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는 물을 많이 먹어요.” “저 아이는 추위에도 잘 자라죠.” 애정 어린 말투로 야생화들을 ‘아이’라고 부르는 백경숙(白慶淑·63) 백경야생화갤러리 대표. 그녀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갑작스러운 병마로 교단을 떠나야 했지만, 야생화 아이들과 싱그러운 ‘인생 2교시’를 맞이하고 있다는 그녀의 정원을 찾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교사 시절, 시험 감독을 위해 교실에 들어선 백 대표는 이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화장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방광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통증과 빈뇨(頻尿)가 점점 심해졌고, 결국 병원을 찾은 그녀는 ‘발작성 방광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명하다는 비뇨기과를 수소문해 가보고, 좋은 치료법이라면 뭐든 해보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별수 없이 퇴직을 결심한 그녀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눈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몸이 아프고 집에 있으면 정말 울음밖에 안 나와요.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시나 하늘이 원망스러웠죠. 병에 좋다는 건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는데 그래도 안 낫더라고요. 암 같은 병도 아니라니까 이런저런 치료를 해가며 집에서 지냈죠.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게 참 더디고 힘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백 대표는 “꽃구경 가자”는 동생의 권유로 양재동 꽃시장 구경에 나섰다. 그때, 순백의 청초한 자태를 뽐내는 꽃 한 송이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말발도리’라는 야생화였다. 말발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당장 꽃을 사려 했지만 꽃가게 주인은 “그 꽃은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는 백 대표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꺼냈다.
“가게 주인이 꽃을 파는 대신 야생화 강사를 한 분 소개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야생화를 배운다는 건 생소했죠. 시민녹화교실이나 분재 수업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야생화를 배운 건 그때부터였어요. 점점 집에 화분이 늘어났고, 제 삶도 활기를 더하게 됐죠.”
몸 상태가 몹시 안 좋았을 때는 패드를 하고 다닐 정도로 잦은 고통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야생화와 함께할수록 베란다에 화분이 가득해졌고 백 대표의 일상에도 한층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갑갑하고 지루한 하루하루 속에서 고통으로 눈물짓던 그녀가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머금게 된 것. 그러나 그런 중에도 고민은 생겨났다.
“꽃에 집중하다 보니 화장실도 차츰 덜 가게 됐고, 화분에 물을 주고 다듬는 등의 활동이 소근육 운동이 돼 몸도 건강해졌어요. 온갖 치료법을 동원해도 낫지 않던, 그야말로 난치병이었는데 말이죠. 모두 야생화 덕분이에요. 그런 야생화가 많아져서 좋았지만,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기엔 공간의 한계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그 고마운 아이들을 처분할 수도 없었죠. 야생화를 위해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결심했어요.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죠.”
이사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즈음 화분 수는 200여 개에 이르렀다. 백 대표는 동생과 함께 전원주택이 있는 지역을 둘러봤고, 고심 끝에 현재 백경야생화갤러리가 있는 서원마을(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에 정착했다.
“동생 도움이 컸어요. 아파트에서 살다가 전원주택으로 옮기기 힘들다고들 하잖아요. 동생이 ‘언니 우리 함께 살며 의지하면 어떨까?’라고 제안했죠. 그 말에 힘입어 식구들을 설득해 두 가족이 편안하게 지내면서도 야생화 갤러리를 꾸밀 수 있는 ‘모던한 전원주택’을 콘셉트로 설계했어요. 함께 살다 보니 어려움을 나눌 수 있게 됐고, 경제적으로도 더 여유가 생겼죠. 무엇보다 야생화를 자유롭게 키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요.”
‘서로가 원하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서원마을에 온 지도 어언 7년. 화분은 점점 늘어나 이제 600여 개에 달한다. 보살펴야 할 꽃이 많아지면서 백 대표의 손길은 더 분주해졌다. 야외 정원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피부도 건강한 빛으로 그을려져 갔다. 백 대표는 이 마을에 오고 자신의 건강이 95% 정도는 회복됐다고 자부한다. 몸에 활력이 생길수록 야생화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갤러리를 찾아온 분이 ‘원예치료사’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죠. 처음 그 단어를 듣고는 ‘아, 꽃도 아플 수 있으니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식물을 이용해 사람과 소통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거더라고요. 괜찮겠다는 생각에 찾아봤더니 건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커리큘럼이 있었어요. 그 길로 등록하고 논문 쓰고 실습도 다니며 원예치료사 자격을 취득했죠.”
전문가가 되고 나니 강사 자격으로 야생화갤러리, 유치원, 주간노인복지요양원 등에서 야생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20년 넘게 교사생활을 했던 덕분에 수강생을 가르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이들이기에 수업 분위기는 늘 화기애애했다.
“꽃을 배우러 오는 수강생 얼굴을 보면 찡그리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게 꽃이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죠. 더군다나 자기가 필요해서 배우러 오는 분들이기 때문에 적극적이라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지난 2년간은 외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을 오가느라 야생화 교실이 뜸했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행복하다는 백 대표다. 특히 자신과 같은 중년 여성들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여자들은 정말 갈 데가 없어요. 그런 분들이 야생화갤러리에 와서 꽃도 보고 수다 떨고 하는데 저는 그냥 오라고 안 해요. 기왕 오는 거 옷도 아름답게 입고 예쁜 앞치마도 하나 가져오고 기분 좋게 찾아오라 이야기하죠. 여기 오면 바람도 선들선들 불고 우리끼리 소통하면서 꽃과 함께 예쁘게 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공간에서 그런 즐거움을 나누며 지내고 싶어요.”
“영화 좀 봤다”는 축에 끼려면 화제작은 꿰뚫고 있어야 대화에 낄 수 있다. 콘텐츠가 어떻든 간에 일단 봤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내용이 어때서 안 봤다고 하면 독서를 편식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일단 보고, 그러고 나서 각자의 의견은 다를 수 있다.
‘메디슨 스퀘어의 다리’를 명작이라고 친다. 떠돌이 사진작가와 남편이 어엿하게 있는 중년 부인이 하룻밤 사랑을 나눈다는 얘기이다. 한국 기준으로는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매도하지만 영화니까 상상이 가능하고 그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는다는 것이다. 남자들 기준으로는 불륜 영화라고 매도하지만 여성들은 이 영화를 좋게 평한다.
이 영화는 노벨문학상 여성 작가 도리스 레싱(1919∼2013)의 단편집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페미니즘 고전 소설 ‘황금 노트북’으로 200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 여성 작가라고 한다. ‘마담 보바리’를 만들었던 여성 감독 앤 폰테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두 중년 부인 역으로 나오미 왓츠 (릴 역), 로빈 라이트 (로즈 역)가 나온다. 둘 다 유명한 배우이다. 40대로 둘 다 매력적이다. 호주 해변에서 비키니 바람으로 지낼 때가 많다. 로즈는 남편이 있지만 도시로 발령이 나서 떠난다. 릴은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두 여인은 친하게 지낸다. 두 여인은 장성한 아들들이 있는데 서핑을 하면서 역시 친하게 지낸다. 어느 날부터 이 아들들과 중년 부인들이 연인관계가 된다. 친구의 어머니와 서로 연인관계가 된 것이다. 두 아들들도 또래의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중년 부인들과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는 막장 드라마인데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이라니 막장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도 여성으로서 여성의 섬세한 감정처리를 잘했다는 평이다. 영화 평론가들도 하나 같이 파격적이고 매혹적인 불륜 영화라니 혼란스럽다.
