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말과 글은 남아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암 투병 끝에 지난달 26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고인은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작가 등으로 활동하며 인문학 부문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인’으로 불렸다.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이어령 전 장관은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등장했다. 그는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한 전후 세대의 이론적 기수가 됐다.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1967년부터 30여 년 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퇴임 후에는 석좌교수로 활동했다.
저술 활동도 활발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1984년 발표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꼽힌다. 하이쿠, 분재, 트랜지스터, 쥘부채 등 일본 문화가 가진 독창적인 특징이 ‘축소지향’이라는 주장을 펼쳐 화제가 됐다. 2006년에는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는 ‘디지로그’ 사회가 올 것을 전망한 바 있다.
이밖에도 ‘이것이 한국이다’(1986), ‘세계 지성과의 대화’(1987),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달라진다’(1997),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 ‘생명이 자본이다’(2013) 등 그가 펴낸 책만 300권이 넘는다. 이어령 전 장관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생전 쓴 책들이 각종 도서 차트에서 역주행 인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주요 독자층은 40, 50대다. 이 책은 정확히 말하면 이어령 대담집이다. 인터뷰어는 ‘조선비즈’ 김지수 기자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과 같이 매주 화요일 스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어령 전 장관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풀어냈다.
2017년 암 선고를 받은 이 전 장관은 치료를 거부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글을 썼다. 그는 ‘죽음’은 ‘생의 한 가운데’ 있다고 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머멘토 모리’라는 책을 낸 적도 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죽음을 ‘관찰’하고 싶어 했다.
그는 “인간은 암 앞에서 결국 죽게 된다네. 이길 수 없어. 다만 나는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말을 하겠다는 거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나가면 그게 암을 이기는 거 아니겠나”고 말했다. 그러나 ‘매일 밤 죽음과 팔씨름’을 하고, ‘암세포는 내 몸의 지우개’라는 사실을 느껴가는 이 전 장관은 글을 쓰는 것이 녹록하지 않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몸과 반대로 이 전 장관은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밝아지고 아이처럼 순수해졌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라네. 죽음은 어둠의 골짜기가 아니야. 세계의 끝, 어스름 황혼이 아니지”라고 어록을 남겼다.
이어령 전 장관은 대화를 통해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른들은 '다 안다'고 하지만, 사실 아는 척을 할 뿐 진실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 전 장관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령 전 장관은 어렸을 때부터 솔로몬의 지혜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항상 모든 것에 의문을 품었다. 혼날 것이 두려워서 고분고분 둥글게 살지 말고, 질문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질문자의 삶을 산 그는 ‘존경은 받았지만 사랑받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천재는 고독하다는 말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또한 이어령 전 장관은 순수한 어린아이는 ‘영성’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죽음을 느꼈다는 이 전 장관. 그는 잠 자는 어머니의 코 밑에 손을 대본 적도 있고, 여섯 살 때는 혼자 굴렁쇠를 굴리다 ‘절정의 시간’인 정오에 눈물을 흘렸다고.
훗날 이는 ‘88올림픽’ 당시 굴렁쇠 소년으로 재현 됐다. 정오에 혼자 나와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 넓은 경기장에서는 오직 굴렁쇠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굴렁쇠 소년’의 침묵은 매우 센세이션했고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이어령 전 장관은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느끼고 ‘디지로그’, ‘생명자본주의’ 시대가 올 것을 예상한 것에 대해 ‘영성’ 덕분이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보다 더 영성을 느낀 사람은 세상을 떠난 딸 이민아 목사라고 했다. 이 전 장관은 평생을 그리워한 어머니, 딸과 만나게 됐다.
이어령 전 장관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글’과 ‘말’을 남겼다. 다음 달부터 그가 남긴 유작 30여 편이 출판된다. ‘한국인 시리즈’와 함께 '알파고와 함께 춤'(가제), '회색의 교실'(가제) 등이 출간될 전망이다.
“스스로 묘비명을 쓰라고 한다면 ‘평생 퍼내도 퍼내도 항상 갈증을 느껴 우물을 판 사람’이라고 말하겠어요. 영원히 두레박의 갈증을 가지고 평생 살아온 사람. 두레박은 늘 비어 있어야 물을 퍼낼 수가 있지요. 이 비어 있는 것이 갈증입니다. 영원한 갈증이지요.” - 2017년 ‘브라보 마이 라이프’ 인터뷰 중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석좌교수가 숙환으로 26일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생전에 문학평론가, 언론인, 작가,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최고 석학 손꼽혔던 고인은, 노태우 정부 때 신설된 문화부 초대 장관(1990~1991)이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0)를 비롯해 '축소지향의 일본인'(1984), '이것이 한국이다'(1986), '세계 지성과의 대화'(1987),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달라진다'(1997), '디지로그'(2006),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 '생명이 자본이다'(2013) 등 수많은 저서를 펴냈다.
과거 고인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투병과정에 대해 “병까지도 인간을 이길 수 없게 하는 방법은 친구로 삼는 것이다. 적으로 맞서 싸우면 병을 이길 수 없다”며 투병이나 치병이 아닌 친병(親病)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그는 인터뷰에서 AI와 4차산업을 화두로 삼으며 새로운 지식 분야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표현했었다.
또 그는 본지 시니어 독자를 향해 당부의 이야기를 남겼었다.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공자님 말씀대로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지지자(知之者)는 인간이 아니라 AI입니다. 지지자 위가 호지자(好之者)이고, 또 그 위가 낙지자(樂之者)입니다. 바로 지호락(知好樂)이지요. 연애가 노동이라면 비 맞아가며 연인을 기다리겠어요? 골프가 땅을 파는 노동이라면 18홀을 돌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지호락을 추구하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마음과 자세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학교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유족 측은 5일간 가족장으로 치를 계획이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2021년 12월, 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1월 폐암 진단을 받고 꼬박 1년을 투병한 후 그렇게 떠났다. 그와 내가 사귄 지 10년째 되던 해이기도 했다. 나의 지난 한 해는 벽두부터 그의 병간호로 시작됐고, 소생과 회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떠나며 한 해가 저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새해가 희망 없이 밝았다.
