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원식 소설가
항구에 닻을 내린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러자고 배를 만든 게 아니다. 항해에 나선 배라야 배답다. 거친 파랑을 헤치고, 멀거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배는 인생을 닮았다. 모험이나 도발이 없는 삶이란 수족관처럼 진부하지 않던가.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살았던 이기순(52)씨가 남편 이병철(57)씨의 손을 잡아끌어 시골로 들어간 건 모험적 항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다. 이기순씨의 시골살이는 암초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대해를 표류 중이다. 취재 섭외를 위해 통화를 할 때, 이기순씨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겸사(謙辭)였다.
“남들은 그럴싸하게 바라보지만, 사실 속사정은 그게 아니에요. 아마도 저희 부부의 현실은 실패 사례로 더 어울릴 거예요. 그냥 차나 한 잔 드시고 간다는 기분으로 오세요.”
이기순씨는 오랫동안 암벽 등반을 즐겼다. 휴일이면 쪼르르 산으로 달려가 잔나비처럼 바위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추락사고를 당해 온몸에 부상을 입었다. 이후 그녀는 지금까지 진통제를 달고 산다. 이 불행한 사고는 용케도 시골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기 좋은 시골에 살며 건강을 돋우자는 착상을 했던 거다. 그즈음 중소기업 상무이사였던 남편 이기철씨는 명퇴의 강박감에 시달리며 전전긍긍 활로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이 역시 도시 탈출의 배경이 되었다. 말하자면 부부가 의기투합했던 것. 까짓것, 우리 시골로 가서 새로 시작합시다! 이기순씨가 앞장서 선창을 했다. 그래그래, 그러세! 남편이 후렴을 읊으며 선선히 뒤를 받쳤다. 그게 4년 전의 일이었다지.
시골 살림을 결단하며 꿈꾸고 그린 게 많았을 게다. 우선은 볕이 잘 드는 남향 터를 잡아야 할 테고, 폼 나게 수려한 전원주택을 지어야 하고, 철따라 꽃이 피어 요요하게 속삭일 정원을 꾸며야 하며, 달빛과 별빛이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밤에 부부 둘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일 만한 정자를 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생활이라는 게 흔히 돈이라는 요물의 농간에 휘둘리게 마련인데, 이들 부부도 자금이 넉넉하질 않아 두통을 앓았다. 그래서 소득을 흐벅지게 올릴 수 있는 방책을 찾았다. 그 결과로 시작한 게 오이농사였다. 이들이 사는 천안시 병천면은 오이의 최대 주산지. 재배 기술도, 유통 루트도 탄탄한 지역이다. 부부는 2000평에 달하는 농지에 오이를 재배하는 것으로 시골생활의 시동을 걸었다. 농토는 임대를 했다. 그 위에 설치된 시설 하우스는 매입을 했다. 거창한 시발이었다. ‘가브리엘 농장’이라는 팻말도 새겨 걸었다. 하지만 업무에 바쁜 행운의 여신은 그들에게 사소한 윙크조차 보내주질 않았다. 첫해는 물론 둘째 해, 셋째 해까지 내리 실패를 보고 말았다. 이기순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농사라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어요. 안간힘을 다해 노력해도 매년 결과는 참담했어요. 기술력 부족으로 생산량이 저조해 낭패를 보기도 했고, 풍작일 경우에도 가격폭락으로 적자가 크게 났어요. 칼자루를 쥔 중도매인들의 횡포에 당하기도 했고요. 갖고 있던 돈을 모두 까먹었고, 빚이 늘어 파산지경에 몰렸어요. 그래도 쌀독에 쌀은 떨어지진 않았어요(웃음). 예산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친정엄마가 쌀을 보내주셔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게 원예농업이죠. 미리 사전 교육을 받진 않았나요? 남의 농장에서 일단 실력을 길렀다거나….”
“별다른 준비 없이 무작정 뛰어들다시피 했어요. 일단 일을 저지르자, 뭐 잘되겠지, 하는 기분으로.”
“저런! 환상적인 귀농이었던 거예요?”
“다분히 그런 면이 있었죠. 귀촌이나 귀농을 하려는 분들에게 요즘 제가 강조하는 얘기가 있는데요, 낭만적인 생각으로 시골에 들어와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산이 좋다고 무작정 산골로 가고, 바다가 좋다고 해변으로 귀촌하는 식의 출발은 극히 위험해서죠. 사실 저희 부부가 단순한 환상으로 귀농을 할 만큼의 바보들은 아니에요. 충분치는 않았을망정 나름대로 사전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그게 농촌 현실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변수와 악재들이 들이닥치더라고요.”
“차라리 초기에 발을 빼는 게 현명했을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었기에 포기 같은 걸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내년엔 좋아지겠지, 차차 타산을 맞출 수 있겠지, 그런 희망으로 더욱 공을 들이고 땀을 쏟았어요. 농사에 어느 정도 물정이 트이면서 우환 중에도 희망이 솟구치곤 했죠. 내 손길을 통해 건강하게 잘 커가는 작물들을 바라보는 경이로움도 견딜 수 있는 힘이었어요. 폭염에 시들시들 말라가는 오이를 볼 때는, 마치 어린 자식이 병상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 것 같아 너무도 괴로웠지만, 그런 경험조차 농사에 애착을 갖게 하는 긍정적 체험이었어요. 정작 후회는 다른 문제에서 왔어요. 마을 원주민들과 어울리는 일이 참 힘들었거든요. 이른바 텃세라는 것 말예요. 이곳은 남편의 고향이지만 한동안 이방인 취급을 받았어요.”
마을 원주민들의 텃세를 견뎌내는 일이 농사보다 더 어려워
전통적으로 유목사회와 달리 농경사회 구성원들은 내 땅, 내 영토에 대한 질긴 집착을 가지고 살아왔다. 공동체 의식도 발달했다. 외지인들이 끼어드는 게 달가울 리 없다. 여기에서 ‘텃세’ 문제가 야기되지만, 토박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전원생활자들의 무신경하고 비사교적인 위세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무례를 범하지만 않으면 텃세에 걸려들 일이 없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기순씨 내외가 겪은 텃세는 워낙 자심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시골 인심이 예전과 다르다는 항간의 논평을 몸으로 직접 체험해 확인한 모양이다. 삶이라는 생존의 들판치고 어딘들 전장(戰場) 아닌 곳이 있을까. 코피 터지는 경쟁의 난리 블루스, 그게 세태이지 않던가. 이기순씨는 시골의 텃세라는 걸, 허공에 미만한 공기처럼, 세상살이에 당연히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기본 조건으로 치부하기로 한 것 같다.
“차라리 마을을 떠날까, 그런 궁리를 할 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에 부대꼈지만 그냥 감수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원주민들과 저희의 정서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서로 살갑게 어울려 지내는 게 힘들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자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흙이나 작물들은 텃세를 부리는 법이 없죠?”
“저나 남편이나 농사라는 건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흙이 지닌 생명력과 식물들의 정직한 성장에 곧바로 매료됐어요. 아아, 흙 냄새, 작물들의 숨결은 또 얼마나 좋은지…. 해마다 농사에 연패를 해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땅을 상대로 한 농사라는 게 신성한 직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돼요.”
“이상해요. 당신은 지난해 천안시가 선정한 우수농민이지만 사실은 곤경에 처했다는 거!”
“농촌의 현실을 보면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흔해요. 수억대 소득을 올리는 농가들이 매스컴에 등장하지만, 매출과 실소득은 크게 다르죠. 저희도 연간 매출이 1억쯤 되지만 갖가지 투자비용을 제하면 오히려 적자가 나더라고요. 적자가 해마다 거듭되다 보니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빚을 내서 빚을 갚아야 하고, 이런 식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예요.”
“어이하나?”
“혹독한 공부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좌절도 많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어느덧 단련이 되고 나름의 내공도 생긴 거 같아요. 이젠 비로소 길이 보여요. 저비용 고효율 농업으로 가야 하는데, 대안이 보이고 있어요. 일단은 작물을 다양화할 예정이에요.”
기죽을 게 뭐람, 괜찮아, 괜찮다구!
이기순씨 내외는 오이 하우스 안에서 산다. 7평짜리 컨테이너에서 살림을 한다. 이 옹색한 정경을 목도한 친정엄마가 눈물을 흘리고, 친구들이 쯧쯧 혀를 차지만, 그녀는 이마저도 오히려 복되지 아니한가, 하는 투로 담담하다. 애당초 근사한 집을 짓기 위해 대지 150평을 장만해두었으나 빚잔치 통에 순간에 날아갔다. 그 바람에 컨테이너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이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을 냉큼 받아들이기를 이미 오래전에 했다. 싱긋 웃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시라.
“‘난 말이야, 2000평 정원에 7평짜리 원룸에 살아. 이 정도면 나쁜 건 아니지 않니?’ 제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그래요. 남들에겐 철딱서니 없는 허세처럼 들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컨테이너에 산다고 해서 기죽을 게 뭐람. 괜찮아, 괜찮다구! 그렇게 제가 저에게 들려주며 용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해요. 지금의 형편에서 방바닥에 등 붙이고 부부가 함께 따뜻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도 큰 다행 아니겠어요?”
