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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순에 첫 시집 낸, 멋쟁이 시니어 정봉애 시인
- 엄마 친구 집 대문을 열다 7월의 뜨거운 열기조차 서늘하게 느껴질 만큼 사무친 그리움을 안고 고향 순창으로 갔다. 얼마 전 뇌졸중이 재발되어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서였다. 한적한 골목길을 거닐다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엄마의 오랜 친구 정봉애(89) 씨가 사는 집 앞. 한참을 서성이다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네 엄마가 왼손은 마비됐어도 삶의 의지가 강해 몇 년은 더 살 줄 알았더니, 너무 갑자기 가버렸구나.” 등을 토닥이며 아픈 내 마음을 위로해주셨다. 50년 지기인 두 분은 젊은 시절 학부모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친구가 되어서 보니 어릴 적 가정 환경이 신기하게 비슷했다. 소학교 시절 정봉애 씨는 남원에서, 엄마는 순창에서 우등생이었던 것도 비슷했는데, 같은 상급학교에 지원했다 세월 탓에 좌절한 경험은 아예 똑같았다. 이런 인연으로 두 분은 우정을 돈독히 쌓아왔다. 나이 들어서는 각자 자신이 사는 동네 노인회관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게이트볼 선수로 여러 대회에 출전도 했다. 또 게이트볼 심판 자격증을 따서 심판을 본 것 등등 두 분은 닮은 점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이번 만남으로 엄마 친구였던 그녀가 시인으로 등단을 한 사실을 알게 됐다. 엄마가 편찮으신 동안 소식을 잘 듣지 못했는데 이런 축하할 일이 생겼다. 독서를 좋아하던 소녀의 꿈 2014년 월간 ‘문학공간’을 통해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엄마와 원불교 교당을 같이 다니고, 동갑계모임을 하는 등 그저 평범한 우리네 어머니로만 알았는데 이토록 멋진 시인이 되어 있을 줄이야! 6월에는 첫 시집인 ‘잊지 못하리’가 출간됐다. 더욱이 전북관광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아 시집을 출간했다고. 이 말은 작가로 인정받아 당당하게 낸 소중한 시집이란 뜻이다. 같은 달 말에는 순창문인협회 주최로 시집 출판기념회도 열렸다. 우리 나이로 구순. 100세를 10년 앞둔 정봉애 시인의 새로운 인생에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정봉애 씨, 아니 정봉애 시인은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 문득 시를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 여쭸다. 1929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정 시인은 비교적 부유한 집 막내딸로 귀하게 자랐고, 아홉 살에 사립 소학교에 들어가 열다섯 살에 졸업했다. 전교 1, 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희망하던 공주사범학교 서류전형 합격도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렇게 똑똑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칼바람 불던 세월 탓에 학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학자였던 부친이 딸의 상급학교 진학을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혹여 딸아이가 위안부로 징집될까 부친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접고 정 시인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전북 순창군 유등면 8남매가 사는 작은 농가의 맏며느리로 들어갔다. 슬하에 7남매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틈틈이 책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시동생 친구인 동네 청년들한테 부탁해서 소설, 시, 월간지 가릴 것 없이 책이란 책은 모조리 구해다 읽었지. 시어머니가 호롱불 기름 닳는다고 불 끄고 자라 하면 치마로 문을 가리고 읽었어. 그렇게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지다 보면 시집살이의 고단함도 저만치 날아가곤 했어.(웃음)” 정 시인의 문학적 기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 시절에도 그렇게 책을 읽었다니 새삼 참 멋져 보인다. “많이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시 쓸 생각이나 했겠나. 2006년에 평생을 같이했던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 적적한 마음에 그저 끄적끄적 메모를 해댔지. 그런 습관이 나중에 시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 맘에 드는 것은 행동에 옮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적극적인 성격의 정 시인. 어느 날 순창에서 발행하는 지역신문 ‘열린순창’을 꼼꼼하게 읽다가 무척 마음에 드는 필진을 발견하고 곧바로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 머시냐 저기… 박모 씨 글이 하도 좋아서 그 필진과 인사를 한번 나누고 싶은디. 연락처 좀 알려줄라요?’ 내가 그랬어!” 그 일을 계기로 이 재밌는 할머니(?)의 이모저모를 살피던 신문사 직원이 시 창작 공부를 한번 해보라며, 순창여성회관에서 진행하는 ‘시 창작 교실’을 소개해주었다. 글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스스로 써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던 정 시인은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시 창작 교실을 노크했다. “첫 시간에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니 40, 50대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더만. 속으로 깜짝 놀랐어. 퇴직하고 나이 지긋한 심심한 양반들이나 있겠거니 생각했거든.” 그래도 기죽지 않았다는 정 시인. 젊은이들 틈에 용감하게 자리 잡고 앉았단다. 자그마한 체구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도전정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공공도서관 등을 찾아다니며 각종 인문학 강좌는 모두 섭렵하다시피 했다고. 특히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시 창작’ 수업을 좋아해 매주 무척 기다렸다고 한다. “시 창작 강의가 너무 재밌어서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 선생님이 내준 숙제 꼬박꼬박 하고, 꾸준히 다니다 보니 이런 좋은 결실을 보게 된 것 같아.” 시인 정봉애로 살다 정 시인의 하루는 규칙적이다. 오전 4시에 일어나 요가와 스트레칭을 하고 7시에 아침식사를 마치면 외출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 서예, 시창작, 시낭송, 게이트볼 등 그날그날 정해진 일정을 소화한다. 오후 5시 반쯤에는 귀가해서 신문 보고, 시 다듬고, TV 뉴스 잠깐 시청한 뒤, 9시 조금 넘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이런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도 정 시인에게는 단 하나 예외적인 것이 있는데, 자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새벽 1시가 됐든 2시가 됐든 벌떡 일어나 곧바로 메모하는 것이다. 시에 대한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다. 솟구치는 그녀의 시심은 아주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하기도 했다. 작년 11월, 순창읍 일품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할 때 정 시인은 순창평화의소녀상건립군민추진위원회로부터 자작시 낭송 요청을 받았다. 당황스러워 “다른 훌륭한 시인도 많은데 왜 나에게 하라는 거냐”며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정 시인이 적임자라며 거듭 요청을 해왔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결국 시인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밤을 새워 작품을 완성했다. 정 시인은 같은 또래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친구’라 부르며 ‘친구여 편히 쉬시라’는 제목의 자작시를 작년 12월 ’평화의 소녀상‘ 건립 행사 때 낭송해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내 사랑, 잊지 못하리 여담으로, 시집 제목을 왜 ‘잊지 못하리’로 했나 여쭸다. “나는 그냥 ‘노인네 넋두리’로 하자 했는데, 내가 쓴 시가 그런 제목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더만.(웃음)” 할 수 없이 주변에서 권유하는 대로 ‘잊지 못하리’로 제목을 막상 붙여놓고 보니 아주 마음에 든다며 천진스레 웃으신다. 123편의 서정시를 모아 엮은 정 시인의 첫 시집 ‘잊지 못하리’는 정 시인의 요청을 받아 노인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큼지막한 글씨로 인쇄돼 정감을 준다. “내 소소한 일상을 보고 느낀 대로 적어 다듬었을 뿐인데, 노인네 넋두리로 치부하지 않고 주변에서들 공감해주니 어찌 이리 고마울 수 있을까.” 90세 넘은 나이에 시 쓰기를 시작해 일본 열도를 감동시킨 100세 시인 ‘시바타 도요’가 롤 모델이라고 했다. 정 시인은 ‘시바타 도요’처럼 100세가 되기 전에 두 번째 시집을 내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한다. “시는 이제 영원한 내 친구, 시 쓰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앞으로도 쉬지 않고 끈기 있게 계속 쓸 참이여.” 정 시인의 하루는 요즘 더 바빠졌다. 