장례를 치른 후, 간호를 하느라 1년 동안 함께 지냈던 그의 대전 집을 나와 다시 서울 내 집으로 돌아왔다. 환자를 돌보는 도중 간간이 들러 옷가지 등 필요한 것들을 챙겨가곤 했지만 그가 떠나고 나니 내 집 풍경조차 다르게 느껴졌다. 칫솔이나 면도기 등 내 집에 두었던 그의 소소한 물건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이제는 영원히 주인 잃은 것들, 그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들을 없애지 못하고 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더 아프니까….
그와 나는 20년 전 어느 기업인 모임에서 만났다. 나도 그도 나름 단단한 사업체를 꾸리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이혼한 상태였지만 10년을 서로 바라만 보는 중이었다. 10년 동안 썸을 탔냐고? 그건 아니고 좋은 사람이니까, 좋아 보이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사귀는 사람이 있겠거니 서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12월 중순의 첫눈 내리던 날, 첫눈치고는 늦었고 첫눈치고는 제법 눈송이가 실했다. 모임이 끝난 후 지하 주차장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우연히도 그와 나의 차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와 그렇게 가까이 마주한 것도 10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천년의 사랑이 시작되고
다소 어색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아 고개를 기울여 그가 먼저 나가도록 손짓을 해 보였다. 그는 또 그대로 내게 먼저 차를 빼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서로 그렇게 배려의 몸짓을 하다가 내가 먼저 차를 움직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의 시선까지 느껴져 더 당황스러웠다. 난감한 상황에 처한 내게, 무슨 일인지 잠시 지켜보던 그가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하지만 그 사람이라고 별수 있나. 고장의 원인을 찾지 못한 데다 이미 밤늦은 시각이니 내 차는 주차장에 그대로 두고 그가 나를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깜깜한 밤하늘에 흰 눈이 별처럼 쏟아졌다. 우리 만남의 서곡이자 팡파르처럼. 나란히 함께 차를 타고 오던 시간이 의외로 편안했고,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다.
천생연분이란 촌스럽고 진부한 표현을 내가 할 줄은 몰랐다. 이혼 후 10년 만에 본격적으로 만난 그 사람, 이제야말로 하늘이 점지해준 짝을 찾았다고 믿었다. 그와는 모든 것이 잘 통했고 모든 것이 좋았으니까. 가치관, 취미, 식성, 관심사, 대화는 물론,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몸까지 잘 맞았다고 솔직히 고백하리라. 국내는 물론이고 코로나 이전에는 자유로이 해외여행을 다녔고 맛집이란 맛집은 죄다 섭렵했다. 전시, 공연, 독서 등 문화생활도 알뜰히 했다. 우리는 성인이 된 자녀들이 각자 둘씩 있었지만 모두 독립해서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었기 때문에 자녀 문제로 신경 쓸 일도 없이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관계였다. 느긋하게 나이 들어갔고 다가올 노후를 함께 설계하며 행복한 노년을 꿈꿨다.
사랑의 보험이 깨지고
그러던 그와의 화려했던 세상이 불과 10년 만에 흑백의 암전을 맞았고 그는 영원히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랑은 떠나도 삶은 지속되는 거라지만, 환갑도 한참 지난 내가 그걸 모를 리 없지만 그가 없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우두망찰 길을 잃었다. 그가 없는 하늘 아래 나는 어떤 생을 살아야 할까. 혼자 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그와 나는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성혼 선언문의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견고한 우리 사랑 한가운데 죽음이 끼어들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젊지 않은 나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미 노년의 문턱에 들어섰다. 그가 없는 나의 노년, 그 막막한 길을 홀로 걸어갈 수 있을까. 나는 요즘 부쩍 늙어버린 기분이다. 지난 1년간 그의 병간호로 쇠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사랑을 잃은 슬픔과 삶의 막막함 때문이리라. 홀로 늙어감,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이 든 여자의 사랑은 사랑을 하는 중에도 버겁다. 더구나 우리는 동갑이 아니었나. 여자로서, 그것도 젊지 않은 여자로서 같은 나이의 남자에게 위축되지 않는다면 약간은 거짓이리라. 내 경우 역시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관하게 문득문득 내 나이를 의식하곤 했다. 아니다,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해도 그게 무슨 대수라고. 내가 젊은 여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와 나의 사랑에 무슨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그와 만나는 동안엔 오히려 내 나이를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가 가고 나니 내 나이가 갑자기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 나는 혼자 남겨진 ‘나이 든 여자’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사랑은 보험이라는 말이 있다. 홀로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할 상대를 찾는다는 뜻이란다. 더는 다른 상대를 만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기에 성실한 보험 납세자처럼 꼬박꼬박 애정을 쏟고, 서로를 챙기다 보면 보험의 만기가 도래하듯 안온한 노후를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들린다. 노년의 원만한 부부가 전형적인 그 모습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정성스레 부어가던 보험이 중간에 깨져버린 것 아닌가. 새로 들 가능성, 새로 들고 싶은 마음도 이제는 없다. 탈 수 있는 보험금 없이 홀로 노후를 맞는 대열에 내가 동참한 것이다.
만날 사람을 다 만났다면
어느 종교계 방송에서 환갑이 지나면 인생에서 만날 사람은 다 만난 거라는 말을 들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산다는 것은 만남의 연속이라 할 때 소위 반환점을 도는 나이가 되면 사람과의 새로운 인연은 더 이상 별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배우자가 되었든, 연인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미 맺어져 있는 인연을 일부러 끊어낼 필요는 없겠지만 혹여 기존 관계에서 자리가 비어 새 인연을 들인다 한들, 관계 맺기를 통한 성장판은 이미 닫혔다는 의미다. 마치 빠진 치아 자리에 임플란트나 틀니를 해 박는다 해도 치아 본연의 성질과는 무관하듯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성장하고 누리고 진화할 수 없다면 더는 살아도 산 게 아니란 의미일까. 물론 그건 아닐 테지. 이제 저 너머의 존재, 신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겠지.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는 알지 못했던, 알아도 제약적이며 한계가 있었던 관계의 장막을 거둬내고 영성에 눈을 떠야 한다는 의미겠지. 그래야만 성장을 지속할 수 있고, 실상은 그러한 성장이 참 성장이라는 의미일 테지. 세속적 희로애락 속에서 울고 웃던 나를 관찰자, 주시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교정하고 회복되도록 하는 과정일 테지.
