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거듭 휘어지는 길, 조붓한 찻길을 따라 닻미술관을 찾아간다. 누굴까? 외진 야산 자락에 미술관을 만든 이. 자연에 심취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 대도시 근교도 아니고, 접근도 쉽지 않은 산중에 사립미술관을 열다니. 이는 모험일 수 있다. 사람들이 찾아오기 쉬우랴. 속된 말로 파리 날릴 수 있다. 하지만 외져서 오히려 호감을 살 수도 있겠다. 도시엔 없는 정적과 고독이,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이곳에 흔하게 있는 게 아닌가. 이윽고 길의 끝에 닿자 닻미술관 푯말이 보인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에 있다.
넓고 훤칠한 정원 안에 미술관이 있다. 정원 안이라 했지만 숲속에 있는 미술관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백마산이라 부르는 야산이 늘어뜨린 치맛자락에 폭신하게 안긴 미술관이다. 미술관의 너른 부지 자체가 산과 정원의 융합으로 이루어져 통째 아늑하다. 청신해서 생동한다. 게다가 계절은 봄. 부지깽이도 꽂아두면 싹이 튼다는 4월의 봄이다. 물오른 나무들의 몸엔 이미 튼 싹눈들. 설레어 곱살스레 하느작거리는 연둣빛 잎사귀들. 희거나 붉거나 노란 꽃들은 작렬하듯 일제히 피어나 날 좀 보소, 아우성친다. 햇볕은 궁금한가? 그것은 유난히 풀꽃들 소담하게 핀 둔덕에 모여 앉아 있다. 풀꽃이 전하는 소식에 귀 기울이는 것 같다. 벌써 후루룩 떨어져 땅바닥에 누운 벚꽃들의 모습은 또 어떻고? 휘황한 장제(葬祭)를 닮아 애절하게 아름답다.
미술관에 왔으나 눈길과 발길은 이렇게 서정적인 정원 풍경에 오래 머문다. 이런 미술관, 아마도 드물지 싶다. 수려한 정원으로 일단 유혹하고 매혹한다. 수목과 화초들이 연출하는 예술과, 숲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이 내는 선율에 씻긴 마음은 샘물 한 바가지 퍼마신 양 개운하다.
나무들에 가려 감춰진 듯 살짝 보이는 입구를 찾아 미술관 본관으로 들어간다. 건물의 양식도 분위기도 이채롭다. 지중해 휴양지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의 집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디귿(ㄷ)자를 닮았다. 건물 복판에 조성한 중정 좌우로 전시관과 카페 공간이 있다. 눈길을 붙잡는 건 역시 중정이다. 중정을 이룬 사물들마다 고풍스런 미감을 돋우고 있다. 고재와 고철로 만든 출입문, 빈티지 타일이 깔린 바닥, 처마를 떠받친 하얀 기둥들, 획일적이지 않은 의자와 탁자들의 낡음과 아름다움…. 한층 독특한 건 중심부에 팔각형 형태로 설치한 연못이다. 아주 작은 연못이라 연못다운 기능성에 착안하기보다 뭔가 상징적인 물웅덩이를 표상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여성성이라거나, 궁극의 자연성을.
중정 뜰에 앉아 만날 수 있는 풍경 중 빼어난 건 하늘의 동향이다. 지붕 없이 확 열린 상부의 사각 프레임으로 파란 하늘과 구름과 햇살이 들이친다. 닻미술관 건물은 이렇게 자연을 향해 열려 있다. 자연을 끌어들인다.
닻미술관은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2010년에 개관했다. 설립자는 사진작가이자 미술관 관장인 주상연. 그는 건축과 정원 조성에 따르는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그가 미술관 설립에 나선 계기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트 인스튜어트’(Art Institute)에서 공부하면서였다고 한다. 유학을 통한 개안? 그는 국내에 있을 땐 착안하지 못했던 구상을 했다. 예술이 일부 계층의 전유물일 수 없다는 것.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것. 삶과 예술과 자연, 이 셋의 소통과 유대를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공간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 이러한 생각을 가슴에 담고 귀국한 그는 마침내 닻미술관을 개관하기에 이르렀다. 사진 중심의 예술서적을 작가와 협업해 출간하는 닻프레스도 설립했다. 닻미술관과 닻프레스는 서로 손잡고 동행한다. 닻프레스의 출간 콘텐츠가 곧장 미술관 전시로 이어지면서 확장되는 게 아닌가. 닻프레스의 존재감은 해외에 더 또렷하게 부각됐다고 한다.
억지 꾸밈이 없는 야생정원
주상연 관장에게는 유학 중에 인연을 맺은 예술적 어머니가 있다. 미국의 사진가 린다 코너(Linda Coner)다. 코너는 하늘과 땅, 성과 속, 우주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탐구와 질문을 사진 작업으로 하는 작가로, 주 관장의 삶과 사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미술관 설립의 배경을 이루는 정신적 에너지 역시 코너에게서 얻은 것 같다. 한편 주 관장은 자연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고요한 숲속에 미술관을 지은 걸 보면 이미 알 만한 일이지만, 그는 인생에 자연이 결부돼 있을 때 삶의 더 나은 지평이 열린다고 믿는다. 따라서 사진작가로서, 미술관 운영자로서 자연이 발신하는 언어를 포착한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자연과 예술이 주는 ‘무작위적 친절’이 공기처럼 세상에 미만하길, 그래 저마다의 삶에 창조성과 영성이 깃들길 바라서다.
전시실에선 국내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꼽히는 주명덕의 작품전 ‘풍경, 저 너머’가 펼쳐지고 있다.(6월 18일까지) 80대 고령에 접어든 주명덕은 아직도 암실에 들어박혀 사진 작업을 하는 열정의 화신.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과속 질주하는 세태에 여전히 아날로그적 사진 작업을 고수하는 것에서도 뚝심과 지향이 드러난다. 평생 한국의 자연과 풍속과 문화유산을 흑백 기록사진에 담은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문명, 풍요, 공해 같은 개념과 상관없는 한국의 고유한 전통과 특색을 보존하고 싶었다.”
이번 전시회는 2021년 닻미술관의 기획전 ‘집’과 이어지는 주명덕의 두 번째 사진전이다. 기록사진으로 시작해 예술사진으로 확장된 후반기 작업에 속하는 세 가지 시리즈, 즉 ‘잃어버린 풍경’과 ‘장미’, 그리고 ‘사진 속의 추상’을 함께 엮어 보여주는 기획전이다. 피사체의 사실성을 포착하는 데 능란한 작가가 추상 이미지의 구축에도 유능함을 알려주는 전시회다. 다만 한 획을 쓱 그은 듯 간결한 이미지를 담은 주명덕의 추상사진엔 허무와 초탈이 실려 있다. 리얼리즘으로 도달할 수 없는 깊이와 높이를 보여주고 있으니, 마침내 그의 눈은 세상과 인간의 이면을 그윽하게 관조하나? 대가의 사진은 그렇다면 한 줄의 경전에 맞먹나?
본관 저 뒤편 프레임실에서는 ‘구름의 노래’전이 진행된다. 닻미술관이 소장한 사진작품 가운데 구름을 소재로 한 것들을 골라 걸었다. 구름이라는 이름의 자유로운 나그네를 저마다의 작풍으로 은유한 사진가 12인의 흑백사진이다.
전시실을 나와 다시 정원 숲길을 헐렁헐렁 산책한다. 억지 꾸밈이라곤 없는 야생정원이다. 가꾸는 건 가두는 것이다. 가만히 방목해둔 나무와 풀들은 저리도 무성하다. 스스로 조화를 이룬다. 정원 길 한편에 오두막 한 채 있다. 은자처럼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작은 집은 데이비드 소로가 살았던 월든 호숫가 오두막의 실제 도면에 따라 지었다. 월든을 주제로 한 기획전을 치를 때 만들어 실내에 전시했던 걸 정원으로 옮겨놓았다. 소로는 말했다. ‘나의 직업은 산책가’라고. 산책이 직업? 이보다 좋은 직업이 있나? 대봐라, 더 나은 게 있거들랑.
주상연 닻미술관 관장
“자연과 소통하는 미술관 추구”
닻미술관의 정원은 아름답다. 인위와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정원의 외곽은 야산 그대로를 다듬지 않고 원형 그대로 두어 야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미술관의 밑그림을 그릴 때부터 주상연 관장은 정원 공간을 전체 콘셉트의 중심에 두고 숙고했던 것 같다. 유학차 미국에 살 때 만들었던 개인 정원에 관한 경험도 되살려 활용했다.
사람 드문 지방의 외진 산자락에 있는 미술관이다. 운영 문제를 고려한다면 아무나 쉽게 나설 여건은 아닌데?
“처음엔 낯설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산기슭에 이상한 지중해식 건물을 짓고 들어선 미술관이라니,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 그런 의아심을 표시했다. 초기 수년간은 관람 인원도 극히 드물었다. 내가 산속에서 지금 뭐하고 있지? 이런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운영에 관한 어떤 전략적 대안을 가지고 개관한 게 아니라 힘든 점이 많았다. 다만 꾸준히 열심히 하면 될 거라는 확신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리가 잡혔다. 서서히 팬이 생기고 조력자들이 늘더라.”
