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판에는 욕심이 많았으나 오디오 기기에는 욕심을 부릴 형편이 못 되어 결혼 후 얼마간은 야외휴대용 전축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국산 중에서는 가장 낫다는 ‘별표 전축’을 구입했다. 이것을 들여놓은 날은 마치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필자가 이 별표 전축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뉴욕대학교 폴리테크닉대(Polytechnic Institute of New York)의 방문교수로서 1985년에 미국으로 건너갈 때였다. 이때쯤은 전축도 상당히 낡았고 또 아들 넷을 동반하자니 짐이 많아 도저히 이것까지 가져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저지에 얻은 셋집에서 모처럼 음악이 없는 삶을 살던 어느 날, 뉴욕의 5번가를 따라 한인상점들이 많은 지역을 걷고 있는데 ‘Fisher Audio Sale!’이라는 광고가 필자의 눈을 때렸다. 당시까지 필자는 외제 오디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지만 지도교수이셨던 C교수께서 항상 자랑하시던 것이 바로 ‘Fisher 오디오’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점포에 들어가 보니 물론 교수님 댁 것과 같은 고급 모델은 아니었지만 성능이나 모양도 그럴듯하고 가격도 큰 무리 없이 살 수 있는 정도여서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다. 이 오디오는 귀국 후에도 친구들이 ‘서린 카페’라고 부르던 필자의 서린아파트 거실을 차지하고 가족들은 물론 놀러오는 친구들에게 많은 음악을 선사하였다.
1990년 초, D건설에 근무하던 친구 K군이 동대문운동장 옆 민자 지하주차장 건설 현상공모를 위한 기본계획 수립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다행히 이 작품이 당선되자 그 친구는 음악을 좋아하는 필자가 제대로 된 오디오 하나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며 돈 대신 오디오를 한 세트 기증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당시 필자는 전설적인 DJ 최동욱씨와 몇 번 방송을 같이 한 적이 있어서 상의해보니 영국의 B사 제품을 추천하며 용산 전자상가에 있던 ‘태양오디오’라는 B사 대리점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B사 오디오보다 기기별로 특성이 있는 컴포넌트들을 모아서 꾸며보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프리앰프 분리형 Audio Innovation 진공관앰프, Thorens 턴테이블, Sony CD플레이어, Teac 카세트데크, Elac 스피커 등 최고급은 아니지만 매우 실용적인 컴포넌트로 구성된 본격적인 오디오 시스템을 처음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Fisher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 오디오로 인하여 ‘서린 카페’의 격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친구들도 더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용인으로 이사 온 후인 2000년대 중반까지도 가끔씩은 친구들을 불러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곤 하였다. 최근에는 이 오디오를 쓰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수년 전에 구입한 Teac 소형 올인원 오디오로 종종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이 오디오는 LP나 카세트테이프의 음악을 CD에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옛날에 좋아하던 LP음악을 차에서 들을 수 있도록 CD에 녹음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필자와 매우 가까운 친구인 (재)월드뮤직센터의 강선대 이사장은 필자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음악 수집광으로, LP나 CD만 해도 필자의 10배 정도인 수 만장을 가지고 있다. 또 음악을 비롯한 각종 문화예술 관련 책자, 외국의 각종 민속악기 등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특히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에 많은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다.
필자는 명지대 교양학부에 ‘세계의 민속음악’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그를 겸임교수로 초빙하도록 하였다. 이 강좌는 수년간 인기리에 운영되었다. 우리들은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토대로 전 세계 음악자료의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아카이브와 국내외 음악 관련 학술 연구 지원 및 세계음악의 대중적 보급을 위한 세계음악문화연구소 등의 설립을 추진해 나가는 한편,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나눔과 소통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법인을 설립할 필요가 있음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9년 7월, 강 이사장을 중심으로 필자와 몇몇 사람이 모여 월드뮤직센터 설립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약수동에 사무실을 얻어 소장품을 옮겨온 후 정리를 시작하였고, 2011년에는 국내외 월드뮤직 전문가 및 활동단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후 2012년 11월에는 (재)월드뮤직센터를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세계 음악학회와 공동으로 “다문화 사회와 음악: 글로벌 현황과 우리의 실천적 과제”라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3년에는 아카이브 구축을 시작하였고, 북촌우리음악축제를 후원하기도 했다.
2014년 3월에는 국민대 김희선 교수를 소장으로 세계음악문화연구소를 설립했고, 4월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여러 단체의 후원을 받아 Asia Society와 공동으로 ‘뉴욕 한국음악 페스티벌:산조와 판소리’(New York Korean Music Festival: Sanjo and Pansori)를 주최하였다.
또 9월부터 11월까지는 매주 월요일 오후 3시부터 90분간씩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한규설 대감댁)에서 강 이사장, 음악평론가 황우창, 세계음악학회장 박미경 등의 강의로 월드뮤직 가깝게 듣기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비엔날레로 개최되는 아시아 월드뮤직 어워드를 제정하여 제 1회 수상자로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그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을 선정하고 10월 27일 13시 30분에 예술의전당 푸치니 홀에서 시상식을 가졌다. 그 다음 날은 관계자들과 더불어 그들의 공연을 만끽하기도 하였다.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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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그리스는 아름다운 곳이 많은 나라다. 아테네 거리에서는 여신이 금방 환생한 듯한 아리따운 여성들이 활보한다. 특히 그리스 여행의 백미는 ‘섬’ 여행이다. 200개의 유인도 중에서도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산토리니’다. 그곳뿐 아니라 꼭 가봐야 할 곳은 ‘메테오라 수도원’이다.
그 아름답고 멋진 풍경은 시댁 어른들과 함께 떠난다 해도 모든 스트레스를 다 감싸 안아줄 것이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화산섬 보트 투어는 유용한 패키지
TV 프로그램 에 소개되면서 광고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본 곳이 그리스다. 그리스의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큰 인기를 누리지만 이 섬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어느 누구하고 동행하더라도 상관없다. 단언컨대 ‘묵은 시름’이 많은 사람들이 동행해도 그 아름다운 풍치에 반해 스트레스를 다 녹여줄 것이다.
