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공포, 애니메이션 등 몇 장르 영화는 극도의 피로감으로 보는 게 두려울 지경이다. 반면에 시대극, 서부극, 뮤지컬, 전기 영화는 시사회 초대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관심 갖고 본 다큐멘터리 알렉산드라 딘의 ‘밤쉘(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 2017)’과 스티븐 노무라 쉬블의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RYUICHI SAKAMOTO: CODA, 2017)’는 추억을 떠올리며 공부하는 자세로 보았다.
‘밤쉘’은 ‘영화 속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오스트리아 출신 할리우드 여배우 헤디 라머(1914~2000)를 추모한다. 대표작 ‘삼손과 데릴라’(1949) 국내 개봉 시엔 헤디 라마르로 소개되었다. 연말연시 TV 재방송 단골 영화였던 ‘삼손과 데릴라’를 되풀이해 보며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데릴라라면 삼손이 넘어가는 것도 당연하지!”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국내에서 헤디 라머의 사망 뉴스는 결혼을 여러 번 한 섹시한 여배우 정도로 간략했는데, ‘밤쉘’은 이런 평가가 얼마나 지엽적이며 왜곡된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여배우가 젊은 시절 ‘주파수 도약’을 발명하여 와이파이, 블루투스 원리를 제공했단다. 구글이 2015년 헤디 라머 탄생 101주년을 맞아 발표한 헌정 영상 ‘NO HEDY LAMARR, NO GOOGLE!’이 얼마나 늦은 인정인가 싶다. “어떤 젊은 여성도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는 헤디 라머의 명언은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에 가려 지성을 무시당한 그녀의 심정을 읽기에 충분하다.
헤디 라머의 전성기를 접해보지 못한 젊은 기자들이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요즘엔 왜 저런 여배우가 없을까? 정말 대단한 여성이었네!”라고 감탄하는 걸 들었다. 그렇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후광에 눈이 부신 선남선녀 배우가 수두룩했다.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 용모로도 주연 배우가 되는 요즘 영화밖에 모르는 젊은 영화 팬이 불쌍할 지경이다. 그 점에서 현재의 시니어 세대는 추억마저 격이 있는 세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밤쉘’을 보고 해디 라머의 사진을 검색해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화를 사랑하는 이라 자신할 수 없다.
‘밤쉘’을 평가해야 할 또 한 가지 이유로 수잔 서랜든 제작을 꼽아야 할 것이다. 정치 사회 발언에 앞장서느라 자신의 이력을 침해당할 정도인 똑똑한 여배우의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거트루드 벨, 베르트 모리조, 카미유 클로델 등이 영화로 조명되면서, 우리는 재능과 용기가 남달랐던 선대 여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여성이 발굴되어, 영화로나마 그들의 영혼과 행적을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70년대, 육상 투척 종목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깜짝 스타가 등장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투포환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쓴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68)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쩌다 그에게 마녀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현재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있는 그를 만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 몰래 시작한 투포환
남들보다 큰 키와 순발력,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운동신경과 체격을 갖춘 백옥자는 중학생 때부터 농구와 배구를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구기 종목도 꾸준히 했으면 좋은 성적을 거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농구와 배구에서 손을 떼고 투포환을 시작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투포환이 뭔지도 몰랐어요. 어린 마음에 올림픽에는 나가고 싶은데 팀 운동보단 개인 운동을 해서 나가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도전한 거죠. 때마침 인천 지역 신인발굴대회가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이 투포환을 해보라며 권유하더라고요.”
그렇게 중학생 소녀의 손에 4kg의 둥근 쇳덩이가 쥐어졌다.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필 해도 괴팍해 보이는 종목이라니… 집에서도 ‘이상한 운동’ 하지 말라며 반대했다.
“처음엔 도시락도 안 싸줬어요. 그래서 용돈으로 자장면, 우동을 사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죠. 또 훈련하느라 늦는 날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전력 질주했어요. 1분이라도 일찍 들어가서 운동 안 했다고 거짓말하려고요.”
몰래 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중학교 3학년, 신인발굴대회에서 신인선수로 발탁됐다. 한국신기록이었다. 언론은 그를 육상 유망주로 소개하며 보도하기 바빴다. 다행히도 이 사건은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놓는 계기가 됐다. 부모의 인정을 받은 그는 곧바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출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별다른 성과 없이 귀국했지만, 육상연맹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선수촌행이었다.
“집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태릉선수촌이 곧 제 집이었죠. 그 당시만 해도 교통이 안 좋아서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경기가 잡히면 전화로 ‘엄마 나 지금 중국 가’, ‘지금 싱가포르 가’ 하면서 당일 통보했죠.”
아시안게임 2연패, 전성기를 맞이하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백옥자의 전성기였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땐 14m 57cm를 던져 금메달을 땄다. 이뿐만 아니라 재미 삼아 출전했던 투원반 종목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인천역 광장에서 인천시장의 영접을 받았어요. 검은 지프를 타고 시청(현 중구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죠.” 매번 경신되는 기록과 메달 행진에 세계도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 땐 ‘연애 중이라 성적이 안 좋다’, ‘백옥자의 시대는 지났다’ 등 그에게 쏠린 기대만큼 억측성 보도도 함께 쏟아졌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백옥자는 그동안의 설움을 떨쳐내듯 또 한 번 신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당시 그는 신우염을 앓고 있었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이 출전을 알리면서 체격이 좋은 선수들을 대거 내보냈다. 자연스럽게 언론도 백옥자의 2연패냐, 처음 출전한 중국의 메달이냐를 놓고 저울질을 했다.
“다들 180cm가 넘었어요. 거기에 체격까지 엄청나니까 거인 같았죠. 안 그래도 긴장해 있는데 더 무서운 소문까지 돌았어요. 북한도 그 당시 처음 출전했는데 잘하는 남한 선수들을 납치해가니 조심하라고요.(웃음)”
‘삐빅’ 하는 호각소리에 백옥자가 있는 힘껏 포환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지점은 16m 28cm.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특별하지만, 자신의 별명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한 대회이기 때문에 더욱 각별하다고 그는 말한다.
“싱가포르 기자가 처음 쓰기 시작한 단어예요. 경기 끝나고 저한테 오더니 ‘마녀’라고 써도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마녀는 좀 그렇지 않나… 했더니 자기 나라에선 마녀가 무서운 이미지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멋있는 존재라고 괜찮다는 거예요.(웃음) 에라 모르겠다, 그래라 한 거죠. 그렇게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했어요.”
그에게 ‘아시아의 마녀’라는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봤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차라리 여신이니 미녀니 하는 것보단 마녀가 나은 것 같아요.(웃음) 그 기자 덕분에 지금까지 불리는 멋있는 호칭이 생겼으니 오히려 고맙죠.”
2연패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만찬회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결혼은 한국 남자와 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지 말고 꼭 한국에 살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잘나가던 스포츠 스타는 거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추세였기 때문에 한국 투척 종목의 일인자이던 백옥자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꿈의 광장이자 지옥이었던 선수촌
아시안게임 2연패는 그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태릉선수촌에서도 그는 이미 유명한 연습벌레였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쌓인 날에도 쉬지 않았다. 그가 연습했던 자리엔 포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백옥자 자리’라고 불렀다 한다.
“겨울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투포환이라는 게 포환을 턱 아래에 대고 던져야 하거든요. 꽁꽁 언 모래들이 포환에 묻어서 던질 때마다 턱을 쓸고 갔죠. 그럼 턱이 다 찢어져서 피가 나고 그랬어요.”
