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식 소설가
귀촌이란 단순히 도시에서 시골로의 이주라는, 공간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꿈과 양상, 지향까지 덩달아 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익숙했던 거주지에서 전혀 다른 장소로 주저 없이 옮겨 간다는 점에서는, 귀촌이란 안주하지 않는 정신의 소산이기도 하다. 충북 괴산의 산골에 사는 박미향(58)·엄팔수(61) 부부는 귀촌으로 인생 제2막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7월의 성성한 초록 숲이 바람에 술렁거린다. 숲 사이 오솔길을 걸으니 나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향훈이 상큼하다. 저 멀리 칠칠하게 늘어선 산봉우리들은 비안개의 희롱에 취해 아련하다. 계곡에선 솰솰 냇물이 흐르며, 머잖은 곳엔 호수가 있다. 사방팔방으로 멋들어진 풍광이 펼쳐진다. 박미향 부부의 시골집은 이 모든 수려한 자연경관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계곡 쪽 둔덕에 자리 잡았다. 터를 잡은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구나.
박미향 부부가 산골에 둥지를 튼 건 13년 전의 일. 원래는 청주 시내 아파트에서 살았다. 도회의 아파트생활은 나름대로 안전하고 쾌적했기에 딱히 불만이랄 건 없었단다. 그러나 사람에겐 못 말릴 취향이라는 게 있는 법. 중년 나이에 접어들던 즈음, 박미향씨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글거리는 어떤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유심히 자신을 관찰한 끝에 소녀기 때 경험한 시골살이에 관한 향수가 강렬하게 들끓는 걸 알아차렸다. 산골에서 꽃과 나무, 새소리와 물소리를 벗 삼아 사는 게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귀촌이라는 사건의 단초였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올드 뉴스가 있지만, 그건 진부한 소식에 불과하다. 아내는 동쪽으로 냅다 뛰는데, 남편은 서쪽으로 쌔앵 돌아서기도 하는 게 부부관계이지 않던가. 귀촌의 경우에도, 부부가 의기투합할 확률은 매우 낮다. 대체로 남정네들이 먼저, 가자, 산골로! 그렇게 선창을 하며 나서는 수가 많지만, 웬걸, 마누라들은 십중팔구 단박에 반기를 들게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자들은 원래 남자보다 영리하고 영악한 고등생물이다. 그녀들은 모기에 뜯기고 뱀에 시달리기나 할 뿐, 자칫 따분하고 답답해질 가능성이 높은 시골살이라는 걸 입문할 일이 아님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부부가 귀촌에 의기투합
그러나 박미향 부부는 달랐다. 박미향이 먼저 말을 타고 귀촌의 깃발을 드높이 들었고, 수더분하고 너그러운 남편 엄팔수는 뒤따라오는 수레처럼 선선히 따랐다. 빈틈없는 의기투합과 일심동체의 힘으로 산골살림을 착수하였으니, 그 시발도 과정도 결산도 자못 오붓한 것이었다. 박미향의 얘기를 들어볼까?
“일단 귀촌하기로 합의를 본 뒤로는 일사천리로 추진했어요. 남편은 직업군인이었어요, 정년을 채우고 전역한 다음 귀촌을 하기로 했으나, 굳이 뜸들일 게 뭐 있겠나 싶어 서둘렀어요. 정년 5년을 남긴 시점에 후다닥 이 산골로 들어온 거예요.”
“남편에게 감사패라도 드리진 않았나요?(웃음)”
“어쩌면 매우 공정한 합의였죠. 결혼 뒤 긴 세월 동안 저는 오직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공들여 기르는 일에 전념하며 살았거든요. 그건 좀 억울한 거 아니에요?(웃음) 이제는 남편인 당신이 나를 외조해주소서, 제가 그런 요청을 했어요. 그러자 남편이 조용히 수긍해줬어요. 고맙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대목이죠.”
“부부가 튼튼한 유대감을 갖고 귀촌을 했을 경우에도, 막상 실제로 촌살림을 시작하고 나서는 예상치 못했던 애환을 겪는 걸 흔히 봅니다. 매우 단기간에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이혼을 하고 갈라서는 부부도 있더군요.”
“맞아요.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은 도시로 되돌아가는 사례를 저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저는요, 귀촌 초기부터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귀촌을 로망으로 삼은 분들이 많을 텐데,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과연 내가, 우리 부부가, 생소한 산골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정서가 맞는지,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그런 걸 우선적으로 점검해야 해요.”
“마을 원주민들과 융화하는 일도 쉽진 않았겠죠?”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외딴집이라서 주민과 교류할 일도 없었지만, 사실 초기엔 심한 소외감을 느꼈어요. 그러나 이젠 살갑게 사촌처럼 지냅니다. 도시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저도 처음엔 시골 인심이 사나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혀 사실과 달라요. 문제를 일으키는 건 늘 도시인들 쪽이죠.”
마음을 활짝 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살 수가 없다. 반면에, 즐겁게 살지 않고서는 마음을 탁 열어 헤칠 수 없다. 소소한 애환과 갈등이 왜 없었으랴마는, 박미향 부부는 산골 생활에 매우 적극적으로 적응했으며, 그럴 수 있었던 기반은 산촌살이의 즐거움이라는 명품을 신속하게 얻었다는 데에 있다.
자연의 제전에 늘 감동과 갈채를
그렇다면 귀촌의 무엇이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우선은 도시의 메마른 풍경과는 다른 산골의 자연 풍치가 주는 심미적 만족감과 정서적 위안이 이 부부를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숲, 황홀하게 피었다가 상처처럼 시드는 온갖 들꽃들이 전하는 철학의 표정, 사람이 곤충이나 풀꽃과 하등에 다를 게 없다는 벅찬 상념들, 조화롭게 저 알아서 흘러가는 생태계가 전하는 유유함…. 박미향은 자연이 펼치는 제전에 매번 갈채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무엇보다 막대한 즐거움은 박미향이 귀촌의 나날들을 통해 꽃차 전문가로 변신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산골에서 풀이나 뽑고 살 수는 없었던 그녀는, 평소에 좋아하던 꽃들로 꽃차를 만드는 취미생활을 일삼아 거듭했다. 그러다가 노하우가 쌓이고, 이름이 알려지고, ‘꽃차연구소’라는 것 까지를 차리게 되었다. 아마추어적 취미를 밀어붙여 프로의 대열에 올라선 것. 요즘의 그녀는 꽃차 강의를 다니느라 부산하다.
“아이들 키우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 알았는데, 이제 저는 더 진정한 행복을 찾았어요. 산과 들에 가득한 들꽃들로 꽃차를 만들어 도시의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취미생활이, 꽃차 전문가로 성장할 계기가 될 줄은 저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근래에 꽃차 붐이 분 것도 행운이었겠어요?”
“맞아요. 인생이란 정말 오묘한 것이에요. 제가 원래 꽃을 좋아해서 청주에 살 때에도 미장원이나 옷가게를 가기보다는 틈나면 꽃집을 드나들었어요. 그런데 귀촌을 계기로 꽃차 전문가로 거듭 태어난 셈이에요.”
“그걸 제2의 인생이라 하겠죠?”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그저 내가 좋아서 해온 일이었을 뿐인데, 이젠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거나 멀리 외지에서 강의 요청도 많아요. 물론 수입도 쏠쏠합니다. 남편의 연금보다는 많으려나?(웃음) 요즘은 세상살이가 참 재미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산다는 것, 그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꽃차의 매력은 뭐라 생각하시는지?”
“우선 시각적으로 아주 예뻐요. 덖어진 꽃차가, 찻잔 속 뜨거운 물에서 풀어지며, 다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걸 바라보면서 향과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 그게 사람들을 매료하는 거 같아요.”
산골에서 별다른 일이 없는 채로 한가하게 노는 것도 행복이자 도락이다. 텃밭 농사건 약초 채집이건, 소규모로나마 몸을 쓰는 일을 찾아내 귀촌생활의 생기를 불러 넣는 것도 현명하다. 또는, 내가 좋아하고 원했던 일을 드디어 찾아내 몸과 정신을 온전히 쏟을 수 있다면 그건 최상의 복락이겠지. 매우 신중하거나 내향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여겨지는 박미향의 안면에 정착한 미소를 보노라면, 귀촌을 통한 자기 변신과, 그에 따른 만족의 크기가 자못 오롯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면민들과 함께 밴드를 만든 남편
귀촌 직후 한동안, 박미향의 도시 친구들은 후미진 산골에 박혀 사는 박미향을 걱정하고 염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산골의 자연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우정, 또는 일을 찾아 투신하는 열정은 고독하기 십상인 인생을 보완하는 질료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물론, 친구들의 태도는 이제 싹 바뀌었다. 오히려 박미향을 선망한다는 게 아닌가.
“친구들은 처음엔, 미향이가 산골에서 얼마나 견디겠는가 하며, 너 언제 나올 거니? 산골에 살아보니 무섭고 외롭지? 그렇게들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들이 쑥 들어갔어요.(웃음) 오히려 저를 부러워해요.”
