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는 패션 디자이너’
필자의 후반생 꿈이다.
2012년 퇴직한 후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봤다. 패션 디자인, 패션 모델, 발레와 왈츠 그리고 탱고 배우기, 영어회화, 서유럽 여행하기, 좋은 수필 쓰기, 오페라와 발레 감상하기, 인문학 공부하기 등 많기도 했다. 사람이 살아갈 때 무엇이 중요할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필자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선생님이 되어 30여 년을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일했다. 퇴직을 했어도 공무원 연금이 나와 최소한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은 정말 심각하단다. 절반이 빈곤층이라고 한다. 그래도 필자는 평생 원하던 일을 하고 퇴직 후에는 최소한의 생활까지 보장이 되니 이처럼 다행스런 일이 없다. 지금부터는 필자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 공부는 주로 집에서 한국방송 통신대 강의를 통해 충족한다. 요일별로 국문학과 철학, 역사와 서유럽 문화기행,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강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창 자랄 때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의지만 있다면 TV와 인터넷 그리고 서울 각 구의 문화원에서 무료로 혹은 가성비 높은 비용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TV를 바보상자라면서 멀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필자는 제자들에게 ‘정보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인터넷에서 전복을 구하느냐 미역을 건져 올리느냐는 매체를 이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요즘엔 방송대 강의도 그렇고 교양 프로그램과 양질의 다큐멘터리 등 좋은 콘텐츠가 넘쳐난다. 방송대 강의가 너무 재밌어서 외출을 못할 때도 있을 정도다.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의욕에는 세월도 못 당한다. 필자는 퇴직 후 제일 먼저 강남 라사라 학원에 등록했다. 패션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 선생님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 패션디자인이었다. 이곳에서 패션디자인 과정 초급 3개월, 중급 3개월을 마치고 서울시 창업스쿨에서 2개월간의 패션디자인 과정을 수료했다. 패션에 대한 열정은 아마 평생 가지고 가게 될 것 같다. 발레는 어려서부터 필자의 로망이었기에 패션디자인 과정을 마친 후 바로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발레를 할 때마다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는지 모른다. 발레가 어린 시절의 로망을 실현시켜주는 취미 정도라면 왈츠와 탱고는 능숙하게 아주 멋들어지게 추고 싶다. 운동할 때는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왈츠와 탱고를 출 때는 어느새 끝나는 시간이 되곤 한다. 건강을 위해, 바른 자세를 위해, 힐링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춤이라고 생각한다. 스웨덴에서는 팔십이 넘은 노인들도 발레를 한다. 노인분들의 표정이 참 행복해 보인다.
서초문화원에서는 수필을 잘 쓰기 위한 수업을 받고 있으며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기자단으로 활동하며 쓴 글이 96편이 될 정도로 글쓰기가 생활화되어 있다. 틈틈이 압구정역에 있는 무지크 바움에 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몇 해 전에는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워킹반에도 등록했다. 주 1회 모델워킹을 연습하고 있다. 2년 동안 패션쇼도 다섯 번 했다. 개성 강한 동료들의 기상천외한 옷차림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옷차림은 전략이고, 옷 입는 것도 일종의 예술 행위’다. 기왕이면 예쁘게 입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훌륭한 액세서리는 젊음이다. 젊은이들을 값싼 옷을 입어도 예쁘지만 나이 들면 옷차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물기 빠진 피부에 옷차림까지 추레하면 볼품이 없기 때문이다.
녹화가 있는 토요일은 될 수 있으면 여의도로 간다. 서포터즈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5포세대, 혼밥, 실업문제, 4차 산업혁명 등 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다루며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메인 브로드캐스터가 강연한 후 미래참여단 서포터즈들이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장에서 녹화에 참여하면 더 생생한 공부가 된다. 20대 젊은이에서 70대 시니어까지 다양한 세대와의 만남도 즐거움 중 하나다. 주 2회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주관하는 서울 둘레길 걷기에 참여한다. 둘레길 걷기는 주 3회 30분 이상 운동을 해야 하는 시니어들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배움이 이어지면 기회가 이어진다’고들 한다. 지금 같아서는 지구촌에서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배움에 대한 열정이 식을 것 같지 않다.
이래도 되는 거야?
삶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거냐고요!
어제는 너무 좋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올해 4월부터 활동하게 된 온․오프라인 잡지 에 필자 글이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온라인에만 꾸준히 실렸는데 잡지사에서 정해준 주제 ‘으이구! 주책이야!’에 맞춰 쓴 글 ‘교재를 망가트려 죄송합니다’가 7월호에 실린 것이다. 제시한 주제에 맞춰 처음 써낸 글이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필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다. 에서 주관한 시니어 헬스 콘서트에 필자와 함께 온 사람들은 대부분 필자 스타일을 좋아하는 여성과 남성들이다. 모두들 성격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분들이다. 하는 일도 인터넷 기자, 사회복지사, 공예가, 모델, 시인, 수필가, 교수 등 다양하다. 서초문화원 문화기행 프로그램에서 만난 분도 있고 동대문 제일평화시장 구두매장에서 필자 스타일에 필이 꽂혀 인연을 맺게 된 분도 있다.
평택여고에 재직할 때 필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정성껏 대하라. 그 사람이 나와 어떤 인연으로 맺어질지 모른다.” 서둔야학 단톡방, 서민동 단톡방, 서울시 낭송회 시음 단톡방, 왈츠 단톡방, 명견만리 서포터즈 단톡방, 꿈방송 단톡방, 뉴시니어 리더스포럼21 단톡방, 강남시니어프라자 해피미디어단 단톡방, 모델워킹 단톡방, 서리풀 문학회 단톡방, 오페라 동호회 모임,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친구들 등 단체회원 단톡방만 해도 만만치 않은 인적 네트워크다. 살아보니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다. 2년 전 메르스 사태로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에서 녹화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느라 고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필자가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모델워킹하는 동료들과 해피미디어단 회원들을 왕창 모시고 갔다. 담당 PD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필자는 바람잡이 역할을 즐긴다.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행사를 할 때는 담당 PD를 초대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필자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각자의 재능을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시니어 헬스 콘서트에 참석한 분들도 너무 재밌었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필자에게 말했다. 다음 행사에도 초대해주기를 바란다면서. 아자아자! 이런 것이 바로 윈윈이다.
날개를 달아준 에 감사해하며 오늘도 필자는 저 푸른 하늘을 향해서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지금 필자의 삶은 글자 그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다. 이런 삶이 수어지교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기쁨!
따봉, 원더풀!
발트 여행에 배낭 하나만 메고 온 사람은 필자 한 사람뿐이다. 여행 짐 싸는 것은 프로라고 자부할 수 있다. 평소 메고 다니던 배낭에 옷가지 몇 개와 세면도구만 추가해서 넣으면 된다. 배낭의 구조가 여러 가지를 나눠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어 편리하다.
