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미쳐도 단단히 미쳐 살았다. 그러니 일이 터질 수밖에. 주목할 만한 기록이 나왔고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미치지 않고서 도달할 길이 없다. 선무당처럼 대충 미쳐서는 히말라야 고봉을 오를 수 없다. 지구상의 극한적 험지인 세 극지(히말라야, 남극, 북극)를 찾아 누빈 탐험가 허영호(65). 그의 격렬한 모험이 거둔 성과가 경이롭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을 향한 온전한 몰입으로 삶을 만족스럽게 끌어온 성취는 더욱 놀랍다. ‘온전한 몰입’이 있는 인생이라는 게 어디 시중에 흔하던가.
일찍이 소년기 때 동네 산꼭대기에 오르는 쾌감을 맛본 게 등산에 빠진 계기였다지. 군대를 다녀온 뒤엔 인생을 몽땅 산에 걸기 시작했단다. 서막은 그저 그렇게 자연스러웠으나, 이후 산악 역사에 두고두고 마르지 않을 이름을 등기했으니 허영호의 행장은 사실상 비범한 것이었다.
허영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83년, 히말라야 마나슬루를 산소통 없이 단독 등정하면서였다. 마나슬루는 1972년, 돌연한 산사태를 일으켜 한국 산악인 16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고봉이다. 1987년 12월, 허영호는 다시 기세를 돋웠다. 세계 등반사상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성공했던 것. 이것으로 마침내 세계적 산악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1994년엔 남극점을, 1995년엔 북극점에 도달했다. 진기한 드라마를 연속 상영한 셈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허영호를 ‘7대륙 최고봉과 남극점, 북극점 도보 탐험에 성공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로 기록하고 있다. 이쯤이면 역사적 인물이다. 역사에 남는다는 것. 허영호는 그게 매우 기쁘다.
“나는 실로 꾸준히 세계적인 것에 도전해왔다. 매번 엄청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모험에 나섰다. 가치 있는 도전이라는 것, 역사를 가치 있게 만든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세계적인 역사를 만들지 못하는 가치 없는 도전이란 말짱 꽝이지 않은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강렬한 집념. 그게 모험에 나서게 했다는 얘기인가?
“극지에 도전하는 모험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과정의 연속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이 남는다는 건 고귀한 일이지 않은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등반을 죽기 전에 완료하겠다는 게 나의 지향이었으며, 그게 모험에 나서게 하는 힘이었지.”
세상의 위업들은 맹렬한 명예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당신에게서도 강한 명예욕이 느껴진다.
“명예, 명망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럽게 찾아오더군. 그러나 명예라는 건 결과적으로 오는 것이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백지상태인 미답의 땅을 섭렵한다는 성취감, 극지의 신기한 자연 풍경에 대한 감동, 이런 요소 역시 나를 모험에 빠지게 했다.”
히말라야에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산악인들도 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흔히 탄식한다. 공연히 위험한 등산을 자청, 하나뿐인 아까운 목숨을 허무하게 버리는 게 안타까워서.
“프로 산악인들의 등반은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등산과 다르다. 특유의 어떤 정신세계를 가지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예 죽음을 각오하고 출발하나?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약해진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재앙이 벌어지는 게 인생이지만 여하튼 어디서건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난 산이 좋아 산에서 죽을래!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바보에게나 어울린다. 나는 항상 죽는 일 따위는 내게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등반에 나섰다.”
죽을 뻔했던 무산소 등정
에베레스트는 이 산의 측량 전문가였던 영국인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초모랑마’라는 티베트 이름으로 불린 산이었다. ‘세계의 어머니 신(神)’이라는 뜻으로 티베트인들은 예로부터 이 산을 숭배해왔다. 산악인들도 정신의 산, 신비의 영산으로 숭상하며 거룩한 사유를 펼치곤 한다. 생사 여부마저 산령(山靈)의 뜻에 달렸다는 식의 감상을 털어놓기도 한다. 허영호에게 이는 어림없는 생각이다. 내 목숨은 오직 내가 간수할 수 있을 뿐 그 무엇도 간섭할 수 없는 거라는 실사구시에 충실할 따름이다. 완벽한 사전 준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정신력, 팀을 통제하는 엄격한 규율. 그것들만이 사고를 피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라 믿는다.
특히 원정 대원들의 관리에 추상같다. 인상에 쓰여 있듯이 평상시엔 온유하지만 등반할 때는 돌변한단다. 엄격하고 날카로운 독수리로 변하는 모양이다. 눈빛부터 사납게 바뀐다는 게 아닌가. 예측할 수 없는 대자연이 성깔을 부리면 한순간에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해서, 군기반장처럼 엄한 규율로 대원들을 다그친다. 덕분에 단 한 사람의 대원도 다치지 않았으며, 이는 다른 원정대에선 찾아보기 드문 성과라고 한다. 그러나 위기 상황은 빈발했다. 벼랑에서 추락했고,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눈사태에 휩쓸려 파묻혔다가 셰르파에 의해 구조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죽음과 직면하기를 거듭했다.
“1993년 4월, 무산소 등정으로 에베레스트를 횡단하며 비박할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산소 등반과 무산소 등반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걸 절감했다고. 가슴이 터져나갈 듯 고통스러웠는데 심장이 당장 멈출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지. 하늘을 쳐다보며 절규를 했다고. 천신만고 끝에 38시간 만에 캠프에 도착, 비로소 물을 마실 수 있었지. 오열을 하면서.”
지독한 사경을 겪고도 또다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배짱이라니.(웃음)
“나 이젠 다시는 산에 안 가! 그런 외침이 속에서 터지긴 한다. 아주 잠깐, 현장에서만.(웃음)”
기어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자연에 도전하는 게 서구적 알피니즘의 전통이지만, 우리 선인들은 산을 그저 욕심 없이 편하게 노닐었다. 이게 더 수준 높은 산행 방식 아니었을까?
“과학의 발달로 일찌감치 산과 바다로 당차게 진출한 서양과 달리 우리는 다분히 정적인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봤다. 어릴 적에 부모님들은 흔히 자식에게 타일렀다. 산에 가지 말라고, 물가에 가지 말라고.”
우리 민족은 누가 말린다고 산수 간에 머물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DNA에 이미 산야의 기질이 상속된 게 아닐까.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양과 사뭇 다른 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도 일찍부터 등산이라 일컬을 만한 장르가 존재했다. 혹자는 승려들의 입산을 등산의 효시로 보며, 혹자는 신라 화랑도의 유산(遊山)을 원조로 간주한다. 조선시대 중엽의 민화 중엔 밧줄을 타고 암벽을 오르는 모습이 있기도 한다. 이 희귀한 사례를 통해 도전적 차원의 등산마저 행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산을 몹시 애호해 산행을 즐겼다. 일테면 남명 조식 선생은 지리산을 16회나 오르내렸다. 사대부들은 등산이라는 개념보다 관산(觀山), 요산(樂山), 유산(遊山)이라는 코드로 산을 누렸던 것 같다. 오늘날 한국의 등산객들이 산을 즐기는 방식도 이와 꽤 유사한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한국의 산은 스케일은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정답다. 위험요소가 드물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수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쌓인 불만과 스트레스를 산에서 해소하고 있어 사회가 그나마 덜 시끄럽다고 봐야 하겠지.”