“시골 생활의 단순한 패턴은 자칫 귀차니즘을 불러올 수도 있을 거예요. 부부가 날마다 24시간 같이 붙어산다는 게 때로 지겹진 않나요?(웃음)”
“왜 안 지겹겠어요?(웃음) 때로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해요. 그럴 때면 제가 묵언수행이나 해야지, 하고선 아예 입을 봉합니다. 그게 제가 자제하는 방식이며 최선책에요. 덕분에 저희 부부는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질 못했어요. 참. 남편은요, 드럼을 쳐서 스트레스를 신나게 날려 버립니다. 면민 12명과 어울려 밴드도 만들었는데, 경로잔치 같은 곳에 위문공연을 다니곤 해요.”
“귀촌을 원하는 시니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팁을 주신다면?”
“귀촌은 실패할 확률도 많다는 걸 아셔야 해요. 현실은 녹록지않으니까.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해요. 요즘은 ‘귀촌교육’을 행하는 기관이 많아요. 미리 수강을 해두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본인의 성향이 산골과 조화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점, 이웃 원주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해요. 그쯤이면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누릴 수 있을 거예요.”
공자나 맹자를 길잡이로 삼은 인생도 근사할 수 있지만, ‘웃자’나 ‘놀자’와 동행하는 삶은 한결 경쾌하고 유쾌하다. 박미향은 귀촌을 계기로 매우 만족스러운 인생을 누린다. 꽃차를 통해 평온하게 웃을 수 있는 삶을, 안락하게 노는 일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를 쾌거라 일컬어도 무리가 없으리라. 인생의 쓸쓸한 황혼녘에, 오히려 환하게 생동하며 밝아오는 아침을 다시 맞이한 셈이니까.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이 아이는 물을 많이 먹어요.” “저 아이는 추위에도 잘 자라죠.” 애정 어린 말투로 야생화들을 ‘아이’라고 부르는 백경숙(白慶淑·63) 백경야생화갤러리 대표. 그녀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갑작스러운 병마로 교단을 떠나야 했지만, 야생화 아이들과 싱그러운 ‘인생 2교시’를 맞이하고 있다는 그녀의 정원을 찾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교사 시절, 시험 감독을 위해 교실에 들어선 백 대표는 이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화장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방광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통증과 빈뇨(頻尿)가 점점 심해졌고, 결국 병원을 찾은 그녀는 ‘발작성 방광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명하다는 비뇨기과를 수소문해 가보고, 좋은 치료법이라면 뭐든 해보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별수 없이 퇴직을 결심한 그녀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눈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몸이 아프고 집에 있으면 정말 울음밖에 안 나와요.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시나 하늘이 원망스러웠죠. 병에 좋다는 건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는데 그래도 안 낫더라고요. 암 같은 병도 아니라니까 이런저런 치료를 해가며 집에서 지냈죠.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게 참 더디고 힘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백 대표는 “꽃구경 가자”는 동생의 권유로 양재동 꽃시장 구경에 나섰다. 그때, 순백의 청초한 자태를 뽐내는 꽃 한 송이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말발도리’라는 야생화였다. 말발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당장 꽃을 사려 했지만 꽃가게 주인은 “그 꽃은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는 백 대표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꺼냈다.
“가게 주인이 꽃을 파는 대신 야생화 강사를 한 분 소개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야생화를 배운다는 건 생소했죠. 시민녹화교실이나 분재 수업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야생화를 배운 건 그때부터였어요. 점점 집에 화분이 늘어났고, 제 삶도 활기를 더하게 됐죠.”
몸 상태가 몹시 안 좋았을 때는 패드를 하고 다닐 정도로 잦은 고통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야생화와 함께할수록 베란다에 화분이 가득해졌고 백 대표의 일상에도 한층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갑갑하고 지루한 하루하루 속에서 고통으로 눈물짓던 그녀가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머금게 된 것. 그러나 그런 중에도 고민은 생겨났다.
“꽃에 집중하다 보니 화장실도 차츰 덜 가게 됐고, 화분에 물을 주고 다듬는 등의 활동이 소근육 운동이 돼 몸도 건강해졌어요. 온갖 치료법을 동원해도 낫지 않던, 그야말로 난치병이었는데 말이죠. 모두 야생화 덕분이에요. 그런 야생화가 많아져서 좋았지만,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기엔 공간의 한계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그 고마운 아이들을 처분할 수도 없었죠. 야생화를 위해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결심했어요.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죠.”
이사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즈음 화분 수는 200여 개에 이르렀다. 백 대표는 동생과 함께 전원주택이 있는 지역을 둘러봤고, 고심 끝에 현재 백경야생화갤러리가 있는 서원마을(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에 정착했다.
“동생 도움이 컸어요. 아파트에서 살다가 전원주택으로 옮기기 힘들다고들 하잖아요. 동생이 ‘언니 우리 함께 살며 의지하면 어떨까?’라고 제안했죠. 그 말에 힘입어 식구들을 설득해 두 가족이 편안하게 지내면서도 야생화 갤러리를 꾸밀 수 있는 ‘모던한 전원주택’을 콘셉트로 설계했어요. 함께 살다 보니 어려움을 나눌 수 있게 됐고, 경제적으로도 더 여유가 생겼죠. 무엇보다 야생화를 자유롭게 키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요.”
‘서로가 원하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서원마을에 온 지도 어언 7년. 화분은 점점 늘어나 이제 600여 개에 달한다. 보살펴야 할 꽃이 많아지면서 백 대표의 손길은 더 분주해졌다. 야외 정원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피부도 건강한 빛으로 그을려져 갔다. 백 대표는 이 마을에 오고 자신의 건강이 95% 정도는 회복됐다고 자부한다. 몸에 활력이 생길수록 야생화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갤러리를 찾아온 분이 ‘원예치료사’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죠. 처음 그 단어를 듣고는 ‘아, 꽃도 아플 수 있으니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식물을 이용해 사람과 소통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거더라고요. 괜찮겠다는 생각에 찾아봤더니 건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커리큘럼이 있었어요. 그 길로 등록하고 논문 쓰고 실습도 다니며 원예치료사 자격을 취득했죠.”
전문가가 되고 나니 강사 자격으로 야생화갤러리, 유치원, 주간노인복지요양원 등에서 야생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20년 넘게 교사생활을 했던 덕분에 수강생을 가르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이들이기에 수업 분위기는 늘 화기애애했다.
“꽃을 배우러 오는 수강생 얼굴을 보면 찡그리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게 꽃이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죠. 더군다나 자기가 필요해서 배우러 오는 분들이기 때문에 적극적이라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지난 2년간은 외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을 오가느라 야생화 교실이 뜸했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행복하다는 백 대표다. 특히 자신과 같은 중년 여성들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여자들은 정말 갈 데가 없어요. 그런 분들이 야생화갤러리에 와서 꽃도 보고 수다 떨고 하는데 저는 그냥 오라고 안 해요. 기왕 오는 거 옷도 아름답게 입고 예쁜 앞치마도 하나 가져오고 기분 좋게 찾아오라 이야기하죠. 여기 오면 바람도 선들선들 불고 우리끼리 소통하면서 꽃과 함께 예쁘게 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공간에서 그런 즐거움을 나누며 지내고 싶어요.”
최근 우리나라에 상영된 영화 ‘인턴’은 40여 년 사회생활에서 은퇴하고 중년을 넘어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한 70대 남자 벤(로버트 드니로 분)과 쇼핑몰을 창업하고 빠른 기간 내에 열정적으로 회사를 성장시켜 궤도에 올려놓은 여성 CEO 줄스(앤 해서웨이 분)가 서로 소통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임에도 놀랍게도 최근 우리 사회의 세 가지 화두라 할 수 있는 일과 가정(육아)의 사이에 놓인 워킹맘의 고충, 일하고 싶어 하는 중ㆍ장년의 경제활동 문제. 그리고 이들 청년과 장년의 소통에 관한 내용을 잔잔하게 끌어내고 있다.
노년의 벤은 부인과 사별해 혼자 살고 있지만 혼자서도 완벽함에 가깝게 집을 꾸미고, 해외여행을 다니며 취미생활을 하고, 적당한 운동ㆍ봉사까지 하는 등 어찌 보면 굳이 일이 필요 없을 것 같은 부러운 시니어다. 그런데도 그가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며 설레는 모습으로 출근하는 것은 돈을 넘어서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임을 느끼기 위함이다. 꼭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행복한 노년을 위해 그 어떤 것보다 필요한 것이 ‘일’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70세가 넘은 나이에 인턴 생활을 시작한 벤은 40년 사회생활의 노하우를 살려서 회사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거나, 나이만큼 풍부한 경험을 살려 멋진 아이디어를 내지도 않는다. 자신을 부담스러워 하며 때론 귀찮아하기까지 하며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성급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주 서서히 따뜻하게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그동안의 사회경력에 비하면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사소한 일도 즐겁게 성심껏 해내면서 차츰 그들만의 젊은 세상에 든든한 동료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간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다 그동안 그토록 사랑했던 일을 포기하려는 줄스에게도 ‘인생이란’ 따위의 거창한 충고를 한다거나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최고야” “너는 잘해왔고 너만큼 그 일을 가장 잘할 사람은 없어”라고 자부심을 심어 줘 스스로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도와줬다.