닻미술관의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불러들인다고 보나?
“예술과 정원과 숲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이라는 점이 포인트라 생각한다. 보통 미술관은 화이트 큐브를 구성하지만 우리는 빛과 공기가 드나드는 건물을 지었다. 이 역시 장점이다. 자연과 소통하는 미술관이라는 게 관람객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고 본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미술관들은 대부분 악전고투를 했다. 닻미술관은 여기에서 예외였단다. 팬데믹 국면에 오히려 방문자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 바이러스조차 침투할 수 없는 숲속 미술관이라는 안전성이 거둔 뜻밖의 성과였다.
사진 전성시대랄까, 요즘은 남녀노소 누구나,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이들도 많아졌다.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풍속이지 않을까?
“사진을 쉽고 친숙한 매체로 대하는 현상은 긍정적이다. 반면 사진에 관한 인식이 얕아지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정말 좋은 사진을 만날 기회가 오히려 적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나 대중이나 디지털 사진에 편중된 점도 문제다. 해외에선 다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니까.”
현재 진행 중인 주명덕 사진전에 나온 추상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작가의 재능과 내공이 느껴져서.
“주명덕 선생이 그저 전통가옥이나 풍경을 찍는 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한결 다층적인 작품 세계를 구현해왔다. 기록사진에서 더 깊이 들어간 관념적 사진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동양철학적 지향을 가진 걸로 보인다. 나에게는 큰 스승이기도 하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뜻을 얻으면 말을 버린다!’ 선가의 법어 같지 않나?”
당신 역시 사진작가다. 어떤 작품 세계를 추구하지?
“자연에 대한 경외감, 영성에 관한 생각, 시간과 공간에 관한 성찰 등을 테마로 삼는다. 늘 잊지 않는 건, 예술의 치유력이 삶과 정신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이고.”
3월 초, 봄이다. 아직 일러 꽃이야 보이는 게 없지만 저만치 있는 팔달산에 봄기운 아련하다. 대기에도 도로에도 봄볕 묻어 따사롭다. 돌아다니기 좋은 날이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더니 화성행궁 쪽으로 밀려간다. 행궁광장은 자전거를 타거나 천천히 거니는 이들로 평화롭다. 수원시립미술관은 광장 북쪽에 있다. 유서 깊은 행궁과 예술의 그릇인 미술관이 공존하는 곳이다. 역사와 예술이, 전통과 현대가 어깨동무를 했다. 볼 것도, 느낄 것도, 담을 것도 많은 동네다.
2층 건물인 수원시립미술관의 외관은 좀 독특하다. 높이는 낮지만 좌우로 무척 길다. 입면의 길이가 75m나 된다. 그렇게 지은 정황이 있다. 행궁 일대에 적용되는 고도제한을 고려해 지었다. 높이 올릴 수 없어 폭을 넓혔다. 설계자는 ‘간삼건축’ 부사장 진교남. ‘건축의 본질과 정신을 시민 건축(Civic Architecture)으로 구현하는 건축가’라는 찬사를 듣는 인물이다. 역사 옆에 예술을 앉히기. 조선 최대의 행궁이자 정조의 족적이 서린 화성행궁 바로 옆에 미술관 짓기. 이게 쉬운 일인가? 곤혹스러웠겠다. 설계자로서 정색하고 궁리해야 할 요소가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까.
무엇보다 행궁의 품격과 위엄을 깎아내리는 결례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교남은 꾸벅 머리 숙여 자세를 낮춘 건축으로 예를 다하고 싶었나? 행궁 쪽 높이를 반대쪽보다 낮추어 겸손을 표한 장면을 주목할 만하다. 겸손보다 유능한 조화의 기법이 드물다는 걸 통기하는 대목으로 읽어도 되겠다. 미술관 전면의 광장은 드넓어 휑하다. 때로 이벤트가 펼쳐지면 인파가 몰려들겠지. 따라서 광장의 모호하고 광활한 기세에 조응할 만한 미술관 형상이 요구됐을 터인데, 설계자는 무뚝뚝하고도 육중한 노출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기를 돋우었다. 광장에 눌리는 게 없다. 진교남은 이런 요지의 얘기를 했다.
‘전통적이냐, 현대적이냐, 디자인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결국 두 가지 선택지 중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떠나 시대정신을 담는 일에 가장 큰 비중을 뒀다.’
건축의 기본을 조화에 두되 ‘시대정신’을 지향했다는 얘기다. 시대정신이란 사회 전반에서 공유되는 본질적 가치를 말하는 것일 텐데, 그는 대중과의 소통을 건축의 키워드로 삼았다. 따라서 열린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권위적인 디자인 요소를 배제했다. 뽐내거나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처럼 벽 없는 소통의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미술관 하부 벽면에 통유리를 끼워 안팎 경관이 서로 자유롭게 드나들게 했다. 내부 동선을 통하지 않고 밖에서도 바로 건물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은 또 어떻고? 계산이 다 있다. 울타리 없이 대범하게 열린 미술관이라는 시그널이니까.
편안하다! 무엇이? 미술관 내부의 분위기를 말함이다. 입구를 통해 라운지로 들어서자 긴 병풍처럼 즐비한 유리창이 눈길을 끌어당긴다. 외부로 확 트인 개방성으로 답답한 게 없다. 행궁과 광장과 행인의 풍경은 물론, 햇살마저 거침없이 솰솰 창으로 쏟아져 들어와 환하다. 조도(照度) 조절이 필요한 전시실을 제외하고 모든 실내 공간에 대형 창을 내 태양광을 끌어들인다.
반갑다, 나혜석의 ‘자화상’
출입문은 세 개다. 어느 문으로 들어오든 카페테리아 구역을 경유해 전시실로 들어갈 수 있다. 공간 구조물들은 선이 굵은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처럼 호연한 맛을 풍긴다. 치레와 장식과 군더더기를 깨알처럼 맵시 있게 집어넣어 시각적 쾌감을 주는 미술관이 많지만, 이 미술관은 별반 양념을 치지 않고 내부의 선과 면을 단장했다. 고로 편안하다. 미술관에 왔으니 전시실 작품에 주로 눈길을 꽂아달라는 청유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악센트를 준 대목도 있다. 통로의 양쪽 벽을 사선(斜線)으로 슬쩍 기울여 세웠다. 회심의 한 획처럼 과감한 공법을 단행한 벽 구조다. 그렇다면 디자인 혁신? 아무려나, 통로를 지나는 사이에 통째 몸을 숙여 착하게 인사하는 벽면의 환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을 야기한다. 벽엔 무늬가 박혀 있다. 송판으로 거푸집을 짜 만들어낸 문양으로, 노출콘크리트의 딱딱한 질감을 눅이는 자연미를 구현했다. 간과하기 쉽지만 설계자는 이 대목에 방점을 꾹 찍었다.
전시실로 들어선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세계에 이름을 날린 에르빈 부름(Erwin Wurm)의 개인전 ‘나만 없어 조각’전이 펼쳐지고 있다. 미술의 본령은 보이지 않는 걸 보게 한다는 데에 있다. 미술 작품이 재미있는 건 남들이 하지 않던 행위를 찾아 해내는 일에 이골 난 사람들의 산물이라는 데에 있다. 그들은 이상한 상상력과 놀라운 창의성으로 조형한 작품으로 지루하고도 멍청한 세속에 엔도르핀을 배송한다. 에르빈 부름 역시 창의로 세상을 비튼다. 웃어주거나 비꼰다. 국내엔 부름에 갈채를 보내는 마니아가 많다지. 아마도 부름의 전위성에 박수를 치는 것 같다. 그는 일찌감치 옷을 조각의 오브제로 끌어들였다. 나아가 변화하거나 증감하는 세상의 모든 현상 자체를 조각으로 보았다. 조각의 외연을 무진장하게 확장한 셈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조각 작품만이 아니라 그가 손을 댄 사진, 비디오, 퍼포먼스, 드로잉, 회화까지 모두 조각이라고 정의한다. 하기야 세상을 고성능 감관으로 바라보면 뭐 하나 예술 아닌 게 있으랴.
한국에서 펼쳐진 부름의 전시회 중 최대 규모인 이번 개인전은 작품 61점을 3개의 전시실에서 선보였다. 우스꽝스럽게 찌그러지고 뚱뚱한 자동차 형상을 한 작품 ‘팻 카’(Fat Car)는 가지면 가질수록 허기지는 소비사회의 탐욕을 꼬집는다. ‘UFO’는 실제 포르쉐 차를 미확인 비행물체처럼 납작하게 변형시킨 조각이다. 물신을 예배하는 세상의 허영과 가식을 풍자했다. 작가는 이렇게 욕망을 동력으로 해 급발진을 일삼는 자본주의 풍속에 옐로카드를 휘젓는다. 그의 메시지는 사실 범상하다. 재미있는 건 작풍(作風)이다. 쉽고 가볍고 익살맞다. 다른 전시실에서 다른 콘셉트로 진행되는 ‘1분 조각’전은 관객 참여형 전시회다. 부름이 설치한 조각에 관람자가 직접 1분여간 개입해 일정한 행위를 함으로써 작품이 완성되도록 했다. 가히 기발하지 않은가? ‘1분 조각’전은 일찍이 부름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출세작이다.
