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명 디자이너 폴 스미스(Paul Smith)는 “패션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명품 옷이든 구제 옷이든, 입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옷의 진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니어는 노화에 따른 심리적, 신체적 변화로 자꾸만 움츠리게 된다. 게다가 대부분의 옷들이 스타일보다는 기능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어 미적 요소가 결여된 의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못마땅하다. 그러나 더는 걱정하지 말라. 기능과 스타일까지 살린 세계의 패션 브랜드와 아이템을 소개한다.
시니어숍, 집 앞에서 편안한 쇼핑을
온라인 쇼핑몰은 집에서 간편하게 옷을 주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인터넷 뱅킹을 이용하지 않거나 익숙지 않은 시니어에겐 곤욕이다. 그런데 당신이 원하는 날, 당신의 집 앞에 의류 매장이 직접 찾아온다면? 먼 곳에 있는 의류 매장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집 앞에서 옷을 고르고 입어보며 편하게 쇼핑을 즐길 수 있다. 상상 속 이야기처럼 생각되겠지만 실제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있다. 바로 스웨덴의 ‘시니어숍(Senior Shop)’이다.
시니어숍은 1996년, 스웨덴 헬싱보리 오픈을 시작으로 유럽 6개국에서 60개 이상의 이동식 매장 네트워크를 갖추고, 노년층을 타깃으로 한 고품질의 편안하고 세련된 의류를 판매하는 기업이다. 방문 신청은 무료이며 방문 당일 바로 구매할 수 있는 1000여 가지 옷이 준비되어 있다. 사이즈도 S에서부터 3XL까지 다양하다. 20m 이상의 전시대와 거울, 직접 입어볼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어 여느 옷가게 못지않다. 요청에 따라 패션쇼를 기획하기도 한다. 편안한 쇼핑과 이색 이벤트로 시니어에게 다양한 즐거움을 주는 시니어숍은 현재 북유럽 국가 전역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마담토모코, 굽은 허리도 우아하게
일본의 고령 여성복 브랜드 ‘마담토모코(マダムトモコ)’는 등이 굽은 여성 시니어가 편안함과 옷맵시를 모두 살릴 수 있는 옷을 만들었다. 상체가 구부러진 사람이 입어도 등 쪽의 옷감이 당겨져 올라가지 않도록 주름을 넣어 조정한 상의와 하의를 개발한 것이다. 최숙희 교수(한양사이버대학교 시니어비지니스학과)가 쓴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칼럼에 따르면, 이 제조법은 특허를 받은 공법으로 편안함은 물론, 굽은 등이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하는 기술을 자랑한다. 허리가 맞지 않는 옷 수선 서비스도 제공하는 마담토모코는 계절에 따라 다양한 신제품을 개발하는 등 꾸준한 노력을 통해 일본에서만 2만 명 가까이 되는 두터운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다.
치코스, 중년 여성의 개성을 살리는 패션
치코스(Chico’s)는 미국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의류 및 패션 아이템을 판매하는 기업이다.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600개 이상의 매장과 121개의 아울렛 매장을 운영 중이다. 물론 온라인 쇼핑도 가능하다.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의류 가격을 한화로도 확인할 수 있다.
치코스의 경영 철학은 여성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감과 개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기계 세탁이 가능하고, 뒤집어 입을 수도 있고, 더 부드러운 착용감을 느낄 수 있도록 옷의 기능에 대해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치코스의 매력은 개인 스타일리스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데에도 있다. 비용은 무료이며 전화상담도 가능하고, 매장을 방문해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쇼핑을 즐길 수도 있다. 홈페이지에선 연중무휴 24시간 상담도 가능하다.
노화의 상징 NO, 패션 아이템 YES!
지팡이는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에게 없어선 안 되는 도구다. 하지만 의료용 기구로 인식되고, 신체적 결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에 사용을 꺼리는 사람도 많다. ‘옴후(OMHU)’는 이런 시니어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기능과 디자인을 모두 갖춘 지팡이를 개발했다. 덴마크어로 ‘아주 조심스럽게’라는 뜻을 가진 이름에 걸맞게 디테일한 미적 감각을 자랑하는 패션 지팡이다. 이곳에서 만들어낸 제품은 견고하면서도 가벼운 소재로 충격에 강하고, 손잡이는 감촉이 부드러운 나무를 사용해 오래 쥐어도 불편함이 없다. 또한 손잡이 부분에 미끄럼 방지 처리를 해 벽에 세워둬도 넘어지지 않는다. 길이가 3가지 종류로 나눠져 있고 색상도 6가지나 돼 소비자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
미국의 ‘엘더럭스(Elderluxe)’도 다양한 디자인의 지팡이를 판매하고 있다. 가죽 지팡이, 스와로브스키 보석이 박힌 지팡이, 접이식 여행 지팡이 등 252개의 지팡이를 만나볼 수 있다.
국내에도 시니어를 위한 특별한 패션 아이템을 만드는 회사가 있다. 바로 주얼리 돋보기를 제작해 판매하는 ‘이플루비(efluvi)’다. ‘efluvi’라는 회사 이름은 자연이 주는 편안함을 선사하고자 스페인어 ‘efluvio(자연의 향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일반 돋보기는 굴절이 심해 오래 사용하면 어지럼증과 두통을 겪지만 이플루비의 돋보기 렌즈는 왜곡이 없는 독일 칼자이스 광학렌즈를 사용해 이러한 불편함을 없앴다. 또 목걸이형 손잡이형, 문진형 돋보기를 직접 디자인해 휴대성과 심미성을 높였다. 주얼리 돋보기 외에도 브로치, 안경줄 등 시니어를 겨냥한 세련된 패션 아이템도 많다.
4) 데이비드 워나로비치(David Wojnarowicz, 1954~1992년)
화가, 사진작가, 영화제작자, 공연예술가, 에이즈 인권활동가로 활동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가족에게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6세에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했다. 미국 전역을 히치하이킹했고 샌프란시스코와 파리에서 몇 달간 살다가 1978년에 이스트 빌리지에 정착했다.
이스트 빌리지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첫 멤버로 1980년대 초에 시빌리안 워페어, 클럽 57, 그레이시 맨션, 패션 모다, 림보 라운지 같은 전설적 공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85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에 초청되어 ‘그라피티 쇼’를 했고, 미국을 포함한 유럽 등지에 그의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38세에 에이즈로 사망했는데, 투병 중에도 도발적인 작품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5) 쳉 퀑 치(Tseng Kwong Chi, 1950~1990년)
홍콩에서 태어나 16세에 캐나다로 이주했다. 파리 명문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1년 공부한 후 사진으로 전공을 바꿨다. 1978년 뉴욕으로 이주해 에이즈로 40세에 사망하기까지 이스트 빌리지에 거주하며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키스 해링의 ‘절친’인 그는 해링의 부탁으로 4만 장의 ‘키스 해링 아카이브’를 제작했다.
챙 퀑 치는 뉴욕에서 경험한 다민족주의, 대량 소비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애매모호한 외교관’을 예술적 페르소나로 설정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작업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작업한 ‘서양과 만난 동양’ 또는 ‘탐험 연작’은 서양이 아시아에 품는 순진무구한 선입견과 무지를 조롱하고, 서구라는 근대적 구성물이 동양과 어떤 연관 속에 구성되는지, 서구라는 상상 개념이 상징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어떻게 동양을 신비화하고 배제했는지를 묻는다. 챙 퀑 치는 중국인임을 적극 강조했지만 중국을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다.