친구의 어머니를 연인으로서 상상으로나마 해 본 적이 없다. 영화에서는 두 중년 부인이 남편이 곁에 없다는 점, 해변이라서 늘 비키니 차림으로 지낸다는 점, 중년이지만 늘씬하다는 점, 성적으로 무르익어 있을 나이라는 점 등이 아직 여인으로서의 매력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심리학적으로 남자아이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다지만, 언감생심 그런 상상조차 매 맞을 일이다. 그러나 모성과 섹스의 욕망은 다르지 않다는 해석도 있다. 윤리적 규범은 과연 누가 왜 만들었는지부터 재고해볼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영화 좀 봤다는 축에 끼고 싶어서 이 영화를 봤다. 영화는 상상력을 엄청나게 폭 넓게 해준다. 정 찜찜하다면 한편으로는 안 본 셈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상의 경계를 스스로 정해 놓고 볼 영화를 정한다면 스스로 상상의 나래를 낮게 해서 가는 것이다. 나래를 편 김에 높이도 날아봐야 세상이 넓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중년이 돼서도 예쁜 여자나 ‘쭉쭉빵빵’한 몸매의 여인들을 보면 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품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눈요기만 한다. 수컷 본능이다. 암컷들은 수컷에 비해 소극적이기 때문에 멋진 남성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가끔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다. 남자나 여자나 한탄하고 부러워하면서 늙는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인생이다. 죽기 직전이 되어야 “왜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나?” 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듯이 불현듯 늙어버리고 한 줌의 재가 될 날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다가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짜릿하게 살아야 한다.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연애(戀愛)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누라와 짜릿하게 연애하듯 살면 최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마누라가 엄마처럼 느껴지거나 선생님처럼 또는 가정부처럼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 그럴 때는 이혼이 정답이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이성을 찾든지, 아니면 부부가 합의하에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든지 적극적으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아니면 부부가 서로 자위행위를 해주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서로를 위해 짜릿한 감정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요즘 정말 짜릿하게 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인교회에서 하객이 단 한 명도 없는 단둘만의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짜릿한 재혼생활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매일 결혼식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관람하면서 마누라와 환하게 웃는다.
요즘은 회식도 줄이고 친구들과의 소주파티도 대폭 줄였다. 대신 마누라와 북한산 바로 밑 신혼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단둘이 파티를 즐긴다. 달콤한 발라드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블루스를 추고 난리다. 20년 전 이혼하고 숱한 연애를 했건만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지금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니? 그때로 돌려 줄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입니다. 이대로 건강만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드릴 것이다.
누구라도 필자와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과감하게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얼마든지 이성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다. 그 상대가 나에게도 끌린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 주면 된다. 수동태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능동태로 적극적으로 이성을 유혹해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부인과 남편이 따로따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세월만 낚고 있다면, 내 인생은 물론 포기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인생도 같이 망가뜨리고 있는 공범이다. 중년인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기투합하면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게 이혼일 수도 있고, 별거라는 형식으로 합의하에 서로 다른 이성과 짜릿한 연애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서로 털어놓고 짜릿한 만족을 위해 요구하고 조정해야 한다.
결혼 30년 차인 내 지인은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마치 아우라를 드리운 스타와도 같았다. 이유인즉, 부인과 합의해서 서로 다른 이성을 찾아 연애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15살이나 어린 젊은 애인과 너무나 짜릿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은 어떠냐?”고 필자가 물어보니, “와이프도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놀랐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털끝만큼의 질투심도 남아 있지 않아서 놀랐다는 자가진단이다. 오히려 부부사이가 더 편해져서 진짜 친구(Best Friend)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전에는 부인과의 성생활이 전혀 없기에 본능적인 성욕의 해소를 위해 몰래 직업여성과 가끔 돈 주고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인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연애를 인정해주니까 부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신뢰감이 더 쌓였다고 한다.
부인도 스스럼없이 초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을 소상히 얘기하면서 남자의 심리에 대해 물어보곤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털어놓는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중년에 짜릿한 행복을 쟁취한 경우다. 전통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히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덕관마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에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살아도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본부인과 첩이 형님 동생하면서 의좋게 살기도 했다. 첩이 두세 명인 경우도 허다했다.
10년 이상 섹스 없이 서로 각방을 쓰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는 배우자와 서로 합의하에 애인을 두는 편이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이 열연한 영화 에서 부부는 정말 사랑한다. 그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다른 파트너와 잠자리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음미하기도 한다. 영화 의 스토리는 에로티즘으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아까 소개한 지인 부부의 경우는 앞으로 백세 시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이혼한 지 20년 만에 짜릿한 재혼생활을 하고 있고, 전 아내도 필자보다 먼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딸에게서 전해 듣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 몰래 도둑연애나 하고 대충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한량이라고 자부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 짜릿하지 않다면 이혼이나 위에서 예로 들었던 케이스처럼 뭔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눈치를 보다간 이 생명 다할 때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인 지금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결심할 최고의 적기다.
>> 이봉규 시사평론가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외래교수
“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지?” 영화 에서 본 장광(張鑛·64)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영상을 압도하는 무서운 표정의 배우는 어디서도 보기 드문 악역 전문이 될 거라 믿었다. 첫 영화 이후 4년이 흐른 지금, 장광은 매서운 눈매를 치켜세우거나 혹은 선한 눈을 하며 웃어도 어울리는 자유로운 배우로 사랑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은퇴할 나이에 혜성같이 나타나 ‘대세 배우’로 살아가는 배우 장광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글 권지현 9090ji@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전광수 커피하우스 대학로점
배우 장광과 걷는 대학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았다. 그날따라 일일장터가 열린 탓이기도 했지만 내 옆에 걷는 이가 잘나가는 장 배우(?)이기에 인사를 하거나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이 꽤 됐다. 나도 모르게 매니저 아니면 경호원이 된 듯 보호본능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핀다. 인기 배우와 함께 있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우선 시청자로서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매번 인기 흥행작에만 유독 얼굴을 비출 수 있는지 말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출연했던 TV드라마를 눈여겨보면 장광은 중년층이 즐겨보는 일일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없다. 5월 초 막을 내린 tvN , 출연이 예정돼 있는 KBS 퓨전 사극 도 젊은 세대를 겨냥하거나 해당 방송사 주력 시간대 드라마다. 굳이 유행하는 작품만 고르는 걸까?
“아니요. 그런 거 생각 안 해요. 그냥 들어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사실 이번에 일일드라마에서도 제의가 있었는데 과 시간이 겹쳐 하지 않기로 했어요. 일부러 고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캐스팅 1순위, 대체불가 배우로 꼽히지만 4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다른 무명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오디션에 응시하고, 고배 마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정년퇴직할 나이, 생애 최고의 영화를 만나다
그러다 만난 작품이 바로 영화 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배우 장광은 인생역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사실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사기 당하고 큰 손해를 입어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7~8년 동안 서서히 숨통이 조여 왔어요.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 더 이상 도움 받을 수가 없었어요. 기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화 를 만나는 과정을 신앙인으로서 기도와 말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 매체 인터뷰에서 자신의 종교 신념을 표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어나갔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집사람과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은 다 다녔죠. 그런데 를 만났던 2011년, 40일 동안 하는 새벽기도회에서 목사님이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찾아올 10년, 20년이 생애 최고의 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우리 나이로 쉰아홉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정년퇴직하고 손 놓을 때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10년, 20년이라는 비전을 가지라더군요. 현실적으로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40일 기도회가 끝나기 바로 며칠 전에 영화 오디션 소식이 들렸다. 오디션 보게 될 배역을 보자마자 가족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거구나 생각했단다.
