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던 일과였다. 저녁 종합뉴스가 끝나고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 그날의 경기들을 정리해주는 스포츠 뉴스. 수십 년간 그랬듯이 그날도 놓치지 않고 TV 앞에 있었다. 무심코 바라보던 화면에서 머릿속을 번쩍이게 한 소식이 한 줄 지나갔다. 그는 그때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걸어보자”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푸른 잔디 위 다이아몬드에서 땀흘리는 선수들과 함께하는 일. 어쩌면 평생 기다려왔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국내 1세대 프로선수 공익에이전트 이창명(李昌明·55) 씨의 이야기다.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군산상고, 선린상고 같은 야구 명문 고교들이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부터 야구에 푹 빠져 있었죠. 낮 경기가 있는 날이면 수업 중에도 리시버(이어폰)를 한쪽 귀에 꽂고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고향과 모교가 경기가 열리던 서울 동대문운동장이나 부산 구덕야구장과는 멀어서 저의 유일한 낙은 중계방송을 듣는 것뿐이었죠.”
그렇게 야구에 빠져 있던 까까머리 소년. 하지만 야구와 관련한 일은 할 수 없었다. 운동도 곧잘 했고, 하고 싶은 열망은 컸지만 당장 먹고사는 일이 먼저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대학에 진학하고 평범한 회사원이 되는 길을 걸었다. 그가 LG금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야구와의 인연은 멀어지는 듯했다. 그래도 그는 야구를 향한 시선을 놓치 않았다. 마음은 늘 그라운드에 있었다.
“야구 중계는 가능한 한 놓치지 않고 봤어요. TV와 라디오 속 야구에 푹 빠져 살았죠. 생활이 바쁜 탓도 있었지만 리플레이를 통해 자세히 볼 수 있는 중계가 더 좋았어요. 신문도 3대 스포츠 신문으로 꼽히는 매체의 모든 기사를 봐야 직성이 풀렸죠.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관련 기록이나 경기장 소식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신문에만 의존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다시 시작된 야구와의 인연
시즌의 모든 경기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인생에도 고비는 있었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듯 새 직장을 구해야 하는 상황은 위기가 된다.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 그는 다른 퇴직자들처럼 자영업을 꿈꿨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고, 취직을 하기도, 창업을 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스포츠 뉴스를 보는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공인선수대리인을 최초로 모집한다는 기사가 떴어요. 이거다 싶었죠. 야구에 대한 상식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도 있었고, 늘 동경했던 그라운드 주변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더라고요.”
공인선수대리인은 말 그대로 선수에게 필요한 여러 일들을 공인된 자격을 갖춰 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연봉계약이나 이적협상 등 주요 계약뿐만 아니라 훈련이나 출전 등 구단 내 생활까지 도움을 주기도 한다. 또 미디어 노출이나 광고계약 등 경기 외 활동에 대한 관리도 맡는다.
“늦깎이 공부가 쉽지 않았죠. KBO의 규약과 리그 규정 등을 달달 외어야 했고, 민법과 도핑 관련 규정까지 숙지해야 했으니까요. 왜 나이 들어 하는 공부를 물 위에 글씨를 쓰는 것에 비유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자신이 어려울 때 노사발전재단 서울 서부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가 도움이 됐다고 이 씨는 덧붙인다. 이전 직장에 취직이 될 때도, 어엿한 에이전트로 거듭나는 과정에서도 자기소개서나 명함을 준비하는 소소한 일까지 컨설턴트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저연봉 프로선수 위한 대리인 되고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바로 한국프로스포츠협회 공익에이전트 자격 획득에 도전한 것. KBO 공인선수대리인과 한국프로스포츠협회의 공익에이전트 관계를 쉽게 설명하면 국선 변호사를 떠올리면 된다. KBO의 공인선수대리인 자격이 ‘변호사 자격’과 유사하게 선수 대리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자격 증명이라면, 한국프로스포츠협회의 공익에이전트는 변호사 비용을 부담할 수 없는 이들이 선임하는 ‘국선 변호사’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에이전트 선임 비용이 부담스러운 저연봉 프로선수를 대리하면, 그 수임료는 한국프로스포츠협회에서 부담한다. 비용은 계약을 직접 대리했을 때와 컨설팅만 제공하는 경우에 따라 차등을 둔다. 연봉 5000만 원 미만의 선수가 대상이다. 최근 선발된 공익에이전트는 총 10명. 이 중 KBO의 공인선수대리인 자격을 보유한 이는 이 씨를 포함해 5명에 불과하다. 이제 제도가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이들은 이번 겨울 선수 확보에 나서게 된다.
“문제는 선수 출신이 아니다 보니 선수를 만날 기회가 적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많은 시니어라는 게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해요. 회사에서 바이어를 만나거나, 하청 업체와의 관계도 겪어봤고, 직원들 연봉계약도 해봤으니까요. 협상능력만큼은 오히려 낫다고 생각해요.”
올겨울 그는 누구보다도 바쁜 스토브리그를 치를 것 같다. 뜨거운 동계훈련을 겪을 선수 중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인연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 선수들은 아무래도 에이전트 선임에 부담이 있을 수 있죠. 구단 눈치를 보는 입장에서 누군가를 내세운다면 자칫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에이전트의 역할은 분명히 있습니다. 선수 대신 구단에 전하고픈 이야기를 하고, 반대로 차마 선수에게 말 못하는 문제들은 대신 접할 수 있으니까요. 이 과정을 통해 선수를 성장시키고 보람을 찾아가려 합니다. 언젠가는 꼭 미국 메이저리그에 선수를 진출시키는 에이전트가 되고 싶습니다.”
이름에 불꽃 섭(燮) 자가 있어 한화에 계시냐는 시답잖은 농담에 그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웃음이 만들어낸 얼굴의 깊은 주름이 마치 거대한 지문처럼 보인다. 역동적인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경제성장을 두 손으로 이뤄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지문 말이다. 군인이 연상될 정도로 흐트러짐 없는 체구와 자세에서는 자부심도 느껴진다. 플랜트 오퍼레이터 손성섭(孫成燮·63) 씨를 만나 현장 이야기를 들어봤다.
플랜트 오퍼레이터란 직종은 일반인에게 생소할 수 있다. 플랜트는 생산시설이나 공장을 통칭하는 단어로, 플랜트 오퍼레이터는 이곳에서 제품 생산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각종 장비를 작동시키고, 생산 과정에서 온도나 압력 등 공정의 상태를 점검하고 확인하는 일을 한다.
그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충남 서산의 대산석유화학단지에 위치한 한화토탈로, 15개 단위공장으로 구성된 석유화학·에너지 생산기지다. 지난해 매출이 9조 원이 넘는 거대 시설. 우리 주변에서 널리 쓰이는 플라스틱의 원료인 합성수지나 화성제품, 에너지 제품을 생산한다.
이곳에서 만난 손 씨는 평생을 석유화학제품 공장에서 일해온 장인이자, 이제 입사 한 달 남짓 된 신입사원이라는 상반된 두 개의 명찰을 가지고 있다. 그는 2013년 말 대한유화주식회사에서 정년퇴직 후 두 번의 단기계약 직장을 거쳐 지난 10월 1일 계약직으로 입사해 현역생활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현재 직급은 과장이다.
38년간 석유화학 공장에서 땀흘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우체국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월급이 너무 적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직장을 찾다가 1980년 한이석유주식회사(S-OIL의 전신)에 입사한 것이 석유화학 공장과의 인연이 됐어요. 그리고 1990년에 대한유화주식회사로 이직해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근무했죠.”
사실 정년퇴직 후 현역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은 그의 계획이 아니었다. 평생을 현장에서 땀흘리며 살았으니 퇴직 후에는 좀 유유자적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그래서 노사발전재단 울산센터를 통해 컨설팅도 받았다.
“컨설턴트와 상담한 것이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이 됐어요. 은퇴 후의 삶에 대한 많은 조언도 듣고요. 퇴직 후 소개로 포스코엔지니어링 제안을 받아 1년 정도 태국 마타풋에 있는 플랜트에서 근무했는데, 당시 계약 과정에서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었지만 고생한 것 빼고는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태국인 현장 직원들과 짧은 영어로 소통해야 했지만 지내다 보니 정도 많이 들었죠. 헤어질 땐 서로 눈물을 보이기도 했어요. 우리 기술로 지은 공장을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 보람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
플랜트 오퍼레이터가 어떤 일인지 묻자 그는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현장을 수시로 순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육체적으로 아주 고된 일은 아닙니다. 다만 공정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온도와 압력은 정상 범위인지 가스가 새지는 않는지, 수시로 점검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해요. 특히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고입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나뿐만 아니라 동료도 다치고 회사에도 큰 손해를 입히게 되니까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몸보다 장비를 우선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정년을 맞이한 것은 큰 행운이자 축복이죠.”
나이와 경험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젊은 직원들과의 관계는 어떨까? 서로 서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됐지만, 그는 전혀 문제없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젊은 직원들의 업무 태도가 정말 열성적이에요. 내가 젊었을 때 이들처럼 공부한 적이 있었나 의문이 들 정도로 지식 습득에도 열심이고요. 그래서 내가 나서서 말을 보태기보다는 직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 따르려고 노력해요. 특히 언행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에요. 내가 먼저 존칭을 써야 상대에게 대우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렇게 현장의 젊은 근로자들을 사려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아들의 존재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아들도 현재 S-OIL 공장에서 플랜트 오퍼레이터로 근무 중이다. 비록 회사는 다르지만, 대를 이어 석유화학산업에서 활약하고 있는 셈이다.
“아들이 입사시험을 통과해 합격통보를 받은 날이 태어나 가장 기뻤던 날 중 하나일 겁니다. 하늘을 날 것같이 기뻤어요.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선배로서 안전이나 업무, 조직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게 저의 또 다른 즐거움 중 하나가 됐어요.”
