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윤영미(60). 그녀의 제주도 집 이름은 ‘무모한 집’이다. 직접 작명했다는 윤영미는 “제 인생을 돌이켜보니 저는 굉장히 무모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무모하다’는 꼭 부정적인 말은 아니다. 누군가의 무모한 도전과 열정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기도 한다.
윤영미 역시 무모한 성격 덕에 아나운서가 됐고, 더 나아가 ‘여성 최초’라는 이름 아래 여러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윤영미의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도전은 60대에 접어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윤영미에게 아나운서는 오랜 꿈이었다.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우연히 방송반 아나운서를 맡은 그녀는 진행의 매력에 푹 빠졌고, 아나운서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예 아나운서 명찰을 달고 다니던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윤영미 아나운서’라고 불렀다.
윤영미는 반드시 아나운서가 되어야만 했다. 목표를 정한 그녀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었다. 방법이 없다면 찾아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윤영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청량리역 역장을 찾아가 “왜 여자는 방송을 안 하냐”고 물으며 방송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에 한 달여 동안 안내 방송을 한 그녀는 ‘최초의 지하철 방송 여자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윤영미는 대학 졸업 후 춘천MBC 사장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당시 춘천MBC에는 공채 제도가 없었는데, 아나운서 시험을 볼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패기 덕에 윤영미는 1985년 춘천MBC 아나운서가 되면서 꿈을 이뤘다. 이어 그녀는 1991년 SBS 개국 당시 경력직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SBS 입사 후에도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 캐스터’, ‘최초의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라는 수식어를 갖게 됐다.
“제가 워낙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는데 방법을 알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저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걸 직접 해보고, 뭐라도 시도해보려는 편이에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이기도 했고요. 저희 어머니도 늘 ‘안 되면 끝까지 해봐라. 분명히 길이 보인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라’는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런 말들이 많은 힘이 된 것 같아요.”
이런 아나운서 처음이라고?
춘천을 벗어나 SBS라는 큰물로 옮겨가니 고충이 따랐다. 윤영미는 “SBS에 들어가서 한 3년 동안은 TV 방송을 못 했다. 제 자리가 없었던 거다”라면서 “당시 아나운서 중에 순위를 매기자면 저는 거의 꼴찌였다”라고 말했다. 쟁쟁한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위기의식을 크게 느낀 윤영미. 그녀의 성격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윤영미가 찾은 돌파구는 ‘야구’였다. 당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자 캐스터가 없던 시절이었다. 윤영미는 자신이 길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야구를 좋아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야구의 ‘야’자도 몰랐기에 그녀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당시에는 야구에 미쳐 살았던 것 같아요. 매일 근무 끝나면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봤어요. 당시에는 신문밖에 없으니까 스포츠신문을 탐독하고, 야구 중계를 켜놓고 따라 하면서 중계 연습을 했죠. 1년 동안 고시 공부하듯 공부했더니 야구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당시 아나운서 국장이었던 이계진은 윤영미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캐스터 오디션 기회를 줬다. 윤영미는 당당히 합격하며 마침내 ‘여성 최초 야구 캐스터’가 됐다. 그렇게 그녀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야구 캐스터로 활약하며 이름도 널리 알렸다. 지금도 그녀는 1994년 4월 7일 광주 첫 중계부터 한국시리즈 중계 등 영광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후 2000년대 윤영미는 또 한 번 주목받았다. 추석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녀는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 무대를 선보였다. 아나운서라는 고정관념을 깬 혼신의 무대는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이후 윤영미는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이 됐다. 신신애와 이박사 성대모사는 물론 시원한 입담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최초의 아나테이너 탄생이었다.
“당시 ‘엽기 아나운서’라고 주목받았는데, 요즘 같았으면 짤이 엄청 돌아다녔을 거예요.(웃음) 그런데 사실 아나운서실에서는 품위가 떨어진다면서 별로 안 좋아했어요. 저는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도, 인지도가 높은 아나운서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미지 실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고, 이왕 할 거면 어설프게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즐겼을 뿐이에요. 시청자분들도 처음에는 제 모습을 낯설게 느끼다가 아나운서도 저렇게 할 수 있구나라고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때 아나테이너라는 말이 처음 나온 거죠.”
윤영미는 50대 진입을 앞두고 또 한 번의 도전을 했다. 2010년 12월 SBS를 퇴사하고 프리랜서를 선언한 것. 그 이유에 대해 그녀는 “방송국에서는 50세가 되면 방송 진행보다 교육 등 다른 것을 하기를 원한다.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는 필드에 계속 있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아나운서로 빛나는 윤영미. 그녀가 생각하는 아나운서로서 자신의 강점은 무엇일까.
“저는 특별히 비주얼적으로 뛰어난 것도, 대단한 특기를 가진 것도 아니에요. 제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성실성밖에 없는 것 같아요. 누구나 다 성실하겠지만 저는 굉장히 프로의식이 강해서 평생 지각, 결석을 해본 적이 없어요.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아침 방송에 늦을까봐 전날 출근해 책상에서 잔 적도 있고요. 항상 미리 가서 준비하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믿음을 준 것 같아요.”
제주도, 그리고 가족
윤영미는 프리랜서가 된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종편 채널은 물론 홈쇼핑 채널에도 출연하고, 강연도 하고, 책도 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늘 가슴에 품고 있다. 현재 그녀는 제주도를 오가면서 살고 있다. 책을 쓰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다가 제주도의 매력에 이끌려 정착하게 됐다.
제주도 살이를 한 지 벌써 3년째. 윤영미는 올해 종달리로 이사했다. 그 집이 바로 ‘무모한 집’이다. 그녀는 유튜브 채널 ‘윤영미의 무모한 집’도 운영한다. 이사를 하고 수리·인테리어 과정을 거쳐 집이 재탄생하는 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도의 전통 양식을 살리면서 모던함을 가미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돌 부엌과 돌 인덕션, 찻장 등 윤영미의 감각이 녹아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저는 방송이 있기 때문에 서울을 왔다 갔다 해요. 그래도 한 달에 반은 제주도에서 사는 것 같아요. 남편은 제주도에 계속 있고요. 제주도 집에 있다 보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이 행복해요. 평생 생각만 하고 못 해봤던 일을 짧게나마 실현한 것 같아서 또 다른 꿈을 이룬 듯한 느낌이 들고 뿌듯해요.”
그런데 무모한 집은 정확히 말하면 윤영미가 산 집이 아니다. 6년 반 동안 장기 렌털한 집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집도 아닌데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윤영미 역시 생각보다 많은 돈을 썼지만 후회는 없다. 그녀는 “저는 남들과 다르다. 내가 행복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에 살던 제주도 집은 ‘체리집’이었어요. 벚꽃(체리 블러섬)이 굉장히 아름다운 집이었거든요. 이번 집은 감나무가 있어 ‘감나무집’이라고 하려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왜 남의 집에 그렇게 억대의 돈을 투자하느냐, 무모한 짓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저도 돈이 그렇게 많이 들 줄 몰랐는데, 무모한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제 인생 자체를 돌이켜보니 저는 굉장히 무모한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무모한 집’이라고 이름 지었죠.”
윤영미는 자신의 무모한 삶에 관해 얘기하면서 ‘결혼’을 언급했다. 결혼 또한 무모했다는 생각이다. 그녀는 서른다섯 살에 출판사 직원이었던 황능준 씨와 결혼했다. 화려한 아나운서였던 윤영미의 선택은 다소 의외였다. 결혼 전 소개팅, 선을 많이 봤는데, 황능준 씨만큼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단다.
즉 사랑 하나만 보고 결혼한 것인데, 결혼 생활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윤영미는 가장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했다. 황능준 씨가 결혼 후 3년 만에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전업주부가 됐기 때문. 졸지에 가장이 된 그녀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윤영미는 지난해 한 방송을 통해 그동안 쌓였던 가장의 스트레스를 털어놓았다. 늘 밝고 당당한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더욱이 윤영미는 남편과 ‘졸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냐고 묻자 그녀는 “지금 남편과 거의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졸혼이나 마찬가지다. 30년 정도 같이 살았으면 많이 산 거다”라고 말했다.
“남편의 장점은 밝고 긍정적이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점이에요. 결혼할 당시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만 좋으면 됐지’라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그건 아니더라고요.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아요. 가장으로서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보면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윤영미가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산 이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 때문이었다. 현재 20대인 두 아들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특히 첫째 아들은 미국 아이비리그에 편입한 바 있다.