“왜 아니겠어요? 참새는 옷 한 벌 입은 게 없이 나뭇가지 한 줌을 움켜쥐고 엄동의 밤을 무사히 지내죠. 최소한의 의식주만으로도 기꺼이 견딘다는 건 일종의 절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에 살 땐 제가 돈을 펑펑 썼어요. 해외여행이며 쇼핑이며,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해봤어요. 그래서 지금의 어려운 형편에 정신까지 약해지진 않아요. 남편 역시 강인하고 똑똑한 사람이라 끄떡없어요. 돈 때문에 허둥지둥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안쓰럽지만, 우리 부지런히 뛰어 멋지게 농장을 살려내자고 등 두들겨 격려하죠. 남편은 원래 영어와 일본어를 잘하는데요, 요즘도 잠들기 전에 꼭 외국어 공부를 해요. 나중에 외국인들이 우리 농장에 견학 올 것을 대비해서죠.”
“산에서 당한 사고로 온몸을 다쳤다 했죠? 지금은 매우 건강해보여요. 그건 귀농 덕분일까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땐 걸음새조차 나사 풀린 바퀴처럼 휘청거렸어요. 그러다가 농사일에 매달리는 사이 건강이 크게 좋아졌죠. 농사를 노동이 아니라 운동으로 여긴 덕분이겠죠. 정신은 더욱 건강하게 깨어난 것 같아요. 경제 면에서는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감성이나 정서는 더 밝고 풍부하게 성숙하는 기분? 그런 걸 느껴요. 하우스 안의 작물들, 바깥으로 펼쳐지는 자연 풍경이 자주 순수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저의 어릴 적 꿈은 문학이었답니다. 요즘도 좋은 글을 찾아 읽거나, 뭔가 느낌이 떠오르면 즉시 메모장을 꺼내 글을 써요. 주로 시골생활에 관한 단상이지만, 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하죠. 이 역시 귀농이 준 행복이라 여겨요. 이쯤이면 괜찮게 사는 거 아녜요(웃음)?”
“사람이 농사를 통해 작물을 기르지만, 동시에 농사가 사람을 키우기도 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흔히들 돈에 사로잡혀 살지만, 남에게 돈 빌리지 않을 정도만 되면 잘사는 것일 테고, 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만족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텐데, 저는 농사에 만족해요. 흙에 뜨거운 애정을 느껴요. 비록 아직은 고전하고 있지만,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크는 나무가 있겠어요?”
가시밭길을 거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꽃길이 있나? 파도를 타넘지 않고서 바다를 건널 수 있던가? 이기순이라는 이름의 선박은 암초를 만나 표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잠정적인 조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58년 개띠인 필자는 사십대로 접어드는 해에 IMF를 당했다. 그때까지 잘나가는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가 한순간에 파산 상태로 접어들었다. 가족과 빚만 남고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직원들 월급은 고사하고 당장 끼니를 이어갈 생활비도 없는 상태에서 카드 돌려막기를 하면서 폭음을 하고 다녔다. 대인관계도 다 끊었다. 어느 순간 고혈압, 불면증, 공황장애, 폐쇄공포, 감각마비 등 여러 가지 심각한 증세가 한꺼번에 찾아왔다. 감각이 마비되어 음식을 먹을 수가 없고 잠을 못 자는 날도 이어졌다. 가상의 공포가 밀려오고 폐쇄공포증으로 지하철도 탈 수 없었다.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술과 담배를 놓지 못했다. 포기 상태의 생활이었다.
그렇게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아내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 정신적 안정을 취하면서 나빠졌던 몸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어갔다. 그러나 일이 없어도 쉴 수가 없었다. 일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매일 출근했다. 사무실에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지낸 날이 많았다. 필자의 사십대는 암흑의 터널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터널을 엉금엉금 기어 나와 보니 오십대가 되어 있었다. 그동안 어느 정도 빚도 정리했고 다행히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문득문득 불면증과 공황장애 중세를 일으키곤 했다. 언제부턴가 100세 시대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베이비부머는 앞으로 30~40년을 더 살아야 하고 운 나쁘면 100세를 넘길 수도 있는데 노후 자금이 준비되어 있느냐는 우울한 질문이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사회 전체를 우울 모드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문제제기만 하고 해결책은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필자는 오십대가 되면서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니 첨단세계에 너무 뒤떨어져 있었다. 필자는 이메일 사용법도 몰라 직원들이 대신 보내주고 받았고 강의교안도 직원들이 다 만들어줬다. 컴퓨터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소위 컴맹 상태로 살아왔던 것이다. 일 외에는 취미생활도 없었고 가족과의 소통도 거의 없었다. 100세 시대를 위한 경제적인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비전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속 빈 강정처럼 허전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은 치유가 필요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를 위해 시간을 쓰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다.
오랜 세월 놓고 있던 붓을 다시 들었다. 그림을 그리면 행복해진다. 목공예도 배웠다. 몰입하는 시간은 일상을 잊게 한다. 기타를 배우면서 음악은 미술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노래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업무나 강의준비 등에 필요한 컴퓨터도 마스터했다. 필요한 것은 배우고 잊고 있던 취미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무엇보다 사진을 가까이 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식물원이나 수목원, 고궁, 유적지 등을 찾아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사진으로 남겨두기 위해 여행도 자주 한다. 사십대의 혹독한 시련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필자는 아직도 일에 파묻혀 살고 있을 것이다.
혼자 살기 때문에 생활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족에게 기대기도 쉽지 않다. ‘최고의 은퇴 준비는 은퇴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처럼, 노후소득 준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능한 한 계속 근로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시니어가 소득활동을 완전히 그만두는 시기는 평균 71세로, 40~50대에 일단 은퇴하더라도 자의든 타의든 일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수입은 예전처럼 높지 않고, 건강 문제 등으로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은퇴 후에도 생활 수준 유지를 위해 원활한 소득 발생과 갑작스러운 목돈 지출을 막는 자산관리가 중요하다. 은퇴 전후에 있는 싱글들을 위한 실질적인 자산관리 방법을 알아봤다.
정하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 선임연구원
연금은 노후소득이 꾸준히 발생하도록 돕는 대표적인 수단이다. 평균연령이 82세로 늘어난 지금, 50대에 은퇴해도 30여 년의 긴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현재 은퇴를 앞두거나 이미 은퇴한 5070 시니어에게는 충분한 연금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노후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 자체가 부족했다. 1970년의 우리나라 기대수명은 61.9세, 1988년에는 70.3세에 불과했다. 2000년대 이후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은퇴가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지만, 자녀교육비 등이 우선순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현재 고령자의 연금은 생활비를 대체하기에 역부족이다. 통계청의 5월 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간 55~79세 고령층의 연금수령액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등을 모두 합해 월 평균 51만원에 불과하다. 싱글은 연금 부족 문제가 더 크다. 부부에 비해 받는 연금이 절반밖에 안 되는데 월세, 광열비 등 고정지출 때문에 생활비는 절반보다 높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연구원이 50대 이상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표준생활을 위한 1인가구의 적정 노후생활비는 월 142만원으로, 부부 기준 225만원의 63% 수준이다.
연금을 늘리기 위한 두 가지 단기 처방
좋은 소식은 지금이라도 연금수령액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20~30대와 달리 적립시간이 짧기 때문에, 소액 장기적립이 아닌 목돈을 활용해야 한다. 소중히 모아온 자산을 활용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러한 자산이 단기에 바닥나지 않도록 현명하게 활용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첫 번째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활용해 주택연금에 가입하는 방법이다. 현재의 5070 시니어들은 급격한 경제성장기 부동산시장의 높은 성장을 경험한 세대로, 자산이 부동산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혼자 사는 데 주택이 무슨 소용이냐며 집을 팔고 전·월세로 변경하는 싱글 시니어도 많지만, 살아왔던 거주지 근처에서 이사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사는 것은 노후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주택연금은 만 60세 이상 고령자가 보유한 9억원 이하 주택을 담보로 매월 연금을 받는 역모기지 상품이다. 주택연금의 수령액은 주택 가격과 집주인의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만 60세인 1956년생이 5억원 가치의 주택으로 종신형 주택연금을 신청한다면, 살던 집에 계속 살면서도 매월 113만6000원을 평생 받을 수 있다. 또 목돈 지출에 대비한다면 연금을 조금 줄이고 대출한도의 최대 70%까지 인출한도를 설정해 가입하면 범위 내에서 수시로 인출할 수도 있다.
두 번째는 보유한 현금을 활용해 즉시연금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다. 즉시연금보험은 목돈을 일시에 납입한 후 즉시 또는 정해진 기간 이후 일정한 연금을 받는 금융상품이다. 보통 만 45세 이상 가입할 수 있는 이 상품은 가입 후 다음 달부터 바로 연금을 수령할 수도 있어 연금 소득을 즉시 늘리는 데 효과적이다. 50대에 퇴직하고 만 60세 이후에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을 수령하기 전까지 소득 공백기간을 채울 때 특히 유효하다. 가입조건에 따라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2013년 이후 가입한 즉시연금은 사망할 때까지 지급하는 종신형일 경우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수령하면 금액에 관계없이, 그 외의 방식은 계약 후 연금수령까지 10년 이상 유지하면 1인당 최대 2억원 한도 내에서 비과세가 적용된다.