인터뷰 도중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엄청 크기도 했지만, 오른손과 왼손이 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손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전 누가 손 보여 달라 그러면 왼쪽 손을 보여줘요. 오른손은 못생겼으니깐.(웃음)”
그의 오른손엔 당시 노력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검지, 중지, 약지는 4kg 포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옆으로 휘어져 있었다. 말 못할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체벌을 받아 엉덩이엔 피멍이 들었고 뺨도 맞아가며 연습했다.
“지금은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누구한테 말해야겠다’, ‘신고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냥 더 좋은 성적을 거두라고 그러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죠.”
힘들 땐 몰래 선수촌을 탈출하기도 했다. 들어오는 길엔 후배를 위해 쭈쭈바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외출하려면 도장으로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근데 못 받았을 땐 경비 아저씨한테 살짝 윙크 한번 날리는 거죠. 그럼 아저씨가 이해해주시고 슬쩍 내보내주셨어요.(웃음) 지금은 선수촌 안에서도 아이스크림이니 우유니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럴 수 없었거든요. 우유 하나 더 먹으려면 아주머니께 인사를 100번은 해야 얻을 수 있었어요.”
선수촌의 규율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점심시간이 달랐고 휴게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볼 때도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같이 있는 장면이 목격되는 날에는 풍기문란이라는 명목하에 퇴촌이라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감시가 빡빡한 일상생활에서도 그의 유일한 해방구가 있었으니, 바로 국제대회를 나가는 날이었다.
“국제대회를 나가면 경기장 주변에 항상 클럽이 있었어요. 경기가 끝나면 할 것도 없고 혼자 심심하니까 클럽에 가서 노래도 듣고 했죠. 같이 대회 나간 선배들이 ‘백옥자 어디 있냐’ 하면서 찾으면 후배들이 ‘시끄러운 곳 가면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곤 했대요.”
인생 3막은 지금부터
20대 중반 건국대학교 체육과 동기인 김진도 씨와 결혼한 그는 은퇴 이후 남편을 따라 교직생활을 했다. 더불어 여자 농구선수인 딸 김계령 씨를 돌보느라 여러모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근데 이제는 더 바빠졌단다. 얼마 전 부천대학교에서 은퇴한 그는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선출돼 새로운 출발을 했다.
“옛날 아시안게임 때 만났던 선수들도 이제는 임원이 돼서 한국을 방문하는데 감회가 색다르더라고요. 저도 더 늙기 전에 연맹에 보탬이 되는 부분은 돕고 그래야지요. 또 새로운 육상 인재를 발굴하는 게 목표예요. 우리나라 육상도 어서 부흥기를 맞이했으면 좋겠어요.”
봄비에 적신 웃음이 꽃잎처럼 퍼지는 것 같았다.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지난 5월 12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정동에 소재한 이화여자고등학교 유관순기념관이 그러했다. 그 안에는 기쁨, 반가움, 감격과 같은 밝은 감정들이 발랄하게 소용돌이쳤다.
1988년에 이화여고를 졸업한 88졸업생들은 준비된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마치 어제도 본 듯한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마다 30년 전 여고생으로 돌아갔다. 어언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추억을 더듬으며 각자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은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등장할 때마다 설레는 마음이 담긴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으로 반겼다.
웃음과 추억과 설렘이 어우러졌던 시간
이날 열린 이화여고 졸업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에는 88년 졸업 동창과 은사 등 200여 명이 참여해 총동창회와 모교의 발전에 기여하는 화합의 장을 만들었다. 또 이화라는 이름 안에서 특별한 시절을 누렸던 88한 배꽃들이 당시 담임과 학과목을 담당했던 스승 40여 명을 초대해 이벤트를 열고 선물과 함께 식사를 대접했다.
1986년 국제적 대행사였던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1987년에는 민주항쟁이라는 격렬한 변혁의 과정을 겪고 대한민국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88년 졸업생들. 그들은 폭발적인 경제성장 속에서 소비문화의 정점이 된 199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사방에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들려오던 IMF 금융위기 속에서 30대를 맞이해야 했다. 그야말로 격동의 세대였다. 그렇게 쌓인 세월 속 할 얘기들이 어찌 한두 보따리만 될까.
“지나온 30년, 새로운 30년 가즈아!”
88졸업생 대표 고혜정 씨의 힘찬 목소리는 지난 세월 동안 짊어지고 왔던 어둠들을 날려 보내는 주문과도 같았다. 김혜정 현 이화여고 교장의 환영사로 시작된 1부 행사는 이자형 이화여고 총동창회장의 축하, 이화교회 이종용 목사의 축도로 이어졌다. 88졸업생 고혜정 대표가 장학기금과 동창기금, 학교발전기금을 각각 전달했다.
“창립 132주년을 맞은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졸업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온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올해 30주년 재상봉 행사에서 88년도에 졸업한 학생들이 첫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추억과 옛 감정을 잘 나눌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정성껏 준비하고 모두 기쁜 마음으로 함께해서 너무 보기 좋습니다.”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에서 졸업생으로 참여한 이자형 총동창회장(1966년 졸업)의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1부 행사가 은사들이 제자들에게 보내는 덕담이었다면 2부는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50세 제자들이 스승에게 바치는 재롱잔치(?)였다. 올해 여든다섯 살을 맞이한 최종옥 전 교장의 격려로 시작된 2부에서는 88졸업생이 준비한 축하 영상, 플라멩코 댄스, 찬양 댄스, 오보에 연주, 동문 합창 등 다채로운 축하 공연으로 영원한 스승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6개월 전부터 이 행사를 자체적으로 기획한 88졸업생들은 현수막부터 초대장, 은사님 선물꾸러미, 테이블 꽃꽂이, 꽃 코사지, 배너, 영상, PPT, 포토월, 크고 작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가진 모든 재능들을 한데 모아 행사를 성황리에 끝마쳤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
이날 행사는 함께한 모두가 교정 곳곳에 묻어둔 아름다운 학창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동시에 은사들과의 재상봉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학생으로 돌아간 88졸업생들은 이화라는 큰 그늘 속에서 살아온 30년을 지나 이제 어느덧 허리는 구부정해지고 흰머리를 날리게 된 은사들을 보면서 추억과 감사함에 뭉클함을 느꼈다.
사회를 본 88졸업생 정성진 씨는 “건강하시고 정정하신 은사님들의 모습에 얼핏 보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구분이 잘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저도 선생님처럼 가슴에 열정을 품고 남은 인생 활기 있게 살아가겠습니다” 하고 다짐했다.
88졸업생 한귀영 씨는 “나이 든 선생님들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과 연대감이 함께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젠 선생님들과 맥주 한잔 하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고 친구처럼 수다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의 담임을 맡을 때 20대였던 선생님들도 여럿이었죠. 돌이켜보면, 20대에 우리들을 만나 선생님들도 많이 긴장되고 두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습니다.”
운영진으로 활동한 88졸업생은 “제 인생이 이화 덕분에 참 많이 빛났던 것 같아요. 너무 많이 웃고 떠들며 힐링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이런 기회를 준 동창회와 모교 동문에게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88졸업생 역시 “그동안 앞에서, 뒤에서 애써준 친구들 덕분에 너무 좋은 추억을 만들게 됐다”며 “88졸업생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라고 말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30년의 세월을 보내고 맞이하는 새로운 인생
감동한 것은 88졸업생 동문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교편을 잡고 있는 스승 한소연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준비한 행사에 감사했어요. 이화의 정신은 여러분들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과분한 대접에 미안하고 앞으로 남은 시간 가르치는 일에 좀 더 마음을 쏟겠다고 다짐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88한 배꽃들의 오늘 만남이 삶에 큰 활력이 되기를 바라며 50세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영원한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토닥거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른 은사들도 홈커밍데이를 잘 치른 88졸업생에게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탄탄한 결속력을 보였다’며 한마디씩 치하했다.
