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을 맞는 2015년 현재, 스포츠는 경제와 함께 신생 대한민국이 압축 성장한 대표적인 분야로 꼽힌다. 대한제국이 제국주의 일본에 병탄된 이후 한국인들의 스포츠 활동은 상당한 제약을
받으면서도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 1920년 조선체육회(오늘날의 대한체육회)를 창립하는 등 나름대로 발전을 거듭했다.
글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 아래 한국인의 국제무대 활약상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하계대회(마라톤 김은배·권태하, 복싱 황을수), 1936년 베를린 하계대회(마라톤 손기정·남승룡, 축구 김용식, 농구 이성구·장이진·염은현, 복싱 이규환) 그리고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독일) 동계대회(스피드스케이팅 김정연·이성덕·장우식) 등 총 3차례의 올림픽에 모두 13명의 선수가 출전했을 뿐이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인도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1900년 제2회 파리 대회부터 올림픽에 나섰고, 필리핀도 미국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1924년 제8회 파리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일본은 1912년 제5회 스톡홀름 대회에 처음 참가한 뒤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에서 종합 8위(금 6, 은 4, 동 8)에 오르는 등 1930년대에 이미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스포츠는 세계 수준은커녕 아시아 지역에서도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 안에 한국은 세계 스포츠 10강으로 성장했다. 놀라운 성장 속도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나라를 먹고살 만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줬던 한국 스포츠의 광복 후 70년을 살펴본다.
혼란기 이끈 두 효자 종목 복싱과 역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미국 등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35년의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으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도 혼란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1945년 11월 26일 이 땅의 체육인들은 조선체육회를 재건했다. 경기 단체도 조선육상경기연맹과 조선축구협회 등이 속속 탄생했다. 1945년 10월 27일 열린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는 제26회 전국체육대회로 이어졌다. 올해 제96회를 맞는 전국체육대회의 기원은 1920년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다.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도 조선올림픽위원회는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하고 1948년 7월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한수안이 각각 동메달을 따며 신생 대한민국의 존재를 온 세계에 알렸다.
이에 앞서 그해 2월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 한국은 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지만 두 대회 모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열렸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열린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강준호가 각각 동메달을 차지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과 1952년에도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195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에는 한국전쟁 탓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1954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3위를 차지하며 아시아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한국은 복싱의 송순천이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은메달을 따고 역도의 김창희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1940~50년대에 참가한 3차례 올림픽에서 한국의 메달박스는 복싱과 역도였다.
한국 스포츠의 메카 태릉선수촌 개장… 치열한 남북 경쟁
해방 이후 70년, 한국 스포츠 발전 과정에서 태릉선수촌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진천선수촌에 자기 자리를 거의 물려줬지만,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태릉선수촌과 인연을 맺지 않은 한국 운동선수는 거의 없다. 196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세계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시기로, 국가 대표 선수들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이 1966년 문을 열었다.
1960년대에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그리고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1966년과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종합경기대회에서 선전하는 한편 1966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아마추어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장창선이 해방 이후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박신자를 앞세워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각종 국제 대회에서 ‘스포츠 코리아’를 알리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도쿄 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이 스위스와 홍콩에서 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이렇다 할 소득 없이 끝난 회담이었으나 남북 스포츠 관계자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머리를 맞댔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초반 탁구와 청소년 축구의 단일팀 구성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공동 입장 등 일정한 성과물을 거두게 된다.
1960년대에는 개인 종목의 프로 스포츠가 활기를 띤다. 1966년 6월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꺾고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고, 김일이 이끈 프로 레슬링은 당시 국내에서 해마다 개최한 유일한 국제 대회인 동남아여자농구대회와 함께 국민적 볼거리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아시아 무대에서 벗어나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시기이기도 하고, 1972년 뮌헨 대회 때 처음으로 올림픽에 얼굴을 내민 북한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시기이기도 하다. 북한이 1972년 뮌헨 대회 사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먼저 따자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양정모(레슬링)의 금메달로 응수하는 등 1970년대 내내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1974년 테헤란·1978년 방콕) 등 여러 국제 대회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다.
체제 경쟁의 측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 스포츠의 전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이 시기,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표어가 ‘선 체력 후 기술’이었다.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 전관왕에 오른 김진호, 1978년 한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유럽 무대인 서독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 등이 이 무렵 한국 스포츠의 슈퍼스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1988년 서울 올림픽, 한국 스포츠 도약의 발판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발전의 토대를 착실하게 만든 한국 스포츠는 1980년대 들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꽃을 피운다. 서울 올림픽 유치 과정은 한마디로 그동안 쌓아 온 국력의 집결 과정이었다.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했던 아픈 기억은 두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완전히 사라졌다.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은 체제를 넘어서서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동서 화합의 계기가 된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국민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 1980년대에는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프로 스포츠 시대의 막을 열기도 했다. 1983년에는 축구와 민속 경기인 씨름이 프로화돼 스포츠의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됐다. 축구의 경우 프로화에 따른 경기력의 발전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에 출전하는 등 성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28개와 은메달 28개, 동메달 37개를 획득했고 북한은 금메달 17개와 은메달 19개, 동메달 20개를 차지해 스포츠의 남북 경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하형주,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등은 스포츠 팬들의 기억에 생생한 1980년대의 스타플레이어다.
한국 스포츠 세계 10강을 굳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홈의 이점을 살려 종합 순위 4위(금 12, 은 10, 동 11)에 오른 한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종합 순위 7위(금 12, 은 5, 동 12)를 차지하면서 스포츠 강국의 위상을 확실히 다졌다. 그해 알베르빌(프랑스)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은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에서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동계 종목 사상 첫 금메달을 기록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후 2006년 토리노 대회까지 한국은 쇼트트랙을 주력 종목으로 동계 올림픽에서도 세계 10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2010년 밴쿠버 대회에서 피겨스케이팅 김연아와 스피드스케이팅 이상화와 모태범, 이승훈 등의 금메달 6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종합 순위 5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2014년 소치 대회에서는 김연아가 금메달을 도둑맞는 등으로 인해 종합 순위 13위(금 3, 은 3, 동 2)로 주춤했지만 2018년 평창 대회에서는 다시 한 번 좋은 성적이 기대된다.
하계 올림픽에서도 2012년 런던 대회에서 역대 최다인 13개의 금메달(은 8, 동 7)이 쏟아지면서 종합 순위 5위를 기록했다. 원정 대회 최고의 순위였다. 축구가 박주영, 구자철, 기성용 등의 활약에 힘입어 기대하고 기대하던 동메달을 따 국민들에게 금메달 이상의 기쁨을 안겼다. 이에 앞서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는 이승엽, 류현진, 이대호 등이 힘을 모은 야구가 9전 전승 금메달의 쾌거를 이뤘다.
한국 스포츠는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아마추어의 경우 국제 대회 성적이 특정 종목에 치우치지 않고 있으며, 프로에서는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선수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뛰고 있다. 특히 여자 골프는 1998년 미국 여자 프로 골프 투어 4관왕에 오른 데 이어 2015년 현재 통산 25승에 빛나는 박세리의 뒤를 잇는 ‘박세리 키즈들’이 세계의 그린을 휘어잡고 있다. 또 하나 달라진 사실은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1등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신세대 선수들은 동메달을 따도 금메달을 딴 듯 기뻐한다.