2층 한편엔 나혜석홀이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불리는 나혜석의 유화 넉 점을 전시했다. 그의 대표작 ‘자화상’도 있어 반갑다. 프랑스 파리에 체류할 때 그는 야수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영향을 받았다. ‘자화상’에서 강렬한 색감과 대담한 묘사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야수파의 경향성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걸 느낄 수 있다. 자화상이지만 실물과 다른 전형적인 서구 여성상을 그린 건 왜일까. 나혜석은 못 말릴 투사형 페미니스트였다. 세상의 빙하를 데카당스로, 마그마 같은 열정으로 섭렵하며 냉대를 자청하기도 했다. 뒤틀린 시대를 고발하고 도발했으며, 성취에서든 방황에서든 그는 매우 독립적인 인간이었다.
박현주 수원시립미술관 홍보마케팅팀 주무관
“에르빈 부름 전시회에 자그마치 4만~5만 명 다녀가”
수원시립미술관은 화성행궁, 성곽길, 행리단길 등을 즐길 수 있는 관광 벨트 안에 있다. 특유의 장소성을 보유한 미술관이다. 그래서일까. 8년 전 개관 이래 관람 인원이 점차 늘더니 요즘엔 급증했다. 장소성 외에 차별화된 전시 클래스와 미술관의 편안한 분위기 역시 관람객 확산을 견인한다. 박현주 주무관은 수원시립미술관이 ‘전시회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미술관’이라는 촌평을 흔히 듣는다며 말을 이었다.
“위압감을 주는 대형 미술관이나 디자인에 복잡한 디테일을 가미한 미술관에선 관람자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 우리는 다르다. 편안하게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조성해 진입장벽을 낮췄다. 결과적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에르빈 부름의 작품 전시장에 관람객이 많더라. 게다가 다들 작품에 몰입돼 뜨거운 분위기였다.
“3개월에 걸친 전시 기간 중 찾아온 관람객이 4만~5만 명에 달한다. 지역 미술관에서 이 정도로 성황을 이루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이건 부름의 인기도를 반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는 물질적 팽창을 가속하는 현대사회의 병증을 풍자한다. 심각하기보다 유쾌한 위트로 가볍게, 그러면서도 깊이 있는 사유를 드러낸다.”
문제적 개성의 표본이라 할 만한 나혜석의 작품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가 그린 회화는 300점이 넘지만 작업실 화재로 대부분 소실됐다지?
“국내에 존재하는 나혜석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이 중 넉 점을 우리 미술관이 소장했다. 나혜석의 일생은 워낙 파란만장해 가십거리로 취급된 경향이 있지만, 사실 그는 굉장히 유능한 여성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도발적인 어록을 보라. 당대는 물론 이 시대에도 의표를 찌르는 메시지가 실려 있는 게 아닌가.”
주로 어떤 작품들을 소장했나?
“페미니즘과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소장품 역시 나혜석 작품을 필두로 주로 여성 작가들의 것이다. 그게 수집 방향이다.”
미술관 개관 이래 실감한 관람객의 추세 변동이 있다면?
“젊은이들의 관람이 확연하게 늘었다. 미술관을 찾아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리는 행위는 청년층에 이미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미술의 저변확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현상이다.”
현대미술은 알고 보면 즐겁지만 무관심한 이들에겐 따분할 수 있다. 미술관을 알차게 향유할 수 있는 기법이 있다면?
“도슨트의 설명과 함께 일차로 작품을 감상한 뒤, 개별적 투어로 작품을 재차 감상하는 게 요긴하다. 그렇게 하면 취향에 부합하는 작품을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을 반복하다 보면 서서히 안목이 생긴다. 안목이 열리면 드디어 미술을 즐길 수 있고.”
이 미술관엔 옥상정원이 있다. 화성행궁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박현주 주무관은 미술 관람 뒤엔 꼭 옥상정원에 올라가길 ‘강추’한다. 조망은 물론 ‘시간이 멈춘 듯한 운치를 자아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여럿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일이 즐거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편이 못 되다 보니 가능하면 이럴 땐 피하고 싶기도 하다. 혼자 혹은 동행 한 명쯤과 다니기 좋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은 어수선함이나 소음으로 피곤한 상황을 피하기 좋다. 혼자서 자기 속도대로 구경하고 한참씩 멈춰 있어도 뭐라 할 이 없으니 말이다. 동행이 있어도 각자 생각의 방향으로 돌아보고 나서 만나면 된다.
이번에 가본 안성의 한국조리박물관도 그렇게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조리박물관의 메인 전시관과 요리아트스쿨 교육장을 중심으로 주변의 너른 공원과 잘 정돈된 조경, 예쁜 카페와 식당까지 고루 잘 조성된 테마파크형 박물관이다. 서양요리 100년의 역사를 갖춘 한국조리박물관은 국내 최초이면서 세계에서는 프랑스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라고 한다.
전시관은 국내 서양요리 역사, 조리인, 메뉴 레시피, 식문화 조리단체, 조리기구와 도구, 소스와 향신료, 커피·바리스타·와인·베이커리 등 8개 테마로 구성되었다. 공간 구획에 따라 준비된 각종 자료들이 생생한 역사를 전달한다. 찬찬히 돌아보며 만난 도구 하나하나, 맛과 연관된 역사적 사실이나 작은 소스 하나까지 신기하고 흥미로워서 한참씩 들여다보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뜻깊은 관람이다. 이를 이루고자 한 걸음씩 심혈을 기울이며 나아간 이들의 진심이 느껴진다. 총 부지 1만 평 정도의 테마파크형 박물관으로, 자연 속에서 관람과 휴식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다.
이번엔 조용히 혼자 전시장을 돌아보려던 생각을 바꿨다. 키오스크로 입장권을 사서 입장하려는데 안내석에 계시던 분이 말을 건넨다. “해설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사실 해설을 들으며 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며 그냥 들어섰다. 그러다가 문득 이곳은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제대로 관람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해설사로 교육받으신 분답게 자신의 소개를 시작으로 친절한 안내와 꼼꼼한 설명으로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어찌나 성심성의껏 안내를 하시는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연륜이 돋보이는 분이었다. 안내를 마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안성시청 소속 문화관광해설사로서 현재 이곳 한국조리박물관에서 파견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일하는 문화해설사는 20명 정도인데 우리가 사는 지역을 위한 일이어서 다들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합니다. 이곳의 문화해설은 팀마다 다르지만 한 번에 한 시간 정도, 경우에 따라 세 시간 한 적도 있어요. 내가 즐거우면 관람객들도 즐겁고, 잘 따르도록 리드하는 능력도 생깁니다. 그런 즐거움이 날마다 여기로 나오게 합니다.”
맡은 일에 자부심이 넘치신다. 청산유수로 설명하는 내용도 귀에 잘 들어오고 구수하기까지 하다. 주어진 일이 즐겁다고 연신 말한다. 유용한 시간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전해진다.
“내가 7학년입니다, 하하하. 건강관리만 잘하면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죠. 지금 하는 일이 대가 여부를 떠나서 보람이 큽니다. 문화 관련 일을 접하는 것도, 또 전시관 주변의 자연도 아름다워서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내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나가는 것 또한 행복한 일 아니겠어요?”
은퇴 후의 시간을 이렇게 보람찬 나날 속에 보내는 심혁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진심 어린 말이다. 시니어들의 일자리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초고령화 시대를 사는 시니어에겐 안정된 노후나 취미 생활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노후의 경제활동이나 적극적인 사회활동이 필요하다. 심혁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말처럼 일이란 건강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진취적인 삶이 행복을 유지해준다.
마침 한국조리박물관 초대 관장을 맡은 최수근 관장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경희대 교수를 은퇴한 최 관장은 여러 호텔 근무 경력도 지닌 식품학 박사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분이다. 특히 ‘소스의 대가’로 불리기도 한다.
“대학 졸업 후 요리 일을 열심히 하다가 더 공부하기 위해 파리 르코르동블루로 유학을 갔지요. 그때 처음으로 이런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남프랑스 니스에 있는 개인박물관이었어요. 프랑스 요리의 거장 에스코피에 셰프의 기념박물관에서 받은 감동을 오랜 꿈으로 간직해왔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방 관련 사업을 하는 이향천 대표를 만난 겁니다. 문화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인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셔서 한국 최초의 조리박물관 건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요리 분야 원로들이 귀한 자료들을 많이 주셨고 저 또한 모든 것을 쏟아부었죠. 지금도 콘텐츠 발굴이나 행사 진행을 하고, 자문을 얻으며 공부합니다. 요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든 언제든 이곳에 찾아오시면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넓은 공원의 자연과 전시관을 돌아보는 그의 시선에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바쁜 와중에도 조리박물관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성의껏 이야기해주셨다. 일정 때문에 급히 이동하면서도 끝까지 예의를 다해 조리박물관의 의미를 전해주시는 마음이 와 닿았다.
