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중반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정치혁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변화의 중심에 철도가 있었다. 빠른 속도의 이동은 세상을 보는 방식과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영향을 끼쳤다. 접이식 이젤, 튜브형 물감의 등장으로 밖에 나가서 직접 보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쉬워졌다. 이런 변화들은 빛과 색채의 회화를 도입하려는 세잔, 드가, 르누아르,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등장을 촉진했다.
점차 발전되는 경제적 풍요와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으로 그림의 대상도 변했다. ‘자연의 풍경’에서 ‘풍요롭고 여유로운 지금 여기의 삶’으로 바뀌었다. 그리고자 하는 모든 것이 그림이 되는 시대가 열렸다. 그렇게 세상이 변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파리의 상징 에펠탑이 1889년 완공되었다. 에펠탑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새로운 기술 발전과 변화는 과학적 광학 이론에 따른 색채 구사를 필요로 했다. 여기에 맞춰서 ‘조루즈 쇠라’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나타났다.
한편, 인상주의의 성공을 넘어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에 갈망을 품은 화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파리를 떠났다. 세잔, 고흐, 고갱이 그들이다.
인상주의의 전성기는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의 시기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획득과 물질문명의 발달에 대해 비판하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네, 고야 등이 대표적이다. 이어서 회화는 마티스 등 야수파와 피카소 등의 입체파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탐욕과 물질의 팽창은 전쟁으로 폭발했다. 이후의 그림은 고통과 비극이었다. 그래서 인상주의가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미술 사조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침 이 시기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대표적 그림들을 모아 ‘프렌치 모던:모네에서 마티스까지’전이 ‘고양아람누리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곳으로 그림 감상 여행을 떠났다.
1800년대 중반 대대적인 도시 정비로 파리가 지금의 형태로 재편되는 시기에 파리 근교에 모여 순수한 자연과 농민들의 가치를 그린 화가들이 있었다. 사실주의 화가 밀레, 카미유 코로 등이다. 이들은 신화나 영웅 이야기가 아닌 농촌을 중심으로 눈 앞에 펼쳐진 환경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밀레의 농촌 그림은 인기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쥘 브르퉁’의 농민 그림이 더 인기가 있었다.
전시회에서 내가 첫 번째로 만난 여인도 ‘쥘 브르통’의 ‘양초를 들고 있는 농민 여성’이었다. 대서양에 접하고 있는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흑백색 전통 의상을 입은 노파가 양초와 묵주를 든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당시 급속도로 변하는 세상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검소하고 소박한 종교적 자세와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집이 화폭에 담겨 있다.
‘쥘 브르통’의 다른 작품으로 감자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민 여성을 그린 '귀갓길'도 있다.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이 감자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모습이다. 1848년 혁명의 영향 때문인지 농촌 노동자들을 영웅화하고 싶어 한 당시 사회의 허구가 반영되어 장밋빛 하늘을 그린 배경이 눈에 띄었다. 가운데 그려진 여인은 농촌에서 일하는 여성의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세련되고 곱다. 그것은 고흐의 말처럼 작업실에서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주의의 한계를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부는 농부답고, 밭 가는 사람은 밭 가는 사람다워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두 번째 만난 여인은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스파르타의 젊은 여인’이다. 야외에서 직접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화실에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한 그는 가장 좋아하는 모델을 선택해 자신의 시정을 불어넣는 방법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그림에 나오는 여인은 작가의 이상적 여성상이었다. 집시 복장 차림의 나른한 자세와 눈길에서 작가의 마음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이어서 ‘앙리 팡탱 라투르’의 ‘마담 레옹 마스터’를 만났다. 마네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를 넘나들었다. 이 그림 역시 명암을 깊게 해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한 사실적인 초상화다. 그녀가 입은 화려한 이브닝드레스와 그 뒤에 감춰진 우울한 분위기가 당시의 경제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이라는 모순된 시대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여인의 체념한 눈빛은 기본적 욕구와 욕망마저 포기한 무너져버린 생의 의지가 보여 애잔한 아픔의 해일이 밀려왔다.
주최 측의 의도였는지 바로 이어서 애잔한 가슴을 먹먹한 비애로 만든 조각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스 신하에 나오는 ‘다나이드 이야기’를 주제로 형벌을 받아 밑바닥이 빠진 항아리에 계속 물을 채워야 하는 ‘다나이스’를 표현한 로댕의 조각 작품이다. 이 ‘다나이드’는 로댕에게 조각적,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제자이자 연인 ‘카미유 클로텔’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이 여인을 만난 순간 잔뜩 웅크린 채 울고 있는 가냘픈 등줄기와 팔에서 살갗의 온기가 느껴졌다. 벗어나고 싶은 운명을 말하듯 방향을 돌린 얼굴과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전하는 절망에 대한 공감 때문에 미술관 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슬픔, 고통, 불행이 너무나 아름다운 우아한 선과 볼륨으로 표현되어 여인의 운명을 품앗이 하고 싶다는 깊고 깊은 한숨의 울림이 가슴 속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다나이드’와는 완전히 다른 여인을 만났다. 당시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예술의 번창을 상징하는 여인으로 이탈리아 출신 ‘조반니 볼디니’의 ‘여인의 초상’이다. 초상화가로 유명했던 작가는 뉴욕의 자선가 ‘플로렌스 블루멘탈’을 현대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검은 머리카락과 드레스가 하얀 피부가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역동적인 자세를 순간 포착한 구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여인의 옆에 있는 의자에 눈길이 멈췄다. 곡선을 ‘가우디’는 신의 선이라고 말했지만,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선이 그림 속에 있었다.
야수파를 대표하는 화가 ‘앙리 마티스’가 그린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여인’도 만났다. 마티스의 개인적 경험 때문인지 북아프리카를 여행한 후 그린 이 그림에서 그는 모델인 이탈리아 여성 ‘로레토’에게 모로코 전통 의상을 입혀 그림을 그렸다. 분홍색 천의 의자, 길고 검은 머리카락, 녹색 간두라에서 야수파의 특징인 보색대비가 잘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만난 여인은 ‘드가’의 ‘몸을 닦는 여인’이다.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달리 실내 빛의 효과와 순간을 포착하는 그림을 즐겨 그린 특성이 나타났다. 드가는 주로 매춘부들을 모델로 고용해 누드화를 그렸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번성했던 당시 매춘업의 실태와 작가의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적 시각이 나타난 현상이다. 그림은 단색의 밑그림으로만 돼 있어 미완성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관람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는 모델의 자세는 작가의 훔쳐보는 시선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노골적인 여성 혐오주의자였던 드가가 가지고 있던 자기모순의 내면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내비게이션을 따르다 보니 차가 산으로 들어간다. 자연을 한 자락 슬쩍 걸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연 속에 있는 미술관이라 들었다. 그러나 이토록 깊은 산중일 줄이야. 씨억씨억 초록을 뿜는 숲 사이 언덕을 올라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예 산꼭대기이지 않은가. 기발하게도 산정(山亭) 미술관이다. 그래서 뮤지엄 산(山)? 그러나 ‘山’이 아니라 ‘SAN’이다. 공간(space), 예술(art), 자연(nature)을 합성한 약자다.
