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역·필수의료 공백을 메우고 초고령 사회에 대비하기 위한 대책으로 ‘4대 개혁 패키지’를 제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1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의료개혁’을 주제로 열린 여덟 번째 민생 토론회에서 4대 개혁 패키지를 발표했다. 4대 개혁 패키지는 △의료인력 확충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보상체계 공정성 제고다.
윤석열 대통령은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프런’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없고 지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선진국이라고 말하기 부끄럽다”면서 “지금이 의료 개혁을 추진할 골든타임이다. 오직 국민과 미래를 바라보며 흔들림 없이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4대 개혁 패키지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정책 과제는 의료 인력 확충이며, 핵심은 의대 정원 확대이다. 정부는 2006년 이후 동결된 의과대학 정원(현재 3058명)을 올해 입시(2025학년도)부터 확대한다. 윤 대통령은 “고령 인구가 급증하고 보건산업 수요도 크게 늘고 있는 데다 지역 의료와 필수 의료를 살리기 위해서는 의료 인력 확충이 필수적”이라면서 “양질의 의학 교육과 수련 환경을 마련해서 의료 인력 확충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토론회 발표를 통해 “전문가 전망에 따르면 10년 후인 2035년에는 1만 5000명 이상의 의사 부족이 전망된다”면서 “정부는 수급을 고려해 현장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의대 정원을 충분히 확대하겠다”고 설명했다.
다만, 증원 확대 규모에 대해서는 의료현안협의체 논의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조만간 확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부와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년간 의료현안협의체에서 의대 확대 규모를 놓고 논의를 거쳤다. 지난달 31일에도 양동호 의협 협상단장은 정부의 정책이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하며 “의대 정원 확대의 장단점을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해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정부에 정식으로 TV 토론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또한 정원 증원과 함께 의대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한 지원을 강화하고, 충분한 임상 역량을 쌓을 수 있도록 수련·면허 체계도 개선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기초·임상 교수를 확충하고 필수·지역 의료 교육을 강화해 필수 의료 실습 과목 비중을 50% 이상으로 확대한다. 수련 체계 개선을 위해 인턴제는 합리적 진로 선택과 기본적 임상 역량 확보가 가능하도록 개선 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의대 증원 후 의사 배출까지는 6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의사 부족 문제 해소를 위해 정부는 의료기관 간 의료진 협진, 파견 등을 토대로 한 ‘공유형 진료 체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 지역 의료 혁신 시범사업을 도입, 선정된 권역에는 3년간 최대 500억 원을 지원한다.
또한 윤 대통령은 의료사고 관련 제도를 전면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의료인에 대한 공정한 보상 체계 구축도 약속했다. 그는 “고위험 진료를 하는 의료진, 상시 대기해야 하는 필수 의료진이 노력에 상응하는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면서 “건강보험 적립금을 활용해서 필수 의료에 10조 원 이상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이와 함께 비급여와 실손보험 제도도 확실하게 개혁하겠다는 입장이다.
산림청이 임업인 소득 증대 등을 위해 새롭게 바뀌는 산림 분야의 주요 정책과 제도를 발표했다.
[1]임업 분야 외국인 근로자 고용
7월부터 임업 분야에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다. 임업분야에 고용허가제(E-9)를 통해 외국인 근로자 1000명이 △임업 종묘 생산업 △육림업 △벌목업 △임업 관련 서비스업 등에 종사하게 된다. 인구 감소에 고령화까지 심화된 산촌의 노동 인력을 외국인 근로자로 대체해 산림 분야의 인력난을 해소하고, 임업인의 경영활동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2]임업인 대상 정부 지원 확대
임업직불제를 농업직불제와 유사한 수준으로 개선해 더 많은 임업인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또한 임업인들이 임산물 생산 작업로를 개설하는 경우 위험 구간을 포장하는 비용도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간 임업인의 요구가 컸던 관리사(管理舍)도 지원 대상에 새롭게 포함되고, 육림업 종사자에게도 굴착기 지원이 추가된다. 임산물 생산자가 사업지 관할 지자체 내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각종 지원 혜택을 동등하게 받을 수 있도록 차별금지 규정도 신설된다.
[3] 산림정책 혜택 확대
임업 계열 학교 졸업자나 국가자격증 소지자는 필수교육 이수 없이도 정책자금 신청이 가능해져 비용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버섯재배 관련 국가자격증 소지자도 정책자금 신청 시 가산점을 부여받아 자금 대출이 보다 용이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더불어 석재사업자에게 석재산업진흥지구 지정을 신청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보전과 개발이 조화되는 지구계획이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4] 임업인 위한 과학기술 지원
산림과학 연구개발(R&D)의 수행 절차와 방법도 더 체계적이고 투명하게 개선된다. 중간평가 결과 성과가 부진한 사업을 의무적으로 구조조정해 우수 사업에 투자가 집중되도록 유도한다. 외부 전문가 중심의 산림과학전문위원 제도도 신설된다. 새로운 ‘범부처 통합연구지원 시스템’(IRIS) 활용으로 모든 출연 연구개발과제의 통합적 관리 또한 가능해진다.
+ 그밖에
△국가보훈대상자의 국립자연휴양림 주차료 및 시설 사용료 감면 확대
△나무 의사 자격시험 연 1회 실시
△국가·지방정원 내 행위 제한 신설: 국가 또는 지방 정원 내 식물, 시설물을 훼손하는 행위 등에 대한 금지 행위와 과태료를 규정
△실내 정원사업의 사업구조 개선
△산림기술자 교육훈련 이수 시기 완화
중장년의 노후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으로 사회공헌 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법적으로 ‘노인’은 65세부터라지만, 현장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60대까지 중장년이라고 봤다. 100세 시대에는 인생 3막을 설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는데, 특히 사회공헌 활동에 50~70대 시니어들이 필요하단다.
기존 ‘사회공헌’이 독거노인, 치매 노인 등 취약 계층에 있는 이들을 지원하는 성격이었다면, 이제는 은퇴자의 인생 2막, 인생 3막을 위해 개인의 욕구를 반영하고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2017년 고용노동부는 생산가능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50·60세대를 ‘신중년’으로 정의했다. 우리나라 고도성장의 주역이면서 부모 부양과 자녀 양육의 이중고를 겪는 마지막 세대이고, 이들의 노후 준비를 위해서는 맞춤형 지원이 절실하다고 봤다. 고용노동부는 보람 있는 노후를 보내고자 하는 신중년의 사회공헌 활동 수요가 많은 데 비해 프로그램이 다양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신중년의 자원봉사 활동은 질이 높지만 참여율은 낮았다. 이들의 노하우나 전문지식을 활용한 재능봉사가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노인의 실질은퇴 연령은 약 71세이며 일하기를 원하는 이유 1위는 생활비(58.3%)였지만, 2위는 보람(34.4%)이 차지했다.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사회공헌 활동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이전 세대보다 고학력자와 전문직이 많은 신중년이 은퇴 후 더 많은 영역에서 사회공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고용노동부는 주된 직장에서부터 인생 3모작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공헌 활동이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면서 보람과 만족을 얻는 활동이다. 크게 자원봉사와 사회공헌 일자리로 나뉜다. 자원봉사는 노력봉사, 재능기부, 프로보노 세 가지가 있다. 노력봉사는 자신의 경력과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일로 ‘연탄 배달’과 같이 과거에 주를 이뤘던 영역이다. 재능기부와 프로보노는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서 대가 없이 하는 것으로, 최근 이 영역이 활성화되고 있다.