한국조리박물관에 가면 근현대 요리와 조리의 방대한 자료를 통한 스토리텔링을 마주하게 된다. 조리계 원로들과 한국 조리명장들이 분야별 자문위원단으로 동참한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가득 만날 수 있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의 유명한 박물관이나 요리학교, 셰프들을 방문하고 벤치마킹하며 진행해온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주방 제조업계의 이향천 대표와 한국 조리업계의 역사를 보존하고 재조명하려는 최수근 관장의 열정이 힘을 합친 결과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현재 한국조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대통령의 밥상’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다. 청와대 요리사가 들려주는 대통령의 밥상 이야기와 청와대 요리사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전시장에는 대통령의 식기가 역사 순으로 전시되었는데 이 또한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빈 만찬에 일본 도자회사의 그릇을 사용해왔다. 이를 본 육영수 여사가 한국 도자기를 주문 생산했고, 그 뒤로 국빈들에게 당당히 우리 그릇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요즘은 가히 요리와 먹방의 시대다. 맛있는 요리를 나누고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이 근래의 일만은 아니다. 답답한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 속의 전시장을 둘러보고 맛의 역사에 다가가 보는 시간이 알차다. 조리인들의 철학과 발자취를 돌아보며 흥미로운 요리 세계로 빠져볼 만하다. 안성 일죽면에 가면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맛의 원천을 되새기는 시간을 만날 것이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서일농원 한국조리박물관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서일농원이 있다. 볕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은 2000여 개의 장독대에서 우리의 장맛이 익어가는 옛 정서를 만끽해볼 만하다. 연못가를 지나 산책로를 걸으며 차분히 사색에 빠져보아도 좋을 듯하다. 코로나19 이후 닫혔던 문이 비로소 올해는 열린다고 한다.
죽주산성 죽산면 쪽으로 조금만 더 달려보자. 시원하게 죽주산성에 올라 봄바람을 맞아볼 일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한 성곽이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확실한 기분전환을 할 수 있다.
노화의 역행 베스 베넷·레몬한스푼
나이 들면서 겪는 주름과 검버섯, 노안과 골다공증 같은 당혹스러운 증상은 왜 일어나는지, 건강수명 연장이라는 최종 목적지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나혜석·하야시 후미코·정은문고
1930년대 남성만이 여행을 누리던 시절, 세계 여행을 떠난 두 동양 여성은 각각 기록을 남겼다. 중국, 만주, 파리까지 여정은 비슷하지만, 두 사람의 민족과 계급이 달라 차이가 존재한다.
의대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윤인모·미래플랫폼
책 제목은 ‘허상 속의 의대는 죽어야 한다’는 숨겨진 뜻을 담고 있다. 강남의 성형외과 의사인 저자는 실제 사례를 재구성해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며, 한국 의료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살인자와 프로파일러 앤 울버트 버지스·북하우스
1970~80년대 미국 FBI는 강력범죄 대응 방안으로 프로파일링 기법을 발전시켰다. 당시 저자는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로 범죄자 성격 연구 방법을 제시, 프로파일링 기법을 체계화했다.
프랑스 면적은 우리나라 5.5배, 인구는 6530만 명이다. 행정구역은 우리나라의 도에 해당하는 레지옹이 18개, 시군에 해당하는 데파르트망이 95개, 동에 해당하는 코뮌(Commune)이 약 3만 5000개 있다. 리옹시와 파리시는 특별지위에 있다. 프랑스 전역에 811개 골프 코스가 있다.
테르 블랑슈 호텔스파&골프리조트(Terre Blanche Hotel Spa Golf Resort)는 유럽 최고의 호텔로 손꼽힌다. 하루에 150만 원의 초고가로 프랑스 1위, 유럽 2위의 명문 골프텔이다. Terre는 ‘땅’, Blanche는 ‘하얗다’는 의미로 ‘하얀 땅’이다.
테르 블랑슈 골프클럽은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에 위치한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은 역사상의 프로방스 지방과 거의 일치하며, 중심지는 마르세유, 그 밖의 주요 도시는 니스, 툴롱, 칸, 엑상프로방스 등이 있다.
유럽 전체에서 손꼽히는 명문
36홀 규모로 샤토 코스(Parcours Le Château)는 프랑스 8위, 유럽 대륙 28위에 랭크된 최고의 명문이며, 리우 코스(Parcours Le Riou)는 프랑스 48위에 랭크되어 있다. 데이브 토마스(Dave Thomas, 1934 ~2013)가 설계해 2004년 개장했다.
테르 블랑슈 골프클럽은 유럽에서 가장 좋은 교수법이 사용되는 훈련 센터를 갖추고 있으며, 최첨단 친환경 시설 덕분에 GEO®(Golf Environment Organization) 인증을 받았다. 2018년에는 ‘골프월드UK’(Golf World UK) 잡지에서 유럽 대륙 최고의 골프 리조트로 선정한 바 있다. 이곳의 자연은 계곡, 호수, 폭포, 숲과 같은 것으로 코스에 영감을 준다. 가장자리가 움푹 파인 벙커는 두 코스의 특징이다. 그린피는 190유로(27만 원) 정도다.
리우(Le Riou) 코스(파72, 6005, 5591m)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전략과 정확성을 보상하는 18홀의 기술 골프 코스다. 5개의 티 박스를 갖고 있다. 블랙, 화이트, 옐로, 블루, 레드다. 샤토 코스와 달리 회원 및 호텔 투숙객에게만 개방된다. 매년 LETAS(Ladies European Tour Access Series)가 열린다.
코스 전체가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으며, 업앤드다운이 심한 전형적인 마운틴 타입이다. 몇 개 홀은 매우 심한 내리막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 오르막을 이루는 홀들도 있어 멋져 보인다. 물은 거의 없지만 9번 홀과 18번 홀은 페어웨이 오른쪽을 따라 길게 흐르면서 그린까지 도달하는 멋진 디자인이다. 전장은 길지 않지만 업앤드다운과 도그레그 홀의 특성상 만만치 않았다. 블라인드 홀이 많아 거리보다는 정확도가 요구되는 코스로 전략적인 라운드가 필요하다.
1번 홀(파4, 353, 319m) 내리막이 심한 왼쪽 도그레그 홀이다. 180m 지점에 큰 벙커들이 있으며, 200m 지점부터 왼쪽으로 도그레그의 매우 심한 내리막을 보여주는 멋진 블라인드 홀이다. 홀 전체가 울창한 수목으로 가득하다.
9번 홀(파4, 398, 368m) 긴 파4 홀로, 티 박스 오른쪽부터 흘러내리는 크리크가 그린 앞 30야드 지점에서 왼쪽으로 지나며 매 샷마다 물과의 싸움이다. 크리크의 폭은 10야드 내외로 작은 바위들과 잘 어우러진 멋진 풍광과 운치 있는 코스 디자인이 돋보인다.
17번 홀(파4, 384, 360m) 큰 내리막 홀로, 홀 주변은 큰 수목들로 가득하며 멀리 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그린 앞 60야드에 크리크가 페어웨이를 가르며 그린 왼쪽으로 길게 큰 벙커들이 이어지는 위협적인 모습이다. 갈수기로 인해 물은 없었다. 멋진 레이아웃이다.
18번 홀(파5, 450, 445m)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난이도 있는 스펙터클한 내리막에 오른쪽 도그레그 홀이다. 페어웨이 왼쪽 150m부터 오른쪽 230m까지 크리크가 흐른다. 비거리가 짧거나 티 샷을 실수하면 최소 더블보기가 나오는 상황. 슬라이스는 매우 위태롭다. 250m 지점에 보이는 멋진 하얀 벙커가 더욱 빛난다.
자연과 어우러진 풍광이 매력적
크리크는 페어웨이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지며, 그린 앞에는 큰 호수가 형성되어 그린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이다. 그린 왼쪽에는 큰 벙커 세 개가 이어져 있으며, 그린은 오르막이 심한 2단 그린으로 핀의 위치에 따라 정확한 티 샷이 요구된다. 그린 좌우에 모두 해저드가 있어 심리적으로 부담되는 상황이라, 강한 멘털이 스코어에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800여 개의 프랑스 골프 코스에서 48위에 랭크된 위용을 18번 홀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클럽을 방문한다면 멋진 코스와 1박에 150만 원이 넘은 프랑스 최고의 골프텔, 라운드 후 3시간에 걸쳐 정통 프랑스 요리를 맛볼 수 있는 훌륭한 만찬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 무렵 일상이 심드렁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사상 최고의 폭염이라는 여름도 간신히 버텨냈고 슬슬 가을이 되고 있었다. 툭하면 머리가 지끈지끈거렸고 개운치 않은 컨디션은 때로 우울하게 했다. 누군가의 낯부끄러운 이기심을 보며 가까이한 것을 후회했고 어떤 이의 유치하고 얄팍한 이중성은 슬프거나 정 떨어졌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내야 하는 소심함이 힘겨웠다. 무엇이 기다릴지 몰라도 잠깐이라도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끓던 중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파리를 제안해 왔다. 거기서 며칠 쉬다가 세비야와 마드리드를 거쳐서 돌아오자고 말하는 남편의 생각에 묻지도 따질 것도 없이 동의했다. 눈 빠지게 그의 휴가 승인을 기다리느라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파리를 거쳐 또 다른 유럽으로 가는 일정이다. 파리를 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거쳐가는 도시로 파리가 좋았다. 잠깐이어도 괜찮다. 스치듯 지나쳐온 단 이틀간의 파리가 가라앉은 내 심장을 조금씩 살아나게 했으니까.