히말라야의 광막한 설산을 묵묵히 오르는 산악인들의 모습은 고행하는 수도승을 연상시킨다.
“고행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고자 한다는 점에선 수도승과 다를 게 없겠지. 그러나 산악인은 자연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수도승과 다르다. 도전이란 정복을 겨냥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정복하나? 잠깐 정상을 딛고 내려올 뿐인데.”
에베레스트 고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떻던가?
“아름답고 경이롭다. 그러나 너무 춥고 숨이 가빠 사실상 풍경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텐트 밖으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게 잠시잠깐의 감상일 뿐이거든.”
등반 중에는 무슨 생각을 하나?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극한 상황에서도 산과 대화를 했던 것 같다. 거짓말하지 않는 자연에서 겸손을 배우고, 인내심을 기르고, 분노를 자제하는 능력을 얻었다. 이건 극지 등반에서의 일만은 아니다. 어디서건 자연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심성이 더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속세의 거친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아 자살까지 하는 경우가 있지만, 산을 좋아하게 되면 달라지지. 어떻게든 사람을 자연으로 끌어내는 게 옳다는 거. 특히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산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탐험과 운명적 사랑에 빠진 종(種)
허영호는 지난 2010년, 대학생이었던 아들 재석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또 한 번 매스컴의 관심을 샀다. 좌우간 산에서 배우는 게 인생을 잘 사는 비결이라는 생각. 등반에 인간과 인생의 모든 게 담겨 있다는 확신. 그는 그걸 널리 홍보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아니랴. 인생에도 크레바스가 있고, 추락이 있으며, 눈사태가 있게 마련이지 않던가. 이 모든 요상한 난리블루스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과 안목을 산에서 얻을 수 있다는 얘기는 언제 들어도 신선한 뉴스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허영호도 어느덧 늘그막에 접어들었다. 난다 긴다 하는 모험 고수이지만 이젠 체력을 고려해 자제하며 산다. 그러나 탐험을 멈출 방법이 없다. 좀 부풀려 말하자면, 그는 탐험과 운명적 사랑에 빠진 종(種)이니 말이다. 요즘은 경비행기에 빠져 산다지. 경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해 또다시 역사적 기록을 남기겠다는 웅장한 포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경비행기를 타고 독도를 비롯해 국내 곳곳을 비행 훈련하며 세계로 비상할 날을 대비해왔다. 문제는 자금이란다. 스폰서를 잡아야 하는데 여의치 않다는 것.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 자력으로 탐험하는 방식은 실로 불가능한가? 매우 내성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당신은 어디 가서 쉽사리 손을 내밀지도 못할 것 같다.
“원정대를 꾸려 착수하는 극지 탐험에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가는 것을 무슨 수로 개인이 감당하겠나? 원정대 지원이 일방적 수혜도 아니다. 주로 등산 장비업체가 스폰서로 붙는데, 그들은 나의 원정 활동상을 비즈니스 마케팅에 활용하거든.”
직업이 탐험가인 당신에게 누가 월급을 주지? 가족을 어떻게 건사하나?
“가족은 나에게 탐험보다 소중하다. 가족 생계를 등한시하는 산악인은 산악인의 자격조차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난 꽤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강연 초대를 자주 받았으며, 그게 무난한 생활 대책이 돼주었다. 사람들이 내게 가장 흔히 하는 질문이 뭔지 아나? 등반으로 돈이 생기느냐, 반사이익이 있느냐, 라는 것이다. 그러나 등반 자체는 무상(無償)의 행위일 뿐이다. 대신 강연료가 들어와 살 수 있었지.”
우리 사회가 나름 똑똑해지는 모양이다. 허영호를 강연장으로 끌어들여 경청을 하는 걸 보면.
“글쎄다. 난 나를 비롯해 프로 산악인들을 더 활용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가령 유능한 산악인들을 모아 특공구조대 같은 걸 만들면 자연재난이나 산악조난 구조에 크게 쓰일 수 있지 않겠는가. 119소방대만 고생시킬 게 아니라는 얘기다. 언젠가 국무총리 공관에서의 오찬에서 그런 취지의 제안을 했으나 소용없더라고.”
어디서나 일관하는 인생관이 있겠지?
“노력하며 살자! 그거. 탐험하며 살다 보니 ‘자기 노력’이 인생 성공의 99%를 차지한다는 걸 깨닫겠더라. 행복이라는 것도 노력의 산물이지 않겠는가.”
평생 노력만 하면 무슨 재미? 잘 노는 데에서도 행복의 샘물이 퐁퐁 솟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긴긴 세월 극지와 맞붙었던 사람에겐 실없는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은퇴한 시니어들의 화두는 뭐라해도 ‘일’이다. 300만 원 이상의 연금 수급자들도 돈을 떠나 ‘일’하고 싶어 한다. 재취업, 인생 2모작 등 현역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시니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니어들 사이에서는 노후 불안과 함께 65세 정년연장에 대한 얘기들이 뜨겁게 오가고 있다. 일하는 시니어가 많은 상황에서, 현재의 정년이 60세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는 반응도 있다. 그러나 정년을 연장하는 일은 일견 단순해 보여도 쉬이 풀기 힘든 무수한 문제들이 따른다. 대체 정년연장으로 어떤 변화들이 발생할 것인지 짚어봤다.
정년연장 논의 가속화에 팔 걷어붙인 정부
정년은 누구에게나 오게 된다. 현재 시니어의 생활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소위 ‘불이 붙은’ 이슈는 바로 ‘정년연장’일 것이다. 기존의 60세를 65세로 올려야 한다는 정년연장 화두는 올해 2월 대법원에서 본격적인 포문이 열렸다. 육체 노동자의 가동 연한을 60세로 산정한 원심을 깨고 65세로 늘려야 한다며 판례를 바꾼 것이다.
이어서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정년연장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5월 23일에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정년연장의 사회적 논의가 필요함을 밝히고 6월 초에는 TV에 출연해 정부에서 현재 해당 문제를 집중 논의하고 있음을 알리는 등 거듭해서 정년연장 이슈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6월 말에 발표된 60세 이상 고령자의 재고용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정부 시책은 이 문제에 기름을 부었다.
정년 60세,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나라의 고령자가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은퇴하는 연령은 남성은 72세, 여성은 72.2세로 알려져 있다. 이것도 2016년 기준이기에 2019년인 현재에는 더 높아졌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는 OECD 35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나이대다. 그런데 한국고용정보원 추산에 따르면,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평균연령은 49.1세에 불과하다. 이는 첫 퇴직을 하는 평균 나이가 49.1세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완전히 일에서 물러나는 72세까지 22년이라는 긴 시간을 재취업 혹은 계약직, 자영업의 세계에서 일하게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다 지난 5월에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35.2%로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65세 이상 인구의 3분의 1이 아직도 일하고 있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60세 정년이라는 현재의 기준은 은퇴 시점을 앞당기는 주요한 원인이면서 현실성 없는 기준으로 보인다. 그래서 현실에 맞게 정년도 5년 늘려서 65세로 간단하게 바꾸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이 간단한 해법 뒤에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적 역학 작용들로 인한 갈등들이 시한폭탄처럼 숨겨져 있다. 올해 769만 명으로 집계된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2020년 813만 명, 2024년 995만 명 등으로 늘어 2025년이면 1000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청년 일자리와의 상충
100세 시대라는 명칭에 맞게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막대한 수의 베이비부머가 매년 80만 명이 은퇴하기 시작하는 근간에, 60세 정년이라는 기준은 터무니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준을 보다 현실적인 나이인 65세로 올리는 일의 발목을 잡는 문제는 바로 청년실업이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는 국내외의 문제들이 중첩되어 경제 침체와 함께 높은 청년실업률이 이어지며 사회적 갈등으로 연결되는 상황이다. 정년연장으로 가뜩이나 부족한 청년 일자리를 시니어들이 빼앗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선이 있다.