내 경우라면 그의 빈자리를 하나님 혹은 부처님으로 채워야 한다는 뜻일 테니 교회나 성당, 절에 나가 위로를 구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그 얼마나 진부하고 맥 빠지는 소린가. 나는 지금 그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간절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외로움에 애간장이 녹아내릴 지경인데, 눈에 그 존재가 보이지도 않고 귀에 그 음성이 들리지도 않는 신을 통해 위로를 구하라는 말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공기를 뻐끔거리며 배를 채우라는 소리처럼 공허하게 들린다. 위로받기는 고사하고 왜 그를 내게서 빼앗아갔냐고, 이제 겨우 64세, 아직 죽음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나이의 그를, 자기 분야에서 드물게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를, 무엇보다 나와의 변함없는 애정으로 행복의 절정기를 누리던 그를 무슨 이유로 데려가야 했냐고 따지고 대들고 싶은 심정이다. 신도 질투를 하냐고, 그렇다면 신도 아니지 않냐고.
차라리 그와 혼인을 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내가 그의 아내였다면 세상 떠난 그를 대신해 현실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가족 내의 위치에서 자리를 지키며 감당할 역할들로 사별의 아픔을 추스를 여지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껏’ 그의 연인이 아닌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그 상실감과 무력감만이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전부다.
다시 빛을 찾아서
슬픔에 겨워 탈진하는 하루하루 중에도 간간이 빛을 느낄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평안과 내적 안온함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실은 나는 그가 떠난 이후 성당에 다닌다. 매주 수요일마다 교리 공부도 한다. 신앙심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고 그저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생전에 그는 신앙이 없었지만 왠지 성당에 가면 영혼이나마 그가 내 옆에 앉아 함께 미사를 드리는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지곤 한다.
올해로 나는 65세가 되었다. 10년 전 55세에 만난 그가 떠나고, 2022년의 출발선에 혼자 오도카니 섰다. 혼자라고 하지만 어쩌면 내 옆에는 신이 서 계실지도 모른다. 신은 무언의 침묵을 통해 나와 동행할 채비를 하고 계시는 걸까. 왜 신은 굳이 내 옆자리에 서려고 하시는지. 나는 그 사람 하나로 행복했건만. 하긴 연일 눈물로 어룽져 시야가 흐려진 내 눈엔 생의 완주 지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신의 손길에 의지해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나는 누군가의 인도가 절실하다. 그러나 앞서 방송 내용처럼 나 또한 이제 더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동반자를 구하고 싶지 않다. ‘사람 대신 신’이란 결단에서가 아니라 또다시 그 존재를 잃고 슬픔의 늪에 빠져 허둥대거나 흐느적거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생 한 번으로 족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후의 상실감과 그리움, 그것은 너무나 혹독하기에.
병이라는 불청객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인의 삶마저 크게 흔든다. 원망, 자책, 후회 등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모두가 함께 가라앉아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성숙의 시간으로 여기고, 같은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있다. 루게릭병으로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된 아버지의 투병기를 연재하는 웹툰 작가 긍씨(박은선, 31)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매일매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8년의 유학 생활을 정리한 후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자 돌아온 집. 아버지 별씨(박한규, 69)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힘겹게 인사를 건넸다. “아빠가, 못 나가서, 미안해. 고생, 했지?” 어눌하고 느릿한 아버지의 음성. 아프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들은 것보다 심각하게 느껴졌다. 8년 만에 만난 별씨는 익숙하지만 가장 낯선 모습이었다.
처음은 손 저림이었다. 점점 반사신경이 둔해졌고, 손의 힘이 갑자기 풀리거나 바지를 갈아입을 때 균형을 잃는 등의 이상 증세를 보였다. 대학병원을 전전한 결과, 이전부터 앓고 있던 목 디스크로 인해 신경이 눌릴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듣고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병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2017년 끝자락에 ‘근위축성 측색경화증’,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통제되지 않는 몸 안에 갇혀버린 별씨 가장과 보호자의 역할을 모두 떠맡은 어머니. 가족들은 현실 부정과 절망을 반복하며 긴 시간을 방황했다.
당연하게 누렸던 일상이 달라진 것은 당연지사. “마트에서 아래층으로 이동하려 무빙워크에 발을 디뎠는데, 이상했어요.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는 무빙워크를 타는 대신 뒷사람들에게 사과하며 황급히 몸을 돌리시더라고요. 당황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나 아버지를 불렀는데 말이죠. 살짝 짜증이 난 상태로 왜 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물으니 ‘무빙워크가 너무 빨라서 발을 얹으면 넘어질 것 같았어’라고 하셨어요. 살면서 단 한 번도 무빙워크가 빠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수단이 누군가에게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 존재라니. 제가 사려 깊은 시선을 갖추지 못했던 거죠.”
‘아픈 아버지’를 둔 딸을 향한 주변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일부 사람들은 지나치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요. 나를 위해 해봄직한 행동들에 제약이 걸리는 기분도 들었어요. 연애나 여행 같은 것들. ‘부모님이 아프신데?’라면서 그걸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에게 슬픔 혹은 분노만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요.”
흔들리는 시기도 있었지만, 긍씨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별씨와의 시간을 차곡차곡 기록하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면 좋을 것 같았어요. 아버지도 ‘내 이야기가 누군가한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뜻깊은 게 아니겠느냐’고 하셨죠. 응원을 제일 많이 해주셨어요.”
‘난치병’을 벗 삼아
웹툰을 연재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긍씨는 약 5만 명의 독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공감과 응원의 메시지가 많이 와요. 병을 앓고 있거나, 가족이 투병 중인 분들이 제법 있더라고요. 덕분에 씩씩하게 이겨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하세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타이밍이 훨씬 늦게 찾아왔을 것 같아요.”
창작자로서 어느 정도 자리 잡았지만 별씨 눈에는 그저 ‘막둥이’다. 매일 아침 ‘오늘도 은선이의 하루가 희망의 날이 되길 바라며. 아빠 딸로 태어나서 정말 고맙다’와 같은 사랑이 가득 담긴 메시지가 도착한다. “아버지는 당신의 난치병을 친구라 부르시더라고요. 이놈을 벗으로 삼으면 조금은 사뿐해진 마음으로 더 자주 웃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그 강인함의 경도를 제가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저희한테 긍정적으로 씩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고 하세요. 저도 이 상황을 덫에 걸렸다고 생각하기보다 태풍이 불어와도 중심을 잃지 않고 굳건히 버틸 수 있는 닻이 생겼다고 여기기로 했어요. 그리고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힘껏 돌려줄 수 있는 순간이 왔다고 봐요.”
