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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가보고 죽겠다
- 는 7년 반 동안 전 세계 87개국 95,000km를 자전가로 달린 일본의 이시다 유스케가 쓴 책이다. 1969년 생으로 대기업에 잘 다니다가 뜻한 바 있어 1995년 회사를 퇴사하고 자전거 여행길에 나섰다. 원래 3년 계획으로 여행길에 나섰는데 여행의 재미에 빠져 2배 이상의 기간이 걸린 것이라고 했다. 걷는 것보다야 나았겠지만, 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혼자였다. 때로는 삭막한 사막 길을 혼자 자전거로 달려야 했고 주로 텐트를 치고 잤다. 강도를 만나 돈을 나 털리고 실의와 좌절에 빠진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에 갔다가 다시 출발 할 수도 있었으나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대로 앞만 보고 달린 것이다. 자전거 여행은 차로 여행하는 것과 다르게 자연을 바로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비행기로 후딱 가면 그 과정에 있는 것들은 그냥 지나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전거 여행은 좋은 곳이 있으면 즐기면서 다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혼자 여행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자전거도 둘만 되어도 속도도 차이 나고 의견도 차이가 생겨 신경 쓸 일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서로의 행선지가 달라 고집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혼자 가면 속도도 알아서 하고 다음 행선지도 순전히 혼자 결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행 전 혈뇨가 나오는 신장병을 앓던 사람이다. 출발 전 많이 걱정했으나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건강하게 일본으로 돌아갔다. 물론 여행 중간에 아픈 적도 있었으나 여행은 긴장하게 만들고 자전거 여행은 다리를 튼튼하게 한 덕분에 큰 병 없이 그 긴 여정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혼자 자전거로 여행하는 일본 청년들이 많다는 것이다.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도 그 사람들끼리 또 마주치고 또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저자가 책 제목을 라고 쓴 것에 유의하고 책을 읽었다.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를 다 둘러보고 과테말라의 티칼 신전을 가장 인상에 남는 여행지로 꼽았다. 잘 알려진 마추픽추보다 더 인상적이라고 했다. 캐나다의 자연도 좋았고 노르웨이의 해안도 좋았다고 했다. 자연도 중요하지만 역시 여행의 재미는 사람이다. 순진한 아프리카의 소년들, 남미의 촌부들을 보며 인간의 세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본다는 것이다. 필자의 여생에서도 여행은 중요한 버킷리스트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자전거 여행은 자전거 안장에 사타구니가 아파서 오래 못 탄다. 걷자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위험하다. 싼 호텔과 기차를 타면서 하는 배낭여행을 하자니 좀 구질구질하게 생각된다. 그러니 비행기 타고 다니는 수밖에 없다. 아직 안 가 본 나라도 많지만, 저자와 달리 아프리카, 남미는 그리 가보고 싶지는 않은 곳이다. 다리가 성할 때 부지런히 다녀야겠다.
- 2017-05-3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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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세 엄마와 특별한 동행
- 필자의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신다. 그런 엄마 덕에 여기저기 많이도 다녔다.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엄마는 참 바빴다. 네 명의 아이들에게 예쁜 옷 찾아 입히고 머리 빗기면서 3단 찬합 가득 김밥을 싸야 했고 그 와중에 화장도 해야 했으니 출발도 하기 전에 엄마 목소리가 커지기 일쑤였다. 4형제 중 누구 하나가 엄마 주먹맛을 본 후에야 우리는 집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엄마는 현관 앞에서 뒷짐 진 채 서 있던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아버지는 가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들 데리고 힘든데 왜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냐고 물으니 자식들이 넓은 세상 많이 보길 원했다고 하셨다. “수덕사에선 너 때문에 살아났어.” 아버지가 이야기를 꺼내셨다. 필자가 일곱 살 무렵이었는데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 머리가 아프다고 우는 바람에 가족들이 연탄가스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열 번도 더 들었다. 여행 중에 일어난 가장 큰 사고여서 여행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단골로 나왔다. 자연농원에서 찍은 사진을 앞에 놓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도망치듯이 한국을 떠난 이야기가 펼쳐졌다. 주차장을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을 보니 그 당시 우울한 집안 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우리는 누가 더 못생기게 나왔는지를 보며 깔깔댔다. 식탁에 앉아 여행에 관한 이야기보따리가 한 번 풀리면 수다가 멈출 줄 몰랐다. 엄마와 단둘이 일본 여행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몇 달 전에 봤을 때보다 등이 굽고, 키가 한 뼘이나 작아져 있었다. 80세가 넘은 티가 확 났다. 관광버스를 타고 남해에 다녀오셨단다. 엄마는 오랜만에 버스 타는 일이 얼마나 좋았던지 도착해서도 버스에서 내리기 싫었다고 했다. 버스 타는 게 그렇게 좋냐고 퉁명스럽게 내뱉곤 미안한 마음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랑 둘이 여행 갈래?” “좋~지.” 엄마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혼자 인천공항까지 올 수 있냐고 물으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냐며 나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일본은 몇 번 다녀와 별로라는 엄마는 미야자키를 맘에 들어 했다. 태평양 푸른 바다가 인상적인 우도신궁에서 소원을 빌고, 시원한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노천 온천도 즐겼다. 회전초밥집에 가서 싱싱한 초밥을 먹은 뒤에는 동물원 구경을 했다. 아주 가까이서 기린과 눈이 마주친 엄마는 깜짝 놀라 뒷걸음치더니 쪼그리고 앉아서 비둘기 모이를 주는 재미에 푹 빠졌다.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저녁이 되자 가방에서 주섬주섬 초록색 표지의 낡은 수첩을 꺼냈다. 엄마가 메모를 열심히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행 수첩이 따로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뭐라고 쓸 건데?” 엄마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별거 없어. 며칠에 뭘 했고 뭘 먹었나 정도 쓰는 거야. 