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바다 마을 출신의 사내라 해도 이 우주선 같은 치료기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폭풍우 속 배 위가 더 속 편하지 않았을까. 돌아가는 기계 위에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낮은 목소리의 소음은 조용했지만 시끄러웠다. 임재성(林在聲·56)씨는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계가 큰 병을 낫게 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암(癌)이라는 큰 병을 말이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보통 암이라고 하면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던 어떤 사람이 느닷없는 선고에 당황하게 되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많다. 그런데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임재성씨는 그에 반해 억울한 구석이 많은 경우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주유소 사업을 하던 그는 교직에 있는 아내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평탄하게 꾸려나가고 있었다. 사업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유지됐고, 그의 활달한 성격에 주변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자녀도 1남 1녀다. 마치 동사무소 입구에 꽂혀 있는 홍보물 표지 사진 속 가족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 반짝이는 가족의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다.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건강검진에서 B형 간염에 감염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매년 빠짐없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원래 건강에 자신이 있었어요. 실제로 간염 환자가 겪는다는 식욕부진이나 피로감 같은 것은 하나도 느끼지 못했어요. B형 간염도 어머니를 통해 받은 것이니 크게 동요할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정기적인 검사만 제때 받으면 되겠지 하고 평소처럼 생활했어요. 주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면서요. 그때만 하더라도 주(主)님이 아닌 주(酒)님을 모실 때였죠(웃음).”
그 시절부터 그는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B형 간염은 까딱하면 간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고를 들어왔기 때문에 건강검진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생활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은 균열은 조금씩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2014년 말, 광주에서의 건강검진 결과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간암일 수 있다는 의사의 말. 하지만 그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정기검사 때마다 만났던 의사의 태도였다.
“간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아직 B형 간염 약을 먹을 단계는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랬던 그 의사에게서 느닷없이 암 진단을받았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요. 그 상황에서 요즘 의술이 좋아져 초기 간암은 치료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위로가 위로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당연히 암 선고는 그에겐 충격이었다. 여느 암 환자처럼 그 역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부정과 분노 등 다양한 과정을 거쳤다. 죽기 전에 손주는 볼 수 있을까, 죽음을 준비해야 하나, 고통은 어느 정도나 될까, 더 괴로워지기 전에 차라리 생을 끝내는 것이 나을까. 말도 안 되는 걱정과 의문들이 그를 괴롭혔다. 심지어 검게 변해 죽어 있는 물고기들이 바닷가로 잔뜩 밀려오는 악몽을 꿀 정도였다.
그렇게 암 선고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처가 쪽 친척으로부터 일산으로 올라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일산에 국립암센터가 있으니 진단이든 치료든 그곳이 가장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곳 아니겠냐는 조언이었다. ‘약사님’ 친척의 조언이었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도 없었고, 믿어보기로 했다. 그 길로 바로 서울로 향했다. 그러고는 국립암센터의 방사선종양학 전문의 김태현(金泰現·46) 교수를 만났다.
비장의 카드 ‘양성자치료기’
김태현 교수는 “임재성씨는 간암 환자 중 우리 주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형태의 환자예요”라고 설명했다 .
“B형 간염은 한국 사람들에게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독 한국과 중국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어요. 이에 반해 일본과 서양인들은 C형 간염 보균자가 많죠. 최근에는 간염 예방 백신의 보급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그 수가 줄고 있지만, 그래도 B형 간염 보균자는 우리 주위에 적지 않습니다. 이 간염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염증이 일어났다 나았다를 반복하는데, 이러다 암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많아요.”
임씨의 경우 간암 초기였기 때문에 경동맥 화학색전술로 치료를 했는데, 원하는 만큼 예후가 나오지 않아 간암고주파열치료술까지 시도했다. 경동맥 화학색전술은 간 전체에 여러 암세포를 치료할 수 있도록 약을 뿌리는 방식이고, 간암고주파열치료술은 특정 암세포에 고주파를 쬐어 높은 마찰열을 발생시켜 괴사시키는 치료법이다.
“문제는 임재성씨의 증세가 다발성(多發性)이라는 것이었죠. 암세포가 또 발생했는데 이번에는 그 위치가 애매했어요. 접근이 무척 어려운 부위라 수술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양성자치료였어요.”
400억원 넘는 꿈의 치료기
양성자치료기는 CT나 방사선치료기와 같은 ‘의료기기’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료시설’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도 장비가 먼저 자리 잡은 뒤에 그 위로 건물이 지어졌다. 지어진 건물 안으로 장비를 넣는 것이 불가능한 규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양성자치료 장비는 가속기 반경이 4km 정도였다. 우주의 기원을 좇는 입자가속기와 유사한 가속기를 통해 수소 원자의 핵을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면 튕겨져 나오는 방사선을 받아 암세포에 쏘이는 방식이다.
의사들에게 이 장비가 꿈의 장비로 불리는 이유는 일반적인 방사선치료 장비와 달리 주변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기 때문이다. 일반 방사선 장비는 방사선을 투과할 때 암세포 앞뒤의 정상 조직이나 장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방사선 조사각을 이리저리 돌려 쪼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양성자치료기는 정확히 암세포에만 조준사격이 가능하다. 주변에 미치는 영향도 훨씬 미미하다. 암세포를 죽인 뒤 몸을 통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 치료하는 의사 입장에서도 부담이 적은 셈이다. 일반적인 방사선치료가 식욕부진이나 설사, 두통 등의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는 2007년부터 본격 치료를 시작했고, 지금은 삼성서울병원에 한 대가 더 도입돼 국내에 2대가 운용 중이다.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 도입 예산은 약 480억원이었고, 삼성서울병원이 밝힌 양성자치료기 도입 예산은 1000억원 선이다.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치료 시설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60대가 안 되는 귀한 장비다.