보건복지부, 서울시50플러스재단 등 정부기관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소정의 급여도 받고 전문성을 살려 사회에 기여하는 사회공헌형 일자리도 늘었다. 민간 기업에서는 은퇴 전 전직지원 교육을 통해 어떤 사회공헌 활동이 있는지 안내하는 곳이 많아졌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세종수목원은 ‘신중년 사회공헌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세종시 일자리정책과 주도로 이뤄지는 사업인데, 국립세종수목원에서는 식물 관리와 고객 서비스 부분에 신중년이 참여하고 있다. 의무실의 경우 양호교사, 간호사 자격증이 있는 신중년이라면 재능기부로 참여할 수 있다. 노동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원봉사 성격을 띤다. 권진온 수목원운영실 실장은 “비영리집단에서 신중년의 사회공헌 참여를 원하는 수요가 많다. 외국의 수목원은 자원봉사자들이 운영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시스템이 미비한 실정”이라면서 “중장년분들은 1년, 2년 단위로 오랜 시간 활동에 참여하시기 때문에 장기적인 수목원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통계청 자료를 보면 50세 이상 응답자 중 80~90%는 봉사활동 참여 의지가 있다고 답했지만, 실질적인 매칭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아직 약하다”면서 “사회공헌 활동이 더 알려져서 더 많은 신중년이 보람도 느끼고 사회공헌에도 이바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돈·시간·보람 세 마리 토끼 잡는 ‘징검다리’
그동안 쌓아온 경력·경험·노하우를 녹여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사회공헌 활동은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사회공헌 활동이 무조건 일자리로 연결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고 새로운 영역을 간접 경험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중장년이 은퇴 후의 삶을 그리는 데 사회공헌 활동이 매우 적합한 활동이라고 입을 모은다.
박영록 이음길 사회공헌 뉴스타트팀 팀장은 “일단 재능기부 활동을 해보라”고 권한다. 한 달 살기를 하더라도 그곳에서 ‘보람’을 주는 일을 찾아야 한단다. 취미 활동과는 또 다른 영역이다.
“재능기부 활동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에요. 내가 원하는 단체나 기관에서 자원봉사 성격의 재능기부 활동을 하고, 교육을 받아 동호회를 구성해 사회공헌 활동에 참여하고, 이후에는 협동조합 등으로 조직을 구성하면서 영역을 확대하는 거죠.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 느끼고, 큰돈은 아니더라도 노후에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목표로 삼으면서 보람도 얻어요. 사회공헌 활동은 돈·시간·보람 세 가지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일입니다.”
박 팀장은 중장년이 재취업에 성공하더라도 퇴장이 빠르다고 지적했다. 풀타임 근무가 생각보다 힘들어지는 나이이기에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박 팀장은 인생 3모작 설계를 하면서 차근차근 사회공헌 활동을 징검다리 삼아 신중하게 나아가기를 권했다.
프로보노의 경우 변호사·회계사 등 전문 직종 중장년의 재능기부 활동이 주를 이룬다. 전오석 상상우리 프로보노팀 팀장은 “전문직 종사자라면 전문성을 살려 현직에 있을 때부터도 프로보노 활동으로 사회공헌을 할 수 있다”면서 “은퇴한 중장년이라면 사회공헌 활동이 재취업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 팀장은 “재능기부라고 하면 나의 경험으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이 활동을 통해 중장년분들이 많이 배워간다”면서 “대부분 직무의 최고 정점에서 은퇴하기 때문에 다시 실무 감각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기업과 라포를 쌓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드문 경우긴 하지만 기업과 합이 잘 맞아 해당 기업으로 재취업 되는 사례도 있다.
박영록 팀장과 전오석 팀장은 다만 사회공헌 활동 영역에서의 ‘매칭’이 아직은 쉽지 않다고 아쉬움을 보였다. 중장년의 전문성이 필요한 기업의 구체적인 수요와 실제 적용 가능한 전문성을 가진 중장년을 정확하게 이어주는 게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간에서 이들을 연결해줄 ‘코디네이터’가 필요하고, 매칭을 위한 또 하나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그럼에도 앞으로 사회공헌 영역에서 중장년의 역할이 더 커질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60대 이후 실질적으로 주된 일자리를 이어가거나 취업 시장에서 다시 활동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기에, 돈·시간·보람 세 가지를 얻을 수 있는 사회공헌 활동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MINI INTERVIEW
‘경력단절’ 사회적 죽음 ‘선택’으로 살아나다
강남의 고층 빌딩이 내려다보이는, 해가 잘 드는 교육장. 이음길 사회공헌 뉴스타트의 마지막 수업 시간이다. 교육하는 강사도, 수업을 듣는 수강생도 눈을 반짝였다.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수강생들의 모습에서 열의가 느껴졌다. 이곳에서 ‘심폐소생술’을 받았다는 이경원(61) 씨를 만났다.
이경원 씨는 경력단절 여성이다. 육아에 전념하다가 공부를 해 사회복지사로 15년 남짓 일했다. 그리고 정년이 되어 퇴직한 순간, 이 씨는 죽음이 이런 것일 수 있겠다고 느꼈다. 사회적인 죽음 말이다.
“출근도 못 하죠. 활동도 못 하죠. 처음에는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우울했고요. 내가 자발적으로 그만둔 것이 아니라 아직 더 활동할 수 있고 재미있는데, 법적으로 환경적으로 정년이니까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고 하니 더 힘들더라고요. 나는 갈 수 있는데, 가면 안 되니까요. 다시 재취업하려니 기업이 저를 원하지 않더라고요. 나이가 있으니까요.”
어느 날 인터넷 쇼핑을 하던 이 씨 눈에 문구 하나가 들어왔다. ‘사회공헌 뉴스타트’라는 두 단어다. 이경원 씨는 “두 단어가 딱 와 닿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처음 교육을 오기 전까지 긴가민가했단다. ‘그냥 한번 들어보자’는 마음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에요. 내가 120세까지 산다고 하면 살아온 만큼 앞으로 더 살아야 하는데, 어떤 사회공헌 활동이 있는지 알려주는 이 수업이 저의 인생 방향을 잡아주더라고요. 수업이 제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아요. 하지만 우울하고 힘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던 저의 숨을 잠시 트이게 해주면서 ‘앞으로 내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라는 방향성을 제시해주더라고요. 심폐소생술이랄까요?”
물론 수업을 막상 들어보니 사회공헌 활동이라는 게 쉽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사회적기업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 씨는 수업을 들으면서 ‘그럼 스스로 나의 일자리를 만들어볼까?’ 생각하게 됐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모여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돕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졌다. 사회복지사로 일했기에 사회공헌 활동에는 일찍이 관심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고민해본 건 처음이다. 이경원 씨는 퇴직 후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 혹은 60대를 맞이한 이들에게 “선택하세요”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제가 인터넷에서 문구를 보고 기본 정보를 입력한 후 이곳에 나오기까지 모든 과정에는 선택이 있었잖아요. 도전은 선택이더라고요. 도전해보라고 하면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선택하라고 하면 해볼 만할 것 같죠? 우리 중장년이 고집이 참 세요. 그동안 해온 것들이 있어 그렇죠. 그런데 제 생각에는 고집을 부리면 선택을 못 하더라고요. 다른 분들도 내가 판단하기에 좋든 나쁘든 일단 선택하고 도전해보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 역시 앞으로도 선택할 것들이 너무 많거든요. 매일 선택하고 실행해보시면 어떨까요?”
◇사회공헌 뉴스타트 보건복지부, 한국사회복지협의회, 이음길HR이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기업 퇴직(예정)자들에게 교육과 현장실습을 통해 사회서비스 분야 일자리 진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36세의 젊은 엄마가 하늘로 떠났다. 5살, 7살 두 딸 아이를 남겨두고. 9년 전 위를 송두리째 떼어내고 다 나은 줄 알았는데,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지내던 중 암이 재발됐고, 항암치료에 전념했지만 암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의 항암치료는 무의미하다는 말기 판정과 함께 우리 병원 호스피스로 의뢰됐다. 젊은 엄마는 남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하길 원했기에 상담 후 가정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기로 했다.
