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이뤄야겠다고 다짐하는 버킷리스트. 그러나 막상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애써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도 어떻게 이뤄가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매달 버킷리스트 주제 한 가지를 골라 실천 방법을 담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앞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한 버킷리스트 서베이에서 6위를 차지한 ‘가족(손주)들과 여행’에 대해 알아봤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여행박사
자녀들이 어렸을 때 방학과 휴가에 맞춰, 어쩌면 의무감(?)에 가족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겐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 훌륭한 부모의 역할을 다하기 위함이었을 터. 어느덧 자녀가 장성하고 일상의 여유가 찾아들었을 때쯤 떠나는 가족여행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아들딸이 보내주는 효도 차원의 관광도 좋겠지만, 내가 직접 계획하고 실천하는 여행은 더욱 뜻깊다. 때로는 배우자와 단둘이, 또는 손주와 함께, 가능하다면 노부모를 모시고 가족여행을 떠나려는 이들을 위해 여행박사(여행사)의 조언을 담아봤다.
시니어 가족여행 트렌드는?
시니어의 가족여행은 적게는 2~3명부터 많게는 10명이 넘는 대가족까지 인원이 다양하다. 엄마와 딸의 여행, 할머니와 손녀와의 여행, 시니어 부부 여행 등 단출하게 가기도 하고, 환갑 기념이나 형제 계모임 등 가족 구성원 간 화합을 다지기 위해 계획하는 경우도 많다. 한 가지 특징은 여행 인원이 적을 때는 자유여행과 패키지여행의 선택 비율이 비슷하지만 인원이 많아질수록 패키지여행 선호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가격이 저렴하고 많은 인원이 가이드 안내에 따라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는 편리성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사 겸 가이드가 안내해주는 우리 가족만의 ‘소규모 맞춤 여행’과 해외 현지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렌터카를 직접 운전하는 ‘렌터카 자유여행’이 늘어나는 추세다.
여행 초보 시니어에게 권하는 테마
중국 ‘장가계’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중 하나로 시니어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곳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장엄한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평소 등산을 즐기는 시니어라면 꼭 한 번 가보길 권한다. 걷기가 불편한 아이나 노인 동반이라도 문제없다. 대협곡에 설치한 유리다리와 바위산은 산악버스를, 십리화랑 협곡은 모노레일을 이용하고, 천문산 케이블카와 백룡산 투명 엘리베이터가 있어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다.
가족의 연령대가 다양하다면 태국 방콕이나 파타야를 선택해도 좋다. 어린 손주와 장성한 자녀, 시니어 부모가 가는 3대 여행은 취향이 달라 여행지에서 하고 싶은 것이 각기 다르다.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저렴한 태국은 가성비 좋은 넓고 깨끗한 호텔이 많아 조식과 부대시설을 이용하며 쾌적한 여행을 즐기기 좋다. 화려한 태국 사원, 시원한 파타야 바다에서의 액티비티, 피로를 풀어주는 타이마사지, 미각을 자극하는 요리 등 남녀노소 모두 만족하는 매력 포인트가 많은 여행지다.
여행 베테랑 시니어에게 권하는 테마
여행 베테랑 시니어는 일반인이 많이 가지 않는 색다른 여행지를 찾는 경향이 크다. 특히 해외 경험이 풍부한 20~30대 자녀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유럽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다. 같은 패키지 상품이라 하더라도 여러 나라의 유명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보다 ‘이탈리아 패키지’, ‘스페인 패키지’, ‘발칸 패키지’ 등 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즐길 것을 추천한다.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와 함께라면?
휠체어를 사용하거나 보행이 불편한 노부모와 여행하는 시니어라면 여행박사 ‘휠링투어’를 고려해보자. 호텔 방에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지, 관광지에서 휠체어로 이동 가능한 교통수단은 있는지, 계단 없는 식당은 어느 곳인지 등 거동이 어려운 가족이 동반했을 때는 그만큼 꼼꼼하게 확인해야 할 점이 많다. 여행박사 ‘휠링투어’는 휠체어 사용자들을 위한 맞춤여행 상품으로 항공, 호텔, 휠체어 탑승 슬로프 차량 등 여행객의 필요에 따라 구성이 가능하다.
영화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등에서 브루스 리(Bruse Lee, 이소룡)가 선보인 절권도는 그야말로 획기적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를 제압하는 절권도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김종학(50) 관장이다. 올해로 40여 년째, 인생의 반 이상을 무술과 함께했지만, 그는 아직 배우고 싶은 무술이 너무나도 많단다.
푹푹 찌는 한여름날 김종학 관장을 만나기 위해 양재동에 위치한 이소룡절권도 한국총본관을 찾아 나섰다. 몇 개의 골목길을 지나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래도 ‘도장은 시원하겠지’ 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큰 기대였을까, 도착한 도장에는 작은 선풍기 한 대만 탈탈거리며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에어컨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도장에선 한 번도 에어컨을 틀어본 적이 없다는 김종학 관장. 전기세가 무서워서도 아니고 더위를 못 느껴서도 아니다. 운동하는 공간에선 마음껏 땀을 흘리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도 하고 복싱도 할 만큼 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때 한창 무술영화가 유행이었는데 우연히 영화 ‘취권’을 보게 됐죠. 공중을 날아다니고 상대를 한 방에 제압하는데… 너무 멋있더라고요. 그렇게 무술에 빠져서 시작한 게 우슈였어요.”
누구나 한 번쯤은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적을 무찌르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우슈 수련을 이어가던 그는 어느 날 돌연 대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진 거라곤 비행기 표와 한 장의 명함뿐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무모해 보일 수 있는 선택이었지만 그는 “대만으로 떠난 건 힘든 시절의 나에게는 한 줄기의 빛이자 유일한 돌파구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꼈어요.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 와중에 힘들어하던 몇몇 친구들이 나쁜 길로 빠지는 걸 보면서 제 정신줄을 잡아줄 무엇인가가 절실히 필요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뭘까, 뭘 하면 행복할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운동이더라고요. 때마침 지인이 대만에 있는 분이라며 찾아가 보라고 명함을 한 장 주셨죠. 그길로 바로 대만으로 떠났어요.”
그의 마음을 끈 건 다름 아닌 절권도였다. 브루스 리가 창시한 무술인 절권도는 그가 실제로 배웠던 무술 중에서 실용적이라고 생각한 동작만 따로 모아 발전시킨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절권도는 미완성의 무술로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브루스 리가 죽기 전 그가 보여줬던 동작만 절권도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정의해요. 근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그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는 더 많은 무술을 배워서 절권도의 기술을 확장했을 거예요. 때문에 브루스 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절권도를 한다고 했을 때 ‘그게 절권도가 맞다, 아니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거죠.”
김종학 관장은 우슈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전통 무예인 실랏(Silat), 필리핀의 전통 무술인 칼리(Kali) 등 다양한 무술을 훈련 중이다. 브루스 리가 배웠던 무술을 할 줄 알아야 그가 절권도를 만들고자 했던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술의 매력을 묻는 말에 그는 무술을 음식에 비유했다.
“음식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무술도 마찬가지예요. 태권도, 우슈, 합기도 등 아주 많죠. 우리가 김치찌개를 좋아한다고 김치찌개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저에게 한 가지 무술만 하고 살아라? 그렇게는 안 되겠더라고요.(웃음) 음식 맛이 다 다르듯이 무술에도 각기 다른 멋이 있고, 그 나라의 문화가 깃들어 있어요. 이런 걸 이해하면서 배우는 게 큰 재미죠.”
절권도를 향한 열정
“테드 웡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그의 도장으로 찾아왔어요. 저도 그중에 한 명이었는데 전 운 좋은 놈이었죠. 그의 눈에 띄었으니까요.”
대만에서 돌아온 그는 브루스 리의 마지막 제자로 알려진 테드 웡(Ted Wong)을 찾아 홍콩으로 떠났다. 무작정 비행기 표를 사서 떠난 그의 모습에서 일찍 눈치 챘어야 했다. 그는 독한 남자였다. 테드 웡의 수업 첫날, 허리 디스크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수업에 임했다. 테드 웡도 그 절실함을 알아봤는지 김 관장을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사부가 개인적으로 누굴 초대한다는 게 매우 드문 일인데 절 데려오라고 하니 다른 제자가 질투가 났나봐요. 씩씩거리면서 ‘웡 사부가 너 오래’ 이러더니 따라오라고 하더라고요. 엄청난 영광이었죠.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테드 웡에게 말을 걸었어요. 그때 처음 한 질문이 “두유 노우 김치?”였어요.(웃음)”
한국인이 외국인을 만났을 때 피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두유 노우 김치?, 두유 노우 지성팍?, 두유 노우 강남스타일?’이거늘….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질문은 효과가 있었다. 테드 웡은 김치를 잘 안다고, 이웃이 한국인이라 먹어본 적도 있다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분위기가 좋은 틈을 타 김 관장이 테드 웡을 한국으로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테드 웡 사부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OK!’ 하더라고요. 덕분에 2008년에 그를 모시고 한국에서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었죠.”
