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에 대기업에서 퇴직하고 서울에 거주 중인 손병수(58세)씨가 재무상담을 의뢰해왔다. 손병수씨가 재무상담을 통해 도움 받고자 하는 내용은 매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현금흐름 확보 방안이다.
1. 현재 상황
손병수씨의 가족으로는 전업주부인 배우자(56세)와 출가한 딸(33세)과 작년에 취업을 하고 회사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는 아들(29세)이 있다. 퇴직 후 2년 동안 손병수씨는 재직 당시 거래처였던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며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하지만 1년 전 두 번째 퇴직을 한 이후 지금까지는 별다른 수입이 없다. 첫 번째 퇴직으로 인해 발생했던 퇴직금은 일시금으로 수령해 딸 결혼자금과 아들 대학등록금으로 대부분 썼기 때문에 퇴직연금은 없는 상태다. 매월 200만원 전후로 소요되는 생활비는 1년 전부터는 실업급여와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충당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향후 아들 결혼자금으로 1억원 정도의 지원을 예상하고 있다.
2. 재무진단
3. 제안
손병수씨가 의뢰한 매월 200만원 전후의 생활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5층 연금체계를 활용해야 한다. 5층 연금체계는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 1958년생인 손병수씨의 완전노령연금 수급가능연령은 4년 뒤인 62세부터다. 연금액은 현재 가치로 매월 110만원 정도 예상된다. 손병수씨는 조기노령연금수급이 가능한 상태이지만 여유자금이 있기 때문에 완전노령연금에 비해 12%까지 연금수령액이 삭감되는 조기노령연금을 미리 받은 받을 필요는 없다.
퇴직연금 손병수씨는 퇴직연금이 없다.
개인연금 현재 가입 중인 개인연금도 없다. 정기예금 중 1억원을 배우자 명의로 하여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손병수씨의 부인은 본인 명의의 국민연금이 없다. 남편인 손병수씨가 사망한 후에는 유족연금 명목으로 손병수씨 명의로 받던 노령연금액의 60%를 수령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의료비가 생활비가 될 정도로 의료비 지출이 많아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약 12년 정도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손범수씨가 부인을 피보험자로 한 연금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일시납연금보험을 가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입 즉시 연금을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금지급 시기를 충분히 여유 있게 설정해두고 그 이전에 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갈 수 있다. 현재 56세 여성이 1억원의 연금보험에 가입해 10년 뒤인 66세부터 연금을 개시한다면 매월 60만원 정도의 연금수령을 기대할 수 있다. 단 연금이 개시된 후 피보험자가 사망하게 되면 최초 가입금액에서 사망할 때까지 지급한 연금총액을 차감한 금액만 상속인에게 지급하는 조건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주택 소유자나 그 배우자가 만 60세 이상일 때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손병수씨는 만 58세이기 때문에 주택연금에 가입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2017년 기준으로 7억원의 주택을 종신연금 수령조건으로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60세 기준으로 매월 146만원 정도의 금액이 지급된다.
손병수씨 부부는 주택연금 가입이 가능한 2년 후까지 현재 거주 주택을 보증금 1억원에 매월 120만원의 월세를 받는 조건으로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세 보증금 1억원과 현금 1억원을 합해 집의 규모를 줄여 서울 외곽 지역에 2년간 전세를 임차해서 살기로 했다.
직업 중장년층이 퇴직 후에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일자리에 대한 눈높이다. 눈높이를 낮춰야 할 수 있는 일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명함이 나를 설명하던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손병수씨는 우선 자신의 경력을 살려 고용노동부에서 추진하는 사회공헌 일자리 사업에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서 매월 30만원 정도의 소득을 기대한다. 동시에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요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4. 실행
퇴직한 지 3년이 지난 손병수씨는 최근에 와서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손병수씨는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는 정부지원사업 중심의 일자리와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매월 100만원의 근로소득을 목표로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민연금이 나오는 시기에서 부인 명의의 개인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는 근로시간을 줄여 매월 50만원 정도의 수입을 목표로 일을 하기로 계획을 짰다.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1. 가락지를 낀 용의 꿈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의 할아버지는 용꿈을 꾸셨단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용의 다리에 가락지가 끼어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 걱정스러웠다고 하셨다. 그 덕택에 필자가 양자로 가서 잘 살 수 있었음에도 할아버지는 당신 손자를 남겨 두는 결심을 하고 나의 사촌 형을 양자로 보내셨다고 한다. 필자는 서울에서 식품사업을 하시던 아버님 슬하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겨우 걸음마를 하던 다음 해에 바로 6.25 사변으로 인해 어머니는 필자를 들쳐 메고 아버지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는데 기차를 타고 남으로 가던 중 인민군 비행기들의 기총사격에 전 승객이 정신없이 숲 속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올라타고 매달려서 가는 행렬이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왼쪽 다리를 약간 삐어 낮에는 잘 놀고 밤마다 아프다고 했으나 시골에서는 당시 마땅한 병원도 없었으니 아이의 꾀병이라고 그냥 넘긴 것이 화근이 되어 2~3세 때부터 심한 골수염을 앓게 됐다.
그러나 신이 나를 살리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침 당시 부산에 전후 서독에서 파견된 서독병원이라는 것이 부산 대신동에 있어 그곳에서 진료를 받고 바로 완쾌 상태로 퇴원하게 되었다. 당시 나이 8살이었는데 병원에서는 통원치료를 하던지 약 1년간 입원을 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 갈 나이라 입학을 시키고 통원치료를 결정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아직 후유증을 앓고 있어 보행이 불편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활발하게 놀다 보니 환부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고 후유증이 남게 된 것이었다.
2. 학문의 길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에게 통지표의 국어 과목에 ‘수’가 없으니 ‘수’를 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해 국어에 ‘수’를 받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필자는 대체로 우수한 학생 측에 들었다. 그러나 당시 진해에서 일류중학이라는 진해중학교에 응시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혼자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과연 합격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거의 꼴찌 수준으로 겨우 합격하였다.
합격 이후엔 학문에 뜻을 둔 공자와 비슷한 나이 15세에 공부의 즐거움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는데 꼴찌 수준의 합격이 필자를 자극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1학년 첫 학기부터 상위권의 수준으로 시작했던 필자는 중학 시절 내내 상위권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해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가정 사정이 여의치 못해 대학 진학을 잠시 미루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장남인 필자는 4명 동생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필자는 일하는 와중에 지방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마침 동생들이 대학 공부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지난 7년간 접었던 대학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70년 당시 5급을류 지방 공무원 월급은 약 1만 원 정도로 집 월세 충당하는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사직하고 학원 강의를 하던 시기에 배움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상대에 진학하여 공부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축적하는 길이 꿈을 실현하는 첩경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을 꼭 가야 하는지 대학 생활을 통해서 이를 확인하고 싶다는 강한 집념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이 지나서 진학한 대학 4년은 꿈같은 세월이었다.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생활 중에 터득한 사업 경험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계기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국경제의 흐름을 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방향설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학 4년은 학문의 즐거움을 알게 된 시기기도 했다. 이런 즐거움으로 수석 졸업할 수 있었지만 한편에선 미래의 진로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동생들 학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학계로 나아가고 싶은 생각이 맘은 접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다시 산업전사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 훗날 이론과 실제를 최대한 일치시키는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안고 현실 속의 길을 찾기로 하여 당시 최고의 보수를 주는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3. 중동 건설 현장을 누비면서 아라비아 상인의 숨결을 느끼다.
필자가 취업한 시기에 건설회사는 한참 중동 붐이 일어 대졸 신입사원에게 최고의 월급을 주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중소기업이었던 한국유리(주) 기획실에 동시 합격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추천한 건설 회사로 취업하였다. 희망하던 기획실이 아닌 자재부로 인사명령이 났다. 기왕이면 큰 뜻을 펴기 위해 나는 중동근무를 지원하였더니 사우디아라비아 TEP 본부 자재구매 담당으로 명령을 내주었다. 여기서 사우디아라비아 상인들의 상술의 대단함을 깨우쳤고 향후 중동국가와 업무상 협상하는 기술을 배우는 전기가 되었다. 영어가 능통하여 구매업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말도 좀 익혔다. 운전 기술도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1980년대 초 리야드 시내는 상가도 크게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건설용 자재를 구매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아서 해외에서 구매하여 조달하였으나 급한 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사 팀으로부터 자재 조달 독촉을 받았던 독특한 자재 A가 생각난다. 당시 필요한 자재는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아 수소문하여 어느 주택가에서 상호를 달고 있는 공급업자를 찾았다. 급한 김에 대충 가격 협상을 하고 공급을 하고 나서 보니 약 3배나 비싸게 구매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동국가의 무표정한 협상력 앞에서는 국내 업자는 한순간 실수하면 엄청난 바가지를 쓴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모든 물건을 생산하지 않고 수입해서 판매하는 까닭에 부르는 것이 값이 되고 모르면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는 곳이 중동이었다. 이후 상대와 협상 시에 얼굴에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여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런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생활은 재미는 있었지만 33세에 결혼하여 바로 해외근무를 하게 되어 아직 아이가 없는 관계로 회사에서는 연장근무를 요청하였지만 귀국을 결심하였다.