6)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년)
‘뉴욕타임스’는 바스키아를 가리켜 “흑인으로서 최초로 성공한 천재 아티스트, 검은 피카소”라 표현했다. 키스 해링, 앤디 워홀과 함께 3대 팝 아티스트로 불리며, 한때 마돈나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 1980년대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을 인정해줬던 앤디 워홀 사망 후에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7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바스키아는 뉴욕 브루클린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여 어머니가 미술 전문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7세 때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인해 부모가 이혼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15세 때부터 가출을 반복하며 거리 생활을 했다. 뉴욕 거리와 지하철에 낙서화를 하며 이스트 빌리지의 신표현주의 경향을 주도했다.
노숙자들과 공원 벤치에서 숙식하고 구걸하고 마약을 거래했다. 작업 초창기에 손으로 그린 엽서와 티셔츠를 뉴욕 거리와 상점에서 1~3달러에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명성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7장의 엽서 시리즈 ‘무제(안티프로덕트 엽서)’는 이 시기의 작품이다. 바스키아의 엽서 시리즈는 앤디 워홀이 구매했는데, 당시 워홀과 함께 있던 뉴욕현대미술관 큐레이터는 이 엽서를 사지 않았다가, 훗날 바스키아에게 그림을 달라고 애걸하는 처지가 됐다고 한다.
7) 버스터 클리브랜드(Buster Cleveland, 1947~1998년)
소호 거리에서 우표 크기의 콜라주 작품을 판매하다 리무진을 빌려 소호 거리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리무진 쇼’를 열어 유명해졌다. 가난과 무명이 창조력을 발휘한 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아 장난감, 자동차 후드 장식품 등 일상 재료를 이용한 콜라주 작품을 우편으로 보낸 ‘메일아트’가 그것이다. 메일아트는 가난한 예술가가 기성 제도권 전시 공간인 갤러리나 박물관에서 벗어나 대안 네트워크 공간에서 대중과 소통하면서 작품을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이자, 국가나 기관으로부터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방식이기도 했다.
그가 애용한 재료는 미술잡지 ‘아트포럼’ 표지였다. 또 벼룩시장에서 싼값으로 구매한 제품들,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 이스트 빌리지 작가들 사진, 담뱃갑, 거리에서 주운 쓰레기로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은 재료 특성에 따라 변주됐는데, 누구든 월 구독료 100달러 혹은 평생구독료 1000달러를 내면 우편으로 그의 작품 ‘Art For Um’을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장은 월요일 휴관한다. 현대미술은 도슨트 설명 없이는 온전한 이해가 어렵다. 도슨트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가길 권한다.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전시기간: 2018년 12월 13일~2019년2월24일)
‘반항의 거리, 뉴욕’(전시기간: 2018년 12월 21일~2019년 3월 20일)
‘키스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전시기간: 2018년 11월 24일~2019년 3월 17일)
‘케니 샤프, 수퍼 팝 유니버스‘(전시기간: 2018년10월 3일~2019년 3월 3일)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부터 이 사람은 싫고 좋은 게 분명할 것이며 그 점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으리라는 인상을 준다. TV 밖 현실 속에서 만난 배우 박정수의 첫인상은 어떤 단호함 혹은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이가 주는 강인함이었다. 얼마 전 드라마 ‘데릴남편 오작두’를 끝낸 그녀는 마침 인터뷰를 한 날 미국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청춘스타로 화려한 데뷔, 긴 휴식, 복귀, 그리고 이제는 안정된 중견 배우로 그 이미지를 각인시킨 그녀를 만나 연기자로서의 삶, 묵직한 여정에 대해 물어봤다.
“요즘은 드라마 끝나면 일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젊은 시절에는 드라마 끝나면 어디로 놀러 가야지, 쉬어야지 했는데 이제는 하도 쉬어서 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드라마가 끝나면 다음 일을 생각한다는 배우 박정수의 말은 바로 그녀가 워커홀릭이라는 짐작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워커홀릭인 그녀가 지금 미국을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원래 즐겁게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만 매우 힘들 때도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지금 일을 준비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여행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그녀가 힘들다는 의미 같았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 날이 저물다
그녀의 대학 시절 전공은 경영학과였다. 입학은 제약학과로 했다. 그리고 정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미술이었다. 지금도 가방과 구두를 유독 좋아하는 그녀는 미술을 계속했다면 패션 디자이너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선택한 삶의 지점들이 여러 갈래인 이유는 가족 때문이다. 교육자 집안의 아버지는 딸이 미술을 하는 걸 반대했고 그녀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학교 재학 시절 탤런트 시험을 봤는데 합격을 하면서 신데렐라 같은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화려한 연예계는 그녀에게 보람보다는 환멸을 더 줬던 것 같다. 탁월한 미모의 연예계 총아였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 뜻과는 달리 연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남들보다 빨리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데 주인공 몇 번 하다가 이 생활이 싫어서 시집을 갔죠. 그러다 15년 후 서른아홉 살에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연기를 시작했어요.”
불혹을 앞두고 복귀한 연예계에서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엑스트라 연기까지 하면서, 그녀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혼자서 딸 둘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힘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예순여섯의 나이, 지금 그녀는 기자에게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회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산을 올라가고 있는 중인데… 그런데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날이 저물었어요. 다시 내려와야 하는 거야. 그래서 길을 잃은 거예요.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래. 딜레마죠. 이걸 계속해야 해? 이 길을 가야 할까? 너무 힘드니까 고민이 돼요.”
또 다른 자신 마주하기
그녀는 자신이 이런 고민에 빠졌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워 보였다. 재작년까지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연기자의 길은 당연히 자신의 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실하면 무조건 통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작년에 나이 든 것을 처음 느꼈죠. 나이를 먹으니 도태되는구나 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됐어요. 그리고 나를 돌아봤어요. 너무 행운아였더라고.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그 운이 다한 거예요. 운이 다했는데, 이걸 밀고 나갈 힘이 있을까? 몸은 늙었고 늙다 보니 마음도 작아지고 겁이 나더라고요.”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은퇴 선언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외려 정반대로, 그녀는 연기 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을 언제까지,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여전히 둥둥 떠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말하자면 그녀의 딜레마는 자신의 업에 대한 확신과 함께, 그 업의 한계를 잔인하게 체감하면서 시작된 듯했다.
애초에 기자는 적절한 시점에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 되어버렸다. 잠시 동안 그녀가 겪은 삶의 굴곡을 생각해봤다. 그녀는 정상에 올라갔다가 길이 안 보여서 내려왔고, 다시 길을 올라가다가 또 길을 잃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지금의 박정수는, 어쩌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한 상황이 아닐까?
바닥을 치고 올라오기 위해 더 가라앉다
“저는 제 아집이 너무 셌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왔지만 좀 더 열린 마음이었으면 오늘보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가 그런 걸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독선이 강했지, 실패가 없었으니까. 뒤를 돌아볼 시간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그녀의 자기고백은 그녀가 하고 있는 고민의 깊이를 느끼게 해줬다. 동시에 그녀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진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줬다. 모든 편견을 다 내려놓고 자신을 알아챈 그녀는 자신이 늪에 빠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늪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늪이기도 했다.
“늪은 허우적거리면 더 빠져들어가죠. 그러니까 내가 어디까지 빠질 수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바닥을 치고 나오는 게 좋겠다 싶어요. 끝까지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깊숙하게 자신을 침잠시켜 답을 구하겠다는 다짐은 자아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브라운관 너머에서 살아가는 여자 박정수가 더 궁금해졌다.
