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월은 참 무더웠습니다. 낮에는 ‘하늘의 불타는 해가 쇠를 녹인다’는 글귀가 실감될 만큼 폭염이 혹심했고, 밤에는 기록적인 열대야가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리우올림픽까지 열려 12시간 차이 나는 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시청하느라 밤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잠의 중요성을 알게 해준 계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9월, 글 읽기 좋고 잠자기 좋은 계절입니다. 원래 글과 잠은 상극인데, 이 둘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자연질서와 그 변화가 오묘합니다. 졸지 않으려고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며 글을 읽었다는 현량자고(懸梁刺股)의 고사가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은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 피가 발까지 흐르도록’ 열심히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성취하려 하거나 남보다 앞서고 싶은 사람은 잠을 줄여야 합니다. 어떤 분야든 최고 수준의 실력자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에도 잠을 줄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하루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거나 발명왕 에디슨은 친구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잤다는 이야기는 효율적인 잠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남들보다 덜 자고 남들보다 더 일한 아침형 인간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핀란드에는 ‘잠꾸러기의 날’인 7월 27일, 가족 중 가장 늦게 일어나는 사람에게 물을 끼얹거나 바다나 호수에 빠뜨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17세기부터 내려오는 이 풍습은 잠과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하루를 함께 시작하자는 독려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숙면(熟眠) 안면(安眠) 정면(靜眠) 쾌면(快眠)이며 게으르게 잠만 자는 타면(惰眠), 노곤해서 잠을 많이 자거나 계속 조는 기면(嗜眠), 잠이 잘 오지 않는 실면(失眠),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不眠)을 조심해야 합니다. 술꾼들이 헤어나지 못하는 취면(醉眠) 습관도 경계해야겠지요. 흔히 “잠이 보약”이라거나 “잠이 약보다 낫다”(Sleep is better than medicine.)고 말합니다. 건강 장수에 중요한 것 세 가지로 쾌식 쾌변과 함께 쾌면을 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 박희진(朴喜璡·1931~2015)의 ‘잠을 기리는 노래’는 5개 연으로 이루어진 제법 긴 시입니다. 마지막 연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오라 잠이여, 목숨의 자양이여, 한껏 부드러이/씨거운 살의 목마름을 풀어주곤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감로수./너를 마셔야 피가 잘 돌아/슬픈 연인들이 얼싸안은 팔다리엔/진한 모란의 향기가 흐르고,/아기들은 자라나니 너의 품 속에서,/밤에 자라나는 식물들처럼./또 새우등의 늙은이에겐/백발을 하나 더 늘게도 하나,/미래를 점치는 슬기의 꿈을 베풀기도 하는 너,/잠이여 오라.’
잠은 휴식이면서 평화입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1897)에는 사막에 누워 잠든 집시여인과, 여인이 죽었는지 자는지 살피는 사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루소는 작품의 부제에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은 망설인다.’고 썼습니다.
누구든지 잠자는 모습은 평화롭고 성스럽기까지 합니다.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파 방정환은 잠자는 어린이의 얼굴에서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얼굴을 만납니다. 그의 ‘어린이 예찬’을 읽어 봅니다.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중략)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중략)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결 같은 꽃잎, 이 세상에 곱고 부드럽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아라.”
잠은 망각이기도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제2부는 해 질 무렵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잠이 든 파우스트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파우스트는 이 잠을 통해 제1부에서 저지른 잘못과 양심의 가책을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되살아납니다. 그 잠은 망각을 통한 치유와 갱생의 잠입니다. 괴테는 파우스트가 신생을 맞는 계기로 잠과 망각이라는 중요한 장치를 설정했습니다. 치유와 갱생을 얻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하는 영면(永眠)은 곧 죽음입니다.
미국작가 워싱턴 어빙의 단편소설 ‘립 반 윙클’은 20년 동안 잠을 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조지 3세가 통치하던 시절 사냥하러 산에 갔던 사람이 이상한 경험을 한 후 낮잠을 한숨 자고 마을에 내려와 보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미 죽었고, 세상은 조지 워싱턴이라는 대통령의 시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제국주의 영국의 몰락을 뜻한다는데, 어쨌든 립 반 윙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크게 뒤떨어진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알았지만, 우리 속담에 “소대성이처럼 잠만 잔다”는 게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영웅소설 <소대성전(蘇大成傳)>에 자신을 알아주던 승상이 죽자 실의에 잠긴 소대성이 모든 일을 폐하고 잠만 자는 데서 파생된 말입니다. 소대성은 시련을 딛고 도술을 익혀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잠은 립 반 윙클의 잠과 다릅니다. 무엇인가를 예비하면서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수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모신 유비가 세 번째 찾아갔을 때 제갈량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낮잠은 유비의 인물 됨됨이와 자신에 대한 성의를 재보기 위해 미리 계획된 행위라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어떻게 잠을 자고 무슨 꿈을 꿀 것인가. 청년에게는 청년의 왕성한 잠과 화려한 꿈이 있고 시니어들에게는 또 그들과 다른 잠과 꿈이 있습니다. 시니어들의 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건강과 휴식입니다. 중요한 만큼 더욱 더 잘 계획되고 정리돼야 합니다. 짧고 깊게, 혹시 길더라도 깊게 자야 합니다.
