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인 자살률은 OECD 회원국 중에서도 1위이며, 그 수치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노인의 자살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우울증의 경우 적절한 상담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례도 많다. 이처럼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노인들을 직접 만나 진정성 있는 상담을 통해 그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제안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자살예방 상담사’다.
서울노인복지센터 노인 일자리 사업단에서 만65세 이상 12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노인의 자살위기 사례 발굴 및 상담을 통한 우울증 감소를 통해 노인의 자살을 예방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들은 매월 36~40시간 자살예방상담사로 근무하며 소정의 급여를 받고 있지만, 월급보다 더 얻는 것이 많아 항상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자살예방 상담사'라는 제2의 직업을 통해 자살을 고민하는 이들에겐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도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은행 지점장보다 자살예방 상담사로 사는 요즘이 더 보람되고 마음이 풍요로워요."
1998년 은행 지점장 은퇴 후 크게 하는 일 없이 지내왔던 조희채(70)씨. 그러던 그는 3년 전 인터넷 모집공고를 통해 노인 상담사 일을 시작했다. 당시 일반 상담으로만 이뤄졌던 업무가 자살예방·성(性)인권상담·민생상담 등으로 나뉘자 조씨는 자살예방 상담사를 택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그는 “지난해 전화 상담 중 자살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40분 넘게 상담을 했죠. 그가 느꼈을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자아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설득해나갔어요. 상담이 끝난 후 119와 경찰에 연락해 그의 자살을 막아냈습니다. 그때 그 일로 노인 자살예방 쪽으로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살예방상담분야를 택하게 됐습니다”라며 그때 그 사건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고 설명했다.
조씨는 평소에도 타인과의 대화법이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강연을 듣거나 책을 읽는 등 친밀감 있는 상담을 진행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그는 상실감을 느끼는 이들에겐 그 무엇보다 목표설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조씨는 “먼저 자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해요. 그렇게 하려면 자기 장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거든요. 저는 상담할 때 ‘당신의 장점을 10가지만 써보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처음엔 ‘나는 장점이 없다’고 하신 분들도 10가지가 아니라 20가지, 30가지까지 써내려가죠. 본인들도 깜짝 놀라요.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스스로 목표를 정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스스로 더 발전하게 되는 거죠”라며 그만의 상담 노하우를 공개했다. 그는 더 친밀감 있는 상담을 위해 관련 책들을 많이 읽고 있다며, 끊임없이 노력해 이 일을 계속 해나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알코올 중독자로 살았던 지난날, 실제 경험을 통한 상담이 사람들의 마음 움직였죠.”
2011년 정년퇴직 후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그동안 학교에서 배우고 가정·사회에서 혜택받은 것을 모두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유을상(67)씨. 그도 한때는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털어놨다. 그 역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경험이 있는 한 상담사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며, 현재 그가 상담사로 활동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했다.
“다른 상담사에 비해 산 경험을 토대로 상담을 하다 보니 더 많이 공감하시고 도움이 된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당신이 뭘 알아?’라고 돌아섰던 분들도 제 앞에선 꼼짝 못 한다니까요.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의 경우엔 빈곤·우울·고독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론적인 이야기보다는 제가 겪었던 일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치유 사례를 들려주는 편입니다. 본인 마음이 움직여야 자살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해요”
인터뷰 중 유씨는 아주 중요한 얘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는 빠르게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노인 인구가 많아지니까 그분들이 갈 곳이 없어진 거죠. 대게 노인들이 종로3가 지하철, 탑골공원, 종묘공원 등으로 몰려나오는데,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들은 계속 소통할 사람이 필요하고 상담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처럼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랑 얘기해야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의 귀가 되어줄 가장 효과적인 인력이 바로 우리(노인 자살예방 상담사)라는 겁니다. 제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저는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할 계획입니다”라며 노인 상담사 인원이 확충돼 더 다양한 상담을 진행하고 싶다는 바람도 함께 전했다.