은퇴 후에도 주변 도울 수 있어야
최근 그의 즐거움이 또 하나 늘었다. 바로 국궁(國弓)이다. 2012년 정년퇴직을 준비하면서 취미를 하나 정도는 갖고 있는 게 좋겠다 생각하고 찾다가 발견했다. 145m 떨어진 과녁에 활을 날리는 과정도 즐겁지만,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정신수양과 심신단련이 더 매력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짧은 경력이지만 실력이 좋아 지난해에는 하늘이 내려준다는 ‘15시 15중’(15발 모두 과녁에 명중하는 것)을 두 번이나 해 2개 전국대회에서 각각 2등과 3등 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정년 후에도 바쁘게 현역생활을 이어나가는 그에게 이상적인 은퇴생활에 대해 물었다. 그는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을 첫 번째 덕목으로 꼽았다.
“퇴직 3년 전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지금 직장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도 아직은 미정이에요. 여전히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도 3가지 목표는 있어요. 건강과 은퇴 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 그리고 남을 돕고 살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생활이 너무나 만족스러워요. 오랜 경력을 통해 쌓아온 지식을 썩히지 않고 능력을 발현하며 살 수 있으니까요. 다른 은퇴자들에게도 가능하면 쉬지 말고 일하면서 살라고 권하고 싶어요.”
하늘과 구름, 강물과 바람소리, 햇살, 새들의 합주, 강변 단애, 그리고 숲 사이 오솔길. 있을 게 다 있다. 언제나 거기에 있어온, 본래 그러한 채로 있는, 자연스러운 자연의 저 완전한 충만. 그래서 아름답고, 그렇기에 신성하고, 그럴 수밖에 없도록 진실하다. 사람 안엔 결핍된 수려한 맑음과 밝음으로, 그지없이 온전한 자연다운 푸른 아우라를 뿜으며 순수의 향연을 펼친다.
모두가 청량산의 식솔들이다. 저만치서 우뚝한 청량산의 모성을 젖줄 삼아 태어나거나 성장한 낙동강과 야산들과 나무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어우러져 풍경의 절창을 빚어낸다. 청량산이라 하면 생각나지 않는가? 청량산인(淸凉山人)이란 호를 쓰며 줄곧 청량산을 사랑한 사람,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냈던 공부벌레, 천 원짜리 지폐의 인물 도안에 불려나온 영감님. 바로 퇴계 이황(1501∼1570)이시다.
이 숲길에 ‘퇴계 오솔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퇴계가 거닐었던 길이어서다. 퇴계의 시구(詩句)에서 따 지은 ‘예던길’, 혹은 ‘녀던길’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청량산 자락에서 모태를 박차고 나온 퇴계는 평생 청량산을 애지중지했다. 끝내는 청량산 자락에 묻혔다. 그는 소싯적부터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기력이 쇠한 노년에도 느릿느릿 산언저리를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그러하니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숲길에 퇴계의 숨결이 감돌 수밖에. 퇴계가 내딛었던 발길에 내 발자국이 포개지고 있을 테니 홍복(洪福)이다.
퇴계 오솔길은 퇴계 종택에서부터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길 50여 리 구간에 걸쳐 있다. 도산면 가송리 농암종택 일대의 강변 오솔길이 단연 백미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34세 연하의 퇴계와 격의 없는 교유를 했다지. 서로의 거처를 방문해 즉흥시를 주고받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덧없는 세사와 뜻 깊은 자연을 교감했다. 이 연상연하 커플의 교제는 문사들답게 낭만적이었다. 실천적 도학자들답게 준절했으며, 산천 애호가들답게 관조적이었다.
숲길에 강물소리 들이친다. 맑고 세차고 기찬 물줄기와 고요하게 좌정한 나무들의 숲길이 동행을 하니 절경이다. 숲에서 강으로, 강에서 숲으로 불어제치는 바람의 거친 애무에 산천이 부르르 통째 몸을 떤다.
가을 들꽃들로 오솔길이 밝다. 핀 꽃술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억새, 청초해서 애틋한 쑥부쟁이, 살랑살랑 몸 흔들어 향을 뿜는 산국(山菊). 저 멀리 도시는 소음과 매연의 저주에 붙들려 있지만 이 숲길엔 가을꽃 향 그윽하니 이방(異邦)이다. 숲길 어간의 쉴 만한 자리에 이르자 물가에 도드라진 너럭바위가 보인다. 퇴계가 그 이름을 지었다는 경암(景巖)이다. 자연을 통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궁구(窮究)를 일삼았던 퇴계는 이 바윗덩어리를 보고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지었다. 천년을 변함없이 흐르는 물과 부평초처럼 덧없는 인간사를 빗댄 시를.
길을 돌아 나와 고산정(孤山亭)에 닿자 다시 시야에 가득 차오르는 찬연한 풍광! 가슴이 두근거린다. 강물과 단애(斷崖)와 산이 합작한 풍경의 드라마를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난해한 세상 속에도 개결한 세상이 있었구나! 풍경의 매혹에 고단한 인생을, 별 볼 일 없는 삶의 남루를 돌아보게 된다.
고산정은 퇴계의 제자 금난수(1530~1604)가 세운 정자다. 퇴계는 자주 고산정을 찾아 노닐었다. 주변 일대의 가경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이 누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시를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을 퇴계의 심취한 모습이 환(幻)처럼 정자에 아롱진다. 이곳에서 수많은 시편을 썼다 하니 말이다.
나는 퇴계를 뵌 적이 없고, 고인(古人) 역시 나를 알 바가 없다. 그러나 유려한 숲을 서성이며 종일 퇴계를 만난 것만 같다. 퇴계를 생각하면 왜 심장이 뛰나. 그는 자신의 기질이 산야(山野)와 닮았다 했다. 독일의 거장 괴테가 울고 갈 만한 학문의 숲을 쌓았다. 그러고서도 겸양으로 일관했다. ‘학문의 길은 구할수록 멀었다’고 토로하지 않았던가. 퇴계의 풍모는 임종 때 더욱 빛을 발했다. 국장(國葬), 그런 거 부질없다.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는 그리 당부했다. 이승을 떠나는, 이토록 가뿐한 행보를 본 적이 있는가?
탐방 Tip
농암종택 주차장에 주차하고 농암종택, 경암, 학소대, 고산정을 답사한다. 평평한 강변 숲길이 걷기에 좋다. 등산으로 벽력암까지 오르면 강물 굽이치는 통쾌한 산경(山景)이 저 아래에 전개된다. 퇴계 오솔길 인근엔 도산서원, 퇴계종택, 퇴계묘소가 있다.
과거엔 필요한 지식은 전수조사해 모조리 공부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새로운 지식이 업데이트되는 요즘, 박형주(朴炯柱·54)아주대 총장은 지식의 시대를 넘어 통찰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방대한 정보 중에서 유의미한 결론을 끄집어내고 취사선택하는 통찰력이 중요하다는 것. 나아가 이러한 통찰의 시대를 지나 ‘연결의 시대’가 다가오리라 예측했다. 그는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닌 ‘잘 배우는 사람’이 살아남는 미래에 대해 ‘배우고 생각하고 연결하고’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박 총장은 ‘연결의 시대’에는 각종 전문지식으로 무장했다는 자신감보다는 살아가며 그때그때 필요한 지식을 학습하는 유연함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런 점에서 특정 분야의 전문가보다는 보편적인 사람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책을 통해 미래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두고 어른 세대가 함께 고민해보길 바랐어요. 우리가 젊은 시절엔 대학만 나오면 어느 정도 취업이 보장됐고, 한 분야에 오래 종사할 수 있었죠. 이제는 학교에서 배운 전공만으로 평생 먹고 사는 시대는 지났다고 봐요. 뭐든 금세 옛 지식이 되어버리거든요. 때문에 전처럼 한 우물 파는 건 무모한 거예요. 요즘은 기업에서도 특정 부서가 필요성이 적어지면서 축소되거나 완전 새로운 분야로 대치되기도 하죠. 다양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들을 연결할 줄 알아야 자기 분야가 대세에서 물러나도 다른 분야로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우리 시대 중장년의 경우 수십 년을 한 분야에 종사하다 은퇴한 경우가 적지 않다. 박 총장의 말대로라면, 100세 시대 노후준비를 위해 재취업을 고민하는 이들이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인생 이모작, 삼모작이라는 말들 많이 하잖아요. 어떤 일을 몇십 년 해왔는데 그 분야가 예전보다 덜 중요해지거나, 파이가 적어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예전처럼 ‘내가 하던 일 평생 하다가 은퇴할 거야’라는 생각이 이젠 안 통하는 거예요. 결국 원하지 않더라도 커리어 체인지는 앞으로 많은 사람의 인생에서 일어나겠죠. 과거보다 대학 평생교육원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기존 취미 개념의 문화교양 강좌에서 제2직업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진입의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해요. 최근 아주대학교를 포함한 많은 대학에서 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꼰대로부터 탈피하는 대화의 프레임
소위 옛날 방식으로 젊은 사람에게 고리타분한 말을 하는 시니어를 일컬어 ‘꼰대’라고 부른다. 박 총장은 이러한 꼰대 마인드는 현시대 패러다임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이나 직관에 따라 충고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진단했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을 앞두고 있을 때, 본인들의 젊은 시절 경험을 토대로 조언해요. 가령 무작정 공부 잘하면 의대 가라고 하잖아요. 앞으로는 원격 의료기술 등의 발달로 예전보다 병원에 가는 횟수가 줄어들 겁니다. 물론 병원 방문자가 줄어든다고 의사가 사라진다는 말은 아녜요. 그만큼 연구를 하는 의사가 늘어날 거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하루에 많은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를 유능하다 하지만, 미래에는 치료법을 개발하거나 환자와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능력이 의사의 소양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이렇게 계속 직업의 속성과 내용이 바뀌고 있죠. 아직 어린 자녀들이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면 10년, 15년 뒤인데 직관만으로 조언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박 총장은 대학 진학이나 취업에 대해 자녀와 의논할 때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 부모 세대의 조언은 효과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이러한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합리적 사유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다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끊임없는 사유의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론에 다다르는, 즉 합리적 사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서로 납득할 수 있는 데이터를 통해 결과를 끄집어내는 건 모든 세대에게 통하는 방식이에요. 또, 서로에게 접점이 생기는 유일한 방법이죠. 이러한 프레임을 통해 세대 간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봐요. 기본 데이터가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과거의 데이터를 갖고 대화를 하면 소통이 안 되는 거죠.”