여기서 한국 시니어들이 청년과의 소통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 청년들이 ‘꼰데’ 운운하며 냉소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는 행동이나 ‘내가 네 나이 때는 말이야’, ‘요즘 젊은 애들은’ 따위의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시니어도 이 영화의 주인공 벤처럼 울고 있는 청년들에 어설프게 충고하기보다는 ‘손수건은 나를 위해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빌려주기 위한 것이다’라며 손수건을 건네주는 따뜻한 시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스마트폰이 대세인 세상, 구태여 ‘사진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구식이라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술적인 이야기를 모두 차치하더라도 나들이를 떠나면서 어깨 한 쪽에 혹은 목걸이처럼 카메라가 한 대 걸려 있지 않다면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지는 것 아닐까? 나들이가 잦아지는 계절이 찾아온 지금 배우자를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멋진 사진 한 장을 위한 준비를 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 보면 간혹 “요즘 세상에 사진을 누가 카메라로 찍느냐?”며 핀잔을 듣기도 한다. 힘들지만 묵묵히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이에게는 야유나 조롱 섞인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틀리지 않은 이야기다. 이미 대부분의 스마트폰에서는 값비싼 카메라가 제공하는 대부분의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카메라 꼭 있어야 하나?
그럼에도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DSLR(일안반사식 디지털카메라)이나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미러리스(광학 뷰 파인더가 없는 렌즈교환식 디지털카메라)가 스마트폰 카메라에 비해 갖는 장점은 물리적인 크기에 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스마트폰은 물리적인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가장 많은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광학적인 표현의 문제다. DSLR이나 미러리스는 렌즈 교환이 가능해, 소위 이야기하는 ‘흐려지는 사진’ 즉, 피사계 심도가 얕아 선명하게 보이는 범위가 적은 사진 등의 표현이 가능하다. 반면에 스마트폰 카메라는 거의 모든 기종이 광학 줌이 아닌 디지털 줌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인 사용 환경에선 그 차이점을 느끼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인 화질의 차이도 있다. 최근 출시되는 스마트폰은 대부분 1000만 화소 이상의 고해상도의 센서를 장착하고 있지만, 물리적으로 좁은 센서 안에 많은 화소를 몰아넣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단점이 있다. 전문가들은 화소가 같더라도 스마트폰 카메라와 일반 카메라는 화질의 수준차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어떤 카메라를 선택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사진을 취미로 갖거나 다양한 장면의 사진을 촬영하고 싶다면 렌즈가 교환 가능한 기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전문가들은 많게는 10가지 이상의 렌즈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3~4가지 렌즈만 있어도 거의 모든 사진 촬영은 가능하다.
최근 카메라를 선택하는 또 하나의 기준은 wifi(무선인터넷)나 스마트폰을 지원하는지 여부이다. SNS의 활용이 늘어나면서 야외에서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재빨리 페이스북이나 네이버 밴드, 카카오톡 등을 통해 공유하고자 하는 사용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wifi나 스마트폰을 지원하는 기종들은 야외에서 바로 업로드나 공유가 가능하다.
시니어들의 경우 눈여겨봐야 할 것 중 하나는 바로 ‘무게’다. 아무래도 체력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진기자들이 사용하는 전문가용 기종의 경우 본체만 1kg이 넘고, 렌즈 하나의 무게도 보통 800g이상이다. 카메라 본체와 렌즈 몇 개를 챙기면 자칫 여행이 행군으로 바뀔 위험에 빠진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온라인 등을 통해 적당한 기종 몇 가지를 고르고 나서, 매장 등을 방문에 직접 만져보고, 내 손에 잘 맞는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DSLR은 니콘이나 캐논, 미러리스는 올림푸스, 소니, 삼성 등이 최근 사용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있다.
카메라를 구매하지 않고 즐긴다?
최근에는 다른 방식으로 사진촬영을 즐기거나 카메라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른바 ‘렌털족(族)’의 등장이다.
사실 이 렌털족은 연예인들을 따라다니는 극성팬들이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연예인은 좋아하지만 경제적 여력이 없는 학생들이 카메라 장비 대여업체를 통해 고가의 망원렌즈와 카메라를 임차하기 시작하면서 렌털족의 시초가 됐다. 그러다 최근에는 카메라 사용 빈도가 낮은 직장인이나 다양한 장비를 사용해보고자 하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대여업체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현재 국내에 운영 중인 카메라 장비 대여업체는 약 20여 곳. 그 중 대부분이 서울에 몰려 있지만, 지방 주요 도시에도 한두 군데씩 성업 중이다.
대표적 대여업체 중 한 곳인 ‘PLAY SLR’의 김현기 팀장은 대여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촬영 갈 때 빈손으로 오시는 고객들도 꽤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리 카메라와 렌즈, 삼각대, 가방까지, 여기에 메모리카드 같은 소품까지 통으로 빌려 가시는 고객들이 적지 않습니다. 구매 자체를 부담으로 여기는 고객들도 많지만, 최근에는 구매 전 비교체험을 위해 빌려가는 경우도 많죠. 아무래도 대여 전문 업체들은 판매업자와 달리 장비에 대한 문의에 객관적으로 답변해 드릴 수 있어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디지털 카메라 어렵지 않을까?
시니어들의 디지털 카메라 사용을 가로막는 장벽 중 하나는 ‘디지털 장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다. 전문적인 촬영 기법은 고사하고, 사진을 찍고 나서 그 사진을 PC나 스마트폰으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촬영이나 공유가 상대적으로 편한 스마트폰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사용자들을 위해 각 브랜드는 사진학교나 강좌를 운영하고 있는데, 완전 초보에서부터 전문가를 위한 과정까지 그 교육내용도 다양하다.
니콘이나 캐논 등 주요 카메라 제작사들은 온라인, 오프라인 강의를 운영하고 있다. 홈페이지를 통해 가입절차나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들 제조사가 운영하는 사진학교는 사용하는 기종에 맞는 최적화된 내용을 소개하고 있어, 사진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들에게 유익하다. 이론적인 교육과 함께 야외촬영 수업도 참여할 수 있다.
올림푸스 한국 영상사업부의 윤은경 차장은 “사용자들을 위한 사후 서비스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각 제조사들의 교육지원 노력도 점차 강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올림푸스의 경우 지난해 시니어 사용자들을 위한 강좌를 별도로 운영한 바 있으며, 올해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운영할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진은 어떻게 즐기는 것이 좋을까?
최근 사진을 즐기는 추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이 개방적인 SNS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과 네이버 밴드나 카카오스토리와 같은 폐쇄적 SNS를 통해 끼리끼리 작품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특히 폐쇄적 SNS를 검색하면 중년들의 사진모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이 사람들과 소통하며 사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네이버 밴드의 한 모임에서 만난 조이례씨(53)는 “남편의 카메라 선물이 사진 취미의 계기가 됐어요. 인생 후반에 무언가 집중하고 공부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서 너무 좋습니다”라며, “힘든 갱년기 여성으로서 우울하지 않고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친구가 됐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또 정귀원씨(57)는 “지난해 명퇴하고 나서 생긴 여유 속에서 여행하며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계기를 사진이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계기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만나 인맥을 넓힐 수 있는 것도 사진의 장점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요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힐튼 헤드 섬(Hilton Head Island)이 은퇴자의 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골프 애호가라면 PGA투어 RBC 헤리티지대회가 매년 열리는 아름다운 하버타운 링크스코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힐튼 헤드 섬은 미국의 은퇴자들이 좋아할 요소를 거의 다 갖추고 있다.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온화한 기후는 한파에 시달리는 뉴욕, 보스턴 등 도회지의 은퇴자들에게는 큰 매력이다. 30도를 넘는 여름 더위가 9월까지 이어지기는 하지만 수온은 수상 스포츠에 최적이다. 저녁이면 선선해지니 휴식과 숙면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고즈넉한 대서양 해변과 하얀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된 마리나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항구의 전경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넓게 펼쳐진 바다, 하얀 모래와 맑고 깨끗한 습지 그리고 이끼로 뒤덮인 울창한 떡갈나무 숲은 대자연이 주는 은퇴기념 선물이며, 넉넉한 남부 인심은 은퇴자들에게 기를 불러 넣어주는 활력소다. 눈부신 햇살 아래 짭짤한 갯바람을 맞으며 160㎞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30여 개 골프 코스에서 라운딩을 하다보면 인생 후반기의 허무감은 어느새 충만감으로 바뀐다.