정년연장의 실현을 통해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1차적으로 공무원이나 대기업 근로자 등 소위 ‘좋은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좋은 일자리’는 청년들에게도 ‘좋은 일자리’이며 수년간의 고시 공부를 해서라도 들어가려는 곳이다. 정년연장으로 인한 일자리 축소와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만드는 이유다.
그러나 정년연장이 청년 일자리를 줄인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OECD는 일찍이 1990년대에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조기퇴직의 활성화를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세대 간 비교우위에 따른 고용분리로 인해 기존의 일자리 전쟁 가설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채택했다. 그래서 2005년부터는 양 세대 고용을 늘리는 정책 방향을 권고하고 있다.
이제 정부 입장을 보자. 현행 60세 정년을 유지하는 것은 국가 예산 정책을 위협하는 주원인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현행 60세 정년 기준은 대부분의 복지 우대 대상 나이를 65세로 묶어두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즉 60세 정년을 유지하면 복지혜택을 받는 ‘노인’의 기준 연령을 낮추게 돼서 대상자 수가 늘어나게 되고 복지 부문의 지출을 늘리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복지혜택을 받지 않아도 되고 계속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시니어가 늘어나는 현재에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까지 겹치면 복지 지출의 단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소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년연장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정년연장 정책은 연령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얽혀 있는 문제들이 서로의 급소를 죄고 있는 듯한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유연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들
다음은 기업의 입장을 살펴보자. 국내 기업들 다수는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는 연공급 임금 체계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정년연장이 이뤄지면, 65세까지 늘어난 시간에 따라 연공급에 맞추는 기업의 인건비 지출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 60~65세 인구 내에서 정년연장을 보장받으며 일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젊은이들 사이의 양극화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업들은 무조건적인 정년연장이 임금 지출 상승 및 전체 국민 경제에 피해를 줄 것이라며 반발부터 하는 상황이다.
이 문제의 해소를 위해 정년연장과 함께 노동유연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 60세 이상 직장인의 업무량을 점차적으로 줄여 65세에 은퇴 준비를 하게 함으로써 기업의 비용절감과 함께 청년층의 고용도 추구하자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임금피크제를 활성화하자는 주장이다. 임금피크제가 정착되기 위해선 시니어 당사자들 전반의 이해와 사회적 동의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관련된 갈등들이 이곳저곳에서 펄펄 끓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민연금도 함께 검토해봐야
정년연장 문제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국민연금이다. 현행 60세 정년을 계속 유지하면 소위 ‘소득 크레바스’라고 불리는 소득 단절시기에 대한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기존 60세였던 국민연금 수급시점이 2013년부터 5년마다 한 살씩 상향조정돼 2033년에는 65세로 늘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행 60세 정년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2033년에는 최대 5년 동안 국민연금을 받지 못해 금전적 리스크를 감내해야 하는 인구가 상당수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65세로 정년연장을 할 경우 국민연금 차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을까? 지금까지 본 사례들처럼, 당연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일을 하면서도 연금을 받는 사람들로 인해 소득격차 문제가 커질 수 있다. 연금공단 입장에서도 연금의 본래 취지와는 다른 성격의 지출이 발생함으로써 재정 부담과 함께 제도의 본질이 훼손되는 문제를 겪을 수 있다. 물론 2033년이 되면 65세로 수급 시점이 올라가니 65세 정년과 맞춰지겠지만, 그때까지 10여 년가량은 누수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정년연장은 국민연금 제도의 근간도 검토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선진국들의 대처
정년연장 문제는 전형적인 선진국형 이슈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제도가 갖춰지고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노동인구 감소를 겪는 선진국의 사회 변화 추이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선진국들은 대부분 이 문제를 맞닥뜨려야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미국은 1980년대에 이미 정년 개념을 없앴다.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나이에 따라 차별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영국은 이보다 늦은 2011년에 대부분의 직업에서 정년제를 없앴다. 단 영국은 고령자가 직무 역량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는 부분적인 일자리들에서는 아직 정년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이미 65세 정년을 적용하고 있는데 곧 67세로 연장할 계획이다. 대표적 장수 국가인 일본은 70세까지 정년을 늘리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이렇듯 선진국들은 정년연장을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순서로 보고 발생할 문제를 해소하는 쪽에 집중해 대처하고 있다.
불가피한 득과 실, 사회적 합의로 풀어야
지금까지 열거된 것들만으로도 정년연장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사안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당사자인 개인과 국가, 기관, 조직의 사정들이 얽히고설킨 상황이다. 그렇다고 마냥 손놓고 있을 수도 없다.
분명한 것은 정년연장의 적용이 이뤄지면 각 이해당사자들이 서로 잃고 얻는 것들이 있으며 그러한 결과를 회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회적 논의로써 정년연장 이슈를 공론화해, 철저히 사회통합적인 가치 기준에서 조정해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 들어 8번째 부동산대책이 나왔다. 9월 13일 정부가 ‘9·13 주택시장 안정방안’을 발표했다. 유주택자의 세금 강화, 대출 규제 및 청약 환경이 크게 달라진다. 1주택을 포함한 유주택자들을 정면 겨냥했다. “실수요자(무주택자)가 아닌 투기 세력은 봉쇄하겠다”는 강력한 경고다. 골자는 종합부동산세 강화다. 조정대상지역 내에서는 2주택자 이상은 물론 고가주택 1주택자에 대한 세율도 인상된다. 1주택 이상자가 조정대상지역에서 새로 구입한 주택은 임대등록 시 종부세에 합산 과세되고, 대출 문턱도 높아졌다.
세금
조정지역 2주택 이상자, 종부세 최고 3.2% 중과
정부는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은 ‘고강도 세금 카드’를 들고 나왔다. 주택이 3채 이상이거나 조정대상지역에서 2주택 이상 보유자에 대해 주택분 종합부동산세 최고세율을 참여정부 수준 이상인 최고 3.2%로 중과한다. 세 부담 상한도 150%에서 300%로 올린다.
세율 강화뿐 아니라, 2주택자도 다주택자로 간주한 점이 달라졌다. 조정대상지역은 현재 서울 전 지역, 세종, 경기(과천·성남·하남·고양·광명 등), 부산(해운대·연제·동래 등), 대구 수성 등 43곳이다.
