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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치지 못한 편지] 쓸쓸한 만추의 어느 날 떠나버린 친구에게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지난해 연말 편집부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열어보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인간의 끝이 없는 탐욕의 수렁으로 인해 빚어지는 이승의 혼탁함 속에서도, 평생 맑게 살다 얼마 전 저 세상으로 떠난 대학 과동기인 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친구는 어느 지방대학 교수이면서 북한학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국제정치학 교수였는데, 그간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오퍼를 받았지만 끝까지 강단과 연구실을 지켜온 천생 학자였습니다. 친구는 그의 어머니께서 노산으로 낳은 막내아들로 몸이 약했는데 평생 담배를 염소같이 많이 피더니 결국 60대 중반에 폐암을 얻었고, 힘들게 치료를 해 몇 년 지나 완치가 되었나 했더니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서 병원에서 몇 달 있다가 한 열흘 전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저와 몇 명 안 되는 과동기들은 천안의 공원묘지에 가서 그 친구를 전별했고 공원 입구에서 산 자들은 맛대가리 없는 육개장을 한 그릇씩 훌훌 먹고 그를 남겨둔 채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카톡을 통해 그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우들에게 먼저 갑니다. 아직 책을 더 써야 하고 그 밖에도 못다 한 일들이 남은 것 같아 아쉬움도 있지만 게으른 천성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자족해야 하겠습니다. 새는 죽음을 앞두고 우는 소리가 더욱 아름답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함에 그 마음씨가 선해진다고 합니다. 저 또한 보다 조용하고 겸허해지고 싶습니다. 귀거래혜(歸去來兮·도연명)에서 도연명은 국화꽃 피고 술 익는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갔다지요. 저는 아지랑이 피는 봄날, 장다리꽃 위로 노랑나비, 흰나비 날아드는 어릴 때 뛰어놀던 서울 근교의 밭길을 걷습니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도 보입니다. 그 너머로 모든 미련이나 원망, 죄의식도 훌훌 털어버리고 가을처럼 높고 푸른 하늘을 지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곳으로 표표히 떠납니다. 인생이 한 조각 뜬구름이라 했거니와, 제게는 또한 한 가닥 미풍과 같습니다. - ○○○ 드림 날짜는 없었습니다. 사후 발송 같습니다. 아마 떠나기 며칠 전 혼수상태 이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썼든지 또는 혼미한 상태에서 구술한 것을 가족이 적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간 후에 발송해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한 것 같습니다. 저는 발송 경위를 알아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친구가 하늘에서 보낸 것이라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 편지를 보고 울컥 먹먹해지며, 그 친구가 떠나면서 봤을 것 같은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습니다. 영화 의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우 배역)이 로마의 사악한 왕에게 비겁한 공격을 받고 죽어가면서 그가 보는 장면입니다. 어떤 좁은 문을 지나 고향의 들판과 아름다운 꽃, 그리고 가족들을 파노라마처럼 보는 것이지요. 아마 동양이나 서양이나 하늘로 떠나는 사람은 고향, 특히 어릴 적 놀던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했습니다. 자네 말마따나 게으르고 느려터진 친구가 갈 때는 왜 그렇게 성미 급하게 떠났나? 지난 5월 어느 날인가 나도 암수술 후 6개월 정기검진 때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자네가 마침 이런 문자를 보낸 것 기억하나? “조 사장! 수술 후 회복 잘되고 있으리라 믿소. 나는 지난달에 신우암이 또 생겨 좌측 신장 절제를 했는데 3년 전 수술한 폐암과는 다른 종류인데 모두 담배가 유력한 원인이라네.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면서 한 번쯤 평생 담배 핀 것을 후회해볼까 생각하네. 우리 중고차 잘 유지 보수하며 삽시다.” 이런 내용을 보냈어. 내게 말이야…. 그 후 9월까지 몇 번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9월 이후 그렇게 급격히 악화될 줄 몰랐네. 그 성미에 아픈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결국 나는 자네 병문안도 못 가지 않았나? 어차피 우리들도 하나둘 자네 뒤를 따라갈 것이니 자리 잘 잡아놓게. 그때 가서 너무 고참 행세 하지 말고. 그는 천재였습니다. 제가 1969년에 서울대 문리대(지금은 사회대, 인문대, 이과대를 합친 단과대)를 차석으로 입학했는데 이 친구가 하필이면 같은 과에서 전체 단과대 수석 합격을 해서 나는 결국 수석도 못했고 등록금 면제 대상도 안 되게 만든 악연(?)이 있습니다. 그 당시 민주화 세대였던 우리는 극렬한 학생운동 대열에 들어가거나 일찌감치 고시공부를 해서 정부로 들어가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민간기업에 취직할 기회도 적었지만 말썽꾸러기 데모꾼 정치학도를 받아줄 회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제3의 길, 즉 드물게 학문을 하는 먼 길이 있었는데 그 천재는 그 먼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운이 없어서 박사학위도 매우 늦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늘 유쾌했고 잡학박사였고 잡담(농아리)의 대가로 이상파와 현실파가 다 좋아하는 뼈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집은 늘 우리의 아지트였지요. 밥도 제일 많이 얻어먹었는데 어머니는 늦둥이 아들 친구라고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주었지요. 많은 추억거리가 있지만 그는 어떤 허세나 재주도 부리지 않고 올곧게 학자로만 일생을 살았고, 도대체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는 전혀 안 했고 담배만 열심히 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인간입니다. 언젠가 그가 속한 학회의 회장으로서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는데 한전에서 조금만 협찬을 해달랬는데, 명분이 약하다고 못 해준 것이 지금 저는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비슷하겠지만, 저는 매우 우울합니다. 어차피 티끌 같고 미풍 같은 짧은 인생인데, 왜 그렇게 절제 없는 욕망의 화차를 맹목적으로 몰다 온 나라의 전복을 걱정할 정도로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어야 할 신뢰가 더욱 아쉬운 이때에, 쓸쓸한 만추의 어느 날 오후에, 주변머리 없이 제 가치를 지키다 맑고 아름답게 간 친구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어봤습니다. 부디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아직도 담배 피시는 분들, 이 글 읽고 한 번쯤 금연 시도해보시지요.