이후에도 김 관장은 테드 웡의 집에서 개인수련을 하는 등 인연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지난 2010년, 테드 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불과 며칠 전 김 관장과 통화할 때만 해도 ‘새로운 세미나를 준비 중이라 바쁘다’던 그였기에 그의 사망 소식은 김 관장에게 뜻하지 않은 이별이었다.
“수련도 수련이지만 이상하게 그의 오래된 차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엄청 가파른 언덕이 하나 있었는데 웡 사부는 항상 그 언덕을 올라가기 전에 차에게 ‘준비됐나?’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마치 나이 든 자기 자신한테 물어보듯이요. 그 질문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지금은 그의 오래된 차도, 웡 사부도 볼 수 없게 되었네요.”
테드 웡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김 관장의 맨땅에 헤딩하기는 계속됐다. 그는 브루스 리가 생전에 절권도를 가르칠 수 있는 사범 자격을 준 3인 중 한 명인 댄 이노산토(Dan Inosanto)를 찾아 LA로 향했다. 댄이 스톡턴으로 가면 스톡턴으로, 댈라스로 가면 댈라스로 그야말로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가서 수업을 들었다. 문득 이렇게까지 하면서 절권도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해서 절권도가 궁금하면 유튜브나 비디오를 통해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어요. 하지만 유튜브가 나의 사부가 될 순 없잖아요. 저에겐 절권도 ‘동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브루스 리에게 절권도를 배운 사람들의 생각과 철학이 중요했어요. 그래서 전 직접 사람을 만나서 배우는 데에 의미를 둔 거죠.”
내 몸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갑자기 김 관장이 모형 칼을 손에 쥐더니 피해보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칼에 맞았다. 실제 상황이라면 죽었거나 응급실에 실려 갔을 것이다. 이번엔 반대로 칼을 쥐어주더니 자신을 찔러보라고 했다. 칼을 휘두르는 동시에 칼을 뺏겼다.
“사람들이 스스로 방어할 생각도 안 하면서 약자라고 말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자기를 보호할 방법은 알았으면 좋겠어요.”
김 관장은 스스로 보호할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공격을 당했을 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최근엔 호신술 수업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무술 하는 김종학”이라고 답했다.
“마치 등산 같은 거죠. 한 산에 오르면 거기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산도 가보는 것처럼, 이 무술, 저 무술 다 해보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아름다운 비경이나 이름나지 않은 멋진 곳이 아주 많다. 친구와 여행했던 한 곳은 깨끗하고 조용한 환경이 파괴될까 봐 남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이야기를 하며 웃은 적도 있다. 요즘엔 각 지자체에서 자기 고장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축제나 행사에 초청하는 일이 많다. 그저 관광만이 목적이 아닌, 그 지방의 특색이나 역사까지 알게 된다면 다녀온 보람을 더욱 커질 것이다.
얼마 전 서산의 철새도래지인 천수만에 다녀왔다. 충남 서산에는 찾아볼 만한 유적이나 유명한 맛집이 많았다. 먼저 해미읍성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그 지방 사람들이 소풍하러 나오는 멋진 장소가 되었지만, 조선 흥선대원군 시절에는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었다니 가슴이 아팠다. 푸르게 펼쳐진 읍성 안에는 조선 시대 사용했던 신기전 기화차와 화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포즈로 각 문을 지키고 있는 포졸 인형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근처에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드라마 촬영 장소인 유명 떡볶이집도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어느 음식 평론가가 죽기 전에 맛봐야 할 음식으로 서산의 영양 굴밥을 꼽기도 했다니 한 번쯤 찾아가 맛보는 것도 좋겠다.
서산의 여러 곳을 돌아보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은 천수만의 철새 도래지 ‘버드랜드’다.
‘버드랜드’는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서산 천수만을 체계적으로 보전 관리하고 체험과 교육 중심의 생태관광 활성화에 주력하고자 조성된 철새 생태공원이다. 천수만으로 철새들이 무리 지어 찾아온다니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환경을 잘 보전해 언제나 철새들이 이곳을 찾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류 해설사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둘러 본 박물관 안은 새의 자취로 가득했다. 벽면에 전시된 수많은 박제 새들을 보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총으로 잡아서 박제했지만, 요즘엔 자연사한 새를 박제해 전시한다는 해설사의 이야기에 그나마 좀 안심했다.
이어 관람한 4D 영상은 정말 신나고 재미있었다. 이전에 극장에서 3D 영화를 봤을 때 바로 눈앞에 영상이 다가오니 마치 영화 속 인물이 된 듯 즐거웠는데, 4D는 실제로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한 동물이 진짜 나를 집어삼킬 듯 다가왔고, 물이 튕기는 장면에선 실제로 우리에게 물이 뿌려졌으며, 산들바람은 부드럽게 또는 세차게 직접 몸에 닿아서 신기하고 즐거웠다. 4D 영화에서는 향기가 나는 장면이면 실제로 관객이 향기를 맡을 수도 있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VR 체험이나 4D 영상이 왜 인기 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이날 본 영상은 어미 잃은 뜸부기를 꿩이 거두지만 철새인 뜸부기는 언젠가는 제 엄마를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겨울나기로 떠났던 아기뜸부기는 철마다 천수만으로 꿩 엄마를 찾아온다는 내용이 콧날이 시큰할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 작품이었다. 또, 아이들에게는 철새에 대한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니 많은 이가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드랜드’의 전망대 망원경을 통해 천수만의 너른 철새도래지를 살펴보는 재미도 있고, 옆쪽으로 숲과 예쁜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모습도 참 보기 좋았다. 영상으로 본 것처럼 이곳의 철새들은 겨울이면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났다가 이듬해 다시 고향처럼 이곳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새에게 좋은 환경을 망치지 말고 잘 보존해서 꼭 다시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휴일에 가족끼리 또는 손자손녀를 데리고 ‘버드랜드’를 찾아가 보자. 교육과 소풍의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다.
북한 핵 개발을 소재로 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로 밀리언셀러에 이름을 올린 김진명(金辰明·60). 그 후 ‘한반도’, ‘제3의 시나리오’, ‘킹 메이커’, ‘사드’ 등을 펴내며 한국의 정치·외교·안보 문제에 촉각을 내세웠던 그가 이번엔 ‘미중전쟁’으로 돌아왔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묵직한 주제인 만큼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고. 그는 정말 두려운 건 북핵도, 트럼프의 불가측성도, 중국의 경제 보복도 아닌,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눈치만 살피는 우리의 모습이라 강조하며 용기와 결단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난제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KAL 007기 피격사건을 다룬 소설 ‘예언’ 이후 5개월 만에 ‘미중전쟁’이 나왔다. 1·2권으로 나뉘어 총 6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을 발 빠르게 내놓은 데에는 김진명 작가의 급급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미중전쟁’이라는 단도직입적인 제목까지 달고, 그가 독자들에게 서둘러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미국은 원산 앞바다까지 가공할 위력의 B-1B 전략폭격기를 들이대고 북한은 워싱턴까지 날아가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북핵을 둘러싸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눈치만 보고 있어요. 분명한 입장 없이 그들의 비위만 맞추다가는 구한말 때와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질 거라 예상해요. 그럼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 이에 대한 솔루션을 하루빨리 이야기하려고 급히 쓰게 됐어요. ‘미중전쟁’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남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시야를 더 넓히자는 뜻에서 붙인 거고요.”