카약, 승마, 테니스, 낚시 등 갖가지 스포츠와 취미활동은 힐튼 헤드 섬의 주요 일과다. 19㎞에 걸쳐 펼쳐진 해안을 따라 무리지어 유영하는 돌고래를 유람선을 타고 관찰하며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붉은바다거북의 산란을 위해 해변의 조명을 모두 끌 때면 자연과의 일체감을 맛보게 된다. 저지대 늪지에서는 새우와 게를 쫓아다니는 푸른 왜가리와 큰 입을 딱 벌리고 햇볕을 쬐는 악어를 만나는 놀라움도 있다.
맨해튼(여의도의 30배)만한 넓이의 힐튼 헤드 섬에서는 4만여 주민이 오순도순 지내지만 해마다 250만 명의 외지인이 찾아와 한가하고 여유로운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쇼핑 환경도 맨해튼 수준이다.
특가 상품에서부터 디자이너 브랜드와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할 독특한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200여 개의 아웃렛과 상점, 그리고 6곳의 마리나 빌리지 상가는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의 눈길과 발길을 끌고 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자동차로 5시간, 사바나에서 45분(57㎞) 거리에 있는 힐튼 헤드 섬은 큰 다리로 내륙과 연결되어 있어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섬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이나 사바나국제공항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면 이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힐튼 헤드 섬은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따뜻한 기후와 야자열매, 풍부한 해산물을 즐기던 곳으로 1663년 영국의 윌리엄 힐튼 선장이 처음 이 섬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힐튼 헤드’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섬의 73%가 은퇴자를 위한 주택단지
힐튼 헤드 섬의 73%는 10개의 대단위 리조트형 주택단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 주택단지 가운데 상당수는 매입 자격을 55세 이상의 신중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 단지에는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실내외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테니스장, 연회장, 식당 등이 갖추어져 있고 호수와 숲, 골프 코스와 마리나가 인접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섬에 정착한 은퇴자들은 평균 6차례 이상 방문하여 생활환경을 체험한 후 주택을 매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웃과 격이 없이 지내는 이 섬의 분위기를 느끼고 썰물 때면 90m나 밀려나 숨겼던 민낯을 드러내는 갯벌을 산책하면서 돌고래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섬의 지난해 주택매매 가격은 단독주택의 경우 52만달러, 타운하우스와 아파트는 20만달러 수준. 침실과 화장실이 각 2개인 아파트는 20만~40만달러, 단독주택은 25만~45만달러, 그리고 침실과 화장실이 각 3개인 주택은 40만~70만달러를 호가한다. 바다 경치가 아주 좋은 주택은 150만달러를 훌쩍 넘고 700만달러를 호가하는 그림 같은 주택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6개월 정도만 빌려 살아볼 수 있는 아파트도 구하기 어렵지 않다. 스튜디오형은 월 평균 600달러, 침실 1개짜리는 800달러, 침실 2개짜리는 900달러 수준이다.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며칠만 빌릴 경우에도 임대료가 치솟는다. 침실 1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도 전망이 좋으면 1주에 1200~1800달러, 해변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면 1000~1200달러 정도다. 봄과 가을에는 20% 정도 할인되고 겨울에는 50%나 싸진다. 2억달러 넘게 투입해 새 단장을 한 리조트의 하루 방 값은 일반형 기준으로 130~340달러 수준이다.
주거비가 웬만한 휴양지나 은퇴자 생활지보다 비싸지만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 총지출은 맨해튼의 50%, 워싱턴이나 보스턴의 75% 수준을 넘지 않는다. 재산세가 다른 지역의 25% 수준인 데다 소득세, 소비세 등 각종 세율이 낮고 85세 이상의 주민에게는 더 낮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보험과 휘발유 값이 저렴한 것도 수월찮게 도움이 된다.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는 현역 시절 주택을 구입해 별장처럼 이용하다가 은퇴 후 눌러앉은 사람도 적지 않다. 세컨드 주택을 구입하면 세제 및 금융 혜택이 있는 데다 에어앤비를 비롯한 휴가용 주택 알선 사이트가 붐을 이루면서 목 좋은 곳의 별장은 재테크 수단이 되었다.
미국 남부 사람들이 테러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허리케인이다. 힐튼 헤드 섬 주민들은 1850년 이후 섬 주변 반경 80㎞ 이내로 81차례의 허리케인이 지나갔지만 큰 피해를 입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천혜의 지형 덕분인지 주민들의 후덕한 인심과 간절한 소망 덕분인지 알 수가 없다.
각양각색의 취미활동 그리고 평생교육도
힐튼 헤드 섬에서는 축제와 이벤트가 풍성하다. 해마다 열리는 다양한 뮤직 페스티벌, 해산물 축제, 고기잡이 경진대회, 카약과 보트 경주 등은 주민과 관광객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리다.
멋을 살린 음악 카페, 길거리 밴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이 늘어선 메이 강변에 각종 포장마차와 공예품 전시판매점까지 어우러지면서 남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16㎞ 떨어진 블러프턴의 소도심에서는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남북전쟁 때의 화재와 파괴를 견뎌낸 대농장주의 저택과 교회는 박물관과 관광안내소로 활용되고 있다.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와 옛 건물은 그림엽서로도 간직되고 있다.
은퇴자들의 취향은 제각각이다. 요트, 카약, 낚시 등에 빠져 있는 ‘해양스포츠파’, 생태관찰 보존과 식물 재배에 몰입한 ‘에코파’, 골프, 사이클, 테니스와 달리기 등을 주로 하는 ‘육상스포츠파’, 공예품 만들기, 독서, 해변 일광욕, 흔들의자 등을 즐기는 ‘정중동파’ 등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봉사활동과 평생교육은 이곳 은퇴 생활자들의 공통된 일과다. 해안사구와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에서부터 노약자 서비스, 도서관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자원봉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은 오셔평생교육원은 1600명의 은퇴 생활자들을 대상으로 400여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1년 회비 40달러에, 수업료는 과목당 15달러. 모두 다 합쳐 연간 95달러를 넘지 않게 책정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가르치고 관심 분야를 배운다. 학습을 하다가도 기분이 내키면 밖으로 나가 현장학습에 들어간다.
미국의 주요 언론과 관련 전문매체의 힐튼 헤드 섬 예찬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최고의 은퇴 생활지’, ‘인생을 바꿀 건강한 봄철 휴가지’, ‘하계 모임을 위한 남부 최고의 장소’, ‘2016년 북미지역 최고의 골프 휴가지’, ‘캐롤라이나 남부 최고의 사이클 친화지역’, ‘미국 남부 5대 하계 가족휴가지’, ‘세계 50대 테니스 휴양지’, ‘미국 최고의 섬’, ‘인터넷 검색이 가장 많은 섬’, ‘사우스캐롤라이나 최고의 해변’, ‘2015년 세계 최고의 여행목적지’ 등등. 이런 찬사 덕분에 이 지역 은퇴 생활자들의 만족감은 더 커지고 있다.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볼링그린공원과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돌진하는 황소 동상 바로 길 건너에 위치한 뉴욕시립대학교. 아침 10시 무렵이 되자 세련된 차림새의 신중년들이 삼삼오오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웅장한 대리석 건물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간다. 주변에 밀집해 있는 글로벌 금융기관의 고위직 인사들처럼 보이지만 평생교육원에 등교하는 학생이자 교수들이다. 배우, 심리학자, 엔지니어, 의사, 교수, 언론인, 관료, 금융전문가, 기업인, 음악가, 미술가 등 전문직업인으로 맹활약을 했던 은퇴자들이다. 틈틈이 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유로우면서도 열정적인 은퇴생활을 누리고 있는 신중년들이다.
스스로 가르치며 배우는 평생교육원 ‘퀘스트(Quest)’. 학교명처럼 진리 탐구를 갈망하는 신중년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배움터이자 아지트다. 취미활동과 문화 탐방 여행과 친밀한 교우관계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 커뮤니티 기능을 하고 있다. 안내서에 나열된 올해 봄 강좌가 얼른 봐도 30개를 넘었다. 고대 그리스, 마음과 뇌, 시 낭송, 클래식 록 앨범, 현대 오페라, 위대한 연극, 현대 단편소설 등 웬만한 대학 강좌보다 수준이 높지만 교수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교수’와 ‘학생’의 구분이 없고 모두 ‘회원’으로 통한다. 내로라하는 전문가 출신 회원들이 직접 강의를 하고 관심 있는 회원은 강의를 신청해 수강을 하는 자급자족 방식이다. 현역 때는 배우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부득이 접어야 했던 학업과 취미와 봉사활동으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많이 띈다. 2주에 한 번은 외부 특별 강사를 초빙하여 지적 탐구심을 더 높이곤 한다. 1년 3학기제로 운영되며 가끔 숙제는 있지만 시험이나 출석 점검은 없다. 한 과목만 수강하나 전 과목을 다 수강하나(물리적으로 불가능) 1년 회비는 500달러. 등록금은 물론 없다.