지난해부터 88졸업생 대표로 뛰어다녔던 고혜정 씨는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해준 친구들에게 고맙습니다. 모교 사랑과 은사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는 행사였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화라는 이름보다 더 큰 버팀목이 있을까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30주년 재상봉을 시작으로 40주년, 50주년, 60주년까지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30년의 세월이란, 한 세대를 매듭짓고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도록 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김성수 선생님은 사은회를 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스승으로서의 대견함과 소회, 그리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삶의 동지로서의 감격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사느라 얼마나 많은 열정과 아픔과 정진의 인고가 있었겠는가? 자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한 세대를 사느라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는가? 은사로서, 자랑스럽고 대견해서 가슴 벅찬 박수를 보내네.”
충북 영동 심천면. 물이 깊다[深川] 하여 이름 붙은 이곳에 뿌리 깊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령 150년이 넘는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위 나란히 자리 잡은 두 개의 새 둥지.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은은히 퍼지는 술 익는 내음. 이 고즈넉한 풍경과 꼭 닮은 ‘시나브로 와이너리’ 소믈리에 가족을 만나봤다.
“아가, 와인 한 모금 마셔볼래?”
이른 아침, 시아버지 이근용(60) 씨가 며느리 박영광(28) 씨에게 와인을 건넨다. 그러곤 와인의 향과 풍미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가 이어진다. 숭늉이라면 또 모를까. 아침부터 와인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구부간(舅婦間) 모습에 시어머니 이성옥(58) 씨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평범하지 않은 시부모와 며느리의 일상은 이들 모두가 소믈리에이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여기에 한 명 더, 아들 이병욱(33) 씨 역시 소믈리에다. 국내에서는 첫 번째로 가족 모두가 소믈리에 자격을 갖고 있다는 이들의 와인사랑은 2007년, 이근용 씨가 귀농을 결심하면서부터 숙성되기 시작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남편이 귀농을 하겠다며 덜컥 회사를 그만뒀어요. 어느 날 영동에 땅을 사더니 이름도 ‘불휘농장’이라 지었더라고요. 불휘가 ‘뿌리’의 고어인데, 자기 이름에 ‘근(根)’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지었다나.(웃음) 그렇게 한동안은 대전 집과 영동을 오가면서 농사를 하다가 2009년에 지금 집터에 정착했어요. 그때 뒷마당에 있는 느티나무가 참 마음에 들었죠. 이웃 어르신 권유로 포도를 재배했는데, 수확물은 품질이 괜찮았어요. 근데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벌이가 시원치 않았죠. 그러던 차에 영동군에서 와인산업 특구 조성을 한다는 거예요. ‘이거다’ 싶었는지 이번엔 남편이 와인 양조에 도전장을 내밀었죠.”
결과부터 말하자면, 남편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대부분 와이너리가 레드 와인에 심혈을 기울였던 반면, 청포도로 화이트와인을 선보인 것이 차별화가 됐던 것. 천천히 음미하고, 서서히 와인에 빠져든다는 의미로 ‘시나브로’라는 브랜드네임을 달았다. 또 보금자리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의 모습을 본따 와인 레이블도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불휘농장표 시나브로 와인은 각종 와인 품평회에서 대상, 금상의 영예를 안으며 토종 와인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시나브로 새댁, 토종 와인 전도사 되다
한창 와인 사업에 물이 오를 무렵, 아들 병욱 씨는 당시 여자 친구였던 영광 씨를 와이너리에 초대했다. 와인과 함께한 저녁식사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근용 씨 내외와 영광 씨는 그 이듬해 가족이 됐다. ‘시나브로’라는 와인 콘셉트와는 다르게(?) 그야말로 속전속결 이뤄진 셈. 결혼과 더불어 아들 내외는 부모님의 와이너리를 함께 운영하겠다는 결심도 들려줬다. 와인과는 동떨어진 일을 해왔던 두 사람, 특히 서울 토박이였던 영광 씨가 귀농을 결심한 까닭이 궁금했다.
“서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당시에 한창 사업이 바빴는데 시부모님 두 분이 감당하시기에 버거우실 것 같더라고요. 가업도 돕고 전원생활의 여유를 경험해보고 싶어 귀농을 결심하게 됐죠.”
가업에 뛰어들며 영광 씨와 남편 병욱 씨는 소믈리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2015년 아버지 근용 씨, 2016년 어머니 성옥 씨에 이어 2017년 아들 내외까지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 이로써 소믈리에 패밀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온 가족이 영동 유원대학교 와인발효·식음료서비스학과에 입학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가업과 학업을 위해 서울과 영동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탓에 신혼인데도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다는 아들 부부. 인터뷰를 당일에도 가능한 한 네 사람이 모이길 바랐으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아쉽게도 아들 병욱 씨가 함께하지 못했다. 가업이니 늘 가족이 붙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느라 이 또한 쉽지 않은 상황. 포도 농사부터 와인 판매까지 일련의 과정을 단 네 사람이 해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각자의 역할 분담은 어떻게 나뉘어 있을까?
“아버님은 포도 재배와 양조, 어머님은 체험 프로그램 운영과 판매, 저와 남편은 와이너리 홍보와 마케팅을 맡고 있어요. 그런데 가족끼리 하는 사업이다 보니 선 긋듯 일하기보다는 모두 주인의식을 갖고 책임을 다하게 되더라고요. 전에 직장에 다닐 때와 가장 다른 점은, 일을 해도 일하는 것 같지 않다는 거예요.(웃음) 하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여서 그런 것 같아요.”
가족 모두가 임원, 회의는 식사시간에
가족이 사업을 함께하면 공과 사 구분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세 사람. 장점이 크지만 자칫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여기며 차츰차츰 균형을 잡아나갈 계획이라고. 서로 일적으로 대면할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게 바로 호칭 아닐까? 각자의 직함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남편이 대표, 아들은 실장, 며느리는 이사예요. 저는 작년까지 홍보 팀장이었는데 애들이 오고 나서 홍보이사로 승진했어요.(웃음) 기업으로 따지면 가족 모두가 임원인 셈이죠.”
일과 관련한 회의는 따로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주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편. 부모 자식 간 일상 대화에서도 마찰이 있기 마련인데, 사업을 함께하는 네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지사. 일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서운한 마음이 생긴다는 근용 씨다.
“나랑 아내는 그동안 해온 것이 있으니 뭔가 변화를 주더라도 천천히 했으면 하는데, 애들은 또 그게 아니더라고요. 자신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거를 과감하게 추진하려는 경향이 있죠. 그런 점에서 트러블이 생기곤 해요. 멀리서 보면 별일 아닌데도, 가족이니까 더 가감 없이 얘기하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서로 서운한 말을 할 때도 있고요. 다 잘해보려는 마음에서 생기는 갈등이죠. 그래도 역시 가족이다 보니 금세 마음 풀고 웃게 돼요.”
새로운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음은 필수. 가족 구성원이 60대, 50대, 30대, 20대인 덕분에 각자 세대의 대표주자가 되어 의견을 나누고 대중적인 와인 맛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특히 근용 씨가 영광 씨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며 와인 맛을 조절한 덕분에 이전보다 젊은 여성 고객의 주문도 늘어났다고. 일 때문에 와인을 달고 살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평소 와인을 즐기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유지된다는 이들이다.
