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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나눔교실, 춘천 토박이 멘토 4인방
- 청춘의 낭만을 품은 도시, 강원도 춘천. 이곳에 남다른 교육열을 불태우는 멘토 4인방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인생나눔교실을 통해 국군장병들을 위한 인생 멘토링에 참여하게 된 이백우(66)·이정석(67)· 차관섭(67)·허남신(43)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가르치는 수업’이 아닌, ‘함께 나누는 교감’을 통해 청춘들을 품고 있는 그들을 만나봤다. 인생나눔교실을 통해 ‘멘토’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함께하게 된 데에는 이백우씨의 역할이 컸다. 영어교사 은퇴 후, 인생나눔교실 1기에 지원해 3년째 멘토링 활동 중인 그는 고등학교 동기인 차관섭씨와 제자였던 허남신씨를 짝꿍으로 맺어주었다. 차관섭 “강원도청 산림정책관 등을 맡으며 반평생 공직생활을 했어요. 수직적인 직장 문화를 벗어나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에 적응하는 것이 초반엔 걱정스럽더라고요. 그때마다 이 친구(이백우)가 ‘당신은 할 수 있을 거야!’라며 희망을 준 덕분에 활동할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또 한 사람, 차씨의 곁엔 환상의 짝꿍 허남신씨가 있다. 그녀 역시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이백우씨의 추천으로 인생나눔교실에 참여하게 됐다. 그렇게 그들은 사제지간에서 멘토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백우·이정석 멘토, 교직의 보람을 잇다 춘천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던 이정석씨는 은퇴 후 봉사활동에 눈을 뜨며 인생나눔교실에 참여하게 됐다. 동갑인 데다가 음악을 좋아하고, 같은 영어 교사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멘토링 파트너 이백우씨와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한 지도 3년째,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 호흡이 척척 맞는다. 이들의 수업 목표는 바로 ‘대화를 통한 공감’이다.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강의 형태에서 벗어나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세대 간 공감을 이뤄나가고 있다. 이정석 “두려움은 없었어요. 40년을 교육자로 지냈으니까. 하루는 종이접기를 하려고 색종이를 가져갔는데, 멘티들이 초등학교 때 추억이 생각난다며 종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이들이 간직한 동심, 그런 감성적인 것들을 끌어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백우 “신세대와 쉰세대 간의 공감·소통·배려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최근 ‘욜로(YOLO)’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우리 기성세대와는 생각이 참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죠. 욜로는 한 번뿐인 인생 즐기며 살자는 건데, 어른들은 저축도 하고 앞날 생각하며 살길 바라니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차관섭·허남신 멘토, 멘토링 속 멘토링 차관섭·허남신 멘토 콤비 역시 ‘노 티칭(no teaching)’을 원칙으로 대화와 이해를 통한 수업을 진행한다. 사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아버지와 딸뻘이다. 함께하는 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묻자 이구동성으로 ‘전혀 없다’는 답변이 나왔다. 차관섭 “같이 군부대에 갈 때면 카풀(carpool)을 하는데, 1시간 반 정도 걸리거든요. 내가 살아온 이야기도 하고, 허 선생 사는 이야기도 듣고 하면서 오늘은 어떤 방법으로 수업을 진행할지 등등을 의논하게 되죠. 어떻게 보면 딸 같지만, 때로는 친구 같고 그래요.” 허남신 “나이 차가 많이 나는데, 상하적인 느낌이 들었다면 부담스러웠을 거예요. 차 선생님은 저를 굉장히 존중해주시고, 같은 멘토로서 대해주셔요. 또 둘이 있을 때는 제게 멘토 역할을 해주시거든요. 저는 A가 맞다 생각했는데, 차 선생님은 ‘그게 아니야’라는 말 대신 ‘B도 있고 C도 있는데, 나는 D도 해봤어’라는 식으로 말씀하시죠. 그런 유연성, 배려 속에서 선생님 인생을 나누고 제 인생도 나누는 것 같아요. 인생나눔교실의 또 다른 성과인 셈이죠.” 멘티에게 배운 ‘요즘 아이들’ 네 명의 멘토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보람된 순간은 바로 자신으로 인해 멘티들의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했을 때다. 모두를 만족하는 수업이 되기는 어렵지만, 단 한 명이라도 그 시간을 통해 작은 깨달음을 얻어갈 수 있길 바라는 그들이다. 차관섭 “얼마 전, 한 장병이 쉬는 시간에 쪽지를 하나 주고 갔어요. 나처럼 공직생활을 꿈꾸고 있는데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싶다고요. 그야말로 내 인생을 나누고 도움을 줄 기회잖아요. 언제라도 시간이 되면 따로 만나서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고, 그 아이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물론 그들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인생만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멘티와의 생각나눔을 통해 배우는 것 또한 적지 않다. 이정석 “작년에 최전방에 있는 장병들에게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라 했는데, 제대하고 돈 벌어서 아버지 차 사드리겠다, 부모님 해외여행 보내드리겠다 등을 적더라고요. 대개 우리 세대는 요즘 애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여기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오히려 이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데 나는 내 부모에게 어땠는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실수하는 멘토가 되고 싶다 국군장병을 위한 수업이지만, 사실 그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게 나름 고충이라고 한다. 사는 지역, 나이, 학벌, 가치관, 장래희망 등 각양각색의 성향을 지닌 이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늘 어느 것 하나에 치우치거나 차별이 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백우 “예전에 아이들에게 ‘아버지’로 삼행시를 지으라 했는데, 한 아이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 섞인 시를 지었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요즘은 편부모나 조손 가정이 많아졌잖아요.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로는 주제를 정하거나 대화를 나눌 때도 마음 다치는 아이가 없도록 배려하고 있죠.” 특별히 더 신경 쓰는 것은 언어다. 아무래도 나이 차가 나기 때문에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대화에 불편함이 생길 수 있어 이 점을 늘 염두에 둔다고. 이정석 “어느 날 ‘계모’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아이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그런 것처럼 멘티들이 알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또 유행어나 줄임말 같은 신세대 언어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이정석씨가 그토록 언어에 신경 쓰는 까닭은 ‘쉽게 대화할 수 있는 멘토’로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각자가 바라는 멘토의 모습에 대해 물어봤다. 이백우 “재미있는 멘토, 얼핏 생각나는 멘토, 그렇게 기억되면 좋겠어요.” 허남신 “여유 있는 멘토, 실수하는 멘토 그런 인간미 넘치는 멘토가 되고 싶습니다.” 차관섭 “나는 그들의 멘토보다는 형으로 남았으면 해요. 인생의 형이 되어주고 싶어요. 그냥 형처럼, 정말 형처럼 내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려고 해요. 그들이 그렇게 나를 형으로 생각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인생나눔교실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인생나눔교실은 선배세대(멘토)와 후배세대(멘티)가 나눔·소통·배려 등 인문 가치와 삶의 지혜를 공유한다. 2015년부터 인문적 소양을 갖춘 은퇴자 및 인문·문화 분야 전문가를 대상으로 수도권·강원권·충청권·영남권·호남권 등 5개 권역으로 나뉘어 멘토를 선발한다. 올해는 3월 지원자를 받아, 4월부터 12월까지 총 250명의 멘토가 3000여 회의 멘토링을 진행한다(자세한 사항은 인생나눔교실 블로그 참조 blog.naver.com/arko2010).
- 2017-08-3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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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돌 그룹 팬이 어때서!
- 지난해 4월 어느 주말 오후, 느닷없이 필자의 주책이 시작되었다. 주말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1990년대 대중문화의 한 획을 긋고 해체된 1세대 아이돌 그룹을 다시 불러 모아 콘서트하는 과정을 방송했다. 그들이 해체된 후 16년이 지났건만 당시의 아이템(팬덤을 상징하는 색깔의 우비와 풍선)을 장착한 팬들이 체육관을 가득 채웠고 가수와 팬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당연히 필자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시절 철없던 소녀들은 한때의 추억이 아닌 더 깊은 마음으로 가수를 응원했고 그들의 16년 전 활동에서부터 콘서트 영상까지 다 찾아 보면서 애정 어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필자도 그렇게 아이돌 그룹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시쳇말로 ‘이모팬’이 된 것이다. 아마 최고령 팬이 아닐까 싶다. 누구한테 말하기에게는 살짝 민망할 때가 있는 걸 보니 주책임이 틀림없다. 몇 년 전 후배가 집에 보온병이 남아나질 않는다는 말을 했다. 좋아하는 가수에게 몸에 좋은 차와 음식을 만들어 보내서란다. 명품 셔츠를 사서 보내고 자기도 같은 옷을 입고는 그와 커플룩을 입었다며 뿌듯해하곤 했다. 필자는 사회적 지위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행동을 십분 이해한다. 필자도 그들이 바빠지거나 얼굴이 야위면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되고, 그들의 노래가 좋은 성과를 내면 필자의 일처럼 기쁘고 마치 자식이 성공한 것처럼 뿌듯하다. 물론 팬으로서 할 수 있는 일도 다 한다. 플레이어도 없는데 소장용으로 새 앨범을 사고, 대형 서점에 찾아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형 서점에서 사야 새 앨범 판매 실적에 반영이 되기 때문이다. 길에서 그들의 노래가 나오면 걸음을 멈추고 다 끝날 때까지 미소를 짓다가 가던 길을 간다. 이제는 웬만한 랩도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들 덕분에 힙합, 랩이 특기라고 소개할 수 있는 시니어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 새 노래 나왔다. 한번 들어봐라” 하며 홍보한다. 물론 그들이 속으로 ‘아이고 저 주책~’이란 말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필자도 처음엔 그들의 노래가사 한마디에 위로받고 눈물까지 흘리는 스스로의 모습에 당혹스러웠으므로. 가족들은 ‘으이그 저 빠순이’ 하며 놀리기도 하지만 기꺼이 응원해준다. “어딘가에 맹목적으로 빠지는 네 열정이 부럽다”고 말해주는 친구도 있다. 아무렴 어떠랴. 주책이라면 또 어떤가. 시니어는 클래식이나 트로트만 좋아해야 하나? 아이돌 음악도 엄연한 대중예술의 한 장르다. 또 그들의 음악인 K-POP은 한류의 대표 상품으로 엄청난 외화벌이의 효자 문화 콘텐츠 아닌가. 필자가 응원하는 가수도 곧 해외 진출을 한다고 한다. 그들이 해외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서 국제적인 아이돌이 되면 좋겠다. 한류 수출의 기수가 되길 팬으로서 항상 응원하고 있다. 순수하고 긍정적인 팬심에 나이라는 변수가 왜 필요한가. 필자는 작년에 너무 가고 싶었던 콘서트엘 못 갔다. 주책 떠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가지 못했는데 너무 후회스럽다. 올해 콘서트가 열리면 당당하게 가서 노래도 따라 부르고 더 적극적으로 즐겨볼 작정이다.