쓸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나중에 읽어보면 정말 재밌어.” 엄마는 수첩에 ‘산본 광장동 공항버스 정류장 오전 6시, 일본 공항 11시 30분 도착’, ‘쇼핑몰 구경하고 7시 회전초밥 저녁식사’와 같은 사소한 일정들을 적어 내려갔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여행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는 엄마의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중국 여행, 싱가포르 여행, 캐나다 여행, 제주 여행, 울릉도 여행. 수첩엔 여행의 기록이 끝이 없었다. 대부분 아버지와 둘이서 한 여행이었다. 지금은 걷는 게 편치 않아 엄마와 함께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건강이 안타까웠다. 그 많은 여행 중에 필자가 동행한 여행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해서 내 자식, 내 식구 돌보느라 엄마, 아버지를 잊고 살았던 모양이다. “엄마, 언제부터 이런 걸 쓰고 있었던 거야? 너무 멋진걸.” 필자의 칭찬에 엄마는 신이 났다. 수첩에 기록해놓은 여행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밴쿠버에 사는 큰딸 집에서 보낸 두 달 동안의 기록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 집에서 먹은 삼시 세끼, 교회 가서 헌금하라고 사위가 쥐어준 빳빳한 달러, 주변 지인들의 식사 초대, 블루베리 따러 갔던 일 등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엄마는 딸이 생각날 때마다 그 수첩을 펼쳐보았다고 말했다.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 코끝이 시큰해졌다. 필자는 부모님과 자주 만나 식사를 하고 간단한 드라이브를 즐기긴 했지만, 잠깐 만나고 헤어졌기 때문에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행 와서 엄마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엄마를 참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느라 관광은 뒷전이 되어버렸지만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엄마와의 여행은, 여행이 목적이기보다는 함께하는 시간이 곧 여행이란 걸 깨닫게 해주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행복의 최고 활동은 여행이라 하였다. 사람은 뭔가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데, 여행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새 옷을 산 얘기는 몇 년째 할 수 없지만, 몇 년 전 다녀온 여행에 대해서는 지금 이야기해도 즐겁다. 새로운 곳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같이 간 사람들과 말하고 노는 것도 즐겁지만, 여행은 다녀와서도 말할 거리가 있기 때문에 행복감이 높아진다. 행복하지 않은 인생은 재미없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을 텐데 여행을 통해 행복감을 높일 수 있다면 당장 가방을 싸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가족이라도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느라 서로를 돌아볼 새가 없다. 한집에 살아도 한상에 둘러 밥 먹는 일이 뜸해지니 별 할 말도 없다. 이럴 때 가족여행을 다녀온다면,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즐기는 재미는 물론이려니와 다녀와서도 식탁 위 대화가 풍성해질 것이다. 엄마가 쾌활하고 건강하게 사는 건 여행을 즐기기 때문인 것 같다. 필자는 엄마가 건강한 심장과 다리로 여행하고 살면서 행복한 감정을 늘 간직할 수 있기를 빈다. 여기저기 꽃이 만발한 봄날이다. 가고 싶은 데 있으면 얘기해보라는 필자의 말에 엄마는 미리 준비라도 해둔 듯 “백두대간 협곡열차가 참 멋지던데” 하신다.
- 2017-05-1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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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여자: 피의 복수 (Even Lambs Have Teeth)
- 캐나다, 프랑스 영화로 테리 마일즈 감독 작품이다. 주연에 늘씬한 금발 미녀들인 커스틴 프라우트(슬론 역), 티에라 스코브예(케이티 역) 등이 나온다. 원제가 ‘어린 양도 이빨이 있다’인 것처럼 생쥐도 구석에 몰리면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든다는 뜻이다. 작품성은 얘기할 것이 없지만 오락성은 풍부한 영화이다. 한창 미모를 자랑할 때인 슬론과 케이티는 금발의 미녀들이다. 둘이 친구 사이로 한주일간의 뉴욕 여행을 위하여 한 달 간 시골마을의 유기농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떠난다. 동네근처 카페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픽업트럭을 운전하는 두 청년이 태워다 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두 여인은 차에 탔다가 두 청년의 집까지 가게 된다. 나이든 어머니가 들어 와 차라도 마시라고 권하고 둘은 약이 든 생크림 파이를 먹고 기절한다. 깨고 보니 숲속의 컨테이너 박스이고 각각 손목에 수갑과 쇠줄이 채워져 있다. 둘은 이집 형제와 동네 남자들에게 강간당하고 죽을 날만 기다린다. 한편 이 둘의 안전을 염려한 삼촌은 FBI요원으로 문자 말미에 쓰는 암호가 약속과 다르자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동네 보안관도 한 통속이었다. 오히려 삼촌도 보안관에게 묶이는 신세가 된다. 두 여인은 살해 직전에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들을 피의 복수를 하자는 것이다. 사이코 패스 가족을 상대로 하나 하나 복수한다. 철물점에 들러 도끼, 망치, 대못, 로프 등을 사서 복수에 나선다. 최초로 약을 먹여 납치한 어머니와 형제들은 같은 방법으로 약을 먹여 실신 시킨 후 로프로 묶어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한 명 한 명 죽인다. 뒷마무리는 그 중 한명이 권총으로 집단 자살 한 것처럼 꾸미고 돌아온다. 그리고 태연히 일상으로 돌아간다. 복수는 대리 만족을 준다. 마땅히 죽어야 할 사이코 패스들을 통쾌하게 죽이면서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참혹하게 죽일수록 대리만족이 커진다. 로프에 묶여 꼼짝 못하게 되자 반응은 돈으로 흥정해 온다. 돈을 줄 테니 용서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돈이고 복수는 복수이다. 풀려나면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저주를 퍼붓지만, 거기서 막 바로 응징을 받으면서 끝난다. 우리말에도 ‘말만한 처녀들’이라는 말이 있다. 짧은 반바지 차림의 두 젊은 여성이 한적한 시골마을에 일하러 간다는 것부터가 위험한 일이다. 집을 떠나면 일탈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픽업트럭을 태워주겠다는 남자들을 따라 덥석 차에 올라타는 행위도 위험하다. 도발적인 옷차림부터가 위험을 부른다. 그러나 ‘호랑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거나 ‘하늘이 무너져도 살 길이 있다’는 말은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연약하게 자란 우리 여성들은 이런 일을 당하면 스스로 자지러질 소지가 많지만, 독립심 강하게 자란 미국 여성들은 종종 남자들을 상대로 한 몫 제대로 한다. 땅이 넓고 인구밀도가 낮은 미국이나 호주 등지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비슷한 영화도 많다.