산정이라 사방에 보이느니 산이다. 세상을 분할한 하늘 절반, 산봉우리들 절반. 하늘과 산 사이에 뮤지엄이 슬쩍 끼어든 형국이다. 간신히 자연에 가담한 약세(弱勢)가 아니다. 부지는 넓고 건물은 우람해 훤칠하다. 우람하나 이물감이 없다. 건물의 태와 됨됨이에 뾰족하게 튀는 게 없어 자연과 불화 없이 조응한다. ‘건축의 철학자’로 불리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79)의 작품이다. 그는 자연과 건축, 그리고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본때 있게 구현하는 건축가로 유명하다.
이 뮤지엄의 설립자는 어떻게 산꼭대기에다 일을 벌일 발상을 했을까? 자연을 애호하는 못 말릴 취향과 세상의 추세를 읽는 시퍼런 촉이 아니고선 감행하기 어려운 역사(役事)다. 삼성가 이병철 회장의 장녀로 한솔그룹을 이끌었던 이인희 고문(2019년 작고)이 세웠다. 그는 열렬한 아트컬렉터. 평생 모은 소장품을 자연으로 끌어들여 건립한 산상 미술관으로 허를 찌르듯 관습을 흔들었다. 뮤지엄 산의 태동부터가 이렇게 전위적이다.
판석을 깐 진입로를 따라 ‘플라워 가든’으로 들어선다. 뮤지엄의 초입일 뿐이지만 완상할 게 많아 벌써 다른 세상이다. 패랭이꽃 군락과 하얀 자작나무들, 조각정원이 어울려 뮤지엄의 서장을 열어준다. 산정의 적막한 허공엔 흩날리는 꽃잎들. 피어나는 봄꽃들 지천이라 몸에 묻을 듯 농밀한 건 꽃향기. 길은 곧게 나아가다 휘어지거나 급하게 꺾인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콘크리트 담장이 보도의 흐름에 편승해 시야를 슬쩍 가려주거나 별안간 확 트이게 한다. 인위적으로 풍경의 변주를 꾀한 설치다. 정교한 의도에 따른 구성이다.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여실해 명쾌하지만, 보일 듯 말 듯, 보였다 안 보였다 변전하는 풍경은 삶을 은유한다. 노골적이어서 온전한 게 있던가. 보이면 있고 안 보이면 없는가. 높낮이와 커브의 각도를 세밀하게 재단해 조성한 담장의 효과로 풍경에 철학이 실린다. 이건 뮤지엄의 절정을 보러 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희? 애피타이저? 풍경을 요리하는 수완에 즐겁다.
시각적 충격에 걸음 멎어
이제 ‘워터 가든’이다. 뮤지엄 산의 예술적인 외부 공간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별한 곳이다. 여기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풍경이 존재한다. 산상 대지에 물을 가득 채워 꾸민 ‘물의 소국’(小國)이 있으니 말이다. 널따란 사각형 수조들에 담긴 물과 물빛으로 찬연한 공간이다. 갑작스런 물의 등장, 그 급속한 풍경의 변이라니. 시각적 충격에 걸음이 멎는다. 나는 지금, 물을 분할하며 본관으로 관입하는 보도 위에 서 있지만 수면을 밟고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보도와 수면이 수평을 이루어서다.
워터 가든의 물 경치에 흥취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수변 테라스엔 커피를 마시며 물과 산과 하늘을 바라보기에 적격인 벤치가 놓여 있다. 거기에 앉고 싶지만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다. 도시라는 욕망의 경기장을 벗어나 고요한 수변에서 차를 마시며 모처럼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의 행복이여! 행복이 아니라 고독이면 어떤가. 물가에선 ‘나’를 바라보기 좋다. 저 투명한 물빛처럼 나도 한때 순수했다고, 내 안에도 물이 있어 눈물도 많아 슬프다고, 저 무심한 수면에 물살을 일으키는 실바람은 어디로 가며 나는 흘러 어디로 가는가, 라고 요모조모 쓸모 있는 상념을 굴려볼 만한 물가이지 않은가. 그러라고 안도 다다오가 워터 가든을 설계했다.
그의 건축적 오브제는 물, 햇빛, 바람 등 자연의 질료들이다. 그의 정신적 테마는 관조(觀照) 혹은 명상이다. 자연을 불러들인 건축으로 사람의 오감과 내면을 일깨우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일컬어 노상 하는 말들의 요점이 그렇다. ‘뮤지엄 산’이 완성됐을 때 그는 “그저 조용한 상자 같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사람들 모두가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져,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도 썼다.
본관 복도로 들어서자 조명부터 침침해 구미에 맞다. 미술관들의 과한 조명에 나는 일쑤 김새더라. 인공조명은 안도 다다오의 자연주의에 위배된다. 가급적 자제! 그는 집요하게 자연의 빛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였다. 복도 벽면의 상부와 하부에 낸 창으로 빛이 들이치게 했다. 천장을 뻥 뚫어 빛과 함께 하늘을 수용한 전시실도 있다. 노출 콘크리트 벽과 기둥, 기하학적 선형, 번뜩이는 예각 구조물, 텅 빈 중정(中庭)…. 그의 건축적 키워드를 이루는 형태와 기법이 거대한 미술관의 세부에서 깨알처럼 구현돼 요동친다.