글로리아 와인, 그 이후
인터뷰 당시, 시나브로 와인들 좀 자랑해주시라 했더니 근용 씨 내외는 너 나 할 거 없이 ‘글로리아’ 와인을 꺼내 들었다. 사랑스러운 핑크빛이 도는 레드 와인인데, 캠벨과 아로니아로 맛을 냈다. 그런데 시나브로 특유의 느티나무 레이블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와인 잔을 모티브로 한 브랜드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시어머니 성옥 씨는 와인 자랑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며느리 자랑으로 넘어갔다.
“가장 최근에 탄생시킨 와인이에요. 우리 며느리 이름(영광)을 따서 ‘글로리아’라고 지었어요. 이 로고 디자인은 며늘아기가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창가에 있는 보자기 상자들 보이죠? 다 며느리가 배워서 꾸며놓은 것들이에요. 참 예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창가마다 줄줄이 전통 보자기로 감싼 상자들이 진열돼 있었다. 토종 와인을 판매하는 와이너리인 만큼 제품 포장도 한국식으로 시도하는 중이란다. 아직 해외 와인에 비해 국내 와인이 저평가받는 것이 안타깝다며 적극 토종 와인 홍보에 나서겠다는 영광 씨. 열정적인 며느리의 모습에 반한 근용 씨 내외는 장차 시나브로 와이너리를 아들 부부에게 물려줄 계획이다. 막중한 임무라 부담이 될 법도 한데, 이 패기 넘치는 새댁은 글로리아 와인처럼 핑크빛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아직 개척 단계에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해요. 해야 할 일도, 변화시킬 것도 많죠. 뭔가를 시도해보고, 좋든 나쁘든 결과를 보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는 중입니다. 멀리 보고 하나하나 시나브로 정착해나가야죠. 아마 저와 남편이 시부모님 나이가 됐을 때쯤엔 시나브로 와인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요?(웃음)”
시나브로 브랜드 와인 중 가족 이름을 담은 와인은 ‘글로리아’가 처음이다. 앞으로 대대손손 가업을 이어가시며 후손들의 이름을 딴 와인을 만들면 어떨지 제안하자, 맞장구를 치며 웃음꽃이 피는 세 사람. ‘소원 나무’라 별칭을 붙인 정원의 느티나무처럼, 오랜 세월 사랑받는 장수기업으로 이름 남길 소망한다.
1960~70년대 신민요의 기수로 불리며 가요계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가수가 있다.
바로 김부자(金富子·70)다. 그 시절은 어느덧 이미 반세기 전의 얘기이지만, ‘달타령’을 비롯한 그녀의 대표곡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번에 만난 김부자는 과거에 묻힌 가수가 아니라 현재를 개척하는 가수로서의 모습이 더 어울리는 에너지가 있었다. 그녀가 털어놓는 롤러코스터와도 같았던 삶을 뒤돌아보며 젊은 날의 봄을 맞이하듯 김부자와의 즐거운 만남을 가졌다.
12가지 달의 모습을 묘사한 민요풍의 노래 ‘달타령’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드물 것이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듣게 되는 ‘달타령’은 1972년에 발표된 이래 수많은 가수들의 리메이크와 수많은 인용으로 반세기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 국민적 아우라의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바로 김부자. 1965년에 아마추어 여고생 가수로 가수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자신이 가요계에 들어와서 이렇게 오랫동안 활동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고했다.
궁핍했던 시대의 위로와 희망, 그 힘겨운 시대를 노래와 함께한 가수 김부자. 반세기를 돌아 지금은 비록 혼자이지만 음악으로 인해 결코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며 이제는 더욱 원숙해진 기량을 펼치며 관객들과 만나고 싶단다.
시간을 잊고 살 정도로 꿈같은 세월 보내다
“동아방송의 ‘가요백일장’에 입상하면서 가수생활을 시작했죠. 그리고 1968년에 ‘팔도 기생’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졌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공연을 했어요.”
올해는 김부자가 프로 가수로서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어느새 칠순. 그러나 누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칠순이라고 할까. 인터뷰 내내 유쾌하게 웃으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얘기를 풀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젊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꿈같은 세월이었어요. 시간을 잊고 살 정도로.”
‘달러 박스’ 김부자의 시대
트로트, 신민요 등등 전성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김부자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전통 가요의 세계를 추구했다. 또 한 명의 당대 슈퍼스타였던 김세레나와는 유명한 라이벌 구도를 이뤘다.
“요즘도 사람들이 제가 지나가는 걸 보면 김세레나로 헷갈려 해요.(웃음) 하나도 안 닮았는데! 김세레나와는 친하죠. 조민희, 김세레나, 김아정 등 돼지클럽 모임이 있어요. 돼지해이던 1971년에 클럽을 만들어서 ‘돼지클럽’이라 부르죠.”
그녀는 대략 200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오아시스레코드에 몸담고 있던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음반 취입을 했다. ‘김부자가 부르면 팔린다’, ‘달러 박스가 왔다’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일자상서’, ‘당신은 철새’, ‘카츄샤’ 등이 연속적으로 성공했고 ‘사랑은 이제 그만’은 발매 3개월 만에 판매량 10만 장을 돌파하기도 했다.
거듭된 성공, 그녀를 사로잡은 오만과 독선
김부자 하면 무조건 히트를 쳤다. 그리고 그런 시절이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녀에게선 이상신호들이 나오고 있었다.
“통금이 12시였고 극장식 캬바레가 성행하던 시절이었죠. ‘하루에 내가 얼마를 불렀지?’ 계산하면 50곡을 부르고 그랬어요. 목이 아프고 잠긴 상태에서 또 나가야 했고…. 이게 즐거운 생활만은 아니고, 뭔가에 매달린 느낌이었죠. 내 삶이 아니고 남을 위해 사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분명 스타가 됐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몸이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의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칭찬 세례들도 그녀의 마음을 둔하게, 그리고 왜곡되게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시작했다.
“후회되는 일이 많죠. 철모르게 내가 이 세상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주위에서 나를 너무 떠받들어주니까, ‘이 정도면 최고지’라는 자만심이 생겼죠. 그때를 뒤돌아보면 부끄러워요. 그때 남들이 나를 보며 뭐라 했을까….”
김부자는 자신의 오만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져버리는 인기와 대중의 관심에 매달려 살아가는 연예인에게 그런 오만은 어떤 종류의 성장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김부자는 그러한 성장통을 겪고도 좌초하지 않고 여전히 현역으로 살고 있다. 말하자면 고통의 강을 건넜다는 의미다.
한때 전성기를 누려본 사람으로서 바닥부터 올라가는 것보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 절박하고 뼈저린 고통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내면의 힘은 자신과 마주하기에 충분했다.
믿었던 지인에게 30억 원을 사기당하다
“어찌 보면 인기도 다 헛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았겠죠. 그때는 사랑을 받는 줄만 알았지 줄 줄 몰랐어요. 이제야 나눠주면서 행복을 느껴요. 몸도 좋아지고 마음도 편해지고 모든 것이 지금 삶이 더 행복해요.”
어떻게 김부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지금의 삶에 안착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인생을 격변하게 만든 커다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게 아니라 제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는데, 그걸 20년 가까이 하니 스트레스와 책임감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가 1990년대 초반, 1992년이네요. 심적으로 버거울 때였는데, 이혼한 뒤 주위 사람을 잘못 만나 큰돈을 잃었지요.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까지 내려갔어요. 그때 당시 돈 30억 원이면 굉장히 큰 거죠? 지인이라 믿었는데 그게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었죠.”
처절하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다
믿었던 사람 때문에 엄청난 돈을 탕진하고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느낀 좌절의 깊이는 그만한 돈의 액수를 경험해보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금액인데 1990년대 초에 30억 원은 그야말로 천문학적 액수였다. 김부자는 하루아침에 엄청난 돈을 탕진했고, 한 달에 이자만 400만~500만 원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말도 안 나오는 불운과 배신감과 고통에 그녀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에게 구원이 내려왔다.