노후 파산 막는 의료비 대책
싱글 시니어는 자기 건강관리에 쏟는 열정이 대단하다. 그러나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갑자기 큰 병에 걸려 예상외의 지출이 크게 발생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주목되는 현상이 일본의 ‘노후파산’이다. 제도가 잘 발달되어 연금액이 높은 일본도 예상보다 평균수명이 길어져 노후 의료비를 크게 지출하고 파산에 이르는 고령자가 200만명 이상 발생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고령자 연간 진료비가 국민 전체 평균의 3배 수준인 1인당 343만원으로 매우 높다. 이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합병증에 걸리거나 회복에 더 긴 시간이 필요하므로, 소득활동을 해왔다면 갑자기 그만두게 될 수도 있어 혼자 사는 시니어는 이중고를 겪을 수도 있다. 의료비 부담을 대비해 보험을 충분히 유지하는 한편, 비상시 예비자금으로 쓸 수 있는 금액도 일정 부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혼자 살수록 자산관리 필요
혼자 사는 시니어라고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독거 고령자는 평균 3.8명의 자녀가 있지만 같이 살고 있지 않을 뿐이다. 싱글이어도 자녀가 있으면 관련 지출이 큰 영향을 미치는데, 결혼비용이 가장 크고 최근에는 자녀 가족의 사정에 따라 부모가 계속 생활비를 보태주는 경우도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녀 셋 중 하나는 결혼비용의 60% 이상을 부모가 부담하며, 소득이 높은 가정일수록 부모와 자녀 모두 높은 지원을 기대한다. 물론 부모로서는 가능한 한 많이 지원해주고 싶겠지만 노후자금을 생각해 적절한 선에서 결정할 필요가 있다. 자녀 입장에서도 홀로 사는 부모가 마음 쓰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자녀에게 많이 퍼주어도 자녀가 나이든 부모를 봉양하기 어려운 시대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노후를 편안히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자녀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부자는 돈이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쓸 수 있는 사람이다.”
한 TV 인터뷰에서 부자가 내린 ‘부자’의 정의다. 혼자라서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은퇴 후 긴 시간 동안 필요한 돈을 계획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싱글들의 현명한 자산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싱글들의 노후 의료비 보험 추천
실손의료보험 병이나 사고로 통원이나 입원을 했을 때, 실제 환자가 지출한 의료비에서 자기부담금을 뺀 만큼을 보상해주는 의료보험이다. 대부분의 질병부터 CT, MRI 등 고가의 검사비용까지 보장하고 있어 활용도가 높지만, 여러 보험사에 가입해도 보장한도만 늘어날 뿐 총보상액은 지출비용만큼만 나오므로 중복 가입으로 보험료를 낭비하지 않도록 한다. 특히 보험사에 따라 최대 75~80세까지 가입이 가능한 노후실손의료보험은 50대 이상 시니어가 일반의 70~80% 수준의 보험료로 가입할 수 있어 저렴하게 노후 의료비를 대비할 수 있다.
정액 보장보험 거액의 치료비가 발생할 수 있는 중증 질병 등에 대비하려면 정액 보험금을 지급하는 보험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혼자 사는 시니어는 사망할 때 유족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는 종신보험보다는 질병이나 사고가 났을 때 보장 금액이 큰 보험이 효과적이다. 가입시 보험료도 중요하지만 보장 범위가 너무 좁지 않아야 하며, 보장기간은 가급적 긴 것이 좋다.
2005년, 미국 스포츠계를 발칵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미국 메이저리그 최초로 40-40클럽(한 시즌 홈런과 도루를 각각 40개 이상 기록하는 것)에 가입한 호세 칸세코가 미국 의회에서 폭탄 같은 증언을 한 것이다. 바로 메이저리거들 사이에서 스테로이드 호르몬 복용이 만연되어 있으며, 자신도 복용했다고 실토한 것이다. 그의 증언에 따라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2년 후, 자그마치 80여 명이나 되는 선수가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중에는 두 번 다시 나오기 어려운 엄청난 레전드급 선수들도 있었다. 배리 본즈와 로저 클레멘스가 그들이다. 둘 다 약물 복용 사실을 부인했지만, 통산 최다 홈런(762개)을 기록한 배리 본즈는 위증죄로 기소되었고 끝내 어느 팀도 계약서를 내밀지 않아 강제로 은퇴해야 했다.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이영상을 7번이나 수상한 로저 클레멘스도 명성이 추락했다. 40대의 나이에도 조카뻘의 강한 타자들을 상대로 방어율 1점대를 찍었던 그의 전설적인 기록은 오욕의 역사로 남았을 뿐이다. 다른 스타급 선수들도 참담한 지경으로 전락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로 불렸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약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말년을 부진하게 보내다가 올해 8월 은퇴를 했고, ‘타점 기계’로 불린 매니 라미레즈, ‘싱커의 제왕’으로 알려진 케빈 브라운, 한 시즌 최초로 70홈런을 넘긴 ‘빅 맥’ 마크 맥과이어 등 수많은 스타가 팬들에게 배신의 기억을 심어 주었다.
스테로이드 호르몬 부작용 심각
선수들에게 금지된 약물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으로 알려진 ‘경기력 향상 약물’이고, 다른 하나는 암페타민처럼 ‘각성제’류이다. 전자가 파워를 높여 준다면, 후자는 집중력을 올려 피로를 느끼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스테로이드 호르몬의 효과는 근육량을 빠른 시간에 늘려주는 데 있다. 운동을 하게 되면, 근육을 이루는 섬유가 전후좌우로 당겨지는 압력에 의해서 군데군데 끊어지게 된다. 그 후, 끊어진 부분이 아물고, 다시 운동에 의해서 또 끊어지고 하면서 근육이 발달하게 되는데, 스테로이드 호르몬은 이 근육 섬유가 아무는 것을 신속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스테로이드의 효과를 경험한 운동선수나 보디빌더들은 마치 밥 먹는 것이 모두 근육으로 가는 것 같더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운동만으로는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섬세하고 우람한 근육을 만들어 주면서 파워도 높여 주기 때문이다. 암페타민은 스테로이드와 다른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집중력을 올려 피로를 쉽게 느끼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다. 최근 2년 사이에 카메론 메이빈과 크리스 데이비스, 그리고 윌슨 베테밋 등의 베테랑 메이저리거들이 규정을 어기고 암페타민을 복용한 것이 적발되어 25~50게임 출전정지를 당했다. 이들은 집중력 장애가 있기 때문에 치료용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암페타민은 집중력을 그냥 높여 주기만 하는 ‘착한 약물’은 아니다. 반짝하는 각성 효과는 있지만 계속 사용하다 보면 불면, 정신적 불안정, 긴장감, 흥분성 같은 부작용이 따라오게 되고, 암페타민 자체에 대한 중독이 함께한다. 또, 암페타민은 필로폰이나 엑스터시 같은 마약을 합성할 수 있는 원료가 되기도 한다. 우리 정부는 그 가능성 때문에 암페타민을 의사의 처방이 있어도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해 놓았지만, 미국에서는 처방이 있으면 사용이 가능하다. 물론 처방은 다른 사람이 받고, 복용은 또 다른 사람이 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메이저리그에서도 의사의 진단과 전문가 세 명의 동의서를 받아오면, 사무국에서 TUE(Therapeutic Use Exemption, 치료 목적 사용 예외 허가)를 발부해야 하는데, 선수들이 TUE 없이 암페타민을 복용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메이저리그만의 문제는 아니다. 젊은 유망주들이 땀을 흘리고 있는 마이너리그에서도 이 일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앞서 언급한 로저 클레멘스는 자신의 호르몬 복용을 맹비난했던 200승 투수 로이 할러데이에게 “너도 암페타민을 복용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맞받아 쳤다.