거장들의 작품 번갈아 전시
아이들은 천진해 이 웅장하고 복잡한 미술관에서 ‘비밀의 성’(城)을 본다. 상상을 펼쳐서다. 어른들은 압도될 테다. 상상을 잃어서다. 예술이 위대한 건 상상력의 거친 날개로 신과 맞먹으려 비상한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상상력 외에 자유정신의 높이, 자연을 읽는 섬려한 안목,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존중. 그런 게 안도 다다오의 건축세계를 가능케 했을 터인데, 햐, 그는 말하길 ‘창의적 체력’이야말로 개중에 관건이라 했다. 창의적 체력이란 건강한 몸뚱이의 에너지를 말한다. 79세 노인인 그는 오늘 아침에도 들입다 뛰었을 게 틀림없다. 흥미로운 유형의 인간이지 싶다. 그에겐 세상을 달관한 시늉이 없어 미덥다. ‘목숨을 건 강인한 도전 정신’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건축을 추구하는 리얼리즘과 적당한 금욕 추구도 멋있다. 뮤지엄 산의 건축미를 즐기기 위해선 안도 다다오의 이러한 성향들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뮤지엄의 많은 전시실 가운데 인기를 누리는 공간을 볼까? 페이퍼 갤러리. 이곳은 종이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는 국내 최초의 종이 전문 박물관이다. 종이 관련 국보와 보물, 진귀한 유물과 공예품을 전시한다. 약하디약한 게 종이이지만 강하디강한 게 또한 종이. 인류의 역사는 종이의 발명과 함께 진보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이기심으로 살고 종이는 이타심으로 존재한다. 아낌없이 나를 내주길 운명으로 삼은 종이이니 이미 득도했다. 페이퍼 갤러리에 머문 시간은 ‘종이부처’와 만난 추억을 안겨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종이 재료로 쓴 파피루스도 여기에 있다. 유리온실 안에서 억새와 비슷한 파피루스가 푸르게 자란다. 순전히 파피루스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는 관람객도 있다. 청조갤러리는 뮤지엄 산이 소장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이쾌대 등 거장들의 작품을 번갈아 상설 전시한다. 매년 두 차례 기획전도 열린다. 현재 ‘회화와 서사’ 전이 진행 중이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위해서는 특별히 독립공간을 마련했다. ‘백남준 홀’로 작품 ‘커뮤니케이션 타워’를 전시했다. 전깃줄을 뭉쳐 만든 타워 형태의 기반에 TV와 민속탈을 주렁주렁 매단 작품. 이게 뭔가? 현대와 전통의 통섭? 문명 굿판? 자화상? 어떻게 봐도 답일 게다. 엿장수 맘대로! 그냥 그렇게 내가 느끼는 대로 보고 즐기면 일단 그만이지 않을까. 현미경을 들이대고 종일 초파리의 겨드랑이 털 개수를 세는 곤충 학자처럼 골똘히 미술작품을 파고들 일 아니다. 궁리를 너무 하면 왜곡이 쉽고, 생각을 너무 조이면 좁아진다. 백남준이 금언을 설했다. “옷도 헐렁하고, 생각도 헐렁하고, 행동도 헐렁헐렁, 헐렁이가 일을 낸다구. 진짜 예술가는 헐렁이야!” 삶도 예술도 틀을 만들면 갇힌다는 얘기이겠다. 예술의 헐거운 정신을 보는 게 작품 감상법이라 들어도 무방하다. 백남준은 노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때 더듬더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뜻밖에도 쓸쓸한 것이었다. “신은 참 불공평해. 내가 왜 쓰러져야 하나?”
아주 특별한 두 곳
마침내 자문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마음이란 물결처럼 요동치기 쉬운 것. 이걸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뮤지엄 산에선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뮤지엄 내·외부 공간에 있는 미술작품 감상 자체가 명상적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명상 체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 두 곳이 있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빛의 예술가’로 세계에 알려진 작가다. 화가라면 당연히 ‘빛’과 무관할 수 없다. 빛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게 화가의 본분이니까. 그러나 제임스 터렐의 작업은 많이 다르다. 그는 빛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빛을 ‘사용해’ 작품을 만든다. 일정한 공간에 빛을 집어넣으면, 즉 빛과 공간이 조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오랜 실험 끝에 그는 놀랄 만한 ‘빛의 아트’를 정립했다.
터렐의 작품은 빛과 공간, 그리고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프로그램에 의해 세밀하게 조정된 자연광이나 인공광을 공간에 투입, 작품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 공간이라는 캔버스에 빛이라는 물감을 투사, 다양한 테마를 신비스럽게 풀어낸다. 터렐 전시관에서 관객은 네 가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가장 기이한(?) 작품은 간츠펠트(Ganzfeld, ‘완전한 영역’이라는 뜻)로 동굴 형태의 공간에 50여 종의 LED 빛을 순차적으로 살포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이 작업의 목적은 관객에게 착시를 경험하도록 하는 데 있다. 동굴 속에 들어간 관객은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와 환영에 즉각적으로 빠져들고 만다. 예컨대 공간 가득 짙은 안개가 끼고, 좁았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된다. 이 돌연한 환각에 관객은 신비감과 황홀감 또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작업 종료 뒤, 빛이 보여준 강렬한 환상의 의미를 자문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명상이다. 내가 빛을 보고 살았다, 하지만 빛이 보여준 게 참일까? 삶과 세상은 허상이지 않을까? 남에게 나는 허상으로 비치지 않을까? 이 일련의 의식 흐름을 통해 마침내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
명상관
지난해, 뮤지엄 산 개관 5주년 기념으로 개설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만든 돔 형태의 건물이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길게 이어지며 초승달 모양으로 뚫린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빛이 들이친다. 쉼 명상, 여유 명상, 싱잉볼 명상 등을 전문가가 도와준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입소문이 나 참가자가 많다. 안도 다다오는 다음처럼 명상관의 의도를 피력했다.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공간에서의 명상으로, 자연과 우주를 만나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과 마찬가지로 명상관을 이용하려면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한다.
스무 해가 훌쩍 넘어서 다시 온 파리에 낯섦이 기다려주어 다행이다. 그러나 파리는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수백 년 된 건물에 거뭇하게 묻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센강은 여전히 느리게 흐르고 있었고 퐁네프 다리도 더 깨끗하거나 새롭게 단장되지도 않았다. 센강 양쪽으로 오래된 옛 건물들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산천은 의구하되 나만 바뀌어 왔다.