- 2017-01-3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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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 치료에 인생과 재산을 탕진 마라
- ‘암과 싸우지 마라’의 저자 ‘곤도.마코토’는 암 방사선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일본인 의사입니다. 이 책은 암 치료의 밝은 미래를 제시하지 않고 ‘진짜 암’은 결코 낫지 않을 것이라며 암 치료의 희망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암과 싸운다는 상식이 가혹한 치료와 고통을 초래하고 여명을 단축하므로 암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사로서 고백하는 말입니다. 암 치료가 어려운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암 환자의 투병생활이나 가족이 겪게 되는 고초는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주위에서 많이 보고 듣습니다. 암 치료에 희망을 가지고 온몸을 난도질당하고 맹독성 항암제 때문에 수명이 단축될 위험을 안고 있는 암 치료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암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불식시켜 ‘인생’과 ‘가산’의 탕진을 막고 암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기위해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말 합니다. 조선시대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들도 평균 수명이 50을 넘지 못했습니다.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3대 태종은 폐렴으로 56세에 승하하고 4대 세종은 당뇨병으로 54세에 승하했습니다. 27대 순종까지 60세를 넘긴 왕은 태조 74세, 2대 정종 63세, 15대 광해군 67세 21대 영조 83세, 26대 고종 67세로 총 다섯 분에 불과합니다. 왕위를 찬탈당한 광해군이 67세 까지 오래 산 것은 그의 낙천적인 성격도 한몫을 했습니다. 광해군은 수발드는 사람이 ‘영감’이라고 불러도 묵묵히 참고 받아 넘겼다고 합니다. 임금의 사망 원인이 역사에 기록되어있는데 ‘암’은 아니고 다른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확실히 암은 오래 사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 합니다. 임금은 당대 최고의 의사를 옆에 두고 호의호식하고 지냈는데도 수명이 이럴진대 일반 백성들이야 열악한 환경과 굶주림, 심한 노동으로 평균수명이 고작 40세미만이고 60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만60세가 되면 환갑잔치를 할 정도입니다. 이제 수명100세 시대에 도달한다고 하니 조선시대에 비하면 수명이 2배로 늘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은 평균수명이 남녀 간에 차이는 있지만 대략 80세라고 합니다. 평균수명이라는 말 속에는 절반은 80세 이전에 죽지만 절반은 80세를 넘긴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건강하게 움직이며 살아가는 건강수명은 평균수명 보다 짧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80세인데도 아주 건강한 분들도 많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평균수명(81세)까지 살 경우 암 발생률이 36.4%로 남자는 5명중 2명 여자는 3명중 1명이 암에 걸린다고 합니다. WHO산하 국제암연구소의 발표 자료에 의하면 암 사망의 30%는 흡연, 30%는 식이요인,18%는 만성감염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그밖에 직업, 유전적 요인, 음주, 생식요인 및 호르몬, 방사선 환경요인도 상당히 영향을 미친다고 하니 암의 정글에 살고 있는 느낌입니다. 내가 아는 선배의 부인은 췌장암인데 3개월 시한부 인생에서 수술과 민간요법을 병행하여 6개월을 살았습니다. 치료기간 6개월 동안은 집안 식구 모두 지옥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성과 없는 암 치료의 고통 속에서 3개월 더 산 것이 과연 잘한 일이였는지 선배는 지금에 와서야 아리송해 합니다. 주위에 암 환자들을 봐도 너무 늦게 발견했다는 말과 함께 무의미한 치료를 받느라 고통 속에 얼마 더 살다가 저 세상을 가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지금은 의료 보험이 발달되어 경제적 지원을 받지만 예전에는 큰 부자도 암 치료에 전 재산을 날리고 자식들에게 빚까지 안겨준 후 결국 죽어나가는 모습도 봤습니다. 암에 걸렸는데 치료가 어렵다고 미리 겁먹고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고령의 환자를 치료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계속하는 것도 잘하는 치료인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암의 종류나 환자의 나이에 따라 치료방법이나 성과도 다 다르다고 합니다. ‘암과 싸우지 마라’ 책을 읽으며 암 치료의 현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링거 병 주렁주렁 매달고 수술과 항암제 주사에 의식을 놓아버리고 몇 달 더 살아있을 것이냐 진통제를 맞지만 말짱한 의식으로 사람답게 살다가 몇 달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 2016-10-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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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수술 중 대장암 발견된 중년 여성과 산부인과 전문의의 라뽀
- 흔히 삶이 단련되는 과정을 사람은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고 표현한다. 평범하게 쓰이는 이 표현이 어떤 때에는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건강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곳저곳이 아픈데, 더 대범하고, 굳건한 태도를 가지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도 그렇게 견뎌나갈 수 있는 것은 아픈 것을 낫게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의사라는 존재 덕분이 아닐까. 우리가 ‘라뽀’라고 부르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소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강동경희대학교병원에서 만난 기경도(奇炅度·43) 교수와 이은주(李銀珠·48)씨의 만남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지난 5월 6일 강동경희대학교병원의 한 수술실. 산부인과 기경도 교수는 자궁근종 수술을 집도하고 있었다. 자궁근종은 말 그대로 자궁 근육에 생긴 종양을 말하는데, 가임기 여성의 20~30%가 겪을 정도로 흔한 병이다. 기경도 교수에게도 그랬다. 1년에 300회 이상 수술을 집도하는 그에게, 자궁근종 수술은 출근을 위해 매일하는 운전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복강경 자궁적출술을 위해 수술 화면을 뱃속의 이곳저곳에 비추고 있을 때였다. 기 교수는 좋지 않은 기분이 느껴졌다. 자궁근종 때문은 아니었다. 비록 환자 이은주씨의 근종 크기가 6cm 정도로 복강경 수술로 해결하기에는 큰 크기인 것은 분명했지만,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자궁 뒷 쪽의 대장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대장이 부어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기 교수는 바로 수술을 멈추고 소화기외과의 동료 교수를 호출했다. 숙련된 전문의에게 직접 확인하게 하고 싶었다. 