여자 혼자 미국을 종단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에서 보니 장거리 여행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버리라고 했다. 책 한 권까지도 읽은 페이지는 찢어버릴 정도로 짐을 최소화하는 장면이 있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모두 손으로 끄는 가방을 한두 개 더 가지고 왔다.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 그 짐을 부쳐야 했다. 비행기 안 수화물 칸에 부치는 짐에는 배터리가 들어 있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스마트폰 등 배터리 용도가 많아 여분의 배터리를 넣어오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수화물을 부치고 나서 정밀검사 때 배터리가 검색되면 짐을 풀어 배터리는 빼서 휴대용 가방에 넣어서 가져가야 한다. 때문에 단체 출국 체크인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또 그렇게 부치는 짐이 분실되거나 다른 도시로 가는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여행은 엉망이 된다. 그래서 필자는 부치는 짐은 아예 안 가지고 간다.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패션쇼를 하듯 한다. 여성들이 그렇다. 일단 가방을 풀고 나면 바로 옷부터 갈아입는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레스토랑에 식사하러 가면 벌써 새로운 옷들로 갈아입고 나타난다.
6박8일간의 여행인데 필자의 작은 배낭 안에서 매일 갈아입을 옷이 나왔다. 반팔, 긴팔이 다 나왔다. 사람들이 희한하게 생각했다. 필자는 여행용 옷은 구겨지지 않는 기능성 옷들로 준비한다. 돌돌 말아 배낭에 넣으면 부피도 별로 차지하지 않는다. 컬러도 백색, 흑색, 붉은색으로 준비하면 매일 옷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말 등은 한 번 신고 버릴 만한 낡은 것들을 가지고 간다. 그러니 짐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짐을 더 간소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정장 드레스 코드라면 일반 넥타이보다 나비넥타이가 부피도 적고 분위기도 다르다. 모자도 부피를 차지하지 않으니 한 가지만 쓰기보다는 한 개쯤 더 갖고 가도 될 만하다. 상의 재킷은 주머니가 많은 옷이 좋다. 카메라, 여권 등 중요 소지품을 넣고 다니면 잃어버리지 않는다. 요즘 옷은 주머니가 없는 경우가 많아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끼를 입기도 하는데 주머니가 많은 재킷이면 둘의 용도를 충족한다.
비행기를 탈 때는 생수를 버리고 가야 한다. 이때 물만 마시고 빈 페트병은 그냥 가지고 다니면 아주 유용하다. 식사할 때 물을 보충해두면 따로 생수를 사는 데 필요한 잔돈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귀국 비행기에서는 필자가 부칠 짐이 없는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오버차지당할 짐들을 나눠 구제받을 수 있었다. 귀국할 때는 쇼핑해놓은 것들이 많아 1인당 제한 무게인 20kg을 넘기 쉽다. 필자는 여행지에서는 아무것도 사지 않는 것을 신조로 한다.
한밤중 나타났다가 아침이면 사라지는 도깨비처럼, 비밀스러운 거래가 일어나던 도떼기시장을 이른바 ‘도깨비시장’이라 부르곤 했다. 이처럼 특정한 날과 시간이 되면 열리는 장이 있다. 바로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이다. 청계천과 한강공원 등 물가 인근에서 열려 밤공기가 선선한 6월이면 산책 삼아 거닐기 제격이다.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이하 야시장)은 서울시에서 출범해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는 행사다. 3월부터 10월까지 금·토요일(청계천은 토·일요일) 저녁마다 여의도·반포 한강공원과 청계천, 동대문디자인프라자(DDP)에서 열린다. 청년 상인들이 운영하는 각양각색 푸드트럭과 핸드메이드 숍, 다채로운 공연 무대 등을 만날 수 있다.
‘월드나이트마켓’이라 부르는 여의도 야시장은 한강의 유람선과 마포대교, 쌍둥이빌딩 등에서 비추는 조명이 별처럼 반짝이는 야경을 자랑한다. 잔잔한 강 물결과 어울리는 버스킹(길거리 연주) 공연과 더불어 아시아·유럽·남미의 전통 공연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한강공원의 너른 잔디밭에는 텐트와 돗자리를 펴고 야시장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하다. 인근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를 다니다가 반짝이는 야시장의 불빛을 보고 발걸음하기도 한다. 한여름에는 열대야에 더위를 식히기 위해 찾는 방문객이 주를 이룬다. 돗자리만 챙겨간다면 도시락을 싸가지 않고도 여름밤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동대문디자인프라자 ‘청춘런웨이마켓’에서는 신나는 DJ공연과 함께 패션쇼가 열린다. 다른 야시장보다 젊은 층의 비율이 높아 신선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다. 패션의 거리인 만큼 신진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와 더불어 개성 넘치는 아이디어 상품과 디자인 소품들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패션 트렌드와 젊은 세대 문화를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도심의 야경과 분수, 빛과 음악이 흐르는 반포 야시장 ‘낭만달빛마켓’에서는 로맨틱한 재즈, 팝페라, 어쿠스틱 음악 공연이 열린다. 해질 무렵 찾아가면, 붉게 물든 석양 아래 무지갯빛 물줄기가 쏟아지는 낭만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인근 반포대교와 한남대교 등 도심의 야경을 배경으로 이색적인 음식과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는 이가 많다.
청계천을 따라 펼쳐지는 ‘타임슬립마켓’은 사랑의 자물쇠와 소원의 나무, 도깨비 퍼레이드 등 다양한 이벤트를 운영한다. 평소에는 광통교 일대에서 열리지만, 시즌별로 특정한 날에는 청계광장에서도 야시장을 만날 수 있다(여름 시즌 8월 18~20일). 도심 속 시민들의 쉼터로 자리 잡은 청계천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각 지역 야시장 종합 안내소 겸 상황실에는 의료지원 본부가 마련돼 있어 응급상황 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푸드트럭, 점포 정보 및 공연 안내는 서울밤도깨비야시장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5월 6일 가정의 달을 맞아 ‘미즈실버코리아 2017 러브 패션쇼’가 개최된다.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서 열리는 ‘미즈실버코리아 2017 러브 패션쇼(이하 러브 패션쇼)’는 ‘나눔·봉사·배려’를 주제로 세대 간 소통과 나눔의 장으로 꾸며진다. 이번 행사는 상업적인 패션쇼의 개념에서 벗어나 시니어와 주니어가 함께 어울리고 즐기는 화합의 무대를 지향한다.
지난해에 이어 2회째를 맞이하는 러브 패션쇼에서는 전문 모델을 비롯해 미즈실버코리아 수상자, 시니어모델 등 40여 명을 만날 수 있다. 아울러 일반 모델 및 아마추어 모델들이 참여할 수 있는 특별 이벤트도 진행된다. 무대에서 선보이는 의상과 물품들은 불우이웃을 위한 바자회와 소외된 계층을 위해 쓰일 계획이다.
