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은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린 노부인 곁을 지키며 대화를 나눈다. 부인을 걱정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이 부인을 위해 설계하고 만든 로봇 ‘스필리킨’ 덕분에 노부인은 옛 추억을 되새기고, 의지하다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로봇은 부인의 배려심 깊은 간병인이자 대화가 잘 통하는 동반자가 된다.
이는 2015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초연을 올린 연극 ‘스필리킨’의 줄거리다. 실제 로봇과 사람 배우가 함께 무대에 서는 것으로 화제가 되었던 이 연극의 설정이 영 낯설게만 느껴지는가.
“2030년 100세 시대를 맞아 전통사회의 효(孝) 개념이 흔들리고, 함께 노인이 되는 자식을 대신해 기계가 노령화되는 인간 사회를 떠받친다.” 배일한 KAIST 녹색교통대학원 연구교수는 지난해 12월 ‘로봇 미래 예측 2030 석학 간담회’에서 ‘2030 미래 로봇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초고령화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인공지능(AI) 로봇 기술로 인구 구조의 취약점을 증강 보완하자는 주장이 담겨 있다. 간병인 혹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돌봄로봇 도입은 더는 별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생활 패턴 분석해 “약 드실 시간입니다”
KT는 ‘AI 케어로봇 시니어’ TV 광고를 송출하고 있다. 광고는 79세 김정문 씨와 케어로봇 다솜이의 일상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다솜이는 김 씨에게 기분이 어떤지, 뉴스를 틀어드릴지 묻는다. 저녁 식사 시간을 알려주거나, 날이 좋을 때는 가벼운 운동을 권하기도 한다. “어르신, 약 드실 시간입니다.” 미리 설정해둔 약 복용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고, 김 씨와 끝말잇기 놀이를 하며 단어를 주고받는다. 영락없는 간병인의 모습이다.
케어로봇 ‘다솜이’는 영상통화, 데이터 통합 관리, 돌보미 연결, 식사·복약·운동 지도, 응급 알림, 말벗 기능, 활동 감지 및 음악 감상, 커뮤니티 기능까지 제공한다. 유익함을 인정받아 수원시에 거주하는 65세 이상 250가구, 경북 영덕군 홀몸 어르신 200가구에 보급되는 등 지자체 어르신 복지에 활용되고 있다.
용인시에서는 비대면 AI 노인 맞춤 돌봄 서비스인 ‘용인 실버 케어 순이’를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순이는 DNX가 2020년 출시한 AI 돌봄로봇이다. 순이와 함께하려면 손목시계 형태의 웨어러블 밴드를 손목에 차야 한다. 약통, 전자레인지, 변기, 리모컨 등 집 안 곳곳에 터치패드 형태의 센서를 부착하는 준비도 필요하다. 기상 및 식사, 복약, TV 시청, 운동 등의 활동이 언제 이뤄지는지 생활 패턴을 감지하고 분석하는 ‘터치 기술’을 기반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약통에 부착된 센서에 이용자인 어르신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으면 자체 애플리케이션인 ‘마실대학 터치케어’에서 데이터를 파악해 AI 스피커 순이가 알림 음성을 재생하는 식이다.
용인시는 2020년 홀몸 어르신 11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범사업을 통해 어르신의 생활 패턴을 개선하는 효과를 확인했다. 6주간 생활 패턴을 조사해 분석한 결과 하루 평균 걸음 수가 약 900보 늘어났으며, 새벽 시간대에 TV 시청 시간이 평균 71% 감소하고 밤 10시 이후 야식을 먹는 횟수도 35% 줄어든 것. 강부금 용인시 복지여성국 노인복지과 주무관은 “사용자를 대상으로 만족도 조사를 꾸준히 진행하고, 개선이 필요한 사항을 DNX 측과 논의해 서비스를 발전시킬 예정”이라고 말했다.
AI가 전화 걸고, 냉장고로 안부 확인해
AI가 어르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대화하는 등 자유롭게 소통하기도 한다. 네이버가 올해 5월 정식 오픈한 ‘클로바 케어콜’(CLOVA Carecall)이 이에 해당한다. 클로바 케어콜은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 1인 가구에 AI가 주 1회 전화를 걸어 식사, 수면, 건강 등의 주제로 안부를 확인하는 서비스다. 지난해 부산 해운대구, 서울, 인천, 대구 등의 지역에서 시범사업을 시행해 서비스를 발전시켰다.
지자체 담당자는 통화 관리 도구를 통해 완료된 통화와 미응답 통화 등 전체 통화 현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건강, 수면, 식사, 운동, 외출 등 각 카테고리별로 불편 사항이 담긴 답변도 빠르게 확인 가능하다. 특히 2주 연속으로 미응답하거나, 답변 내용 중 특이사항 혹은 긴급 상황이 의심되는 경우 신속하게 조치할 수 있게 별도로 표시하고 있다.
단순히 건강 체크를 하는 수준을 넘어 정서적으로도 케어할 수 있는 것이 클로바 케어콜의 특징이다. 실제로 클로바 케어콜을 통한 AI와의 상호작용은 홀몸 어르신의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완화하는 효과를 냈다. 시범사업에 참여한 부산 해운대구 거주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한 결과, 열 명 중 아홉 명이 서비스 이용 후 ‘위로를 느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약 95%는 계속 서비스를 이용할 의향이 있다고 답하는 등 이용자의 만족도도 높았다.
최근엔 국내 자유대화형 AI 서비스 중 최초로 ‘기억하기’ 기능이 추가됐다. 지난 대화 내용 중 주요 내용을 요약 및 기록했다가 “코로나 걸린건 좀 어떠세요?”, “혈압약은 잘 챙겨드시고 계신가요?”라고 질문하며 대화 만족도를 높인다는 것. 네이버는 통화 종료 후에는 답변 내용을 기반으로 상태를 업데이트해 지자체의 돌봄 업무를 돕겠다고 설명했다.
가전제품이 돌봄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냉장고나 로봇청소기를 통해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가 등장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스마트싱스 홈 케어’ 업데이트를 통해 해당 기능을 추가했다. 이제 미리 설정해놓은 시간 동안 냉장고 문이 계속 닫혀 있으면 등록된 가족의 스마트폰으로 알림 메시지가 전송돼, 이용자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거주하는 어르신이 평소보다 오래 냉장고 문을 열지 않을 경우 몸이 아프거나 거동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는 설명이다. 이 기능은 2018년 이후 출시된 스마트싱스 연동 가능한 냉장고에서 이용할 수 있다.