청마 유치환의 시 ‘바위’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해서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뜨려져도/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로 끝납니다. 불의에 항거하면서 위선 앞에서 당당하고 진리와 진실을 덮는 권력에 떳떳한 인간의 절대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는 수사(修辭)로 읽고자 합니다. 유치환의 ‘바위’는 시니어들의 삶에 중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합니다. 짧고 깊게, 꿈꾸더라도 노래하지 않고 평안하게 새로운 계절 가을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1. 가락지를 낀 용의 꿈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의 할아버지는 용꿈을 꾸셨단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용의 다리에 가락지가 끼어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 걱정스러웠다고 하셨다. 그 덕택에 필자가 양자로 가서 잘 살 수 있었음에도 할아버지는 당신 손자를 남겨 두는 결심을 하고 나의 사촌 형을 양자로 보내셨다고 한다. 필자는 서울에서 식품사업을 하시던 아버님 슬하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겨우 걸음마를 하던 다음 해에 바로 6.25 사변으로 인해 어머니는 필자를 들쳐 메고 아버지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는데 기차를 타고 남으로 가던 중 인민군 비행기들의 기총사격에 전 승객이 정신없이 숲 속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올라타고 매달려서 가는 행렬이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왼쪽 다리를 약간 삐어 낮에는 잘 놀고 밤마다 아프다고 했으나 시골에서는 당시 마땅한 병원도 없었으니 아이의 꾀병이라고 그냥 넘긴 것이 화근이 되어 2~3세 때부터 심한 골수염을 앓게 됐다.
그러나 신이 나를 살리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침 당시 부산에 전후 서독에서 파견된 서독병원이라는 것이 부산 대신동에 있어 그곳에서 진료를 받고 바로 완쾌 상태로 퇴원하게 되었다. 당시 나이 8살이었는데 병원에서는 통원치료를 하던지 약 1년간 입원을 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 갈 나이라 입학을 시키고 통원치료를 결정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아직 후유증을 앓고 있어 보행이 불편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활발하게 놀다 보니 환부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고 후유증이 남게 된 것이었다.
2. 학문의 길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에게 통지표의 국어 과목에 ‘수’가 없으니 ‘수’를 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해 국어에 ‘수’를 받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필자는 대체로 우수한 학생 측에 들었다. 그러나 당시 진해에서 일류중학이라는 진해중학교에 응시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혼자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과연 합격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거의 꼴찌 수준으로 겨우 합격하였다.
합격 이후엔 학문에 뜻을 둔 공자와 비슷한 나이 15세에 공부의 즐거움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는데 꼴찌 수준의 합격이 필자를 자극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1학년 첫 학기부터 상위권의 수준으로 시작했던 필자는 중학 시절 내내 상위권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해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가정 사정이 여의치 못해 대학 진학을 잠시 미루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장남인 필자는 4명 동생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필자는 일하는 와중에 지방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마침 동생들이 대학 공부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지난 7년간 접었던 대학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70년 당시 5급을류 지방 공무원 월급은 약 1만 원 정도로 집 월세 충당하는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사직하고 학원 강의를 하던 시기에 배움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상대에 진학하여 공부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축적하는 길이 꿈을 실현하는 첩경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을 꼭 가야 하는지 대학 생활을 통해서 이를 확인하고 싶다는 강한 집념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이 지나서 진학한 대학 4년은 꿈같은 세월이었다.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생활 중에 터득한 사업 경험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계기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국경제의 흐름을 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방향설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학 4년은 학문의 즐거움을 알게 된 시기기도 했다. 이런 즐거움으로 수석 졸업할 수 있었지만 한편에선 미래의 진로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동생들 학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학계로 나아가고 싶은 생각이 맘은 접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다시 산업전사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 훗날 이론과 실제를 최대한 일치시키는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안고 현실 속의 길을 찾기로 하여 당시 최고의 보수를 주는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3. 중동 건설 현장을 누비면서 아라비아 상인의 숨결을 느끼다.
필자가 취업한 시기에 건설회사는 한참 중동 붐이 일어 대졸 신입사원에게 최고의 월급을 주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중소기업이었던 한국유리(주) 기획실에 동시 합격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추천한 건설 회사로 취업하였다. 희망하던 기획실이 아닌 자재부로 인사명령이 났다. 기왕이면 큰 뜻을 펴기 위해 나는 중동근무를 지원하였더니 사우디아라비아 TEP 본부 자재구매 담당으로 명령을 내주었다. 여기서 사우디아라비아 상인들의 상술의 대단함을 깨우쳤고 향후 중동국가와 업무상 협상하는 기술을 배우는 전기가 되었다. 영어가 능통하여 구매업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말도 좀 익혔다. 운전 기술도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1980년대 초 리야드 시내는 상가도 크게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건설용 자재를 구매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아서 해외에서 구매하여 조달하였으나 급한 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사 팀으로부터 자재 조달 독촉을 받았던 독특한 자재 A가 생각난다. 당시 필요한 자재는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아 수소문하여 어느 주택가에서 상호를 달고 있는 공급업자를 찾았다. 급한 김에 대충 가격 협상을 하고 공급을 하고 나서 보니 약 3배나 비싸게 구매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동국가의 무표정한 협상력 앞에서는 국내 업자는 한순간 실수하면 엄청난 바가지를 쓴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모든 물건을 생산하지 않고 수입해서 판매하는 까닭에 부르는 것이 값이 되고 모르면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는 곳이 중동이었다. 이후 상대와 협상 시에 얼굴에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여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런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생활은 재미는 있었지만 33세에 결혼하여 바로 해외근무를 하게 되어 아직 아이가 없는 관계로 회사에서는 연장근무를 요청하였지만 귀국을 결심하였다.