미즈실버코리아는 50세 이상 중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미(美)의 제전으로 경쟁의 차원을 넘어선 종합문화예술축제로 발돋움하고 있다. 러브 패션쇼 관련 자세한 일정은 미즈실버코리아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엄마는 그 유명한(?) 58년 개띠다. 수많은 동년배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20대에는 결혼과 출산, 30대와 40대는 지난한 육아, 50대에는 고장 난 몸과 싸웠다. 그리고 지금 엄마의 나이 앞자리는 6을 바라보고 있다. 엄마는 수많은 58년 개띠처럼 형형색색의 아웃도어를 장례식장, 예식장 빼고 거의 모든 자리에 입고 나간다. 뒷모습만으로는 우리 엄마와 남의 엄마를 구분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과 패션. 그렇다고 엄마의 지금 패션에 대해 비난할 수는 없다. 엄마에게는 이름 석 자만큼이나 옅어져버린 ‘자신’. ‘패션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다’라는 말을 패션을 전공하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남들에게 말했다. 엄마의 이름 석 자와 엄마라는 육체와 정신을 쏙쏙 빼먹고 자란 나는 할 말이 없다. 지금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엄마에게 무작정, “엄마 그 오렌지색 점퍼는 정말 아니지 않아?”라고 말할 순 없다. 우리 엄마와 수많은 남의 엄마에게 패션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자신을 찾는 법에 관한 지도를 내밀어본다. 우선 이 지도의 가이드로 적당한 4명의 인물을 꼽아봤다.
김민정 프리랜서 패션에디터 h98008272@gmail.com
◇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인생 철학이 녹아 있는 옷을 입어라"
“옷을 잘 입은 사람은 옷보다는 그 사람이 기억나요.” 몇 해 전 라는 영화가 개봉될 즈음 실제 주인공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노라노는 1947년 국내에서 출발한 두 번째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미국 유학을 간 신여성으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56년 한국에서 제일 먼저 패션쇼를 열었으며, 기성복이란 제도를 프랑스보다 앞서 만들었다. 인터뷰를 했던 그때 이미 노라노는 80세를 훌쩍 넘긴 나이였다. 노라노는 심플한 디자인의 캘빈클라인 시계를 차고, 어깨선에 딱 맞는 벨벳 재킷을 입고 있었다. 단정한 커트 머리에 보라색 아이섀도를 바른 모습에서는 바지런함이 느껴졌다. 잘 입었다, 못 입었다가 아니라 참 노라노답다는 생각이 인터뷰 말미에 들었다. 인생을 일부러 ‘루틴’하게 만들었다는 노라노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혹시라도 더 일찍 깨면 5시가 될 때까지 누워 있는다) 45분간 스트레칭을 하고, 똑같은 식단의 아침밥을 먹는다. 그리고 동네 공원을 45분 걷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9시까지 출근한다. 퇴근은 당연히 6시, 칼 같이 맞춘다. “시계나 다름 없죠. 세상에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아요. 생활을 이렇게 루틴하게 만들어놓으면 쓸데 없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죠.” 그녀의 철학은 패션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스무 살부터 일을 했어요. 직장 여성으로 산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생활이 단순해야 일에 집중할 수 있어요. 패션도, 생활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요.” 머리를 짧게 유지하는 것도, ‘시그니처 룩’이라고 불릴 만큼 똑같은 스타일로 옷을 입는 것도 모두 이런 패션철학 때문이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는 말에 노라노만큼 적당한 사례는 없다. 멋지게 입고, 트렌디하게 입는 것이 답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철학이 스타일에 녹아 있으면 그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다.
◇ 사업가 겸 스타일리스트 린다 로딘 차라리 ‘안티’ 안티에이징
“난 60대가 될 때까지 늙었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종종 젊은 사람들 위주로만 돌아가는 문화 때문에 힘들기도 해요.” 곧 일흔을 바라보는 린다 로딘은 여전히 주말이면 빈티지 시장을 돌아다니고, 종종 ‘중고장터’를 통해 자신의 옷과 탐나는 남의 옷을 교환해서 입는다. ‘패션은 여자들의 창의력을 강물과 같이 흐를 수 있게 도와주는 돌파구’라는 명제에 충실하다. 그래서 가끔 짧은 스커트에 타이츠를 신고(자신의 다리가 예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롤업 청바지를 애용한다. 부엉이처럼 큰 컬러 안경과 새빨간 립스틱도 즐긴다. 물론 한때 그녀도 하얗게 센 머리를 염색할까, 주름진 이마에 필러를 맞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필러를 맞고 마주한 제 얼굴은 제가 아니었어요. 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할머니가 보일 뿐.” 그녀는 차라리 ‘안티’ 안티 에이징을 외쳤다. 젊어 보이는 것에 포커싱되는 중년의 패션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의외로 젊은이들만의 소유물인 줄 알았던 ‘신선함’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유니클로의 생지 데님을 툭툭 걷어 입고, 바삭한 화이트 셔츠에 빨간 플랫 슈즈를 신은 린다 로딘의 패션에서는 나이라는 코드가 읽히지 않는다. 그저, 린다 로딘이라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 영국 총리 테리사 메이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무언가를 기억하자
자신을 찾는 일에 불특정 다수, 즉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또 다른 정계 인물이 있다. 얼굴보다 구두로 첫 취임기사를 장식한 영국의 총리 테리사 메이. 그녀의 패션은 한마디로 멋지다. 20대 여자들의 트렌디함과 중년 여성의 묵직함, 워킹 우먼의 단호함이 한 벌에 담겨 있다. 한정판으로 출시된 구두를 사고(입술 모양이 그려진 앙증맞은 플랫슈즈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사이하이 부츠를 신는 과감한 여자다. “저는 늘 여성들에게 ‘고정관념에 맞추려 하지 말고, 당신 자신이 되라’고 말해요. 만일 당신 개성이 옷 또는 신발을 통해 보인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 바람에 테리사 메이의 연관 검색어에는 ‘슈즈 마니아’가 뜬다. 우리 엄마는 보라색을 좋아했고, 벨벳으로 만든 무언가에 항상 반했다. 하지만 언제나 손에 들린 건 물세탁이 가능한 실용적인 옷이었다. 테리사 메이에게는 구두 쇼핑이 취미활동이자, 스트레스를 푸는 창고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를 찾는 놀이였다. 내가 좋아했던 그 시절의 무언가를 떠올리자. 엄마에게 보라색 벨벳 슈즈가 필요한 것처럼.