한국 스포츠는 올해 프로 야구가 800만 관중을 겨냥하고 있고 다양한 종목의 생활 체육이 활성화돼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보는 스포츠와 즐기는 스포츠가 엘리트 스포츠와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며 발전해 나가고 있다. 해방 후 70년, 속도를 우선시하며 나타난 압축 성장의 폐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 신명철(申明徹) 스포츠 평론가
편집국장과 편집위원, 편집위원을 거쳐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1993년 버팔로(뉴욕주) 유니버시아드대회, 1995년 프로 야구 한일슈퍼게임,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등 주요 국제 대회를 취재했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쎄시봉’ 가수, 라디오 장기 DJ, 예능 프로그램에 감초 게스트, 그리고 독보적인 소재를 활용하는 화가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조영남. 올해 칠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조영남과의 인터뷰는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그의 사고는 거침없었다. 하지만 그 거침없음으로 인해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만들어진 수많은 대중의 호불호 속에서도 그가 지켜 가고자 하는 삶의 중심은 무엇일까?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짧고 굵다. 무뚝뚝하고 툭툭 던지는 듯한 조영남의 화법은 마치 묵직한 못을 박은 것처럼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답을 던진다.
“재밌게 사는 방법에는 낚시, 바둑, 골프, 등산…. 그중 하나 골라서 하면 되는데 돈 안 드는 걸로는 그림 같은 게 있지. 딴 것들은 돈이 드니까 추천하기가 거북하네. 그런데 낚시하고 똑같아. 뭐든 낚싯줄 드리우듯이 시작하면 하게 되는 거지. 일단 경험을 해봐.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도 그림 시작할 때는 아마추어로 시작했지. 그런데 이걸 계속 30년 넘게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프로 대접을 받더라고. 저절로 프로가 됐어.”
인생 후반전에 들어와 화가로서 이름을 세운 조영남. 그에게 인생 후반전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 길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을 때의 대답이다.
뿔테 안경 너머로 익살스러운 웃음과 함께 늙지 않는 청춘을 실제로 마주하니 더 진솔했다.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해보라”
화가가 된 그에게 그림이 좋다 나쁘다의 평가 기준이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 돌아온 대답도 조영남다웠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거 그리는데 남이 뭘 보고 느끼겠어. 그런 건 모르고. 낚시나 바둑 같은 것보다 그림 그릴 때가 단순히 좋을 뿐이야. 그래서 하는 거지.”
그러나 대화를 더 진행하니 단순히 좋아서는 아니었다. 조영남이 화투를 통해 미술을 선택한 이유는 미술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음악은 내가 노래 잘하는 사람과 똑같이 하면 금방 인정받잖아? 그런데 내가 피카소와 똑같이 그리면 미술계에서 실력이 없다는 굴욕적인 평가를 받아. 음악과 미술은 그런 차이지.
그런데 화투를 아무도 안 그렸었더라고. 내가 그걸 알고서 처음 화투 그림을 시작한 거지. 딱지도 그린 사람이 없었어. 딱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추억의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소재로 그림을 그린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서 2년 전부터 그리고 있어. 미술은 100% 자유야. 화투를 그려도 되고 딱지를 그려도 되고 하다가 말아도 되고. 그런데 음악은 까다롭잖아. 음정, 박자를 맞춰야 하잖아. 내게 음악과 미술은 정반대야.”
그는 치열하고 골똘하게 연구해 독자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미술이라며 미술과 음악을 포함한 예술은 모순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에 닿는 그림을 담아내고 있다.
징징 짜면 죄(罪)라는 생각
우리는 동창들을 만나면 “그 친구보다는 내가 괜찮았는데 잘 안 됐어” 식의 추억 이야기를 곧잘 하게 된다. 조영남에게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그에게는 정말 안 어울리는 질문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열등감 있게 보여? 나는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얼마나 무감각한 남자냐 하면 어렸을 때 가난했잖아? 가난도 실감을 못 하는 정도였어. 어렸을 적에 가난했다고 한숨 푹푹 쉬는 친구들 있잖아. 난 학교 가는데 하늘이 노랄 때가 있었거든? 그럴 때는 ‘아! 내가 굶었구나’ 생각하고 친구들 접선해서 얻어먹으면서 견디고 그랬지. ‘가난하다’, ‘불행하다’, 그런 느낌을 안 가졌었어. 그러려니 싶었던 거지.”
조영남은 자신의 낙천적인 면모가 피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부모님 양쪽으로부터 받은 긍정의 피다. 혹시 그런 천성이 그가 젊게 사는 비법이 아닐까. 그는 세대 갈등을 느껴본 적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런 그가 나이를 먹었다는 걸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이 나이 돼서 늘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보다 몸이 더 불편하잖아. 그러면 ‘늙었구나’ 하고 생각하지. 하지만 한탄하지는 않아.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태반이잖아. 내가 징징 짜면 안 되지. 그러면 죄 받는다고 생각해.”
그는 현재 딸과 함께 사는 중이다. 딸의 나이도 20대 중반. 딸의 결혼에 관한 생각을 물어봤다.
“그건 자기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지. 나는 딸이 뭘 하든지 찬성하고, 간섭 안 해.”
딸과 함께 수다를 떠는 거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그에게 문자를 보내도 외면당하는 요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조언을 물어봤더니 손사래를 쳤다.
“자식 문제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할 주제가 아니야. 두 번 이혼했는걸. 해선 안 되는 거로 생각해. 현대인들이 문제를 푸는 걸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냐. 안 돼서 안 하는 거지.”
“주된 관심사는 이성”
‘조영남’이라고 하면 스캔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요즘 이성에 대한 관심은 어떤지 물어봤다. 그러자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가장 빠르고 굳건한 목소리의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내 제일 주된 관심사지.”
조영남 하면 다들 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활력이 나이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그런 반응에는 일말의 부러움이 섞여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왜 철딱서니 없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나한테 데려와 봐. 누가 철이 있는지 없는지 알게 해줄게. 나처럼 철딱서니 없으면 여자들이 좋아하는데.” (웃음)
솔직히 생각해보자. 요즘 사람들은 인생관을 세워도 그 인생관대로 삶을 잘 운영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 조영남에게 철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관대로 잘 안 되는 이유가 있어. 돈 쓰기를 싫어하니까.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하는데 되겠어? 그게 큰 원인이지. 그리고 사람들이 잔머리를 너무 써. 너나 할 것 없이. 그게 걸림돌이야. 그러다 보니 솔직하게 이야기를 못하지. 그런데 내가 그걸 솔직하게 말하니까 철딱서니 없다 하지. 진실을 얘기하니까. 진실은 항상 거북살스럽거든.”
진실을 직시하기 어렵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진실의 표현에 대한 수위 조절 또한 참 어려운 일이다. 그 물음에 그 또한 선선히 어렵다고 동의했다.
자신에 대한 반감에 투덜대지 않는 이유
조영남이 자주 가는 본인만의 아지트가 있을까? 그는 그런 곳이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 좋아하는 술도 줄였다고 한다.