- 2017-03-1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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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콩 주택, 노후 주거로 괜찮다
- 나이 들어가면서 중요한 삶의 요소 중 하나가 주거다. 어디에서 어떤 형태의 집에서 이웃과는 어떻게 지낼 것인지가 주요 관심사다. 최근에는 주택의 형태 중 하나로 땅콩 주택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땅콩 주택은 하나의 필지에 닮은꼴의 주택 두 채가 들어서 있는 집을 말한다. 대문도 하나이고, 마당도 하나이지만 외부에서 보면 한 채의 집처럼 보인다. 땅콩 주택은 미국에서 시작된 친환경적 주택의 일종으로 듀플렉스홈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그 모양새가 마치 땅콩을 닮았다 하여 ‘땅콩 주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필자는 현재 땅콩 주택에서 살고 있다. 사람은 삶의 편리성과 경제적 가치를 자신도 모르게 따지며 산다. 개미가 가장 짧은 길을 찾아서 행군하듯 말이다. 주거는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의식주’라 했다. 입고, 먹고, 사는 집이 삶의 필수요소인 것이다. 그런데 의식주의 형태는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왔다. 땅콩 주택도 이런 변화 속에서 등장한 새로운 주거 트렌트다. 현재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유행하고 있으며 목조 주택으로서 친환경적이면서도 건축시간과 건축비가 절감되고 단열이 잘되는 게 매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건축가가 이 주택의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짓기 시작했다. 적은 건축비로 지은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어 하는 세대를 겨냥한 것이다. 2011년부터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땅콩 주택은 현재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특히 아토피 피부질환을 앓고 있는 자녀를 둔 젊은 세대들이 선호한다. 인간은 한 줌의 흙으로 빚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흙을 가까이 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주거에서도 흙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을 바라게 된다. 하지만 도심의 주거는 온통 콘크리트에 둘러싸여 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 포장이 아닌 길이 없을 정도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는 매우 삭막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오죽하면 콘크리트 감옥 속에서 산다는 말도 있다. 편리성과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환경이 가져온 피폐다. 주말이면 도심 주변의 온 산들이 인산인해가 되는 이유다. 도시인들은 유난히 흙을 그리워한다. 인간 본성의 발로라 할 수 있다. 특히 나이가 든 사람들은 더욱 흙을 그리워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거나 남은 인생만큼은 전원주택에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건축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땅콩 주택은 건축비를 적게 들여서 지을 수 있다. 한 필지 위에 두 채의 집이 들어서게 되는 형태여서 건축비가 적게 든다. 대문이나 주차장도 하나이고, 정원도 하나라서 넓다. 이렇게 지으니 공사기간도 그만큼 단축된다. 또한 두 집이 한 건물에 있어 이웃끼리 정을 나누며 살 수 있다. 이웃사촌이 자동으로 생기는 셈이다. 집을 비울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여행을 간다든지 애완견을 키울 경우 옆집에 부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 안에 가스 불을 켜놓고 나왔는지 헷갈려서 걱정이 될 경우에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도 대처할 수 있다. 옆집에서 봐주면 해결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편리함과 장점들도 많지만 유의해야 할 점들도 많다. 땅콩 주택에 살 때는 이웃집과의 관계가 좋아야 한다. 한 필지 위에 하나의 건물로 지어지기 때문에 소유권도 공동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 소유권 행사에 제약이 따를 수 있다. 집을 팔 때나 수리할 경우에도 이웃집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최근에는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각각의 소유권으로 집을 짓고 있다. 최근의 모든 주택이 실수용의 개념으로 바뀌고 있지만, 땅콩 주택은 특히 부동산 투자의 개념이 아닌 주거의 질을 높이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낯선 사람이 아닌 가족이나 친인척 또는 절친한 친구 등과 같이 평소 편안하게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하다.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은 양쪽 집 부인의 성격이나 삶의 가치관 등이 서로 잘 어울려야 한다. 서로 생각하는 게 너무 다르면 가까운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삶이 피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땅콩 주택, 노후 주거의 형태로 생각해 볼만하다.
- 2016-11-0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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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가 막힌 나만의 아지트 대공개] 호숫가 작은 나의 다락방
- 강원 속초시 하면 누구나 바다와 산을 떠올린다. 그러나 필자는 속초시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조용한 호수다. 그곳에 나의 작은 아지트가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무작정 속초시로 여행 가서 영랑호를 찾았었다. 천천히 한적한 호숫가를 걷는데 예쁜 집 두 채가 눈에 들어왔다. 짙은 회색 지붕의 모던하면서 아담한 집 두 채가 나란히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가정집인 줄 알고 집을 구경하는데 의외로 1층에 커피숍이 있었다. 손님이 1명도 없는 한적한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수하고 사람 좋게 생긴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바로 옆 비슷한 집 한 채는 게스트하우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처에 커피숍이나 다른 숙소도 전혀 없었고, 집 자체가 상업적인 장소라는 느낌도 전혀 없어 게스트하우스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 바로 여기야 ! 집주인 부부는 캐나다에 이민했었는데 속초시에 놀러 왔다가 영랑호에 반해서 정착하게 되었단다. 젊은 집주인 부부에게 집 구경을 부탁하였더니 처음 본 낯선 손님에게 흔쾌히 여기저기 구석구석 설명해주고 안내해 주었다. 집 한 채는 아내가 1층에서 직접 커피를 볶고 내리는 과정을 모두 홀로 하고 그 옆의 집 한 채는 남편이 홀로 운영하고 관리했다. 이렇게 모든 걸 부부가 손수 해나가는 소박하고 아담한 게스트하우스였다. 집안은 주인이 화가여서 곳곳에 직접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고 작은 소품 하나 마치 내 집 같은 편안함을 줬다. 방마다 호수 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바로 3층 다락방. 하늘을 볼 수 있게 창을 내어 밤에 누우면 별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집 구경을 하는 내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제부터 이곳이 아지트야. 그 이후 필자는 시간 나는 대로 그곳을 찾았다.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필자는 그곳에서 조용한 호숫가를 천천히 걷거나 때론 자전거로 호숫가를 한 바퀴 돌곤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서 창을 통해 호수 너머 지는 노을 보는 것도 좋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작은 해변으로 가서 일출을 보며 아침 산책을 했다. 할 일 없이 다락방에서 뒹굴뒹굴할 때도 있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주인이 키우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책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지내다 보면 내 마음의 모든 독소가 다 빠져나가는 듯하다. ◇아지트를 잃을 위기 처음 그곳을 알게 되었을 때 만 해도 여행객은 거의 없고 간혹 산책하는 사람도 다 그 지역 사람뿐 이었다. 그랬던 곳이 갈 때마다 조금씩 복잡해지고 있다. 호수 주변에 카페도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해마다 한적한 호숫가 분위기가 사라져갔다. 조용한 아지트를 잃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필자로선 몹시 탐탁지 않은 변화다. 그러나 필자는 개의치 않고 그곳을 찾았다. 예약 같은 건 하지도 않는 채 말이다. 방이 없으면 커피숍에서 조용히 커피 한잔하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책을 읽고 호숫가를 바라보고 머물다 와도 괜찮았다. 실제로 몇 번은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갔다가 그냥 커피만 마시고 머물다 온 적도 몇 번 있다. 아직은 주말만 피한다면 여전히 유유자적 아지트가 되어 주는 곳이다.