나라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소설을 썼다는 김진명의 말에 작가로서의 남다른 사명감이 느껴졌다. 소설가이지만 작품에 대한 문학적 해석보다는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그의 모습이 대중에겐 더욱 익숙할 것이다. 혹시 그런 자신의 이미지로 인해 작품활동에 불편함은 없는지 묻자 “전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해외에서는 나라의 정치학을 세우거나 정책을 마련할 때 톰 클랜시 같은 전문 작가들의 작품을 참고하잖아요. 그만큼 글로써 사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작가는 어떤 전문가나 정치인보다 더 해박하고, 예지력이 있어야 해요. 웬만한 식견 가지고는 어림없죠. 그런데 한국 사회는 소설의 영역을 너무 좁혀놨고, 작가들은 그 좁은 세계에 갇혀 있어요. 작가는 자기만의 영역을 벗어나 사회 문제에 대해 방향성을 제시할 정도의 세계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에는 그런 작가가 얼마 없기 때문에 내가 좀 특별하고 이상해 보이는 거죠.”
허용된 거짓이 요구하는 소명
김진명의 소설 속 캐릭터는 대부분 실존 인물이며 실명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그가 창조한 주인공은 대개 비범하고 전지전능한 인물이라는 것. ‘미중전쟁’의 주인공 김인철 역시 세계은행 법무팀 조사요원으로 문재인, 블라디미르 푸틴, 시진핑 등 국가 정상들과의 접촉이 가능할 정도로 특출한 면모를 지녔다. 때론 비현실적인 인물 설정에 대해 비평하는 독자들이 있는데, 그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덧붙였다.
“작품마다 주인공이 한결같이 천재적이고 전지전능하다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들은 세계 최고 권력자를 상대로 아주 내밀한 비밀과 약점을 캐내는데 그걸 보통 사람이 해낸다면 더 비현실적이지 않을까요? 사실 내가 쓰는 소설은 일반 소설과 다르게 주인공이 큰 의미는 없어요. 주인공은 숨겨져 있는 무서운 비밀을 밝히는 한 도구일 뿐이지, 그의 내면이나 감정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지지는 않거든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동시에 김 작가의 주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혹시 소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기 생각을 펼치고 싶지 않은지 묻자 그는 “소설이 가장 편하다”고 대답했다.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이해가 부딪치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히 규제를 하죠. 조금만 이상하면 정보보호법이나 명예훼손에 걸려 법의 영역을 뚫고 진실을 파헤치는 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니 대중은 민감하고 중요한 정보에 접촉할 방법이 없죠. 언론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진실을 드러내려 하면 그들 내부에서 굉장히 겁을 내고, 역시 법으로 제재를 받을 테니 알맹이는 감춰진다고 봐요. 그런데 소설은 거짓말을 허용하잖아요.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진실을 드러낼 수 있죠. 물론 거짓말을 허용하는 대신 소설가에게는 그만큼 소명의식이 요구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나는 작가이고, 그런 측면에서 허구를 통해 진실을 끌어내는 인류 최고의 장치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고구려 정신의 회복이 필요한 때
‘미중전쟁’의 또 다른 주인공 최이지는 북핵 문제, 중소기업 인재난 등에 대해 잡지에 글을 쓰고 대통령에게 제언하는 등 김진명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이번 소설을 통해 북핵 문제 외에도 한국 경제난, 미래 먹거리, 인구절벽 등의 고민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로 경제 지표는 좋은 데 반해 그 돈이 소수에게 몰리는 현상을 꼽았다. 대기업이나 부자들이 돈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이에 관해 중장년층의 인식 전환도 필요한 시점이라 역설했다.
“우리 세대는 학교에서 저축을 장려했어요. 어렸을 때 배운 사고에서 멈춰 돈을 쌓아두고 쓸 줄 모르죠. 그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굉장히 장애가 돼요. 자본주의는 수요만 있으면 잘 돌아가는데 이 수요를 막고 있는 거죠. 저축으로 부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부동산 투기예요. 나눠야 할 자본을 나만 잘살자고 쥐고 있으면 젊은이들은 어떡해요. 취직이 안 되면 장사나 사업을 해야 하는데 비싼 땅값에 임대료에 집도 마련 못하니 결혼, 육아는 엄두를 못 내죠. 우리 세대는 노력해서 벌은 거고 애들은 노력을 안 해서 못 벌었다는 인식도 문제예요. 과거야 한창 경제가 성장할 때니까 가능했죠. 현 상황을 인식하고 젊은이들 처지에서 생각해봤으면 해요. 얘들아, 안심하고 결혼해서 애 낳아라, 우리가 키워주마, 이런 마음의 유대가 없으면 아무리 지원금을 쏟아 부어도 우리에게 오는 인구절벽을 피할 수 없다고 봐요.”
김진명은 세대뿐만 아니라 친미와 친중, 보수와 진보 등 한국 사회 면면이 다 갈라져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를 대표할 가치관이 없다는 것에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그는 고구려 정신을 강조했다.
“옳다 그르다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해요. 옳고 그름은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에 자기가 맞다고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은 한심한 거예요. 예를 들어 택시가 교통질서를 흐린다는 이유로 택시 정류장을 만든다고 합시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한편으로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편히 탈 수 있는 택시의 장점이 사라지는 거잖아요. 이런 간단한 문제에도 입장이 나뉘고, 정반대 의견도 다 일리가 있는데, 하물며 나라의 정책이나 외교, 안보 문제는 얼마나 생각이 많이 갈리겠어요. 우리 사회는 나는 옳다, 너는 틀리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너무 많아요. 고구려는 아무리 파가 갈려서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도 외적이 침입하면 완전히 대동단결했거든요. 고구려 700년 역사가 가능했던 이유죠.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고구려 정신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버킷 리스트’, ‘인턴’에 이어 시니어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우리나라 문화와는 다소 다르지만, 미국에서는 유명인사들은 죽기 전에 자신의 사망기사를 써 놓는다고 한다. 일종의 보도 자료이다. 이를 위해 사망기사 전문 작가도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마크 펠링튼 감독 작품으로 주연에 80세 노인 해리엇 역으로 셜리 맥클레인, 사망기사 전문 작가 앤 역으로 아만다 사이프리드, 흑인 소녀 브랜다 역으로 앤주얼 리 딕슨이 출연했다.
은퇴한 광고 회사 보스 해리엇은 자신의 사망 기사를 미리 확정해 놓기 위해 사망기사 전문작가 앤을 고용한다. 그러나 해리엇의 까칠한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해리엇에 대해 저주와 혹평을 한다. 좌절한 앤에게 해리엇은 사망기사에 담겨야할 자신의 철학을 얘기한다.
‘고인은 동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하고,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며, 사회적 약자인 누군가에게 우연히 영향을 끼쳐야 하고, 자신만의 와일드카드가 있어야 한다’는 4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렇지 못하니 완벽한 사망기사를 위해 이제부터라도 같이 찾자는 것이다.
까칠한 성격에 막말을 해대서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났으니 동료들의 칭찬은 물 건너갔다. 같은 이유로 가족의 사랑도 포기한지 오래이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려면 장애자나 소수 민족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적이 없다. 자신만의 와일드카드는 고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말한다. 유명인사라면 몰라도 해리엇에게는 역시 이렇다 할 수식어가 없다.
해리엇은 느긋하게 변한다. 나이든 노인의 여유이다. 그리고 하나하나 4가지 요소를 충족시키기 위해 작전 실행에 돌입한다. 자신의 회사, 전 남편과 딸 등 가족에게도 연락하여 화해한다. 해리엇이 워낙 까칠했기 때문에 돌아 섰던 것이지 본심은 역시 가족이었던 것이다. 딸도 어른으로 성장해 보니 엄마를 그대로 닮더란다. 정신과 의사가 ‘강박성 인격 장애’ 판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문제 흑인 소녀 브랜다를 인턴이라며 데리고 다닌다. 그리고 앤과 브랜다에게 자신의 인생 노하우를 가르쳐 준다. “적극적으로 살 것, 마음을 터놓은 사람이 될 것,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 것, 물속에 뛰어들기를 두려워하지 말 것, 자신의 신념을 두려워하지 말 것” 등이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완벽주의자가 되었고 드센 성격으로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라디오 방송국에도 가서 젊은 디제이를 몰아내고 무보수 디제이를 맡아 음악과 함께 인생의 노하우를 느긋하게 멘트한다.
해리엇은 흥겨운 음악을 틀어 놓고 앤과 브랜다가 춤추는 모습을 소파에 앉아 보며 같이 즐기다가 잠깐 조는 듯 죽는다. 교회에서 가진 해리엇의 장례식은 해리엇이 남긴 막대한 재산을 시에 기증하고 음반은 방송국에 기증하는 등의 선행이 좋은 와일드카드 수식어로 장식된다. 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원래 써두었던 사망 기사보다 더 인간적인 조사를 한다.