예측하지 못했던 일로 지치고 기운 다 빠졌던 드골공항에서 탄 RER 열차가 뤽상부르 역에 닿았다. 파리다. 파리라는 것만으로도 슬슬 기분전환이 되기 시작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살짝 어이없는 일이 있었지만 가라앉았던 기분은 집어치우자며 심기일전의 심호흡을 길게 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며 날린다. 여기도 가을과 겨울 사이쯤이다. 마음껏 늦가을을 즐기는 파리지엔들 틈에서 내 기분도 조금씩 생생해졌다. 빵집 진열장의 알록달록한 마카롱 더미를 보면서 아하, 파리구나 했고 샹송에서나 듣던 어조를 지나가는 연인들의 말소리에서 들으며 나 떠나왔구나 실감했다.
떠나옴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주변을 온통 둘러쌌다. 거리의 밤바람이 그랬다. 걸을 때마다 눈앞 여행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상의 이야기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발 딛고 서 있는 낯선 풍경 속에서 심장의 동요가 느껴지는 것, 이미 두근거리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소르본 대학 주변의 숙소에서 내려다보는 거리는 대학가의 학구열보다는 어렴풋한 소설의 한 장면이 먼저 떠올랐다. 제목도 내용도 기억에 없지만 희미한 가로등 불빛 한 점 빛나던 소르본의 골목 풍경을 읽었던 듯했다. 어렴풋한 기억이 오히려 아련한 기분으로 감성을 부추긴다.
그리고 문득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재클린이 생각났다. 소르본이라는 이름으로 얼핏 그 두 명이 떠올랐던 것이다. 고작 대중적 인지도만으로 떠올려지는 내 수준으로 연결되는 소르본 골목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한결 친근하다. 연상법의 흐름이란 참 편리하다. 그녀들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문학적 배경이 되고 그녀들의 빛났던 인생의 초석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며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여자가 소르본 대학 학생이었다. 비엔나행 열차에서 만난 남녀의 끊이지 않던 대화가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낸 것으로 기억한다. 어딜 가든 영화 속의 풍경이나 ost가 순간순간 떠오르거나 책 속의 배경이나 여행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시도 때도 없이 생뚱맞게 불쑥 오버랩되는 건 오랜 내 습관이다.
무엇보다도 어둔 밤거리가 활기차다. 구획이나 담장도 없고 대문도 없는 생미셸 거리의 대학가는 가을바람이 휙휙 불어대는 쌀쌀함 덕분인지 순식간에 상쾌하게 기분전환이 된다. 백 년 전에도 있었을 듯한 골목이다. 대학 건물 벽의 오래된 낙서가 이야기가 있는 벽화처럼 재미있는 볼거리다. 길 가다 손잡이를 열면 나를 압도할 그들의 견고한 학문이 맞아줄 것 같은 상상을 하며 그 담벼락 옆 소르본의 골목길을 느릿느릿 걸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젖은 낙엽이 발에 밟히는 거리 주점에선 젊은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밤늦도록 들려왔다. 숙소 창문을 열고 그런 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스민 골목을 자정이 넘도록 내다보았다. 노천카페와 서점들로 이어지는 소르본 대학 주변을 산책하며 비로소 심폐 소생하듯 되살아나는 기분을 감지했다.
소르본 근처 호텔의 아침식사는 간단했다. 그런데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며 신기한 실내 구조를 보며 놀랐다. 마치 마리앙뜨와넷뜨나 루이 14세 시절에 죄수나 반역자들을 가두었던 지하 감옥이 떠올려진다. 언젠가 책에서 그 옛날 프랑스 어느 지하 감옥이 대학 주점으로 변모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또한 떠올려졌다. 역사가 느껴지는 특별한 실내 분위기였다. 참 쓸데없는 상상력이란.
천정이나 벽이 울퉁불퉁하다. 실내가 네모거나 원형도 아닌 멋대로 삐뚜름한 내부 공간에 정갈한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요란하게 잘 차려진 아침이라기보다는, 갓 구운 빵 냄새가 솔솔 나는 누군가의 소박한 주방의 간편한 아침시간 같은~수수한 듯 참 인상적인 분위기여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특히 뭐니 뭐니 해도 바게트 맛은 내가 맛본 중에서 가장 최고다. 쌉싸래한 커피와도 잘 어울린다. 통통한 빵의 굵기와 겉 부분의 크러스트가 단단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하다. 그 안의 빵 결은 촉촉하고 쫄깃해서 물리지 않고 끝없이 먹게 된다. 그 맛에 배가 부른데도 마구 먹어댔다.
우리의 주식은 밥이기에 빵만으로는 오래 먹기 쉽지 않다. 우리는 밥심으로 산다고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빵심으로 산다는 걸 이해하겠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맛이다. 다음에 또 갈 일이 있을까만 만일 다시 간다면 맛있는 바게트를 찾아서 실컷 먹고 올 생각이다. 빵이 맛있던 소르본 어드메의 골목길이 유난히 떠오른다.
파리 중심부에서 남서쪽 36km 지점에 위치한 르골프내셔널(Le Golf National)은 샤를드골 국제공항에서 남서쪽으로 60km 지점에 있다. 알바트호(L’Albatros, (영) Albatross)와 에글(L’Aigle, (영) Eagle) 두 개의 화려한 18홀 코스와 7홀의 이그제큐티브 코스인 와즐레(Oiselet, (영) Birdie)를 가지고 있으며, 8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앞으로 편의상 영어로 표기하여 발음하기로 한다. 알바트로스 코스(파72, 6649, 5854m)는 1990년 10월, 이글 코스는 이듬해 11월에 개장했다. 위베르 슈즈노(Hubert Chesneau)와 로버트 폰 하게(Robert Von Hagge)가 피에르 테브낭(Pierre Thvenin)과 공동으로 설계했다. 2020-2021 ‘골프다이제스트’ 선정 세계 82위의 명문 코스다.
알바트로스 코스의 주된 도전은 샷의 다양성이다. 이 코스는 워터 해저드와 벙커로 공격적이고 과감한 타깃 플레이를 요구하면서 링크스 코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수한 컨디션과 전략적으로 까다로운 레이아웃 덕에 유러피언 투어인 프랑스오픈이 열리는 챔피언십 코스이며, 2018년 프랑스 최초 라이더컵 대회가 열렸다. 골프 코스는 미터법을 쓰고 있으며 티 박스 컬러도 다르다. 블랙-화이트-옐로-블루-레드 5개의 티 박스 순이다.
프랑스오픈 대회장으로 개장
알바트로스 코스는 1991년 프랑스오픈 대회장(Venue)으로 만들어져 중간에 두 번을 제외하고(1999, 2001년)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프랑스오픈은 유러피언 투어로 1906년에 시작되었으며, 2019년 103회를 맞았다. 2020년 104회 대회는 코로나19로 취소되었다가 2021년 속행되었다.
특히 15번 홀, 16번 홀, 18번 홀은 아멘 홀의 명성을 갖고 있다. 실제 라운드를 해보니 가히 공포스런 홀이다. 15번 홀과 18번 홀은 완벽한 아일랜드 그린을 갖고 있어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린 스피드도 10피트가 넘어 속도 조절이 매우 필요하다.
각 홀은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다. 9홀에 한 곳씩 작은 나무로 된 휴식 공간이 있다. 물도 받을 수 있어 굳이 물을 사 먹지 않아도 된다.
2번 홀(파3, 192, 141m) 티부터 그린 왼쪽을 돌아가는 전체가 큰 폰드로 그린 에지까지 어마무시한 모습이다. 샷이 짧다면 여지없이 볼은 물속에 있을 것이다. 그린 오른쪽도 세 개의 큰 벙커가 기다리고 있어 티 샷이 절대적으로 불안하다. 그린 표면만이 안전지대다. 항상 불어오는 뒷바람(Prevailing Wind)으로 그린 위에서 공을 멈추기 어렵다.
8번 홀(파3, 190, 169m) 멋진 내리막 파3 홀이다. 워터 해저드는 없지만 그린 앞과 좌우의 큰 언듈레이션과 티 박스에서 바라본 좌우의 큰 계곡을 연상케 하는 뷰는 장엄함과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그린 역시 언듈레이션이 심해 2퍼트면 성공.
11번 홀도 그린 앞 워터 해저드, 그린 뒤 벙커 등 뷰와 난이도가 환상이다.
15번 홀(파4, 373, 345m) 멋진 내리막에 오른쪽으로 거대한 호수가 18번 홀과 공유하면서 완벽한 아일랜드 그린을 갖고 있다. 라이더컵의 가장 흥미진진하고 위압적인 마무리 를 증명할 수 있는 시작 홀이다. 결코 짧지 않은 파4 홀이며, 기본 거리와 정확도가 요구되는 정말 골치 아픈 홀이다. 파를 기록한다면 오늘 저녁을 사야 할 것이다.
