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영하는 여행 관련 TV 프로그램 중 ‘꽃보다 할배 리턴즈’(tvN)를 시청했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 김용건 등 원로 배우들이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순으로 동유럽을 돌아보는 여정으로 꾸며졌다. 오스트리아 비엔나(빈)의 경우엔 나 또한 두 번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워낙 좋아하는 도시이기에, TV를 통해 다시 추억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첫 비엔나 여행은 40대 후반 프랑스, 이태리 등 유레일패스 기차여행을 하면서 인상 깊었던 도시 인스부르크와 함께였다. ‘비엔나 숲속의 왈츠’와 ‘모차르트’ 우습게도 ‘비엔나커피’ 정도를 머리에 그리며 떠났는데, 영어가 원활하지 않다 보니 이해가 덜 되어 답답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안은 중세 서양 문화의 현장인 비엔나 구시가지 풍경은 마치 심봉사가 광명 찾듯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문외한으로 갔던 첫 번째 비엔나 여행에서의 아쉬움은 이후 미술사, 클래식 음악, 유럽 역사, 인문학을 가까이하는 데 동기부여가 되었다.
강의도 듣고 공부도 하여 2011년 60세 언저리에 다시 한번 비엔나를 찾았다. 두 번째 여행은 독일, 체코 프라하, 비엔나, 잘츠부르크를 포함하는 동유럽의 여정이었다. 18세기 비엔나는 화려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음악의 도시로도 잘 알려졌다. 18세기 고전파 음악가 3인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회자하는데, 특히 잘츠부르크와 비엔나에는 모차르트의 발자취로 가득하다. 덕분에 현재 두 도시의 관광 수익은 지역 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지만,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후세인들은 평생 빈곤 속에 살다 죽음을 맞이한 그의 삶을 몹시 안타깝게 여긴다.
고건축물이 가득한 구시가지 가운데 비엔나의 상징인 슈테판 대성당이 있다. 1100년대 건축 이후, 수차례에 걸쳐 개축되며 세계적인 유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성당의 이름인 ‘슈테판’은 성경 속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집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하이든과 베토벤이 소년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던 성당이기도 하다.
모차르트는 슈테판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던 화려한 결혼식과 시신이 없는 가장 슬픈 장례식의 주인공이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보았듯 모차르트는 ‘레퀴엠’(진혼곡)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비명횡사하여 끝내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에는 너무나 많은 가설이 따르지만, 당시 열악한 교통수단으로 어린 나이부터 수많은 순회 연주를 다니며 이름 모를 풍토병에 시달렸고, 성인이 되어서도 폐결핵 등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죽음을 경험해야만 쓸 수 있는 곡 ‘레퀴엠’을 작곡하면서 실제로 죽음의 경지까지 자신을 몰입시켰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세기의 음악천재는 그렇게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만다.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모차르트가 말년에 병마와 빈곤 속에 시달리며 작곡한 ‘클라리넷 5중주 A장조 K581’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곡 중 하나다. 유홍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온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TV와 함께 떠난 나의 세 번째 비엔나 여행에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이 보였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등산 자락에 가면 ‘생오지문예창작촌’을 만날 수 있다. 소설가 문순태(文淳太·80) 씨가 추구하는 문학의 열정을 증명하는 이곳 주변의 도로명은 생오지길. 원래는 만월2구라 불렸다고 한다. 그 이름을 바꾼 것이 바로 문 작가다. 그가 어린 시절 이곳을 생오지라고 불렀던 기억을 되살려 문학의 집을 만들어 생오지라고 이름 붙인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소설 ‘징소리’와 ‘타오르는 강’ 등으로 한국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깊게 새긴 그가 말하는 고향과 문학, 그리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인생을 들여다봤다.
문순태 작가가 생오지에 자리를 잡은 지는 어느덧 13년째, 그동안 그는 이곳에서 문학제를 열고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을 완성했으며 창작집 두 권과 에세이집, 시집 등 다양한 책들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시 쓰기에 열중하고 있다.
“나이가 드니 소설 쓰기가 힘들어요. 수술을 여러 번 하기도 했고 기억력도 쇠퇴해서. 대신 자꾸 시가 써지네. 시는 누워서 앓고 있어도 영감으로 쓰는 게 가능하니까요.”
그는 지난 1년 동안 장편소설 ‘광주 가는 길’을 집필했다. 그 와중에 쓴 시들을 모아 ‘생오지 생각’이라 이름 붙이고 얼마 전 출판사로 넘겼다. 새삼 그가 1939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올해 팔순의 나이.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창창했고 문학가로서의 그의 업 또한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후배 소설가 김영현 씨는 얼마 전 전주에서 열린 혼불문학상에서 그를 만나 자신의 롤모델이, 문 작가처럼 80대까지 살아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다. 자신의 나이를 언급하는 말을 듣고 문 작가는 다소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언제 죽어도 미련이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영원히 남을 작품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량이었죠. 농사는 안 짓고 첩을 둘이나 두신 분이었으니. 반면 어머니는 전형적인 농사꾼이셨어요. 저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덕분에 일찍부터 땅의 소중함을 알게 됐죠.”
문 작가는 당시 ‘아무나 못 들어가는’ 광주고등학교를 들어갔고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문학을 만나게 됐다.
“2학년 국어선생님이 수필가였는데 글을 써내라고 해서 에세이를 썼어요. 그런데 그 에세이를 엄청 칭찬하는 거예요. 너무 잘 썼다면서 문예부에 들어오기를 권했고 들어가니 이성부, 조태일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함께 어울렸죠. 특히 시인인 김현승 선생님을 너무 존경했어요. 고등학생인 우리를 데리고 숲 산책을 하면서 시는 무엇이고 인생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죠. 사실 김현승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 시를 쓰게 된 거예요.”
1965년 ‘현대문학’에 시 ‘천재들’이 추천되어 등단한 문 작가는 전남대학교 철학과, 숭실대학교 기독철학과를 거쳐 조선대학교 국문과를 다니면서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를 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삶이라고 보기 힘들었기에 내심 답답했던 그는 신문사로 갔다. 신문사에서 일하며 독일 연수를 다녀오니 유신이 나라를 뒤집어놨다. 절박해진 현실에서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됐고, 마침내 1974년에 ‘백제의 미소’가 ‘한국문학’에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명찰을 달았다.
“그때가 서른네 살이었으니 늦게 된 편이었죠. 쓰고 싶은 욕망이 넘쳤고 너무 많이 썼어요. 그런데 내가 죽은 후에 이 많은 작품들 중 몇 편이나 살아남을까 싶어요. 살아남을 수 있는 작품을 쓸걸 하는 아쉬움이 있죠. 최하림, 이청준, 조태일을 보세요.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났어요. ‘야, 이청준이도 아직 살아 있고 최하림도 살아 있네’ 했죠. 단 한 작품이라도 시공을 초월해 살아 있으면 돼요. 그걸 일찍 깨달으면 많이 쓸 필요가 없어요. 작가들은 헛된 욕심 때문에 막 쓰게 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괴로운 존재죠.”
문학은 역사의 칼
문 작가가 오래 살아남을 작품을 못 썼다는 자괴감을 갖고 있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그에겐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대표작 ‘징소리’와 ‘타오르는 강’이 있지 않은가. 이제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볼 차례였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는 누가 봐도 철저한 리얼리스트의 감성을 보여준다.
“문학은 역사의 칼이다, 잘못된 역사는 문학이란 칼로 베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창작과비평사 외에는 내 글을 안 받아주더군요. 주변에서도 ‘너무 색깔이 강하다,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는 ‘빼앗기고 짓밟혔을 때 울부짖는 소리야말로 문학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문학은 관념이 아니라고 봤던 것이다. 철학과 출신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어까지 배운 그가 그렇게 말한다는 게 이채롭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알 만큼 알기 때문에’ 내놓을 수 있는 말일 수도 있다.