긍씨는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투병 중이라면, 병이 찾아온 건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게 가장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서 어떤 게 문제였는지 원인을 찾아봐야 소용없어요. 오히려 당사자는 그 상황에서 스스로 몸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 있거든요. 병은 잘못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으니까요. 또 병이 생겼다고 해서 어제까지 잘 웃던 사람이 오늘부터 계속 울어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본인의 희로애락을 모두 소중히 여겨야 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죠. 노년에 찾아오는 비극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급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로 인해 노인 돌봄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24시간 돌보기 어려운 현대사회에서는 간병인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커지는 추세다. 이에 간병이 필요한 사람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간병인을 연결해주는 ‘간병인 중개 플랫폼’이 인기를 끌고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간병인 중개 플랫폼들은 간병인을 매칭해주는 기본 서비스에 각 기업의 특화된 기술과 독보적인 서비스를 더해 각자의 특장점을 지니고 있다.
자체 알고리즘과 교육으로 전문성 높인 ‘케어닥’
간병인 중개 플랫폼 시장을 선도하는 ‘케어닥’은 간병인뿐만 아니라 요양보호사와 요양시설도 중개한다. 전국 4만여 개 요양시설 정보를 확보하고 있고, 국내 간병인의 10%가 넘는 1만5000여 명이 케어닥 서비스에 가입해 매달 2000여 명의 케어코디(간병인과 요양보호사)가 활동 중이다.
2018년 서비스를 시작한 케어닥은 지난 3년간 케어코디 약 3만 명의 활동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체적인 매칭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매칭 알고리즘을 통해 케어코디는 자신의 능력과 난이도에 맞는 일자리를 추천받고, 간병인을 구하는 보호자는 환자 건강 상태에 적합한 경력을 갖춘 케어코디를 우선으로 찾을 수 있다. 간병인과 환자에 대한 기본 정보 외에도 거동 여부, 인지 정도, 필요 돌봄 내용 등 22개 항목을 개인화했다.
케어닥은 이들만의 노인 돌봄 교육 커리큘럼을 통해 보호자와 간병인의 신뢰도 얻었다. ‘간병은 교육이 필요하다’라는 신념으로 전문성 개발과 간병인 문화 개선을 위해 무상으로 간병인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케어닥의 케어코디는 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 매일 돌봄일지를 작성하고 해당 데이터를 보호자에게 공개하고 있다. 돌봄일지에는 식사, 소변 횟수 등 매일 확인해야 할 내용이 포함된다.
입찰제 매칭으로 비용 부담 던 ‘케어네이션’
2013년 설립된 ‘주식회사 에이치엠씨네트웍스’의 앱 서비스 ‘케어네이션’은 2021년 대한민국 최고 브랜드 대상 ‘간병인 매칭 플랫폼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플랫폼이다. 케어네이션은 환자의 의료 정보 및 빅데이터 기반으로 환자와 간병인을 연결해주고 있다.
케어네이션은 올해 업계 최초로 환자 데이터의 수집과 분석이 가능한 ‘데이터랩’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최신 간병 시장 동향 및 전망을 살펴볼 수 있는 ‘대한민국 간병 동향 리포트’를 매월 발간하고 있다. 리포트에는 환자 통계, 간병인 통계, 질환별 간병 기간 등을 제공해 간병 시장 동향은 물론 질환을 가진 환자와 보호자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한다.
간병인과 보호자가 서로 비용 부담을 덜 수 있는 ‘간병비 입찰제 시행’ 역시 케어네이션만의 특장점이다. 간병인과 보호자는 서로 합의된 가격으로 계약하는 입찰제 기반으로 연결돼 추가비용 발생 등의 부담을 덜 수 있다.
간병비 정찰제 강점 내세운 ‘좋은케어’
헬스케어 IT 기업인 ‘유니메오’의 간병인 구인구직 플랫폼 ‘좋은케어’는 수도권 중심 상급종합병원을 포함한 50여 개의 병원의 입원환자들과 간병인들을 매칭하고 있다. 좋은케어의 특징은 기존 간병인 시장에서 천차만별이었던 비용 문제 해결을 위해 정찰제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간병인 시장의 거래 투명성을 위해 서비스 론칭 전 1년 동안 시장조사를 통해 간병인 비용 통계를 내고 이를 기준으로 자격증 보유 등 조건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비용 구조를 만들었다.
좋은케어는 간병인 중개 서비스에서 한발 더 나아가 간병인과 환자·보호자의 정신건강까지 챙기는 심리상담 서비스 ‘좋은상담’도 개발했다. 좋은상담에서는 투병, 간병 스트레스 등 고민에 대해 비대면 영상 상담을 제공한다. 전문상담 인력은 자격증, 전공, 경력 등 평가와 함께 면접을 통해 상담역량을 평가해 선발한다.
유니메오는 의사소통이 어려워 심리 상담이 불가능한 환자들을 위해 ‘멀티 모델 감정 분석 모델’을 개발 중이다. 이는 시니어의 텍스트와 음성 데이터의 특징을 분석하여 시니어의 감정 유형을 분류하는 AI 모델로서, 환자의 사용 어휘, 억양 및 톤을 분석하여 그의 심리 상태를 판별할 수 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지난달 나는 아내와 재결합했다. 20년 만이다. 지금 내 나이는 70, 긴 외도 끝에 이른바 조강지처의 치마폭으로 ‘기어들었다’. 나는 서울의 명문 치대를 나와 강남에 치과를 개업하고 큰 기복 없이 순탄하게 운영하고 있다. 당시 강남은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선견지명으로 일찌감치 터를 잘 잡았다. 병원에 간호사도 여럿 두었는데 그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우리 병원의 수간호사 격이라 나이도 제법 있어, 나와는 고작 열 살 남짓 차이 났다. 집이 가난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간호조무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이 바닥에서는 베테랑에 속했다.