“난 독주가 좋아. 그런데 나이가 드니 술도 안 들어가. 맛도 없고, 흥도 안 나고.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술이 들어갈 때 마음껏 먹어둬라, 나중에 후회한다. 그렇게 얘기하고 싶어. 클럽도 한 번 가봤는데, 정말 재미가 없더라고. 젊었을 때 갔어야지. 뭐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해.”
조영남의 삶의 궤적을 보면 다른 것들은 열정이 보이는 게 많은데 유독 돈을 버는 일에는 크게 애정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돈 버는 직업은 아니잖아. 그래서 내 이름으로 해서 망한 적도 없고. 그런 걸 하면 죄 짓는 거라 생각해. 나는 신이 노래만 불러도 먹고 살게끔 해줬는데, 다른 걸로 먹고 살려고 하는 건 신의 뜻에 어긋나고, 나 자신에게도 어긋난다고 생각해.”
확고한 신념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지만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연예인이다.
“꼼꼼하다기보다는 와이즈(Wise)하다는 표현이 더 맞는 거 같아. 나는 현명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했고 나름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그는 유명인으로서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볼 때가 가장 섭섭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가 유명하니까 나에 대한 몰이해도 나오는 거로 생각해. 그래서 나에 대한 반감에 대해 투덜거리지 않아. 사람들이 날 모르는 척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세상 사람 전부가 다 날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오늘 같은 인터뷰를 통해 조영남이란 사람에 대해 알 수 있겠지. 해서 지금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거고.”
“없어지는 걸 생각 중…생텍쥐페리처럼”
그는 영화 ‘버킷리스트’를 좋아해서 네 번이나 봤다고 말했다.
“보면서, 난 어떤 버킷리스트가 있을까…. 한 가지가 딱 생각났어. 내가 손목시계를 좋아해. 그래서 제네바에 가서 손목시계를 3박 4일 보고 오는 걸로 버킷리스트를 정했지. 그런데 그걸 하고 나니까 너무 싱거워. 너무 싱거워서 뭐 다른 건 없을까 생각했는데…. 지금도 없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했더라고.”
자신이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하고 싶은 걸 다한 상태였다는 걸 깨달은, 억수로 운이 좋은 남자, 조영남의 정체다.
“없어지는 걸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생텍쥐페리가 비행기를 몰고 구름 속으로 사라졌잖아. 그게 늘 부러워서 흉내 내려고 했는데 비행기를 배우려면 학원에 다녀야 하고 귀찮아. 그러니 버킷리스트가 없을 수밖에 없지.”
최근 그의 화투 그림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것 같아 인터뷰 막바지에 넌지시 가격이 많이 올라갔느냐고 물어봤다.
“굉장히 비싸졌지.”
그리고 바로 무심하게 툭 던진다.
“아, 그런데 그게 뭐 팔려야지.”
쎄시봉 큰형님으로 알려진 조영남은 이전까지 쎄시봉 콘서트와 별개로 개인 활동을 했지만 올해는 쎄시봉 전국투어 콘서트에 합류한다. 이번 콘서트에서는 영화 쎄시봉 OST에 등장한 신곡 백일몽 라이브 버전을 최초로 공개 할 예정이다.
다음은 2015 쎄시봉 친구들 콘서트 상반기 일정이다.
4월 4일 일산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
4월 11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
4월 12일 전주 전주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4월 18일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
4월 2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hall D
5월 9일 대구 경북대학교 대강당
5월 23일 인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평생 공무원으로 살았지요.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사진도 정형화된 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젠 공무원이 찍은 사진 같다는 말은 듣지 않으려고요. 제가 셔터를 누르던 찰나의 느낌을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진을 찍고싶어요.”
그렇다. 그는 한평생 공무원이었다. 1972년 3월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초급 공무원부터 시작해 2007년 4월 행정도시건설청기반시설본부장(국장급)으로 퇴직하기까지 35년간 국토정책 전문가로 나라의 녹을 받고 국가에 봉사했다. 퇴직 이후 2012년 4월까지 몸담은 건설공제조합(전무이사)까지 감안하면 40년 이상 사실상 공직생활을 한 셈이다. 그런 그가 퇴직 후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의 사진 얘기가 궁금했다.
현역시절엔 신문 스크랩으로 아쉬움 달래
공무원은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특히 국토부 공무원은 주택이라는 국민과 가장 근접한 이슈를 다루면서 일을 한다. 기본적은 정책 업무뿐만 아니라 언론 기사 대응까지 24시간이 모자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말을 편안하게 보내 본 기억이 없다. 공직에 발을 들여 놓고선 긴장의 끈을 놓고 살아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 그의 유일한 취미가 사진찍기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멋진 풍경을 찍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일단 모으기 시작한 것이 일간지 신문에서 주말판으로 제공하는 투어나 여행 관련 섹션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다니며 그림 같은 풍경을 찍겠노라고 모은 여행 섹션지가 큰 사과박스로 2개가 넘는다. 어느 순간엔 퇴직하고 나면 반드시 가겠노라며 차곡차곡 모아 놓은 것이다. 공직 퇴직 후 7년이 넘은 지금.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 들어보셨지요? 진짜 (현역때보다) 더 바쁘더라구요. 동창회를 비롯해 업무상 지인들, 가족 모임까지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어요. 아직 스크랩한 지역들을 다니지 못한 것이지요. 게다가 투어 섹션은 여전히 매주 발행되고, 또 새로운 여행지가 쏟아져 나와 이젠 감당이 힘들 정도예요.”
“예술사진반서 공부… 달력사진 안 찍어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곳이 계원예술대학교 예술사진반이었다. 전문가에게 사진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달에 두 번 전국에서 사진 찍기 좋기로 유명한 곳들을 좋은 분들과 함께 다닐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다보니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들은 한낮 풍경만 담은 달력사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같은 사진반 회원들이 찍은 작품을 살펴보다 풍경만 있고 감성은 없는 무미건조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를 스트레스라고까지 말했다.
“공무원이 찍은 사진 같다는 얘기가 그렇게 듣기 싫더라고요. 틀에 박힌 사진이란 얘기지요. 여백을 담아내기도 하고 감성을 이끌어 내는 다른 분들의 사진과 비교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게되더라고요.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라는 고민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무조건 멋진 풍경을 담기보다 풍경을 차분히 보고 제가 보고 느낀 감정을 같이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있어요. 점점 고민하고 진지하게 사진을 대하고 있는 셈이지요.”
몽골·미얀마 사진전 열어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 최근 결실을 맺기도 했다. 계원예술대학교 전문사진반이라야 갈 수 있는 몽골과 미얀마 투어에 참가하게 된 것. 이를 계기로 올해 2월과 8월 각각 몽골 사진전과 미얀마 사진전에 준 프로급 전문가들과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영광을 얻게 됐다. 실력으로 보면 몽골과 미얀마 동행은 물론 사진전도 동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의 열정과 함께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는 몽골과 미얀마가 각기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고 했다. 먼저몽골의 키워드는 ‘광활함’이었다. 그리고 메마르고, 거칠었다. 한반도 넓이의 7배에 달하는 드넓은 땅이었지만 춥고 척박했다. 그런 땅에서도 가족단위로 소·말·양·염소 등의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때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초라한 변방국가가 돼버린 그들에게서 ‘우리가 사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가’라는 잔상이 남기도 했다고.