필자의 경우, 해리엇의 사망기사 4가지 요소를 적용해보니 해당 되는 것이 별로 없다. 동료, 가족, 사이는 다른 사람들처럼 별 문제 없을 뿐이다. 장애인댄스를 한 것이 약자에 대한 영향을 끼쳤다고는 할 수 있으나 내세울 만 한 것도 아니다. 죽음은 누구나 맞이하는 것이고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조용히 잊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배우 남경읍(59)의 경력을 보니 그가 처음 뮤지컬을 한 것은 이라는 작품으로,
어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야말로 한국 뮤지컬 1세대라고 불리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 후로도 그는 꾸준히 뮤지컬 활동을 하며 척박했던 뮤지컬 장르를 지금의 보편적 문화계로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또한 수많은 연극과 영화, 드라마에서의 활약으로 정통 연기자로서의 자신을 각인시킨 그는 얼마 전까지 연기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삶도 살았다. 여러 사이클을 거쳐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연기자로서 다시 현장에 선 그에게 삶과 사람에 대해 물어봤다.
기자가 배우 남경읍을 다시 만나게 된 건 6년 만이었다. 최고의 전성기는 딱히 없지만 늘 힘이 나는 그래서 변함없이 차분하고 믿음을 주는 인상을 가진 그는 깊은 가을과 어울리는 남자였다.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을 동시에 종횡무진 활동 중인 그는 활발한 외부 활동과는 별개로 얼마 전 큰 아픔이 있었다. 한 달여 전, 어머니를 하늘로 떠나보낸 것이다.
인생을 바꿔준 어머니의 말씀
“원래 제가 재수할 때 연극영화과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음대를 가려고 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연기를 할 테면 해보라고 말씀하셨죠. 회상해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때 연극을 했었거든요. 중학교 때는 대본이란 말도 몰랐는데 강감찬, 을지문덕, 이순신 등 위인들을 소재로 막 대본을 썼어요. 그걸로 집에 세트를 만들어서 동네 아이들과 연습도 했고. 그때 문경읍에는 녹음기가 없어서 점촌까지 나가서 녹음기를 사서 녹음해서 연습했어요.”
그는 어머니가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고, 돈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건 남자답지 않다는 거였죠.”
1970년대의 보수적이고 고루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여자. 어머니의 그런 태도는 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항상 어머니께 감사해요. 그런데 동생인 남경주가 연기를 한다니까 어머니가 한 집안에 광대가 둘이나 있어도 되겠냐며 반대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제가 설득했죠(웃음). 아들 둘을 배우로 만든 어머니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했어요.”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많은 아쉬움이 있을 듯했다. 그래서 어머니 얘기를 해도 될까 걱정했다.
“어머니가 생선장사를 하시며 혼자 4남 1녀, 5남매를 키우셨어요. 약사이셨던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도를 맞아 집에 못 들어오시고 밖에서 사셨기 때문이었어요. 전국을 유랑하며 글을 쓰면서 사셨던 한량이었어요. 집에는 1년에 한두 번 오셨고, 겨우 하룻밤 주무시고 떠나셨죠. 그래서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어요.”
어찌 보면 어머니가 그에게 한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말은 아버지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10여 년 전에 승천했다.
“아버지가 오시면 동생들이 아버지가 안 오셨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우리를 잘 모르면서 간섭하는 아버지가 그저 불편하고 어색했으니까요.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제가 혼절할 정도로 난리를 쳤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이 안 났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어쩌면 그것은 어머니의 삶이 서러움과는 거리가 먼, 후회 없는 삶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형제 우애가 돈독해지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싶어요. 어머니는 아버지 고향인 경북 봉화에 묻혔어요. 아버지는 그동안 벽제에 있는 서울시립승화원에 계셨는데, 이번에 어머니와 합장했죠.”
소통하는 후배들과의 즐거운 만남
요즘 남경읍은 뮤지컬 에 열중하는 중이다. 루 월리스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오랜만의 뮤지컬 복귀작이기도 하다.
“뮤지컬은 8년 만에 하는 거예요. 매우 아끼는 후배 연출자가 출연을 요청해서 대본도 안 보고 하겠다고 했죠. 작은 역이라고 했는데, 진짜 작은 역이긴 하더라고(웃음).”
그러고 보니 그는 널리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생각보다 작품이 적다. 작품을 신중하게 고르는 성향 때문이다.
“1년에 한 개나 두 개 정도 해요. 이번 는 워낙 탄탄한 원작에 음악과 연출이 너무 좋아요. 관객 반응도 상당히 좋아서 설 연휴 기간의 공연은 매진이었고. 배우들도 고무돼서 즐겁게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는 에 함께 출연하는 후배 칭찬을 이어나갔다.
“카이가 아주 인간성이 좋고 정말 열정적이더군요. 깜짝 놀랐어요. 민우혁도 참 멋있는 후배고요. 박민성은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지, 무대 뒤에서 아이비하고 저하고 입 벌리고 보게 돼요. 무서운 후배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무서운 후배들을 이길 생각 말고 뒤처지진 말자고 생각하죠(웃음).”
신이 내린 계시, “까불지 마라”
지금은 탄탄한 중견 배우로서 입지를 굳혔지만, 여전히 힘든 순간은 있다.
“공연할 때 내가 생각한 대로 표현 안 될 때가 너무 힘들어요. 나는 배우로서 자질이 없다고 자책하고 면박하기도 하고.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 날이 있었는데 그날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그걸 극복하기 위해 결국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받아들이려면 무한 반복하는 수밖에 없어요. 무식한 방법일 수는 있어도 내가 한 만큼 나오니까.”
그는 발레리나 강수진씨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예술세계는 끝이라고 말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위대한 것을 이룬 사람, 정말 대단한 예술가는 죽기 직전까지 반복해서 연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신문을 며칠 치 모아서 서너 시간을 투자해 한 번에 읽는 편이거든요. 2000년 즈음에, 그렇게 신문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제목이 하나 있었어요. 80세 할아버지 피아니스트. 그분이 호로비츠였던가? 외국의 한 기자가 그가 연주를 쉬는 시간에 인터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80세 피아니스트가 휴게실에서도 계속 연습을 하는 걸 보고 물어봐요. ‘그렇게 평생 피아노를 치셨는데 휴게실에서도 또 치십니까?’ 그러자 피아니스트가 말해요. ‘왜? 난 요즘도 조금씩 느는 것 같아.’ 그때 제가 한창 교만했던 때였어요. 그런데 그 글이 마치 신이 내린 계시 같았죠. 까불지 말라고.”
이미 날짜가 지난 신문들에서 하필 그 제목만 눈에 들어와서 그에게 큰 감명을 줬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그 순간 앞으로 평생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됐다.
“제자들에게도 말해요. ‘까불지 말라’고. 이 말이 저에겐 평생 갈 수 있는 심지가 된 셈이죠.”
같은 연기자로서 이해하는 딸
남경읍의 자녀는 외동딸 남유라 한 명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같은 연기자의 길을 걷는 중이다.
“아직 메이저에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에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됐죠. 아내는 무용인이라 이쪽 길이 힘든 걸 알아서 딸이 연기하는 걸 반대했는데, 난 힘들어도 얻는 게 있다고 생각해서 찬성했어요.”
아버지와 딸 사이는 돈독하다. 조언과 대화도 많이 하고, 자신이 연기한 걸 보라고 보여주기도 하며 이쪽 계통 얘기들과 인생에 관한 얘기 등등을 지겨울 정도로 한다고 한다. 어쩌면 부녀 사이를 넘어서 같은 연기자로서의 끈이 서로를 잘 통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다.
“동생(남경주)은 작품을 같이 할 때는 대들기도 해요(웃음). 그런데 뭐, 끝나면 다시 잘 어울리고. 술 한잔하자고 만나자 하면 만나서 한잔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보는 것 같네요.”
연출? 정치? 단칼에 거절한다
탄탄한 중견 배우인 그는 여러 연기 영역을 두루 거쳤다. 그에게 연출할 생각은 없는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바로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에요. 우리는 감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저는 제 재능을 알기에 오로지 배우예요.”
그는 신뢰감을 주는 외모 덕분인지 유난히 정치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항상 ‘노’다.