산토리니는 에게해 남쪽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Kykladhes Is.) 남쪽 끝에 있다. 아테네에서 235㎞ 떨어져 있으며 중심 마을인 피라(Fira)를 포함해 13개의 마을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산토리니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티라(Thira) 섬. 티라는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중간에 위치해서 두 문명과 교류하며 발전했던 키클라데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1500년경, 이곳에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났고 이후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1956년에도 화산폭발로 피라와 이아(Oia) 마을이 파괴된 적이 있다. 한때는 원형 섬이었는데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고 잘려나간 절벽 위에 하얀 집들이 들어섰다.
산토리니의 중심 도시는 피라다. 하지만 여행이란 ‘첫인상’이 참으로 중요하다. 피라 마을이 산토리니의 중심지라 해도 섬 끝의 이아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이 뒤떨어진다. 이럴 때는 먼저 ‘화산섬 보트 투어(Volcano Tour)’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 마을 여행사에서 티켓을 판매하는데 1일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아티니오스 신항구나 피론(Firon) 구항구에서 배에 오르게 된다. 배는 가장 먼저 산토리니 서쪽에 있는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를 간다.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의 척박한 화산섬의 돌멩이에는 아직도 지열이 남아 있다. 그다음 코스는 바닷속에서 용출되는 온천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이다. 40도가 넘는 고온이다. 이어서 유인도인 티라시아(Thirasia) 섬에 다다른다. 배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는 작은 섬이지만 천혜의 매력을 갖춘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먹거나 마을까지 올라서 멋진 전경 사진을 찍으면 된다. 이때 당나귀(동키)를 타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화산섬 보트는 이아 마을을 잇는 항구에서 내릴 사람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신 저녁 8시에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숙소로 이동하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
온통 캘린더 사진을 만들 수 있는 곳, 이아(Oia) 마을
이아 마을을 산토리니 첫 마을로 보게 된다면 ‘아, 정말 산토리니에 오길 잘했군’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내 몸을 조금만 움직여서 셔터를 누르면 캘린더 사진이 된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얀색 집들. 미로처럼 나있는 좁은 길목에 피어난, 화사한 부겐빌레아 꽃이 눈 시리다. 앙증맞고 귀여운 숍들이 열지어 이어지는 곳. 지붕이 파란 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돔 지붕뿐이다. 하얀 교회의 파란색 돔과 에게해의 푸른 물빛이 어우러진 풍경에 넋을 잃는다. 발길은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그나저나 이 섬의 건물들은 왜 하얀색일까? 건물 색채에 대한 사람들의 설명은 제각각이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가 많다. 그리스가 외세에 점령당했을 때 국기 좌상단의 십자가 색을 따 외벽을 하얗게 칠했고, 파랑 바탕색으로 창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산토리니를 빛나게 하는 곳은 이아 마을이고 석양시간이 되면 굴라스 성채 쪽으로 몰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가 된다.
이아 마을을 먼저 보고 난 후 피라 마을을 찾아보자. 피라 마을은 산토리니의 명동 격으로 테오토코플루(Theotokopoulou) 광장이 중심이다. 골목을 구경하거나 교회나 수도원, 고고학 박물관 등을 보면 된다. 또 절벽 아래 항구까지 566개의 지그재그 계단 길이 놓여 있는데 당나귀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 또 피라에서 10분 거리에 이메로비글리(Imerovigli) 마을이 있다. 산토리니에서 유일하게 언덕 위에 지어진 성채 마을로 스카로스(Skaros) 성까지 걸어보자.
렌터카를 이용한다면 동쪽 해변의 블랙, 레드, 화이트 비치를 따라 해안 드라이브를 즐겨보자. 블랙 비치라고 불리는 ‘카마리(Kamari)’는 해변 길이가 1㎞가 넘는 산토리니 대표 해변으로, 별칭처럼 온통 검은빛의 모래가 깔려 있다. 카마리 비치 인근에는 고대 티라 유적지가 있는데 메사 보우노 봉우리(369m) 꼭대기까지 트레킹하면 된다. 또 페리사(Perissa) 해변 근처에는 워터파크가 있다. 피라의 남단 아크로티리(Akrotiri)에는 선사 유적지가 있다. 에게해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지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붉은 퇴적층이 침식되면서 만들어진 레드 비치와 화이트 비치가 있다.
기암 위에 세워진 수도원 6곳 메테오라(Meteora)
그리스 여행 중에서 메테오라를 빼놓는다면 여행의 재미 하나를 잃어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라는 뜻으로 ‘하늘의 기둥(columns of the sky)’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네스코는 이곳의 기묘한 자연경관과 경이로운 종교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해 1988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했다. 칼람바카(Kalambaka)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마을 뒤로 거대한 암산이 산봉우리처럼 연이어진다. 400m 이상의 바위 봉우리들은 테살리아(Thessalia) 평원에 있는 페네아스(Peneas) 계곡과 칼람바카라는 작은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이 봉우리들은 약 6000년 전, 강에서 원추형으로 나타났다가 지진 활동으로 변형되면서 생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메테오라의 기암들은 사암과 역암이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 생겨난 거대한 암산이다. 그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기암 위에 지어진 수도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기암 봉우리에 건물을 지었을까? 이곳은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상당히 불안했던 14세기에 테살리아의 수도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 위에 건축된 것이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최초로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1곳이 남아 있는데,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최초로 창건되고 가장 큰 대메테오라 수도원, 바를라암 수도원, 암벽에 붙어 있는 모습인 로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 가장 올라가기 힘든 트리니티 수도원(007시리즈 의 로케이션),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이다. 현재 수도원에는 수사와 수녀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방문이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된다.
바위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된다. 좁은 바위 꼭대기에 아찔하게 서 있는가 하면, 절벽 옆에 붙어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분명코 바위 위에서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 저곳으로 훨훨 날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한국에서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가면 된다. 많은 이들이 터키 여행과 함께 그리스를 선택한다. 터키항공을 이용해 이스탄불을 거쳐 그리스 아테네로 들어간다. 인천~이스탄불 구간은 주 11회, 이스탄불~아테네 구간은 주 42회 운항한다.