“너무 힘든 시절을 보내다가 교회를 가게 됐어요. 저희 아들과 딸이 먼저 교회에 다니면서 자꾸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해 교회에 다니도록 했는데 정작 저는 안 갔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저를 위해 많이 기도를 했어요. 거기에 감동받아서 교회를 나가게 됐죠. 그리고 신앙을 만나면서 생활이 많이 바뀌었어요. 지난날의 나를 되돌아보게 된 게 그때부터였죠. 살면서 내 딴에는 잘했다,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 싶은 것이 실은 아니었던 거예요.”
꽃이 봄에 저절로 피듯 절망 끝에 부활하다
김부자는 신앙을 갖고, 자기반성을 했다. 그녀의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사건 이후 10여 년이 지난 2000년 즈음부터라고 한다. 그때 모든 문제들이 회복되면서 어려웠던 것도 해결되고 마음의 안정도 되찾게 됐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할 정도로 생활이 확 달라졌어요. 울면서 기도했던 것을 들어주셨구나 싶었죠.”
그녀의 생활은 이제 안정적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고, 철저한 건강관리도 뒷받침되고 있는 삶이다.
“운동은 유산소, 스트레칭, 걷기를 꾸준하게 하고 있어요. 생활에 무리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게 참 좋고, 거기에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약은 전혀 먹지 않고 강화에서 보내주는 홍삼 원액만을 먹고 있다는 그녀는 몸이 쑤시거나 관절에 이상이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녀의 모습에서 활기가 넘쳤다. 마음이 건강해지니 몸도 자연스럽게 건강해진 것이리라. 계속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소소한 행복이 가장 소중하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거 같아요. 내 나이에 뭘… 하다가도 이거 정도는 하고 싶다는 게 있죠.”
작년부터 지나온 시간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는 김부자는 그동안 꾸준히 쉬지 않고 디너쇼 중심의 공연을 해왔다. 올해는 50주년 공연을 5월로 계획하고 있고 외국 초청 공연도 있다. LA와 뉴욕 쪽에서 연락이 온 상태다. 작사가 겸 작곡가 조운파 선생과도 협의 중이다.
“새로운 음반에는, 지금까지 여러 노래들을 많이 불렀으니 이제는 조금 더 재밌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노래를 싣고 싶어요. ‘달타령’보다 좀 더 신나면서 현실적인 풍자가 있는 그런 인생 노래를 하고 싶죠. 지금까지는 주로 한복을 입고 불렀는데, 이제는 좀 망가지는(웃음) 노래를 하고 싶어요. 그러나 예전보다 좀 더 진한 정서가 있는 그런 노래를요.”
‘노래란 나를 지켜주는 것이며 나의 생명이고 삶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삶의 담금질을 통해 더 단단해진 가수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그대로 기억해주면 좋겠다 말한다. 그런데 그 말 뒤에 ‘그러나’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는 여전히 펄펄 뛸 수 있는 가수로서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
“굳이 욕심을 부린다면 그래도 팬들이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기에 보답하고 싶어요. 지금 나이를 생각하면 그냥 무조건 잘하고 싶죠. 그리고 옛날에 나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으면 잘해주고 싶어요. ‘잘 보이고 싶다가 아니라 진심으로 잘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들이 새록새록 드는 거 보면 내가 나이 들면서 철이 드나 싶기도 하고.(웃음) 나쁜 건 아닌 거 같아요.”
온라인상에서 유행하던 신조어를 이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어렵지 않게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글 파괴, 문법 파괴라는 지적도 받지만, 시대상을 반영하고 문화를 나타내는 표현도 제법 있다. 이제 신조어 이해는 젊은 세대와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 필요해보인다.
01 관크족
영화관에서 주위 사람 때문에 영화에 집중하지 못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냄새가 지독한 음식, 옆 사람과 큰 소리로 하는 대화, 뜨거운 애정행각, 휴대폰 확인 등등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이런 행위들 중 하나라도 ‘뭐 어때’라고 생각한다면 관크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관크족은 관객과 치명적인(critical)의 합성어로, 영화관에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뜻한다.
02 서탈/면탈
취업 희망자가 서류 또는 면접 과정에서 탈락하는 경우를 빗댄 말이다. 결과 발표일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름을 확인해보지만 아쉽게도 불합격. 이런 날은 빛의 속도로 탈락했다는 의미의 ‘광탈’로 표현한다. ‘광탈’에 기념일을 뜻하는 단어 ‘절’을 붙인 신조어 ‘광탈절’도 있다.
03 가즈아
‘가자’를 길게 발음해 익살스러운 느낌을 더한 말이다. 원래는 도박 사이트에서 유행했는데, 2017년 비트코인 열풍과 함께 이 단어는 다시 한 번 더 전성기를 맞이했다. 비트코인 시세가 오르면 ‘가즈아(계속 올라라)’, 하락하면 ‘한강 가즈아(돈을 날려 한강에 투신하고 싶은 심정을 표현)’라는 유행어로 사용되고 있다.
04 롬곡웊눞
발음하는 것부터 쉽지 않은 롬곡이 무슨 뜻인지 유추하기도 쉽지 않다. 잘 모르겠다면 종이를 180도 돌려 글자를 확인해보자. 폭풍눈물이라는 단어가 보인다면 성공이다. 말 그대로 눈물을 폭풍처럼 쏟아낸다는 뜻이다.
05 펫티켓
2017년 유명 연예인의 반려견이 목줄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네 주민을 물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큰 이슈가 됐다. 이후 펫티켓의 준수와 규제강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펫티켓이란 공공장소에 반려동물(pet)을 데리고 왔을 때 지켜야 하는 예의(etiquette)가 합쳐진 신조어다. 대표적인 예로 외출할 때 목줄하기, 배변봉투 챙기기, 입마개 착용하기 등이 있다.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임수정이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이슬 같은 여자 임수정과 참이슬을 마주하고 흥이 돋는 밤을 보냈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주세요~” 이 노래가 TV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가사 그대로 무작정 임수정이 좋아 죽었었다. 이 노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로 흘러나오던 그녀의 전성기 시절 피가 끓는 청년 이봉규는 마치 그녀가 나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애타게 원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입을 헤~ 벌리고 넋을 놓은 적이 많았다.
중년이 되어서도 “임수정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낼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배철수가 진행하는 ‘콘서트 7080’에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쩜 나이를 먹어도 아직도 이슬 같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오늘 임수정을 만나고는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조그만 선술집에서 만나자마자 그녀에게 대뜸 물었다. “아직도 이슬 같은 비결이 뭡니까?” 그녀는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일까? 담담한 표정으로 “‘참이슬’을 많이 먹어서 그래요”라고 받아치며 소주병을 능숙하게 흔들고 딴다. 정확한 주량은 말하지 않았지만 “남들 마실 만큼은 마신다. 어지간해서 잘 취하지 않는다”고 믿기 힘든 말을 던진다. 의아한 반전에 한량 이봉규도 움찔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한 술자리가 2차까지 이어지면서 한바탕 무르익어갈 무렵에서야 눈치를 챘다. 술도 약한 편은 아니지만 정신력이 강해서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질 않는다는 걸. 임수정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술자리에서 흐트러지면 늑대들은 아마 제정신 차리기 힘들 것이다. 어려서부터 약간 틈만 보이면 자신에게 남자들이 달려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자기방어가 몸에 배어 있다. 특히 술자리에서는 더욱 철저하다. 인터뷰하는 나와의 술자리도 매니저인 그녀의 사촌 동생이 옆자리에 딱 붙어서 경호했다. 매니저가 사촌 동생인 점도 아마 철저한 자기관리의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여전히 매력적인 임수정
이자카야에서 소맥 폭탄주로 한껏 흥이 오른 우리는 2차로 피아노가 있는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젊은 시절 꿈에 그리던 임수정을 바로 앞에 앉혀놓고 나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취기 때문에 용기를 냈지만 내심 그녀에게 피아노를 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평소 TV에서 도발적인 톤으로 윽박지르는 이봉규의 거친 표정을 많이 보아왔던 임수정은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면서 나의 노래를 경청했다. 내친김에 그녀를 무대로 불러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그녀가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네다섯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20여 명의 손님들은 환호했다. 나의 손놀림은 평소보다 더 들떴고 힘이 들어갔다.