- 2016-09-0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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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정리수납 컨설팅 업체 ‘덤인’ 정경자 대표- “물건에 애정 그만 쏟고 좀 버리세요!”
- “오늘만 해도 태안군 안면도, 양평·가평을 갔다가 내일은 대구로 갑니다.” 여유가 없어 보인다는 질문을 건네자 덤인 정경자(鄭京子·50) 대표의 카랑카랑 애교 섞였던 목소리가 풀이 죽으며 답한다. 바빠서 달리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다. 집안일로만 여겼던 ‘정리하고 수납하는 일’을 전문 분야로 끌어올린 주인공 정경자 대표.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스며들 듯 부드러운 방법으로 시장을 넓혀갔다. 쇄도하는 강의 요청과 방송 출연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 취재가 있던 날에는 한 아파트의 광고 모델로 발탁돼 촬영을 마쳤다. 그렇다 쳐도 여전히 생소한 정리수납 컨설팅. 우리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왜 필요한지 들어봤다. “저를 납득시켜 주세요, 정리수납에 왜 돈을 쓰죠?” 정경자 대표가 정리수납 컨설턴트를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캐나다 주재 한국 물류회사의 법인 대표로 일하고 있었다. “저는 캐나다에서 정리수납 전문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미 캐나다나 유럽에는 20~30년 전부터 있던 직업이더라고요. 자기 물건을 자기가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리해주기도 하는구나. 막연하게 나중에 한국에 가면 이걸 꼭 직업으로 만들어야지 했습니다.” 막연하게 생각만 해보겠다는 것도 잠시. 회사에서 캐나다 법인의 철수 결정이 갑작스럽게 났고 2002년 한 달 만에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정경자 대표는 회사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물어보는 사람마다 직업으로는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어요. 어찌됐건 아무리 아이템이 좋아도 아직 우리나라에선 인식이 안 돼 있어 사업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바로 정리수납으로 시작하지 않았어요.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를 교육하고 양성해서 파견하는 일을 했어요.” 당시 맞벌이 부부가 많아져 아이를 자기가 키우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던 때였다. 사업을 하면서도 정리수납에 관한 준비를 꾸준히 했다. “5년 정도 준비 끝에 정리수납 교재와 매뉴얼을 만들고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 교육을 할 때 가르쳤어요. 1대 1서비스를 잘 하기 위해서 정리수납교육을 한 거죠. 그런데 베이비시터가 아이 옷을 잘 정리하니까 고객들 반응이 좋았습니다. 가정관리사도 옷을 세탁하고 개는 것을 달리해주니까 고객 만족도도 좋고 일 하는 사람들 또한 좋아했습니다.” 2010년부터 방송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다 보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저런 거 배웠으면’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드디어 2011년 11월, 한국정리수납협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정리수납 컨설팅 활동을 시작했다. “협회를 만들고 3개월 정도 됐을 때 여성능력개발원에서 여성유망직종으로 정리수납 관리사를 선정했더라고요. 아이템 자체를 보고 한 것 같아요. 경력단절 여성 일자리 창출에서부터, 2015년에는 신직업지원 육성정책에도 정리수납이 들어갔습니다. 여성가족부, 노동부 등 정부기관이 육성한다고 하니 이와 관련한 일자리가 많이 늘어났어요. 사람들 관심도 높아졌고요. 저희만 봐도 정리수납 컨설팅을 교육받고 있는 회원이 전국에 3만9000명 정도입니다.” 정리수납, 한국 사람에게 절실하다 정리수납에 있어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심어지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 교육에 정리수납을 접목해 이용자들에게 미래 사업을 노출시켰다. “저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외국에서 이것을 매우 당연하다고 봤고, 우리나라에서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사람은 어렵게 살아온 시절이 있기 때문에 돈만 생기면 집이랑 차 넓히고 물건 사고 그래요. 자신이 어렸을 때 옷을 잘 사 입지 못해서 아이한테만큼은 옷을 잘 입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과 장난감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제 한계가 왔고, 물건을 버릴 때도 돈을 지불하는 사회가 된 거죠.” 시니어, 정리습관을 기르자 정경자 대표의 말에 의하면 시니어들의 정리 습관은 참으로 심각하다. “지금 제가 잘 버리는지 엄마가 잘 버리는지를 비교하면 우리 엄마가 더 잘 못 버려요. 나이가 들수록 더 못 버리게 돼요.” 시니어 세대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정경자 대표는 ‘애정결핍’의 문제라고 했다. 젊었을 때는 관심 가질 것도, 행동할 것도 많아서 물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이거는 어디서 산 거고, 누가 준 선물이며, 의미를 사람이나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물건에서 찾으려 한다고. “나이가 들면 자식이 분가하거나 배우자가 죽을 수도 있죠. 결국 자기 혼자 남기도 해요. 자식들과 자주 만나 생활한다면 선물해준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은 혹시 온다 해도 아주 잠깐만 있다 가죠. 그러니 이거는 큰아이가 사준 거였고, 이건 누가 사준 거고 말입니다.” 버리는 습관과 정리하는 습관은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 한다. “80세에 갑자기 잘 버릴 수 있느냐?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가 85세신데 제가 뭘 버리라고 말하지 않아요. 어머니 집에 가서 저는 정리 안 해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있기 때문에 제가 하루아침에 바꿔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상처가 될 수 있어서 삶을 이해하려 하지 바꾸려고 들지는 않아요.” 시니어 고객에게 하는 조언은? “제가 시니어를 만났을 때 하는 얘기가 딱 그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죽었을 때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죽는 순간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다 버려지게 된다. 돈 혹은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니면 다 버려진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물건을 정리하는 자식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왜 엄마는 아직까지 이걸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냐고 합니다. 