치료비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예전의 10분의 1 수준이 됐다. 암종, 치료기간, 치료횟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00만~800만원 수준이다.
김 교수는 “최대한 건강한 간 조직을 유지시키는 데 가장 주의를 기울였어요. 임씨와 같이 만성 간변병증이 있는 경우는 낮은 백혈구·혈소판 수치 때문에 출혈이 잘 멈추지 않아 수술을 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치료가 잘되어 이제는 더 이상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됐어요. 다행이죠.”
암 환자 더욱 위험하게 하는 건 ‘얇은 귀’
임씨가 양성자치료기를 통해 본격적인 치료를 받은 것은 2016년 2월부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사들은 가능성과 확률을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B형 간염 보균자는 간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B형 간염 보균자가 많은데, 그에 비해 경각심은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와 함께 또 경각심을 가져야 할 곳이 있어요. 바로 언론이에요. 요즘 종편에서 의학 관련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믿어선 안 될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암 환자는 기본적으로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어요. 마음이 다급하니까요. 이 마음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부 엉터리 프로그램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는 주변의 다른 암 환자들과 등산을 하거나 모임을 갖는 등 활동을 해왔는데, 불필요하게 효과도 없는 건강식품에 돈을 쏟아 붓는 사람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효과가 좋다고 암 환자들을 유혹하는 각종 식품들에 대해 김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말한다.
“흔히 암에 좋다는 음식 중 상당수는 몸에서 분해되는 과정에서 되레 간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간암은 간을 보호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인데 간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러니 예후가 좋을 리 없죠.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간 수치가 나빠져서 오는 경우가 있는데, 결국 원인은 음식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난 운이 좋은 사람”
임재성씨는 그래도 스스로를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간암이라는 장벽을 만났지만 남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비교적 일찍 암을 발견한 것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덕분에 초기에 치료를 받았잖아요. 또 간암에 효과적이라는 양성자치료기를 알게 되어 혜택을 받았는데, 치료를 받기 직전에 건강보험 적용이 돼서 혜택을 많이 받았어요. 치료 과정에서 임상시험 대상자로 뽑혀 치료비 부담도 줄였고요.”
양성자치료는 아직 모든 암에 적용되지는 않지만 일부 암종을 대상으로 2015년 9월부터 국민건강보험 급여화가 됐다.
“워낙에 가무에 능했는데, 이제는 술과 이별을 해서 대신할 만한 것이 필요했죠. 그래서 드럼연주를 시작했어요. 절로 흥이 나면서 즐거운 마음이 되더라고요. 보통 큰 병에 걸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왜 신경 안 써주냐, 왜 이건 안 해주냐며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자신의 병은 자신이 챙겨야 해요.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몸이 좋아지길 바라면 그게 이뤄지겠어요? 또 이런저런 주변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의료진의 진료에 따르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 하는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글로 한번 꼭 표현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유년시절
필자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해 왔다. 60년 인생에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고향은 대전이다.
필자 머리가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유년 시절의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와 유성온천 만년장호텔의 개울 위 다리에서 벚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일도 기억나고, 만년장 객실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밖으로 봄날의 벚꽃이 하나 가득 흩날려 쏟아지던 것도 생생하다.
필자는 1952년 아름다운 계절 6월의 첫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큰 포도밭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피아노를 좋아하셨지만 예술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평양이 고향인 이북 사람이셨다. 할아버지는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로 평생 후학을 길러내셨으며 명망이 두텁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아주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였다.
아버지는 대전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이고 진명여고를 다니다 대전으로 피난 가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역시 피아노를 전공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쟁도 있었고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두 시림은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는지 존경스럽다.
필자가 태어난 동네는 대전역 건너편 골목의 정동이라는 동네였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나니 필자 머리가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크면서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부모는 딸 셋을 낳고 더는 아이를 갖지 않으셔서 필자 집은 세 자매가 되었다.
필자 집은 대전역 건너편의 중심가에 있었고 친가는 조금 떨어진 가양동, 외가는 10km쯤 떨어진 문창동에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가를 좋아해서 거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바로 꿈과도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일본 사람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집을 외할아버지가 장만하셨는데 그 집은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팽나무에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기다란 그네가 보였다. 필자는 언젠가는 꼭 이 집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력이 모자라 표현을 어찌해야 할지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마당에는 일본 사람 특유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연못 속에 돌로 만든 거북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꽃도 아름다웠다.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놓인 발 디딤돌 외의 공간에는 빼곡히 알록달록 키 작은 채송화가 융단처럼 깔렸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가꾸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칸 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아래위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고 안방을 지나 돌출된 현관을 가진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져서 그 안에 보석 같은 알맹이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외가에 들어와 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필자는 덕분에 동네의 헤로인이 될 수 있었다. 놀이할 때에도 필자는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필자를 떠받쳐주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항상 집이 부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처절하게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딸 셋에게 풍족하게 해 주려고 부모가 많이 노력하셨다는 걸 알았다.