‘약물의 노예’로 비참한 말로 걸어
스포츠 스타들의 약물 복용 스캔들은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도 쭉 있었다. 예전, 올림픽 육상 종목에서 남성 못지않은 빼어난 기록을 남긴 동구권 여자 선수들이 일상적으로 남성 호르몬제를 복용했다는 의혹은 둘째치고라도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육상 100m에서 칼 루이스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한 캐나다의 벤 존슨이 수일 만에 호르몬 복용 사실이 적발되어 메달을 박탈당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여자 육상 5관왕인 매리언 존스의 약물 복용 사실도 충격이었다. 결국 그녀의 세계기록은 모두 무효처리 되었고, 메달도 박탈당했다. 세계 최고의 여자 운동선수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불명예 은퇴를 해야 했다. 2016 리우올림픽은 시작도 하기 전에 러시아 선수단의 도핑 스캔들로 얼룩졌다. 러시아는 최종 순위에서 4위를 기록했지만, 육상 선수단이 거의 참가하지 못하는 등 국제적인 망신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러시아 선수 중에서 또 금지약물로 인해 메달을 박탈당하는 사례가 생기면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사실 약물 파문으로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스타는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이다. 그는 고환암을 이기고 더 강한 챔피언으로 돌아온 신화를 썼지만, 근육피로를 극복하기 위해서 에리트로포이에틴(EPO)이라는 약물을 복용한 것을 오프라 윈프리쇼에서 고백하면서 재정적으로도 파산했고, 모든 기록도 삭제 당했다. 사실상 현대 스포츠에서 도핑스캔들에 휘말리는 것은 영구적인 파멸을 뜻할 정도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스포츠에서 약물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페어플레이를 위반했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처벌이 가혹한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경기력이나 집중력을 위해 사용하는 약물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스테로이드 호르몬은 원래 호르몬 장애나 노령으로 인해 남성호르몬 부족현상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쓰여 질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문 의약품이다. 그러나 근력 증강을 위해 쓰는 순간부터 순수한 근력운동으로 근육을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약물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후에 따라오는 부작용은 더 가혹하다. 호르몬 부조화로 인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근육은 오히려 약화되고, 남성에게는 여성형 유방증이 생기며 고환 위축 증상이 동반된다. 여성은 무월경과 탈모 증상이 따라오며, 면역력 약화로 인해 황달증상과 감염 가능성이 높아지는 등 총체적인 위기를 겪는다. 가장 심한 것은 심혈관 장애로 인한 돌연사 가능성이다. 서울올림픽 여자 육상 단거리 3관왕 그리피스 조이너는 38세로 돌연사 했다. 전문가들은 그녀의 신체에 나타난 변화와 돌연사를 볼 때, 그녀의 죽음을 스테로이드 과다복용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스포츠 스타로 성공하는 것은 좁은 길이지만, 진정한 땀방울외의 것으로 그 길을 가려고 하는 잘못된 선택은 결국 불행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예들이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 최혁재(崔爀在) 경희의료원 한약물연구소 부소장
경희대 약학대학 객원교수, 한국병원약사회 법제이사, 서울시 약사회 병원약사이사, 대한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 총무이사.
손성동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ssdks@naver.com
몇 년 전 모 대학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평생교육원에 다니고 있는 남성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은 누구일까? 옷 잘 입는 여성? 돈 많은 여성? 요리 잘 하는 여성? 셋 다 아니다.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은 단연코 ‘예쁜 여성’이었다. 젊으나 늙으나 남자에게는 예쁜 여성이 최고다. 남자는 참 단순하다. 사람마다 미의 기준이 다른 게 그나마 다행일 정도다.
그럼 평생교육원에 다니는 여성에게 가장 인기 있는 남성은 어떤 사람일까? 잘 생긴 남자? 돈 많은 남자? 근육질 남자? 모두 아니다. 여성이 가장 좋아하는 남성은 ‘연금 많이 받는 남자’다. 잘 생기거나 근육질 남성은 온전한 내 남자가 되기 힘들고, 돈 많은 남자는 자식들 차지이거나 분란의 소지가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정경제를 꾸려온 사람들답게 여성들은 참 현실적이다.
상대적으로 이성을 지배하는 좌뇌가 발달한 남성은 감성에 휘둘리고, 감성을 지배하는 우뇌가 발달한 여성은 이성에 좌우되는, 남녀관계는 정말로 모를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실버파산, 노후파산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화두로 등장했다. 노후에 생계를 꾸려갈 만큼 수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파산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현실적인 여성들이 미리 냄새를 맡고 연금에 손을 들어 준 이유를 알 만하다.
연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후에 일정한 주기로 일정액의 현금이 내 통장에 꽂히는 것. 일정한 주기는 매달일 수도, 분기일 수도, 매년일 수도 있다. 물론 매달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연금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지만 사람마다 연금에 부여하는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세계적으로 유명인사인 오 노레드 발자크(1799~1850), 한스 안데르센(1805~1875),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78)를 통해 연금의 다양한 의미를 에이브러햄 매슬로(1908~1970)의 욕구 5단계설에 비춰 살펴보도록 하자.
오 노레드 발자크 : 절대적 생존 수단으로서의 연금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소설가로 사실주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 나폴레옹이 칼로 시작한 일을 자신은 펜으로 완성하겠다는 포부를 지닌 나폴레옹 숭배자, 이라는 90여 편의 소설로 구성된 소설 위의 소설을 구상한 혁신자, 짓누르는 눈꺼풀을 커피로 녹여 낸 커피 중독자…. 오노레 드 발자크를 지칭하는 말들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서 발자크를 ‘현대 문학의 가장 위대한 노동자’ ‘환상적인 작업 기계’로 묘사한다. 사흘에 잉크병 하나를 비우고 펜 10개를 닳아 없앨 정도로 많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에 색다른 별명을 하나 더 붙이고 싶다. 바로 ‘연금 애호가 발자크’다.
발자크의 소설에는 유독 ‘연금’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언어학에서는 작가가 특정 주제에 관련된 어휘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그 작품의 중심 테마일 확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본다. 발자크가 그의 소설에 ‘연금’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곧 ‘연금’이 소설의 중심 테마임을 의미한다.
발자크가 연금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잠시 엿보기로 하자. 에서 발자크는 연금을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한가로움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묘사한다. 에서는 딸의 사교 비용을 대느라 연금증서까지 팔아 치운 나머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 절규를 숨 막힐 정도로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연금에 대한 발자크의 생각이 가장 잘 녹아 있는 대목은 에 나오는 하녀 나농의 이야기다.
“160㎝가 넘는 큰 키 때문에 키다리 나농이라 불리게 된 그녀는 35년 전부터 그랑데 집에 살고 있었다. 1년에 60리브르밖에 받지 못하지만 그녀는 소뮈르 지방에서 제일 부유한 하녀로 통했다. 35년 동안 60리브르를 차곡차곡 모은 결과 최근에 크뤼쇼 집에 4000리브르를 종신연금으로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루어진 나농의 끈질긴 저축의 결과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였다. 하녀들은 그것이 고된 노역의 대가라는 사실은 생각지 않고 60대의 노파가 마련해 놓은 노후자금에 질투심을 드러내곤 했다.”
위 구절을 보면 연금에 대한 발자크의 생각과 당시 프랑스 사회를 읽어낼 수 있다. ①노후에 연금을 받으려면 오랜 기간 동안 차곡차곡 돈을 모아야 한다. ②연금은 고된 노역의 대가다. ③연금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④유력 집안이 금융회사를 대신해 연금을 지급한다. ⑤여자가 160㎝만 넘으면 큰 키로 인정받는다. ④와 ⑤번을 제외하면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발자크가 그의 소설 속에 연금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집안 내력과 극도의 경제적 궁핍을 겪은 경험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이지 않을까. 츠바이크의 에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누구보다도 오래 살려는 그의 의지는, 가입자가 죽으면 남은 사람에게 연금이 덧붙여지는 이른바 톤틴식 연금에 들었다는 사정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발자크는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연금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발자크는 젊었을 때 인쇄업과 활자제조업에서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평생 빚더미에 짓눌려 살았다. 다시 츠바이크의 말이다. “3년 동안의 사업가 활동에서 얻게 된 10만프랑의 빚은 그에게 ‘시시포스의 돌’이 되었다. 그는 평생 근육을 거의 망가뜨리면서 이 돌을 꼭대기로 굴려 올리곤 했지만, 언제나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생애 최초의 이 잘못은 그를 언제까지나 채무자로 남도록 운명지었다. 자유롭게 창작하고 종속 없이 산다는 어린 시절의 꿈은 절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었다.”