음식정보 그리스의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수블라키(Souvlaki), 게미스타(Gemista), 무사카(Moussaka), 기로스(Gyro, 기로, 자이로, 지로스라고도 함) 등을 꼽는다. 수블라키는 흔한 꼬치구이라 말할 수 있다. 게미스타는 피망 등 야채에 고기와 밥을 넣어 만든 것으로 동양인 입맛에 잘 맞는다. 무사카는 야채와 고기를 볶아 화이트소스를 뿌려서 구운 것. 기로스는 피타 빵(Pita bread)에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잘라 넣고 소스, 야채를 넣어 케밥처럼 만든 요리다. 또 슈퍼 등지에서 간단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돌마데스(Dolmades), 혹은 돌마스(Dolmas)가 있다. 일명 ‘포도잎 꼬마 쌈밥’으로 간단하게 요기하기에 좋다.
전통 술 그리스의 국민 술이라 일컬어지는 우조(Ouzo)와 메탁사(Metaxa)가 있다. 2006년부터 오직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우조’는 40도 이상의 독한 술로 미틸리니에서는 해마다 축제를 연다. 포도+아네스씨+각종 허브로 만든 이 술은 문어요리를 안주 삼아 함께 마신다.
숙박정보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사이트에서 순위를 확인하면 숙박 전문 인터넷 사이트로 연계가 가능하다. 가족 인원수가 많다면 메테오라에서 캠핑장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통화정보 유로 사용
사용 전압 표준 전압 220V, 50㎐를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이 잘된다.
치안정보 그리스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하철역 등에서는 날치기나 소매치기 등을 유의해야 한다.
기타 여행지 미코노스, 델로스, 낙소스 섬을 비롯해 희랍인 조르바의 배경이 되었던 크레타 섬 여행도 해봄직하다. 그 외 델피, 테살로니키, 올림피아, 칼라마타, 코린토스, 티바스 등 갈 곳은 너무나 많다. 아테네 시내와 수니온 곶 여행도 좋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다. 갑작스레 지휘자의 손끝이 하늘을 향한다. 그러자 실내의 모든 눈동자가 그 끝을 좇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숨과 함께 소리를 내뱉는다. 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 사이에 그들의 시선은 정면의 손끝과 청중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소리와 시선 사이엔 날카로운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직접 목격한 청춘합창단의 공연은 예상 이상으로 진지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평균 나이 65세’, ‘KBS ’, ‘유엔본부에서의 공연’. 이는 모두 청춘합창단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청춘합창단은 2011년 7월 3일부터 10월 9일까지 방영된 KBS 2TV의 간판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의 을 통해 조직된 시니어 합창단이다. 합창단에는 당시 나이 84세부터 52세까지 대학 교수, 양봉업자 등 다양한 나이와 배경의 중년들이 7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모였다.
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1년 전 유사한 형태인 ‘남격합창단’을 방영하면서 엄청난 대중의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청춘합창단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청춘합창단은 방영이 거듭될수록 단원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황혼의 나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장면들로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얻었다.
프로그램 종영 후 청춘합창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듯했지만, 최근 다시 한 번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지난 6월 15일 미국 뉴욕에 위치한 유엔본부에서의 역사적인 공연을 치렀기 때문이다. 청춘합창단의 공연은 유엔에서 제정한 ‘세계 노인 학대 인식 제고의 날’(6월 15일)을 기념해 열렸다. 이 공연에서 청춘합창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리랑’ 등 12곡을 불렀다. 특히 청춘합창단은 공연 이틀 전 생일(6월 13일)이었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깜짝 선곡하기도 했는데, 공연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반 총장은 무척 기뻐했다고. 이 공연을 위해 청춘합창단은 ‘마이 웨이(My Way)’와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과 같은 팝송 레퍼토리를 일부러 준비했고, 한국어 노래들은 자막을 준비하는 등의 정성을 기울였다.
지난 7월 KBS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된 유엔 공연 도전기의 주인공이었던 김삼순 단원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청춘합창단에서의 활동이 제 인생을 모두 바꿔 놓았죠. 그전까지는 딸들을 위한 인생을 살았다면 지금은 온전히 제 인생을 사는 느낌입니다. 청춘합창단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아마 모두들 마찬가지일 겁니다.”
2011년 방송 종영 후 청춘합창단은 본격적인 합창단으로서의 활동을 위해 변신을 꾀했다. 강동구립여성합창단의 김상경 지휘자를 영입해 지금까지 연습과 공연을 함께하고 있다. 앰배서더 호텔의 권대욱 사장이 단장을 맡아 역사적인 유엔 공연의 일등 공신 역할을 했고, 방송을 통해 간과 신장을 이식 받은 사연이 소개됐던 이만덕 단원은 총무를 맡아 합창단의 모든 살림을 도맡았다. 당시 이만덕 총무는 수술 직후여서 몸과 연결된 의료기기를 휴대하고 오디션에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완치돼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청춘합창단이 방송에서 마지막 도전으로 참가해 은상을 수상했던 2011년 국민 합창대축제 대회에서 솔로 파트를 맡아 전 국민을 감동시켰던 최고령의 노강진 단원은 현재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 중이다.
그 밖의 개인 사정으로 활동을 못하게 된 단원들의 빈자리는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채워졌다. 현재 원년 멤버는 약 절반 정도가 남은 상태. 지금은 KBS 오케스트라 하피스트 출신으로 관심을 모았던 배용자 단원이 최고령 왕언니 역할을 맡고 있다.
유엔본부에서의 공연 탓인지 청춘합창단을 찾는 이들의 요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한 달에 두세 차례 공연이 몇 달 전부터 예약될 정도다. 정부부처부터 지자체에 이르기까지 찾는 곳도 다양하다.
왕언니 배용자 단원은 “이제는 무대를 앞두고 심하게 긴장되지 않을 정도로 활동이 익숙해졌습니다”라며 “동료 단원들과 신 나게 무대를 즐기는 것이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워낙 많은 인원이 모이는 탓에 연습장소 마련도 쉽지 않았다. 결국 과천시민회관에 어렵게 터를 잡고 매주 화요일 연습 중에 있다. 힘들게 자리를 잡은 만큼 연습에는 열정적이다. 김상경 지휘자도 연습과정에서 자발적인 연습을 강조했다.
“청춘합창단은 다른 합창단과는 다르게 상대의 실수나 단점을 지적해서는 안됩니다. 특성상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고, 대신 다른 단원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스스로가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현재 청춘합창단은 내년 5월 6일에 있을 정기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통일기금 모금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공연을 위해 새로운 레퍼토리 연습에 한창이고, 새로운 단원도 모집 중이다.