좋은 얘기 안 하죠. 물건을 보며 엄마를 추억하지 않아요. 내가 살아 있을 때 쓰레기들을 남에게 버리게 하는 수고로움은 덜어주고 가야죠. 그게 시니어가 돼가는 것이고 내 삶을 정리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정경자 대표는 시니어에게 정리수납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주방 싱크대 상부장 맨 위에 의자를 받치고 올라갔다가 떨어져 허리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면 기력이 쇠하고 점점 더 빨리 늙는 것을 봐왔다는 것. “왜 거길 올라가는 거죠? 10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하면서요. 본인이 그렇게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드려야 합니다.” 한국의 여성 CEO, 일하는 여성을 말하다 사업을 시작한 지 이제 5년째. 여성 CEO로서의 고충을 물어보자 고충보다는 이 분야 선구자로서 할 일이 태산이라고 했다. 벤치마킹할 곳도 없고, 슬로건 교재도 만들어야 해서 바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라고. “그리고 좋은 건 정리수납은 여자들의 섬세함이 필요하잖아요. 남자들이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도 장점이라고나 할까요(웃음)?” 경력단절 여성들과 작업에 대해서도 흥미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전업주부들이 사회적응을 잘 못한다고들 하죠. 그런데 정리수납을 가르치고 기본 원칙을 알려줬더니 이만큼의 전문가가 없는 거예요. 생소한 분야가 아닌 거죠. 자기 삶의 가치가 바뀌었죠. 정리를 못하는 사람에서 정리 전문가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자신감이 생기니까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도 내고요.” 바쁘게 사는 그녀, 복지관 예쁜이 할머니 꿈꾸다 올해 딱 50세가 된 정경자 대표. 그런데 누가 봐도 50대로 볼 수 없는 그녀는 지금 일이 아니면 뭘 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일이 우선 많아요. 결혼도 연애도 시간이 없어서 못 했거든요. 20대 때부터 세계여행도 하고 뭐든 다해봐서 혹시 시간이 좀 생긴다면 운동을 해야겠어요. 얼마 전에 면역력 저하로 세균이 번식을 해서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반성을 많이 했죠. 그런데 퇴원하는 날 방송사 가서 10시간 촬영했어요. 책 읽는 것도 좋아했는데 도무지 시간이 안 나요.” 그리고 그녀에게는 원대한 꿈이 하나 있다. 복지관에서 인기 있는 예쁜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돈을 많이 벌어서 기회가 되면 지금 우리 직원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직원 전용 실버타운을 짓고 싶어요. 이분들이 나이 들어서 정리수납 강의도 하셔서 강사료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100만원 정도의 수입만 있으면 시니어가 되어서도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여기서 나이 먹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리고 90세가 됐을 때 목표는 제가 다니는 복지관에서 가장 예쁜 할머니가 돼 있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 내가 가장 인기 있는 할머니가 된다면 무척 바쁠 것 같아요. 밥 사준다는 할아버지들도 많을 거 같고요. 내가 아파 복지관 못 나가면 우리 가족이 나한테 전화해 주는 것이 아니라 복지관에 있는 분들이 어디 아프냐고 죽이라도 사가겠다고 하겠죠? 늘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거죠.”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 꿈꾸는 정경자 대표의 멋진 미래가 궁금해진다. 무엇보다 복지관 퀸카 할머니가 꼭 되길 바란다.
- 2016-08-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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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장지에서 생긴 에피소드
- 30대 초반 중공업 부문 회사의 플랜트 화공설비 부문 해외영업 팀장으로 근무하던 1980년대 초의 일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조선과 제철은 겨우 기초를 마련하였고 자동차도 현대 포니를 시작으로 국산 소형차가 출고되어 인기리에 주문받던 시기였다. 회사에서는 새로이 중화학 분야의 플랜트를 일괄수주 방식이나 주요설비의 부문별 주문방식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려 하였으나 아쉽게도 당시 우리에게는 플랜트 엔지니어링에 대한 기술과 경험이 거의 없어 국제 경쟁 입찰에 참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회사 경영진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유명 엔지니어링 회사와 접촉하여, 우선 우리 회사의 생산제조 기술과 경쟁력, 그리고 상세 설계 능력 등을 홍보하여 그들 하청 형태로 납품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나아가 기본 설계와 엔지니어링에 경험이 많은 그들의 협조 하에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공동으로 국제 입찰에 참여하여 그들의 기술도 습득하고 동시에 공사에도 참여하는 방안도 추진키로 하였다. 필자와 화공설비설계부장, 그리고 뉴욕주립대학교 공대 학장을 역임한 미국인 고문(어드바이저)으로 기본추진킴이 구성되었고 필요에 따라 현지 지사장과 본사 임원진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우선 일본지역으로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등 10여 개의 유명 엔지니어링 업체와 약 보름 정도의 일정으로사전에 회의 일정을 마련하여 개별적으로 방문하였다. 놀라웠던 것은 당시 상대 회사의 참석자가 상당한 나이와 직급의 고위급 인사들이었으나 무척 긍정적이어서 우리의 거의 다 받아들여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는 점이다. 특히 회의 후에는 출입문까지 배웅하며 상대적으로 젊은 우리에게 끝까지 몇 번이고 응대 인사를 하여 처음에는 무척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2차 미팅은 미국과 캐나다 지역으로 면적도 넓고 회사도 많아 약 한 달 반 정도의 일정을 갖고 회사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회의 일정은 현지 지사의 도움으로 주로 필자가 결정하였는데 두 번 세 번 방문하기가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들 것 같아 한 번으로 정했는데 일정이 빠듯하니 중반 이후부터는 상당한 피곤함을 느꼈다. 출장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멸치, 김, 고추장과 라면 등을 준비해 갔는데 호텔 방을 함께 사용했던 설계부장과 커피용 더운물을 요청하여 가끔 몰래 라면도 끓여 먹으면서 지냈다. 가져갔던 음식물도 떨어지고 넉넉하게 준비했던 양말과 내의도 부족하여 저녁 늦게 돌아와서 빨아서 말려 입기도 하였다. 