절제하는 배우가 갖게 된 연륜
“누군가 제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너는 사막에 떨어지면 전갈을 씹어먹고서라도 살아남을 사람이라고.(웃음)”
그 말처럼, 겉으로 보이는 박정수는 독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경험한 연예계, 그리고 홀로 키워야 했던 두 딸.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기에는 생활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책임감은 그녀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는 연기를 해도 어디까지는 가는데 선을 넘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건 배우로선 나쁜 점이에요. 배우라면 갖고 있지 말아야 할 감수성을 갖고 있는 거니까요. 미쳐야 미친다지만 미치도록 미치지는 않는 거죠.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다 내보내지 못하고 늘 참아요. 그게 아버지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아버지도 교육자, 외할아버지도 교육자인 집안이었으니까요.”
그녀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하는 것은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늘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 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행동과 성격은 연기자보다는 CEO에 더 어울리는 자질이다.
“그래서 배우로 성공 못했나봐.(웃음) 기획을 너무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러다가도 ‘박정수, 네가 하는 거나 잘해’ 그렇게 스스로 말하죠.”
그렇게 ‘하는 거나 잘한’ 박정수가 얻은 것은 연기 연륜이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선을 넘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 젊었을 때는 상황을 너무 객관적으로 보며 몰입하지 못하는 감정이 단점이었지만 지금은 큰 걸림돌이 아닌 이유다.
너무 하고 싶은 영화
나이 들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자존감, 그리고 총명함이에요. 옛날에는 스마트하다는 말 참 많이 들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총기를 많이 잃었죠.”
그녀 삶의 낙은 여행과 여행에 관한 독서, 그리고 영화 감상이다.
“여행은 머리와 몸을 싹 비워줘요. 그곳의 문화에 젖어서 사는 거죠. 연기자로서도 도움이 돼요. 제가 워낙 새로운 곳의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걸 좋아하는데… 아마 호기심이 많아서겠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사람을 만나기 싫은 것은 사람에게 치여서, 부대끼는 게 싫어서 그런 것이지, 누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가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넌지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정말 하고 싶죠. 그런데 예전에 영화계를 모르던 시절에 개런티를 많이 받고 출연한 적이 있어요. 당시엔 그 개런티가 파격적이었나봐요. 그때는 내가 인기가 좀 있었던 때니까. 그런데 그다음부터 영화계에서 ‘박정수는 비싼 배우’로 낙인을 찍었어요. 그리고 영화계는 사단이 형성되어 있어 늘 같이 하던 사람만 세트업되더라고요. 이게 굉장히 큰 장벽이구나, 진작에 하자고 할 때 할걸 너무 배짱을 부렸나 했죠.(웃음)”
시니어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 하고파
그녀에게는 아직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을 때 해보고자 하는 연기 욕심이 있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나이 드신 분들이 감정을 교환하는 게 복잡해졌을거예요. 사랑과 미움 등의 감정도 이제는 심플하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을 잘 살려낸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그녀의 말은 시간과 함께 시대를 자신의 연기 속에 녹여내고 싶은 여배우들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TV 속에 나오는 나이 든 여자를 단순하게 ‘어머니’의 이미지로만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만나는 나이 든 여자는 모두 ‘어머니’로만 존재할까.
그녀가 새삼 여성스럽게 느껴진 건 이 지점에서였다. 다소 거침없어 보이는 면모는 삶의 부침을 겪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그녀만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마음의 평정을 찾은 사람이 멋있다
다시 그녀가 겪고 있는 딜레마로 얘기가 돌아왔다. 삶의 좌표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박정수는 그걸 알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면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결국 뭐든지 내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 그녀가 강인한 사람이지만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는 만족스러운데… 극복해야죠. 사실 이런 딜레마는 배우가 아니라 다른 누구도 겪는 거니까요. 그걸 딛고 일어서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건데,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야죠. 다만 얼마만큼 시간이 걸릴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죠.”
그녀는 나이 들어서도 멋있는 사람의 기준으로 ‘마음의 평정’을 꼽았다. 그렇다면 현재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기준에서 멋있는 사람일 수가 없기에,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에게 준비된 질문 중 폐기될 뻔한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10년 후의 박정수는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질문이 너무 슬프게 만드네.(웃음) 이걸 다시 뛰어넘고 더 행복해질 수도 있고…. 저도 모르죠. 모르겠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마지막 대답은 그 어떤 말보다 그녀다웠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자신만은 절대 잃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다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가 찾아낼 길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고 납득한 길일 것이다. 배우 박정수의 새로운 길을 믿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이유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녀의 핸드폰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녀는 슬럼프에 빠진 배우의 모습에서 바삭한 미소의 여자로 변신했다. 역시 ‘배우 박정수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스스럼없고 당당한, 그렇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애가 스며들듯 젖어 있었다.
'오름 오름' (박선정 저ㆍ미니멈)
‘제주에서 1년 살아보기’의 저자 박선정 작가가 제주살이 6년 동안 오름을 오르며 정리한 탐방 정보와 노하우를 담은 ‘오름 트레킹 가이드북’이다. 무성한 숲에 가려져 전체를 보기 어려운 오름의 모양을 개성 넘치는 일러스트로 표현한 점이 독특하다. 오름마다 특이사항은 물론 트레킹 순서와 코스, 준비물, 편의시설, 소요시간, 주의점 등을 일러준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몇몇 오름 외에는 초행자가 곧바로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에 저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알아낸, 승용차는 물론 대중교통으로도 오름을 찾아갈 수 있는 루트를 제공한다. 특히 노약자도 쉽게 오를 수 있는지, 여성이 혼자 올라도 안전한지 등에 대해서도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당일치기 제주 여행객들을 위한 ‘원 데이 트레킹(1 Day Trekking)’ 코너를 마련해 시간에 알맞게 효율적으로 오름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한다. 특정 계절, 시간, 분위기 등 여행 시기나 조건에 따라 가볼 만한 오름도 따로 골라 정리했다. 오름 트레킹과 더불어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이벤트, 서비스 정보도 알차게 실었다. 여행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사진. 각 오름의 사진 찍기 좋은 뷰포인트와 최적의 시간까지 알려준다.
'숲은 생각한다' (에두아르도 콘 저ㆍ사월의책)
캐나다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이 4년간 아마존 숲속에서 생활하며 사색한 결과물을 담아냈다. 저자는 개미핥기나 고무나무 등 언어가 없는 숲의 생물들도 저마다 생각하고 세상을 표상한다고 주장하며 그들만의 생존 전략이 인간의 역사와 어우러지는 풍경을 묘사한다.
'프랑스 여자는 80세에도 사랑을 한다' (노구치 마사코 저ㆍ더퀘스트)
일과 삶에서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프랑스 여성 55명의 우아하고 당당한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준다. 온전히 자기 취향대로 살며 자신이 원하는 것에 솔직한 그들은 80세가 넘어서도 설레는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 읽는 엄마' (신현림 저ㆍ놀)
“엄마라는 무게에 흔들리고 외로울 때마다 시를 읽으며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말하는 신현림 시인이 이 세상 모든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38편을 엮었다. 시와 함께 실린 ‘딸의 남자 친구가 온 날’, ‘기쁘고 힘겨운 엄마’ 등의 에세이로 따뜻한 공감을 나눈다.
'간다, 봐라' (법정 저ㆍ김영사)
법정 스님의 임종게와 사유 노트, 그리고 미발표 원고와 지인들의 편지 등을 최초로 공개한다. 자연과 생명, 침묵과 말, 명상, 무소유 등의 주제로 나눠 스님의 노트 속 글과 메모를 그대로 수록했다. 퇴고의 흔적을 간직한 육필 원고에서 짙은 여운을 느낄 수 있다.