권대욱 단장은 “중년들은 남은 인생 시간을 보내는 데 몰두하기 쉬운데, 그래선 안 됩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고, 청춘합창단의 단원들처럼 가슴 뛰는 일을 찾아 행동에 옮기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청계천으로 떠내려간 지식들…
1938년 출간된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서 칠성네 아주머니가 방망이를 두들기며 빨래하던 청계천은 나에게는 헌책방과 고물상이 즐비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고등학교 때 조금이라도 싸게 참고서를 구입하기 위해 기웃거리던 거리를 국문과 진학 후 전공 관련 자료를 찾느라 다시 뒤졌을 때 캐캐한 책 냄새는 은은한 향기로 다가왔고, 수많은 책들이 자꾸 속삭이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책벌레보다는 수집광에 가깝다고 할까.
도쿄살이 18년에 책이 그립고 자료가 땡기면 곧잘 도쿄 진보초(神保町) 일대의 ‘간다(神田) 고서점가’를 찾는다.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서 도쿄대학 근처의 헌책방을 기웃거리도 한다.
지금은 매주 화요일이 되면 대학 강의를 마치고 일부러 고서점 거리를 지나 다른 대학으로 걸어간다. 약 180개의 서점들은 이곳을 찾을 때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처럼 늘 듬직한 미소로 반겨준다.
‘책의 거리’ 간다 진보초의 공식 사이트(http://jimbou.info)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서점 거리임을 자랑하면서 176개의 고서점을 소개하고 있으며, 52군데 고서점과 6군데 신간서점의 재고를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 베이스도 공개해 이용자의 편의를 돕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역사가 제일 오래됐고 규모도 가장 큰 전국고서적상업협회(JADOB)가 운영하는 ‘일본의 고서점’ 공식 사이트(http://www.kosho.or.jp)를 통해서는 전국 2200여 개의 고서점이 등록한 약 600만 권의 고서를 검색하고 구입할 수 있으며, 고서점의 소개 및 이벤트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나 역시 진보초와 도쿄대 일대의 고서점에서 구할 수 없던 백화점, 박람회, 운동회 등 한국 근대사의 자료를 먼지방의 고서점으로부터 직접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이트 덕분이었다.
반면에 우리 사회가 청계천을 통해 배운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옛것을 없애고 부수는 것은 쉽지만 이를 다시 복원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사실. 어쩌면 헌책방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그 속에 담긴 지식도 함께 떠내려간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료, 활용하면 가치
‘헌책방’보다는 ‘고서점’이 연구자들의 귀중한 자료라는 인상 덕분에 좀 세련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훈훈한 정겨움은 역시 전자가 더 진할지 싶다. 하긴 이 거리의 출발도 가난한 학도들의 얄팍한 주머니와 뗄래야 뗄 수 없었다.
100여년 전 메이지유신 이후 이 지역에는 도쿄대학의 전신인 도쿄카이세(開成)학교를 비롯해 메이지(明治)대학, 주오(中央)대학, 니혼(日本)대학의 전신인 각종 학교들이 연이어 설립돼 많은 학생들과 연구자가 모이는 거리로 자리 잡았다.
1913년 이 일대에 큰 화재가 발생해 잿더미로 변한 뒤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가 고서점을 열었고 이듬해인 1914년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대표작 ‘마음’을 간행하면서 출판업에도 진출해 문학 작품과 철학서 등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것이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 이와나미서점의 시작이자 간다 고서점 거리의 출발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 화폐 1000엔권에 초상이 실릴 정도로 존경을 받는 일본의 국민작가로 이와나미의 간판도 그가 쓴 것이라고 하며, 이런 인연으로 1916년 향년 49세의 나이로 그가 세상을 떠난뒤 '나쓰메 소세키 전집'도 이와나미서점에서 발행돼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 1920년 도쿄고서적상업협회(TADOB)가 설립됐으며, 1921년 문화학원이 개교되면서 음악, 미술, 무용 등 예술 관계서를 다루는 서점까지 등장해 고서점 거리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유명해졌다.
지난 2001년 일본 환경성은 독특한 향기가 풍기는 이 거리를 ‘향기로운 풍경 100선’으로 뽑기도 했는데, 현재는 서점 이외에도 각종 사업시설과 수많은 식당, 멋진 분위기의 레스토랑까지 등장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고서점 탐방을 즐기고 있다.
매년 벚꽃이 피는 봄이 오면 3월말 진보초 벚꽃거리 페스티벌로 ‘봄 헌책 축제’가 열리며, 10월 26일부터 11월 4일까지 약100군데 서점이 참가하는 ‘도쿄 명물 간다 헌책 축제’가 성대하게 개최된다.
올해로 55회째를 맞이하는 간다의 헌책 축제는 특별 전시 및 판매, 자선 경매, 각종 강연회와 좌담, 관련 영화 상영 및 토크쇼, 그리고 다양한 체험교실 등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애호가는 물론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룬다.
이 시기에 맞춰 ‘진보초 북페스티벌’도 사흘간 거리와 광장에서 총 매장 면적 5000 평의 규모로 함께 열려 300만 점의 각종 서적(총 재고수는 무려 1000만 권)이 넘쳐난다.
올해로 24회째이며 헌책 판매뿐만 아니라 낭독회, 문학상 수상, 공개 방송, 다양한 검정시험 도전, 그리고 연주회 등 각종 공연도 마련돼 찾는 이들의 눈과 귀도 즐겁게 만든다.
이처럼 이 거리의 서점 주인들은 틈만 나면 먼지를 털고 표지를 닦으면서 누구보다도 ‘헌책’의 새로운 가치를 신뢰한다. 버리면 그냥 1kg 당 60 원 선에서 거래되는 폐지에 지나지 않는 헌책. 이런 헌책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내용에 따라 분류돼 새 주인과 만나 값진 가치를 발한다.
따라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을 실천하는 거리가 바로 이곳이며, 시니어 세대의 향수 어린 추억을 떠올리는 무대가 아니라 지금도 젊은이들이 옛것의 소중함을 느끼고 새로운 가치를 캐어내는 산 교육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헌책 시장의 규모는 가치 창조의 시금석
일본의 출판과학연구소가 지난해 출판물의 판매액을 1조7000억 엔으로 추정했으며, 인프레스 종합연구소가 간행한 ‘전자서적 비즈니스 조사보고서 2014’에 따르면 지난해 전자 출판물도 1013억 엔을 기록해 처음으로 1000억 엔대를 넘어서 2018년에는 3000억 엔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헌책 시장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시장 점유율 60% 이상을 자랑하는 일본 최대의 헌책 체인망인 '북오프(Book-off)'가 2011년에 보고한 자료를 보면 중고서적의 시장은 873억 3300만 엔 규모로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이다.