강좌 개설을 포함한 퀘스트 운영의 거의 모든 사항은 협의회와 분과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협의회는 회원들 중에서 선출된 임원 7명과 재정담당관 등 4명의 교직원으로 구성되고 2년 임기의 회원 대표가 회의를 주재한다. 산하 4개 위원회는 회원들로만 구성돼 강좌 개설, 교육자재 관리 및 섭외, 회원 관리, 각종 행사 기획 및 일정 조정 등을 나눠 담당하고 있다. 뉴욕시립대학은 장소와 행정적 도움만 줄 뿐이다.
오는 5월이면 개원 21돌을 맞는 퀘스트의 출범 내력을 알고 나면 이런 자율적인 운영 시스템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명성 있는 뉴욕의 은퇴자 교육기관이 은퇴자들의 생각과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입학 절차와 학사 관리를 매우 까다롭게 하면서 등록금까지 높이 책정하자 40명이 함께 탈퇴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이 1995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함께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차에 뉴욕시립대학과 뜻이 맞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배터리파크를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맨해튼 최고의 위치에 자리한 퀘스트는 자율적인 평생교육을 갈망했던 40명의 결단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산물이다.
새로운 이념으로 퀘스트의 설립을 기초한 40명 가운데 로버트 하트만 회장을 비롯한 10명은 지금도 퀘스트의 열렬 회원이자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창립 회원인 샌디와 앨 고든 부부는 매년 발간하는 종합 문예지 20주년 기념 특별판 기고문에서 “퀘스트와 함께한 지난 20년은 결코 지루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우리 은퇴자의 꿈은 따뜻한 햇볕을 쬐고 놀이와 내기나 하면서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이고 모험적인 사람들과 함께 지식을 넓혀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캐롤 아브람스, 스텔라 체이스, 베버리 프란쿠스, 에버린과 러셀 굿 부부, 조 나탄 등 다른 창립 회원들도 퀘스트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이 대단하다.
멤버십 위원회의 에바 샤트킨 위원장은 퀘스트를 찾는 방문인을 일일이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다. 설립 때의 초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샤트킨 위원장은 한국인 학생을 수양딸로 맞이해 함께 살며 교육시켰을 정도로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다. 수양딸은 훌륭히 성장해 지금은 뉴욕대학(NYU)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교직생활을 한 국제적인 영어 교육자인 샤트킨 위원장은 구순을 훨씬 넘겼는데도 거의 매일 배우고 봉사하고 있다. 구순을 넘긴 회원은 보통이고 백세를 넘긴 회원도 지하철로 등교하기도 해 배움이 회춘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무급으로 봉사하고 있는 마이클 웰르너 원장은 “퀘스트의 평생교육에 참여하고 싶은 은퇴(예정)자가 인터넷이나 전화로 방문신청을 하면 하루 일정으로 강의도 듣고 회원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도 하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웰르너 원장은 자택을 방문한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시설과 운영방식을 친절하고 상세히 안내했다.
회원들이 가장 신나는 시간은 함께 창작활동을 할 때다. 한때 에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유명배우인 도미니크 치아네스와 로이 클레어리 회원이 지도하는 연극 시간이면 모두 브로드웨이를 꿈꾸는 배우로 변신한다. 해마다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면 온 가족과 친지들이 관객으로 참석하면서 흥겨운 잔치판이 벌어지고 회원은 현실에서도 주인공이 된다. 연극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도나 루벤스 회원이 건강 악화로 정기 공연을 놓쳐 몹시 안타까워하자 집을 방문해 즉석 공연을 했던 일화는 어떤 연극보다 더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날씨가 나쁘지 않은 금요일이면 이스트강변 89번가의 콩츠마켓(Conte’s Market)에서 퀘스트 회원들이 연주하는 포크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문예지 발간은 소설가와 시인을 꿈꾸었던 회원들이 주도하고 있다.
퀘스트에서는 수학여행과 현장학습이 수시로 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익스플로러클럽 등 주변에 즐비한 미술관과 박물관은 언제 들러도 즐겁고 배울 게 많은 현장학습장이다. 나이아가라폭포, 재즈와 ‘욕망의 이름이란 전차’와 프렌치 쿼터의 도시 뉴올리언스와 미국 전통의 여름철 문화교육타운인 이리호 남단의 쇼토쿼(Chautauqua)는 단골 수학여행지다.
여행전문가인 캐롤린 맥과이어 회원은 5월로 다가온 런던 수학여행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8월 수학여행지를 어디로 할지 고심하고 있다. 다채로운 여름축제가 벌어지는 캐나다와 기네스맥주를 즐길 수 있는 아일랜드를 놓고 회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다. 물론 회원들이 좋다면 두 곳 모두 갈 수도 있다. 여름 내내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 회원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학창 시절처럼 수학여행을 고대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수학여행에는 가족도 참가할 수 있어 더 신나고 추억거리도 넘친다.
뉴욕시립대학교와 교육이념에서부터 학사와 재정 관리에 이르기까지 호흡이 척척 맞아 이제는 회원이 230명을 넘어섰다. 평생교육의 새 장을 열고 있다. 요즘 퀘스트에는 성공비결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해외 귀빈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평생교육이 국가의 주요 이슈로 부각되면서 묘책과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저 어울려 배우고 교류하는 커뮤니티일 뿐인데 해외에서까지 관심이 쏟아지니 회원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신이 난다.
지난해 9월에는 태국 총리 부인인 나라폰 찬오차 교수를 단장으로 한 태국 사절단이 방문했고 은퇴를 앞둔 캐나다의 리차드 솔터 변호사는 4년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평생교육에서도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다.
‘놀면서 배우는 것(Play and Learn)’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만 적용되는 교육이념이 아니다. 배움의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고 호기심은 나이가 들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퀘스트에서 깨닫게 된다.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고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되다(Liberty without learning is always in peril and learning without liberty is always in vain)”라는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교훈을 퀘스트가 실천에 옮기고 있다.
김원곤(金元坤·63)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 교수는 독특한 이력들을 갖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 교수라는 것도 충분히 화제가 될 수 있는 이력이지만, 동시에 열정적인 미니어처 술병 수집가이며 영화광이기도 하다. 얼마나 그 취미를 파고들었는지 미니어처 취미는 ‘닥터 미니어처의 아는 만큼 맛있는 술’, 영화 취미는 ‘영화 속의 흉부외과’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또한 소위 말하는 ‘몸짱’으로도 유명하다. 환갑을 앞두고 1년 동안 몸 만들기에 매진한 그는 세미누드 사진집까지 펴낼 정도로 자신을 가꿨고, 중년을 위한 몸 만들기 책도 펴냈다. 쉬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는 그가 다음으로 시도한 영역은 4개 외국어다.
그는 50세의 나이에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4개 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4개 외국어능력시험의 고급 과정에 단 한 번에 합격했다. 이 정도면 사람이 좀 불공평하게, 그러니까 김 교수가 어떤 특출한 자질을 갖고 태어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김 교수는 그런 생각이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저는 제가 언어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어요. 우리 집에서는 그런 공부를 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영어 알파벳 선행학습 한 거하고 서양 사람 얼굴을 AFKN에서 본 게 제 어린 시절 외국어와 접촉했던 전부예요. 그러니까 대학 졸업 전에는 어학 관련해서는 접한 게 없습니다.”
더구나 김 교수는 콤플렉스까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사투리 발음에 대한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의욕적으로 한글 교육 정도는 내가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가 돼서 한글을 가르치고 받아쓰기 테스트를 했는데, 받아쓰기가 영 엉망인 거예요. 막 야단을 쳤죠. 그런데 아이가 ‘아빠가 발음하는 대로 썼다’ 하는 겁니다. 그 이후로는 뭐 아이에게 한글 교육 같은 거 안 했어요. 지금도 영어의 p 발음과 f 발음은 구분하기 힘들어요.(웃음)”
그가 50대가 넘어서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 것 자체가 굉장히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가 50세가 되었을 때 주5일제 제도가 시작되면서 전에 비해 여유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중을 생각해서 후회 없이 한 가지를 해보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영어 외의 제2외국어를 찾다 보니 가장 만만한 게 일본어였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인생에 후회가 없을 일을 한번 해보자
“운동이나 외국어, 다 어렵죠. 운동도 그렇고 외국어 공부도 그렇고 공통적인 특징은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해서 궤도에 올려놨다고 해도 잠깐 게을리하면 쭉 떨어진다는 거예요. 멈춘 상태로 그대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게 무서운 거죠. 학원에 다니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봐요.”
그는 특히 전업으로서, 혹은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닌 취미로서의 공부는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그건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걸 뜻하는 거예요. 올림픽을 목표로 하거나 대회가 있으면 그러한 구체적인 목표에 매진하면 되지만 취미 생활로 공부를 하면 목표가 있을 수 없죠. 그러니 평생 해야 한다는 건 어렵죠. 먹고살 일도 아니고. 열심히 하면 수입이 보장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얻을 수 있는 건 자기만족과 자기발전이란 건데, 그 외에는 사실 동기 부여가 없는 셈이죠. 그게 힘든 거죠.”
하긴 그렇다. 취미로서의 공부란, 아무도 옆에서 강요하거나 격려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 본인은 그냥 안 하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결코 그만두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다 좋은 거잖아요. 공부나 운동이나.”