정상적으로 수술을 마치고 별도의 검진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환자가 겪을 불편함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기 교수의 의견이 틀렸다면 동료 교수에게 핀잔을 들을 수 있고, 이런 일들이 쌓이면 평판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수술실에서 발견된 대장암 헐레벌떡 뛰어 온 전문의의 눈에 대장 내부에 자리잡은 대장암이 발견됐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상황을 기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확한 진단은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야 알겠지만 수술에 경험이 많은 의사는 수술현장에서 이상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원래 수술을 하려 했던 장기 이외의 곳에서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이상을 눈으로 발견하는 거죠. 이 경우 본 수술 이외에 추가적인 조직검사 또는 수술을 시행하게 됩니다. 심각한 질환의 경우 시간이 지체되면 안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타과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어요. 덕분에 수술실에서 대장암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은주씨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일단은 의심된다 했죠.” 이은주씨는 갑작스런 암 판정에 놀라고 당황했지만 이렇게 수술실에서 암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일종의 호사(豪奢)였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했다.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이 제 얘기를 듣더니, 기 교수님이 제 생명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어요. 처음엔 수술하다 다른 병을 발견하는 것이 의사라면 모두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평소에 보살펴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말이죠.” 이런 이은주씨의 얘기에 기 교수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부끄럽지만 스스로 수술이 적성에 맞는 천생 외과의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수술 중 이런 경우에도 대비할 수 있게 전공이 아닌 타 분야에 대해서 간접경험이라도 많이 쌓으려고 합니다. 저야 매일 수많은 환자를 만나면서 수술을 일상처럼 하고 있지만, 환자 입장에선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일이니까 함부로 대할 수 없죠. 산부인과 전문의인 제 입장에선 취재 섭외요청이 왔을 때 치료 후 출산한 ‘아름다운 환자’를 소개할 수도 있었지만, 은주씨를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에요. 환자들의 투병 뒤에는 이렇게 노력하는 많은 의료진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기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익숙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은주씨’라는 호칭. 기 교수는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한 명의 인격체로 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환자의 질환이나 예후를 기억하기도 좋고요. 일단 제가 치료를 했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서요. 주말에도 회진을 도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라고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이은주씨가 한마디 거든다. 회진시간에 환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의사가 기 교수라는 것. 환자들이 이런 저런 ‘우문’을 솔직하게 던져도, 매번 ‘현답’을 지치지 않고 내어준다고. 지겨워하는 일도 없고, 환자끼리 하는 잡담에도 슬쩍 끼어들어 해답을 알려주기 일쑤라고 했다. 이씨는 “대장암 수술을 위해서는 비슷한 환자들이 있는 다른 층으로 병실을 옮겨야 했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 사정했어요. 기 교수님이 계신 산부인과 병동에 남고 싶었거든요.” 평범한 삶 속에 들어온, 암 이은주씨가 자신에게 자궁근종이 있다는 것을 안 지는 10년 전 일. 종교재단의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한 이씨에게 병원을 다니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산부인과에서 진단 받는 일 역시 부끄럽지 않았다. 점검을 위해 계속 정기 검진을 받아왔다. 그러다 지난해 11월부터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11월에 4cm 정도 크기였던 종양은 5개월만에 6cm로 자랐고, 바로 수술을 결정했다. 건강은 잘 지켜왔다 생각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암 선고는 더욱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암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억울했어요. 이 나이에. 현모양처라고 자부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암이라니. 꼬박 하루를 울었어요. 그렇게 눈물을 쏟고 나니, 걱정도 쏟아졌는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기 교수님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하고. 그래서 용기를 내기로 했어요.” 용기를 내어 병마와 맞서기로 했지만, 그녀에게도, 가족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막내딸이였다. 가장 힘들어했던 막내지만 가장 힘이 됐던 것도 막내였다고 이씨는 이야기했다. 각자의 일 때문에 늘 곁을 지키지 못 하는 가운데, 대학생인 막내가 늘 곁을 지키며 그녀를 도왔다고. 물론 다른 가족들도 힘을 내는 데 도움이 됐던 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을 정도였다. 요양보호사로 일해 온 덕에 병원 생활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요양보호사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에 걸려 보호가 필요한 고령의 환자들을 돕는 일이 주 업무인데, 그 일을 하던 사람이 병원에 왔으니 이름만 바뀐 일터였던 셈이다. “어르신들 낙상 방지나 간호를 위해 간호조무사 수준의 교육을 받거든요. 병원에 있다가도 서투른 간호사들을 보면 참견하고 싶어 몸이 들썩들썩 했어요. 실제로 어르신들을 도울 상황이 되면 직접 나서기도 했고요.” 5월 6일 자궁근종 수술에서 대장암이 발견되고 기 교수는 이은주씨가 바로 암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사전준비를 해놓았지만, 정작 수술은 보름이 지난 후 이뤄졌다. 부신피질(신장 위의 호르몬 분비 조직)이 문제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장암 수술이 이뤄진 것은 5월 23일이었다. 산 넘어 산 그렇게 대장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이은주씨의 삶은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다. 가족들도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에 조금씩 적응이 되는 것 같았다. 다녔던 요양원에 병가 신청서를 사직서로 바꿔 놓아야 했지만, 직장이야 다시 찾으면 될 일이였다. 그러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위암이었다. 암조직이 크지 않았지만, 위치가 나빴다. 