반면 미얀마의 매력은 ‘사람’이었다. 한없이 맑고 순박한 표정과 평화로운 사람들이 그를 매료시켰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독실한 불교국가라는 점에서 그연유를 찾고 있었다. 특히 사원이 많다보니 거의 맨발로 돌아다니며 유적지에서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전 작품들은 지인을 비롯해 자식들에게 선물했어요. 그 전에 몸담았던 건설공제조합에도 기부했고요. 이제 사진은 제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매개체 역할도 하고 있지요.”
문화해설가로 재능기부 하고파
사실 그의 인생에서 사진을 빼고 얘기하기도 어렵다. 이는 국토부 공무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부 과장 시절 국토부 내 처음으로 사진 동호회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청사의 사계 등 사진전도 열고 사진을 팔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다.
이후 행복도시 건설청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사진반을 만들어 직원들이 함께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건설공제조합 시절에는 찍었던 사진들을 조합에 건네 조합달력을 만들기도 했다. 은퇴 이후에도 국토부 퇴직 공무원 모임인 건설진흥회에서 사진반 총무를 맡는 등 사진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앞으로는 사진으로 재능기부를 하고 싶어요. 관광 가이드가 찍어 주는 사진이 맘에 들지 않을 때 많으셨지요? 제가 문화해설가 역할도 하면서 사진도 찍어드리는 가이드를 하게 되면 ‘더 의미 있는 취미 생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은 평생 찍은 사진을 분류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정말 움직이기도 힘들 때가 되면 아내와 둘이서 지난 세월을 음미하면서 사진을 즐기고 싶어서요.”(웃음)
금융권 생활 20년, 돈 냄새를 누구보다 잘 맡는 사람이 있다. 퇴직 후 10년, 불운의 연속으로 실패에 쓴 맛을 본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NGO단체 (사)러브 월드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있는 박근배 사무국장이다.
그는 자신을 한때 ‘잘 나갔던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표했했다. 그러나 전혀 거만하거나 거북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 경험도, 바닥에서 헤메던 경험도 있던 사람의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은행연합회에서의 20년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후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이 내 삶에서 가장 화려한 날이라고 표현 할 뿐이다.
◇ 잃어버린 10년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박씨의 퇴직 후 10년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지난 10년 간 3차례의 사업에서 실패해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탓이다.
2003년 은행연합회에서 나온 후 그가 도전한 첫 사업은 골프연습장. 골프마니아다운 야심찬 행보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골프 프로 티칭 자격증까지 보유하고 있었지만, 경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골프 연습장은 얼마 되지 않아 폐업을 하게 된다. 씁쓸한 결과였다.
가장 운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사업이다. 2007년 그가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수고기 수입 사업이었다. 소고기 수입 회사의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적으로 촛불시위가 확산됐다. 박씨에게는 악재였다. 대한민국 사람 그 누구도 수입 소고기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2007년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나가던 박씨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에 기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태국 골프투어회사 경영은 불운의 마침표였다. 그가 태국에서 골프투어회사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국은 반정부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시위는 과열양상을 보이나 싶더니 이윽고 유혈사태까지 벌어져 한국발 태국행 비행기는 파리만 날리게 됐다. 태국을 찾던 관광객들은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푼 꿈을 안고 찾은 태국도 그에게 재기의 발판이 되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은행연합회에 재직하면서 모은 돈도 모두 날려버렸다.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들이었다. 오직 신앙에 의존해 극복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수년이 흘렀다. 그때는 절망의 기운으로 몸서리쳤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값진 경험이 됐다.
“‘아 이게 하느님의 뜻인가’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죠. 나이가 들고 이 세상을 뜨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돈. 이것을 쫓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요.”
◇ 주는 것? 얻는 것이 더 많은 NGO 활동
박씨에게 3번의 쓰디쓴 실패 경험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들어줬다. 그중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자문도 있었다. 그 심오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난해 필리핀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찾은 그곳의 여름은 태풍 하이옌 피해로 아수라장이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얽히고설킨 집단 이재민 수용소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다짐했다. 이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미래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이다.
박씨는 다짐을 실천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 활동 범위 또한 국내·외를 넘나들었다. 국내에서도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족들이 한국어 교육과 건강 검진까지 받을 수 있는 토털 케어 센터가 바로 그것이다. 자원 봉사의 현장에서 봉사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활기를 찾고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볼 때 덩달아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NGO 활동의 매력이라고 그는 얘기한다.
박씨가 NGO 활동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베푸는 것만으로 보람을 느꼈다면 결코 이 일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봉사와 온정이 전해지는 현장에서 삶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것. 살아가는 힘과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박씨가 손을 놓지 않는 이유다. 자신의 힘을 보태고자 날아간 필리핀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탠 힘보다, 더 많은 힘을 얻어 돌아왔다고 말한다.
“동남아 봉사활동을 가면 오히려 배우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항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감사할 줄 알았던 저였는데 그것이 행복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남아 사람들의 순수한 모습과 넉넉하진 않아도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모습. 이것을 보면서 진짜 행복함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배우게 됐습니다.”
◇ 영혼이 즐거워야 인생이 행복하죠
“제가 러브 월드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저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는 거예요. 이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저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또 나로 인해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영혼이 즐거워집니다. 이게 바로 행복한 인생인가 봅니다.”
박씨는 행복은 영혼의 즐거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에게 돈은 이제 전혀 보람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금융권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쌓여가는 통장의 잔액이 보람의 척도이자 행복의 척도였지만 말이다.
그가 영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NGO 활동. 삶의 보람을 찾은 덕분인지 몇 년 전까지 실패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인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고 패기가 넘친다.
그가 보람 있는 인생 후반전을 살고자 하는 신중년들에게 하는 조언이 있다.
첫째,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 동안 가정을 위해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보람된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그에게는 NGO 활동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둘째, 예전의 지위나 기억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퇴직 이 후는 그야말로 인생 후반전이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잘 나갔던’ 때를 기억하며 상대방이 그때의 지위로 생각해주고, 행동해 주길 바란다면 보람 있는 일을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거란 것이다.
인생 후반전을 행복하게 살고 있는 박씨. 그가 러브월드 활동을 하면서 생긴 철학이 있다. 항상 가슴과 머리에 새겨 놓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은 오로지 육신뿐. 보람 있는 삶을 살아 멋진 이름 남겨놓고 가자.’
“(서킷 코너링을 위해) 바이크와 함께 몸을 옆으로 점점 뉘이다가 급기야 뺨이 지면에 닿으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바로 그때 느껴지는 짜릿함이란 말로 형언하기 어렵죠.”(웃음)
전국 바이크 족들이 모여 실력을 뽐낸다는 경기도 가평 유명산 정상. “크앙~”하는 거친 굉음과 함께 날렵하면서도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는 슈퍼 바이크(배기량 1000cc이상) 한 대가 멈춰섰다. 이 바이크에 앉은 라이더가 헬멧을 벗자 마초(남성) 라이더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머리를 단아하게 뒤로 빗어 넘긴 준 연예인급 미모의 여성이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로 내년 하늘의 뜻을 깨닫는다는 지천명(知天命·50세)의 나이를 바라보는 아마추어 슈퍼 바이크 레이서 겸 주부, 전규정(49)씨였다.