그녀는 40 즈음에, 그러니까 내가 쉰 살 되던 해 우리 병원에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말하는 나의 오피스와이프가 되어주었다. 치과 업무를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나의 일과 나의 삶을 동시에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나의 꿈과 나의 좌절을 공감하며 위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내한테서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더구나 어린 나이에 사회와 부딪히며 나름 내공을 쌓은 덕에 타인에 대한 이해심도 깊었다. 무엇보다 영리하고 야무졌다. 급기야 나는 그녀와 딴살림을 차렸다. 이혼은 하지 않았다. 아내가 원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까짓 절차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와 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내겐 더 바랄 것이 없었으니까. 그럼 아내는? 아내는 사랑하지 않았냐고? 아내는 아내고 그녀는 그녀였다.
뻔뻔하다고 나를 욕해도 하는 수 없다. 나도 안다. 나는 욕을 먹어도 싸다. 단순한 바람으로 그쳤다면 차라리 덜 욕을 먹었으려나.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함께 살수록 뒤늦게 참사랑이 찾아온 거란 믿음이 솟았고, 그녀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랬던 그녀와 헤어진 후 돌이켜보면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신고를 하고, 그녀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는다. 그러면 적어도 쪽박은 차지 않았을 테니까. 정식 부부였다면 뭐라도 공동 명의로 남은 게 있었을 테니.
무슨 소리냐고? 그녀는 함께 살던 아파트와 내 전 재산을 독차지한 후 나를 내쫓았다.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녀 명의로 아파트를 사줬고, 집을 나온 나는 자연스럽게 그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았다. 그녀의 아파트였지만 사는 동안은 ‘우리의’ 아파트였던 셈인데, 헤어진 마당에는 엄연히 ‘그녀의’ 아파트란 사실에 나는 치를 떨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치과 수입을 그녀가 관리하는 일도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 살림을 하는데 여자가, 더구나 야무진 그녀가 돈 관리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녀는 재테크에도 제법 소질이 있어서 적절한 투자로 돈을 불려나가는 재주도 있었으니까. 20년간 아내에게 보내는 생활비를 빼놓고는 내 돈도 그녀 돈이요, 그녀 돈도 그녀 돈인 줄 진정 난 몰랐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20년 생활을 청산하면서 몸뚱이만 남게 된 것이다.
헤어진 후 내 수중에는 생활비를 넣고 빼고 하던 허드레 통장 하나뿐. 잔고라곤 겨우 이삼백만 원. 그 통장과 옷가지만 들려서 나더러 나가라고 했다. 법에 호소하여 찾아올 돈이라곤 전혀 없었다. 실상 나는 돈보다 그녀와 헤어지게 된 것이 더 충격이었기 때문에 재산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왜 쫓겨났냐고? 나도 그걸 모르겠다. 20년을 함께 살았으면 부부와 다를 바 없건만, 지난 20년 동안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나와 살았던 것일까.
그 길로 아내를 찾아갔고, 아내는 나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나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병원과 아내의 집, 아니 이젠 내 집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아내와 나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는다. 아내가 지난 이야기를 꺼내며 바가지를 긁지도 않는다. 언제 폭탄이 터질지 조마조마하지만 겉으로는 평온이 유지되고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20년 만에 아내와 재결합한 사연이다.
한 달 전 나는 남편과 재결합했다. 내 나이 68세, 남편이 집을 나간 지 2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나갈 때처럼 올 때도 빈 몸, 빈 손으로. 남편을 선뜻 받아준 나를 주위에서는 등신이라고 했다. 등신 중에서도 상등신이라고 했다. 지난 세월 그 고생을 한 것이 억울하지도 않냐면서.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 인간을 받아줬냐는 거다. 안 할 말로 멀쩡하게 함께 살던 남편도 나이 드니 귀찮아서 떼놓을 궁리를 하는 판에. 혹시 데려다놓고 복수하려는 거냐고까지 했다. 혹자는 남편이 그렇게 좋냐며, 그렇게 사랑했는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살았냐고 진심으로 물었다. 사랑? 솔직히 그건 모르겠다. 남편을 사랑해서 받아준 거냐고 묻는다면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할 수밖에.
소설가 이외수의 아내 전영자 씨가 몇 년 전 졸혼했다가 뇌출혈로 투병 중인 남편을 돌보기 위해 최근에 다시 합쳤다지만, 내 남편은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졸혼으로 따진다면 우리 부부는 이미 20년 전에 남남이 되었지 않나. 그런 사이에 무슨 새삼스럽게 사랑 타령…. 그럼 돈 때문이냐고? 나이 70에 손 떨려서 앞으로 얼마나 진료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며, 게다가 이미 소문이 자자하게 났을 테니 환자인들 제대로 올까.
이쯤 되면 내 행동에 대한 명분이 필요하다. 아비투스라는 게 있다.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제2의 천성을 일컫는 말이다. 한마디로 내가 속한 계층,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즐겨 하는 일 등 타인과 나를 구별 짓는 취향, 습관, 아우라를 일컫는다. 즉 남편을 받아들인 것은 나의 내면화된 천성에 기인한 품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아가 20년을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진 것 또한 아비투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천성과 그 여자의 바탕이 다름에서 온. 걸레를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행주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리라.
즉 내가 남편을 받아들인 건 그를 끔찍이 사랑해서도, 나의 현실에 부족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눈물도 말라버린 그 수많은 날들이 곰삭아 이제 독립과 자유로 보상을 얻게 된 마당에 새삼스럽게 그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속옷을 빨아주는 게 난들 즐거우랴. 아니 그런 것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 무엇보다 나의 내면화된 선비 기질과 인격이 질척함이나 천박함과 함께 뒹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번 재결합은 나의 높은 자존감의 선택이다.
중년에 떠난 남편이 초로의 노인이 되어 내 곁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코 고는 소리만큼은 그대로다. 부부로 이 남자와 남은 시간을 잘 살아내느냐 마느냐는 나 하기에 달렸다. 나의 아비투스를 신뢰하며!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나는 치매 의사입니다 (하세가와 가즈오 외 공저·라이팅하우스)
평생 치매를 연구한 하세가와 박사가 치매에 걸리면서 써 내려간 투병 기록. 책을 통해 치매를 두려워하는 모든 이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빨리 은퇴하라 (최승영 저·이은북)
은퇴를 앞둔 이들을 위한 진로탐색서. 단순히 불안한 마음을 잡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점점 단단해지는 중입니다 (김영미 저·혜윰터)
노화로 우울감을 느끼던 저자가 환갑의 나이에 자전거 라이더가 된 이야기를 담았다. 어릴 적 사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전국 자전거길을 섭렵한 저자의 도전이 짜릿한 설렘을 선사한다.