로봇청소기 ‘비스포크 제트 봇 AI’를 통한 패밀리 케어 기능은 지난해부터 제공되고 있다. 스마트싱스 홈 케어 서비스 중 ‘패밀리 케어’ 항목에 청소기를 연결해두면, 이용자가 “하이 빅스비, 도와줘”라고 외쳤을 때 청소기가 이를 인식해 미리 설정해둔 가족의 스마트폰으로 푸시 알람을 보내는 식이다. 알람을 받으면 ‘우리 집 모니터링’ 기능을 통해 원격으로 로봇청소기를 이동시키며 집 안 상황을 영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기술, 떠나고픈 욕구까지 채운다
기술은 돌봄과 의료의 영역을 넘어 이동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도 맡는다. 직접 걸을 수 있도록 돕거나, 운전 시 사고를 예방하는 방식으로 어르신의 곁을 지킨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는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전기를 통해 근육과 관절을 제어함으로써 일상생활과 근육 발달을 도와주는 기술을 개발했다. 원하는 근육 위치에 패치를 착용하고 움직이면 시스템이 사용자의 동작 의도를 파악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제어해 근력을 보조한다.
이 장치는 특정 동작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신체 활동에 적용 가능해 어르신의 근감소증이나 재활인의 활동, 보행 장애 개선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ETRI가 삼육대학교와 위탁연구를 통해 고령자를 대상으로 2년간 탐색 임상시험을 진행한 결과, 걷거나 계단을 오를 때 신체기능평가 점수가 향상되고, 근육 사용률이나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줄어들었음이 나타났다. 또한 보행 속도가 빨라지고 근육량이 증가하는 등 보행이 더욱 정상화되는 개선 효과를 확인했다. 연구에 참여한 이완희 삼육대학교 물리치료학과 교수는 “상용화되면 근쇠약 고령인의 맞춤형 재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초고령화 사회에 다다른 일본에서는 고령 운전자의 운전 부주의를 예방하기 위한 운전 보조 제품이 인기다. 2018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일본에서 운전 실수를 방지해주는 다양한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고 전했다. 페달 조작 실수로 인한 급발진을 방지하는 제품부터 운전자의 얼굴을 모니터링해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행동을 하는 경우 경고음을 내는 장비가 인기를 끌었다는 분석이다.
KOTRA는 당시 기술 발전에 따라 AI, 사물인터넷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운전 보조 제품이 출시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는데, 이는 곧 현실이 될 예정이다. 2050년까지 자사가 판매하는 차와 관련된 사망 사고를 없애겠다고 선언한 혼다는 운전자의 신체를 분석하는 AI를 개발하고 있다. 요미우리 신문은 지난 5월 이 같은 내용을 보도하며 “이번 기술 개발로 고령 운전자에게 사고 위험을 알려주는 동시에 몸 상태의 변화를 인지하는 계기가 된다”라고 적었다. 교통신호에 대한 운전자의 반응이 늦어지는 경우는 녹내장을 의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신체 상태의 변화를 AI가 감지하고 운전자에게 알리면 녹내장이나 치매를 조기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사고 방지 기술이나 심박 측정, 동공 추적 등을 통해 운전자의 건강 상태를 감지하는 헬스 케어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현대차가 2018년에 출시한 넥쏘 자율주행차에는 탑승객의 건강 정보를 전문의에게 전송해 실시간으로 건강 진단을 받는 기술이 탑재됐다. ETRI는 “향후 운전을 못 하는 노인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율주행차 개발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자동차가 달리는 검진센터 역할을 하거나, 스스로 병원으로 이동하는 시스템이 개발될 것이라는 업계의 전망이 실현될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일본의 독신가구가 늘어나면서 ‘유품 정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물건을 가족이 아닌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효율적으로 정리하고 싶은 이들이 주로 유품 정리 전문가를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야시 상회(林商会)가 실시한 ‘유품 정리 전문가에게 의뢰할 경우 중점적으로 받고 싶은 지원’을 주제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4%는 ‘유품 정리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다’고 답했다.
A씨(50대 여성)는 “유족들은 여러 추억이 있으므로, 유품 정리를 효율적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으며, B씨(50대 남성)는 “자녀들이 타지에 살기 때문에 유품 정리를 하려 숙박을 하며 지낼 것을 생각하면 유품 정리사가 오는 게 낫다”고 말했다.
또한 정리할 물건이 많아 전문가가 효율적으로 처리해주기를 바란다는 의견도 있었다.
응답자들이 유품 정리사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싶은 1위는 “필요 없는 물품 처리”였다.
이어 2위는 “유품과 필요 없는 물품을 구분하는 것”, 3위는 “필요 없는 물품 판매”, 4위는 “대형 가구·가전 폐기”, 5위는 “귀중품과 중요 서류 찾기” 등이 차지했다.
1~4위의 항목을 보면 주로 물품 처리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유족들은 남은 물건의 필요성을 냉정하게 결정하기 어렵고, 물품을 버린다는 생각을 할 수 없어 중고 판매 등도 쉽지 않다.
따라서 유품 정리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객관적인 시선으로 필요한 물건과 남겨야 할 물건을 분리하고 판매 가능한 것은 팔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는 과정을 맡기고자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대형 가구나 가전은 처리하는 데 힘이 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대부분 유족들이 일과 유품 정리를 병행할 것을 고려하면 유품 정리사가 처리해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5위를 차지한 것은 중요 서류를 찾는 것인데, 이유로는 “본인이 중요 서류를 둔 장소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와 “가족이 중요한 서류인지 모를 것을 대비해 알려주었으면 해서”라는 이유가 있었다. 특히 유산 상속과 관련한 서류는 자칫 가족 간 싸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물론 “요금이 비쌀 것 같다”, “고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싶다”, “마음을 담아 직접 정리하며 추모하고 싶다”는 이유로 유품 정리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도 있었다.
하야시 상회는 “요즘은 ‘종활’(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활동)을 통해 생전 정리를 하는 사람도 늘어 유품 정리사의 도움이 꼭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면서도 “‘실제 유품 정리를 해보니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는 경험자들도 많은 만큼, 전문가에게 유품 정리를 맡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송파구 오금로에 위치한 책 복합문화공간 ‘서울책보고’에서 특별전시 ‘절판 시집의 추억전(展)’이 열린다.
10월 16일까지 이어지는 ‘절판 시집의 추억전(展)’은 문학과지성사, 창비, 민음사 등 출판사들이 펴낸 시집 가운데 서울책보고가 보유한 200여 권의 절판 시집을 전시·판매한다. 교육시집과 영화시집, 대학교 시 동아리에서 내놓은 동인지 등도 만날 수 있다.
서울책보고 참여 헌책방이 선별한 초판 시집과 시인 사인본 모음 코너도 마련된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창비 시선’, ‘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세계사 시인선’ 등에서 출간한 1970~2000년대 초판본이 전시·판매될 예정이다. 김광규, 나희덕 등 시인의 사인본도 접할 수 있다.