- 2017-07-1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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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단 2기 발단식 “우리 세대 이야기, 역시 우리가 써야 제맛이죠!”
- 4월 14일 동년기자단 2기 발단식이 열렸다. 지난 1년간 감동과 연륜이 묻어나는 글로 두각을 나타냈던 1기 동년기자 26명을 포함한 총 48명의 2기 동년기자단이 꾸려졌다. 각자의 인생과 삶의 철학은 다르지만, ‘동년(同年)’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게 될 그들이 첫 만남을 가졌다. 3월 1일부터 15일까지 온라인 지원과 서류 심사를 거쳐 선발된 48명의 동년기자가 설렘을 안고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발단식 이후, 이듬해 3월까지 1년간 각자의 역량에 따라 활발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2기 동년기자들은 1942년생부터 1966년생까지, 평균나이 61세로 1기 동년기자단(평균나이 54세)보다 연령대는 높지만, 저마다의 깊은 연륜과 강한 열정으로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를 불어넣고 있다. 공감과 감동이 있는 기사 기대돼 이날 행사는 명함 및 기자수첩 수여, 윤리강령 채택, 동년기자단 1기 활동 보고, 개인 프로필 및 단체사진 촬영, 자기소개 등으로 이뤄졌다. 발단식에 참석한 길정우 이투데이 총괄대표이사는 “동년기자들의 눈높이로 일상의 행복한 일, 감동을 주는 이야기 등을 기사로 쓴다면 중장년 독자와의 공감대를 잘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좋은 글을 많이 써서 우리 주변에 행복과 기쁨을 나눠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강혁 이투데이PNC 대표이사는 “매호 동년기자의 글을 감동적으로 읽고 있다. 1기 동년기자단의 활동 덕분에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콘텐츠 잡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며 2기 동년기자단의 활약을 기대했다. 보람만큼 책임감 더한 기사로 발전하길 동년기자단 1기를 이끌었던 강신영 단장은 “처음에는 얼떨떨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모두 액티브 시니어로 활동하는 분들이라 잘 자리 잡을 수 있었다”며 지난 활동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했다. 아울러 “블로그나 SNS 등에만 쓰던 내 글이 잡지와 온라인 사이트에도 실리는 것에 무척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게 되는 만큼 글과 사진의 수준을 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동년기자단’을 작명한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이사는 “동년이란, 같은 나이라는 뜻도 있지만, 과거 시험에 함께 합격한 이들을 일컫기도 한다. 서로 나이는 차이 나지만, 친구로 동무로 어울리며 망년지교(忘年之交)하길 바란다. 열심히 글을 쓰고 보람찬 활동을 하면 좋겠다”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남자 25명, 여자 23명 / 50대 20명, 60대 23명, 70대 5명 / 평균나이 61세 가나다순 48명 가재산(63·남), 강신영(65·남), 김수영(64·여), 김영선(65·여), 김종범(61·남), 김종억(64·남), 김진주(57·여), 김태형(57·남), 박기원(51·남), 박미령(63·여), 박수남(54·여), 박애란(66·여), 박정하(51·여), 박종섭(62·남), 박혜경(65·여), 배인휴(65·남), 백외섭(66·남), 변용도(67·남), 성경애(60·여), 성미향(54·여), 손웅익(59·남), 신용재(68·남), 안영란(55·여), 안영희(70·여), 양복희(60·여), 옥선희(59·여), 육영애(71·여), 윤영애(56·여), 윤재훈(58·남), 윤정자(75·여), 윤종국(70·남), 이경숙(65·여), 이두백(67·남), 이미숙(56·여), 이석현(56·남), 이찬만(58·남), 이현숙(59·여), 장영희(61·여), 전용욱(59·남), 정성희(57·여), 정원일(60·남), 조왕래(66·남), 주상태(51·남), 최원국(61·남), 최은주(54·여), 최현식(64·남), 한정수(71·남), 홍재기(57·남)
- 2017-04-2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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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게 듣고 미래에게 말하는 ‘문화해설사’
- 최근 고궁과 같은 사적을 방문하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역사적 배경을 곁들여 문화재를 설명하는 문화해설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전하는 ‘이야기꾼’에서 역사적 사건과 그 배경을 설명하는 ‘역사 선생님’으로서, 때론 유적을 안내하는 ‘안내자’로서의 열정을 보여주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화해설사에 대한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그 매력에 빠지는 것만큼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는 방법도 쉬울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문화해설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직업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직종인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해설사란 전문성을 갖고 사적이나 특정 지역의 역사와 가치, 문화를 알리고 방문객의 이해를 돕는 사람을 지칭한다. 문화해설사제도가 처음 도입될 때만 하더라도 특정 문화재를 대상으로 고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문화재가 아닌 여러 지역이나 코스를 대상으로 해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화해설사라는 명칭 역시 대상이나 주관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문화재청의 경우 제도 시행 초창기에는 문화해설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문화재안내해설사라고 구분해 부르고 있다. 광역자치단체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문화해설사들은 ‘문화관광해설사’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문화관광해설사제도는 관광진흥법으로 정해져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그리고 각 지자체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 구 단위 소규모 지자체나 민간단체에서 활동하는 인원은 문화해설사, 역사문화해설사, 문화교류해설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명칭이 해설 대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그 취지와 역할은 대동소이하다. 정부 문화관광해설사 취득은 ‘바늘구멍’ 문화해설사 중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해설사제도는 어떻게 운영될까? 안을 들여다보면 다소 복잡하다. 문화관광해설사제도의 설립은 2011년 관광진흥법 개정으로 시작됐다. 2001년 ‘한국 방문의 해’를 맞아 당시 문화관광부가 문화유산해설사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다른 제도와 달리 관광진흥법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가 인증한 위탁 교육기관을 수료한 사람만이 지원 가능하다. 위탁 교육기관에서 100시간 교육을 통해 배출된 예비 문화관광해설사는 지자체의 평가와 3개월 이상 실무수습을 마친 후에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얻게 된다. 이들 교육기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관광공사에게 선발을 위탁하는데, 한국관광공사는 3년에 한 번씩 교육기관의 인증을 갱신한다. 현재 인증된 교육기관은 총 25개소로, 교육 시설을 갖춘 대학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들 25개 인증 교육기관으로 찾아가면 문화관광해설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들 교육기관은 상시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자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의 수요가 있을 때마다 교육을 의뢰받아 시행한다. 다시 말하면 서울시와 같은 광역자치단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에 수요가 있을 때 문화체육관광부와 협의해 선발 계획을 세우면, 공고를 통해 지원자를 선발하고 이들의 교육을 한국관광공사에서 인증한 위탁 교육기관에 의뢰하는 식이다. 의뢰가 있을 때마다 선발된 인원에 대해서만 교육을 진행하기 때문에 교육기관을 찾아간다고 문화관광해설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각 지자체에서 선발 공고를 내면 그 시기에 맞춰 신청해야 자격 취득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수요가 광역자치단체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것. 강릉시와 공주시, 경상남도의 경우 올 초 문화관광해설사를 선발해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갔다. 이에 반해 국내 최대 규모인 214명의 문화관광해설사를 관리하고 있는 서울시의 경우 올해 추가 인원을 뽑지 않기로 했다. 서울시 서울관광마케팅관광사업팀 관계자는 “모집 여부는 지난해 실적을 고려해 판단하는데, 지금 인원으로 충분하다고 판단돼 올해 추가 모집은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사드 문제로 인한 중국 관광객의 급감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얻으면 운영기관 배치에 따라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된다. 서울시의 경우 문화관광해설사들이 활동 가능한 시간과 지역을 설정해놓으면 서울도보관광(korean.visitseoul.net)에서 신청자들의 예약을 받아 자동으로 연결하는 형태로 운영 중이다. 해설사 운영 지자체도 많아 소규모 지자체에서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문화해설사 과정도 노려볼 만하다. 서울의 경우 중구와 종로구, 영등포구 등이 각 지역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활동할 문화해설사를 선발해 운영 중이다. 선발이나 운영 방식은 각 구별의 특성을 반영해 차이가 있다. 서대문구의 경우 지난 3월 처음으로 해설사 8명을 선발했다. 총 36명의 지원자 중 8명을 뽑았다. 이들은 40시간의 이론·현장 교육을 받은 뒤 5월 하반기부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하게 된다. 