“관념적 주제를 만들기는 굉장히 쉬워요. 황석영이 한 말이 있는데, 관념은 보기 좋은 상자를 보기 좋은 종이로 싸서 계속 끌러 봐도 상자들만 나오다가 맨 마지막에 찌그러진 성냥통을 보면서 ‘휴, 소설 쓰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거라고 한 적이 있어요. 저도 똑같은 생각이었죠. 우리 삶의 실체를 보고 거기서 주제를 이끌어내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징소리’가 주는 울림
문 작가의 신념과는 달리 주변에서 그의 소설을 보고 자꾸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럼 한번 해보겠다’며 작심하고 내놓은 소설이 ‘징소리’였다.
교과서에도 수록되며 많은 독자에게 읽혀온 문순태 작가의 대표작 ‘징소리’. 이 작품에서 그는 20세기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정의하고 고향을 관념화해 인간성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래서 ‘징소리’에서는 ‘고향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인간 존재의 양식으로서의 고향을 보여주길 시도했다. 그 결과 평론가들의 찬사가 이어졌고 ‘징소리’는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됐다. 그는 그때를 계기로 문학 예술성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그에게 문학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을까?
“육십이 되니 ‘문학은 역사의 칼에서 삶의 길 찾기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문학은 시대정신을 꿰뚫어보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혜를 빌려주는, 그래서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에 대한 길 찾기가 돼야 한다고 봐요. 이제는 ‘성찰의 거울’이 되길 바랄뿐이에요.”
얼마 전 국민대학교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나이 들어 그가 갖게 된 문학관을 설명하자, 학생 한 명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선생님도 도인이 됐다는 소리군요?”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 소리였다고 한다. 물론 문학에서의 깨달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은 자칫 작가로 하여금 현실과 유리된 세계 속에 빠뜨려 방관자로서의 공허한 외침만 반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던 그는 순간 당황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역사라는 칼은 주머니칼로 변해서 아직 내 주머니에 있다’고 답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작품이 그 자신이 진정한 대표작이라 여기는 ‘타오르는 강’이다.
평범한 사람이 바꾸는 세상을 꿈꾸다
36년.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 전 9권의 완결을 맺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말 그대로 문순태 작가의 반생이 담긴 작품이다.
그가 1970년 무렵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을 때 나주 양반집 취재를 간 적이 있었다. 1886년에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문서를 나눠줬는데, 그 집 할머니가 문서를 보여주며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노비들은 울면서 내쫓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노비들은 자의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니 그런 반응이 나온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 이건 뭐가 있다’ 싶어서 노비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기사화했다. 그리고 이를 소설로 써서 ‘월간중앙’에 연재한 것이 바로 ‘타오르는 강’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꿈이 있어요. 제 소설에서는 의도적으로 지식인을 등장시키지 않아요. 평론가들은 지식인이 등장해야 소설이 고급화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긴 해요. 그런데 지식인들은 세상을 정직하게 보지 않습니다. 굴절시키고 자기화하죠. 그러나 무지렁이는 있는 그대로 보고 전달합니다. 나 또한 지식인이지만 지식인처럼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지식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내 소설을 받아들이고 삶의 변화를 가져오길 바라는 마음이 ‘타오르는 강’을 쓴 동기였죠.”
작가는 언어의 채굴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타오르는 강’에 심혈을 기울여 전라도의 정서와 역사를 담아냈다. 한 국어학자는 문 작가를 가리켜 우리나라 소설가 중 전라도 토박이말을 가장 폭넓게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만큼 향토색이 가득한 작품이다.
“‘타오르는 강’이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을 때 잘 안 팔렸어요. 어떤 사람이 사투리를 전부 표준어로 바꿔라, 그러면 팔릴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그 책을 읽고 있던 법정 스님이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듣고는 ‘어떤 미친놈이 그런 말을 하냐’고 화를 내셨습니다. 토박이말은 그 지역의 혼이 담겨 있는 것이라면서요. 그래서 아예 3년에 걸쳐 ‘타오르는 강’ 토박이말 사전을 별도로 만들었어요. 그 뒤로 단어를 모르겠다는 전화가 오면 그거 읽어보라고 했죠.(웃음)”
관계를 끊어야 본래의 나를 찾는다
‘타오르는 강’을 집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전라도를 떠나본 적이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특히 광주는 계속해서 일하며 지낸 운명적 장소다. 전남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주필까지 한 그는 작년까지도 유니버시아드의 오프닝과 폐막 시나리오, 광주전남연구원 이사장 등 사회적인 역할을 계속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정리할 때라고 보고 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서 지갑을 자주 열고 좋은 말을 해줘야 하는 법이죠. 그런데 관계를 정리하느라 하나하나 끊을 때마다 외롭긴 해요.”
인간은 욕망이 무한한 존재이기에 욕구충족을 위한 경쟁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욕망이 의미 없다는 걸 깨닫고 버리게 된다. 그래서 문 작가에게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일이다.
“관계를 많이 유지하며 죽는 것은 괴로워요. 그러나 나에게로 돌아와서 죽는 것은 멋진 일이죠. 나이 들수록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욕망을 가진 채로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절대로 안 돼요. 죽음도 존엄하지 않고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때 존엄한 죽음이 가능하죠. 제가 고향에 돌아온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작은 것에서 감동받는 게 삶의 희망
문 작가는 “풀벌레와 나비와 경쟁할 거냐?”고 되물으며 웃었다. 고향의 자연 속에 있다 보니 한없이 낮아진 자신을 발견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작가는 미세한 존재를 통해 우주를 보는 사람입니다. 작은 곤충 속에서 우주를 보니 제가 낮아져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소확행’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죠. 젊을 때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보여요. 빨간 것은 빨간색으로밖에 안 보이죠. 그러나 나이 들면 빨간색 안에 많은 색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총체적으로 보는 안목이 생기니까, 나이 들어가면서 시력은 점점 더 나빠지지만 세상은 더 잘 보여요.”
최근 핸드드립 커피에 푹 빠져 지내는 그는 과테말라산 ‘안티구아’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과테말라 정부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커피농장 노동자 2만여 명을 학살한 역사가 떠올라서 슬픈 영혼들을 생각하며 ‘검은 눈물’을 마신다고 말했다. 수많은 작은 것들에는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삶과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삶은 작은 것에서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매사에 의미를 부여해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남 험담하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 보낼 필요 없잖아요. 사실 우리는 감동받을 게 굉장히 많은데, 지금까지 너무 냉정하게 살았어요. 작은 것에서부터 감동을 받는 것, 이것이 삶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읍내’ 작가 쏜톤 와일더 말처럼 ‘인생은 커피 마시고 싶을 때 커피 마시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는 것’인가보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순수하고 맑은 성정을 가진 문순태 작가와의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무등산 자락 산골 생오지의 고추잠자리를 보았다.