가슴은 뿌듯했고 온몸의 마디마디는 ‘연인들의 이야기’ 음절에 따라 춤췄다. 노래가 끝난 후 박수가 터져 나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멀리 떨어진 바텐의자에서 슬며시 웃으며 박수 치는 내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터뷰하면서 나는 임수정에게 내 아내를 소개했고 아내는 인터뷰에 방해되지 않도록 저만치 바텐의자에 앉아 관람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임수정도 무장해제하고 나와 2차까지 상당히 마실 수 있었고 또 노래까지 부른 것이다. 대중가수가 조그만 라운지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큰 인심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 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거기 오신 손님들에게 엄청난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다. 어쨌거나 그날 밤은 황홀한 밤이었다.
그녀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걸까?
임수정은 여고 재학 중 미인대회에서 포토제닉상을 수상하면서 모델로 먼저 데뷔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그녀는 가수와 배우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작곡가 계동균을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다. 계동균과 작사가 박건호 두 사람은 임수정의 외모와 음색에 딱 어울리게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의기투합했다.
1982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 ‘연인들의 이야기’ 연주곡이 그해 방영된 KBS2 드라마 ‘아내’의 OST로 삽입되었는데 발칵 뒤집혔다. 드라마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방송국에 이 노래에 대한 전화와 편지 문의가 빗발쳤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와 두 명의 여성이 엮어가는 기구한 스토리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 ‘연인들의 이야기’ OST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앨범은 발매 몇 달 만에 30만 장이 넘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다. 뒤돌아보면 미처 준비도 안 된 임수정에게 벼락스타의 자리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와 관련해서 “한번은 탤런트 강부자 씨가 슬픈 노래인데 왜 웃으면서 노래를 하느냐고 핀잔을 줄 정도로 준비가 안 됐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제 나이를 먹고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시절을 겪고 난 후 임수정은 노래나 삶의 철학이 원숙해졌다. “최근에 강부자 씨를 만났더니 노래가 확 달라졌다고 칭찬을 해줬다”며 자신을 스스로 평가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에는 별의별 소문이 난무했다. 배우 정윤희와 맞먹는 외모의 소유자이고 한창 인기를 누리던 임수정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호사가들은 소설을 쓰면서 입방아에 올렸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당시 임수정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한꺼번에 밀어닥쳐서 젊은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다. 일종의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였다. 30만 장의 앨범이 팔려나간 ‘연인들의 이야기’에 이어 1985년 ‘사슴 여인’이란 곡을 내놓았는데 그 가사가 문제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밤거리에서 사랑을 먹고 사는 사슴 여인”이라는 가사가 직업여성을 뜻한다며 방송사 심의에 걸려 노래가 전파를 탈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임수정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레코드사 이적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힌 것이 결정타였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면서 여린 성격의 임수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걸 다 던지고 198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성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비주얼만 강하고 오디오가 약하지 않느냐?”는 말을 감당하기엔 어린 나이였고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고생 끝에 정상의 자리에 올라간 분들은 소중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상에 올라가다 보니까 소중함을 잘 몰라서 공백기를 갖게 된 것 같아요”라고 그녀는 나이를 먹은 지금 뒤늦게 밝히고 있다.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사실 임수정은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청순한 목소리와 그녀만의 독특한 비브라토(vibrato)는 상당한 음악적 가치가 있었다.
임수정이 가창력이 없다는 비판은 일종의 어깃장이다. 음악에 정석이 어디 있을까? 어떤 목소리와 창법이 노래를 잘하는 것일까? 수치로 계량화된 것도 없고 그저 당시의 유행과 통론에 치우쳐 마음에 안 든다고 비판하는 군중심리의 일종이다.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니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줘야 한다. 대중이 선택한 음악이고, 대중이 사랑한 가수다. 거기에다 이슬 같은 청초한 외모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임수정의 매력이다. 음악의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가수의 외모는 아주 중요한 자산으로 여긴다. 심지어 스포츠인과 정치인의 외모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임수정은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추억을 무너트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20대 때 제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릴까봐 많이 망설였지만, 팬들이 ‘감성가수’ 하면 ‘임수정’ 하고 바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꿈이에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노래를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예쁜 얼굴은 더 상기되었다.
100세 시대다. 팬들도 나이를 먹고 가수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 70세에 아직도 전 세계 무대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올리비아 뉴튼 존’보다 임수정은 열다섯 살이나 어리다. 그녀의 전성기는 이제부터다.
10월 마지막 화요일은 금융의 날이다. 원래는 1964년부터 저축의 날로 불리며 그 해의 저축왕도 선정하고 알뜰살뜰 저축을 많이 한 사람의 미담을 치하하는 행사가 있었다.
오랜 시간 내려오던 저축의 날은 경제성장과 시대의 변화 속에서 의미가 약해지고 다양한 금융상품과 금융의 역할 다변화, 세계적인 초저금리시대에서 저축의 개념을 확장해 2016년부터는 명칭을 금융의 날로 변경 개편하게 되었다.
'심부름했다고 엄마가 주신 돈 무얼 할까요? 과자 살까요? 사탕 살까요? 아니 아니 아니죠, 저금해야죠'
어릴 때부터 불렀던 동요인데 아직도 잊히지 않고 머리에 남아서 요즘도 가끔 흥얼거리는 노래이다.
멜로디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물건이든 무엇이든 아껴야 한다는 생활 철학을 어릴 때부터 일깨워 주는 교훈이 담겨있다.
어릴 때부터 저축은 미덕이었고 그래서 돼지저금통은 집집마다 몇 개씩은 있어 적은 돈부터 절약하고 모으는 습관을 들이며 살아왔다.
필자는 금융의 날 행사 취재를 위해 2017년 10월 31일 육삼 컨벤션 그랜드 볼룸 홀에 참석하게 되었다.
금융의 날의 취지는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금융부문 종사자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행사가 있는 홀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축사를 위해 참석한 최종구 금융위원장과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을 비롯해 금융발전 유공 수상자와 금융기관 임직원, 수상을 축하하러 참석한 가족들로 500여 명이 성황을 이루었다.
금융발전 유공 포상은 '금융혁신'과 '서민금융' '저축' 세 개 부문에서 195명이 받았다.
훈장 수상자는 녹조근정훈장(금융혁신부문)에 장범식 숭실대학교 교수님이 2016년부터 현재까지 금융발전심의회의 위원장으로서 서민금융진흥원 설립, 크라우드 펀딩 정착, 중금리 대출 등 금융혁신을 위한 성과창출에 기여한 공으로 수상했고, 국민훈장 석류장(서민금융부문)에 정재성 (신용회복위원회 구미지부장)님은 신용회복위원회 천안, 포항, 구미지부 개설준비 위원장으로 취약계층 채무자들이 가까운 곳에서 금융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전국에 네트워크 구축에 기여해서 상을 받게 되었다.