4. 세계 제1의 중공업 회사를 만들어내다
대학 재학 중에 아산학자금을 받아 공부했던 연고로 인하여 귀국 후에 현대중공업(주) 플랜트 사업본부 계약관리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구매부서의 업무도 재미있고 할 만했지만 주위에서 바라보는 의혹의 눈초리는 아주 거북스러웠다. 따라서 수출과 관련된 업무를 하려고 하던 차 현대중공업(주) 계약관리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현대에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일을 하던 한유동 전무가 담당 중역이었다. 필자가 계약관리부로 가게 된 것도 한 전무의 뜻이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계약서의 핵심 사항을 짚어가면서 일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지만 리더십도 출중하여 회사의 임직원들이 많이 존경하는 그런 분이었던 것 같다.
1981년 만 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쉴 수 있었고 그 외는 업무에 전념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필자는 혼자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업무에 전념하였다. 우리는 현대가 이미 국가적인 회사였으므로 현대가 잘되는 길이 우리나라가 잘되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근무하였다.
계약관리부서는 요즘 PM 부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회사의 대표이사로부터 프로젝트에 대한 전반적인 위임을 받아 사장을 대신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 영국 등 구미 국가를 위시하여 호주, 인도, 중국 등 전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총괄관리하다 보니 각 국가 및 회사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해양플랜트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선진국의 기업들과 계약과 협상 업무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업무도 세계화의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회의하면서 영문으로 회의록 (MOM)을 만들고 노트북이 생기면서 회의 시 바로 회의록을 작성하여 상호 서명하는 수준까지 이르니 어떤 계약과 협상 업무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지 기술적으로 좀 미진한 부분은 세계적인 설계회사와 하도급 계약을 하던지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는 식으로 보완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 사이 우리도 모르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선박을 만드는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고 조선업 세계 1위 회사로 성장해 나아갔다.
초기 단계에 인도 ONGC사로부터 수주한 Win, Wips 공사는 실행률이 85% 정도가 되는 수익이 많이 나는 프로젝트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도 클레임 보험사고 처리 등의 업무에서 600만 달러 이상의 순익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해양사업본부는 인도 ONGC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약 25년간 매년 지속해서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한때 ONGC사업본부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였었다. 이와 관련 인도는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 발주하지 않고 한국의 현대에게 지속적인 발주를 함에 따라 위 기간 약 20억 달러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5. 함께하여 행복하다
먼 길을 갈 때는 함께 가라고 했다. 필자는 사랑하는 5남매들과 함께하여 행복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필자가 존재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 오남매는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집도 절도 없는 상황임에도 함께 노력하여 다 대학을 졸업한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필자 집안에 행복을 몰고 온 사람은 어쩌면 나의 아내인 것도 같다. 아내와 결혼하자마자 5남매의 장남인 필자를 도와 얼마 되지 않은 월급을 쪼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고 집안을 평화롭게 이끌어왔다. 회사 야유회 때 부부동반이라 같이 가자고 하였더니 옷이 없어 함께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순간 너무나 미안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난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아들 둘은 이제 장성하여 결혼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큰 행복이라 생각한다. 손자를 보고 손자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이 즐거움 또한 어디에 비길 수가 있을까? 며느리가 수시로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는가 하면 손자가 커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내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6.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서 도전
대기업 30년 중소기업 10년의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양자의 주요한 차이는 도덕성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은 도덕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개인사업자 등록을 하여 필자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필자가 스스로 도덕성을 허물지 않는 한 누구도 필자에게 도덕에 반하는 일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서 외자 유치 3500만 달러를 성사시킨 필자는 이를 회사가 갚지 못할 시 처할 수 있는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도덕성이 모자란 그런 결정을 했는데 당시 이런 생활을 접기로 했다.
필자는 전문성이 있으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국제계약 컨설팅을 하는 일이다.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한양대 및 중앙대나 전문 교육기관, 한국플랜트협회, 건설전문공제조합 등에서 국제계약 관련 강의를 한다. 신문사에서 집필 요청이 있으면 글을 쓰기도 한다.
강의는 대학 졸업 당시 학계로 나가고 싶었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루에 7시간 강의를 하는 필자를 보고 아내는 철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강의 자체를 즐기다 보니 강의를 시작하면 나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필자가 또 하나 사명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창출하는 일이다. 원래 국가가 앞서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야 할 일이나 현재 국가가 해주기를 기다릴 수 없는 실정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SBA의 창업 닥터 과정을 이수하면서 청장년들의 창업을 지원하는 창업닥터로서 자격을 취득하고 KDB 시니어브리지 센터 1기 과정 도심권 인생설계 1기과정 등을 수료하면서 많은 뜻을 함께하는 좋은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인 꿈도 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장학회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이름하여 가칭 ‘태성(太晟)장학회’ 다. 가난으로 인하여 젊어서 배우지 못하는 후손이 없도록 해두고 싶은 생각으로 오래 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시니어들이 건강한 삶을 살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또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이상 사회를 꿈꿔가는 것은 필자의 또 다른 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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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기부’는 돈이 아닌 경험과 전문성을 사회에 내놓는 새로운 형태의 기부다.
김종욱(金鍾郁·70) CEO지식나눔 공동대표는 그러한 기부의 힘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기부가 그 무엇보다도 생활 속에서 굳게 자리 잡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말하는 삶을 가꾸는 재능기부의 힘이란 무엇인지 들어보자.
슬쩍 지나간 그의 노트에 적힌 글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다 애 아니면 개다.’
주변에서 그를 가리켜 ‘유머와 재치가 많은 어른’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 촌철살인으로 다가오는 문장이었다. ‘경이로움에 대한 매혹, 어린아이와 같은 탐구심, 삶에 대한 환희만 있으면 늙지 않는다’는 새뮈얼 울먼의 시구를 평생 실천해 왔다고 말하는 김종욱 CEO지식나눔 공동대표가 그 사람이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한일은행 외국부를 시작으로 도쿄, 런던,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며 한빛은행 부행장, 우리은행 수석부행장, 우리금융지주회사 부회장, 우리투자증권 회장을 거친 대표적인 금융전문가다. 2007년에 은퇴한 후 한미글로벌 기업에 경영 자문을 하고 있는 그는 기부의 기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CEO지식나눔을 운영하면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를 젊은이에게 전수하자는 의도로 모였습니다. 모임을 열자 한국장학재단에서 멘토링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로 가족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안타까웠고,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태도를 후대에 계속 전달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어서 CEO지식나눔을 열었다는 김 대표는 나이 든 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건전한 젊은이로 거듭날 청년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며 기부라는 것이다. 돈이 아닌 삶을 전달하여 더 좋은 삶을 살게끔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은 아직도 거부감이 있는 국내의 기부 문화에 대한 하나의 돌파구처럼 들려왔다.
기부는 저축처럼 미리 떼어놓고 해야 하는 것
“제가 처음 은행에 들어갔을 때, 선배가 ‘너희들은 저축을 해야 한다. 저축할 돈을 미리 떼어놓으면 저축이 된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가 기부를 해보니까 기부라는 것도 저축처럼 먼저 떼어놓고 해야 기부가 되지, 남는 걸로 기부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기부는 미리 떼어놓고 하는 것. 그것은 기부란 생활 속에 배어 있어야 가능함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김 대표는 ‘완전하게 증명하지 못할 세 가지’라고 전제하며 기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설명했다.
“첫째, 누구나 살다 보면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일 조금씩 아프지만 참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운동이 되고 큰 아픔을 분산시켜 줘요. 저는 아침마다 108배를 하는 것으로 그 고통을 나눠서 체감합니다. 둘째, 살다 보면 크게 피 흘릴 일이 생겨요. 수술을 해서 피를 흘리거나 단순히 피를 흘리거나, 어떻든 피를 흘릴 일이 생깁니다. 그렇게 흘린 피는 못 쓰니 다 버려야 해요. 그런데 일종의 기부인 헌혈을 해서 다른 삶을 살려 보세요. 신이 그걸 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했구나. 내가 더 피 안 흘리게 해야지’ 합니다. 그래서 헌혈을 많이 한 사람은 자기 가족의 피 흘림도 신이 막아준다고 봐요. 셋째, 살다 보면 큰돈을 쓸 일이 있어요.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조그맣게 각 사회단체에 자동이체로 한 달에 만 원, 삼만 원 정도 소액으로 보내면 신이 보면서 ‘돈 좀 썼네. 억울하게 돈 쓸 일 막아줘야지’ 하면서 막아줄 거예요. 증명은 못하겠어(웃음). 하지만 제 믿음입니다.”