9·13 대책에 따르면 종부세 과표 3억~6억 원 구간이 신설되고, 세율은 구간별로 0.2~0.7%포인트 올라간다. 0.1∼0.5% 인상을 제시했던 정부안보다 강화했다. 과표 3억 원 초과구간에 대한 세율을 지금보다 0.2∼0.7%포인트씩 추가로 올려 최고세율을 2.7%까지 인상한다. 구간별로 과표 6억 원 초과구간에 대한 세율은 현행보다 0.1∼0.5% 인상하기로 했던 정부안보다 강화했다. 여기에 조정대상지역 내에서는 2주택 이상도 3주택 이상 다주택자와 마찬가지로 중과된다.
구간별 세율을 살펴보면, 신설된 과표 3억∼6억 원 주택에 부과되는 세율은 0.5%, 6억∼12억 원은 현행 0.75%에서 1.0%로, 12억∼50억 원은 현행 1.0%에서 1.4%로 상향 조정됐다.
과표 50억∼94억 원은 현행 1.5%에서 2.0%로 인상되고 과표 94억 원 초과 주택에 대해서는 최고세율을 현행 2.0%에서 2.7%로 상향조정된다. 3주택 이상자와 조정대상지역 2주택 보유자는 동일하게 추가 과세하되 현행 대비 0.1~1.2%포인트 세율이 인상된다. 특히 조정대상지역 내 2주택 이상으로 과표 94억 원 초과 주택을 보유한 경우 세율은 최고 3.2%로 중과된다.
그렇다면 실제 종부세는 얼마나 오를까?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현재 18억 원 1주택 보유자(과표 3억 원)는 종부세가 94만 원에서 104만 원으로 상승한다”고 설명했다. 1년에 10만 원가량 더 부담하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조정대상지역 2주택 이상자이거나 3주택 이상 보유한 다주택자의 종부세 부담은 훨씬 높아진다. 2주택 이상 보유자는 과표 3억 원(시가 합계 14억 원) 기준 현재 94만 원에서 144만 원으로 연간 50만 원이 늘어나고, 과표 12억 원(시가 합계 30억 원) 기준일 경우 현재 554만 원에서 1271만 원으로 연간 717만 원의 부담이 추가된다. 실거주 주택 외 투기 목적으로 부동산을 소유하지 말라는 시그널인 셈이다.
정부는 이번 종부세 강화로 4200억 원의 추가 증세를 예측했다.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사람은 총 21만 8000명 수준으로, 부동산 부자의 3% 규모로 집계됐다.
임대사업자
신규 임대등록 시 종부세 합산, 양도세 중과
주택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제 혜택도 축소된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금감면 등을 확대했다.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취득세와 재산세 등 지방세가 면제·감면되고, 양도소득세도 줄일 수 있다면서, 다주택자들에게 임대시장의 안정적인 공급자 역할을 주문했다.
그런데 돌연 입장을 바꿨다.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투기지역 내에서도 대출 규제를 피할 수 있고, 절세 효과가 있어 갭 투자에 악용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주택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제 혜택은 축소된다. 1주택 이상 보유자가 조정대상지역에서 신규 취득 주택을 임대주택으로 등록하는 경우 종부세에 합산 과세한다. 양도세 감면은 까다로워진다. 등록 임대주택 양도세 감면 요건으로 주택가액 기준을 신설했다. 임대 개시 시 수도권 6억 원, 비수도권 3억 원 이하 주택에 한해 양도세 감면을 적용한다. 이전까지는 가격과 상관없이 주거 전용면적 85㎡ 이하, 수도권 밖 읍·면 지역은 100㎡ 이하 주택이면 양도세 감면 혜택을 적용받았다.
부동산 임대사업자 대출에 대해서도 규제를 강화한다. 그간 갭 투기로 악용된 주택 임대사업자 대출규제의 고삐를 죄겠다는 것이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 40%를 새롭게 적용한다.
청약·대출
서울에서 ‘한 채 더’ 막혀, 무주택자 ‘최대 수혜’
앞으로 서울을 비롯한 집값 급등 지역에서 집을 ‘한 채’ 더 살 수 있는 길은 거의 봉쇄됐다. 1주택 세대라도 규제지역 내 주택 신규 구입을 위한 주택담보대출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집값이 비싼 지역에서 주택을 추가 구입하는 것은 투기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단 추가 주택 구입이 자녀의 분가이거나, 타 지역에서 거주 중인 60세 이상 부모의 봉양 등인 경우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일시적 2주택으로 인정받으려면 현재는 3년 내 기존 주택을 팔면 됐지만 앞으로는 2년 내 처분해야 한다. 이 경우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 및 투기지역에서는 주택담보인정비율이 40% 적용된다. 조정대상지역 내 2주택 이상 보유 세대일 경우 예외 없이 주택담보대출은 금지된다.
무주택자라 해도 고가주택 구입 시에는 대출을 받기 어려워진다. 규제지역 내 공시가격이 9억 원을 초과하는 고가주택을 구입할 경우 무주택자라도 실거주 목적이 아니라면 주택담보대출이 금지된다.
유주택자는 청약시장 진입도 사실상 어려워졌다. 현재 투기과열지구에서전용면적 85㎡ 이하는 100% 가점제가 적용된다. 유주택자의 경우 1순위 기회가 없다. 하지만 85㎡ 초과 주택의 50%, 조정대상지역(투기과열지구 제외)에서는 85㎡ 이하 25%, 85㎡ 초과는 70% 물량이 추첨제다. 1주택자도 가점을 따지지 않는 물량에서는 당첨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앞으로는 추첨제일 경우에는 무주택자에게 우선권이 돌아간다. ‘로또분양’이라고 불릴 만큼 청약 열기가 뜨거운 상황에서 인기 지역에서 남는 물량은 기대하기 어렵다.
무주택자의 요건도 강화됐다. 분양권이나 입주권 소유자도 주택 소유로 간주한다. 기존 주택을 보유한 경우 전세자금 대출에 대한 공적보증도 막힌다. 전세를 끼고 주택을 구입하는 수요를 차단하는 셈이다. 다만 1주택자는 부부합산 소득 1억 원 이하라면 전세 대출을 위한 보증이 가능하고, 무주택자는 소득과 상관없이 공적보증을 제공한다.
이번 조치로 무주택자들은 웃게 됐지만, 다주택자도 아닌 어정쩡한 1주택자들이 유탄을 맞았다는 하소연이 줄을 잇는다. 사실상 집을 옮겨가는 ‘갈아타기’도 막혔다. 주부 김모(48) 씨는 “거주 중인 주택이 오래된 주택이어서 청약을 기다렸는데, 이제 그나마 적었던 청약 당첨의 기회도 사라졌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박모(61) 씨는 “자식들과 사는 집 한 채 가진 게 전부인데 집값 올랐다고 세금 부담만 커졌다”고 말하며 “실거주자까지 투기 세력으로 보는 것 같아 답답하다”고 허탈해했다.