절판 시집 구매자에게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시인 김명순·윤동주·랭보·에밀리 디킨슨 등의 띠지와 레트로 종이봉투를 증정한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책보고 홈페이지나 공식 SNS(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거나,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한편, 서울책보고는 유휴공간이었던 신천유수지 내 물류창고를 서울시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새롭게 조성한 책 문화공간이다. 2019년 3월 27일 개관 이후 3년 동안 400회 이상의 다양한 책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교과서전(展):슬기로운 생활’, ‘잡지전(展):지나간 시간을 엿보다’, ‘7080 추억의 만화전(展)’, ‘근현대 여성 작가전(展)’ 등 공공 헌책방이 할 수 있는 특별전시를 선보인 바 있다. 서울책보고가 헌책과 헌책 문화를 통해 시대의 흔적과 추억을 시민과 공유하는 특별기획전시는 계속 이어진다.
반짝이는 것은 늙지 않는다. 일을 향한 열정,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짝이는 이 역시 늙지 않는다. 춘삼월 여린 잎 같던 목소리는 푸르다 못해 영글었고, 소년은 단단한 어른이 되었지만 반짝이는 두 눈은 24년 전과 다르지 않다. 예술과 사람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푸른 청년(靑年)으로 남을 임형주(37)의 이야기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최연소’, 하나 덧댄다면 ‘최초’를 꼽겠다. 2003년 만 17세 나이로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헌정사상 최연소 애국가 독창자가 됐다. 같은 해에 세계 남성 성악가 사상 최연소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데뷔 독창회를 가졌다. 국내 3대 공연장에서 독창회를 여는 대기록은 10년 전에 세웠다. 데뷔 15주년에는 앨범 누적 판매량 100만 장을 돌파했고, 최근에는 스승의 날을 기념한 독창회를 열면서 세종문화회관의 모든 무대(대극장, M씨어터, S씨어터, 체임버홀)에 서본 최초의 음악가가 되었다. 음악가로서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전부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두 살 소년이 상상 못한 숫자들
수집하듯 온갖 기록을 쓸어 담은 세월이 24년이다. 지금의 임형주는 데뷔 25주년을 앞둔 대한민국 대표 팝페라 테너지만, 1998년 데뷔 당시 열두 살 소년은 이 모든 기록적인 숫자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난 24년이 ‘꽃길만 걷는’ 시간이었을 것 같지만, 그는 스스로 ‘영광과 고난의 역사’를 거쳐왔다고 평가한다. 선배가 없는 팝페라 장르에서 활동하는 건 흙길에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과도 같았다.
지쳤던 걸까. 언제부터인가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월드컵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에만 등장했다.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노래하는 모습조차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명세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뜬소문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석좌교수, 미국 그래미상 심사위원, 음악평론가 임형주로 살았다. 대중과 멀어지면서 ‘세월호 추모곡 가수’, ‘애국가 소년’쯤으로 이미지가 축소됐다.
그러다 가수 임형주가 지난 5월 JTBC ‘뜨거운 씽어즈’로 안방극장에 얼굴을 비췄다. 출연자도, 시청자도 예상 못 한 깜짝 등장이었다. “음정, 박자, 테크닉은 다 차치하고 진정성을 전하는 노래가 최고의 노래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출연진의 도전을 응원한 그는 시니어 합창단과 함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겸손한 자세와 청아한 목소리가 갖는 힘은 여전했다. ‘뜨거운 씽어즈’에서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함께 부르는 장면의 유튜브 동영상은 두 달 만에 134만 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대중의 관심이 전보다 덜하리라는 예상을 뒤엎은 수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수로서 노래하는 제 모습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데뷔한 지 오래되다 보니 ‘왕년의 스타’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도 잘 출연하지 않았으니 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그의 데뷔 무대이자 첫 방송 출연이었던 KBS 2TV ‘이소라의 프로포즈’ 영상은 ‘온라인 탑골공원’(1990~2000년대에 유행한 콘텐츠를 올리는 유튜브 계정을 총칭하는 신조어)에 게재됐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하지 않느냐며 너스레 떨지만, 대중의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됐음을 알고 있는 그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 사랑을 위한 노래
그는 노래를 고를 때도 대중을 생각한다. 스스로 청중이 되어보고, ‘팝페라 테너’라는 정체성을 되새기며, 이 시대의 대중이 무얼 가장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지 고민한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곡들로 그는 사랑을 노래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연인의 애정보다는 인류애에 가깝다.
“연인의 사랑을 다루는 가수는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 휴머니티를 다루었어요. 대중이 가장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인 팝을 통해서 인간애를 노래하죠. 사실 예술은 무한하기 때문에 장르로 구분 지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예술의 본질적인 의미는 향유, 즐기는 데 있거든요. 저는 세상에 듣기 좋은 음악과 듣기 싫은 음악, 딱 두 가지 음악만 있다고 이야기해요. 예술가는 대다수가 공감하고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할 줄 알아야 하죠.”
고고하고 우아한 음악을 한다는 생각에 괜히 으스대는 클래식 전공자들을 종종 봤다. 그 역시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그들만의 음악’을 하기 싫었기에 팝페라 테너로 전향했다. 정치·경제만큼이나 문화예술의 중요성이 커지는 요즘, 그는 뿌듯한 한편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전부터 ‘문화예술의 일상화’를 주장하던 입장에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전하기 위함이다. 즐기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는 ‘어려운’ 콘텐츠가 일상에 스며들 자리는 없으니까.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예술을 향유하며 영감을 얻는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감상은 물론,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고, 활자중독이라 할 정도로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쓰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등.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기다렸다는 듯 세계 유수의 작가와 작품명이 쏟아졌다. 최근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책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도 그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다. “타인을 돌보는 마음, 그 사랑이 있기에 사람은 오늘도 살아 있다.” 인간애를 노래하는 가수다운 모습이다.
숲을 만드는 일을 꿈꾸다
올해로 서른일곱의 나이지만, 데뷔한 지 24년이 지났다. 인생의 3분의 2를 올곧이 음악에 바친 셈이다. 인간 임형주의 삶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지만 흘러간 과거가 아쉽지는 않다. ‘음악과 이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몇 시간 지나면 새로운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앨범 제작 작업은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지만, 사람은 죽어도 앨범은 세상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면 열심히 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요즘 들어 점점 은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굉장히 일찍 데뷔했기 때문에 다른 음악가들보다 조금 이르게 은퇴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커리어상 최정상을 누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지금이 제 목소리의 전성기임이 느껴지거든요.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뒤에는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순응하려고 해요. 돌이켜보니 데뷔하던 때도 왠지 ‘나는 일찍 은퇴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네요.”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끝을 떠올리자니 가수 임형주를 기다리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도 아쉬움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태도다.
현역에서 은퇴한다 해도 문화예술계에 일조하려는 계획은 확고하다. 그는 예술감독으로 행사를 직접 연출해보고 싶다고 했다. 노래가 꽃이자 나무라면, 가수로서 노래 부르는 것은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 일이다. 예술감독은 행사에 쓰이는 모든 음악을 심고 가꾸며 배치한다.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개·폐막식이라는 하나의 숲을 만드는 작업이다.