“절대로 좌절하지 마세요. 열정·희망·격려를 통해 젊은 세대와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현재 목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김복룡(70)씨는 1998년 봉사활동차 라오스에 방문해 마약 중독자들을 접한 후 마약 재활센터에 대한 생각들을 키워나가게 됐다. 국내 재활센터를 비롯해 미국과 말레이시아의 재활센터도 방문해 다양한 훈련을 받아온 그는 최근 이화여대에서 알코올 상담과 관련해 정식으로 2학기를 수료한 상태다. 그는 장차 마약중독 재활센터를 세울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장소만 준비되면 바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탄탄하게 준비했다며 자부심을 드러낸 그다.
김씨는 “마약중독자 대부분이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고, 실제 자살자도 많습니다. 2년 전, 직접 관리하고 기도했던 지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계기들로 이쪽 상담센터도 오게 됐죠. 앞으로 재활훈련소를 만드는 일을 진행하더라도 노인자살예방에 상담 일은 병행할 겁니다. 노인 자살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두고 정보를 교류해가며 각 분야를 서로 접목해 볼 계획입니다”라며 열의를 다졌다.
그는 인생2막 준비를 앞두고 방황하고 있는 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요즘 어르신들은 나이에 따라서 너무 좌절합니다. 절대로, 결코 좌절하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 좋은 신약들이 개발되기 때문에 수명은 연장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대에 벌써 좌절한다면 자녀들에 치이고, 젊은 세대에 치입니다. 정말로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교육하고 훈련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어려워지고 생활이 고단해집니다. 어르신들끼리 서로 소통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서로 소통하고, 협력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열정과 희망 그리고 격려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자살예방상담사 세 사람 모두 “이 일을 계속 해 나갈 것이고, 현재 직업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은퇴 이전 나 자신을 위해 땀 흘려온 시절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함께 고민하는 지금이 더 가치 있고 행복하다며 미소 짓는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 있게 말한다. “어려움에 빠져있다고 좌절하지 마시고 우리를 찾아오세요. 계속 찾아오세요. 함께 나누면 분명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고민이 있다면, 목표가 없다면, 격려가 필요하다면 그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그들을 찾아가자. 매주 셋째 주 수요일 오후 2시, 종로3가역 육의전광장으로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안산은 다른 시에 비해 공원이 많아 노인분들이 갈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살기 좋죠.”
안산시 노인복지 담당자의 말이다.
그 말을 곱씹어 보면 마치 ‘공원’이라는 공간이 노인의 삶에 유익함을 제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 안산시에 공원은 177여 곳으로, 경기도 내에서 수원(289곳)·용인(264곳)·고양(205곳)시에 이어 4번째로 많다(2011년 기준). 안산시의 규모가 경기도 31개 시·군 중 17번째인 것을 고려하면 다른 지역에 비해 공원이 꽤 밀집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그의 말대로 노인들은 공원 수와 비례하는 만족감을 표하고 있는지에 대해 직접 찾아가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안산에서 첫발을 내디딘 곳은 상록수역 부근 늘푸른광장.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급식 행사가 있는 날이면 노인들이 구름떼처럼 몰린다고 한다. 그 정도라면 평상시에도 노인들이 제법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3~4명 남짓한 노인들만이 각각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광장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고모(83)씨에게 주변에 어르신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그는 “우리 집 앞에 보면 공원이 있는데 거기 가면 할매·할배들이 많이 와서 놀지. 같이 가보실라우?”라며 고모씨 집 근처에 있다는 일동공원으로 안내했다.
가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느냐고 묻자, 고씨는 “특별할 게 뭐가 있겠어. 그냥 집 앞이니까 한 번 씩들 나와 보는 거지. 밥 먹고 슥하고 나와서 좀 떠들고, 바둑들도 두고 하다가 밥 때 되면 또 싹 들어가고 그래”라고 말했다. 일동공원에 도착하자 10명이 채 안 되는 노인들이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울에서 거주하다 최근 안산으로 왔다는 유모(72)씨는 “서울은 종로에 가면 노인네들이 우글우글 몰려가지고 왁자지껄 술 마시고 고래고래 싸우고 하더라도 그게 또 나름 재밌었단 말이지. 근데 여긴 살기는 좋은데 좀 재미가 없지”라고 말했다. 재미가 없는데 살기가 좋다고 말하는 그의 말이 의아했다. 이에 대해 묻자, 그는 “점잖고 건강하게 살긴 좋지. 근데 이 할아버지들도 어쩔 땐 개구지게 놀고도 싶고 소리도 박박 지르고 싶고 그래”라며 조용하게 웃었다.