또 다른 업체가 조사한 헌책 구입 방법에서는 점포를 찾아가 직접 구입한 적이 있는 사람이 81%, 반면에 인터넷을 통해 구입한 적이 있는 사람은 49%(중복응답)였다. 그 이유로 “책 상태를 알 수 없는 게 불안”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에서는 국회도서관을 비롯해 국공립도서관과 대학도서관 등 대규모 도서관을 제외한 작은 규모의 공공도서관의 경우 책을 구매한 지 5년 정도 지나면 정리해 폐기하게 되는데,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도 하지만 보통 많은 책들이 헌책방으로 유입된다.
또한 개인들도 나이가 들어 신변을 정리하면서 재산과 함께 골동품, 미술품, 서적 등을 상속하거나 팔며, 혹은 기부한다. 여기에 각 출판사들의 재고서적까지 가세하면 헌책방을 통해 새로운 주인을 만나길 기다리는 책들이 끊임없이 넘쳐난다고 하겠다.
‘간다 고서점가’의 산책은 서점마다 인문, 자연, 과학, 기술, 미술, 공연, 사진, 대중문화, 아동도서, 외국잡지 등 특화된 전문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잘 분류된 서가를 걷는 기분이 든다. 책의 향기 속에 흠뻑 빠져 지식의 바다를 항해하는 환상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에는 시니어 세대의 인기를 모았던 절판 서적들이 다시 복각돼 출판되는 예도 크게 늘고 있다. 수요와 공급의 시장 원리가 아니더라도 ‘잘 익은 된장맛’ 같은 헌책의 가치를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 거리에서 수많은 ‘온고지신’의 향기는 계속 퍼져나갈 게 분명하다.
근현대사의 풍파 속에 복개와 복원 끝에 떠내려간 청계천의 헌책방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가슴 아프며 부럽기 그지없다.
예술의전당은 ‘70세 이상’ 시니어를 대상으로 공연 당일 한정된 좌석에 한해 특별 할인가로 티켓을 판매하고 있다. ‘특별 할인가’를 통해 3만원 초과 입장권에 대해서는 정액 1만원으로, 3만원 이하 입장권에 대해서는 정액 5000원으로 각종 공연과 전시를 즐길 수 있다. 1인 1구매로, 오후 6시 30분 이전 공연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 이후 공연은 오후 3시부터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티켓 예매가 가능하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우리 시대 시니어들이 문화생활을 통한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유익하면서도 가격 부담을 줄인 ‘예술의 전당-오늘의 당일할인티켓’ 공연·전시 리스트를 정기적으로 소개한다.
# 서울바로크합주단 제44회 정기연주회- 여름축제 콘서트
티켓오픈: 2014.07.22. 오후 3시부터
공연일시: 2014.07.22. 오후 8시
관람시간: 100분
공연장소: 콘서트홀
# 여름을 깨우는 스파클링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티켓오픈: 2014.07.18. 오전 9시부터
공연일시: 2014.07.18. 오후 8시
관람시간: 145분
공연장소: CJ토월극장
# 김연진 첼로 독주회
티켓오픈: 2014.07.22. 오후 3시부터
공연일시: 2014.07.22. 오후 8시
관람시간: 90분
공연장소: IBK 챔버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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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지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하여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적 기질을 가진 독자적 토종 패션 브랜드 쌈지. 10년 동안 운영됐던 예술가들의 인큐베이터 쌈지 스페이스,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뮤지션들의 축제의 장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인사동의 쌈지길 등은 쌈지라는 브랜드가 얼마나 혁신적이고 감각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결과들이었다. 그러나 기업으로서의 쌈지는 2010년에 부도가 났다. 쌈지의 주인장이었던 천호균 대표는 ‘장사’를 버리고 ‘농사’로 인생의 두 번째 시작을 드라이빙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쌈지의 정신을 농업과 연결시킨 (주)쌈지농부를 통해서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bravo-mylife.co.kr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저는 남들 신경 엄청 쓰는데 남들은 제가 신경 안 쓰는 줄 알아요.”
1949년 생 소띠, 올해로 예순여섯 살인 천호균 대표의 첫 모습은 ‘쌈지’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신적 브랜드의 수장다운(?) 수더분한 외모와 소년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10여 년 전, 예술인마을에 먼저 자리를 잡은 지인의 소개로 헤이리 파주에 들어오게 됐다. 그리고 (주)쌈지농부를 세우고, ‘농사가 예술이다’라는 슬로건으로 농사와 예술의 결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쌈지에서의 ‘예술’을 농업으로 이어가다
천 대표는 쌈지농부를 시작하면서 특히 느림의 미학을 조명하는 슬로우 아트(slow art)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어떤 작가는 농사를 짓는데, 밭 이름이 ‘반만 먹자’다. 농사를 지어서 사람은 딱 반만 먹고 반은 동물들과 나눈다. 원래 농사는 같이 먹으라고 하는 것, 그 철학에서 출발한다. 갤러리에서 병아리를 부화시켜 2주 정도 키워 독거노인들에게 기부하는 프로젝트를 하는 작가도 있다.
“쌈지를 할 때, 장사를 하면서도 마케팅을 예술로 했죠. 그 아트 마케팅을 농사에서도 융합시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쌈지에서 시도했던 ‘예술’을 계속 이어간다는 의미가 되겠죠.”
그는 예전 인터뷰에서 과거에 패션디자인상 심사위원장을 하면서 ‘아름다움에는 순위가 없다’는 문제적 심사평을 낸 바 있다고 자평한 바 있다. 교육과 사회는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아름다움을 고정시키려 하는데, 그는 모든 생명이 ‘생긴대로’ 저마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편견 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굴해서 보여주는 이가 예술가라는 게 그의 지론. 생각해보면 농업은 그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실현시키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익숙한 기술 아니던가.