“영화 에서 원하는 배역이 50대 후반의 대머리여야 하고 연기는 잘해야 하는데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선한데 뒤에서 악랄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장광이 맡은 1인2역의 교장과 행정실장은 교회 장로였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부담됐지만 기도로 받은 역할이라 생각했다. 800명이 지원해 단 한 명, 장광이 선택됐다. 이 배역이 정해지지 않아 6개월 여 난항을 겪다 장광이 합류하면서 바로 영화 촬영이 진행됐다고. 실화를 다룬 영화, 19금 등 흥행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460만(누적 466만2 914명)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실제 도가니 법(장애 여성, 아동 등을 성폭행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법) 제정에도 큰 영향을 줬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커서일까? 영화를 만든 스태프와 배우에게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쫑파티를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는데 우리는 손님 많이 들었다고 웃고 즐길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할 분위기도 아니었죠. 상영 시작하고 한 달 뒤, 전라도 어디 초등학교 폐교에 가서 쫑파티 했습니다(웃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배우 공유(본명·공지철)도 공유지만 쌍둥이 교장과 행정실장을 연기한 장광이 더욱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무엇보다 영화 이후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부드러운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하여튼 예능 프로그램은 다 돌았던 거 같아요. 우리집 식구 다 찍고 그러고 나니까 처음 했을 때는 ‘저 얼굴도 보기 싫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도 싫다. 나쁜 놈, 못된 놈, 더럽게 생겼다’ 이렇게 나오다가 나중에는 ‘귀엽다’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날개를 달다
악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천후 배우로 활약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배우 이병헌과 함께 했던 영화 다.
“를 찍을 땐 참 재밌었습니다. 악독한 배역이었다가 ‘내시’를 한다는 게 말입니다. 보통 ‘내시’라고 그러면 가늘고, 마르고,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는 거만 생각하는데 감독님은 저한테 ‘아주 듬직한 고목나무 같이 끝까지 상감을 보필하는 우직한 내시를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영화 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장광의 연기를 꼼꼼하게 챙기고 요구했다. 영화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때라 완벽하게 따지고 확인해 주는 추 감독의 도움이 컸다고.
“그때 칭찬 받았던 것이 뭐냐면 감독이 원하는 딱 그만큼만 한다는 거였어요. 차지도 넘치지도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촬영 과정에서 연기 잘한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작년 8월 개봉했던 영화 에서는 사이비 교주 역할을 맡았다.
“난 그런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재밌습니다. 성우를 할 때도 그랬는데 강한 캐릭터나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 과연 저걸 어떻게 만들까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의 스탠스 필드(게리 올드만 분), 의 펭귄맨, 애니메이션 더빙으로는 와 도 해봤고요. 이 성공하지 못하고 완성도도 약해서 아쉽긴 했지만 사이비 교주 역은 아주 재밌었습니다.”
집안에서 나는 60~70점짜리 가장
얼굴이 알려진 이후 단 한 번의 기복도 없이 배우 생활을 하고 있는 장광.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본인의 점수를 물어보니 60~70점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광의 부인 전성애, 딸 장윤희, 아들 장영 모두 연예인이다. 서로의 일상이 바쁘지만 돈독한 가족애를 위해 노력하고 살고 있단다.
“각자 스케줄 때문에 여행을 못해요. 그게 좀 아쉽지만 가족 예배를 드릴 때가 있기 때문에 볼 시간도 있고 기도 제목을 얘기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나눕니다. 친구 부부들과 함께 만날 때면 우리 부부가 편안하게 말을 많이 한다더라고요. 내 친구들은 자식들 걱정에 속이 썩어들어 가도 말 못할 때가 많다는데 저는 다행이죠.”
내 아들, 미안하다! 사랑한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는 딸 장윤희씨와는 정말 친구처럼 지낸다는 장광. 그런데 아들 장영씨와는 조금은 서먹함을 느낀다고 했다.
“아무래도 남자라서 그런지 밖으로 돌고 그래요. 물론 서로 할 만큼은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아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 거 같아요. 따지고 보면 잘되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거죠. 우리 나이 아버지들이 대부분 다 그렇잖아, 자기는 잘 못했으면서 아이들은 제대로 시키려고 강제적으로 하는 거요.”
어느 날 꼭 날을 잡고 아들에게 사과할 생각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교회 프로그램이던 아버지학교에서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내고, 안아도 봤는데 풀리지 않더라고요. 스킨십도 하고 사랑한다 말도 해야 한다는데 아버지가 아들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쉽지 않아요. 젊은 사람들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는 너무 어렵습니다. 꼭 언젠가 아들에게 얘기해 줄 겁니다. 미안하다고요.”
집밥 백선생님? 장광 배우님 어떠신가요?
사실 영화 로 카메라 앞에 서기 전, 성우로 일을 할 때도 줄곧 주인공을 맡아 인정받는 성우로 살아온 장광.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일 뿐이지 사랑을 많이 받고 산 사람이라 스스로 평가한다고.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겪었지만 현재를 생각하면 많은 것이 감사하다. 신앙적으로도 를 전후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도 인생에서 너무 고마운 부분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뭔가 배우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젊었을 때는 탭댄스를 정말 배우고 싶었습니다. 진 켈리가 나왔던 뮤지컬 영화 를 보고 정말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뭐 따라하는 정도일 거고 제 나이에 맞는 스포츠댄스를 운동 삼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우고 싶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공동체에서 기타를 배워보기도 했는데 정말 매일 미친 듯이 쳐야 늘 것 같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배우고 싶다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요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요즘 분위기로 남자들도 요리는 좀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혹시 이 글을 tvN 제작진이 읽기를 바라며 시즌3에는 꼭! 장광 배우를 섭외하길 권한다.
‘배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하는 사람들에게 배역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그 어떤 옷을 입는다 해도 충격이지 않게 단지 그의 연기로 몰입하게 만드는 배우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을까? 배우 장광이 지금 별처럼 빛나는 이유? 바로 그것! 그것이다.
1999년. 필리핀에서 가장 덥다는 3월의 어느 바닷가 마을, 그곳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이끌고 온 자원봉사자들로 북적였다. 많은 미국인이 참여했고, 한국과 일본에서 온 학생 단체도 있었다. 그 많은 외국인 사이에서 땀 흘리는 한 중년 한국인 남성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가 한국에서 특별히 휴가를 내고 참여한 대형 금융회사의 대표라고 생각하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후에 한국해비타트의 이사장이 된다. 바로 이창식(李昌植·71) 이사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신태현 기자 holjjak@etoday.co.kr
한국해비타트 이창식 이사장은 한국해비타트 초창기부터 성장을 함께해오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국내 금융업계의 발전을 지켜본 산증인 중 한 명이다. 이창식 이사장은 1968년 국민은행에 입사해, 1976년 삼보증권으로 옮기면서 증권맨으로 변신했다. 정적인 분위기가 싫어 은행을 박차고 나와, 증권업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동부증권 부사장을 거쳐, 국민투자신탁증권 대표와 푸르덴셜투자증권 부회장까지 지낸, 은행과 증권, 보험을 두루 거친 금융맨이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격동의 시기에 동서증권 영업부장을 하고 있었어요. 검증은 안 해봤지만, 마치 시장은 나라의 큰 사건을 예견하고, 반영하고 있지 않았나 느껴질 만큼 혼란의 시기였죠. 제가 종교에 귀의하게 된 것도 이때쯤이었어요. 굉장한 변화의 기운이 느껴졌고, 한국사회의 흐름이 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그 누가 권유도 안 했는데 내 발로 교회를 찾아갔죠.”
이끄는 이 하나 없었는데 스스로 종교를 선택해 찾아갔다니 흔치 않은 일이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물으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변화에 답을 찾고 싶었어요. 당시 몸도 별로 좋지 않았고요. 힘든 시기에 스트레스로 부대낄 때였어요. 그래서 더 찾게 됐던 것 같아요. 교회를 나가고 나서 이런 세계가 있구나! 세삼 깨닫게 됐고, 잘 알고 있다고 자만했던 종교가 이런 것이었구나 새삼 자각하게 됐죠. 자신의 무지를 알게 된 것이죠. 대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때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고뇌와 갈등적 요소들에 대한 해답도 얻게 된 것 같아요. 그간 고민했던 것들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창식 이사장이 한국해비타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종교활동이 계기가 됐다.