일동공원을 벗어나 안산역으로 이동했다. 택시 기사에게 주변에 노인들이 많이 몰리는 공원을 소개받아 초지동에 위치한 ‘화랑유원지’로 향했다. 유원지 입구를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여 장기를 두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20명 남짓 모여 있던 등나무 벤치 주변으로 그들과는 섞이지 못한 채 멀찍이 앉아 있는 노인들도 곳곳에 보였다. 장기를 두고 있는 노인들을 등지고 앉아있던 김모(82)씨에게 왜 함께 어울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애들 노는데 어른이 껴서 뭐해. 나도 전에 안양 살면서 노인정 회장만 15년 했던 사람이야. 이제 그런데 가는 것도 재미없고. 그땐 60만 넘으면 다 노인이었는데 요즘은 누가 60대더러 노인이라고 하나. 그러니 애들이라고 하는 거지. 나는 그때도 노인네고 지금도 노인네잖아. 20년 넘게 노인으로 사니까 저러고 노는 것도 이젠 다 시시해”라며 풋내기 노인들 사이에서 진짜 노인들이 소외당한다고 털어놨다.
화랑유원지를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한참을 돌았지만 산책 삼아 나온 몇몇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유원지 입구만큼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곳은 없었다. 다시 입구 쪽으로 걸어가던 중 ‘안산 시니어클럽’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이곳이 안산에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그곳이 맞는가에 대해 안산 시니어클럽 김선희 과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김 과장은 “안산에는 곳곳에 공원이 많아 특별히 어느 한 공원에 어르신들이 몰리는 일이 없죠. 다들 흩어져 계시니까요.
오히려 종로 탑골공원처럼 확 몰려서 계실만한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어르신들은 주로 경로당을 많이 가시는데, 경로당을 못 가는 분들이 주로 공원으로 나오는 편이죠. 그리고 실제 어르신들은 경로당을 싫어하십니다. 정말 거기에 가게 되면 노인이라는 기분이 들어서랄까요? 그래서 밖으로 나오시는데 공원 외엔 딱히 갈 곳은 없는 셈이죠”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전에 화랑 유원지 내에 어르신들끼리 의기투합해서 ‘화랑 경로당’이라고 직접 만든 적이 있어요. 원래는 유원지 내에 텃밭처럼 사용하려고 비닐하우스를 두었는데 그곳에 어르신들이 의자도 가져오시고 장기판도 두고 하신 거죠. 어르신들끼리 만든 거니까 회비 없이 가입할 수 있어서 당시엔 꽤 많이들 이쪽으로 몰렸었는데, 어쨌거나 불법이라 결국 철거됐죠. 지금은 그분들이 다 어디로 가셨는지 저도 참 궁금하네요”라며 노인들이 모여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공원이 많아서 노인에게 나쁠 것은 없다. 쾌적하고 안락한 ‘쉼’이라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은 다 하고 있지만, 노인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것만이 최우선은 아니다. 언제까지 노인들은 쉬어야 하고 언제까지 그들은 공원에만 머물러야 하는가. 그들에게도 쉬는 것 이외에 또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원곡동 관산공원에서 만난 황모(72)씨는 이런 말을 남겼다. “생각해봐. 노인이 공원 말고서야 다른 곳에 가서 모여 있는 게 어울리는지. 그러니 어디 가려 해도 어색하고 눈치 보여 자꾸 공원으로 내몰리는 거야. 노인네들끼리 신 나게 놀아도 주책이란 소리 안 듣고 갈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그의 물음에 기자의 머릿속에도 커다란 물음표가 그려졌다.
1호선 지하철의 끝 인천역 근처의 차이나타운. 그 가파른 언덕에 있는 차이나타운을 지나 언덕의 정상까지 도달하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숨이 넘어갈 듯 말 듯 하던 찰나. 그 차이나타운의 최정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공원 ‘자유공원’이 있다.