시집 발간 후 여기저기서, 심지어 멀리 미국에서도 축하인사를 보내와 정신없을 정도라고. “내가 요즘 심심할 겨를도 없이 호강을 많이 한다우. 여기저기 크고 작은 행사에서 모셔가지, 젊은 동호회 회원들이 수시로 전화해 드라이브시켜주고 맛있는 밥 먹으러 다니지, 아주 행복혀.” 90세 인생이 이리도 즐거울 수 있을까. 정 시인은 문자는 물론 컴퓨터와 카카오톡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안다. 카톡 프로필 란에 ‘매일매일 싱그럽고 화려하게ㅋㅋ’라는 멘트가 놀랍다. 열정은 사람을 늙지 않게 만드나보다. 이 나이에 뭘 하나, 세상 다 산 듯 정신줄 놓고 있던 게으른 내 영혼에 90세 시니어 시인은 섬광처럼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 잊지 못하리 - 정봉애 이토록 보고픔 어찌하오리까 고요 속에 아른아른 아린 그리움 어찌하오리까 가슴 깊이 젖어드는 끈끈한 정 어찌하오리까 마디마디 묻어나는 님의 향기 어찌하오리까 이왕에 가버린 사랑 어찌하오리까 정봉애 시인은, 어린 나이에 결혼해 60년 넘게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온 남편이 병환으로 세상을 뜨자 하늘이 무너진 듯 온 세상 슬픔이 다 몰려왔다고. 6·25동란 때 오빠들과 부모님을 모두 잃은 정 시인에게 남편은 오빠 같고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내 나이 78세 때 82세 남편이 가버렸지. 다들 살 만큼 살았다고 말들을 하더라만, 남편만 의지하고 살았던 나는 그 허전한 마음을 어디에도 둘 데가 없더라고.” 저녁이면 남편과 오순도순 술 한 잔씩 반주로 나누며 밥 먹던 소소한 행복. 첫 잔을 꼭 먼저 따라주던 다정했던 그 사람. 이 시 ‘잊지 못하리’는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정 시인의 애틋한 심정이 아리게 담겨 있다.
- 2018-09-0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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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 전 선연한 그때 기억 속의 큰 가르침
- 선생님,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그동안 강녕하신지요? 무엇 하나 순조로울 것 없는 세상에 날씨마저 이러하니 주위의 장삼이사의 삶들이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언젠가 읽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에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우상을 침묵케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어려울 때마다 이 말을 주문처럼 외며 저는 정치가 통계수치로 제시하는 장밋빛 희망 같은 건 결코 믿지 않고 스스로를 살아왔습니다. 이건 선생님께서 저에게 가르치신 삶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1985년인가 그때 서신에 선생님께선 “삶의 분한(憤恨)을 다 터뜨린다고 해서 문제가 하나라도 해결되는 것이 있던가요? 때론 침묵이 필요합니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는 여기서의 ‘침묵’을 카뮈의 ‘자기의 고통을 주시하는 것’으로 재해석해서 힘들 때도 가능한 한 비명을 지르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한데 두서없이 무슨 서신 이야기냐 하실 것 같아서 3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연한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올 초 ‘문학사상’에 발표한 ‘내 가난의 고귀한 목록엔 장미의 열정도 있다’는 시에서 “전교 일등 아들을 차마 공장으로 보낸 한과/그 탓에 평생을 룸펜이 되어버린 분노가 있었다!”는 구절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나이 60에 돌아본 지난 59년이 잘못이었다’는 뜻의 오십구비(五十九非)라는 말이 장자 ‘잡편’에 나오던데, 환갑이 되어서 돌아보니 어쩌면 위의 졸시 두 구절에 제 인생의 코가 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 그때 저는 너무 힘든 시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제 등단작품 중 하나인 ‘동구밖집 열두 식구’는 저의 가족사로 땅 한 뙈기 없이 죽세공 일로만 호구지책을 삼던 그때에, 삼부자가 임란 의병으로 전사한 제봉 고경명의 12세손이 당신이라는 것을 되뇌던 아버지의 주사(酒邪)가 지금의 폭염처럼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공부에서 중동무이당한 채 세상과 삶에 대한 분노로 10여 일간 서울, 부산 등지로 고단(孤單)의 행로에 몸을 맡겼었습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놓지 않았던 소설가의 꿈 때문에 손엔 늘 책이 잡혀 있었던 그 즈음, 방위 복무를 마치고 부산에서 양장점 수선가게를 하던 여동생 집에서 잠시 기거하던 1984년이었습니다. 할 일이 없어 서면의 ‘영광도서’에 들락거리던 중 우연히 시집 두 권을 보게 되어, 이를 계기로 일주일 만에 20여 편의 시를 써서 무모하게 ‘실천문학’에 보냈습니다. 한데 그중 7편이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실려 소위 등단이라는 것을 하였는데, 저를 포함한 14명의 농민, 노동자, 운동권 사람 등의 투박한 시들을 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 발표를 등단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다시 소설을 쓰고 있던 차, 당시 ‘창작과비평’의 주간이었던 선생님께서 창비 앤솔로지에 게재할 시 5편을 청탁해주셔서 본격적으로 시를 독학하기 시작했으나 청탁에 응한 시는 게재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시적 재능을 보았기에 선생님께서 청탁하신 걸로 스스로 해석해서 저는 1985년부터 한 번에 20~30편의 시를 대학노트에 써서 선생님께 무턱대고 보냈습니다. 아무 물정도 모르던 저는 오로지 공부에 대한 일념 하나로 원고노트를 보냈었는데 선생님께선 이를 무시하지 않고 원고지 한두 장에 꼭 독후감을 써서 보내주셨습니다. 그중 서두에 밝힌 평생 저의 삶의 철학이 된 말씀을 백석의 ‘주막(酒幕)’이라는 시와 함께 써서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제 시가 분노와 한풀이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시는 긴장과 절제의 미학이다”라는 말씀도 해주셨는데 이는 제 시가 쓸데없이 무슨 뱀의 다리처럼 길어졌기 때문이었겠지요. 읽으신 시에 ○표나 ×표 혹은 Δ표 등으로 표를 해주고 그중 ○표의 시들은 몇몇 잡지에 발표도 해주시길 2년 여, 저는 마침내 농촌·농민 얘기를 쓴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라는 첫 시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객지를 떠돌다 선생님께 시를 배우며 마음을 잡고 고향에 내려와 소작(小作) 일도 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런 선생님과의 인연을 몇 군데 약간씩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데 이렇게 정식으로 편지를 드리게 된 것은 저는 ‘독학자’이기에 그 어떤 스승도 없으나 그래도 제가 오늘날까지 나름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자부심의 근거에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시집 8권, 산문집 3권 그리고 문학상도 네댓 번 탔으니 이는 시인으로서의 덤이지요. 만약 그때 선생님께서 제 원고노트를 외면하셨다면 어쨌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씩 해봅니다. 사람들은 이런 가정이 부질없다고 하겠지만 저에게는 그만큼 삶의 허기와 동시에 삶의 과잉으로 모든 신(神)들과도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었기에, 그때 선생님의 짤막한 서신들은 저에겐 시원지(始原地)의 단물 같은 것임에 분명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있어 가난과 병고며 불우는 여전히 개선될 여지가 없어 이런 것들에는 이제 무심하기도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외아들의 난치병 때문에 크게 실망한 저는 10여 년 전부터 다시 고향 집에 처박혀버렸습니다. 고향집에 우거하며 텃밭에 상추며 고추를 심고 불교도 배우고 좌선도 해보지만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당뇨망막증 때문에 예전처럼 책을 많이 못 읽는다는 것과 ‘대표시’ 한 편은 남겨야겠다는 욕심이 날로 커져간다는 사실입니다. 요새만큼 저의 ‘천학비재(淺學菲才)’를 절감할 때가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중앙일보 아침 시란에 “고재종의 시는 때론 수일하고 때론 속악하다. 속악하다 함은 명품주의(名品主義) 탓이다”라는 정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데 그 명품주의는 저의 무학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한 시집 자서에 밝힌 대로 오월 바람에 잎새가 한 번 발랑 뒤집히는 순간만큼을 포착한, 그야말로 신운(神韻)이 스치는 시를 받아 적어야할 텐데 말입니다. 한데 인간사는 여전히 고단합니다. 시골에 있으니 생사가 너무 분명해 보이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가 아니라 실제 등이 활처럼 휘어버린 호호백발들이 유모차로 고샅길을 밀고 다니는 모습을 매일 보며 저는 여전히 ‘민중파’임을 절감합니다. 그 노인들의 이름이라도 시로 불러주는 것으로, 지금껏 선생님께 약주 한잔 대접해드리지 못한 저의 미급과 부덕을 대신하려 합니다. 하루하루 행복하시길 빕니다. 고재종(高在鍾) 시인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역임. 시집으로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과 육필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이 있고, 시론집으로 ‘주옥시편’과 산문집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등이 있음.