숲을 울창하게 만들어줄 묘목을 가꿀지도 모른다. 그는 최근 국내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팝페라’의 길을 걸을 후배들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또한 풍부한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행정가로도 활약하고 싶다. 인생 2막에 대한 계획을 늘어놓는 모습이 장래 희망이 너무 많아 고민인 어린아이를 닮았다.
바빠 나이 들 시간조차 없는 청년
차차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지만, 당장은 9월에 발매될 정규 앨범 8집 ‘Lost In Memory’를 제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번 앨범에는 1970~1980년대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 대중가요를 담을 예정이다. 독립군 애국가나 ‘봉선화’, ‘사의 찬미’ 등 1920~1960년대 노래를 수록한 정규 7집 ‘Lost In Time’과 시대적으로 연결되는 앨범이다.
“지난 앨범에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의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으니, 이번에는 ‘잃어버린 추억’에 대해 다뤄보려고 해요. 1970~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에는 트로트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작곡가 길옥윤, 박춘석, 이봉조와 그들의 뮤즈인 패티김, 혜은이, 정훈희나 이미자의 가요를 녹음하고 있어요. 패티김의 ‘이별’이나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정훈희의 ‘안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빠질 수 없죠.”
10월 12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신보와 같은 이름의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8집에 실린 노래 외에도 가을에 어울리는 추억의 팝송이나 연주곡을 함께 선보이려 한다고. 50인조 오케스트라 반주를 곁들일 예정이라, ‘사랑은 생명의 꽃’(패티김)처럼 음역대가 굉장히 넓은 곡을 듣다 보면 특히나 코끝이 찡해질 것이라는 전언이다.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우선 첫 베스트 앨범을 내려고 한다. 그의 모든 대표곡을 앨범 한 장에 담을 예정이고, 앨범 발매 기념 독창회 역시 진행하려 한다. 내년에 코로나19가 완화되면 국내나 해외 순회공연도 떠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전국 25개 도시를 돌아보고 싶어요. 숫자 맞추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TV 프로그램이나 매체 인터뷰 등 섭외 제안이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해요. 순회공연을 돌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난 뒤겠지만, 내년은 인간 임형주이자 음악가 임형주로서 제 인생을 결산하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의 계획을 듣고 있자니 “바빠서 나이 들 시간이 없다”던 유명 배우의 발언이 떠올랐다. 임형주는 배움을 멈추고 안주하려 할 때 사람이 비로소 ‘늙는다’고 생각한다. 고로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잠을 설치고,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받고 싶은 상이 남았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라고 대답한다. 오래도록 푸르를 청년일 수밖에.
고즈넉한 정취로 포근한 골목길, 시간의 퇴적으로 빛바랜 집들, 저 너머가 궁금해지는 언덕…. 서울에서 이제는 쉬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다. 딱딱한 고층 건물은 찾아보기 어려우니 희한하다. 그래 부암동은 매혹적이다. 음미할 만한 옛날 맛이 남은 동네다. 아파트촌보다 한결 따사로웠던 옛날 동네에 관한 추억이 금빛을 머금고 살아난다. 향수겠지. 이럴 때 마음은 물살처럼 번져 과거의 기슭으로 흘러간다. 자하미술관은 길의 끄트머리에 있다. 길의 이름은 무계정사길.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인왕산 서북부 자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자하미술관은 높고 외진 산기슭에 있다. 서울에 있는 미술관들 중 가장 고지대에 자리 잡은 미술관이다. 인근엔 석파정 서울미술관과 환기미술관이 있다. 둘 다 내로라하는 미술관이다. 저만치엔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이상적인 도시란 어떤 걸까. 내 생각엔 크고 작은 문화공간들이 우후죽순처럼 즐비한 도시다.
싱싱하고 유쾌한 콘텐츠를 장전한 문화시설이 편의점처럼 숱하다면? 아마도 풍속은 덜 야박해 매정한 도시를 견디기가 용이하리라. 삶의 비루함과 지루함을 잠깐이나마 날려버릴 수 있는 문화예술의 폭약이 생필품 목록에 오르는 세상. 나는 그런 도시가 그립다. 이 점에서도 부암동은 사람을 매혹한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많으니까.
레트로 바람일까. 해묵어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처럼, 곰삭은 시간의 흔적이 서린 이 동네를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색다른 운치를 돋운 카페들도 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또는 갈피 없이 마음이 들썩일 때 커피 한잔 즐기기에 좋은. 자하미술관에 이르는 무계정사길 풍경이 이렇게 다채롭다. 서정과 시정을 누릴 만하다. 그렇다면 이건 미술관에 차려진 예술의 성찬을 예감케 하는 애피타이저?
좁은 길을 따라 차를 몰면 잠깐 사이에 자하미술관에 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일 아니다. 두 발로 뚜벅뚜벅 거닐며 풍경을 즐기라. 그러라고 골목길들이 무언의 환영사를 읊조리는 게 아닌가? 삶의 과속과 과욕은, 직진을 관습으로 삼은 넓고 개방적인 큰길들이 암암리에 인간들에게 퍼뜨린 병증일지도 모른다. 넥타이처럼 좁고 골방처럼 안온한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길의 주류를 이루었던 시절은 이미 사라졌으나, 부암동에 듬성듬성 남아 있다. 도시개발의 캐터필러에 깔려 이마저 머잖아 시들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다면 간신히 생존한 저 골목의 일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그저 고만고만한 골목길이지만 애틋하다. 옛 친구를 만난 양 반갑다. “그래, 또 만나!” 기약 없는 석별을 하고 몇 십 년 전에 헤어진 친구가 문득 골목 모롱이에서 전설처럼 등장할 듯 괜히 설렌다.
과거에는 많은 일들이 골목길에서 벌어졌다. 일상의 인간관계가 맺어졌다. 벌게진 얼굴로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수줍은 연애편지를 전해주고 냅다 달아나기 좋은 곳도 골목길이었다. 정든 주점 하나쯤 골목에 있게 마련이었다. 피로가 극에 달할 때, 숨듯이 대피할 수 있는 곳이 골목이었다. 세사의 긴장과 소음에서 놓여날 수 있는 곳이 골목길이었다. 그러니 못내 그리운 게 골목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자하미술관에 가려거든 골목을 걸어 예열할 일이다. 자글자글 들끓는 향수에 취해볼 일이다.