쓰레기 하나 떨어져있지 않은 깔끔한 공원. 주로 신중년과 노인이 많이 찾는 공원인 탓인지 조작이 어려운 공원 디지털 안내판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채 꺼져있다. 이것 빼곤 벤치와 기타 시설물들 중 고장이 난 것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깨끗한 공원이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해 추위가 기승하던 3월 중순. 매일 콧바람을 쐬러 자유공원을 찾는다는 95세의 여성은 “오늘은 추워서 사람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의 말과는 달리 꽤나 많은 중년남녀가 자유공원을 찾았다. 그 여성이 매일 이곳을 찾는다고 했으니 아마 이곳을 찾는 평균 인파는 더 많은 것 같다.
챙이 긴 모자를 쓰고 팔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며 운동하는 여인. 굵은 컬의 파마머리를 한 중년여성과 빛바랜 헌팅캡 모자를 눌러쓴 중년남성은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잡고 데이트를 즐긴다. 장기판과 바둑판에 삼삼오오모여 훈수를 두는 남성과 이를 제지하는 바둑 플레이어들도 있다. 중년과 노인들이 많은 공원이었지만 깨끗하고 잘 정비된 공원이라 그런지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커플도 눈에 띄었다.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과는 달리 남녀노소가 뒤섞인 공원이었다.
반면 곳곳에 술에 취해 술기운을 폴폴 풍기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고량주 나발을 불며 길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도 보였다.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그 취객을 축으로 ‘비잉’ 둘러서 돌아간다. 이러한 광경을 본 29세 김 모씨는 “집에 계신는 것이 적적해 나온 것은 이해하지만 술 마시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에는 눈살이 찌푸려진다”고 손사래를 쳤다.
중년들도 할 말은 있다. 68세 정 모씨는 “솔직히 젊은이들이 보면 싫어 할 것 같다. 칙칙하다고. 젊은이 눈치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동네에는 갈 곳이 없다. 이곳에는 바둑을 두는 사람도 있고 말벗도 있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꽃샘추위로 옷깃을 두껍게 여몄던 3월 중순 임에도 추위를 무릎 쓰고 이곳을 찾는 이유 중 하나였다.
7~8년전 까지 만해도 오히려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곳이 이곳 자유공원이었다. 그렇다면 신중년과 노인의 발걸음이 자유공원으로 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여성합창단에 내준 노인 쉼터
다소 쌀쌀하고 흐린 날씨에도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이곳은 젊은이들의 데이트 명소였다. 인천광역시 중구의 한 투어 코디네이터는 “7~8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자유공원에서 중년이나 노인들은 현재만큼 많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중년과 노인들의 발길이 잦아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쉼터 건물을 여성합창단이 사용하면서 자유 공원으로 나오는 중년과 노인이 많아졌다”고 대답했다. 현재 공원 한 쪽에서 하고 있는 장기와 바둑 같은 게임들은 과거 2층 건물인 쉼터에 모여서 이뤄졌다고 한다. 많은 노인들이 찾아와 여가 생활을 즐겼다는 것이다.
코디네이터의 말에 근거해 지역 주민에게도 물어본 결과 여성 합창단이 사용하기 이전 노인들의 쉼터로써 사용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인천 중구에 문의했지만 여성합창단이 사용하기 이전 어떤 건물로 이용됐는지 파악한 중구의 부서는 단 한 곳도 없었다. 노인 복지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현재 노인의 쉼터에서 여성합창단에게 자리를 내준 건물은 공원 관리 사무소로 구실을 하고 있다. 중구 여성합창단은 지난해 본거지를 인천 중구 신흥동 3가의 중구문화회관으로 옮겼다. 그곳이 더욱 크고 좋다는 이유에서다. 중년과 노인들의 쉼터는 그대로 사라진 채 말이다.
중구 노인복지관 관계자는 “현재 자유 공원 주위에 특별한 노인 쉼터는 없다”며 "노인들을 위한 쉼터의 설립 계획은 특별히 없는 상태"라고 언급했다. 여성합창단과 같이 중구를 홍보할 수 있는 단체를 위한 투자는 커지고 있는 반면 노인들을 위한 안식처는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중년과 노인에 젊은이도 적절히 배합된 공간. 어떻게 보면 세대를 아우르는 특별한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세대 간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데이트를 즐기거나 운동을 즐기는 젊은이들 사이로 이곳저곳에 말을 건낼 공간을 찾아 눈치를 보는 노인들이 보인다. 자유공원에서 만난 중년과 노인이 이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는 노인이 되지만 막상 분주하게 사는 동안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여유를 갖는 사람은 드물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노후를 위해 지금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여운을 남기는 책이 오근재의 ‘퇴적공간’이다. 대학에 적을 두고 있던 저자가 현직을 떠난 다음 노인 문제를 자신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고 쓴 책이다.