한국해비타트는 1995년 9월 13일 건설교통부 산하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등록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해비타트 활동은 훨씬 이전부터 국내에서 진행됐다. 1976년 미국에서 시작된 해비타트 운동은 1980년대 후반 미국인이면서 성공회 수도원 예수원 원장으로 활동한 대천덕(미국명 Ruben Archer Torrey) 신부가 신앙계 칼럼을 통해 소개함으로써 국내에 알려졌다. 이후 기독교계에서 펼쳐지다가 1995년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창식 이사장이 한국해비타트에 합류한 것도 이때쯤이다. 그리고 1997년 감사직으로 이 단체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대천덕 신부님은 한국사회의 성인 같은 분이시죠. 해비타트는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니라 일종의 토지 공개념으로 토지 투기를 막아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어요.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생각되었죠. 당시 국내 운동가들도 이러한 뜻에 동의하면서 한국해비타트의 시초가 됐어요.”
1997년이면 동부증권 부사장을 지내다 국민투자신탁증권의 대표를 맡았던 시기다. 금융인으로서 최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때라 할 수 있는, 가장 바쁜 시기에 단체에 참여한 셈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NPO(비영리민간단체) 활동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관심과 애정이 중요하죠. 꼭 해야 하는 의무처럼 느끼지 않고 애정을 갖고 좋아하는 일이라 느낀다면 시간은 어떻게든 나게 되어 있어요. 기업에 있으면서 돈이나 출세 욕심이 많지 않아서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덕분에 지금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요.(웃음)”
국내에 수많은 NPO가 있고, 남을 도울 방법도 많은데 해비타트에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해 이 이사장은 한마디로 “멋있어서”라고 답했다.
“해비타트의 운영방식(Operation Model)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해비타트는 자립(Self Support)을 돕는 것이 목표예요. 집을 지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어서 가지라는 것이죠. 원래는 혜택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지급하도록 해요. 해비타트 운동을 통해 도움받는 사람들을 우리가 동료(Partner)나 구매자(Buyer) 혹은 집주인(Owner)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 이들이 상환하는 자금을 다시 다른 이를 위해 집을 짓는 예산으로 쓰이는 구조도 멋있죠. 집이 있고 없고는 단지 거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과 건강, 장래까지 좌우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중요한 부분을 언급했다. 바로 ‘받는 사람의 자존감’에 관한 부분이다. 최근 일부 NPO들의 활동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받는 사람의 자존감과 관련이 있다. 일부 구호단체나 매체들은 아프리카와 같은 제3세계의 불행과 재난을 부각해 상업적 효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생성된 사진이나 영상물을 일부에선 ‘빈곤의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라고 부른다. 자금 확보라는 근시안적 이득 때문에 균형 잡힌 시각과 지역 주민들의 자존감과 같은 장기적인 목표를 희생시킨 셈이다.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받는 사람의 자존감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기본적으로 국내 NPO들은 아무래도 국외에서 시작된 단체들도 많아 외국 단체로부터 배우고 있는 편이죠. NPO들을 감시하는 NPO들도 존재하는데, 그들을 중심으로 비참한 광경을 자극적으로 부각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요. 국내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작지 않습니다. 구호 활동은 양적 성장만큼이나 그 과정에서의 진정성과 도덕성도 중요합니다.”
KCOC는 세계에서 활동 중인 국내의 국제개발 NGO(비정부기구)의 협의체로 이창식 이사장은 2011년부터 올해 4월까지 회장을 맡아 굵직한 업무들을 해결해왔다.
국제기구들 사이에선 그간 구호활동을 위해 많은 돈이 제3세계로 넘어갔지만,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고 빈곤과 착취가 계속되는 이유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도 높아졌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받는 사람의 준비가 안 됐다거나 주는 사람의 일방적인 지급을 문제 삼는 일도 있었다고.
“그래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 밀레니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예요. 2000년에 유엔이 밀레니엄 정상회의(Millenium Summit)에서 빈곤자 수를 줄이기 위해 2015년까지 실행해 나갈 8가지 목표를 정했죠. 2011년엔 그 목표들이 잘 실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 세계 대표들과 NGO들이 부산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가 KCOC도 참석한 부산세계개발원조총회입니다. 이러한 움직임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인류사회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는 점이에요. 불과 수십년 만에 각국 정부나 국민, 민간단체의 태도가 너무 달라졌어요. 인류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 되요.”
이 이사장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호단체의 한 축은 바로 은퇴자들이다. 그는 1999년 필리핀과 2009년 메콩강 일대의 4개 국에서 열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주최하는 국제 해비타트 봉사 프로그램, ‘지미&로절린 카터 워크 프로젝트(Jimmy & Rosalynn Carter Work Project)’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카터 전 대통령과 동행해서 일하는 70세가 넘은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보고 감명을 받은 바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해비타트에서 은퇴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어요.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주변에서 은퇴한 남편을 추천하는 아내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아마 한국의 은퇴한 남자들은 가장 낯가림이 심한 존재들 일 거예요. 여성들은 반대고요.(웃음)”
재정적 여건이 넉넉지 않은 NPO 입장에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갖춘, 많은 돈이 들지 않는 노동력인 은퇴자들은 분명히 매력적인 존재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생각보다 세대 간 갈등이 컸어요. 은퇴자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갖고 의미 있고, 드러나는 일들만 하려 하는 경향이 있고, 젊은 직원들의 지시나 의견은 따르지 않으려고 했어요. 조직 내 담당자들은 그런 은퇴자들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거추장스럽다고 여겼죠. 그래서 제가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분리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양쪽의 의견을 들어주었죠. 그들이 갖는 불만을 발산하지 못한다면 폭발했을 테니까요. 완충 역할을 한 것이지요.”
노력의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은퇴자들은 젊은이들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젊은 담당자들은 은퇴자들을 전문가로 바라봤다. 그 가운데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은퇴자들의 태도 변화가 가장 절실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몸을 낮춰야 해요.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은퇴자들까지 전부 다. 특히 은퇴자들은 마음가짐을 달리할 필요가 있어요. 결국, NPO에서 필요한 일손과 역할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누구나 전문적인 일을 할 수는 없어요. 부가가치 높은 일 하고 싶어도, 조직에서 필요한 일은 단순한 허드렛일이 먼저니까요. 직원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신입사원처럼 마음을 다잡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이 이사장은 어땠 을까? 국내에서 가장 고도화되어 있다는 금융권 조직 곳곳을 누빈 그다. 체계화된 기관에서 근무하다 뜨거운 선의와 열정과 비교하면 체계가 부족한 NPO 조직이 마뜩잖을 수 있었을 터.
“그간 기업 내에서 해결사나 중재자(troubleshooter) 역할을 많이 했었으니까요. 그런 과정에서 어려운 기업들을 살린 경험이 있고요. 워낙에 보수적이기보다는 개혁성 성향을 갖고 있어요. 조직을 고쳐가면서 이끌어가는 데 재미를 느끼는 편이에요. 이런 성향 탓에 회사에선 ‘호기심 천국’이라고 불렸었어요. 아내는 분잡스러운 부분이 닭과 닮았다고 하고요.(웃음)”
그 수많은 봉사활동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으로 ‘2006년 수해지역 사랑의 집짓기’ 행사를 꼽았다. 강원도 평창 일대의 물난리로 거처를 잃은 수재민을 돕기 위해 13일간 연인원 3600여 명이 참여한 큰 행사였다.