“단칼에 거절해요. 저는 장관도 국회의원도 못해요. 내가 나를 알기 때문에. 저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 일을 하면 즐거울 건가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돈은 아니에요. 그래서 돈을 못 모았지만(웃음).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어머니 말씀이 저에게 계속 남아 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한 생각은 안 해봤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걸 정말 최선을 다해 하다 보면 그만한 대가가 오겠지 하는 생각이었죠.”
물론 돈에 대해선 내려놨다는 그 말을 지키면서 만들어진 현실적인 고통들도 있었다.
“쌀이 없어서 라면을 먹은 적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어머님 생신날에 차비가 없어서 못 간 적도 있고…. 그런데 그것 또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경험이 많을수록 배역을 잘 소화하게 되니까요. 슬프고 괴로운 경험이라 할지라도 도움이 될 것이고, 마음 한쪽에는 지나간다고 생각하죠.”
명불허전 진짜배기
남경읍은 올해로 59세다. 그도 작품을 하면서 자신이 나이 들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힘이나 호흡 면에서 특히 그렇죠. 후배들과는 30년 차이가 나니까요. 비교하면 안 되지만 하게 되죠. 나도 한때는 체력 좋았지만 이제 환갑이라(웃음). 그런데 이순재, 신구 선생님은 80대이지만 활동하고 계시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분들은 하늘이 내린 배우라고 봐요. 그래도 70대까지는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덕목에 대해 묻자 ‘처음과 끝이 같으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앞서 말한 죽을 때까지 연습하는 예술가와 같은 관점에서의 말이었다.
“사람이 위치에 따라 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초심을 쉽게 잃죠.”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 걸까 궁금해졌다. 이미 베테랑 배우에게 묻기에는 어색할 수도 있는 궁금증이었지만, 그만큼 그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젊고 열정적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배우로 남고 싶죠. 그럼 좋은 배우가 뭐냐. 대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캐릭터 역을 최대한 치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디테일하고 완벽한 준비가 필요해요. 전쟁에서 쓸 총알을 만드는 일과 같죠. 그러다 보니 너무 바빠요. 그런데 그게 나의 취미이고 생활이자 특기, 원동력인 것 같아요.”
국내 최고의 술 전문가가 마침내 세계와 겨룰 명주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재료는 오미자였다. 패스포트, 썸씽스페셜, 윈저12, 윈저17, 골든 블루… 27년 동안 동양맥주에서 한국 위스키 시장의 거의 모든 술에 관여해, 업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불릴 만큼 주류 역사의 산 증인이 된 이종기(李鍾基·62) 오미나라 대표. 오랜 세월 한국 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그는 지금 독립군이 된 심정으로 명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의 술 만드는 흥과 열정, 그리고 잃어버린 술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고군분투의 이야기.
서울대 농화학과 75학번인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를 만나니 대뜸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미자였을까?’
“제가 술로 할 수 있는 재료는 거의 다 해봤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양조용 원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양조를 위한 원료가 없다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맥주는 보리가 주원료다. 우리가 먹는 보리는 육조대맥이라 하여 위에서 보면 알맹이가 육각형으로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양조용 보리는 이조대맥이라는 두 줄짜리 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 심지어 쌀도 마찬가지다.
“쌀로 술을 만들기 좋은 품종이 일본에는 80개가 있고 그중에 유명한 7대 품종이 있어요. 포도도 수천 종 중에서 양조용 품종인 샤르도네, 리슬링 등이 유명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부 생식용이지 양조용 원료가 없어요. 양조학에서 생식용은 아예 양조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걸로 만들어도 술이 되긴 되죠. 그런데 명주가 될 가능성은 제로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쌀을 비롯해서 곡물, 과일, 약재 등으로 술을 만들어봤는데 국제적으로 명주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오미자 이외에는 없었던 거죠.”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 아니다
이 대표가 우리나라 명주를 만들기 위해 원료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다. 그로부터 5년여 후, 그는 한국산 원료로선 오미자 외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오미자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술은 기본적으로 관능미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취하는 거야 술이 아니어도 취할 수 있어요. 그냥 에틸알코올만 마셔도 취하긴 하죠. 술의 주성분은 물이에요. 12도 와인이라면 물이 88%입니다. 그런데 알코올과 물 외에 천분의 일 정도 분량에 수백 가지 다른 요소들이 섞여 있는 거죠. 문제는 그 수백 가지 요소들로 인해 술의 색과 향과 맛 등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술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게 술이죠. 오미자가 그걸 충족해요.”
이 대표에게 있어 술이란 일단 매력이 있어야 한다. 관능미를 충족시키는 매력과 역사 문화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진짜 술이란 것이다. 그에게 술은 사회의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저는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희석식 소주는 일제가 전쟁을 일으켜서 발악할 때 만든 전쟁 보급품이에요. 워낙 우리가 어렵게 살다 보니 제3공화국 때 서민용 술로 보급된 거지. 그런데 희석식 소주가 우리나라 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술과 농업이 전혀 관련 없게끔 괴리가 생겼어요. 술은 농산물의 꽃이고 농업의 가장 오래된 산업이 양조 산업인데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문화 말살을 위해 일제가 만든 적폐
희석식 소주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우리 생활에 관계된 얘기다. 당장 오늘 저녁에만도 그 수많은 식당과 테이블 위에서 몇 병씩 비워질 삶에 밀착된 한 부분 아닌가.
“1909년에 순종이 주세법을 공포했어요. 물론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죠.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가호호든 궁궐이든 술을 만들어 먹었는데 주세법은 그걸 금지시켰어요. 겉으로는 조세를 확보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술은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문화 그 자체였어요. 아예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법도가 있었는데, 직역하면 마을에서 음주하는 예절이라는 의미죠. 정조가 이것을 책으로 수천 부를 만들어서 배포했어요. 술 문화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이 대표는 향음주례의 절차가 일곱 개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술을 권하고 받을 때 세 번 권하고 두 번 사양하라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걸 없애니 문화가 말살된 거죠.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취하려고 술을 털어넣는 문화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술이 살아야 우리 농업이 산다
술은 그 지역에서 농사지은 걸 빚어서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1938년이 되자 일제가 전선을 중국, 동남아, 하와이까지 넓히면서 보급품이 부족하게 됐다. 그때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국가에 있는 모든 자원을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전쟁에 동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 못지않게 술입니다. 그런데 식량은 전쟁물자로 다 나간 상황이죠. 그러니 일제가 열대에서 나는 가장 싸구려 타피오카와 당밀을 섞어 알코올을 만들고 거기에 사카린, 조미료를 타서 보급한 게 오늘날 희석식 소주예요. 술을 음미하고 즐기는 게 아니라 정성과 품이 안 들어간 막술로 변질된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됐죠.”
술은 문화를, 예법을 논하는 일이다. 이 대표는 그런 술의 본연의 성격이 지금은 일종의 도피제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술을 도피제로 전락시킨 것은 정말 저급한 문화죠. 저는 항상 술을 마실 때는 시를 생각해요. 로마네 콩티가 왜 비쌀까요? 한 병에 오백 내지 이천만원에 달할 정도로. 로마네 콩티나 소주나 취하는 건 똑같은데 말입니다. 로마네 콩티에는 그걸 마시고 싶은 스토리,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가격이 싼 희석식 소주를 마시는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10%만 괜찮은 술로 대체가 된다면 그 자체가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어요. 지역 발전과 관광, 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인삼주 혹평에 자존심 상해 명주를 만들기로 작심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려면 우리나라 농산물로 만든 술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물러설 수 없는 지론이었다.
“술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라고 얘기됩니다. 자기 고장의 술을 마시고 영감도 얻고 애환도 달래고 해야 하는데 일제의 보급품을 국주처럼 먹는 건 진짜 적폐죠.”
문득 술은 공동체의 삶이 녹아 있는 문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가양주(家釀酒)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어요. 일제가 전쟁 군수용으로 개발한 소주로 한국의 양조 문화와 술 문화가 떨어진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일제 치하에 있는 문화가 술 문화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 슬픈 일이죠.”
이 대표는 현재 충주에서 세계술문화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5월 1일에 설립하여 올해로 벌써 12년째다.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가 너무 저급하고 전통문화와 지독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두 가지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바로 박물관과 세계 명주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19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를 다니던 1990년 영국 에든버러의 헤리옷 와트 대학원에서 2년간 양조학을 공부했어요. 담당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대표 술을 갖고 시음회를 열자고 했죠. 저는 막걸리를 가져갈 수는 없어서 인삼주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담당교수가 다른 술들을 마시면서는 칭찬을 하더니 인삼주를 마시고는 혹평을 쏟아내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도 구분하지 못하냐’고 말이죠. 여기서 저는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 가져온 로제(rose) 샴페인을 마시고 그 빛과 맛, 향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산 명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오미자로 술을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
2006년 우연히 경북 문경에 있는 농장을 방문하면서 오미자 열매에 꽂혔다.