박 총장은 기성세대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실수해도 괜찮다’는 문화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프랑스 교육을 모범사례로 들었다.
“프랑스식 수능 ‘바칼로레아’는 나폴레옹 시대 때 만들어져 200년이 넘은 제도인데, 100% 서술형 평가입니다. 답이 틀리더라도 풀이 과정에서 부분 점수를 주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 문제에 접근할 수 있어요. 그에 반해 우리는 객관식, 단답형 평가이기 때문에 모험을 했다가 실수로 답이 틀리면 손해를 봐요. 즉, 모험이 리워드를 주는 게 아니라 패널티를 주는 셈이죠. 겉으론 모험심 강한 아이들로 기른다고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은 거예요.”
그는 프랑스의 교육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이 한 가지 더 있다고 했다. 바로 12학년(고등학교 3학년) 때 철학 과목을 가르치는 방침이었다.
“프랑스는 대학 진학률이 낮은 편이라 대부분 학생에겐 12학년이 마지막 교육 과정이에요. 그때 철학을 가르치죠. 그렇게 중요한 과목이라면 왜 1학년 때부터 진작 가르치지 않는지 의아했는데, 그 이유를 들으니 납득이 가더군요. 12학년이 되기 전까지 아이들은 한국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수학, 과학, 역사 등 정규 수업 과정을 거치죠. 공부하다가 어려우면 좌절도 하고, 내가 이걸 왜 배워야 하냐며 짜증도 내요. 그 고달픈 시간의 끝에 피니싱터치, 즉 화룡점정을 철학이 찍어줘요. 철학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과목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 그것이 우리 세계관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게 되죠. 배움의 이유를 깨닫게 해주는 겁니다.”
유연성으로 키우는 문제해결력
지난 과정을 겪기 전에는 철학을 배워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끝나기 때문에 미리 가르치지 않는단다. 박 총장은 프랑스 아이들이 10여 년 동안 배운 것들을 철학 과목을 통해 하나의 스토리로 완성한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특별한 계기나 연관성이 없어 보이던 것에도 관심을 두다 보면 언젠가 그것들이 꿰어지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그는 여러 분야를 연결하는 능력과,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유연성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살다 보면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죠. 난제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분야의 방식을 가져오는 겁니다. 이 분야에서는 어렵지만 엉뚱한 분야에서는 쉬운 해결책이 있기도 해요. 여러 영역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있어야 재빨리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연성은 다양한 분야에 대해 깊지 않더라도 꾸준하게 호기심을 유지하는 데서 길러져요. 분야를 편식하지 않고 잡독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인터뷰 내내 “여러 우물을 파야 한다”고 강조한 박 총장. 수학자로서 한 우물을 파고 있는 듯 보이는 그가 현재 파고 있는 또 다른 우물은 무엇일까?
“물론 수학에 대한 사랑은 유지하겠지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빅 데이터나 인공지능 문제에 기여할 기회를 찾고 싶어요. 실제 세상의 많은 일을 해결하는 데 수학이 유용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의사들과 함께 의료 데이터를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도 하죠. 수학과 유관하면서도 다른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참여하다 보니 제가 하는 일의 영역이 더 넓어지고 있다는 걸 느껴요.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연결인데, 앞으로도 더 활발하게 여러 우물을 파볼 계획입니다.”
또 다른 느낌의 에너지였다. 붓이 물 안에서 살랑, 찰랑. 물 묻은 붓이 물감을 만나면 생각에 잠긴다. 종이에 색 스밀 곳을 물색한다. 한 번, 두 번 종이 위에 붓이 오가면 색과 색이 만나고 교차한다. 파고, 풀고. 수백, 수천 번 고민의 흔적에 마침표를 찍으면 삶의 향기 드리운 수채화 한 점이 생명을 얻는다. 수채화 그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김재열 교수의 제자 모임 ‘수연회’를 찾아갔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각자의 시선으로 색감 물들이는 이들에게는 잔잔한 어울림과 따뜻함이 있었다.
수채화를 그리는 모임 ‘수연회’
“2004년쯤 수채화교실의 인터넷 카페를 만들려고 보니 대표할 이름이 없는 거예요. 마침 그때 KBS2 드라마 ‘겨울연가’ 인기가 일본에서 대단했어요. 일본에 있는 친구가 드라마 촬영 장소를 그려서 책을 만들자고 해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릴 때였습니다. 그래서 ‘수채화연가’라고 이름을 지었고 지금의 수연회가 됐습니다. ‘수채화를 사랑하는 모임’. 자연스럽게 예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지난 9월 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가온갤러리에서 열린 ‘2018 한·일 수연회 아카데미전’에서 밝은 얼굴의 김재열 교수를 만났다. 홍익대학교에서 건축미술을 전공하고 1980년대 이름을 날렸던 주식회사 보루네오가구 임원으로 정년퇴임한 김재열 교수. 현재 홍익대학교 문화예술 평생교육원을 비롯해 다양한 예술교육 현장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림 그리는 것에만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솜씨를 세상에 알리고 보여주기 위해 매년 이렇게 전시회를 열고 있다. 32년 전 업무차 만났던 일본인 친구 우에노 히로시(上野 博) 첼시아트아카데미 대표는 평생을 함께하는 그림 친구로 꾸준히 교류 중이다. 전시장 안에는 김재열 교수와 제자 45명, 우에노 대표와 제자 18명의 연합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한·일 양국 두 스승과 제자들의 교류 전시회는 올해로 7회째로 수채화 총 64점이 전시됐다. 내년에는 일본에서 한·일 연합 전시를 할 예정이다. ‘나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치러진 이번 전시회에서는 양국 제자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달리던 도시인, 느린 삶에 눈뜨다
수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직업군도 나이도 다양하다. 30대부터 80대까지 전·현직 교사, 퇴직 공직자, 주부, 작가, 제빵 경영인 등이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모였다.
“선긋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림을 잘 모르던 사람도 함께 그리다 보면 실력이 늘어요. 퇴직한 분들도 오십니다. 그림 한 번 그려본 적 없는 분도 있고요. 다들 용기내서 들어오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매력이 있어서 수채화 속에서 이들은 낭만을 즐기는 것일까?
“수채화가 다시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하더라도 관광지에서 사진만 찍고 끝내지 않아요. 느리게 여행하고 대상을 천천히 봅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남겨오면 더 좋잖아요. 그게 바로 ‘어반스케치(urban sketch)’, 즉 스케치 활동을 하며 도시기행을 하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인생을 담는 작업이기에 시니어들에게 더 없이 다 필요하다고 김재열 교수는 말했다.
“시니어가 ‘고희연’ 같은 잔치 대신 전시회를 열었으면 합니다. 작년에 파킨슨병으로 더는 그림을 못 그리는 회원 한 분이 금혼식과 함께 전시회를 했어요. 도록을 만들면서 옛 사진도 넣어 만들었더니 좋아하더군요. 특히 전시회 도록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장담 못해요. 언제 아플지 모르잖아요. 그림과 기록은 남잖아요. 잔치 대신 전시회! 이런 캠페인을 벌이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화실에서 만난 수연회 사람들
김재열 교수의 화실에서는 매주 금요일에 5명의 제자들이 모여 그림을 그린다. 전시회에서 그림 관람을 하고 방문한 화실에는 수연회원 4명이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시장에 인상적인 바게트 그림을 출품한 제과점 사장 조화익 씨,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박진주 씨, 극작가 진윤영 씨, 13년째 김재열 교수를 사사하고 있다는 주부 이경자 씨가 넓은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올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년째라는 조화익 씨는 서울 인사동과 안국동 근처에서 20년 넘게 제과점을 하면서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그분들이 그림을 그려주면 받기도 했는데 그때 그림을 그리겠다는 꿈을 조금씩 키워왔다. 마음속에 떨어져 있던 겨자씨가 어느새 자라 나무가 된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지만 제과제빵 기술자로 일하느라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올해 제가 일흔여덟 살인데 지금이 내 인생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시기인 것 같아요.”
박진주(37) 씨는 홈스쿨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필라테스 사업을 하고 있다. ‘세월의 향기’라는 작품으로 2017 인천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한 박진주씨는 마무리가 있어서 수채화가 매력적이라고 했다.
“유화는 계속 덧칠할 수 있어서 끊임없이 수정할 수 있어요. 끝이 없죠. 그런데 수채화는 끝이 있어요. 상쾌하고 맑아서 좋아요. 색감도 좋고요. ‘세월의 향기’라는 작품을 1년 8개월 동안 그렸어요. 그림을 그리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냥 덮고 가고 그랬는데 결국 해낸 거죠. 동기부여가 됐어요. 처음에는 이게 뭐냐 했는데 정말 열심히 그림을 팠어요. 수채화를 파고 푼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저는 풀지는 못하고 파기만 합니다. 교수님은 물로 물감 농도 조절해서 풀면서 그리시는데 저는 아직 멀었죠.”
이경자 씨는 20년 동안 그림을 그렸고 지금까지 상도 많이 받았다. 5년 정도 소묘를 하다가 수채화를 배우기 위해 김재열 교수를 만났다. 이창포를 그리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는 마침 화실에 쌓아두었던 그림을 정리하다가 그림 한 점을 꺼내 보여줬다
“10년 넘게 묵혀놓았던 그림이에요. 2007년도 세계평화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건데 제목은 ‘역주’입니다. 그때는 역동적인 그림만 그렸어요.”
꽃그림만 그릴 줄 알았는데 다양한 모델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찾아본다는 이경자 씨.
“SNS에 가수 손담비가 동묘구제시장에서 옷을 사 입고 포즈를 취한 걸 봤는데 멋지더라고요. 드로잉하면 되겠다 싶어서 팔로잉하고 사진 캡처도 했습니다.”