외국어에서 문법과 단어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
김 교수가 자신의 외국어 정복기를 묶어 책으로 만든 ‘파란만장 중년의 4개 외국어 도전기’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문법과 단어를 뼈대와 근육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일상 회화의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는 근간의 외국어 공부 흐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우리 시절에는 해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외국인을 만날 기회도 이유도 없었죠. 그러니 오로지 가르치는 게 문법이었어요. 현실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는 게 사실이었죠. 그런데 시대가 바뀌니 말하는 게 중요하다, 해서 일상 대화가 강조됐습니다. 사실 말하는 건 중요하죠. 그런데 한국 사람끼리를 생각해 보세요. ‘밥 먹었니.’ ‘날씨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 일상 대화를 보면 늘 그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그렇게 단순히 얘기해도 일상생활에선 불편이 없죠. 그런데 같은 사람을 계속해서 만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만날 식당에만 가는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말이란 게 밥 먹고 날씨 좋다고 말하는 것뿐이라면 문제가 있죠. 심층적인 얘기도 좀 하고 정치 사회 현안에 대해 얘기도 하려면, 단어를 모르면 할 수 없어요.”
외국인이 우리 문화권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하려면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바탕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에게 공자에 대해 설명해 주려면 공자를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철학적 단어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문법이나 단어의 바탕이 좋은 사람은 외국어 능력 발전에 가속도가 붙지만 회화만 할 줄 아는 사람은 역으로 발전이 잘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자를 많이 안다고 중국어를 잘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일본어다. 그런데 시니어들 중에는 한자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하여 중국어도 일본어만큼 배우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한자를 많이 알고 있으면 중국어를 배우는 데 조금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중국어에서 특히 어려운 건 성조예요. 우리나라는 억양이 달라도 성조가 없으니까 다 알아듣는데, 중국은 성조가 없으면 아예 못 알아들어요. 그리고 어순이 우리와 완전히 다르죠.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쓰는 한자 대부분이 중국계 한자와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받아들인 현재 쓰고 있는 한자의 상당수는 일제 당시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식 한자다. 애초에 중국과 다를 수밖에 없는 데다, 중국은 따로 간체자라고 하는 새로운 한자 체계를 조직하여 쓰고 있다. 아무리 한자 지식이 많다고 해도 현재의 중국에서 통용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김 교수는 프랑스는 유럽 언어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배우기에 가장 어려운 말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발음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국어를 배우는 사람들 사이에선 중국어 성조가 더 어려우냐, 프랑스어의 발음이 더 어려우냐 하는 비교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사실 프랑스어의 문법은 크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영어로 자란 세대니까, 영어와 다르면 무조건 어려운 거죠. 그리고 스페인어는 발음은 우리나라 사람 입장에서 쉬운 편이긴 합니다.”
진짜 공부는 일상 속에서 한다
김 교수는 올해 우리 나이로 63세다. 그는 자신도 나이를 거스를 순 없으며 젊었을 때보다 기억력이 쇠퇴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학원을 가면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단어 암기에서 제가 그들에게 뒤진다는 생각은 안 하거든요. 자기의 타고난 능력에 대해선,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변명하기가 좋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암기는 가장 효과가 있는 시점에 반복하고 자주 반복하는 게 좋아요. 학원을 마치고 나오면 해방이다, 이러면서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영화를 보고, 소주 한 잔을 하든지 그러면, 암기가 잘 안 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타고 가면서 배운 걸 보고, 자기 전에 또 봅니다. 거리를 가면서도 공부할 것들이 많아요. 간판에 적힌 글자들만 봐도 뭔가 궁금해지면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공부하죠. 그래서 시간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공부를 마치고 나서 바로 짧은 시간에 반복해서 다시 복습을 하는 것, 그리고 자투리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는 그의 태도는 공부법에서 말하는 복습의 중요성을 일깨우게 만든다.
“나이 든 사람들과 공부를 해보면 그분들 나름대로 한계가 있긴 해요. 그러나 다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머리 중심 노익장의 시대가 올 것
김 교수는 ‘나이 많은 몸짱’이란 개념도 거의 10여 년 전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꽤 보편화된 개념이 됐다고 진단했다. 아직도 스페셜하긴 하지만. 그 자체가 화젯거리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몸짱은 그렇다 칩시다. 사람들이 이제 다 그런 개념을 갖게 됐으니까. 그런데 머리를 쓰는 것은 어떤가요? 나이를 먹은 사람의 특성상 머리를 쓰는 게 몸을 쓰는 것보다 더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가 노인이 돼서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말하는 건 오래된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것보다는 기억력과 관련된 문제예요.”
김 교수는 공부에 뜻이 있는 시니어들이 막상 해보려고 하면 자꾸 기억이 안 나게 되니 좌절감을 느끼고 ‘나는 안 된다’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몸짱’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정립이 된 것처럼 자연적으로 머리를 바탕으로 하는 노익장이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각해 보면, 먹고살기 위해서는 그걸 처절하게 견뎌야 하는 몸이 바탕이 되어야 했으니 몸이 먼저 주목받았던 게 당연합니다. 사실 머리는 당장 먹고사는 것과는 관계가 없죠. 그래서 머리와 관련된 기능은 쉽게 퇴화하고 유지하는 게 어려운 걸 수도 있어요.”
은퇴, 그 자체를 잘 모르겠는 마음
나이를 잊은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김 교수에게 은퇴 후의 삶이란 어떻게 다가올까? 그는 그 질문에 대해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세상이 너무 변했어요. 요즘은 나이가 들어도 너무도 건강하게 됐어요. 은퇴 생활이 60대에 적용된다고 보면, 남들은 일하는데 은퇴한 자신은 놀고 있으면 능력이 없어 보이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 된 거죠. 그래서 저는 은퇴 후라는 게 ‘인생을 열심히 살아보자’인지, ‘유유자적하게 살자’는 것인지 모르게 됐어요. 사회적으로 정립이 안 된 걸 개인이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죠. 내년에는 양상이 또 바뀌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정말 어려운 문제예요.”
의학의 발달과 사회적 진화로 인해 기존의 정년 개념은 이제는 무의미하게 됐다. 이제 은퇴라는 말은 아직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말일 수도 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은퇴에 대한 개념을 들으며 느낀 것을 많은 시니어들도 동감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넓은 공부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술, 영화, 운동, 외국어까지 섭렵했다. 이제 다른 영역으로 김 교수가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을까?
“사실 지금까지 한 것들도 도전을 위해서 한 게 아니고 우연히 한 거죠. 우연히 시작한 걸 버려선 안 된다, 한때의 추억으로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앞으로의 욕심이라면 현재 하고 있는 외국어, 운동들로 그 자체 내에서 내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나를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운동은 가시적인 발전에 한계가 있습니다만 외국어는 끝이 없을 거라고 봐요. 커피도 그렇잖습니까? 다 맛있다 하다가도 원산지, 볶는 법 등등을 알게 되면 끝이 없잖아요. 언어도 그런 게 더 없겠습니까?”
그는 나이가 들어도 지금 꾸준히 하고 있는 것들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이상 퇴보하는 건 없도록 하고 싶어요. 그 기간이 오랫동안 연장이 됐으면 싶고. 1차 목표는 70세로 하고,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75세로 늘리려고요(웃음).”
가구 컬렉션계의 대부 혹은 가구 컬렉션계의 1세대.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그의 컬렉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질과 양에서 모두 세계 수준으로 손꼽힐 정도다. 디자인 가구의 컬렉팅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도화선이 됐다. 그 노력의 집약체가 바로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그 곳에서 김명한(金明漢·63) 관장을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단순히 홍익대학교와 그 앞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소비의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디자인과 출판, 건축 등 다양한 창조물이 샘솟는 곳이다. 이제 지역적으로는 마포구 서교동과 동교동을 넘어 합정동, 창전동에 일부는 서대문구 연남동 일대까지로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저잣거리를 축으로 확대된 ‘종로’가 있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홍대가 해내고 있는 셈이다.
그 홍대의 랜드마크 중에는 aA 디자인 뮤지엄이 있다. 휴일에는 문을 닫고, 오후 5시 전에는 나가야 하는, 으레 생각하는 그런 박물관이 아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도록 머물 수 있는, 디자인을 손에 쥐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문화를 주도했던 주인공들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속에서도 aA 디자인 뮤지엄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과 영감의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설립자 김 관장은 aA 디자인 뮤지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홍대에, 젊은이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통해 돈을 벌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디자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들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콘텐츠를 담을 하드웨어예요. 어린 친구들은 그 하드웨어를 만들 여력이 없으니 그 부분만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aA 디자인 뮤지엄은 권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에도 박물관 공간 한쪽에선 학생들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할 여러 가지 수단을 찾고 있고, aA 디자인 뮤지엄과 유사한 상설 전시공간을 유럽에 마련하는 것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홍대를 지키는 기둥으로 마포 디자인·출판 진흥 지구협의회의 회장을 맡아 서울시와 함께 중소 출판인들의 인프라 개선을 위한 작업을 올해부터 본격 진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의 가구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1년 유럽식 레스토랑 ‘아지오’를 열면서 그의 수집은 시작됐다. 그의 공간을 장식할 소품과 가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그가 손대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연이어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순수했고 열정으로 가득한 시기였지요. 똥폼도 잡고 밤새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정원이 있는 레스토랑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고, 평론에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어서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침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를 통해 외국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그 추억을 공유할 장소가 필요했고, 대표적 여행지인 유럽과 유사한 공간은 그들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그의 공간에 대한 감각과 욕심은 유년 시절의 경험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가 뛰어놀던 정원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가득했고, 그가 자란 안동은 미적으로 뛰어난 한옥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주택문화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독서와 정원 가꾸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디자인 역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배경은 ‘경험’을 중시하고, 나누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aA 디자인 뮤지엄이나 제주도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모두 이 맥락에서 출발했다. 수집이 본격화되면서 시작한 것은 공부다.