그가 닥치는 대로 실험을 한 끝에 고르게 된 오미자는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의 복합적인 맛을 내는 재료다. 그 다양한 맛은 오미자의 명주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높게 만들었다. 반면 그런 다채로운 맛의 오미자를 발효시켜 술까지 이르게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7년에 프랑스 연구소를 찾아가서 오미자 발효 여부에 대해 자문을 했습니다. 결론은 오미자는 쓴맛과 매운맛이 강해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효가 안 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걸려도 발효가 분명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의 확신은 2008년에 마침내 현실이 됐다. 그래서 바로 오미자 농가가 많은 경북 문경에 JL크래프트 와이너리와 오미나라, 우리술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JL크래프트의 제품은 네 가지다. 오미자로 만든 스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브랜디, 그리고 사과로 만든 브랜디가 그것이다.
“세계 명주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은 제품은 어느 정도 된 거 같은데 재정이 문제죠. 재정이 취약하니 활동을 할 수가 없어요. 품평회도 열고 해외에서 행사도 할 수 없으니. 그런데 내년 정도면 재정이 상당히 좋아질 것 같아요.”
이 대표는 세계 명주의 기준을 두 가지로 보고 있었다.
“첫째는 이 술이 세계의 다른 어떤 술과 비교해도 열등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적 철학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그가 자랑하는 술은 오미자 증류주인 ‘고운달’이다. 이미 상당한 마니아가 만들어졌다는 자평이다. 물론 신제품도 준비하고 있었다.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을 대상으로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절반 가격으로 대형 유통과 손잡고 내년 하반기부터 스파클링 와인을 출시할 계획이에요.”
좋은 술은 스토리가 많아 더 맛있다
술을 만드는 명인답게 그는 대단한 술꾼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 일 년에 500회는 마셨을 거예요. 거의 매일 마셨던 셈인데, 그것도 하루에 두 번 가까이 마신 거였죠.”
그는 술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으로 술과 함께 먹을 음식을 잘 맞추라고 말했다. 음식과 술의 궁합이 물질적인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술이 가진 스토리와 좋은 사람과의 교감은 정신적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선물용으로 술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 있죠. 우리 저장고에 보면 다양한 술들이 있는데 이 술들은 자기가 오크통을 사고 직접 술을 담가서 숙성을 시키는 거죠. 말하자면 직접 만드는 정성이 담긴 술들입니다. 이런 술이 정말 선물할 가치가 있는 술이 아닐까 싶어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술 세 가지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
“우선 뮌헨 옥토버 페스트에서 나오는 라거 맥주는 정말 맥주가 이렇게 맛있나 놀라게 만듭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가면 도루 강이란 곳이 있는데, 강 양쪽에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들이 있어요. 그곳의 음식과 와인은 정말 대단한 맛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우리나라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해서 런칭한 술이 윈저부터 패스포트까지 이르고, 간접적으로는 조니워커, 발렌타인 시리즈 등을 탄생시켰죠. 그러니 제가 빚은 ‘고운달’을 마셔보면 다른 술하고 비교가 안 돼요(웃음).”
백세시대, ‘얼마만큼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가치를 두는 이가 많아졌다. 언론인 최철주(崔喆周·7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장수시대라는 착각에 빠져 우리의 삶이 더욱 오만하고 지루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웰빙’을 위한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그의 생각을 에 담았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이른바 ‘웰다잉법’이 2018년 2월부터 시행된다. ‘죽음’과 관련한 법인 만큼 제정 단계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시행을 수개월 앞둔 현재, 나라 안팎의 혼란과 희석되며 이에 대한 관심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 그동안 글과 강연을 통해 ‘웰다잉’을 알렸던 최철주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작년에 김영란법이 만들어졌잖아요. ‘웰다잉법’도 우리가 필요해서 여론을 모아 만든 건데, 막상 시행하려 하니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아니, 잊어버린 거죠. 우린 그렇게 죽음을 기피하고 도망가려 해요. 김영란법도 처음 시행됐을 때는 논란과 혼란이 많았죠. 이제 내년이면 웰다잉법도 그런 상황이 벌어질 거예요. 그 전에 우리 스스로 이 법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알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게 됐어요.”
웰다잉법은 ‘존엄사법’이라고도 하는데, 자칫 안락사로 오해하거나 죽음[死]이라는 단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가 많다. 그는 괜한 시비를 막기 위해 되도록 ‘웰다잉법’이라 말하지만, 이번 책의 제목에는 ‘죽음’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그 앞에는 ‘존엄한’이라는 수식어가 묵직하게 놓여 있다. 그가 말하는 ‘존엄’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 그렇게 살다가 사람다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이 ‘존엄’이라 생각해요. 광화문 사거리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횡단보도가 생겼어요. 차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거죠. 여성을 성희롱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여성의 존엄을, 학교나 군대에서 함부로 폭행하지 말라는 건 우리 아이들의 존엄을 지키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삶 모든 부분에 존엄은 필요해요.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게 헌법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삶의 마지막에는 존엄이 없느냐.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한 모습으로 떠나도록 해야겠다. 그게 웰다잉법의 목적입니다.”
집안의 어른이 먼저 죽음을 논하라
웰다잉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사전에 작성해놓은 서류에 따라 자신의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생명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기 쉬워, 그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연명의료는 더는 의학적 치료 효과가 없는 말기 단계에 이뤄지는 심폐소생술이나 약물 투여 등을 말합니다. 무조건 치료를 안 한다는 게 아니에요. 치료할 것은 다 하고, 어느 때가 되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떠나야 하는데 환자나 가족들이 그걸 인정 못하는 거죠. 그건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굉장히 고달파 해요. 평소 죽음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막연히 본능적으로 연명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죠.”
그는 연명의료 과정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팔다리가 묶여 발악하다가 혼수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기억한다. 더욱 애석한 점은 말기 환자 대부분이 자신이 아닌 자녀나 주변인의 결정으로 연명의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부모님이 사전연면의료의향서를 써두었다고 해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그는 “자식으로서 쉽지 않다”며 “부모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평소 부모와 자식이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식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봐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 괘씸하게 여기죠. 그러니 집안의 어른이 먼저 대화의 단초를 열어야 해요. 또 ‘나는 내 인생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을 문서화해두고 보관 장소까지 알려주는 것이 좋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 가족끼리 의견이 분분해져 다툼이 나고, 한 사람의 죽음이 엉망이 돼버립니다. 그럼 그게 자식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게 되고요.”
그는 식탁에서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통이 어렵다는 요즘 가족, 그들이 죽음을 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죽음이 등장하잖아요. 가령 ‘얘, 그 주인공 보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죽는 게 안 좋아 보이더라. 나는 나중에 그렇게 하기 싫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또 장례식장을 다녀오거나 주변에 연명의료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례를 통해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보기도 하고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한 두 가지가 뭘까요? 생명과 돈이죠. 평생 벌어놓은 돈 자기가 결정해놓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나라가 또는 자식이 결정하잖아요. 그래서 유서는 많이들 써두죠. 그럼 내 생명은요? 내가 결정해두지 않으면 의사나 가족이 연명의료하겠죠.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남에게 맡기나요? 죽음도 돈처럼 자기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해야 해요.”
죽음에도 롤 모델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근하게 설명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그다.
“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아내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때를 계기로 웰다잉 공부를 하고 책도 쓰게 됐어요. 내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웰다잉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기 힘들어해요. 난 그게 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난 아픔을 드러내게 되죠.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니까요.”
그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죽음을 공부하게 됐지만, 누구든 죽음을 생각하고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인생의 롤 모델을 정하듯, 죽음에도 롤 모델 찾기를 권했다.
“좋은 죽음은 우리 삶에 좋은 지침서가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처럼 최후의 순간에도 위엄과 존엄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감동을 하죠. 시각장애를 딛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씨는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자신이 시한부라고 밝히며 그동안의 삶이 행복했고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죠. 존엄하게 삶을 끝내는 이들을 보며 내 인생도 그렇게 마무리하겠다고 느끼면, 지금의 삶을 더 의미 있게 살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난 이렇게 죽으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보람 있고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더 알뜰하게 살게 돼요.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 웰다잉을 생각하면 삶은 자연히 웰빙이 됩니다.”