그 외에 반가운 이름도 보였는데 운동경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때 야구 전성기의 이만수 선수는 기억하고 있다. 나이도 꽤 있을 텐데 실물은 아주 젊어 보여 역시 좋은 일 많이 하는 사람은 좋은 인상을 가졌다고 느꼈다.
전 프로야구감독 이만수 씨가 국민포장을 받았는데 입단 시절부터 현재까지 꾸준한 저축습관을 실천하고 있으며 은퇴 후 비영리재단(헐크 파운데이션)을 설립해 국내외 어려운 유소년 야구선수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시인이자 소설가 안중원 씨는 노숙자 무료급식 제공, 꽃동네 후원, 장학금 기부 등 나눔을 실천 중이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을 목표로 꾸준히 저축하고 있는 분이다.
중국에서 활약 중인 가수 황치열 씨는 무명시절부터 저축을 생활화하고 있고 팬들과 함께 10주년 맞이 연탄 나눔 봉사와 아동 양육시설 후원, 결식아동을 위한 기부 등 다양한 선행을 실천 중이라 한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분들이 수상했고 꾸준한 저축습관은 물론 나눔의 정신을 실천 중인 사회복지사, 청년 창업가, 구두 미화원, 김나연 학생도 여러 수상자를 대표하여 표창을 받았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축사에서 금융의 양면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금융은 사람들이 현재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 발전해왔으나 쏠림현상, 양극화 확대, 신뢰 훼손 등 금융에 내재한 속성이 사회적 역기능을 가져올 수 있다며 금융이 담당해야 할 공공성과 책임성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담겨있는 만큼 금융기관은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 사회적 역기능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자랑스러운 수상자들을 보니 어떻게 선정되었을지 궁금했는데 금융위원회에서 제한 없이 포상후보자를 공개로 모집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각 은행에서 저축을 성실히 했거나 사회 환원 활동을 많이 한 고객을 추천하기도 한다는데 공모 이후에 추천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포상심사위원회를 거치고 경찰청 등과 같은 타 부처에서 포상제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공개 검증하는 절차가 진행된다고 한다.
좋은 일 하면서 열심히 살고 저축을 생활화하면 누구나 수상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단상에 오른 수상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나도 한 번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국립발레단장을 맡고 변방의 한국 발레를 르네상스 시대로 이끈 최태지의 업적과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이 중첩되어 한량 이봉규는 살짝 주눅이 들었다. 한국의 대표 발레리나 최태지와 올해 마지막 데이트를 했다.
1959년생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가녀린 몸매와 청초하면서 귀족같이 우아한 최태지와 마주하니까 오드리 헵번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연상된다. 이봉규의 눈에 포착된 최태지의 기품에 한량도 살짝 주눅이 들었을까? 라운지에서 만나자마자 “왜 그렇게 젊어 보여요?”라고 따져 물었다. 그녀는 “모자라게 살아서 그럴까요?”라며 웃음으로 내쳐버린다. 시작부터 의문의 1패를 당한 꼴이다.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내공의 깊이까지 느껴진다. 어설픈 한량이 차분하게 분석해보면 아마 평생 발레를 해서 세포조직도 건강하고 정신적으로도 좋은 에너지를 한껏 받아 아직도 아름다운 젊음을 유지하는 것 같다.
정작 본인은 “발레리나 현역 활동에서 은퇴한 후에도 레슨하면서 항상 거울을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거울 앞에서 젊은 무용수들과 같이 있으면 긴장하기 때문에 자기관리를 자연스럽게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살이 퍼지게 놔둘 수가 없다는 것. 그녀의 성공은 어쩌면 이 같은 승부근성 때문일 것이다. 내일모레면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다. 거울 앞에 선 전성기의 젊은 무용수들을 보며 경쟁심이 우러러 나온다니 부럽기 그지없다.
20년 전에 미국 워싱턴 D.C.에서 발레리나 문훈숙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뭔지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 육십이 되어 최태지와 마주앉으니까 그때보다 몇 배 더 한 발레리나의 기품에 눌리는 것이 감지된다. 국립발레단을 12년간 이끌며 아시아 최고의 발레단으로 성장시킨,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출신의 최태지 단장의 업적과 아름답게 나이 먹은 모습이 중첩되어 그럴 것이다. 그녀는 최근 광주시립발레단장에 임명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최태지’ 이름만으로도 발레단이 주목받다
국립발레단장을 역임했던 그녀인지라 관계자들은 조심스럽게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으로 양분되는 한국 발레 무대가 광주시립발레단을 포함하는 3강 체제가 될 것임을 전망하기도 한다.
최태지라는 이름만으로 광주시립발레단은 일약 중앙의 두 발레단과 비교 대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는 것. 이로써 최태지·문훈숙·강수진으로 이어지는 세 스타 발레리나 출신 단장들의 대결은 현재진행형이다.
최태지는 1959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가이타니 발레학교, 프랑스 프랑게티 발레 아카데미, 미국 조프리 발레 스쿨 등에서 발레를 전공했고, 한국인 최초로 로잔국제발레콩쿠르와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발레를 발전시킨 산 증인이다.
하지만 발레의 명성만큼 그녀의 인생은 화려하지 않았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두 번째 남편과는 사별한 아픔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 지금은 성장한 두 딸과 함께 주말이면 서울에서 살고 주중에는 혼자 광주의 한 오피스텔에서 지낸다. 실례를 무릅쓰고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이혼과 사별 중에 어느 것이 더 아프냐?”고 물으니, 그녀는 “눈물도 안 나올 정도로 사별이 슬펐다”고 대답한다. 발레를 하지 않았으면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부연한다. 사별한 지 5년 정도 되었기에 지금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
발레 인생도 굴곡이 많았다. 결혼 후 발레를 그만두려고 80kg까지 일부러 살을 찌웠다. 그런데 뉴욕에서 첫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치료를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발레학원에 등록했다.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출신이 뉴욕이라고는 하지만 허름한 대중 발레학원에 수강생으로 등록할 정도로 절실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발레 생활 3~4개월 만에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그 후 곧바로 한국에 들어와 국립발레단에 다시 복귀했다. 아이를 낳고 활동한 국내 최초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체중이 또 80kg으로 늘었다. 다시 발레를 시작했다. 발레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그만두면 어느새 또 발레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발레는 내 운명!”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녀의 인생은 프랑스어로 세라비(C'est la Vie, 영어로 That is Life) 같다. 중학교 시절 일본에서 한창 발레 연습에 몰두해 있을 때 그녀를 지도했던 선생은 “‘발레의 하느님’이 너를 붙잡으면 평생 도망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났다고 고백한다. 그 선생은 일본에서 최초로 ‘백조의 호수’를 공연한 발레리나다.
국립발레단장을 그만두고 4년 남짓 그냥 아줌마로 편하게 살며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광주발레단장을 맡은 것도 아마 ‘발레의 하느님’이 아직도 그녀를 꽉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공연을 위해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무대 의상을 입고 공연을 하는 무용수들과 함께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할 따름이고 들뜬다. ‘발레의 하나님’이 그녀를 선택해서 붙잡은 것이 아니라 최태지가 발레의 하느님을 먼저 꼭 붙잡고 놓지 않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막내딸을 한국의 대표 발레리나로 키우고 싶었던 부모님
1970년대 중반 일본에 살 때 어머님과 부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갔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은 일본에 비해 열악한 환경이었다. 어린 최태지는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그 때문에 오빠들도 “한국에 가서 잘 적응하고 살 수 있을까?” 걱정하며 한국행을 만류했지만 대한민국 국립발레단 무용수가 꿈인 어린 최태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 이름인 ‘오타니 야스에(おたに やすえ)’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최태지가 대한민국 최고의 발레리나가 된 것은 부모님의 강한 의지와 희생 덕분이다.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로 심한 차별을 견디며 살아온 부모님은 무용에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던 막내딸만큼은 한국의 대표 발레리나로 키우고 싶었다. 아버님은 항상 어린 막내딸에게 “일본에서 왜놈들에게 머리 조아리며 돈을 벌고 있지만 너는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울면서 다짐했다. 그래서 일부러 민단이 운영하는 교포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본 학교에서 공부시킨 뒤 프랑스로 발레 유학을 보냈다. 경제 사정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 일본 무용계에서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약하다 1983년 의 객원 주역으로 초청되면서 국립발레단과 인연을 맺었다.