기부는 조금씩 피를 흘리는 일과 같다
기부란 ‘조금씩 피를 흘리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기부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자 기부를 당연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그런데 기부를 하면 언젠가는 도움을 받는다는 김 대표의 신념은 그저 무턱대고 생긴 긍정적인 생각일 뿐일까? 아니다. 김 대표의 삶이 그러한 자신을 만들어냈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상대를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혜택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온 고마움을 기억하는 힘이야말로 김 대표가 가진 기부 신념의 기반이기도 했다.
“회사는 날 해외에 보내줬으니까 그게 너무 고마워서,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후배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부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1980년대에 영국에 가서 본 기부의 생활화가 무척 부러웠어요. 우리나라는 기부라고 하면 반짝하고 어떤 기간에만 할 뿐인데, 영국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죠. 거기에 우리가 가야 할 기부의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금씩 기부를 위해 쓰는 걸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사실 기부라고 표현할 것도 없이, 나누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지혜의 자산 사회에 환원
김 대표는 손주에게도 나눔의 교육을 하기 위해 여행을 하다가 지체부자유자나 어려운 사람을 보면 손주에게 돈을 줘서 그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고 한다. 받기만 하면 쓸 줄 모르기에, 주는 걸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주는 걸 안 가르치면 어른이 돼서도 받으려고만 합니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원리예요. 그래서 기부가 세상을 사는 원리의 기본일 수가 있는 거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타인에게 뭔가를 줘서 뿌듯한 마음을 알게끔 해야 합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자식들에게는 사랑하는 연습, 베푸는 연습, 소통하는 연습을 많이 시켜야 한다고 믿어요.”
기부를 세상을 사는 원리라고 말하는 김 대표의 사고의 기반에는 세상에 대한 고마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당연한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당연함은 심지어 물리법칙으로서의 중력에 대한 고마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살고 있는 중인데 만유인력의 법칙, 그러니까 중력을 고마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봐요. 모든 것의 기본이 이 중력에서부터 비롯되거든요. 중력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다들 붕 떠서 지내야 하죠. 중력만 봐도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당연시해요.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사람은 기적을 믿는 사람과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믿는 사람이다. 나는 매 순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매 순간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자신이 노력한 것보다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마음. 김 대표의 강점은 그곳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저는 전생도 있다고 믿어요.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죠.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50미터 앞에서 뛸 수 있는 사람과 50미터 뒤에서 뛸 수 있는 사람이 나뉘거든요.”
김 대표는 그래서 면접을 볼 때,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가, 나빴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나빴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좋았다고 생각해야 나중에 더 좋아집니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후배들을 가르치고자 했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무조건 달콤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 그들은 다 사기꾼들이에요. 조심해야지. 가끔씩 저에게도 뭔가 당첨됐다는 전화가 와요. 그러면 저는 그 사람에게 ‘그거 당신이 다 가지세요’, 그러지(웃음).”
‘냉정한 긍정주의자’로서의 김 대표가 꿈꾸는 CEO지식나눔의 미래는 모양이 차차 갖춰지고 있다. 우선 새터민 교육이 있으며, 오너의 2세 교육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비즈니스 컨설팅은 계속 추진 중이며 최근에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재능기부는 특히 자존감이 저절로 높아진다
김 대표에게 은퇴 후의 멋진 삶에 대해 물어봤다. 생활화된 기부가 주는 저축된 힘 외에 그의 은퇴 후에 활력을 주는 힘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가 ‘자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나이는 74살이었다’라고 말한 게 있어요. 저는 ‘가장 행복한 나이’보다 조금 모자란 나이죠. 그런데 이제는 의무가 없고 손자는 귀여워만 하면 되니, 저도 행복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가끔씩 내게 젊어지고 싶지 않으냐고 묻는데, ‘지금 행복한데 왜 젊어져?’라고 대답하죠. 행복의 첫째는 자유예요. 를 쓴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두려운 게 없다. 나는 자유다.’ 과거에는 역할에만 충실하느라 어려웠던 일이지만, 나이가 든 이제는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게 있는 법이에요.”
은퇴하면 많은 게 사라진다. 그 대신 얻는 것은 자유다. 나이가 만들어낸 자유와 생활 속의 기부로 축적된 힘을 김 대표는 고마운 마음으로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처럼, 이렇게 늙으면 안 된다는 그의 말에도 당당한 자유가 배어 있었다.
“나이를 먹는 것이 훈장 받는 일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기본적으로 안 돼요. 19살을 넘어 성인이 되면 100살과 똑같은 성인입니다. 그러니 나이로 누르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돈을 벌었다고 거만하게 행동한다든지 행동이 바뀌는 일부 사람들은 꼴불견이에요. 좋은 사람하고 함께할 시간도 부족합니다. 돈을 쓰는 자유보다 기부하는 자유를 가져보세요.”
김 대표는 CEO 멘토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성숙한 생각을 나누고, 취업과 창업 지도를 통해 사회진출의 장애를 슬기롭게 넘어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 작은 일을 왜 ‘기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인지 몹시 미안하고 쑥스러워했다.
그는 돈이 아닌 다른 자원(resource)도 자원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돈이 아닌 서로의 전문성을 모두 돈과 똑같은 가치로 여기는 그에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면서 헌신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CEO지식나눔에 대하여…
2010년 30명으로 출범한 (사)CEO지식나눔의 회원은 전·현직 국내 기업 임원 및 대표급 인사들이 강연을 통해 지식나눔 활동을 전개한다. 2015년 현재 75명으로 지난 5년간 대학생과 사회인 멘티를 1500여 명 지도했고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630여 회 CEO 특강을 통해 연인원 6만여 명을 교육했다. 아울러 회원들이 강의 등 활동으로 모아진 기부금과 후원금으로 대학생과 유학생 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보조기구 구입에 기부했다.
회원들은 500만 원의 입회비를 내고 CEO지식나눔 모임에 가입해 모든 활동을 무상으로 하고 있다. 각종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 전액은 법인 운영금으로 사용하며, 남으면 사회복지재단 등에 다시 기부한다. LG화학 사장을 역임한 노기호 상임대표를 필두로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민경조 前 코오롱그룹 부회장, 김수근 차병원그룹 고문, 김기용 前 카길한국대표 회장, 강정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금융전문대학원 원장, 박문화 前 LG전자 사장, 박종식 前 삼성엔지니어링 부사장, 이방주 ㈜JR투자운용 회장, 허남석 포스코ICT 상임고문 등이 나눔 활동에 참여한다.
이 외에도 박주철 前 SK글로벌 사장, 신원기 前 르노삼성자동차 부사장, 윤봉태 GS칼텍스 상임고문, 이명우 동원산업 대표이사 사장, 최동수 한화그룹 고문, 최길선 현대중공업 총괄 회장 등이 주요 회원이다.
김종욱 대표는 은퇴 후 재능 기부를 하게 된 궁극적 이유에 대하여 “작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사진 이태인 기자
◇청년 창업 성공 10계명(도움=희망창업연구소)
1. 경험 부족은 정보로 보완하자.
정보 수집을 꾸준히 하자. 업종을 선정하면 해당 업종에 대해 꼼꼼히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같은 업종 매장에서 일하면서 운영 노하우를 배우거나, 관련 기술을 익힐 수 있는 학원을 수강한다. 간접적 정보 수집 방법으로는 신문과 책을 통해 창업 관련 이론을 정립하거나 전시회나 박람회 등을 방문해 견문을 넓힐 수도 있다. 또한 창업 동호회에 가입해서 창업 선배들의 조언에서 정보를 얻기도 한다. 또한 각 시청, 구청에서 무료로 진행하는 창업 강좌도 꼼꼼히 챙긴다. 창업 컨설팅 업체를 방문해 컨설팅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2. 실전 경험을 쌓자
청년이라면 사업 실패율을 줄이기 위해 반드시 실전 경험을 쌓아라. 외식업을 예로 들었을 때 주방부터 서빙, 운영까지 실전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관련 업종에 취업해 해당 분야의 능력을 쌓고, 인맥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막상 내 매장을 오픈한 후에는 인력관리, 고객 불만에 대한 대처 등 운영상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매장 체험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도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3. 취미나 적성 고려해 업종 선정
즐겁지 않으면 일하기 싫은 것이 청년들의 성향이다. 즐거워야 더 시너지가 나기 때문에 눈앞의 수익보다 장기적인 성장성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서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본인의 적성과 취미다. 자신이 하는 일이 적성에 맞고 취미와도 연결된다면 성공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4. 부모님과 함께 운영하자
부족한 경험을 가족 경영으로 보완할 수도 있다. 오랜 사회 경험이 있는 부모와 함께 매장을 운영하게 된다면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다.