김영하 작가의 글에 “한 번 간 곳을 또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걸 볼 수 있어서가 아니다. 산천은 의구한데 오는 '나'만 바뀌어있다는 것, 내가 늙어간다는 것, 그런 달콤한 멜랑콜리에 젖어 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시 가는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조라는 뜻일 것이다."라고 김화영 선생님이 사석에서 말했다며 덧붙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십 년 세월을 훌쩍 넘겨 찾아와 늙어가는 내가 느릿느릿 걸으며 그런 달콤한 멜랑콜리에 젖어보는 건가. 어쨌든 다시 찾은 여행지의 맛을 느껴본다. 다만 그 옛날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제외했다. 에펠탑은 강 건너 빌딩 사이로 멀리서 탑 끄트머리만 힐끗 쳐다보았다. 샹젤리제 거리나 루브르 박물관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센 강 변을 따라 노트르담 성당 쪽으로 걸었다. BC 2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파리시의 기원이 된 센 강의 시테(Cite) 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 그 옛날 찬송 미사가 울려 퍼지던 노트르담 성당을 바라만 본다. 이전엔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들처럼 기도하고 오르간 연주와 장엄한 노래를 들으며 예배에 함께 참여했었다. 높은 천정까지 울리는 오르간 연주와 신부님의 기도소가 온몸을 휩싸던 감동의 시간, 순박한 콰지모도가 치는 듯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종탑, 에스메랄다의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듯 성당의 성스러움을 온몸으로 받았던 그 옛날이었다.
흐린 하늘에 바람이 불고 간간이 빗방울이 흩뿌린다. 비를 피해 지하철역으로 얼른 뛰어들어갔다. 이곳 사람들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걷는 속도는 여전하다. 도무지 비를 피할 생각이 없는 모습이다. 일상의 자연 속에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눈과 비도 함께 하듯.
노트르담 역에서 오르세 역까지는 10여 분이다. 역에서 나와 미술관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이 같은 방향으로 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길가 강변의 가게에서 머플러를 하나 사서 둘렀다. 한결 온기를 준다.
오르세 미술관이 먼저 나타난다. 역시 예상한 대로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빗속에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저 행렬에 서서 보낼 시간이 없다. 애초에 두 개의 미술관 중에 오랑주리 미술관에 갈 생각이었다. 클로드 모네의 필생 역작인 '수련 연작'을 다시 볼 생각이다.
이날은 오랑주리 미술관 모네의 수련과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만 시간을 집중하기로 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오르세 역사(驛舍)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규모도 크고 볼거리도 엄청나서 한나절을 다 보내야 한다. 그 옛날 그렇게 다리 아프도록 실컷 보았던 오르세 미술관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그냥 지나치고 사랑의 자물쇠가 빽빽이 걸려있는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가면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다. 근처에 다다르면서 익숙함의 안도가 생긴다. 그래, 여기쯤에서 잠깐 앉아있었지. 오래전 엄청 추웠었던 공원은 그대로군... 김영하 작가의 글에서처럼 나만 변해서 다시 하는 여행을 맛본다. 기분이 촉촉하다.
시간이란 게 참 별거 아니다. 스물 몇 해 전 꽁꽁 손이 얼던 겨울 속의 파리를 기억하는 것처럼 이제는 이렇게 촉촉했던 파리를 또 기억하게 되었다.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을 향하는 길의 튈르리 정원은 오래된 정원의 멋이 물씬하다. 튈르리 궁전 정원 별채의 자연광이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의 수련 연작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 천정의 빛과 자연광이 날씨에 따라 또는 일출과 일몰에 따라 환상적이다가 몽환적이다가 하며 최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이다.
흐린 날에 찾아간 모네의 대작들은 조용히 그 자리에서 수련의 멋을 보여준다. 오직 자연의 원초적인 빛을 찾아 그의 영혼을 불어넣은 수련 연작이 갤러리 내부에 가득 차 있다. 모네의 메시지가 무엇일지 생각하며 가슴 벅차게 그의 예술혼을 흐뭇하게 느껴보는 시간이다. 모네의 방에서는 그 날의 자연광에 따라서 수련 연작은 언제든 다른 그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여행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기념하여 모네가 작품을 기증하면서 요청한 조건이 있었다.
1. 작품을 시민에게 공개할 것
2. 장식이 없는 하얀 공간을 통해 전시실로 입장할 수 있도록 할 것
3.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하게 할 것.
지하로 내려가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다닥다닥 전시되어 있다. 고풍스러운 액자도 눈길을 끈다. 모네, 마네, 모딜리아니, 피카소, 르누아르, 루소, 마티스, 위트릴로, 시슬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들의 맛을 실컷 느껴볼 수 있었다.
더 꼼꼼히 그림을 즐기기 위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그리고 가이드 투어를 이용해서 작품 이해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을 들러볼 일이다. 그래야만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작품과 연결해서 완전한 감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나와 눈을 들어보면 저편으로 콩코드 광장도 보인다. 파리의 동선은 생각보다 길거나 힘들지 않다. 얼마든지 파리를 느끼며 걷기 좋다. 이날처럼 비 오는 날의 여행은 감성지수를 자극한다.
미술관을 벗어나니 센강엔 파리지엔느들이 하나둘 나와 걷고 있다. 바람 불거나 비가 오거나 햇살 좋은 어느 날 오후 미술관 정원을 거닐며 가끔 센 강 변을 거닐며 그렇게 여행자가 되는 파리 사람들, 센 강을 배경으로 여행자처럼 사진을 찍는다. 내가 사는 곳에서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감성은 축복이다. 일상 속에서 즐기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발걸음은 풍경이다. 나는 어떤 여행 중인가.
여행이 끝났어요. 즐거움이 남아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제는 내가 파리와 모네의 정원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에펠탑은 어땠니?' 하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답니다.
'에펠탑은 볼 시간이 없었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을 봐야 했거든....'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모네의정원에서 중에서~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질투로 얼룩졌던 마티스와 피카소의 우정을 소개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젊은 예술가들의 산실로 불리던 파리에는 다양한 국적의 보헤미안들이 몰려들었다. 스페인에서 온 풋내기 청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906년 그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한 사람을 만난다. 바로 당대 프랑스 화단에서 이름을 날리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였다.
프랑스 북부 시골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법학을 공부하다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0대 초반 파리로 갔다. 이후 회화 양식과 색채와 빛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 명성을 얻었고 야수파의 우두머리가 됐다.
‘색채의 혁명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던 이 대작가는 무명작가인 피카소의 그림을 보자마자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
마티스를 뛰어넘고 싶었던 피카소
그 무렵 마티스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만든 조각품의 신비로움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서 콩고 조각품을 구입한 그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감상하고 싶어 예술가들로 북적이던 아지트로 향했다. 마침 피카소도 그곳에 와 있었다. 그는 마티스가 가져온 ‘흑인 두상’ 나무 조각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간다는 말도 없이 황급히 일어나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두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원시 아프리카 미술을 재해석해 화폭에 옮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마티스는 아프리카 조각을 통해 인체의 비율과 ‘색채’를 고민했고, 피카소는 마법처럼 느껴지는 ‘초월적 힘’에 심취했다.