“첫째는 경영을 전공해서 월스트리트 쪽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고, 둘째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 해요. 나중에 정말 우리 집을 지어줄지도 모르죠.(웃음) 저는 아이들이 무엇이 됐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애들을 속박하며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그렇게 하니까 오히려 애들이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윤영미는 어느덧 60대 시니어가 됐다. 동안 소리도, 젊게 산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잘 모르겠단다. 그냥 자신의 방식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을 뿐이라고. 윤영미는 나이를 먹을수록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방송과 여행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무모한 도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뛰어들 그녀다.
“앞으로 2년 동안은 우리 애들 학비를 대는 것이 목표예요. 그리고 제주도 집을 6년 반 계약했으니 잘 살아야죠. 또 욕심이 있다면 강원도나 전라남도에 새집을 얻어 제주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살고 싶어요. 인생의 목표는 오늘을 재밌게 살고, 하고 싶은 대로 살자예요. 독자 여러분도 마음에 어떤 갈망이 있다면 앞뒤 보지 말고 무조건 행하면서 즐기며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지역문화예술프로젝트 ‘청춘유랑극단’이 제주도 어르신들을 찾아간다.
청춘유랑극단은 서울에 집중된 공연문화자원을 지방의 주민들도 함께 즐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이병용 빅터스 아트앤컬쳐 대표가 기획한 프로젝트다. 프로젝트의 목적지로는 육지와 떨어져 있는 제주도를 선정했다.
이병용 대표는 “공연문화예술을 접하기 어려운 제주도 어르신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청년 배우들이 찾아가는’ 무대인 ‘청춘유랑극단’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이에 어르신들을 위한 볼거리 위주의 공연을 구성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시즌2에서는 극 속에 트로트, 마술, 춤 등을 자연스럽게 융합시켜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무대를 준비하는 데에 중점을 뒀다. 또한 중앙대학교 공연예술학과 교수이자 극단 ‘두 하늘’의 연출인 강민호 연출과 협력해 제주도 지방 특색을 살려낸 작품을 만들어갈 예정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국내 연극영화과 학생들과 예술 전공 중국 유학생들이 협동 작업을 진행할 예정으로, 국경을 넘는 문화예술의 어울림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가 될 예정이다.
청춘유랑극단 시즌2는 오는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에서 시작해 일주일간 낙천리 의자마을, 한원리, 협재리, 무릉리 등 제주도의 마을을 찾아가며 순회공연을 올린다. 제주주민협의회 초청공연으로서, 9월 3일 토요일에는 이중섭거리의 서귀포 관광극장에서 이중섭의 예술세계와 일대기를 그린 ‘길 떠나는 가족’을 각색한 공연 ‘나와 소’를 통해 서귀포 주민들과 만날 예정이다. 마지막 날에는 한라산 정상에서 청춘 선언문 발표식과 작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공연의 마침표를 찍는다.
한편, ‘청춘유랑극단 시즌2’의 제주 순회공연 과정을 담은 영상은 유튜브 계정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요즘 시골에서는 아기 울음소리를 듣기 어렵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된 까닭이다. 그러나 고요했던 마을이 최근 청년들의 웃음소리로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일자리 부족과 주택난을 피해 ‘탈도시’한 젊은이가 하나둘 늘어서다. 이들은 지역의 값진 자산과 톡톡 튀는 감성을 한데 버무려 새로운 귀촌 문화를 이끌고 있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격언이 만들어진 건 그만큼 도시가 많은 장점을 갖고 있어서일 테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출세 기회가 주어졌고, 경제·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거듭된 경제 위기와 물가 폭등으로 도시는 더 이상 탄탄한 직장과 아늑한 내 집을 보장해줄 수 없게 됐다.
농어촌에 대한 이미지도 달라졌다. 고즈넉한 마을에서 묵묵히 밥을 지어 먹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휑한 부지에는 탁 트인 논이 펼쳐진 ‘논 뷰’(View) 카페가 들어선다. 가장 시골스러운 것이 오히려 가장 세련된 것으로 변모했다.
팍팍한 도시 생활을 뒤로한 채 시골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사람도 늘었다. 그러나 실행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아이디어 부족이다. 무작정 귀촌에 도전했다간 기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젊은 귀촌인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중에서도 지역의 문화적 특성이나 자원에 아이디어를 덧대 새로운 경제를 창출하고,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청년 ‘로컬크리에이터’들을 소개한다.
지역과 귀촌인은 ‘상생’해야
충북 괴산에 둥지를 튼 ‘뭐하농’은 농부도 흙투성이의 고된 삶을 벗어나 얼마든지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청년들이다. 같은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주식회사를 만들고, 자금을 모아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수익 구조도 짠다. 무언가를 하는 농부들의 공간이라는 뜻의 ‘뭐하농 하우스’는 반딧불이를 방사하는 행사를 무료로 진행하거나, 도시 청년들에게 창업·창농을 가르치는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충북 청주시 문의면 꿀카페 ‘해밀당’의 최고야 대표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남편과 시댁으로 귀농했다. 해밀당은 부부가 직접 채집한 달콤한 벌꿀로 메뉴를 구성한다. 수해와 병충해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이 농촌과 뗄 수 없는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그 뒤로는 상품을 생산할 때 최소한의 포장재를 사용하고, 작물을 기를 때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려 한다. 더불어 마을 환경 캠페인도 진행한다.
경북 문경시 산양면의 ‘화수헌’은 청년들로 이루어진 기업 ‘리플레이스’가 운영한다. 화수헌은 문경의 700평 규모 고택을 트렌드에 맞게 개조한 한옥 카페로, 냇물이 워낙 맑고 깨끗해 비단결 같다는 금천과 현리마을의 한옥들이 어우러져 안온한 분위기를 풍긴다. 포털 사이트에서 ‘문경 카페’를 검색하면 상단에 뜰 정도로 명소가 됐다. 오미자차, 매실차, 미숫가루 등 대부분의 메뉴는 문경에서 나고 자란 식자재로 만들어 지역 특색을 살렸다. 이외에도 사진 스튜디오 ‘볕드는 산’, 폐양조장을 보수한 복합문화공간 ‘산양정행소’를 차례로 열며 문경의 작은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별별 귀농·귀촌 유튜브 채널
●귀농다큐 KTV
국민방송에서 운영하는 다큐멘터리 채널이다. 귀농·귀어·귀촌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게 담았다. 인기 동영상으로는 ‘150억 원 들여 만든 국내 1호 민간 정원!’, ‘우리는 4600만 원으로 여유를 샀습니다’ 등이 있다.
●리틀타네의 슬기로운 생활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시골 전원생활을 시작한 30대 리틀타네와 영국 특파원 20대 망고로아의 유학 생활이 번갈아 올라오는 자매 채널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듯 다른 생활을 보여주며 묘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귀농빚쟁이
30대에 귀농한 쨍이 씨의 채널이다. 빵빵한 청년 농부 지원책에 귀가 솔깃해 로망을 갖고 혼자 시골로 왔다. 그러나 추가 시설비, 농약비 등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쳤다. 쨍이 씨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농촌의 현실을 풀어낸다.
큰맘 먹고 시작한 한달살기. 정해진 시간에 정신없이 유명한 장소를 훑는 관광이 아닌, 느리고 여유로운 휴식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부지런히 살아온 이들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하루를 빈둥빈둥 보내는 게 영 익숙하지 않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제주 생활이 즐겁고 만족스러울까? 급할 건 없다. 우리에게는 30일이라는 시간이 있으니까!
한달살기는 단순한 여행과는 차이가 있다. 보통 한달살기를 앞둔 사람들은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한 달 동안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동네 산책을 하다 말을 트게 된 아주머니에게 사는 이야기를 듣거나, 비를 피하려 우연히 들어간 작은 카페에서 메뉴에 없는 음료를 대접받는 등의 상황 말이다.
그러나 막상 제주 땅에 발을 딛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육지에서는 먹을 수 없는 음식, 할 수 없는 일을 깨알같이 모두 즐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을 참고해 각종 정보를 샅샅이 뒤지게 되고, 고민과 갈등의 연속에 하루하루가 숙제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이상과는 다른 제주살이에 문득 조바심이 날 수도 있다. 한달살기가 아니라 그저 한 달간의 패키지 여행이 되는 셈이다. 한달살기에 대한 보상 심리를 바라기보다, ‘여행 테마’를 설정하고 제주를 누려보는 건 어떨까.