주로 주 중에 회사들과 회의하고 주말에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도록 일정을 만들었기 때문에 쇼핑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겨우 휴일에 시간이 있어서 내의를 사러 미국 디트로이트인지 피츠버그인지에 있는 현지 백화점에 가서 내의를 몇 장인가 사고 50달러 짜리 현금을 냈더니 점원이 위조지폐인지 확인을 하러 계산대로 가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별로 큰 액수도 아닌데 그곳에서는 주로 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현금 50달러는 큰돈이라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카드를 별로 사용하지 않아서 해외 출장을 갈 때는 매번 미화 100달러 짜리 여행자 수표나 현금, 그리고 방문국가의 현지 화폐를 준비해 가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휴스턴과 뉴욕에서는 현지 주재원의 안내로 라이브 쇼를 구경했는데 규모도 엄청나게 크고, 성행위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무척 놀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밖에 댈러스 등 텍사스 지역은 같은 영어지만 끊지를 않고 계속이어서 응얼응얼 발음하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대도시에는 대부분 한국음식점이 있어서 가끔 한식을 즐길 수 있었으며 한국과 비교하여 값도 비싸지 않으면서 맛도 좋은 집이 많았다. 특히 미국 동부해안 지역에 있는 도시의 회사들과 회의 후 식사 때에 바다가재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 초대받은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 그렇게 크고 맛있는 바다가재 요리는 그후 별로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으로 돌아와 방문했던 회사들과의 회의 시 상담했던 사항들에 대한 후속 조치들을 약 한 달 여에 걸쳐 처리한 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지역 엔지니어링 업체 방문 계획을 세웠다. 유럽 지역 업체는 스냄프로게티 등 이탈리아 회사부터 상담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직항노선이 없어 홍콩, 싱가포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로마공항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기본 팀원인 3명이 함께했는데 당시 로마에는 우리 회사의 지사가 없어 공항에서 우리가 방문할 회사의 주소를 공항 안내카운터의 직원에게 알려주고 방문할 회사 근처의 호텔로 어떻게 가면 좋을지 조언을 부탁했다. 그 직원이 운전기사를 한 명 소개하면서 도움을 받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해주었다. 운전기사는 친절하고 싹싹하며 영어는 잘 못 하지만 무척 명랑하고 낙천적이였다. 운전하면서도 연신 휘파람으로 노래하곤 했다. 그는 약 1시간 반 정도 달려서 원형경기장 옆의 호텔로 친절하게 인도해 주었으며 내일 아침 다시 그가 와서 우리를 회사로 안내하기로 약속하였다. 택시 요금이 상당히 많이 나왔으나 주행거리가 많아 그랬구나 하고 생각했다. 호텔이 약 150년 전에 지어져서 거의 문화 유적지 같은 그런 형태였으며 엘리베이터는 없고 도르래 같은 리프트의 쇠사슬을 손으로 잡아당겨서 위아래 층을 오르내리는 형태였다. 방을 배정받은 후에 제일 먼저 약속한 엔니지니어링 회사에 전화하여 다음 날 회담 시간 등을 다시 확인하였다. 우리 호텔 이름과 주소를 물어서 알려주니 자기 회사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단다. 약간 황당하였으나 다음 날 아침에 운전기사와 약속한 사항이 있어서 그대로 이용한 택시를 타기로 하였다. 조금 후에 욕실에서 샤워하려고 하니 온수가 나오지 않아 호텔카운터로 전화를 하니 샤워를 한다면 자기들에게 미리 전화하면 온수를 가져다준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많은 나라 많은 호텔을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행인 점은 호텔 식당에 직접 갓 구운 빵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어 식사 시 맛 좋은 빵과 신선한 치즈와 우유, 채소 등을 맘껏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웃기는 일은 다음 날 운전기사가 우리를 회사로 데려다 주는 데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려서 우리가 공항에서 회사 주소를 주면서 그 주소 근방의 호텔로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따지자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척하면서 능청을 떨어 그냥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그 회사가 자기들이 자주 거래하는 택시를 불러주어서 타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요금이 타고 갈 때와 비교하여 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 웃고 친절하게 하면서 여러 가지로 바가지를 씌운 것 이였다. 로마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주말에 거리를 산책하는 데 젊은 아가씨들이 일광욕을 위해서인지 상체를 완전히 벗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 안 보는 척하며 슬쩍슬쩍 훔쳐보기도 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먼저 파리에서 일정을 시작하기로 하였는데 본사의 설계담당 상무가 한 분 합류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분이 도착하자마자 사고가 발생했다. 호텔 안내대에서 입실 등록을 하는 매우 짧은 순간 서류가방을 훔쳐가 버려서 여권과 돈 등을 모두 잃어버렸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은 서울이 아니라 파리였다. 후에 대사관에서 서류 재발급 받고 주변에서 돈 빌리고 해서 겨우 출장을 마칠 수 있었다. 한 가지 웃기는 일은 우리 일행이 네 사람인데 한 택시를 이용해서 이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운전기사 옆에는 보통 커다란 개를 태우고 다니며 뒷좌석에만 손님을 태우는 것이다. 그밖에도 우리의 미국인 일행이 영어로 무엇을 물어보면 자기는 영어 잘못 한다고 상당히 유창한 영어로 대꾸하며 상대를 잘 안 해주는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 백화점 등에서 쇼핑할 때는 어떻게든지 영어를 잘하는 젊은 여자를 데려오는 것이다. 이때 내가 아내를 위해서 멋진 가죽 치마와 점퍼를 사다 주었는데 옷은 사다 줄 때마다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해서 나중에는 포기하고 돈을 갖다 주니 좋아해서 그때부터 아내가 돈을 더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필자가 독일어 전공이라는 점이 빛을 발했다. 밤에 호프집 등 음식점 갈 때 꼭 필자와 동행을 하려고 해서 약간 우쭐댈 수가 있었으며, 영국에서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많았는데 보행자가 있으면 차들이 반드시 정차해서 보행자가 완전히 지나간 것을 확인하고 운행하여 당시 우리와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엔지니어링 회사 방문 상담 이후 점차 엔지니어링에 대한 기술과 경험이 축적되어 약 10여 년 후부터는 조선이나 단순 구조물 생산보다 일괄도급 형태의 공사 수주가 더 많아졌다. 물론 최근에는 경쟁적으로 저가 공사 수주를 많이 하여 대부분의 중공업 업체들이 부실 위험에 처해 있어 무척 안타깝게 생각된다.