4. 세계 제1의 중공업 회사를 만들어내다
대학 재학 중에 아산학자금을 받아 공부했던 연고로 인하여 귀국 후에 현대중공업(주) 플랜트 사업본부 계약관리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구매부서의 업무도 재미있고 할 만했지만 주위에서 바라보는 의혹의 눈초리는 아주 거북스러웠다. 따라서 수출과 관련된 업무를 하려고 하던 차 현대중공업(주) 계약관리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현대에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일을 하던 한유동 전무가 담당 중역이었다. 필자가 계약관리부로 가게 된 것도 한 전무의 뜻이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계약서의 핵심 사항을 짚어가면서 일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지만 리더십도 출중하여 회사의 임직원들이 많이 존경하는 그런 분이었던 것 같다.
1981년 만 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쉴 수 있었고 그 외는 업무에 전념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필자는 혼자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업무에 전념하였다. 우리는 현대가 이미 국가적인 회사였으므로 현대가 잘되는 길이 우리나라가 잘되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근무하였다.
계약관리부서는 요즘 PM 부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회사의 대표이사로부터 프로젝트에 대한 전반적인 위임을 받아 사장을 대신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 영국 등 구미 국가를 위시하여 호주, 인도, 중국 등 전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총괄관리하다 보니 각 국가 및 회사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해양플랜트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선진국의 기업들과 계약과 협상 업무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업무도 세계화의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회의하면서 영문으로 회의록 (MOM)을 만들고 노트북이 생기면서 회의 시 바로 회의록을 작성하여 상호 서명하는 수준까지 이르니 어떤 계약과 협상 업무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지 기술적으로 좀 미진한 부분은 세계적인 설계회사와 하도급 계약을 하던지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는 식으로 보완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 사이 우리도 모르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선박을 만드는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고 조선업 세계 1위 회사로 성장해 나아갔다.
초기 단계에 인도 ONGC사로부터 수주한 Win, Wips 공사는 실행률이 85% 정도가 되는 수익이 많이 나는 프로젝트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도 클레임 보험사고 처리 등의 업무에서 600만 달러 이상의 순익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해양사업본부는 인도 ONGC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약 25년간 매년 지속해서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한때 ONGC사업본부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였었다. 이와 관련 인도는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 발주하지 않고 한국의 현대에게 지속적인 발주를 함에 따라 위 기간 약 20억 달러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5. 함께하여 행복하다
먼 길을 갈 때는 함께 가라고 했다. 필자는 사랑하는 5남매들과 함께하여 행복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필자가 존재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 오남매는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집도 절도 없는 상황임에도 함께 노력하여 다 대학을 졸업한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필자 집안에 행복을 몰고 온 사람은 어쩌면 나의 아내인 것도 같다. 아내와 결혼하자마자 5남매의 장남인 필자를 도와 얼마 되지 않은 월급을 쪼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고 집안을 평화롭게 이끌어왔다. 회사 야유회 때 부부동반이라 같이 가자고 하였더니 옷이 없어 함께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순간 너무나 미안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난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아들 둘은 이제 장성하여 결혼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큰 행복이라 생각한다. 손자를 보고 손자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이 즐거움 또한 어디에 비길 수가 있을까? 며느리가 수시로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는가 하면 손자가 커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내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6.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서 도전
대기업 30년 중소기업 10년의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양자의 주요한 차이는 도덕성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은 도덕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개인사업자 등록을 하여 필자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필자가 스스로 도덕성을 허물지 않는 한 누구도 필자에게 도덕에 반하는 일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서 외자 유치 3500만 달러를 성사시킨 필자는 이를 회사가 갚지 못할 시 처할 수 있는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도덕성이 모자란 그런 결정을 했는데 당시 이런 생활을 접기로 했다.
필자는 전문성이 있으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국제계약 컨설팅을 하는 일이다.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한양대 및 중앙대나 전문 교육기관, 한국플랜트협회, 건설전문공제조합 등에서 국제계약 관련 강의를 한다. 신문사에서 집필 요청이 있으면 글을 쓰기도 한다.
강의는 대학 졸업 당시 학계로 나가고 싶었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루에 7시간 강의를 하는 필자를 보고 아내는 철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강의 자체를 즐기다 보니 강의를 시작하면 나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필자가 또 하나 사명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창출하는 일이다. 원래 국가가 앞서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야 할 일이나 현재 국가가 해주기를 기다릴 수 없는 실정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SBA의 창업 닥터 과정을 이수하면서 청장년들의 창업을 지원하는 창업닥터로서 자격을 취득하고 KDB 시니어브리지 센터 1기 과정 도심권 인생설계 1기과정 등을 수료하면서 많은 뜻을 함께하는 좋은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인 꿈도 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장학회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이름하여 가칭 ‘태성(太晟)장학회’ 다. 가난으로 인하여 젊어서 배우지 못하는 후손이 없도록 해두고 싶은 생각으로 오래 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시니어들이 건강한 삶을 살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또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이상 사회를 꿈꿔가는 것은 필자의 또 다른 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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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진(文國鎭·91)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법의학자다. 1955년 설립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창설멤버인 문 박사는 당시 국내에 생소했던 ‘법의학’이라는 분야를 뿌리내리고 기틀을 잡는 등 한국 법의학계의 큰 스승과 같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말하는 인생의 스승은 바로 ‘죽음’이라고 한다. 수많은 주검을 부검했던 문 박사는 요즘도 부검을 하고 있다. 바로 ‘책 부검’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죽음’의 교훈은 무엇인지, ‘책 부검’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을 통해 들어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전문서, 교양서 등 통틀어 53권의 책을 펴낸 문 박사의 저서 중에는 , , 등 법의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작품들이 상당수 차지한다. 작가의 성향이나 느낌을 중시하는 예술 분야와 객관적 증거와 분석을 통해 이루어지는 법의학이 과연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문 박사가 법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학생 시절 소나기를 피해 잠시 헌책방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처음 ‘법의학’에 대한 책을 봤어요. 책에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이 법의학이다. 법의학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발달한 민주 국가에서만 발달한다’는 내용이 있었죠. 그 글을 보고 가슴이 뛰더라고요. 어찌 보면 예술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두 분야 모두 인간을 중심에 두고 풍부한 인간성과 사회 문화 창달을 목적으로 한다는 데는 공통점이 있지요.”