- 2018-09-0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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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석4조의 즐거움, 문화관광해설사
- 젊은 시절 외국에 가고 싶은 마음에 해외공사를 많이 하는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업무상 유럽으로 자주 출장을 가서 주말에는 출장지 부근 관광지를 다닐 기회가 많았다. 덕분에 현지의 많은 관광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긍심과 열정이 넘쳤고, 내가 그들 나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퇴직을 앞두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고민하던 중, 문득 유럽 관광지에서 만났던 관광가이드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관광가이드가 되기로 마음먹고, 소양을 갖추기 위해 우선 한국관광공사가 발급하는 영어 분야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관광가이드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 무렵 서울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해설사가 되었다. 해설사들은 서울을 방문하는 국내외 관광객에게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지 해설을 제공한다. 서울시에는 현재 203명의 해설사가 활동하고 있다. 해설 코스는 청계천, 경복궁 등 25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고 한 번에 소요되는 시간은 도보로 약 2시간 정도다. 나는 2009년도에 서울시 해설사가 되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9년째다. 보통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해설을 하니 지금까지 약 900팀의 관광객에게 해설을 한 셈이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다양한 관광객을 만난다. 한번은 네덜란드의 가족을 만났는데, 부모와 딸이라고 했다. 그런데 부모는 서양인, 딸은 동양인이었다. 알고 보니 딸은 한국에서 태어나 네덜란드로 입양된 여성이었다. 관광이 끝난 후 “친부모를 만날 때 통역을 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해 흔쾌히 수락했고, 실제로 만났다. 친부모가 별거 중이라 따로 만나는 수고가 있었지만, 한 사람이 평생 그리워했을 부모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되어 무척 보람 있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보람 외에도 해설사 활동으로부터 오는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양한 세계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설활동을 할 때마다 두 시간 정도 걸으니 건강에도 좋다. 또한 영어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이 밖에 해설사들의 평균연령이 60대 중반인데 외로울 수도 있는 노년기에 서로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좋다. 매월 월례회를 통해 해설 활동과 관련한 의견을 교환하고 친목도 도모한다. 노년에 자기계발을 원하면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외국어에 소양이 있는 분이라면 문화해설사가 되어 우리나라를 알리는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해볼 것을 적극 권하고 싶다.
- 2018-09-0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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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멋진 남자 남진이 왔다잉!
-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상징하는 ‘오빠’들이 있다. 그런데 남진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울림은 수많은 ‘오빠’들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일찍이 나훈아와 함께 라이벌 구도를 만들며 전설적인 남진 시대를 만든 그가 70이 넘어 펼치는 요즘 공연을 보라. 여전히 무대 위를 날아다닌다. 과거와 다를 바 없이 변치 않는 에너지와 무대를 휘어잡는 여유, 특유의 인간적인 매너는 그를 영원한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더없이 남진다운 유쾌함과 호탕함이 어우러진 인터뷰에서 남진을 느껴보자. “50년 넘게 부른 노래는 제 인생의 전부죠. 때론 하기 싫을 때도 있었고 슬럼프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노래’고, 노래가 ‘나’이구나 싶어요. 노래는 그냥 자기를 표현하는 거예요. 그걸 안 느낄 수가 없죠.” 그렇게 말해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가수, 남진과의 대화는 펄펄 끓는 에너지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노래 장르를 설명하며 각 장르의 박자와 멜로디를 구성지게 재현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넘실대는 흥이 느껴졌다. “‘님과 함께’가 트로트라고요? 전혀 아니에요. 그런데 옛 가수들을 무조건 트로트 가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사실 남진은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독특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가요계의 주류인 트로트의 기조와는 다른 결을 추구해온 가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애초에 가요가 아니라 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기억에서 음악에 대한 가장 강렬했던 첫 경험은 중학교 3학년 때 들은 닐 세다카의 ‘Oh! Carol’이었다. 그 노래에 충격을 받고 그는 폴 앵카, 엘비스 프레슬리 등 스탠더드 팝과 로큰롤의 세계로 들어간다. 남진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세련미는 거기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저는 가요의 ‘가’ 자도 몰랐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노래는 팝을 좋아했지만 가수가 되기 위해선 가요를 해야 했죠. 솔직히 그때는 옛날 노래들이 촌스럽다는 느낌밖에 안 들었고 나와 안 맞더라고요.” 나이 들며 배우는 옛 노래의 역사와 혼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 ‘아 이게 우리 노래구나’ 하며 깨닫게 되는 것이 많다. 그 맛을 느끼고 배우고 싶어서 그는 요즘 남인수, 현인, 백년설 등의 노래를 들으며 공부하고 있다. 나이가 70이 넘어서도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그 꾸준한 학구열 덕분이 아닐까 싶다. 문득 그의 요즘 노래가 풍성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나이 들수록 더 깊은 울림을 주고 묵은지 맛 같은 풍미를 느끼게 해주는 노래로 사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전쟁도 치렀던 그 역사와 혼이 옛 노래에 다 담겨 있어요. 요즘은 그때처럼 애절하고 한이 서린 노래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이 부르는 트로트에 깊은 감동이 있나요? 물론 기술적으로는 훌륭하죠. 다만 옛날 사람들과 같은 경험이 없으니….” 새롭게 깨달은 선배들의 업적은 그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해줬다. 그는 제2회 남인수가요제에 참석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남인수 선생 고향이 진주인데 가보니 어디를 봐도 그의 이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작년에 가요제도 했잖아요, 근데 왜 이름이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분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 노래를 불러서 없앴다는 거예요. 속으로 ‘우리나라 큰일 났다’ 싶었죠. 그 사람이 무슨 죄가 있어요? 나라가 잘못한 거지. 어떻게 사람을, 한 시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를 이렇게까지 매도할 수 있나 싶어서 그다음부터는 안 갔어요.” 엄격한 아버지, 여성의 힘을 알려준 어머니 남진에게는 일곱 살짜리, 다섯 살짜리 손자가 있다. 손녀를 원하는데 마음대로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세 딸과는 자주 얘기를 하지만 아들과는 그렇게 살갑게 지내는 게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가 자신이 아버지를 닮아서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 김문옥 씨. 