5. 무리한 투자는 금물이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한 청년의 창업이라면 자금이 넉넉지 않다. 따라서 무리하게 대출을 통해 창업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금물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정부 지원자금을 노크하는 것이 저금리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니 한번쯤 고려해보자.
6.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라
청년창업자의 가장 큰 무기는 발 빠른 정보 수집 능력과 소비력 높은 20대의 유행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부모님 세대보다 인터넷 활용 능력이 뛰어난 만큼 각종 창업정보를 쉽게 수집한 후 활용할 수 있다.
7. 지인들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자
동떨어진 데서 창업에 대한 정보를 얻기보다는 지인들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자. 아버지의 회사 경력, 어머니의 살림 노하우가 소중한 창업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8. 시간은 금, 시간관리가 매출관리
자신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엄격하게 따져보고 어떻게 활용할지를 미리 계획한다. 창업 이후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따라서 시간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9. 수익성을 체크하자
창업 초기부터 수익성을 체크해 보자.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창업해서 예상보다 낮은 수익성 때문에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프랜차이즈 창업이라면 가맹본사에서 제시하는 데이터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직접 가맹점을 몇 군데 찾아가 확인해 보라.
10. 기대소득을 업종선정에 반영하라
투자금액에 따라 기대소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창업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낼 것인지 결정해서 업종 선정에 반영하는 것이 좋다. 업종에 따라 수익구조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 경제의 90% 이상을 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최근 몇 년 동안 차례차례 세계 각국과 FTA를 진행하면서 산업 풀을 넓히고 있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문제 제기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FTA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국FTA산업협회는 그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설립된 국내에서 유일한 FTA 전문 민간 단체다. 이창우(李昌雨·62) 한국FTA산업협회 회장은 삼성종합상사를 거쳐 전자상거래, 전자무역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전자무역협회장 및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한 현장 전문가 출신의 FTA 전도사. 그가 조찬회에 나가 끊임없이 공부하는 이유를 들어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안타까운 점이 참 많습니다.”
이창우 한국FTA산업협회 회장에게 FTA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물었을 때, 나온 말이었다. 이는 FTA 추진의 난맥상을 그대로 드러낸 목소리였다. 이 회장은 20여 년 전 종합상사맨으로 있었던 시절 미국의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추진에 자극을 받고 전문가가 없는 국내에서 사실상 홀로 FTA에 대해 독학한 실무형 전문가다. 사실 FTA는 국민적 관심사라기에는 너무 전문적인 인상을 주지만, 동시에 의사결정권의 세계에서는 정치 게임으로 다뤄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회장 입장에서는 답답할 만도 할 것이다.
국제경쟁력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이 회장은 우리 사회의 국제경쟁력이 어떤지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FTA에 대한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선 진정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FTA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잘 모르고, 정치적 수준에서 말을 합니다. FTA를 언급하려면 경쟁 국가들과, 국제적 흐름을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국내용으로만 언급하고, 대부분 FTA 정책도 국내용으로 추진됩니다.”
또한 그는 실무 경험자로서 교역 현장의 팩트 반영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FTA 협정문을 제대로 반영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상황을 보면 한·미 FTA 24개 항목 중 2개만 반영되는 수준이며 한·중 FTA 22개 항목 중 2개 수준만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변호사가 법전을, 스님이 불경을, 목사님과 신부님이 성경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회장은 양자, 다자, 복합, 복수국가 FTA 등 FTA 자체가 급속도로 진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미국과는 3개, 싱가포르와는 5개, 베트남과 5개, 중국과 총 6개의 FTA 체결이 예상되는 등 복합 FTA가 급속히 중가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 국가들은 우리나라 말고 다른 나라들과도 계속 FTA를 추진하고 있는데 현재의 FTA 정책, 교육, 컨설팅 등은 미국, 중국이 우리나라하고 딱 하나의 FTA만 체결한다는 가정 하에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가족’
FTA의 현실에 대한 이 회장의 단호한 견해는 그가 가진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회장도 자신이 만약 FTA 전문가가 되지 않았다면 교육전문가가 되었으리라고 말한다.
“아들들이 저보고 학원 선생님 했으면 명강사로 돈 많이 벌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안 하는 FTA 전문가가 되어 죽창에 찔릴 뻔하고, 멱살 잡히고,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등 고생만 하고 돈은 못 버는 가장을 원망하는 소리겠지요.”
일만 하며 살아온 이 회장이 가족에게 느끼는 빚은 컸다. 현재의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가족이 된 이유는 너무나 바빴던 그의 삶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저는 대기업, 종합상사맨으로서 정말 바쁘게 앞만 보고 살았어요. 그 사이에 가족의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지금도 가슴 아프게 하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젊었을 때 제가 하도 가족을 돌보지 못하니까, 어느 날 아내가 작정한 것처럼 아이들 좀 한번 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때 아이들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정말 아이들이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과의 대화는 아이들이 군대를 갔다 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둘째가 중학교를 다닐 때 아빠하고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아빠는 신경도 안 썼다고 말하더군요. 밤늦게 들어와서 새벽에 나가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었으니까요.”
FTA로 제2, 제3인생을 빚다
가족을 포기한 대신 일에 매달려 살던 이 회장의 삶은 현재의 그에게 FTA 전문가라는 보상을 해주고 있었다. 그에게 인생 후반전, 제2의 인생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다.
“제가 올해로 6학년 2반인데요. 베이비부머, 실버, 시니어 등의 대표적인 나이지요. 저는 FTA로 제 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는 전 세계가 FTA를 둘러싼 극단적인 경쟁을 하고 있어서 고도로 전문성이 필요하지만, 국내에는 상대적으로 FTA 전문가가 거의 없습니다. 전국적으로 원산지·통관 분야만 다루는 관세사 외에 종합적으로 FTA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는 10명도 채 안 됩니다.”
이 회장은 FTA가 일자리의 보고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회장은 은퇴한 무역전문가들을 200명 선발하여, 200시간의 FTA 교육을 통해 FTA 전문가로 양성했다. 200명 중 48명이 취업 및 창업을 했고, 100명 이상이 현재 FTA 전문가로 활동 중이며 일부는 해외까지 진출한 상태라고 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FTA에 대한 반감이 가장 높은 농업 분야에서도 40여 명의 FTA 전문가를 양성하여 활용 중에 있다고 한다.
“FTA 관련 정보를 다루는 분야는 대표적 블루오션으로서 앞으로 약 10만 명의 FTA 전문가가 필요한데 이들을 양성하는 데 진력하다 보면 저도 70대가 되지 않을까요? 70세가 넘으면 쉴 생각입니다.”
내 삶을 완성하는 데 쉼 없는 배움
지식포럼을 자주 나가는 이유는 지혜를 배우려는 것. 선배들에게서 머릿속에 있는 지식의 암묵지(暗默知)를, 머릿속에 지식을 글이나 그림으로 정리한 형식지를, 몸으로 체득한 지식의 경험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찬 포럼을 찾아다니는 마음가짐은 무엇일까?
“우선 저는 요즘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쉬움도, 원망도, 욕심도, 미움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어렵지만 그렇게 노력하다보니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집니다. 살아 있는 것만도 축복이니까요. 그리고 시대에 적응하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빠 때문에 걱정이라고 종종 말합니다. 그러면서 3가지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요. 젊은 사람들이 아빠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야단치지 말기, 전철에서 젊은 남녀들이 껴안고 뽀뽀를 해도 나무라지 말기, 길 가다 어린 아이들이 예뻐도 쳐다보거나 머리를 쓰다듬지 말기가 그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기준과는 너무도 먼 화성과 금성 같은 이야기이지만 적응해 보려고 노력중입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나를 걱정하는 시대예요. 그러니 제가 노력해야지요.”
마지막으로 이 회장은 주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저는 주위의 도움과 은혜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위치에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크게는 국가·사회, 작게는 가족·친구·이웃 등 모두 감사하지요. 그리고 나이 든 사람에게는 보물이 4개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소중히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바로 늙은 몸(건강), 조강지처(부인), 오래된 친구(친구), 노후 자금(돈)입니다. 특히 돈 없는 노후는 100세 시대의 재앙이라고 생각합니다.”