이러한 뜻으로 문 박사는 정년 후 인생 이모작을 ‘예술과 법의학을 접목하는 융합과학’에 힘쓰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생소하고 어려운 일을 시작한 지도 20여 년이 지났고, 그동안 펴낸 책만 10여 권에 달한다. 그는 명확하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사인을 밝혀내고 의학적 관점에서 예술작품을 해석했다. 문 박사는 법의학박사가 아니라면 분석해내지 못했을 요소들을 발견해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독특한 작업을 ‘책 부검(book autopsy)’이라고 표현한다. 특히 은 사람의 오감 중 후각적 요소에 집중해 다양한 예술 작품을 헤아려 보고자 했다.
“알고 보면 인간의 오감(五感) 중에 가장 천대받는 것이 후각이에요. 시각은 빛이 있어야만 기능하고, 청각은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리가 있어야 하지만 후각은 숨 쉴 때마다 작용하죠. 사람의 오감 가운데 오직 후각만이 의식으로 인식되기 전에 감정 반응을 먼저 일으켜요. 그래서 후각과 예술을 접목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삶의 경험과 새로운 지식의 융합으로 만나는 ‘인생 이모작’
에는 ‘조제핀의 제비꽃향 체취와 나폴레옹의 운명’, ‘막달라 마리아와 나드 향유’ 등 흥미로운 주제의 이야기들이 예술적, 의학적 분석과 함께 담겨 있다. 글에 나오는 그림이나 조각, 작가의 초상화 등을 함께 볼 수 있어 가볍게 교양서로 읽기에 좋고, 작품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해석이 있어 예술적 식견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술, 과학, 법의학 등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권해볼 만하지만, 그가 특별히 중·장년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떠한 분야의 전문가라도 정년퇴직하고 나오면 현역 때 가지고 있던 지식이 낡아져요. 나 역시 그런 기분이 들어 한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죠. 정년을 앞둔 후배들에게도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라는 조언을 해요. 한 분야를 마스터하고 다른 분야를 접하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거든요. 그동안 갈고 닦은 경험에 또 다른 경험을 융합하면 정말 기가 막힐 일들을 해낼 수 있어요. 이러한 내 경험이 담긴 책이 인생 이모작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문 박사가 중·장년 세대에게 강조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지식을 환원하자’는 것이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학술대회나 강연회에 나가고, 언론사 칼럼이나 인터뷰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54권째 책을 집필 중이라고. 그가 이토록 가만있지 못하는 이유는 서둘러 지식을 환원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한우물만 팠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법의학에만 매진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런 내 지식과 경험을 나만 알고 느끼면 될까요? 강의를 하든 글을 쓰든 무엇으로든 남겨야죠. 그럼 이것들을 남기기만 하면 되느냐? 자꾸 알리고 이야기해서 많은 이에게 환원될 수 있도록 해야죠. 이제 이만큼 살았으니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서둘러서 내 모든 것을 사회에 남기고 환원하고 가려고 해요.”
‘시활사(屍活師)’, 살아 있는 가장 큰 스승은 바로 ‘죽음’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갈 것이라는 문 박사의 말대로 그가 환원하고자 하는 것은 학술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자신이 가진 금전, 지위, 명예 등을 모두 내려놓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한다. 법의학자로 살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죽음을 직접 마주했던 그는 누구든 죽음을 앞두면 생전에 지녔던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순수한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정주영 회장처럼 부와 명예가 대단했던 사람이 죽을 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가지고 가는 게 없구나!’라고 했대요. 우리가 살아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재산이나 명예는 다 자기 만족이고 욕심일 뿐이지 죽을 때는 다 놓고 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가 매달리던 것들이 결코 행복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죽음 바로 직전에 말이에요. 야속하기도 하지만 인간에겐 죽음이 삶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뜻으로 ‘시활사(屍活師)’라는 말을 쓰고 있죠.”
문 박사는 나이가 들면서 ‘항시 죽음을 생각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강조했던 선현들의 혜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죽음’이 지닌 또 하나의 가치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고 덧붙였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떨까요? 더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불로장생할 수 있다면 귀중한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목적이나 욕망을 가질 필요도 없고, 또 누군가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일도 생기지 않을 거예요. 생명이 그 의미를 잃게 되는 거죠. 인간은 죽음을 알기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면서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더 우리가 사는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포니 개발 프로젝트’ 때도 최전방에서 활약했던 이충구(李忠九·70) 서울대학교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지능형 자동차플랫폼센터장(前 현대·기아자동차 통합연구 개발본부 사장)은 자동차업계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현대자동차 총 35종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포니 생산 40돌이 되는 12월을 맞아 이 센터장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이충구 센터장이 사무실 컴퓨터에 저장돼 있는 여러 장의 포니 사진을 보여줬다. 오랜만에 만나는 포니의 모습이 무척 반가웠다. 스크롤을 내리던 중 마치 사람의 증명사진처럼 덩그러니 차만 찍힌, 첫 시리즈인 포니 사진이 보였다. 재미있게도 이 사진의 파일명은 ‘장남’이었다.