서대문구 지역활성화과 박홍표 과장은 “서대문구의 역사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스토리텔링 개발을 통해 문화재 중심에서 지역을 알리는 골목 해설로의 확대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문화해설사제도가 지자체의 전유물은 아니다. 서울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는 지난해 6월 민간단체 한양길라잡이와 함께 세종마을(서촌)해설사 양성 과정을 진행했다. 이들은 7월 23일부터 10월 16일까지 온라인으로 해설 신청을 받아 1개 도보여행 코스를 운영했다. 올해 역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를 통해 두 번째 세종마을해설사 총 18명을 선발해 지난 3월 수료식을 진행했다. 한양길라잡이 이상욱 대표는 “올해는 해설사 선발에 경력사항을 중점적으로 고려했고, 실제로 반응도 좋다. 지난해보다 단체 신청이 많은 상태”라며, “내년에는 한옥마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갑신정변과 3·1운동의 중심인 북촌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민간단체를 통한 경력 확보의 길 현장의 문화해설사들은 문화해설사라는 직업을 쉽게 접하고, 관련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으로 민간 문화해설 관련 단체를 추천한다. 민간 주도의 ‘재능기부’이기 때문에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 가입이 쉽고, 교육 내용도 관 주도의 교육보다 실질적이고 체계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현재 민간 문화해설사 양성기관 중 대표적인 곳으로는 비영리 민간단체 우리문화숨결이 운영하는 ‘궁궐길라잡이’와 사단법인 한국의재발견이 운영하는 ‘우리궁궐지킴이’가 있다. 두 기관의 뿌리는 서로 다르지만 1999년 공식적인 문화해설 활동을 협력해 시작한 사이로 국내 문화해설 사업을 이야기할 때 두 단체를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국내 문화해설사 교육 과정에 참여하는 인력 중 상당수는 이들 단체 출신이고, 두 단체 출신은 선발 과정에서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다. 두 단체는 1년에 한 번 교육생을 모집하고, 총 9개월간의 이론과 실습 교육 과정을 거쳐 문화해설사를 배출한다. 배출된 인원은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통해 주요 궁궐을 중심으로 한 사적에 배치돼 방문객을 대상으로 해설 활동을 한다. 서울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과 종묘에서 궁궐지킴이는 금요일과 토요일, 궁궐길라잡이는 일요일에 해설을 맡는다. 문화재청 소속으로 활동하는 문화재안내해설사들은 평일에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안내 역할을 한다. 큰 수입 기대하면 낭패 직업으로서 문화해설사는 어떨까. 현실적으로 생활에 보탬이 될 만한 수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문화재청 소속의 문화재안내해설사들이 급여가 보장되어 있어 그나마 사정이 가장 낫기는 하지만 기간제근로자(계약직)라서 업무성과 평가 후 1년 단위로 계약이 갱신된다. 모집인원도 문화재마다 1~2명씩 선발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 광역자치단체의 문화관광해설사를 포함해 소규모 지자체의 문화해설사 역시 대부분 급여의 개념이 아니라 교통비와 활동비 정도만 지원해준다. 1회당 지원금은 2만5000원에서 3만5000원 수준이다. 이마저도 해설을 매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수입은 ‘월 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한 액수다. 그래서 자긍심과 보람, 열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중국어 전문 서울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인 김선희씨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자랑스러 문화유산을 알릴 수 있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이라며, “해설을 들은 외국인들이 여행 후에 다시 연락해 감사인사를 전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2017-04-2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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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단카이 세대의 취미
-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정년퇴직 이후의 삶, 제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즐길 수 있을까?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며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새로운 취미를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의욕과 체력이 따라주는 젊은 시절부터 ‘취미의 씨’를 뿌려두는 게 중요하다. 취미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물으면 “젊었을 때 했던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꽤 된다. 그러나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는 걸 방해하는 건 의욕도 체력도 아니고 ‘오래 계속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일지도 모르겠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기회이자 타이밍’이니 남은 삶에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재미’와 ‘보람’을 선물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삶의 ‘애호가’일 것이다. 일본 시니어들의 취미 일본에서는 고령자가 계속할 수 있는 취미로 주식, 등산, 워킹, 낚시, 독서, 자수, 골프, 볼링, 시쓰기, 체스, 데생, 원예, 역사, 장기, 분재, 서예, 유화, 과자만들기, 수묵화, 시계수집, 게이트볼, 꽃꽂이 등을 꼽는다. 크게 몸을 움직이는 취미, 머리를 쓰는 취미, 손동작이 필요한 취미 등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러한 취미는 운동 부족을 해소해주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 또한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넓혀주고 쓸쓸한 노후의 고독도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60대 남녀의 인기 취미 순위 350개 이상의 취미를 소개하는 일본의 ‘취미찾기닷컴’이 조사한 인기 순위를 잠깐 살펴보자. 먼저 60대 남성은 혼자 하는 여행, 사이클링, 오토바이, 재택근무, 사진, 전자공작(PIC), 절과 신사 순례, 주식, 워킹 순으로 조사됐다. 60대 여성의 경우는 혼자 하는 여행, 재택근무, 온천 순례, 절과 신사 순례, 워킹, 자수, 양궁, 등산, 심리학 순으로 인기가 있었다. 참고로 50대 남성의 취미로 사격, 50대 여성의 취미로 소설쓰기, 기타, 퍼즐 맞추기 등이 눈에 띄었다. 내 꿈을 찾아라~ 인생은 60부터 일본의 주쿄(中京) TV는 매주 일요일 아침 5시 45분부터 을 방송하고 있다. ‘아라칸’은 Around Kanreki의 줄임말로 칸레키는 우리말로 환갑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은 환갑 전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꿈에 도전해 제2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힌트를 제안하고 있다. 이 방송에서 소개된 이색 취미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2015년 12월 6일 방송에서는 빙상 위의 컬링(curling)이 아닌 날씨와 관계없이 체육관에서 즐길 수 있는 ‘커롤링(curolling)’이 소개됐다. 20여 년 전 나고야에서 시작된 이래 경기 인구 40만 명을 자랑하는 인기 스포츠로 체력보다는 두뇌게임이라는 점에서 ‘마루 위의 체스’라고도 불린다. 2016년 1월 10일에는 미술 취미로 ‘어탁(魚拓)’이 소개됐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누구든 즐길 수 있는 ‘어탁’은 기존의 수묵(水墨) 중심이 아니라 색채와 구도 등을 바꿔가며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꼭 물고기가 아니어도 되며 모든 사물의 본을 떠서 작품으로 만드는 ‘탁화(拓畵)’라는 장르가 새롭게 소개됐다. 그다음 주인 1월 17일에는 카우보이 복장으로 차려입고 컨트리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컨트리 댄스가, 3월 13일에는 1960~1970년대에 붐이 일어나 일렉트릭 기타에 빠졌던 세대들이 밴드를 결성해 제2의 청춘을 만끽하는 모습이, 4월 17일에는 실제 동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인 리얼 양털 퀼트 아트가, 8월 7일에는 다양한 무늬가 특징인 넥타이를 재활용해 가방과 인형 등을 만드는 리폼이 소개됐다. 이 밖에 9월 4일에는 경이로운 종이접기의 세계, 9월 11일에는 걸리버 여행기를 방불케 하는 미니어처의 세계, 10월 9일에는 종이를 오려내 그림을 만드는 ‘키리에(切り絵)’, 10월 23일에는 실제로 사람을 태우고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철도 모형 등이 소개됐다. 2017년에 들어와서는 우쿨렐레와 돌하우스(미니어처 장난감 집), 천사의 소리 핸드벨 음악, 볼펜 그림의 세계 등이 전파를 탔다. 이색(異色) 취미보다는 다양한 취미 인구가 많아지고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나면서 취미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 이색적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끌던 취미들은 최근 덕후(마니아, 광)들이 등장하며 주류와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다. 그만큼 취미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셈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 역시 새로운 취미에 도전해 개척하는 자세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령자들에게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치매 예방 차원에서 손가락과 뇌를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주산, 바둑, 장기, 손글씨, 그림, 색칠하기, 민요, 노래방, 꽃꽂이 등을 권한다. 간단한 요리를 만들게 하거나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시키는 것도 좋다. 