점했다. 근대 건축물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덕분에 인기를 끌고 있다. 1900년에 지은 부산 최초의 창고인 남선창고 터와 부산 동구의 근현대사와 인물을 소개한 초량초등학교(1937년 개교) 담장을 지나면, 이내 이바구정거장이 나타난다. 이바구정거장은 초량이바구길의 안내소로서 캐리어 보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바구정거장 옆에 있는 바람개비로 장식한 계단에서 본격적인 까꼬막 여행이 시작된다.
초량이바구길의 명물 168모노레일
바람개비계단 끝에서 분식집처럼 생긴 168도시락국 식당이 반긴다. 추억의 도시락을 주문하면, 달걀부침을 얹은 양철 도시락과 진한 멸치 육수 맛이 일품인 시래깃국을 맛볼 수 있다. 시래깃국을 들이마시다시피 하니, 주방을 지키던 할머니가 빈 국그릇을 가득 채워준다. 배불리 먹은 밥값은 단돈 5000원. 감사 인사가 절로 나온다. 168도시락국 식당을 비롯해, 이바구놀이터(영진어묵&공감카페), 6·25막걸리, 게스트하우스인 이바구충전소, 커뮤니티 센터인 이바구공작소 등에는 동구 지역 시니어가 근무한다.
168도시락국에서 조금 올라가면 경사 45˚의 168계단이 기다린다. 쳐다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다행히도 2016년, 계단 옆에 무료 모노레일이 생겼다. 운행거리는 약 60m. 모노레일에 함께 탄 아주머니가 168계단을 가리키더니 “이 계단이 부두 노동자들이 일하러 갈 때 다녔던 지름길이라. 계단 밑에 있는 우물도 봤지요? 할매들이 이 계단으로 물 뜨러 다녔는데, 한 계단 오르고 한 번 쉬고, 고생이 말도 몬했다꼬. 모노레일이 생겨서 얼매나 좋은지 몰라요. 여름에도 시원코. 저짝 아래 함 보소. 갱치가 울매나 좋은지”라며 추억 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바구길 최고 전망은 이곳
모노레일에서 내리면 바로 전망대로 이어진다. 비탈에 층층이 자리 잡은 초량동 주택가와 멀리로는 황령산, 해운대 마린시티, 부산항과 부산항대교, 영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모노레일 승강장 옆에 있는 이바구놀이터도 전망대만큼 훌륭한 뷰를 자랑한다. 이곳은 야경 감상에 최적화된 장소다. 통통하고 쫄깃한 부산어묵으로 끓인 어묵탕을 먹으며 야경을 감상하노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인정 넘치는 시니어 직원들이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음식이 식을세라 살뜰히 살피기도 한다. 이바구놀이터 맞은편 6·25막걸리에서는 막걸리와 해물파전을 맛볼 수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갈 때는 모노레일 대신 계단을 추천한다. 걸어 내려가면서 빵집, 아트숍, 카페, 갤러리, 추억의 물건을 파는 다락방장난감BOX, 김민부 전망대에 들를 수 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로 시작하는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작사한 이가 바로 시인 김민부다. 전망대와 마주보고 있는 이바구충전소를 지나 마을 수호신을 모신 당산 쪽으로 올라가면 산복도로와 만난다.
부산에서만 가능한 산복도로 투어
산복도로 턱밑에 자리한 이바구공작소는 방문객 안내센터 겸 주민커뮤니티센터다. 이곳에 근무하는 시니어 문화해설사에게 초량의 근현대사를 들을 수 있다. 이바구공작소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장기려더나눔센터도 들러볼 만하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칭송받는 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환자를 돌보는 데 일생을 헌신한 의사이며, 의료보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장기려더나눔센터에서 유치환의 우체통으로 가는 길에 산복도로를 지나다 보면, 독특한 풍경이 눈에 띈다. 도로 폭이 좁아 건물 옥상을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한쪽 차바퀴를 들어 주차하는 ‘개구리 주차’를 볼 수 있다.