문순태 소설가
1939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 조선대학교 문학부와 숭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었고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징소리’, ‘고향으로 가는 바람’, ‘철쭉제’, ‘된장’, ‘울타리’, ‘생오지 뜸부기’ 등과 장편소설 ‘걸어서 하늘까지’, ‘그들의 새벽’, ‘41년생 소년’, ‘도리화가’, ‘소쇄원에서 꿈을 꾸다’,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전 9권) 외에 시집 ‘생오지에 누워’가 있다. 순천대학교와 광주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고향 담양에서 ‘생오지문예창작촌’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왜 여행하느냐에 대해서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정의와 이유가 있지만 아마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일상에 묻혀버린 꿈과 환상을 충전하기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른이 된다는 건 시시해지는 것”이라고 일갈했듯이,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수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후회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고, 이럴 땐 다시 한 번 꿈을 충전하기 위해 무언가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떤 여행도 열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행이야말로 진정 젊음을 충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
아프리카와 인도 대륙 사이의 바다, 인도양에 유유히 떠 있는 섬 마다가스카르는 실제로 가본 사람이 많지 않지만 그 이름만은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이곳이 바로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나무와 보아뱀의 고장이며,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여행은 비행기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목적한 나라의 비행기를 타는 경우 여행 기분은 배가된다. 마다가스카르항공은 프랑스 것이라더니 모든 안내방송이 프랑스어가 먼저 나온다. 그다음이 영어, 그다음이 말라가시어(마다가스카르 공용어) 순이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여행의 인상은 바로 승무원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마다가스카르에는 18개에 이르는 다양한 부족이 살고 있고, 외모 또한 아시아인에서 아프리카인까지 다양하다. 그 이유는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2000년 전 인도네시아인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살기 시작한 뒤 아랍의 상인들과 아프리카의 노예, 유럽의 제국주의가 밀려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는 80%의 국민이 농사를 짓는 농업 국가로, 국토의 많은 부분이 논이며, 우리처럼 하루 세끼 쌀밥을 먹는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루 세끼 흰쌀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게 다가오면서 왠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바오바브나무의 고향, 모론다바!
바오바브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쪽 끝에 있는 모론다바라는 도시로 가야 한다. 모론다바로 가는 비행기는 19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로, 손님의 숫자에 따라 제멋대로 항공시간을 변경해버리기도 해서 고객을 당황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탑승수속 땐 짐의 무게뿐만 아니라 승객의 몸무게도 잰다. 비행기가 워낙 작아 무게를 초과하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오지를 가든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천천히, 천천히”와 “문제없다”는 말이다. 마다가스카르어(말라가시어)로는 “모라모라”, “짜마니노나”라 한다. 황당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들은 “모라모라”, “짜마니노나” 하며 활짝 웃는다. 오지 여행에서는 아무리 서둘러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니 느긋한 마음을 먹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마다가스카르의 최대 볼거리로 꼽히는 바오바브나무 군락지와 칭기국립공원의 입구 역할을 하는 모론다바는 ‘긴 해안’이라는 뜻으로 바닷가에 면해 있다. 수도 안타나나리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살갗을 태울 듯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람도 개도 늘어져 있는 이곳에서는 휴양 모드의 유럽 여행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동네 소녀들은 그늘에 앉아 머리를 땋으며 놀기도 하고, 소년들은 타는 듯한 태양 볕에도 아랑곳없이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천 년의 지혜가 들려주는 말들
해안가를 벗어나 바오바브 애비뉴로 들어서자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드문드문 바오바브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침내 눈앞에 짠하고 나타난 바오바브나무 군락지! 그것은 목이 꺾어질 듯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도 장대했다. 1년에 고작 3mm씩 자라는 나무가 저만큼의 크기가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걸까. 정말이지 바오바브나무 하나만 보고 간다 해도 마다가스카르 여행은 충분할 것 같다.
바오바브나무는 세계적으로 8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에 7종이 흩어져 있으며 나머지 1종은 호주에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바브나무는 다른 바오바브나무와의 비교를 불허한다. 속이 뻥 뚫릴 만큼 하늘을 향해 길쭉길쭉 늘씬늘씬 시원하게 뻗어 있다.
감탄사가 터지는 순간을 많이 만나는 일, 그것이 바로 행복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소혹성 B612를 온통 엉망으로 만드는 무서운 식물이 있다”며 바오바브나무를 안 좋게(?) 묘사하고 있지만, 난 천 년이나 되었다는 신비한 바오바브나무를 보면서 식물이야말로 신의 안장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바오바브나무를 바라보며 한없이 걷고 또 걷는데 저 멀리 보이는 바오바브나무에 뭔가 자그마한 것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벌레라기엔 좀 크다 싶은 그것을 가까이 가서 보니 한 아이였다. 아이는 바오바브나무와 인간을 대조해서 보여주려는 듯 나무에 딱 붙어 서 있었다. 그 장면은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천 년이나 된 바오바브나무와 대조되는 작은 인간의 모습. 마치 “문명국가에서 온 너희들이 좀 산다고 오만해봤자 천 년 된 바오바브나무 앞에선 모두 다 ‘고작 요만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내게 나무처럼 살라고 말하는 듯했다. 현실이라는 대지에 굳건히 발을 딛고서도, 끝없이 천상을 향해 뻗어 나가라고….
러브 바오바브와 성스러운 바오바브
두 번째 날엔 바오바브 애버뉴를 조금 벗어나 독특한 바오바브나무들을 찾아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러브 바오바브(love baobab)’와 ‘성스러운 바오바브(holy baobab)’다. ‘러브 바오바브’는 다른 바오바브나무와 달리 두 개의 줄기가 엉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혼여행객이나 연인이 많이 찾아와 사랑을 맹세한다고.
‘신성한 바오바브’는 성황당처럼 마을 입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고 마을 주민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동네 주민들은 이 나무를 몹시 영험하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이곳에 가 소원을 빈다.
그렇게 러브 바오바브와 성스런 바오바브를 거쳐 이윽고 다시 돌아온 ‘바오바브 애비뉴’. 역시 마다가스카르는 바오바브나무 하나만 실컷 봐도 그만인 곳이었다.
마다가스카르에 온 지 며칠 안 되었지만 그래도 묘사할 게 몇 개 있었던 것 같다. 온종일 먹어도 좋을 것 같은 끝내주는 바게트 맛이라든지 수도 안타나나리보 재래시장의 생동감 넘치는 삶의 모습, 칭기국립공원의 찌를 듯한 암석들까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숙소를 향해 달리는 길. 군락에서 떨어져 혼자임을 즐기는 바오바브나무들이 양손을 펼쳐 바이바이를 한다. 하나하나 작별을 고하며 바오바브나무들에 이름을 붙여본다.
발레리나 바오바브나무, 고독한 바오바브나무, 체조하는 바오바브나무….
천 개의 느낌표가 가슴에 와 박힌다.
travel tip
★찾아가기인천에서 방콕까지 타이항공(5시간소요), 방콕- 마다가스카르까지는 마다가스카르 항공(9시간 소요).
★기본여행정보한달간 무비자국가로 오랫동안 프랑스식민지였던 관계로 현재까지도 불어가 널리 통용되며 마다가스카르어(말라가시어)가 공용어다. 화폐단위는 아리아리(Ariary)로, 1000원=2000아리아리 정도. 커피와 사탕수수, 쌀이 주농작물이다.
★지도 & 추천여행루트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시내관광, 재래시장, 유적지를 본후 국내선으로 모른다바로 이동해서 바오밥 군락지, 그랑칭기국립공원을 보는 것이 핵심코스.
★준비물오프로드에 가까운 비포장도로를 장시간 달리므로 앉아있기 편안한 차림을 하는게 좋으며, 오지마을을 지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필이나 공책, 천으로 된 가방, 의류, 풍선, 사탕 등 준비해가면 현지인들을 위한 소중한 나눔이 될 수 있다.