9·13 대책에 서울 주민, 60대 이상 고령층 속앓이
국민 10명 중 6명은 이번 9·13 대책의 핵심인 종부세 강화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60대 이상 고령층에서는 상대적으로 반대 의견 비율이 높았다. 최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종부세 강화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56.4%로 전체의 과반수를 넘었다. 반대 의견은 30.7%에 그쳤다. 하지만 주택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은 서울(찬성 48.6% vs 반대 41.9%)과 60대 이상(46.0% vs 39.0%)에서 반대 여론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이은재 의원(서울 강남구병)은 “종부세는 부동산 투기 방지를 목적으로 해야 하는데, 현 정부의 종부세 개편안은 투기 목적이 없는 대다수의 실거주 주택 보유자가 지게 될 부담을 간과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집 한 채를 보유한 어르신들의 세 부담마저 높인 것은 과도하다는 지적이다. 이은재 의원은 이에 9·13 대책 당일 ‘종합부동산세’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만 60세 이상인 1세대 1주택자에 대한 공제율을 현행 대비 20~40%포인트 상향하고 5년 이상 장기보유에 대해서도 10%포인트 상향하는 내용을 담았다.
2일 ‘생명을 지키는 안전보건, 사람이 우선인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제51회 산업안전보건의 날 기념식’이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됐다. 정부는 1968년부터 매년 7월 첫째 주를 ‘산업안전보건 강조주간’으로 정하고 그 주 월요일을 ‘사업안전보건의 날’로 지정해 고용노동부와 산업재해예방 전문기관인 안전보건공단에서 합동으로 행사를 추진해 오고 있다.
이날 기념식은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박두용 안전보건공단이사장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 김 장관은 기념사를 통해 “정부도 산재사망사고 감축을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건설과 조선, 화학 등 고위험 사업장을 집중관리하고 산업안전 감독의 사전예방 기능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라며 “안전보건 불공정 관행도 개선해 오는 2022년까지 산재 사망사고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안전관리 유공자에 대한 포상으로, 한 분야에서 30년 동안 안전관리업무를 수행해 오면서 ‘달인’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는 코오롱인더스트리 구미공장 안전관리자인 임규재 씨에게 동탑산업훈장이 수여됐다. 철탑산업훈장은 제주도에서 제1호 위험성평가 인정사업장으로 무재해 사업장을 이룬 경림산업(주) 고동린 전무이사가 받았다. 석탑산업훈장은 병원의 환자와 직원, 의료인 모두가 함께 안전을 지킬 방법을 찾는데 노력한 (의)소화아동병원 현숙 보건관리자에게 돌아갔다. 산업포장은 삼성물산 에버랜드리조트 유인종 상무와 SK하이닉스 김태훈 상무, 호텔롯데 박의연 안전관리자에게 영광이 전해졌다.
대통령 표창은 임종룡 성우전자(주) 과장 외 6명이 받았고 국무총리 표창은 김영준 지에스건설(주) 현장소장 외 6명에게 돌아갔다. 수상자는 모두 부부동반으로 수상했는데 배우자에게는 꽃다발로 그간 내조에 고마움을 표했다. 유공자들의 우수사례는 ‘2018 산업재해예방 유공자 우수 사례집’으로 별도 발간하여 참석자 모두에게 기념식 현장에서 배포되었다.
한편 기념식을 시작으로 6일까지 5일에 걸쳐 안전보건강조기간 행사가 별도로 마련된다. 안전보건공단이 주최하고 안전보호구협회가 주관하며 경영전람이 기획, 운영하는 제36회 국제안전보건전시회가 코엑스 C홀에서 열린다. 이 기간 국제안전보건전시회, 사고사망 절반 줄이기 정책세미나(총 34건), 산재예방 우수사례 발표대회(총 13건)가 있는데 관심 있는 국민 누구나 현장등록을 통해 무료로 참여 할 수 있다.
친애하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 여러분. 저는 바상자브 주한 몽골대사입니다. 지난 5월 16일부터 7월 17일까지 한국·몽골 공동학술조사 20주년을 기념한 ‘칸의 제국 몽골’ 특별전을 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몽골 제국의 역사와 유목문화를 주제로 기획되고,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전시된 유물들을 소개합니다. 몽골의 유물들을 경험하는 이번 전시와 더불어 한국의 많은 분께서 몽골을 더 친근하게 이해하도록 몽골 여행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몽골은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정도면 수도 울란바토르에 도착합니다. 인구는 312만 명이 넘습니다. 한국에서 ‘몽골’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정식명칭은 몽골리아(Mongolia(영어), МОНГОЛ(몽골어))입니다. 몽골어를 사용하며 표기는 키르문자(러시아 알파벳)를 사용합니다.
몽골의 환경과 역사
몽골인들은 동서로는 다싱안링(大興安嶺) 산맥에서 알타이 산맥, 남북으로는 바이칼 호수에서 만리장성 사이의 땅을 주거지로 살아왔습니다. 북쪽은 자작나무 숲이 빼곡한 시베리아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갈수록 삭막한 고비 사막에 다다릅니다. 그 중간에 대초원이 펼쳐져 있는데, 몽골 사람들은 이를 무대로 유목 생활을 꾸려왔습니다.
석기시대 유물
80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의 유물로 남아 있습니다. 기원전 3000년 후반부터 청동기 흔적이 있는데 이 시기에 사용하던 청동기에서 보이는 특징은 여러 동물 형상을 표현합니다. 히르기수르와 판석묘 등의 무덤에서 사슴돌이 발견되고, 바위에도 다양한 동물의 형상이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유목 제국
기원전 3세기 무렵 흉노(匈奴)가 최초로 국가를 세웠고, 이어 유목 민족인 선비(鮮卑)와 유연(柔然)이 활동했습니다. 6세기 중반부터 9세기 말까지는 돌궐, 위구르, 키르기스가 세운 국가들이 몽골 지역을 지배했으며, 10세기 초부터 거란이 등장합니다. 여러 유목 국가 가운데 흉노 제국(BC 3세기~AD 1세기)과 돌궐 제국(AD 552~745)의 유적이 최근 활발하게 조사되고 있습니다.
흉노는 중국 진(秦)나라(BC 221~207) 및 한(漢)나라(BC 202~AD 220)와 맞선 강력한 나라로 동서 문명을 이어주며, 다양한 유적을 남겼습니다. 돌궐은 아시아 내륙의 초원과 오아시스 대부분을 통합한 거대 유목 제국으로 성장했는데, 그들이 만든 제사 유적 중 고대 돌궐 문자로 쓴 기록 등은 돌궐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과 그 후예들
몽골은 13~14세기 태평양 연안에서 동유럽, 시베리아에서 남아시아에 이르는 역사상 유례 없는 초거대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수많은 국가와 종족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horum)과 타반 톨고이(Tavan Tolgoi)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원과 유물
티베트 불교는 16세기부터 널리 퍼졌는데, 정주(定住) 생활과 불교 사원 주변의 도시화한 모습은 대승 운두르 게겡 자나바자르(Undur Gegeen Zanabazar, 1635∼1723)가 세운 사원과 여러 작품에서 이전의 불교와 다른 점이 드러납니다.