발자크에게 연금은 생존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생존의 문제였다. 빚의 노예로 노동자처럼 소설을 써야 했던 그이기에 같은 사회성 짙은 소설이든 같은 연애소설에도 어김없이 연금이 등장한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에 접목하면 1단계인 ‘생리적 욕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안데르센 : 복합적 의미로서의 연금
한스 안데르센은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덴마크의 동화작가다. 하지만 안데르센과 관련하여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바로 안데르센이 그렇게도 연금 받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안데르센은 젊은 시절 엄청난 고통과 각고의 노력 끝에 정상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정상에 오르고 나서도 마음 한구석에 빈 곳이 있었으니 바로 연금이다. 그의 경쟁자이면서 자신보다 역량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연금을 받고 있는데,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은 연금을 받지 못하는 사실에 꽤 자존심도 상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안데르센의 에 매료된 덴마크 총리가 그의 거처를 방문한다. 물론 안데르센은 그가 총리인지 모른다. 방문 목적과 자신의 신분을 밝힌 총리는 안데르센에게 어려운 점이 없는지 묻는다. 이에 안데르센은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연금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국왕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총리는 돌아가 덴마크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외르스테드를 통해 국왕 면담을 주선한다. 국왕과 면담 후 안데르센은 그렇게도 원하던 연금을 받게 되었는데, 그 장면과 감정을 자신의 자서전인 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프레데릭 6세 때 이미 몇 년 전부터, 문학청년이나 예술가들을 해마다 선발해 여행 경비를 주는 제도 외에도, 이들 가운데서 이렇다 할 소득이 없는 사람들을 골라 많지 않은 돈이지만 연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대부분의 유명한 시인들이 모두 이 보조를 받고 있었다. 욀렌슐레게르, 잉게만, 하이베르그, 카를 빈터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헤르츠도 얼마 전부터 이걸 받고 있어, 그의 미래는 생계가 탄탄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나도 그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내 희망이자 소원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졌다. 프레데릭 6세는 내가 1년에 200릭스달러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나는 기쁘고 고마운 나머지 펄쩍펄쩍 뛰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단지 살기 위해서 억지로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몸이 아프거나 병에 걸려도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확실한 버팀목이 생긴 것이다. 늘 신세를 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바야흐로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안데르센이 연금을 받고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던 장면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온다. 안데르센이 연금에 집착한 이유는 뭘까? 하나는 안정적으로 창작활동에 몰두하기 위한 경제적 토대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은 여행을 매우 좋아했다. 당시 여행비용은 꽤 비쌌다. 여행을 통해 자신의 정신과 사상을 깊게 하고 넓혀 나갔던 안데르센은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영국 여행에서는 찰스 디킨스를, 프랑스 여행에서는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 등 세계적 작가들을 만나고 교류했다. 결국 안데르센에게 연금은 더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경제적 안정 수단이었던 셈이다. 매슬로의 욕구5단계설의 두 번째 욕망인 ‘안전욕구’였다.
“여행은 마법의 물약처럼 마음을 정화하고 육체에 원기와 젊음을 불어넣는다. … 나의 내면에 보석 같은 소재들이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이 보석들을 제대로 다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이 보석들을 정력적으로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다듬어 종이에 옮겨 놓기 위해서는, 정신을 신선하게 재충전할 필요가 있다. 내게 있어서 여행은 정신을 정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는 늘 더 젊어졌고 더 강해졌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연금을 통해 국왕으로부터 인정받는 명실상부한 명사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욕구이지 않을까. 국왕과의 연결선이 없어 자신보다 못한 경쟁자가 연금받는 것을 부러워하고 시샘하던 안데르센이 드디어 자신도 그들의 리그에 속하게 된 것이다. 매슬로의 욕구5단계 중 3단계인 ‘사랑과 소속 욕구’를 쟁취한 셈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확실한 기반을 구축하는 덤까지 얻었다. 5단계 욕구 중 4단계인 ‘존경 욕구’를 충족하는 기쁨까지 누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안데르센에게 연금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도구였던 것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정치 도구로서의 연금
비스마르크는 우리에게 독일의 철혈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스마르크가 철혈재상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근과 채찍을 효율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항상 한 손에는 채찍을, 다른 한 손에는 당근을 들고 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78년 10월 9일 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법’ 제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여지없이 다음과 같은 당근책을 제시한다.
“나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며, 노동자들에게 기업 이윤의 배당을 보장하고, 기업의 경쟁력과 시장상황을 고려한 범위 내에서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는 모든 계획들을 후원할 예정입니다. … 만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성적인 방법으로 미래를 내다 보면서 노동자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긍정적인 방안을 제안한다면 나는 국가부조라는 이념을 염두에 두면서 자구책을 강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방안을 호의적으로 검토할 것입니다.”
1881년 3월 8일 산재보험법을 제안하면서는 “국가란 오직 유복한 사회계급의 보호를 위해서만 창안된 것이 아니다. 무산계급의 요구와 이익에도 봉사하는 복지기구”라고까지 강조했다. 1881년 11월 17일 자신이 직접 작성한 황제교서에서는 “사회적 폐단을 단지 사회민주주의의 과격행위를 탄압함으로써만이 아니라, 노동자 복지를 적극적으로 도모함으로써 척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4대 사회보장제도인 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등은 사회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비스마르크의 당근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이다. 비스마르크에게 연금은 5단계 욕구 중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의 실현 수단의 한 방편이었던 셈이다.
>>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중학교 3학년 국어시간의 일이다. 국어선생님은 머리가 하얗고 이가 몇 개 빠진 할아버지였고 성함은 ‘김이홍’이었다. 당신 이름에 세 가지 성씨 즉, 김씨, 이씨, 홍씨가 들어있다고 자주 자랑하셔서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 내재되어 있던 작문 소질
그 날 국어시간에는 작문을 하라고 하셨다. 작문의 주제는 ‘국어 선생님’이었고 1등에게는 커다란 ‘배’ 하나를 상으로 주겠다고 하셨다. 그 당시 우리 중학교는 망우리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고 학교 주위에 배 밭이 많았다. 그 날 필자가 1등상을 차지했고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가서 큰 배 하나를 상으로 받았다. 글을 잘 썼다는 선생님의 칭찬도 아직 귀전에 남아있다. 그 당시 몸이 왜소하고 깡말라서 덩치 큰 녀석들로부터 늘 괴롭힘을 당했다. 성격도 지독하게 내성적이어서 거의 말도 하지 않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작문 1등이라는 사건은 우리 반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글 쓰는데 재미를 붙일 만도 하건만 그날 이후 수십 년간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 다시 찾아낸 글쓰기 소질
2008년에 우리나라에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그 십년 전인 IMF 때는 자살하거나 파산해서 삶의 고통에 빠진 사람들이 금융위기 때 보다 훨씬 더 넘쳐났었다. 그러나 IMF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힘들었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끼리 서로 돕기라도 했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조용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그 때 조선일보에서 금융위기와 관련하여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수기를 공모했다. 신문에 실리는 수기를 보면서 용기를 내어 응모했다. IMF 때 파산하고 공황장애도 앓았으나 가족의 사랑으로 재기하게 된 필자의 이야기였다. 채택이 되어서 신문에 개제되었고 몇 달 동안 개제된 수기를 모아서 ‘희망편지’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여러 사람의 수기를 모아서 출간된 책이었지만 필자 이름이 들어간 책은 의미가 컸다.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 본격적인 글쓰기
그 때부터 블로그에 사진과 글을 써서 저장해 두는데 재미를 붙였다. 여기저기 신문사나 잡지에 글을 기고하였고 여러 번 채택되어 원고료도 받았다. 2012년에는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인연’ 수기공모에 입상했다. ‘내가 만난 추기경’이라는 책에 글이 실렸다. 글을 쓰는데 더 용기가 생겼다. 활동하고 있는 시니어 관련 포럼 회원들과 같이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다. 과거에는 잘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과 책을 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고를 모으고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어려움은 있었지만 ‘시니어 비즈니스 스쿨’, ‘무지개 공감’ 이라는 책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이렇게 해서 벌써 공저서가 네 권이라고 이력서에 넣게 되었다. 시니어 관련 강의를 할 때면 수강생들에게 이 책들을 선물한다. 올해는 여성 동화작가로부터 책 감수를 부탁 받았고 오늘 그 책이 출간되었다.
아주 오래 전 낡은 철재 책상 오른 쪽 맨 아래 칸 서랍에서 신문지로 뭉쳐놓은 큰 배를 꺼내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때 작문시간에 선생님께 썼던 편지가 씨앗이 되어 [희망편지]라는 책으로 남게 되었다.
1964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기획관, 경제기획국장, 재무부 차관보, 재무부 차관, 한국산업은행 총재 등을 거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해 살아온 이형구(李炯九·76) 전 노동부 장관. 대개 한 분야에서 탄탄대로 삶을 산 이들은 자기계발서나 자서전을 쓰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생의 사명감을 가지고 쓴 을 통해서 말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8년 이 전 장관이 출간한 에서 그가 제시했던 문제들에 대한 결론이 담긴 책이 바로 이다. 단순 명료한 책 제목만 보아도 이전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 관련 일을 해왔기 때문에 책을 낸 것은 아니다. 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자 사명감, 후세대를 위한 바람이 담긴 ‘인생작’과 같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며 시원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다.
“2005년에 세종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준비했던 책이 입니다. 번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을 역사, 정책, 문화적 상황에 따라 설명했어요. 그 책을 쓰면서 꼭 그에 대한 결론을 내는 책을 쓰고 죽겠다고 결심했었죠. 한 10년쯤 후에 쓸까 했는데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보다 훨씬 앞당겨 쓰게 됐어요.”
그가 예상보다 책을 일찍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다. 번영학은 신자유주의의 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 논리와 ‘경제하려는 의지(will of economize)’를 바탕으로 한다. 리먼브라더스 사건은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시장이 왜곡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를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경제 상황의 변화로 그는 하루라도 일찍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인위적인 통화 공급으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무너져버렸죠. 여러 가지 발전 전략이나 가치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이 경쟁이거든요. 발전하려는 의지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로 치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예로 들 수 있죠.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를 가지고 개발도상국 시대의 발전의 의지를 접목하자. 거기에 정부의 역할이 조금 확대돼야 한다는 게 번영학의 기본이자 의 결론과 같아요.”