산복도로 가에 위치한 유치환의 우체통은 부산에서 세상을 떠난 시인 유치환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2층 시인의 방에서 엽서를 써 3층 전망대에 설치한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다. 다음 목적지로 가려면 유치환의 우체통 앞에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주변 명소 & 맛집
초량차이나타운
1884년 초량에 청국 영사관이 설치된 뒤, 중국 상인들이 점포를 겸한 주택가를 형성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93년 중국 상해시와 부산시가 자매결연을 해 상해문을 건립하는 등 상해 거리를 조성했다. 고기만둣집인 신발원이 유명하다. 차이나타운 일부 구역에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들어선 텍사스 거리가 있다. 두 곳이 한길로 이어져 있는데,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동구 중앙대로 196번길 8.
밀면과 돼지국밥
부산에 여행 와서 밀면과 돼지국밥을 먹지 않으면 서운하다. 부산역 근처에 있는 초량밀면과 본전돼지국밥이 소문난 식당이다. 밀면은 피란 온 이북 사람들이 원조 물자로 공급된 밀가루로 냉면을 대체할 음식을 만든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돼지국밥도 피란민들이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돼지 뼈를 이용해 국을 끓인 것이 시초라 한다. 밀면과 돼지국밥은 싼 재료로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을 수 있게 만든 피란 음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초량밀면 동구 중앙대로 225, 본전돼지국밥 동구 중앙대로214번길 3-8.
돼지갈비와 돼지불백거리
초량은 돼지갈비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직후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부두 노동자들이 작업을 마친 뒤 초량시장에서 돼지갈비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초량 육거리 부산고등학교 앞에 돼지불고기백반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검정 프라이팬에 달달 볶은 매콤한 돼지불고기가 없던 입맛도 살아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싼값에 푸짐한 한 상이 차려진다. 초량돼지갈비골목 은하갈비 동구 초량중로 86, 초량불백거리 원조불백 동구 초량로 36.
초량1941
초량1941은 초량동 산복도로 위에 자리한 우유 전문 카페다. 1941년 지어진 일본 적산가옥을 개조했다. 이색적인 분위기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이 눈길을 끈다. 커피와 말차우유, 홍차우유, 커피바닐라우유, 동백우유 등 다양한 병우유를 판다. 고소하고 진한 우유와 쫀쫀한 생크림 속에 과일을 콕콕 박아 만든 과일 샌드위치를 함께 먹으면 한끼 식사로도 충분하다. 동구 망양로.
여행 정보
➊ 찾아가는 길 전철 1호선 부산역 7번 출구에서 ‘백제병원(브라운핸즈백제)’ 또는 ‘이바구길모노레일’ 방면으로 이동
➋ 이바구자전거 시니어 도슨트(문화재 해설사)가 운전하는 전동 자전거에 타고 초량이바구길을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도슨트가 이바구길의 명소 소개와 숨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산역 분수대 옆에서 출발/ 10시, 11시, 12시, 13시, 14시, 15시 출발. 예약 070-8224-0122/요금 어른 1만 원. 초등학생 7000원(미취학 아동 무료) 우천 시 운행하지 않음
➌ 이바구버스투어 가이드와 동행하는 이바구버스 투어 상품도 있다. 요금 어른 1만6000원, 초등학생 9000원
이자연은 최근 여성 최초로 대한가수협회장에 당선되었다. 호칭을 회장님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자연의 대표곡 ‘찰랑찰랑’을 부를 때 그녀의 목소리와 몸짓을 떠올리면 회장님보다는 찰랑찰랑대는 맛깔스러운 가수가 훨씬 더 어울린다. 대외적인 그녀의 나이는 63년생이지만 사실은 58년 개띠. 이봉규와 갑장이어서 더 말이 많았다.
그녀가 데뷔할 당시 여자 연예인들은 대부분 나이를 내려 발표하곤 했다. 무명 시절 부산에서 설운도와 함께 같은 밤무대 업소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둘이 동갑이라 대기실에서 자연스럽게 이자연이 설운도에게 “야 너 이리 와봐!” 하면 사람들이 놀랬다고 한다.