몽골의 민족의식과 근현대사
14세기 중반을 전후해 붕괴된 몽골 제국은 초원으로 후퇴하고, 17세기에 만주인들이 세운 청 제국에 복속됩니다. 이후 1912년 청나라가 몰락할 즈음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중국에 대한 몽골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1917년 러시아 제정이 무너지자 몽골은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1921년에 완전 독립을 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 많은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 중 최초로 탈사회주의 선언 후 1992년 이원집정부제의 신헌법을 제정합니다. 1996년 총선으로 1997년 바간반디 대통령이 선출되고, 2000년 총리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으로 2004년 연립내각이 출범했습니다. 현재 2017년 당선된 바툴가 대통령과 후렐수흐 총리가 임기 중입니다.
몽골에 남은 독립운동가 이태준
이태준은 1914년 몽골 고륜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 병원을 개업합니다. 그는 몽골인들에게 근현대 의술로 유명해졌으며, 몽골 왕국인 보그드 칸(Bogd Khan)의 어의(御醫)가 되는 등 몽골 왕족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습니다. 1919년 보그드 칸이 이태준에게 ‘귀중한 금강석’이란 뜻을 가진 ’에르데니-인 오치르’라는 명칭의 제1등급에 해당하는 국가훈장을 수여합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는 이태준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몽골 정부가 부지 2200평을 제공하고 연세대학교 의학과, 몽골연세친선병원, 주한국 몽골대사관의 노력으로 기념공원과 기념관이 탄생했습니다. 현재는 이태준기념공원 보존회도 만들어져 한국인들에게 몽골 여행 필수 코스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한국을 떠나 우리 몽골에서 많은 사람에게 의술을 선보이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이태준 선생의 지난 세월과 신념을 되새기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몽골과 한국
1990년 수교 이후 양국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우호교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제와 대외관계에서도 동반자적 문화, 인적 교류가 점진적으로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지난해 서울글로벌센터와 몽골 대사관은 새응배노(‘안녕하세요’의 몽골어) 학교를 열었습니다.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왔거나 한국에서 태어난 몽골 출신 어린이들이 모국어 교육을 통해 미래 한-몽골 문화, 경제적 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인재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최근에도 앞서 소개한 ‘칸의 제국 몽골’ 전을 통해 한국과 몽골의 역사와 문화의 장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홍성열(洪性烈·63) 마리오아울렛 회장의 삶을 들여다보면 도전과 기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토종 브랜드 론칭, 초대형 패션 아울렛 도입 등등 돈도 지원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게 되겠어?”라는 주변의 비웃음까지 들어야 했던 그의 선택과 도전들은 모두 커다란 성공이 되어 보답으로 돌아왔다. 지난 40여 년 동안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요즘 마리오아울렛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과 함께 경기도 연천군에서 운영하고 있는 마리오허브빌리지 경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의 인생과 준비 중인 또 다른 선택에 대해 들어봤다.
“밖에 나오면 좋죠. 회사 안에 있으면 머리가 아파.(웃음)”
농담을 건네는 쾌활하고 시원시원한 목소리에는 자수성가하여 산업의 지형까지 바꾼 사람다운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경영하고 있는 가산디지털단지 마리오아울렛은 평일 10만 명 이상, 주말에는 20만 명 이상의 고객을 불러들이고 있으며 온라인 몰을 론칭하여 1년 만에 11만 명의 회원 수를 보유할 정도로 꾸준한 성공을 거듭하고 있다. 이 모든 시작은 형제들의 돈을 긁어모아 마련한 사업자금 200만 원이었다.
“홍성열 회장은 슈퍼 마리오다”
홍 회장이 200만 원을 들고 패션 유통업에 뛰어든 것은 1980년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40여 년 전 이야기다. 당시 우리나라의 의류 생산 산업은 호황기를 거쳐가고 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의류 업체들은 외국 바이어들의 지시에 따라 하청받은 제품을 공장처럼 찍어내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홍 회장은 단순한 노동력 제공과 지시 답습이 아닌 토종 브랜드가 필요함을 직감했고, 고민과 연구 끝에 1985년에 패션 브랜드 까르뜨니트를 출시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까르뜨니트는 한국 최초로 일본 게이오백화점에 입점하는 성과와 함께 한국 제품이라면 싸구려라고 홀대하던 일본 바이어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닌텐도에서 출시한 비디오 게임 ‘슈퍼 마리오’가 게임의 역사를 바꾸며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다. 일본 바이어들은 홍 회장에게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을 따서 마리오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바이어들 사이에서 “홍 회장은 슈퍼 마리오다. 마리오 제품을 수입하면 다 팔린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기 때문이다. 홍 회장은 신뢰와 책임으로 꾸준히 사업을 성장시켰다.
한 사람의 도전이 거대 아울렛 타운을 만들다
1997년부터 시작된 IMF 체제는 국가의 산업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1차, 2차산업을 주로 맡던 공장들이 문을 닫자 수많은 인력들이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구로공단의 공장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폐쇄된 공장들이 싼값에 무더기로 쏟아졌다. 그런 국가적 위기 앞에서 홍 회장의 과감한 기획은 결정적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주변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넓은 공장 부지를 싸게 매입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울렛이란 단어를 전혀 모르던 시절에 자신의 별명을 붙여 도심형 정통 패션 아울렛인 마리오아울렛을 세웠다. 2001년의 일이었다.
경제위기가 지속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렴한 상품을 주로 찾게 될 것이며, 그러한 소비 성향과 판매가 사이의 이격 현상 때문에 재고가 쌓이게 된 회사들은 재고 처리가 급박해질 수밖에 없는 게 산업의 순리다. IMF 같은 대형 외환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홍 회장을 비웃었지만, 그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산업의 순리를 따라 마리오아울렛을 통해 그 판을 커다랗게 깔아준 셈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손님이 몰렸고, 3년 만인 2004년에 2관을 열고 이어서 3관까지 개장했다. 이후 대기업들이 대형 아울렛을 주변에 개점함으로써 과거의 공단지대는 연매출 1조 원가량의 돈이 움직이는 거대 아울렛 타운으로 재편됐다. 한 사람의 의지가 지역 산업의 구조를 송두리째 바꾼 사례가 만들어진 것이다.
무분별한 확장 거절, 서비스와 가치를 높인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마리오아울렛은 신규 출점에 대한 많은 제안을 받고 있다. 지방은 물론이고 심지어 중국 쪽에서도 제안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회장은 모두 거절하고 가산의 마리오아울렛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통해 가산의 구심점이 되는 동시에 자체 브랜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2017년 8월부터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이름은 ‘가산디지털단지(마리오아울렛)역’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역명 병기 사업은 명칭의 인지도와 이용 편의 증진 가능성을 심의하여 엄격하게 선정되는데, 이 결과는 마리오아울렛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는 인정이기도 하다.
마리오아울렛은 또한 무분별한 확장을 배척하는 대신 서비스와 가치를 높여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방향으로 가는 중이다. 홍 회장은 일찌감치 대기업들이 무분별한 확장 전략으로 중소기업들이 이뤄놓은 터전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말한 바 있고, 마리오아울렛 또한 그러한 전략을 배제함으로써 그 말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기도 하다.