‘이 대리, 이탈리아 가서 고유모델 개발 해볼래?’
이 센터장은 2002년 연구개발부문 사장을 끝으로 회사를 나올 때까지 33년간을 현대자동차에 몸담았다. 그가 신입사원이었을 때 현대자동차 공장의 생산력이라는 것은 포드의 차량을 하루 2~3대 정도 조립하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국내 자동차 회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의 자동차산업 자체가 조악했다.
1974년, 그가 대리였을 때 일이다. 어느 날 선임 팀장이 그에게 고유모델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이탈리아에 보내준다는 말에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생면부지의 나라로 향했다.
작업과정을 배운 뒤 국내 공장에서 실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만만치 않았다. 어떤 디자이너는 하루에 선 한 개를 겨우 그리고 말았다. “지식이 없다 보니, ‘아 이 사람들이 이렇게 가는구나, 이게 여기서부터 이렇게 시작하는 거구나’ 하고 말았지요. 그 다음 날 선이 추가되고, 다음 날 또 추가되고. 나중에 합쳐 보니까 ‘이렇게 됐구나’ 이해한 부분도 있고,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요.”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그들의 그림과 글을 무조건 노트에 베껴 적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날 적은 것들에 대해 퍼즐을 맞추듯 공부했다. 코피를 쏟는 날도 많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3권의 연습장이 언론을 통해 유명해진 ‘이 대리 노트’다. 이 노트에 적힌 내용들이 이후 한국의 자동차산업의 밑거름이 됐다.
“포니 성공 요인? 정주영-주지아로 두 인물의 특별함이죠”
돌이켜보면 부품 한 개도 설계해 본 적이 없는 현대자동차가 고유모델을 만든다는 것은 난센스였다. 그런데 어떻게 성공했을까. 이 센터장은 “먼저 정주영 회장님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탁월한 수완, 집념과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에요. 자동차에 대한 꿈, 그리고 ‘Can do(할 수 있다)’ 정신이 있었기에 됐다는 거죠”라고 말했다.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에 대한 찬사도 덧붙였다. “주지아로는 야심이 컸어요. 이 사람의 꿈과 정주영 회장의 꿈이 맞닿아서 무모해 보였던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것이죠.”
이 센터장은 프로젝트를 일궈낸 기한이 고작 2년 6개월여에 불과했다는 점이 가장 경이로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지금 그 작업을 하려면 통상 4년이 걸립니다. 그것도 컴퓨터와 첨단 시스템을 동원했을 때 말이죠. 현대차 남양연구소 인원이 1만1000명, 이 중 설계 인원만 4000명 정도입니다. 포니 때는 약 10명이 그걸 다 했어요. 물론 컴퓨터도 없이 손으로.”
그는 “지금 고유모델 개발 프로젝트를 하라고 하면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포니의 성공사례는 여러 주변 환경과 특별한 인물들의 궁합, 그리고 한국인과 이탈리아인의 기질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설명이다.
이 센터장은 “이탈리아 국민들은 한국 사람처럼 모든 면에서 뜨겁습니다”라며 “나중에 도면을 가져와서 보니까 마치 한국에서 고속도로를 뚝딱 만들 듯이 깔아뭉갤 부분이 많았는데, 중요한 것은 어쨌든 작품이 나왔다는 겁니다.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디자이너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면 잘 되기 어려웠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아쉬움? 그런 것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포니 개발 프로젝트는 ‘자동차인’으로서 보람이 컸던 경험이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위해 개인의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했다. 1974년 이탈리아 출장 기한은 8개월이었다. 출국 당시 아내는 첫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전보 한 줄이 전부였다. 국제우편도 한 달이 넘게 걸리던 때였다. 난산(難産)이었다는 애기도 나중에야 들었다. 귀국하는 공항에서야 생후 6개월 된 딸을 처음으로 안아볼 수 있었다. 낯을 가리기 시작한 어린 딸은 울었다. 3년 뒤, 포니 3도어 모델 개발을 위해 출장이 잡혔다. 공교롭게도 출산 날짜가 또 겹쳤다. 이 센터장은 병원에서 유리 너머로 둘째 딸의 모습을 본 뒤 황급히 공항으로 향했다. 둘째 딸도 생후 6개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안아볼 수 있었다 .
젊은 시절, 앞만 보고 달렸던 포니 개발 프로젝트였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느껴지는 아쉬움은 없을까. 이 센터장은 “아쉬운 기억? 그런 것까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생각났다는 듯 “이탈리아에 있을 때 숙소에 세탁기를 하나 놓아 달라고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그 생각을 못해서 빨래를 욕조에 넣고 밟아가면서 전부 손으로 했어요.”라고 덧붙였다.