필자는 어릴 땐 숫기 충만하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대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책 읽기를 잘해서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하는 단상에 올라 동화구연을 하기도 했다. 욕심 많은 어부의 아내 이야기로 어부가 잡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부리다 망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던 것도 생각난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과자를 사 먹으려고 교문 밖 문방구에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너 참 잘하더라” 라고 말씀을 해서 군것질을 못 사고 공연히 연필 한 자루만 사 들고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인이 되면 그렇게 체면치레도 해야 하는가 보다.
필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행가도 잘 불렀다. 또 어머니와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아이들 앞에서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해 보였던지 극장에 갔다 온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어릴 때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살던 필자 맘에 꼭 드는 도시인 대전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이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필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필자는 식구들이 필자만 외가에 두고 떠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며칠 후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현동에 있었고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현동 집은 대문 앞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대추나무 집이라고 불렸으며 아주 예쁘고 깔끔한 한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다녔던 아현초등학교를 한 학기만 마치고 전학을 간 곳은 돈암초등학교였다. 집이 돈암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집 역시 한옥이었다. 그때로써는 더 좋은 동네로 옮긴 거지만 요즘으로 따져보면 아현동은 지금 너무나 발전한 고층빌딩 숲으로 시내 중심가가 되었으니 이사하지 않고 그냥 그 대추나무집에 살았다면 어머니, 아버지는 재테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후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필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중에 들어갔다. 동덕여중은 일제 강점기에 여성교육에 큰 뜻을 품으신 조동식 박사가 설립한 민족 학교라 할 수 있는데 교정이 아름답고 건물이 너무나 멋졌다. 본관 건물의 빨간 벽돌담을 초록 담쟁이가 가득 뒤덮어 고풍스러운 모습은 그림 동화책을 보는 듯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등교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허리를 졸라매는 하얀 블라우스와 군청색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등굣길의 버스 안이 얼마나 만원이었는지 그때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터질 듯한 버스 속으로 안내양이 등으로 밀며 필자를 구겨 넣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차체를 흔들어 뭉쳐 있는 사람들을 고루 뒤섞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주름 잡아 허리를 매어 입은 교복이 구겨지고 삐뚤어져서 한동안은 동소문동 집에서부터 보문동, 신설동을 돌아 창신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도 했다.
혜경, 대학생이 되다
그리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3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꼭 가고 싶었던 이화여대는 아니어도 청파동 언덕의 아름다운 숙명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과도 영문과나 불문과 아니면 국문과가 좋았지만 예비고사 성적에 맞추어 무난하게 경제학과를 지망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과이지만 그 당시 필자가 경제학과 학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청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듯하다. 수많은 미팅도 있었고 친구들과 명동이나 종로 등 좋아하는 거리를 섭렵하며 다녔다. 이렇게 미팅 전성시대를 누렸지만 정작 결혼은 매우 철저한 중매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그런 추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필자는 학교 다니는 동안 교직과목을 듣고 교생실습을 거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친구들은 취직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필자는 그때도 놀기만 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무지였다. 서울에서는 임용고시가 너무나 어려워 통과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가 경기나 지방으로 교사가 되어 떠났다. 지방은 서울보다는 선생님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셋인 아버지는 필자를 지방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필자는 본의 아니게 빈둥빈둥 노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하게 딸들을 사랑한 아버지 덕분에….
20대 후반이 됐는데도 시집을 못 가
나이가 27세가 되자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내 쉬며 걱정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정작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무척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필자가 자타공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만났다. 약대를 나왔고 시아버지는 변호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첫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야 동생들도 그렇게 될 거라며 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선을 봤는데 남자가 너무 못 생겨 보였다. 못 생겨서 싫다고 했더니 제 복을 제가 찬다면서 야단치셨다.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이 남자를 만나보니 인물보다는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더구나 어느 날 자기 집 얘기를 하는데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필자는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에 파란 물이 출렁이는 예쁜 풀장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 가서 보니 뭐, 거짓말은 아니고 정말 집안에 수영장이 있긴 했다. 집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인데 어머니가 손수 지휘하셔서 아주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필자가 상상한 그런 수영장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멋지고 좋은 집이었다.
전면으로 볼 때 3층이었고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분수가 나오는 정원이 있고 왼쪽으로 반지하인 1층이 있는데 그 층에 운전기사 방과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한다는 넓은 부엌이 있고 그 구석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위해 네모난 풀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수영장을 보고 필자가 엉뚱하게 상상했던 게 생각나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결혼했다. 처음엔 결혼하고 바로 분가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첩이 있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집이 너무 큰 데 식구가 없으니 몇 년 만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이혼의 위기에서
그런데 그렇게 시댁은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고 분당이 개발되기 전에 서현동이라는 곳에 정원이 아름다운 크고 근사한 별장도 있었으며 시아버지가 아직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굉장한 부자이긴 했지만 첩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좀 복잡했다.