몸 푸는 기분으로 이런 취미는 어떨까? 사단법인 일본 화살불기 레크레이션협회는 폐활량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로 화살불기를 권한다. 실제로 전국의 화살불기 교실에는 60~70대 회원들이 많은데 90세가 넘은 고령자도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수집이 취미인 사람들은 모으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수집한 물건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취미활동을 확대해보는 것도 좋겠다. 예를 들어 도자기 수집을 하는 사람이 도예 교실을 다니며 직접 만들어보거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해 실력을 인정받는 것은 어떨까? 또 인물과 동물, 자연 풍경 등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은 독거노인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등 자신의 취미와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재능기부 나눔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다. 이처럼 좀 더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펴보면, 의외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들이 많다. 먼저 발품을 팔아 정보를 찾아보고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취미를 선택해보자. 슬슬 발동을 걸어보자 지난 2014년 5월에 구성된 댄스 그룹 ‘TGK48’은 일본 기후 현 다지미 시의 고령자들이 만든 그룹이다. 그룹명은 일본의 인기 여성 아이돌 그룹 AKB48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다지미, 겐키(건강), 고레샤(고령자)’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를 기치로 내걸고 2016년 8월 60대 42명, 70대 21명, 80대 1명 등 총 64명(남성은 5명)으로 구성된 ‘TGK48’은 힙합도 소화하는 본격 댄스 그룹으로 공공시설을 빌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가량 연습을 하며 구슬땀을 흘린다. 최근 춤을 잘 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크고 작은 행사와 스포츠 대회에 출연,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 강사 레슨비 등 연간 100만엔가량의 운영비는 다지미 시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고령자의 의료비와 개호비 등의 삭감과 관련해 길게 내다본 다지미 시의 획기적인 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6년 3월 16일자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TGK48’ 멤버 35명의 체력을 측정한 결과 전 항목에 걸쳐 동세대의 일반인들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깜빡이는 빛을 보고 도약하는 데 걸리는 ‘전신 반응속도’는 무려 0.3초대로 20대 수준으로 나타났다. 5초간 빠르게 스텝을 밟는 ‘서서 스텝핑’의 평균 횟수도 60대 멤버가 40.1회, 70대 멤버가 37.7회를 기록해 젊은이 못지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이들의 체력을 측정한 기후대학교 교육학부의 가스가 히카루 교수는 “힙합은 빠른 템포의 음악에 몸의 움직임을 맞추는 춤으로 신경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 2017-04-1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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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로 인생 달라진 시니어 7인의 이야기
- 인생 후반전에서 만나는 취미활동은 이전의 취미들과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유희를 통한 만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몸담았던 직장에서 은퇴한 공백을 대신하기 때문. 그래서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은퇴 후 갖게 된 취미를 ‘제2직업’처럼 소중히 여긴다. 또 자신과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취미를 찾아낸 은퇴자들은 종종 취미를 ‘두 번째 인생의 반려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동안 가 만난 시니어들은 어떤 취미로 인생의 반전을 이끌었을까? “옻칠 공방으로 창업해요” 이수매(李秀梅·63)씨 이수매씨가 옻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남부기술교육원의 옻칠나전학과를 통해서다. 옛 문화재를 보며 전통공예의 매력에 빠졌다는 이씨는 규방공예를 거쳐 옻칠까지 배우게 됐다.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덕에 배우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는 이수매씨는 “외국인들이 사고 싶은 물건을 만들어 한국의 전통공예를 외국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또 그녀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은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그간 우리가 겪었던 희로애락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직 무언가 배울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면 좋겠어요”라고 당부했다. “그림으로 외롭게 사는 방법 배웠죠” 윤성호(尹性浩·65)씨 그가 송파의 한 화실의 문을 두드린 것은 2012년. 환갑의 나이에 붓이라곤 평생 제대로 잡아본 적 없었다. 하지만 열정은 욕심을 만들어냈고, 욕심은 많은 연습량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배운 것은 인생이었다. “그림에 쏟는 시간이 늘면서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어요. 이제 이 나이쯤 되면 외롭게 사는 방법, 슬기롭게 외로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할 텐데, 전 그 방법이 그림인 셈이죠.” 4년간 화실을 열심히 다니다 보니, 작품 수도 늘고 전시회 참여도 많아졌다.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회원 가입에 도전해 정식 작가도 됐다. “붓을 잡고 세 번째 인생 살아요” 하효순(河孝順·67)씨 하효순씨의 그림 사랑은 수집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뉴욕의 갤러리에서 종일 멍하니 그림만 보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도통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선물받은 컬러링북에 색칠을 반복하다 직접 그려보겠다는 용기를 갖고 근처 화실을 찾게 됐다고. 그림을 그리면서 겪은 변화를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지금은 다르게 보여요.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나고 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 됐죠.” “취미로 유년 시절의 꿈 이뤘죠” 윤민용(尹民鎔·80)씨 그가 자랐던 고향 죽산에는 유난히 다양한 모양을 한 돌이 많았다. 유년 시절 어린 마음에 이를 알아내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은퇴 후 고향으로 내려와서야 그 꿈을 이루게 됐다. 안성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제도를 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적인 교육을 통해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된 것. 물론 공부는 쉽지 않았다. 그의 해설은 이제 칠장사(七長寺)에 전해 내려오는 박문수(朴文秀)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이야기와 함께 명물이 되었다. “수영은 이제 삶의 일부죠” 서은희(徐銀姬·58)씨 그녀의 수영 경력은 올해로 25년. 과장해서 표현하면 사반세기다. 결혼 후 생활이 안정적으로 접어들 무렵 동네 체육센터가 문을 열었고 그때부터 수영을 시작해 아직도 쉬지 않고 물살을 가르고 있다. 오랜 기간 수영을 해온 덕에 건강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다. “같은 수영교실의 선배들을 보면 삶의 활력이 느껴져요. 당연히 모두 건강하고요. 회원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을 땐 몰랐던 건강과 체력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수영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됐어요.” “취미 덕분에 교우의 폭 넓어졌죠” 김호영(金好榮·72)씨 평생 교직에서 아이들을 위해 살아온 김호영씨. 그는 교직에서 은퇴하기 직전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아야 했다. 갑작스런 건강의 이상 증세와 은퇴는 그를 바로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다고. “뭐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취미를 찾다 어릴 적부터 관심 있었던 기타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문화센터에 교육과정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시작했습니다.” 과거 학교에서 불타올랐던 교직생활처럼 그의 열정은 다시 불타올랐고, 지금은 문화센터 기타반 반장까지 맡게 됐다. 그가 꼽는 취미로서의 연주가 갖는 최고의 미덕은 봉사활동이다. “치매센터나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 연주를 통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인생의 또 다른 보람을 찾게 됐어요.” “평발 이겨내고 마라톤에 중독됐죠” 김학윤(金學倫·58) 원장 42.195km의 마라톤 완주만 어림잡아 90회 이상. 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풀코스를 하루에 뛰는 철인3종경기 아이언맨 코스는 네 번이나 달렸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한 선배 덕분이다. “어느 날 의사 등산모임에서 훨씬 나이 많은 선배에게 뒤처지는 거예요. 비결을 물었더니 마라톤이라더군요. 그래서 바로 시작했죠.” 평발인 그에게 고통은 따라다녔지만, 조금씩 참고 극복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다 마라톤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그의 관심은 마라톤에서 수영, 자전거로 옮겨가며 ‘아이언맨’이 되었다.
