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트 오퍼레이터란 직종은 일반인에게 생소할 수 있다. 플랜트는 생산시설이나 공장을 통칭하는 단어로, 플랜트 오퍼레이터는 이곳에서 제품 생산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각종 장비를 작동시키고, 생산 과정에서 온도나 압력 등 공정의 상태를 점검하고 확인하는 일을 한다.
그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충남 서산의 대산석유화학단지에 위치한 한화토탈로, 15개 단위공장으로 구성된 석유화학·에너지 생산기지다. 지난해 매출이 9조 원이 넘는 거대 시설. 우리 주변에서 널리 쓰이는 플라스틱의 원료인 합성수지나 화성제품, 에너지 제품을 생산한다.
이곳에서 만난 손 씨는 평생을 석유화학제품 공장에서 일해온 장인이자, 이제 입사 한 달 남짓 된 신입사원이라는 상반된 두 개의 명찰을 가지고 있다. 그는 2013년 말 대한유화주식회사에서 정년퇴직 후 두 번의 단기계약 직장을 거쳐 지난 10월 1일 계약직으로 입사해 현역생활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현재 직급은 과장이다.
38년간 석유화학 공장에서 땀흘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우체국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월급이 너무 적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직장을 찾다가 1980년 한이석유주식회사(S-OIL의 전신)에 입사한 것이 석유화학 공장과의 인연이 됐어요. 그리고 1990년에 대한유화주식회사로 이직해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근무했죠.”
사실 정년퇴직 후 현역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은 그의 계획이 아니었다. 평생을 현장에서 땀흘리며 살았으니 퇴직 후에는 좀 유유자적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그래서 노사발전재단 울산센터를 통해 컨설팅도 받았다.
“컨설턴트와 상담한 것이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이 됐어요. 은퇴 후의 삶에 대한 많은 조언도 듣고요. 퇴직 후 소개로 포스코엔지니어링 제안을 받아 1년 정도 태국 마타풋에 있는 플랜트에서 근무했는데, 당시 계약 과정에서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었지만 고생한 것 빼고는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태국인 현장 직원들과 짧은 영어로 소통해야 했지만 지내다 보니 정도 많이 들었죠. 헤어질 땐 서로 눈물을 보이기도 했어요. 우리 기술로 지은 공장을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 보람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
플랜트 오퍼레이터가 어떤 일인지 묻자 그는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현장을 수시로 순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육체적으로 아주 고된 일은 아닙니다. 다만 공정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온도와 압력은 정상 범위인지 가스가 새지는 않는지, 수시로 점검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해요. 특히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고입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나뿐만 아니라 동료도 다치고 회사에도 큰 손해를 입히게 되니까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몸보다 장비를 우선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정년을 맞이한 것은 큰 행운이자 축복이죠.”
나이와 경험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젊은 직원들과의 관계는 어떨까? 서로 서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됐지만, 그는 전혀 문제없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젊은 직원들의 업무 태도가 정말 열성적이에요. 내가 젊었을 때 이들처럼 공부한 적이 있었나 의문이 들 정도로 지식 습득에도 열심이고요. 그래서 내가 나서서 말을 보태기보다는 직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 따르려고 노력해요. 특히 언행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에요. 내가 먼저 존칭을 써야 상대에게 대우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렇게 현장의 젊은 근로자들을 사려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아들의 존재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아들도 현재 S-OIL 공장에서 플랜트 오퍼레이터로 근무 중이다. 비록 회사는 다르지만, 대를 이어 석유화학산업에서 활약하고 있는 셈이다.
“아들이 입사시험을 통과해 합격통보를 받은 날이 태어나 가장 기뻤던 날 중 하나일 겁니다. 하늘을 날 것같이 기뻤어요.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선배로서 안전이나 업무, 조직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게 저의 또 다른 즐거움 중 하나가 됐어요.”
은퇴 후에도 주변 도울 수 있어야
최근 그의 즐거움이 또 하나 늘었다. 바로 국궁(國弓)이다. 2012년 정년퇴직을 준비하면서 취미를 하나 정도는 갖고 있는 게 좋겠다 생각하고 찾다가 발견했다. 145m 떨어진 과녁에 활을 날리는 과정도 즐겁지만,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정신수양과 심신단련이 더 매력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짧은 경력이지만 실력이 좋아 지난해에는 하늘이 내려준다는 ‘15시 15중’(15발 모두 과녁에 명중하는 것)을 두 번이나 해 2개 전국대회에서 각각 2등과 3등 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정년 후에도 바쁘게 현역생활을 이어나가는 그에게 이상적인 은퇴생활에 대해 물었다. 그는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을 첫 번째 덕목으로 꼽았다.
“퇴직 3년 전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지금 직장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도 아직은 미정이에요. 여전히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도 3가지 목표는 있어요. 건강과 은퇴 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 그리고 남을 돕고 살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생활이 너무나 만족스러워요. 오랜 경력을 통해 쌓아온 지식을 썩히지 않고 능력을 발현하며 살 수 있으니까요. 다른 은퇴자들에게도 가능하면 쉬지 말고 일하면서 살라고 권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