그렇게 멋진 집에서 5년을 살고 분가했다. 분가는 친정 옆 동네로 했다. 시댁의 가정사가 복잡한 것과 대조해서 친정은 너무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있어 언제나 평화로웠다. 특히 아버지는 손자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혼의 위기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부러움을 받고 살던 필자에게 큰일이 일어났다. 상속받은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있던 5층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건물은 시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알토란같은 건물이었다. 위치가 좋아 건물세도 잘 나오고 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다고 표현하며 좋아했었는데 마음만 착한 남편이 사기에 걸려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이혼도 고려하게 되고 심각해졌는데 필자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해서 온전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필자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 남편을 구박하기도 하고 화풀이도 하지만 이혼 안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재산을 잃었지만 든든한 시댁과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었고 키우는 동안 너무나도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진 큰 재산이 아깝긴 해도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주 예쁜 손녀와 돌 지난 손자, 아들,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큰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큰 병에 걸렸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다. 투병 중인 남편을 보며 한때 재산을 없앴다고 못되게 굴었던 일도 후회돼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유행가 가사가 다 진리로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치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고 누구에게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이 한 세상 잘 살았으며 이별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1964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기획관, 경제기획국장, 재무부 차관보, 재무부 차관, 한국산업은행 총재 등을 거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해 살아온 이형구(李炯九·76) 전 노동부 장관. 대개 한 분야에서 탄탄대로 삶을 산 이들은 자기계발서나 자서전을 쓰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생의 사명감을 가지고 쓴 을 통해서 말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8년 이 전 장관이 출간한 에서 그가 제시했던 문제들에 대한 결론이 담긴 책이 바로 이다. 단순 명료한 책 제목만 보아도 이전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 관련 일을 해왔기 때문에 책을 낸 것은 아니다. 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자 사명감, 후세대를 위한 바람이 담긴 ‘인생작’과 같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며 시원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다.
“2005년에 세종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준비했던 책이 입니다. 번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을 역사, 정책, 문화적 상황에 따라 설명했어요. 그 책을 쓰면서 꼭 그에 대한 결론을 내는 책을 쓰고 죽겠다고 결심했었죠. 한 10년쯤 후에 쓸까 했는데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보다 훨씬 앞당겨 쓰게 됐어요.”
그가 예상보다 책을 일찍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다. 번영학은 신자유주의의 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 논리와 ‘경제하려는 의지(will of economize)’를 바탕으로 한다. 리먼브라더스 사건은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시장이 왜곡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를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경제 상황의 변화로 그는 하루라도 일찍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인위적인 통화 공급으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무너져버렸죠. 여러 가지 발전 전략이나 가치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이 경쟁이거든요. 발전하려는 의지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로 치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예로 들 수 있죠.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를 가지고 개발도상국 시대의 발전의 의지를 접목하자. 거기에 정부의 역할이 조금 확대돼야 한다는 게 번영학의 기본이자 의 결론과 같아요.”
모두 다 한번 잘살아 보세~
번영(繁榮)이란 번성(繁盛)과 영화(榮華)를 이른다. 번성은 객관적으로 번창하고 풍성한 상황, 즉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한 경제적 풍요를 의미한다. 영화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호화로움과 영예를 뜻하는데, 객관적인 경제적 의미보다는 사회적 의미의 주관적 상황과 개인의 행복을 뜻한다. 따라서 번영이란 경제적으로 풍족한 조건과 더불어 개인의 영예, 행복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할 수 있겠다. 거기에 현재의 번영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할 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뒤따라야 한다.
“만약 내가 현재 연간 소득이 1억원이라 하면, 10년 후에도 1억원이면 되겠어요? 현재보다 발전한 소득수준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이 많다고 행복한가? 그 돈이 영예로워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도둑이 훔친 돈으로 잘 먹고 잘산다고 하면 소득 수준에는 문제없겠지만 내 가족이나 이웃에는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나를 번창하게 하는 그 돈이 영예로워야죠.”
그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관용을 베푸는 것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그래야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공동체의 행복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과거에 우리는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았잖아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그런 내가 삼시 세 끼 챙겨 먹으면 행복하지 않겠어요? 소위 절대빈곤 타파라 하는데, 그저 세 끼 먹는다고 만족할까요? 매일 채소만 먹는 것보단 고기반찬도 먹고 해야 좋을 거 아녜요. 그게 생활의 질이에요. 그러면 내가 좋은 반찬을 배불리 먹는다고 행복할까요? 이웃도 잘 먹고 잘살게끔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죠. 그래야 ‘저 사람 참 훌륭하다’는 인정도 받고 개인이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거예요. 상대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 행복 조건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현재 삶의 행복 점수, 70점
행복 가치 추구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는 그에게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70점 정도”라고 대답했다. 이 전 장관은 현실적으로 채우지 못하는 30에 연연하기보다는 소소하게 채워진 70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을 쓰는 일도 행복하고, 손주를 보는 것도 즐겁죠. 다들 그런 재미로 사는 거 아니겠어요? 집 근처에 서재를 마련했으니 글을 쓰고 싶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런 것도 행복해요. 이번에 책을 내고 동료들이 의견을 내서, 실제 관련 일을 했던 이들 중심으로 한국번영학회를 설립하기로 했어요. 6월에 시작하는데, 내가 일을 벌였으니 학회장을 맡았죠. 근데 뭐 그게 일인가요. 이제 나이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일종의 놀이인 셈이죠. 아주 즐거워요.”