빅토르 위고와 함께하는 여름 (로라 엘 마키 외 공저·뮤진트리)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인생 철학을 그가 남긴 희대의 명작들로 살펴본다. 평생 민중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정의를 향해 나아갔던 위고의 삶이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전한다.
KBS TV에서 PD로 근무하던 심웅섭(62)은 어느 날 퇴근길에 뜬금없는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아파트를 올려다보면서였다. 저 메마른 잿빛 콘크리트 상자 안에 살다니, 이거 실화냐? 그렇게 중얼거렸던 모양이다. 심웅섭의 말에 따르면 눈물까지 핑 돌더란다. 그날 밤 그는 아내에게 선언했다. “나 아파트에서 못 살겠어!” 이후 그는 도시 변두리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해 살았는데, 그즈음 내심에선 귀촌을 향한 희망의 싹눈이 돋았다.
말하자면 심웅섭에게 귀촌은 일종의 묵은 숙원이었다. 늘 시골을 마음에 담고 살았으니까. 그의 근무지는 서울에서 충주로, 다시 청주로 바뀌었다. 청주에 살면서는 시골티가 나는 외곽의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았고,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마침내 꽤 깊숙한 산골에 집을 짓고 귀촌을 했다. 충북 보은군 회인면의 산촌으로.
“내가 시골 태생이다. 과수원집 막내아들이었다. 과수원에서 강아지와 함께 뛰어놀며 사과를 따 먹던 추억이라거나, 그리운 게 너무도 많았다. 때가 되면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이 있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지. 그렇다고 미루기도 싫어 보은에서 청주로 출퇴근을 하기로 하고 이주했던 거다. 물론 아내의 동의를 얻어서였다.”
당시 불운하게도 그의 아내 홍근옥(59)은 암 투병 중이었다. 아내의 요양을 위해서도 물 좋고 공기 맑은 시골살이가 이상적이었을 테다. 청주로 출퇴근을 하며 시골 맛을 누리는 생활은 길게 이어졌다. 2년 전에야 퇴직을 하고 온전한 산골 생활로 접어들었으니까.
부부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氣) 수련에 열중했다. 계룡산에 있는 수련원을 드나들면서였다. 귀촌을 추동한 요인 중에는 자연 속에 살며 영성이라는 걸 북돋우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엔 귀촌지를 아예 수련하기 좋은 계룡산 자락으로 정하려 했다. 그러나 적당한 터를 찾지 못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마음에 드는 땅을 만나기도 했으나 계약 단계에서 확인해보니 집을 지을 수 없거나 길이 없는 터였다. 부부 연분처럼 땅하고도 인연이 돼야 일이 성사되는 것 같았다. 이곳 보은의 터와는 좋은 인연으로 만난 셈이다. 수월하게 터를 잡았으니까.”
어떤 경로로 매입했기에?
“인터넷에 나온 매물을 보고 답사를 왔는데, 용케 호의를 베푸는 주민을 만나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는 초면임에도 가격을 좀 깎아서 살 수 있도록 땅 주인에게 다리를 놔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해주었다. 집을 지을 때도 이모저모 도움을 받았다.”
집이며 조경이며 수려하고 안락한 모습이다. 어떤 기본 구상을 가지고 집짓기에 착수했을까?
“생태주의랄까, 생활 방식은 좀 간결한 게 좋다는 생각을 평소에 지녔기에 가급적 작은 집을 짓기로 했다. 그래서 바닥 면적 18평짜리 목조주택을 지었다. 나중에 자그만 황토방을 추가로 지은 건 필요성이 커서였다. 남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일단 작게 짓고, 차후 꼭 필요하다면 부속 건물을 지으라고.”
목공실도 있네?
“집짓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일찍이 목공학교를 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덕분에 갖가지 생활가구를 직접 만들어 쓸 수 있게 됐다. 집 안에 있는 탁자, 의자, 책장은 모두 직접 만든 것들이다. 문짝도 만들어 쓴다. 나무로 뭔가를 만든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직접 만들었다는 자부심으로 즐거워지거든.”
도시보다 생활비 30% 덜 들어
심웅섭이 손수 가구를 만들어 쓰는 데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게 바로 그렇다. 그는 알뜰한 소비를 지향한다. 무슨 ‘짠돌이’ 계열의 성향이어서가 아니다. 통장 잔고가 불어나는 재미로 낙을 삼는 습성의 소유자도 아닌 것 같다. ‘그저 빠듯하게 살 뿐’이라는 얘기로 보자면 쟁여놓은 부가 있는 것도 아닐 거다. 여하튼 돈에 관한 주관이 뚜렷하다.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고 믿는 그는 과도한 물욕의 추구만큼은 자제하고 싶다.
“농사엔 햇빛이 필수지만 지나치게 높은 광도는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이걸 광포화(光飽和) 현상이라고 하더라. 돈이나 물질도 마찬가지다. 과잉 추구하느니 자제하는 게 낫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믿음을 진심으로 간직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건 이상적인 신념이지만 돈이라면 영혼까지 거래하는 게 현실이다.
“돈이 안 들거나 덜 드는 방식의 삶이 그래서 필요하다. 가령 내가 필요한 가구를 마트에서 사들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일에도 진땀을 쏟아야 하고, 여기에서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필요한 가구를 직접 만들어 쓸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매력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도시에서보다 30%쯤 생활비가 덜 드는 것 같다. 돈이 덜 들어 돈 버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원하는 일에 선용할 수 있다는 건 시골 생활의 큰 장점이다. 우리 부부는 가급적 산길을 많이 걷고자 한다. 여기에 무슨 돈이 들겠나?”
그의 집 주변은 온통 산이다. 숲을 흔들며 불어온 바람이 솔향기를 흩뿌린다. 숲속의 인기 가수들인 온갖 새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지구재재구 명랑한 노래를 협연한다. 이 찬탄할 만한 오케스트라 공연엔 입장료가 없다. 산나물은 또 어떻고? 아내 홍근옥은 귀촌 이후 완연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녀가 누리는 최상의 기쁨은 산나물 뜯기인데, 앞산 뒷산에서 얻어온 풋것들로 몸도 씽씽해졌다. 그렇더라도 때로 무료하지 않을까? 산중의 반복되는 일상에 심심하지 않을까?