“유럽의 각국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매소들을 많이 다녔죠. 그곳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눈을 키우고, 거래 기관과의 신용을 쌓았습니다. 관련 전문서적도 갈 때마다 사들여서 매달 번역해서 읽었고요.”
20년 넘게 진행된 그의 컬렉션은 100여평의 창고 8개를 채울 정도가 됐다. 일본의 업계 관계자가 한국시장 진출을 꿈꾸다 그의 컬렉션을 보고 규모에 깜짝 놀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제 수집 스타일은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학술적 가치 말고도 조형적 가치나, 시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들도 모았으니까요. 전시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활용까지 생각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덕분에 컬렉션의 형식이나 아이템들이 다양해졌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가 세운 원칙은 철저하게 지켰다. 김 관장 스스로가 정한 약속이다.
“그동안 가구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켜왔던 원칙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은 피하고, 갖고 있는 능력 안에서만 하자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수집은 저에겐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집은 3년 전 멈췄다. 그가 아지오나 다른 카페들에서 손을 뗐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 자르듯 그만뒀다.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고, 다른 관심사들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지오를 그만둘 때도 주위에서 이런저런 만류가 있었지만, 단칼에 실행했던 그다. 지금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수집은 그의 인생 2막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하게 확대됐다. 그중 하나가 무크지 ‘캐비닛’과 ‘캐비닛 Jr.’의 출간이다. 캐비닛 창간호는 전 세계 디자이너 20명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업계의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기사를 번역한 것이 아닌, 현지에 찾아가 그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와 촬영한 사진을 게재한 잡지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날아가서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향이 반영됐다.
또 다른 사업은 그의 디자인 안목과 경험이 집약된 ‘aA 디자인 퍼니처’다. 2011년 론칭해 주목받았던 그의 가구 브랜드 aA 디자인 퍼니처는 최근 경기도 가평에 공방을 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그의 공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구 공장’과는 차이가 크다. 공방이 곧 전시장이 될 수 있는 정갈한 작업환경과 디자이너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까지 갖추고 있다.
“내 직업에 대한 평가를 상대적 가치로 판단하려 들면 자식에게 내 일을 물려줄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직업과 일터를 물려주겠다고 생각하면 공간이나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지죠. 춥거나 덥거나 더럽지 않은, 직원들이 폼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위치가 가평인 건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이 많이 표현된 것이죠.”
그는 이 공방을 통해 디자인 샘플이 탄생되면 소비자들을 고려한 가격을 정해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다.
최근 제주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Jeju in aA’는 다시 한 번 그가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워낙 제주가 좋았던 그는 지인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했고, 수집한 가구들로 공간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보니 많은 사람과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목적에 맞게 비용도 저렴하게 책정했다. 주말 가격도 없고, 성수기 가격도 따로 없다. 1년 365일 같은 가격이다. 바가지 상혼이 가득했던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도 평소 가격을 유지했던 ‘아지오 아저씨’ 김 관장의 고집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두 채는 제주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간세다리’와 영어로 빈둥거린다는 뜻의 ‘아이들(idle)’입니다. 다른 한 채는 제 손녀의 이름이자 순우리말로 바다를 뜻하는 ‘아라’고요. 이름처럼 젊은이들이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다. 예기치 않게 제주 제2공항이 근처로 발표되는 바람에 오해도 받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한다.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또래의 중년들에게 미루지 말고 바로 실행할 것을 주문한다.
“돈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돈은 절대 가치가 될 수 없어요. 대신 자신에 대한 가치, 신념이 있어야 해요. 저는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을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하루라도 거르거나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똑같다고 봐요. 그렇게 인생을 준비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대학생일 때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죠. 고등학교 때는 시골에 있었으니 좀 여유 있게 놀 수 있었죠. 노래를 좋아했어요. 주위에서 목성이 좋다고 하고 발음도 명확하다며 성악을 하라고 하더군요.”
한영섭(韓永燮·61)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성악이라는 자신의 오랜 꿈을 더듬어보기 위해 10대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그만큼 오래된 꿈을, 그는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루게 됐다. 지난해 12월 10일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서서 그간 갈고닦은 자신의 실력을 선보인 그에게 꿈을 이룬 제2의 인생 담론을 들어본다.
운동에 재능이 있고 배짱이 있었던 한영섭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얼떨결에 교련 과목에서 연대장을 맡게 됐다. 당시 교련은 굉장히 비중이 큰 과목이었다. 그래서 방과 후에 교련 연습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령을 하려면 목소리를 키워야잖아요. 산에 가서 차렷, 열중쉬어를 많이 외쳤어요. 마이크 없이 질러대는 거예요. 그때 목이 많이 개발됐죠.”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레코드를 자주 사게 됐는데, 특히 가곡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인생의 노래로 꼽는 곡도 그때 만나게 됐다. 양명문의 시에 변훈이 곡을 붙인 가곡 ‘명태’였다.
“다른 가곡들도 좋았지만 ‘명태’를 듣는 순간 이런 노래가 있구나 싶었어요. 엄청나게 따라 부르면서 외우곤 했죠. 학교를 다닐 때도 부르고 버스 안에서도 부르고. 그렇다고 성악의 길을 간 건 아니고 그보다는 좋은 공부를 해서 직장을 가야겠다 싶어 전경련에 들어갔어요.”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그가 전경련에서 맡은 건 CEO 교육이었다. 그래서 연사를 초청하다 보니 당연히 그중에 성악가들도 있었고, 그들과 자연스럽게 친하게 됐다. 그런데 그들의 공연을 보다가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런 무대에 서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혼자서만 불렀지 교육을 받은 건 아니잖아요. 노래는 사사를 받아야 하더라고요. 우연한 기회에 감성CEO 오페라 과정에 들어가서 성악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명태’를 부르는 걸 보고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1막에 나오는 ‘Non piu andrai(더 이상 날지 못하리)’를 부르라는데 다른 사람은 다 2분 내에 끝나는 노래인데 이 노래는 5~6분 되는 거예요. 악보가 일고여덟 장 돼요. 다 이탈리아죠. 처음에는 자신 없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싶었어요.”
‘더 이상 날지 못하리’가 한 원장 손에 쥐어진 건 2015년 5월 중순. 연습 시간은 한 달. 그는 집에서 엄청나게 연습했다. 횟수로 세진 않았지만 천 번은 거뜬히 넘었다고 한다.
“재미도 있지만 외우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다행스러운 게 비슷한 패러그래프가 반복된다는 거였는데, 그게 또 헷갈려요. 반복이 정기적으로 되면 되는데 엇박자로 가는 게 있더군요. 그리고 노래가 경쾌하다보니 템포가 굉장히 빨라요.”
안 좋은 기억이 생기면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연습을 하다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지난해 7~8월 휴가 때 제주포럼에 가서 한 번 불러본 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 달 뒤에 그를 가르치던 분 앞에서 자신 있게 이 노래를 다 불렀다. 그러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그걸 노래라고 불렀어요?’ 그러더라고. 충격 먹었어요. 자신 있게 했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을 할까. 상처가 됐죠. 일주일 정도 지난 다음에 선생님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얘기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학생에게는 상처가 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아, 그렇게 해야 다시 노력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질책은 잘못한 거죠.”
그러나 예순 살의 나이에 겪게 된 그런 강렬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 원장은 자신의 노래를 계속 가다듬었다. 혼자 알아서 해야 했던 연습이기에 박자가 안 맞고 숨을 엉뚱한 데서 쉬는 등의 실수를 나중에 가르침 받았다. 감정에 치여 좌절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제가 평행봉을 잘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손에 땀이 너무 나니까 평행봉을 하다가 떨어졌어요. 하필 비탈에 떨어지면서 배를 쫙 긁혔죠. 보통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운동을 단념해요. 철봉이 꼴도 보기 싫어지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때 더 열심히 했어요. 안 좋은 기억이 있을 때, 그 지점에서 더 열심히 하면 이겨낼 수 있는데 쇼크를 받아서 안 하면 완전히 멀어지는 것 같아요. 이번 경우에도 그런 쇼크를 받았어도 계속 코치를 받고 발전하려고 노력했죠.”