야속하게도 암은 계속 진행돼 몸은 하루하루 더욱 앙상하게 말라 갔고, 장폐색까지 진행되면서 나중엔 물만 마셔도 구토가 계속되자 가정호스피스팀은 소위 콧줄이라 부르는 배액관을 넣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콧줄을 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아이들이 충격을 받을까 걱정했던 그는 콧줄을 거부하고 화장실에 숨어 몰래 구토를 하면서 마지막까지 아이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자 두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보내면서 그 뒷모습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119를 불러 응급실로 왔다. 응급실에서 만난 내게 자신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했으니 더 이상 고통 없이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반복되는 구토로 탈진해 있는 그에게 나는 미뤄왔던 콧줄을 바로 삽입했다. 그리고 배액장치를 통해 역류하는 소장액이 계속 바로바로 빠져나오자 비로소 그녀는 구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배액이 원활해지니 이제 조금씩 물과 음료도 마실 수 있게 됐다. 수액을 통해 탈수가 교정되고, 마약진통제를 통해 통증이 가라앉자 잠도 푹 잘 수 있게 됐고 조금씩 기력도 돌아왔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어린 두 아이들 생각에 그는 몸이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도 수차례와 수술과 항암치료를 견뎌냈고, 그로 인해 몸은 너무나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특히 배 안은 유착이 너무 심각해 심한 통증과 구토가 반복됐다. 콧줄과 배액장치에도 구토가 발생할 때가 있었고, 그런 불편감으로 입원 후에도 밤을 꼬박 새워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콧줄의 위치를 섬세하게 조정해 배액장치가 아닌 주사기를 통해 소장액을 뽑아냈는데, 배액에 성공할 때면 그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이제 살 것 같아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고통에서 자유로워지자 그는 표정이 밝아졌고 여유가 생긴 만큼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어느 날 그는 조심스레 내게 다시 집으로 갈 수 있냐고 물었다.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있다며 나를 바라보던 그의 차분하면서도 굳건한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절대 아이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콧줄을 단 모습마저도 스스로 용납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집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배액장치로도 해결되지 않는 구역질이 발생했을 때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그날부터 주사기를 통해 수동으로 소장액을 배액하는 법을 그녀를 간병하는 친정엄마에게 꼼꼼히 전수했다. 반복하는 연습과 교육으로 이제 구역질이 밀려올 때면 친정엄마 역시 능숙하게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다.
약속된 퇴원 전날 밤 나는 그의 침대 곁으로 찾아가 설레임과 두려움에 잠들지 못하고 있는 그와 친정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2주간 참 잘 이겨내 줘서 고마워요. 입원하기 전까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사실 집보다 병원이 훨씬 편하실 텐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시니 그 결정 속에 각오만큼이나 큰 두려움이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의 엄마는 화장실에서 숨어서 구토를 하고, 신음소리를 삼키며 고통을 참던 딸의 모습을 봐왔기에 다시 그 지옥같은 상황으로 돌아가게 될까봐 퇴원을 반대했지만 결국 딸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딸과 엄마의 손을 포개어 손에 쥐고 말을 이어갔다.
“삶은 여행이라잖아요. 이제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여행에는 늘 변수가 생기고, 자는 것도 먹는 것도 모든 것이 불편하겠지만 목적이 있으니 사람들은 고생을 감수하고 떠나는 거겠죠. 집에 가시게 되면 꼭 그 목적을 이루세요. 저희가 지켜드릴게요.”
그는 퇴원을 하고 3주 정도를 집에서 보냈다. 중간에 오한과 고열이 발생해 응급실로 실려온 적이 있었지만, 응급처치만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 ‘해야 할 일’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입원하지 않고 가정호스피스를 통해 해열제와 항생제를 투여하면서 다행히 발열은 안정됐다. 그리고 내가 가정호스피스팀과 함께 그의 집을 방문했던 어느 날 그는 아파트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창가의 침대에 누워 나를 반겼다. 평소 차분한 그였지만 이날은 왠지 유난히 들떠 보였다. 친정엄마에게 선생님 좋아하시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내려서 드리라고 계속 채근을 했고, 커피를 내가 다 마시자마자 수정과도 준비했다며 다시 엄마를 재촉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내 말에, 처음에는 콧줄을 달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 아이들이 충격을 받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다시 돌아온 엄마를 아이들은 반겼고, 심지어 이제는 절대 떠나지 말라며 아이들이 팔목에 수갑 같은 팔찌를 채워놓았다며 웃었다.
나는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그 ‘해야 할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고 찬찬히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그는 내게 말했다.
“주문한 피아노 내일 집에 들어와요.”
퇴원 후 그는 바람에 날려갈 듯한 그 앙상한 몸으로 매일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동화책을 읽어주고, 작은 전자 피아노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엄마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 꼭 한 번 건반 피아노의 맑은 소리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내일이면 그게 현실이 될 것이기에 그는 들떠서 환히 웃고 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그의 얼굴이었다. 그 환한 웃음을 남겨두고 일주일 뒤 새벽 그는 하늘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 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렸기에 나는 다음날 우리 호스피스 팀원들과 조문을 갔다. 그의 친정엄마는 우리 가정호스피스 간호사 선생님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흐느끼며 울었다. 그 옆에서 고인의 남편도, 여동생도, 그리고 시부모님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다 함께 그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꺼내 놓으며 나누다 보니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얼굴에 어느새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비록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극복하고 새롭게 도전했던 시간들은 돌아보니 분명 해피엔딩이었다. 슬픔이 비극과 상처로 남지 않고 웃음과 위로로 추억되는 이 순간이 호스피스를 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선물이고 보람이다. 장례식장을 떠나며 남편과 악수하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아이들 곁을 지켰던 엄마의 용기를 아이들이 커가면서 분명 깨닫게 될 거예요. 그 용기는 고스란히 남아 평생 아이들의 삶을 지탱해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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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민속마을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설화산 자락에 있는 옛날 마을이다. 일부러 꾸며 만든 눈요기용 민속 마을이 아니다. 단장이야 좀 했지만 겉치레에 흐르지 않았다. 이곳은 500년간 이어진 ‘예안 이씨’ 집성촌이다. 지금도 일부 후손들이 산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즐비해 이색적이며, 하나같이 묵은 시간의 잔영이 더께로 쌓여 고색창연한 마을이다.
마을 길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일 없이 거듭 휘어져 나직한 선율처럼 포근하다. 느린 걸음으로 걷기에 좋은 골목길이다. 발길이 느려지면 풍경이 한결 세밀해져 살갑게 다가온다. 첫눈에 정겨운 건 돌담길이다. 집과 집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마을 사이사이로 흘러가는 돌담길 길이는 자그마치 5.3km에 이른다. 외암마을의 시그니처 구조물이라 할 만하다. 예로부터 외암은 ‘삼다(三多) 마을’로 통했다. 양반이 많고, 양반들의 글 읽는 소리가 흔하며, 돌이 유독 많다는 건데, 땅을 파면 온통 돌투성이 지질이란다. 따라서 돌담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등장했다. 이는 어쩌면 주민들이 집단으로 창작한 환경미술에 가깝다. 그 이미지는 수더분하나 아름다우며, 기법은 소박하지만 능란한 것이니까. 돌담길은 미로처럼 얽혀 퍼져나간다. 길 끝이란 없다. 끊길 듯하다가도 다시 이어진다. 마치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떠돌이 인생의 상징처럼.
신창댁에서 객을 싣고 시동을 건 돌담길은 온 마을을 감고 휘돌며 덩실한 양반 고택들과 조촐한 초가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주요 반가(班家)들은 대체로 마을 안길 북쪽에 있다. 이곳은 일반 민가들이 들어앉은 남쪽보다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다. 그래 마을을 보듬은 설화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계류의 범람을 피할 수 있다. 즉 주거 여건이 좋은 심층부다. 종가, 사당, 송화댁, 참판댁 등 상류층 가옥들이 주로 여기에 산재한다. 개중 핵심은 건재(建齋) 이상익(1848~1897)이 1869년에 지은 건재고택이다.