자작나무는 예로부터 쓸모가 많은 나무 중 하나로 꼽혀왔다. 신랑 신부의 두근거리는 첫날밤을 밝혔던 화촉(樺燭)이 자작나무로 만들어졌고, 천마총의 천마도도 자작나무 수피 위에 그려졌다. 그래도 왜 인기 있는지 묻는다면 수많은 쓸모보다 자작나무의 매력은 역시 외형이 아닐까. 흰옷을 차려입고 굽힘 없이 쭉 뻗은 모습은 마치 고고한 선비를 연상시킨다. 흰 눈이라도 자작나무 숲에 내리면 몽환적인 풍경이 압도적이다. 자작나무 숲 여행은 겨울에 하라고 추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작나무는 참나무목의 큰키나무로 다 자라면 20m가 넘는 높이를 자랑한다. 시베리아나 북유럽, 캐나다 같은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다 보니 국내에선 강원도에서도 평균기온이 낮은 일부 지역에 생식한다.
국내 최대의 자작나무 숲으로 꼽히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인공적으로 만든 숲이다. 1974년부터 1995년까지 자작나무 69만 그루가 심어졌다. 이 중 일부 지역만 개방되어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새 고속도로로 관광객 늘어
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남로에 위치한 자작나무 숲은 최근 서울서 한층 가까워졌다. 얼마 전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거리를 줄여주는 데 한몫했기 때문이다. 서울 잠실쯤에서 출발하면 도착하는 데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동홍천 IC에서 빠져나와 44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인제 38대교 앞 남전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자작나무 숲 입구가 보인다.
실제로 자작나무 숲을 찾는 관광객은 고속도로 개통 이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귀촌했다는 인근 가게 주인장은 “주말이면 수천 명이 찾아요. 관광객이 말도 못하게 많아요. 주변 주차장이 꽉 차서 모자랄 정도니까요”라고 말한다.
자작나무 숲이 유명세를 타는 데에는 방송도 한몫했다. KBS 2TV ‘1박2일’에 소개돼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고, SBS 드라마 ‘용팔이’의 촬영지로도 알려졌다.
방문을 위한 채비는 필수
자작나무 숲으로 향하는 여정은 ‘원대리 산림감시초소’에서 시작된다. 방문자 명부에 이름을 적고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임도를 따라 걸으면 된다. 초소를 지나 마침 내려오는 관광객 일행과 마주쳐 숲까지 얼마나 걸으면 되는지 묻자 대뜸 아래쪽을 훑어본다.
“그 등산화로는 무리예요. 저 밑에서 아이젠을 대여해주니까 그걸 차고 가세요. 저도 빌려왔어요.”
겨울철 원대리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임도에선 아이젠이 필수다.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빙판을 만들기 때문이다. 등산로 수준은 아니어도 경사가 꽤 심하다. 가능하다면 낙상 예방을 위해 등산스틱을 준비하는 것도 좋다.
인대리 자작나무 숲까지의 거리는 초소에서 약 3.2km 정도. 산림자원을 위해 개발된 임도라 구불구불한 모습이지만, 2012년 개장 이후 관광객이 늘면서 정비는 잘되어 있다. 도착지까지 두 번의 ‘깔딱고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입구에서 1.5km 지점까지 오르막이 이어져 방문자들의 숨이 거칠어진다. 두 번째 오르막은 도착 직전에 있다.
늘 손꼽히는 아름다운 숲
차가운 공기를 잔뜩 마시면서 걷다 보면 어느 새 자작나무 숲에 도착한다. 커다란 표지판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준다.
인공적으로 만든 숲이라서 그런지 다른 수종은 섞여 있지 않다. 자작나무로만 가득 찬 새하얀 숲을 볼 수 있다. 쉽게 상상하지 못할 풍광이다. 만약 주변에 다른 관광객이 없다면 쉽사리 걸음을 내딛지 못할 만큼 나무 사이를 적막이 메우고 있다.
숲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이 숲은 지난해 11월 산림청이 주최한 아름다움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인 공존상을 받았다. 또 8월에는 국유림 명품숲으로도 뽑혔다.
이곳 숲은 4개 산책로로 구성되어 있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자작나무 코스는 둘러보는 데만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치유 코스는 1시간 반, 탐험 코스는 40분 정도 걸린다. 힐링 코스는 최장거리인 2.4km. 두 시간을 꼬박 걸어야 한다.
흙빛과 갈색이 어우러진 겨울 숲에 익숙한 우리에게 온통 흰색으로 장식된 자작나무 숲은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겨울은 집 앞도 나서기 어려운 계절이지만, 용기를 조금만 내어 이 특별한 자작나무 숲을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여행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여행 아닐까. 이왕이면 평소 사는 곳과 다른 곳일수록,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일수록 완벽한 여행지가 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 하지만 누군가는 별을 보고 있다네”라고 했던가. 살면서 꼭 한 번은 밤하늘에 펼쳐지는 신비로운 빛을 만나보고 싶다. 그 황홀한 광경을 보고 나면 우주는 더욱 위대해 보일 것이고 우리네 삶도 조금은 숭고하게 느껴질 것 같다.
최고의 오로라 관측소, 옐로나이프!
전 세계적으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같은 북구의 나라와 미국 알래스카, 캐나다 화이트호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 옐로나이프는 나사(NASA)가 지정한 오로라 관측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다. 여름에도 오로라를 볼 수 있지만 11월에서 4월 사이 밤이 긴 겨울이 가장 좋다.
북극광(northern light) 혹은 극광이라고도 불리는 오로라는 라틴어로 ‘새벽’을 뜻한다. 태양에서 방출된 플라스마 입자가 자석 성질을 가진 지구의 극지방 주변을 둘러싸면서 붉은색이나 녹색, 파랑, 노랑, 분홍 등 다양한 색의 자기 에너지 띠로 나타나는 것이다.
엘로나이프로 향하는 프로펠러 비행기 안. 일본인들과 중국인들, 영국 등지에서 온 유럽인들, 그리고 캐나다인처럼 보이는 가족들도 보인다. 일본은 오로라 여행이 대중화되어 일반인과 신혼여행객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오로라가 뜰 때 아기를 가지면 그 아기가 천재가 될 확률이 높다는 믿음 때문이라지만, 혹한과 어둠을 뚫고 세상에서 가장 보기 어려운 신비로운 빛을 함께 경험하는 일은 두 사람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선사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비행기 안에서 엷은 환호가 터져 나온다. “저기… 저기… 오로라다.” 반대편에 앉은 승객이 창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자 기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창밖으로 향한다. 나도 벌떡 일어나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하늘에 두 줄기 오로라가 어른댄다.
“아~ 저것이 말로만 듣던 오로라구나.”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오로라, 그것은 마치 바닷속의 돌고래를 보는 것과 같다. “고래다!” 하고 소리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신기루 같은 존재 말이다.
오로라 빌리지를 통하면 모든 예약이 하나로
오로라를 보러 옐로나이프를 간다면 오로라 빌리지(Aurora Village)를 통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한국에서 비싸기로 유명한 캐나다 구스는 영하 50도까지 내려간다는 이곳 옐로나이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평소엔 입을 일이 없기에 오로라 빌리지에서 대여해준다. 방한 점퍼와 바지, 마스크, 두터운 신발과 장갑까지 착용하고 나면 마치 우주복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 저 하늘을 둥둥 떠다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옐로나이프 오로라 사진마다 등장하는 아름다운 원주민 텐트 ‘티피(teepee)’ 안엔 따뜻한 화로가 있고 간단한 수프와 빵, 차와 커피, 코코아 등이 준비되어 있어 장시간 오로라 사진을 찍거나 관측하다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다.