호남에서 가장 큰 정미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말씀이 적고 보수적인, ‘그 시대 아버지’였다. “딸 여섯을 낳고 쉰하나에 절 낳으셨어요. 얼마나 귀했겠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엄하셨어요. 평생 머리 한 번 안 쓰다듬어줬고 엉덩이도 안 두들기셨죠. 나는 아들에게는 안 그래야지 했는데 결국 아버지랑 똑같네요.(웃음)” 많고 많은 직업 중 왜 하필 ‘풍각쟁이’냐며 만류하셨던 아버지. 그런 엄격한 아버지가 어려워 그는 어머니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자랐다. 어머니 장기순 씨는 그 시절에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일본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던 흔치 않은 여성이었다. “어머니의 사랑과 교육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가장 큰 힘이었어요. 보통 분이 아니셨어요. 그리고 여성의 힘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셨어요.”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들 아버지 몰래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배우의 꿈을 키우다 우연히 친구들과 노래하며 놀다 캐스팅이 돼 1965년 1집 앨범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매하며 데뷔했다. 부유한 집안, 이른 성공, 지속적인 인기, 귀공자 이미지 등으로 남진이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산 걸로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의외로 거친 순간들이 가득하다. 심지어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도 여러 번 있었다. “아마 제가 싸우다 칼 맞은 몇 안 되는 대한민국 연예인일 거예요. 그때 대동맥을 5mm 비껴 지나갔는데 0.1mm만 칼이 틀어졌어도 죽었다고 하더군요.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그러고 보니 그는 해병대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파병되기도 했다. 전쟁터는 죽음이 일상인 공간이다. 그곳에서도 당연히 죽을 고비를 꽤 넘겼다. “베트남전에 파병됐을 때 바로 앞에서 폭탄이 터지기도 했죠.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간 적도 있고. 그때가 스물서너 살, 이십대 초반이었어요. 겁 없을 때니까 해병대에 자원해서 갔던 거죠.” 당시 베트남전 파병은 원래 특수병과가 아니면 1년 이상 못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무슨 호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여단장에게 기간을 더 연장해 달라 하고 만 2년을 그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게 의문이야. 여단장이 ‘야, 이놈아 딴 놈들은 하루라도 빨리 보내 달라고 하는데 너는 왜 안 가려고 그래?’ 하더군요. 이십대면 여자도 보고 싶고 날아다닐 때인데 그런 생각 막아주고 거기서 머무르게 해서 제대하면 바로 활동하게 한 어떤 존재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도 의문이야. 지금 그렇게 하라면 절대 못할 거 같아.(웃음) 아마 하느님이 가수로 성공하라고 인도한 거 같아요. 감사하죠.” 수많은 인연이 만들어준 남진 시대 남진은 운명적인 인연을 믿는다. 그래서 감사하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우선 팬들. 그들이 없었으면 나도 없었죠.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TBC의 ‘쇼쇼쇼’를 연출한 황정태 PD, MBC의 전우중 PD가 있죠. 사실상 그분들이 저를 예뻐해주셔서 최고의 스타가 됐고 남진 시대를 만들 수 있었어요. 노래 못하면 연습하다 ‘야, 똥가수 나와!’ 하고 대놓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성질은 좀 거친 분이셨지만.(웃음)” 그를 21세기의 현역으로 만든 히트곡 ‘둥지’의 탄생도 드라마틱하다. 전두환 집권 시기에 제재를 받아 방송 출연도 못하고 고향에 내려가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가수가 운명이었던 그는 노래가 하고 싶어 3년 동안 곡을 모으고 연습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앨범 녹음을 끝내고 발매를 앞둔 시점이었다. 어느 날 지방에 갔다 오니 사무실에 데모곡이 담긴 카세트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틀어서 노래를 듣는데 소름이 쫙 돋는 거야. 편곡하는 사람 빨리 오라고 해서 편곡했죠. 그리고 녹음을 하려는데 배일호가 내가 녹음하고 싶은 날에 녹음실을 빌린 상태더라고. 그래도 무조건 가보자 해서 갔죠. 그러고는 배일호에게 ‘내가 급하게 해야 할 녹음이 있는데 이삼십 분만 빌려 달라’고 부탁해서 겨우 녹음했죠.” 대박을 터뜨린 남진의 뚝심 3년 동안 준비한 노래를 뒤로 미루고 순식간에 녹음된 ‘둥지’를 타이틀곡으로 한 앨범이 나왔다. 마침 라디오에 지인들이 있어서 신곡 나왔으니 신경 좀 써 달라고 부탁도 했다. 그런데 한 6개월 지난 후에 라디오 부장이 ‘둥지’가 아닌 다른 곡으로 타이틀곡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의사를 물어왔다. “이게 반응이 전혀 없으니까, 같은 앨범 안에 실린 다른 노래가 홍보에 더 낫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사실 ‘둥지’는 일반 트로트곡이 아니야. 재즈지. 난 그게 좋아서 한 거거든. 그때 바꿨으면 ‘둥지’는 끝이었죠. 하지만 ‘이 음악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냥 이걸로 하겠다’ 해서 그대로 밀고 갔어요.” 남진의 뚝심은 통했다. 1년 정도 지나자 사람들이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내 대박이 터졌다. 그 후로 ‘둥지’는 20년째 남진의 전성기를 만들어준 노래가 됐다.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이고, 그런 영을 주는 게 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더 멋진 영을 달라고 기도하죠.” 남진의 인생을 돌아보니 그가 신앙을 말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요즘 다시 흥이 나는 참이다. 마음에 드는 곡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은데, 이번에 나온 신곡 ‘남자다잉’이 그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로큰롤에 기반해 만들어진 이 노래는 듣자마자 ‘남진은 역시 남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남진다운 에너지로 채워져 있기에 그의 만족감이 얼마나 큰지 저절로 이해가 간다. 노래의 본질로 회귀 중 “요즘은 과다한 치장을 빼려고 연습하고 있어요. 묵은 때를 벗겨내는 연습인데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정신에서 때가 떨어져나가야 소리에서도 때가 벗겨져요. 마음이 와야 소리가 되는 법이니까. 그런데 50년 동안 쌓인 걸 털어낸다는 게 쉽지 않아요.” 50여 년에 걸친 가수생활, 남진은 지금 ‘본질로의 집중’이라는 화두에 몰두해 있다. 그가 요즘 가사에 신경 쓰는 이유도 그러한 본질로의 추구와도 관련 있어 보였다. 요즘은 노래방 시대인 만큼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야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른다는 그의 진단은 예리했다. “진솔하게 부르고 싶어요. 그런데 나이가 있으니까 노래 한 곡 부를 때마다 죽겠어.(웃음) 열심히 운동해야지.(웃음) 건강관리는 수영으로 하고 있어요. 제가 목포 놈이잖아요. 수영은 일곱 살 때부터 했죠.” 어렸을 때부터 맞은 바닷바람은 그의 폐를 단련시켜줬다. 노래는 호흡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의 단련된 몸은 아직도 여전한 ‘남진다움’을 유지시켜주는 비결이기도 하다. “감성은 생각이고 소리는 폐로 합니다. 폐가 안 좋으면 힘 조절이 안 돼요. 그래서 우리는 소리 들으면 그 가수가 어떤 상태인지 딱 알아요.” 그는 건강에 있어 중요한 게 마음이라고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 마음을 놓아야 하는데 반대가 돼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서운한 게 많아지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싫어져요.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영원한 오빠, 역사를 만들다 현재 고흥에서는 남진기념관이 만들어지고 있다. 비용은 남진이 마련해서 짓는다. 박병종 전 고흥군수와의 인연으로 성사된 이 작업은 내년에 마무리되어 상반기 중에 문을 열 예정이다. 남진이라는 가수가 가요사에 남긴 업적을 생각하면 기념관이 만들어지는 건 이상하기는커녕 늦은 감마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붙는 부담스러운 칭호들에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노래에 왕이 어딨어요? 왕은 군림하는 건데, 노래는 다 다른 거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나훈아 씨 노래를 부르라면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그 감정을 그만큼 내겠냐고요. 못 내. 최백호 씨나 송창식 씨 노래도 애창하는데, 흉내를 내는 거지. 십 분의 일이나 비슷하면 다행인 거예요.” 그 얘기를 들으며 남진 또한 누구와 비교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불가능하다. 그만큼 남진 역시 우리 가요사가 만들어낸 독보적인 존재 아니던가. “무슨 왕이니 황제니, 방송 나가서 사회자나 작가가 나를 그렇게 칭하는 말들을 들으면 불러서 얘기해요. ‘난 딱 한마디야. 가요계의 영원한 오빠. 오빠의 원조. 그거면 끝이야.’ 삶이 힘들어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남자다잉~~~~.(웃음)”