아쉬운 30점에 대해서도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돈을 좀 더 잘 모아둘 걸 하는 마음은 있어요. 그랬다면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봉사나 기부도 그렇고요. 그런데 내가 재벌이나 기업가도 아닌데 돈이 그렇게 많으면 되겠어요?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평가거든요. 본인이 기준을 잘 설정해서 만족하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얼마나 많겠어요. 아쉬운 점은 있지만 고맙게 생각해야죠. 나름의 기준은 있어 점수를 매길지는 모르지만, 사실 지금 나이에 그것에 좌지우지되거나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현재의 삶이 행복하고 고맙다고 말하던 그는 인터뷰 중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인터뷰 전 날이 바로 어버이날이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잘해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챙겨드릴 부모님이 이제는 안 계시다는 것이 못내 허전하다고 했다.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부모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노력했던 그다. 그렇지만 마음은 편안하다고.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어머니는 100세를 사시고 금년 1월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1990년대에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오셨어요. 그때부터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사는 여의도에 집을 마련하시고 생활을 하셨죠. 아마 두 분이 계속 시골에 사셨더라면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적었을 것 같아요. 근처에 사시니 매일 보고 이야기도 하고 무엇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진정한 은퇴 라이프의 시작
3년을 투자한 끝에 출간한 . 자기만족만을 위해 썼다면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 후손들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하리라는 바람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로 대학교 4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때도 참 보람 있고 좋았어요.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사무관부터 시작해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나라 경제계획에 참여했다는 거예요. 힘든 점도 많았지만 가슴 뿌듯한 일이 더 많았죠. 다른 점에서 볼 때 난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안 되지만, 그만큼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서는 특별한 사명감을 느껴요. 개인적으로 나를 위해 했던 일도 아니니 후세대를 위한 무언가를 남겨야죠. 그들이 보고 ‘과거의 경제 계획은 이랬구나. 이러한 이론이 있고 상황은 어떠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그는 자신은 잠시도 가만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 일을 할 때도 해외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했고, 테니스와 골프 등을 즐겼으며, 요즘도 중국어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원에 다닌다. 하지만 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3년간은 해외 일정이나 모임 등을 자제하고 원고 작성에만 몰두했다.
“책 출간하느라 바빠서 운동도 잘 못 다니고 해외도 거의 못 나갔어요. 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흔히들 말하는 은퇴 라이프가 다소 건조하긴 했죠.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더 충만하게 하고 즐거움을 줬는지도 모르겠어요. 최근까지는 원고를 쓸 때가 가장 즐거웠으니까요. 정말 죽기 전에 꼭 하자 하는 것을 이뤘으니, 이제 죽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며 지내려고 해요.”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르신이 되라
그가 지금까지 낸 책은 모두 경제와 관련된 전문서적들이다. 그 스스로 이야기할 정도로 남들이 선망할 만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도 자서전을 낼 생각은 없다고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노년기 삶에서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 그런 데에는 아내의 조언이 한몫했다.
“아내에게 매일 듣는 말이 ‘노인네가 되면 안 돼요. 어르신이 돼야 해요’입니다. 상당히 좋은 충고라고 생각해요. 노인네가 된다는 게 뭐겠어요. 목소리 높이고 잔소리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그런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저 사람 참 잘 늙었구나’해야 어르신이 되는 거죠. 전에는 경제정책 운용과 관련해서 정부가 뭐를 한다 그러면 언론에 글도 쓰고 그랬어요. 근데 요새는 그런 것도 안 하고 있어요. 그렇게 떠들어봐야 늙은이 잔소리니까요.”
그는 최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 관한 글을 읽고 본받아야겠다고 느낀 점이 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사위가 쓴 글이었는데, ‘장인어른은 가족 문제나 자식 일에 대해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식이나 손주의 일에 가능한 한 나서지 않고 간섭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밥 먹고 생각하는 게 늘 나라 경제 운용에 대한 것이니까, 물론 얘기야 하고 싶죠. 내가 볼 때 잘못됐다고 느낀 것이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나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현재의 장관이며 총리며 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고 내 생각처럼 바뀌겠어요? 아니거든요. 결국 잔소리거든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에 담았어요. 거기에 그동안 살면서 쌓은 경험, 지식, 조언 등이 담겨 있으니 자서전과 다름없지요.”
사전에 쓰인 ‘용돈’의 정의는 ‘개인이 자질구레하게 쓰는 돈.
또는 특별한 목적을 갖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다.
말 그대로 그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라는 뜻.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니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용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각기 다른 분야의 시니어 남녀 4명에게 물었다.
질문 ?한 달 용돈은 얼마?
?용돈 주로 어디에 쓰나?
?1년에 가장 지출이 많은 달은?
?세뱃돈은 얼마나 지출하나?
?500만원 혹은 그 이상의 돈이 생긴다면?
“우리 나이 되면 그렇게 욕심내 쓸 곳이 없어요”
(男77, OO 기업 회장)
기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돈 많이 쓸 거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 달에 저만을 위해 쓰는 돈은 한 50만원 정도입니다. 주로 지인들과 식사하거나, 등산모임에 가서 쓰는 것이 전부죠. 지인들 만나서 제가 주로 밥값을 내는 편입니다. 평균적으로 연말에 씀씀이가 많이 커집니다. 어려운 사람도 도와야 하고요. 그리고 그다음으로 많이 나가는 건 설날 등 명절이지요. 세뱃돈은 아이들 나이에 따라서 차등 지급합니다. 1만원에서 5만원까지 생각해요. 초등학생은 1만원, 중학생은 2, 3만원, 고등학생은 5만원 정도 세뱃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를 위한 큰돈이 생긴다면 좋은 데 쓰고 싶습니다. 봉사하러 요양원에 자주 가는데 그런 곳에 보태주는 게 보람 있지 않겠습니까? 지인들과 밥도 사 먹고 싶고, 직원들과도 나눠야겠죠. 선물도 주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게 뭘 가지고 싶은 것도 없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린아이, 직원들에게 써야죠. 돈 들어오면 쓰느라 바쁩니다. 회사 빌딩 경비, 용역 직원에게도 나눠드리고 싶어요. 나이 먹으니까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늘 생각하고 삽니다. 돈도 중요하지만 보람있게 살고 싶습니다.