2011년 DBM과 Lee Hecht Harrison이 글로벌 합병한 결과, 세계 최대의 전직지원서비스 기업인 LHH/DBM이 탄생했다. 그 한국 지사인 LHH/DBM 코리아는 점차 미래 산업이 되어가고 있는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 분야에 있어 다양한 글로벌 사례와 독보적 노하우를 갖고 국내에 아웃플레이스먼트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LHH/DBM 코리아의 수장을 맡고 있는 유홍열 사장을 만나 국내 아웃플레이스먼트 시장의 현황과 미래를 짚어봤다.
유홍열 LHH/DBM 코리아 사장은 국내 아웃플레이스먼트 시장의 규모를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을 합쳐서 약 300억 원 정도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기업과 퇴직자 모두가 필요로 하는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가 유독 국내에서 확장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문화적 차원의 거부감이 존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전직지원서비스 시장이 미국이나 가까운 일본에 비해서 성장이 더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외면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계속해서 시장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국계 기업들은 서비스의 효과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꾸준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국 기업의 경우에는 여전히 퇴직 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퇴직자에 대한 배려나 나가는 사람들에게까지 추가비용을 지급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기업이 많이 있는 편입니다.”
전직지원서비스의 성과에 대한 조급함 경계해야
유 사장은 한국 기업들이 전직지원서비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유를 이해한다고 밝혔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전직지원서비스를 통해서 퇴직자들이 서비스 기간 내 성공하기를 기대하나 서비스 종료 시점에서 보면 기업이 기대할 만한 결과를 내기가 어려운 점도 한 몫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
“물론 전직지원서비스를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소요기간이 2배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은 한국고용정보원의 객관적 통계를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국내의 통상적인 서비스 의뢰 기간은 3개월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미국이나 일본은 6~12개월이 대부분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사례는 전직에 성공하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이 재취업은 6개월, 창업의 경우는 12개월 정도 소요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국내에선 지금의 서비스 의뢰 기간 내에 만족할 만한 성공률을 얻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또한, 아웃플레이스먼트 시장 규모에 비해 후발 기업들의 과다 진출이 시장에서의 서비스 가격을 지나치게 하락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저가 수주에 따른 간소화된 서비스 제공이 서비스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민간 부문은 공공 부문에 노하우 뺏겼다는 피해의식 있어
고용노동부 및 정부 기관 등에서 수행하는 재취업 프로그램이 뚜렷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LHH/DBM 코리아는 공공 부문에 대한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는 회사다. 오로지 기업만을 위한 아웃플레이스먼트를 담당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재취업 지원 기관들의 문제점은 ‘인력’이었다.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전직지원서비스가 고객 개개인에 대한 맞춤형 컨설팅이 가능하도록 준비된 인력으로 하여금 적정한 인원을 담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과다한 인원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서비스가 형식적으로 진행되고 결과적으로 좋은 효과가 안 나타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비스를 받아본 사람들의 경우에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다 보니 그 불신도 커지게 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전직지원서비스의 본질이 취업 알선 서비스 정도로 잘못 인식되게 하는데 공공부문이 일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 사장이 제시하는 공공 부문 기관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민관 협력 방식이었다.
“공공 부문이 주도적으로 전직지원서비스를 담당하기 보다는 최소한의 공공부문의 인력과 전직지원 업체의 전문인력 간의 공조 체제로 센터를 운영하거나 일선에서의 서비스를 민간 부문이 담당하도록 공공부문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판단됩니다. 또한 상호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공공과 민간 부문 간의 긴밀한 대화와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당장 그러한 공조체제를 구축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2005년 노사공동전직지원센터가 시작할 때 공공 부문은 초기 3년 정도를 민간 부문에게 위탁 운영을 맡겼다가 현재는 직접 운영하면서 공격적으로 26개 무료 서비스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민간 부문은 서비스 운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제공했다가 시장을 빼앗겼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다.
모토로라 아웃플레이스먼트 성공 사례의 교훈
LHH DBM코리아는 자사에서 수행한 국내 기업의 아웃플레이스먼트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라 평가하는 기업으로 한국 모토로라를 꼽았다.
“모토로라는 작년에 한국에서 사업 완전 철수를 하면서 저희 회사가 사후관리 포함 총 9개월 동안 아웃플레이스먼트를 수행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유수의 대기업에 90%에 육박하는 전직성공률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유 사장은 모토로라 아웃플레이스먼트의 성공에는 고객사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 하에 전직지원센터 제공과 친밀한 파트너십이 형성될 수 있었고 본격적인 서비스 시작에 앞서 사전 단계 컨설팅 제공(Pre-Outplacement)으로 서비스에 대한 이해를 높인 게 주효했다고 밝혔다.
“IT 산업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많은 역량 있는 컨설턴트를 통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여 초기 성공 사례 다수 발생했고, 그 덕분에 소극적 고객에도 동기부여가 가능했습니다. 국내외 IT 및 연관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네트워크 활동을 통한 폭 넓은 히든잡을 발굴한 것과 사후관리 서비스를 통해 미성공자에 대한 추가적인 밀착 지원을 추진한 것도 성공의 이유입니다.”
아웃플레이스먼트를 하고 있는 기업들 전반의 질적 향상 노력 필요
유 사장은 향후 아웃플레이스먼트가 활성화되기 위한 개선책으로 업체들 전체의 지속적인 질적 향상 노력을 주문했다.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를 단순한 취업 알선 서비스로 인식해서 성공률 중심으로 요구하거나 교육 프로그램으로 인식해서 서비스의 본질을 왜곡하는 많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전직하는 고객에 대한 심리상담, 심경변화 인식, 경력 목표 설정, 필요 시 경력 개발, 시설 제공, 정보 제공 등 종합적인 전직지원서비스로서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는 변화관리 서비스라는 인식을 사회 전반적으로 공유하게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장년층과 베이비부머세대, 퇴직자들, 즉 시니어들이 공통적으로 최대의 관심 정보는 뭘까? 바로 일자리다. 재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고 연금은 부족하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55∼64세 고령자 고용률은 2012년 63.1%로 1995년 63.6%보다 0.5%포인트 하락했다.
고용지표상으로만 보면 베이비부머 세대인 50대 중심으로 취업자가 늘어가고 있고, 여성과 중장년층의 고용율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춰보면 시간제근로자, 기간제근로자 등의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이 늘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숫자만 채우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50대 이후 시니어들 재취업은 정부와 기업의 전직지원 구축이 시급한 이유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는 재취업에 절망
비자발적, 자발적이든 정든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던 퇴직자들은 인생2막을 열기 위해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들에게는 재취업이 필수다.
그러나 시니어 계층의 재취업과 창업에 대한 절박한 사회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화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중장년층 구직자들을 위한 전직 서비스가 아직 자리잡지 않았고, 기업들이 퇴직자를 바라보는 편견도 넘어야 할 벽이다.
명예퇴직 신청을 한 1년 전부터 50대 초반 A씨는 6개월 동안 ‘전직지원전문가’에게 심리상담, 진단과 피드백,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전직교육, 취업알선 등 전문 컨설팅을 받았고, 퇴직 후 곧바로 자신의 경력과 적성에 맞는 새로운 직장에 재취업했다.
퇴직이 배우자의 사망에 이은 가장 큰 심리적인 충격이라는 여론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퇴직은 개인에게 또한 매우 큰 시련이다. 게다가 고령화사회 정년퇴직 연령이 낮아지는 노동시장의 형태 속에서 퇴직은 고급 인력들의 사회 참여 폭이 작아지는 사회 해체의 문제와도 연관돼기 때문에 퇴직자들에 대한 기업과 사회의 고민은 매우 커져갔다.
따라서 그 동안 회사를 위해 기여한 근로자들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그 대안으로서 아웃플레이스먼트(전직지원프로그램)가 도입되고 확대되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퇴직 후 일정기간 동안 실업급여를 제공하고 또 재취업을 위한 각종 교육훈련제도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정년연장과는 별개로 기업들은 고령화의 적극적인 대응책으로서 전직지원서비스에 주목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의 최선의 복지는 일자리 제공이며, 일자리가 행복의 조건인 상황에서 이직하는 근로자가 가급적 실업 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지원하는 전직지원서비스의 중요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즉, 퇴직자에게 일시적 희망 퇴직금이나 복리후생보다는 근로능력이 있는 중·장년 근로자를 일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장년의 재취업과 창업이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재취업에 대한 비틀린 시선이다. 시니어들에게 정부가 주도하는 재취업 지원이 시니어들의 전문성이나 그간 해왔던 일들과는 상관없는 일감들을 맡기기 일쑤라는 불평을 듣는 건 어렵지 않다.