잠재력을 증명한 열정의 무대
“하고 싶은 노래를 하니 좋은 점이, 내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했다는 거죠. 그리고 전경련을 나와서 인간개발연구원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 수 있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나이를 들어서 꿈이 없으면 추하다는 말이 있다. 지금 그가 꾸고 있는 꿈의 모습은 무엇일까?
“올해 5, 6월즈음 개인 발표회를 하려고요. 한 곡 한 곡 사사를 받아 날 좋을 때 발표를 해야겠다 싶어요. 제가 바리톤으로 7~8곡은 부르고 소프라노 한 분, 테너 한 분 모셔서 함께 공연하는 식으로 진행하면서 단독으로 개인 발표회를 해보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가동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살아 있음을 감지한다. 그 잠재력을 모두 동원해 자신의 꿈을 향해 점점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 행복해한다. 그는 노래를 할 때 행복감이야말로 사는 이유라는 것을 알았다. 노래는 혼자 있어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그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줬다.
이렇게 꿈을 이룬 그에게 꿈에 대한 다른 시선을 물었다. 그는 꾸준한 노력이 함께하지 않는 꿈은 몽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발을 움직여 스스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며 꾸준히 노력하고 직접 몸으로 맞서 꿈을 이룰 것을 조언했다.
“간절하지 않으면 꿈꾸지 마세요.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은 분명하지 않으면 안 돼요. 막연한 간절함이 아닌 ‘반드시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지와 다짐이 분명한 간절함이 필요해요. 24시간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면 어느 순간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일과 즐거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
그는 전경련에서 33년 3개월을 보냈다. 초년기 중년기를 거기서 다 지낸 것이다.
“산업사회에 기여하는 조직으로서 훌륭한 직장이었죠. 송충이는 솔잎만 먹는다고 저는 다른 데서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요. 조찬회를 만들어 회사를 좋은 방향으로 가게끔 하는 훌륭한 경영자 스토리를 교육하고 정치, 외교, 통일 안보에서 훌륭한 사람을 데려와 그쪽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이 저에게 그 장을 마련해준 거죠. 혼자 그걸 만들려면 엄청나게 어려워요. CEO지혜산책을 만드는 등 제게 그런 지식과 기회를 만들어준 곳입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은 30여명의 기업인이 1975년 조찬 공부 모임으로 창립한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를 모태로 설립돼 지금까지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한 세미나 등 각종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그는 인간개발연구원 경영대상 시상식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공연에 대한 열정이 샘솟는다. 일과 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는 그의 인생 2막의 다음 무대가 기대되는 이유다.
한영섭 원장과의 1문1답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어렸을 적부터 성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취업과 생활을 위해 바쁘게 살아야 했습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성악가들의 공연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부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CEO를 위한 오페라 과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게 됐습니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릴 적 꿈은 운동선수였으나 지금은 꿈을 이루고 나니 나만의 개인 공연을 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서정시를 음악으로 낭송하는 행위가 얼마나 멋집니까. 완전히 몰입된 감정 상태의 시인이 돼 노래하고 싶습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노래에 빠져 있는 동안 저는 훌륭하게 부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스승)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난 이후부터가 어려움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슨 색?
성악을 색깔별로 표현하면 노래마다 다르긴 한데, 특히 가을에 부르는 성악은 완전히 익은 갈색 같아요. 그런데 모차르트의 노래는 경쾌하고 파릇파릇한 게 초록색 같습니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그저 잠재력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해냈다는 거죠.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한때는 꿈이 있었지/가슴에 묻어 왔던 꿈이/사랑은 영원하다고/철없이 믿어 왔던 날들/하지만 그 꿈은 잠시/한순간 사라져 버렸네” ( 삽입곡 ‘I dreamed a dream’)
아내 윤이남(尹二男·70)씨가 첫 소절을 부르자 남편 권영국(權寧國·75)씨가 부드러운 화음을 넣는다. 그들이 부른 노래처럼 부부에게도 한때는 꿈이 있었다. 가수를 꿈꾸었던 소년과 간호사를 꿈꾸었던 소녀, 잠시 사라진 듯했던 그들의 꿈은 ‘뮤지컬 배우’라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가수를 꿈꾸었던 권씨와는 다르게 음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윤씨. 그녀가 음악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은 남편 덕분이었다. 신혼 시절, 어느 날 가야금을 사들고 온 남편은 “당신 가야금 연주하면 정말 아름답겠다. 어머니 환갑 때 연주하면 좋겠다”고 엉뚱한 제안을 했다. 가야금은커녕 악기는 배워볼 생각도 없던 아내는 그 말을 웃어넘겼고, 가야금은 집 한편에 장식품처럼 놓여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윤씨는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년간 연습한 끝에 시어머니의 환갑잔치 날 ‘아리랑’과 ‘도라지’를 연주해냈다.
남편이 그랬듯 아내는 “당신, 내 가야금 연주에 판소리를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함께 음악의 즐거움을 공유하기 시작해 색소폰, 플루트, 하모니카 등 악기뿐만 아니라 스포츠댄스, 합창, 사물놀이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해오던 그들은 2007년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당시 예순을 넘긴 부부였지만 ‘아무리 고되어도 인생의 두 번째 문은 열린다’는 의지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2008년, 노년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 의 오디션에 부부가 동시에 합격하게 된다. 20명 남짓 뽑는 오디션에 14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한 덕에 그들은 꿈의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됐다.
그들의 꿈을 펼친 뮤지컬 (2008)의 공연이 열렸던 세종문화회관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장소다. 1967년 12월, 당시 시민회관이었던 그곳에서 결혼식을 했고, 결혼 40주년이 되던 해에 그곳에서 뮤지컬 배우로 서게 된 것이다. 꿈을 이룬 이후에도 그들의 일상은 분주하다. 연기활동 외에도 함께 구연동화 자격증을 따서 봉사활동도 다니고, 노인 상담, 인문학 강의, 악기 연주 재능기부도 하는 등 다정히 손을 잡고 행복한 제2인생을 만끽하고 있다.
늘 대화가 끊이지 않는 부부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지난 추억들을 되새기고 노래를 부르느라 새벽을 훌쩍 넘길 때가 많다고 한다. 잦은 대화는 행복했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그들만의 노력이다. 그런 추억을 모아 2014년에는 이라는 부부 자서전도 만들었다. 이후 각자의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는 그들은 늘 그렇듯 함께 펴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과 꿈을 담아가고 있다.
Q & A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남편) 학창시절부터 노래의 즐거움을 알았고, 무대를 동경해왔죠. 음악은 취미로만 여겼을 뿐, 직업이 되기는 어려웠어요. 직장생활하고 연년생인 삼남매를 정신없이 키우느라 ‘꿈’은 정말 꿈도 못 꾸고 살았죠.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남편) 50세가 되던 해, 무엇이든 아내와 같이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러던 어느 날 ‘충무아트홀 연극 교실’이라는 문구를 발견했죠. 아직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더라고요. 그 길로 아내와 연극 교실에 등록했고, 그때부터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한 기초를 다지고, 꿈의 무대에 도전하게 됐어요.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아내) 어릴 땐 나이팅게일처럼 간호사가 꿈이었어요. 늘 ‘멘소래담’ 같은 연고를 들고 다니며 다친 아이들에게 발라주곤 했죠. 결혼을 하고 꿈이라는 것은 딱히 없이 지냈는데, 남편과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잠재된 재능을 발견했어요. 그러면서 꿈과 목표가 생겼죠. 중년 이후의 꿈은 남편이 찾아준 것과 마찬가지예요.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아내) 뮤지컬 배우는 노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노래, 연기, 춤, 그리고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까지 신경 써야 하니까요. 대사 암기가 난관 중 하나였어요. ‘연습만이 최선이다’라는 생각으로 언제 어디서든 남편과 대사를 맞추고 안무를 익혔죠.
당신의 꿈은 무슨 색?
(남편) 어떤 꿈이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죠. 젊어서 꾸던 진취적인 꿈, 중년에 꾸던 삶의 돌파구 같던 꿈 등. 지금 떠올려보면, 행복했던 꿈도 있고 서글픈 꿈도 있고 그래요. 지금은 무엇보다 건강한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건강한 빛을 띤 색이라 하고 싶어요.
(아내) 저는 아직도 무지갯빛 꿈을 꿔요. 모든 일이 재밌고, 신나고, 행복하고, 그만큼 알록달록하고 다양한 색깔의 삶을 살고 있죠.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남편) 커튼콜. 그 순간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무대 위에서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받는 그 광경은 잊지 못해요.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꿈을 이뤘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뮤지컬 배우 부부도 많이 없지만, 우리처럼 노년에 뮤지컬 배우가 된 부부는 거의 없잖아요.
(아내)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노년의 삶이 준 선물이죠. 그동안 아이들 키우고 어르신 모시느라 제 삶이 없었잖아요. 그런 시기가 지나고 나니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제 삶을 사는 시간도 많아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