★여행경비350만원 내외
“58년 개띠입니다.” 어느 모임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첫마디다. 개띠의 당당함과 그들의 파란만장한 세월이 그 한마디에 포함되어 있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아기가 많이 태어났는데 그 절정기가 1958년이다. 개띠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뺑뺑이 추첨으로 배정받아 들어갔다. 58년 개띠라는 말은 사회 여러 방면에서 이전 세대와 차별되고, 이후 세대와도 분명하게 구분되어 생긴 용어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운동장에 가득했다. 교실이 모자라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뉘었다. 필자는 비 오는 날 잠시 낮잠을 잤다가 오후반 등교가 늦어 엉엉 운 적도 있다. 그 시절은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가난한 집 아이가 꽤 많았다. 대부분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했고, 여자들은 식모살이를 했다. 그러나 형편이 괜찮은 아이들은 과외도 했다. 필자는 학교가 너무 멀어 쌀 두 가마니를 주고 친척집에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 펜팔을 했다. 단양 골짜기에 사는 소년에게 줄곧 편지를 써댔다. 엄마가 공부에 지장이 있다며 편지가 오면 아궁이에 집어넣곤 했다. 그 일로 엄마에게 대들던 사춘기가 떠오른다. 펜팔은 얼굴도 모르는 누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 솔직한 말을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서울에 사는 준이라는 소년에게 편지질을 했는데 아침이 오면 지난밤에 쓴 편지가 너무 유치해서 박박 찢어버릴 때가 많았다. 저 별은 나의 별, 이 별은 너의 별. 별과 달을 자주 글 소재로 써먹었다. 편지를 자주 쓰다 보니 글 솜씨가 좋아져 친구들 연애편지를 대필해주고 옥수수와 고구마를 얻어먹기도 했다.
당시 수학여행을 가면 다른 학교 남학생들이 주소가 적힌 쪽지를 여학생들에게 던졌다. 누구를 지정해서 쓴 쪽지가 아니라 줍는 사람이 그 쪽지의 임자.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다가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필자가 아는 사람 중에도 있다. 그 부부는 딸이 “엄마 아빠는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 하고 물어볼까봐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한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누가 뒤를 바짝 따라오며 말했다. 누군가 필자에게 호감을 보이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왜 이러세요” 하며 튕겼다. 예전에는 대부분 남자가 프러포즈를 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스무 살 봄, 이종사촌과 잘 알던 그는 계속 필자를 따라다녔다. ROTC 복장을 하고 자주 필자 앞에 나타나곤 했다. 그 시절은 주로 남자들이 데이트 비용을 부담했다. 돈이 없을 때는 전당포에 손목시계를 맡기기도 했다. 주로 만나는 장소는 다방이었고, 커피 한 잔을 시켜 둘이서 나눠 먹기도 했다. 가끔 이종사촌 커플과도 만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필자는 예술을 좋아했다. 한눈에 그에게 반해서가 아니라 외로움 때문에 가까워진 것도 같다. 만남은 운명이다. 필자는 말라버린 우물가에 누워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그 순간이 그 낯선 장면이 자주 떠오른다. 그가 속내의를 사서 아버지를 찾아왔던 일, 아버지와의 어색한 만남, 죄책감에 당황스러워하던 그의 표정. 아버지는 서너 달 후 뇌졸중이 와서 길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돌아가셨다. 그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필자는 숙명으로 결혼을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판돈으로, 대우에서 나온 컬러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샀다. 컬러텔레비전은 그 해 혼수품으로 처음 나온 제품이었다. 시어머니는 밤색 모직코트 옷감을 혼수함에 넣어주었다, 양장점에 가서 모직바지와 코트를 맞춰 입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남아 옅은 밤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을 가야 하는데 입고 갈 마땅한 옷이 없었다. 그 시절의 결혼 예복은 긴 소매 옷, 앞이 막힌 구두가 상례였다. 신혼여행을 안 가면 남들 보는 눈도 있고 후회도 될 것 같아 아산 현충사로 갔다. 하룻밤 있었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젊은 날의 쓸쓸함이여! 그때 그 얇은 마음이 얼마나 외로움에 떨었을까.
결혼을 후회하지 않으려 무척 애를 썼다.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필자는 늘 동생들에게 모범이 돼야 했다. 지금은 홀가분하다. 58년 개띠 인생. 이제부터는 자존감 회복에 중점을 두고 싶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사랑하자. 그래야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더불어 살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다사다난했던 2017년이 지나가고 새해가 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나가고 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세월 가는 일이 그저 찰나처럼 느껴진다. 2018년 무술년(戊戌年)은 60년 만에 오는 ‘황금 개띠’의 해라고 한다. 개는 인간에게 충성스러운 동물이면서 친구이자 가족이기도 하다. 소설과 영화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플랜더스의 개(A Dog of Flanders)’다. ‘플랜더스의 개’는 영국 소설가 매리 루이스 드 라 라메(1839~1908)가 1872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작가는 여행 후 작은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소년 네로와 그의 늙은 개 파트라슈의 정다운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우리나라의 토종개 중에서 삽살개는 단연 사랑받는 존재다. 삽살개가 있는 곳에는 귀신도 얼씬 못한다는 옛 속담이 있듯 삽살개는 악귀를 내쫓는 동물로도 알려져 있다.
지난해 말, 뜻하지 않은 오해로 인해 마음고생을 했다. 사소하거나 아주 작은 일로도 마음의 상처를 깊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지난해 마지막 날 커피숍에 단둘이 앉아 대화를 나누면서 오해를 풀었지만 여전히 그 상흔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새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1월 1일,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면서 금년 한 해는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내려놓는 것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안 좋은 감정을 내려놓고 비워내는 일이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어디서부터 마음을 비워야 할지 와 닿지 않는다. 일단 자신과 관계를 맺고 지내는 지인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선암사 템플스테이에서 만난 등명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라. 인생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마음이 열리지 않았는데 무엇인들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햇빛은 마음이 열린 만큼 들어온다. 미추(美醜)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아름답고 추한 것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되어 있어 사람이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다. 돈은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욕심은 유기체라 끝없이 자라고 욕망은 더 큰 욕망을 만든다. 독과 약은 다 내 안에 존재한다. 아무리 좋은 차도 많이 먹으면 독이 된다. 남을 의식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일은 남의 탓이 아니라 다 내 탓이다. 화내지 마라.”
우리는 마음의 밭에 매일매일 씨앗을 뿌리면서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긍정적인 씨앗을 뿌리면서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씨앗을 뿌리면서 매일매일 힘겹게 살아간다. 물론 주변 환경이 우리를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우선 마음을 먼저 다스리고 비우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욕심(집착),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욕심은 비우기도 버리기도 어려운 마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욕심이라는 강렬한 마음이 결코 우리의 마음을 자유롭게 놔두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내려놓는 방법 중 하나가 용서(容恕)라고 한다. 용서는 마음공부의 시작이고 끝이다. 용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방편이다. 내면의 두려움과 죄책감은 자신을 속박하지만 용서는 자신을 해방시키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만들어준다고 한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용서를 통해 상대방을 따뜻하게 보는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기로 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면서 즐겁게 지내야겠다. 욕심을 내려놓고 용서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부단하게 노력해야겠다. 필자만의 마음밭에 사랑을 심고 물을 주어 예쁘게 키워나가도록 노력해야겠다.