아웃플레이스먼트 실행이 잘 안되는 이유
소위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를 도입한 기업일지라도 퇴직을 앞둔 1주일 전에 단발성으로 워크샵을 가거나 온라인 상담정도에 그친다. 이력서 쓰는 방법 알려주거나 면접 보는 스킬정도. 직전 퇴사 처리된 회사에 대해 악의를 품지 않도록 잘 달래주는 일이 겨우 아웃플레이스먼트라고 시늉하는 행태에 머물러 있다. 기업들의 평판에만 신경쓰는 저비용 고효과를 기대하는 변형 아웃플레이스먼트를 흉내내고 있다는 의미다.
전직지원프로그램이 있다고 소문난 기업에도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개념도 모르고 있는 곳이 많다. 퇴직자들이 아웃플레이스먼트제도를 요구하지 않아서 도입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HR부서에서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정보를 아예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 기업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가 IMF 경제위기 이후의 구조조정과 전직지원장려금제도가 도입되면서 국내 기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도입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에 대한 기업들과 퇴직자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기업들은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에 대해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할만큼 서비스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퇴직자들은 아웃플레이스먼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퇴직 시에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보다는 현금 보상을 더 선호하는 상황이다.
위로금을 선호하는 퇴직자들, 전직지원 서비스 요구해야
이런 이유들로 인해 도입 초기에 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국계 기업 및 국내 기업은 많이 늘었지만,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만 커진 시장 규모는 역설적으로 그리 크게 늘지 않았다.
하지만 국회에 계류중인 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이같은 퇴직(전직)자에 대한 재취업, 창업 알선 등 지원서비스가 의무화 되면 전직지원서비스를 하려는 기업은 늘어 날것으로 전망된다. 퇴직자 가운데 장년을 대상으로는 전직지원 장려금을 지급하고, 사업주에게는 고용유지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검토된다는 것이다.
KT는 지난 4월 무려 8300여명의 명예퇴직 신청을 받아 1조3000억원 가량을 명예퇴직금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1억4457만원에 이르렀다. 또 한국시티은행은 최근 실시한 명예퇴직에서 5년치 급여를 특별퇴직금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4억원에 달했다. 이밖에 자녀 학자금, 건강검진 혜택도 보장했다.
현대차그룹 계열회사도 최대 2억원을 넘게 퇴직위로금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감원인데, 막대한 인건비를 지출하게 된다.
경력관리체계가 자리 잡힌 일본, 공공과 민간 양쪽에서 재취업 지원
고령화 사회의 문제점을 일찌감치 치룬 해외 선진국에서는 재취업-창업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들이 우리나라보다 고도화되어 있다. 일본은 정부의 ‘헬로워크’와 민간의 ‘시니어살롱’이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헬로워크는 일본의 후생노동성이 고용안정 기회 확보를 위해 만든 공공직업안정소의 애칭으로 전국에 약 500개가 만들어져 있다. 취직 상담, 직업 교육, 직업 소개, 고용보험 관련 업무 등 취업과 관련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사실 일본에서도 헬로워크는 상대적으로 낮은 직무 능력을 가진 중·고령자들을 위해 단순한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곳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시니어살롱’은 전문 경력을 가진 시니어를 대상으로 구인구직 및 직업 교육, 상담을 진행하는 민간 비즈니스 모델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일본의 국가 공인 경력관리체계가 안착됨에 따라, 경력관리모델에 의해 노년에도 전문성을 충분히 살리는 일을 맡기기 때문이다.
베이비붐이란 단어의 탄생지인 미국은 비영리단체(NPO)가 잘 정비돼 있어 경험과 지식이 많은 계층의 재취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의 NPO는 200만 개 정도 있는데 그중 절반은 의료,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30% 정도는 각종 교육 활동, 나머지 20%는 기타 다양한 활동을 한다. 미국에서는 NPO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취업 인구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미국 전체 취업 인구의 10% 가까이가 NPO에서 일하고 있는 걸로 나온다. 즉 취업 알선 분야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다보니 그 분야 자체가 일자리까지 제공할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각 지역사회 내에서의 재취업 지원 활성화 시작
우리나라도 문제들에 대한 대책과 대안들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공공기관과 기업들은 매 시기마다 열리는 다양한 일자리 박람회와 함께 다양한 재취업 프로그램을 준비해놓고 있다.
‘중장년 재취업 프로그램’이 경제단체와 지자체들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지만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40대 후반 항공회사 출신 조기 퇴직자는 “간혹 일자리를 연결해 줘도 그곳에서 추천해주는 일자리들이 너무 열악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다양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 앞으로 10년 뒤에도 폐지가 노인 일자리를 감당하는 비극적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300인 이상 기업은 퇴직을 앞둔 근로자에게 의무적으로 전직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한다. 고용정보원 한 연구원은 전직지원 서비스에 대한 기업의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퇴직자에 대한 전직지원은 결국 기업과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라는 인식이 선진 외국처럼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숫자나 통계치 목표에 기준을 두지 말고 ‘양질의 일자리’를 모색한다면 퇴직자들이 전직 및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퇴직 후 재취업은 이제 근로자 개인의 것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중장년 퇴직자의 전직과 노후설계 지원은 기업이 정부, 전문가와 손잡고 수행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되어야 한다.
현재 많은 기업에서 전직지원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데 기업에 따라 기본교육만 실시하고 있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전체 프로세스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기업도 있다.
기본교육은 퇴직을 앞둔 대상자의 변화, 심리, 가족, 건강, 여가, 경력, 법률, 재무, 인생설계 등 퇴직후 누구에게나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말한다.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 기업에 따라 집합교육 및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다.
아직 도입단계인지라 전직지원에 대한 집체교육을 실시하는 기업이 늘고 있으며 전직지원 상담의 경우에는 개인적 상황에 따라 시간을 유동적으로 하고 있다.
상담 및 컨설팅의 경우는 개인의 재무상태나, 경력 활용방안, 법률적 문제나 여가활용 방안 등 개인의 문제를 1:1로 전문가에 의해 심층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법이며 창업이나, 재취업의 경우 컨설팅을 통해 재취업 실행까지 지원 하도록 해야 한다.
P&G, 수출입은행, 한전, KT에서는 이러한 전직지원 프로그램을 이미 시행 중에 있으며, 퇴직 예정자 뿐만 아니라 이미 퇴직한 사람들도 유용하게 접할 수 있어 향후 기업들이 전직지원 서비스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삼성 그룹, 계열사별로 18개 경력컨설팅센터 운영 중
한편 대기업들도 자사의 직원들을 위한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를 차차 갖춰나가고 있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처음 탄생한 개념으로 우리 말로는 ‘전직 지원 프로그램’ 또는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들 중 80% 이상이 이를 실행하고 있을 정도로 선진국에서는 일반화된 개념이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IMF 이후 기업에서는 효율적인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정부에서는 실업률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활용돼 공공과 민간부문에서 지속 적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에선 아웃플레이스먼트를 실행하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삼성 그룹을 들 수 있다. 삼성은 회사를 떠난 임직원이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게끔 퇴직 관리를 해주는 경력컨설팅센터를 2001년부터 시작하여 현재 각 계열사별로 18개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40~50대 중장년 퇴직(예정)자들의 재취업을 돕는 전직 지원 서비스를 시작했다.
경력컨설팅센터는 퇴직임원, 정년퇴직자(또는 예정자), 퇴직자(또는 예정자)를 대상으로 자문역 전직, 정년준비, 전직 상담을 해주며 재취업 알선뿐만 아니라 재교육, 창업지원을 하면서 퇴직 후 삶을 계획할 수 있게끔 종합적으로 관리해주고 있다. 현재까지 총 3천 600명이 재취업에 성공했다는 것이 센터측의 얘기다.
센터 관계자는 “전직지원 프로그램 제공을 통해 회사는 내부 고객으로서의 근로자와의 계속적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퇴직과 관련한 근로자 개인의 심리적 불안감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심리안정 후 여기서는 6단계의 교육을 실시합니다. 일에 관한 인식을 전환하고 자산을 체크, 가족, 건강, 여가, 관계 등을 탐색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한다”고 말했다.
재취업자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실패를 줄이기 위해 사후관리까지 해주는 점이 특징이다.