- 2018-08-3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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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여행 소환, 비엔나와 모차르트
- 최근 방영하는 여행 관련 TV 프로그램 중 ‘꽃보다 할배 리턴즈’(tvN)를 시청했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 김용건 등 원로 배우들이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순으로 동유럽을 돌아보는 여정으로 꾸며졌다. 오스트리아 비엔나(빈)의 경우엔 나 또한 두 번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워낙 좋아하는 도시이기에, TV를 통해 다시 추억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첫 비엔나 여행은 40대 후반 프랑스, 이태리 등 유레일패스 기차여행을 하면서 인상 깊었던 도시 인스부르크와 함께였다. ‘비엔나 숲속의 왈츠’와 ‘모차르트’ 우습게도 ‘비엔나커피’ 정도를 머리에 그리며 떠났는데, 영어가 원활하지 않다 보니 이해가 덜 되어 답답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안은 중세 서양 문화의 현장인 비엔나 구시가지 풍경은 마치 심봉사가 광명 찾듯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문외한으로 갔던 첫 번째 비엔나 여행에서의 아쉬움은 이후 미술사, 클래식 음악, 유럽 역사, 인문학을 가까이하는 데 동기부여가 되었다. 강의도 듣고 공부도 하여 2011년 60세 언저리에 다시 한번 비엔나를 찾았다. 두 번째 여행은 독일, 체코 프라하, 비엔나, 잘츠부르크를 포함하는 동유럽의 여정이었다. 18세기 비엔나는 화려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음악의 도시로도 잘 알려졌다. 18세기 고전파 음악가 3인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회자하는데, 특히 잘츠부르크와 비엔나에는 모차르트의 발자취로 가득하다. 덕분에 현재 두 도시의 관광 수익은 지역 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지만,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후세인들은 평생 빈곤 속에 살다 죽음을 맞이한 그의 삶을 몹시 안타깝게 여긴다. 고건축물이 가득한 구시가지 가운데 비엔나의 상징인 슈테판 대성당이 있다. 1100년대 건축 이후, 수차례에 걸쳐 개축되며 세계적인 유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성당의 이름인 ‘슈테판’은 성경 속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집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하이든과 베토벤이 소년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던 성당이기도 하다. 모차르트는 슈테판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던 화려한 결혼식과 시신이 없는 가장 슬픈 장례식의 주인공이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보았듯 모차르트는 ‘레퀴엠’(진혼곡)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비명횡사하여 끝내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에는 너무나 많은 가설이 따르지만, 당시 열악한 교통수단으로 어린 나이부터 수많은 순회 연주를 다니며 이름 모를 풍토병에 시달렸고, 성인이 되어서도 폐결핵 등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죽음을 경험해야만 쓸 수 있는 곡 ‘레퀴엠’을 작곡하면서 실제로 죽음의 경지까지 자신을 몰입시켰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세기의 음악천재는 그렇게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만다.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모차르트가 말년에 병마와 빈곤 속에 시달리며 작곡한 ‘클라리넷 5중주 A장조 K581’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곡 중 하나다. 유홍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온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TV와 함께 떠난 나의 세 번째 비엔나 여행에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이 보였다.
- 2018-08-2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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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천명처럼 받아들인 일, 강사
- 나는 우연한 기회로 강사 일을 시작했다. 은퇴 후 경로당 봉사를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을 잘 못해 한국언어문화원에서 스피치를 배웠다. 몇 개월 후 어느 정도 발성 훈련이 된 듯해 대통령기쟁탈 웅변대회 출전해보자 하고 나갔다가 특등을 했다. 그러자 자신감이 생겼고 2년 뒤에 출전한 대회에서는 대상을 받았다. 그 후 우연히 시니어파트너즈 강사 과정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노느니 한번 배워볼까?’ 하는 마음으로 등록했다. 그런데 교육을 받는데 몰라도 이렇게 모를까, 내가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사실에 무척 당황했다. 교육이 끝나면 필기시험을 봐야 했는데 떨어지면 수료증도 못 받고, 실기시험에 떨어지면 강사 자격증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했다. 얼마나 긴장이 됐는지, 동기생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나만 떨어져 망신당하는 꿈까지 꿨다. 병아리 강사에게도 회사에서 강의 기회를 줬다. 그러나 나는 계속 미룬 채 닥학열공(닥치는 대로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며 내공을 쌓았다. 첫 강의는 29명의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어떻게 끝났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박수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강단에서 내려오던 순간의 희열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됐다. 이날을 계기로 나는 강의를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강의의 매력은 신나고 재미있고 보람찬 데 있다. 강사가 마련한 유쾌한 긴장 속으로 이끌려오는 수강생들, 강의의 본질과 개념을 터득해가는 눈빛들, 그 주인공들과 여백을 서서히 채워나가는 뿌듯함이 있다. 온통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며 사는 이 시대에 눈빛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사람은 아마도 강사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강사가 되는 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강사의 기본은 스피치다. 말은 그냥 말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누군가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면 그 말은 사람에게 행복의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려면 같은 말도 더 맛깔스럽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의가 끝나고 이메일 혹은 전화로 상담이 들어올 때 이 직업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을 하며 보람을 느낀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잘 못 했는데 그런 내가 연단에 서고 강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를 강사로 이끈 우연한 기회, 그 선택을 이제는 천명처럼 받아들인다.