진윤영 씨는 수채화를 그린 지 2년 됐다. 가끔 호랑이나 사자 그림을 그려 SNS에 올렸는데 사납거나 용맹스러워 보이지 않아 그림도 주인을 닮는구나 생각했다고. 그는 지인이 그려 달라던 강아지 두 마리 그림을 보여줬다. 맹수가 아니라 그런지 둥글둥글 귀여운 강아지 모습을 꽤 잘 그렸다.
“교수님이 제 연극작품을 좋아해서 때마다 많은 분을 모시고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그림에 관심이 있다 했더니 화실로 당장 오라고 하셨어요. 처음부터 무조건 그렸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림 그리는 시간이 좋습니다.”
mini interview
운명 같은 그림, 제자들과 나눕니다 수연회 지도교수 김재열
재능에 칭찬을 더한 삶을 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방학숙제로 냈던 그림이 교실 뒤에 붙은 게 계기였죠.”
형이랑 같이 그려 방학숙제로 냈던 그림이 우수작에 뽑혔다. 그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김 교수는 입소문이 날 정도로 미술 영재로 성장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미화부장을 줄곧 맡았다고 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인 김재열 교수는 산업인재 육성에 힘을 기울이던 시절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공고라 대학 진학이 멀어지나 싶었는데 때마침 미술반이 생겼다. 고교시절에도 경북 도내에 미술과 관련한 상은 다 휩쓸었다. 그림이 좋았지만 예술을 하면 어렵게 살게 될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우려도 있었다.
“그때 홍익대학교 건축미술과가 있다며 한 선배가 얘기해줬어요. 그림에 디자인도 배울 수 있다면서요.”
홍대에서 열렸던 미술 실기대회 입선 경력도 있고 그림에 자신 있었던 김 교수는 무리없이 미대 명문인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건축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즐겁게 생활했습니다. ROTC 장교로 군에 있을 때도요. 사단 내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대회에서 1등을 해서 휴가도 나가고 진급도 빨랐죠. 군 제대 후에 보루네오가구에 입사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규모 가구공장이 인천에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때 평생의 그림 친구인 우에노 씨를 만났다.
첫 만남부터 평생 친구를 알아보다
“우에노 선생이 우리 가구공장에 견학을 왔어요. 1986년, 32년 전에요. 우에노 씨는 공장장이면서 디자이너였습니다. 저는 회사의 디자인개발 소장이었고요. 그때 제가 불고기 쌈밥을 좋아해서 식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한국의 쌈 먹는 방법을 설명해줬습니다. 만났던 첫날 언젠가 함께 미술 전시를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16년 만에 그 약속을 서로 지켰죠.”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던 우에노 씨는 51세에 회사를 관두고 다음해 영국 첼시로 유학을 떠났다.
“우에노 씨가 영국에서 유학할 때 저도 그를 만나기 위해 영국에 갔습니다. 그때 같이 도시를 다니면서 스케치도 하고 말이죠. 1년 3개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우에노 씨는 책도 내고 수채화를 가르치는 미술 아카데미를 개원했습니다. 저는 아직 회사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저도 정년퇴임하고 나서 그림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실도 만들고 본격적으로 교류하고 말이지요.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멘토입니다.”
드로잉북과 함께 떠나는 여행
취재를 마칠 즈음 꼭 보여줄 게 있다면서 노트를 꺼내 들고 방에서 나왔다.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과 비행기 티켓, 글귀 등이 담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드로잉북이었다.
“기내에서 와인을 자주 사 마시는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먹고 자고 관광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느낌은 담았으면 합니다.”
그는 기내 사무장이 준 감사편지도 잊지 않고 드로잉북에 붙여놓았다. 더 보고 싶어 방으로 따라 들어가니 크고 작은 드로잉북이 한가득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하실 생각이냐고 물었다.
“즐거우니까 싫어질 때까지? 죽을 때까지 붓 들고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세상 편해 보이는 사람 또 없다. 웃는 인상은 기본이다. 모두를 향한 감사가 담긴 듯 등을 굽혀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인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몸짓, 평생 몸에 밴 버릇 같다. 누군가 말을 건네면 온화하게 웃고, 나직하게 말한다. 속 깊게 생각한 뒤 유쾌한 해답을 찾아주는 사람, 한정수 동년기자를 만났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명품 패널!
한정수 동년기자는 최근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네이버 채널 시니어 패널로 등장했다. 1기부터 쭉 동년기자로 다방면에 참여해왔는데 이번에는 영상 출연에 과감히 도전한 것이다. 전자 체온계 사용후기에서부터 신세대 음료 마시기, 다림질 사용기를 통해 적절한 입담과 친근한 표정으로 프로그램 중심을 잡았다. 촬영을 진행했던 후배 기자도 한정수 동년기자의 준비성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촬영하는 거 재미있었어요. 저는 뭐든 시작하기 전에 봐야 할 자료가 있으면 꼭 여러 번 챙겨보고 숙지합니다. 따로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다리미 촬영 전에는 아내에게 다림질 방법을 물어도 봤습니다. 뭔가 하나 발견했을 때의 희열, 저는 그런 준비단계가 좋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 나서서 강연을 하는 직업이 촬영 현장에서 제대로 먹혔다. 적당한 타이밍에 호응하고 질문하는 것이 베테랑 방송인만큼이나 능수능란했다. 나서지 않으면서도 옆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실력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나를 가만히 보니까 리더는 절대 아니고 뒤에서 누군가를 보듬어주는 역할이 더 맞더라고요. 어디를 가나 리더들은 많이 흘리고 다녀요. 리더가 놓치는 것을 주워 담는 역할, 목적 달성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거나 낙오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힘을 줘서 몰고 가는 역할이 저에게 맞습니다. 그래서 제 별명이 양치기견인 ‘보더콜리’입니다.”
봉사와 우연이 천명이 되다
올해 일흔두 살의 전문 강사 4년 차인 한정수 동년기자. 변화관리와 인간관계에 관한 주제로 주로 강연한다. 강연장에서 한정수 동년기자의 인기는 정말 남부럽지 않다. 강의가 끝나면 박수뿐만 아니라 사진 찍자고 다가오는 이들에, 명함을 요구하는 이도 많다.
“그런데 처음부터 전문 강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사료 사업을 하다가 정년퇴직한 이후 ‘뭘 하면서 살까’를 고민했습니다.”
은퇴자로서의 고민은 봉사활동을 하도록 이끌었고 스피치 학원으로까지 인도했다. 공부를 썩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기에 대중 앞에 서서 방향을 제시하는 선생으로서의 삶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정년퇴직과 함께 ‘경로자 우대카드’를 받아들고 나니 뭘 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앞으로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뭘 배우고 싶어 합니다. 이런 고민으로 대한노인회에 전화를 걸었더니 집에서 가까운 경로당에 가서 봉사를 하라더군요.”
처음에는 성의 없는 답변에 할 말을 잃었다. 화를 누르고 생각해 얻은 결론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모르면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대한노인회의 조언대로 경로당에 가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봉사하러 가니까 경로당 총무가 ‘할 짓이 없어서 젊은 놈이 경로당에 나오냐’고 언성을 높이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생각한 바가 있어서 경로당에 나간 거잖아요. 한 달 근무를 해보니 너무 열악하더라고요. 정부에서 한 달에 36만 원씩 10개월을 줘요. 그 돈으로 전기요금, 난방비 등을 다 해결해야 하니까요.”
경로당에는 58명의 어른이 계셨다. 이런저런 비용을 따져보니 매일 한 사람당 200원을 지원받는 셈이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그 길로 경로당 근처의 절, 성당, 교회, 기업체를 찾아다녔어요. 한 달에 한끼 식사비만 기부해 달라고 했더니 어르신 인원이 너무 많아서 힘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줄 수 있는 일정 금액을 통장에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3만 원, 5만 원 조금씩 통장에 쌓이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나들이도 다녔다. 멀리 갈 일이 생기면 간호사도 동행했다.
“다행히 다니면서 사고 한 번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소문이 났어요. 다른 경로당에서도 봉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결국은 돈 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걸 많은 사람 앞에서 하려니 말이 잘 안 나오는 거예요. 정식으로 한국언어문화원에 들어가서 스피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6개월 과정 동안 정말 열심히 배웠다. 발성 연습을 할 때는 30분 동안 페트병에 담긴 물을 두 병이나 마셔댔다. 6개월 하고 났더니 물 한 모금 안 마시고도 목소리가 자유자재로 나왔다.
“첫 강의는 한국생산성본부에서 했습니다. 스물아홉 명 앞에서 강의했는데 28장 되는 자료를 정말 달달 외워 갔습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만족도 조사가 아주 높게 나왔습니다. 만점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일을 한다니까 고교 동창들은 희한하게 보더라고요. 어렸을 때 제가 싸움질은 좀 했는데 공부는 못했거든요.(웃음) 처음부터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4년째 하고 있고 지금은 한국언어문화원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이 아닌 강사들을 위한 ‘파워 스피치’ 수업을 진행한다고. 주어진 시간 안에 대중이 알아듣고 또 새길 수 있는 이야기를 펼치는 방법을 전수 중이다.
“리더 성향은 아니지만 내 것이라고 강하게 느끼는 것이 생기면 끝까지 남아서 결국은 뭔가 하더라고요. 강의를 4년째 하다 보니 어디서 강의 들은 누구라고 인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강의안 자료를 모아 공동저서로 2015년과 2017년 책을 냈다. 그리고 올해 단독으로 ‘우연은 천명이다’란 제목의 책을 준비 중이다.
“저는 공부 잘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경로당에 갔다가 말을 못해서 스피치를 배우고 눈에 띄어서 강사로 활동하고… 아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늦게나마 공부를 시작해 참 재미를 느끼며 살고 있어요. 우연히 하나씩 주어진 것을 받아먹은 거죠. 그 결과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길로 들어섰습니다. 제가 태어난 소명은 아마 누구를 가르치고 도우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이 배우고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한정수 동년기자. 그런데 꼭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란다. 뭔가 알아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장애인 인권과 관련한 공부를 하고 있다.