서울에는 노인들만의 특별한 공간이 있다. 한 곳은 종묘시민공원이고 또 다른 곳은 탑골공원이다. 저자는 이 두 공간을 중심으로 한국의 노인문제를 독특한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퇴적공간’은 강의 상류로부터 떠밀려 내려 하류에 쌓인 모래섬과 같은 공간을 뜻하는데, 이 두 공간에 대한 비유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퇴적공간에 쌓여 있는 잉여 인간들의 모습을 기록한 이 책은 노년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머지않아 다가올 미래의 본모습”이라는 문장에 저자의 집필 동기가 담겨 있다.
노인이 된 다음 저자가 느끼는 소회는 어떤 것일까.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에 등장하는 벌레처럼 정년의 순간부터 자신이 이 사회의 걱정거리로 입장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벌레가 되기 전까지는 가족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지만 벌레로 변신하자 이전 가족 관계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자기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가족을 보는 서글픔을 지난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와 내가 몹시 닮아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돈으로 노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부 기관들이 의욕적으로 세운 노인전문기관들을 증설해도 욕구를 충분히 반영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은 파격적이다. “급식이든 프로그램이든 자신의 몸을 자기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정상적인 노인들에게 제공하는 ‘무료 제도’를 없애야 한다. 상징적으로 요금을 부과할지라도 그것이 우대일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노인들을 비루하게 만들고 사물화하며 자생력을 잃게 해 결과적으로 사회적 부담을 증가시킨다.”
짐작은 했지만 이 책에는 젊은이들도 깊이 새겨야 할 지적이 한 가지 들어 있다. 내가 누구인지, 사후에 어떻게 되는지 등과 같은 본질적인 질문은 노년이 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15세기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 속의 노인이 흘러가는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처럼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은 노인이 되어서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노인이라도 어느 정도 굳건한 삶의 지향점을 지니지 않는다면 삶은 이리저리 방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은 젊은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노인들에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그런 정책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정치권에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행복이란 자기의 욕망을 거두는 순간, 즉 소유물이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찾아드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국가가 노인의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불편함을 나눠 가지려는 가상한 생각은 아름답지만, 결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조언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노인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우리사회에서 노인은 과연 누구인가?
‘퇴적공간’의 저자인 오근재는 현대 사회에서 ‘노화’란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로 유기체 기능의 퇴행과 감퇴만을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건강한 신체와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노동 시장에서 퇴출되면 사회적인 쓸모를 인정받기 어렵고,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상품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인된 직업으로 일정 수준의 소득을 벌어들이지 않는 이상, 나이든 자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인 잣대로 ‘노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그는 노화는 한 개인이 노동 시장으로부터 밀려나는 거리에 비례한다고 말한다.
대학 교수로 20년간 근무한 저자는 교수라는 직함에 물러나면서 사회적 기준의 ‘노인’이 됐다고 고백한다.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인천자유공원, 종로3가, 낙원동 뒷골목 등 노인들이 운집한 공간을 누비며 노인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 저자가 말하는 ‘퇴적 공간’이다. ‘퇴적 공간’은 도시의 인위성에 밀려나고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들이 강의 상류로부터 떠밀려 내려 하류에 쌓인 모래섬처럼 몰려드는 모습을 지칭해 만든 단어다.
‘퇴적 공간’에서 만난 노인들에게 저자는 동질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 가족과 어울리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않은 노인들이 주를 이루는 이 공간이 노인들 또는 제3자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파악하고자 했다.
저자는 우리가 노인의 소외 문제를 모른 척할 경우 늙음과 죽음, 나아가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라는 본원적인 사유를 받아들이는 감각 자체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 경고한다. 교수출신답게 인문·철학·예술·역사 등 다채로운 관점으로 한국의 노인복지 실태도 고발한다. 일과 가정에서 추방당해 ‘퇴적공간’으로 밀려난 노인들. 그들에게 ‘배려’라는 이름의 ‘배제’를 거두라고 저자는 목소리를 높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