해외여행에 익숙지 않은 초보 배낭 여행객들에게 홍콩은 매우 적격한 나라다. 중국 광둥성 남쪽 해안지대에 있는 홍콩은 1997년 영국령에서 반환되어 국적은 중국이지만 특별행정구다. 다른 자본주의 체제가 적용되는 ‘딴 나라’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라는 오래된 유행가를 흥얼거리면서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병 고쳐 달라 기원하면 낫게 해줄까? 웡타이신 사원
홍콩의 주룽반도(九龍半島)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도교 사원이 웡타이신(黃大仙)이다. 원래는 중국 광저우(廣州)의 황사에 있었는데 1912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해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1956년부터다. ‘웡타이신’은 우리말로 황대선이라는 인물을 뜻한다. 그는 원래 저장성의 한 지방에서 살던 양치기 소년. 15세 때, 정제된 황화수은을 질병 치료 약으로 만들어 인술에 많은 공적을 쌓았다. 그래서 이 사원은 병 치료에 도움을 주는 신앙처로 알려지게 된다. 모습은 여느 사원과 비슷하다. 각자의 소원과 병 치료를 기원하는 제수를 놓고 향초를 피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사원 안은 눈이 매울 정도로 향내가 진동한다. 특히 사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나무 산통을 이용해 행운의 점(산통점)을 친다. 일을 그르칠 때 쓰는 ‘산통 깨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 ‘산통점’과 관련해서 생겨났다. ‘산통(算筒)’에 대나무를 잘게 잘라 100개 정도를 넣고 산통의 막대가 나올 때까지 흔들고 막대가 나오면, 막대와 같은 번호의 종이와 바꾼다. 점쟁이는 그 내용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점괘가 나와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니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또 이 사원에 들러 꼭 찾아야 할 곳은 뒤쪽의 정원. 황대선이라는 이름이 선명한 정원은 연못과 함께 꾸며져 있어 주변 고층 아파트의 삭막함을 무색케 할 정도로 아름답고 정적이다.
홍콩 영화 속 주인공처럼 침사추이 거리 헤매보기
주룽 지구의 침사추이(尖沙咀)는 홍콩 최대 번화가다. 고층빌딩 숲, 옛 향기가 가득 배인 칙칙하고 좁은 골목들. 오래된 재래시장과 파도처럼 일렁대는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의 물결.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영화 같은 매력이 폴폴 넘쳐나는 곳. 홍콩 누아르 영화 속에서 이미 친근해진 풍경이 반갑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영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할리우드 스타의 거리를 모티브로 만든 ‘스타의 거리’다. 2003년에 시작해 1년 뒤인 2004년부터 공개되었다. 너비 4~5m, 길이 440m로, 9개의 붉은 기둥에 홍콩 영화 100년사가 기록되어 있다. 또 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의 조형물, 이소령 동상 등이 눈요기를 시켜주고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길바닥에 새겨진 영화인 명판들. 이연걸, 홍금보, 임청하, 양조위, 오우삼, 서극, 매염방 등 국제적으로 친숙한 홍콩 스타들의 손도장과 사인들이 거리를 장식했다. 이름만 새겨진 배우는 스타 거리가 조성되기 이전에 죽은 사람들이다. 이곳이 유난히 좋은 이유는 주변 바다 풍치가 덧대어져 있기 때문이다. 유람선과 고깃배가 떠다니고 바다 너머로 홍콩섬 금융가의 건물들이 뾰족하게 올라가 있는 주변 풍광이 매력적이다. 이외에도 미술관, 우주박물관, 시계탑, 문화센터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주룽반도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계탑(높이 44m)은 1910~1978년 중국과 유럽을 오가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출발역이었던 주룽역 앞에 서 있던 것. 조화롭지 않은 듯 조화를 이루고 있는 침사추이가 매력적이다.
홍콩의 부자 동네, 리펄스 베이
침사추이에서 리펄스 베이(Repulse Bay)로 가려면 일단 홍콩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페리호와 해저터널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홍콩섬은 홍콩 개항 이후, 상업 및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홍콩섬에서 가장 높은 산, 빅토리아 피크(554m) 고갯길을 넘어서면 차창 밖 모습이 조금씩 달라진다. 빽빽한 건물 대신 초록색 산과 바다가 어우러지고, 띄엄띄엄 고층 아파트가 그림처럼 들어앉아 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건축 형태가 자연과 잘 어울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리펄스 베이다. 성룡 등 홍콩의 유명 인사들이 주로 사는 부촌이다. 길 끝나는 바닷가 끝에 틴하우(天后) 사원이 있다. 사원 앞에 틴하우 여신이 해탈의 미소를 건네고 있다. 산정이 아니라 바다와 눈높이가 같다. 1865년에 세워진 도교 사원은 독특한 중국 건축 양식을 전하는 지붕의 곡선이나 조각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사원엔 바다의 수호신인 ‘쿤암(Kwun Yum)’과 틴하우를 모시고 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틴하우 여신은 뱃사람들이 복을 빌면 소원을 들어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을 구해준다고 믿었다. 또 건너가면 젊어진다는 장수교와 손으로 문지르면 재물복을 준다는 정재신(正財神) 석상, 만지면 3일 안에 인연을 만들어준다는 인연신이 있다. 특히 인연신 앞에서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떨어질 줄 모른다.
유럽 거리 걷는 건가? 스탠리 마켓과 머레이 하우스
리펄스 베이 해변을 벗어나 찾아갈 곳은 스탠리 마켓(Stanley Market)이다. 스탠리 메인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150여 개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장 거리다. 마치 서울의 이태원동과 같은 분위기다. 마켓 거리는 고급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다. 반면 스탠리 베이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확연히 모습을 달리한다. 아기자기한 유럽식 바와 식당, 숍들이 해변을 따라 이어진다. 세계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외국인도 많이 눈에 띄어 이국적인 풍치가 연출된다. 아기자기한 바와 레스토랑에서는 커피 한 잔, 파스타, 피자 한 조각으로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만(灣)’ 형태의 넓지 않은 바다를 따라가면 머레이 하우스(Murray House)를 만난다. 옛 센트럴에 위치한 1844년대 식민지시대 건축물을 1991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40만 개의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을 분해해서 옮긴 후 재조립했다고 한다. 아직도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건물은 딱히 멋은 없지만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식민지시대 건물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현재는 레스토랑과 홍콩해양박물관으로 이용된다. 머레이 하우스 앞 바닷가 쪽의 정자와 옹기종기 매여 있는 조각배의 풍치에 반한 여행객은 그 순간 긴장을 스리슬쩍 내려놓는다.
홍콩 야경 보고 레이저 쇼 보니 기분 최고, 맥주 한잔 어때?
홍콩 여행에서 야경을 빼놓을 수 없다. 야경을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가 여러 곳 있다. 그중 홍콩섬의 빅토리아 피크는 야경 보는 인기 뷰포인트. 홍콩의 가장 높은 전망대로 서울의 남산타워, 63빌딩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야경도 훌륭하지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서야 완벽하게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의 명물로 꼽히는 것은 피크 트램. 1888년부터 긴 세월 동안 가파른(373m)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어느 순간 건물이 거꾸로 서 있는 듯 몽롱해진다. 특히 피크 타워 바로 옆, 사자 정자는 환상적인 야경을 볼 수 있는 명소다. 또 승강기를 타고 타워 꼭대기 층인 스카이 테라스로 올라가면 더 넓게 조망할 수 있다.
야경을 보는 데에도 피크 타임이 있다. 오후 8시부터 약 20분간 심포니 오브 라이트(Symphony of Lights) 레이저 쇼가 펼쳐진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영화 거리와 이어지는 시계탑 근처, 연인의 거리에 마련된 2층 뷰포인트가 명당자리. 바다 건너 홍콩섬의 금융가 건물에서 뿜어대는 광선에 취하는 홍콩의 밤이다. 이런 날, 침사추이 밤거리로 들어가 몽콕 야시장에서 야식을 사먹는 재미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Travel Data
교통편 대한항공, 아시아나 항공, 캐세이패시픽, 타이항공 등에서 매일 인천~홍콩 간 직항편을 운행한다. 2014년부터 제주항공, 진에어와 같은 저가 항공사도 직항편을 운항 중이다. 3시간 30분~3시간 50분 소요.