건재고택은 우람하면서도 정교한 구조를 지닌 집이다. 떡 벌어진 행랑채 중앙에 자리한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마당과 사랑채가 있고, 그 뒤편에 정갈하고 수려한 구색으로 돋보이는 안채가 있다. 건재고택이 유명한 건 사랑채 앞마당에 조성한 정원 때문이다. 조선의 옛집들을 보면 크거나 작거나 사랑채 마당을 거의 여백으로 남겨둔 걸 알 수 있다. 조경이라야 그저 소나무나 배롱나무 두어 그루 심거나 자그만 화단을 만든 게 고작이다. 옛사람들은 마당에 굳이 나무를 잔뜩 심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집으로 들이치는 산야의 경관을 만끽하며 내면에 자연을 들여놓는 걸 즐겼을 뿐이다. 이와 같은 전통 미학을 차경(借景, ‘풍경을 빌려온다’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건재고택의 사랑채 마당엔 수목이 빼곡하다. 용트림처럼 절묘하게 비틀린 채 생동하는 노송을 비롯해 갖가지 정원수를 보라. 화려한 정원이다. 괴석과 석조 장식물에 정자까지 다양한 조경 요소를 조밀하게 배치하기도 했다. 당최 여백이 없어 답답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허공으로 펼쳐진 나무들의 가지로 인해 한낮에도 어둑하다. 전통 범례를 초월한 이 정원의 이질성은 오히려 묘한 미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미태의 레이스를 펼치는 나무들의 모습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뭔가 웅숭깊은 맛을 자아내는 이곳에서 신령스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 정원을 전문가들은 대체로 일본식 조경 방법을 따른 것으로 본다. 조선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공간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집 마당 가운데 나무를 심은 것은 방에 나무를 심은 것과 같다’며 평가절하하는 견해도 있다. 사랑채와 대문이 일직선상에 놓인 바람에 집안의 기(氣)가 빠져나갈 수 있어 비보(裨補) 용도로 나무들을 심었다는 얘기도 있다.
건재고택에선 추사 김정희를 살짝 만날 수 있어 매력을 더한다. 추사체로 쓴 현판과 주련 다수가 걸려 있어 문기(文氣)가 풍긴다. 이 집은 추사의 두 번째 부인 예안 이씨의 친정이다. 이런 인연으로 추사가 글씨를 남겼다. 낙관이 박힌 추사의 친필은 5점 정도로 파악된다. 건재고택엔 오랫동안 빗장이 걸려 있었다. 개인 소유였던 데다 소유권 소송 문제 등이 겹쳐 문을 닫아뒀던 것. 그러다가 2019년 아산시가 인수한 이후 요즘은 하루 두 차례 일정한 시간에 개방한다.
맹사성 고택은 최고(最古) 민간 주택
건재고택 뒤편 저만치엔 참판댁이 있다. 건재고택과 함께 외암리를 대표하는 집이다. 현재 종손 일가가 산다. 여느 빈집과 달리 사람의 온기로 숨을 쉬는 집이다. 규모로나 구조로나 완연한 대갓집이다. 참판 벼슬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8~1950)의 고택으로 고종이 하사한 집이다. 고종이 왜? 이정렬은 똑 부러지는 기개로 할 말 다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일제의 침략 야욕 저지를 탄원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하나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이정렬은 말 등에 거꾸로 올라타고 대궐에 들어가는 진기한 시위를 했다. 조회를 주관하던 고종이 경악할 수밖에. 이 통렬한 장면에 대해 황성신문은 이렇게 썼다. ‘아침 햇살에 봉황이 울었다.’ 이정렬은 종단엔 ‘나라 망하는 꼴은 차마 못 보겠다’며 벼슬을 던지고 낙향했다. 이후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다지. 그걸 안 고종이 먹고살 만한 재산을 보냈으나 세 차례나 사양하며 돌려보냈고, 이번엔 고종이 낙선재의 축소판쯤 되는 집을 지어줬는데 그게 지금의 참판댁이다. 이 집의 처마엔 금색으로 ‘퇴호거사’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퇴호는 고종이 이정렬에게 내린 별호다. 현판은 고종의 아들 영왕이 9세 때 썼다. 이정렬의 못 말릴 결기와 고종의 대범한 풍모가 겹으로 환히 비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발길은 이제 설화산 너머 배방읍 중리에 있는 맹씨행단(孟氏杏壇)에 닿는다. 조선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인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고택이 있는 곳이다. 이 집의 주인은 본래 고려 말의 무신 최영 장군이었다. 한편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였다. 이런 연고로 최영이 맹사성에게 집을 물려줬다. 집의 형상은 그지없이 조촐하다. 물질에 무심한 청백리의 살림집답게 단출하다.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으스러진 게 많은 집이기도 하다. 덩달아 보수와 변형도 잦았다. 엄밀한 분석을 할 경우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복화반 정도가 이 옛집에 남은 원 구조물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고려 말에 지어진 집이라는 사실엔 하자가 없다. 우리나라에 남은 최고(最古)의 민간 주택으로 간주되는 집이다.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세종조의 황금기를 쌍두마차처럼 이끌었던 주역이다. 정치인다운 기량은 물론 청렴결백으로 당대의 사표가 된 인물이다. 그의 말년 생활은 소박해, 이를테면 집에서 기르던 소를 타고 돌아다니는 정도에서 자족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겸손해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허름한 이가 방문할 때에도 반드시 예를 갖추어 맞이했다. 매사 목에 힘을 주는 법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고결한 인품이 흔하던가? 저마다 꿍꿍이와 내숭을 장착하고 각축을 일삼는 게 속세다. 맹사성의 성정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고 한다. 그의 온유한 정신은 세상의 어둠을 감쌀 수 있는 치마폭 같은 것이었다.
정종호 온양문화원 원장
“락페스티벌 펼쳐 성황 이뤄”
아산시는 1995년 1월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면서 새로운 출발을 했다. 근래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형 산업체들이 입주하면서 지역사회에 역동성을 불어넣고 있다. 지역문화를 향유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문화원이 해야 할 역할이 많아졌다. 책임감도 느낀다.” 이는 정종호 온양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아산시 인구가 38만여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유입이 많았다. 아산에서 출생한 2세대도 많은데, 그들은 아산의 미래를 짊어질 소중한 자산이다. 우리 문화원은 아동이나 청소년은 물론 젊은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반응은 매우 좋다. ‘전통놀이와 내 고장 알기’ 같은 프로그램에 경쟁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의 위력에 눌려 퇴색하기 쉬운 게 전통문화다. 옛것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 세대가 많다고 보나?
“현대적인 문화를 즐기는 경향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지역의 옛것에 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한 문화재 탐사 프로그램을 적극 가동하고 있다. 이 역시 참여도가 높다.”
아산은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요즘도 온천에 사람들이 몰려드나?
“아산시 온양지구의 온천은 백제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실 온천 역할을 할 만큼 유명했다. 1980년대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이후 생활상의 변화에 따라 한동안 온천의 인기가 저하됐지만 서울-아산 간 전철이 개통되면서 상황이 개선됐다. 전국의 어느 온천 지역보다 양질의 수질을 공급한다는 점도 이 지역 온천의 강점이다.”
요즘 아산시에서 부각된 문화 이슈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온천 문화의 보고인 ‘온양행궁’의 복원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아산 시민의 숙원이자 지역 발전을 위한 핵심 사업이다. 그러나 재원 문제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온양문화원이 추진한 중점 사업과 성과엔 어떤 게 있나?
“신정호수공원을 신정호 아트밸리로 이름을 바꾸고 전국 최고의 명품 공원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미 문화예술과 생태가 어우러진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온양문화원은 ‘락페스티벌 달그락’을 주관하기도 한다. 지난 8월에 열린 행사엔 노브레인, 육중완밴드, 크라잉넛 등 21개 팀이 참가해 열띤 공연을 펼치며 성황을 이루었다. 전국 최고의 페스티벌로 키워나갈 참이다.”
요즘은 문화원마다 전통문화 보존 활동에서 나아가 한결 트렌디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이는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문화원이라 하면 흔히 옛날 문화를 축으로 삼아 활동하는 걸로 오해한다. 사실 문화원은 이미 변화했으며, 변신에 더욱 가속을 붙이고 있다. 현대 문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온양문화원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프로그램을 다수 개발했다. 타 문화원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잦다.”