모두 다 한번 잘살아 보세~
번영(繁榮)이란 번성(繁盛)과 영화(榮華)를 이른다. 번성은 객관적으로 번창하고 풍성한 상황, 즉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한 경제적 풍요를 의미한다. 영화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호화로움과 영예를 뜻하는데, 객관적인 경제적 의미보다는 사회적 의미의 주관적 상황과 개인의 행복을 뜻한다. 따라서 번영이란 경제적으로 풍족한 조건과 더불어 개인의 영예, 행복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할 수 있겠다. 거기에 현재의 번영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할 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뒤따라야 한다.
“만약 내가 현재 연간 소득이 1억원이라 하면, 10년 후에도 1억원이면 되겠어요? 현재보다 발전한 소득수준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이 많다고 행복한가? 그 돈이 영예로워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도둑이 훔친 돈으로 잘 먹고 잘산다고 하면 소득 수준에는 문제없겠지만 내 가족이나 이웃에는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나를 번창하게 하는 그 돈이 영예로워야죠.”
그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관용을 베푸는 것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그래야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공동체의 행복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과거에 우리는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았잖아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그런 내가 삼시 세 끼 챙겨 먹으면 행복하지 않겠어요? 소위 절대빈곤 타파라 하는데, 그저 세 끼 먹는다고 만족할까요? 매일 채소만 먹는 것보단 고기반찬도 먹고 해야 좋을 거 아녜요. 그게 생활의 질이에요. 그러면 내가 좋은 반찬을 배불리 먹는다고 행복할까요? 이웃도 잘 먹고 잘살게끔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죠. 그래야 ‘저 사람 참 훌륭하다’는 인정도 받고 개인이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거예요. 상대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 행복 조건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현재 삶의 행복 점수, 70점
행복 가치 추구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는 그에게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70점 정도”라고 대답했다. 이 전 장관은 현실적으로 채우지 못하는 30에 연연하기보다는 소소하게 채워진 70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을 쓰는 일도 행복하고, 손주를 보는 것도 즐겁죠. 다들 그런 재미로 사는 거 아니겠어요? 집 근처에 서재를 마련했으니 글을 쓰고 싶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런 것도 행복해요. 이번에 책을 내고 동료들이 의견을 내서, 실제 관련 일을 했던 이들 중심으로 한국번영학회를 설립하기로 했어요. 6월에 시작하는데, 내가 일을 벌였으니 학회장을 맡았죠. 근데 뭐 그게 일인가요. 이제 나이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일종의 놀이인 셈이죠. 아주 즐거워요.”
아쉬운 30점에 대해서도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돈을 좀 더 잘 모아둘 걸 하는 마음은 있어요. 그랬다면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봉사나 기부도 그렇고요. 그런데 내가 재벌이나 기업가도 아닌데 돈이 그렇게 많으면 되겠어요?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평가거든요. 본인이 기준을 잘 설정해서 만족하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얼마나 많겠어요. 아쉬운 점은 있지만 고맙게 생각해야죠. 나름의 기준은 있어 점수를 매길지는 모르지만, 사실 지금 나이에 그것에 좌지우지되거나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현재의 삶이 행복하고 고맙다고 말하던 그는 인터뷰 중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인터뷰 전 날이 바로 어버이날이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잘해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챙겨드릴 부모님이 이제는 안 계시다는 것이 못내 허전하다고 했다.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부모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노력했던 그다. 그렇지만 마음은 편안하다고.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어머니는 100세를 사시고 금년 1월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1990년대에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오셨어요. 그때부터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사는 여의도에 집을 마련하시고 생활을 하셨죠. 아마 두 분이 계속 시골에 사셨더라면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적었을 것 같아요. 근처에 사시니 매일 보고 이야기도 하고 무엇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진정한 은퇴 라이프의 시작
3년을 투자한 끝에 출간한 . 자기만족만을 위해 썼다면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 후손들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하리라는 바람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로 대학교 4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때도 참 보람 있고 좋았어요.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사무관부터 시작해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나라 경제계획에 참여했다는 거예요. 힘든 점도 많았지만 가슴 뿌듯한 일이 더 많았죠. 다른 점에서 볼 때 난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안 되지만, 그만큼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서는 특별한 사명감을 느껴요. 개인적으로 나를 위해 했던 일도 아니니 후세대를 위한 무언가를 남겨야죠. 그들이 보고 ‘과거의 경제 계획은 이랬구나. 이러한 이론이 있고 상황은 어떠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그는 자신은 잠시도 가만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 일을 할 때도 해외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했고, 테니스와 골프 등을 즐겼으며, 요즘도 중국어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원에 다닌다. 하지만 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3년간은 해외 일정이나 모임 등을 자제하고 원고 작성에만 몰두했다.
“책 출간하느라 바빠서 운동도 잘 못 다니고 해외도 거의 못 나갔어요. 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흔히들 말하는 은퇴 라이프가 다소 건조하긴 했죠.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더 충만하게 하고 즐거움을 줬는지도 모르겠어요. 최근까지는 원고를 쓸 때가 가장 즐거웠으니까요. 정말 죽기 전에 꼭 하자 하는 것을 이뤘으니, 이제 죽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며 지내려고 해요.”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르신이 되라
그가 지금까지 낸 책은 모두 경제와 관련된 전문서적들이다. 그 스스로 이야기할 정도로 남들이 선망할 만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도 자서전을 낼 생각은 없다고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노년기 삶에서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 그런 데에는 아내의 조언이 한몫했다.
“아내에게 매일 듣는 말이 ‘노인네가 되면 안 돼요. 어르신이 돼야 해요’입니다. 상당히 좋은 충고라고 생각해요. 노인네가 된다는 게 뭐겠어요. 목소리 높이고 잔소리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그런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저 사람 참 잘 늙었구나’해야 어르신이 되는 거죠. 전에는 경제정책 운용과 관련해서 정부가 뭐를 한다 그러면 언론에 글도 쓰고 그랬어요. 근데 요새는 그런 것도 안 하고 있어요. 그렇게 떠들어봐야 늙은이 잔소리니까요.”
그는 최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 관한 글을 읽고 본받아야겠다고 느낀 점이 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사위가 쓴 글이었는데, ‘장인어른은 가족 문제나 자식 일에 대해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식이나 손주의 일에 가능한 한 나서지 않고 간섭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밥 먹고 생각하는 게 늘 나라 경제 운용에 대한 것이니까, 물론 얘기야 하고 싶죠. 내가 볼 때 잘못됐다고 느낀 것이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나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현재의 장관이며 총리며 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고 내 생각처럼 바뀌겠어요? 아니거든요. 결국 잔소리거든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에 담았어요. 거기에 그동안 살면서 쌓은 경험, 지식, 조언 등이 담겨 있으니 자서전과 다름없지요.”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 집에 얹혀살면서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현상이 미국에서도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캥거루족, 키덜트(Kidult), 어덜테슨트(Adultescent) 같은 신조어에도 익숙해졌다. 제 앞가림을 못하는 자녀 때문에 베이비붐 세대의 속앓이가 심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애지중지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이런 현상에 대한 학계의 연구와 언론 보도가 봇물을 이루고 전문가들의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AARP(미국은퇴자협회)가 5월호에 게재한 ‘끔찍한 22세들(The Terrible 22s)’이란 제목의 특집 내용을 소개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시각 :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요즘 20~30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애지중지 키웠더니 제 구실을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그건 한쪽에 치우친 말이다. 정말 문제는 부모인 베이비붐 세대다. 원인을 제공했고 날개까지 달아줬다. 줄리 리스코트-하임스 스탠포드대학 교수는 그의 저서 에서 “많은 부모가 자녀를 지나치게 보호하고 간섭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힘든 경험을 해보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는 온실의 난처럼 현실 적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20대일 때는 해외여행이나 연수를 가도 부모가 일정을 세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엽서나 편지 한 장 보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당시 부모는 자녀가 20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뒀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첫 봉급을 받을 때까지 생필품과 방값을 지원해 주면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여겼다.
이런 경험을 한 베이비붐 세대가 자신들의 자녀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딴판이다. 성인이 된 자녀를 여전히 품안에 끼고 있다. 자녀와 함께 지내면서 내밀한 생활까지 공유하려는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소셜미디어와 같은 현대기술 덕분에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베이비부머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을 이용해 자녀의 일상생활과 고민을 낱낱이 파악하고 간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녀의 연예나 결혼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청년과 몇 년째 교제를 하고 있는 딸에게 시간 낭비니 단교하라고 종용하는가 하면 중매 사이트에 자녀의 세세한 이력과 취향까지 올려 배필을 물색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자녀의 직장 생활에까지 발 벗고 나서는 부모도 적지 않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녀의 취업인터뷰 절차를 알아보는 것은 기본이고 연봉 계약과 승진 문제로 직장 상사와 직접 상담을 하고, 자녀의 업무 성과까지 평가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자녀가 어린이일 때보다 부모의 역할이 더 커진 셈이다.
미국 부모의 과보호 현상은 지난 1979년, 당시 여섯 살이던 에단 파츠가 학교버스를 타러 가다가 행방불명되면서 미국 전체가 공포에 빠진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1980년대 초 미국 어린이의 학력이 세계 수준에 못 미쳐 국가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내용의 대통령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헬리콥터 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6명 중 1명이 불안증세로 진단을 받았거나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정신력이 약해졌다.