현지 교통 정보 홍콩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고속전철을 타고 20~30분 만에 중심가인 주룽반도와 홍콩섬에 갈 수 있다. 시내를 여행할 때는 배(스타 페리)와 2층 버스, 전차(트램)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된다. 옥토퍼스 카드라고 불리는 교통카드를 이용하면 지하철, 배, 전차, 버스 등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화폐 단위 홍콩 달러(HKD)를 이용해야 한다. 마카오에서는 홍콩 달러를 사용할 수 있으나 거스름돈은 현지 화폐인 파타카(Pataca)로 받을 수 있다. 화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음식과 숙박 정보 홍콩 음식은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완탕이 유명하고 시장통에만 가도 먹을 게 지천이다. 유명 호텔 숙박은 몇십만원대이지만 5만~8만원 선에 이용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주룽반도 쪽이 가격이 저렴하다. 특히 1928년 문을 연 페닌술라 호텔(香港半島酒店)은 세계 10대 호텔 중 하나로 꼽힌다. 또 40여 년의 전통을 지닌 만다린 오리엔탈 홍콩(mandarin oriental Hong Kong)은 미슐랭 스타(Michelin Star)를 받은 호텔로 10개의 레스토랑, 스파 및 피트니스 센터를 갖추고 있다. 가격은 70만~80만원대다.
물가 정보 홍콩은 면세가 되는 품목들이 대부분이다. 의류, 가방, 시계 등은 한국보다 다소 저렴하다. 그러나 주류, 담배 등의 품목 몇 가지는 한국보다 가격이 더 높고 세금을 부과한다. 전체를 합치면 홍콩 물가는 서울과 비슷하다.
날씨와 옷차림 정보 홍콩의 12월은 평균 최저기온이 15.9℃, 평균 최고기온이 20.2℃로 우리나라 가을과 비슷하다. 일교차가 작아 낮이나 밤이나 서늘하고 쾌적하다. 가을 옷 위주로 챙기고 머플러 등을 준비하면 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홍콩과 마카오(澳門)는 빼놓을 수 없는 밀접한 여행지다. 홍콩 항에서 뱃길로 40여 분(약 60㎞) 달려가면 마카오다. 또 홍콩과 인접한 도시가 심천이다. 홍콩의 지하철(MTR)이 주룽의 홍함에서 중국 국경인 광둥까지 국철(KCR)로 연장되지만 통과하려면 비자가 필수다. 심천은 경제특구 지역으로 새로 생긴 신흥도시. 건물들도 깨끗하고 홍콩보다 물가도 싸다. 매우 좁은 도시여서 여유롭게 여행을 즐기면 된다.
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장리석(張利錫, 1916~ ) 화백은 2016년 4월 백세(百歲)를 넘긴, 그러나 아직 화필을 잡는 당당한 현역이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상수보통학교 졸업, 1937~1939년 일본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 수학, 귀국해 1940~1945년 평양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미술부장, 이때 조수로 있다 숨진 화가 최지원(崔志元, ?~1940)을 추모하여 그의 아호를 딴 ‘주호(珠壺)회’를 구성,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최영림(崔榮林, 1916~1985), 황유엽(黃瑜燁, 1916~2010),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박영선(朴泳善, 1910~1994), 윤중식(尹仲植, 1913~2012) 등과 5년간 동인전을 열어 평양 미술인의 자긍심을 높였다.
1950년 7월 북한 노동성에서 건립 중이던 금강산호텔 벽화 작업에 동원되어 평양을 떠난 뒤, 북진(北進)한 국군 원산 해군기지 사령부에 입대, 종군하게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1951년 1·4후퇴 때 제주도까지 내려가 4년 여 체류한 인연으로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1955년 제4회 국전에 이 특선되고, 1958년 제7회 국전에 이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화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81년까지 서라벌예대, 수도여자사범대학, 중앙대학교에서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 구상회화의 산증인이 되었다. 주로 제주에 머무르며 서민들의 일상,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해녀 등을 독특한 색감으로 그리고 있다. 2005년에는 제주도에 그림 110여 점을 기증하여 2009년 개관한 제주도립미술관 내의 ‘장리석 기념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2014년에는 전을 열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두고 온 고향풍 경도 많이 있는데, 내가 보았던 겨울 풍경은 , , 세 작품이었다. 눈 내린 시골마을, 옹기종기 초가집도 보이고 밤나무 옆길로 엄마와 아기, 소년과 강아지 등이 눈길을 걸어가는 시정어린 그림으로 화가의 유년시절 외가 마을의 설경을 그린 것이다.
바람에 눈발이 날리듯, 노화백의 가슴에 묻혀 있던 아슴푸레한 기억들이 연작으로 화폭에 옮겨져, 보는 이들을 묻혔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적이 따뜻하게 해 준다. 이 작품 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낙찰받은 작품이다. 창밖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 그림 아래 아내와 차를 끓이고, 가야금 산조를 들으며 깊은 감상에 젖곤 한다.
은 박용인(朴容仁, 1944~ ) 화가의 유럽 여행 중의 한 작품이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 1981~1983년 프랑스 몽파르나스의 아카데미 드 라그랑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Chaumière)에서 유학하고 국내 여러 미술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북한산, 제주도 등 곳곳의 풍경이나 와인, 과일, 꽃의 정물도 많이 그렸다. “남극과 북극을 빼고 전 세계를 여행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유럽에 자주 머물며 알프스의 마터호른,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같은 세계적 명산은 물론 고성(古城)들을 그렸다.
이 화가는 회화의 기법상 캔버스에 나이프를 주로 써서 유화물감을 바른다. 나이프를 쓰면 그림의 두께를 더하여 마티에르(matiere, 물감의 질감)가 무겁고 깊이 있게 보이고, 평면의 화면도 시각적으로 입체적인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미술시장에서, 외국 풍경을 그린 작품은 우리나라의 풍경을 그린 작품보다 다소 가격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경매에서 이 그림을 살 때에는 그 시작가가 높아 의외였다. “이 작가나 권옥연(權玉淵, 1923~2011) 화백 같은 경우, 외국 풍경이나 인물을 워낙 심도 있게 작품화하기 때문”이라는 경매 회사의 설명이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교외, 한적한 도로를 건너 왼편으로, 고색창연한 성당의 옆모습이 보인다. 후원에 나뭇잎을 채 떨어뜨리지 못한 나무에도 눈이 덮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성당의 첨탑도 잿빛 하늘에 묻혀 희미하다. 지붕은 흰 눈으로 적요하다. 고목의 가로수 위에도, 풀밭에도 깊게 눈이 내려 사위가 고요에 휩싸였다. 그림을 보는 찰나, 아늑함과 경건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속세의 혼탁함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이 화폭에 질펀히 흐르고 있다. ‘잘 된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으나, 이 작품은 아주 잘 된 그림이며, 동시에 좋은 그림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예술세계는 소재에 대한 친근감과 따뜻한 눈길이 와 닿는다. 거기에는 격정의 향수와 서정성 짙은 은유의 시어(詩語)로 잔잔한 감동이 다가온다. 정직, 성실한 자태와 순수함을 잃지 않는 작가적 심성이 화면 깊숙이 투영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화가는 “내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럽풍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유럽에서는 동양적이라고 한다.”고 미소 짓는다.
사실 화가들은 설경(雪景) 그리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흰색이 다른 색에 묻히고 그 밋밋함이 화폭을 평이하게 이끌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도 화선지의 흰 여백을 그대로 두어 눈[雪]의 형상화가 어려움을 나타내곤 하였다.
눈 내리는 날은 마음이 설렌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노라면 마음도 경건해진다. 입속으로 가만히 어떤 바람이라도 읊조리고 싶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작은 오두막, 무쇠난로에 장작불을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한때를 회상해본다. 눈설레 속에서 정겨운 얼굴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가고,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 작곡가, 1935~ )의 몇 곡을 듣다 보면 정화(淨化)된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드는 적멸감(寂滅感), 시공을 넘어 유년의 뜰로 이어진다.