산경(山景)도 영락없는 예술
자하미술관으로 가는 길엔 웅숭깊은 역사 한 자락이 깔려 있어 상상력을 자극한다. 세종의 아들로 서예의 달인이었던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무계정사 옛터에 지금은 한옥 문화공간 무계원이 들어섰지만, 고명한 옛사람의 별장이 있었던 자리니 깃든 뜻이 예사로우랴. 안평대군은 어느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봤다. 당최 잊히지 않는 꿈을 붙잡아두기 위해서였을까.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에게 꿈속의 지상낙원을 들려주고 그림으로 그려주길 청했다. 그렇게 태어난 그림이 천하 걸작 ‘몽유도원도’다. 안평대군은 더 나아가 몽유도원의 현실적 지형을 찾아냈다. 여기 부암동 산간을. 그러곤 무계정사를 지었다. 무계란 무릉계곡이다. 즉 이곳은 안평대군의 무릉계곡이자 무릉도원이었다. 무계정사 일원이 통째 옛사람의 원림이었다. 자하미술관 역시 원림 구역이었다. 순전히 안평대군의 행장에 이끌려 부암동 길을 거닐다가 자하미술관에 이르는 이도 드물지 않을 테다.
자하미술관은 언덕길이 끝나는 고샅에 있다. 인왕산이 늘어뜨린 치마 한 자락을 부여잡은 미술관이다. 그저 살포시, 산 그림자 드리워진 미술관의 형상도 담박하다. 꾸밈과 치레를 자제해 얼룩이 없는 둘레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린다. 건물은 노출콘크리트 벽체로 골격을 삼았다. 개성을 돋우기보다 기능성을 살려 지은 집이다. 전시실은 1층과 2층에 있다. 외부의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해 천장 한쪽엔 유리판을 설치했다.
미술관 외부에 가득한 건 초록을 내뿜는 산이다.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이다. 인간사의 광기와 탐욕은 인간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양 무심히 흐르는 구름이다. 상상력을 광폭으로 키울 경우 모든 게 미술이다. ‘본디부터 그냥 그런’ 저 자연을 모방하는 게 예술이지 않던가. 이런 자연을 예술로 관조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게 자하미술관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라 했으나, 미술관에서 바라보이는 산경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락없는 예술이다. 조물주의 붓질이 스친 자리다. 신이 구현한 설치 작품이다.
산중 고요에 폭 파묻힌 자하미술관은 작은 미술관이다. 하나 허투루 봤다간 큰코다친다. 수준 높은 기획전을 빈번히 펼치는 미술관으로 나름 이름났다. “어쩌면 그렇게 좋은 전시회들을 기획해요?” 그런 얘기 매번 들었다며, 설립자 강종권 관장이 홍소를 터뜨린다. 그는 미술관 건물을 손수 구상해 지었다. 2008년 개관 이래 독특한 기획전들을 펼쳐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오랫동안 안평대군에 꽂혀 헤어나지 못했다. 6년을 내리 안평대군을 테마로 한 갖가지 전시회들을 열었다. 몰입도 이런 뜨거운 몰입이 없다. 그럼에도 양에 차지 않았던가. 2017년엔 ‘안평대군의 비밀정원’이라는 타이틀의 대형 전시회를 펼쳐 갈 데까지 가봤다. 이 전시회에 한창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 22명이 참여해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2018년 주재환과 성능경의 2인전 ‘도르래미타불’전 역시 성황리에 펼쳐졌다. 방문 당시에는 김상표의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감을 손가락으로 찍어 화폭에 난사한 액션 페인팅으로 아나키즘을 표출했다.
자하미술관에서 시선이 머무는 건 그림만이 아니다. 외려 산 풍경에 쏠린다. 북한산 비봉능선에, 북악산의 옹골찬 품새에 넋을 잃는다. 후미져 제 발로 찾아오기 쉽지 않은 미술관이지만 웬걸, 와서 보고선 흥취에 반색한다. 그림과 풍광, 둘을 잡았으니 남은 허기가 없다. 종내 마음으로 들이치는 건 안평대군의 꿈이다. 그의 몽유도원 한 자락을 훔쳐본 기분이라니.
서울역사박물관 산하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1970년대~2000년 초 옛 종로서적과 관련된 자료와 사연을 12월 31일까지 공모받는다. 이번 공모는 2023년 개최될 기획전 ‘종로서적(가제)’을 위해 진행된다. 1970년대~2000년대 초 종로서적에 대한 자료를 모아 시민들이 기억하는 그 시절 종로서적의 모습과 의미를 다시 되새기기 위함이다.
종로서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있던 대한민국의 대형 서점이다. 대한민국의 서점 중 가장 역사가 긴 서점이며, 도서정가제를 처음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종로서적은 당대 지식·문화를 상징하는 종로의 대표 서점이었다. 2002년 문을 닫기 전까지 ‘종로에서 만나자’는 말은 종로 2가 종로서적 앞에서 보자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의미일 정도였다.
공모대상은 ▲종로서적에 대한 개인의 기억 ▲종로서적과 관련된 물건이다. 공모해준 시민들에게는 2023년 기획전 도록을 제공한다. 인터뷰에 선정된 시민에게는 서울역사박물관 20주년 기념품(소진 시 다른 기념품으로 대체 가능)을 증정할 예정이다. 또한 공모된 사연 및 자료는 공모해준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향후 전시 혹은 발간될 도록에 수록 가능하다. 공모 결과는 2023년 기획 예정인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응모는 방문 및 우편, SNS를 통해 가능하다. 자세한 사항은 서울역사박물관 누리집에서 소식참여를 클릭한 후, 공지사항 게시판을 통해 확인하면 된다.
한편, 종로서적은 주변 서적들과의 경쟁으로 경영난을 겪었고 인터넷 서점과의 경쟁, 1년 가까이 지속된 노사분규가 매출 부진으로 이어져 2002년 6월 4일 최종적으로 부도 처리됐다. 이후 출판인과 과거 종로서적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의 후원을 바탕으로 새로운 종로서적 법인이 설립됐고 새로운 종로서적은 2016년 12월 23일 종로타워에 있던 반디앤루니스 자리에 개점했다.
27일 오후 1시 30분 방송인 고(故) 송해의 49재 추모공연이 서울 종로구 모두의극장(허리우드극장 5층)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은 이상벽, 조영남, 현숙, 심형래 등 생전 고인을 따랐던 후배 문화예술인 12인이 한마음으로 준비해 그 의미를 더했다.
지난달 8일 갑작스러운 비보에 각계각층의 추모가 이어졌고, 49재가 열리는 현재까지도 종로 송해길 주변 상인과 시민들의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고 있다. 생전 고인은 KBS1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받은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문화 1번지 종로’의 부활을 알리는 극장식 추억의 쇼를 기획 단계부터 직접 참여했고, 종로 거리에서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 축제를 여는 등 평소 종로에 대한 깊은 열정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2019년 본지와의 만남에서도 “송해길에 자주 나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맛있는 것도 즐기면서 사는 재미를 느끼시라”며 종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 건강한 모습으로 길거리 담소도 마다치 않으며 시민들과 유대해온 그이기에 빈자리는 더욱 컸다.
