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센티미터의 길이에 강렬한 색상과 아찔한 높이의 킬 힐이 ‘킹키부츠’로 여장 남자들이 신는 부츠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라니 범상치 않은 구둣가게 이야기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게는 영화나 연극, 뮤지컬 공연을 같이 다니는 삼총사 친구가 있다. 이번엔 티켓 값이 무려 14만 원이나 했는데 할인 구매한 티켓이 4장이어서 삼총사 외에 동창을 한 명 더 초대했다. 공연 시작이 7시 30분이라 우리는 5시쯤 이태원 블루스퀘어 공연장 앞에서 만나 오랜만에 경리단 길도 걷고 맛있는 식사도 즐겼다.
시작 시간에 맞춰 공연장으로 가니 주말이어서 그런 건지 뮤지컬 배우들의 인기 때문에 그런 건지 객석이 빈틈없이 꽉 찼다. 얼마 전에 봤던 <마타하리>나 <42번가의 기적> 등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오늘 관람하는 <킹키부츠>는 줄거리를 전혀 알지 못해 더 흥미롭고 기대되었다.
스토리는 영국 노샘프턴에 있는 ‘프라이스 & 선 제화점’이라는 구둣가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주인공 ‘찰리’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구두공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구두만이 전부인 세계에서 자랐다. 찰리의 아버지는 고급 수제 남성화만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찰리는 여자 친구 ‘니콜라’와 함께 지겨운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런던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새로운 곳에서 짐을 풀기도 전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구두공장을 물려받게 된 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급스럽지만 유행에 뒤떨어진 수제 구두만 고집했던 아버지의 구두공장은 마구 밀려드는 저가 수입 제품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할 형편에 놓여 있었고 오랜 시간 함께 일한 공장 식구들도 해고해야 할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이때 똑똑한 여직원 ‘로렌’이 새로운 틈새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찰리는 망해가는 공장을 다시 일으킬 결심을 한다. 찰리가 아는 사람 중에는 유쾌한 여장 남자 ‘로라’가 있었다. 로라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찰리는 여장 남자들이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아름다우면서도 튼튼한 ‘킹키부츠’로 공장을 다시 일으킬 계획을 세운 뒤 로라를 구두 디자이너로 데려와 밀라노에서 열리는 패션쇼에 ‘킹키부츠’를 선보이려 한다.
그러나 여장 남자인 로라를 공장 사람들은 탐탁해하지 않았고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라는 공장 직원인 ‘돈’과 권투시합을 하게 된다. 사실 로라의 아버지는 권투선수였다. 자신을 남자답게 기르려고 어릴 때부터 권투를 가르쳤던 아버지 덕분에 로라는 권투를 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합 날 로라는 일부러 돈에게 져주었고 그걸 알게 된 공장 사람들은 로라를 좋아하게 된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킹키부츠’로 성공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주인공 찰리 역할은 탤런트 ‘이지훈’이 맡았고 로라 역할은 ‘정성화’가 맡아 열연을 펼쳤다. 정성화는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 역으로 감동을 주더니 이번 작품에서는 여장을 하고 나와 관객을 즐겁게 해줬다. 특히 로라와 함께 여장 남자로 분장한 엔젤 팀 남자 배우들이 어찌나 예쁜지 나는 그들이 남자라는 사실을 극 중반에야 알았다. 6명의 엔젤 중에 예쁘긴 한데 어쩐지 남자 같은 이미지가 느껴져 옆자리 친구에게 “저기 두 번째 있는 사람은 남자인가봐.” 했더니 “다 남자야.” 해서 깜짝 놀랐다.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허벅지까지 오는 킬 힐의 ‘킹키부츠’를 신고 노래와 춤을 췄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다른 뮤지컬과 다르게 관객들이 소리도 지르고 손뼉도 치며 호응하는 모습이 매우 흥겨웠다. 나와 친구들도 마구 환호하며 신나게 관람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엔젤 팀의 여장 남자들이 객석을 돌아다니며 관객의 호응을 유도했다. 관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몸을 흔들며 손뼉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려서 돌아보니 예쁜 엔젤들이 지나가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도 하고 객석이 들썩일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배우들이 객석을 누비고 다니며 관객과 소통하는 모습은 끝까지 많은 감동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공연을 본 친구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랜만에 신나는 공연 봐서 좋았다며 고맙다고 했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유쾌하고 신나는 뮤지컬로 우정도 다지고 맘껏 즐거웠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