◆우울증 = 그녀의 바이크 인생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의 한 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그래픽 디자인 등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에게 우울증이란 진단이 떨어진 것이 바로 그 즈음이다.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직장과 집만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삶이 낳은 결과였던 것. 즐겁게 빠져들 수 있는 것을 찾아보라는 의사의 권유에 사격을 비롯해 승마, 스킨스쿠버, 보드, 심지어 킥복싱까지 영역을 넓혀 갔다. 바이크도 그때 시작했다.
“강원도의 한 리조트 근처에서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 400대가 무리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죠. 오토바이 하면 택배 배달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타는 사람들도 있구나 했죠. 그길로 서울의 한 바이크 교습소를 찾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교관이 스쿠터 레이스도 나가보라고 해서 레이싱 세계에 입문하게 된 거예요.”
◆와인딩 = 슈퍼 바이크는 최고속도가 300㎞를 넘나든다. 전씨 역시 경주용 서킷에서 시속 200㎞를 훌쩍 넘겨 내달릴 정도 스피드에도 자신있다. 남성에 비해 체력적으로 떨어지는 여성인 데다 아마추어 라이더라는 점을 감안하면 준 선수급이라는 것이 주변의 얘기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즐기는 플레이는 따로 있다. 바로 와인딩(굽이길)이 그것. 서킷에서 바이크와 몸을 뉘어 업-다운을반복하며 코너링할 때 느껴지는 스릴감이 그녀가 바이크에 앉는 가장 큰 이유라고. 특히 코너를 돌 때 바이크가 기울어져 얼굴이 땅에 부딪칠듯한 느낌이 들 때가 가장 희열감이 느껴진단다. 이때 속도가 무려 시속 140㎞에 이른다. 그런 스피드가 무섭긴 하다고. 하지만 바이크를 서서히 세우며 코너를 탈출할 때 느껴지는 ‘해냈다’는 해방감은 그녀에게 가장 큰 성취감을 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녀는 바이크 투어링에 나설때 굽잇길을 골라서 다닌다. 도로가 뱀처럼 꼬불꼬불 꼬이면 금상첨화다.
강원도 느랏재, 태기산, 구룡령, 대관령, 한계령 등이 그녀가 주말이면 즐겨 찾는 투어링 코스라고. 특히 굽잇길이 심한 지리산 뱀사골이 라이딩 재미에는 그만인데 너무 멀어 자주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차량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평화의 댐도 그녀의 단골 투어링 코스다.
“업-다운으로 이어지는 와인딩은 바이크 타기의 백미예요. 내년에는 BMW원메이커 레이스 대회에 출전할 계획이에요. 더 늙기 전에 나가서 남성들과 당당히 실력으로 겨뤄보고 싶어요.”
◆남편보다 좋은 것 = 전씨의 바이크에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름 절약을 아는 주부 9단 그녀도 바이크 앞에선 한없이 무너진다. 이런 이력은 미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이크를 만난 이후
로 돈을 버는 족족 바이크에 투자했던 것. 그래서 지금 소유하고 있는 바이크만 3대다.
가장 아끼는 애마는 BMW S1000RR. 가격이 무려 4000만원에 이른다. 나머지도 예사롭지 않다. MV아구스타 브루탈레675는 대당 2000만 원을 호가한다. 베스파 이태리 스쿠터도 전씨가 즐겨타는 바이크다. 레이싱용 장비까지 합하면 금액은 더 올라간다. 레이싱용 슈트를 비롯해 헬멧, 부츠, 라이딩 자켓, 라이딩 바지, 글로브 등을 합치면 2000만 원을 훌쩍 넘는다고. 여기에 2년 전부터 바이크 세계에 입문한 남편 바이크(할리데이비슨)와 장비를 합치면 추가로 수천만 원이 더해진다. 바이크 라이딩 취미생활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주부다. 바이크에 투자하는 돈 이외에는 지독할 만큼 아낀다. 일단 자신을 치장하거나 꾸미는 데 돈을 들이지 않는다. 성형은 물론이고, 그 흔한 피부 마사지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양말 살 돈을 아끼기 위해 남편 양말을 신기도 한다고. 그녀의 털털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렇다 보니 여자들이 다들 좋다고 한다는 명품 가방하고도 거리가 멀다.
“피부관리요? 일단 저를 누가 만지는 것 자체가 싫어요. 그래서 팩도 안 하고 미용 같은 것에 관심이 별로 없어요. 제 유일한 취미는 바이크죠. 바이크에 들인 돈이 엄청나긴 하지만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남편보다 바이크가 더 좋으니까요.”(웃음)
◆스턴트 우먼 = 바이크는 그녀의 직업도 바꿔버린다.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스턴트우먼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 교습소에서 바이크 레이싱 교육을 받는 동안 알게 된 영화제작자에게서 “운동신경이 남다르다. 스턴트 전문 교육을 받아보는 게 어떤가”라는 말을 듣고, 그 길로액션 스쿨에 등록한 것. 각종 무술과 액션 기술을 두루 섭렵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지난 2005년 반올림 드라마에서 배우 고아라 대역(여자 경찰)으로 나왔고, 드라마 막상막하에선 배우 성유리 대역(군인)으로 바이크를 탔다. 특히 MBC 베스트 극장에선 건물 3층에서 트럭으로 뛰어내려는 스턴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요즘도 대역배우 요청이 들어오면 선별해서 방송출연하기도 한다고. 내년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현직으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건강에 자신이 있다. 이외에도 오토 바이크 로드매니저로도 활동하고 있다.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남자 형제들하고 자라다 보니 여기저기 치이면서 자랐거든요. 특히 남존여비라는 개념이 너무 싫었죠. 내가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스턴트가) 저도 무섭긴 한데 그런 두려움과 긴장감이 저를 더 즐겁게 해요. 바이크를 타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셈이지요.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사는 게 즐거워요.”
◆국제 여성라이더 협회 = 그녀의 바이크 사랑은 해외로도 이어졌다. 지난 2012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국제 여성라이더 협회 행사에 한국 대표(4명)로 참가하게 된 것. 총 300명 정도 참여하는 국제 행사에 당당히 그녀가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녀는 국제적인 행사에 태극기가 찍힌 레이싱복을 입고 한국여성 라이더의 위상을 알리는 기회를 얻게 돼 영광스런 자리였다고 했다. 게다가 투어형 바이크를 현지에서 렌트해 약 12일 동안 오스트리아 곳곳을 누비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금상첨화였다고.
그렇지만 전씨는 바이크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없어졌으면 한다고 했다. 바이크 타는 사람들 전체를 폭주족이나 불량배로 매도하고 배척하는 세태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는 얘기다. 오토 바이크 타는 사람들의 취향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바이크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도 불만이다. 자동차 전용도로는아예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는 데다 일반도로에서도 사륜차들의 텃세에 치여 배척당하기 일쑤라는 것. 외국에서는 바이크를 출퇴근용으로 더 권장하기도 하고 사륜차들이 오토바이에 길을 비켜주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데 한국은 선진국과 대조적인 모습만 연출되고 있다고. 그녀는 여성 라이더에 대한 편견도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 금녀의 구역이다 보니 처음에는 미친 여자 취급까지 받았다고. 특히 자신을 여성이 아닌 똑같은 라이더라 봐달라는 것이 그녀의 부탁이다.