이에 이번 추모공연을 기획하고 무대를 제공한 ㈜추억을파는극장 김은주 대표는 “송해 선생님은 생전 실버영화관 홍보대사로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후배를 양성하며 양질의 무대를 위해 힘써오셨다”며 “그게 종로를 찾는 어르신은 물론 국민들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하는 길이라 여기셨다. 하늘에서도 분명 후배 문화예술인들이 준비한 무대를 흐뭇하게 지켜보시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이 더욱 뜻 깊은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과거 고 이주일이 폐암으로 고통받던 본인의 모습을 공개하며 대한민국 흡연률 감소에 기여했듯, 고 송해의 죽음은 ‘어르신 낙상사고 예방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주최측은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매주 월요일 ‘모두의 극장’을 무료로 대관하는 한편, 수익금 일부로 어르신 관객에게 미끄럼방지매트를 제공한다. 아울러 독거노인이 화장실 낙상사고로 고독사하지 않도록 관련 캠페인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한편 송해는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후 끝내 눈을 뜨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추모공연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오늘 오전 11시 30분부터 선착순으로 현장 접수한다(300명까지). 평소 송해를 따랐던 후배 문화예술인 이상벽, 조영남, 전원주, 최주봉, 김성환, 박일준, 현숙, 배일호, 조항조, 이용식, 심형래, 김은주((주)추억을파는극장 대표)가 무대에 오른다. 공연 관람을 통해 얻어지는 수익금은 전액 기부 예정이다.
올해 6월 일본 대표 여성 시니어 매거진 ‘하쿠메쿠’(ハルメク)는 호세이대학 대학원 정책 창조 연구과와 공동으로 ‘시니어 여성의 행복에 관한 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장기화하는 코로나19 사태와 불안정한 국제 정세로 개인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행복의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에 시니어 여성에게 행복이란 무엇이고, 그들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느끼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 일본 시니어 여성(50~84세, 507명 대상)의 행복도는 10점 만점에 7.77점으로, 일본인 평균보다 1.73점 높게 나타났다. 연령대별로 비교한 자료를 살펴보면 50대는 7.67점, 60대는 7.81점, 70대 이상에서는 7.80점이었다. 50대의 경우 60~70대와 비교해 행복도의 평균이 약간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배우자의 유무와 건강 상태, 취미 활동 수도 행복도에 영향을 미쳤다. 먼저, 배우자가 있는 시니어 여성(7.92점)은 배우자가 없는 시니어 여성(7.25점)보다 행복도가 근소하게 높았다. 또, 이들 세대는 몸과 마음의 건강, 즉 심신이 건강이 행복도와 비례하여 나타났고, 취미활동의 수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열심히 임하고 있는 취미 활동 수’에 대한 물음에서 4개 이상이라 답한 이들의 행복도는 평균을 웃돌았지만, 그 이하라고 답한 경우 행복도는 평균에 못 미쳤다.
취미 활동 수 평균은 6.06개였는데, 구체적인 활동을 묻는 질문에는 1위 건강을 위한 운동(51.9%), 2위 독서(46.0%), 3위 원예 가드닝(39.1%) 순으로 답했다. 주목할 점은 배우자가 없음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는 취미 활동 수가 4개 이상인 이들의 경우 행복도의 평균이 평균치와 동등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즉, 배우자가 없더라도 스스로 활발히 일상에 임하고 취미 활동을 할 때 행복도가 높아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언제 행복을 느끼느냐’는 질문에는 ‘맛있는 것을 먹고 있을 때’(68.8%)라는 응답이 1위였다. 2위는 ‘지식이 깊어지거나 새로 얻었을 때’(60.4%), 3위는 ‘취미 활동을 할 때’(60.0%) 등으로 나타났다. 그밖에 연령대별 자세한 의견을 들어보면 50대는 ‘아이와 보내거나 아이의 행복을 느낄 때’, 60대는 ‘남편과 TV 또는 동영상을 보며 대화를 할 때’, ‘손자와 소통하거나 성장을 바라볼 때’, 70대는 ‘과거의 인생이나 추억을 되돌아볼 때’ 행복하다고 응답했다. 전반적으로는 ‘친구와 즐겁게 지낼 때’가 행복하다는 의견도 다수였다.
연구를 진행한 하쿠메쿠 연구소의 우메즈 유키에(梅津 順江) 소장은 “일본 시니어 여성의 행복을 형성하는 요소는 돈과 건강만이 아니었다. 가족(남편 포함)의 존재, 열심히 할 수 있는 취미와 활동, 손주나 친구와 보내는 시간, 맛있는 식사, 지식을 얻는 순간 등도 영향을 주고 있다. 즉 많은 인연과 관계 짓고 있다면 행복하다는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더불어 “이러한 관계는 ‘타인과 나’, ‘돈과 시간’, ‘사회와 가정’, ‘놀이와 배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의 관계성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가 균형 있게 연결된 상태가 시니어 행복과 일상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시니어 여성의 행복도는?
그렇다면 한국 시니어 여성의 행복도는 어떠할까? 지난해 국회미래연구원이 발표한 ‘2021년 한국인의 행복조사 및 한국인의 미래 가치관 연구 심층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연령대가 높을수록 행복도가 낮아지는 경향을 나타냈다. 세대별 현재 행복도(5점 만점)는 Z세대가 3.63점으로 가장 높았고, M세대(3.56점), X세대(3.45점), 베이비붐세대(3.32점) 순이었다. 주목할 점은 남녀로 나눴을 때의 행복도의 차이다. 해당 조사 결과 베이비붐세대를 제외한 전 세대에서 남성보다 여성의 행복도가 높게 나타났다(베이비붐세대 행복도 남성 3.35점, 여성 3.29점). 즉 전 연령대에서 가장 행복점수가 낮은 것은 시니어 여성이라는 것. 일본과는 상이한 결과다.
한편 일본과 마찬가지로 배우자 유무에 대한 결과에서 베이비붐세대는 기혼 또는 동거 상태인 경우(3.39점) 행복도가 더 높았다(미혼 2.87점, 사별·이혼·별거 3.01점). 아울러 베이비붐세대에게 현재 행복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가족관계가 45.8%로 1위, 이어 건강이 32.3%로 2위를 차지했다. 일본 여성 시니어의 사례와 같이 가족 관계가 좋을수록 건강한 상태일수록 행복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해당 보고서 연구자는 분석 자료에서 “기성세대의 주관적 행복 요인 관련해, 사회적 신뢰가 높을수록,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인식이 양호할수록 행복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현재 주관적 건강상태가 양호하다고 응답할수록, 나의 미래에 대해 개인의 노력과 선택이 중요하다고 응답할수록, 삶의 만족도가 높을수록, 10년 후 나의 행복도를 높게 평가할수록 행복감이 높은 경향을 보인다”고 해석했다.