“박홍수 당시 농림부 장관이 석 달쯤 걸릴 예산 집행을 신속하게 해 줘서 늦지 않게 수재민들을 도울 수 있었죠. 컨테이너만 한 집을 40채 만들어서 20채씩 두 번에 나눠 옮겼어요. 그 집들이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 총 길이만 2㎞ 정도 됐는데, 아주 장관이었죠. 한여름 뜨거운 땡볕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나서 감동적이었습니다. 막내 녀석도 당시 2주간 교육받고 현장에서 크루 리더로 함께 참여했었죠.”
그는 최근 진짜 은퇴를 위해 사회적 활동을 점차 줄여나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종착지가 될 단체는 ‘좋은의자’라는 NPO다.
“올해 시작된 정서적 심리적 약자를 돕는 단체예요. 이화여대 간호대 학장, 서울사이버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수지 박사가 ‘사람 돌봄 이론’을 바탕으로 창립하셨죠. 구호단체 경험이 많다 보니 도움 요청이 왔는데,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아 합류하게 됐죠. 그러다 박사님 건강이 나빠지시면서 어쩔 수 없이 상근직을 맡게 됐어요. 계급상으로는 상근이사로 강등된 셈이죠.(웃음) 이 단체가 자리 잡을 때까지 당분간 도우면서, 내년까지 해비타트 활동도 마무리할 생각입니다. 자유로운 삶을 즐겨보고 싶어요.”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NHK방송문화연구 미디어연구부를 책임지고 있는 하라 유미코(原由美子, 1962년생)의 까무잡잡하고 야무진 얼굴에서 관리직의 연륜과 함께 충만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주위에서 엄격한 상사, 철저한 커리어우먼이라고 부를 만큼 한 마디로 일밖에 몰랐던 전형적인 ‘일벌레’로 해외 출장도 잦았다. 주로 미국과 유럽 등을 많이 다녔지만, 정년을 앞두고 10년 정도는 한국, 중국, 몽골 등 아시아 지역으로 출장을 많이 갔다. 특히 한국과 관련해서는 양국 방송에 대한 공동 연구, TV 방송 제작 심포지엄 등에 참가하기 위해 대구, 경주, 제주도 등 각지를 돌았다. 미디어연구부의 업무 때문에 한국의 일본 연구자들과 동아시아, 일본 드라마 등을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해 자주 한국을 방문했으며, 사람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그러다가 쉰 살 무렵 부장을 맡아 현장을 다니는 일보다는 자료 수집과 분석, 조사 등 주로 의자에 앉아 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가끔 서서 일할 때 다리의 힘이 풀려 휘청하는 등 하반신 근육이 많이 약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크게 깨달았다. “사실 20년쯤 전에 수면 부족, 스트레스 등으로 가벼운 안면 마비 증세가 생겼지만 꾸준한 운동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앞으로 더 나이를 먹을 텐데, 제대로 서지도 못하거나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끼는 일이 더 많아질 걸 생각하니 더 심각해지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었죠.”
파도와 호흡하는 서핑에 빠져
그래서 58세 때 도전한 것이 서핑이다. 처음에는 근력을 키우기 위해 노를 젓는 타입의 서핑으로 시작해, 현재는 자신의 다리 힘만으로 파도를 타고 방향을 바꾸는 본격적인 보드를 즐기고 있다.
“건강을 위해 스포츠클럽에서 요가와 스트레칭, 체조 등을 해 왔고, 아울러 스탠딩 서핑도 했는데 사실 말이 파도타기일 뿐 스탠딩 서핑은 노를 젓기 때문에 파도가 좀 있으면 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죠. 그래서 이왕 하는 거 어떤 파도든 그 속에서 파도와 호흡하는 본격 서핑으로 바꿨답니다.”
하라 유미코는 줄곧 살던 도쿄(東京)의 집과는 별도로 일본의 대표적인 서프 포인트이자 수많은 서퍼와 서핑 동호회가 즐겨 찾는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치가사키(茅ヶ崎)시에 별장까지 마련할 정도로 서핑의 매력에 흠뻑 빠져 지내고 있다.
“예순 살때 정년 퇴직을 하고 현재는 계약사원으로 일주일에 세 번 출근해 근무 중인데, 도쿄의 집은 화, 수, 목 근무 때 사용하고 치가사키의 집은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이용해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면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있어요.”
서핑을 위해 바닷가 입지를 충분히 살린 세컨드 하우스는 그야말로 그녀의 제2 인생이 꽃을 피우는 곳, 의외로 서핑을 시작하는 중장년들이 많아 서핑 이외에도 그들과의 교류도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아울러 스탠딩 서핑은 복근을 사용하고 노를 젓는 근력을 키우지만 본격 서핑의 전신 운동에는 미치지 못하며, 무엇보다 파도를 타면서 자연과 한몸이 됐다는 쾌감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짜릿해 정말 배우길 잘했다고 덧붙였다.
모전여전, 다시 찾은 건강 만끽
하라 유미코에게는 어머니(1931년생)와 여동생(1959년생)이 있다.
어머니는 일흔 살 때 지금까지 꾸려오던 양품점을 접자 급격하게 체력이 쇠약해지고 각종 노인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원인도 모른 채 살이 쭉쭉 빠져 체중이 35㎏밖에 되지 않은 적도 있었고,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미코의 극진한 간호와 꾸준한 치료 덕분에 현재는 체중을 55㎏까지 회복했으며, 건강도 되찾아 무엇보다 기쁜 일이라고. 치가사키에서 누리고 있는 제2의 삶에 맞춰 어머니를 노인요양원으로 옮겼으며, 매주 주말 시설을 찾아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건강이 회복된 어머니는 평일에는 노인시설에만 있지 않고, 치가사키에 있는 대학의 공개 강좌를 듣거나 문화센터에서 캘리그라피까지 배우고 있어 지난 10년간 투병 생활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유미코는 혀를 내둘렀다. 뭐든지 열정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아마도 모전여전일지 싶다. 미술을 전공한 여동생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현지 일본 요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친구와 함께 리옹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다. 화가에서 요리사로 변신해 자신이 만든 음식 맛을 보기 위해 찾아주는 손님들과 나누는 행복한 시간이 벌써 16년이 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듯이 이렇게 세 모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삶을 놓치지 않고 알뜰하게 만끽하고 있다고 하겠다.
62세 홍일점 바다에 서다
서핑 동호회의 회원은 대개 50대 초반의 중년들이 많은데, 인생의 선배 하라 유미코는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유일한 고령의 여자라는 점에서 홍일점. 평일의 바닷가에는 젊은 사람들이 드문 반면, 의외로 중장년층 서퍼들이 꽤 많다고 한다. 골프처럼 필드에 나갈 때마다 돈이 드는 운동과 달리 서핑은 바다와 파도, 그리고 바람을 느끼고 이용하는 공짜 운동이라는 점도 매력이다. 서핑은 매년 3~4월 봄에 시작해 11월 말까지가 시즌으로, 파도를 타지 않을 때에는 유연성과 근력을 키우기 위해 체조 등으로 몸을 만들어 둔다고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은 바닷가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크린 캠페인에 참가하는 바다 사랑도 실천 중이다. 이어 유미코는 파도의 속성을 알고, 파도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호흡할 수 있게 되면 먼저 일본 바다를 두루 섭렵한 뒤 세계 곳곳의 유명한 서프 포인트를 찾아가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파도를 직접 맛보고 싶다며 눈을 반짝거렸다.
허벅지는 제2의 심장
끝으로 일에 매진하면서 건강을 잃었다가 어렵게 되찾은 경험이 있기에 유미코는 이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좀 더 빨리 했으면 생각하지만, 절대로 늦은 것이란 없습니다. 단지 안 할 뿐이죠. 생각이 있다면 행동에 옮길 것, 이걸 명심했으면 해요. 파도타기를 통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맞춰 산다는 가르침을 배웠는데, 일할 때 몰랐던 근육과 신경 등 여러 문제도 알게 되었고, 몸을 움직이면서 크고 작은 문제도 해소되고 몸도 부드러워지고 훨씬 가벼워졌어요.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몸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특히, 제2의 심장이라는 허벅지를 지금부터라도 단련해 두면 제2의 인생이 든든해질 겁니다.”