뉴욕이나 도쿄 등 선진국 대도시에 가면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다.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과 술은 물론 오페라와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문화를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각 나라 방문 비용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싼 값으로 먼 나라의 문화를 맛보고 즐길 수 있다. 이때 제시할 수 있는 단어가 ‘문화력(文化力·Cultural power)’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문화력을 국가와 국민이 갖는 매력이면서 한 국가의 브랜드 파워로 풀이하고 있다. ‘경제력(經濟力·Economic power)’이 경제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처럼 문화력도 문화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문화력은 그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또는 문화적 매력 정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 도시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의 정도를 문화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만약 ‘문화력지수(Cultural power index)’를 만들어 주요 도시들을 비교한다면 우리나라의 서울은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음식과 술의 종류가 다양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뮤지컬, 연극 등도 수시로 무대에 오른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각설이처럼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와서 오리지널 공연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요즘엔 일부 대형 영화관에서 해외 유명 오페라 또는 콘서트를 녹화해서 방영하거나 생중계하기도 한다. 이태원이나 홍대 앞 거리에는 각 나라의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요르단,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다 비슷해 보이는 음식 같아도 조금씩 다르다. 중남미는 물론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아프리카 음식점도 있다.
필자는 운 좋게도 뮤지컬 , 오페라 를 워싱턴과 뉴욕 그리고 서울에서 여러 번 봤다. 그래서 가끔 무대와 의상, 주연배우 등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프랑스 3대 뮤지컬인 , , 도 외국과 서울에서 번갈아 가며 관람했다. 는 하도 많이 봐서 주인공 이름은 물론 대사를 듣지 않아도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대강 알 수 있다.
무슨 큰 자랑처럼 필자의 경험담을 늘어놓는 이유는 문화력지수가 높은 서울을 잘 활용해 개인별 문화력지수를 키우자고 제안하기 위해서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과 대구 같은 대도시만 활용해도 문화적 욕구를 상당히 해소할 수 있다. 가끔 1박 2일 코스로 서울을 방문해 다양한 문화 체험과 함께 음식점 등을 순례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최근에는 주말마다 광화문 근처 호텔 방들이 만석이라고 한다. 지방에 사는 가족들이 촛불 집회 참가 겸 서울 나들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영화 에서 주인공 태식(원빈 분)이 하는 말이다.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오늘 놀고 쓰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고 해석하고 싶다. 열심히 일해서 모았든, 투자와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든,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든 늙어 죽을 때까지 쓸 돈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가장 먼저 고민할 일은 ‘돈을 어떻게 쓰다가 죽을 것인가?’ 아닐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일 또 내일 하며 미루다 보면 어느새 다리에 힘이 빠져 돌아다닐 기력마저 없어진 뒤일 수도 있다. “여행은 다리 떨릴 때 하는 게 아니라 가슴 떨릴 때 해야 한다.” 이 말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돈을 쓸 때도 다 때가 있다. 나이 들면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다. 물론 자녀나 친인척들에게 주거나 사회에 기부하겠다면 말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엔 강의하러 가면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보라고 자주 청중들을 부추긴다. 버킷리스트의 사전적 의미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다. 대단한 일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 별거 아니다. 이렇게 한번 짜보자. ‘올해에는 오페라를 두 개 보고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영화를 보자.’ 오페라나 영화를 보러 갈 때 괜찮은 음식점에 들러 식사까지 할 수 있다면금상첨화. 이처럼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목록으로 정리해서 실천해보자.
오페라와 영화에는 취미가 없고 여행을 더 선호한다면 목록을 바꾸면 된다. 문화력지수가 꼭 오페라와 영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역사 유적지를 탐방할 수도 있고 박물관이나 유배지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섬이나 폐사지(廢寺地), 전적지(戰跡地), 이름난 고택(古宅), 습지(濕地), 유명 사찰, 교회(성당) 등도 좋은 선택지다. 술과 음식을 좋아한다면 지역 양조장이나 맛있는 음식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근교의 산들을 섭렵하는 것도 좋은 버킷리스트가 될 수 있다. 서울만 해도 가까운 산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먹거리, 볼거리도 많다.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오페라 이름 하나, 산 이름 하나, 음식점과 양조장 이름 하나를 지울 때마다 느끼는 뿌듯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버킷리스트는 문화력지수를 키우기 위한 일종의 계획서 역할을 해준다. 되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것도 좋지만 전국 지도를 놓고 여기저기 갈 만한 곳들을 기웃거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페라와 뮤지컬도 익숙한 작품에서부터 좀 낯선 작품들까지 죽 적어보라. 다 못 보고 죽을 만큼의 목록이 나올 수도 있지만 욕심 많다고 누구에게 야단맞을 일도 아니지 않는가. 할 수 있는 것까지 하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쉬고 싶으면 쉬는 것이 인생이다.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보겠다는 다짐도 좋지만 중간에 다른 게 더 재밌어지면 지우고 새로운 리스트를 만들면 된다.
중요한 것은 유인(誘引)과 동력(動力)이다. 이것에 시동이 걸려야 하고 싶은 일과 목표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고 노력한다. 은퇴 후 나이 탓이나 하면서 넋 놓고 앉아 있다가는 뒷방 노인네 취급받기 십상이다. 당장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계획대로 움직여보자. 적절한 스트레스와 긴장감은 ‘필요악(必要惡·Necessary evil)’이라는 말이 있다. 버킷리스트는 필요악을 넘어 ‘필요선(必要善·Necessary virtue)’이다. 비가 올 때 필요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우산이다. 우산처럼 버킷(양동이)도 기왕이면 여러 개가 더 좋지 않을까.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장사익 소리판 대전 공연이 있던 날. 대전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인터뷰에 앞서 도리였다. 노래가 전부라는 사람, 장사익(張思翼·68). 작년 초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성대결절 수술대에 올랐던 그는 8개월 뒤 불사조처럼 힘차게 일어섰다. 공연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나.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진 소리가 가슴을 뒤흔들었다. 음악 안에서 행복하다는 그가 살아 돌아와 부르는 노래.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했다.
대전 공연에서 만나고 수 주가 지난 뒤, 찻상을 사이에 두고 장사익과 마주앉았다. 종로구 평창동 그의 자택 너른 창 앞이었다.
“다섯 잔은 해야 소통이 된대, 차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말을 건넸다. 인터뷰 때마다 치르는 장사익만의 통과의례이자 손님을 극진하게 맞이하는 인사법은 바로 차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마냥 수다스럽게 안부를 묻고, 지난 공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한창 담소가 무르익어갈 무렵, 창밖으로 보이는 산 뒤쪽으로 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였다.
“나 어렸을 적 살던 홍천 우리 집에는 동산이 있어서 오전 9시나 10시나 돼야 아침이 됐죠. 대신 뻘건 일몰은 수도 없이 봤어요. 나이 먹으니 거꾸로 됐어(웃음). 그게 바로 인생이라. 초창기 때 내가 되게 힘들었어요. 노을만 보는 인생이었어. 근데 지금은 해가 뜨는 걸 본단 말이야. 지금이랑 옛날이랑 완전 정반대죠. 내 인생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사는 것과 지는 해를 보고 사는 것과 어떤 게 더 힘이 있어?”
대한민국 중·장년층에서 장사익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공연 때마다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장사익 콘서트 티켓은 효도상품이 된 지 오래다. 1만7000명이나 되는 팬들과 여름과 겨울 꾸준히 팬 미팅을 진행하는 대형 가수이자 올해 예순여덟인 시니어 세대의 젊은 오빠(?) 장사익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1994년. 그의 나이 마흔다섯 되던 해다. 노을 드리우던 굴곡진 젊은 시절을 지나 밝게 떠오르는 인생을 40대 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맞이했다.
마흔다섯, 내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이 새어 나왔다
속이 뻥 뚫릴 만큼 유행가를 불러 젖히는 장사익. 소리꾼이 되기 전 그는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웃음기 없는 가장이었다. 15가지나 되는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동안 아련하게나마 위안이 됐던 것이 어렸을 적 동네 아저씨가 불던 태평소 소리였다.