일본 자료 출처=하쿠메쿠 연구소 보고서 'ハルメク 生きかた上手研究所調べ'
이젠 연두에서 완연한 초록이다. 선명해진 그 색감 속에서 자연을 충만하게 누릴 만한 곳, 안성에 가면 산자락을 돌며 이루어진 호숫가의 신록이 한창 물이 올랐다. 호수를 감싼 둘레길이 매력적인 안성. 날마다 감각적인 공간들이 튀어나오는 세상에 푸름이 가득한 시인의 고향에서 마주하는 사색과 사유의 시간으로 여기가 더없이 딱 안성맞춤이다.
시를 만나며 걷다, 박두진 둘레길
굳이 박두진 문학길을 내비게이션에 넣지 않아도 안성의 금광호수만으로도 자동차는 잘 찾아간다. 둘레길 진입로엔 청록뜰과 수석정 두 코스가 있다. 금광호수를 따라 빙 둘러싼 박두진 문학길 중 하나인 수변산책로 청록뜰은 인적이 드물다. 안성 시내에서 동쪽으로 자리 잡은 빼어난 경관의 금광호수 수변길은 오직 자연의 소리만 들린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낮은 물소리와 숲길 따라 걸으며 들려오는 새소리가 전부다.
수변데크를 걷다 보면 호수를 둘러싼 주위 산들이 기다랗게 어우러진 풍경이 자연스럽다. 안성은 큰 강이 없는 내륙이다 보니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저수지를 여럿 만들었다. 금광호수는 안성의 대표적인 호수다. 보통은 둥그런 형태의 호수 모양이 흔한데, 주변의 산길 따라 구불구불하게 형성된 모양이다. 호수 위에 얹은 나무데크 길은 사뭇 물 위를 걷는 느낌이랄까. 가다가 숲 그늘 벤치에 앉아 마음껏 ‘물멍’에 잠겨도 좋다. 맞은편 산이 물속에 잠겼다. 물속에 잠긴 나무의 반영이 청송 주산지와 흡사하다. 다만 시인의 고향인 이곳의 고요함은 어쩐지 더 아련하다.
시인이 나고 자란 고향 안성. 조지훈, 박목월 시인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혜산 박두진 시인은 유년기를 안성의 농촌 마을에서 보냈다. 그 후 평생을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살면서 자연을 시로 노래한 분이다. 말년엔 안성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문학적 토대가 되었던 고향 땅에서 시를 쓰고 유년기의 추억을 집필했다고 전한다. 호숫가를 돌다 보면 언덕 위로 집필실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 앉아 호수 물빛을 바라보며 따스한 고향의 품을 누렸을 듯하다. 지금은 자료들을 모두 옮기고 빈집과 표지석만 남아 있다.
박두진 문학관과 안성맞춤 공간들
물 위를 걷듯 수변의 박두진 문학길을 걷다 보면 군데군데 시인의 시구가 한마디씩 맞아준다. 숲길 따라 시(詩)를 만나며 혜산정으로 오르는 산책로에서는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적당히 땀 흘리며 여유롭게 걸으니 몸과 마음이 동시에 건강해지고 순해지는 기분이다. 이렇게 평온함을 주는 아름다운 둘레길이라니, 시인의 길에서 감성을 일깨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왕 나섰다면 금강호수 둘레길의 박두진 문학관도 들러볼 일이다. 문학길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다. 잘 알려진 대표적인 시 ‘해’가 그려진 외관이 멋스럽다. 박두진 시인의 문학사상과 관련 자료 전시, 교육, 휴식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이다. 전시 공간은 1부 ‘박두진의 시를 읽다’, 2부 ‘박두진의 일상을 보다’, 3부 ‘박두진의 예술 세계를 만나다’로 구성되었다.
1층 북카페와 수장고를 지나 2층을 둘러보며 간간이 시를 읽어본다. 자필 원고와 원고료 영수증 같은 시인의 소소한 일상도 볼 수 있다. 단소와 서예를 즐기던 모습과 영상으로도 시를 만난다. 한켠의 서재 공간은 연희동 집에서 옮겨와 똑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잘 고증된 지인들의 회고 영상이나 수많은 작품과 자료들이 지루하지 않다. 살아생전 주변 문인들과 교류의 흔적,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낭독으로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전시 공간도 마련되었다. 노래로 만나는 박두진 시인 코너에서는 시에 곡을 붙인 조수미와 조하문 등의 노래를 헤드폰을 끼고 들어보는 것 또한 즐겁다.
박두진 시인은 수석과 붓글씨, 도자기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전시장 곳곳에 집약적으로 펼쳐놓은 시인의 생활을 보면 일상이 고스란히 예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따라 보여주는 문인들의 사진과 회화 작품들이 시인과 연관해서 생각케 한다. 다목적실로 이어지며 나타나는 책이 구비된 멋진 공간, 서가의 책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어 편하게 앉아 책 속에 파묻히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듯.
문학관 주변에 조성된 공예문화센터와 잔디광장, 야생화 단지는 시민공원으로 최적이다. 박두진 문학관은 안성맞춤랜드 북쪽 끝자락인 셈이다. 안성맞춤랜드의 남사당 공연장이 문학관 건너편에 마주하고 있다. 안성 남사당패의 바탕이 된 여성 꼭두쇠 예인 바우덕이를 기리는 민중 예술단 남사당 공연장이 산 아래 웅장하다. 주변으로 천문과학관이나 캠핑장도 이어져서 커플이나 가족 단위 나들이로도 안성맞춤. 안성 시민들과 여행자들에겐 최고의 쉼터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주변에 가볼 곳이 아직 많다. 안성에서는 올망졸망하고 나지막한 산과 호수들이 천혜의 자원이다. 안성목장 들녘에는 청보리가 익어서 누렇게 일렁이고, 죽주산성의 탁 트인 성벽을 따라 오르며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다. 유기공방에서 장인의 전통 유기도 살펴보고, 4대째 이어오는 노포 맛집 안일옥에 들러 안성 쌀밥에 국밥 한 그릇도 먹어야 한다. 나선 김에 마음 끌리는 곳으로 한 군데 더 발걸음한다면 천년고찰 석남사(石南寺)가 있다.
천년고찰 석남사 돌계단 그 끝까지
서운산 기슭에 들어앉은 석남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절이다. 입구부터 시작되는 돌계단을 밟으면서 단박에 이 절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파르게 계단이 쭉 이어진다. 오르면서 계단 옆으로 불두화가 맞아주어 잠깐씩 발걸음을 멈춘다. 조금 더 오르면 계단 옆으로 호위하듯 세운 담장에 기댄 보랏빛 매발톱이 바람에 살랑살랑. 드물게도 계단 오르는 일이 힘들지 않다.