외모로 보면 설운도가 대충 열 살은 많아 보이는데 반말로 ‘야자’를 트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보였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때 장면이 떠오르는지 이자연이 깔깔대며 웃는다.
이자연은 경북 구미 출신. 스무 살 때부터 부산에서 프로가수로 노래를 시작했다. 중학교 때 이미 음반이 나왔을 정도로 이자연은 타고난 가수다. 부산 코모도호텔 나이트클럽 등 밤무대 에서 노래를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일본 공연을 갔는데 거기서 운명적으로 길옥윤을 만난다.
이자연이 타고난 가수임을 한눈에 알아본 길옥윤과 함께 전국 투어를 시작하면서 그녀 이름은 대중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훈아 선배를 만나 ‘당신의 의미’로 데뷔하는 행운도 거머쥔다. 그 후 ‘서울 나그네’, ‘사나이 눈물’ 등의 곡들이 잇따라 히트를 치면서 가수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져 나갔다.
당시 나훈아로부터 곡을 받고 작곡해준 값으로 2000원을 줬더니 나훈아가 식당 종업원에게 “야~ 담배나 사와라! 나머진 팁이고~”라고 말하면서 퉁쳤다는 에피소드를 전한다. “나훈아는 이자연에게 은인이자 훌륭한 선생님이다. 보잘것없는 신인에게 그렇게 호의를 베풀다니….” 그때 상황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대가의 선견지명일 것이다.
길옥윤, 나훈아, 남진과의 특별한 인연
길옥윤이나 나훈아 같은 대중음악계의 대가들이 볼 때 이자연은 될성부른 나무였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나훈아 씨 가끔 만나나?” 하고 물었더니 “그 오빠는 숨어서 지내기 때문에 요즘은 못 만나고 있다. 예전부터 워낙 숨어 지내는 분이다. 남진 오빠랑은 정반대 스타일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자연은 남진과의 인연도 나훈아만큼 각별하다고 말한다. 남진 추천으로 2006년 대한가수협회 이사로 이름을 올렸는데 그게 큰 경력이 되었고, 이번에도 남진이 이자연을 회장으로 또 추천해줘서 당선이 됐다.
“나훈아, 남진, 이자연이 삼 남매야? 뭐야? 두 오빠들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하는 거야? 나훈아는 나를 데뷔시키고 남진은 나를 가수협회장 시키고….” 오늘의 이자연을 만들어준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한다. 그녀는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하고 친하다는 사실을 상당히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이자연이 대단한 것은 노래도 노래이지만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노력이다. 젊은 시절부터 가수활동에 전념하느라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워 늦은 나이에 도전, 2011학년도 건국대학교 수시 예술문화대학 예술학부에 지원 합격했다. 내친김에 그 후로도 공부를 계속해서 동대학 언론홍보대학원에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올해 가을학기에는 건국대 예술문화대학 초빙교수로 위촉되기도 했다.
만학도의 꿈을 이루더니 교수도 되고 여성 최초로 대한가수협회장도 되고 이자연의 인생은 갈수록 멋지게 펼쳐진다.
우리 남편은 ‘껌딱지’
“우리나라 가요역사를 잘 알리고 싶다. 우리 가요를 지키는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다. 일본에서 5년간 활동했는데 엔카에 대한 인기와 엔카를 지키려는 일본 대중문화계의 노력을 보면서 부러웠다. 선후배 간에 철저하게 위계질서도 있지만 서로 밀어주고 키워주고 존경하고 따르는 문화가 부러웠다”고 토로한다.
“지금 대중가요계가 질서도 없다는 비판을 받아도 싸다”고 자조 섞인 하소연도 늘어놓았다. “예전에는 레코드 회사에서 엄선해서 데뷔를 시켰는데 지금은 아무나 음반 내고 가수라며 공연을 다닌다. 대중가요계가 싸구려가 되어버렸다”고 한숨을 쉰다.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지니까 이자연은 노련하게 갑자기 족보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한산이씨(韓山李氏)인데 가수 이동준, 이태원, 이용복 등이 할아버지뻘이다. 가수 이선희는 더 높아서 대모님인데 보통 때는 이선희가 나에게 언니라고 부르다가 종친회에 가면 내가 깍듯이 ‘대모님’이라 불러준다”며 화제를 돌리는 내공이 수준급이다. 나도 질세라 급히 화제를 돌리면서 남편에 관해 물어봤다. 이자연은 1996년에 결혼해서 남편과 별 탈 없이 살고 있다. 두 살 연상인 남편은 건설업에 종사하면서 모텔도 소유하고 있는 재력가다.