- 2017-03-3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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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장영준 대한바이애슬론연맹 회장
- “치과의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세요?” 조윤선 문화체육부장관이 그를 보고 던진 첫 질문이었다. 장영준(張永俊·58) 회장은 대한바이애슬론연맹을 대표해 나간 자리에서 받은 그 질문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조 장관이 아니라 누구라도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바이애슬론이라는 비인기 동계스포츠를 대표하는 자리에 치과의사라니. 더군다나 지금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중요한 시기. 그는 어떻게 동계스포츠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영준 회장은 사실 치과의사들 사이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올해 1월까지만 해도 그는 선거에서 당선된 대한치과의사협회의 부회장이었고, 그 전부터 협회 기획이사와 홍보이사 등을 경험한 회무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받아왔다. 때문에 치과계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장영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를 리 없다. 그를 치과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직함이 있다. 바로 연세대학교 치과대학동문회장이라는 자리. 현재 국내에는 의대보다 훨씬 숫자가 적은 11개의 치과대학이 있고, 그만큼 의과대학에 비해 결속력이 강하다. 한때는 어떤 대학 동문회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에 따라 협회 회장이 바뀐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이렇게 그는 뼛속까지 치과의사 그 자체다. 벽안의 한국인 서안나와의 인연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조윤선 장관의 질문에 장영준 회장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론 스포츠도 하나의 전문적인 분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격이 필요한 분야는 아니잖아요. 단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운동과는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치과의사들에 대한 인식이나 위상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영준 회장의 바이애슬론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올해 4월이 그 시작이었다. 바이애슬론 연맹은 곧 있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성적 향상을 통해 외국인 선수의 귀화를 야심차게 추진했는데, 그중 한 선수인 러시아 출신의 프롤리나 안나(한국이름 서안나·32)의 후원 요청을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바이애슬론의 주 무대가 유럽인 만큼, 활발한 활동을 위해서는 스폰서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바이애슬론은 제게 낯선 스포츠였죠. 그러나 제가 운영하는 의료법인 메디피움 이름으로 후원을 해달라는 선수 에이전시 측의 요청이 있었어요.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태극 마크를 달고 뛸 선수를 돕는 일이라 기분 좋게 동의를 했죠.” 후원이 결정된 프롤리나 안나는 2009년 평창 세계선수권대회 스프린트 4위, 계주경기 1위를 차지하고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여자 스프린트 7.5km 경기에서 4위를 기록한 세계 정상급 선수다. 이런 그의 응원이 힘이 됐는지, 안나는 한국 바이애슬론 역사상 첫 세계선수권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8월 27일 에스토니아 오테페에서 열린 2016 바이애슬론 하계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스프린트 종목에서 22분 29초 01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음 날 열린 여자 추발 종목에선 3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동메달을 하나 더 따냈다. 평창에서의 금메달을 바라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린 셈이다. “안나는 결혼과 함께 잠시 은퇴했던 선수였어요. 그러다 2년 만에 복귀했는데 지난여름의 성과로 주변의 우려를 한 번에 불식시켰어요. 여성 운동선수들은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 분비가 늘면서 오히려 성적이 더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아마 안나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후원자에서 진두지휘하는 수장으로 일각에서는 마치 용병을 사 모으듯 외국인 선수를 귀화까지 시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대표를 출전시켜야 하는 바이애슬론연맹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바이애슬론의 올림픽 출전권은 국가 순위가 기준이 되는데, 이 순위는 9번의 월드컵과 1번의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결정된다. 그런데 한국의 2015~2016 국가 순위는 25위로 22위까지만 주어지는 자동출전권을 얻기는 어려운 상황. 게다가 남자 대표의 경우 성적이 나빠 세계선수권 출전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2016~2017 시즌에서 출전권을 확보하려면 성적을 낼 선수가 필요했다. 장 회장은 “귀화 선수를 더 확보하려고 추진하고 있는데 쉽진 않다고 들었어요. 여자 선수는 선수층이 얇아 보강이 필요하다고 하고. 이런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은 단기적인 성과만 내주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어린 선수들이 기량을 갖추는 데 마중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안현수 선수가 쇼트트랙 종목의 수준이 낮은 러시아에 가서 금메달도 따고, 러시아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기여한 것처럼, 안나도 바이애슬론 수준이 낮은 한국에서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죠”라고 말했다. 장 회장은 안나의 후원식이 열리던 날 안나의 성적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후원이 결정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바이애슬론연맹 회장직에 도전하게 됐고 지난 7월 29일 열린 투표에서 제5대 대한바이애슬론연맹 회장에 당선됐다.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된 셈이다. 그 과정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3월에 국민체육진흥법이 바뀌고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되면서 새누리당 염동렬 의원이 맡고 있었던 전임 회장자리가 자동으로 공석이 됐어요. 국회의원의 체육단체장 겸직 불가 의견도 있어 새 회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들었는데 문득 욕심이 나더라고요. 아마 안나를 후원하면서 바이애슬론 매력에 빠진 모양이에요(웃음).”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평창올림픽을 위해 애쓰고 있는 입장에서 일련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올림픽이 마치 범죄의 온상이라도 된 듯한 지금의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말이다. 장 회장은 당연히 성공적 개최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맹과 조직위원회가 맡은 역할이 달라 세세하게 알긴 어렵습니다만, 지금의 상황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창올림픽은 국가적인 사업이라는 점이에요. 실제로 이번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많은 사람이 애쓰고 있고요. 이미 IOC에서도 실사를 다녀갔고, 경기 준비 진행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받았어요. 한 차례 세계대회를 치러본 경험도 있고, 경기장도 12월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일만 남았어요. 연맹 예산이 적어 홍보활동에 많은 한계가 있지만 좋은 성적을 내고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응원도 열심히 해주시고, 많이 보러 와주시면 좋겠어요.” 이종결합으로 대중화 앞당길 것 바이애슬론은 국내에선 어쩔 수 없는 비인기 스포츠이지만 유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국내의 프로야구나 프로농구에 비견될 만큼의 인기 스포츠 중 하나. 유럽 일부 국가에선 하루 24시간 바이애슬론 경기만 방영하는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 역대 올림픽 성적을 보면 독일이 가장 강국이고, 그 뒤를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뒤쫓고 있다. 장 회장은 “바이애슬론은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사격이 결합된 경기예요. 선수들은 총을 등에 맨 채로 스키를 타고 일정 거리를 달리다가, 사격장에선 사격을 겨뤄요. 바이애슬론이 인기가 있는 이유로는 두 가지 경기, 그러니까 스키와 사격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과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페널티가 주어지는 역동성이 꼽히죠. 이 밖에도 꽤 흥미로운 요소가 많아요. 한 가지 경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주도 있고, 앞 주자를 앞질러야 하는 추적 경기도 있어요. 올림픽에서는 11개의 메달이 걸려 있는 종목이니까 비중도 꽤 높다고 봐야 합니다. 남자 5개, 여자 5개, 혼성 1개의 경기가 진행돼요”라고 설명한다. 장 회장이 바이애슬론연맹을 맡으면서 관심 갖는 것 중 하나는 바이애슬론의 대중화다. 결국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되지 않고서는 인지도와 성적 모두 다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바이애슬론은 생각보다 즐길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꼭 스키가 아니더라도 자전거와 같은 다른 종목과 결합할 수도 있고, 사격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죠. 요즘엔 레이저를 이용한 장비들도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대중화를 위한 연맹 차원의 행사가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의 반응이 대단했어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목소리 듣고 싶어 그가 속한 의료법인 메디피아는 치과뿐만 아니라 의료검진센터 등 다양한 과목이 결합된 의료법인이다. “메디피아를 시작한 시기는 1990년이었어요. 다른 과목 의사들과 의기투합해서 만들었는데, 어려움이 생겨 경매에 넘어가게 된 상황까지 처해 할 수 없이 모든 지분을 제가 인수하게 됐죠. 2000년 1월 1일에 이사장이 됐어요. 경영 정상화가 되면서 2013년에는 판교에 분점도 냈죠. 치과의사가 다른 메디컬 분야의 경영에까지 참여한다는 것이 한계도 있고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직의 힘과 팀워크 그리고 소통의 중요성을 알게 됐어요.” 그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바로 치과의사를 위한 일종의 사회운동, ‘행복한치과만들기 준비위원회’다. 그는 이 위원회를 통해 철학자 강신주를 초청, 대담을 진행한 적도 있고, 청년이나 여성 치과의사들과의 모임도 진행했다. “치과의사들에게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죠. 치과의사들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다양한 계층의 치과의사들과 터놓고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젊은 치과의사들이나 여성 치과의사들의 생각은 어떤지, 동료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다양한 시도들을 했습니다.” 이런 모임에서 여러 직함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놓지 않는 것은 치과의사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이다. 이제는 직원이 300명인 의료법인의 대표라면 진료를 쉴 법도 한데, 아직도 매주 환자를 대면하고 직접 진료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유에 대해 묻자 간단하게 대답한다. “배운 것이 이것이고, 치과의사니까요.”