종양이 암의 머리 부분에 자리 잡고 있어 일부 절제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위 전체를 절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장암 때는 딱 하루 울고 툭툭 털어 버릴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며칠이 걸렸어요. 저도 저지만, 남편도 무척 힘들어했어요. 남편은 해병대 출신으로 전우회 활동도 열심일 정도의 씩씩한 남자에요. 그런데 위암 소식을 듣더니 하루는 술에 취해 들어와선 절 안고 펑펑 울더라고요. 제게 미안하다면서. 그렇게 서로를 위로했던 것이 평소의 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 힘이 된 것 같아요.” 이은주씨는 아직 위 절제 수술을 하진 않은 상태다. 아직 암을 안고 있는 것이다. 대장암의 항암치료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씨의 상태에 따라 수술 일정이 결정된다. 지금 예정으로는 12월쯤 수술할 계획이다. 두 달 정도 휴가를 내서 잠깐 병원에 머무를 예정이었던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난 셈이 됐다. 지금 병원 의료진은 그녀가 완전히 치료를 마무리 하는 데 5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보람있는 삶 지속하고 파” 시련이 그녀를 강하게 할 것이라는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녀는 씩씩하다.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려고 하고 있어요. 징징대서 뭐하겠어요. 선생님들도 긍정적인 마인드가 치료에 도움된다고 하시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고요. 아직 젊으니까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려고요.” 이은주씨의 희망사항 중 하나는 병이 나아 체력을 회복하게 되면, 예전처럼 남편과 함께 남을 돕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장애인 특수학교 행정직 직원으로 해병대 전우회나 소방의용대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단다. 매년 정기적으로 산소통을 등에 메고 한강에 잠수해 수중정화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경찰이 요청하면 수중 수색작업을 지원하기도 한다고. 행사가 있을 때 마다 아내들도 모여 단체로 음식을 하거나 별도의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앞으로도 그런 보람있는 활동들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했다. 대학생인 아들과 딸이 잘 자라 주는 것도 희망 중 하나다. “어릴 때 고지식하게 키워서 남편과 저를 ‘아빠,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에요. 남들 눈에는 딱딱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바르게 키우고 싶었어요. 그 희망을 들었는지 둘 다 올곧게 자라 줬어요. 딸은 남을 돕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였는지 특수교육학과를 다니고 있어요. 임용고시에 합격하면 교편을 잡게 되요.” 인터뷰는 예상보다 훨씬 늦게 마무리가 됐다. 이씨는 현재 치료 중인 상태였기 때문에 중간중간 검진이 있기도 했지만, 그간 만났던 의사들, 암 환자들의 조언을 ‘은주씨’에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기자가 말이 많아졌다. 물론 나쁜 치료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솔직하고 당당하면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은주씨’와 이야기 나누다 보니, 단지 그녀가 더 빨리 일상으로 복귀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녀의 쾌유를 기원한다.
- 2016-10-04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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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野草 이야기] 장수 마을은 어디에 있을까?
- 에 “고지대 사람은 장수하고 저지대 사람은 수명이 짧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세계의 장수 마을은 파키스탄의 훈자 마을, 러시아의 카프카스 지역, 일본 알프스의 나가노 현(長野縣) 같은 고산지대나 일본 오키나와(沖繩), 전북 순창군, 제주도 등 해안가에 있다. 파키스탄의 훈자 마을은 해발 6000m가 넘는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소량은 16.5%, 습도 50%로 건강에 좋은 조건이다. 러시아의 카프카스 지역은 해발 4000~5000m의 카프카스 산맥으로 이어진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지역을 말한다. 일본의 나가노현은 일본 지역 중 남자가 가장 장수하는 지방이고, 2000~3000m 고산으로 둘러싸여 ‘일본의 지붕’이라 불린다. 일본의 오키나와 지역은 일본 지역 중 여자가 가장 장수하는 지방이고, 따뜻한 해안가이다. 우리나라는 2003년 서울대 조사에서 해발 200~600m의 산간 지대와 해안가에 장수 마을이 몰려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의 장수하시는 분들을 조사해 보면 남성 장수자는 강원도 산간 마을에 많고, 여성 장수자는 전남 해안가에 많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섬 역시 장수 마을인데, 평균 해발 700m의 산악 지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사르데냐의 산악지역인 누오로에서는 100만 명당 244명이 100세 이상이다. 그리고 남성 장수자가 여성 장수자보다 많다. 높은 산골에 가서 하룻밤을 자면 남자들은 새벽 발기가 더 잘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남성들에게는 산이 맞고, 여성들에게는 바닷가가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한의학적으로는 음양의 이치가 바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조깅을 하면 가슴을 움직여 거친 숨을 내쉬는 데 반해, 등산을 하면 아랫배를 움직이며 거친 숨을 내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산을 오르다 보면 산소가 엷어지면서 숨이 가빠지는데, 우리 몸은 이를 보상하기 위해 흉식호흡에서 복식호흡으로 바꾼다. 아랫배가 후끈해지는 복식호흡은 단전호흡이나 단전에 뜸을 뜬 효과를 내서, 머리는 시원하게 하고 아랫배는 뜨겁게 한다. 기본적으로 상열하한(上熱下寒)증을 치료한다. 티베트 수도인 라사로 여행 간 적이 있다. 처음 며칠은 고산 반응으로 머리가 아프고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차만 타면 멀미와 구토... 그런데 움직이지 않던 아랫배가 며칠 지나면서 저절로 들쑥날쑥 복식호흡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고산 반응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때 위장의 연동운동 또한 활발해지며 소화도 호전되었다. ‘신선 仙’자가 ‘산[山]’에 ‘사람[人]’이 붙어 있는 모양을 한 것은 등산과 고산지대 생활이 복식호흡을 도와서 도 닦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네팔의 셰르파족과 구르카 용병이 고산에서도 뛰어다닐 수 있는 것은 고산에 적응해서 복식호흡이 잘 되어 폐활량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고차원 티베트 불교가 융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산이란 일교차와 바람이 심한 곳이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사람은 북극곰처럼 피부가 야물고 단단해야 한다. 천지운기에서는 “중국의 서북지방은 지대가 높고 건조한데, 그 곳 사람들은 추워서 병이 들어도 대부분 땀이 없다”고 했다. 고산 지역 사람들은 주로 붓고 뭉치는 병이 생기며, 땀을 내거나 설사시켜서 치료한다. 고산 지역 사람들은 피부가 단단해져서 몸의 근본 구성 요소인 정액[精], 기운[氣], 정신[神], 피[血]가 잘 갈무리되어 장수할 수 있는 것이다. 