“귀촌 5년 차쯤 되면 슬슬 심심해진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렇긴 하다.(웃음) 그렇다고 심각하게 무료한 건 없다. 사실 시골에서 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게 요즘의 시골이다. 차로 40분이면 닿는 청주로 나가 갑갑증을 해갈하는 식으로.”
부부 사이에 갈등이 늘어날 수 있는 게 귀촌 생활이다. 종일 함께 지내다 보면 불편한 일도 생기는 거라서. 상대의 장점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뭐든 항상 같이 한다. 소소한 다툼은 있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태도로 풀어나간다. 세상에 부부 사이보다 더 귀하고 좋은 게 있을까?
햐, 부부간에 ‘귀차니즘’이 증대될 나이인데.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함께 영성 수련을 해왔다. 영성, 이건 함부로 말할 건 아니지만 자연 속에서 영성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 좋은 거라는 생각 정도는 하고 산다. 배우자는 물론 모든 사람이 영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안도감이 느껴진다.”
독서는 주로 어떤 분야의 책으로 하지?
“우주에 관한 책이 재미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평행이론을 알게 하는 책들을 좋아한다. 우주에 관심을 갖다 보면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걸 깨우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실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영적인 존재든 우주든 그것들이 나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럴 때면 깊은 위안을 얻는다.”
산야의 들풀 한 포기와 인간이 크게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때도 뭔가 삶이 더 넓게 보이는 것 같더라.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귀촌 생활의 유익함은 한둘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산중의 낙은 달밤에 한잔 마시는 데에도 있다. 음주는 간혹 즐기나?
“술은 전혀 못 마신다.(웃음) 명상 수련을 하면서 생활 패턴이 조용한 쪽으로 바뀌기도 해 술자리에 섞이지 않는 편이다.”
시골에서도 다이내믹한 삶이 가능하다
살면 살수록 더 가지고 싶고, 더 벌고 싶고, 더 욕망을 채우고 싶은 게 필부의 속성이다. 심웅섭은 여기에서 좀 벗어나 살고 싶은 것이다. 때로 산골 생활이 무료하지만 방안을 찾아 해소한다. 오디오 장비를 마련해 레코드 음악 감상에 입문하는 식으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남들에게 피해 주는 일을 삼가는 데에서 나아가, 뭔가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게 좋은 삶이라는 생각도 강화됐다.
“방송사 PD로 일할 때 휴먼 영상 다큐를 자주 만들었다. 이 경험을 살려 요즘 농촌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스마트폰으로 만드는 영상 자서전’ 강의를 하고 있다. 인근의 젊은 귀촌인들과 함께 ‘해바라기 문화공작소’를 만들기도 했다. 영상을 매개로 지역 문화를 돋우는 활동을 하기 위한 동아리다. 아내 역시 면 소재지에 꾸린 ‘작은 도서관’에서 일한다. 이건 봉사활동이자 알바다.”
시골이 따분한 곳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심웅섭에 따르면 그건 좁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생각과 행동의 외연을 확장할 경우 다이내믹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는 게 귀촌 생활이라고 본다.
“집에 폭 파묻혀 풀만 뽑는 식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의 삶을 시도해볼 만한 게 시골이다. 이 점에서 귀촌은 하나의 도전 행위다. 그 무엇보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하면 즐거움이 커진다.”
심웅섭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귀농인들이 겪는 애환 중 가장 큰 건 원주민과의 갈등에서 발생한다.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편에만 있는 건 아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알력과 닮았다. 일단 우월감을 버려야 한다. 배운 건 많지 않더라도, 대체로 나쁜 맘 없이 진솔하고 순수한 면이 있는 게 시골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에 녹아든 지혜를 배운다는 태도로 존중해주는 게 현명하다. 좋은 관계 맺기에 정 자신이 없다면 마을과 떨어진 곳에 터를 잡는 게 낫다.
● Exhibition
◇요시고 사진전
일정 12월 5일까지 장소 그라운드시소 서촌
코발트빛 바다와 그 위를 헤엄치는 관광객, 알록달록한 파라솔. 전시장에 걸린 사진들은 잊고 있던 어느 여름날의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휴양지의 찬란한 순간을 프레임에 담아낸 요시고의 전시가 국내 관객을 찾았다. 요시고는 스페인 출신 포토그래퍼 겸 디자이너로 본명은 호세 하비에르 세라노다. 유명 IT 매거진 ‘와이어드’와 베네통 매거진 ‘컬러스’로 이름을 알렸으며, 현재는 ‘킨포크’, ‘비트라’ 등 글로벌 브랜드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중해부터 마이애미, 두바이, 부다페스트 등 세계 여러 여행지를 기록한 350여 점의 사진을 선보인다. 대칭적 구도와 기하학적 기법 등 작가만의 표현 방식이 두드러지는 ‘건축’ 섹션을 시작으로 미국, 아랍에미리트 등 사막의 풍광을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섹션을 거쳐 해변과 바다, 관광객의 모습을 담은 ‘풍경’ 섹션으로 마무리된다. 작가가 작품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해, 세계 곳곳의 여행지를 함께 거니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방문객이 많고 대기 시간이 길어, 여유롭게 관람하고 싶다면 평일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윌리엄 웨그만 : 비잉 휴먼
일정 9월 26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개념미술의 선구자 윌리엄 웨그만의 전시가 호주, 뉴질랜드, 스위스, 네덜란드를 거쳐 한국에 상륙했다. 윌리엄 웨그만은 화가의 그림을 기록하는 데 그쳤던 1970년대 미국 사진계의 보수적인 관행을 깨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며 사진 예술을 주류로 끌어내는 데 이바지한 예술가다. 특히 그는 자신의 반려견 ‘만 레이’를 의인화해 인간 사회를 풍자하고 내러티브를 시각화하는 사진 작업을 발표했다. 촬영 즉시 인화되는 대형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활용해 후보정 없이 반려견과의 교감만으로 즉석에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는 대표작 ‘캐주얼’, ‘키’를 비롯해 희소성 높은 대형 폴라로이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점의 작품을 망라한다. 지금까지 대중에게 선보인 작품 외에 50점 이상이 국내에 처음 공개되며, 디올, 입생로랑, 마크제이콥스 등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작도 선보인다. 반려견을 모델로 삼아 독특한 작업 세계를 구축한 윌리엄 웨그만의 이번 전시는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지친 현대인에게 웃음을, 반려동물 가구에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 Book
◇나는 치매 의사입니다 (하세가와 가즈오 외 공저·라이팅하우스)
평소와 달리 기억이 흐릿할 때 떠올려보는 질문이 있다. ‘100에서 7을 빼보세요.’ ‘하세가와 척도’의 문항 중 하나로, 치매 여부를 진단할 수 있는 인지 기능 검사법이다. 이 척도를 만든 하세가와 박사는 평생 수천 명의 치매 환자를 돌본 치매 의료계 1인자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치매에 걸렸다. 그의 나이 88세의 일이다.