천 대표는 과거 쌈지 시절의 예술과 지금의 예술이 어떤 점에서 다르냐는 질문에 지금 농업을 통해 하는 예술은 거대담론으로 세상을, 환경을 바꾸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농업의 생산성과 예술의 가치를 합치니 지속가능, 정의, 나눔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히는 천 대표의 지론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농업을 시작하니 가능한 한 농사하는 마음으로 장사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형보다는 내용이나 가치에 충실하게 말이죠. 그 절실함을 담다보면 지속가능한 예술로 이어집니다,”
농부할아버지, 손녀와의 소통 비결… 측은지심을 알게 되다
농업을 하면서 천 대표는 세 명의 손녀들과 더욱 친근하게 지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식물이라는 돌보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약자를 돌봐서 길러내야 하는 농업의 특성이 소통의 비결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배경이나 교육이 아이들의 착한 속성을 계속 유지시켜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약자를 측은하게 생각하잖아요? 그런 마음을 유지시켜주는 교육 말이죠. 농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약한 것들에 대해 측은하게 생각하게 되니까, 그게 아이들의 속성하고 일치하는 거 같아요. 농업이 만들어 준 제 속성이 손녀들의 속성을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죠.”
인생이모작을 진행하는 시기의 동반자와의 관계도 궁금했다. 사실 많은 시니어들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동반자와의 관계에 관해 고민한다. 취미나 여가를 찾으려고 애쓰게 되는 건 동반자와의 관계가 불성실해진 것에 대한 반대급부가 아닐까. 그런데 이 부분에서 천 대표는 거의 ‘완성형’이었다.
“자랄 때 아버지가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분이었어요. 그러면서도 가정일을 챙기셨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내를 위하는 문화를 알게 됐어요. 그리고 살다 보니 여자들이 아는 게 참 많더라구요. 그렇게 자라고, 살고 배워 오면서 아내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됐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생각이 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 말 잘 안 듣잖아요? 그런데 저는 습관이 아주 잘 되어 있어요(웃음).”
천 대표는 부인을 ‘감사야’라고 부른다. 늘 배울 부분이 많은 사람이라 감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결혼할 때부터 ‘배우자’는 생각으로 부인을 배우자로 택했는데, 실은 ‘마누라말 잘 듣자’는 습관이 되다보니 얻게 된 것.
생각의 밭, 마음의 논을 가꿉니다
천 대표는 자신이 아직 초보 농부라고 고백한다. 말하자면 이제 막 인생 2막을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중이라는 것. 그래도 먼저 시작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시대의 일가를 이뤘던 사람으로서 인생이모작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말해 줄 수 있을지가 궁금하여 물어봤다.
“농부를 하다 보니 생명의 가치를 알게 됐습니다. 그 가치를 소비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돈을 많이 벌 때와 비교하여 행복하냐구요? 돈을 많이 벌면 많이 버는대로 만족스럽죠. 하지만 지금은 가치를 추구하다 보니 행복을 느끼게 되요. 만족보다는 행복을 찾아라,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생긴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에 가장 멋스러워 보이는 천 대표는 수익이 좀처럼 나지 않을 것 같은 ‘달동네’(천대표가 표현하는 절실하게 살기 위한 공간)에서 그만의 노련한 솜씨로 예술과 농사를 엮어 농부와 소비자의 소통을 꾀하고 있다.
레코드 애호가들의 축제 ‘제4회 서울 레코드페어’가 개최된다.
오는 28~29일 양일간 서울 강남구 논현동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음악 레이블, 음반점, 출판사 등 50여 곳이 참가해 LP, CD 음반을 소개하고 판매한다.
예년 행사에서 진열된 음반 중 CD와 LP 레코드의 비율이 반반 정도였다면, 올해는 LP 판매 비중이 70%가 넘을 것으로 알려지며 국내 LP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CD 판매가 저조한 상황에서 들국화, 전람회, 부활 등 많은 가수의 LP 출시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해외 판매자도 참가해 국내에 없는 유럽 오리지널 레코드도 선보인다.
서울 레코드페어의 주요 이벤트 중 하나인 ‘서울 레코드페어 한정반 발매’는 올해에도 이어진다. 한국 펑크의 걸작 노브레인의 데뷔작 ‘청년폭도맹진가’,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 DJ 소울스케이프의 데뷔작 ‘180g Beats’, 포크계의 신예 김목인의 데뷔작 ‘음악가 자신의 노래’, 각광받는 힙합 레이블 일리네어 레코즈의 컴필레이션 앨범 ‘11:11’을 각각 500장씩 판매된다. 이들 한정반은 사전 예약 없이 축제가 열리는 이틀 동안 현장에서만 구매 가능하다.
지난 3년간 서울 레코드페어는 유료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누적 관객 1만 2000명을 모았다. 4회를 맞이한 이번 행사에서는 음악가의 새 앨범 쇼케이스 등 부대행사가 축소된 대신 무료입장으로 바뀌어 더욱 많은 관객을 모을 것으로 예상된다.
글ㆍ레시피 제공 요리연구가 양향자
4년마다 개최되는 월드컵의 향연이 브라질에서 열린다.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브라질! 남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브라질은 정열적인 축제의 나라로, 축구 강대국으로, 남미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로 유명하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카니발과 삼바 춤은 브라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다. 이렇듯 놀고 즐기는 것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브라질이기에 그들의 요리가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놀고 즐기는 일에 음식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기후에서 자란 풍부한 먹거리가 브라질 음식의 맛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 준다.
브라질은 처음 인디오들의 터전이었으나 1500년경부터 몰려온 유럽 여러 나라의 침략으로 백인들이 이곳을 차지하게 됐다. 그들은 이 넓고 비옥한 대지에 사탕수수를 심게 되고 이곳에서 일할 노예인 흑인들을 데려오게 된다. 이때부터 브라질은 백인과 흑인 그리고 인디오 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새로운 인종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문화까지도 혼합되어 새로운 브라질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갔다. 경제면에선 백인들이, 축제나 음식 같은 문화면에선 흑인들이 중심이 되어 지금의 브라질을 이끌고 있다.
# 흑인중심의 독특한 음식문화가 특징
지금 소개할 브라질 요리들도 거의 예전에 노예였던 흑인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그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와 빈곤했던 생활들이 의외로 독특하고 맛있는 요리를 탄생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아마조나스와 아마파 지역이 있는 북부는 인디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며, 말린 새우와 양파, 토마토, 실란트로, 오크라를 한 냄비에 넣고 끓인 요리가 주를 이룬다.