고산에는 항암 효과가 뛰어난 약초가 많다. 중국 육상선수단 ‘마군단’과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 늘 복용해서 유명해진 동충하초, 티베트의 4대 약재라고 하는 홍경천, 설련화, 남미 고산의 아가리쿠스 등이 있다. 곡기생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겨우살이도 높은 산의 참나무 윗부분에 기생한다. 이들은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소를 잘 빨아들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세포의 산소 결핍증인 암을 치료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사람 또한 고산에서는 산소를 더 잘 빨아들이도록 변화하기 때문에, 암에 대한 저항력이 커지고 면역력이 높아진다. 등산을 하면 산소 흡취력을 높여줘서 도시 생활에만 익숙해져 약해진 면역력과 저항력을 키워 준다. 해안가도 장수 마을이 많다. 일본 오키나와, 우리나라 전북 순창군과 제주도가 그렇다. 해안가에 자라는 식물들을 보면 짜고 강한 해풍을 맞고 산다. 짠맛은 생명체 속의 물을 빼앗아서 말라죽게 하고, 강한 바람도 생명체 속의 물을 증발시켜 말라죽게 한다. 해안가 식물들은 이런 생태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개발했다. 바람을 이기고 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동백나무처럼 잎 표면이 코팅 처리(큐티클 층)되어 있거나, 수분을 많이 머금기 위해 다육식물로 변하거나, 퉁퉁마디처럼 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염분을 머금고 있다. 사람도 비슷하게 해풍에 대응한다. 해안가 식물이 물을 빼앗기지 않도록 진화하듯, 해안가 마을 사람들은 정액[精], 기운[氣], 정신[神], 피[血]를 잘 갈무리하도록 진화한다. 그래서 피부가 더 억세지는 것이다. 해조류(미역, 김, 파래, 톳, 다시마)가 물을 정화하는 힘은 인체 내에서는 피를 정화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해조류는 혈액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항산화 물질이 많아 LDL 콜레스테롤은 낮추고, HDL 콜레스테롤은 높이며, 고혈압을 내리고, 미네랄을 공급해 준다. 그리고 식이섬유가 많아 대변을 잘 보게 해서 독소를 배출한다. 그래서 해조류는 심혈관계 질환의 예방과 치료에 좋다. 일본 오키나와와 전남 바닷가, 제주도가 장수 마을로 유명한 것도 해조류의 영향이 크다. 고산과 해안가가 모든 사람에게 좋을 수는 없다. 그렇게 척박한 곳 사람들이 장수한다는 것은 척박한 환경 때문에 약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고, 강한 사람들만 살아남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고산에서 적응하기 전에 병이 심해질 수 있고, 피부가 약한 사람은 해안가에 적응하기 전에 해풍과 자외선에 큰 병이 생길 수도 있다. 고산과 해안가가 장수에 좋다는 것은 어느 정도 면역력, 적응력이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예방 주사가 좋지만, 너무 약한 사람에게는 무리이듯이 말이다. 따라서 해발 고도를 완만히 높여 가거나, 해풍이 적당한 곳에서 적응하는 것이 좋다. >>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2016-08-2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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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트- 나만의 코디법] 모자에 반한 그 남자
- 필자는 모자 쓰기를 좋아한다. 아주 간단히 멋쟁이로 만들어주는 기막힌 물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래전 모자 때문에 덕을 보기도 했으니 이 코디를 더더욱 버릴 수 없다. ◇용감한 외출 20여 년 전 남편이 이미 미국에 이민 가서 필자가 혼자서 모든 고난을 감당할 때 일이다. 아파트와 모든 것들이 경제 위기 속에 날리고, 손에는 한 푼도 남지 않았다. 당시 유일한 탈출구는 신용대출이었다. 그래서 단골 은행을 찾아갔는데 코웃음만 쳤다. 할 수 없이 다른 은행을 찾아갔다. 오랜 대기 끝에 상담했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영 시원치가 않았다. 확실한 대답을 얻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돌아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 전화가 왔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전혀 않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상대는 대뜸, 필자에게 대출에 관심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전날 두 번째로 찾아갔던 은행 대부계의 과장이라고 했다. 수상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은 서둘러 은행으로 나갔다. 은행에 갔더니 안쪽에 선비 같은 모습의 대출 과장이 앉아 있었다. 필자를 반갑게 맞이한 그 사람은 차까지 대접하며 친절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상담해주었다. 필자는 솔직하게 모든 상황을 털어놓았고 상대는 아주 자상하게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해주었다. 필자는 그 순간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고, 속이 후련해졌다. 설사 대출받지 못한다 해도 후회스럽지 않을 만큼 그 남자는 자상했기 때문이다. ◇진솔한 친구, 은인 사이 그 사람은 “윗분과 상의한 후 결정해야 한다”며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 격려해줬다. 그 직원의 말을 듣고 희망 반, 걱정 반 속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될 즘, 핸드폰으로 또 연락이 왔다. 시원스럽게 한마디로 원하는 대출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무조건 필자라는 인간 하나를 믿고 해주는 대출이니 꼭 갚아 달라고 했다. 필요했던 어려운 대출이 이루어지고, 하루아침에 걱정이 사라졌으니 그 사람은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필자는 그 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해 만나자고 했다. 이번에는 필자가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 사람은 쾌히 승낙했고, 필자는 정성껏 준비한 작은 선물과 함께 약속 장소로 나갔다.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필자는 궁금증에 질문했다. 어떻게 그리 쉽게 “아무 조건 없이 해줄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고객님을 모자를 쓴 모습을 처음 본 순간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필자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태연한 모습으로 커피까지 마셨다. 하지만 그 사람과 대화하다 보니 흑심을 품은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후엔 속마음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친한 남자 친구가 되었다. 그야말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순수한 관계였으나 그 후로부터 모든 은행 일은 아주 쉽게 해결되었다. ◇ 아픈 추억 이 일이 있고 얼마후 필자도 미국으로 이민 갔다. 당연히 연락도 못 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미국에서 잠시 다니러 나왔다. 설레는 마음에 만나기로 한 어느 날, 그 친구는 뼈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들어가 연락을 취한 어느 날에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있었다. 똑똑하고 인간다운 진실했던 친구를 보내고 필자는 한동안 가슴에 큰 구멍인 듯 가슴앓이했다.