마티스가 아프리카 조각품의 원시성에서 영감을 받고 그린 ‘삶의 기쁨’(1906)과 ‘푸른 누드’(1907)가 발표됐을 때 비평가들은 “불편한 느낌을 주는 도발적인 작품”이라며 주목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피카소는 비판을 쏟아냈다. “무릇 화가라면 단순한 색깔로만 변화를 주는 게 아니라 형태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시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의 작품을 깎아내렸던 것. “색이 무엇인지 인류에게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말로 칭송되던 마티스의 작품에 대한 도전적 발언이었다.
피카소는 변신을 거듭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다. 마티스가 활용한 기법들은 철저히 지양했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곡선으로 처리하고 강렬한 색으로 아우라를 발산한 ‘삶의 기쁨’은 피카소에겐 매우 중요한 도전 대상이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고, 힘찬 직선으로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한 ‘아비뇽의 처녀들’(1907)로 응수했다. 입체파의 시작을 알린 작품은 그렇게 탄생했다.
평론가들은 그림 경쟁을 벌이게 된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심리’를 분석하며 마티스보다 더 뛰어나고 싶었던 피카소의 속내를 지적했다.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해 미술계의 1인자가 되고 싶었던 피카소가 스승처럼 따랐던 마티스를 경쟁상대로 만들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흠모와 질투의 ‘붓 대결’
마티스는 신중하고 사색적인 사람이라 홀로 조용히 작업하는 걸 좋아한 반면, 피카소는 사람들과 왁자지껄 어울리며 작업을 했다. 비슷한 취향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늘 서로의 작품에 끌렸다. 누가 먼저 시작했든 마티스와 피카소의 이른바 ‘붓 대결’은 그렇게 흠모에서 질투, 그리고 경쟁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피카소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마티스를 강박증 환자로 몰아세우며 공격했다. 마티스도 이에 질세라 피카소의 콜라주 기법을 쓰레기라 비웃었다. 급기야는 서로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며 헐뜯었다.
피카소에게 실망한 마티스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교류를 끊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렀고 두 사람의 입장은 뒤바뀌었다. 피카소가 미술계의 거장이 됐을 때 병약해진 마티스는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54년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가 생을 마무리하면서 남겼다는 한마디는 피카소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내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을 함께 전시하지 말아주게. 불꽃같이 강렬하고 번득이는 그의 그림들 옆에서 내 그림들이 초라해 보이지 않게.”
마티스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 피카소는 슬픈 얼굴로 창밖을 보며 “마티스가 죽었어, 마티스가 죽었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자책감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그는 ‘캘리포니아 아틀리에’를 그리며 떠나간 마티스를 추억하고 애도했다. “다시 태어나 그림을 그린다면 마티스처럼 그리고 싶다”고 말했던 피카소는 1973년 92세에 눈을 감았다.
인생은 변란과 함께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4ㆍ19가 발발했다. 그 때 누나가 내 손을 잡고 데모대를 따라갔다. 갑자기 내가 있던 데모대를 향해 종로경찰서 쪽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자전거 위에서 구경을 하던 내 옆의 어른이 쓰러졌고 그 때 처음으로 사람의 피가 매우 끈적거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넘어진 자전거 바퀴에 발이 끼어 울부짖는 나에게 누나는 길모퉁이에 숨어 자신에게 기어오라는 손짓만 해댔다. 다음 해 오월의 새벽,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군인(해병)들이 기관총을 설치한 지프차를 타고 서울역 방향에서 필동 방면으로 와, 남산 밑의 헌병대 쪽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는 모습을 2층 방에서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내 인생에 가장 놀랐던 순간은 군대 생활 중에 발생했다. 결혼하고 딸을 가진 후 늦게 입대해 휴가 중이었는데, 훈련경보가 아닌 공습경보가 발령되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휴가 중인 군인은 즉시 귀대하라”는 방송이 계속 반복되었다. 순간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바로 중국민항기가 국경을 넘어 왔을 때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이웅평 대위가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했을 때 또 한 번 공습경보를 들어야 했다. 그것을 전후하여 10ㆍ26, 12ㆍ12, 5ㆍ18, 6월 항쟁 등 정치적 변란들이 이어졌고 1998년 IMF사태, 2008년 금융위기 등의 경제적 변란들도 겪게 되었다. 최근에는 사스, 메르스 같은 바이러스들까지.. 그러니 외국에는 한반도의 안보, 정치, 경제위기까지, 늘 부정적 뉴스들이 전달되었다.
그러다가 이번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대응을 보고 그들이 놀란 것 중 하나는 사재기가 없다는 보도였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일본·이탈리아·스페인·일본 등의 휴지와 생수가 사재기로 인해 품절되었으나 한국은 생필품의 품절률이 0%대에 머물렀고, 그것은 탄탄한 물류망과 성숙한 온라인 시장 체계 덕분이라고 분석되었다. 하지만 표면에 수치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간의 상기와 같은 수많은 변란으로 단련된 국민성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공비들은 내려오고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핵실험을 해대는 속에서 경계경보, 공습경보로 이어지는 민방공훈련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0월 위기설, 0월 전쟁설들을 끼고 살았다. 그 수많은 변란과 위기 속에서, 과연 우리들이 사재기를 한 번도 안 해 봤겠는가? 예전 필자의 어머니는 위기설이 닥칠 때마다 제일 먼저 모든 항아리에 물을 받아 놓으셨다. 필자도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양초와 라면을 사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재기를 해 봐도 잠깐 버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결과, 우리는 사재기에 목을 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스와 메르스를 겪어내면서 면역이 생겼듯이 이미 사재기에도 면역이 생겼다고나 할까.
사진에서와 같이 지금 프랑스에서는 식료품을 중심으로 사재기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성숙한 시민의식과 선진화 된 유통 체계로 한국은 사재기가 없다는 보도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파리에 사는 딸은 상기의 내 얘기들을 하지 않았단다. 한국의 높은 위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직접 보거나 겪지 않은 그간의 힘든 세월들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모든 예술가는 '돌+아이'여야 작품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하고 멀쩡한 정신으로 어떻게 그 위대한 예술작품들을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위대한 ‘돌+아이’ 중의 하나인 툴루즈 로트렉 전시회를 보러 갔다. 한국에서는 처음 열린다는 로트렉 작품 전시회. 물랑 루즈의 작은 거인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로트렉 전은 예술의 전당에서 오는 5월 3일까지 열린다.