리오그란데가 있는 북동부는 건조지역으로 소를 많이 키우며, 바닷가에 인접해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고, 중서부 지역은 건조 사바나 기후로 강에서 잡히는 물고기와 넓은 목축지에서 키우는 소와 돼지, 작물로는 마니옥과 쌀, 옥수수 등이 많이 난다.
리오데자네이로와 상파울루 등의 대도시가 있는 남부에서는 브라질의 대표적인 음식 페이조아다가 유래되었으며, 유럽의 이민들이 이주해와서 정착한 이후로 다양한 음식문화가 발달해 있다. 마지막으로 남부지방에서는 풍부한 육류로 인하여 축제의 인기메뉴 슈하스코가 생겨났다. 위에서 언급한 페이조아다라는 이 음식은 서글픈 유래가 있는데 먹을 것이 부족하던 흑인 노예들이 주인들이 먹지 않는 부분, 예를 들면 돼지의 귀나 꼬리 등을 냄비에 넣고 푹 끓여서 먹던 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페이조아다만을 하루 종일 내는 음식점도 있으며, 보통 수요일과 토요일 점심으로 먹는 것이 전통으로 남아있는데, 워낙 칼로리가 높고 소화되는데 오래 걸려서 저녁에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 브라질 그들만의 음식 즐기기
누가 뭐래도 브라질 제1의 요리로 손꼽는 것이 '페이조아다'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부대찌개와 비슷하다. 맛이나 요리법이 비슷한 것이 아니라 페이조아다가 생기게 된 계기를 말하는 것이다.
페이조아다는 옛날 노예였던 흑인들이 만들어 먹은 음식이다. 그들의 주인인 백인들이 요리하고 버린 재료(돼지꼬리, 귀, 족발 등)를 가지고 콩과 함께 삶아 먹었는데 그것이 지금이 '페이조아다'다. 물론 지금은 여기에다 고기, 햄, 소시지 등 각종 재료를 첨가하여 조리하지만 우리의 부대찌개처럼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이 쓰리다.
어쨌든 이 맛이 얼마나 좋은지 백인들이 우연히 그 맛을 보고 반해 지금의 페이조아다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렇게 삶아 낸 각종 재료에다 쌀밥을 곁들여 먹기도 하고 감자의 일종인 '마니옥 가루'를 곁들여 먹기도 한다. 이 요리는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에서 가장 유명하며 지금도 브라질 가정에서는 주말이면 이 음식을 특별식으로 즐겨 먹는다.
페이조아다가 브라질의 국민적인 요리라면 '슈하스코'는 여행객들에게 단연 1위로 손꼽히는 요리다. 특히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박수를 치며 좋아할 요리일 것이다. 슈하스코는 왠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는 것 같다. 워낙 푸짐한 요리이기 때문이다. 1m가 넘는 쇠꼬챙이에 각종 육류(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오리고기, 칠면조 등)를 부위별로 골고루 꽂아 소금만을 뿌려 숯불에 구운 바비큐 요리로서 담백함과 고소함을 모두 느낄 수 있다. 또 곁들여져 나오는 신선한 야채와 과일, 새콤, 매콤, 달콤한 다양한 소스들이 이 요리의 맛을 더욱 업그레이드시켜준다. 각종 축제나 행사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슈하스코는 지금은 세계인들이 더욱 애식하는 요리가 되고 있다.
브라질에서 놀고먹고 즐기는 일은 거의 일상과도 같다. 그들은 자연이 준 풍요로움으로 언제나 해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금 더 재밌게 조금 더 열정적으로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 같다. 그러니 음식 맛도 당연히 최고를 추구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질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입안에서도 축제를 벌이며 행복을 찾는 브라질 사람들 덕분에 우리의 입맛까지도 즐거울 수 있으니 말이다.
# 브라질의 대표적인 추천 요리
① 페이조아다
재료: 간 돼지고기 100g, 양송이버섯 50g, 양파 1/2개, 각종육가공품(스팸·햄·소시지) 50g, 고춧가루, 갖은 양념
1. 간 돼지고기는 불고기 양념을 하여 살짝 볶아 놓는다.
2. 양송이는 납작납작하게 썰고, 양파는 길게 썬다.
3. 육가공품은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4. 전골냄비에 준비한 재료를 보기 좋게 돌려 담고, 갖은 양념을 넣은 육수를 자작자작하게 부어 끓인다. 한소끔 끓으면 고춧가루를 더 넣고 간을 맞춘다.
②브라질식 대구 튀김
재료: 해덕 필레 992g(3oz) 껍질 있는 상태로 비늘을 벗기고 가시를 발라낸 것, 우유 142ml(1/4 파인트), 월계수 잎 2개, 감자 992g(3oz), 껍질 벗긴 것, 잎이 평평한 파슬리 1단(대형) 다진 것, 신선한 민트 1움큼 다진 것, 레몬 2개, 제스트, 달걀 2개, 붉은 칠레고추 1개 다진 것, 소금, 금방 빻은 검은 후추, 밀가루 113g(4oz), 튀김용 해바라기씨 오일, 완성 접시에 놓을 레몬
1. 오븐을 190℃로 예열한다.
2. 트레이에 해덕, 우유, 월계수 잎을 넣고 이 트레이를 포일로 싼 다음 15분간 굽는다.
3. 소금을 넣고 끓인 물에 감자를 넣고 익을 때까지 15분 정도 삶는다. 익은 감자의 물기를 뺀 후, 팬에 넣고 가열하여 물기를 바싹 말리고 으깬다.
4. 구운 생선은 조각내면서 대형 볼에 넣는다. 이때, 가시는 모두 발라낸다.
5. 으깬 감자를 여기에 넣고, 다진 파슬리와 민트, 레몬 제스트, 달걀, 칠레고추, 소금, 후추 등도 넣는다. 잘 섞고 맛을 보고, 필요하면 소금을 좀 더 넣는다.
6. 도마에 밀가루를 조금 뿌린다. 위에 섞어 놓은 것을 조금 떼어내 손에 밀가루를 조금 묻히고, 밀가루 위에서 밀면서 어뢰 모양(생선 모양) 프리터로 만든다. 대충 틀만 잡아 신속하게 하는 것이 좋다.