- 2016-11-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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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인생 : 코이카 해외봉사단] 은퇴후 제2의 삶, 지구촌에서 봉사를
- 막연히 생각하는 은퇴 후 삶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평소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고, 이왕이면 내 경험을 살리고 싶다. 여기에 남을 돕는 보람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런 기회는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해 세계인을 돕는 코이카가 그것. 세계에서 활약한 다양한 시니어를 만나, 코이카를 통해 어떻게 보람 있는 삶을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한국국제협력단은 일반적으로 영문명의 약자인 코이카(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91년 4월 정부출연기관으로 설립된 코이카는, 우리 정부의 대외무상원조 전담기관 역할을 담당해 왔다. 미국 정부가 1961년 설립한 평화봉사단(Peace Corps)과 일본의 일본국제협력기구(日本國際協力機構, JICA)가 이와 유사한 기관으로 볼 수 있다. 정부가 미국의 평화봉사단을 모델로 1989년 설립한 한국청년봉사단이 코이카의 전신이다. 역할은 말 그대로 개발도상국 원조사업이다. 봉사단은 개발도상국 주민과 함께 생활하며, 우리의 경험과 기술을 전수함으로써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지원하는 것이다. 코이카에서 운영하는 봉사단은 크게 3가지로, 마이스터 고등학교나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드림봉사단과 코이카 봉사단과 중장기 자문단이 있다. 드림봉사단을 제외하면, 자격조건에 ‘나이’라는 단어는 없다. 시니어 향한 문호 ‘활짝’ 열려 있어 하지만 구직난이 심해진 요즘 젊은이들이 취업을 대비하기 위한 ‘스펙 쌓기’용으로, 때로는 정부가 청년실업 문제 대책용으로 활용하면서 ‘청년들이 주인공인 사업’이란 색깔이 덧입혀졌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코이카는 시니어들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있고, 실제로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단원 중 시니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적지 않다. 2015년 12월 기준으로 전체 파견인원 1350명 중에서 50대 이상이 365명으로 27%를 차지한다. 적지 않은 수치다. 여기에 40대 113명을 더하면 중·장년층이 35%까지 증가한다. 70대도 5명이나 활동 중이다. 이에 대해 코이카 월드프렌즈 모집팀의 송희수 팀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은퇴 후의 삶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코이카에서는 이런 분들의 도전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사회에서 쌓았던 지식과 경험을 개발도상국을 위해 베풀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될 테니까요. 각국에서 요청하는 대부분의 자원도 이런 지식과 경험이 있는 인재들입니다.” 봉사단과 자문단 두 갈래 길 시니어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코이카 봉사단, 다른 하나는 코이카 자문단이다. 봉사단은 쉽게 말해 실질적인 기술전수의 성격이 짙다. 교육과 보건, 공공행정, 산업에너지, 농림수산 5개 분야에서 세부 직종을 모집해 현장에서 교육이나 이와 관련한 사업을 실시한다. 5개로 나눠진 분야가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현실적이다. 예를 들어 산업에너지 분야는 자동차 정비나 용접, 전기 설비가 포함되어 있고, 농림수산에는 농업과 어업 인력을 모집한다. 대부분 특정 분야의 기술직이다. 최근 현대자동차에선 직원들의 퇴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코이카와 협력 방안이 논의되고 있을 정도다. 대부분 전문직종이기 때문에 전문성 없이는 활동이 불가능해, 외국어 능력보다는 모집직종에 대한 전문성을 우선시한다. 기술이 먼저라는 이야기다. 이 중 만 50세 이상, 해당 직종 10년 이상 경력자는 시니어 단원으로 분류돼 배우자와 동반도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코이카 봉사단은 혼자 가는 것이 원칙이다. 봉사단의 임기는 2년이 기본. 현지에 파견되면 최대 3년까지 연장이 가능하고, 귀국 후 재지원도 할 수 있다. 재지원의 경우 횟수 제한은 없지만, 심사 과정에서 가산점이 없어 다른 지원자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한다. 코이카 자문단은 봉사단과는 조금 다르다. 교육과 보건, 공공행정, 산업에너지, 농림수산이라는 5개 분야는 같지만, 정책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코이카 봉사단이 조직의 말단, 그러니까 각 도시의 읍면 단위에서 실무를 처리하는 역할이라면, 코이카 자문단은 각 국가의 정책 결정자들이 올바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임기는 6개월에서 1년이다. 당연히 자격요건도 다르다. 해당 직종에서 10년 이상 실무 경력이 있고, 영어나 현지어로 강의나 보고서 작성이 가능해야 한다. 행정적인 업무가 대부분인 탓이다. 때문에 지원자들도 차이가 있다. 코이카 자문단의 경우 대학교수나 대기업 임원, 공공기관이나 정부부처의 고위공무원 출신들이 많다. 오세훈 前 서울시장이 시장직에서 물러나자마자 르완다와 페루에서 6개월씩 자문단으로 활동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봉사활동이라는 책임감 있어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경험자들은 코이카를 통해 다른 국가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국가를 대표하기 때문에 단순히 노후에 시간을 보낸다는 개념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직업군인 출신으로 2013년부터 2년간 몽골에서 체육교육 활동과 지역개발 사업을 진행했던 류진현씨는 이렇게 조언한다. “노후의 삶을 계획하는 방안 중 하나로 코이카를 고려할 때는 봉사활동임을 확실히 인식해야 해요. 국민의 세금으로 활동하는 것인 만큼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노후를 해외에서 즐긴다는 생각으로 도전한다면 본인도 불행해지고, 예산도 낭비될 수 있어요.” 실제로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모집을 담당하는 코이카 월드프렌즈 모집팀의 김혜원씨는 많은 지원자들을 만나다 보면 다양한 사례를 접할 수 있다고 한다. “코이카를 종교기관으로 착각하고 선교활동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이런 종교활동은 코이카에서 엄격하게 제한하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또 이민의 개념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려는 경우도 있는데 불가합니다.” 코이카 측에서 원하는 인재상도 류진현씨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문지식과 현지 적응력, 봉사정신 이 3가지를 가진 인물이 코이카가 바라는 인재의 모습이다. 해외체류 위한 생활비, 거주비 등 지원 코이카 봉사단이나 자문단의 파견은 기본적으로 해당 국가에서 필요한 분야에 대해 한국 외교부로 요청이 들어오면, 코이카에서 원조 인원이나 범위를 결정해 파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언제 어느 국가에 수요가 발생할 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코이카 봉사단이 횟수를 정해 놓지 않고 수시로 모집하는 것도, 특별한 희망국가가 있다고 해도 그 바람이 이뤄지기 힘든 것도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자문단의 경우에는 1년에 두 차례 모집한다. 자세한 일정이나 모집분야, 자격을 알고 싶다면 홈페이지(kov.koica.go.kr)를 확인하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 경쟁률은 보통 3대1에서 5대1 수준. 그러나 봉사단에선 한국어 교육분야, 자문단에서 공공행정 중 경제분야는 10대1 이상을 기록하기도 한다. 농림수산 분야는 치열하지 않다. 이렇게 선발이 되면 한국과 현지에서 적응을 위한 별도의 교육을 받고, 전 세계 40여 개국으로 파견된다. 파견국은 주로 아시아 국가가 꾸준한 수요를 보였으나 최근에는 중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봉사단원이 받는 금전적 지원은 얼마나 될까? 일단 많은 금액은 아니다. 코이카 봉사단의 경우 현지 생활비, 주거비 등이 지원되는데 각 국가의 물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실무자들의 설명으로는 시니어 단원들에게 대략 한화로 월 150만~200만원이 지원된다고 한다. 여기에 2년간의 활동을 마치면 귀국하면 국내 정착지원금을 지원하는데, 월 50만원씩 총 1200만원이 지급된다. 봉사단의 시니어 단원은 일반 단원에 비해 생활비는 2배, 주거비는 1.5배 더 받고 있다. 코이카 자문단의 경우에는 별도의 정착지원금이 없다. 대신 현지 정착비, 생활비 명목으로 월 4000달러 정도가 지급된다. 인생의 후반기 돌아보는 기회 아무래도 해외생활에서 걱정하는 부분은 건강과 안전이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이는 코이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현지에서 활동을 해야 할 단원들이기 때문에 건강관리 부분은 가장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 건강검진이나 의료비, 의료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안전도 마찬가지다. 최근 테러 위협이 증가하는 국가들이 많아지면서 문제가 되는 나라들은 아예 지원 대상 국가에서 제외하고 있다. 또한 현지에 파견되어 있는 코디네이터를 통해 단원들 안전관리를 위한 보호·철수 계획을 수립해 놓고 비상시를 대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파견되는 국가는 기초적인 안전은 보장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코이카의 전신인 한국청년봉사단부터 각종 자문역할로 인연을 맺고 많은 봉사단을 만나 온 이태주 한성대 교수는 유의해야 할 점과 코이카 활동이 갖는 장점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특히 시니어들은 정신적인 건강관리도 중요해요. 한국 남성들, 시니어들은 혼자 서기 힘든 존재인 경우가 많아요. 그랬던 사람들이 현지에선 밥 먹는 거, 양말 빠는 것까지 혼자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겪는 고독이나 정신적인 건강을 주의해야 해요. 하지만 시니어들이 그 난관을 딛고 다녀오면 다른 인생이 열리는 경우가 많아요. 뒤늦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고, 시각도 열리고 유연해져요. 국가적으로도 기여할 수 있고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려는 시니어들을 보면 되레 제가 감동 받기도 해요.”
- 2016-09-26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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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하면 떠오르는 스포츠는?