마음의 자유 선물하는 ‘책방 투어’
전자기기와 영상매체가 발달한 후로는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도 버거운 사람들이 늘었다. 독서율이 점점 감소하고 있다는 의미다. 한달살기를 명목으로 멀리했던 책을 다시 가까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제주에는 소규모 독립 서점, 독특한 색깔을 가진 서점이 많다. 제주만의 지역 감성과 책방지기의 취향이 버무려져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책방 특유의 기분 좋은 종이 냄새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주는 아늑함은 덤이다.
바라나시 책골목_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횟집 거리 사이, 빈티지한 간판이 눈에 띈다. 내부로 들어서면 이국적인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인도 서적과 세계문학 및 인문학 책이 즐비하다. 이곳은 제주 속 인도, ‘바라나시 책골목’이다. 바라나시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 있는 도시다.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바라나강과 아시강을 합쳐 붙인 지명으로, ‘신성한 물을 차지한다’는 뜻이 있다. 생애 한 번은 가봐야 할 도시로 꼽히며, 일부 여행객은 인도 여행의 필수 코스로 소개하기도 한다. 제주 바라나시 책골목은 한국에서 인도의 정취를 느끼기 충분한 장소다. 책방과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 인도식 밀크티인 ‘차이’나 요구르트 ‘라씨’도 맛볼 수 있다.
만춘서점_야자수를 배경으로 한 아담한 흰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삼각형 구조의 내부로 매력을 더했다.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책들과 LP, 제주의 감성이 흐르는 소품이 가득하다. ‘만춘서점’ 책방지기는 출판·디자인 업계에서 일하다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했다. 그래서인지 육지 사람이 그리는 제주의 장면을 더욱 잘 옮겨놓은 듯하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 1인용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쉬어 가기도 좋다.
소심한 책방_오름 다섯 개가 감싸고 있어 유독 고요한 제주의 동쪽 끝 마을, 종달리다. 좁은 골목 안쪽, 돌담 너머에 ‘소심한 책방’이 있다. 이곳은 각각 제주와 서울에 사는 두 사람이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모아 만든 공간이다. 소설, 에세이, 여행 등 단행본부터 독립 출판물, 제주 특산품, 문구까지 다채롭게 구비했다. 낮에는 햇살이 가득 들어와 책방에 온도를 더해주고, 밤에는 노란 불빛이 다정하게 채워진다. 때로 소소한 전시나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주변에 들를 곳이 많은 관광 지역이 아닌데도 굳이 찾아가게 되는 이유는 하나만 꼽기 어렵다.
책약방_‘책약방’은 초록 잎과 나무, 낮고 작은 집 사이에 위치한 아주 작은 그림책 전문 서점이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무인으로 운영된다. 사람 대신 책이 지키고, 마을이 지킨다는 독특한 콘셉트를 갖고 있다. 현관 옆에 걸린 작은 의자 위에는 운영자가 추천하는 ‘오늘의 그림책’이 놓여 있다. 비치된 그림 일기장과 100자짜리 작은 원고지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다. 릴레이처럼 이어진 글들을 읽다 보면, 책약방의 진짜 ‘약’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올레길은 제주도의 마을길, 해안도로, 숲속 오솔길 등 걷기 좋은 길들을 선정해 개발한 코스다. 2007년 9월 8일 제1코스(시흥초등학교~광치기해변, 총 15km)가 개발된 이래, 2012년 11월 제주해녀박물관~종달바당을 잇는 21코스가 개장하면서 올레길 코스는 제주도를 한 바퀴 빙 두르게 됐다. 현재는 제주도 내에 총 23개 코스가 있으며 우도, 가파도, 최근 확장된 추자도 코스를 포함하면 총 27개다. 각 코스는 길이가 대체로 15km이내이며, 평균 소요 시간은 5~6시간 정도다.
제주도 올레길을 한 코스씩 돌다 보면 도내의 모든 코스를 돌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대중교통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코스도 있어 차를 갖고 있지 않다면 동선과 숙소 계획을 맞춰 짜야 한다. 식사도 매번 사 먹을 수 없으니 간단하게 준비한다. 또한 올레길은 리본을 매달아 길을 안내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으로 혼자 간다면 주의가 필요하다. 통상 날이 저무는 시간인 오후 6시 이후로는 드문드문 표시한 리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길을 잃기 쉽다.
이런 사소한 단점을 보강한 ‘알파캠프’는 트레킹과 관련해 가이드, 교통, 식사, 숙소, 세탁 서비스 등을 모두 제공한다. 더불어 관광객이 한 달 동안 제주의 모든 올레길과 새로 생긴 하영올레길까지 안전하게 완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토끼반과 거북이반 중 하나를 골라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체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보통 중장년층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68세 이선이 씨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그 대신 올레길을 걸어볼 생각으로 알파캠프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올레길 코스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고, 숙소 예약도 번거로워 고민하던 차였다. 이 씨는 “차로 여행할 때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을 가까이 보며 자연의 소중함을 느꼈다. 그리고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제주는 그저 우리나라의 섬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정겨운 기분이 든다”고 소감을 밝혔다.
알파캠프에는 제주 올레길 코스를 완주하는 ‘제주올레캠프’ 프로그램 외에도 오름이나 한라산, 4대 휴양림, 숲길 등을 다양하게 걷는 ‘제주여행캠프’, 다이어트 식단을 제공하는 ‘다이어트 캠프’, 오름 전문 캠프인 ‘제주계절캠프’ 등이 있다.
의미 있게, 친환경 한달살기
‘제주도’ 하면 많은 이들이 청정 자연을 떠올린다. 그러나 막상 해변에는 폐그물, 밧줄, 스티로폼, 플라스틱, 페트병, 장대 등 폐어구와 나무토막이 가득하다. 게다가 언제 번식했는지 모를 파래가 수면에 떠 있거나 바위나 모래사장에 널려 있어 볼썽사납다.
제주도는 수용력을 넘어서는 관광객의 유입으로 환경이 위협받고 있다. 실제로 도는 1인당 폐기물 발생량을 전국 평균의 2배 이상, 관광객이 버리는 생활폐기물은 전체 발생량 가운데 4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일부 관광객은 제주를 지키기 위해 ‘쓰레기 없는 제주’를 여행 혹은 한달살기 테마로 설정한다. 제주에 있는 동안 최대한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플로깅을 하는 식이다. 플로깅은 간단한 산책이나 조깅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운동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혼자서 가고 싶은 장소를 지정해 환경 정화를 하거나, 제주 내 여러 봉사단체에서 진행하는 캠페인과 이벤트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다.
나에게 맞는 여행 테마는?
후회 없을 제주도 한달살기를 위해서는 장소 위주로 계획을 짜기보다 나만의 큰 주제나 목표를 정하는 게 좋다. 우선 ‘왜 제주도에 가려고 하는지’를 고민해보자.
1 건강하게 한달살기 ‘하루 한 군데 오름 오르기’, ‘서핑·승마·스쿠버다이빙 등 레포츠 한 종목 배우기’, ‘한 달간 인스턴트식품 끊기’ 등으로 몸을 상쾌하게 만들 수 있다.
2 휴식하며 한달살기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다면 ‘매일 한 시간씩 바닷가에서 멍때리기’, ‘동네 반경 5km 안에서 생활해보기’, ‘7시간 이상 수면하기’ 등의 방법을 통해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
3 습관 개선 한달살기 한 달 동안 ‘전자기기 없이 살기’, ‘부정적인 말 하지 않기’,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기’ 등을 시도해 나를 괴롭히는 습관을 개선해보는 건 어떨까.
1 바라나시 책골목 2 만춘서점 3 소심한 책방 4 책약방
이야기를 좋아해 그 속에 푹 묻혀 살았다. 동네 사랑방, 길쌈하는 여인들 틈바구니 비집으며 이야기 구슬들을 집어 담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다듬고 정리해 하나씩 쓸모 있게 만들기 시작했다. 구슬은 서 말이라도 꿰어야 장신구가 되듯이, 최상식(77) PD의 손에서 잘 꿰어진 고향의 전설들은 한국의 여름을 대표하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이 되었다.