화려한 현업을 보낸 그에게 앞으로 이루고 싶은 다른 꿈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독일이나 미국처럼 현장에서 필요한 학생들을 길러내는 게 꿈이죠”라며 “여기 융합과학기술원에 와 있는 이유도 재능 있는 학생들이 산학협력으로 뛰어놀 수 있도록 ‘운동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힘 있는 그의 대답이 제2의, 제3의 ‘이 대리’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현대자동차 ‘포니(Pony)’가 1975년 12월 첫선을 보인 지 올해로 꼭 40년이 됐다.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국산 고유 모델 포니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국내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소형차 중심으로 바꾸고 마이카 시대를 열었으며, 단순한 자동차를 넘어 한국 공업화의 상징이 됐다. 많은 국민들에게 ‘생애 첫 차’로 추억되는 포니를 더듬어 본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요즘은 자동차가 일상생활의 필수품처럼 여겨지지만 불과 40년 전만 해도 동네 도로에 자가용 자동차가 지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던 때였다. 자동차가 많아지게 된 계기는 국산자동차 ‘포니’ 출시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마이카’를 갖는 사람들이 점차 늘었다. 포니가 잘 팔려나갈수록 자동차산업 발전의 기반이 단단해졌다. 또한 자동차산업은 원조경제를 막 벗어난 걸음마 단계의 한국 산업이 보다 고도화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회사 망합니다’ 직원들도 말린 무모한 도전
자동차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작용한다.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도 연간 5만 대 이상을 생산하지 못하면 채산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후진국 자동차업체들로서는 해외 유명 모델을 그대로 도입해 일단 채산성을 맞추는 전략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고(故)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당시 현대자동차 사장)은 곧바로 고유모델을 개발하는 공격적 전략을 택했다.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동차 관련 기술은 ‘백지상태’에 가까웠다. 국내에서 생산된 자동차라고는 미군이 버리고 간 지프차량을 뜯어 만든 ‘시발(始發)차’ 정도였다. 자동차는 2만여 개 부품이 들어가는 ‘기계공업의 꽃’으로 불리지만 국내 기술력으로는 부품 한 개도 제대로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현대차 기술자들조차도 ‘자칫 회사가 망하게 될 수 있는 위험한 계획’이라며 정세영 전 회장을 말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달리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만은 개발 계획을 흔쾌히 승낙했다. 현대는 처음부터 국내시장은 물론 세계시장을 겨냥해 무모할 정도의 투자를 감행했다. 정부의 자동차 육성 계획보다 오히려 앞서가고 있었던 것이다.
伊·日서 코피 쏟으며 공부, 전쟁처럼 치른 개발·생산
맨땅에서 자동차를 만들어야 했다. 막상 시작하긴 했지만 부품을 도면으로 그리는 방법조차 몰랐다. 더구나 당시 한국에는 도면을 줘도 만들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정세영 회장은 자동차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 날아간 이탈리아에서 36세의 젊은 디자이너를 만났다. 오늘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거장 조르제토 주지아로다. 그의 감각을 알아본 정 회장은 당시로서는 거액인 미화 120만 달러에 고유모델 디자인을 의뢰했다.
자동차의 기본 골격이 되는 엔진, 트랜스미션, 프레임 등을 포함한 플랫폼이 필요했다. 자체 개발은 불가능했다. 현대자동차는 플랫폼을 구하기 위해 GM사와 포드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거절당했다. 다행히도 일본 미쓰비시와 기술이전 협약을 체결했다. 미쓰비시 구보 도미오(久保富夫) 회장 가족 중 한국인 혈통을 활용해 정주영 회장이 수완을 발휘했다는 후문이다. 현대차는 이탈리아와 일본에 각각 연수팀을 보내 설계도면 제작과 엔진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불과 몇 개월 내에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연수팀은 매일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했다.
생산현장은 흡사 전쟁터였다고 한다. 생산근로자들은 아침 8시에 출근해 다음 날 밤 10시에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틀 밤을 새우는 ‘이철’, 사흘 밤을 새우는 ‘삼철’ 등의 단어도 이때 생겨났다. 첫 고유모델 생산은 온 나라의 관심을 끌었다. 차 이름은 전 국민 대상 공모를 통해 정했다. 공모에는 태양, 새마을, 아리랑 등 6만 장에 가까운 엽서가 접수된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폐허에서 세계 8번째 고유모델 車 생산국으로
포니가 첫선을 보인 곳은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제55회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였다. 현대자동차와 대한민국의 세계 자동차시장 데뷔였다. 포니에 대한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세계의 가장 가난한 나라가 여덟 번째로 고유모델 자동차를 출품했다는 점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포니신화’의 시작이었다.
1975년 12월 생산설비 완공과 함께 포니 차량 양산이 시작됐다. 이듬해 2월부터는 시판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첫해인 1976년에는 1만726대, 1977년에는 2만4000여 대가 팔렸다. 외국차 일색이었던 서울 시내 도로를 오렌지색, 하늘색, 녹색의 포니가 대신 채워갔다.
염원이었던 해외 수출도 시작됐다. 첫해 1019대였던 수출 물량은 1977년 4523대, 1978년 1만2195대 등으로 급신장한 뒤 1982년에는 30만 대를 돌파했다. 1986부터는 미국시장에 입성, 첫해 16만8800대, 이듬해에는 26만여 대의 판매 성적을 올렸다. 대성공이었다. 미군이 버리고 간 군용차로 차를 만들던 한국이 미국 시장에 고유의 차량을 수출하게 된 극적인 장면이다.
마흔살 포니가 대한민국에 남긴 것은
지난 7월 미래창조과학부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광복 이후 과학기술 성과 70선’ 선호도 조사를 한 바 있다. 포니는 기계소재 분야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으며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포니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포니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덧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전문가들은 포니가 국내 자동차산업의 자립과 경제도약의 발판이 돼 줬으며 국민의 자긍심도 높였다고 평가한다. 포니와 함께 본격적으로 출발한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지난해 기준 세계 자동차생산 5위, 수출 9위를 기록하고 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강, 합금, 플라스틱, 유리가공 등 수많은 산업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자동차산업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수출주도형 경제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고, 세계에서 가장 빈곤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바라보는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동시에 기억의 동물이다. 세월에 쓸려 사라지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9월의 기억으로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하계올림픽, 그리고 올림픽 유치가 확정됐던 1981년 9월 바덴바덴, 올림픽 유치의 주인공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을 재조명해본다.