- 두 질문의 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과 씨름 선수다. 최근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졌지만 1980~90년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는 체육관은 연중 열리는 민속 씨름 경기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피어오른 민속 씨름 인기의 중심에 ‘만 가지 기술’을 구사한다는 이만기가 있었다. 민속 씨름이라는 이름은 1983년 씨름이 프로화되면서 기존의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의 스포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몽골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지에 씨름과 비슷한 운동이 있고 민속 씨름 전성기에는 몽골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근대적 스포츠로서 씨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타난다. 이 무렵 단성사의 소유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조직한 ‘유각권투구락부’에서 회원들에게 씨름과 유도, 복싱을 익히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10월 7일 단성사에서 씨름과 유도, 복싱 3개 종목 경기가 열려 점수제에 의해 우열을 가리고 상품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울YMCA는 민족 스포츠인 씨름을 장려하기 위해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스타는 김윤근(金潤根)이었다. 1930년대의 이만기인 셈이다. 김윤근은 이 대회를 비롯해 선수 시절 200여 차례 씨름대회에서 황소 200여 마리, 우승기 88개를 차지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에는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방위군 비리와 관련해 사형됐다. 씨름계로서는 큰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27년 12월 27일 창립한 조선씨름협회는 농구 축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우리 힘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 거의 모든 종목은 조선체육회가 대회를 주관하고 주최했다. 서울YMCA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한 1년 뒤인 1929년 9월 28일 조선체육회는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씨름협회와 공동 주최로 제 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중동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협성실업, 보성고보, 숭인상업 등 8개 팀이 출전한 단체전 결승에서 경신학교는 보성고보를 접전 끝에 7-6으로 누르고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개인전 결승에서는 이도남이 최재빈을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씨름, 유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씨름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씨름은 우리 민족의 혼을 이어 주는 운동으로 꾸준히 발전했고 프로화된 민속 씨름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로는 이만기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성률 장사를 꼽을 수 있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최고의 씨름 선수였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제 55회 대회부터 1976년 제 57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슈퍼헤비급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2관왕을 3년 연속 차지한 것을 비롯해 1983년 제 63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성적이다. 하형주가 씨름 기술을 응용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씨름과 레슬링, 유도로 이어지는 연계성 그리고 씨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 약관의 이만기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장소다.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운 지 10년 만에 이룬 첫 개인전 우승이자 프로화된 씨름 사상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날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후 1990년 27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까지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 그리고 11차례의 번외 경기까지 이만기는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47차례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상금이 아니고 예전처럼 황소를 줬으면 큰 농장을 차려도 됐을 것이다.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의 빛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포츠팬들이 잊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씨름판에는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군웅할거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털보' 이승삼 그리고 홍현욱,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대회든 전국대회든 우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만기는 경력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 우승 후보군에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만기는 지방에 있는 대학(경남대학교 2학년)에서 씨름을 하는 무명의 선수였을 뿐이다. 천하장사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16일 펼쳐진 한라장사 결승전은 약관의 천하장사 탄생 예고편이었다. 그 무렵 최고 수준의 기술 씨름을 자랑하던 최욱진(경상대학교 3학년)은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한라장사 꽃가마에 올랐다. “나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이만기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체격이 이만기보다 작은 최욱진이 자세를 낮추며 파고드는 바람에 가슴에 약간의 부상까지 있었다. 민속 씨름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리는 초대 천하장사 결승전 카드는 절묘하게 이뤄졌다. 키 172cm의 최욱진이 준결승에서 182cm의 홍현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한라장사와 천하장사 두 개의 타이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8강을 목표로 했던 이만기(182cm)는 준결승에서 ‘한 번만 이겨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이준희(195cm)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몸무게에 관계없이 겨루는 천하장사 경기에서 기술 씨름의 두 달인이 한 체급 위인 백두급 장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승전 모래판에서 마주 서게 된 것이다. 기술 씨름 달인들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그때 전국 방방곡곡의 가정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를 보는 이들이 넘쳐 났다. 요즘처럼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면 ‘국민 드라마’의 수치를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2-2로 맞선 가운데 이룰 만큼 이룬 이만기로서는 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최욱진은 한 판만 잡으면 한라장사에 이어 천하장사까지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이 더했을 것이다. 이때 이만기는 평소 연습을 거의 해 보지 않았던 호미걸이를 승부수로 던졌다. 씨름계에서 쓰는 표현인, ‘뽑아 드는’ 들배지기가 이만기의 상징적인 기술이고 이외 밭다리, 잡채기, 뒤집기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후 7년여 동안 모래판을 평정하게 되는 이만기지만 이날 구사한 호미걸이 기술은 이제 와 생각해도 ‘왜 그때 그 기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도 기술과 비슷한 호미걸이 기술로 이만기는 자신의 선수 생활 첫 개인전 우승이자 천하장사 우승을 이뤘다. 천하장사 이만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모래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래를 흩뿌리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만기는 1980년대 스포츠 전문 사진기자로 활동한 R씨와 매우 친했다. 이만기는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마다 R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물처럼 터진 프로화의 물결 8월을 스포츠 열기로 뜨겁게 달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있었다.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의 선수를 포함한 18명의 남자 축구 대표팀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전원이 프로 선수였다. 축구는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7명이나 됐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을 아마추어와 프로 양대 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할 만하다. 물론 이때 이전에도 프로 종목은 있었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가 대표하는 프로 복싱과 1960~70년대 최고 선수였던 한장상으로 대표되는 골프가 1980년대 이전의 몇 안 되는 프로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개인 종목으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82년 단체 종목인 야구가 프로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는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마추어 팀을 포함한 축구 프로 리그인 슈퍼리그(K리그의 전신)가 출범했다. 민속 경기인 씨름도 같은 해 프로화가 돼 이만기 등 신예의 등장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1982년 3월 프로 야구, 1983년 4월 민속 씨름, 1983년 5월 프로 축구다. 이들 종목은 앞서기니 뒤서거니 프로화 물결에 합류했다. 잠시 끊겼던 프로화 물결은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를 무대로 펼쳐진 대학 농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7년 남자 농구가 프로화되고 이어 여자 농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남녀 배구가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인기 종목 대부분이 프로로 재탄생했다.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가 되면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에 올랐다. 이 사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를 기반으로 끌어올린 경기력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식 종목 재진입이 확실시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메달에 도전할 만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프로화 3총사 가운데 씨름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인기 하락과 함께 프로 종목으로서 내세울 만한 콘텐츠 없이 암흑기를 겪고 있어 스포츠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9-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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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아직도 애인이 필요하다
- 꿈은 인생에 장마가 지고, 눈이 올 때마다 점점 깊숙하게 땅속에 처박힌다. 하지만 실종된 꿈을 찾지 않으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꿈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꿈이 보인다. 이렇게 자신을 후벼 파서 꿈을 찾다 보면 옵션이 생기고, 다채롭고 재미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 인생을 한 번 글로 서봤다. ◇꿈의 발원지 초등학교 때 신작로로 등ㆍ하교했다. 역고개를 넘어 역말다리를 건너 다시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즐비한 읍내를 지나 산 아래 있는 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당시 신작로 양옆으로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끔 트럭이 지나갈 땐 먼지가 풀풀 날리어 사람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이 고향이다. 도서관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림에서 봤을 정도의 촌이다. 다행스럽게 학교와 집의 중간 정도에 살는 임명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명희 아버지는 필자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동화책과 위인전을 전집으로 사놓았다. 그 집은 여러 형제가 있지만 그 누구도 책을 즐겨 읽지 않았다. 하굣길이면 늘 친구 집에 들러 책을 팠다. 처음 ‘알프스 소녀’를 읽고 하이디에 빠진 후로 괴산의 하이디라고 생각했다. 책에 흠뻑 빠져 전집을 몇 번씩 읽었다. 그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명희는 깔깔거리고, 팔짝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필자는 마루 끝 구석에 앉아 고개가 아프도록 책을 읽었다. 해가 저물고, 그 집 식구들 저녁상이 들어올 때까지도 죽치고 읽었다. 천국이었다. 명희 어머니가 “영희야, 이제 해가 저물었다. 집에 가야지”라고 해야 그제야 일어나 땅거미 내린 1.5㎞의 신작로를 마치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 사뿐거리며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발견, 다시 꿈꾸다 늘 필자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때는 역사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이 다르게 흘러갔다. 매우 실망했고, 무기력해졌다.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가도 되고 싶었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작가 꿈을 꾼 적도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아무 생각 없는 주부로 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로서 자서전 쓰기 전문가로 나서게 되었다. 작가라는 토대 위에 ‘자서전 쓰기 전문가’라는 건물을 올린 것이다. 또 그것은 재능이라는 골조로 지어졌고 취향이라는 마감재로 모양을 갖추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은 특별함을 준다. 삶 속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진솔하고, 진실한 만큼 자신을 대신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다. 또 세월의 경험이 축적돼야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채워야 할 게 많고 더 부족함을 느낄 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 보면 꿈이 구체화하게 된다. 많은 사람과 필자가 자서전을 쓰며 받았던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필자의 어릴 적 꿈은 여장군이었다. 군인을 거느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또 작가도 되고 싶었다. 군인이 되고 싶은 것이 겉 꿈이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속 꿈이다. 첫 번째 꿈은 이미 사라졌고, 두 번째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다. 