사별, 이혼, 독립 등으로 혼자 사는 노인이 증가하면서 생기는 돌봄 공백에 따라 요양시설 수요가 급격히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령이나 노인성 질병 탓에 일상생활이 힘든 사람을 대상으로 서비스 혹은 돈을 지급하는 ‘장기요양급여’ 제도가 마련돼 있다. 장기요양급여는 재가·시설·특별현금 급여 세 가지로 구분된다. 재가급여는 방문요양, 방문목욕, 방문간호, 주·야간보호와 단기보호, 복지용구 제공 서비스를, 시설급여는 노인요양시설 또는 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에 장기간 입소한 수급자에게 신체활동 지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별현금급여는 수급자가 도서・벽지 등 장기요양기관이 부족한 지역에 거주하면 현금으로 요양급여를 지급한다.
현행 장기요양급여는 재가급여 우선 제공을 원칙으로 한다. 장기요양 1∼2등급은 재가급여 또는 시설급여를 이용할 수 있지만, 3∼5등급은 재가급여를 제공받는다. 가족 돌봄이 어렵거나 주거환경이 열악한 경우, 치매 등에 따른 문제행동으로 재가급여를 이용할 수 없을 때에만 예외적으로 시설급여 이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보험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독거・무배우 노인의 요양시설 수요와 과제’에 따르면, 노인요양시설 이용자가 2008년 장기요양보험 제도 도입 이후 점진적으로 증가해 2022년 약 24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재가급여를 원칙으로 하는 3~4등급이 약 69%를 차지했다. 재가급여를 이용할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가 늘어난 셈이다.
더불어 보건복지부의 장기요양실태조사(2019)에서는 장기요양 인정자가 1인가구 또는 무배우자일수록 불가피하게 요양시설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시사했다. 하지만 보험연구원의 분석 결과 2022년 기준 노인요양시설의 정원은 약 22만 명(4372개 소)으로, 대체재인 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 정원(1만 5707명)과 요양병원 병상 수(최대 26만 7725개)를 더하더라도 최대 수용인원이 50만 명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송윤아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원은 “85세 이상 1인 가구는 약 26만 명에서 45만 명으로 7년 사이 1.7배 이상 증가하고,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는 85세 이상 고령자는 2023년 약 102만 명에서 오는 2030년 158만 명이 될 것”이라며 “독거 또는 무배우 노인의 경우 돌봄 공백 발생으로 요양시설 이용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령 1인가구 증가세와 함께 노인요양시설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어 “재가우선 제공 원칙을 유지하되 불가피한 요양시설 이용 수요 증가에 대비해 노인의 지역사회 계속 거주에 방점을 둔 요양시설 확충과 시설서비스 내실화 및 다양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충분한 재가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시설 이용이 불가피한 노인층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설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서비스 수준을 제고해야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정부는 제3차 장기요양기본계획(2023~2027)을 발표하고 △돌봄 필요도가 높은 1・2등급 수급자의 재가급여 월 한도액(2023년 188만 5000원)을 시설입소자 수준(245만 2500원)으로 단계적 인상 △통합재가서비스 확대 △재가서비스 다양화 및 내실화 △재택의료서비스 및 방문간호 확대 △주거환경 개선 지원 등의 내용을 포함했다. 시설급여와 관련해서는 공급부족 지역을 중심으로 공립 노인요양시설을 확대하고, 요양시설 진입 제도를 개선하도록 제시했다.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차에서 내려 북적이는 부산역 역사를 빠져나온다. 역 광장을 가득 채운 건 가을 햇살이다. 그것은 체로 거른 듯 맑아 상큼하다. 발길에 절로 탄력이 붙는다. 부산역 맞은편 초량동 골목엔 ‘이바구길’이 있다. 부산 동구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옛날 동네다.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을 통해 동네의 근현대 문화와 풍속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다.
이바구길 초입엔 ‘구 백제병원’이 있다. 국가등록문화재로 ‘근대건조물’이라는 팻말을 달고 있는 서양식 건물이다. 그런데 외관이 범상치 않아 도드라진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지은 건물이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멀쩡한 외모를 유지한 게 아닌가. 100년 풍상에 시달린 건축이라면 보통 낡은 기미를 풍기게 마련이다. 시들고 삭은 기색으로 시간의 횡포를 웅변하거나 고색창연한 운치를 돋우기 십상이다. 그러나 애초 워낙에 잘 지은 덕분일까, 이 4층짜리 적벽돌집 외형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당대의 첨단 건축 기법을 통해 등장한 건물인 걸 직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부는? 아쉽게도 원형을 많이 잃었다. 1972년에 발생한 화재로 많은 것이 잿더미로 스러졌다. 외부와 달리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한 탓에 피해가 컸다. 이후의 보수 작업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건물주는 원형을 복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벽면과 바닥의 형태는 물론 천장을 도배한 그을음까지 그대로 놔두었다. 기본이 원체 튼실해 뼈대까지 손볼 필요는 없었다. 이를테면 벽체 거죽이 얼마나 단단한지 콘크리트못 하나 박아 넣을 수 없었다니 말 다했다. 현재 이 빈티지한 건물 1층엔 카페가 있다. 묵은 세월이 새겨 넣은 신비감까지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재생 공간만이 가질 수 있는 투박함과 묵직함에 예술적 디테일, 나아가 건물 역사의 스케일까지 가세해 민감한 이들의 오감을 자극한다. 2층엔 창비출판사가 차린 복합문화공간 ‘창비 부산’이 있다.
저 옛날의 백제병원은 외과의사 최용해가 지은 대형 사립병원이었다. 그런데 건물의 용도 변화 여정이 다채로워 흥미롭다. 개업 5년이 지난 1932년, 최용해는 기묘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일본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그러면서 건물은 동양척식회사로 넘어갔다. 이후 ‘봉래각’이라는 이름의 청요릿집이 들어섰다. 중일전쟁이 터지면서는 일본군 장교 숙소로 쓰였다. 해방 직후엔 부산 치안사령부 건물로, 1950년엔 중국 임시대사관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엔 개인에게 불하되면서 예식장으로 바뀌었다. 이후의 양상은 생략하더라도 어지러울 지경으로 변동이 잦았던 걸 알 만하다. 말하자면 ‘구 백제병원’은 부산의 사회사와 풍속사가 압축파일처럼 내장된 건물이다. 따라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 모든 게 변한다는 걸, 흘러가고 지나간다는 걸, 세상에서 나그네 아닌 게 없다는 걸 일깨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승도 추락도, 기쁨도 슬픔도 그저 지나가는 것일 뿐이련만, 고정불변의 것으로 바라보는 착시와 오해를 교정하라 묵시하는 곳일 수도 있다.
아슬아슬한 ‘168계단’이 품은 사연
이바구길을 따라 이제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을 움켜쥐고 빼곡히 들어앉은 집들이 보인다. 간혹 새집도 섞여 있지만, 주로 자그맣고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간신히 숨을 쉬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곳은 삶의 변방이었다.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천신만고한 생활이 펼쳐졌던 곳이다. 의지가지없던 피란민들은 이곳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피란민뿐이랴. 부두 노동자, 자갈치시장 일꾼, 공장 근로자, 영세상인 등 중심부에서 소외된 서민들이 초량동에서 비지땀을 쏟으며 간절한 삶을 꾸렸다. 이바구길은 이렇게 유적처럼 남은 과거사의 명암과 요철을 이바구하는 길이다. 동네에 고인 문화적 요소를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가시적으로 재구성한 문화재생 테마길이다.