“세상에 그 어려운 밥벌이하느라 직장에서 얻어터지면서 살았어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 그걸 죽을힘을 다해 한번 해보자고 선택한 것이 태평소였어요. 아부지 장구 칠 때 옆에서 정말 태평소를 잘 불던 아저씨가 제 기억에 늘 있었거든요. 아무 욕심도 없고 별 볼일 없는 것에 내가 좋아서 목숨을 걸었어요.”
태평소를 손에 쥐면서 삶의 판이 바뀌어갔다. 노래하는 인생에 길을 내어준 것은 분명 태평소였다.
“노래가 운명이었나봐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5년 동안 웅변 연습 삼아 목청을 풀었어요. 20대 초반에는 첫 직장 다니면서 대중가요도 3년 동안이나 제대로 배웠고요. 지금 부르는 유행가는 대부분 그때 알게 된 노래입니다. 군 3년 동안에는 문선대 가수로서 전라남도를 돌아다녔어요. 그땐 소리꾼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정말 신기하게 노래란 놈이 다가왔어요.”
그 운명의 끈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만나게 해주었다.
“1993년 1월 4일부터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끼어서 태평소를 불기 시작했어요. 임동창은 그때 김덕수 쪽에서 악보를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요. 나는 이광수 쪽. 그러니까 사물놀이 전설의 라이벌 밑에 둘이 각자 있었던 거야. 공연할 때 뒤풀이에서 둘이 운명적으로 만난 거지. 나는 ‘저 피아노 치는 친구 잘하네’ 했고 임동창이도 ‘어! 저놈 노래 잘하네’ 한 거야. 내가 뒤풀이에서 조용필이야 조용필(웃음). 그때 임동창이가 ‘형, 그러면 한번 나가봐’ 그랬어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그의 인생 첫 콘서트가 계획됐다. 1994년 11월 6일, 7일 이틀에 걸쳐 열렸다. 벼락이 치는 소리만큼이나 강렬한 임동창의 피아노와 김기영의 북장단에 맞춰 ‘찔레꽃’을 비롯해, 20대 초 장사익이 낙원동 골목에서 배우고 흥얼거렸던 유행가를 관객 앞에서 불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0석 규모 공연장에 이틀 동안 800명의 관객이 찾아온 것이다. 장사익이 드디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셋이서 그냥 논 거야. 웃기는 거 아냐? 그때 내 나이가 마흔다섯이었어. 밤새도록 연습해가지고 딱 한 번만 하자 했어요. 첫날 공연 끝나고 나서 다음 날 아침 ‘이게 행복이구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어요. 노래를 딱하고 그다음 날 일어났는데 너무 행복하고 좋은 거야. 그때부터 웃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주름살이 웃는 주름인 거예요. 하회탈마냥 웃잖아.”
노래 부르는 인생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까? 장사익은 공연 뒤풀이에 가서도 노래를 꼭 부른다. 긴 시간 공연에 쉴 만도 한데 그의 흥은 죽지 않는다. 함께 고생한 스태프와 팬만을 위한 무대가 뒤풀이 장소에서 더해진다.
“제 인생에 신조가 있어요. 내가 속한 집단은 늘 행복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인상 쓰고 먹으면 독이 돼요. 아무리 허술한 음식이라도 즐겨 먹으면 약이 된단 말이에요. 일도 그래. 인생이 다 그런 거 같아요.”
근본 없는 세상, 희망가를 부르다
장사익의 대전 공연이 있던 작년 11월 2일은 온 나라가 대통령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떠들썩했다. 콘서트장을 찾은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지만 무거운 돌덩이 하나쯤 가슴 한쪽에 안고 있지 않았을까. 장사익은 공연 중간 ‘근본 없는 세상이라 이런 일도 생긴 것’이라 말하고 ‘희망가’로 관객들을 위로하며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노래하는 놈이 목을 다쳐서 수술을 했단 말이지. 100m 달리기 선수가 달리다가 다리 부러진 거여. 그럼 어떻게 해요? 당장 앞이 안 보이잖아. 긍정적인 생각부터 해야지. 다행히 완벽하지는 않지만 목소리는 일단 찾았어요. 이렇게 노래하고 있을 때 행복하고 노래가 더 소중합니다. 우리나라도 똑같이 승승장구하다가 걸린 거예요. 정지.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보는 거예요. 이건 아닌데. 가만히 보니까 폼도 잡고 있고, 객기도 부리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목을 다치니 뒤도 좀 돌아보고 내 모습도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도 해보더군요. 이런 소중한 기회를 이번에 아프면서 알았어요. 이건 돈 주고도 못 사요. 그런데 딱 목에 신호가 와서 잠시 멈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반성하면서 곪고 터진 것들을 다 도려내야죠. 민주적으로 사정없이 혼내야죠.”
대규모 집회가 매주 집 주변에서 열리던 상황. 혹시 ‘희망가’를 불러달라는 요청이 있다면 응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예전에는 많이 했어요. 요즘에는 별로 얘기 않더라고(웃음). 나는 이렇게 같이 덩달아서 하는 것도 좋지만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지요. 제의가 있다면 늘 마음은 있습니다.”
인생, 3할대만 쳐도 성공하는 거예요
성대결절 수술 후 장사익은 8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절대안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병원에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만 목 또한 악기인지라 연습하고 가다듬어야 소리가 제대로 난다. 목 상태를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면 음이라도 좀 내려 불러야 하련만 장사익 사전에 타협은 없다.
“여기서 죽으면 관둬야 해(웃음).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하는 거여. 노래가 모두 다 좋을 수가 없어요. 특히 찔레꽃은 클라이맥스에서 톡 쏘는 느낌이 관객에게 전달돼야 하는데 그게 안됐을 때는 노래 전체가 살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늘 숙제하는 기분입니다.”
그는 노래가 잘될 때도 또 안될 때도 있다면서 인생을 야구의 타할에 비유했다.
“요새 하는 생각인데요. 야구 상위 타자가 몇 타를 치는지 알아요? 3할 중반은 넘지만 4할은 못 넘어가요. 기가 막히죠. 백인천이 옛날에 4할을 치기도 했지만 말이죠. 국민 타자 이승엽도 10개 중 6~7개 정도는 칠 수 있을 거 같은데 못 치잖아요. 인생은 3할만 가도 성공하는 거예요. 세 번에 한 번. 그리고 두 번은 버려야 해. 욕심이야. 다 잘할 수 없어요. 그게 진리더라고요. 세 번에 한 번만 잘 쳐도 상위 타자로 들어가는 거야.”
그는 인생이 다 좋을 수는 없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결과가 오든 수용해야 한다고, 그게 세상살이라고 말한다.
“2할대 타자도 준수하게 치는 거야. 3할도 하고 5할도 하려다가 모두 도둑놈 되는 거여(웃음).”
은퇴와 죽음이 맞닿을 나의 무대, 무대!
늦은 나이에 소리꾼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섰지만 그에게도 분명 생각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이 있을 것이다. 특히 성대수술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 역시 그의 끝은 무대 위를 꿈꾼다.
“옛날에 내가 좋아하던 조갑녀 선생님이라고 있어요. 이분은 마지막 춤을 내 무대에서 췄어요. 90에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나왔는데 딱 일어나서 1분을 췄어요. 그 어떤 춤보다도 기둥 하나가 춘 거여. 밀양 북춤의 대가 하보경 옹의 무대도 제 눈으로 봤습니다. 그분도 제자가 번쩍 들어서 무대에 올려놓았어요. 농악 장단이 들어가고 1분 있다가 손을 번쩍 드는데, 언제 저렇게 땅이 무너지는 춤을 또 볼 수 있을까. 다 벗어버려야 해요.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해요.”
장사익은 최근 유명을 달리한 노래하는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캐나다·2016)과 차벨라 바르가스(멕시코·2012)의 노래를 좋아한다. 이들의 노래를 ‘죽음을 코앞에 두고 부르는 노래’라고 표현한다.
“이게 진짜 노래예요. 앞으로 나는 힘 좀 빼고 나이 먹는 것을 되게 기다리고 있어요. 남들은 나이 먹는 걸 두려워하잖아요. 나는 80에 90에 어떻게 노래를 부를까 궁금해요. 지금도 주름살이 골목길처럼 있는 놈이 더 늙어져서 지팡이 짚고 나와 비틀비틀하면서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그런 꿈을 꾸고 있어요. 내가.”
일생에 좋은 노래 하나, 좋은 공연 하나, 안 했을 수도 있고 이미 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장사익은 말한다.
“진짜 저런 공연, 저런 노래, 그런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인생을 사는 것인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