캄캄한 어둠속을 달려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스고이”, “스고이”라는 일본말과 외국인들의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뛰어나가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지상에서 보는 오로라는 어떤 모습일까? 정말 사진에서처럼 그렇게 환상적일까? 깜깜한 밤하늘에서 처음엔 희미한 듯하더니 점점 더 강렬하게 하얀 빛줄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20초. 마침내 신의 영혼인 듯, 천상의 빛인 듯,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이 내게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잊지 못할 오로라 여행이 시작되었다.
낮 동안의 신나는 북극 체험
전날 밤 오로라를 보고 숙소에 돌아온 시각은 새벽 3시. 이곳에서의 일정은 밤에 오로라를 보기 위한 기다림으로 채워진다. 바쁠 것 없는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내다보는 창밖 풍경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화 속 엘사가 살던 ‘겨울 왕국’ 그 자체였다.
밤엔 매일 오로라를 관측하고, 낮엔 다양한 북극 체험을 했다. 얼어붙은 그레이트슬레이브 호수를 걸어보는 아이스로드(ice road) 체험, 시베리안 허스키를 타고 하얀 숲을 달리는 개썰매 체험, 이누이트 원주민들이 신던 스키를 신고 산속을 트레킹하는 스노슈잉(snow shoeing) 체험이 대표적이다. 이런 액티비티한 경험은 어디서도 해볼 수 없는 이색 체험들로 반드시 해보기를 권한다. 노스웨스트 의회 청사나 박물관에 들러 이곳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노슨이미지(Nothern Image)에서는 원주민이 직접 그리거나 만든 예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마지막 밤, 오로라를 보며 신에게 감사를
드디어 떠나기 전 날 마지막으로 오로라를 보러 가는 길, 호텔 로비의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밤 9시의 기온은 영하 33도, 체감온도는 영하 40도!!!!! 실제로 체험해보기 전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기온이다. 그러나 언제나 상상이 더 무서운 법. 막상 가보면 별것 아니다.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하니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오로라도 별이나 달처럼 날이 맑을수록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티피 안에서 코코아를 마시고 있을 때 밖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4박 6일의 여행기간 중 가장 눈부시고 화려한 오로라가 나타나줬다. 영하 40도의 혹한과 어둠을 뚫고 마지막 날 가장 아름다운 신의 영혼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의 마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좀체 보기 힘들다는 핑크오로라도 볼 수 있었다. 마시초 갓(Mahsi-cho, god)! 원주민어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라는 의미다. 사진 속에서만 보던 ‘오로라의 아우라’를 실제로 체험하고 나니 오랫동안 꿈꿔왔던 소원 하나를 이룬 느낌이다. 모든 여행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라 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꿈을 꾼 듯했다. 지구별이 아닌 다른 행성으로 다녀온 꿈 말이다.
travel tips>>
항공편>>인천-밴쿠버-캘거리-옐로나이프로 연결된다. 밴쿠버에서 옐로나이프로 바로 가는게 없고, 캘거리를 거쳐야 하므로 비행기를 최소한 세 번을 바꿔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가는데만 하루가 소요되는 힘든 길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오로라 빌리지 예약 시스템>> 옐로나이프 여행의 핵심은 오로라빌리지이다. 모든 여행 시스템은 오로라빌리지를 중심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개별여행자는 오로라 빌리지를 통하면 방한복 대여 및 오로라관측에 대한 일체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Aurora village (www.auroravillage.com)4720 Northwest Territories Ltd.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669-0006
추천숙소>>
옐로나이프엔 혹한과 어두음을 피해 안락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숙소가 다양하다. 필자의 경우, 더운 나라에 갈때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 등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이곳은 혹한의 환경이라 가장 좋은 익스플로러 호텔을 선택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텔급에서부터 inn, B&B, 게스트하우스, 로지, 콘도스타일까지 다양하므로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숙소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시내 중심의 관광 인포메이션을 제공하는 비즈니스 센터에서 얻을 수 있다.
Explorer Hotel 익스플로러 호텔 엘리자베스 여왕도 묵고 갔다고 해서 로비에 사진도 걸려있는 가장 럭셔리한 호텔이다. 그날그날의 일기예보는 물론 친절하고 품격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다운 타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용이하다. 로비와 방에서 무료인터넷도 가능하다. (www.explorerhotel.ca) P.O.Box 7000,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873-3531
추천레스토랑>>
극지방에 왔으니 다른 곳에서 먹어볼 수 없는 특이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된다. 익스플로러 호텔 1층에 있는 트레이더스 그릴(Trader's Grill) 레스토랑은 극지방에서 잡아올린 신선한 해산물과 원주민 전통요리인 순록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늑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Address 4823-49th Avenue,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873-3531
추천 준비물>>
오로라 사진은 핸드폰으로는 잘 찍히지 않는다. 일정시간 이상 노출을 해야 하므로 오로라 사진을 찍고 싶다면 트라이포드(삼각대)와 수동설정이 가능한 카메라와 광각렌즈(18mm이상)를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여행경비400만원 내외
30년 동안 부부동반으로 만나는 모임이 있다. 원래 7커플이 모였으나 지금은 4커플만 모인다. 죽은 사람도 있고 이민 간 사람, 스스로 탈퇴한 사람도 있다. 그동안 국내 여행은 몇 번 다녀 왔다. 각 집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보니 거칠 것 없이 친하다. 송년 모임을 하다 보니 또 단체 해외여행 얘기가 나왔다. 그동안 수없이 해외여행 얘기가 나왔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 적금을 붓기도 했지만, 때가 되면 한 팀이 못 갈 사정이 생겼다며 빠지면서 없던 얘기가 되곤 했던 것이다.
이번 연말모임에서도 또 해외여행 얘기가 나왔다. 멀리 캐나다, 베네수엘라 얘기도 나왔고 가깝게는 일본 중국 필리핀 여행 얘기도 나왔다.
그런데 가장 연장자인 70대 수원 사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좋아 꿈속에 사는 사람 같다. 이번에도 베네수엘라 등 해외여행 얘기를 꺼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그런 얘기를 하는 과정이 즐겁다. 그런데 앞에 있던 일산 친구가 정면으로 70대 연장자에게 그동안 해외여행 프로젝트를 여러 번 깬 장본인이라며 비난했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얼어붙고 언쟁이 계속 되나 했더니 70대 연장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버렸다.
나이 들어 이렇게 다퉈도 되나 싶었다. 일산 친구가 웃으면서 “얘기해봐야 성사도 안 될 것이니 지나가는 얘기로 하자”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 정색을 하며 그동안 쌓인 감정을 폭발시키다 보니 싸움이 된 것이다. 나이 들었다는 것이 헛말이 되었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고 상대방을 이해해주는 입장이 되어야하는데 친한 사이끼리 이런 일이 벌어지니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서로 어린 애로 가는 느낌이다. 이러다가는 30년 모임이 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서로 잘 알고 너무 속속들이 알다 보니 조심성이 없는 것이다. 부부모임이라 그런 것 같다. 남자들끼리는 속 얘기를 별로 안 한다. 남자들은 술이나 마시며 바깥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한다. 그런데 여자들은 집안 얘기부터 다 한다. 결혼 전부터 만났으니 그동안 아이들 커 온 얘기며, 남자들 흥망성쇠를 다 안다. 그러면서 친하다는 이유로 거침이 없는 것이다.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한다.