볼거리는 충분히 많다. 발목 잡힌 듯 딱 멈추게 되는 건 ‘168계단’ 앞에서다. 좁고 길고 가파르기 짝이 없다. 허공에 펼친 사다리처럼 아슬아슬한 계단이다. 산동네 사람들은 이 험악한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면제받지 못한 채 생활을 도모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아래 있었던 우물물을 퍼 나른 루트였으며, 노동의 피로를 한잔 술로 달래고 휘청휘청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들의 발길에 닳고 닳은 계단길이었다. 희망을 품고 고역을 감수했던 주민들의 일상이 계단에 비쳐 먹먹하다.
‘168계단’ 옆에는 ‘김민부 전망대’가 있다. 부산에서 출생해 31세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시인 김민부를 기리는 공간이다. 그의 시는 빼어났으나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거의 잊힌 시인이 됐다.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자로 알려진 게 고작이다. 일찍이 김민부 시의 천재성을 증언한 논자들이 다수였지만 정작 그는 궁핍에 시달렸다. 시는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높이 날았으나 종단엔 실존의 비애로 무너졌다. ‘김민부 전망대’에 오르거든 그의 이름을 가슴으로 한번 호명해볼 일이다. 참으로 반가운 건 부산에서 ‘김민부 문학제’가 연례행사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속세란 더러 경박하지만 야박한 것만도 아니다. ‘168계단’을 거쳐 언덕 중턱에 이르면 ‘유치환의 우체통’을 만날 수 있다. 부산 동구에서 살다 타계한 유치환 시인을 추모하며 만들었다. 마음에 둔 이에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다. 과거나 미래의 자신에게 쓰는 편지여도 좋겠다.
발길은 이제 ‘문화공감 수정’에 닿는다. 일제가 조선 침탈의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엔 일본식 가옥이 여럿 있다. ‘문화공감 수정’은 개중 번듯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지은 일본식 전통 목조주택이다. 창호 문양 같은 세부 장식의 다양성,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급변하는 실내 공간 구성이 특징적이다. 한옥과 달리 복도 공간을 정교하면서 활달하게 구사한 대목 역시 일식의 전형이다. 이모저모 본때 있게 지은 집이다. 관리 상태도 최상이다. 전국에 적산가옥(敵産家屋, 자기 나라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 소유의 집)이 남아 있지만 이곳처럼 잘 보존된 집이 드물다고 한다.
1943년에 지어진 이 집은 해방 뒤 한국 사람에게 불하된 뒤 ‘정란각’이라는 고급 요정으로 쓰였다. 2007년에 이르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적산가옥을 쳐다보기조차 싫어했다. 부끄러운 역사의 잔재로 인식해 철거나 개조를 능사로 삼았다. 그러나 적산가옥을 모조리 없애버린다면? 그럼 일본 정부가 반색하지 않을까? 침략의 증거물이 사라지니까.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가 겹으로 엉겨 있는 ‘문화공감 수정’은 캄캄했던 전 시대를 돌아보게 한다. 이곳 내부는 기능성과 미학으로 빼어나다. 온통 유리창을 낸 전면으로 들이치는 정원 풍경도 수려하다. 한때 이곳은 카페 공간으로 소비되었다. ‘인스타 핫플’로 유명했다. 그러면서 역사적 상징성이 흐려졌는데, 2021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역사 전시공간으로 전환했다. 옳은 결정이다.
정정숙 부산동구문화원 원장대행
“부산 동구는 부산 문화의 본산지다”
‘부산 동구를 알면 부산 전체가 보인다’는 말이 있다. 지역사와 문화 측면에서 동구에 유형・무형의 많은 자산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동구엔 인적・물적 유입은 물론 문화 교류의 통로인 부산역과 부산항이 있다. 정정숙 문화원장대행은 이와 같은 정황을 근거로 ‘동구가 부산의 뿌리 역할을 했다’고 본다.
“동구는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한 이래 명실상부한 부산의 관문으로 기능했다. 부산역 역시 문화자산을 축적하는 문물의 유입 경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러한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동구의 문화가 성장했으며, 여기에서 나온 에너지는 부산 전역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며 확산됐다. 동구의 문화는 한마디로 부산 문화의 본산이자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부산이라는 지명 자체가 동구에 있는 증산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동구의 문화 파워를 대표하는 공간을 꼽는다면?
“동구의 히스토리를 고스란히 담은 문화재생 테마 골목길인 ‘이바구길’이다. 이 길은 부산시가 2011년부터 추진한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을 통해 탄생했는데, 매우 재미있고 매력적인 곳이다. 꼬불꼬불 연달아 이어지는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만날 수 있는 풍경과 명소마다 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다. 길을 걸으며 과거를 만나고, 그러다 문득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이바구길 인근에 있는 차이나타운과 연계해 답사하면 한층 즐겁다.”
31세에 요절한 천재 시인 김민부를 기리는 ‘김민부 문학제’가 부산에서 운영되고 있어 반가웠다. 문학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시피 한 이름이라서.
“김민부 시인은 우리 동구의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혼을 기리기 위해 이바구길에 ‘김민부 전망대’를 조성했지만 미흡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공간 확장이나 시인을 재조명하는 문학 행사 활성화 대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부산동구문화원이 추진하는 역점 사업을 소개해달라.
“우리는 25개의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구민들의 호응도가 매우 높다. 특히 ‘노래교실’이 인기다. 무려 5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해 노래를 즐긴다. 옛 추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이 역시 반응이 좋다.”
예술 프로젝트 ‘꿈의 오케스트라 부산’을 운영하는 목적과 성과도 궁금하다.
“‘꿈의 오케스트라’는 문체부가 주관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국가 사업으로 전국 여러 곳에서 펼쳐진다.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동구문화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불우 청소년을 위한 음악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의 한국형 모델이다. 음악의 힘으로 사회에 희망을 부여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현재 단원은 오디션을 통해 뽑은 초2부터 고2까지 60명, 음악감독 1명, 강사 9명으로 구성돼 있다. 성과는 매우 크다. 정기 연주회와 작은 연주회를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아이들이 음악을 즐기며 밝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라 다행스럽다. 이 아이들 중에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나올 수도 있을 테고.”
도서관도 카페처럼 자주 머무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도서관에 방문하여 책과 오랜 시간을 보내자.
다산성곽도서관
서울 중구 동호로17길 173
서울의 성곽길에 위치한 도서관. 자연의 싱그러움을 내부 공간에 표현하여 편안한 독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청운문학도서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36길 40
작은 폭포가 보이는 한옥 도서관이다. 다양한 문학책을 읽으면서 아지트 같은 한옥에서 사색을 즐기자.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서울 종로구 북촌로 134-3
삼청공원 내에 위치해 있어서 산책하다가 들러도 좋은 곳. 아늑한 공간에서 도서관 나들이를 하는 건 어떨까.
아차산숲속도서관
서울 광진구 워커힐로 127
아차산 어울림정원 옆에 위치한 도서관이다. 숲속에서 책 읽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야외 책 쉼터에 머물자.
오동숲속도서관
서울 성북구 화랑로13가길 110-10
목재 건축물이 돋보이는 숲속 도서관. 창가에 자리 잡으면 숲의 풍경을 바라보며 휴식할 수 있다.
1인 가구 증가, 고령화 등 인구 구조 변화에 대한 주거 대안으로 ‘공동체 주택’이 떠오르고 있다. 공동체 주택이란 독립된 공동체 공간(커뮤니티 공간)을 설치한 주거 공간으로, 공동체 규약을 마련해 입주자 간 소통‧교류를 하며 생활 문제를 해결하거나 공동체 활동을 함께하는 새로운 형태의 주택을 말한다. 그간은 청년을 중심으로 공동체 주택이 증가·보급되어 왔는데, 초고령사회를 앞둔 현재는 고령자를 위한 공간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정말 고령자 공동체 주택은 필요할까, 그리고 장단점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찾고자 서울시 내에 있는 어르신 공동체 주택 ‘해심당’을 직접 찾아가 봤다.
‘따로 또 같이’ 공동체 주택
서울시 도봉구 소재의 어르신 맞춤형 공동체 주택인 ‘해심당’(海心堂)은 바다와 같은 마음과 따뜻한 햇살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어르신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집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도봉구청, 사회단체가 협업해 만들었다. 기존 노후 주택을 신축해 재탄생된 곳으로 2021년 문을 열었다.