또 어릴 때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 매주 수요일 밤이면 누드크로키를 한다. 그 시간은 행복하다. 지금은 글쓰기 강사와 집필, 그림에 열중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냥 별이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더 나가보자. “내 꿈은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화법으로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꿈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내 몸이 체득해서 토해 내는 것이다. 또한 찾는 것도, 쇼핑하는 것도 아닌 매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와집 맏손녀 1956년 음력 섣달 보름, 밝게 비추는 달 아래서 저녁 먹고 한참 후에 필자는 태어났다. 오봉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산 아래, 앞에는 동진천이 흐르고,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에 첫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쁨이었다. 조부모, 부모, 고모, 일하는 아재들, 부엌에 밥하는 언니, 애 보는 사람 등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애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이유는 필자의 형제가 칠 형제여서다. 필자 느낌으론 학교만 다녀오면 갓난아기의 울음이 들린 것 같았다. 가방을 마루에 던진 채 심통이 나서 뒤 곁으로 확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 기억 색동저고리를 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추운 봄에 역고개를 넘어 학교에 가고 있자니 “주머니에 손 넣고 가지 마라” 하면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채 쌩하고 눈길을 지났던 것도 생각난다. 필자는 발을 동동거리며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아침이면 학용품 살 돈을 달랬다. 아버지는 잔돈이 없으면 읍내까지 가서 바꿔다 주었다. 가계부는 아버지가 기록했다. 필자에게는 별말이 없었고 필자도 어려워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셔널라디오를 사왔다.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필자는 라디오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 3학년 때는 아버지가 네모난 빨간 비닐 책가방과 쑥색의 슬리퍼를 사 왔다. 슬리퍼의 뒤축에 자갈이 수시로 박혀 그것을 빼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밤색 코르덴 바지를 뜯어 타이트스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집에 싱거 미싱이 있었고, 아버지도 미싱 기술이 있었다. 6학년 때는 주름치마에 스트라이프 무늬의 봄 스웨터를 사 주기도 했다. 그걸 입고 서울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가서 수세식 변소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사용 방법을 몰라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 물이 쏴 나오자 아이들과 함께 놀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양복 기술을 배웠다. 이태 정도 기술을 배우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주농고와 충북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산림청에 근무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면 대가 끊기게 되니 산속에 숨어 있었다. 할머니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6세 무렵, 무를 묻어 두었던 구덩이에 빠져 숨졌다. 하나 남은 아들을 애지중지하느라 쌀 두 가마니를 들여 군대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별 할 일이 없어서 책을 뒤적이거나 바깥마당 한쪽에 돼지를 길렀다. 누에와, 양봉도 했다. 잉크를 찍어 노트에 뭔가를 쓰는 것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필체가 좋았는데, 필자 보고 “글씨가 그게 무어냐”며 자주 타박하였다. 농사를 적극적으로 해 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고향에서는 조부모가 중농,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울 게 없었다. 다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패가 되어 어머니를 나무라곤 했는데 그게 유일한 분란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옆구리에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필자는 처음에는 울고불고했는데 나중에는 외면해 버렸다. ◇그 오해와 진실 아들은 남이다. 고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아내 편을 든다고 필자는 당장에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 필자 남편은 부모 편만 들고 효자이더니, 이제 아들은 마누라 편만 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난 그래서 불행해’ 라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 진다. 그래서 남편이 부모편만 들었을 때 마음이 상했던 걸 떠올렸다. 그 속상함을 며느리가 가져야 하는 거는 더 안 될 일이다. 남편은 자기 부모에게 잘했으니 효자였고, 아들은 자기 부인에게 잘하니 괜찮다고 마음 다잡았다. ◇둘째 아들 1 필자는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자라게 키웠다. 그래서 이 아이는 매우 주체적이다. 유치원 때의 일이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캐 오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한두 개만 가지고 왔으나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질질 끌고 왔다. 물론 주인아저씨가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갖고 가라고 했지만 가져올 수도 있고, 안 가져올 수도 있는 그 순간 아들은 이렇게 스스로 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모든 학용품도 스스로 선택해서 사도록 했다. “친구들은 어떤 회사 물건을 사 왔니”,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괜찮아 보이니”라고 한 뒤 돈을 주었다. 그랬더니 물건을 잘 골라왔다. 학교에서 폐휴지를 가져오라고 하면 위층에 사는 외동아이는 그 엄마가 나서서 난리다. 학교까지 날라다 주고, 복도가 시끄럽게 한바탕 소동이다. 아들은 만약 집에 신문지가 없으면 경비아저씨한테 사정이라도 해서 지하에 갖다 둔 신문지를 바퀴 달린 가방에 넣고 혼자 끙끙대며 끌고 간다. 애처롭지만 그냥 두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려고 할 때도 “엄마, 보이스카우트 해보고 싶어”라며 “보이스카우트는 단복 입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이라며 필자한테 설명했다. 그래서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고 했더니 아들은 3년 동안 스스로 열심히 했다. 운동장에서 1박 2일 야영훈련 때도 필요한 것 외에는 스스로 물건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끝난 후 아이들이 버리고 간 물건 중 먹을 만한 것은 전부 집으로 한 보따리를 가져왔다. 대견했다. 5학년 때는 자전거를 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전거를 요구하면서 시장조사 뒤 비교 분석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한술 더 떠 “네가 가서 사와라”라며 13만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서비스품목까지 모두 챙겨왔다. 자기가 골라온 자전거라 그런지 애착을 가졌다. 6학년이 끝나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스카우트활동을 잘했다고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런데 담임교사가 “진우 어머니세요. 어쩜 학교를 안 찾아오세요. 원래 진우가 단장감인데 할 수 없이 학교를 자주 오는 어머니 중의 아들을 단장으로 시켰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네 괜찮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란 대답만 했다. 중고생이 되면 학부모들은 학교 앞에까지 자가용을 끌고 가서 모두 픽업하느라 난리다. 그러나 필자는 가지 않았다. 버스 네 정거장 거리였다. 혼자서 해결하라고 했다. 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잘못하더라도 아이들과 다투더라도 혼자 해결하도록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는 하고 있었다.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학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청소를 해 놓으면 학원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하니 그 일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근면, 성실성까지 있는 아이다. 아들이 빠져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게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얼마나 몰두하든지 ‘어주 구리, 이것 봐라’ 했다. 이때는 필자도 속이 좀 탔다. 전국게임회장이 되어 게임머니를 주무를 땐 특히 그랬다, 그러나 필자는 참았다, 되레 ‘어 이놈 봐라, 사업하면 잘하겠네’고 오히려 좋게 봐줬다. 더구나 대학 가서는 거의 안 했다. 안심됐다. 하지만 결혼하고 게임을 다시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며느리가 싫어하니 담배와 게임을 끊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가서도 후배와 선배, 교수들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 자기한테 자꾸 일을 맡긴다고 투덜댄다. 일을 맡기면 잘해낼 뿐 아니라 믿음이 가서 일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완급을 조절해 보라’ 고 조언하는 게 전부다. 사실은 필자도 큰아들한테 보다는 작은아들한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된다. 군대에 복무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럴 때만 대꾸를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신 어머니로서 아들을 향한 기도를 늘 했다. 어머니가 올리는 기도가 대단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운동을 시작한 지 15년 되었지만 도복을 입고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체대 체육관에 가 보았다, 열심히 군인으로 생활하고 이다음에 퇴직하면 운동을 보급하면서 살아갈 예정. 자기의 인생목표가 뚜렷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스스로 잘 헤쳐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다. 상의하거나 어떤 사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 진지한 의견을 교환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않으려 매사 애를 쓴다. ◇밤새워 할 부부이야기 찰칵찰칵 엿장수 가위 소리에 골목이 떠들썩했다. 남루한 차림의 어른과 아이들이 그 옆에서 뭔가 호기심에 찬 눈을 굴리고 있다. 엿판을 실은 손수례 아래에는 구멍 뚫린 솥단지, 고무신짝, 철사 토막까지 구경거리가 많았다. 단조로운 시골 마을에 엿장수의 등장은 일종의 문화행사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웃기웃. 무쇠 가위를 엿에 대고 치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에 놀러 갔는데 엿장수 가위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엿가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웃집 여인은 대뜸 "그 가위 마음에 들면 줄까" 한다. 말이 바뀔까 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가위를 받아들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어떤 선물보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퇴근 후 남편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 가위 어디서 가져 왔나. 당장 버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닌가. . '엿장수 한 조상이 있나 봐, 왜 그래'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그냥 “구질구질해서 싫다”는 것이었다. 개포주공아파트 4층, 지금은 분리수거를 하지만 그 당시는 쓰레기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그냥 투하했다. '쨍그랑'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오메, 아까운 엿가위, 지금도 가위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필자 집에는 골동품과 민속품이 즐비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좋으니까 모든 것이다. 심란한 마음이 들 때 먼지를 닦으면서 만지작거리면 얼마나 행복한지. 며칠 전 일이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더니 "이사를 하게 되면 저런 것들도 가져갈 거야"라고 민속품을 삿대질하면서 다그쳐 묻는다. 필자는 이에 “물론이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방으로 슬슬 가더니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 부부는 잘해 보려고 하거나, 좀 더 친하게 지내보려 노력하면 할수록 결국은 티격태격 싸운다. 의지와 사고방식이 참 많이 다르다. 어느 날, 무릎을 탁 쳤다. ‘본처가 아닌 첩처럼 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자는 달라졌다. 이야기 중에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면 ‘아니 여보, 왜 이리 졸리지’ 핑계를 대며 안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불을 켜 놓고, 할 일을 하든가 잠을 청하게 되었다. 필자는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한다. ‘그랬군, 이제 고생 끝났네, 대단해요’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주면서 말이다. ‘미주알고주알’ 해봐야 누더기가 되기에 십상임을 몸의 체득을 통해 알고 있다. ◇인수봉 정상에 오르다 인수봉을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북한산 바위를 오르는 연습을 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동호회에 참가해 원효길, 우정1ㆍ2길. 인수AㆍB길에서 바위에 손을 짚어 기어올랐다. 한 발자국만 헛디디면 그대로 가는 거다. 의도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뭐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 봉우리인 인수봉, 백운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불렸다. 인수봉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고양시에 걸쳐 있는 삼각산 세 봉우리 가운데 하나. 세 봉우리 모두 산 정상에 바위 암반이 그대로 노출된 모양이라 산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직접 올라도 그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특히 인수봉은 81m가 매끄러운 화강암 봉우리다. 필자가 이 봉우리에 도전한 그 날은 눈발이 스산하게 날리며 찬바람이 제법 불었다.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었으나 그냥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물러날 곳은 없다. 그냥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이 올라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필자 팀은 산봉우리의 기쁨을 느끼며, 줄에 의지하여 모두 하산했다. 그때 로프 줄에 엉킨 젊은 두 남녀가 줄을 풀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과 삶은 한 끗발 차이다. 사람들은 사고를 보고도 또 올랐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인수봉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했다. 이 세상에서 줄을 타고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에 잊지 못할 한 편의 드라마였다.
- 2016-07-25 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