최근 미술계에 정착된 도슨트 해설도 풍성하다. 특히 젊은 관객들을 몰고 다녀 도슨트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정우철 도슨트의 해설 시간대에 맞춰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이 있을 정도이니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작품 감상을 훨씬 풍성하게 할 수 있어 강추!.
전시회를 알차게 보려면 도슨트 해설 시간 전에 넉넉하게 도착해 미리 작품을 한번 훓어 본다. 도슨트 해설시 기본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정우철 도슨트의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1시간 정도 로트렉의 삶에 대한 스케치를 곁들인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설을 듣고 나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래서 사람은 한 가지라도 더 배워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 물랑 루즈의 빨간 풍차를 그린 화가, 난쟁이, 알코올 중독자, 매춘굴에서 살다시피 했던 성 도착자, 로트렉을 떠올릴 때 따라붙는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로트렉은 파리 최고의 귀족 가문 자제로 태어났다. 한데 이 가문은 재산을 타인에게 나눠주기 싫은 탐욕적인 가문이었다.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촌 간의 결혼으로 가문의 계승자를 돌려막았다. 계속된 근친결혼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뼈가 부서지는 병이 대를 걸러 나타났고 하필이면 로트렉의 아버지 대를 건너 이 병이 로트렉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불운의 귀족 로트렉은 14세 되던 해 넘어지면서 허벅지의 뼈가 부러지게 되고 이후 로트렉은 하반신 성장이 멈춰버렸다. 하반신 성장이 멈춘 채 상반신만 성장하는 난쟁이로 어른이 된 로트렉은 백작인 아버지처럼 승마나 사냥 등을 하지 못하고 대신 어머니의 지원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화실에서 종일 그림을 그리며 아버지의 냉대와 멸시를 이겨내야 했다.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로트렉은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천박한 귀족성에 치를 떨기도 했다는데 그가 그린 삽화 중 샌드위치를 게걸스럽게 먹는 귀족은 그의 아버지를 빗대 그린 것이라고 한다.
말풍선으로 “천박해, 너무 천박해” 까지 그려 넣은 로트렉은 아버지의 차별과 냉대, 멸시를 받으며 그림에 대한 집착을 키워낸 예술가다. 이에 반해 한없이 너그럽고 죄책감을 가진 채, 평생 로트렉을 보살피며 그의 마지막 죽음까지 지켜줬던 어머니는 로트렉에게는 인자한 성모 마리아 그 자체였다.
‘천박한 아버지와 성스러운 어머니’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모에 대한 천착을 넘어 로트렉이 다음으로 천착한 것은 파리 몽마르트르 아랫마을의 유곽을 이룬 매춘부들이었다. 로트렉은 아예 이곳에 방을 얻어 자유스럽게 그들과 교류하며 귀족의 눈에 보기엔 뒤틀렸지만, 사실은 생존의 삶 그 자체인 삶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기록했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물랑 루즈에서 춤을 추는 무희거나 노래를 부르는 가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매춘부 등을 그린 작품들이다.
현대 회화의 대가인 피카소가 존경했던 화가, 로트렉
피카소는 그의 작품 ‘푸른 방’에서 로트렉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로 ‘푸른 방’ 작품 속 공간인 벽면에 로트렉의 작품인 메이밀튼 포스터를 그려 넣기도 했다. 로트렉이 없었다면 앤디 워홀도 없었을 것이라는 후대 예술가들의 평이 아니더라도 19세기 후반인 로트렉의 활동시대가 무색할 만큼 현대의 팝 아트 같다. 지금 2000년대의 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올드 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전문가 설명에 의하면 그림 전체를 꽉 채우기보다 사물의 특성을 극대화해 캐치하는 로트렉 특유의 기법 때문이라고 한다.
로트렉의 이 기법은 현대 회화에 가장 크게 미친 영향이라고 하니 조롱과 멸시, 냉대에도 굴복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를 이룬 로트렉의 정신세계는 현대인 모두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포스터와 삽화 등의 일러스트전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열린 로트렉 전시회를 통해 현대 포스터, 그래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트렉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며 나 스스로 나를 지키고 뭔가를 이뤄내는 일에 대한 자기 단련은 어디까지 계속돼야 하는지 화두를 자신에게 던져본다.
예술의 전당에서 5월 3일까지 전시가 계속되며 도슨트 가이드를 통해 관람해볼 것을 강력 추천한다(별도 요금 없음).
세월이 참 쏜살같습니다. 화창한 봄 가곡 ‘동무 생각’을 부르던 누이들 얼굴엔 어느덧 주름이 깊게 파이고 흰머리 가득한 할머니들이 되었습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들녘을 나비처럼 사뿐사뿐 날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설익은 앵두처럼 풋풋했던 황혼의 누이들이 가만가만 속삭입니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 유자효의 시 ‘인생’ 중에서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온 산이 풀빛으로 물들어가는 강원도 삼척의 고갯길을 지나다 갑자기 들려오는 웅장한 교향악 소리에 멈춰 섰습니다. 그 옛날 누이들이 입을 모아 합창하던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듯한 환청을 들었습니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관악기가 봄날의 환희를 노래하는 듯한 천상의 교향악을 들었습니다. 숱한 수가 한꺼번에 울리니 그 소리는 산과 계곡을 압도합니다. 숲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주인공은 바로 유별난 생김새를 무기로 단번에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등칡의 꽃입니다.
나뭇가지를 휘감으며 최대 10m까지 길게 뻗는 줄기뿐만 아니라 10~26cm로 제법 큰 데다 하늘을 뒤덮을 듯 풍성하게 나는 심장형 잎이 칡을 빼닮았고, 무성한 가지마다 잎겨드랑이에서 꽃송이를 숱하게 늘어뜨린 것이 등나무를 닮았다고 해서 등칡이라 불리는 덩굴식물입니다. 그런데 누에고치 집을 U자형으로 구부려 놓은 듯한 길이 10㎝ 안팎의 꽃이 참 독특하니 매력적입니다. 4~5월에 피는 꽃의 구조는 단순해, 지름 18㎜ 정도인 꼬부라진 통부(筒部)와 3개로 갈라진 꽃가장자리로 되어 있습니다.