총 21세대가 살 수 있으며, 1층에는 장애인, 2·3층은 1인 가구, 4층은 부부 세대가 거주할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배리어프리(무장애) 디자인이 도입됐다. 거주 공간뿐만 아니라 복도 등 공용 공간에도 손잡이를 설치했고, 단차를 최소화했다. LH 최초로 소규모주택 배리어프리(BF·무장애) 인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해심당의 입주 조건은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의 50% 이하’로 정해져 있다. 임대료 시세는 주변 시세의 45% 수준으로 보증금은 월 800만 원, 임대료는 월 40만 원 정도이다. 일반인 입장에서는 저렴하다고 느껴지지만, 저소득층에게는 부담이 되는 금액이다.
앞서 말했듯이 4층을 제외하고는 해심당의 거주 공간은 1인 가구를 위해 설계됐다. 입주를 원해 방을 둘러 본 이들은 ‘집이 임대료 대비 좁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터줏대감인 이현민 자치회 총무 역시 “공간 자체가 작긴 하다. 입주 당시 물건을 많이 정리했고, 늘 정리해야만 한다. 반대로 장점도 되는 것 같다. 공간을 깔끔하게 유지하게 되고, 또 생활하기 편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심당의 매력은 ‘공동체 주택’이라는 데 있다. 이에 따라 1층에는 카페 ‘향’이 있고, 2층부터 4층까지 각 층에는 입주민들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안마 의자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주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옥상의 ‘키친 가든’이다.
키친 가든은 해심당 설계에 참여한 이연숙 연세대 명예특임교수가 특히 신경 쓴 공간이다. 정원과 텃밭이 합쳐진 복합 공간으로 도시 농업이 가능하도록 체계적으로 설계했다. 꽃, 식물뿐 아니라 채소, 허브 등을 심고, 입주민들은 직접 기른 작물을 수확해 먹는다.
특히 키친 가든 관리를 맡은 이현민 총무는 이곳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매일 정원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무엇이 심어져 있고, 열매는 언제 맺는지 다 알고 있다. 이현민 총무는 “교수님이 친환경을 목표로 만든 곳이라서 사용하는 비료도 정해져 있다. 그런데 주민들이 화학 비료를 막 뿌려서 나는 반대했다. 그래서 우리가 주민인데 왜 교수님 편을 드냐고 갈등을 빚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공용으로 만드는 공간이다 보니 갈등도 종종 일어났다. 입주민들은 얘기를 나누며 의견을 조율했고, 본래의 목적대로 친환경 도시 정원 형성을 이어가고 있다. 함께 기른 작물을 나눠 먹으면서 이웃 간의 정도 더욱 끈끈해졌다. 올여름에는 샐러드 파티도 열렸다. 이현민 총무는 “최근에도 호박이 나서 모두에게 나눠줬다. 그런데 요리를 못 하시는 분들은 안 가져가려고 해서 내가 감자를 사서 호박과 같이 전을 부쳤다. 그래서 모두에게 호박이 돌아갔다”라고 덧붙였다.
가족 아닌 가족, 노인 갈등 해결해야
해심당은 노인들이 이곳에서 공동체로 외롭지 않게 살며, 자립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설계된 곳이다. 초반에는 일자리 제공도 했다. 실제로 이현민 총무는 입주와 동시에 일자리가 생겼다. 1층 카페 ‘향’에서 실버 바리스타로 일한다. 이 총무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는 열정을 발휘했다고. “특별한 직업이 없었는데 해심당 입주 후 2년째 일하고 있다. 집에서 내려오면 바로 일할 수 있고, 주민들과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취미, 운동 등을 함께 하는 커뮤니티 활동은 예상과 달리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LH의 공동체 활동 지원이 끊긴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해심당의 임대 관리를 맡은 김익 유니버설하우징협동조합 본부장은 “다른 서울시의 공동체 주택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끼리 공통점이 있고, 유대관계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만 65세 이상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면서 “작년에는 외부 강사를 초청해서 총 16강짜리의 심리 치료 및 건강 증진 프로그램을 했다.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입주민들의 체력적 조건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김익 본부장은 짚었다. 그는 “사실 건강한 분들이 계셔야 커뮤니티 활동도 가능하다고 본다. 해심당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많은 상황이다. 그래서 다 같이 모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면서 “벌써 두 분이 돌아가셨고, 곧 요양원에 가신다는 분도 계신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공동체 활동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어르신들이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현민 총무는 “정말 많이 싸웠고, 지금도 맞춰가는 과정인 것 같다. 우리는 가족 아닌 가족 사이기 때문에 싫어도 매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익 본부장은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진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르신들이 사소한 것으로 많이 다투신다. 그런데 금방 화해하시기도 한다”면서 “싸우는 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김익 본부장은 이현민 총무가 공동체 운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칭찬했다. 이현민 총무는 “참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 남편이 부도를 두 번씩이나 맞아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저는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다. 제가 어디를 가나 몇 명만 모이면 리더가 되는데, 그래서 여기서도 총무가 됐다. 총무라고 어떤 보수가 있는 것도 없는데, 정의감에 불타는 성격이라 불이익을 그냥 지나칠 수 없고 꼭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현민 총무는 공동체 주택에 장점이 더 많다고 느낀다. 그는 “다 같이 모여 사니까 외롭지 않은 게 제일 크다”라면서 “저도 누군가 도와줄 수 있고, 제가 어려움에 처하면 저를 도와주는 분들도 많다. 그럴 때 의지가 되고 보람도 많이 느낀다. 가족처럼 외식하러 나가서 맛있는 것 먹는 것도 좋고”라고 설명했다.
김익 본부장은 “우리 회사에서는 나중에 실버타운을 만드는 것도 생각하고 있는데, 이곳을 관리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다. 고독사 예방 등, 노인에게 공동체 주거 공간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민간 운영 기관에 전적으로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 지자체 차원에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심당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이현민 총무도 앞으로 노인 공동체 주택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때때로 그의 태도나 인식 변화가 엿보인다. 현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장르는 더 그러하다. 줄곧 정치·사회 이슈를 다뤄온 이마리오(52)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에게도 뚜렷한 변곡점이 포착됐다. 모노톤의 어둑했던 포스터들을 뒤로하고 형형색색 꽃이 만발한 포스터가 등장한 것. ‘갑자기 왜?’라는 의문을 풀러 이 감독이 있는 강원도 삼척으로 향했다. 이내 그곳과 한껏 어우러진 그의 모습에서 ‘저절로 자연스럽게’ 답을 찾았다.
이마리오 감독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더 블랙’ 등을 통해 사회문제를 날 선 시각으로 비춰왔다. 강원도 동해 출신인 이 감독은 대도시 서울에서의 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단다. 그중에는 외면하기 힘든 현실, 불편한 진실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시한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다큐멘터리를 택했다. 작품을 이어가던 그에게 어느덧 수많은 ‘앎’이 삶의 피로로 다가왔다. 타인과 사회를 비추던 앵글이 스스로를 향하던 순간이었다.
“서울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일손이 늘 모자라잖아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힘들어하는데 차마 ‘나 서울 못 살겠어’라며 도망치듯 떠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마침 강릉에서 미디어센터를 만드는데 함께 준비해달라는 제안이 온 거예요. 굉장히 그럴듯한 핑계가 생긴 덕분에 서울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죠. 막상 ‘그래도 가지 마라’ 붙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요.(웃음) 그렇게 마흔을 앞두고 강릉에 내려왔습니다.”
고향과 가깝고 인맥도 있는 강릉인지라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대도시에서 탈출(?)한 해방감과 자유는 만족감으로 다가왔다. 벌이나 씀씀이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상은 더욱더 풍요로워진 기분이었다.