‘외가’라는 낱말은 단순히 ‘어머니의 친정’ 이라는 뜻만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함축된 말이다. 외가는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곳이며, 내 모든 투정이나 허물도 기꺼이 품어 주는 따뜻한 풀솜 속 같은 곳이다.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에게선 느껴볼 수 없는 자글자글한 정이, 외할머니 치마폭에서 피어난다. 김칫국물 얼룩진 저고리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아릿하다. 어머니의 어머니로 농축된 모정이 “아이고, 내 강아지” 한마디 속에 묻어난다. 진종일 눈사람을 만들다, 강아지와 뛰놀다, 눈이 그치면, 보랏빛 하늘 위에 연을 띄워 날리며 얼레에 대고 ‘우우우’ 입김을 뿜던, 그 아름답던 시절이여!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이재준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1963~ )의 바이올린 독주회 맨 앞자리에 김영태 시인과 나란히 앉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k.304를 들었다. 41개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한 단조의 선율은, 봄밤을 깊은 심연의 사색에 잠기게 하였다.
연주가 끝나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잠시 하늘을 보았다. 아련한 산사나무 꽃향기 사이로 멜로디의 여운이 눈물 되어 흘렀다. 긴 계단을 내려와 차도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부군을 사별한 안네의 망부곡 같았어요. 검은 의상은 상복일 테지요.”
스스로를 ‘풀먼지 같은 존재, 어눌한 말주변’에 빗대어 초개눌인(草芥訥人)이라 자호(自號)한 분이 김영태(1936~2007) 시인이다. 비교적 작은 키에 작은 손으로 평생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김환기 화백(1913~1974)의 훈도를 받았고, 재학 중 박남수 시인(1918~1994)의 추천을 거쳐 ‘사상계’잡지에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7권의 시집을 비롯하여 소묘집, 시론집, 산문집, 무용평론집 등 70여 권의 저작물은 가히 초인적인 문화 활동이란 말 이외에 더 무슨 수사가 필요할까.
일찍이 독일문화원에서의 첫 전시를 비롯해 7~8회 회화전도 열었으나 그림 수집의 인연은 아주 늦게 찾아왔다. 그의 화풍은 독특해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산 판화지에 철필과 몽당붓을 짙은 먹이나 검은빛 잉크에 찍어 윤곽의 선을 구획하고, 유화용 까칠한 붓으로 면을 마감하는데, 서예의 갈필(渴筆)같이 선묘(線描)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림의 기초 단계인 스케치 실력이 상당하지 않고서는 강철 같은 선(線)을 뽑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07년 이른 봄 초개 선생 댁에서 ‘토슈즈 끈을 매고 있는 헤르미아’를 만났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멘델스존이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으로 작곡했고, 이를 무용으로 공연한 발레리나의 포즈를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이다. 물 흐르듯 먹의 농담이 한 송이 꽃으로 살아 있다.
드로잉(drawing)을 선인들은 화골(畵骨)이라 일컬었다. 그리기의 단단한 뼈대가 곧 선긋기에 있음을 강조함이다. 유화나 짙은 수채화 등은 물감을 덧칠하여 잘못 그린 선들을 감출 수 있으나, 연필, 목탄, 먹, 파스텔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게 매력이다. 초개 선생의 그림 속에는 일절 꾸밈이 없다. 색칠의 남용도 없다. 탄탄한 구성과 간결한 선들의 얽힘이 화면 가득 흐른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2)의 피아노곡을 즐겨 듣고, 모차르트 음반을 많이 소장하였다.
2007년 7월 운명하기 전까지 화랑가를 산책하고 음악회, 무용 공연장을 찾았다. 생전에 그가 즐겨 앉았던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가열 123번 좌석은 그를 추모하는 예인들에 의해 ‘초개눌인 석’으로 명명 헌정되었다.
문학과지성사는 1978년부터 문학과지성 시인선(詩人選) 시리즈로 시집을 475권째 발간해 오고 있는데, 표지에는 시인의 얼굴을 컷으로 표현하는 게 특징이 다. 이 컷은 2007년 김영태 선생이 작고하기 전까지는 김영태, 이제하 두 분이 그렸으나 이후는 이제하 선생이 혼자 그리고 있다. 컷을 그리기 전에 시집의 원고를 읽고, 시인들이 제공한 얼굴 사진을 보고 컷을 그리는데, 선이 잘 풀려 나올 때는 불과 몇 분 만에, 안 풀릴 때는 수주일이 걸린다는 말을 두 분에게서 들었다.
이제하(1937~ )는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평론가의 그 어느 장르에서도 건필을 견지하고 있는 분이다. 자작곡의 노래에 기타반주로 음반도 취입한 바 있다. 홍익대 조소과에서 미술공부를 하였으나 중도에 독창적인 창작의 길로 전환하였다. 경남 마산에서 고교시절인 1956년 ‘새벗’잡지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학도의 선망이 되었고,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고교 시절에는 김상옥(1920~2004), 김춘수(1922~2004), 김남조(1927~ ) 같은 시인들에게 국어수업을 받았음을 자부하기도 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광화사’등의 소설로 이상문학상등을 수상하였다. 1955년 제작된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에서 따온 마리안느 카페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평창동에서 시작된 카페가, 대학로로 옮겨와 시인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음악과 커피 와인 향 속에서 예술을 토론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성악가, 대중가수, 국악인들은 주저 없이 절창을 부르고 있다. 그의 문체는 회화적이고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평가 받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시혼(詩魂)의 알레고리가 녹아 있다.
마리안느를 드나들며 몇 점의 그림을 수집하던 중, 2008년 인사동 전시회에서 ‘말과 소년’ 드로잉을 구입하였다. 파스텔로 단숨에 그린 원숙한 드로잉이다. 늠름한 말이 실내 어느 공간에 들어와 있고, 소년이 말을 다독이고 있다. 한 여인이 옆에 앉아 있다.
이제하는 ‘도시에서 태어나야 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 혹은 그 긴장하는 접점으로 말[馬]을 실내로 끌어들인 야생의 한 이미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하 그림 속의 말은 자연과 야성의 모티브가 된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으나 쉽게 동화되지도 못하는 인간들의 고뇌와 갈등을 오묘한 색상으로 표출하고 있다.
1998년에는 김영태, 이제하 2인 드로잉전이 열려 한자리에서 개성 강한 두 예술인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는 당나라 대시인 왕유의 시를 보고 시중유화(詩中有畵)요, 화중유시(畵中有詩)라 하였다. 김영태, 이제하 두 예술인의 문장 속에는 격조 높은 그림이 보이고, 그림 속에서는 시와 음악이 흐른다. 이들의 고양(高揚)된 예술세계는 우리의 혼탁한 일상을 정화시킨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그때 197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에 사는 이모가 졸업 겸 입학선물로 독일제 만년필 로텍스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Made in Germany 제품을 손에 쥐었던 짜릿함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만년필은 잉크통이 고무 튜브가 아니라 빙빙 돌려서 쓰는 나사식이라는 사실이었다. 파랑 잉크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가히 시골 소년에게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버지의 차지가 되었다.