최상식 PD는 1971년 서울중앙방송(현 KBS)에 PD로 입사했다. 1976년부터 1994년까지는 TV드라마 PD로서 ‘전설의 고향’(1977~1989), ‘보통사람들’(1982~1984), ‘춘향전’(1994) 등을 연출했다. 이후 KBS 드라마 제작주간으로 ‘젊은이의 양지’(1995), ‘첫사랑’(1996~1997), ‘태조왕건’(2000~2002), ‘겨울연가’(2002) 등을 기획 및 제작했다. 2002년 퇴사한 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원장, 미디어공연영상대학 학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 ‘최상식 PD와 송도영 성우의 전설의 고향’을 운영하며 전설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있다.
‘촌스러운’ 캐릭터의 창시자
최상식 PD의 이름 밑으로는 제목만 봐도 OST가 귀에 들릴 정도로 유명한 작품들이 빼곡하다. 그는 시청률 공식 집계 이래 대한민국 모든 프로그램을 통틀어 역대 최고 시청률인 65.8%를 기록한 KBS 2TV 주말 연속극 ‘첫사랑’의 책임 프로듀서다. 491회로 최장수 일일 연속극 기록을 보유한 ‘보통사람들’의 책임 프로듀서이며, 김희선, 배종옥, 배용준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발굴해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사람들은 ‘전설의 고향’부터 떠올린다.
“1976년부터 드라마 PD로 일했어요. 1977년 10월에 시작한 ‘전설의 고향’은 PD로서 영글기 전에 만들었던 프로그램이죠. 저 스스로는 부끄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잖아 있어요. 그래서 저는 대표작으로 ‘전설의 고향’보다는 ‘보통사람들’을 꼽곤 하는데, 워낙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최 아무개 하면 ‘전설의 고향’부터 떠오르는 모양이에요.”
지금도 ‘납량 특집 드라마’의 대명사로 여겨지지만, 당시 파급력은 더욱 대단했다. TV 있는 집이라면 안 본 집이 없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전설의 고향’이 전파를 탄 다음 날이면 온통 전설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2년 동안 프로그램을 제작한 불세출의 연출가임에도,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좋아할 만한 ‘전설’이란 소재 덕분에 인기 있었던 것이라며 겸손을 보인다.
마산 시골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전설의 고향’ 역시 그가 유년 시절 접한 수많은 이야기들로부터 탄생했다. PD가 된 그는 연출자로서 어떤 점을 내세워야 성공할지 고심했고, 그동안 모아둔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야기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KBS에서 TV 드라마 방영을 시작한 지 10년이 막 지나던 즈음이었다. CG는커녕 촬영한 영상에 효과음을 넣는 편집 작업조차 다른 세상 이야기이던 시절, ‘전설 속 요괴와 귀신을 어떻게 구현하려고 하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려였다.
하지만 그는 제작을 밀어붙였다. 쑥을 태워 스튜디오에 연기를 자욱하게 내고, 시골 초가집을 표현하기 위해 스튜디오 바닥에 지푸라기를 잔뜩 가져다 깔았다. 물뿌리개로 카메라 렌즈 앞에서 물을 뿌려 비 오는 날씨를 연출했고,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뱀이나 구렁이를 직접 섭외(?)해 스튜디오에 풀기도 했다. 게다가 리얼함을 추구하는 연출자였던 그는 출연 배우에게 어떤 장치가 설치돼 있는지 미리 안내하지 않고 촬영에 임했다. 덕분에 촬영 중 실제로 울음을 터뜨리는 배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인 촬영 현장에서 생고생을 해야 하니, 배우고 제작진이고 ‘전설의 고향’ 참여를 원치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행히 고생한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프로그램을 크게 흥행시킨 것 말고도 구미호나 저승사자를 한국 납량물의 대표 캐릭터로 정립한 까닭이다. 하얀 소복과 하얗게 센 머리, 희고 큰 꼬리 아홉 개를 가진 구미호, 검은 갓과 검은 도포, 하얀 얼굴에 까만 입술의 저승사자. 이제는 당연하다 못해 자칫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최상식 PD가 고민 끝에 구현해낸 엄연한 창작물이다.
“저는 어릴 적에 여우 이야기를 많이 접했어요. 농한기인 겨울에는 사람들이 큰방에 모여서 새끼를 꼬면서 옛날이야기를 하곤 했거든요. 그때만 해도 한국에 여우가 굉장히 많았고, 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소만큼 중요한 가축이 없었기 때문에 여우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았죠. 하지만 1979년 처음 에피소드를 제작할 때만 해도 구미호는 ‘남자 간 빼먹는 여우 같은 여자’ 같은 욕으로나 쓰였어요. 관련한 설화를 아는 사람도 얼마 없었죠. 그래서인지 반응이 좋을 줄 전혀 몰랐습니다. 저를 포함한 제작진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했어요.”
1대 구미호를 연기한 배우 한혜숙은 길에 나서면 아이들이 ‘구미호 나타났다’며 돌을 던졌다. 방송 잘 보고 있다는 전화가 고등학교 은사로부터 걸려오기도 했다. ‘전설의 고향’ 출연 섭외와 프로그램의 인기는 반비례했지만, 구미호만큼은 예외였다. 구미호로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이름 날리는 데 성공하면서 방송가에는 ‘여우 귀신이 도와줘 스타가 된다’는 소문까지 생겼다.
미래 콘텐츠 찾아 헤매는 이야기꾼
그의 취재 과정은 학자의 연구를 방불케 한다. 서재와 작업실, 거실을 가득 채운 책들과 고서, 그림 등 고문헌을 뒤지고, 취재하다 만난 동네 주민들에게서 새로운 이야기를 듣 기도 한다. 전설을 발견하면 현장에 직접 가서 증거물이 실제로 있는지, 전설에 등장하는 지역과 그 근방을 샅샅이 뒤진다. 이제는 동네의 오랜 전설을 아는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신 탓에 지역 주민이라도 전설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네 여인 전설이 있는 서울 남산 부엉바위 약수터도 찾기 힘들었어요. 조사해보면 해방 전까지 한양, 경기 일대 최고의 약수터로 꼽혀서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데 남산을 아무리 오르내려도 전설에 등장하는 부엉바위 약수터는 없는 거예요. 2주일이 넘도록 찾다가 계단 난간을 넘고 가시덤불 밑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약수터가 있었어요. 하도 무당들이 찾아오니까 도시 정비를 하면서 그곳을 폐쇄해버렸던 거예요. 그러니 경비원도 주변 주민들도 전혀 몰랐던 거죠.”
그를 움직이는 건 사명감이다.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전국을 헤매며 현장의 영상을 담는 고생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1박 2일에 유튜브 방송 8~9회 분량을 취재하는 답사 일정이 점차 힘에 부친다. 그러나 그는 전설이 갖는 콘텐츠의 중요성을 알기에 그만둘 수 없다. 한 가지 소재로 웹툰, TV 드라마, 뮤지컬, 영화까지 만드는 요즘이다. 전설이 빠지면 섭섭하다.
“전설은 이야기의 보물창고예요. 한국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 다른 나라 사람들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구조의 이야기들이죠. 게다가 전설을 뜯어보면 당시 서민들이 무엇에 분노하거나 서러워했는지, 무엇을 꿈꿨는지 알 수 있어요. 인간의 삶과 죽음, 한(恨)이나 정(情)이 한데 들어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소스가 또 있을까요.”
그는 올해 초 국제영화제에 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안으면서 이를 증명해냈다.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측으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은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 11부 ‘짐승’ 편의 정재은 영화감독이 ‘전설의 고향-이어도’(1979)를 동반 초청작으로 직접 추천했기 때문이다. 후배들은 ‘과거 선배들의 업적이 재조명된다는 점이 의미 있다’, ‘함께 소개할 수 있어 영광이다’라며 기뻐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소식을 접하곤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다.
“처음 후배들한테 연락을 받고서는 ‘그걸 창피해서 어떻게 내느냐’면서 손사래를 쳤어요. 장비도 마땅치 않았고 편집은 거의 불가능한데다 막 컬러 영상이 도입되던 시절에 만든 영상이니 요즘 나온 작품들에 비하면 얼마나 어설프겠어요. 하지만 영화제 측에서 유튜브에 올라온 리마스터링 영상을 확인했고, 충분히 좋다며 재차 요청해서 결국 출품하게 됐죠. 그때 제주도에 태풍이 와서 비바람 부는 밖에서 힘들게 촬영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유튜브로 옮겨붙은 열정
열흘에 한 번, 10분 내외의 분량. 얼마든지 재탄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지난해 유튜브 채널 운영을 시작했다. ‘10대가 보지 않으면 유튜브로 성공할 수 없다’, ‘이미 야사나 민담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이 너무 많아 상대가 안 될 것이다’ 등 대부분이 만류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제작을 밀어붙였다. 배우를 쓰는 대신 연필을 들었다. 직접 그린 삽화와 촬영해온 현장 영상,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메텔 역 등을 맡았던 유명 성우이자 아내 송도영의 더빙 음성을 합하면 ‘가내수공업’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퀄리티의 영상이 탄생한다.