◇ 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 ‘나’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자
흰머리에 쇼트커트, 수영으로 다져진 다부진 어깨, 조금의 경사도 느껴지지 않는 빳빳한 허리. 당당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이 프랑스 여자는 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다. 방탄 가공을 거쳤을 법한 그 단단한 사회의 유리천장을 뚫고 ‘최초’로 IMF 총재 자리에 앉았다. 줄곧 ‘남초’ 직장에서만 생활해온 그녀는 전쟁터 같은 직장생활에서 총을 잡기보다는 립스틱을 잡았다. 무채색의 팬츠 슈트로 넥타이맨들과 경쟁하는 대신 핑크색 스커트로 여자다움의 힘을 강조했다. “생각은 그만하고, 행동 좀 하시죠”라는 말을 자주 해 ‘아메리칸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행동파인 그녀 앞에서, “일이 힘들어서, 이게 편하니깐”이라는 말로 유니폼 같은 무채색 패션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워킹 우먼들은 용납이 안 된다. 그녀는 수년간 IMF 총재 역할을 해오며 능력마저도 스타일리시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여전히 스카프 쇼핑을 즐기고 핑크색 트위드 슈트를 입고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60대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그녀의 지금 룩은 뚝심 있게 지켜온 자기 자신 그 자체다.
>>김민정 프리랜서 패션에디터
남성지 를 거쳐, 와 의 패션 에디터로 10여 년간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에디터로 패션 관련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은퇴의 시작은 여행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사전 체크
5070 액티브 시니어들은 앞으로 그동안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삶의 중심은 일에서 여가로, 직장에서 가정으로, 성장에서 관리로 변한다. 이에 따라 재산을 관리하는 재무설계 방식도 바꿔야 한다. 은퇴의 시작은 여행 가방을 준비하듯 꼼꼼히 챙겨야 즐겁고 안전하다. 은퇴재무 전문가 3인의 ‘믿고 맡기는 평안한 노후의 길’을 함께 떠나보자.
김태우 한화생명 은퇴연구소 부소장
평균수명이 50세를 조금 웃돌던 1960년(남 51.1세, 여 53.7세)에 5070은 그야말로 뒷방 늙은이였다.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한 지금 5070은 액티브 시니어로서 인생 황금기의 주인공들이다. 반백년 만에 완벽한 신분세탁이 이뤄진 셈이다. 연세대학교 김형석 명예교수는 라는 저서에서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75세까지는 정신적으로 인간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올해 김형석 교수의 나이는 98세다.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8명 정도(78.3%)는 70세를 노인 연령의 기준으로 보고 있다. 인생 100세 시대에 5070은 노년으로 넘어가기 전의 ‘신중년’인 셈이다. 지금의 5070세대는 그 전까지 일과 가족 때문에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했지만, 50세를 넘기면서 ‘신중년’으로서의 새로운 인생의 꽃을 피우고 싶어 한다. 문제는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줄 경제적 토대다. 5070 액티브 시니어가 2040일 때는 월급이라는 끊이지 않는 현금흐름을 통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해왔지만 지금은 다르다. 물론 아직 현역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5070은 여전히 풍부한 현금흐름을 확보하고 있겠지만, 이미 은퇴한 5070은 사정이 다르다. 안정적 현금흐름이 끊긴 상태에서 그동안의 관행을 답습하며 모아놓은 돈을 빼내 쓰는 행위로는 평안한 노후생활을 장담하기 어렵다.
현역 시절 안정적인 생활이 노후에도 이어지기 위해서는 5070 시절을 잘 보내야 한다. 특히 액티브 시니어로서의 지위를 노후에도 이어가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스마트한 재무설계가 필요하다. 재무설계는 재무 상황을 파악하여 관련 목표를 세우고, 이에 맞추어 구체적인 자금 준비 등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5070세대가 이전까지는 월급을 통해 재테크, 저축, 목돈 중심의 재무설계를 해왔다면 지금은 새로운 관점, 가치관의 재무설계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재무설계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5070세대의 특성을 충분히 감안한 재무설계를 특별히 ‘은퇴재무설계’라 부르기로 한다. 여기서는 먼저 5070세대에게 ‘은퇴재무설계’가 필요한 이유 5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은퇴재무설계’가 필요한 이유 5가지
첫째, 속성이 다르다. 재무설계 측면에서 5070세대와 2040세대는 그 속성이 다르다. 2040세대가 샘물이 계속 솟아나는 우물이라면 5070세대는 더 이상 샘물이 솟아나지 않는 우물이다. 5070세대가 자신의 우물에서 죽을 때까지 목을 축이기 위해서는 막혀버린 샘물이 다시 나오도록 다른 길을 뚫거나, 우물의 물이 썩지 않은 상태에서 고갈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속성이 다른 2040세대 때 해오던 재무설계를 5070에도 그대로 적용할 경우 적잖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패션쇼에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다.
2040 시절에 고수익·자산 중심의 재무설계로 재미를 봤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게 하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5070 은퇴재무설계는 모아둔 자산을 어떻게 소비하고 지출할 것인가 하는 현금흐름 중심의 재무설계로 바뀌어야 한다.
둘째, 현역 때인 2040 시절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아프리카 속담에 “음악이 바뀌면 춤도 바뀌어야 한다(When the music change, So does the dance)”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전을 노멀(normal) 시대, 그 후부터는 경제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고 해서 뉴노멀(new normal) 시대라고 한다. 최근에는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져 기존의 경제이론으로는 예측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뉴애브노멀(new abnormal)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과거 5070세대가 살아왔던 노멀 시대는 어디에 투자하든 무슨 장사를 하든, 그리고 저축만 열심히 해도 돈을 불릴 수 있는 시절이었고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재무설계였다. 1980년에 시중은행의 평균금리는 24%였다. 5년 만기 재형저축상품의 금리는 무려 36%였던 적도 있다.