1981년 9월 30일, 자정을 앞둔 늦은 시각, 온 국민이 숨죽이고 TV 앞에 앉았다. 시선은 독일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을 향했다. 사마란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가 적힌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프랑스어를 알아듣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란치의 입에서 나온 “쎄울(서울)”은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집집마다 기쁨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9월을 환호의 계절로 만들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이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지는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승리를 예상하기 어려웠던 만큼 기쁨도 컸다. 더욱이 국민들은 상대가 일본이었다는 것이 더욱 기뻤다. 7년 뒤 1988년 9월에는 예정대로 서울올림픽이 전 세계의 전파를 탔다.
세계가 비웃던 유치선언, 세계가 놀란 역전극
서울이 일본 나고야와의 유치경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외국인들의 눈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전쟁폐허’ 이미지가 강했다. 더욱이 한국은 앞서 1974년에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능력 부족을 이유로 포기한 전력이 있었다. 일본은 이미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경험이 있었다. 기반시설, 자금력, 국제스포츠계 인맥 모든 면에서 서울은 나고야에 경쟁이 되지 않는 상대로 보였다.
국내의 시각도 올림픽 유치에 부정적이었다. 나고야와 표 대결을 해 봤자 형편없이 져 망신당할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다. 남덕우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은 설령 유치에 성공한다 해도 대회를 치러 낼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올림픽 망국론’을 펼쳤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유치 신청을 철회할 거란 소문이 파다했다. 훗날 서울올림픽 민간추진위원장이었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독일 바덴바덴으로 떠날 때 정부로부터 “창피만 당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개최지 선정 당일까지 서울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외신은 누가 이길지가 아닌, 나고야가 몇 표 차이로 이길지에 초점을 뒀다. 하지만 결과는 52 대 27. 전체 79표 중 52표를 얻은 서울이 나고야를 두 배 가까이로 따돌리고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세계가 깜짝 놀란 대이변이었다.
냉전마저 녹여낸, 역사상 가장 성공적 올림픽
1988년 9월 17일 예정대로 서울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서울올림픽에는 160개국에서 1만3304명의 선수단(선수 9417명·수행인원 3887명)이 참가해 올림픽 역사상 최다 참가국과 참가인원 기록을 경신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냉전으로 ‘반쪽 대회’가 됐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외신들은 분단국가인 한국에 냉전으로 대립하던 각국이 모인 장면을 보며 ‘냉전종식의 신호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재정 측면에서도 당초의 우려를 불식했다. 당시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의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사건으로 보안비용이 폭증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몬트리올시의 파산 등으로 올림픽 유치 회의론이 퍼지던 시기였다. 올림픽조직위원회는 대회에 총 2조3826억 원이 투입돼 252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상황에서 회계의 오차범위를 다소 고려한다 해도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둔 것만은 분명했다.
대회운영 자체도 성공적이었다. 전 국가 차원의 역량을 결집한 결과였다. 개막 전까지만 해도 성공 여부를 반신반의했던 세계 스포츠계는 서울올림픽의 매끄러운 대회 운영을 칭찬했다. 대회기간 총 237개 세부 종목의 경기 중 지연된 경기는 단 6개뿐이었다. 대회에서는 냉전의 양 축이었던 소련과 미국이 나란히 1, 2위를 기록했고 동독이 3위에 올랐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역대 최고성적인 4위를 기록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올림픽 이후 달라진 한국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도약에 커다란 시너지를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를 두고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한국인은, 특히 젊은이들은 서울올림픽 이후 왕년의 고질적인 고립주의, 패배의식, 열등감을 털어버렸다”고 표현했다.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일본인에게 신분에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준 것처럼 서울올림픽도 우리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경제 측면에서 ‘3저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과 맞물린 올림픽의 성공은 오늘날까지도 한국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수출산업에 커다란 호재가 됐다. 올림픽은 ‘코리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세계 각국에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알렸다. 한국 경제의 국제적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 한국 기업의 공격적인 세계무대 진출이 시작된 시점도 서울올림픽 이후부터다.
전반적인 사회 모습도 대한민국은 올림픽 전후로 딴판이 됐다. 서울에 쏠린 세계의 이목은 민주화를 앞당겼다.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해 최저임금법이 제정된 것도 1988년이다. 임금이 높아지자 내수가 급격히 성장했다. ‘마이카 시대’로 대표되는 소비시대가 도래했다. 학교에서는 단계적으로 급식이 시작됐고, 먹거리와 생활용품을 공산품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마련된 지하철, 아파트, 체육시설 등의 사회간접자본도 한국인의 삶을 바꿨다.
※2030세대의 워너비 인물을 탐구하면 5060의 현실과 미래가 보인다. 그래서 2030세대 321명에게 물어봤다. 6월 9일부터 20일까지 SNS와 설문지 조사를 통해 얻은 결과다. 2030세대가 원하는 정재계 인물을 통해 5060의 미래를 알아보자.
[워너비(Wanna Be) 경제인]
“삼성이라는 두 글자면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끝이다” - 1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나라 전체가 술렁거린다. 대한민국의 작은 거인이 쓰러졌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 이미 대한민국을 넘어섰다. 2030세대가 뽑은 ‘귀감이 되는 워너비(Wanna Be) 경제인’ 1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다. 321명 중 57명의 표를 받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기술고문(45표)에 근소하게 앞서 1위에 당당히 올랐다.