글 소설가 김호경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중학교 1학년이 만년필을 쓰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는 그 대신 ‘빠이롯트 파랑 잉크’ 한 병과 작은 조개가 박힌 ‘빨간 플라스틱 펜대’ 그리고 ‘10개들이 펜촉’을 사다주셨다. 그 필기구들을 책가방에 담아 학교에 가니 만년필이 없다 하여 꿀릴 일은 조금도 없었다. 한 반 60명의 아이들 중 빠이롯트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두세 명, 그보다 좋은 미제 파카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초록색 걸상 위에 책을 펴고, 노트를 펴고, 오른쪽 위에 파란 잉크병을 놓고 그 옆에는 펜대를 놓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펜촉에 잉크를 찍어 필기를 했는데 문제는, 부산스러운 사내아이들인지라 잉크병을 쏟는 사단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잉크병이 쏟아지면 책상은 난장판이 되었는데, 가장 좋은 해결책은 선생님이 던져주는 백묵이었다. 쏟아진 잉크 위로 백묵을 굴리면 순식간에 잉크를 빨아들여 비록 책과 노트에 온통 얼룩이 남기는 해도 짝꿍이나 앞 친구의 교복에 잉크를 묻힐 일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용돈을 모으고 모아 중앙전파사(그때는 전파사에서도 만년필을 팔았다)에 가서 로텍스 만년필을 샀는데 800원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버스요금이 30원 하던 시절이었으나 800원짜리 만년필은 그다지 비싼 것이 아니었다. 국산 빠이롯트 만년필은 최소 2000원이었다.
한때 만년필은 필수품이었으나 이제 시대의 소명을 다한 물건이 되었다. 또 사용하는 주체와 용도도 달라졌다. 학생에서 어른으로 이동했고 ‘필기’에서 ‘부의 과시’로 변한 것이다. 1천만원이 넘는 만년필이 심심치 않게 팔린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 옛날 펜촉에 잉크를 찍어 공부했던 60년대생의 가난한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 시절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았던가?
김일은 아버지, 조용필은 형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논하자면 어느 세대가 가장 아름다웠는지 단순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50년대생은 너무 고달프고, 70년대생은 격변이 사라진 세대였고, 80년대생은 오늘날 88만원 세대가 된 현실에 비추어보면 60년대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격동적이고, 추억이 많은 세대다. 하지만 추억이 많다 해서 어찌 암울함이 없었겠는가?
10집 건너 한 집의 담벼락에 ‘반공방첩(反共防諜)’이 붙어 있고, 10월 유신과 긴급조치가 사람들의 삶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하고, 오후 6시가 되면 국기하강식에 걸려 모든 동작을 멈추고 길에 허수아비마냥 우뚝 서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태극기에 경의를 표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독재와 압제도 강했지만 일상에서의 흥분도 강했다. 1년에 두어 번 세계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는데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불러모은 주인공은 그 위대한 김일이었다. 레슬링 경기는 이틀에 걸쳐 열렸는데 첫날은 B급 선수들이 싱글매치와 태그매치로 경기를 했다. 우리의 영웅 김일은 반드시 두 번째 날, 마지막 경기의 태그매치에 출전했다. 상대 선수는 대부분 일본, 아니면 미국에서 온 레슬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흉측하고 반칙만 일삼는 괴기한 ‘놈’들뿐이었다. 복면을 쓰고,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고, 심판을 패대기치고, 팬티 속에 흉기(주로 포크)를 감추는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위기에 몰리면 심판이 안 보는 틈을 이용해 괴춤에서 포크를 꺼내 우리 선수를 마구 찔렀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할 무렵 김일이 등장한다. 그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니들은 다 죽었어!”
그러나 적들은 여전히 악랄하다. 김일은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리고, 매트에 쓰러지고, 심지어 피를 흘리기도 한다. 모든 국민이 탄식을 내지를 때 김일은 불사조처럼 일어나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상대 선수의 머리를 잡고 한방, 꽝! 박치기를 날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끓어올랐다. 그 이후 2002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그런 환호성은 우리나라엔 없었다.
그 통쾌함을 간직한 60년대생은 1979년 10·26 이후 길고긴 민주화 투쟁에 들어갔다. 민주화운동은 1950년대 생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으나 그것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세대는 60년대생이었다. 지금은 그 이름마저 희미하게 잊힌 박종철(1964년생)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 민주항쟁이 절정에 달했고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갑작스레 끝났다. 사실 60년대생의 역사적 소명은 1987년 6월 29일에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쾌함과 더불어 즐거움도 많은 시절이었다. 매우 일요일 저녁 , , 으로 이어지는 골든 트리오 프로그램은 서민들에게 웃음과 격정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단체영화 관람을 했다. 수요일 5교시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학생주임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3열종대로 줄줄이 극장으로 향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1년 내내 영화 한 번 못 볼 처지였다. 50원을 내고 , , , , 등을 보았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소룡 영화였다. 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막대기 2개를 잘라 쌍절곤이랍시고 만들어서 어설픈 무술을 선보이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
1977년 이 대 히트를 치면서 국민가수로 등극한 조용필은 이후 연예인 전성시대를 열었다. 사상 최초로 제주도 사투리를 넣어 을 부른 혜은이는 최초의 여자 국민가수였는데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대중문화는 오늘날처럼 활짝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며, 30년 후쯤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들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김추자, 이은하, 최백호, 정태춘·박은옥 등이 있었고 맹인가수 이용복도 잊을 수 없는 명가수다. 60년대 생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수는 를 부른 샌드페블즈, 를 부른 활주로,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을 열풍으로 몰아넣은 산울림이지 않을까?
‘교련’, 그리고 ‘약속다방’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은 흑 아니면 백이었다. 겨울에는 검정 교모에 검정 교복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었으며, 여름에는 흰색 상의에 회색 바지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교련이 있어서 그나마 옷이 두 벌이었다. 1주일에 두 번 교련 수업을 받고 1년에 한 번 교련검열을 받았다. 대학 2학년까지 교련수업을 했는데 다행인 것은 군대를 3개월 면제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군대가 30개월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다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다방!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다. 그곳에는 모나리자를 닮은 후덕한 마담이 있었고 엉덩이를 촐싹거리며 테이블 사이를 누볐던 허벅지 굵은 레지가 있었다. 또 푹신한 안락의자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뿌연 담배연기가 있었고 매캐한 유황냄새가 있었고 따뜻한 커피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청춘이 고스란히 있었다. 우리는 다방에서 친구를 만났고, 미팅을 했고, 데이트를 했고, 역적모의를 했다.
모든 역사는 다방에서 시작돼 다방에서 끝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육각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수수께끼를 풀다가 간혹 호기를 부려 레지에게 커피를 사주곤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마담은 우리가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어른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곳에 있었던 약속다방, 양지다방, 별다방, 난초다방, 호수다방, 궁전다방, 아리랑다방, 아네모네다방... 당신은 분명 이 다방 중 한 곳에서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이제 다방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세대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것이 바로 다방이다. 잃어버린 것은 또 많다. 위문엽서, 채변검사, 도시락검사,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었던 남진과 나훈아, 오라잇~ 소리를 경쾌하게 외쳤던 버스 안내양, 명랑노래로 전국을 석권했던 듀엣 콤비 서수남과 하청일, 아나운서의 대명사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원맨쇼의 왕 남보원과 백남봉, 전 세계 시청률 1위였던 , 20년 넘게 치열한 대결을 펼친 미원과 미풍, 자유를 구가했던 구수한 싱어송라이터 송창식, 유치찬란한 대중통속 잡지의 대명사 ,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던 소년잡지 , 느끼한 목소리로 레코드판을 돌렸던 유리상자 안의 그 남자 DJ(일명 판돌이), 독서의 갈증을 풀어준 마음의 양식 삼중당문고, 70년대 영화계를 이끈 미남과 추남 배우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 이 모든 것들이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판타레이’ 일지언정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레이(panta rhei)’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김종필)는 김영삼(YS), 김대중(DJ)과 더불어 1980~2000년대를 지배한 이른바 3김 중 1명이었다. 386세대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JP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60년대생이 오롯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영광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김호경(金虎卿) 작가
37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인 1997년 제21회 오늘의작가상에 장편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장편 , , 여행에세이 , , 스크린셀러 ,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