목돈을 만드는 데 얼마의 기간이 걸리는지를 간단하게 알아보는 방법으로 72법칙이 있다. 72법칙은 원금이 2배가 되는 데 걸리는 기간을 계산하는 공식으로 ‘72÷금리=기간’으로 산출한다. 과거 금리가 24%였던 시절에 1억 원을 예금해두었다면 원금은 3년(72÷24=3) 만에 2배로 불어난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엔 어떨까? 예금 금리를 2%로 가정하더라도 원금을 2배로 만드는 데 36년(72÷2=36)이나 걸린다. 예전처럼 예금으로 자산을 급속히 늘려가는 시대는 끝났다. 다른 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한 지금까지 모아놓은 한정된 자산으로 긴 노후를 보내야 한다는 의미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엔 은퇴 자금으로 제법 큰돈을 모아놓았다 해도 안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은퇴할 때 노후자금으로 3억원을 준비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매년 2400만원을 노후생활비로 사용하고, 물가상승률은 2%라 가정하자. 이 사람이 3억원에서 언제까지 노후생활비를 꺼내 쓸 수 있을까? 이는 3억원의 운용수익률에 따라 달라진다. 3억원을 예금도 적금도 아닌 자신의 금고나 장롱에 넣어두고 사용할 경우(운용수익률 0%) 약 11년이면 소진된다. 운용수익률이 2%일 때는 12년, 4%일 때는 14년으로 큰 차이가 없지만, 7%일 때는 약 20년으로 노후자금 사용기간이 늘어나게 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요즘은 노후생활비를 이자로 조달하며 살아가는 금리생활자의 설 자리가 사라졌음을 뜻한다. 보다 적극적인 운용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셋째, 수명 증가 속도를 간과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 100세 이상의 어르신은 몇 명일까? 통계청(2016) 자료에 따르면 3159명이다. 90세 이상 인구는 이보다 약 50배 많은 15만 명 정도다. 100세 이상 인구는 5년 전에 비해 72%, 90세 이상 인구는 67% 증가했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대수명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1980년에 66.1세였던 기대수명은 2015년 기준으로 82.1세로 2년마다 기대수명이 1년씩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생명공학 분야 전문가들은 금세기 안에 인간의 평균수명이 120세, 심지어는 140세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기도 한다. 5070세대가 2040 시절에 경험했던 것처럼 퇴직 후 10~20년을 더 산다는 전제로 노후를 준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5070세대 중 액티브 시니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의 기대수명은 더 길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서울대 의료관리학연구소와 건강보험공단 분석에 따르면, 소득이나 거주지역에 따라 기대수명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 상위 20%에 속한 사람들의 평균 기대수명은 83.7세로 소득 하위 20%의 기대수명(77.6세)보다 6년이나 더 길다. 한마디로 부자가 더 오래 산다는 것이다. 2011년에 상영된 이라는 영화를 보면 돈으로 인간의 수명을 거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상위 1%의 부자들은 불로장생(不老長生)하고, 나머지는 고된 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런 영화 같은 현실이 우리 주변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하다.
넷째, 가계 재무상태가 적절치 못하다. 5070세대는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집단이다. 이 세대는 전쟁과 굶주림, 경제개발과 IMF 경제위기 등 롤러코스트와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축적한 자산은 액티브 시니어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물질적 토대가 되고 있다. 통계청 ‘가계금융조사(2016)’ 조사에 따르면, 50대의 자산은 4억4302만원, 부채는 8385만원으로 순자산이 3억5917만원이다. 60대 이상은 자산 3억6648만원, 부채 4926만원, 순자산 3억1722만원이다. 5070세대는 평균적으로 3억원 정도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액수다.
문제는 자산의 구성이다. 50대는 전체 자산의 69%가 부동산이고, 60대의 부동산 비중은 79.1%나 된다. 60대 이상의 경우 금융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금융자산은 1656만원에 불과하다. 전형적인 ‘하우스 리치(house rich)’, ‘캐시 푸어(cash poor)’ 현상이다. 자산은 많으나 현금이 없는 것이다. 자산으로부터 현금흐름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조그마한 유동성 위기에 봉착해도 파산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어떻게 하면 자산에서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을까? 5070세대의 가장 큰 숙제다.
다섯째, ‘노후난민’만은 피해야 한다. 지금은 5070세대가 액티브 시니어로서 충분한 생활기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80세 이후에도 그것이 그대로 유지되리란 보장은 없다. ‘노후난민’은 은퇴 후 자산이 계속 줄어드는 바람에 급기야는 의식주 같은 기본생활을 충족할 만한 자금조차 없는 노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돈과 수명의 경주에서 수명이 이기는 바람에 노후파산이라는 역설에 직면하고 만다. 적잖은 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수명과의 경쟁에서 돈이 지도록 만드는 원인은 뭘까? 자산관리 소홀, 의료비 부담, 자녀부양 문제 등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자산관리 소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요즘 같은 시대에 안전하다는 이유로 자금을 원금보장형 상품에 묻어두고 곶감 빼먹듯 빼먹으면 고갈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안전심리가 노후난민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셈이다. 일에서 은퇴했다고 투자활동까지 막을 내리면 곤란하다. 은퇴 이후에는 나를 대신해 돈이 일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은퇴 및 투자전문가인 노지리 사토시는 노후난민을 피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삶을 은퇴 전과 은퇴 후의 2단계로 구분하지 말고 3단계로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즉 ①직장생활로 ‘돈 버는 시기’, ②은퇴 후 투자를 통해 자산을 불리는 ‘자산 투자기’, ③투자활동을 끝내고 불린 자산을 느긋하게 소진하는 ‘완전 은퇴기’로 구성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돈을 쓰면서 불려나가는 ‘자산 투자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노지리 소장은 은퇴 후에도 20년 정도는 자산을 불려나간다는 생각으로 투자를 계속하고, 75세쯤에야 투자로부터 은퇴를 선언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2. 의료비 부담: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본적인 의식주 관련 생활비는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 의료비는 늘어나는 게 보통이다. 운동과 식이요법 등으로 건강관리를 해보지만 도적처럼 슬며시 찾아오는 것이 ‘노후 질병’이다. 게다가 꽤 큰돈까지 삼켜버린다.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1인당 월평균 진료비는 30만2904원으로 전체 인구의 1인당 월평균 진료비(9만9315원)보다 3배 이상 많다. 70세 이후 보건의료비 지출은 소비지출의 15.5%나 차지한다. 노인이 금융자산의 상당 부분을 보유하고 있어 노인 부국이라 불리는 일본에서조차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40년간 저축과 연금을 통해 노후를 대비했으나 배우자의 질병, 자녀에 대한 경제적 지원 등의 문제로 노후에 파산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 사회문제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후 의료비 지출은 일정연령이 되면 반드시 찾아온다는 점과 오래 살수록 위험이 급증하고 정도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3.자녀부양 문제: ‘73만7000원!’ 25세 자녀를 둔 부모가 한 달 자녀에게 쓰는 부양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성인 자녀를 둔 부모 10명 중 4명은 학교를 졸업했거나 취업, 결혼한 자녀를 계속해서 부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에는 자녀가 사회에 진출해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면 부모의 자녀부양 의무는 끝나고, 부모가 노인이 되면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선순환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요즘은 캥거루족, 부메랑족이란 단어가 유행할 만큼 부모가 성인 자녀를 돌보는 역부양 현상이 연출되고 있다. ‘자녀부양’과 ‘부모봉양’이란 ‘더블케어(double care)’ 현상에 직면해 있는 5070세대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 보인다.
눈부신 조명 아래 화려한 런웨이 위를 당당하게 워킹하는 모델을 보면 ‘나도 저렇게 폼 나고 멋지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골드스톤 그룹의 대표이자 시니어 모델로 활동 중인 김성훈(56)씨 역시 또래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곤 한다. 고맙고 즐거운 일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되고 노력할 것도 많다. 박수갈채를 받는 빛나는 겉모습 이면에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해온 그의 속사정 그리고 패션에 대한 애정을 들어봤다.