중년이 좋아하는 아이돌. 잘못 생각하면 짧은 치마로 무장한 여자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삼촌 팬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중년의 음악애호가, 특히 색소폰 마니아들 사이에서 아이돌을 꼽자면 단연 강기만(姜其滿·40)씨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강기만씨는 알려진 명성에 비해 늦깎이 데뷔를 한 음악가다. 애초 직업은 군인이었다.
“원래는 군에 있었죠. 2013년 대위로 제대를 했습니다. 색소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부대 근처에 학원이 있어서였어요. 늦게 데뷔를 했지만,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완성이 된 이후 음악에 접근했기 때문에 어릴 때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친구들에 비해 해석력에 차이가 있죠.”
만학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2010년 1집 를 발표했다. 그리고 4집까지 연이어 앨범을 세상에 내놨다. 학습서 을 비롯해 책도 4권이나 집필했다. 호주 현지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호주기독교대학(Australia Christian College)에서 실용음악과 학과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딴 색소폰도 출시됐다.
연주가로서의 활동만큼이나 강기만씨가 잘 알려진 것은 그의 SNS 동호회 ‘색소폰 랜드’를 통해서이다. 네이버 밴드에서 규모가 큰 색소폰 모임 중 하나로 전국에서 회원만 4600명에 달한다. 별도의 여행이나 골프 동호회는 물론 지역별, 종교별 모임까지 있을 정도다. 6월25일에는 전국모임이 속리산에서 개최될 예정인데, 참석 예정인원만 250명 정도 된단다.
“회원들의 색소폰에 대한 사랑은 대단합니다. 대부분 50대 이상의 시니어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들어와 보시면 아시겠지만, 매일같이 회원들의 연주영상이나 게시물이 엄청나게 올라옵니다. 다들 전국에서 열정적으로 연습하고 있죠.”
그의 추산으로 전국의 색소폰 동호인 숫자는 30만~40만명. 악기가 팔린 것만 100만대 정도 된다고 어림잡아 계산한다. 동호인들을 위한 각종 경연대회도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는데, 평균적으로 100팀 정도가 출전한다고 한다. 강기만씨는 이런 대회의 단골 심사위원이다.
그의 특별한 활동 이력 중에는 라디오 DJ가 있다. CTS 기독교 방송 라디오에서 매주 월요일 1시에 를 진행한다. 색소폰이 주제가 되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것은 처음일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가 이런 활동에 매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색소폰 연주가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는 일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음지에서 연주를 하다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팬들의 사랑을 통해 제가 연주 이외의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만큼, 후배들도 그 길을 갈 수 있게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후배들의 비중이 큰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시니어들에게 색소폰이 사랑받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강기만씨는 재미있는 답을 내놓는다.
“아마 외로움이 아닐까 싶어요. 중년 이후에 찾아오는 외로움을 음악으로 해소하려는 시니어들이 많은 것 같아요. 또 색소폰 자체와 연주하는 모습에서 풍기는 멋진 모습이 주목받게 해 주니까요. 색소폰이 갖는 특유의 음색도 시니어들에게 어필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음악을 시작하려는 시니어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색소폰을 시작하려면 먼저 좋은 스승을 찾아, 충분한 연습을 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남의 연주를 많이 듣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악기에 대한 얘기도 꺼내놓았다.
“색소폰을 시작하는 시니어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 비싼 악기로 부족한 음악적 소양을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있죠. 하지만 비싼 장비를 갖는다고 실력이 나아지진 않습니다. 연습만이 살 길이죠. 두 번째 함정은 반주기에 너무 의존한다는 것이에요. 적당한 레슨 없이 반주기만 틀어놓고 연습하는 것은 음악을 예술이 아닌 게임으로 변색시키는 것이죠. 타이밍에 맞춰 음계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리듬에 운율과 감정을 실을 수 있어야 진정한 연주가 됩니다. 연륜과 열정이 묻어나올 수 있는 연주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히 식스(He 6). 1960~1970년대 미8군 무대와 이태원·명동 일대 음악 살롱을 격렬한 록 음악으로 장악하던 여섯 명의 청년(권용남, 김용중, 김홍탁, 유상윤, 이영덕, 조용남)이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거울과 같았던 그들은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세대의 거울 앞에 섰다. 중·장년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고, 낭만을 추억하는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파파스(PAPAS)’ 밴드다. 그 이름처럼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음악만 있다면 언제나 20대로 돌아간다는 그들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히 식스 원년 멤버였던 조용남(曹龍男·69), 유상윤(兪尙潤·68), 김용중(金用中·68)을 주축으로 조용필 밴드 ‘위대한 탄생’의 이건태(李建泰·63), 변성용(卞成鏞·63), 와이키키브라더스의 리더 최훈(崔薰·59)이 합세한 파파스 밴드. (다른 히 식스 멤버들은 건강이 좋지 않거나 해외에 거주해 함께하지 못했다고) 히 식스 2기로 함께 활동했던 고(故) 최헌(1948~2012)을 추모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 밴드 결성의 계기가 됐다.
“(조용남)보컬이었던 최헌씨가 작고한 후, ‘2013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았어요. 고인이 되어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 수 없으니 같은 팀이던 우리가 그를 위해 연주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렇게 잠시 모여 공연을 했었는데, 김용중씨가 못내 아쉬웠는지 ‘우리 다시 뭉쳐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 친구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정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뜻을 모았죠.”
당시 간암을 앓고 있던 김용중씨는 자신을 가장 활력 넘치게 했던 젊은 날의 그 음악이 간절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음악으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았다.
“(김용중)다 같이 모여 연습하는 것은 일주일에 하루뿐이지만, 그 하루를 위해 6일 동안 열심히 준비해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으니 참 행복하고 재밌어요.”
파파스 음악, 중장년 마음의 ‘사이다’
보컬그룹사운드라는 것을 강점으로 내세운 그들은 각자의 포지션(베이스-조용남, 색소폰·건반-유상윤, 리듬기타-김용중, 건반-변성용, 드럼-이건태, 리드기타-최훈)과 더불어 모두 보컬을 겸하고 있다. 그들이 주로 연주하고 부르는 음악은 1970년대를 풍미하던 올드 팝과 로큰롤이다. 젊은 시절 손끝이 닳도록 기타를 치고, 목청이 나갈 정도로 불렀던 노래들이다. 부른다기보다는 부르짖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당시 나온 기사들만 보아도 그들의 모습을 ‘폭발하는 젊음의 절규’, ‘화려한 조명 아래 정글에 가까운 노래’ 등이라 표현했으니 말이다.
파파스 밴드의 맏형인 조용남씨는 히 식스 시절 한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의 음악인 우리의 울부짖음을 통해 위안을 얻는 거죠. 청량음료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의 참 마음을 (어른들이) 알아달라고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언어 중에 ‘사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이다(탄산음료)처럼 시원하게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을 표현할 때 쓰는 신조어다. 그 시절에 그들의 음악이 바로 ‘사이다’ 같은 존재였던 것. 위축되고 권태에 짓눌린 젊은 세대의 마음을 톡톡 쏘는 음악으로 시원하게 만들어준 그들이다. 그리고 현재, 그들이 그때의 곡들을 다시 연주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유상윤)젊은 사람들이 요즘 중·장년은 트로트나 뽕짝 같은 것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당시 우리에겐 그룹사운드의 음악이 가장 세련되고 인기 있었죠. 밴드 간 경쟁도 대단했어요. 그 치열하던 시절에 심취한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꼭 20대로 돌아간 것 같아요. 패기와 열정으로 함께한 친구들도 같이 있으니 철없던 시절 추억들도 새록새록 떠오르고요.”