부모가 병원 예약에서부터 선물 구입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일을 대신해주니 자녀는 성인이 되어도 사소한 일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부모는 아들딸이 도움 없이도 잘 지내게 되면 자신은 쓸모없는 늙은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한 분위기다.
네브래스카의 임상심리학자 제인 워렌은 “좋은 가정에서 곱게 자란 자녀들의 자립심이 더 낮은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니 독립할 이유가 없어진다. 부모들도 고분고분 잘 따라주는 자녀와 함께 살고 싶으니 독립이 반가울 리 없다. 맨해튼의 심리치료사 제리 애게이트는 “자녀가 독립하면 부모는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우선 들지만 자녀로부터 소외된 느낌도 들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오리건주립대학 리처드 세터스턴 교수와 작가인 바바라 레이는 공동 저서 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조언과 자문을 받을 뿐 아니라 동료애와 위안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이 덕분에 세대 차이가 많이 좁혀지고 있다. 1970년대나 1980년대와는 달리 자녀의 생각이 부모와 닮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자녀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스스로 자유로운 생활을 접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면을 감안할 때 이제는 자녀들이 21세기에 직면할 문제를 스스로 해결토록 하는 공동 목표를 세우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음 세대가 번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자녀인 밀레니얼 세대의 시각 : 부모님은 몰라요
베이비붐 세대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자녀들이 무기력하고 생활을 꾸려갈 준비도 안 됐다고 낙담하고 있는 것 같다. 공포와 수치심이 뒤섞인 숨 막힐듯한 태도로 자녀를 대하는 느낌마저 준다. 밀레니얼 세대를 평가절하하는 근거없는 이야기도 많이 나돈다.
입사 면접에까지 부모와 함께 간다는 소문이 단적인 예다. 이 이야기는 2013년 9월 월스트리트저널에 ‘면접장까지 부모와 함께 가야 하나?’라는 제목의 기사로 소개됐다. 인력관리회사인 아데코가 대학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한 이 기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응답자의 8%가 입사 면접에 부모와 함께 갔고 3%는 자리를 같이했다는 내용이다. 사실을 제대로 파악해 보면 황당해진다. 차가 없는 자녀를 면접장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면접장 주위에 앉아 기다린 부모의 비율을 집계한 통계를 왜곡해 큰 제목으로 기사화한 것이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미국에서는 부모가 어디든 차로 데려다 주는 것은 자연스런 일상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경제력이 떨어진다는 분석도 왜곡된 점이 없지 않다. 2013년, 25~34세인 남성의 수입은 1980년 그 또래의 남성에 비해 물가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18.5%나 감소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기간 젊은 여성의 수입은 40.5%나 증가해 전체적으로 보면 그 전 세대와 수입 차이가 별로 없다.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의 하위 60%는 부모세대 때보다 재정상태가 훨씬 열악하다. 1989년, 18~34세의 젊은 성인들은 평균 3300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했으나 2013년의 그 또래는 7700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 학자금 융자가 빚 증가의 주요인이다.
그렇다면 밀레니얼 세대가 과거 부모세대에 비해 더 많이 파산했냐 하면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대학을 졸업한 경우 베이비붐 세대보다 형편이 더 낫고 고등학교 이하 학력의 경우는 부모세대 때보다 수입이 훨씬 떨어지는 상반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이런 자녀를 위해 옹호자, 친구, 상담사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녀와 좀 더 가까워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자녀의 생각은 좀 다르다. 부모가 자신만의 소셜미디어 영역에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하고 있다. 부모 집에 같이 사는 것도 밀레니얼 세대만의 현상은 아니다. 1911~1924년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세대 때는 대공항의 여파로 직업을 구하지 못해 부모와 함께 지낸 캥거루족이 더 많았다. 고용여건이 악화되고 임대료 부담이 가중되면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요즘 직장 상사들은 “밀레니얼 세대들이 문자를 주고받느라 근무를 태만히 하지만 일일이 나무랄 수 없어 포기하고 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무 태만은 밀레니얼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징계를 하거나 해고를 하면 될 일을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밀레니얼 세대는 아직 젊다. 앞으로 수십 년을 살아가면서 미흡한 생활능력을 키우고 재산도 모으며 자녀도 낳아 기를 것이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면 밀레니얼 세대도 다른 세대와 별 차이가 없다. 더 예민한 부모가 있을 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그에 대한 생각들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중년 우리들의 생각도 좋지만 젊은 사람들은 현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할 때가 있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 젊은 사람들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한다. 그들이 은퇴와 퇴직 이후 얻은 삶의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 내용들을 이란 책에 담았다.
정퇴자(정년퇴직), 조퇴자(조기 퇴직), 졸퇴자(졸지에 퇴직) 세 명이 모였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모인 그들은 어김없이 전날 토론한 책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어제는 동화책을 읽고 토론을 했는데 새롭더라고요.”
책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문을 두드린 곳은 숭례문 옆 ‘숭례문학당’. 책을 내보고 싶다는 꿈을 좇아 모인 것이 이렇게 인생을 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기업연수원에서 기업교육을 담당하다 조기 퇴직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경희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병일(崔炳一)씨. 그도 책을 내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글쓰기의 기초가 전혀 안 된 자신을 발견하곤 한겨레문화센터의 글쓰기 과정에 등록한다. 거기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그가 소개를 받은 곳은 바로 숭례문학당. 즐거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수산회사, 무역회사, 교육회사 등 중소기업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지만, 부도를 맞은 회사와 함께 파산한 윤석윤(尹錫潤)씨. 졸지에 퇴직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무너지지 않고, 교육회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사 활동을 하던 그였다. 동경하던 것은 책을 쓰는 것도 아닌 글쓰기. 그가 찾은 곳도 한겨레문화센터였다.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최씨가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던 윤석윤씨에게 숭례문학당을 추천한다. 최씨가 2011년 초 그곳에 들어간 지 한 달 뒤였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하는 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생소한 방식이었다. 생소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방식에 순응하고 따라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뽐내 남들에게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석윤씨는 결심했다. 이곳에서 2년만 공부에 투자해보겠다고.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젊은 시절보다 더 다양한 영역에서 그들은 빛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과 민간연구기관에서 32년간 연구원 생활을 했던 윤영선(尹永善)씨. 사실 그가 숭례문학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두 명에 비하면 가장 최근이다. 2014년 12월 31일 정년퇴직을 한 뒤, 지난해 1월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도 두 명과 다르지 않다. 책을 내보고 싶다는 것. 단지 그 꿈을 위한 열정이 발을 이끌었다. 두 명보다는 시작이 늦은 탓에 그들보다는 아직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서히 활동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외부활동보다 더욱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 것은 내면의 변화다. 자신감은 말로 할 수도 없고,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생겼다. 몇 십 년간 사회생활을 하며 굳어진 습관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
이들은 모두 신중년들 또한 똑같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책을 읽으면 말이다. 그러나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고, 발로 뛰었을 때 비로소 변화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자신도 변화하는 것. 그리고 열린 사람이 되는 것. 그것들이 바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그들은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독서를 하고, 토론을 해야 하는 이유
세 명 모두 숭례문학당에 대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다. 이곳은 토론을 할 때 정답도 없고,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 그저 자신이 책을 읽고 느낀 것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곳이라고 말이다. 윤석윤씨는 이곳에서 토론을 할 때 ‘나이와 계급장을 모두 떼는’ 대화의 장이자 아고라라고 얘기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유독 ‘경청’하려 한다. 20~30대의 사람들과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살아온 환경과 배경이 달라 생각이 다를 뿐,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근저에는 ‘인문학’이 있었다. 숭례문학당에서는 대부분 인문학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한다.
“인문학은 역사, 철학, 문학이 있죠. 여기에서 많은 문학책을 읽고 공부하니, 세상을 사는 다양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문학책을 읽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간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최병일)
토론의 매력은 소통과 대화다. 그리고 그 속에 배려가 존재한다. 토론은 2시간. 각 10분의 발언권이 주어진다. 꽤 긴 시간 같지만, 막상 토론에 들어가면 토론자들이 느끼는 시간은 10초와 같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은 지혜의 나눔에 목마르다. 그리고 치열하다.