- 2016-06-2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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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세계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 1위,오스트리아 빈
-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 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6-05-2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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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2005년 여름의 알라스카 출장기(알라스카 연어)
- 11년전 여름, 그러니까 미국 시애틀에 살던 2005년 7월 중순경의 일이다. 당시 필자는 부산소재 모 수산회사의 1인 지사장으로 시애틀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말이 지사장이지 고정수입이 없는 프리랜서형 지사여서 힘겹고 배고프던 때였다. 23세부터 23년간 당연시 여긴, 중독중의 최고라고 여겨지는, '월급'이 없어 마음이 황량한 때였다. 당시 알래스카의 오지 공장들로 연어알 수집을 위해 출장가는 삿뽀로 소재 일본 Buyer의 통역으로 그를 대동, 2주간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험한 여정이 예상됐지만 한푼의 커미션이 아쉽던 때라서 마다할 수도 없었고, 알라스카에 대한 동경도 어느정도 있어, 그와 함께 가게되었다. Tacoma공항에서 출발하는 날부터 오후비행기인 줄 모르고 새벽에 나갔다가 아침비행기로 땡겨서 타는 등, 좌충우돌 처음 겪은 일들이 많았다. Anchorage에서 다시 Kodiak이라는 섬으로 가는 비행기도 역시 땡겨 타고, Kodiak에서 Larsen Bay라는 곳으로 8인승 소형비행기를 탔다. 맨땅의 활주로를 이륙하여 40여분 비행해 도착한 곳에는 주민 약 100여명, 연어 수십만 마리와 역사 100년이 넘은 반 수상가옥형 공장(Kodiak Salmon Packer Inc. 이하 'KSPI'로 칭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 수상시설은 짐작하겠지만, 연어잡이 배들이 접안, 하역, 가공하기 쉽도록 하기 위함이다. KSPI부근에는 알라스카 원주민 위주의 주민들과 그 외에는 그네들 보다 많은 수의 야생 곰, 바닷새 수십만마리, 그리고 산과 바다, 구름, 비 외엔 없는 광막한 원시자연, 그야말로 하늘아래 1번지였다. KSPI에는 세계 각국, 특히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동구권의 자본주의에 막 맛 들이기 시작한 나라들과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의 가난한 히스패닉 나라들에서 학비내지 라스베가스 유흥비를 벌기 위해 방학을 이용하여 알바온 대학생들이 대부분의 노동자였는데, 지구 끝의 그 오지에서 뉴욕 못지 않은 Melting Pot를 연출함이 경이로웠다. 거꾸로 그들 눈에는 필자와 동행한 부산의 본사 직원, 그리고 일본인 Buyer 3명이 그 곳의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음식관련 가공공장을 경험해 본 사람은 짐작하겠지만, 장화와 모자, 비닐 앞치마와 고무장갑은 필수품이다. 필자의 역할은 통역이었지만 24시간 휴일도 없이 가동하는 공장사정상 막일도 나몰라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78,00하는 어부용 장화를 사 신고 공장일도 꽤 돕게 되었다. 당시 광막한 자연만큼이나 황량한 마음으로 읽고 있던 유태경전(주로 창세기 이전부터 구약에 관한 것으로 Kabbalah라고 하는데, 모태가 되는 경전은 Zohar라고 한다)에 의하면 여행을 떠날 때는 무기와 선물, 공부거리 3가지를 준비해야 한다는데, 장화가 당시 나의 무기가 된 것 같다. 당시의 출장겸 여행을 떠날 즈음에 웬지 신이 내게 인생의 목적을 가르쳐 출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했다. 목적지가 지구의 끝이거니와 하늘아래 일번지였기에 말이다. 카발라에 의하면 인생의 모든 사건들에 우연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모든 일이 자신이 뿌리고 나서 잊어버린 씨앗들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섬뜩한 진리인가! Alaska에서 태어난 연어들은 약 5~7년 간의 대양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산란(다음세대의 창조)을 하고 생을 마감한다. 산란을 위해 기를 쓰고 고향민물을 역류해 가는 연어 떼의 장관을 목격한 것은 분명 진기한 경험이었다. 연어에는 참고로 Sockeye, Coho, King, Silver, Red, Chum 등이 있으며, 이들의 고향회귀율은 평균 1% 이하라고 한다. 99% 이상은 조업선, 낚시꾼들, 곰 등에게 잡히거나 회귀도중 역류물살에 힘이 부쳐 자연사 한다. 자연사한 연어들은 굶주린 바닷새들에게 최고의 먹이가 된다. 연어의 고향회귀는 과학자들도 파악하지 못한 경이 중의 하나로, 고향민물의 광물질에서 풍기는 냄새를 기억하고 찾아간다는 설이 정설로 굳어가지만,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초자연적 신과 비슷한 존재가 인간에게 양식제공을 위해 연어로 화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신의 육화 (Incarnation)로서 경건하게 연어를 대하는 것이다. 알라스카의 원 뜻도 Great Land(not Island)란다. 당시 주변에서 교회다니는 분들이 권하여 Warren목사가 저술한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을 읽었는데, 연어들이야 말로 그러한 삶을 사는 듯했다. 바닷물을 벗어나면 염분이 없어져 아가미가 틀어지면서 몸체도 탈색하고, 거친 역류물살 외에도 곰, 바닷새 등 죽음의 위협이 곳곳에서 도사림에도 불구하고 산란을 위해 숭고하게 민물을 역류해 간다. 종족번식이라는 신이 부여한 숭고한 사명을 인식하고 가는 것일까? 신기하고 경이롭다. KSPI에서 각국 젊은 대학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그들에겐 금지된 술도 몰래 주고, Sage라는 필명으로 게시판에 선현들의 지혜의 편린을 가끔 메모했기 때문일까? 폴란드 학생들 무리 150여명은 아예 비행기를 Charter하여 단체로 그 곳에 왔는데, 당시 교황이던 자국 출신 요한바오르 2세에 대한 프라이드와 존경심이 대단하였다. 폴란드 국민 97%가 카톨릭 신자라고 했다. KSPI의 공장시설은 돌이켜보면 거의 감옥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수십년된 푹꺼진 벙크부터 열악한 샤워부스, 그리고 로버트 드니로 주연영화 Insomnia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백야현상 때문에 커튼을 암실수준으로 설치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고, 공장 밖에는 광막해서 탈출?해 본들 아무시설도 없었다. 더구나 야생곰들이 많아 위험하니 창살없는 감옥과 다름 없었다. 속세?와의 소통도 공장에 설치된 몇대 안되는 공중전화 뿐, 핸드폰도 물론 터지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음식도 별 가림 없이 잘먹는 필자에게 KSPI의 식당 음식은 먹기가 꽤 힘들었다. 술을 사려고, KSPI에 처음 갈 때 다른 비행기에 잘못 실린 짐을 사후적으로 찾을 겸하여 비행기를 타고 Larsen Bay에 가야 했었다. 술도 감옥만큼이나 실제로 귀한 곳이었다. 그만큼 오지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앵커리지(돛을 매는 곳이란 뜻)경유 Kechikhan에 도착, 거기서 6인승 수상비행기 (Waterplane)로 캐나다 서안 Neets Bay의 Lucky Buck에서 해안에 정박시킨 배(선상공장)에서 2일을 지냈다. 