- 2016-08-0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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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1만4000봉을 향해 오늘도 산을 오르는 70대 산사나이 문정남
- 취재를 위해 전화를 걸 때마다 그는 늘 산, 아니면 제주 오름에 있었다. 매일같이 산에 오르고, 등산했던 기록을 정리하면서 일과를 마무리하는 문정남(文政男·75)씨. 이제 그만 올라도 될 텐데, 70대 산사나이는 아침이 되면 또 새로운 산봉우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선생님, 시내 가까운 산으로 가면 안 될까요?” 한 TV 프로그램에서 전투적으로 등산하는 문정남씨의 모습을 보고 난 후였다. 겨울 산을 오르는데 카메라 감독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혹시 나의 미래 같은 불길함. 인터뷰만 좀 하면 되지 않을까? 힘든 산은 제발 피하고 싶어 조심스럽게 여쭸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NO! “나는 갔던 산은 가지 않아요.” 조율을 거듭해 만난 장소는 경기도 남양주의 천마산역(경춘선). 나름 등산복장은 완벽하게 준비해 갔다고 생각했다. 812m 천마산 정상에 올랐을 때. 내 손에는 문정남씨의 스틱이 들려져 있었다. 문정남씨는 매일 산을 오르는 산사나이다. 지원해주는 스폰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산이 좋아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1000봉, 4000봉, 1만봉, 1만3000봉을 올랐다. 취재를 위해 만났던 4월 4일에도 마치고개 봉우리 3곳을 올랐다. 최근에는 제주도에 1주일 있으면서 50여 개 오름을 다녀왔다. 제주에 360여 개의 오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까지 오른 오름만 360개. 제주 오름은 다 올라갔다고 해도 된다. 육지에서도 이제 오를 봉우리가 몇 안 된다고 했다. 모두 쉽지 않은 코스만 남았다. 문정남씨는 광신정보상업고등학교에서 화학교사로 30년 가까이 재직하다 2000년 2월에 명예퇴직했다. 사실 퇴직 전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활지도 선생을 했었어요. 얼마나 신경 쓸 일이 많은지. 학교 가면 어떤 학생과 싸워야 하나 했어요. 요즘이었으면 제가 아마 학생들한테 많이 맞았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좀 순수했다는데 선생님들을 얼마나 골치 아프게 했는지 몰라요.” 학교를 그만두고 나오니까 완전히 해방된 느낌이었다고 한다. 퇴직 후 문정남씨는 산에만 다녔다. 그런데 1년 뒤 암 증세가 나타났다.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이런 얘기를 학생들이 들으면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생활지도 선생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그게 암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문정남씨는 학생지도 교사를 하는 동안 학생들에게 무섭게 보이고 독하게 행동해야 했다고. “처음에는 아프지도 않고 통증도 없었어요.” 한창 산에 열심히 다닐 때였다. 하루에 7~8시간씩 산행을 했는데 체중이 3개월 만에 6kg이 줄었다. 그게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직장암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단계였다. 죽음의 문 앞에 선 문정남씨. 그런데 등산을 중단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죽어도 산에서 죽지 뭐 집안에서 죽냐 생각했어요.” 문정남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항암치료를 받는 6개월 동안에도 계속 산에 올랐다. 병원에는 그저 산책한다는 말만 하고 산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항암치료 후 또 한 번의 수술을 받고 완치 판정을 받았다. “직장암이 낫고 3년 후에 병원에서 암이 간으로 전이됐다 하더군요. 정말 그때는 죽는 줄 알았죠. 그런데 간암 수술 날짜를 정해놓고 마지막으로 CT 촬영을 했는데, 암 흔적이 사라지고 없었어요.” 문정남씨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의사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물어볼 이유가 없었다. 그 뒤 정말 열심히 산에 오르고 또 올랐다. “나는 좋은 아빠가 아니었습니다” 퇴직 후 매일 산을 오르는 아버지. 자식들과는 가깝게 지내왔는지도 궁금했다. 산을 다니면서 별다른 취미도 없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없다는데 자식들과 관계는 어떨까? “2남1녀를 뒀는데 다 시집, 장가갔습니다. 나는 그렇게 인기 있는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엄부자모(嚴父慈母) 즉, 아버지는 엄해야 하고 어머니는 자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때는 꼭 부모가 그래야 하는지 알았어요. 물론 지금은 편합니다.” 자식들에게 못 다 준 사랑을 손자와 손녀에게 쏟아 붓는다는 문정남씨. 아이들과 잘 노는 모습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느냐”고 물어본다고. 키울 때 사랑을 많이 주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단다. 가족 얘기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 함께해준 부인에 대한 고마움도 나눌 수 있었다. “병원에서 내 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했잖아요. 의사도 이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 뒤 집안의 모든 일을 아내에게 맡겼고 저 또한 참견하지 않습니다.” 문정남씨는 본인이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하지 말아달라고 아내에게 당부했다.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남편이 등산갈 때 도시락 싸주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도와준 아내가 1만3000봉 오른 산사나이를 만든 일등공신이다. 기록의 왕 산행을 하다 문정남씨가 갑자기 마른 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다. 1973년도에 만든 국가기준점(삼각점)이었다. 그는 삼각점에 쓰여 있는 내용들을 메모지에 꼼꼼하게 써내려갔다. “산에 다니면서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그냥 왔다만 간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산행을 할 때마다 가는 과정을 전부 기록합니다. 출발 시간부터 어디를 지나왔고 또 몇 시에 도착했는지 삼각점 좌표 등도 적고 말입니다.” 이렇게 메모한 것들은 집으로 가서 컴퓨터에 기록해 놓는다. 문정남씨가 산에 있는 동안 모든 시간이 기록이고 역사였다. 1만4000봉까지는 이젠 슬슬 쉬면서 문정남씨는 산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60세부터 지금까지 자연경관을 느끼기보다 봉우리 하나하나 정복하는 심정으로 올랐다. 어떤 날은 하루에 봉우리 10개를 오른 때도 있었다. 산 밑에서 아침 7시쯤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줄곤 봉우리만 찾아다녔다. 어떤 때는 아침 7시에 시작해 저녁 7시까지 걷기만 했다. 