“사회적인 편견도 있고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 부족 탓에 약해지고 비굴해지고 스스로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장애인들이 꽤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낙오되거나 자연 도태됩니다. 그들을 잘 추슬러 끝까지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앞으로의 인생은 이 방면에서 펼쳐보려고 해요.”
사랑하는 아내 이야기
인터뷰 중간중간 ‘아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우선 3년 전 아내의 친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집을 옮겼다고 했다.
“강남에 살 때 종종 아내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왔습니다. 아내랑 놀려고요. 그런데 어느 날 힘드니까 저희 부부더러 이사 오라고 하더군요. 아내 친구가 민낯에 슬리퍼 끌고 와서 냉장고 열어 집에서 먹을 거 먹고요. 아내도 외롭지 않고요.”
한정수 동년기자뿐 아니라 친구들까지 아내를 극진히 보살피는 듯했다. 물론 이유가 있었다.
“아내가 근무력증을 앓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치매로 오래 편찮으셨어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9년 만에 아내에게도 병마가 찾아왔어요. 그때는 집에 가면 다 환자였습니다. 제가 뭘 했겠어요? 재롱부려야죠. 웃고 싱거운 소리 하면서 맨날 즐겁게 웃었어요. 어느 날 아내가 너무 아파 제가 어머니를 일주일 모셔봤어요. 도저히 못 모시겠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서. 그때 되게 울었어.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젊은 시절 만나 6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돈 열심히 벌어야 했던 시절에는 남편 뒷바라지, 어머니 아프실 때는 병수발. 이제는 자신이 몸이 아파서 하고 싶은 것도 못해보고 나이 들어버린 사랑하는 아내다. 연애 때 얘기 좀 들려 달라 하니 바로 어제 얘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진다. 조계사에서 흑석동으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바래다주다 통금에 걸린 일화, 일이 바빠 못 갈 뻔했던 신혼여행을 친구 때문에 다녀왔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많은 것이 부족하던 시절 감내하면서 남편을 믿고 지지해준 멋진 여인이 한정수 동년기자의 아내였다.
“제가 지방으로 강의 다닐 때는 아내와 꼭 같이 다닌다고 했잖아요. 아내가 사실 멀미를 해서 버스를 못 타요. 그런데 남편이 운전하는 차는 참 잘 타요. 타자마자 양말 벗고 발도 올려놓고 등도 뒤로 하고 잠도 푹 잘 자고요. 비 오는 날 차 타는 걸 좋아하는데 차 안에서 비 내리는 걸 보는 모습이 꼭 가을날 코스모스를 감상하는 소녀처럼 예뻐요. 생각만 해도 좋아요. 요즘은 아내의 친구들 덕분에 마음이 편해요. 저녁때는 대신 제가 집에 일찍 들어가죠.”
어머니가 남기신 유산
“살아왔던 모든 게 다…. 제가 어디에 글을 써도 은퇴 전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아요. 너무 힘이 들어서요. 다음에 그 얘기로 책 하나 내려고요.(웃음)”
옛이야기 좀 들려 달라고 하니 눈빛이 흔들렸다. 긴 웃음이 깊은 한숨으로 느껴졌다. 1940년대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GDP 60달러 시대. 없어도 너무 없던 시절이었다고 운을 뗐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돌아가셨어요. 제가 다섯 남매의 장남인데 아버지 장례 다 지낼 때까지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어요. 아버지가 굉장히 미웠어요. 갑자기 돌아가셨잖아요. 그때 딱 드는 생각이 ‘어떻게 하면 굶지 않나’였습니다. 가족들 굶기지 않으려고 안 해본 것이 없어요. 얼굴에 웃음기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자꾸 저더러 웃으래요. 싫어도 어머니 때문에 입이라도 웃었어요.”
얼굴을 찡그리면 어머니가 역정을 내셨다. 어머니 앞에서만이라도 웃어보려 노력했다.
“어머니가 슬퍼하는 게 싫었어요. 힘들어도 싫어도 짜증이 나도 무조건 웃었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습관이 됐고 긍정적인 사고로 이어진 겁니다.”
어머니는 한정수 동년기자에게 호 하나를 지어주셨다고 했다. 덕강(㥁姜)이었다.
“어머니가 너는 복이 오는 걸 원하지 말고 덕을 쌓고 살라며 지어주셨습니다. 그분 생각에는 제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지고 있습니다.”
한정수 동년기자랑 마주하고 얘기하다 보니 집중해서 보게 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왼쪽 뺨의 주름이다. 팔자주름이 깊게 패이면 사나워 보인다지만 왼쪽 팔자주름의 의미는 남다르다. 기꺼이 웃을 때 코의 왼쪽 근육을, 인위적으로 웃을 때는 오른쪽 근육을 사용해 웃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유심히 본다. 한정수 동년기자의 왼쪽 팔자주름은 길고 깊다. 오랜 세월 웃음을 잃지 않고 시대를 이겨내며 살아온 우리 세대 아버지의 얼굴이다. 문득 ‘미남 주름’이란 말이 생각났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려 노력했던 한정수 동년기자. 그의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같은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지인의 남편이 10월8일 독창회를 한다고 해서 다녀왔다. 직업이 성악가냐고 물으니 아니란다. 단지, 음악을 좋아해서 성악으로 독창회 무대에 서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독창회가 열린 서초문화예술회관 대강당은 647석이나 되는 큰 공간인데 사람들이 얼마나 올 지 걱정이라고 했다.
공연장에 가 보니 만석은 아니어도 객석이 꽤 들어찼다. 안내서에 보니 ‘바리톤 이관희’라고 쓰여 있었다. 프로 성악가가 아니라 경찰대학 명예교수라는 것이다. 경찰대학에서 35년간 헌법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현재 경찰대학 명예교수, 대한법학교수회장, 안암법학회장, 한국헌법학회장, 한국인터넷 법학회장 등 현직도 모두 법과 관련되어 있었다.
바리톤 박흥우 교수가 인사와 함께 독창회가 시작됐다. 이관희 교수와 만난 인연, 곡 해설까지 박흥우 교수가 도맡았다. 박흥우 교수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이관희라는 사람이 찾아 와서 성악 공부를 하고 싶다며 지도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남자 중음인 바리톤인데 성악 적 기반은 없었으나 음악적 열정이 대단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래서 시작한 성악. 전문 성악가도 힘들어 하는 독창회까지 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교수 타입의 이관희 교수가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 입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검정색 드레스를 차려 입은 피아니스트 최유리와 함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섰다.
첫 무대는 ‘가고파’, ‘Because Song’, ‘물망초’ 세 곡이었다. 이 무대를 열면서 연관되는 제목들이다. 두 번째 무대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프로벤자 내 고향으로’, 줄리오 이글레시아스 곡 ‘나를 많이 사랑해주오’, ‘푸치니의 라보엠에 나오는 ‘그대의 찬 손’이었다. 관객들이 마이크 앞으로 다가서라고 주문하자 앞으로 조금 다가 와서 불렀다. 감탄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불안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훌륭한 음색으로 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설자의 설명으로는 프로 성악가는 마이크를 안 쓰는 것이 지존심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관희 교수도 도전한 모양. 아무래도 평생 성악을 전공한 사람들에 비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마이크의 영향력은 큰 것이다.
특별 출연으로 소프라노 유미자의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들을 수 있었다. 남자 목소리에서 여자 목소리로 그리고 중음인 바리톤에서 소프라노를 듣게 되니 역시 달랐다.
다음 순서는 이날 사회와 해설을 맡은 박흥우 교수가 ‘보리수’를 원어로 불렀다. 같은 바리톤인데 역시 프로 성악가라서 복식호흡에서 나오는 깊은 소리가 매혹적이었다. 다음 곡은 다시 이관희 교수가 나와 ‘그리운 금강산’, ‘The Impossible Dream’, ‘여자의 마음’을 불렀다.
이날의 백미는 마지막 스테이지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 ’별은 빛나건만‘, ’공주는 잠 못 이루고‘였다. 세 곡 모두 전형적인 테너 곡들인데 바리톤으로 불렀다. 보통 테너가 아니면 시도조차 못하는 곡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이라는 데야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앵콜 송으로 소프라노 유미자, 바리톤 박흥우 교수와 함께 부른 ‘축배의노래,. ’오 솔레미오‘는 여느 음악회의 피날레 장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이육사의 시 ’광야‘를 암송하는 것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관희 교수는 평소부터 문화국가를 꿈꿔 왔다고 했다. 일반인들이 꺼려하는 경찰들이 시를 사랑하고 노래를 좋아하는 면을 갖추고 있다면 훨씬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했다. ]이관희 교수는 턱시도를 차려 입었지만, 일반 음악회와 달리 사람 좋은 미소도 지어가며 다소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관객들이 대부분 지인들이라 “브라보!” 대신 “잘 한다”, “ 아주 좋아요”, “대단해” 등 편안한 분위기였다.
일반인이 버킷리스트에 담았던 것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갈 때 희열을 느낄 것이다. 이날 이관희 교수가 그랬을 것이다. 일반인은 노래 가사 하나 외우기도 힘든데 10여곡을 원어로 불렀다. 프로 성악가도 그만큼 연습하자면 성대결절을 걱정하는데 이관희 교수는 무난히 해냈다. 대단한 열정이다.
작년 7월 손웅익 동년기자와 함께 동행 취재를 했다. 공장지대에서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한 성수동 거리를 걸어 다니며 공간을 소개하는 지면이었다. 그날은 손웅익 동년기자가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딱 일주일 되는 날이기도 했다. 마침표를 찍지 않았더라면 회사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와 살아갈 얘기를 나눴다. 40년 건축 전문가로, 전문 경영인으로 살다 은퇴한 지 1년째.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 또다시 데이트 신청을 했다.
“경희궁이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그곳을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만들어준 공간이라고 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성중·고등학교였으며, 해방 후 1980년까지 서울고등학교의 옛 교정이 있던 자리다. 무시험고교입학제, 소위 ‘뺑뺑이 세대’로 불리며 명문 서울고에 입학한 58년 개띠 손웅익 동년기자가 고교 시절을 보낸 장소. 본래 모습을 되찾아가면서 교정은 사라졌지만,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자리가 대운동장이 있던 곳입니다. 경희궁 뒤에도 작은 운동장이 더 있었어요. 나무들도 그때 그대로입니다.”