“체계적인 라이더 훈련을 받고 경험을 쌓은 후 자기 실력껏 바이크를 타면 그리 위험하지 않아요. 조금 빠른 자전거를 탄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는 오토바이를 타면 안 좋게 보는 이유가 유교적인 사상에 기인한 것 같아요. 오토바이 타면 주렁주렁 치장하고 문신하고 하다 보니 더 곱지 않은 시선을 주는 것도 있고요. 자기 취향일 수 있는데 말이지요.”
◆바이크 미술 전시회 = 그녀는 아직도 도전하고 싶은 일들이 남아 있다고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학에서 전공했던 미술(서양화)이다. 전씨는 본인의 천직은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미술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려워 직장생활에 파묻혔고 바이크를 타면서 더 등한시하게 됐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얘기다.
더 나이를 먹기 전에 놓았던 붓을 다시 쥐고 짬짬이 작품활동을 해서 미술 전시회도 연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여기서도바이크는 빠지지 않는다. 바이크를 조형화하거나 형상화한 이미지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구상이다. 그래서 전시회 이름도 ‘바이크 미술 전시회’로 벌써 지어놨다.
“바이크는 나의 심장이고, 삶의 원동력이에요. 바이크가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셈이지요. 체력이 닿는 때까지 바이크를 탈 생각이에요. 특히 나이를 먹으면서 좀 더 진지한 자세로 바이크를 생각하고 즐기고 있어요. 젊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있어 좋기도 하구요. 단순히 멋있어 보인다거나 스피드만 즐기기 위해 타는 이들도 많은데 저는 이제 (그런 것은) 초월했어요. 바이크는 제 인생을 바꿔준 대상이고, 삶의 가치를 높여 풍성하게 해준 최고의 친구예요. 이젠 누구보다 진지하게 바라보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바이크를 탈 수 있을 것 같아요.”
新중년들에게 공연은 쉼표여서 좋다. 때론 백마디의 말보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지 않는가. 찌는 무더위에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아니 즐거울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우리들에게 ‘허기’를 채울 문화감성 충전을 울려보자.
부모님을 위한 공연이 아니라 자식들이 부모님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며 진한 감동을 나누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극, 뮤지컬, 퍼포먼스를 구성해봤다.
★4D와 태권도의 한판 넌버벌 퍼포먼스 ‘탈’
넌버벌 퍼포먼스 ‘탈’ 공연 첨단 3D 맵핑 기술도입하여 4D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눈을 가리고 날카로운 칼에 달린 사과를 격파하는 태권도의 고난이도의 기술과 무대전체에 도입된 3D 맵핑 영상에서 이에 맞춰 배경 이미지와 격파 효과 등을 제공하고 영상과 배우의 동작을 결합시켜 ,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완벽한 조화로 하나의 4D 퍼포먼스를 만들어낸다.
이번 4D 공연을 준비한 KTA (대한태권도협회) 와 SR그룹 최소리 총감독은 “4D 공연은 마치 영화의 액션 장면을 직접 눈앞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며, 관객들에게 지금 까지 볼 수 없었던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토대로 새로운 넌버벌 시장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전통무예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된 이유는 무예에서 운동종목으로 발전시킨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운동종목인 태권도의 기본 틀을 깨고 줄거리와 캐릭터 등의 극적인요소를 더하여 하나의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대한태권도협회 소속 태권도 국가대표시범단 40여 단원들의 무술합이 200단이 넘는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태권도 4단은 흔히 볼 수 없는 높은 단수이지만 국가대표시범단에는 이러한 4단 이상의 고단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5~8단 이상의 고단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스토리의 주된 내용인 선과악의 대결을 파워풀한 태권도의 격투와 격파시범으로 표현하였고, 여기에 감동적인 스토리 , 애절한 사랑 그리고 리드미컬한 비보잉과 파워풀한 타악연주로 보는 이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피켜의 전설이 된 김연아 선수의 더블악셀과 같은 회전수를 가진 900도 돌려차기 기술은, 공중에서 두바퀴반을 회전한 후 정확한 발차기로 송판을 격파해낸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외에도 눈을 가리고 칼 끝에 달린 사과를 정확히 격파하는 기술, 5미터 높이의 장애물 격파 고속 10회전 격파 등 한계를 넘어선 최고의 격파 기술을 자랑한다.
대한태권도협회는 넌버벌 퍼포먼스 ‘탈’을 통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태권도를 대중적인 생활체육으로 확고히 정착시키고, 이를 넘어 문화사업으로 까지 발전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을 밝혔다.
공연명 : 넌버벌퍼포먼스
공연장 : 올림픽공원 K-아트홀
공연기간 : 2014.06.28.~2014.08.31.
공연시간 : 평일 오후7시 / 토요일 오후3시,7시 / 일요일 오후3시 / 월공연없음
*6/28 오픈공연 오후7시 / 7/4 공연없음 / 7/5, 8/15 특별휴관일 공연없음
티켓가격 : VIP 50,000원 / 일반석 30,00원
주최,주관: (사)대한태권도협회 ㈜ SR그룹
★14억명을 열광시킨 뮤지컬 ‘비밥’
88일간 중국 28개 도시에서 한국 공연의 저력을 보여준 뮤지컬 비밥이 텐진 공연을 마지막으로 7월 6일 입국했다. 비밥은 해외로 간 한국 공연 중 최장기간, 최다도시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에 걸맞게 비밥에 대한 중국 현지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들은 비밥팀의 숙소까지 찾아와 선물을 건네고 심지어 같은 호텔에 숙박을 하기도 하였다. 한 관계자는 이렇게 비밥이 성공리에 이번 투어를 끝낸 것은 한국 공연 업계에서도 놀랄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비밥은 드라마, K-pop의 한류를 넘어선 공연 한류의 선두주자로 우뚝 섰다.
또한 이번 공연의 열기는 현장을 찾은 매스컴의 반응과 현지 공연 관계자의 공연 초청으로 이어졌다. 비밥은 중국 최대 시청률을 자랑하는 CCTV의 성광대도의 오프닝을 장식하였고 스촨성, 복건성, 광저우 등의 공연 요청을 받아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번 비밥 중국투어는 한국 공연 콘텐츠 시장을 넘어 세계시장을 무대로 한 새로운 공연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비밥측은 이번 투어를 계기로 G2로 우뚝 성장한 중국 관광객들의 종로 비밥 전용관 유입이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공연명 맛있는 뮤지컬
공연장 시네코아 비밥 전용관 / 인천 비밥 전용관(인천중구문화회관)
공연일시 서울 2012.03.20 ~ OPEN RUN (연중무휴)
총감독 최철기
연출 전준범
코미디연출 백원길
티켓가격 서울 VIP 6만원 / R석 5만원 / S석 4만원
러닝타임 75분
관람등급 36개월 이상
주최&제작 CJ E&M, ㈜페르소나
★모노드라마의 새 역사를 쓴 명품 연극 ‘염쟁이 유씨’
‘염쟁이 유씨’는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고자 하는 연극이다. 그러나 죽음을 무겁고 지루하게 다루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깨져버린다. 소박하고 진솔한 염쟁이의 삶을 유쾌하게 표현한 염쟁이 유씨는 2010-11시즌부터 새로운 연극역사를 쓰고 있는 1대 염쟁이 ‘유순웅’과 함께 깊이 있는 작품 분석·선 굵은 연기 2대 염쟁이 ‘임형택’, 그리고 2012~13시즌부터 3대 염쟁이 ‘신현종’ 3명의 배우가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올라 1인 15역을 도맡아 하는 연극이다.