형제들 모임도 그렇다. 너무 서로의 사정을 잘 알다 보니 자존심을 건드려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많다. 이 경우도 여자들까지 포함되다 보니 소소한 얘기까지 불씨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낯선 사람 효과’라는 것이 있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좋은 이야기만 한다.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고 예의를 지킨다. 서로 잘 모르니 호기심도 있고 기대감도 있다. 과거에 뭘 했는지 묻지도 않지만, 본인이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므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나이 들면 새로 만나는 사람들 모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잘 아는 사람끼리 만나면 너무 허식이 없어 피곤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주변에 얼마든지 많다. 이 나이에 남에게 신세 질 일도 없고 일부러 잘 보이려 할 필요도 없다 보니 기본을 망각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붙지 않는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김형석 교수님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애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빠르다는 얘기를 하곤 했는데, 요사이는 내가 늙어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2018년에는 내 나이가 우리 관례에 따르면 99세가 됩니다.
10년 전에는 미수(米壽)의 나이라고 해서 미국에 다녀왔어요. 같이 가기로 했던 둘째 딸네는 집 일 때문에 못 가고 혼자이지만 가서 ○혜, ○애, ○순 세 딸들과 여행도 했어요. 막내인 ○순이가 벌써 대학 교단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세월이 많이 지났네요. 애들과 당신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때마다 엄마와 같이 고생하던 옛날이 가장 행복했다 말하며 다들 공감했어요. 가난한 세월에 전쟁까지 겪었으니까 우리들의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지요. 그래도 사랑이 있는 고생이어서 행복했어요. 사랑이 깊을수록 행복은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그 시절이 제일 좋았을 것입니다.
내가 구십이 되던 해에는 미국의 애들도 한국에서 다같이 모여 5일간 제주도 여행을 했고요. 여행을 끝내면서 당신이 잠들어 있는 산소에도 다녀왔고요. 막내가 “이다음에 나도 한국에 와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누우면 안 돼?”라고 해서 내가 “신랑과 애들이 허락해줄까?”라고 했어요. 막내는 큰애들보다 부모와 머문 기간이 짧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지요?
못했던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내가 2011년 봄에 ○진이가 교수로 있던 한림대학교에서 주는 일송(一松)상을 받았어요. 그때 여러 사람이 주는 꽃다발을 받았는데, 강원도 양구의 군수님이 주는 꽃다발도 받았어요. 뜻밖이라고 생각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까, 양구의 뜻있는 분들이 나와 안병욱 교수가 50여 년 가까이 사회를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실향민이어서 갈 곳이 없으니까 휴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양구로 모시자는 협의를 본 것입니다. 둘 다 구십 고개를 넘기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고마운 뜻을 전달하기 위해 군수가 직접 수상식에 와 꽃다발을 주었던 것입니다.
양구는 북녘땅과 가장 가깝고 우리나라 국토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파로호를 둘러싸고 있는 풍치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그 호숫가에 있는 공원에 나와 안 선생을 위한 기념관을 건설하고 우리 둘을 모시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안 선생은 93세에 세상을 떠나 기념관 옆에 잠들고 계십니다. 부인께서도 세상을 떠나면 안 선생과 함께 잠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 선생의 안식처 옆자리에는 내가 당신과 함께 잠들 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숫가이기 때문에 기념관에 온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고 가족들도 찾아오기 편한 곳입니다. 기념관 안에는 나에 관한 사진들과 기념품이 진열되어 있고 가족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어요. 당신에게 보여주지는 못했으나 나보다 더 고맙게 만족할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가족과 친지, 제자들은 물론이고 캐나다나 미국에 있는 이들도 한국에 오면 들러보곤 합니다. 다행히 내 건강이 허락하기 때문에 벌써 4~5년 동안 그 기념관에서 양구의 여러분을 위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인문학 강좌를 개최해 3년간 직접 강의도 하고 후배와 제자 교수들이 도와주기도 합니다. ○진과 ○우도 다른 강사들과 함께 강의를 돕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두 과정을 진행해왔는데, 내가 마지막 특강을 맡아주기도 했어요. 둘이 같이 잠들 곳이고 옆의 기념관에는 많은 사람이 참관해주겠기에 감사한 마음을 함께해줄 것으로 압니다.
또 한 가지 약간 놀라워할 사실을 얘기해야겠네요. 내가 당신과 함께 지내는 동안 1960년 초부터 30여 년간 많은 일을 했지요. 그중에서도 라는 책이 나온 후부터 10여 년은 전국적으로 나와 내 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관심을 받기도 했지요. 그 후부터는 비교적 조용히 일하면서 꾸준히 저서도 남기고 강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정초에 KBS1 프로그램 에 나가 한 시간 동안 행복에 관한 강의를 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큰 반응을 일으킬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같은 방송국에서 한 시간씩 두 차례에 걸쳐 이 방영되었습니다. 내 생애에 관한 기록 다큐멘터리였지요. 그렇게 알려지기 시작하니까 다른 TV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초청을 해와 내가 사양할 정도로 바빴습니다. 마치 행복을 알려주는 멘토 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또 그 방송들을 계기로 조선일보에서 두 차례, 동아일보에서도 두세 차례 내 얘기가 보도되었고 문화일보와 매일경제신문에서도 큰 비중으로 소개되는 기사가 실리곤 했습니다.
그 때문에 김 교수가 아직 살아 있고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내는 물론 미국과 캐나다의 교포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의사 방군은 옛날부터 잘 아는 제자였지요? 한국까지 찾아와 큰절로 인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 간접적인 영향으로 과거에 썼던 책들 와 가 다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 종교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가 다시 출간되었고 몇 권의 수필·수상집이 새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새로 나온 책들 가운데서 라는 책은 널리 알려진 출판사에서 나온 것도 아닌데 말년에 다시 한 번 장·노년층을 상대로 한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애독자가 생겼습니다.
그 책 때문에 청탁이 들어와 강연회도 몇 해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2017년에도 한 달에 평균 15~16회의 강연에 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애가 전화를 걸어서, “아들과 사위들이 다 정년으로 쉬고 있는데 아버지 혼자서 일하시네요?”라면서 다른 애들과 같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내 남편이 최고!’라면서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함께 지낼 때는 내가 교만해질 것 같아 “당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했지만 지금의 내 나이를 보면 당신도 감탄할 것입니다. 어머니와 당신이 있다면 내놓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자랑하고 칭찬해줄 사람이 옆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 가지 더 추가할까요? 내가 2016년 말에는 ‘도산인상 교육상’ 받았고요, 금년에는 유한양행에서 주는 ‘유일한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가을에는 동아일보에서 주는 ‘인촌상’까지 받았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세 분을 기리는 상을 다 받았습니다. 상금도 당신은 상상 못할 정도로 많았고요. 이제는 더 준다고 해도 사양할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식 때 ○예가 당신 대신 자리를 채우곤 했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예를 보고 사모님이 젊고 아주 미인이라고 부러워했어요. 사실은 당신이 더 아름다웠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랬어요. 어제도 지방에 강연을 갔는데, 사람들이 김 교수가 얼마나 늙었는가 보러 가자고 해서 왔는데 이전보다 강연이 더 좋았다며 감사하다는 겁니다.
여보!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대놓고 자기자랑을 하네…. 그러지 마세요. 다른 누구보다도 당신에게는 얘기하고 싶은 것을 참았어요. 믿기 어려우면 주어지는 시간에 우리 함께 갈 양구의 기념관 ‘철학의 집’에서 내가 다 설명해줄게요.
무어라고 끝을 맺을지 모르겠네요.