, 등 영화 속 영웅들은 평상시 유능한 회사 경영자이지만, 사건·사고가 생기면 슈트를 갈아입고 나타나 악당을 물리친다. 그들의 변신을 한눈에 알아보게 하는 것은 바로 패션. 화려한 망토나 로봇 슈트는 아니지만 김 대표 역시 패션을 통해 일상의 변화를 만끽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모습 중 하나였어요. 회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망토를 두르고 슈트를 입고 ‘부우웅’ 하고 나가서 악당들과 싸우는 영웅! 우연히 찾아온 시니어 모델의 기회이지만, 그런 판타지를 채우고 있죠. 옷을 갈아입고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섰을 때의 쾌감과 스릴이 정말 대단해요.”
2011년, 평소 준비성이 철저한 그는 다가올 인생 2막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인을 통해 ‘시니어 모델’에 대해 알게 됐고, 50세의 나이로 시니어 모델계에 입성했다. 여자 모델에 비해 남자 모델의 수가 극히 적은 시니어 모델들 사이에서 패셔너블하고 끼가 충만한 그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댄스스포츠를 10년 정도 배웠거든요. 그러다 보니 워킹이 자연스럽고 포즈를 취해도 선이 잘 살더라고요. 그 덕분에 패션쇼에서 메인 모델로 설 기회가 많았죠.”
탐나는 삶, 티 내지 않고 살기
자신의 관심사인 패션을 드러내면서 끼와 매력을 뽐낼 수 있기에 즐겁기도 했지만 우려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다. 그의 본업인 회사 경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활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회사의 대표로서 긴장하거나 엄격해야 할 때가 있는데 ‘우리 대표는 모델 한다고 일에 소홀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곤란하잖아요. 직원들에게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 내 즐거움만 생각할 수는 없죠. 또 경쟁업체 등에서 그런 부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 있으니 사생활에서도 행동에 주의하려 해요.”
회사 대표로서도 조심스러운 모습이지만,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려 한다. 화려하게 비치는 모델의 특성상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 자신의 즐거움을 드러내는 게 다른 이에게는 불편함이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다.
“처음 한두 번 모델로 설 때는 주변에 자랑도 하곤 했는데, 계속 그러니까 친구들도 반기는 표정이 아니더라고요. 내가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어엿한 회사 대표인 데다가 모델까지 하니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이 볼 땐 부러울 수도 있고, 약이 오를 수도 있겠죠.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모습을 드러내는 게 관계에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마음은 그게 아니라도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조용히 즐기고 신중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아내까지 그의 인생을 탐낸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의 모델 활동을 우려했던 아내가 자신도 시니어 모델로 무대에 서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것.
“집사람이 저한테 모델 활동 이전이랑 이후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람이 참 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표정이며 분위기가 훨씬 여유롭고 밝아졌다면서요. 특별히 피부 관리를 하거나 머리를 심은 것도 아닌데 내가 봐도 얼굴이 참 좋아졌어요. 그런 변화를 느낀 아내가 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무대에 나와 함께 서고 싶다는 거예요. 물론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있죠.”
최고의 패션 아이템은 ‘건강한 몸매’
어릴 적부터 패션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쇼핑이라고 한다. 시간이 나면 백화점이나 아웃렛에 들러 트렌드를 살피며 스트레스도 풀고 패션 감각을 키운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 중에는 해외 명품 패션 관련 분야도 있어 패션 트렌드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남다르다. 그런 그의 ‘패션 포인트’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포인트를 안 주는 게 포인트입니다. 꾸며보려고 욕심내다가 오히려 촌스럽고 어색해 보일 수 있거든요. 넥타이나 행거칩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포인트는 시계 정도로 하나만 살리고 나머지는 톤을 맞추는 정도로 마무리하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때와 장소에 맞게 연출하는 겁니다. 요즘 중·장년 대부분이 어디서든 등산복을 애용하잖아요. 저마다 개성과 매력이 다른데 등산복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산에 갈 때는 등산복을 입더라도 크루즈 여행을 갈 때는 드레스도 입어보고, 고궁 나들이 갈 때는 한복도 입어보고 그렇게 다양한 시도를 해야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데 도움이 돼요.”
그가 시도 중인 패션은 영화 의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 스타일이다. 슈트 버튼이 양쪽으로 나란히 있어 허리선이 드러나기 때문에 배와 등의 군살이 없어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다.
“제 패션 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스타일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완벽한 보디(body)예요. 몸매가 돼야 어떤 옷을 입어도 태가 나고 멋스럽거든요. 그래야 다양한 스타일에 도전할 때 자신감도 붙고 그러면서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되죠. 그러면 삶이 더 즐겁고 행복해져요. 물론 지금 내 몸매가 그런 상태는 아니지만, 오히려 목표가 있고 그것을 성취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면 더 즐거워지곤 해요. 자신만의 롤 모델이나 위시 리스트를 갖는 것도 중요하죠.”
새해부터는 운동과 식단 관리를 통해 꼭 ‘킹스맨 슈트’를 입겠다는 그는 원하는 옷을 입기 위한 노력이지만 육체적·정신적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에게 롤 모델은 누구냐고 물었다.
“영화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패셔니스타 닉 우스터 등도 롤 모델이라 할 수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배트맨이 가장 완벽한 제 롤 모델 아닐까요?”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지난 9월 29일부터 4일간 큰 춤판이 벌어졌다. 8개국 70개 댄스팀이 참가한 덤보댄스축제다. 이 춤판은 맨해튼 다리 밑,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덤보(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역을 문화의 중심지로 변신시킨 일등공신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축제를 뉴욕 5대 무용축제로 선정했고, PBS 방송은 올해 뉴욕의 5대 행사로 꼽았다. 이 춤판을 벌여온 주인공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예술감독 겸임). 뉴요커의 자랑인 덤보댄스축제는 김 단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고난과 눈물의 결정체다.