유튜브 채널 운영은 순탄한 편이다. 구독자도 7만 명을 훌쩍 넘겼고, 영상의 조회수 추이도 좋다. 올린 지 한 달 만에 조회수 110만 회를 넘긴 영상도 있다. 야심차게 기획한 어버이날 특집 ‘고비사막을 넘은 효자’ 영상 조회수가 정작 낮다는 점이 아쉽지만 아무렴 괜찮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밑그림 작업이다.
지난해 4월부터 여태 그린 그림만 1000장이 넘는다. 이쯤 하면 실력이 늘 법도 하건만, 현장에서 연출할 때도 배우의 표정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그는 직접 그린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이 마뜩찮아 애를 먹고 있다. ‘내가 남의 속에 들어앉는 게 아니고서야’ 맡길 수도 없는 일이라, 그는 오늘도 눈초리며 입 매무새를 그렸다 지우길 반복한다.
유튜브에는 과거 ‘전설의 고향’에서 다뤘던 전설과 새로운 전설에 대한 영상이 골고루 올라간다. 전설만 12년 넘도록 소개했지만 아직도 다루고 싶은 내용이 차고 넘친다. 일본에서 살았던, 살아야 했던 한국인들의 전설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지리적·역사적으로 우리와 연관이 깊은 나라예요. 이미 잘 알려진 귀무덤이나 코무덤 말고도 가야, 백제 때부터 임진왜란, 일제강점기까지 합치면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엄청날 거예요. 국내에서 다룰 전설도 많고 시간과 체력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다뤄보려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 갔을 때 작은 돌다리 간판석에 백제 관직과 이름이 새겨져 있거나, 얼굴 반절이 탄 채로 절 구석에 처박혀 있는 우리나라 불상을 많이 봤어요. 그런 유물, 지명에 담긴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은퇴 후 학생들 앞에 설 때도 좋았지만 무언가 부족했나 보다. 촬영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꿈을 종종 꿨다. 무언가 잘못돼서 촬영 전체가 어그러지는 꿈은 귀신 꿈보다 끔찍했다. 20년 가까이 그를 쫓아다니던 꿈은 지난해 유튜브 시작과 함께 멎었다. 천직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그가 소망하듯, 이야기꾼이 꿰어낸 보배는 길이길이 K-콘텐츠의 든든한 원형이 되어줄 것이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오른 우리는 항상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한 번쯤 제주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살고 있는 곳이 아닌, 나를 환기해줄 수 있는 새로운 환경에 호기심이 향한다. 그러나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간 상상과는 다른 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진정한 제주를 느끼고, 다시 일상을 버틸 인내를 얻고 싶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생활 관광의 형태인 ‘한달살기’는 낯선 지역에서 먹거리, 볼거리를 즐기고 현지인과 교류하는 기회를 가지며 그 장소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특히 환상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도는 국내에서 한달살기에 적합한 지역으로 중장년층에게 주목받고 있다. 언어가 달라 버벅거릴 일도 없고, 갑자기 생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돼서다. 해변의 반짝이는 몽돌들, 아기자기하게 이어진 돌담, 솟아오른 야자나무 등 천혜의 자연이 펼쳐져 있어 해외에 온 것 같은 기분은 덤이다.
‘진짜 나’를 찾기 위한 쉼
51세 이정은 씨는 지난 5월, 큰딸의 권유로 제주 애월읍에서 한달살기를 시작했다. 젊은 시절부터 부산에서 자녀 셋을 키우며 직장 생활을 병행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삶은 없어지고 아이들의 엄마, 직장인이라는 자격만 남아 있었다. “어느 날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정말 잘 모르겠더라고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죠. 남편,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지금 바로 읊을 수 있어요. 내가 아니라 타인 속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주도에 도착한 순간, 머리 아픈 일상과 복잡한 감정들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마음이 안정되니 풀 한 포기, 흙 한 줌이 생생하게 느껴져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셈이죠.”
단박에 떠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말 내가 집에 없어도 될까?’ 싶은 마음에서다. 그러나 오히려 자녀들도 서로를 살피고 집안일을 분담하며 책임감을 가질 기회가 됐다. 그때야 이 씨는 모든 게 혼자만의 집착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불안하기도 해요. 그래서 제주 정도의 위치가 좋아요. 떠나온 느낌은 나지만 정말 급한 일이 있다면 육지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해외는 당장 돌아오려 해도 밟아야 할 절차가 있잖아요.”
그의 제주살이는 한 달짜리지만, 이 시간을 촘촘히 보낸 덕에 앞으로의 일상을 위한 원동력이 생겼다. “제 나이가 되면 내려놓을 용기가 필요해요. 직업, 가족, 인간관계 등 이제껏 일궈놓은 일들이 다 자존심과 직결되는데, 은퇴하면 한 번에 뚝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제주에 와서 내려가기 위한 계단을 하나씩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다치지 않게요.”
새로운 친구와 함께하는 취미
제주도는 골퍼들에게도 사랑받는 지역이다. 골프장 주변으로 펼쳐진 오름과 손에 닿을 듯한 한라산이 안온하기 그지없다. 57세 한효진 씨 역시 골프를 즐기기 위해 제주로 한달살기를 왔다. 골프는 혼자 즐기기엔 한계가 있는지라 제주를 방문한 골퍼들이 모이는 온라인 카페나 커뮤니티를 적극 활용했다.
“골프장 동행을 구하는 글이 올라오면 댓글이 엄청 빨리 달려요. 아무래도 골프는 비슷한 실력을 갖춘 또래와 제일 편하게 칠 수 있을 것 같아서, 올라온 글을 보고 저랑 맞겠다 싶으면 연락하죠. 덕분에 공감대가 잘 맞아서 즐거워요. 한 게임 즐기고 점심도 같이 먹으면서 새로운 사람들이랑 교류하는 재미가 쏠쏠해요.”
여가 시간에는 가까운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카페에 들어가 차 한잔 마시며 공상에 잠긴다. “혼자 오름을 오르다가 다른 사람들과 한두 마디 나누거나, 조용히 비자림을 걸으며 나무 향을 맡는 일은 마음에 안정을 줘요. 해외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는데, 제주는 아무래도 국내라 다시 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편히 먹게 돼요.”
환상만 품었다간, ‘글쎄’
제주도에서 항상 환상적인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유명인들의 제주 생활이 세간에 아름답게 비춰지다 보니 제주 생활 자체가 인생 후반부의 로망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만일 한달살기, 더 나아가 제주로의 이주를 단순히 불편하고 벗어나고픈 과거로부터의 탈피라고만 생각한다면 해피 엔딩은 장담할 수 없다.
제주도는 섬이기 때문에 마트, 학교, 학원, 편의시설이 모두 제주 도심에 몰려 있다. 특히 외곽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병원을 찾기 힘들다. 큰 사고가 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의료 혜택을 이용하려면 50분 이상 이동해야 한다. 따라서 멋진 자연환경만 생각하고 너무 외진 곳으로 들어가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불편한 대중교통, 비싼 난방비, 추가로 붙는 택배비 등도 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로 꼽힌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반복되면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다.
제주도는 분명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낭만적인 장소임은 틀림없다. 제주에 살아보기를 계획하고 있다면, 현실을 보고 그에 맞는 생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단점을 감내하는 만큼 그 속살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장성식, 박영순 부부의 제주 한달살기 tip
장성식(55), 박영순(54) 부부는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서 초밥집을 26년째 운영하고 있다. 자영업 특성상 쉬는 날이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마음은 지쳐가고, 체력은 바닥이 났다.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느낄 즈음, 우연히 인터넷에서 한달살기를 알게 됐다. 평소 자연 친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편인 데다 나이가 들고 자녀들이 독립하면 도시에 사는 게 맞는지 고민을 많이 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연고도 없는 제주에 무작정 이주하는 것은 위험한 모험이기에 일단 한 달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계획 과정에서 가장 고심했던 요소는 단연 ‘숙소’다. 구체적으로는 도심을 벗어나 자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가, 숙소 호스트와의 소통은 원활한가 등을 고려해 서귀포의 ‘아라민박’에 자리 잡았다. 부부는 한달살기를 하면서 어떤 것을 느꼈을까?