“대도시 삶과의 차이를 꼽자면 시간과 생활을 주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서울에서는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 속 하나의 부품처럼 무언가에 끌려가는 듯했고, 존재감도 작았죠. 그런데 지역에 살다 보니 내가 삶을 결정하고 컨트롤할 수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데, 전에는 안 됐으니까요. 또 서울에서는 꼭 내가 아니더라도 그 일을 해낼 사람들이 있었다면, 여긴 인구도 적고 이 분야 전문가도 부족한 편이잖아요. 똑같은 역량을 가지고도 쓰임새가 훨씬 많아진 거죠. 나의 쓸모를 발휘하며 주도적으로 사니 자존감도 높아졌고 삶도 충만해졌어요.”
현실로부터 현실을 바꾸는 다큐멘터리의 힘
일상이 바뀌자 자연스레 시선도 변화했다. 한때는 사회 이슈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냉철하게 바라봤지만, 이제는 둥글둥글 온정 어린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다. 다정하고 따뜻한 것들을 자꾸 마주하다 보니 카메라에도 담아보고 싶어졌다. 그러던 차에 이 감독의 시선은 강릉의 구도심 명주동의 ‘작은정원’에 머무르게 된다.
“명주동에 ‘작은정원’이라는 이웃 모임이 있는데요. 여기에 최소 40~50년 한 마을에 살았고 서로 30년 넘게 알고 지낸 주민들이 계시거든요. 이분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스마트폰 사진 촬영 프로그램을 서포트했는데, 그때부터 언니들과의 인연이 시작됐죠. 수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큐로 담아보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3년 정도 수업을 더 이어가다가 영화 제작을 결심했죠.”
그가 언니라 말하는 이들은 평균 나이 75세인, 영화 ‘작은정원’ 주인공들이다. 보통 우리 사회에서 여성 노인들에 대한 호칭은 할머니나 어머니 아니면 어르신, 선생님 정도일 것이다. 초반엔 이들도 그러한 호칭을 썼는데, 어쩐지 거리가 느껴졌고 언니들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그러다 누군가 우연히 ‘언니’라 불렀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그날부터 명주동 할머니들은 모두의 언니가 되었다. 이제는 촬영 스태프도, 동네 청년들도, 영화를 본 관객들도, 너나 할 거 없이 그들을 언니라 부른다.
“저도 처음엔 어머니뻘이라 언니라는 말이 어색했는데, 막상 입에 붙고 나니 너무 좋더라고요. 관객평 중에 그런 말이 기억에 남아요. 강릉 명주동에 가면 그런 언니들이 있고, 그런 언니들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언니’라고 부를 것만 같다는. 저도 요즘은 관객들을 만나면 그 얘기에 보태 명주동을 한 번씩 들러주시고, 그곳에서 언니들을 보시면 꼭 ‘언니’ 하고 아는 체를 해달라고 권해요. 어떻게 보면 영화 속 이야기가 바로 현실로 접목될 수 있다는 점이 다큐멘터리의 힘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자가 “영화를 보고 난 뒤 어머니에게 카메라를 사드리고 싶었다”고 이야기하자, 이 감독은 재차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힘”이라 강조했다. 또 단순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이라는 등 감상에 그치지 않고 어떤 다짐이나 실천, 행동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덧붙였다.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주죠. 창작자 입장에서도 그런 과정을 경험하지만 관객에게도 비슷하게 작용한다고 봐요. 또 현실의 상황이나 인물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에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고요. 어떤 분은 영화를 보고 나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하셨대요. 사실 그 정도 반응을 이끈 것만으로도 성공한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해요. 우리 영화가 그렇게 누군가에게 어떤 계기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카메라에 담긴 ‘진짜 나’와 마주하다
다큐멘터리 창작자는 사건이나 인물에 한층 더 깊게 파고들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어떤 내막이나 내면이 드러나기도 하고, 진실을 발견하거나 해답을 얻기도 한다. 짜인 각본이 없기 때문에 결과를 두고 작업하기보다는, 결과에 다가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이 감독 또한 자신이 품었던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과정을 경험했다.
“언니들이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삶을 살 수 있지? 나도 나중에 그들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이토록 깊은 관계를 어떻게 오래 이어왔을까? 그런 궁금증들이 있었는데 촬영을 진행하며 답을 다 얻은 것 같아요. 그리고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언니들이 변화하는 과정이었어요. 구체적인 모습을 그린 건 아니지만,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 같아요.”
이 감독은 이미 그 변화를 확인 바 있다. 당시 선생님 역할을 맡았던 최승철 감독이 수업 초반 언니들의 스마트폰 사진첩을 열었는데, 90% 이상이 꽃 사진이었단다. 그랬던 이들이 점차 자신과 서로의 얼굴을 담은 사진들로 채워나가고, 영상 촬영을 배우며 영화 제작까지 뛰어들게 됐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나가며 언니들은 단편 극영화 ‘우리동네 우체부’를 완성했다. 영화는 2020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시스프렌드상을 받는 기분 좋은 성과도 얻었다. 사실 이러한 대외 평가보다 더 의미 있었던 건 언니들 내면의 긍정적 변화였다. 이 감독이 당초 확신했던 변화가 이변 없이 일어난 것이다.
“초반에는 주름진 얼굴과 굽은 등을 촬영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언니도 계셨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니, 나중엔 직접 배경이나 구도를 제안하기도 하시고, 대사하듯 일부러 이야기도 하시고요.(웃음) 점점 실력이 늘어가는 게 보였어요. 한번은 희자 언니가 밭일을 나갔다가 고춧대에 카메라를 고정해놓고 영상을 찍으셨는데 ‘대박!’ 저보다 낫더라고요. 한편으론 이 시대 젊은이로 태어났다면 더 굉장한 일들을 해내셨을 텐데 싶기도 했어요. 물론 언니들도 나이 듦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겠지만, 결국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해가셨죠. 영화에는 언니들의 셀프 영상이 많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영상으로 보면 자신의 외모나 목소리가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잖아요. 처음엔 힘들어하고 어려워하셨는데, 나중엔 그런 외적인 부분도 다 받아들이고 자신의 속내도 허심탄회하게 드러내시더라고요. 그렇게 나이 듦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픔이나 고민과 마주하며 오히려 긍정적으로 변화해가셨죠.”
흔들림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다
아직 언니들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앞서 ‘우리동네 우체부’에서 감독을 맡았던 춘희 언니는 벌써 다음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고. 이 감독에게도 차기작 계획이 있는지 묻자 “아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올해부터 삼척 도계읍에서 ‘폐광지역 통합 영상미디어센터’의 센터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당분간은 이 일에 집중할 생각이다.
“2025년이 되면 도계읍도 마지막 폐광지역 중 하나가 됩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끝나가는 시점에, 이곳에서 터전을 이뤘던 이들에게 생기는 변화에 주목하려 해요. 이미 폐광지역의 지난 역사를 기록하는 건 다른 곳에서도 많이 하고 있고요. 그보다는 폐광이 되고 난 이후에 달라지는 주민들의 생활이나 내면의 변화를 그리는 작업을 생각 중이에요. 그런 것 외에도 읍 단위 미디어센터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요즘은 그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센터 일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깃거리를 찾아가겠다는 계획이다. 언니들을 만나 ‘작은정원’을 제작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런 고마운 순간이 언제 또 찾아올지는 알 수 없지만 불안하거나 막연하지는 않단다. 때론 흔들리더라도 그 흔들림을 즐기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겠다는 이 감독이다.
“‘작은정원’ 작업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이거예요. 소위 개똥철학 같은 건데,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힌 삶을 살지 말자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거든요. 근데 작품에서도 언니들이 비슷한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그래도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싶더군요. 물론 아직은 흔들릴 때도 많지만, 언니들을 보면 나이 들었다고 해서 그런 흔들림이 사라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그 흔들림이 필요하다고 느껴졌어요. 인간은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 흔들림이 멈춘다면 생명력이 끝나는 단계라고 봐요. 그러니 나이에 상관없이 계속 그런 흔들림을 즐겨보셨으면 해요. 그렇게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이나 가능성의 씨앗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