삼성전자 경력컨설팅센터가 국내 전직지원서비스의 롤모델로 부각되면서 LG, SK 등도 벤치마킹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전직지원장려금제도 부활과 맞물려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부장, 재취업보다는 더 늦기 전에 생애설계부터 하지”
전문가들은 재취업 준비를 자신의 장점과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로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물론 척박한 재취업 환경을 갖고 있는 현재에 그를 위해선 철저한 준비가 뒤따라야 한다. 당연히 시니어 본인은 재교육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고 실행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은 어찌 보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재점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시니어 취업자들이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도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이는 아직 현실적으로 시니어들의 취업 지망과 기업이 인재에게 바라는 요구사항의 격차가 큼을 우회해서 알려준다. 물론 시니어들의 눈높이 낮추기만을 강요하지 말고 기업에서 시니어들을 고용하는 일에 거부감을 갖는 풍토 또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를 위해선 시니어 재취업에 있어 정부에서 기업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 세금 감면, 인센티브 등이 보다 현실화될 필요가 있다.
중장년 대다수가 일할 의사가 있는데도 정년은 57세 수준에서 정체되어 있고 기업의 장년 채용 기피 관행이 있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중장년 재취업 대책의 실효성을 점검하고 구체적인 보완책을 내놓아 중장년 고용률의 획기적인 변화를 유도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25년을 근무했는데 내가 과연 무엇을 잘하는지…”
증권사 퇴직을 앞둔 이창수 부장(가명)은 전직지원(outplacement)서비스를 받을지, 현금으로 보상을 받을지 고민이다. 퇴직하면 최대 12개월 치의 급여에 해당하는 돈을 받을 수 있다. 부장급이 1억 원 정도다. 앞서 구조조정을 추진한 A증권과 B증권의 부장급이 각각 받은 2억3000만 원, 2억 5000만 원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소중한 직장을 떠나는 이 부장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 부장은 회사에 대한 서운함, 조직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 평생을 몸받쳐 일한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다 못해 배신감마저 들 것이다.
당장 현금으로 몇푼 주면서 생색내고 하는 그런 위로 따위는 사양하고 싶다. 새로운 직장에서 보란 듯이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당장 생애설계와 경력목표를 지원해주는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기업의 대표적 아웃플레이스먼트 두가지 유형의 프로그램을 살펴보자.
【포스코 ‘그린라이프 서비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회사를 떠나는 퇴직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혜택을 자발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실직의 충격을 최소화하고 새 직장을 찾도록 도움을 주는 서비스를 의미한다. 기업 측으로서는 퇴직자가 회사와 고용관계를 청산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결국 퇴직관리를 효율적으로 시행함으로써 해고가 보다 원활하게 되는 이점이 있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기업과 퇴직자의 자발성과 협력을 바탕으로 한 전직지원제도이다.
전직지원제도는 향후 국내 기업들의 노사간 이슈로 부각되면서 신고용 창출의 모델로 정착될 것으로 예상된다.
포스코 ‘그린라이프, P&G 상시 아웃플레이스먼트, 삼성전자 경력컨설팅센터 등이 퇴직자를 위해 제대로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를 하는 기업으로 꼽는다.
포스코는 정년을 1년 앞둔 퇴직 예정자를 대상으로 퇴직에 따른 막연한 불안감 해소 및 사회 적응력을 배양할 ‘그린 라이프 서비스(Green Life Service)’ 과정을 개발해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특히 2001년 10월 시작된 ‘그린라이프 서비스’는 정년퇴직을 앞둔 직원들을 인재개발원에 파견해 새로운 진로 개척을 위한 컨설팅 및 학습 기회를 부여해 인기다.
그린 라이프 서비스 과정은 제 2의 인생설계에 필요한 실용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고 퇴직이라는 급격한 인생 변화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면서 사회에 조기 적응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국내 기업 중 정년퇴직 예정 직원을 대상으로 재취업 교육을 실시하기는 포스코가 처음이다. 정년퇴직을 1년 앞둔 직원을 대상으로 매년 4월과 10월에 1년 과정으로 두 차례 운영한다.
교육 프로그램은 공인된 진단 기법을 이용해 개인별 가치관, 성격, 행동양식, 핵심역량 등을 진단하고 분석된 내용을 기초로 미래의 새로운 진로 개척을 위한 개인별 카운셀링을 병행한다. 또 퇴직후 당면하게 되는 변화에 적응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마인드를 심어주고, 노후의 여유 있는 재테크 테크닉, 건강·스트레스 관리 등을 배우는 과정도 함께 진행한다.
통상 재취업 알선은 구조조정 기업에서 어쩔 수 없이 퇴직하는 직원을 위주로 하는데 비해, 포스코의 ‘그린 라이프 서비스’ 프로그램은 50세이상 재직중인 직원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포스코의 퇴직 예정자를 위한 교육프로그램은 개인별 여건에 맞춰 진로를 설계할 수 있도록 ‘맞춤식 컨설팅’ 형태로 운영한다. 이를 위해 포항과 광양제철소에 ‘그린 라이프 센터’를 설치해서 지원해주고 있다.
Life Plan Workshop(총 8일)을 통해서 퇴직 이후의 자신의 삶의 변화와 현재 자신에 대한 다양한 진단과 더불어 관련 목표를 수립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포스코경영연구소 관계자는 “그린라이프 서비스의 장점은 고용환경 변화와 퇴직 이후를 대비한 생애관리, 재취업, 창업, 재무관리 4개의 목표를 점검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재취업 희망자에게는 자신에게 적합한 취업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이에 필요한 다양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 70~80%는 포스코로 재취업이 이뤄지고 나머지는 외주 협력업체로 고용이 된다”고 말했다.
그린라이프 서비스를 받으면 자신의 변화는 물론 퇴직 후 재정계획 수립과 인생설계 작성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자기 모습을 적나라하게 돌아보는 시간이다.
그리고 개인별 가치관, 성격과 행동양식, 핵심역량을 진단한 뒤, 그 결과를 통해 자신의 참모습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설정할 수 있도록 개인별로 카운슬링한다.
그리고 주1회 카운슬링 날을 지정해서 사외 전문 컨설턴트의 자문을 받고 진로 개척을 위한 전략수립 및 목표설정을 세운다.
아울러 부부동반 워크샵 프로그램을 가동해 부부가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진행한다.
퇴직이 임박한 단계에서는 지금까지 수강한 프로그램을 종합해 개인별 재정계획, 능력배양 계획, 건강관리 계획, 진로 결정 등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마스터플랜’을 확정하는 워크숍을 갖고 마무리한다. 또 퇴직후에도 3개월간 지속적인 카운슬링을 온라인을 통해 제공받을 수 있도록 전문 컨설팅사와의 창구를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 ‘경력컨설팅센터’】
삼성전자는 지난 2001년 9월 퇴직자 및 퇴직예정자의 전직 지원을 위해 경력개발센터(Career Development Center : CDC)를 설립하고 재취업을 지원해왔다.
그 후 2011년 8월 경력컨설팅센터(Career Consulting Center: CCC)라는 명칭변경과 함께 인력보강 및 별도 공간을 마련하여 새롭게 개소하게 됐다.
평생경력시대에 있어 퇴직이 상시적으로 일어나고 예측 가능해짐에 따라 퇴직예정자와 퇴직자의 고용가능성을 제고, 퇴직 이후에도 퇴직자를 회사에 우호적인 잠재고객으로 유지하며 채용부터 퇴직까지 균형 있는 인사관리 체계를 구현하고 있다.
삼성전자 경력컨설팅센터는 10여명의 전담자가 전직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등 임직원의 접근성과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센터는 교육장과 Open Desk, 상담 공간, 집단 상담실, 휴게 공간 등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체계적인 연계를 위해 5,000여개 중소기업과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양적으로는 2001년 경력개발센터 개소부터 2013년까지 3,600여명의 퇴직(예정)근로자가 재취업에 성공했다.
삼성전자 경력컨설팅센터 전직지원서비스는 ‘자발적, 비자발적인 이유로 퇴직하거나 퇴직예정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퇴직으로 인한 충격을 극복하도록 지원하고, 급격하게 진행되는 환경의 변화를 인지하게 한다. 퇴직자가 계획적이고 전략적인 구직활동을 통해 신속하게 경력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고, 새로운 직무나 경력 또는 라이프스타일 등에 대한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인생 100세 시대에는 장기적 관점의 경력관리가 필수이다. 정년(60세) 후에도 약 10~20년의 활동기간에 하나의 직장·직업으로는 생애에 걸쳐 의미 있는 삶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임직원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전 생애에 걸쳐 경력을 준비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평생경력의 의식과 태도 함양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퇴직자가 퇴직 후 중소기업에 재취업하는 경로를 선택하다보니 조직문화, 시스템, 환경 등에서 큰 차이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관점의 전환에 중점을 두었다.
재취업이 지연되면 구직기간이 길어지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취업스킬 교육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전직지원 프로그램의 전 과정은 기본교육, 일대일 컨설팅, 잡매칭, 정보제공의 서비스가 병행하여 진행된다.