성향에 맞는 숙소 찾기는 필수
“사람마다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이 다르고, 지내고 싶어 하는 숙소가 달라요. 저희 부부는 제주 이주를 고려하고 있어서 실제로 제주에 살고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었어요. 또 현지 분들만 알고 계신 좋은 장소나 식당도 공유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죠.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숙소를 정해서인지 운명처럼 다정한 분들을 만났어요. 사장님이 여행 관련 정보를 많이 알고 계셔서 그것만 참고해도 한 달이 훌쩍 가버릴 것 같네요.”
‘무조건 관광’의 한계
“유명한 관광지를 쫓아다니기엔 한계가 있어요. 그런 곳은 사람도 많은 데다 입장료도 꽤 비싸죠. 그건 저희가 원하는 온전한 쉼이 아니기도 하고요. 부부끼리 왔지만, 한 달이 짧은 시간은 아니다 보니 처음엔 즐겁게 지내도 갈수록 무료해질지도 모르죠.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충분히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어렵게 낸 시간인데, 의미 없이 흘러간다면 슬프잖아요.”
배차 시간이 긴 대중교통
“서울은 보통 10분 내로 대중교통을 탈 수 있어요. 오히려 자가용이 불편할 때도 있죠. 하지만 제주는 달라요. 자가용이 없으면 바로바로 이동이 힘들고, 대중교통은 항상 시간을 맞춰야 해요. 중간에 환승하게 되면 더 복잡해지죠. 그래서인지 요즘은 자차 탁송도 많이들 하시더라고요.”
부담스러운 식비
“한 달 동안 매일 밥을 사 먹을 수는 없잖아요. 제주도 물가가 만만찮으니까요. 저희는 준비해둔 각종 식재료로 해 먹는 경우가 많아요. 조미료는 숙소에 구비돼 있는지 확인해보고, 소분해서 챙겨오는 게 좋아요. 하루 식비를 일정 금액 정해두는 것도 방법이죠. 게다가 도심에서 벗어날수록 식당이 빨리 문을 닫기 때문에 일정을 잘 조율해야 해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MZ세대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는 데 당당하다. 그들은 훈수를 두는 어른을 ‘꼰대’라고 지칭하면서 자신의 세대와 분리했다. 나이 든 어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노인에 대한 반감으로 커졌다. 그러면서 고령자의 출입을 막는 장소들이 생겨났고, 온라인에서는 노인 혐오 표현이 거리낌 없이 쓰이고 있다. 노인 혐오를 감추지 않는 세태를 좀 더 들여다봤다.
“나이 먹고 늙은 것도 서러운데, 얼마나 대단한 곳이라고 못 들어가게 하는 거야?”
‘노중년존’ 식당 인근의 고령자 주민은 울분을 토했다. 이른바 ‘노OO존’은 출입할 수 있는 연령에 제한을 두는 것이다. 영유아와 어린이의 출입을 제한하는 ‘노키즈존’이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중년 이상의 출입을 제한하는 ‘노중년존’ 또한 등장했다.
‘속사정 vs 차별’, 노중년존
‘49세 이상 정중히 거절합니다.’ 2019년 문 앞에 이 같은 안내문을 내건 서울 신림의 한 실내포차는 ‘노중년존’으로 화제를 모았다. 현재는 폐점된 상태다. 실제로 49세 이상 손님은 그 식당에 들어가지 못했고, 욕을 하는 고령자가 많았다고 한다. 출입을 거절당한 적이 있는 60대 주민은 “손님을 차별하는 식당이 문을 닫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꼬집었다.
해당 식당의 노중년존 결정에는 속사정이 있었다. 60대 여성 혼자 식당을 운영했는데, 중장년층 남성들이 술주정을 부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서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40대 박 씨는 “나는 남편과 같이 운영하는데도 술 마신 어르신들이 많이 치근덕거린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이해된다”라면서 공감했다.
서울 신림에는 49세 이상 출입을 제한하는 호프집이 또 하나 있다. 현재도 운영 중인 곳으로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 밝고 활기차지만, 소음 공해 등의 단점이 따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런가 하면 부산의 한 대학교 인근 술집은 ‘노교수존’을 선언했다. 진상 손님이 모두 중년의 교수였기 때문에 사장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노중년존’ 표현이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은 숙박업소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는 40대 이상 이용객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연령의 상한선은 35~39세다. 서울의 한 캠핑장은 ‘40대 이상 커플의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공지했는데, ‘중년 차별’로 논란이 일자 이를 취소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노중년존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50대 남성 이 씨는 “사장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벌이를 일정 부분 포기하더라도 자신의 마음대로 장사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60대 남성 한 씨는 “나이 든 사람들이 매장 안에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싫어한다더라. 요즘 어디를 가면 눈치를 주는 경우가 많다. 연령 제한 출입은 벌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얘기했다. 결국 노중년존의 사장들은 ‘선택과 집중’을 한 셈이다.
온라인 노인 혐오 표현 심각
사실 노인 혐오의 근원지는 온라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틀딱’, ‘할매미’, ‘연금충’ 등 온라인상의 노인 혐오 표현은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하다. 2021년 한국노년학회는 ‘온라인상에서 공유되는 노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태도’ 학술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10·20대의 젊은 층을 비롯해 전 연령은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각종 노인과 관련된 사건·사고 보도를 접하면서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물론, 미디어를 통해 노인 혐오 표현을 알게 된 경우도 많았다. 특히 젊은 층은 정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재밌어서’, ‘사람들이 쓰니까’ 등의 단순한 이유로 노인 혐오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온라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인 노인 혐오 표현은 무엇일까? 학회는 총 2만 747건의 댓글을 수집해 분석했는데, 가장 많이 언급된 노인 혐오 표현은 ‘노인네’(6894건)로 집계됐다. 이어 ‘틀딱’, ‘꼰대’, ‘늙은이’, ‘할배’, ‘개돼지’ 순으로 나타났다.
이 중 ‘틀딱’, ‘꼰대’ 등은 주로 노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비난하는 댓글에서 확인됐다. 그러나 노인 혐오 표현이 활발히 사용되는 편은 아니었다. ‘틀딱’이라는 혐오 표현이 상위에 위치하긴 하지만, ‘노인네’ 빈도수의 7.57%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더불어 노인의 이미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형용사 위주로 살펴본 결과, ‘힘든’이 481건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무식한’, ‘나쁜’, ‘무서운’, ‘힘없는’, ‘아픈’ 순으로 사용이 두드러졌다. 대체로 분노와 연민에 해당하는 감정으로, 온라인상에서 공유되는 노인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노인 혐오 표현 알아보기
꼰대 :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을 비하하는 말로, 꼰대질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도 ‘젊은이들의 복종을 기대하며, 비판은 빠르고 실수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보복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틀딱 : ‘틀니를 딱딱거린다’는 일부 노인들의 특징에서 유래했다. ‘틀딱’에 벌레를 의미하는 한자 ‘충’을 붙인 ‘틀딱충’도 많이 사용된다. 자신의 나이를 빌미 삼아 젊은 사람들을 훈계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어기는 노년층을 비하하는 말이다. ‘꼰대’와 비슷한 말로 통한다.
할매미 :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일부 할머니를 매미에 비유한 말이다.
연금충 : 나라에서 주는 노령연금 등으로 생활하는 노인들을 비하하는 말이다.
노슬아치 : 노인+벼슬아치를 합친 말이다. 예전에는 많이 사용했지만,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노인 혐오, 낙인 야기
지난해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 차별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5개 국가 중 2위로 매우 높았다. 특히 청년층 80%는 노인에 대해 부정적 편견을 갖고 있다. 이는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의 보고서에 나와 있다.
청년층의 노인 혐오 증가 이유는 고령사회와 연관이 깊다. 우리나라는 2017년 8월 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고령자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했고, 젊은 세대의 경제적 부양 부담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노인 혐오 표현을 숨기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회적 낙인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노인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조성하고 차별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노인 혐오 표현을 사용한다는 데 있다.