인생 방향을 설정해준 운명의 장소로 꼽은 옛 서울고등학교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속상한 일도 많았다. 입학시험 관문 없이 명문고 대열에 무임승차한 자격미달 74년 고교 입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시험 쳐서 들어왔는데 저희는 아니잖아요. 선배들과 선생님들의 벽이 너무 높았어요.”
총동창회에 안 나오겠다는 졸업생도 많았다. 선배들 사이에서는 아예 74년 입학생을 후배로 인정하지 말자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졸업하고 한 10년 정도 됐을 때 총동문회에서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있었어요. ”
동문들 앞에 선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58년 개띠생을 후배 취급할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이름을 만들어 1회 졸업생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곳에 계신 선배님들 자식 중에 뺑뺑이로 서울고등학교에 들어오면 우리한테 대하듯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장내가 잠잠해지더라고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날 동문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정리해 동문회지에 글로 실었다. 이를 계기로 선후배 간 관계가 재정립됐고 지금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제가 공부했을 때가 제 인생 줄기의 큰 시작점인 것 같아서 이곳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 경우는 많은 걸 깨달았어요. 학교 다닐 때 어린 마음에 반발심도 있었어요. 감성도 풍부할 때라 고목 주위에서 그림도 많이 그렸고요. 나중에 보니까 학교의 전통이나 정신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었습니다. 이곳의 추억이 벌써 40년 전인데 지금까지 맥락을 꿰뚫고 있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 그 자리로 오고 싶었습니다.”
마침 대학 졸업 후 첫 직장도 옛 서울고가 내려다보이는 피어선 빌딩에 있었다. 은퇴하고 나서도 학교 주위는 친숙하기에 자주 찾는다. 시청역에서 덕수궁을 지나 정동길을 걸어 커피 한 잔, 차 한 잔 하며 여유를 즐긴다. 경희궁 한 바퀴 돌고. 서울역사박물관도 구경하고 말이다.
척박한 서울살이를 이기다
경주에서 태어난 손웅익 동년기자는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성수동 카페거리 동행 취재 때 중랑천변 판자촌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비가 오면 집이 떠내려가기 일쑤였고,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횃불 들고 밤새 집을 지어야 했다. 그런 생활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1 때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통장을 의무적으로 만들어서 적금을 붓도록 했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 냈다가 교우들 앞에서 선생님한테 맞은 적도 있어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나는 지금도 부모님이 내 대학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주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친구들한테 자주 민폐를 끼치면서 살았어요. 그야말로 빈대생활이었죠.(웃음)”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손웅익 동년기자는 미술대학 대신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택했다.
“미술 대신 선택한 건축이 저랑 잘 맞았어요. 건축은 조형물이고 예술품이지요. 미술을 선택하지 못했던 한을 건축에서 충분히 풀 수 있었으니까 제가 40년 가까이 건축을 했겠죠.”
건축과 졸업 후 돈을 잘 벌 수 있는 건설회사 대신 건축설계 사무실에 들어갔다. 건설회사의 3분의 1 수준인 월급을 받고 설계 사무실에 앉아 도면을 그렸다. 현장에서 공사하는 것보다 도면 그리는 것이 적성에 맞아서였다.
“그때 건설회사로 간 친구들이 월급을 삼십만 원쯤 받을 때였어요. 설계 사무실은 십만 원이었고요. 그래도 나는 어쨌든 간에 도면이 좋았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요. 나중에 건축사가 돼 설계 사무실을 차려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설계 사무실을 연 이후 일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건설 열기 덕분에 설계사 또한 바빠졌다.
“결혼하고 1년 뒤에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서른한 살에 설계 사무실을 차렸어요. 정말 그때는 일도 많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죠. 미국에도 가고 이탈리아, 스위스 종주여행도 하고요. 당시 유럽 왕복 티켓 가격이 비쌌거든요. 1990년대 초반에는 분당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건설 열기가 또 어마어마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어요. 사무실 규모도 커지고 집도 사고 정말 내 세상이었어요. 말도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30대 초반에 경제적으로 인생 역전했던 거죠.”
신나게 이야기가 흐를 때쯤 속도가 딱 끊기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이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 IMF 금융위기 얘기가 이어진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직원들을 내보내지 않았어요. 내보내봐야 직원들이 갈 데도 없잖아요. 집 담보 잡히고 그냥 모든 걸 다 쏟아 붓고요. 이곳저곳에서 돈 빌려서 회사 사무실에 다 쓸어 넣었어요. 그 빚 갚는 데만 10년 걸렸어요. 경제적으로 제로인 상태에서 퇴직을 했습니다.”
10년을 준비한 은퇴, 퇴직 1년 차
작년 5월,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손웅익 동년기자. 부사장이라기에 넉넉해서 그만두는구나 생각했는데 이전 상황에 대해 듣고 나니 왜 그만뒀는지가 궁금했다. 회사에서 제안도 있었고 좀 더 은퇴를 늦출 수도 있었지만 흔들림 없이 계획대로 은퇴 날짜를 잡았다.
“제가 은퇴 준비만 10년 했습니다. 자격증도 따고, 책도 내고, ‘이 정도면 부딪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강의하고 글 쓰고, 건축 일을 평생 했으니까 또 건축과 관련해서 자문도 몇 개월 했고요.”
은퇴를 위해 미술심리상담사, 노인심리상담사, 자살예방지도사 등 자격증도 땄다. 중앙일보에 건축과 관련한 글을 1년 여 게재했고, 동년기자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 우송정보대학교 리모델링 건축과 겸임교수로 임용돼 강의도 하고 있다.
“강의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반응도 좋고요. 참 체질적으로 나랑 잘 어울리는구나 생각합니다.(웃음) 작년 5월에 수필작가로 등단했어요. 이외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그림. 정말 그림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어서 삽화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그리고 사진도 찍고 그게 글하고 또 연결되잖아요.”
은퇴하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시간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했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출근시간은 늘 아침 7시에 맞춰져 있었다. 고교 시절에도, 설계 사무실을 운영할 때도, 큰 조직에서 중역을 맡아 일할 때도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찍 출근해서 데이터 정리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정리하고요. 퇴근도 항상 늦었어요. 문제는 내가 정말 쉬고 싶어도 강제로 출근해야 되잖아.”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는 후배가 자리를 내주어 출퇴근할 장소가 있기는 하지만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출근하다가 멈춰 설 수도 있고 어디론가 다른 길로 빠져서 내빼도 괜찮다. 사진 찍고, 산책하고, 집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도 많이 본다고 했다.
“좋잖아요. 생각도 하고. 하여튼 뭐 여러 가지로. 과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봐요. 글이나 그림 소재도 생각하고요. 그리고 길가다 사진도 찍어야죠. 바삐 가야 하는 사람들과 걸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 혼자 걷습니다.”
베이비부머가 주거문화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손웅익 동년기자가 1년 동안 유유자적 한가롭게만 지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업과 시니어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의견을 나누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 중이다. 문 닫은 식당과 빈 공간들이 눈에 많이 띄어서 걱정이라고도 했다.
“베이비부머는 위로는 늙은 부모가 살아 계시고 아래로는 부양해야 할 자식들이 있습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자식들에게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국민연금에 기대기도 어렵고 퇴직연금을 들어놓은 사람도 흔치 않고요. 재산을 분배하네 마네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줄이고 씀씀이도 줄여야 하고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공간, 그러니까 집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주거 공간의 평수를 줄이고 입주자가 함께 쓰는 공간을 늘려 조금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주거로 전환하자는 운동을 현재 손웅익 동년기자가 펴나가고 있다. 자식들 출가시키고 나면 덩그러니 부부만 남아 있으니 적당한 규모의 집에서 살고 남는 돈은 현금화해서 노후자금으로 돌리자는 의미다.
“내 공간은 최소화하고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역을 만들어 여러 가지 활동도 하고 수익사업으로도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시니어 카페라든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요리를 하고. 이런 공동 주택이 마을화가 되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러 혹은 빵을 맛보기 위해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10년 넘게 연구했습니다.”
최근 정부의 잇따른 부동산 정책 실패로 혼란과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을 골똘히 해보면 나쁘지 않은 구조이기도 하다. 투자와 돈을 만드는 도구로 변질된 집의 개념을 본래의 기능으로 되돌릴 수 있는 혁신 운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액티브한 시너지를 기대한다
회사에 있으면서 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증이 심한지 그가 매진하는 일들이 많기도 하다. 삽화뿐만 아니라 캘리그라피에도 관심이 많아 시간이 나면 꼼꼼하게 글씨를 쓰기도 한다.
“그림을 하다 보니까. 어떤 곳에서 책을 내는데 삽화를 그려 달라는 제의도 있었어요. 내가 그린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면 SNS 활동도 열심히 해야겠구나 생각합니다.”
끝에 뭐가 있는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시간을 마음껏 누려보겠다는 마음밖에 없다.
“아무 준비도 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그냥 기대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이가 없다잖아요. 맞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고 크고 작은 기업에서 일도 해보고 했는데 그때마다 제것도 아니고요. 그냥 열심히 살다 보니까 여기에 제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핵심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관계요.”
시니어 세대로 접어들면서 좋은 점은 관계 정리에 의연해졌다는 것이다. 정리도 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도 만들 수 있다.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모이니 친해지기도 쉽고 다양한 경험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발전시킨다는 생각도 든다.