김영순 단장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댄스스쿨로 유학을 온 것이 미국생활의 출발점이었다. 세계 현대무용계의 신데렐라를 꿈꾸며 시작한 유학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굳게 마음먹고 준비한 유학이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일여자중고등학교에서 무용교사로 재직하면서 월급의 70%를 저축해 모은 유학 자금을 장춘동 국립극장 소극장(현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다 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국내 사상 최연소 단독 현대무용 공연이었고 ‘잔잔한 호수 위로 퍼덕이며 뛰어오르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당초 계획에 없었던 공연이었다. 김 단장은 40년 전 그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던 입학허가를 받고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거부를 당했어요.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젊은 여성이 미국에 눌러 살까 우려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멋진 공연을 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비자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공연을 하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자가 나왔다. 그런데 체재비는 고사하고 항공료조차 부족했다. 철도공무원인 아버지 김철주씨의 5남 4녀 중 셋째인 김 단장은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께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아 두 명을 미국까지 데려다주면 항공료를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8개월과 11개월 된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22시간 넘게 비행을 했다.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의 자그마한 방 한 칸을 댄스스쿨에서 알선해줬지만 아침식사를 포함해 주당 25달러인 숙식비와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하루 12시간 이상 무용 연습을 하면서도 베이글 하나로 견딜 때가 많았다. 때로는 밤늦게 돌아오다 너무 힘들어 남의 집 계단에 앉아 달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김 단장은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딸이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현모양처로 살기를 원하셨지 유학 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았어요. 딱 1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춤꾼이 되고 싶었으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기대까지 짊어지고 있었어요. 김포공항을 떠날 때 외할머니께서는 부적을 한 장 주시면서 엄마의 꿈을 대신해서 이루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를 극심한 생활고에서 구해준 것은 루돌프 누레예보 장학금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30 대 1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뉴욕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출연료였지만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80년, 경쟁률 300 대 1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욕 10대 명문 무용단인 제니퍼 뮬러 현대무용단 전속 단원으로 발탁되면서 그는 프로페셔널 댄서로 우뚝 서게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 중남미, 캐나다 등 세계 곳곳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검정머리 휘날리며 춤추는 동양의 신비한 무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에 9개월간 해외 공연을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뉴욕에 머무는 3개월은 트론댄스시어터(Throne Dance Theater) 같은 소규모 무용단에서도 활약을 했다.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할 정도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많은 댄서들 가운데 눈을 뗄 수 없는 댄서”라고 극찬했다.
1988년, 드디어 그는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한다. 하얀 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의 ‘화이트웨이브(White Wave) 김영순 무용단’이다. 하얀 파도는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의 무용단 창단은 실력과 명성과 인간관계를 모두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단장은 그 해 88서울올림픽 현대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국내 팬들에게 현대무용의 진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홍콩에서 단독공연을 할 때는 홍콩스탠더드 신문이 ‘춤추기 위해 태어났다(Born To Do It)’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춤을 전면에 소개했다. 신문 제목처럼 그는 타고난 춤꾼이었다. 6세 때 인근 무용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구소리에 이끌려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7세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해 호남예술제에서 1등을 차지했다.
무용단 운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 등 60여 가지의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이 ‘댄스의 영역을 뛰어넘은 새로운 예술세계 창조’라고 논평하는 등 주요 언론들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무용단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소호(SOHO)에 있던 스튜디오를 임대료가 저렴한 이스트 할렘으로 옮겼으나 70평 남짓한 스튜디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해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는 맨해튼 스튜디오가 상가로 바뀌면서 새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다. 소호에서 밀려난 가난한 예술인들이 몰려든 덤보 지역은 앞이 캄캄했던 그에게 축복의 땅이었다. 기업인 존 라이언(John Ryan)씨가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면서 25만 달러를 지원받아 이스트 강변에 100석짜리 무용 전용극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덤보댄스축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미술·패션쇼·음악·필름스크린·댄스 등 5개 예술 분야로 나눠 열리는 덤보아트축제의 이사진과 댄스 부문 기획을 담당했던 친구의 권유로 2001년 제1회 덤보댄스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사실 덤보아트축제는 ‘예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사업이 번창한다’는 부동산개발업체의 경영전략에서 출범한 축제다. 덤보 지역이 번창하자 다른 분야의 축제는 사라지고 댄스축제만 남아 뉴요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김 단장은 신예 안무가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면서 뉴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신념으로 댄스축제를 지켰다.
그는 여세를 몰아 2004년부터 쿨뉴욕(Cool New York) 댄스축제를, 2006년부터는 웨이브라이징시리즈(Wave Rising Series) 무용축제를 잇따라 개최했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다운타운 현대무용계는 김영순 단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나도 하기 힘든 페스티벌을 세 개나 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때부터 그는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축제를 통해 총 2600여 무용단과 1만3500명의 안무가들은 7만여 관객 앞에서 기량을 발휘했다. 창무회 & 김매자, 김윤정 프로젝트댄스, 장유경 무용단, 길섭무용단, 박신애, 정석순, 김정환과 박봄, 박정윤, 최성옥 메타댄스 프로젝트 등 수많은 안무가들이 그들이었다.
그는 현재 뉴욕시가 매년 수여하는 댄스·연기대상(Bessie Award)과 예술지원기금 무용 부문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그의 무용단은 3년 연속 뉴욕시 지원 대상 문화예술단체로 선정되는 등 공로와 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마티 마코위츠(Marty Markowitz) 브루클린 구청장은 수년째 덤보댄스축제가 개막되는 날을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의 날’로 공표하고 있다. 그의 공로는 곤경에 처했을 때 더 빛이 났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이스트 강이 범람해 극장이 침수 피해를 입자 온라인 성금이 답지했다. 루도 셰퍼(Ludo Scheffer) 드렉셀대학 교수는 상속 재산 중 상당액을 기부했다.
김 단장은 수많은 무대에 올라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2014년 한국계 안무가로는 처음으로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rooklyn Academy of Music, BAM) 무대에서 새 작품 을 성공리에 공연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뉴욕에는 링컨센터 등 굴지의 공연장이 즐비하지만 공연 대상 선정이 가장 까다로운 BAM이 화이트웨이브무용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링컨센터의 뉴욕공공도서관은 그의 공연을 촬영해 DVD로 영구 보관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은 세상 사람들이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멈출 수 없다. 자신의 무용단을 통해 끊임없이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국제댄스페스티벌을 잇따라 열어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걸작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은 요즘 인류 화합을 주제로 한 이라는 대형 작품을 새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일부는 이번 덤보댄스축제에서 선보였다. 작품이 완성되면 내년쯤 한국 팬들에게도 소개할 계획이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은 전용 공연장이다. 덤보 지역도 이제는 예술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임대료가 뛰어 브루클린 내 다른 지역을 열심히 물색하고 있다. 김 단장은 새 공연장을 임대할 경제적 여력은 없지만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이제까지 그런 믿음으로 험난한 무용인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왔고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라는 독보적 위치에 걸맞은 활약을 오늘도 펼쳐나가고 있다.
요즘 들어 뮤지컬 볼 기회가 많다. 오늘 관람한 공연은 정말 신바람 나는 노래와 춤의 향연이었다. 제목은 좀 생소한 다. 뮤지컬 티켓을 받아 들고서도 나는 ‘킹키부츠’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부츠라고 하니 구두일 것이라는 짐작만 했는데 카탈로그 사진을 보고서 ‘아-이게 킹키부츠구나’ 했다.
80센티미터의 길이에 강렬한 색상과 아찔한 높이의 킬 힐이 ‘킹키부츠’로 여장 남자들이 신는 부츠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라니 범상치 않은 구둣가게 이야기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게는 영화나 연극, 뮤지컬 공연을 같이 다니는 삼총사 친구가 있다. 이번엔 티켓 값이 무려 14만 원이나 했는데 할인 구매한 티켓이 4장이어서 삼총사 외에 동창을 한 명 더 초대했다. 공연 시작이 7시 30분이라 우리는 5시쯤 이태원 블루스퀘어 공연장 앞에서 만나 오랜만에 경리단 길도 걷고 맛있는 식사도 즐겼다.