까다로운 코스 구성이 특징
16번 홀(파3, 162, 137m) 필자는 이 홀을 2번 홀과 더불어 시그니처 홀로 보고 싶다. 물론 18번 홀이 압권이긴 하지만. 필자가 숙박한 호텔에서 창문을 열면 16번 홀 그린을 맞이한다. 멋진 내리막 홀이다. 전경이 압권이다. 그린 앞과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작은 호수, 그린 왼쪽과 그 앞으로는 벙커, 그린은 뒤에서 앞으로 내리막이다. 그저 공포스럽다. 그린에 올리는 것이 마냥 부담스럽다.
18번 홀(파4, 431, 411m) 2018년 라이더컵을 열광시켰던 그 문제의 홀이다. 프랑스어로 라훌(La Foule), 즉 ‘군중’이란 뜻이다. 이 홀을 공식적으로 시그니처 홀로 본다. 프로는 파4, 아마추어는 파5로 라운드한다. 레드 티 박스 앞 왼쪽부터 쪽 내려와 그린 앞까지 호수가 이어지며, 그린은 완벽한 아일랜드 그린을 보여준다. 게다가 페어웨이 오른쪽은 폿 벙커(Pot Bunker)들이 더해진다. 티 샷 시 위엄 있는 페어웨이는 스마트한 공략을 준비하지 않으면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워터, 폿 벙커, 아일랜드 그린 등 장갑을 벗을 때까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전반 9홀은 매우 터프하고 공격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에 비해 후반 9홀은 어려워서 스마트하고 전략적인 라운드가 요구된다. 3만 km를 왕복해서 라운드할 만한 값어치는 충분했다.
●Exhibition
◇장 줄리앙 : 그러면 거기
일정 2023년 1월 8일까지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뮤지엄
장 줄리앙(Jean Jullien)은 프랑스 출신의 그래픽 아티스트다.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와 영국 왕립 예술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독창적이면서도 위트 넘치는 작품 스타일은 세계적인 브랜드들과의 협업을 통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면 거기’는 장 줄리앙의 첫 번째 회고전이다. 장 줄리앙의 초기 작품부터 그가 새롭게 탐구해온 최신 작품들까지 총망라된다. 일러스트와 회화, 조각, 오브제, 미디어 아트까지 다양하게 변주된 1000여 점이 전시됐다.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장 줄리앙의 스케치북 100권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장 줄리앙은 항상 스케치북을 갖고 다니면서 인상적인 순간을 즉흥적인 드로잉으로 기록한다. 그 기록들은 하나의 완성작을 탄생시키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100권의 스케치북은 그중 일부다.
전시장은 ‘100권의 스케치북’, ‘드로잉’, ‘모형에서 영상으로’, ‘가족’, ‘소셜 미디어’ 등 총 12개 테마로 구성됐다. 전시장 입구에는 작가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기록한 거대한 스케치북이 펼쳐져 관람객을 맞는다.첫 회고전을 연 장 줄리앙은 “창의적인 삶이란 항상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속에 있는 열정이 어떻게 변화하고 작품으로 표현돼왔는지 그 과정을 이 전시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기억
일정 2023년 1월 20일까지 장소 경운박물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생애를 돌아보며 황실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박물관에 있는 의친왕 관련 유물과 대한 황실 후손들이 소장하던 유물 및 개인 소장 유물을 총망라하는 국내 최초 의친왕 유물전이다. 전시는 의친왕의 왕자 시절부터 △의친왕 책봉 △미국 유학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까지 전반적인 생애와 활동을 살펴본다. 특히 일제강점기 전후한 황실의 독립운동을 비롯해 의친왕과 함께한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역사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친왕의 사진, 훈장, 기념장, 임명장, 의궤, 복식, 선언서, 의친왕 글씨 액자 및 족자, 사동궁 생활유물 등 120여 점이 공개됐다.
●Book
◇나이듦의 철학(제임스 힐먼·청미)
저자 제임스 힐먼은 저명한 융 심리학자다. 그는 책을 통해 나이 듦을 영예롭게 여기고, 그에 합당한 지성으로 창의적인 발상을 제시한다.
제임스 힐먼은 인생에서 가장 오해받는 두려운 시기, 즉 노년에 혁명적으로 새로운 시선을 던진다. 인간 수명의 연장을 문명이 쓸데없이 빚어낸 과오로 보는 유전적 결정론과 정반대 주장을 펼친다. 노년의 고역스러운 일들을 지성으로 파악 가능한 통찰로 보고, 나이 듦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을 비틀었다.
제임스 힐먼은 나이 든 사람을 조상, 젊은이의 본보기, 사회의 문화적 기억 및 전통의 전달자로 본다. 저자는 “나이 듦은 ‘오래됨’의 문을 열고 노년은 그 문을 좀 더 활짝 열어젖힌다. 그게 나이 듦의 핵심일 것이다”라면서 “노인이 지혜를 짊어지고 있다는 말은 노인은 그 자신이 오래됐기 때문에 이 오래된 세상의 이치를 안다는 뜻이다. 노인과 세계는 동일한 존재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노년에 접어들지만 노년의 변화에 당황하거나 절망하기 마련이다. 나이 듦에 대해 저자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며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노년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깊은 자기 이해를 하라고 말한다.
◇빅지니어스 : 천재들의 기상천외한 두뇌 대결(김은영·마음의숲)
양자역학에 관심이 많은 과학 칼럼니스트가 썼다. 아인슈타인, 뉴턴 등 천재들은 라이벌과 경쟁하며 현대문명에 발전을 가져왔다. 천재들의 싸움을 읽다 보면 과학 이론과 역사 상식도 알게 된다.
◇애도 클럽(타일러 페더·문학동네)
암으로 엄마를 떠나보낸 지 10년. 저자는 마침내 지난날의 상실을 마주하고 회고록을 썼다. 암 진단과 투병 과정, 장례식과 추모식, 그 후의 일상을 모두 담았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을 홀로 끌어안은 모든 이에게 위로를 전한다.
◇나는 단단하게 살기로 했다(브래드 스털버그·부키)
성과 전문가인 저자는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부담과 스트레스로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는 동서양의 고대 철학, 과학과 심리학,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고 성장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았고, 이를 소개한다.
●Stage
◇스위니토드
일정 12월 1일 ~ 2023년 3월 5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에릭 셰퍼
출연 강필석, 신성록, 이규형, 전미도, 김지현, 린아 등
스릴러 걸작으로 꼽히는 뮤지컬 ‘스위니토드’가 3년 만에 돌아온다. 1979년 초연된 후 토니 상, 드라마 데스크 상, 로렌스 올리비에 상 등 해외 유수의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극은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이발사 벤저민 바커가 15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친 후,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터핀 판사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치밀한 복수를 펼치는 내용이다.
‘스위니토드’는 파격적이고 독특한 스토리와 넘버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강필석, 신성록, 이규형, 전미도, 김지현, 린아 등 국내 최정상 뮤지컬 배우가 출연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 넘치는 무대가 기대된다.
◇미저리
일정 12월 24일 ~ 2023년 2월 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황인뢰
출연 김상중, 서지석, 길해연, 이일화, 고인배, 김재만
연극 ‘미저리’는 미국 대표 작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990년 동명의 영화가 흥행해 국내에도 스토리가 잘 알려져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 폴 셸던을 향한 열성 팬 애니 윌크스의 광적인 집착을 그린 스릴러다. 주인공 폴 셸던 역은 초연부터 출연한 김상중이 맡으며, 서지석이 새롭게 합류했다. 애니 윌크스 역에는 김상중과 초연부터 환상의 호흡을 펼친 길해연이 돌아오고, 이일화가 새롭게 나선다. 보안관 버스터는 초연부터 이 역을 맡은 베테랑 배우 고인배와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김재만이 연기한다.
◇물랑루즈!
일정 12월 20일 ~ 2023년 3월 5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알렉스 팀버스
출연 홍광호, 이충주, 아이비, 김지우, 손준호, 이창용, 최호중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 ‘물랑루즈!’는 CJ ENM이 글로벌 공동 프로듀싱한 작품이다. 제74회 토니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 포함 10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1890년대 프랑스 파리의 클럽 ‘물랑루즈’ 최고의 스타 사틴과 젊은 작곡가 크리스티안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이번 공연은 아시아 초연으로 오리지널 창작진 및 제작진이 직접 참여한다. 165명의 작곡가와 31명의 퍼블리셔가 창작한 70곡 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 홍광호, 아이비, 김지우, 손준호 등 유명한 뮤지컬 배우들도 대거 출연한다.
●Exhibition
◇바티망
일정 12월 28일까지 장소 노들섬 노들서가
건물 외벽에 사람이 매달려 있는 듯한 착각을 안겨주는 설치 예술 ‘바티망’(Ba^timent)이 국내에 착륙했다. ‘바티망’은 프랑스어로 ‘건물’을 뜻하며, 현대 미술계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 1973)의 대표작이다.