“굉장히 희망적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요. 동년기자단도 멋진 시니어가 모인 모임이잖아요. 앞으로 동년기자 활동도 잘해야 할 텐데요.(웃음)”
경희궁 처마 아래서 손을 내밀어 비와 마주하던 손웅익 동년기자 모습이 기억난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힘들었던 세상과 맞서던 추억 속 고교생 시절 자신과 만나 듯 손 위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작년 초, 2기 동년기자 발단식에 범상치 않은 여인이 나타났다. 망사와 레이스로 된 코사지를 머리에 올려 쓰고, 화려하게 빛나는 공단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상냥한 어투로 자신을 핑크레이디라고 소개하던 그녀는 어느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대표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중. 최근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영상 제작에도 참여하며 그 누구보다 활발히 동년기자 활동을 넓혀가고 있는 그녀다. 잘 영근 숙녀의 삶 속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숨어 있을까?
동년기자 리포터 가능할까요?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자주 가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으니 서울 강남에 있는 서초문화원이라고 했다. 현재 이곳에서 모델워킹 수업과 시창작 수업을 듣고 있다고. 대부분 시간을 주로 강남 일대에서 보내는데 1분 1초도 아깝지 않게 살뜰히 모아 사용하고 있다.
“2012년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평택에서 컴퓨터 선생님으로 교사생활 33년 하고 나서 서울로 이사왔습니다. 이곳에서 수필창작, 영어회화, 시낭송, 왈츠를 등록해 열심히 다녔어요. 패션학원도 등록해서 다녔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교사였는데 이것은 벌써 이뤘고, 다른 하나는 패션디자이너라고 했다. 교사직을 맡고 있을 때도 꿈을 이루기 위해 평택과 서울을 오가며 패션 특강을 들었다고. 한국폴리텍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 야간과정을 6개월 정도 밟기도 했다. 순간마다 패션의 길로 접어들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패션 공부했던 경험을 실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입고 두르고 가지고 다니는 것 대부분이 스스로 리폼한 제품이다.
“어렸을 때 바느질을 좋아했어요. 내 옷은 내가 리폼하고요. 이 가방도 다섯 번도 넘게 끈 부분을 갈았어요. 레이스를 손바느질로 덧대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명품가방을 만든 거지요.”
퇴직하고 난 이후에 더욱더 열심히 사는 박애란 동년기자다.
“생각을 바꿔야 해요. 퇴직 전은 전반생, 그 후는 여생이 아니라 후반생. 전반생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살았다면 후반생에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도 괜찮아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 돼요. 그래서 후반생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내가 또 몸치이기는 한데 왈츠도 배우고 탱고 동호회도 나가고 있어요. 발레도 하고요. 이 나이에 몸이 잘 늘어나겠어요? 왜 내가 내 돈 들이면서 이 고생하나 하다가도 우아한 발레 음악 들으면 엄청 행복해집니다.(웃음)”
인터뷰 바로 전날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제작하는 영상 프로그램 촬영을 다른 동년기자들과 마친 상태였다. 이후 의학 관련 영상에서는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검증된 끼와 재능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간판 리포터(?)로 벌써부터 점쳐졌던 인물이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아무래도 시작이다 보니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요. 안 그래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영상을 시도할 만한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시작하더라고요. 동년기자들이 대단한 내공을 가진 시니어잖아요. 내 생각이 그대로 옮겨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대한 애정은 이뿐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품격 있는 시니어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잡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며 홍보 멘트를 꼭 날린다. 우리 잡지에 처음 자신의 기사가 실렸을 때는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생각해보니 당시 기자 앞에서도 본인 기사가 실린 잡지를 열어보고는 방방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웃는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슬프고 착한 아이, 애란을 만나다
“내 패션이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지? 왜 이런지 물어봐주실래요?”
한껏 하늘을 날 것처럼 깃털 같은 얘기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기자에게 질문했다. 별 얘기 아니려니 하고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뜻밖의 소재로 이야기가 바뀌었다.
“옷을 이렇게 입게 된 건 언니 때문이었어요. 어린 시절 아빠가 언니만 사랑해줬어요. 언니가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한번은 언니랑 싸우는데 아빠가 싸우지 말라고 우리를 다그치다 저랑 언니를 톱자루로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렸어요. 정말 너무너무 아팠어. 그때 든 생각은 ‘언니도 아프게 때렸을까?’ 였어요.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요.”
이때의 기억은 말 그대로 트라우마(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남아 있었다. 똑같이 때렸을 거란 기자의 말에 “아니, 아닌 거 같아요”라고 맞받아쳤다.
“어느 날 언니가 책을 산다며 아버지한테 용돈을 달라고 했어요. 저한테도 ‘돈이 필요하지 않냐?’고 아버지가 물었어요. 그런데 저는 ‘됐어요. 그동안 제가 모아놓은 돈으로 사면 돼요’라고 했어요. 누가 착한 아이야?”
이 말에 기자는 “아버지가 속으로 많이 상처를 받았을 거 같다”고 답했다. 이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그게 왜 상처냐고 되물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돈 잘 모은 행동’을 칭찬받고 싶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용돈을 주겠다’는 말이 일종의 사과였고 화해의 사인이지 않았을까. 박애란 동년기자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너는 도대체 애다운 맛이 없다”며 나무랐다. 화해의 손을 놓아버린 고집 세고 질 줄 모르는 애어른으로 아버지는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때 박애란 동년기자가 아버지한테 “저도 책이 사고 싶어요, 돈 주세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분명 화해를 표했던 것이라고 꼭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얘기하고 싶다. 어린 시절 언니를 편애하던 아버지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초등학교 시절 너무 예뻐서 한 치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두 친구 이야기로 흘렀다. 외모 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길에서 주웠던 군번줄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학교에 갔던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줬다.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사랑은 선생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사랑으로 표출됐다. 이쁨받기 위해 고운 옷을 골라 입었고,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말을 하는 내내 박애란 동년기자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그렇게 서러운 걸까. 밝은 웃음 뒤에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던 상처받은 어린 박애란이 바로 눈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나마 박애란 동년기자 인생에서 다행인 것은 어린 시절의 아픔을 서둔야학에서 대신 치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둔야학은 박애란 동년기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야학으로 서울대학교 농대 재학생들이 주축이던 곳이다. 작년 말에는 서둔야학당터에서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행사를 열었는데 본지가 찾아가 탐방 취재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모두 착한 아이로서 박애란 동년기자를 인정해주었고 예뻐해줬다. 훗날 박애란 동년기자의 교사 꿈을 이루게 해준 놀라운 곳도 바로 서둔야학이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울컥할 때 주문처럼 되뇌는 마법과도 같은 말이 있다.
“울면 안 돼, 짜장면은 돼!”
세상의 모든 낭만적이고, 슬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아픔을 덮어주는 이불과도 같은 말. 이제는 좀 따뜻한 마음으로 사그라지고 아물고 용서할 수는 없을까.
백설공주처럼 예쁘게 안녕
“큰일날 뻔했어. 이 좋은 세상 못 보고 이생을 하직할 뻔했잖아.(웃음)”
상황 불문 눈물, 콧물 짜며 소녀감성 폭발하는 박애란 동년기자. 세상을 비관하고 꽃다운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던 일화도 꽤 오랜 시간 털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야학에서 공부를 하고 나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선택한 곳은 대한방직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에 빠져 있는데 현실은 공장이잖아요. 숨이 턱턱 막혔어요. 내 방에 공주들 사진을 붙여놓으면 아버지는 그런 것을 벽에 붙이면 귀신 나온다며 떼어버리라고 그러셨고요.”
이러다 평생 여공으로 살 것 같았다. 그러느니 죽자. 수면제가 가장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을 듣고 수면제를 사다 모았다. 사랑으로 감싸준 서둔야학 선생님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헝겊으로 꽃을 만들었다. 죽음 초읽기에 들어갔다.
“1968년도 5월 15일에 야학당에 가서 스승의 날 꽃이라며 선생님들 가슴에 달아드렸어요. 정말 눈물을 꾹 참고요. 내 나이 열여덟 살이었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예쁘게 죽겠다는 생각에 하늘색 브라우스에 스커트를 입고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입 안에 수면제를 털어넣었다. 천운이었을까, 일어나보니 하늘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막 우시더라고요. 그래도 아버지가 고와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맞았던 사건 이후로 아버지한테 사랑받기를 포기했어요. 무엇보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 무력했습니다. 그땐 절망이었습니다.”
기운을 차리고 야학당으로 가서 그곳에 계신 대학생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자살소동과 관련한 얘기를 했다고.
“그때 번뜩 정신을 차렸어요. 선생님이 제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어요.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누가 너 죽은 모습을 보고 아! 아름답다’ 하겠냐고. 백설공주를 본 왕자는 아름답다고 외쳤는데. 암튼 그때 제 생각에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죽으려 했던 것이 너무 낭만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반전은 죽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지금 사는 게 너무 재밌거든. 요즘 생각하면 죽기 정말 아까워요.”
여직공, 여교사 되다
“되게 힘들게 살긴 했네요. 고비, 고비. 길고긴 고비. 내가 산전, 수전, 지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수원에서 딸기를 땄어요. 그다음에 버스회사 사환을 했어. 방직공장에 들어갔어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일반직으로 이십대 때 근무했어요. 그다음에는 타자학원 강사로도 일했고요. 그리고 결국 스물아홉 살에 중등교사자격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후에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붙어서 선생님으로 33년 살았잖아요.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었을 때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었어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말씀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서울대학교 농대에서 일할 당시 선생님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농대 학장은 유독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우리 여 선생님 오셨네”라고 하셨다.
“일반직 여직원이 80명이 넘는데 저한테만요.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꿈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제가 학교와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제게 학교로 가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트라우마를 조금씩 치유하고 어릴 적 자신과 타협하며 매일 조금씩 나아가며 살아가는 박애란 동년기자는 화려하게 보이는 일은 물론이고 매일 공부하며 사는 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현재는 문화원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는 것 이외에도 방송통신대학교에서 미디어영상학과를 전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농학과, 국어국문학과, 가정학과와 문화교양학과에 이어 미디어영상학과까지 5번째 입학이다.
“우리 집 TV는 방송대 채널에 고정돼 있어요. 예능프로그램은 볼 생각해본 적 없고 클래식 음악 채널이나 다큐채널을 틀어놓아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인 거 같아요.”
압구정 날라리는 폼생폼사?