문정남씨가 똑같은 산을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는 바로 기록 때문이었다. 똑같은 산을 10번을 가나 20번을 가나 기록에는 한 봉우리로 표시하기 때문에 굳이 갈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지금 공식적으로 어디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1만3000여 봉을 오른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올해는 산을 얼마나 탈 것인지 계획을 물었다. 이제는 조금 여유 있게 밀도를 낮출 생각이라고 한다. “이제 오를 산이 거의 없어요. 지금까지는 기록을 위해 산행을 했다면 이제는 좀 즐겼으면 합니다. 갔던 산도 좀 가고 말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것이냐고 물었다. 연세가 많기에 관절도 걱정됐다. “다행히 타고난 관절 때문에 먹어본 약은 없어요. 아마 산을 오르는 것을 그만두는 날은 무릎에 고장이 왔을 때가 아닐까요? 내 다리가 허락하는 한 다니고 싶어요. 다리가 성하지 않으면 안 하는게 아니라 못 가는거지.” 등산은 곧 인생이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길은 오직 하나였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꺾어질 듯한 절벽을 기어올라가야 했다. 문정남씨와 멀어져 뒷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무조건 걸어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됐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또 산을 오르다 보니 812m 정상에 다다랐다. 문정남씨에게 숨을 헐떡이며 “도망칠 곳도 없고, 무조건 올라가야 하니 산을 오르는 게 꼭 인생 같다”는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문정남씨가 TV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강연한 주제라고 했다. “등산은 인생살이랑 똑같아요. 등산할 때 처음은 순탄하게 시작하잖아요. 높은 데 오르다 절벽을 만날 때도 있고, 평탄한 길이 있고 또 좋은 길을 만날 수 있잖아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서히 내리막이 있을 수도 있어요. 아닐 수도 있어요. 언제 교통사고가 날지, 실연을 할지, 나처럼 암에 걸릴지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절벽을 만났다고 생각하다 보면 절벽 뒤편에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잖아요.” 잠깐이었지만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동안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넘어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문정남씨와는 하산하는 길목에서 헤어졌다. 안 가본 봉우리가 근처에 있어서 가보고 싶다 했다. 분명 인터뷰 때는 느릿하게 등산하고 싶다더니 아직은 아닌가보다. 언제나 건강하시길 기원하고 1만4000봉 달성은 제발 좀 천천히 이루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 2016-05-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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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어머니 기일이 돌아온다
- 퇴직 후 양재천을 자주 걷는다. 아내와 함께 걷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서 걷기도 한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산책할 수 있어 좋다. 양재천은 철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6월이면 화사하던 봄 꽃 들은 자취를 감추고 연초록 나뭇잎은 싱싱한 푸르름을 더해간다. 6월에는 우리 가족에게는 큰 행사가 두 개있다. 어머니의 기일이 있고 둘째 동생이 회갑을 맞이한다. 어머니는 당뇨와 암으로 16년 전 6월에 68세로 돌아가셨다. 요즘 같은 장수 시대에 칠십도 넘기지 못하신 어머님은 우리 가족에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꽤 시간이 지났건만 우리 형제끼리 모여 술 한 잔 할 때면 막냇동생을 울리는 것은 간단하다. 동생이 취할 때쯤 어머니 이야기만 꺼내면 보고 싶다며 큰소리로 운다. 오십이 넘고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건만. 세브란스 암센터, 원자력 병원 검진 결과 너무 늦었다는 결론이 내려져 항암치료를 포기하시고 어머님이 고향집으로 내려가시기로 결정하시던 그날 ‘그만 내려가자’ 고 아버님이 하시던 그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어머니는 5년을 더 사셨다. 고향집에서 고통의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생을 마감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2년이 지나지 않아 아버님도 어머님 곁으로 가셨다. 이제 세월이 흘러 동생이 회갑을 맞이해 잔치를 한다고 한다. 호텔에서 가족들을 초대해서 음악회를 열 계획이다. 노래방 반주기에 맞춰 동생은 색소폰을 연주하고 우리 형제들은 부부 단위로 노래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 부를 노래 곡목을 미리 제출하라고 한다. 색소폰 반주를 해주기 위해서다. 동생은 퇴직 후 색소폰을 배운다고 아파트에 방음시설을 갖추고 몇 년을 연습하더니 이제 프로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그날 댄스를 하려고 한다. 지난해 내가 라틴 댄스 차차차를 배워 몇 달을 집에서 아내와 함께 연습한 적이 있어 이번에 그 실력을 뽐내보려 한다. 사실 나도 4년 전 회갑을 지냈지만 잔치를 하긴 쑥스러웠다. 그래서 아내와 유럽 여행을 하고 형제들과 간단히 식사를 했다. 팔순을 넘긴 삼촌도 계시는 데 거창하게 잔치를 한다는 것이 좀 어색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나와 성격이 달라 잔치를 제법 제대로 할 모양이다. 아무리 장수시대라 해도 회갑이란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날이긴 하다. 아이들은 다 자라 품을 떠나가고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제대로 홀가분하게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시점이다. 회갑을 지나니 인생이 뭔지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도 안다. 내 나이도 어느덧 60중반이 되어 며느리도 보고 손녀가 생겨 할아버지가 되었다. 인생은 다 때가 되어야 깨닫게 되나 보다. 손녀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보자기에 싸여 태어나 업치고, 일어서고, 걷고, 말을 배우는 과정을 자세히 보면서 너무 신기하고 귀엽다. 아들과 딸을 다 키웠건만 그때는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다. 생명의 신비와 핏줄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소중하게 다가올지 몰랐다. 가끔 아들과 며느리, 딸 우리 가족이 다 모여 식사하는 날이 더없이 행복하다. 작은 일이지만 이러한 일상생활 속의 소박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이것이 치열하게 살던 젊은 날과 달라진 점이다. 유월에는 아내와 제주도 서귀포 여행을 간다. 