지세근 삼성전자 경력컨설팅센터장은 참여대상과 목적에 따라 프로그램을 차별화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자문역 전직 프로그램은 임원으로 재직한 후 퇴직을 앞두고 있는 자문역과 퇴직 임원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으로 생애 전반에 대한 점검과 중소기업의 이해와 경영전략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대일 상담과 재취업을 위한 잡매칭(job matching)이 함께 진행된다.
둘째, 정년 준비프로그램은 정년 퇴직자와 정년 퇴직예정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재취업시장과 중소기업의 이해, 제2의 인생을 위한 경력대안 탐색, 취업전략, 라이프 플래닝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대일 상담과 재취업을 위한 잡매칭으로 진행된다.
셋째, 전직실행 프로그램은 퇴직자 및 퇴직예정자를 대상으로 전직 가능성이 저하된 구직자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개발됐다.
퇴직 후 심리적 안정과 실행력 제고를 목표로, 고용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해 개인 특성과 외부 취업시장을 고려한 개인별 맞춤형 프로그램으로 운영하고 있다. 구체적 과정으로는 퇴직 후 변화관리, 나에 대한 탐색, 경력목표 설정, 구직전략 수립, 파워 이력서 작성, 면접 전략, 잡서치 실습, 셀프마케팅 실습, 네트워킹 실행, 경력관리와 라이프 플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퇴직 예정 근로자들의 고용가능성 증대와 함께 퇴직으로 동반되는 심리적 불안과 상실감을 완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업 10곳 중 6곳이 퇴직 직원에 대한 재취업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재취업 지원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상 기업의 생산성 향상 효과 때문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투데이와 시니어 전문 미디어인 브라보마이라프(www.bravo-mylie.co.kr)가 국내 대기업 50곳을 대상(44개 기업 응답, 응답률 88%)으로 실시한 ‘자기계발 교육 지원 현황, 재취업 프로그램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절반 이상의 기업들이 임직원의 퇴직 이후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일부 기업들은 근로자가 재취업하거나 창업할 수 있도록 돕는 종합컨설팅 서비스인 ‘아웃플레이스먼트’ 제도를 운용하는 등 체계적인 지원을 시행 중인 것으로 분석됐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기업 중 81.0%는 ‘퇴직자의 재취업은 기업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퇴직자의 재취업 프로그램이 ‘정부의 정책에 부응하기 위한 것일 뿐이어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와 ‘기업활동에 장애가 될 것’이란 항목의 답변은 각각 14.3%와 4.7%에 그쳤다.
응답 기업 중 56.8%인 25곳은 재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기업의 재취업 프로그램 운영기간은 4~8년 사이가 48%로 가장 많았다. 이어 1~3년(36.0%), 9~13년(8.0%), 15년 이상(8.0%) 등 순이었다.
재취업 프로그램 운영 시 어려운 점으로는 ‘고령자 고용 기업 부족’(52.3%)이 가장 많았다. 이어 ‘퇴직자의 나이가 많아 부담된다’와 ‘관련 프로그램의 부재’를 꼽은 기업의 비율이 15.9%로 같았다. 다음으로는 ‘회사의 재정상황’(11.4%), ‘담당인력의 전문성 결여’(4.5%) 등 순이었다.
이번 조사에서 재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는 기업들은 그 이유로 ‘사내의 요구가 없어서’(57.9%)를 가장 많이 들었다. 아울러 ‘비용 등 재무상태’가 42.1%로 뒤를 이었다.
응답 기업 중 73.2%는 퇴직자의 재취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아웃플레이스먼트 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체계적 교육실시’(40.0%), ‘재취업 부작용 감소’(34.3%), ‘조직 분위기 쇄신’(11.4%) 등을 아웃플레이스먼트 제도의 장점으로 꼽았다.
한편, 이번 조사 대상 업체는 제조·금융·증권·건설 등 4개 분야에서 자산 규모, 매출, 도급 순위 등 부문별 산업 특성을 고려한 기준으로 선정했다.
10대 그룹, 재취업 프로그램 가동률 100%
삼성, 현대차, LG, SK 등 국내 10대 그룹(제조 부문)은 모두 임직원 재취업 프로그램을 가동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재취업 프로그램 가동 기간은 절반 이상이 3년 이내로 집계됐다. 아울러 이들 기업 대다수가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을 이용 중인 것으로 분석됐다.
퇴직자의 재취업을 지원하는 정부 정책에 대해서는 긍정과 회의론이 각각 절반씩 차지했다. 제조 부문 응답 기업 5곳은 기업 생산능력 향상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고, 나머지 기업은 고용률 향상이란 정책적 성과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이번 조사에서 기업들은 재취업 지원 대상자의 역량 진단 기준 설정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대상자가 고령일수록 재취업 지원에 부담이 커진다고 답했다. 이와 함께 절반 이상이 재취업 교육 및 알선을 위해 아웃플레이스먼트 제도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지속적인 교육 및 성과 공유로 퇴직자들의 재취업 지원 시 우려되는 각종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만큼 아웃플레이스먼트 제도를 도입하려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금융사들 “재취업 프로그램 긍정적…비용은 부담”
5대 금융지주를 포함한 주요 금융·보험사는 퇴직자들의 재취업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다만 실적 악화에 따른 비용 부담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조사에 참여한 15개 업체 가운데 현재 퇴직자에 대한 재취업 프로그램을 가동 중인 금융사들은 총 9개로 집계됐다. 재취업을 가동한 조사자들의 평균 프로그램 가동 시기는 4~8년이었다. 지원을 통해 재취업에 성공한 인원수는 100명 미만이 가장 많았다.
이번 조사에서 금융사들이 선호하는 재취업 프로그램은 ‘이력서 및 역량 경력 기술서 작성법’이 다수를 차지했다. 더불어 재취업 지원 비용 부담을 덜기 위해서 정부의 재정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봤다.
특히 응답 기업의 73%는 아웃플레이스먼트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미 아웃플레이스먼트 제도를 운용 중인 2개 기업을 포함하면 거의 모든 금융사가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웃플레이스먼트 제도의 장점으로는 체계적인 재취업 지원을 가장 많이 꼽았다.
증권사들 재취업 지원에 소극적 “직원들이 원하지 않아”
증권사들의 재취업 지원은 걸음마 단계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대형 증권사 10곳 가운데 4곳만 퇴직자에 대한 재취업 프로그램을 가동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재취업 교육을 통해 취업에 성공한 퇴직자도 대부분 100명 미만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취업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는 4곳 중 기간이 15년 이상인 증권사는 1곳이었고, 3곳은 모두 8년 미만이었다. 대형 증권사들이 2000년대 들어 퇴직자 재취업 지원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재취업 프로그램 종류에 대한 질문엔 ‘자사만의 특화된 프로그램’, ‘이력서 및 역량경력기술서 작성법’, ‘외부업체 위탁’ 순으로 응답했다.
재취업 프로그램 운영 시 어려운 점으로는 3곳이 고령자를 고용하는 기업이 부족한 것을 꼽았다. 아울러 금융·보험사들과 마찬가지로 재취업 프로그램 운영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비용 부담이 재취업 지원의 가장 큰 장애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재취업 프로그램을 가동하지 않고 있는 증권사 6곳 가운데 4곳은 ‘직원들이 재취업 프로그램을 요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나머지 2곳은 ‘비용 등 현재 재무 상태에 어려운 점이 많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외에 아웃플레이스먼트 제도 운용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는 70% 이상의 증권사가 ‘그렇다’고 답했다.
“10대 건설사 재취업 지원 단 2곳뿐”
건설은 이번 조사에서 재취업 지원에 가장 소극적인 업종으로 나타났다. 도급 순위 상위 10대 건설사 중 대다수가 퇴직자에 대한 재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건설사가 재취업 프로그램을 통한 기업의 생산능력 향상에 공감하고 있어 정부 주도의 공론화가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사에서 재취업 프로그램을 가동 중인 기업은 단 2곳뿐이었다. 이들 기업의 재취업 프로그램 가동 기간도 3년 미만이며, 재취업에 성공한 인원도 100명 미만에 그쳤다.
대부분의 건설사가 재취업 프로그램을 가동하지 않는 이유로는 증권사들과 마찬가지로 은퇴 임직원들의 별다른 요구가 없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에서 대부분의 건설사는 은퇴자들의 재취업이 기업 생산능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봤다. 이에 따라 정부의 지원 확대와 프로그램 지원 등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아웃플레이스먼트 제도에 대해서는 10곳 중 5곳이 도입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유로는 재취업에 비해 부작용이 적고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하며 비용 절감 측면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