노인 혐오 표현에 잠재된 큰 문제는 노인을 ‘우리’라는 집단에 유입되지 못하게 제한함으로써, 그들을 더욱 외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 노인들의 문제를 사회 전체의 문제로 일반화해서는 안 되며, 노인 혐오 표현 사용과 차별적 태도를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변화무쌍한 일상은 아니다. ‘이동식 급식소’ 관리하던 시절에야 차에 사료 한가득 챙겨 몇 시간씩 순회를 돌았다. 운영을 그만둔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 집 앞 식당에 빈 밥그릇 채워놓고, 피크타임 비껴갈 즈음 손님들 노는 모습을 뷰파인더에 담으면 그만이다. 미리 보정해둔 사진과 재치 있는 문구를 곁들여 SNS에 올려두고, 사진 정리를 하거나 원고 작업을 한다. 이용한 작가의 일상에 ‘대단한 변화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변화무쌍한 고양이를 제외한다면.
장소 협조 고양이책방 ‘책보냥’
이용한 작가는 16년 차 ‘캣대디’(고양이와 아빠의 합성어로,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이자 명실상부한 고양이 작가다. 2009년에 낸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를 시작으로 ‘명랑하라 고양이’, ‘나쁜 고양이는 없다’ 시리즈와 지난해 출간한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에’까지 총 11권의 고양이 책을 냈다. ‘나쁜 고양이는 없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 ‘고양이 춤’의 제작과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사라져가는 오지 마을들을 찾아서’, ‘물고기 여인숙’, ‘사라져가는 풍경들’ 등 문화기행서를 내고 있다.
세 번째 고양이 책의 성공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는 국내 세 번째 고양이 책이다. 사진부터 글 내용까지 전부 고양이로 가득한 ‘고양이 책’은 당시 출판 시장에 거의 전무했다. 이제는 해외 번역본까지 포함해 한 해에만 고양이 책이 몇 백 권씩 쏟아지지만, 2009년 한국에 등장한 이용한 작가의 고양이 책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여태껏 낸 고양이 책에 고양이 다이어리, 고양이 일력 등을 합하면 이 작가가 책 형태로 엮어낸 고양이 이야기만 헤아려도 셀 수 없다. 특별히 아끼는 책을 꼽기도 힘들다. 다만 첫 고양이 책인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와 신간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에’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 더 많다.
“책을 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국내에서 출판된 세 번째 고양이 책이자, 최초의 성공 사례라고나 할까요. 고양이 책만 열 권 넘게 냈지만 아직도 첫 번째 책 판매 부수를 넘어선 책이 없어요. 책보다는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으로 고양이 동영상을 보는 시대가 됐잖아요. 지금은 워낙 고양이 책이 많아지기도 했고요. 앞으로도 실물 책을 낼 생각이지만,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도 100% 공존은 없다, 그러나
‘어서 오세요, 고양이 식당에’는 출간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책이다. ‘고양이 식당’ 운영 경력 16년 차, 그를 거쳐간 수많은 고양이 손님들의 이야기를 꾹꾹 모아 담았기 때문이다. 현재 운영하지 않는 이동식 급식소는 제외하고, 1호점 고양이 식당인 ‘구름이네 고양이 식당’, 꾸준히 사료 후원을 해오고 있는 2~3호점 단골손님들이 주인공이다.
책에는 그의 ‘반쯤’ 마당 고양이 ‘아쿠’와 ‘아톰’이 등장한다. 이 작가의 집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세 살배기 두 형제는 최근 그와 함께 거처를 옮겼다. 지난한 원고 작업 중에도 세 살배기 고양이와의 첫 만남부터 함께 살게 되기까지 있었던 일을 정리할 때는 행복했단다. 다 커버린 아이들의 어릴 적을 추억하는,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반면 쓰기 힘들었던 부분도 있다. 고양이 식당 2호점 ‘목련식당’의 할머니 이야기다. 만취한 채 ‘고양이를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 윽박지르는 경찰, 고양이 키우지 말라고 협박하는 마을 이장. 늘그막에 길고양이를 돌보며 삶의 낙을 얻곤 했지만 이웃 등쌀에 못 이겨 결국 할머니와 목련식당은 산속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요즘도 사료 후원 겸 사진 촬영 겸 주기적으로 2호점을 찾고 있지만, 쫓겨나듯 이사하던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시골에서 고양이 밥 주며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굉장히 낭만적이라고 말해요. 현실을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죠. 시골에서 고양이는 상추보다 못한 생명 취급을 받아요. 밭을 파놓고 농작물을 건드린다고 욕하고, 집 앞마당에 철마다 쥐약을 놓죠. 고양이 식당에 찾아오던 고양이들이 어느 때부턴가 자꾸 다치고 죽는 일이 있었어요. ‘나 때문에 고양이들이 피해를 입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괴로워하다가 2~3년 정도 밥 주는 일을 멈춘 적도 있었죠.”
해마다 이웃집 마당에 놓이는 쥐약을 보고도 모른 체해야 한다. 어제까지도 고양이 식당을 찾아오던 단골손님이 차갑게 굳어 쓰러진 모습을 마주하는 일도 종종 겪어야 한다. 시골 캣대디 생활은 그런 식이다. 개보다 고양이를 고깝게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한 데다, 시골에서 발생하는 고양이 학대는 도시와는 달리 주목조차 받지 못한 채 묻혀버린다. 고양이를 모함하는 이웃들에게 맞서보기도 했지만 ‘위아래도 없는 천하의 몹쓸 놈’ 소리만 들었단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면 밭을 망치는 고양이가 늘어난다. 고양이가 쓰레기봉투를 헤집어 길거리를 더럽힌다. 고양이에 대한 단단한 오해를 풀 의향이 없어 보이는 이웃들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대신 그는 회유책을 택했다. 뇌물에 가까운 선물을 가져다주며 대화를 시도하는 것.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고양이를 득달같이 쫓아내던 할머니네 텃밭에는 어느덧 촘촘한 그물이 쳐졌다. 언제 누가 낳은 것인지도 모르는 집 앞 도랑의 꾸물거리는 새끼 고양이 여섯 마리를 챙겨도 된다는 암묵적인 허락도 받아냈다. ‘고양이에 미친 놈’ 취급받은 지 6년 만에 찾아온 변화였다.
고양이 친화적이라 ‘고양이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터키나 모로코에도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제 것을 나누며 공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 길고양이 학대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요즘이지만, 그는 하던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그게 길고양이와 사람이 공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고양이 아빠 노릇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수많은 작은 곳의 수많은 작은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많은 작은 일들을 하고 있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어요. 수많은 캣맘과 캣대디, 애묘인들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는 동네 고양이를 포획해 TNR(길고양이 중성화) 사업 지정 병원에 데려다놓고, 누군가는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SNS에 올려서 고양이의 귀여움을 널리 알리고, 또 누군가는 감명받은 고양이 게시물을 주변에 공유하는 거죠. 이 모든 일이 계속되다 보면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고양이와의 공존도 자연스럽게 가능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 믿음의 기저에는 그 스스로가 인식의 급격한 변화를 겪었던 경험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열렬한 고양이 예찬론자지만, 고양이라는 존재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의 그는 고양이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옥외 식당에서 식사할 때 발치를 맴돌던 길고양이를 쫓아낸 적도 있다. 고양이가 싫어서가 아니라 몰라서 그랬을 뿐이다.
그러나 2007년의 늦가을 어느 저녁, 아내 덕분에 발견한 고양이 일가족에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버려진 소파 위에 누운 어미 고양이가 아기 고양이 다섯 마리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은 강렬한 충격 그 자체였다. ‘머릿속에서 고장 난 필름처럼 무한 반복되던’ 장면을 곱씹던 그는 먹다 남은 음식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일 년 후에는 연고도 없는 지방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집 마당에 고양이 식당을 차리기 위해.
고양이 작가로 활동한 지 10년이 훌쩍 넘어가니 새삼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 그는 털어놓았다. ‘초등학생 때 작가님의 책을 처음 접했는데 벌써 어른이 되었다’는 독자들의 메시지를 받을 때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진을 통해 대단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첫 번째 책 서문에 썼듯, ‘고양이에게 신뢰받지 않고는 신뢰할 만한 고양이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길고양이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나누면 세상은 더 귀여워진다
운이 좋으면 카메라를 들이대자마자 재밌는 장면을 포착하지만, 대부분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래도 사람처럼 턱을 쓸어내리는 듯한 재밌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에는 ‘포토샵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 진짜 고양이가 맞느냐’며 열광적인 반응이 쏟아진다. 그중에서도 유독 반응이 좋은 사진들이 있다. 예를 들면 눈이 내려 소복이 쌓인 길 위에서 총각무를 먹는 고양이 가족의 사진이 그렇다.