- 2018-08-2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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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영어, 매일 딱 10분만 공부해보세요
- 오전 9시, 가양5종합사회복지관 지하 1층 팬지배움방. 영어를 배우기 위해 모인 시니어 중에서 유독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한 여인, 바로 김정숙 씨다. 노트 대신 이면지를 엮어 만든 연습장에 꼼꼼히 수업 내용을 받아 적는다. 선생님 질문에 큰 소리로 대답도 척척 하며 수업을 즐기는 모습. 대학생 손녀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 같다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그이지만, 처음엔 ‘ABC’부터 시작했단다. 60년 넘게 영어를 몰랐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영어를 알고 난 뒤 세상이 더 즐거워졌다는 김 씨다. “5~6년 전에 남편이 아파서 집에 누워 있었어요. 낮에는 간호 도우미가 와서 봐주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으려니 그 시간이 참 무료하더라고요. 평생교육 시대라고 하는데, 나도 뭔가를 배워야겠다 싶었죠. 학창 시절에는 아버지가 위암을 앓으셔서 철없이 공부 욕심을 낼 수가 없었거든요. 그때 못 배워 아쉬웠던 마음도 채울 겸 영어 공부를 시작하게 됐죠.” 처음 도전했을 때, 젊은 강사가 가르치는 수업을 듣고 실망만 하고 돌아왔다. 시니어의 눈높이에 맞춘 강의가 아니었기 때문. 다행히 그 후 현재의 선생님(박미령 강사)을 만났고, 한 걸음 한 걸음 영어를 배워온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다. 수업시간 외에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카카오톡으로 선생님에게 질문하는데, 늘 친절히 대답해주는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영어를 배워나갈 수 있었다. “나이 들어 공부하려니 간단한 것도 자꾸 잊어버리게 돼요. 그때마다 선생님이 괜찮다며 이해해주시고, 반복해서 가르쳐주셔서 고마웠죠. 요즘에는 길거리를 다녀도 곳곳에 영어가 널려 있잖아요. 가게 이름, 음식 메뉴 등등. 이런 것들을 하나씩 읽을 수 있고 그 뜻을 알게 되니 일상이 더 즐거워졌어요. 완벽히는 몰라도 딸이랑 같이 자막 없는 미국 드라마도 볼 수 있고요. 아직 해외에 나가 실력 발휘를 해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가서 멋지게 영어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해요.” 지금보다 더 실력이 늘면 외국인 친구에게 편지도 써보고, 자신처럼 영어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도움도 주고 싶다고 한다. 김 씨에게 언제쯤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겠느냐 묻자 손사래를 치며 소박한 바람을 드러냈다. “나에게 마스터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죠.(웃음) 어디까지나 ‘앎’의 과정 아닐까요? 내 체력이 뒷받침되는 한 무한대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그 끝은 없지만, 하나라도 했으니 여기까지 왔잖아요. 저도 육십 넘어 시작했어요. 너무 늦었다고 도전을 망설이지 마세요. I can do it, You can do it!” Q&A로 보는 '시니어 외국어 배우기' 도움말 박미령 등촌ㆍ가양종합사회복지관 시니어 영어회화 강사(본지 동년기자 3기) Q. 시니어 영어 수업에 찾아오는 분들의 목표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A. 대개 해외여행 가서 의사소통하기 위해 배우려 합니다. 학창 시절 배우지 못한 한을 풀려고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아예 처음 배우는 분들만 있는 건 아녜요. 언어는 습관인데, 한때 영어를 열심히 배웠어도 그동안 일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다시 처음부터 공부하면서 영어 세포를 되살리시곤 하죠. Q. 수업은 주로 어떻게 진행되나요? 문법보다는 회화 위주이기 때문에, 먼저 입에서 익숙해지게끔 반복해서 말하도록 하고 있어요. ‘thank you’처럼 간단하고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thank you very much’ 이렇게 부사나 형용사 등을 하나씩 더해가죠. 나이 드신 분들은 한국식 영어 발음이 배어 있는 경우가 많아 잘못된 발음도 교정해드리고요. 영어 간판이나 뉴스나 TV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일상 영어도 알려드리면 참 좋아하십니다. Q. 일반 학생들과 시니어들을 가르칠 때 차이점이 있다면요? 젊은 사람들은 살짝 자극을 주면 더 하려고 하지만, 시니어들은 오히려 그런 자극에 마음을 다칠 수 있어요. 열심히 배우려고 왔다가 의기소침해지기 일쑤죠. 그래서 최대한 편안하게 배울 수 있도록 해드리는 편이에요. 가끔 지각하거나 숙제를 못했다고 미안스러워서 수업시간에 안 오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결석하셔도 괜찮다. 지각하면서도 오시는 건 더 훌륭한 거다”라고 말씀드리고, 숙제도 부담되니 최대한 적게 드리려고 해요. Q. 늦깎이 학생들은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나요? 젊은이들처럼 ‘공부가 하기 싫어서’ 포기하는 분들은 거의 없어요. 다만, 연세가 있는 분들은 갑자기 편찮으시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수업을 중단하시죠. 또, 자꾸 강의실 문만 나서면 까먹는다고 걱정하시는데 “제가 반복해서 가르쳐 드릴 거다. 그러면 크리스마스 때는 꼭 하실 수 있다”라고 응원해드리곤 해요. 젊은 사람도 영어는 계속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려요. 하루 하나씩이라도 꾸준히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하시는 게 좋습니다. Q. 시니어에게 추천하는 공부 방법은 무엇인가요? 10분씩만 공부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공부하다가 재미있어서 더 하고 싶어도 절대로 더 하시지 말고, 10분 하시고 나면 책을 덮으세요. 대신 매일 하셔야 해요. 일주일에 1시간 몰아서 하는 것보다, 매일 10분씩 하는 게 영어 실력을 늘리는 데 효과적입니다. 드라마들 많이 보시잖아요. 잠깐 광고하는 틈에 10분 공부하셔요. 좀 더 하고 싶으시면 EBS 영어 방송을 보는 것도 추천해요. 유아부터 초등, 중등, 성인 등 단계별 프로그램이 잘 돼 있어요. 스마트폰에 익숙한 분이라면 팟캐스트 무료 영어 강의도 보시면 좋아요. 그중에서는 ‘일빵빵 입에 달고 사는 기초영어’를 권합니다. 영어 초급 단계의 분들에게 도움 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 2018-08-2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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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양식 담는 책·글쓰기 학교
- 직장을 퇴직한 시니어 중 하는 일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남달리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바로 액티브 시니어다. 바쁘든 바쁘지 않든 그동안 살아온 인생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왕성한 에너지로 책을 쓰고 글을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목적을 위해 내가 10년 전에 시작한 것이 ‘책과 글쓰기 학교’다. 2년 전까지는 ‘에세이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전문 수필가를 모시고 수필 쓰기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책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현재 밴드 회원이 불과 1년 만에 30명에서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글을 잘 쓰려면 전문성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뭐든 쓰는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오프라인에서 매월 두 번째 화요일 모임을 갖고 있다. 현재 네이버 밴드에 가입한 회원 중 70여 명은 연회비(30만 원)를 내고 있다. 월례회 모임은 1, 2부로 진행된다. 1부에서는 책을 많이 낸 전문 작가 선생님이 한 시간 특강을 하고, 2부에서는 회원들이 써온 글을 작가 선생님이 하나하나 교정해준다. 자신이 써온 글을 직접 교정받는 과정을 통해 제대로 글쓰는 방법도 배우고 자신감도 키운다. 실력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되는 시간이다. 책·글쓰기 학교는 단지 글쓰기 공부에 그치지 않고 책쓰기에 대한 특강도 하고 문학기행도 한다. 책쓰기는 책을 한 번도 내보지 않은 왕초보 회원들에게 책쓰기에 대한 기본은 물론, 기획서 작성 등 전체 프로세스를 알려주고 출판사까지 연계해주어 결과물이 조기에 나오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은 한 달에 2~3명이 책을 출간하고 있다. 금년 말에는 회원들이 쓴 글들을 모아 10주년 기념 문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문학기행은 1년에 한두 번 하고 있는데 작년 하반기에는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문학관을 다녀왔고, 금년 상반기에는 중국 길림성에 있는 용정의 윤동주 문학관을 다녀왔다. 이제는‘2060’시대라 한다. 20대부터 80세까지 60년 동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로 60세도 20년은 현역으로 움직여야 한다. 책쓰기와 글쓰기는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해고가 없다. 누구든 나이에 관계없이 용기를 내어 평생학교에 입학하라. 책쓰기, 글쓰기 학교라면 더욱 좋다.