보고 싶어요! 왜 눈물이 나지요? 많이 사랑했는데….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
-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후학을 길렀고 지금은 글쓰기와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을 하고 아침식사로 계란, 사과를 먹는 게 건강 비결이다. 후배들과 신촌 카페에서 담소를 즐기는 따뜻하고 다감한 한국 철학계의 아버지다.
캐나다 본토에서 배로 한 시간 거리에 밴쿠버 섬이 있다. 그리고 그 섬 안에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주도 빅토리아가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 의해 발전한 땅으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밴쿠버 섬의 빅토리아로 주도를 옮기면서 빅토리아는 BC주의 주도가 되었고, 지금까지 주도로 남게 되었다.
밴쿠버에 간다면 꼭 한번 들러봐야 할 여행지 빅토리아. 밴쿠버 항구에서 배를 타면 약 한 시간 반 만에 빅토리아에 닿을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밴쿠버를 찾을 때마다 열일을 제치고 가이드를 자처하는 형부가 이번 여행도 앞장 섰다.
7시에 밴쿠버 항을 출발하는 배를 타기 위해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에 집을 나섰지만 7시 배를 타는데 실패했다. 조카가, 월요일 아침이어서 빅토리아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차가 많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가보다. 새벽 잠을 쫓으며 달려온 우리는 허탈한 마음을 달래며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9시 배에 올랐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빅토리아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차드가든이다. 빅토리아 하면 제일 먼저 아름다운 꽃이 떠오르는데 그런 이미지를 만든 장본인이다. 본래 석회석 채석장이었던 곳을 소유주인 부차트 부부가 전세계 꽃과 나무를 모아 테마별 정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봄, 여름에 특히 예쁘다던데 가을에 만난 부차드가든도 운치있고 멋졌다. 꽃도 나무도 예쁘고 날씨마저 아름다워 감탄사가 나왔다. 가을빛으로 아름답게 물든 정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대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가꿔놓은 정원에 감동하는 이유는 뭘까 라는 생각을 하며 다운타운으로 이동했다.
빅토리아 다운타운에 들어서니 바닷가를 따라 오래된 건물들이 고풍스럽게 서있었다. 주의사당의 아름다운 석조건물과 푸른 잔디밭, 거리를 다니는 마차와 오랜 역사를 지닌 호텔 등 밴쿠버와는 다른 이국풍광을 볼 수 있었다.
1897년에 세워진 주의사당은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예전 영국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데 주의사당 건물은 직접 눈으로 보아야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50m 높이의 중앙 돔과 화려한 스테인 글라스가 눈을 사로잡는다. 1층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빅토리아여왕의 초상화를 둘러보고 영국 여왕이 즐겨 찾았다는 엠프레스 호텔로 향했다.
빅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건 아마도 앰프레스 페어몬드 호텔일 것이다. 1908년에 세운 영국풍의 호텔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의 호텔이다. 영국 왕실 사람들도 묵어가는 곳이라 더 명성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빅토리아는 거리 곳곳에 영국 풍의 건물과 문화가 남아 있어 밴쿠버 속 영국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영국 귀부인들의 한가한 오후를 엿볼 수 있는 애프터눈 티 문화도 그대로 남아있다. 밴쿠버에 오기 전에 엠프레스 호텔에서 애프터눈티를 먹고 싶다고 위시리스트를 전했는데 조카들이 다른 곳에 하이티를 예약해 두었단다. 어차피 여행 중엔 영국 사람들처럼 여유롭게 애프터눈 티를 마시기 쉽지 않을 텐데 아름다운 장소 때문에 괜한 욕심을 부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에 호텔 커피숍 항구가 보이는 자리에서 앉아 커피와 시니그처 케익을 주문했다. 자리 탓인지 여행 중이라는 걸 잊을 만큼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뜻한 봄날 같은 날씨 덕분에 빅토리아 여행은 즐거웠다. 온화한 날씨로 은퇴 후 여유를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니 그 말에 수긍하게 되는, 좋은 날이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이런 날을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커피 잔에 비친 내게 말을 걸어보았다.
“라디오코리아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89년 2월 1일, LA의 한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라디오를 틀었는데 한국어가 나오고 한국 노래가 나왔던 거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한인들을 울렸던 목소리는 지금도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28년 동안, 그가 마이크를 놓았던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저 방송이 좋아 방송쟁이로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덧 라디오코리아는 그의 인생이 되어 있었다.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부회장(69). 그는 부인할 수 없는 LA의 라디오 스타다.
“죽을 때까지 하자던 장희는 울릉도로 가버리고, 글쎄 나만 이러고 있네요. 하하하.”
올해로 28주년을 맞은 라디오코리아와의 인연을 묻자 최영호 부회장은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랬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라디오코리아는 ‘이장희’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장희가 홀연히 떠났고 라디오코리아는 위기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후 10년, 라디오코리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동안 광역주파수를 가진 자체 라디오방송국도 마련했고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지역과 하와이까지 지국을 넓혔다. 최근엔 한국의 종편채널 ‘TV조선’과 손잡고 TV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영호 부회장의 공이 적지 않았다.
라디오코리아의 주인도 바뀌고, 건물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그는 바뀌지 않았다. ‘부회장’이라는 묵직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는 스튜디오 안 마이크 앞이다. 28년을 한결같이 들어온 목소리. 이제 사람들은 라디오코리아 하면 ‘최영호’를 떠올린다.
‘라디오코리아’ 너는 내 운명
“참 재미있는 것이 인생이에요. 미국에 오기 전 장희(가수 이장희)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동아방송 이라고. 장희랑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예요. 친구가 일하는 방송국에 가서 재미 삼아 원고도 써주고 음악도 고르며 놀곤 했어요. 그때 김병우 PD도 알게 됐고요. 나중에 세 사람이 모두 미국 LA에서 만난 거예요. 운명이었죠. 우리에게 라디오코리아는.”
1974년, 대학(연세대학교 물리학과)을 졸업하고 큰누이가 사는 LA에 와 있던 최 부회장은 김병우 PD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때가 1988년, 무역회사에 잘 다니고 있을 때였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어보자는 말에 최 부회장은 짜릿함을 느꼈다. 곧 이장희까지 합세,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라디오 방송을 하려면 주파수(스테이션)를 사야 하는데 값이 어마어마합니다. 때문에 같은 주파수를 여러 다른 커뮤니티가 시간별로 렌트해서 나눠 쓰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아시안 라디오 Am1300에서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방송을 하기로 계약을 했어요. 김병우 PD가 한국에 레코드판을 사러 간 사이 우리는 방송 인력을 뽑았어요. 프로를 원했기 때문에 필기시험, 실기시험 갖출 건 다 갖춰서 했습니다. 다섯 명을 뽑았는데 그들이 라디오코리아 공채 1기입니다. 그중엔 현재 라디오코리아 보도본부장을 맡고 있는 송봉후씨도 있었습니다. 그때 목소리가 상당히 좋았어요. 지금도 좋지만…(웃음).”
최 부회장은 1989년 2월 1일 12시를 잊을 수가 없다. 애국가가 울려 퍼진 후 송봉후 아나운서의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여기는 라디오코리아입니다!”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의 한인들은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이 방송이 진짜냐, 내일도 하느냐?”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장희가 맡은 음악 프로그램 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방송이 나가는 시간이면 방송국 앞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한바탕 난리가 나곤 했다. 그야말로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페이지였다.
잊을 수 없는 그날, 4월 29일
“라디오는 참 매력적인 매체입니다. 들으면서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요. 한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라디오를 들었죠. 봉제공장에서, 미장원에서, 방앗간에서, 운전을 하면서 모두가 라디오를 들었던 겁니다. 한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수백 명의 한국인 여직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려 미국인 감독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힘들었지만 낭만이 있던 시절이죠.”