꽃 색은 다소 평범해 통부 입구의 꽃가장자리는 연한 노란색, 통부는 밝은 연녹색, 안쪽 중앙부는 연갈색이며, 밑에는 검은 자주색, 윗부분엔 보랏빛의 갈색 반점이 있는 등 전체적으로 황록색을 띱니다. 하지만 꽃 모양은 오묘해서 대개는 “앗, 색소폰을 닮았네”라는 첫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한술 더 떠 통부를 옆에서 보면 남성의 상징을, 정면에서 보면 여성의 국부를 연상하게 된다며 “애들은 가라”라는 우스갯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선에 대해 식물학자들은 말합니다. “꽃은 곱건 밉건 다음 세대를 만들기 위한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꽃 색이 대부분 황색인 것은 수분을 돕는 꿀벌 등 곤충이 가장 잘 식별하는 색이 황색이기 때문이다.” 꽃 구조가 야릇해 마주보기가 민망한 게 어쩌면 당연하다는 말이겠지요. 실제 등칡의 생식기관인 꽃 안으로 벌이나 파리가 일단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아 새끼손가락만 한 통부 안에서 발버둥을 치다가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잔뜩 옮겨 수분을 돕게 된다고 합니다.
Where is it?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중국 및 극동 러시아, 그리고 함경북도에서 강원도까지 분포한다. 강원도 이북에서 많이 자란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남으로 경북 청송의 주왕산, 경남 거제도까지 개체 수는 많지 않지만, 널리 분포한다. 서울 등 수도권의 야생화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곳은 경기도 가평과 강원도 화천의 경계에 있는 화악산. 강원도 삼척 일대 계곡과 너덜지대에서는 등칡의 꽃이 줄줄이 달려 천상의 교향악을 울리는 장관을 만날 수 있다. 울산의 재약산에선 수령 300년 된 노거수 등칡 2그루가 발견되기도 했다.
모네, 세잔, 샤갈, 르누아르, 로댕 등 서양 근·현대 화가들의 걸작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고양문화재단(이사장 이재준)은 지난 2월 아람미술관에서 전시 개막 후 4일 만에 코로나19로 휴관에 들어갔던 ‘프렌치 모던: 모네에서 마티스까지 1850-1950’전을 지난 4월 7일부터 재개관했다.
클로드 모네와 앙리 마티스, 폴 세잔, 마르크 샤갈 등 후기 인상파의 대표작을 비롯해 미국 브루클린 미술관의 컬렉션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총 45명의 회화와 조각 59점을 전시함으로써 서양 미술사의 황금기이자 혁명기를 관통하는 사조를 망라했다.
이번 전시는 미국에서 최초로 인상주의 전시를 열었던 브루클린 미술관의 유명한 유럽 컬렉션 중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모더니즘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그 과정의 대표 작가들 작품을 통해 미술사의 맥락과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 크기와 소재, 미술사조가 각각 다른 전시품들은 프랑스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이다.
앞서 말한 100년 동안 프랑스는 1848년 혁명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미술사도 리얼리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이 등장하며 모더니즘이 전개됐다. 그 중심에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있었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맨 먼저 장 프랑소아 밀레의 ‘양 떼를 치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이삭 줍는 여인들’과 ‘만종’으로 고단한 노동자들이 삶을 주로 그렸던 밀레는, 반 고흐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전통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자연을 보았던 바르비종파의 대표 화가이기도 하다.
밀레에게 깊이 공감했던 클로드 모네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담아내 색채 묘사의 혁명가라 불린다. 이번 전시의 포스터로 활용된 그의 작품 ‘밀물’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는 듯한 시점을 사용하여 해안선에 자리한 오두막집의 배치를 극적으로 강조했다. 그의 힘찬 붓놀림은 휘몰아치는 자연의 힘을 전달하는 듯 강렬하다.
전시는 풍경, 정물, 인물, 누드의 총 4개의 장르로 구분돼 자연주의에서부터 추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모던 시기의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풍경 섹션에서는 모네의 ‘밀물’ 외에, 구스타브 쿠르베의 ‘파도’, 폴 세잔의 ‘가르단 마을’ 등을 만날 수 있다. 정물 분야에는 르누아르의 ‘파란 컵이 있는 정물’, 앙리 마티스의 ‘꽃’ 등이 전시돼 있다. 인물 부분에는 밀레, 모리조, 부게로 등의 작품이 있고, 누드 파트에서는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작품 ‘청동시대’, 에드가 드가의 ‘몸을 닦는 여성’ 등이 눈길을 끈다.
전시장에서 기자를 안내해준 고양문화재단의 김언정 수석큐레이터는 이런 대규모 전시를 유치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우리나라와 현대 미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서양미술 전환기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골고루 프렌치 모던 시기의 중요한 작가들을 다 모아서 기획하고 작품을 가져온 경우는 많지 않아요. 게다가 지금 같은 블록버스터급 전시를 하기 위해서 특정 기획사가 아니라, 뉴욕에서 세 번째로 큰 브루클린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들을 통해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라서 더 의미가 있습니다.”
더불어,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기획사가 개입하지 않은 덕분에 시민들도 저렴한 입장료(성인 1만 원, 고양시민은 5천 원)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전시 관람을 원하는 관람객은 고양문화재단 홈페이지(www.artgy.or.kr)에서 사전예매를 통해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 시간대별로 관람 인원을 제한해 진행하고 있는 이번 전시는 6월 14일까지 계속된다.
전시장소: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앙로 1286 아람누리
요즘처럼 시간이 여유로울 때는 지난 영화를 검색해서 다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최근에 본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은 2017년 개봉작으로 ‘엘레노어 코폴라(Eleanor Coppola)’ 감독의 데뷔작이다. 남편의 동유럽 출장에 동행하려다 감기가 걸리는 바람에 일정에 차질이 생긴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이 남편 동료의 제안으로 프랑스를 여행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감독 데뷔 전에는 ‘회상, 지옥의 묵시록’과 같은 다큐멘터리 연출도 했고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설치미술가, 작가 등 다양한 이력이 있다.
여주인공 ‘앤’역은 배우 ‘다이안 레인(Diane Lane)’이 맡았다. 초반에 잠깐 등장한 남편 ‘마이클’역은 ‘알렉 볼드윈(Alec Baldwin)’이, 프랑스의 연출 겸 작가, 배우로 활약하는 ‘아르노 비야르(Arnaud Viard)’가 남편의 사업 동료인 ‘자크’역으로 나와 프랑스 남동부 곳곳을 안내한다.