- 2018-08-13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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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가요의 번지 없는 주막을 찾아서
- 청중은 젊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면서 박수쳤고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제2인생을 준비하는 은퇴자를 비롯해 교사, 시인, 사진작가 등 모인 사람들의 나이와 직업도 참 다양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몰입하는 이들 앞에 선 강연자는 이동순(李東洵·68)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다. 시를 쓰는 문학인이라는데 옛 대중가요에 심취해 살다 보니 ‘대중음악 연구가’라는 이름표도 늘 따라다닌다. 중절모를 쓰고 나타난 로맨스그레이 이동순 대표는 강의뿐만 아니라 그에 맞는 노래를 직접 들려주며 이해를 돕는다.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일깨우며 살고 있는 이동순 대표의 이야기를 동년기자가 직접 들어봤다. 6월 말 만난 이동순 대표는 ‘대중가요로 풀어보는 서울미래유산’이라는 주제로 열띤 강연을 했다. 이야기경영연구소가 주최하고 서울미래유산과 서울시가 후원한 이 강좌는 서울미래유산(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현재 문화재 등록이 안 된 서울의 근현대 유·무형 유산) 중 하나인 대중가요를 통해 서울의 옛 모습과 현재를 이어 역사를 이해하고자 마련된 프로그램이었다. 대중가요가 만들어진 배경이나 가수의 인생 스토리는 물론이고 서울의 옛 거리도 슬라이드 사진으로 더해졌다. 이동순 대표가 맛깔나는 목소리로 직접 노래를 부르면, 청중도 따라 부르면서 시간여행을 하듯 추억 속으로 함께 잠겼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대중가요 사랑과 전파에 쏟는 열정은 국보급이다. 이동순 대표는 대구 계명문화대학교 평생교육원의 특임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음껏 음반도 듣고, 노래도 부르며 힐링하는 곳이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센터 이름을 지었다. 주 활동무대는 대구와 경상도 지역이지만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대중가요 연구가이기에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모시기 바쁘다. 지금까지 공연을 겸한 강연을 500회 넘게 한 것 같다고. 대중가요 사랑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이동순 대표는 대학 졸업 무렵이던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시를 쓰는 문인이자 학자로서 천재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의 시를 엮어 ‘백석시전집’(1987)을 발간했으며 ‘백석문학상’ 제정에도 큰 역할을 했다. 문학인의 삶 외에 특이한 이력 하나가 바로 ‘대중가요 연구가’라는 타이틀이다. 대중가요에 심취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동순 대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한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산달을 얼마 앞두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답니다. 피란도 못 가고 경북 김천 선산 가까이에 있는 초가에서 저를 낳으시곤 10개월 만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딸자식 둘은 계모 설움 안 받게 해 달라, 포대에 싸여 윗목에 누워 있는 어린 핏덩이는 곧 나를 따라올 테니 걱정 안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답니다.” 유년 시절이 되니 어머니의 빈자리가 점점 커져갔다. 유난히 설움과 눈물이 많았고, 상처도 쉽게 받았다. 감수성 또한 섬세하고 예민했다. 이 시절의 성격이 시인이 되는 데 일조한 것 같다고 이동순 대표는 회고했다. “전매청 창고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진공관 라디오를 켜놓고 ‘정오의 희망음악’이라는 방송을 듣곤 하셨어요. 이때 대중가요를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그리고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같은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어요. 여가수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엄마도 저런 목소리였을 거야’라며 상상하곤 했어요.” 라디오에서 여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빈 종이와 연필을 찾아 미친 듯이 가사를 옮겨 쓰기도 했다. 가사를 적으면 노래가 외워지면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련함이 그를 대중가요에 점점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음반 가득한 친구 집에서 자신을 발견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등하교를 같이하던 길목 친구가 있었다. 친구 어머니 방에는 탐나는 예쁜 전축과 함께 음반이 가득했다. 혼자 몸으로 철공소를 운영하던 친구 어머니는 술만 취하면 전축을 틀어놓고 흐느껴 울었다. 친구 어머니가 외출한 틈을 타 음반이 가득 꽂힌 방으로 들어갔던 어느 날, 온종일 노래를 들으며 대학노트 두 권에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노래 가사를 빼곡하게 써내려갔다. “친구 집에서 기록했던 노래가 지금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요. 한 480곡쯤 될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내 대중가요 연구의 밑천이 되었어요. 가요 평론가로 가요 해설가로 또 노래를 부를 때도 당시 기억을 다 써먹고 있습니다.(웃음)” 학창 시절 그는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했다. 많은 노래를 알고 잘 부르기까지 하니 섭외 1순위가 당연했다. 수학여행, 장기자랑, 친구 집에 놀러갈 때 등 어디서든 칭찬받는 것이 좋아 능청스럽게 무대에 선 듯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마치 남자 기생이 된 거 같았어요. 심지어 군대에서도 그랬습니다. 선임이 노래 부르게 하고 술 한 잔씩 따라주곤 했거든요. 그야말로 노래 사역을 한 셈이었어요.” 꿈을 포기하고 대중가요에 빠져들다 이동순 대표의 젊은 날 꿈은 방송인이었다. 대학 시절 방송반 활동을 쭉 했기에 당연히 기자나 라디오 PD쯤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입사시험 신원조회에서 친척의 부역 기록이 발견됐다. 연좌제가 발목을 잡았다. 유년 시절부터 꿈꿨던 방송인의 꿈은 펼치지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경북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누구보다 빨리 국문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아 27세의 젊은 나이에 경북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넉넉해진 주머니 사정 덕분에 고서와 음반도 사 모을 수 있었다. 천직처럼 느꼈던 대중가요 연구는 1980년대 충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노래를 살펴보니 일제강점기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등 문화예술인이 대부분 가사를 썼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가사가 굉장히 품위가 있고 훌륭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대중가요를 ‘뽕짝’ 혹은 ‘딴따라’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모멸적이고 비하하는 말을 많이 했어요. 딴따라는 두드리고 다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거든요.” 당시 대중음악가들이 자해의식, 피해의식 등 상처가 많았다고 이동순 대표는 진단한다. “대중음악가가 술집에서 서양음악을 하는 작곡가나 성악가를 만날 수도 있잖아요. 서양음악 가들은 대중음악을 음악으로 취급하지 않았어요. 음악계에 반상계급 의식이 존재했는데 당연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번지 없는 주막, 대중가요 연구에 심취하다 이동순 대표는 대중가요를 ‘문화적 번지를 잃어버린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음악도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서양음악을 생각하면 답답했다. ‘가요’야말로 민족 예술이고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은 도구인데 ‘왜 이렇게 천대를 받나!’ 하는 생각에 1981년 충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가요에 대한 에세이, 신문 칼럼, 논문을 수시로 썼다. 2001년 월간조선에 1년여 기고했던 옛 가요 관련 에세이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가요 연구가로서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갈 즈음, 대구MBC에서 연락이 왔다. 옛 가요를 중심으로 한 시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싶다고 했다. “놀라운 소식이었어요. 속으로는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지요. 원래 방송인이 꿈이었으니까요. 기분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어떻게 진행하나 걱정이 앞섰어요.” 