“내 이름으로 된 통장 없어요. 단, 돈은 쓸 뿐”
(女66, OO 갤러리 관장)
용돈이 얼만지 솔직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가계부도 살면서 써본 적이 없거든요. 돈은 주로 누구를 만나 음식 대접할 때 쓰거나 미술관 갈 때, 미술관에서 차 마실 때 쓰죠. 만나는 사람이 저보다 어리거나 월급 받아 사는 친구들이라면 제가 돈을 써요. 아무래도 내가 쓰는 게 낫죠.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돈은 모을 필요 없다고 가르치셔서 우리 자매들 다 돈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삽니다. 어렸을 때도 아버지가 남들 용돈 4, 5배는 주셨거든요.
문화 교육, 강의 등 문화 관련 분야 굉장히 좋아해요. 예술의전당은 몇 개월 들으면 40여만 원이고 개인교습은 좀 더 비싸요. 그룹으로 클래식 이야기 듣기도 하고요. 문화를 즐기고 지식을 넓히는 게 즐겁습니다. 남편이 장애아동 돕는 일을 정말 열심히 해요. 제가 뭔가 돕는 거 대신 골프를 안 쳐요. 이미 처녀 때 다 해봤고. 골프 안 치는 것만으로도 돈 안 쓰는 거니까 남편 도와주는 거로 생각해요.
사실 양친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특별히 용돈 드릴 곳도 없고, 돈은 항상 비슷하게 나가는 거 같아요. 언제 많이 나가고 적게 나가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예전에는 세뱃돈 많이 주는 이모고 고모였어요. 그런데 요즘 사촌 조카들 다 시집, 장가가고 우리 집까지는 발길이 안 닿아서 특별히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줘 본 적은 없어요. 단, 우연히 호텔 로비나 헬스장에서 친구 손자를 만나면 단 얼마라도 손에 쥐여주거든요. 좀 큰 애들은 5만원, 어린아이는 2만원. 뭐 그런 돈을 주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내가 너희를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거든요. 내 버릇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가지고 온 내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큰돈이 생기면 일시적으로 아주 좋겠지요. 일단 친구, 형제 순으로 만나서 밥 먼저 먹으려고요. 먹고 나서 스카프 같은 선물도 준비해서 줄 거예요. 자주 가는 호텔 빵집에 들러서 빵도 사줄 거예요.
“큰돈이 생기면 따뜻한 섬나라 가서 몇 년 살다 오고 싶어요”
(男59, 자유기고가)
카드를 주로 이용하는데 청구서를 보면 들쭉날쭉이더라고요. 60만원 정도부터 300만원까지. 내가 여행을 갈 때는 그보다 훨씬 많기도 해요. 어제도 여행비 460만원 결제했습니다.
돈 쓰는 거야 주로 지인들과 밥 사 먹는 데 많이 사용합니다.
사실 우리 부부는 세뱃돈을 주기 보다 받아왔어요. 작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그전까지는 우리 부부가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주셨죠. 우리 가정은 상당히 자유로워서 집을 거점으로 생각해요. 꼭 돌아와야 하는 개념 같은 거 모르고 살았어요. 아이들이 외국에도 많이 가 있어서 세뱃돈 챙겨줄 일이 없었습니다. 몇백만 원이면 푼돈이라 간단히 길 떠나는 데 써야 할 것 같고, 몇억이 생기면 다 접고, 따뜻한 어느 섬나라 가서 몇 년 살다 오고 싶어요. 여행자가 아니라 몇 개월 이상, 1년~2년 각기 다른 대륙에 살아볼 생각이거든요. 죽기 전에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여행가는 거니까 돈이 많이 있어야 해요. 레스토랑에서 누군가에게 밥을 사주어야지 함께 밥을 먹지 않겠어요? 언젠가 캐나다 노바스코샤에서 배낭여행길에 한 노부부와 바닷가재를 먹었는데 수다와 식사를 즐긴 뒤 그 부부가 돈을 내니 참 좋더라고요. 나도 나중에 저렇게 살아야지 했습니다. 그러니 나이들면 언제든지 쌈짓돈이 필요해요.
“친구들 만나 밥 먹는데 돈을 제일 많이 쓰지 않나요?”
(女56, 주부)
용돈은 한 달에 대략 200만원 정도 쓰는 것 같아요. 용돈이라기보다는 그냥 생활비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인데 여행도 용돈에 포함했을 때 이 정도 쓰는 거 같아요. 기본적으로 유류비가 많이 나가고요, 친구들을 만나 식사하거나 문화생활도 하고요. 지금까지 명절에 돈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양가 부모님 다 살아계셔서 용돈을 드리는데 각각 20만원 정도 드립니다. 그런데 또 세뱃돈은 줘본 적이 없네요. 매년 설날 때마다 외국으로 여행을 가기 때문에 세뱃돈 생각 안 해봤어요. 이번 설날에는 형제들과 함께 5박 6일 일정으로 베트남 다낭으로 여행갑니다.