시작 시간에 맞춰 공연장으로 가니 주말이어서 그런 건지 뮤지컬 배우들의 인기 때문에 그런 건지 객석이 빈틈없이 꽉 찼다. 얼마 전에 봤던 나 등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오늘 관람하는 는 줄거리를 전혀 알지 못해 더 흥미롭고 기대되었다.
스토리는 영국 노샘프턴에 있는 ‘프라이스 & 선 제화점’이라는 구둣가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주인공 ‘찰리’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구두공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구두만이 전부인 세계에서 자랐다. 찰리의 아버지는 고급 수제 남성화만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찰리는 여자 친구 ‘니콜라’와 함께 지겨운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런던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새로운 곳에서 짐을 풀기도 전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구두공장을 물려받게 된 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급스럽지만 유행에 뒤떨어진 수제 구두만 고집했던 아버지의 구두공장은 마구 밀려드는 저가 수입 제품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할 형편에 놓여 있었고 오랜 시간 함께 일한 공장 식구들도 해고해야 할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이때 똑똑한 여직원 ‘로렌’이 새로운 틈새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찰리는 망해가는 공장을 다시 일으킬 결심을 한다. 찰리가 아는 사람 중에는 유쾌한 여장 남자 ‘로라’가 있었다. 로라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찰리는 여장 남자들이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아름다우면서도 튼튼한 ‘킹키부츠’로 공장을 다시 일으킬 계획을 세운 뒤 로라를 구두 디자이너로 데려와 밀라노에서 열리는 패션쇼에 ‘킹키부츠’를 선보이려 한다.
그러나 여장 남자인 로라를 공장 사람들은 탐탁해하지 않았고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라는 공장 직원인 ‘돈’과 권투시합을 하게 된다. 사실 로라의 아버지는 권투선수였다. 자신을 남자답게 기르려고 어릴 때부터 권투를 가르쳤던 아버지 덕분에 로라는 권투를 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합 날 로라는 일부러 돈에게 져주었고 그걸 알게 된 공장 사람들은 로라를 좋아하게 된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킹키부츠’로 성공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주인공 찰리 역할은 탤런트 ‘이지훈’이 맡았고 로라 역할은 ‘정성화’가 맡아 열연을 펼쳤다. 정성화는 뮤지컬 에서 안중근 역으로 감동을 주더니 이번 작품에서는 여장을 하고 나와 관객을 즐겁게 해줬다. 특히 로라와 함께 여장 남자로 분장한 엔젤 팀 남자 배우들이 어찌나 예쁜지 나는 그들이 남자라는 사실을 극 중반에야 알았다. 6명의 엔젤 중에 예쁘긴 한데 어쩐지 남자 같은 이미지가 느껴져 옆자리 친구에게 “저기 두 번째 있는 사람은 남자인가봐.” 했더니 “다 남자야.” 해서 깜짝 놀랐다.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허벅지까지 오는 킬 힐의 ‘킹키부츠’를 신고 노래와 춤을 췄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다른 뮤지컬과 다르게 관객들이 소리도 지르고 손뼉도 치며 호응하는 모습이 매우 흥겨웠다. 나와 친구들도 마구 환호하며 신나게 관람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엔젤 팀의 여장 남자들이 객석을 돌아다니며 관객의 호응을 유도했다. 관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몸을 흔들며 손뼉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려서 돌아보니 예쁜 엔젤들이 지나가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도 하고 객석이 들썩일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배우들이 객석을 누비고 다니며 관객과 소통하는 모습은 끝까지 많은 감동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공연을 본 친구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랜만에 신나는 공연 봐서 좋았다며 고맙다고 했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유쾌하고 신나는 뮤지컬로 우정도 다지고 맘껏 즐거웠던 하루였다.
크루즈 여행의 현지투어로 로마를 갔다. 로마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많이 알려진 곳이다.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영화「로마의 휴일」의 배경이기도 하다. 2000년 가까이 보존되어 있는 콜로세움이 눈에 들어 왔다. 이곳은 독립하기 위해 로마 지배에 반역한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끌려 온 포로들에 의해 8년에 걸쳐 세워졌다고 한다. 포로들의 피와 땀의 결실물이다. 시민의 불평과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사용된 원형경기장이다. 그곳에서 기독교인들을 신앙 때문에 맹수의 밥으로 희생되었고 검투사는 시민의 오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맹수와 대결하였다. 관람하고 싶었으나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입장을 포기했다. 대신 로마가 세워진 언덕과 시가지를 관람했다.
시가지에는 로마의 옛 건물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파리의 개선문이 로마의 개선문을 모방한 것이고, 시저는 러시아 쟈르, 나폴레옹, 히틀러가 닮고 싶어한 우상이었다. 그는 모든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전쟁의 신이라고 한다. 로마는 도로, 법률, 건축에서 실용적인 모범을 보였다. 길에 남겨진 단단한 돌에서도 실용성을 엿볼 수 있었다. 로마는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보존된 유적과 유물과 거리를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수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논리가 적용되지 않았다니. 옛 건물과 유적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것에 시민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독재자 무솔리니조차도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고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 문화의 가치를 인식하는 시민의 힘이 전통 보존의 토대가 되었다고 여겨졌다. 오래 된 건물에 진열되어 있는 유명 회사의 명품은 왠지 가치가 더 있게 느껴진다. 문화의 가치에 명품의 가치가 혼합되어 상승효과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영화 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데이트 하던 계단이 보인다. 이곳에서 유명 패션쇼가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되었다고 한다. 관광객이 오드리 헵번을 흉내내어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너무 많이 걸어다녀 흘린 크림으로 인해 파손되어 현재는 보수 중이었다. 조금 더 가면 분수 중 최고의 걸작이자 가장 인기 있는 분수인 트레비 분수가 나온다. 세 갈래 길(Trevia)이 합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동전을 던졌다. 분수를 뒤로 한 채 오른손에 동전을 들고 왼쪽 어깨 너머로 1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고, 2번 던지면 연인과의 소원을 이루고, 3번을 던지면 힘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영화 에서 오드리 헵번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이곳을 한층 낭만적인 장소로 기억하게 한다.
로마는 문화유적으로 인해 천문학적 관광수입을 얻는 반면 상당 부분을 문화재 보존에 재투자한다. 서구화, 근대화를 위해 문화재와 유물을 포기한 나라들과 대비가 되었다. 전통과 문화는 뿌리이다. 이를 바탕으로 창조가 가능하다. 행복은 물질이 아닌 문화적인 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인 풍요는 어느 정도 이상 되면 행복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이스털린 역설이 있다. 문화의 시대에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