7. 바닥이 두꺼운 대형 소스 팬에 기름을 충분히 부어 1/3 이상을 채운다.
8. 기름에 꽂아 놓은 튀김 온도계가 182℃를 가리킬 때까지 중간불로 가열한다. (온도계가 없으면 빵조각을 떨어뜨려본다. 3분 안에 갈색으로 될 때가 적당하다.) 튀김이 갈색이 되고 바삭바삭해질 때까지 5분 정도 푹 튀긴다.
9. 키친 타올로 기름을 빼고, 소금을 위에 뿌린 뒤, 큰 접시에 레몬 반쪽과 함께 대접한다.
# 퇴임후가 더 중요했습니다
미국 노인이 땅을 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95세 생일날 쓴 일기입니다.
“65세에 정년퇴임했습니다. 별 고민 없이 안락한 여생을 즐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95세 생일 잔치때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퇴임 후 30년의 삶은 가장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죽기만을 기다리는 삶, 덧없고 희망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부터 어학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나중에 왜 95살 때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반면, 1인 방송 ‘도전 365’(www.wing365.com)대표 심현용씨(사진 ·62)같은 꿈을 실현하는 도전적인 삶도 있습니다. 심씨는 사업을 하다 외환위기 타격으로 PC방을 전전하는 바닥 인생까지 갔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젠 SBS TV ‘하우머치’의 1인 창조기업 1호에 방송될 정도로 전문성을 인정받습니다. 서울시 소셜방송 자키 등 여러 일을 합니다.
그는 캠핑카에 카메라를 싣고 전국의 행사장, 이슈의 현장, 축제, 세미나 등을 현장 생방송합니다. 기업-단체 등의 의뢰를 받아 유료방송도 하고, 후배들 교육도 합니다. 1인 방송 경력 14년차이고, 세월호 사건 생중계는 1주일간 누적 시청 180만명에 최고 동시접속 7만명도 기록했습니다. 그의 무기는 SNS(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혹은 소셜미디어)입니다. 그는 촬영한 영상을 유스트림-아프리카TV-올레 IPTV-다음 TV 등에 올리고, 나아가 블로그-페이스북-트위터를 통해 추가로 알립니다. 1인 미디어로서 당당하게 활동합니다.
두 사례중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꿈 실현에 도전하면 젊음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팔순이 넘어서도 청년처럼 활동하는 이어령 박사가 좋은 스승입니다. 필자는 여러번 뵈었는데…이 박사는 “나는 계속 꿈(비전)을 꾸고있어서 늙지않는다”고 말합니다.
# SNS를 무기로 새 출발하세요
시니어의 새 출발은 SNS를 무기로 시작하셔야 합니다. 이젠 국민의 71%(50대는 63%,60세 이상은 14%)가 스마트 기기를 쓰기 때문에, SNS활용이 손쉽습니다. 움직이면서도 SNS 콘텐츠를 보고, 내 글과 사진도 올릴수 있는 시대입니다. 게다가 한국은 SNS 세상에의 진입이 늦었습니다.
“우리는 네이버, 다음도 있고 싸이월드도 있다”고 자만하는 사이, 패러다임이 전혀 다른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유튜브, 구글플러스,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뒤늦게 뛰어들었습니다. 따라서 개도국 사람들보다 SNS 활용이 뒤지고 있고, 한국은 10대~20대도 초보자라 할 수 있습니다. 시니어라고 해서 SNS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시리즈 칼럼과 함께 소셜미디어 세상을 여행하시면서, 1년만 열심히 하면 젊은이 못지않은 전문성을 인정받아 강사나 나눔활동, 소규모 창업 등 여러 기회를 잡을수 있습니다. 최근 1~2년새 50대 이상의 SNS 활용이 아주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SKT가 지난해 4월 한달에 SNS를 한번 이상 쓴 사람을 조사해보니, 50대 SNS 이용자가 66만여명으로 10대의 60만명을 추월하기도 했습니다. 카카오톡을 연장자들도 많이 쓰면서 생긴 변화로 보입니다. 미래창조과학부의 ‘2013 정보문화 실태조사’에서도 50대 이상의 디지털 생활이 급격히 활성화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카톡의 영향으로 ‘실시간 메시지 서비스’이용률이 50대의 경우 2012년 63%에서 2013년 81%로 뛰었지요.60세 이상도 32%에서 68%로 급등했습니다. SNS 이용률은 50대 39%, 60세이상 22%로 높아졌습니다.
# SNS에 도전해야하는 이유 SNS에 왜 도전해야 할까요
첫째, 내 경쟁력과 콘텐츠로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시니어에게는 세상에 전해 줄 경험과 지식이 있습니다. SNS는 그걸 효율적으로 전파해주는 도구이며 나도 당당한 ‘1인 미디어’가 될 수 있습니다. 지식 나눔이나 컨설팅 등으로 봉사도 할수 있습니다. 내 브랜드가 생깁니다. SNS에 내가 올려논 경험과 지식은 검색을 통해 후대들에게도 활용됩니다.
둘째, 남에게 도움이 되면 내가 행복해집니다. 행복감은 나에게 건강을 주며, 늘어난 활동과 교류도 건강을 선물합니다.
셋째, SNS는 내 관심분야 정보를 습득하는 무료 통로입니다. SNS에서 관심 분야 전문가를 찾아 적극적으로 친구를 맺으면, 전문가가 글-사진을 올릴 때마다 내 SNS 방에 자동배달돼 옵니다. 넷째, SNS에는 모임활동이 많아 인적 네트워크를 넓힐 수 있습니다.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들도 찾게해줍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납니다.
다섯째, 수입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나만의 콘텐츠가 있으면, SNS 기반으로 수입을 올릴 수도 있는 시대입니다. 강사활동을 하거나 책도 내고, 1인 창업도 가능합니다.
여섯째, SNS를 열심히 하면 나도 몰랐던 나의 강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글 솜씨, 사진 솜씨 등을 알게되고, 키우게 됩니다. 이 시리즈 칼럼을 통해 여러 SNS도 소개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스마트워크 도구들도 소개하겠습니다. 매번 짭짤한 스마트폰 앱 하나씩을 미니로 소개합니다. 여행을 시작하실까요?
김일 소셜미디어나눔연구소장/본지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