정진홍(鄭鎭弘·78)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은 중·고교에 다닐 때 어른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했고, 죽기 전에 읽고 싶은 책이나 실컷 읽고 싶어서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죽음을 살아온 사람이 어느덧 78세.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늙음의 의미, 삶과 죽음의 철학을 듣기 위해 아산나눔재단(서울 종로구 계동)을 찾았다. 편의상 대답은 평어체로 기술한다.
글 임철순 미래설계연구원장 fusedtree@etoday.co.kr
녹취·정리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사진 노진환 기자 myfixer@etoday.co.kr
언제 처음 늙었다고 느끼셨나요?
정년을 맞았을 때였다. 어느 날 문득 ‘관악산(서울대)에서 나보다 나이 먹은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년이라는 게 없었다면 나이를 의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2003년에 은퇴를 하기 전부터 조금씩 달라지긴 했다. 예전 제자들을 만나면 내가 대부분 C D F학점을 줬다고 한다. 강의 내용을 그대로 쓴 답안지는 게을러 보여서, 좀 튀면 건방져 보여서 F학점을 주곤 했다.
지금은 이런 저런 이유로 A학점을 주려고 한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다른 면, 장점이 보이기 시작하고부터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변화의 계기가 정년이더라.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는 표현보다는 굉장히 고맙다는 게 더 맞겠다. 참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다. 살다보니 싫은 사람, 안 만났더라면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과 안 만날 수 없어 힘든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게 다 고맙다. ‘내가 참 좋은 사람들 속에서 살았구나’ 하고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동기, 선·후배, 가족 다 고맙게만 느껴진다. 나를 도와준 사람도 많았고. 그런 이들에게 고마운 감정을 갖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면 행복 아닐까.
모든 게 다 고맙다니 그러면 죽음도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가요?
어느 때는 죽음이 기다려질 때가 있다. 굉장히 편하게, 아주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남아 있는 이들에게 괴로움은 주고 가지 말아야 하는데’라는 염려 정도는 든다. 죽음은 굉장히 그윽한 휴식, 쉼이다. 그래서 기다려진다.
사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
나는 그런 의견과는 조금 다르다. 남겨주고 싶은 것도 없을 뿐더러, 무언가가 남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까지 끼적거린 글이나 남긴 것들도 함께 가면 좋겠다. 내가 살다 간 자리가 텅 비었으면 좋겠고 쉽게 잊히면 좋겠다. 아버지의 부자연스러운 죽음(판사였던 그의 선친은 6·25 와중에 숨졌다.), 자식이 시신도 못 찾은 일, 그런 경험 때문인지 아무것도 안 남기고 가야 자식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편하지 않을까 싶다. 바람대로 잘 될 것 같다.
나이 먹으니 친구들이 자꾸 간다. 죽음은 친구만 데려가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일부도 함께 떼어간다. 사람이라는 게 기억에서 잊히면 없어지기 마련인데 뭔가 남기려 하거나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를 생각하는 건 욕심인 듯하다. 그런 생각이 지금의 삶을 더 추스르고 아름답게 할 수 있는 힘이 되긴 할 것이다. 근데 난 그런 생각이 별로 없다. 정말 텅 비었으면 좋겠다. 의식이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한 두루 고맙다는 말을 남기는 게 전부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더욱더 노년의 삶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겠다, 뭐가 되겠다는 것도 늙기 전의 생각이다. 나는 한강 근처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처음엔 한강대교에서 잠수교까지 뛰어 갔다 오곤 했다. 몇 년 지나니 나도 모르게 뛰는 게 안 되더라. 그 뒤로는 건강을 위해 속보를 했는데 언젠가부터 속보도 안 되더라. 지금은 그저 어슬렁거린다. 뛸 적에는 잠수교만 보이고 돌아서면 한강대교만 보이더니 걷기 시작하자 가로수도 보이고 가로등도 보이고 빌딩도 보였다. 이제는 어슬렁거리니 바람소리도 들리고 풀잎소리도 들린다. ‘늙음’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내게 다른 세계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뛰는 것을 잃은 게 아니라 속보를 얻었고, 속보를 잃은 게 아니라 어슬렁거림을 얻었다.
젊었을 적에 분별과 판단으로 얻은 결실을 늙어서는 베풀고 살았으면 좋겠다. 죽음이 있다는 걸 알고 살되 죽음 자리에서 삶을 바라봐야지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면 절망스럽다. 죽음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면 어떻게 내 삶을 완성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섭섭하거나 기분이 상하거나 그러지 않나요?
고까운 일이 왜 없겠나. 그러나 억지로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안 좋은 것만 보면 자꾸 그런 것만 보인다. 좋은 것만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참 괜찮다고 생각한다. 정말 우리보다는 100배 낫다. 한 방송사가 그동안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부모에게 보내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잘 자라줘서 참 고맙다”고 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대가 그래서 돼지같이 먹고 사는 데만 급급했는데 너희들은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하고 배낭 메고 세계여행도 다니며 참 잘 자라줬다고.
서울대에는 자하연이라는 연못이 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교수가 지나가면 붙어 앉아 있던 남녀가 떨어지거나 일어섰는데 요즘은 허리를 감싸고 딱 붙어 앉은 채 인사를 한다. 나는 그 모습이 예쁘다. ‘녀석들아 오래오래 행복하거라’ 하고 속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근데 누군가는 버르장머리 없다고 험한 말을 한다. 젊은이들이 그렇게 행복한 걸 축복을 못해줄 망정 왜 욕을 하는가. 우리 때는 뭐 잘했나?