2030세대는 이건희 회장이 삼성이라는 기업을 초대형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회장을 선택한 응답자들은 경영 철학과 시대를 앞서가는 기업 문화는 국내 대기업에 본보기가 됐다고 봤다.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끌어 올렸다는 응답도 많았다. 삼성이라는 글로벌 기업의 성장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 국가의 경제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45표로 2위에 오른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기술고문도 눈길을 끈다. 응답자의 대부분이 ‘자수성가의 표본’,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본보기’라고 표현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미국 애플사의 CEO 스티브 잡스(각각 21표),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18표)이 이들의 뒤를 이었다.
◇ 이래서 귀감이 됩니다. 2030의 말말말
의외로 이건희 회장의 사회적 기여에 비해 국민들의 저평가가 많은 것 같다. 기업 이미지를 위해서 그랬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 한다. (박용호ㆍ37)
삼성의 성장을 이끈 그의 경영철학과 리더십이 마음에 든다. 세월호 사고 때도 크레인을 지원하는 등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양지석ㆍ25)
한국에서 삼성의 위상은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는 뜻의 신조어).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노고는 인정한다. (박수정ㆍ24)
인내심이 강하며 입체적 사고 능력이 뛰어나다. (남자ㆍ24)
국내 대표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거듭나고 있는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상반기 패키지 공연 예매가 시작됐다. 특히 내달 11일까지 조기 예매할 경우 티켓값의 50%가 특별 할인된다.
오는 4월 16일부터 7월 8일까지 네 차례 공연되는 이번 수원시향 상반기 패키지는 ‘최고연주가 시리즈’라는 테마로 각 분야를 대표하는 클래식계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첫 공연으로 내달 16일 진행되는 정기연주회에는 수원시향 김대진 음악감독의 지휘로 ‘2013년 퀸엘리자베스콩쿨’ 1위인 피아니스트 보리스 길트버그를 초청하여 라흐마니노프 대표곡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연주되고, 유럽무대에서 찬사 받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4번이 감동을 전한다.
5월 16일은 정주영 부지휘자와 수원시립교향악단의 관악수석연주자들이 함께 하며 수원시향의 저력을 확인 할 수 있다. 6월 3일 정기연주회는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25년 역사를 함께 한 후 코리안 심포니로 자리를 옮긴 지휘자 임헌정이 그의 대표 레퍼토리인 브람스를, 미국 등 해외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첼리스트 문태국과 함께 슈만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며 낭만의 진수를 선보인다.
마지막으로 7월 8일 정기연주회는 다양한 오케스트라와 활발한 활동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지휘자 성기선과 국내 정상급 현악 앙상블인 ‘조이 오브 스트링스’의 음악감독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 재직중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가 함께 한다.
예매는 수원시립예술단 홈페이지(www.artsuwon.or.kr)와 전화(031-250-5362~5)를 통해 선착순 판매된다.
경기일보 박광수기자 ksthink@kyeonggi.com
말이 교통수단으로 기능하던 시절은 지났지만, 세월이 지나도 말과 우리 생활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특히 말의 활약은 경제부문에서 두드러져, 세계 유수 기업들이 말의 역동성을 담은 엠블럼을 사용하거나 수익 창출 아닌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사업에 이용하기도 한다.
말이 각광받는 대표적인 산업 분야가 바로 마력(馬力)이란 단위로 성능을 재는 자동차 산업이다. 세계적 명차로 손꼽히는 이탈리아의 페라리와 독일의 포르쉐 엠블럼이 말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두 엠블럼 모두 말이 앞발을 치켜들고 꼬리를 한껏 세워, 당장이라도 질주할 듯 힘찬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선 고(故) 정주영 현대자동차그룹 명예 회장의 마지막 유작으로 1999년 출시된 에쿠스(Equus) 이름이 라틴어로 말(馬)이란 의미다.
역시 현대차에서 지난 90년대 초 내놨던 사륜 구동차인 갤로퍼(galloper)는 영어로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말’을, 2014년형이 발표된 엑센트(Accent)는 ‘천리를 달리는 명마’를 각각 뜻한다.
비단 자동차뿐 아니라 의류와 악세사리를 취급하는 세계 명품 브랜드도 말 이미지를 차용, 로고 등으로 쓰고 있다.
미국 의류브랜드인 폴로랄프로렌(Polo Ralph Lauren)은 귀족 스포츠라 불리는 폴로 경기에서 유래된 로고를 사용 중이다. 역시 미국의 청바지 판매업체인 리바이스는 가운데에 청바지를 두고 두 마리의 말이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모습을 로고로 형상화, 청바지의 튼튼함을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로 가방, 지갑 등을 취급하는 에르메스(Hermes)의 경우 사륜마차인 뒤크와 말, 그리고 마부가 그려진 로고가 인상적이다. 마차에 오를 고객을 기다리는 모습처럼 고객을 기다리겠단 뜻이 담겨 있다. 이탈리아 브랜드인 에트로(Etro)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로고로 활용해 페가수스의 창조적 상상력과 아름다움 등을 부각시켰다.
말 산업에 직접 뛰어들거나 후원하는 형식으로 이미지 제고를 꾀하는 기업들도 있다.
말 재갈을 형상화한 로고를 지닌 이탈리아 브랜드인 구찌(Gucci)는 2009년부터 승마대회 후원을 재개, ‘구찌 마스터즈’를 세계적인 승마대회로 자리잡도록 했다. 또한 프랑스의 스포츠 행사인 ‘파리 홀스 쇼’에도 ‘구찌 마스터즈’란 이름으로 후원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삼성그룹이 승마단을 운영하면서 유럽의 유명 승마대회 메인 스폰서로 활약하고 세계승마대회를 직접 개최해 대외 이미지를 높였다는 평가다. 한화그룹의 경우, 현재 승마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 최대규모의 승마대회를 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