방송을 함께할 작가를 구해주기로 했으나 옛 노래에 대해 잘 아는 작가가 없었다. 결국 원고 준비에서부터 내레이션, 노래 선곡까지 이동순 대표 혼자 도맡아야 했다. 1인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했습니다.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라는 타이틀로 주말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방송을 했어요. 나들이 갔다가 길이 막힐 때 라디오를 트는 황금시간대였어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어요. 즐겁고 행복했죠. 무엇보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방송 진행을 마음껏 할 수 있었잖아요.” 자부심도 대단했다. 5년 동안 이어온 방송 진행으로 가요 연구가로서의 인지도도 높아졌다. 지금은 전국에서 강연 초청이 물밀듯이 들어와 정신없다고. 청중에게 직접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아코디언도 배웠다. 악기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생겨나 색소폰, 장구는 물론 판소리할 때 쓰는 소리북과 거문고 등도 익혔다. “삶이 어떻게 보면 단조로울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만질 수 있는 악기가 늘어나니까 아주 풍성해지고 다양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이걸로 남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흥이 절로 납니다. 지금은 강연 반, 공연 반 이렇게 합니다.(웃음)” 악기를 배우고 보니 재능을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쓰고 싶었다. 경산에 있는 한 요양원을 찾아가 치매 노인들에게 옛 노래를 들려주곤 한다고. “요양원 직원들이 제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치매 노인들을 미리 홀에 모아 앉혀놓습니다, 무표정한 얼굴, 목석처럼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노인들을 위해 연주해요. 그런데 신기해요. 10분, 20분이 지나면,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고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 그들의 잠자는 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느낄 때 전율이 일어난다고 했다. 떠돌이 유랑가수로 대중의 마음을 치유하다 노래방 가사책을 모두 꿰뚫고(?) 있다는 이동순 대표.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노래방 가사책이라고 자부하는 만큼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생일대의 결투가 있다. 바로 김지하 시인과의 대중가요 부르기 대결이다. 김지하 시인은 가왕(歌王) 조용필도 꺾은 문단계 노래 지존으로 불렸다. 술만 마시면 혼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래를 불러댔다. 보다 못한 김지하의 후배가 “청주 시골뜨기가 더 노래를 잘 부른다”고 놀리자, 김지하는 “그런 놈은 우리가 꺾어야지” 하면서 대결을 신청했다. 배심원도 배석할 정도로 큰 대결이었다. “같은 노래도 안 되고 상대방이 부른 노래도 부를 수 없고 별별 규칙을 다 만들어 노래 대결을 했습니다. 밤 9시에 시작했는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도 안 끝났어요. 김지하 씨가 ‘아이고, 저렇게 징그러운 놈은 처음 보네. 이런 끔찍한 짓은 다시는 안 할란다!’ 하면서 항복했습니다.” 배심원 중 한 명인 김성동 소설가가 이 일화를 이동순 대표가 1987년에 출간한 시집 ‘지금 그리운 사람은’ 발문에 쓰면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됐다. 이 대결은 이동순 대표가 대중음악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이동순 대표는 많은 노래를 알고 있고 잘 부르지만 특히 고운봉의 ‘명동 부르스’와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즐겨 부른다. 자신의 음색과 정서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가슴에 사무치는 노래는 역시 이화자의 ‘어머님 전상서’, 백련설의 ‘어머님 사랑’, 현인의 ‘비나리는 고모령’ 등이다. 어머니와 관련한 노래나 글자가 나오면 눈물이 핑 돈다.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학자의 길을 걷지 않고 아코디언을 어깨에 메고 함경도나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유랑극단 악사를 하지 않았을까 상상한다는 이동순 대표. 스스로를 옛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떠돌이 유랑 가수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 옛 노래를 섬세한 감수성과 예리한 시각으로 재발견하는 대중가요 연구가. 이동순 대표의 따스한 미소와 온화한 모습 뒤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중가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혜안이 숨겨져 있다.
- 2018-08-1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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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늘꽂이와 피 뽑는 선비 마누라
- 시어머니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쪽진 머리였다. 동그스름하고 몽똑하게 붙은 뒷머리 가운데로 은빛 비녀가 반짝였다. 농사일로 두 손을 호미 삼아 거의 평생을 사신 어머니. 그 시절 부녀자들에게 달리 돈이 될 유일한 게 머리카락을 파는 거였다. 젊은 시절엔 당신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내주고 항아리나 그릇 등을 장만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만든 바늘꽂이를 받았다. “머리카락 바늘꽂이는 녹이 안 슬어. 큰 바늘은 이불 꿰맬 때 쓰거라.”나일론 자투리 헝겊에 특별할 것 없는 무늬. “이걸 언제 쓴대요?”라고 되물으며 나는 조금 웃었다. 생활에 쫓겨 허덕이는 내게 바늘꽂이는 영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어머니 생전에 내가 들었던 ‘피 뽑는 선비 마누라’ 이야기가 있다. 결혼해서 이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던 걸까. 그 얘기를 당신만 알고 있는 비밀인 듯 나직하고 조심스럽게 했다. 나 또한 그 이야기가 생의 비밀을 품은 실타래처럼, 어머니를 통해 마치 주문을 외는 제사장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결혼하면서부터 어머니와 시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첫애를 낳고 얼마 후, 시동생 결혼으로 우리는 시댁 근처 동네로 분가했다. 다락이 있는 단칸방 월세를 거쳐 방 두 개가 딸린 전셋집을 얻었다. 다락의 책들이 내려와 방 한 칸을 차지했다. 책 사이로 겨우 바람이 통한다 싶을 때 아이는 둘로 늘었다. 아침에 눈을 떠 밤늦게까지 육아와 생계를 잇는 노동으로 여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시선이 당신 아들의 책에 머물렀다. 필요한 살림보다 책이 주인인 것 같은 방. 공부하는 아들이 시간제로 강의를 한다는데 그럴듯한 밥벌이는 아닌 것 같았는지 어머니는 짐짓 내게 물었다. “애비 공부는 언제까지 하는 거여?” “언제까지란 게 있나요. 죽을 때까지 하는 게 공분데.” “음, 그렇긴 허지.” 속 시원한 답을 기대한 건 아닐 터였다. 당신보다 한술 더 뜬다 싶은 며느리 말에 막연히 불안했을까. ‘피 뽑는 선비 마누라’ 이야기가 나오는 적절한 상황은 이때다. 어머니는 “서방이란 사람이 돈 될 일 하기는커녕,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만 들여다보는 서방. 그렇게 가망 없겠다싶은 날들을 보내던 차에 쌀이 떨어졌다는구나. 논에서 피 뽑아 겨우 생계 유지하던 마누라가 부아가 나 그만 보따리를 쌌다지 뭐니” 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이쯤에서 어머니의 의도는 알고도 남았다. 나도 찔리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식구들이 잠든 어느 일요일 새벽, 집을 나왔다. 전날 술에 절어 들어온 남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남편 옆으로 여덟 살, 세 살, 두 아이들이 송이버섯처럼 나란히 자고 있었다. 집을 나선 건 계획된 게 아니었다. 식구들을 떠나 나를 돌아봐야 했다. 넘어질 것 같은 내 자신을 추스르려고 안간힘을 썼던 때였다. 얘기 속, 보따리를 싼 마누라는 공부만 하는 서방을 떠나 좀 편하게 살자 했으나 피를 뽑고 사는 궁핍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다. 조금만 더 참았다면 영광이 있었을 텐데,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서방을 떠난 마누라를 어머니는 당신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머리카락이 들어간 바늘꽂이는 어머니의 체온인 양 은은하다. 평소에 바르시던 동백기름 향이 나는 것도 같다. 바늘꽂이를 보고 있으면 당신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머니는 백수를 한 해 앞두고 소천하셨다. 살아가는 동안 세상 욕심으로 힘들고 외로울 때, ‘비밀’처럼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는 나를 부드럽게 꾸짖으며 따뜻하게 위로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바늘꽂이의 큰 바늘은 행여나 마음속 해지지 않게 한 땀, 한 땀 나를 꿰맨다.
- 2018-08-06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