등장인물로는 염쟁이 유씨, 조직폭력단의 우두머리와 그의 부하들, 장례 전문 업체의 대표이사인 장사치, 유씨의 아버지와 아들, 기자, 어떤 부자와 그의 큰 아들, 작은 아들, 며느리, 막내딸, 기자 등으로 다양하다. 배우는 혼자서 이 모든 역을 신들린 듯 표현해낸다.
공연은 쉼 없이 계속 되며, 객석의 지휘자로 공연시간 90분을 관통하는 가슴 저린 감동과 놀라운 재미를 선사하는 세 배우의 불꽃 튀는 연기의 향연을 비교 체험 할 수 있는 색다른 기회가 될 것이다.
‘염쟁이 유씨’는 관객들이 함께 만드는 작품이다.
관객은 구경꾼으로서만이 아니라, 문상객으로 혹은 망자의 친지로 자연스럽게 극에 동참한다. 낯선 이웃의 죽음 앞에서도 고인의 명복을 빌던 우리네 삶의 미덕처럼, 망자를 위해 곡을 하고, 상주를 위해 상가집을 떠들썩하게 하던 모습이 연극 속에 자연스럽게 우러난다.
전통의 장례문화를 소재로 죽음을 통해서 삶을 바라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에 대한 물음과 답을 통해 삶의 진정성과 소중함을 감동적으로 풀어낸다.
공연명
공연장 대학로 이랑씨어터
공연일시 서울 2014.04.09 ~ OPEN RUN (연중무휴)
총감독 김인경
연출 위성신
출연 유순웅 임형택 신현종
티켓가격 3만원
러닝타임 90분
관람등급 만 8세 이상
주최&제작 한강아트컴퍼니
★자살이라는 극단적 코믹 연극 ‘죽여주는 이야기’ 웃겨 죽는다
‘죽여주는 이야기’는 대학로에서 공연하고 있는 여타의 공연과는 다르게 ‘자살’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풀어낸 블랙코미디 소재의 연극이다.
‘죽여주는 이야기’는 시종일관 ‘자살’을 가볍게 이야기하고, 관객들을 참여시키며 한바탕 재미있는 소동극을 벌이게 된다.
인터넷 카페가 활성화되었던 2000년 초반에, 뉴스에서는 충격적인 보도내용이 방송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살사이트의 존재였다. 온라인 세상에서 자살정보를 공유하고, 같이 실행에 옮길 회원들을 모집하는 어둠의 세력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생각과 배경에서부터 ‘죽여주는 이야기’의 서사는 시작이 된다. 타인의 비극과, 세상을 버리려고 하는 절박함을 돈을 받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사신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주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방치되고 방관이 되어 천사가 된다.
어쩌면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방관하고 애써 무시하면서, 개인의 출세와 이익에만 집중하는 현대인들의 세태를 ‘죽여주는 이야기’ 공연을 통해서 엿볼 수 있지는 않을까.
무겁고 암울한 소재로 한 놀이를 관람 하고 되돌아가는 관객들은 ‘자살’과 등장인물의 비극적인 개인사를 보고 박장대소 하고 나서, 집으로 되돌아간다.
관객들은 과연 어떠한 메시지를 가지고 돌아가게 될까?
어쩌면 나의 비극에도, 타인들이 비웃을 수 있는 비인간적이고 불안한 관계의 허망함을 들여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열린 공연의 방식처럼, 가져가실 수 있는 메시지도 열려있는 공연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웃음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앙금은 슬프고 우울한 것이 될 것이다.
‘죽여주는 이야기’는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연일 매진행진 중이며, 공연 기간도 코믹하게 ‘죽을 때까지’로 정해두어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창작 뮤지컬
창작 뮤지컬 가 재정비를 거쳐 리뉴얼 오픈했다.
뮤지컬 는 송창식의 대표곡인 ‘담배가게 아가씨’를 모티브 삼은 작품이다.
뮤지컬 ‘담배가게 아가씨’는 2000년대 초반 그룹 ‘문차일드’로 활약했던 허정민이 배우로 전업한 후 뮤지컬 무대까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한 작품으로, 2012년 초연 당시 소설가 이외수를 비롯한 많은 공연 관계자에게 관심을 받았다.
더불어 VIP시사회 당시에는 연말 시상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스타가 공연장을 찾아 화제를 낳기도 했던 창작 뮤지컬이다.
스토리는 아버지와 함께 이사를 온 유나 부녀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아현동 달동네에서 작은 담배가판대를 운영한다. 사건사고 없이 조용하던 동네는 유나의 미모 때문에 시끌해지고 평생 연애 한번 못한 현우는 유나의 외모에 반하게 된다. 현우뿐만 아니라 동네 모든 남자 사랑을 독차지하는 유나. 너도 나도 달려들어 유나에게 고백하지만 차이기 일쑤다.
앞서 ‘담배가게 아가씨`는 서울, 대구, 울산, 대전, 부산, 안산 등 전국 각지에서 공연을 진행했다.
공연명 창작 뮤지컬
공연장 대학로 소리아트홀 3관
공연일시 OPEN RUN (연중무휴)
총감독 김재목
연출 김지환
음악감독 지현수
주최&제작 JJ글로벌, 극단 담씨
도시 자체로 피서지인 동네가 있다. 평균해발고도 800m. 하늘 아래 동네 태백이다.
한 여름 평균온도도 19도를 넘지 않아 시원함이 옷깃에 스민다. 석탄도시 태백의 모습은 지워진지 오래. 이제 태백으로의 여름 여행은 한 폭의 풍경 스케치라 할 만하다.
백두대간의 허리. 대한민국의 마지막 청정지대. 올 여름 숨 가쁜 삶 속에 진이 빠진 당신께 자연이 주는 놀라운 치유 에너지를 스스로 선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시니어의, 시니어에 의한, 시니어를 위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25000원 당일치기 태백 풍경 여행 코스를 추천한다. 아침에 서울 시청과 잠실에서 출발해 태백의 상장동 벽화마을, 매봉산 풍력발전단지를 둘러보고 검룡소에서 트래킹하는 코스다.
서울을 떠나 가장 먼저 들르는 곳. 태백 상장도 벽화마을. 이곳은 옛 탄광도시 태백을 모티브로 했다. 탄광촌 주민들의 애환과 추억, 에피소드를 벽화로 그려 지금은 태백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점심은 황지동 태백한우 직판장에서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청정고원지대에서 키워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태백 한우. 한우육회, 한우구이, 곰취냉면 등 그 메뉴도 다양하다. 주변식당을 자유롭게 선택해 입과 배를 즐겁게 하면 된다.
한우로 두둑해진 배를 만지며 식후경을 하는 곳은 매봉산 풍력발전단지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위치한 매봉산(1303m). 해발고도가 높아 ‘배추고도’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능선에 드넓게 펼쳐진 배추밭 사이로 7개의 풍력발전기(대형 바람개비), 바람의 언덕, 빨간 풍차가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매봉산 고랭지 배추밭은 전국 4개 고랭지 배추밭중 하나로 초록의 향연과 하얀 바람개비가 어울려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 놓은 듯하다.