“12년 전 한겨울 오후였어요. 어미 턱시도 고양이(등이 검고 가슴이 흰 고양이)와 새끼 두 마리가 배가 고팠는지 누군가 먹다 버린 총각무를 나눠 먹고 있더라고요. 무도 작은 데다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새끼들은 어미를 밀어내고 그걸 다투듯 나눠 먹는 모습이 어찌나 짠하고 안쓰러웠는지 몰라요. 사진만 빠르게 촬영하고 차에 남은 사료를 챙겨줬죠.”
촬영할 때 느끼는 감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기 때문일까. ‘작가님 덕분에 캣맘, 캣대디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뒤숭숭한 소식도 자주 들려오지만, 16년 전보다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유해졌음을 몸소 느끼는 요즘이다.
가장 많이 변화한 지역은 제주도다. 과거에는 어업 종사 인구가 많은 섬 특성상 ‘고양이가 생선을 훔쳐간다’는 이유로 인식이 좋지 못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가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최근 여행차 방문한 제주도는 예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최근에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웬만한 카페나 식당 앞에는 고양이 밥그릇 물그릇이 있고, 고양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도 우호적으로 바뀌었더라고요. 특히 제주도 남쪽에 있는 가파도는 섬 곳곳에 고양이 급식소를 지어두고 사료를 챙겨주고 있었어요. 일본의 고양이섬을 연상케 할 정도였는데, 작기는 해도 섬 하나가 통째로 바뀐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그는 사람과 고양이가 함께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모로코의 공원에서는 보잘것없는 빵이나마 고양이와 나누는 걸인의 모습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람 먹는 음식을 고양이에게 준다며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가 생각하는 가치는 제 것을 나눈다는 데에 있다. 어려운 시절에도 된장국에 남은 밥을 말아 길고양이들에게 내주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이용한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가졌으니 우리가 가진 걸 고양이에게 조금만 나눠줘도 이 세상은 훨씬 아름답고 귀여워질 것”이라고.
제주특별자치도(이하 제주도)가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신중년이 관광약자의 관광을 돕는 ‘트래블헬퍼’가 대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50~69세 미취업자 중에서 전문 자격이나 경력을 활용해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는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을 운영한다고 10일 밝혔다.
제주도는 도내 퇴직 전문인력에게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지원해 취업 활성화를 유도하고자 지난해 고용노동부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 공모로 5억 4100만 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올해부터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제주도는 사회적기업 및 비영리 민간단체를 대상으로 공모해 3개 사업의 수탁기관을 선정하고, 총 50명의 참여자를 모집해 4월부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3개 사업은 △관광약자의 여행서비스를 지원하는 트래블헬퍼 사업 △신중년 주도 마을돌봄 소통을 지원하는 마을돌봄매니저 사업 △서귀포지역 도서관 및 문화시설 상담을 지원하는 행복이음코디네이터지원 사업이다.
특히 지난달 19일 노사발전재단과 제주관광공사, 두리함께는 트래블헬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신중년 적합직무인 트래블헬퍼는 관광약자의 여행시 불편함을 해소하고, 관광 활동에 따른 여행서비스를 지원한다.
트래블헬퍼는 제주 무장애관광 도시 육성을 목표로 한다. 무장애관광이란 장애인, 고령자 등 관광약자가 관광에 있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환경을 의미한다. 즉 제주도는 트래블헬퍼를 통해 신중년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며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목표다.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 참여자의 활동기간은 사업에 따라 올해 10월 또는 11월까지이다. 근무기간 중 4대 사회보험 가입 및 생활임금 이상의 보수가 지급된다.
최명동 제주도 일자리경제통상국장은 “올해 사업을 시작으로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을 통해 많은 전문인력이 사회공헌뿐만 아니라 민간 일자리에 재취업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이하 고용부)의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을 위해 정부는 일자리와 예산을 매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개선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은 5060 퇴직 전문 인력에게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민간 일자리로의 재취업을 지원하기 위한 사업으로 2019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사업 참여 대상은 만 50세 이상 70세 미만 미취업자 중에서 전문 자격이나 소정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올해 고용부는 118개 자치단체 518개 사업을 선정해 연말까지 3437개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활동 기간은 2022년 12월까지이며, 근무 기간 중 4대 사회 보험 가입 및 최저임금 이상의 보수가 지급된다.
참여 분야는 취약계층 주거 환경 개선, 중소기업 경영 컨설팅, 장애인 학생 교육, 공사 현장 산업안전 컨설팅, 관광 약자 여행 지원, 플랫폼 노동자 직업 상담, 농업 기술 전수 서비스 등 다양하다.
경력 무관 단기 일자리 논란도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은 공공일자리 사업이다. 특수 자격증이나 높은 수준의 전문 경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장점과 함께 단점이 존재한다.
지난 2020년 한 매체는 2019년도 '신중년 사회공헌활동지원 및 경력형 일자리' 사업의 예산이 259억 원이었는데, 경로당 안마서비스·운영지원, 1인 가구 안부 확인, 가사 정리 등 경력과 무관한 단기 일자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고용부는 "2019년은 60개 자치단체에서 199개 사업을 시행했으며, 일부 자치단체는 지역 내 수요를 반영하여 1인 가구 양육 코칭 등을 시행했으나 대부분 사업은 자격 기준을 갖춘 고령 퇴직 전문 인력이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반박했다.
기사에 인용된 안마서비스는 1개, 1인 가구 돌봄 등은 2개로 전체 사업의 1.5%였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기사에서 말한 경로당 안마제공 사업의 경우 특수학교에서 병리, 해부생리, 안마·마사지 등 1000시간 이상 교육 이수 또는 복지부 장관이 지정한 안마수련기관에서 2년 이상의 안마수련과정을 마친 경우 획득할 수 있는 안마자격증 보유자가 참여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고용부는 2020년부터 고령화에 따라 증가하고 있는 고령 퇴직 전문 인력들의 지역 내 사회활동 참여 활성화를 위해 참여자의 경력 및 자격 요건을 강화했다고 강조했다. 기존의 '관련 경력 보유'가 '관련 분야 3년 이상 경력 보유'로 개정됐다. 자격 또한 '국가기술자격 국가전문자격·국가공인민간자격증 등 보유'에서 '국가기술자격법 상 산업기사 또는 서비스 분야 2급 이상 자격 등 보유'로 강화됐다.
요구되는 경력 높아졌지만…
올해 일자리 사업 운영 지침도 확인해 보면, 일자리 기준 부분에 '자치단체(위탁 등의 경우 수행기관)는 참여자에게 자신의 경력․전문성을 활용하여 수행할 수 있는 사회서비스 등의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특히 '해당 업무와 관련된 경력 3년 이상 등의 전문성이나 직무 능력이 필요한 일자리일 것', '일회성 또는 일시적인 단기 일자리가 아닐 것'이라고 강조되어 있다. 요구되는 경력의 수준이 높아진 셈이다.
이번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의 대표 중 하나인 제주도의 '트래블헬퍼'를 예로 들어보자. 트래블핼퍼는 장애인과 고령자의 관광을 돕는 일이다. 지원 가능 대상은 제주도에 거주하는 만 50세 이상 70세 미만의 미취업자 중 사회복지사(2급 이상), 요양보호사, 활동 지원사 자격증 또는 여행업 경력(3년 이상)이 있는 경우다. 트래블헬퍼로 채용 되면 직무 교육 후 현장에 투입된다.
요구되는 경력은 높아졌지만 지원되는 임금 수준은 큰 변화가 없다.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은 '사회공헌' 개념이 강해 생활임금 수준의 급여만 지원된다. 2019년에는 2천여 명이 참여했고, 예산은 89억 원, 월평균 105만 원이 지급됐다. 2020년에는 2천 3백여 명이 참여했고, 예산은 168억 원이었으며, 월평균 124만 원을 지원했다.
신중년 경력형 일자리 사업의 장점은 퇴직 후에도 일을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지역 사회를 위해 일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경력을 요구하지만 업무에는 전문성의 한계가 드러나고, 임금이 낮은 부분은 아쉬운 대목이다. 퇴직 신중년이 오랜 시간 쌓아온 전문 경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고용안정성과 소득을 더욱 보장해주는 방안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