이자연은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서른여덟 살에 결혼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섭섭해서 “부부 전선에는 이상이 없나? 요즘 하도 ‘졸혼’이 유행이라서…” 하고 은근슬쩍 떠보았다. 다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우리 남편은 ‘껌딱지’다. 틈만 나면 내 옆에 딱 붙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일을 존중해줘서 지방공연 등 가수활동을 하는 것에 관해 불평이 없고 오히려 좋아한다. 남진 오빠랑도 잘 아는 사이라서 ‘어떤 때는 남진 오빠가 나에게 전화 안 하고 신랑에게 전화를 할 정도’다”라고 말하는 걸 보니 남편의 외조가 오늘의 이자연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노래가 내 자식”
자식이 없어서 오히려 부부애가 더 끈끈하고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이자연은 “노래가 내 자식”이라며 “아직까지 자식이 없는 것에 대해 아쉬움은 없다. 입양까지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가수활동이 바빠 아이를 입양하면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예전에는 남자들이 여자를 집에 가두고 살림만 시키려 했던 경향이 있는데 나는 아무리 백마를 탄 왕자라 해도 노래하지 말라 하면 못 산다”고 딱 부러지게 말한다.
그래서 결혼 전에 뭇 남자들로부터 대시를 받은 적이 많지만 전부 거절하고 지금의 남편을 선택했다. 남편은 그녀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게다가 “나는 밥도 할 줄도 모르는데 우리 남편은 미식가라서 내가 밥하는 것을 원치도 않는다”니 이만한 천생연분도 없다.
그녀는 “나는 가수가 천직이고 다시 태어나도 또 가수를 할 것이다. 다른 것은 할 줄도 모르고 아예 하고 싶지도 않다”고 단호하게 자신을 정의한다. 어떤 분야이든 자기 일에 미치도록 집중해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자연처럼 일생을 노래에만 집중하며 산 사람도 드물다.
나 이봉규만 해도 직업을 여러 차례 바꿨고 취미도 다양하고 아직도 와이프가 차려주는 밥상이 제일 좋다. 오늘은 왠지 이자연 앞에서 작아지는 느낌이다. 이래야 성공을 하는구나! 또 배운다.
“이룰 거 다 이뤘는데 앞으로 꿈이 있는가?”라고 묻자 “좋은 노래로 사랑받고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가수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천생 가수의 모범 답안이다.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최고로 일 잘하는 회장으로 남고 싶다. 어려운 가수들의 복지에 힘쓰고 선후배 가수들이 잘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이자연의 눈과 목에 힘이 들어간다.
포부가 당차고 왠지 신뢰가 간다. 이 여자가 뭔 일을 해낼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수라는 직업이 최고다. 행복한 직업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나는 축복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걸 보니 이자연이 인생을 잘 산 것 같아 부럽기까지 하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숨도 안 쉬고 “남진, 나훈아”를 외친다. 뼛속 깊이 가수이면서 의리까지 갖췄다. 석사까지 받은 사람이기에 대중문화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알고 있겠지만 곧바로 두 사람 이름이 튀어나온다. 그러고는 덧붙여 “이미자 선배님도 존경한다.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나?” 하며 가수로서 너무 부럽다고 말한다.
동갑내기 이자연을 인터뷰하고 나서 거울을 보며 이봉규에게 자문해봤다. “나는 누굴 존경하나? 누구를 부러워하나? 어떤 것에 미치도록 집중해본 적이 있나? 앞으로는 무엇에 미쳐야 하나? 누가 나의 은인인가?” 찰랑~찰랑~대는 이자연이 대단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