마지막은 검룡소 오솔길을 걸으며 자연치유로 마무리다. 검룡소 주차장에서 검룡소까지 약 1.3km의 이어진 흙길과 나무터널 숲길, 그리고 그 속에 드리워진 갖가지 야생화가 뼛속까지 상쾌함을 전해준다. 2010년 국가 지정문화재 ‘명승 제73호’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문의: 투어2000. 02-2021-2070
평화열차 DMZ train이 4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DMZ train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을 운행하는 유일한 열차로 서울역~도라산역을 하루 2회 왕복한다. 첫 열차가 8시 30분, 두 번째 열차가 13시 40분에 각각 서울역을 출발한다. 매주 월요일과 주중 공휴일은 쉰다.
종착지 도라산역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민통선 안에 있다. 이 역에는 2002년 조지 W.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도라산역을 방문해 친필 서명한 철도 침목들이 전시돼 있다.
기차는 총 3량이다. 평화실ㆍ사랑실ㆍ화합실로 구분 돼 있다. 각 실의 사진 갤러리에서는 철도ㆍ전쟁ㆍ생태 등의 테마별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창이 넓은 전망석에서는 경치를 편하게 감상할 수 있고, 영상 모니터를 통해 열차의 앞뒤 풍경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카페 칸에서는 군용건빵, 전투식량, 주먹밥, 끊어진 철조망 등 이채로운 DMZ 상품들도 판매한다.
DMZ train의 추천 코스는 두 가지다. 안보관광코스와 일반관광 코스다. 전자는 임진강역 매표소에서 안보관광 이용권을 구입해, 도라산 역에서 연계버스로 제3땅굴, 도라전망대를 돌아본다. 후자는 도라산역에서 300미터 떨어진 도라산평화공원을 거니는 코스다.
승차권은 전국 철도역, 코레일 홈페이지, 모바일앱 코레일톡에서 구입할 수 있다. 임진강역~도라산역 구간은 반드시 왕복 구입해야 한다.
‘DMZ플러스’도 판매한다. 1일 DMZ train 자유이용권이다. 이것으로는 △서울시티투어 △한화63빌딩 △CJ서울타워 △쉐라톤서울디큐브시티호텔 △그랜드앰버서드호텔을 할인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최연혜 코레일 사장은 “DMZ 평화열차가 평화와 화합과 사랑을 싣고 평양을 지나 유라시아 대륙철도를 달리는 초석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천 역전한마음시장과 약초시장이 중소기업청과 코레일이 추진하는 '2014 팔도장터 관광열차 방문시장'으로 선정됐다.
'팔도장터 관광열차 방문시장'이란 전통시장 쇼핑과 명승지 관광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코레일 여행상품으로, 침체되어 있는 전통시장을 살리고 국내관광 활성화를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2014 팔도장터 관광열차 방문시장'으로 선정된 제천한마음시장과 약초시장은 다양한 이벤트와 체험활동을 마련할 계획이다.
제천 역전한마음시장은 하트벽화 찾기, 해피갤러리관람, 해피공작소, 한방 발관리체험, 추억의 놀이, 지역문화예술단의 다양한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약초시장은 약초 해설사에게 직접 듣는 약초전시장 관람과 약주·약차 만들기, 약초다식 만들기, 약초체험, 체질에 맞는 나만의 보약 짓기 등의 행사를 마련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코레일은 팔도장터 관광열차만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기존 무궁화 열차 외부를 화회탈, 각시탈, 엿장수 그림 등으로 새롭게 디자인 하고 객차 1량은 이벤트 칸으로 무료 공연이나 레크리에이션 등 다채로운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
방문 시장은 전국의 문화관광형시장 중 권역별 대표시장 11곳이며, 4월부터 11월까지 50회에 걸쳐 운행된다.
시장 관계자는 "제천 역전한마음시장과 약초시장을 찾는 팔도장터 관광투어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기사제휴: 대전일보 이상진 기자]
봄맞이 남도 여행을 떠난다면 열차 여행은 어떨까. 장시간 운전의 피곤함 없이 열차에 몸을 맡기는 것도 남도의 봄의 즐기는 색다른 방법일 것이다.
코레일은 이번 달부터 특별관광열차와 남도해양열차 등 봄맞이 기차 여행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3일 밝혔다.
# 열차여행 패키지
남쪽으로 봄꽃을 맞으러 가는 가장 편한 방법은 남도의 축제에 맞춰 운행하는 기차여행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이다.
코레일은 3월에만 지리산 산수유, 광양 매화마을 등으로 15편의 특별관광열차를 운행하고, 정기열차를 이용한 관광프로그램도 전국 주요역 여행센터와 기차여행 전문여행사에서 마련하고 있다.
서울, 용산, 의정부 등 수도권뿐만 아니라 부산 부전, 경북 김천 등 전국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다. 또 현지 이동 수단도 연계돼 이동이 편리하다.
코레일은 광양매화축제에 28, 30일 2차례 팔도장터관광열차를 운행한다. 서울에서 출발해 광양매화축제, 광한루, 남원공설시장 등을 돌아오는 일정이다. 요금은 프로그램 구성에 따라 1인당 5~7만원 선.
문의는 코레일 홈페이지(http://www.korail.com)이나 코레일 관광 개발(1544-7755)에 하면 된다.
# 남도해양열차(S-train)
정해진 일정의 단체 여행이 싫다면 남도해양열차(S-train)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남도해양열차는 남원, 구례, 순천, 보성, 진주, 하동, 광양 등 남도의 주요 관광지를 매일 운행하기 때문에 봄꽃여행을 떠나기에 안성맞춤이다.
순천시는 3월부터 남도해양열차와 용산발 KTX 도착시간에 맞춰 ‘순처난 에코힐링투어’ 버스를 매일 운행한다. KTX나 남도해양열차를 타고 순천역에 내리면 선암사~낙안읍성~순천만 등 순천의 주요 관광지를 돌아보고 다시 열차 시간에 맞춰 역까지 데려다 준다.
남도해양열차를 이용해 남원, 오동도, 벌교, 보성, 순천만 등 남도의 주요 관광지를 연계한 프로그램은 서울역, 용산역, 대전역 등 수도권 주요역 여행 상담센터에서 안내하고 있다.
문의는 서울역(02-3149-3333), 용산역(02-792-7789), 대전역(042-253-7960), 순천역(061-745-7785), 부산역(051-440-2513)으로 하면 된다.
# 열차 + 카 셰어링
열차로 현지까지 이동해서 역에서 카셰어링을 하는 방법도 있다. 이는 진주, 하동, 순천, 여수, 보성, 나주, 전주 등 남도해양열차의 주요 정차역에서 저렴하게 차를 빌릴 수 있어 가족단위 여행에 안성맞춤이다.
코레일 네트웍스가 운영하는 유카(http://www.youcar.co.kr) 회원에 가입한 뒤 이용하면 저렴하다. 경차 기준으로 평일 1시간 빌리는데 4090원(유류대 별도)이다. 유카 이용 문의는 코레일 네트웍스(1644-0520)에 하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