물론 마리오아울렛이 ‘한 우물만 판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울렛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홈페이지와 앱을 제공하는 것부터가 새로운 도전을 증명한다. 그리고 상당수 아울렛이 이미 준테마파크적 성격을 갖게 된 것처럼 마리오아울렛 또한 다양한 즐기는 공간들을 통해 유통과 소비공간으로서의 성격만을 가지는 것에서 탈피한 지 오래다. 서비스적인 면에서 보면 매년 두 자릿수 이상 증가하고 있는 해외 고객들을 위해 다국어 쇼핑 가이드, 외국어 안내 서비스, 자국통화결제서비스 등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한국경영학회 최우수 경영 대상, 올해의 브랜드 대상, 국무총리 표창, 한국유통대상 대통령상 등 경영 분야의 수많은 수상 실적들로 드러났다.
‘자연이 만든 천당’이 허브빌리지의 목표
“우리나라는 새로운 걸 하려고 하면 야단맞아요. 그래서 뭔가를 하기가 겁나죠.”
홍 회장의 말이 엄살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마리오아울렛만 하더라도 공장지대에 유통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는 정부 규제와 계속 줄다리기를 하면서 완성시켰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최근에 언론에 오르내리게 된 일들도 그렇다.
그는 2015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 씨가 소유한 경기도 연천의 허브빌리지를 매입했다. 2017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되기 사흘 전에 매입했다. 사람들에게 화제와 함께 의혹을 불러일으킨 이 두 번의 거래에 대해 그는 소위 ‘로열패밀리’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음모론’을 강하게 부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는 오래전부터 강남의 주택으로 이사를 가려 했는데 박 전 대통령의 주택이 급매로 괜찮은 가격에 나와 구입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고향인 충남 당진에서 20년 전부터 개인농장을 운영해오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허브빌리지는 도시농업과 정원 문화에 관심이 많았기에 사업 투자 목적으로 인수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줬던 경영 방식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디자인 불모지에서 과감하게 토종 디자인 브랜드를 론칭하고 문 닫은 공장들이 즐비했던 황무지에 아울렛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가져와 성공시킨 그다. “경영이란 남들이 건드리지 않는 열쇠를 통해 얻어내는 최선의 효과”라는 공식은 그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허브빌리지의 경우를 보면, 네 번의 유찰을 통해 최초 감정가 250억 원에서 지속적인 하락이 이뤄져 홍 회장은 118억 원이라는 저가에 인수할 수 있었다. 현재 허브빌리지는 홍 회장이 야심차게 진행하는 본격적인 사업 구상 아래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
“‘허브빌리지는 동산이다, 건축이다’를 넘어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운영하고 있어요. 돈을 보고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허브빌리지는 자연이 만든 천당이 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죠. 천당을 가보지 않았지만 마치 천당이라고 느낄 만큼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합니다.(웃음)”
경영인이 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삶
이처럼 원칙과 정도를 걷는 홍 회장에게 어릴 적 꿈에 대해 묻자 비밀이라고 말하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겨우 대답이 나왔다.
“아티스트였죠. 패션 디자이너.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패션 쪽이 제 적성에 맞았어요. 주변에 그런 일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면 제 직업이 달라졌을 거예요.”
그 말이 그렇게 어렵게 나와야 했단 말인가? 의아했다. 아무튼 그가 가졌던 크리에이터로서의 꿈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패션 전시관을 만들려고 기획하고 있다.
“선두에 있다는 건 힘들죠. 그래도 나이 들어서는 젊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곡과 와전으로 피곤하게 만드는 최근의 논란들에 대해서 그는 어느 정도 해탈한 듯하다. 그는 과거 인터뷰들에서도 오랜 기간 사업을 하면서 겪어야 했던 불미스러운 일들을 헤쳐 나가게 해준 것은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하기도 했다.
“저에 대한 오해도 많고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저런 과정에서 많이 걸러져요. 저를 믿는 사람은 꾸준히 저를 지지해주죠.”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솔직하고 담대한 그에게 미래 계획을 물었다.
“브랜드를 키워서 국격을 높이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자 그의 어린 시절 꿈이 아티스트였다는 것이 순식간에 이해가 됐다. 마리오아울렛을 타 지역에 확장하지 않은 채 가산의 독보적인 아이콘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 그리고 허브빌리지를 단순한 휴식공간이 아닌 작품으로 생각하고 경영한다는 것, 모두 자신이 만든 창작품을 소중히 다루며 그 가치를 독보적으로 승화시키려는 예술가의 자세와 매우 흡사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모든 시도는 브랜드 가치로 연결되고 있다. 또 길은 그 앞에 활짝 열렸다.
무모한 도전을 성공으로 연결시킨 남자. 홍성열 회장은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예술로서의 경영이 아닐까. 서두르는 것 같지만 하나의 뚝심을 갖고 경영을 펼쳐나가는 그의 미래가 계속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는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기억한다. 그의 이전 경력이 주로 군 관련 경력에 치우쳐 있어 그를 무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는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화가였으며 소설, 신문 칼럼, 에세이 등 글을 잘 쓰는 문필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난 후 집필한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영국 해군장관 출신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이 전시내각의 총리로 임명되는 1940년 5월 10일부터 덩케르크 작전(다이나모 작전)으로 불리는 대규모 철수작전이 끝나는 5월 28일까지 19일간의 행적을 추적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내각을 이어받은 처칠이 반대 세력으로부터 받는 갖은 압력 속에서 현실과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모습이 이 영화의 전부를 이룬다.
사실 이 영화를 보게 된 동기는 작년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를 감명 깊게 보았던 영향이 크다. 당시 놀란 감독이 표현해낸 기적 같은 철수 장면이 떠오르면서 당시 영국 내의 상황이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두 편은 서로 이어진 작품으로 순서만 바꿔 보는 셈이다. 두 편 모두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지만, 도달하는 지점은 같다는 게 흥미롭다.
‘덩케르크’는 등장인물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이름 없는 국민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돋보인다. 반면에 ‘다키스트 아워’는 이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진흙탕 싸움이 전개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무엇이 옳은지 불분명하다. 현저한 전력의 열세 속에서 히틀러에게 항복하고 희생을 줄이는 것도 나름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처칠은 항복은 곧 노예의 삶을 의미한다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무수한 정치적인 공세 속에서 처칠의 흔들리는 신념을 잡아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이름 없는 지하철의 시민들이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역사적 사실이 아닌 픽션임이 분명한 이 장면이야말로 감독의 의중을 여실히 반영하는 지점일 것이다. 전쟁이라는 막중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결국 이름 없는 일반 국민들인 것이다. 처칠은 그들을 대변하며 용기를 얻는다.
처칠의 무기는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그의 탁월한 언변이다.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처칠의 말과 관련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정적을 제압하는 여유 있는 유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어디선가 접했을 법한 익숙한 그의 명연설이 감독 조 라이트의 뛰어난 연출을 통해 화면에 전개된다. 역광을 활용한 어두운 분위기의 의사당에서 행하는 마지막 연설은 이 영화의 백미다.
그렇다. 결국은 말의 힘이다. 처칠은 사실 과거 군사적 판단착오로 여러 전쟁에서 실패한 무장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말의 힘으로 일어섰다. 올바른 판단을 하였으면서 말로 표현하는데 서툴러 무대에서 사라진 정치가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현실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언제쯤 자극적인 막말이 아닌 우아한 언어로 상대를 제압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이런 정치가를 만날 수 있을까!