‘바티망’의 구조는 실제 건물 모양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와 거울로 이뤄졌다. 이에 관람객이 작품에 올라서면 마치 건물 외벽에 매달린 듯한 모습이 거울에 반영된다. 더불어 관람객은 바티망 위에서 창의적인 포즈를 취하며 작품을 즐길 수 있고, 그 자체가 작품이 되는 예술적인 경험에 빠져든다. ‘바티망’은 2004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개된 이후 18년간 런던, 베를린, 도쿄, 상하이 등 전 세계 대도시를 투어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2017년 도쿄와 2019년 베이징에서 진행된 투어에는 하루 평균 4500명 이상 방문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올해는 한·아르헨티나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바티망’뿐 아니라 ‘잃어버린 정원’(Lost Garden, 2009), ‘교실’(Classroom, 2017), ‘세계의 지하철’(Global Express, 2011). ‘비행기’(El Avio′n, 2011), ‘야간 비행’(Night Flight, 2015) 등 일상적 소재를 매개로 신선한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작가의 다양한 설치·영상·사진 작품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에바 알머슨, Andando
일정 12월 4일까지 장소 전쟁기념관
‘행복을 그리는 화가’로 불리는 스페인 출신 에바 알머슨(Eva Armisen)의 국내 세 번째 전시다. 3년 만에 내한한 에바 알머슨은 “한국은 항상 두 팔 벌려 따뜻하게 환영해주는 특별한 나라”라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전시의 테마인 ‘Andando’(안단도)는 스페인어로 ‘계속 걷다’라는 뜻으로, 전시는 에바 알머슨의 일생을 회고한다. △삶을 그리다 △가족 사전, 일상의 특별함 △사랑 △자가격리자들의 초상화 △광장 △애니메이션 △자연 △삶 △연약함과 강인함 △축하 △영감 등 총 11개 공간으로 구성됐다. 드로잉, 유화, 대형 조형물, 조각 등 150여 점이 전시됐으며, 최초로 공개된 다수의 최신작을 만날 수 있다.
●Book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플뢰르 펠르랭·김영사)
“당신은 한국인이라고 느낍니까, 프랑스인이라고 느낍니까?” 이 질문은 2013년 한국을 찾은 프랑스 장관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이 들은 말이다. 당시 플뢰르 펠르랭의 답은 ‘프랑스인’이었다. 생후 6개월 때 프랑스로 입양된 지 4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그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답이었다.
플뢰르 펠르랭은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에서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특임장관으로 발탁된 후 통상·관광·재외교민 담당 국무장관, 문화·커뮤니케이션부 장관을 지내고 퇴임했다. 이후 2016년 파리에서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운 그는 벤처 투자자로 변신, 유럽 스타트 업계의 큰손으로 활약하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 출간되는 그의 첫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는 그가 프랑스에 ‘도착’한 날부터 정치인과 사업가로서의 최근 활동까지 담았다. 동시에 2013년 자신을 마치 ‘딸처럼’ 환영했던 한국인에게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성별, 배경, 경계를 이탈해 눈부신 성취를 이어가는 펠르랭의 서사는 소통과 공감으로 감동을 전달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면서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를 추천했다.
◇조선의 대기자, 연암(강석훈·니케북스)
저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연암을 기자의 원조라고 생각했다. ‘열하일기’에는 조선의 정치와 학문 풍토, 선비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직설적 비판과 질타가 포함돼 있다. 연암의 기자 정신은 현재의 기자들에게도 본보기가 된다.
◇전 세계 최초로, 향기를 마신다(김용식·모아북스)
‘마시는 향기’란 천연 재료에서 나온 천연 향기를 포집한 것으로, 우리 몸에 바르거나 마실 수 있는 물질이다. 한의학 박사인 저자는 상세한 연구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마시는 향기’가 건강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자 마을에 저녁이 내리는 소리(한창수·페이퍼로드)
소년 모모의 친근한 이웃들은 사실 인류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 위대한 철학자들이다. 모모는 일상 속에서 이웃들에게 인생과 세계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렵게만 느꼈던 철학 사상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Stage
◇브로드웨이 42번가
일정 11월 5일 ~ 2023년 1월 15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출 오루피나
출연 송일국, 이종혁, 정영주, 배해선, 신영숙, 전수경, 홍지민, 오소연, 유낙원, 김동호 등
브로드웨이 쇼 뮤지컬의 대명사로 불리는 ‘브로드웨이 42번가’는 193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뮤지컬 배우 지망생 페기와 연출가 줄리안, 한물간 프리마돈나 도로시를 둘러싼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1996년 한국 최초 정식 라이선스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다.
이번 시즌은 한국 초연 26주년을 기념한 공연으로 화려한 캐스팅 라인업을 자랑한다. 브로드웨이 최고 연출가 줄리안 마쉬 역은 2016년 ‘브로드웨이 42번가’로 뮤지컬에 데뷔한 송일국, 다섯 시즌 연속 캐스팅된 이종혁이 연기한다. 한때 최고의 뮤지컬 스타였지만 지금은 그 명성을 잃어버린 프리마돈나 도로시 브록 역에는 정영주, 배해선이 캐스팅됐고 새로운 캐스트로 신영숙이 합류한다. 제작자 메기 존스 역은 ‘브로드웨이 42번가’ 초연 멤버이자 역대 최다 출연 타이틀을 기록하고 있는 전수경, 그리고 다방면에서 활동 중인 홍지민이 더블 캐스팅됐다.
◇드라큘라
일정 11월 15일 ~ 2023년 1월 15일
장소 서울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
연출 노우성
출연 신성우, 안재욱, 정동하, 테이, 김진환, 유승우, 이병찬, 종형, 김법래, 이건명 등
3년 만에 돌아오는 ‘드라큘라’는 1995년 체코 프라하에서 초연된 이후 전 세계에서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유럽 뮤지컬의 대표작이다. 1998년 국내에서 초연된 이후, 드라큘라의 매혹적인 스토리에 몰입감을 높이는 무대 연출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번 ‘드라큘라’에서는 신성우, 안재욱, 정동하, 테이가 드라큘라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다. 특히 초연부터 지금까지 드라큘라 역을 연기한 신성우는 관록의 카리스마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또한 아이콘 김진환, ‘슈퍼스타K’ 출신 유승우, ‘내일은 국민가수’ 이병찬, DMZ의 종형 등도 출연하며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에쿠우스
일정 11월 8일 ~ 2023년 1월 29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연출 이한승
출연 장두이, 최종환, 한윤춘, 김시유, 강은일, 백동현 등
1975년 국내 초연 이후 매 공연 센세이션을 일으킨 연극 ‘에쿠우스’가 3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올해는 극단 실험극장의 창단 62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로 장두이, 최종환, 한윤춘, 김시유, 강은일, 백동현 등 공연계 중견 배우부터 신예 배우까지 색다른 조합의 라인업을 자랑한다.
에쿠우스(Equus)는 라틴어로 말(馬)을 뜻한다.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소년 알런 스트랑과 그의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를 통해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정상·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근원적 고찰을 담아낸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건축물이 쓸모를 다하면 부수고 새로 짓는 것만이 답일 것 같지만, 그 시간과 의미를 찾아 연결하고 남기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건축물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의 가치를 알아보고 기록하는 조성룡(78) 건축가를 만났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입구로 들어가 노래하는 분수를 지나면 멀지 않은 곳에 ‘꿈마루’가 있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 ‘피크닉정원’을 찾았다. 조명이 없어 어두운 듯하면서도 햇빛이 들어와 어둡지 않은 길을 돌아선 순간,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천장이 있지만 사이사이가 뚫려 있어 하늘이 보이고, 벽이 있지만 틈이 있어 볕이 닿았다. 내부의 나무들은 천장을 뚫고 자라 있었고, 외부의 나무들은 천장을 넘어 가지를 늘어뜨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새소리가 엉켜 노래하고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읽던 소설 속 비밀의 정원에 들어온 것 같았다.
건물과 자연이 얽혀 있는 ‘꿈마루’
밖에서 보면 무척 오래되어 낡은 건물 같지만 꿈마루는 건축학도들의 필수 답사 코스다. 2013년에는 ‘한국 최고의 현대 건축’ 14위로 꼽혔다. 철거 직전 이 건물을 남기자고 설득한 사람이 조성룡 건축가다. 그는 꿈마루를 ‘보물 같은 건축물’이라고 했다.
“천장을 조금 뚫어놓기만 해도 바람이 통하고 새소리가 들려요. 나무가 자라 넘어오기도 하고, 새가 날아 들어오기도 하지요. 전혀 다른 구조가 되는 셈이에요. 제가 한 건 이렇게 뜯어내는 작업이었어요.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해서, 종종 이곳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했는데, 이쪽까지 올라오는 게 쉽지 않은가 봐요.”
꿈마루 철거가 정해진 뒤 최광빈 푸른도시국 국장이 그에게 자문했다. 당시만 해도 이 건물에 대한 기록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많이 낡은 데다 페인트가 덧칠된 상태였다.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지어졌지만 이후 어린이들을 위한 교양관으로 쓰였다. 찾아보니 나상진 건축가의 작품이었다.