그 배에서 새벽에 물안개가 가득할 때 덩치 큰 연어들이 귀향이 좋아서인지 수면 위로 점프하던 귀한 장면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케치칸 부두에는 타이타닉보다 큰 크루즈 유람선이 4척이나 정박해 있었는데, 그 배의 승객들에게 곰들이 연어를 사냥하는 곳으로 5~7명씩, 소형 Waterplane으로 태워다 주는 중간에 잠시 물에 착륙, 우리 일행을 내려주고 간 것이다. 관광객들은 우리 일행이 기실 최대의 연어사냥꾼?인 줄은 몰랐을 터. 케치칸 비행장은 활주로가 섬에 있어 승객전원이 Ferry를 3~5분 타고 육지로 가게 되어 있는 점도 매우 특이하려니와, 그 짧은 거리에 다리를 놓지 않는 이유는 Ferry 수입보다는 무수한 Boat-plane이 계속 이착륙하기 때문이란다. 알래스카에서 보트플레인은 제 2의 승용차라고 할 만큼 보급율이 높고 그 만큼 오지가 많다. 앵커리지 공항에서도 수십대를 보았다. 선상공장(가공선박)에서 비행장까지 나 한명 만을 위해 Small Boat로 태워다 주는 평생 잊지 못할 호사도 누렸다. 호사다마일까? 케치칸의 거리에서 죠지아출신의 술취한 저질 백인 인종차별론자(Whitrash = White와 Trash의 합성어)와 싸울뻔 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거칠게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일본, 한국"이라 했더니 대뜸 "무조건 싫으니 돌아가라"는 거다. 열받은 내가 "너는 어디서 왔는데?"라고 묻고 그가 "죠지아"라 해서 "너나 죠지아로 돌아가지?" 했더니 대뜸 완력으로 나오려는 그를 옆에 있던 가엾은 그의 처가 말렸고, 숫적으로도 우리가 우세였기에, 험한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다. 외양 하나는 천국같은 시애틀 집에 돌아 왔다가 몇일 후 다시 알래스카를 다녀 왔는데, 언제 또 갈일이 있으려나 싶다. 아름다운 도시 시애틀에 살면서도 수입이 일정치 않았던 내게는 정작 그 때가 인생 최고의 시련기겸 심리적 생지옥이었다. 이후 2006년 부터 기러기 생활을 하며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그제서야 가족들 보러 시애틀에 들락거릴 때 비로소 그 도시가 천국처럼 보이더라는 지나간 이야기다. '일체유심조'는 참으로 맞는 말임을 그 때 절감했다.
- 2016-05-0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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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동경은] 축음기로 떠나는 추억 여행
-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2020년 올림픽을 앞둔 도쿄( 東京)는 현재 변신 중이다. 여기저기 재개발이 추진중이며, 올림픽에 맞춰 새 경기장 건설과 거리 조성도 한창이다. 지금도 속속 새로운 명소가 등장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도쿄역 왼쪽에 새로 지은 JP타워는 도쿄중앙우체국과 각종 점포, 레스토랑 등이 가득 들어선 공공시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과거·현재·미래의 융합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우편주식회사와 도쿄대학 종합연구박물관이 협력해 2013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학술종합뮤지엄 인터미디어테크이다. 지상 2층과 3층을 연결해 2996m²의 널찍한 전시 공간과 강의 시설 등을 자랑하는 이곳은 산학협동의 롤모델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도쿄대학이 1877년 개교한 이래 수집해온 각종 학술 표본과 연구 자료 등 ‘학술문화재’로 불리는 귀중한 자료들이 상설 전시중이다. 특별 전시와 기획 행사에서는 최첨단 과학의 성과와 각종 표현 미디어의 독특한 창조물도 선보이고 있다. 일본은 물론 지구촌 구석구석 다양한 장르의 학문 분야를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색다른 융합도 맛볼 수 있다. 특히 렉처 시어터로 불리는 ‘아카데미아(ACADEMIA)’의 공간에서는 귀중한 영상 및 음성 자료가 학예사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정기적으로 소개돼 많은 마니아층과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월 26일 오후 6시부터 1시간 가량 열린 그래모폰(Gramophone) 기획 26회차 행사는 재즈의 집대성으로 알토편이 진행됐다. 아카데미아에는 1925~1928년에 만들어진 빅토롤라(Victrola)사의 명품, 캐나다제 크레덴자(Credenza) VV8-30 과 일본의 악기 설계자 히라바야시 이사무(平林勇, 1904~1938)가 1931~1932년경 제작한 독자적인 음성 증폭 시스템이 달린 축음기 등 2대의 축음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빅토로라의 크레덴자로 1942년 데카(Decca)사에서 출시된 앨범 ‘알토 섹소로지(Alto Saxology)’에 수록된 지미 도시(Jimmy Dorsey)와 1939년 5월 26일 녹음한 ‘로망스(Romance)’를 비롯해서 도시 형제의 ‘테일스핀(Tailspin)’, 알 쿠퍼(Al Cooper)의 ‘(When I GrowToo Old to Dream’ 등 주옥 같은 재즈 명곡 10곡이 축음기를 통해 당시의 생생한 음을 되살려냈다. 도쿄의 야경과 추억을… 깔끔한 디지털 사운드가 아닌 인간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음역대에서 재현되는 축음기의 아날로그 사운드는 LP판의 굴곡과 함께 숨결처럼 떨리는 잡음 속에서 마치 이야기를 걸듯 귓속으로 다가왔다. 이날 주제인 알토에 걸맞은 색소폰이 이끄는 재즈 리듬이 70여 명의 참가자들로 가득 찬 아카데미아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때로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속 우울한 대도시의 그늘을 묵직하게 그려내기도 했으며, 경쾌한 스윙풍의 재즈로 흥을 돋우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창밖의 도쿄역 야경과 함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수놓기에 충분한 시간 여행이었으며, 축음기가 지닌 소박한 휴머니즘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사였다. 귀에 거슬리는 LP판의 잡음이 아니라 기억을 긁어 잠자던 감각을 일깨우는 느낌이라고 할까, 따뜻한 인정미마저 느껴지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현역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회사원 요시다 쇼타로 씨(62세)는 “대학 시절 재즈에 빠져 친구들과 밴드도 꾸려 연주 활동도 했지만, 직장 생활에 쫓겨 재즈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재즈의 집대성 시리즈 행사로 모처럼 재즈의 매력에 젖을 수 있어 자주 이곳을 찾는다”며 “여기 설치된 축음기와 소장된 희귀 음반은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훨씬 넘을 텐데, 공짜로 매달 좋아하는 재즈와 해후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밝혔다. 인터미디어테크 전시 공간과 아카데미아의 기획 행사는 모두 입장 무료이다. 일본 도쿄를 출장 혹은 여행으로 찾는 기회가 있다면 한번쯤 JP타워를 방문해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봄직하다.
- 2016-04-12 0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