수많은 명언 중 “싸우다 패한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어도, 무릎 꿇고 굴복한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말이 오늘의 우리 상황과 중첩되어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처칠 역의 게리 올드만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가 옛날 의 그 미치광이 형사였다니.
날씨가 매우 차가워진 1월 10일 오전 코엑스 홀에서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진로교육 페스티벌의 개막식이 있었다.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이 페스티벌은 교육부가 주최하고 17개 시도 교육청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주관하는데 학교와 마을의 여러 주체가 학생들의 진로개척 역량을 높이기 위해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네트워크 조성의 중요성에 따라 마련되었다.
‘온 마을이 함께하는 우리 아이들의 꿈’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큰 코엑스 홀의 행사장에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수많은 진로에 관한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듯 너무나도 중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주입식교육과 수행평가에 매달리는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교육문제에서 진로 탐색의 부재를 실감하는 부분이다.
행사 부스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을 찾아 진로를 탐색할 기회가 많을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
개막식은 충남 공주의 석송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아름다운 합주로 시작되었고 많은 내빈이 참석했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나영선 한국직업능력개발원장,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염태영 수원시장의 축사가 이어졌는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아이들 스스로 흥미를 찾아가는 미래를 위해 국가가 책임지는 진로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혁신학교와 자유학기제 확대, 진로교육 집중 학년 학기제 안착, 아이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모두의 참여와 협력 속에서 진로개발역량을 더욱 튼튼히 키워주어야 하며 학생들이 참여하는 이런 진로교육프로그램이 살아있는 교육일 것이니 교육현장에서 꼭 필요하다는 실무자의 영상인터뷰도 있었다.
학교 교육과정에 스며드는 진로교육정책으로 학교 진로설계코칭 강화와 수요자 중심 진로교육 기반 구축, 미래를 탐색할 수 있는 다양한 진로체험기회제공으로 진로 탐색 활동 지원을 강화하고 4차산업혁명 시대에 창업 체험교육을 활성화한다고 했다.
삶의 경험과 지혜를 얻고 당당하게 길을 찾아가는 아이들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자 추구해야 할 가치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우리 아이들을 응원하고 아이들의 진로, 희망찬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번 페스티벌은 주제마당, 교류마당, 체험마당, 창업 경진마당으로 구분되었다.
다양한 부스 중 특히 관심이 갔던 곳은 창업동아리 경진마당이었다.
진로교육 차원에서 지난 한 해 동안 육성된 전국의 60여 개 청소년 창업동아리가 총출동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젓가락이 서툰 동생이 파스타 먹는 걸 어려워하자 한 번에 감아 입에 넣을 수 있도록 개발한 ‘전동포크’가 흥미로웠는데 이 제품은 어르신이나 장애인에게도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양광 구명조끼도 관심이 갔다. 구명조끼에 GPS를 장착해 조난당한 위치를 알릴 수 있고 구명조끼에 열선을 설치하여 태양광 전지판으로 충전해 체온을 지켜주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파라솔에 태양광을 설치한 아이디어작품도 있었다.
파라솔은 자외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동시에 햇볕을 많이 받게 된다.
파라솔에 태양광 전지판을 설치해 얻는 에너지로 전구나 휴대폰 충전을 할 수 있고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60여 개나 되는 창업동아리 부스에서 각각 반짝이는 재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환하게 밝혀주는 것 같아 흐뭇했다.
진로교육페스티벌은 4차산업 혁명에 대응하는 인재육성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학교라는 고정적인 울타리를 벗어나 꿈과 미래를 꿈꾸고 설계할 수 있는 진로교육의 장을 마련해 청소년에게 꿈을 키울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마을과 지역사회, 정부의 몫일 것이다.
우리의 희망이자 미래인 청소년의 꿈을 진로교육의 장을 통해 더욱 튼튼히 키워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11월 23일 은행연합회 2층 컨벤션홀에서 인간개발 연구원 장만기 회장의 출판 기념회가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 당신이 희망입니다 ’
그는 모든 일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
확신을 가지고 그가 30대부터 시작한 사업이 '인간 개발' 사업이었다. 사회를 본 한비야씨도 “자신을 키워주신 분이 장만기 회장님”이라며 고마워했다. 그녀는 '바람의 딸 한비야, 지구 한바퀴를 돌다'라는 책으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정말 거침없고 용감한 여성이구나!' 구석구석 지구의 오지를 돌며 그녀가 겪은 희안한 경험을 보며 나는 내내 놀라워했다. 겁이 많은 나는 꿈도 못 꾸는 일을 용감한 그녀는 거뜬히 해내고 있었다.
인생의 지혜를 공유하는 진정한 리더 커뮤니티(Human Development Institute)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공부하는 CEO모임’, ‘인간의 향기가 나는 곳’
인간개발연구원에 붙여진 자랑스러운 별칭이다. 인간개발연구원은 1975년 2월 5일 첫발을 내디뎠다. 나는 우리나라가 빈곤을 면치 못하고 있던 시절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인간개발연구원을 설립했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매주 목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인간 개발원 조찬 세미나'가 열렸단다. 모든 사업에는 기본적으로 자금이 들어가야 한다. 재정적인 면으로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그였기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그는 묵묵히 한 길을 걸어왔다.
마지막에 내빈들께 감사 인사를 하신 장 회장은 조찬 세미나에서 강연하신 분 중에 네 분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셨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유산은 돈이 아닌 지혜임을 강조하셨다. 5포를 넘어 9포세대인 젊은이들에게 멘토의 역할을 충실히 하여 그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함을 강조하셨다. 여러 사람들이 ‘지혜 나눔으로 건강한 가치들이 살아 숨 쉬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그의 신념이 빛났다. 당신이 소신을 갖고, 평생 해 오신 사업에 대한 확신으로 80세인 그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열정이 넘치셨다. 어느 청춘보다도 푸르른 청년이 거기에 서 계셨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동년기자인 가재산 기자와 한국 시니어 블로거협회 김봉중 회장도 참석하여 축하해주셨다. 김황식 전 총리, 숙대 이경숙 전 총장, 양병무 교수, 도서 출판 행복에너지 권선복 대표, KGM의 최병헌 대표, 한국 콜마 주식회사 윤동한 회장 등 정치계, 학계, 재계에서 잘 나갔거나 잘 나가는 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축하해 주셨다. 이분들은 물심양면으로 장회장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친구 분들이다.
훌륭한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기본 덕목 중 하나는 겸손함이다. 장 회장이 이분들의 신뢰를 얻은 바탕은 '겸손함'이라고 김봉중 회장이 얘기해주셨다. 김봉중 회장도 10년 전에 조찬 세미나에 참석했었다고 하셨다. 인간 개발원 '조찬 세미나'의 일원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잘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이분에게 물어 보세요"
바로 장만기 회장. 대한민국 오피니언 리더 중에서 그를 모르면 명사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그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꿰뚫고 있다.
뛰어난 인재를 알아보는 장 회장의 레이다망에 포착됐다는 것은 그가 오피니언 리더라는 뜻이다.
우리 삶에 근간이 되는 사람.
그 사람에 촛점을 맞춰, 더불어 행복한 우리나라를 만들기 위해 오롯이 헌신하신 장만기회장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