“나눔이 없는 독서는 무엇인가 부족하더라고요. 독서토론은 제 생각을 나눠주고, 남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니 더욱 좋은 셈이지요. 또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발언권이 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정말 평등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면서, 제 생각의 깊이가 그보다 깊지 않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겸손해지고, 공부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윤석윤)
이들은 독서토론이 신중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이유를 계속해서 토해냈다. 특히 젊은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그들에게서 인정받을 때의 희열은 퇴직 이후 떨어졌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30세대에게 인정을 받고, 책 친구와 말 친구가 생겼다는 것. 그것은 60년 이상 살면서 굳어진 생각의 패러다임을 깨버릴 수 있는 힘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어색했어요. 토론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상대방의 반응에도 민감했고 말이에요. 나이 먹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수하는 것 아닐까 생각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는 평가라는 게 없더라고요. 그저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뿐. 자연스럽게 저도 젊은 친구들의 생각을 수용하게 됐습니다. 어쩔 땐 젊은 친구들이 그래요. ‘선생님, 이번 토론 꼭 나오셔야 된다’고 말입니다. 재미있어요. 그들과 친구가 된 것이.”(윤석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행복해요. 행복해졌어요.”(윤석윤)
“은퇴 후 소속감이 없고, 고독감이 와서 두려웠어요. 지금은 그런 것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삶의 자신감도 생겼어요. 밤을 새워가면서 책 읽는 것이 매우 즐거워요. 마음에서 오는 자긍심 때문인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최고의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윤영선)
“예전에는 일이 없으면 초조했는데, 지금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제가 하고 있는 일과 일 사이의 공백기는 책으로 채우면 되니까요.”(최병일)
독서 공부가 인생을 바꿨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타인에게 독서와 토론의 즐거움을 전한다. 독서토론 강의를 나가기도 하고, 토론 진행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열기도 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씨는 과목과 강의 방식을 180도로 바꿨다. 경영학에서 독서토론, 생각과 표현이라는 과목으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씨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도 확실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피드백 정도만 하는데도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 이러한 반응에 용기를 얻어 생산성본부, 학교 도서관 등의 초청 강의도 줄을 잇고 있다.
“2015년은 태어나서 가장 많이 강의를 한 해예요. 특히 기업에서 강연을 하고 느낀 점은 신중년들이 변화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고, 숭례문학당을 소개했더니 회사 다니는 것도 즐겁고, 책에 지출하는 비용도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삶이 조금 더 윤택하게 변했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것을 똑같이 상대방이 느끼니 이보다 좋은 게 있겠어요?”(최병일)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은퇴 후 인생에서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공부를 하는 은퇴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그 부족함을 채워줄 책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의와 토론을 하면서 느낀 젊은이들은 신중년의 지혜를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게 맞물려 그들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물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많은 이들이 다이아몬드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분명 다이아몬드는 금보다 더 귀하고 비싸긴 하지만, 장식용품에 쓰이면서 부의 상징으로 여겨질 뿐이지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더 큰 가치를 가진 것은 금이라고 할 수 있다.
금은 지금도 국제 결제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유사시에 그 가치가 드러난다. 금값과 주가는 연동되기 마련인데, 상반되는 주기를 갖는다. 즉, 금값이 오르면 주가가 떨어지고, 반대로 주가가 오르면 금값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면 맞다.
아주 대표적인 실례로, 1929~1932년 대공황 당시 다우지수는 90%나 폭락했지만, 금광회사인 홈스테이크의 주식은 금값이 오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급상승을 했다. 주가총액이 무려 300배나 급등하는 기현상을 보인 것이다. 이 사태를 보면서 전쟁이나 기타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폐는 종잇조각에 불과해도 금은 언제나 가치를 유지하는 물건이라는 공감이 모아졌다.
2008년 미국발 금융파산 때도 전 세계의 많은 투자자들이 자신의 금고에 많은 재산을 금덩이로 묻어 놓는 바람에 세계적인 금괴와 금화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금을 한의학에서 한약원료로도 사용한다.
금이 주로 나타내는 효능은 마음이 불안정하고 놀랐을 때 안정을 시켜주는 신경안정작용, 몸 안의 유독한 물질을 흡수하여 배출시키는 해독작용, 종기나 화농증 등의 피부병에 효과가 있는 피부정화작용 및 면역력을 높여주고 관절염의 통증을 제거하는 등의 효능이 한의학적으로 알려져 있다. 금은 금박이라 하여 아주 얇은 편(片)의 형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황청심원이나 공진단의 표면에 감싸져 있기도 하다. 이 얇은 금박도 워낙 비싸기 때문에 한약의 원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정도이다.
그런데, 이 금보다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비싼 한약이 있다. 바로 사향이다. 사향은 사향노루의 사향선(腺)을 건조시켜 얻는 분비물로서 사향노루 수컷의 배와 배꼽의 피하에 있는 향낭속에 있다. 한의학적으로는 사향을 갑작스럽게 환자가 쇼크에 빠지거나 뇌졸중으로 인사불성이 될 경우 의식을 깨우기 위해서 사용한다. 또, 대사를 활성화시키는 작용이 있어 호흡과 혈액순환을 개선시키는 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황제의 명약이라는 공진단과 정신이 불안정할 때 급히 사용할 수 있는 우황청심원의 대표적인 원료로 사용되어왔다.
사향의 대표적인 성분은 무색의 기름 같은 액체이며, 무스콘(muscone)이라 한다. 무스콘의 효능은 항염증작용, 강심작용, 혈압강하작용, 알레르기를 가라앉히는 항히스타민 작용 및 혈전의 생성을 억제하는 혈소판 응집억제 작용 등이 현대의학적인 연구에서 증명되었다. 이 사향은 금값의 몇 십배에 달할 정도로 고가의 한약이다. 그래서 위조품이 가장 많은 한약중의 하나가 바로 사향이다. 수년전에 공중파 소비자고발 프로그램에 이 사향의 국내 위조 실태에 대해서 방송된 적이 있다.
사향은 멸종위기에 놓인 사향노루에게서 얻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야생동물보호협약상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수입 절차가 아주 까다롭고 수입할 수 있는 양도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데 국내에서 사용되는 사향이 공인된 수입량의 열배 이상으로 밝혀진 것이다. 우리나라 공정서 기준으로는 사향 안의 무스콘 함량이 2% 이상이어야 하는데, 무작위적인 실험결과, 무스콘이 전혀 검출되지 않는 사향으로 만든 한약제제도 많은 것으로 밝혀지고, 그 과정에서 일부 업자가 불개미 등을 섞어 만든 가짜 사향이 대거 적발되기도 했다. 1차 방송이 나간 후에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있었고, 압수수색 끝에 밝혀진 사실이다. 그 후, 수십명이 기소가 되었으나 결국 결과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법령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틈으로 모두 빠져나간 탓이다. 결국 사향은 법적 보완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아직도 구하기 힘든 한약으로 남았다. 최근 사향의 수입 가격이 대폭 오르면서 그 가격이 그대로 국내 구입가에 반영되었다. 그런데 한약을 다루는 전문인들의 입장에서 더 답답한 것은 무려 60%가 넘게 오른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사향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공진단이나 우황청심원의 사용량은 계속 늘어가고 있는데, 핵심원료인 사향을 구할 수 없어 대기순번이 수백번까지 이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다.
이 사향보다 더 비싼 한약이 있을까? 물론 있다. 가장 비싼 것은 바로 벌의 독을 모아서 정제하여 만든 봉독분말이다. 봉독의 가격은 사향의 6~7배에 달할 정도로 비싸다.
봉독은 한의학적으로 염증을 가라앉히고 면역력의 높고 낮음을 정상 수준으로 조절해주며, 통증 억제와 혈액 순환의 개선, 그리고 뇌하수체와 부신피질 호르몬 분비를 촉진해주는 등의 아주 다양한 작용이 있다. 특히 심한 근육통과 외상으로 피멍이 심하게 들었을 때 증상을 신속하게 가라앉혀 주거나, 만성 디스크 등의 치료에 효능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벌을 잡아서 환자에게 직접 살아 있는 벌의 침을 맞게 했다.
물론 1회용으로만 쓰는 것이었고, 벌침을 놓자마자 그 벌은 죽고 말았다. 그래서 벌침을 사용하는 한의사들은 항상 일정 수 이상의 벌을 직접 키우고 있어야 했다. 최근에는 벌에서 직접 독을 추출하여 정제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독성분을 순수한 분말형태로 얻고 있다. 커다란 동물이나 사람도 전기충격을 받으면 정신을 잃고 분비물을 쏟아놓듯이, 벌도 고정시킨 채로, 특정파장의 전자파를 흘려 넣으면 독성분을 주로 분비한다. 이 독성분을 잘 정제하여 자연 건조시켜 얻은 분말이 바로 봉독분말이다. 물론 이 추출과정은 개발자의 특허로 보호되어 있다. 이것을 생리식염수에 적당한 비율로 녹인 다음, 멸균하여 주사액 형태로 만들어 환자의 피하나 관절낭에 아주 소량씩 주사하여 염증과 통증 치료에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벌을 키우는 농원에서 이렇게 얻어진 봉독분말의 대부분은 수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말 안의 상당 분량이 염증을 가라앉히는 소염작용을 하는 성분들인데, 이것을 가지고 소염주사제의 원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고서화가 되었든지, 공산품이 되었든지, 아니면 한약의 원료가 되었든지 결국 값을 정하는 것은 희소성의 가치이다. 금이나 사향, 봉독의 비싼 가격도 사실 이 희소성과 함께 그것을 얻는 과정의 특수성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세 가지 한약원료 모두 오랜 세월동안 임상에서 환자치료에 탁월한 효능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희소성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것이지, 구하기 어렵다고 무조건 비쌀 수만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