신뢰받던 의사에서 치료받는 환자가 된 그는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마지막까지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공개해 치매 연구에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이듬해 치매에 걸린 사실을 공표하고, NHK 방송국과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 이 책은 그 기록의 결과물이다.
50년 넘게 치매를 연구했지만, 그는 환자가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치매에 걸렸다고 24시간 비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것. 기억력은 흐릿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그렇기에 주변인이 치매 환자를 삶에서 배제해선 안 된다고 당부한다. 대신 “나는 치매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남긴 2년간의 투병 기록은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병이기에 겁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불안은 줄어들고 희망은 커진다. 치매를 절망적인 질환으로 여기는 사회 속에서 “불편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단단한 태도 덕분이다. 의사와 환자의 기로에 선 그의 이야기는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은 물론, 치매를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억을 잃어도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단서와 희망을 보여준다.
◇빨리 은퇴하라 (최승영 저·이은북)
은퇴를 앞둔 이들을 위한 진로탐색서.
단순히 불안한 마음을 잡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점점 단단해지는 중입니다 (김영미 저·혜윰터)
노화로 우울감을 느끼던 저자가 환갑의 나이에 자전거 라이더가 된 이야기를 담았다. 어릴 적 사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전국 자전거길을 섭렵한 저자의 도전이 짜릿한 설렘을 선사한다.
◇빅토르 위고와 함께하는 여름 (로라 엘 마키 외 공저·뮤진트리)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인생 철학을 그가 남긴 희대의 명작들로 살펴본다. 평생 민중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정의를 향해 나아갔던 위고의 삶이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전한다.
● Stage
◇엑스칼리버
일정 8월 17일~11월 7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권은아
출연 김준수, 이지훈, 신영숙, 민영기, 최서연, 이상준 등
EMK뮤지컬컴퍼니의 창작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2년 만에 재연을 올린다. ‘엑스칼리버’는 혼란스러운 고대 영국을 지켜낸 영웅 서사 ‘아더왕의 전설’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시골 청년 ‘아더’가 성검 엑스칼리버를 뽑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기사들의 틈에 끼지도 못했던 평범한 인물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여정이 벅찬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서양 신화 속 인물의 이야기인 만큼 국내 관객의 정서를 반영해 초연 당시 서사를 대폭 수정했으며, 아더의 내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춰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이번 공연 또한 초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수정과 보완을 거쳐 더욱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특히 물, 불, 연기를 비롯한 특수 효과와 샤머니즘적인 퍼포먼스, 신비로운 영상 등 다양한 시청각적 장치로 마법과 마술이 공존하던 시대의 배경을 극대화해 몰입감을 더할 예정이다.
◇분장실
일정 8월 7일~9월 12일
장소 대학로 자유극장
연출 신경수
출연 배종옥, 서이숙, 정재은, 황영희 등
일본 현대 연극의 거장 시미즈 쿠니오의 대표작으로, 연극 ‘갈매기’가 공연 중인 어느 극장의 무대 뒤편 분장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서로 다른 사연을 지닌 네 여배우가 ‘맥베스’, ‘세 자매’ 등 고전의 명장면을 연기하며 무대를 향한 열정과 삶에 대한 회한을 풀어낸다. 배종옥, 서이숙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표현하는 진짜 ‘배우 연기’가 완성도를 더한다.
◇광화문연가
일정 ~9월 5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출 이지나
출연 윤도현, 엄기준, 강필석, 차지연, 김호영, 김성규 등
이지나 연출, 고선웅 작가, 김성수 음악감독 등 최고의 제작진이 의기투합해 2017년 처음 선보인 창작 뮤지컬로, 죽음을 눈앞에 둔 ‘명우’가 미스터리한 시간여행 안내자 ‘월하’와 함께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고(故) 이영훈 작곡가의 주옥같은 명곡을 토대로 해 ‘붉은 노을’, ‘옛사랑’, ‘소녀’ 등 1980~90년대를 장악한 음악이 옛 시절의 추억을 깨운다.
“한날한시에 같이 가자고. 사는 것도 같이 살고.”
2년 전 작가 이외수 씨와 졸혼(卒婚)을 선언해 화제가 된 아내 전영자 씨가 투병 중인 이 씨의 곁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졸혼은 이혼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혼인 관계는 유지하지만 부부가 독립적으로 사는 삶의 형태다.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가 2004년 쓴 책 ‘졸혼을 권함’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씨의 장남 한얼 씨는 지난 15일 짤막한 영상을 통해 이 씨의 근황을 전했다. 54초 분량의 영상에서 전 씨는 병상에 누운 이 씨의 다리를 주무르며 “여보, 이러고 둘이 사는 거야. 혼자면 외로워서 안 돼. 한날한시에 같이 가자고. 사는 것도 같이 살고”라고 말했다.
삼킴 장애로 말하기 힘든 이 씨는 대답 대신 전 씨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어 전씨가 “한날한시에 가지만 서로 다른 길로 가자. 다른 사람 만나게”라고 농담하자 가벼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이 씨와 전 씨는 결혼 44년 만인 지난 2019년 졸혼을 선택했다. 이후 이 씨는 강원도 화천에서, 전 씨는 강원도 춘천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했다.
졸혼 이유에 대해서 전씨는 “몸이 아프면서 모든 게 귀찮아졌다. 남편을 도와 하루에도 30명씩 손님을 맞는 삶에 지쳐버렸다"며 "철저히 외로워지겠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이혼을 꺼냈더니 졸혼을 권하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이 씨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전 씨는 페이스북을 통해 졸혼을 종료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