인터뷰도 하기 전에 이런 제목이 어떨까 하고 물어온 박애란 동년기자. 저 느낌이 본인 캐릭터라고 밝게 웃는다.
글쎄 눈물의 근원과 굴곡진 인생 얘기를 듣고 나니 그녀가 가볍게 폼생폼사로 살아간다는 느낌은 없다. 오히려 마감할 뻔했던 삶을 치유하고 보듬으며 매일을 기똥차게 열심히 사는 시니어, 내면에서 흐르는 진정한 멋을 가진 여인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더 깊고 고운 아름다움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빛내는 동년기자로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붉고 통통한 볼에 눈이 맑은 여자 같은 술이여!” 한산 소곡주에 취한 그가 감흥에 못 이겨 한밤중 끼적였다는 한마디다. 주선(酒仙) 이백이 그 모습을 봤다면 그냥 가지 못하고 배틀 한번 붙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술 향을 맡았다가 낯선 길로 들어섰다는 허시명(56) 씨. 우리 술 찾아 20여 년간 유랑하듯 전국을 떠돌더니 어느 날 술 얘기 좀 해볼 때가 됐다며 막걸리학교를 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술 인문학 바람의 신호탄이었다.
술 기행 떠났다가 아예 술 평론가가 되어버렸다는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 술과 함께하는 삶을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다고 한다. 우리 술과의 인연은 기자생활을 그만두면서부터 시작됐다.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와 당시 우리나라 최고 인문 사회 교양지였던 ‘샘이 깊은 물’에 입사해 글을 쓰던 그는 5년 만에 사표를 쓰고 나온다. 기자들이 만든 노동조합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을 결심한 것이다. 이후 주요 일간지와 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며 여행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양조장에서 우리 술 빚는 장인들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곰삭은 옛 문화를 발견하고, 더러는 불운했던 역사를 들여다보며 그는 우리 술 이야기를 써나갔다. 그렇게 해서 출간된 술 관련 책만 벌써 네 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중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에 들어가 고문헌의 기록들을 뒤지더니 2005년에는 우리 술 원형을 찾아 일본 유학까지 감행한다.
“글 쓰는 사람은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행지에서 만난 양조장에 들렀다가 평생을 우리 술에 바친 장인을 만났어요. 그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술을 한 잔 마셨는데 한 편의 글이 저절로 써지더라고요. 그 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며 술 기행을 시작했죠.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술 찾아 떠납니다.”
우리 술, 인문학적 접근이 필요할 때
주당천리. 그가 자신의 술 기행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처음에는 먹고살기 위해 글을 썼다면 나중에는 돌아오는 길을 잊거나 잃어버린 채 썼다. 가끔은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여기가 어디지?’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그러나 술이라는 놈은 알면 알수록, 옛 주당들의 흔적을 발견하면 할수록 더 빠져들게 했다. 주당천리를 돌고 나자, 우리 술이 기록해온 유무형의 길들을 인문학적 이해 없이 제조·기술자·소비자 구도로만 인식해온 현실도 아쉬웠다.
“좋은 술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술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의아합니다. 술 마시고 사고 친 얘기는 해도 술 빚은 사람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막걸리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수백 개의 양조장이 있고 그곳에서 만든 막걸리 맛은 다 다릅니다. 그런데도 ‘막걸리 맛이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하죠. 이제는 인식을 바꿀 때가 됐습니다. 내 입맛에 맞는 막걸리, 차별화된 막걸리, 새 막걸리를 찾아 마시며 그 맛을 품평해봐야 해요.”
술 기행하면서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빚어낸 다양한 술을 맛본 후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맛과 향기를 느끼기보다는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 속에서 마십니다. 술이 내 몸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관찰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요. 음식들의 순환 사이클에 대해 잘 모르는 거지요. 젊은이들에게 음주법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도 없어요. 술 마실 나이 됐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마셔라 하는 상황이죠. 그러면 어른들은 제대로 마실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취하면 누구라도 미투 대상이 될 수 있어요. 이게 우리의 술 문화 현실입니다. 술은 마시고 취하면 사고나 치는 음식이라며 부정적으로 인식돼왔고 가능하면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던 것 같습니다. 술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려는 노력들은 거의 없었다는 얘기죠. 그러나 앞으로도 우리가 술과 공존해야 한다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이 부분이 저의 도전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제대로 한번 장을 마련해 그 역할을 해보려 합니다.”
우리 술의 유통과 판매도 인문학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봐야 제대로 진단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현대의 술은 대양을 가로지르는 항공모함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이 자기 존재를 알리려면 자본이나 광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술에 담긴 문화의 힘이 있으면 순항할 수 있다고 봐요. 모든 술이 함선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러는 쪽배가 되기도 하고 나룻배가 되는 것도 괜찮습니다.”
수강생들로 북적이는 ‘막걸리학교’
그가 쓴 첫 막걸리 책 ‘막걸리, 넌 누구냐?’를 읽고 허영만 만화가는 “이제야 비로소 막걸리 종주국의 체면이 서게 됐다”고 말했다. 전통주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느라 그가 공을 들인 시간과 노력과 실천이 우리 술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기도 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2009년에 문을 연 막걸리학교는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하나의 결실이다. 개교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삼청동에 있던 학교는 1년 전 남산으로 이사를 해 39기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 그동안 졸업한 학생이 2000명을 훌쩍 넘는다 하니 이런 열풍도 드물다.
“1기생 모집 때는 이틀 만에 수강생이 다 차더니 2기 때는 단 몇 분 만에 마감이 되어 얼떨떨했습니다. 해외에서도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있어, 우리 막걸리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나 하고 놀랐어요. 지금도 수강생이 만원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만큼 술 교육에 목이 말랐던 모양입니다. 프로그램은 주로 전통주 시음, 술과 관련한 인문학 강좌, 술 빚기 강좌, 하우스 막걸리 창업 강좌, 우리 술 해설사 강좌 등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먼 지역에 계신 분들을 생각해 2013년에는 부산 분교도 열었습니다.”
허 교장은 남주북병(南酒北餠, 서울의 남촌은 술맛이 좋고 북촌은 떡 맛이 좋다 하여 이르던 말) 이야기를 해주며 스토리가 있는 남산 막걸리의 시대를 열고 싶다고 했다. 인문학 체험 공동체에 대한 열망도 컸다.
막걸리학교에선 술 마시며 토론하는 수업시간이 인기다. 생막걸리와 살균막걸리, 전통막걸리와 개량막걸리 등 다양한 막걸리를 통해 지금까지는 몰랐던 맛들을 경험한다. 색상, 탁도, 향기, 첫맛, 뒷맛 등을 꼼꼼하게 비교 분석해보는 시간이다. 그러나 술에 사로잡혀 비틀대거나 주정이라도 부리면 바로 퇴학 조치가 내려진다니 아무리 흥에 겨워도 경거망동은 금물이다.
시니어와 막걸리의 아름다운 동거
젊은 사람들도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있지만 역시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막 은퇴한 사람들이 막걸리학교의 큰 고객이다. 특히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공부한다. 시골에서 노동의 기쁨을 누리며 우리 술을 빚어보겠다는 사람도 있고, 수익을 얻기 위해 막걸리 사업을 구상하는 사람도 있다. 요즘은 하우스 막걸리 제조가 가능해 막걸리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사람도 꽤 있다. 허 교장은 막걸리 교육을 받고 장인의 경지로 깊어지든, 벗들과 나눠 마실 술을 소박하게 빚든 둘 다 괜찮은 공부라 말한다.
“대학 교수, 신문사 기자, 음식점 주인, 직장인, 농부,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하시는 일들이 정말 다양해요. 나이도 그렇고요. 이번에 75세 어르신이 오셨는데 친구랑 같이 공부하러 왔다면서 ‘우리 나이 합치면 150이야, 쉿 이건 비밀이야’ 하셨어요. 술 빚어 친구들하고 나눠 먹으려 배우러 왔다는 말씀에 ‘선생님, 참 건강하시네요. 일흔이 넘어 마시고 싶은 술이 있다는 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운동 열심히 해서 오래오래 건강 지키셔야 해요’라고 응원해드렸어요. 건강을 잃으면 좋아하는 술도 못 먹게 돼요. 저는 수강생들과 술 기행 가면 ‘술 한 잔에 1km!’ 하고 무조건 걸으라 합니다.(웃음)”
그러고 보니 그의 주량이 슬쩍 궁금해졌다. 막걸리학교 교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릴 만큼의 만만치 않은 주량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친구들에 비하면 약해요. 같이 대화를 하는 게 좋아 한 잔씩 하는 정도죠. 대학에 들어와 마시기 시작했으니 고등학교 친구들은 제가 술 마시는 줄도 모를 걸요. 말술 마시는 술꾼이었다면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매일 소량이라도 술을 마시게 돼요. 저는 술맛을 느끼고 평가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과음은 하지 않습니다.”
술꾼만이 술맛을 알 것이라는 통념을 보기 좋게 무너뜨린다. 그는 수강생들에게 술을 마실 때는 술맛과 향기를 제대로 감상할 것을 강조한다. 수업시간에 “당신이 가진 언어로 가장 길게 이 술맛을 표현해보라”고 주문하는 것은 후각과 미각 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훈련이다. 술 한 잔 앞에 놓고 대숲 소리를 듣고, 달과 대화를 나누고, 국화 향 속에 흠뻑 젖어버렸던 옛 주당들의 풍류가 새삼 부럽다. 가끔 월하독작(月下獨酌)의 흉내라도 내어봐야 할까? 혼술 시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우리 사회는 혼자 술을 마시면 알코올 중독자나 노숙자 혹은 술꾼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술은 독작(獨酌)이라는 말도 있지요. 자기 삶을 들여다보며 내면을 관찰하는 시간이 된다면 그게 바로 혼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시간 넘게 우리 술에 대해 묻고 대답을 듣고 나니 마치 대숲 바람 부는 양조장에서 백발의 장인이 빚은 탁주 한 사발 시원하게 마시고 온 기분이다. “술에 대해 논하려면 입으로 마시고 가슴으로 하라”는 그의 말이 오래 발효하는 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