“보통 솜씨로 지은 건물이 아니었어요. 당시만 해도 이렇게 짓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건물 외벽에 타일처럼 붙여둔 저 파란 조각들이 유럽에서는 흔했고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나 하던 방법이에요. 곳곳에 그런 기법이 적용됐는데, 국내에서는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 많아요. 유학 한 번 안 다녀온 사람이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설득력을 가지고 실현까지 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해요?”
꿈마루는 나상진 건축가가 최초에 설계한 그 원형을 최대한 지켜내면서 관리사무소 역할을 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공간들을 ‘집 속의 집’처럼 지었다. 그는 건축물만 봐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상진 건축가가 1970년대에 남긴 흔적, 전시장으로 바뀌며 덧댄 흔적, 설계도를 보고 재생하며 조성룡 건축가가 넣은 장치, 세 가지를 모두 볼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의 흔적 남기는 ‘가치 재생’
조성룡 건축가는 역사에 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이 자리에 골프장이 생긴 시대적 배경, 클럽하우스를 사용했을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 교양관이 되어야 했던 사연까지. 건축 재료나 방법이 아니라 꿈마루라는 건축물의 끊어진 역사 속 퍼즐을 찾아 하나씩 맞추어가며 시간을 엮은 것이다.
“건축물이라는 게 산업 사회의 산물이죠. 쓸모를 다했으니 결국 버리거나 고치거나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그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어떻게’ 버리고 고칠 것인가를 구별해야 하죠. 의미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의미가 없어요. 이 벽을 보세요. 금이 가 있어요. 기둥은 콘크리트고 그사이를 채운 벽은 벽돌이에요. 그런데 벽돌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금이 가게 되어 있어요. 이 벽 아래를 보세요. 뭐가 있던 자리죠? 뭐였을 것 같아요? 라디에이터예요. 이런 게 흔적이죠.”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라디에이터지만, 과거에는 여기에 도시락을 올려 데워 먹었다. 한 공간에 대한 여러 시대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의 추억을 담은 흔적이다.
“1910년부터 건물이 지어졌다고 생각하면 100년 넘는 시간이에요. 얼마나 많이 지었겠어요? 오래된 것 다 헐고 새로 짓는다고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건축은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흔적을 지우기가 쉽지 않거든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살릴 것인가가 중요해요. 그런데 이 중요한 지점이라는 게 시대마다 바뀌어요. 그러니 재생이라는 건 결국 움직이는 생물 같죠. 쓸모를 다해가는 과거 건축물을 소생해내는 ‘재생’은 세계 트렌드예요. 그런데 재생이라는 게 반드시 새것으로 만드는 걸 뜻하는 건 아니에요. 못 쓰게 된 물건이라고 무조건 버리거나, 새롭게 만드는 것, 두 가지 방법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정치·사회적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건물이나 공간이 어떤 이유로 바뀌었는지, 사용하는 사람이 거쳐가는 과정은 어땠는지, 이 흐름을 현재에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가 생각하는 ‘재생’이다. 이는 문화재청 위원으로 활동하며 유심히 살펴본 유네스코 문화유산 보존 방법과도 결을 같이한다. 유네스코는 긴 논의 끝에 복원에는 건축의 진정성을 담아 후대 사람들이 차이를 알아볼 수 있도록 보강하는 방법을 택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같은 문화유산 복원 방식을 두고 유럽에서도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성룡 건축가는 꿈마루 재생 이전에 선유도공원에서 이런 방법을 적용해 이미 재생의 ‘좋은 사례’를 만들었다. 그는 외국의 도시재생 사례들을 가져와 무작정 적용하는 게 아니라, 거리, 건축물, 공간마다 상황을 고려해 남길 것은 남기는 재생이 이뤄지길 바라고 있다. 꿈마루 재생 작업을 하면서 정부에 선유도공원과 꿈마루 두 곳을 시간의 흐름을 담은 재생 사례집으로 묶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담당자가 바뀌면서 결국 이뤄지지는 않았다.
“아파트는 30년이 넘으면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지만, 다른 건물들은 슬슬 문화재에 들어갈 수 있는 연한이 돼요. 문화재는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겠지만, 그렇지 않은 건축물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생각해봐야 하죠. 재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집의 시간을 잘 살펴야 한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면 노출 콘크리트가 트렌드처럼 되어버렸는데, 아무 데나 적용하면 안 돼요. 건축물마다 가진 고유한 시간과 상황을 담아야 하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마을 ‘소록도’
최근 조성룡 건축가가 마음을 쏟고 있는 곳은 소록도다. 10년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폐교를 이용해 문화공간 만드는 사업을 하려고 그를 찾았다. 그저 병원인 줄 알았던 소록도를 처음 방문한 그는 이곳에서 100년간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걸 알게 됐다. 국가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이곳에 가두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마을을 이루고 살 정도였는지는 몰랐다. 소록도에는 7개의 마을이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이 중 가볼 수 있는 마을은 두 군데뿐이다. 주민이 가장 많았던 때는 6000여 명이 살았지만, 이제는 400명 정도 남았다.
“한센병이 있으면 결혼을 못 하게 했기 때문에 이들은 가족이 없어요. 있어도 숨기죠. 그러니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소록도’는 소멸할 거예요. 섬만 남겠죠. 그런데 아무도 이 마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소록도에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어떻게 모르는 일로 넘길 수 있겠어요. 마치 코로나 팬데믹과 비슷하지 않아요? 국가가 강제로 격리하고, 양성이면 병원에서 치료하고 음성이면 마을에서 생활하도록 한 거죠. 전염도 되지 않고 완치 가능한 병이 되었는데도 1980년대까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용돼 강제로 노동하며 살았던 곳이에요. 그런데 그저 슬픈 이야기로만 구전되고 있죠.”
한센병에 관한 의학적 연구 자료는 많지만 이들이 살았던 마을, 집, 생활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그 역시 직접 보기 전에는 소록도에 100년간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이를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만들어진 주차장 한가운데 남아 있던 장안리 마을 집 한 채를 발견해 안내소처럼 만들었다. 100주년 기념 조형물을 만들자던 병원 장을 설득해 기념관 조성을 제안한 것. 다음으로 학생들과 함께 서생리 마을 복원 작업을 시도했다. 가장 오래된 집은 1920년대에 지어졌고, 최소 80년이 지난 집들이었다. 소록도의 이야기를 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일단은 집들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파이프로 보호하는 작업까지만 할 수 있었다.
“앙코르와트 사원처럼 무너져가는 집들과 나무·풀들이 한데 엉켜 있더라고요. 찾아보니 이 집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직접 벽돌 한장 한장 쌓아가며 만든 거예요. 당시 병원장이 이곳에 벽돌 공장도 만들었더라고요. 강제로 노동에 동원된 거죠. 그러니 아무리 무너진 집이라 해도, 그 벽돌 한 장을 그냥 버릴 수 없는 거예요.”
해방 이전까지는 일본인들이 남겨둔 기록이라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의 기록은 아예 없었다. 100년간 사람이 살았지만 누구도 손대지 않은 채 있었으니, 마을마다 집의 형태도 조금씩 다르고 시대마다 지어진 집도 달랐다. 또 처음에는 나무로 지었다가 무너지면 벽돌을 덧대는 등 여러 재료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섞여 있었다. 조성룡 건축가는 이런 것을 연구하고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범하게 살았던 이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거예요.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걸 기록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증명하겠어요? 사진 몇 장으로 남아 있을 뿐이겠죠. 이 기록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야 도시를 어떻게 만들지도 고민하죠. 도시는 한 번 쓰고 말 게 아니라 지속해야 하니까요. 또 시대마다 도시의 모습이 다르잖아요. 어찌되었든 그것들을 기록해서 평가도 하고 반성도 하고 본받을 것은 본받고 고칠 것은 고쳐가야죠. 아파트는 재건축한다고 하면 항상 다 허물고 새로 짓잖아요. 그게 돈이 되니까요. 그러니 소록도 마을과 같은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소록도를 기록할 수 있도록 몇 년간 노력해 국가로부터 예산을 받았다. 그런데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이 예산을 다 채어갔다. 무척 기운 빠지는 일이었지만, 소록도의 실상을 알았는데 돈을 주지 않는다고 기록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 왕복 10시간 넘는 거리를 달리며 그는 아직도 소록도를 조사하고 기록하는 일을 한다.
“가치는 상대적이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죠. 지금까지 문화유산은 보존의 필요성만 있었지 ‘왜’ 보존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연구자가 논문을 쓰면서 ‘불편 문화유산’이라는 말을 쓰더라고요. Difficult Heritage를 불편 문화유산이라고 한 것인데, 특별한 해석이에요.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지만 사회가 불편해한다는 뜻이거든요.”
이를테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이 불편 문화유산에 속한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거쳤고 군부독재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지어진 건축물에 불편한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다. 조성룡 건축가는 그럴수록 ‘왜, 유산으로 남기는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간을 기록한다는 건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국가가 교과서에 남기는 역사만 있는 게 아니에요. 개인의 역사도 역사지요. 역사가 쌓여서 축적되었다는 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준다는 게 중요해요.” 그가 하는 건축물과 공간의 재생은 어쩌면 역사를 기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