라디오코리아는 한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함께 울고 웃었다.
가장 떠오르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최 부회장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1992년 4월 29일의 LA폭동 이야기를 꺼냈다.
“퇴근을 하려는데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싶더라고요. 직원들에게 퇴근하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사우스 센트럴 일대는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었다. 폭도들은 북쪽으로 밀고 올라와 코리아타운을 습격했다. 불길이 치솟아도 소방대는 오지 않았고 떼를 지어 가게 물건들을 약탈해가도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한인들은 라디오코리아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리쿼스토어인데 폭도들이 쳐들어온다.”
“지금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르고 있다.”
“웨스턴 길로는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다.”
최 부회장은 재빨리 특별 생방송을 결정하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폭도들의 위치를 알려주면 상인들은 미리 대비를 했고, 운전자들은 자동차에서 방송을 들으며 안전한 길로 갈 수 있었다.
“상상해보세요. 스마트폰도 GPS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눈앞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건물이 불타는 전시 상황과 같은 곳에서 라디오코리아 방송은 한인들에게 목숨 줄이었습니다. 경찰이 한인타운을 지켜주지 않자 한인들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죠.
1세들이 이민 와서 피땀으로 일궈낸 모든 것이 초토화될 상황이었습니다.”
폭동이 진압된 후에는 엄청난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급한 일이었다. 한인 공무원, 회계사, 변호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방송을 했다. 라디오코리아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가 똘똘 뭉치는 모습에 미국 주류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다.
“하루는 화이트하우스에서 전화가 왔어요. 백악관 말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하겠다고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죠. 현직 대통령이 로컬 언론사를 직접 찾는 일은 처음이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비서실장이 직접 한 말입니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제 개인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어요.”
야구광, 다저스를 만나다
최영호 부회장은 유명한 야구광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후 다저스의 팬이 되었고 특히 ‘다저스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빈 스컬리 캐스터의 중계를 듣는 것은 그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라디오코리아를 개국한 이듬해인 1990년, 최 부회장은 당시 LA 다저스의 구단주 피터 오말리를 찾아갔다. 거두절미하고 그가 던진 말은 “라디오 중계 좀 합시다!”였다고.
“한인들이 다저스 중계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싶었습니다. 야구 중계를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재미있었던 것은 오말리 구단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예스’를 한 거였어요. 당시 메이저리그 중계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렇게 세 가지 언어로만 했는데 한국어가 네 번째가 된 겁니다. 그해 9월 다저스와 신시내티와의 경기 중계를 하러 다저스구장에 갔지요. 그때의 감격이란… 그날 경기 녹음테이프는 뉴욕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역사적인 날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 중계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최 부회장의 중계는 재미를 더했다. 경기 상황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뒷이야기 등 미국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담긴 그의 중계는 한인 다저스 팬들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했다. 다저스 구단으로서도 대만족이었다.
“다저스 구단 측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팀에 한국 선수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외국 선수를 기용하는 데 꽤 적극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도 쉬웠죠. 4년 뒤인 1994년, 마침내 박찬호 선수가 LA에 오게 되었죠.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2년 동안 라디오코리아는 전 경기를 중계방송했어요. 당신을 응원하는 한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이후의 메이저리거 활약은 모두를 신바람 나게 했어요. 박찬호 선수와 지금 뛰고 있는 류현진 선수를 보고 있으면 저 혼자 느끼는 보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최 부회장은 지금도 다저스 경기에서 캐스터와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했던가. 야구 중계만이 주는 짜릿함이 있다. 방송 경력 28년에 다저스 경기 중계만 27년, 그는 단연코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며 무한애정을 드러낸다.
“간혹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힘들게 일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줍니다. 빈 스컬리는 67년간 다저스 중계를 하다가 88세에 은퇴했다고(웃음).”
“인호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어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최영호 부회장은 2013년 작고한 고 최인호 작가의 친동생이다. 세상없는 우애를 나누던 형이자 국민 작가를 떠나보낸 지 어느덧 4년.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최인호 작가는 유독 LA와 인연이 깊었다. 3남 3녀 중 누이들과 동생인 최 부회장이 197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와 있었던 까닭에 자주 찾아와 오래 머물다 가곤 했다. 참고로 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8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LA와 데스밸리 여행 중에 구상된 작품이다. 잡지 에 35년간 연재된 자전적 소설 을 비롯해 고인의 작품 곳곳에는 홀어머니와 그 밑에서 어렵게 자란 형제들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다.
“작가 아니랄까봐 까칠하고 예민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인호 형과 나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형의 글 쓰는 모습만 떠올라요. 자고 일어나 문틈으로 보면 역시나 글을 쓰고 있었고… 이사할 때마다 형의 습작들이 한 짐이었지만 어머니는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셨습니다.”
형 최인호와 아우 최영호만이 아는 신춘문예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형이 군대를 가면서 자신이 공책에 끄적거려놓은 게 있으니 원고지에 정필해 신문사에 보내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정성껏 써서 신문사에 보냈죠. 그렇게 당선된 작품이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견습환자’예요. 원고지 첫 장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정성을 들여 한자(漢字)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어령씨가 글씨가 너무 유치해서 읽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형과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어요.”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나누던 친구 같은 형이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최 부회장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 최인호는 자신이 범접할 수 없었던 ‘거인’이었다는 것을.
“정치, 경제, 문화, 예술계 전체가 애도를 표해왔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객들과 분향을 하고 흐느끼는 독자들을 보면서 형님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였는지, 한 시대를 품었던 예술가였는지 알게 됐어요. 아, 내 형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내가 더 존경해야 했던 분이었구나 회한이 밀려와 많이도 울었습니다.”
최 부회장은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서고의 벽 하나를 다 차지하는 적지 않은 양이다. 형이 하늘로 간 후로 지금까지 그는 그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읽고 있다. 라디오코리아 그의 사무실 책상에도 작가 최인호의 주옥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늘 곁에 두는데도 볼 때마다 마음이 철렁한다. 첫 장에는 어김없이 ‘영호에게’로 시작되는 형의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보물들이다.
“갈수록 무뎌져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갈수록 보고 싶어요. 큰누이를 잃고 많이 울던 나에게 형은 누이를 가슴에 묻으라 했어요. 인호 형도 그렇게 가슴에 묻어야겠죠. 그는 나에게 영웅입니다. 형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그 깊이가 더해져요. 형 없이 나 혼자 늙어가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또 많이 감사합니다. 형으로 인해, 형의 글들로 인해 깨닫는 것이 많아지니까요.”
지키고 싶은 이름, 방송인 최영호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TV보다는 인터넷을, 라디오보다는 MP3가 더 편한 세대다. 최영호 부회장은 방송은 변하지만 방송을 하는 정신은 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라디오코리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로컬 방송의 생명은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인 동포들이 라디오코리아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정말 소중한 겁니다. 라디오코리아는 미주 한인의 자본으로 만든 한인언론이에요. 진짜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이익을 대변하는 ‘우리 방송’인 거죠. 저는 한인 사회가 있는 한 라디오코리아도 존재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마이크 앞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스스로를 뼛속까지 방송인이라고 칭한다.
“나는 마이크 앞에 방송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감투도 싫고 명예도 귀찮습니다. 나이가 더 들어 목소리가 변하면 청취자가 싫어할까요?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친구 같은 분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분들을 위한 좋은 음악방송을 하고 싶어요. 깊은 밤에 함께 음악도 듣고 지난 얘기도 나누고요. 와, 이런 얘기 방송에서 해도 되나 싶은 것도 막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