1987년 국립발레단 프리마 발레리나로 특채되면서 고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됐다. 에서 오데트, 에서 키트리, 에서 에스메랄다, 에서 사탕 요정, 에서 메도라 등 많은 작품에서 출중한 공연으로 발레 팬들의 박수를 받았다. 국립발레단 지도위원을 거쳐 1996년에는 국립발레단장을 맡아 변방의 한국 발레에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준 주인공이다. 특히 그녀가 국립발레단장 시절 ‘해설이 있는 발레’와 ‘찾아가는 발레’를 시작할 때만 해도 지나친 대중화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자타가 공인한다.
발레학교를 만드는 게 꿈
발레리나로서 이 같은 성공은 부모님의 의지와 희생 덕분이지만 막내딸의 강한 독립심이 스스로 이룩한 면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빠들은 나약해서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습성이 강했지만 막내딸 최태지는 어릴 때부터 독립심이 강했고 부모의 기대와 사랑도 각별했다. 오빠들은 사업의 어려움으로 부침을 겪으며 재산을 탕진했지만 막내딸인 그녀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부모덕을 본 최태지는 자식 복까지 터졌다. 두 딸들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역시 핏줄은 못 속인다. 엄마처럼 얼굴도 예쁘고 승부욕도 강해 잘 자랐다. 첫째(리나·30)는 러시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솔리스트로 활동하다 귀국해 지금은 예고와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한양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둘째(세나·28)도 발레를 배우다가 엄마와 언니가 너무 힘들어 보여 뉴욕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현재 서울대 외교학 석사과정에 있다.
발레리나로서 모든 걸 누린 그녀에게 앞으로의 꿈을 물어봤더니 발레학교를 만드는 것이란다.
“창작발레도 많이 만들어야 하지만 발레학교가 꼭 필요하다. 한국에서 너무 놀란 것은 사교육비가 비싸 발레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한정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10세부터 18세까지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봐도 발레단보다 국립발레학교가 먼저 생긴다. 한국은 거꾸로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서 일반 교육과 발레 교육을 받으며 중·고교 과정을 거친 뒤 전문 발레단에 입단하거나 대학에도 갈 수 있는 그런 학교가 필요하다.”
그녀의 꿈이 우리 사회의 꿈이다.
늦은 밤 아직 다 못 치운 부엌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켜놓은 TV에서 귀에 아련한 노래가 들려왔다.
'찬바람이 싸늘하게에~' 그리고는 '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 따라 가버렸으니'
특별하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들리는 멜로디와 가사가 오늘 왜 이리 필자 마음을 울컥하게 하는 걸까?
물 묻은 손 그대로 TV 앞으로 가 화면을 보았더니 평소 관심 두지 않던 '가요 무대'라는 프로그램이다.
뉴스를 본 후 설거지를 하면서 그냥 켜두었더니만 ‘가요 무대’까지 이어져 가슴 울컥하게 만드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노래를 듣게 되었다.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그리고 너와 나의 사랑의 꿈이 낙엽 따라 가버렸다는 가사를 듣고 눈물이 나려 하니 아직 소녀 적의 감성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어 미소가 지어진다.
‘가요 무대’는 꼭 챙겨보는 프로는 아니지만 가끔씩 채널을 돌리다 보면 예전 필자 전성기 때 그들의 전성기를 보낸 궁금하고 그리운 가수들이 출연해서 반갑기도 하고 추억에도 잠겨보게 해 준다.
지금 필자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 노래의 가수는 '다이나믹스'로 이름 붙여 활동하던 옛날 가수 김준, 장우, 차도균씨였다.
이들은 한때 인기 있던 중후한 가수들이다. 지금은 작고한 박상규 씨 까지 넷이 '포 다이나믹스'라는 예명으로 환상적인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던 멤버들인데 열창하는 이들을 보니 털털하고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사람들 마음에 따뜻하게 다가왔던 박상규 씨가 그립다는 생각이 든다.
젊었을 적 언젠가 막냇동생네 아파트에 놀러 갔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보니 눈에 익은 얼굴이 있어 필자도 모르게 "어머,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고 만 적이 있다.
생전 처음 본 사람인데 꼭 잘 아는 사람처럼 친근한 모습이었던 그 사람은 박상규 씨였다. 아마 TV에서 많이 보아서였던지 아는 사람 같아서 불쑥 인사를 건넸던 것인데 같이 갔던 엄마가 "얘는?"하고 눈치를 주었지만, 특유의 개구쟁이 같은 미소로 털털하게 반가운 답례를 해주어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던 가수여서 잊히지 않는데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격과 취향이 어느 정도 바뀐다는 게 맞는 말임을 실감하고 있다.
필자는 예전 젊어서는 가요를 듣지 않았다.
특히 오빠부대를 끌고 다닌다는 남진 씨나 나훈아 씨 무대는 절대 보지 않았다.
일명 뽕짝이라 불리는 가요를 듣는 건 창피한 일인 듯 여겨지고 팝송이나 샹송, 칸초네쯤 들어야 고급스럽다는 유치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생일 때 한창 칸초네가 유행했다. 우리는 친구들끼리 이탈리아 가사를 한국발음으로 적어서 외우고 다니며 부를 정도로 치졸했다.
‘라 피오자’라는 곡은 펄 시스터즈가 리메이크해 ‘비’라는 제목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어 필자는 이 곡 역시 한국 발음으로 써서 유치하게 외웠다.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너희도 나이 들어 봐라. 우리 가요가 최고다." 그럴 리 없다고 코웃음 쳤지만 필자는 요즘 남진 씨와 나훈아 씨가 너무나 매력적이다.
나훈아 씨의 거친 듯한 용모는 섹시함까지 느끼게 한다. 노래도 좋다. 예전에 귀를 막았던 그들의 노래가 가슴에 와 닿고 마음을 찌른다.
정말 어른들 말 그른 것 하나 없다더니 딱 맞는 것 같다. 나이가 드니 우리 가요가 정답고 듣기에 좋아졌다.
우리 세대가 미리 겪어본 일로 젊은 아이들에게 아무리 충고해도 수긍해주지 않는 게 있다. 그들도 훗날 나이 들면 어른들 말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고집이 안타깝지만 필자가 젊었을 때 어른들 말을 이해하지 않았으니 그들도 스스로 알 때까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요 무대’는 거의 30년째 순항 중이다. 어쩌면 옛날 모습과 그렇게도 똑같은 얼굴로 김동건 아나운서는 "방청객, 시청자, 해외동포 근로자 여러분~안녕하십니까?“ 라는 멘트로 말문을 연다.
아-해외에서도 이 방송을 보며 많은 이들이 고국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가슴이 뭉클하다.
나이가 들으니 생각과 취향이 달라졌다. ‘가요 무대’도 볼 만하다고 느껴진다.
오늘 밤은 낙엽 따라 가버린 청춘도 그립고 옛날 가수들도 그리운 센티멘털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