돌계단 중간쯤에서 양옆으로 두 기의 5층 석탑, 그리고 나타나는 영산전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기도를 올리는 스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석가모니불과 그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불전이다. 또한 500나한을 함께 봉안한 것이 특징인 조선시대 건축 양식으로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영산전에서 또 한 번 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 석남사의 대웅전이 기다린다. 마치 마지막 신전에 오르는 기분이다.
대웅전 앞에 서서 석남사를 내려다본다. 산 높이에 따라 중턱에 배치된 몇 동 안 되는 사찰의 구성이 운치 있다. 절 앞으로 마주한 산과 뒤편으로 배경이 되어주는 산세가 너무나 평안하다. 이렇게 유순한 산세에 파묻힌 절의 긴 계단을 오르면 드라마 속 배우 공유가 날리던 풍등이 자연스러워 보였던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절에서 조금 더 걸으면 마애여래입상을 만난다. 산길을 쭉 걸으면 청룡사도 나오니 시간이 허락된다면 산행을 즐겨볼 만하다. 꼭꼭 숨은 듯 서운산 자락에 묻힌 석남사, 고졸(古拙)함과 소박함의 깊이가 거슬릴 것 하나 없이 기막히다.
“사람이 죽으면 정말 끝일까요? 시신만 놓고 본다면 생명은 끝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은 죽어도 다른 사람의 기억에 남아 추억되고, 재산은 상속되며, 쓰던 물건은 어떤 식으로든 유품으로 남습니다.” - ‘당신의 마지막 이사를 도와드립니다’ 中
책 ‘당신의 마지막 이사를 도와드립니다’의 저자 김석중은 국내 1호 유품정리사이자 유품 전문 회사 키퍼스코리아의 대표다. 그는 유품정리사라는 일에 대해 ‘돌아가신 분들의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한다. 고인이 남긴 것을 분류해 남길 것과 버릴 것을 골라 정리한다’라고 표현했다.
‘그런 직업도 있어?’라고 묻는 사람이 여전히 많지만, 김석중 대표가 유품정리사로 일을 한 지도 벌써 15년이 됐다. 15년 전의 어느 날, 그는 20대의 젊은 직원이 갑자기 죽는 일을 겪었다. 이어 우연히 일본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유품 정리 일을 알게 됐고, 그 회사 대표를 찾아가서 유품 정리 일을 배우게 됐다.
책 ‘당신의 마지막 이사를 도와드립니다’에는 김석중 대표가 15년간 유품정리사로서 죽음의 현장에서 일하면서 마주했던 다양한 일과 그 과정에서 느낀 소회가 담겨있다. 특히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아닌 고인에 대한 예우를 갖춰서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고 감동을 안겨준다.
김석중 대표는 보통 가족의 의뢰를 받고 고인의 유품을 정리한다. 요즘은 사전 예약도 늘고 있지만, 저자는 고인이 떠난 후 남겨진 물건들을 통해 고인과 처음 만난다. 그래서 그는 ‘현장에 들어가는 순간 마치 영상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시계가 반대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고 표현했다.
한 사람이 사망하면 집 한 채 분량의 유품이 생기는데, 김석중 대표는 그 물건들을 보면서 고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고인이 각별하게 생각한 물건, 가족들에게 남겨주고 싶었던 물건 등은 물론 취미, 취향, 성격 등이 모두 보인다고 했다.
김석중 대표는 죽음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떠난 사람을 위해, 남은 가족을 위해 ‘마지막 이사’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유품 정리를 한다. 최대한 신중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임하려고 한다.
그러나 감정이 이입 되는 순간들도 있다. 태어난 지 1백일 만에 세상을 떠난 아기를 둔 부모님의 사연에는 눈물짓고, 재산만 노리는 가족을 만나면 화가 나기도 한다. 김석중 대표가 유품정리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김석중 대표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아흔을 앞두고 돌아가신 할머니와 60대 후반의 며느리 사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며느리는 자신도 나이가 많고 너무 슬퍼서 시어머니의 유품 정리를 하지 못해 김 대표에게 의뢰했다.
김석중 대표는 “유품 정리를 마치고 유품을 며느님께 드렸더니 정말 많이 우셨다. 시어머니하고 며느리 사이인데, 정말 정이 깊은 사이라는 게 느껴졌다. 친딸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라면서 “저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고 밖에 나와서 혼자서 울었다. 지금도 내가 쓴 책이지만 그 부분을 읽으면 울컥한다”라고 말했다.
김석중 대표는 유품 정리 일을 하면서 장례학과 교수가 되고, 장례지도사까지 됐다. 그리고 돌이켜보니 그는 대학생 때 상조회사와 거래하는 도시락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손해보험회사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고. 30년간 장례산업에 몸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장례업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무섭지 않으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 김석중 대표는 장례업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는 “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누군가 제대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김 대표는 ‘장례’에 대해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가족이 마지막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인문학적 영역’이라고 표현했다.
김석중 대표는 “장례학과 학생은 젊은 세대부터 연세가 많으신 분들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그런데 젊은 학생들은 편견과 선입견이 워낙 심하다 보니 좌절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코 천시 받는 직업이 아니고, 사람들이 고마움을 느끼는 직업이라는 것을 심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책에서 장례에 대해 다뤘다”라고 설명했다.
김석중 대표가 책을 통해서 전하는 메시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대비를 해두라는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죽고, 물건은 남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김석중 대표는 사후에 대해 미리 적어두는 ‘엔딩노트’를 작성하고, 가족들과 평소에 얘기를 많이 할 것을 추천했다. ‘치약을 눌러 짜는 것처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더 많은 추억을 나누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석중 대표는 “저는 모친, 딸과 함께 3자 통화를 자주 한다. 따로 떨어져 살아도 같이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딸은 이제 저보다 할머니한테 더 자주 연락한다.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라면서 “이런 대화의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손주는 할머니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할머니는 손주가 있으니 외롭지 않고 든든하다고 느끼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죽음이라는 것은 결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사망 전부터 이후에 이르기까지 혼자 준비하고 맞이할 수 없으니까 반드시 가족과 함께 논의했으면 하는 것이다. 만약에 가족이 없다고 한다면 가족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을 자꾸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60대 중반이신 분이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제게 연락을 하신다. 이분이 결혼을 안 하셔서 자녀가 없으시다. 부모님과 형제들도 다 돌아가셔서 가족이 없는 거다. 그나마 제가 있으니까 안심이 된다고 얘기하셨다. 오늘도 그분이 다리 수술을 하러 가시는데, 오늘은 못 가드렸지만 퇴원할 때 가볼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한 사람한테는 어떤 누군가의 관심이 제일 절실할 수 있다. 가족이 없는 분들에게는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면서 “우리(유품정리사)가 하는 서비스가 불안해하시는 분들에게 안심을 드릴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