자꾸 어딘가를 들르는 ‘자크’에게 ‘앤’은 “파리, 오늘은 갈 수 있나요?” 하고 묻는다. ‘자크’ 는 “걱정 말아요. 파리는 어디 안 가요.” 라고 센스 있는 대답을 한다. 결국 칸에서 파리까지 7시간이면 오는 파리를 거의 40시간 만에 도착하게 된다.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이때 경험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약 6년간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남편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감독의 든든한 외조 덕에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은 자신의 이야기를 에 녹여낼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경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깨닫게 하는 이 영화는 제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와 제60회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 제35회 뮌헨국제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특별하지 않은데 설레게 하는 영화
화면에는 프랑스 남동부의 아름다운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프랑스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칸을 출발하여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는 중년 남녀의 모습 역시 청춘의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의 설렘을 준다.
‘프랑스의 심장’으로 불리는 리옹에서는 세계 최초로 영화를 제작한 뤼미에르 형제의 ‘뤼미에르 박물관’이 나온다. 도시의 세련됨과 여유로움이 있는 리옹에서 가장 큰 ‘폴 보퀴즈 시장’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사진을 찍는 ‘앤’의 작은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프랑스 정통 와인과 프렌치 푸드의 다양한 색감과 화려함은 색다른 즐거움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행 중에 ‘앤’이 먼저 가자고 한 곳이 한군데 있다. 성모 마리아의 유해가 있다고 알려진 ‘성 막달레나 대성당’ 이곳에서 ‘앤’은 마음 깊이 있던 자신의 상처 하나를 ‘자크’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다.
남편의 사업 동료가 안내하는 여행은 내내 정중하고 사려 깊다. 특별하지 않은데 아련하게 다가온다. 두 중년 배우가 주는 원숙미와 프랑스 거리의 풍경들. 두 사람의 여행이 길어지면서 불안해하는 남편의 반응과 호들갑스럽지 않지만 덤덤하게 드러나는 서로에 대한 관심도 재미있다.
이선화 추상화가(52세)의 작품은 색채와 그림이 모두 인상적이다. 컬러풀한 색채는 열정과 에너지를 전하고, 역동적인 그림은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이야기한다. 작가 자신도 늘 밝은 기운을 발산해 주변에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전시가 대부분 취소된 가운데, 고양시에 있는 한양문고의 ‘갤러리 한’에서 3월 3일부터 6월 8일까지 이선화 작가의 ‘생명소통’ 전을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는 작년 8월에 초대전을 한 이후 반응이 좋아 2번째로 하는 전시다. 그는 20살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30년이 넘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10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좋았어요. 중학교 때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나도 색채의 마술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색감이 뛰어난 작가’라는 평을 듣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꿨어요.”
대학졸업 후 여러 해 동안 미술 교사로 재직했을 때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외할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도 어린 그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목단꽃을 그려주곤 했다. 언니와 여동생 역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예술가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집안에서 성장하다 보니 화가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늘 생명력, 에너지, 색채에 관심을 두었고, 40대부터의 표현 주제는 생명소통이다. 작품과 제목에도 물고기와 새, 나무, 바람, 물 등 장자의 자유 사상과 생명체들 간의 소통을 담았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생기와 울림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심리학과 동양철학, 명상 관련 책을 즐겨 읽은 덕분에 이런 사고가 가능하다.
“생명도 중요하고 소통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한 줌도 안 되는데 서로 연결이 되어 있죠. 사람을 포함한 생명 하나하나는 우주 안의 하나의 세포라고 생각해요.”
그는 작품을 통해 추상화의 동서양적 만남을 시도했다. 추상화의 출발은 서양이지만, 추상적 사유와 미학은 동서양이 따로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저는 우리나라의 전통색인 오방색을 주로 써요. 오방색이 우리 민족의 심성에 가장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음양오행의 의미를 담고 있는 청, 적, 황, 백, 흑색은 서로 충돌하면서 조화를 이루죠. 마치 카오스와 코스모스, 즉 혼돈과 질서가 함께 있는 우주와 같아요. 이런 것들이 생명력을 표현하는 제 회화를 만드는 요소들이에요.”
그의 작품들은 멀리서 보면 어떤 기운이 느껴지다가, 가까이서 보면 온갖 생명체들이 서로를 향해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관객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때로는 온화하고, 때로는 격정적이며, 때로는 시원한 치유의 바람을 느끼길 바란다.
“컬러 테라피, 즉 색채에는 치유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제 그림과 소통을 하는 모든 분에게 생명력과 에너지를 주고 싶어요. 그림을 통해서 감상자들의 트라우마를 줄여주고 활력 있고 행복한 삶에 도움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죠.”
그의 작업을 보면 현대미술 대중화를 위해 고민한 흔적도 읽을 수 있다. 선입견 없는 마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담으려고 인문학 공부를 꾸준히 한 덕분인 듯하다. 그 스스로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수행하는 마음으로 예술 활동에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추상화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가 전하는 감상법은 명쾌하다.
“예술가는 대상을 표현하고 평론가는 작품을 해석하려고 하죠. 그런데 감상자는 그 느낌 자체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작품을 머리로 해석하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바람의 의미를 묻지 않고 바람을 느끼듯이, 꽃의 의미를 묻지 않고 꽃향기를 맡듯이, 파도의 의미를 묻지 않고 파도에 몸을 던지듯이 말이에요. 그때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은 오롯이 감상자 고유의 것이 될 것이고, 감상자는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화여대와 홍익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그동안 20여 차례의 개인전과 100여 회의 단체전에 참석하며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왔다. 중국 상하이를 비롯해 런던 ‘어포더블 아트 페어(Affordable Art Fair)’와 홍콩 ‘하버 아트 페어(Harbor Art Fair)’ 등 해외 여러 곳에서 전시를 했다. 2017년에는 20여 명의 한국 작가들과 함께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열린 ‘아트 쇼핑(Art shopping)’에도 참여했다. 국내에서는 키아프, 화랑미술제, 롯데호텔 아트 페어, 부산국제화랑미술제 등에서 단체전과 국회 아트갤러리, 현대백화점 등에서 초대 개인전을 했다. 작품은 박영사, 고영 테크놀러지, LG생활건강, 리더스경제신문사 등 많은 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는 SNS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도 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활용해 스카프, 넥타이, 스탠드 조명 등의 아트상품을 만드는 것도 소통을 위한 일 중에 하나다. 5월 한 달간 ‘갤러리 한’ 전시장에서는 추상화 개인 레슨도 할 예정이다. 그동안 종종 자신의 작업실에서 캔버스와 물감, 붓 등의 재료를 제공하고 2시간 동안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지도해 왔는데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추상을 힘들고 낯설게 생각했던 이들이 추상의 매력에 빠져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