지금 시대의 노인들은 지혜가 부족해 보이고, 있다 해도 발휘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노년의 지혜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시대마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있다. 우리의 트라우마는 다음세대의 트라우마와 다르고 그다음 세대와도 다르다. 우리 선배들은 징병, 일제시대 이야기를 주로 하고 우린 6·25 이야기를 한다. 한 제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기억하지 않는 이들은 한국인이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이기에 너의 트라우마를 왜 남에게 강요하느냐고 혼낸 적이 있다. 그러한 한계가 지혜를 막는 벽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현 시대는 과거의 시간대보다 변화가 빠르고 시간차도 점점 짧아진다. 기존 세대가 변화를 체감하기 전에 이미 시대는 변해 버린다. 기존 세대가 지혜라고 알고 발언하면 그 다음세대가 적합성을 못 느낀다. 적합성이 없으면 진리가 아니다. 젊은 세대에게 노인을 배우라고 하기 전에 노인들이 그들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 경험과 지혜를 그들의 언어로 표현해야 젊은이들도 이해할 수 있다. 내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지혜 있는 어른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젊은이들과는 어떻게 교류하고 있습니까?
울산대에서 주 1회 ‘종교문화의 이해’ 강의를 하는데, 아이들에게 “행복하니?”라는 질문은 어색해했다. 대신 “재미 있니?”라고 하면 이해한다. 요즘 아이들은 못 먹어서가 아니라 더 맛있는 것을 못 먹어서 불행하다. 사랑을 못해서가 아니라 더 진하게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이 아이들에겐 그런 게 절박한 문제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예전엔 굶어죽고 했는데 지금 그게 문제야?”라고 말하면 안 된다.
통계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젊은이 수보다 직장이 더 많다. 실업률이 높다지만 취직할 곳이 없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직장을 가려 해서 문제인 거다. 그런 것도 우리가 젊은이들의 수준에서 함께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어른은 거의 없다. 그러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지혜로운 어른이 없다고 하는 거다.
강의방식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군요.
나는 강의보다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려 한다. 수강생이 75명이나 돼 대화하기가 참 어렵다. 질문을 던지고 원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처음엔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지금은 내가 뭘 물어 볼지도 모르는데 이야기하겠다고 나선다. 어른들이 3분을 못 기다려서 그렇지 그것만 기다리면 아이들은 대화를 한다.
나는 한 학기에 한 번씩 학생들에게 5천원 안팎의 비용을 들여 점심을 준비해 오도록 한다. 조교가 그 음식에 번호를 매긴 다음 제비뽑기를 해서 먹게 한다. ‘점심 바꿔 먹기’는 남을 위해 점심을 마련하는 경험을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대충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 오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집에서 정성껏 준비해 오는 아이들도 있다. 어떤 아이들은 편지도 쓴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누구는 정성을 다했구나, 누구는 성의가 없구나,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게 된다.
중간고사 답안지도 임의로 나눠주어 논평을 하게 한다. 그런 다음 이름을 불러 답안지를 주고받고 얼굴을 보게 한다. 다른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면 ‘이렇게 잘 하는 아이가 있구나. 그럼 나는?’하고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철학교수는 소크라테스의 말이라며 “너 자신을 알라”고 강조했다. 그거 참 마땅찮은 거다. 내가 나 자신을 몰라 죽겠는 아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니. 그보다는 함께 고민해보자 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컴퓨터도 좀 하고, 걸 그룹 춤추는 것도 즐길 줄 알고, 랩도 들어야 한다.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젊은이들에게 욕은 하지 말아야 한다. 조언을 할 때에도 ‘이래라 저래라’가 아니라 난 이렇게 살아왔노라는 고백의 언어에서 끝나야 한다. 결국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다. “난 이렇게 살았으니 넌 이렇게 살아라” 이건 아니다. 장차 내가 꿈도 꾸지 못할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에게 내가 무슨 당위를 논할 수 있겠는가. 교육이란, 가르침이란 자신의 삶과 경험을 고백하는 정도이지 그것을 정답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폭력’과 마찬가지다.
어려웠던 성장기를 돌아보면 어떤 기분이신지.
어머니는 많이 배우신 분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이 어려워졌을 때 친지들이 많이 도와주셨는데, 어머니는 “남의 도움을 받으면 갚아야 한다. 그러나 집안의 도움을 받으면 갚지 못한다. 니들은 그렇게 자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집안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거부하셨다. 그래서 7남매의 맏이인 나는 고아원에서 지내게 됐다. 만 17세 이상은 고아원에서 지원하지 않는다. 중학교 때까지는 고아원에서, 그 이후에는 모자원에서 지냈다. 대학 때는 서울에 계신 당숙의 도움을 받았다. 난 6·25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홈(Home)이 없었다. 해가 지면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갈 집이 없었다. 지금도 석양이 지고 어두워지면 괜히 초조해진다. 집에 가 드러누워 있으면서도 집에 가야 할 것만 같다. 그게 치료받아야 할 트라우마인데, 죽으면 집에 가는 것처럼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다.
정진홍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공주중 대전고 서울대 종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석사,
미 유나이티드 신학대학원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박사.
서울대 한림대 이화여대 교수 역임. 현재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울산대 철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