뭉클한 옛 기억에 잠기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파파스의 음악을 듣는 관객 역시 혈기왕성했던 시절의 추억 한 자락을 곱씹어 본다.
“(최훈)얼마 전에 우리 공연을 보고 간 한 관객이 자기 블로그에 ‘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말에 울컥했다’고 썼더라고요. 젊은 친구들은 경험하기 어려운 오랜 팬과의 음악적 교감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죠. 우리의 음악을 통해 그런 짙은 감정을 공유할 때가 참 뿌듯하고 흐뭇해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순간의 감동과 즐거움일 수도 있지만, 파파스 세대에게 음악이란 과거의 리듬을 되살아나게 하는 촉매제와도 같다. 조용남씨는 “음악이 그래서 좋은 거잖아. 내가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음악이 나오면 그 시절로 확 돌아가는 거야!”라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의 말에 “맞아! 맞아!”라며 맞장구치는 파파스 멤버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간직하고 있을 뜨거운 추억의 온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배려’로 다져지는 파파스 음악
그룹 ‘와이키키브라더스’와 ‘믿음소망사랑’의 핵심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최훈. 사실 그도 웬만한 공연에 나서면 대선배 대우를 받지만 파파스에서는 귀염둥이 막내다.
“(최훈)히 식스의 팬이었는데 그들과 함께 연주하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 영광스럽고 소중해요. 형님들의 완벽한 소리를 들을 때면 지금도 전율이 느껴지곤 하죠. 다른 데서는 저도 긴장을 안 하는데 선배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늘 신경 쓰고 풀어지지 않으려 해요. 그러면서 음악에 더 집중하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어 좋더라고요.”
그만큼 록 밴드 사이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그들이지만, 원로(元老) 대우는 사양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유상윤)음악 하는 그 순간만큼은 스무 살이라니까. 나는 젊고 싱싱한 기분으로 연주하는데 극진한 원로 대접을 받으면 어쩐지 팍 늙어버린 기분이 들잖아요. 무대에 올랐을 때의 마음가짐은 몇십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걸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음악과 함께해 온 그들에게 무대는 편안한 놀이터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과 설렘으로 여전히 손에 땀이 난다.
“(이건태)연주하며 표현하는 퍼포먼스나 스킬은 능숙해졌을지 모르지만, 무대에 임하는 자세는 거의 변함이 없어요. 열심히 애정을 가지고 준비한 음악을 관객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늘 떨리고 신중하죠. 경력에 상관없이 청중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오히려 명성 때문에 책임감과 부담이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 더 신경 쓰이고 가슴이 뛰죠.”
그런 그들이 오랜 밴드 생활을 하며 터득한 삶의 지혜는 ‘배려’와 ‘양보’다. 밴드 음악은 무엇보다 팀워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파파스는 리더를 따로 두지 않았다. 모두 각 분야의 리더인 만큼 솔선수범하되,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다.
“(이건태)혼자 너무 튀려고 하거나 자기만 잘하려고 하면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없어요. 젊은 시절에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죠. 연습하다가 치고받고, 그러다 팀이 깨지는 경우도 많았어요. 지금 파파스 멤버들은 그 세월을 지나왔기 때문에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요. 밴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그게 옳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러다 보니 공연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세련되고 성숙한 음악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 동안 변성용씨는 유독 말이 없었다. 하지만 틈틈이 멤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호응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그들이 말하는 팀워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팀 내 건반을 맡아 부드러운 멜로디로 멤버들의 개성을 살려주고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여…
그들의 무대는 ‘Can’t take my eyes off you’, ‘Boxer’, ‘Hotel California’ 등 팝을 비롯해 ‘초원의 빛’, ‘물새의 노래’ 등 히 식스 시절의 음악을 주요 레퍼토리로 구성한다. 대부분 30~40년 전 노래이지만, 가장 최근 만들어진 ‘사랑은 무슨 사랑’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했다. 이 곡은 1997년 조용남씨가 속해 있던 ‘2040 밴드’의 멤버인 김기표가 작곡했다. 20년 가까이 된 노래이지만, 당시 이미 중년이었던 그들의 마음을 담아 만든 곡이다. 가사는 이러하다.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음악 속에 묻혀 산 나날/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여/ 그날의 꿈은 어디에/ 내 열정은 어디에/ 뒤돌아보면/ 못 견디게 그리워/ 가거라 아주 가거라/ 사랑은 무슨 사랑/ 내 나이 몇이더냐/ 이제부터인 것을…’
전반부는 담담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열정을 토해내는 듯한 보컬이 인상적인 곡이다. 특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인다는 노랫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조금은 씁쓸하게도 느껴지는 가사이지만, 그들은 “그거야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동고동락한 지금까지의 삶이 살아갈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자 가치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파파스 멤버들이다.
나이가 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대 앞에서는 늘 새로 태어나기 때문. 타이틀곡의 마지막 구절을 힘 모아 불러보는 그들이다.
“이제부터인 것을!”
최근 우리나라에 상영된 영화 ‘인턴’은 40여 년 사회생활에서 은퇴하고 중년을 넘어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한 70대 남자 벤(로버트 드니로 분)과 쇼핑몰을 창업하고 빠른 기간 내에 열정적으로 회사를 성장시켜 궤도에 올려놓은 여성 CEO 줄스(앤 해서웨이 분)가 서로 소통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임에도 놀랍게도 최근 우리 사회의 세 가지 화두라 할 수 있는 일과 가정(육아)의 사이에 놓인 워킹맘의 고충, 일하고 싶어 하는 중ㆍ장년의 경제활동 문제. 그리고 이들 청년과 장년의 소통에 관한 내용을 잔잔하게 끌어내고 있다.
노년의 벤은 부인과 사별해 혼자 살고 있지만 혼자서도 완벽함에 가깝게 집을 꾸미고, 해외여행을 다니며 취미생활을 하고, 적당한 운동ㆍ봉사까지 하는 등 어찌 보면 굳이 일이 필요 없을 것 같은 부러운 시니어다. 그런데도 그가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며 설레는 모습으로 출근하는 것은 돈을 넘어서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임을 느끼기 위함이다. 꼭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행복한 노년을 위해 그 어떤 것보다 필요한 것이 ‘일’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70세가 넘은 나이에 인턴 생활을 시작한 벤은 40년 사회생활의 노하우를 살려서 회사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거나, 나이만큼 풍부한 경험을 살려 멋진 아이디어를 내지도 않는다. 자신을 부담스러워 하며 때론 귀찮아하기까지 하며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성급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주 서서히 따뜻하게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그동안의 사회경력에 비하면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사소한 일도 즐겁게 성심껏 해내면서 차츰 그들만의 젊은 세상에 든든한 동료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간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다 그동안 그토록 사랑했던 일을 포기하려는 줄스에게도 ‘인생이란’ 따위의 거창한 충고를 한다거나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최고야” “너는 잘해왔고 너만큼 그 일을 가장 잘할 사람은 없어”라고 자부심을 심어 줘 스스로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도와줬다.
여기서 한국 시니어들이 청년과의 소통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 청년들이 ‘꼰데’ 운운하며 냉소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는 행동이나 ‘내가 네 나이 때는 말이야’, ‘요즘 젊은 애들은’ 따위의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시니어도 이 영화의 주인공 벤처럼 울고 있는 청년들에 어설프게 충고하기보다는 ‘손수건은 나를 위해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빌려주기 위한 것이다’라며 손수건을 건네주는 따뜻한 시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 포기가 돋아나오고…’ 길거리 음반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다. 중장년이라면 금세 알지만 10~30대 젊은 층은 거의 모르는 노래다. 1970년대 활동했던 정미조(67)가 부른 ‘개여울’이다.
그 정미조가 37년 만에 대중 곁으로 돌아왔다. 정미조뿐만 아니다. 정미조처럼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다 활동을 중단했던 가수들이 최근 대중음악계에 속속 복귀하고 있다.
지난 3월 14일 서울 그랜드힐튼 호텔 로비에서 꽃다발을 든 50~70대 수십 명이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함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35년 만에 가요계에 복귀하는 포크 1세대 가수 박인희(71)였다.
“살아가면서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 못 했다. 잠깐 노래했었고 좋아하던 방송을 하다가 떠났는데 이렇게 많은 분이 기다려 주시고 만나 볼 기회를 주시다니 너무 감격스럽다. 내 음악을 잊지 못하는 팬들을 보고 앨범 하나 만들자는 꿈을 품게 됐다.”
1981년 미국에 이민 가면서 대중음악계를 떠났다가 35년 만에 대중 앞에 다시 나선 박인희는 한창 활동했을 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특유의 단아함은 잃지 않았다.
1970년대 혼성듀엣 ‘뚜아에무아’ 출신인 박인희는 1972년 솔로로 나선 뒤 모닥불’, ‘끝이 없는 길’, ‘그리운 사람끼리’, ‘세월이 가면’, ‘봄이 오는 길’ ‘방랑자’ 등 서정성이 강한 멜로디와 가사의 포크 음악을 직접 만들어 큰 사랑을 받은 1970년대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였다. 또한, 박인희는 맑고 청아한 음성으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등 시를 낭송한 음반으로도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박인희의 트레이드마크인 통기타와 긴 생머리, 그리고 나팔바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박인희는 4월 30일 서울 콘서트를 시작으로 일산, 수원 등 전국 투어에 나섰다. 박인희는 “가을께 새 앨범도 낼 계획이다. 최근 만든 곡이 60곡쯤 된다. 내게 맞는 곡은 내가 부르고 만든 곡에 맞는 가수가 있으면 줄 것이다. 가수 박인희보다 싱어송라이터로서 넓은 의미의 음악 속에 살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박인희…정미조…중장년팬들 가슴 설레
“가수로 복귀해 너무나 기분 좋습니다. 이젠 제 삶을 노래로 들려줄 때인 것 같아요.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뿐만 아니라 저를 새롭게 아는 분들에게도 가수 정미조가 어떤 가수인가를 보여주고 싶어요.”
인기 최정상이던 1979년 전격 은퇴를 한 뒤 37년 만에 대중 앞에 다시 선 정미조다. 차분하고 매력적인 보이스로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으로 1970년대 스타 가수로 명성을 날렸던 정미조가 지난 2월 전격 복귀해 수많은 대중의 시선을 끌었다. 정미조는 1979년 은퇴에서 2016년 복귀까지 기간을 제목으로 한 앨범 ‘37년’을 발표하며 가수로서 대중을 다시 만났다. ‘귀로’ ‘인생은 아름다워’ ‘7번 국도’ 등 재즈, 발라드, 탱고, 보사노바까지 다양한 장르의 세련된 신곡과 중장년층 뇌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등 자신의 히트곡을 함께 담은 새 앨범은 정미조를 기억하는 중장년 팬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인기 절정의 1979년 가요계를 전격적으로 은퇴하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정미조는 이후 교수 생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가요계를 떠난 지 35년이 흐른 2014년 만난 최백호가 앨범 발표를 권유하며 음반 제작자를 소개해 준 게 컴백의 계기가 됐다. 정미조는 수원대 조형학부 서양화과 교수로 정년퇴임(2015년)을 앞둬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노래에 대한 그리움이 터져 복귀 용기를 냈다고 했다. 음반 발매와 함께 가요계로 돌아온 정미조는 지난 4월 10일 콘서트를 갖는 등 가수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이에 앞서 33년간의 공백을 깨며 2014년 6월 새 앨범 ‘It’s Not Too Late’를 들고 복귀한 섹시 디바의 원조 김추자(65)는 무대를 통해 대중을 지속해서 만나고 있다.
1969년 신중현에 의해 발탁돼 가요계에 데뷔한 김추자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도발적 퍼포먼스,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거짓말이야’, ‘꽃잎’, ‘님은 먼 곳에’,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1970년대 한국 최고의 여가수로 우뚝 섰다. 1970년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에서 알 수 있듯 김추자의 인기는 엄청났다. 김추자의 복귀 이후 활동은 그녀를 기억하는 중장년 팬과 그의 노래를 거미, 조관우 등 수많은 후배 가수의 리메이크로 접한 신세대들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가며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
‘70가수’ 음악, 한국 대중음악 스펙트럼 확장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두 명의 남자 가수도 최근 복귀해 중장년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목회 활동을 하다 2014년 신곡 ‘걱정을 말아요’ 등이 담긴 데뷔 55주년 기념 앨범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복귀한 윤항기(73) 역시 4월 30일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나의 노래, 나의 인생’이라는 타이틀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윤항기는 1959년 대한민국 최초의 록밴드라 할 수 있는 키 보이스(Key Boys)의 멤버로 데뷔, 가수 생활 57년째를 맞았다. 1974년 솔로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이거야 정말’ ‘나는 행복합니다’ 등 숱한 히트곡을 내며 스타 가수로 맹활약했다.
윤항기는 “나는 57년 동안 음악을 떠나 생활한 적이 없다. 그룹과 솔로는 물론 성직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음악을 했다. 나같이 나이 많은 70대 가수들이 설 방송과 무대가 없어 안타까웠다. 나 같은 원로 가수들도 계속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에서는 70대 이상의 훌륭한 가수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존경도 받고 있다”며 여전한 현역 가수임을 강조했다. 윤항기는 가을부터 전국투어에 나설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신드롬을 일으키며 높은 반응 속에 1월 16일 막을 내린 tvN 드라마 에서 라미란이 불러 유명해진 ‘황홀한 고백’의 원곡 가수 윤수일(61)도 1970년대 가수 컴백 대열에 합류한 스타 가수 중 한 사람이다.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데뷔해 ‘아파트’ ‘황홀한 고백’ 등으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윤수일은 4월 24일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열린 ‘윤수일 밴드 40주년 콘서트’를 계기로 무대 공연과 방송활동을 재개했다.
윤수일은 “세월이 화살 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여전히 나는 가수다. 내 노래를 기본적으로 활동하면서 후배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35년 만에 복귀한 박인희를 비롯해 정미조, 김추자, 윤항기, 윤수일 등 1970년대 가수들이 다시 대중 앞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것은 최근 들어 신중년의 문화소비가 증가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장년층이 젊은 날을 함께했던 1970년대 가수들의 음반 구매와 공연 관람을 많이 하면서 신중년 가수들이 속속 대중음악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한, 같은 드라마나 KBS 같은 음악 예능프로그램에서 1970년대 음악을 소개하거나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대중문화 전반에 1970~1980년대 복고바람이 거세지면서 1970년대 가수에 관한 관심이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젊은 층에서도 높아진 것도 1970년대 가수 복귀 붐의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부에선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가수들의 복귀가 새로운 트렌드와 진화, 완성도 높은 음악, 탄탄한 가창력의 담보 없이 복고 바람에 기대어 단순한 추억팔이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한다.
하지만 1970년대 가수들의 복귀 바람은 대중음악계와 대중에 긍정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의 노래와 함께했던 중장년층에게 젊은 날의 추억을 선사할 수 있고 신세대에게는 1970년대 음악의 문양과 특성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요즘 신세대 가수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연륜과 정서가 담긴 60~70대 가수들의 음악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것도 긍정적인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