제주도를 몇 번 다녀오긴 했지만 이번 여행은 별다른 의미가 있다. 제주도 공무원 연금공단 강의가 있어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일과 여행을 동시에 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강사가 되어 내가 먼저 경험한 소중한 것들을 후배 시니어들과 나눌 수 있어 기쁘다. 직장생활의 오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 이 막을 준비하는 데 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려놓고 가벼이 해야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새로 준비하고 끊임없이 학습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유월을 맞이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 2016-05-1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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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유방암 재발·재수술 이겨낸 중년여성과 유방·갑상선외과 교수의 라뽀
- 19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의 작가로 친숙한 영국의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은“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라고 이야기했다. 어머니란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 가정에서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신에 빗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어머니도 병(病)이란 암초를 피할 수 없도록 세상을 만들었다. 전주에서 만난 또 한 명의 어머니 유인숙(兪仁淑·50)씨와 그를 치료한 윤현조(尹炫朝·44) 교수의 이야기도 평범하지만 위대한 어머니의 투병과정을 그리고 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유방암은 다른 암종(癌種)에 비해서 사회적인 파장이 큰 병입니다.” 전북 전주에 자리 잡고 있는 전북지역암센터에서 만난 전북대학교병원 외과학교실 유방·갑상선외과 윤현조 교수는 유방암에 대해 조금 다른 시작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질병에 대해 설명할 때 발병 원인이나 치료방법에 국한하기 마련인데, 윤 교수는 조금 남달랐다. “유방암이 환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그 질환을 앓게 되는 환자가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정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크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가장 많이 의지할 때라는 것이 문제이지요.” 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 60대 이후에 찾아오는 다른 암종들과 달리 유방암의 주된 발병 시기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사이로 일찍 찾아오는 편. 이 시기는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로 진출을 준비하는 때이며, 남편은 퇴직·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시기다. 자녀가 어른이 되려는 마지막 준비과정과 ‘힘을 잃어가는 남편’이라는 중요한 두 과제가 어머니의 양어깨에 실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고 그 중심을 잃게 되면, 가족 전체가 한순간에 휘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윤 교수의 설명이다. 가정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회적 질환 유방암이 어려운 점은 치료 과정에서 잃게 되는 여성성과 함께 찾아오는 괴로움이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끌었던 에선 ‘정팔 엄마’ 라미란이 폐경을 겪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고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많은 시청자의 공감을 얻은 바 있다. 유방암 치료는 여성 호르몬의 조절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치료 과정에서 반드시 이런 고통을 동반한다. 환자 입장에서는 암이라는 갑작스러운 암초에 걸려 가라앉는 고통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폐경이라는 여성으로서 또 다른 감내하기 힘든 고통까지 이겨내야 한다. 윤 교수는 “암 판정을 받게 되면 현실 부정을 시작으로 분노와 수긍하는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치료 과정에서 폐경을 겪게 되면 흔히 울화라고 얘기하는 심한 감정적 변화와 함께 심한 경우 우울증까지 겪게 됩니다”라고 설명하고, “이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치료에 임하느냐에 따라 그 예후는 차이를 보이게 되는데,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치료에 응할 때 전이 방지나 치료에 대한 성과가 좋은 편입니다”라고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방암을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방법은 없을까? 윤 교수는 다른 암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예방법은 없지만, 건전한 생활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육류나 지방에서 유방암의 원인이 되는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온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름기가 많은 음식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전자검사를 통해 BRCA(BRest CAncea susceptility) 돌연변이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난소 절제와 같은 적극적인 방법을 통한 예방방법도 있습니다. 만약 암에 가족력이 있다면 건강검진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통계를 살펴보면 건강검진을 통해 유방암이 발견되는 경우는 20% 정도에 불과합니다. 촉진을 이용한 자가검진을 통해 발견하는 경우 80%가량 되고요. 하지만 만져질 정도가 되면 이미 종양의 크기가 2cm 이상인 2기로 넘어간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발견되면 늦습니다. 40세 이상이 되면 매년 초음파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와 함께 평소에 골고루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윤현조 교수와 함께 만난 환자 유인숙씨는 이러한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한 사례다. 그녀 역시 암 판정을 받았을 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후두암으로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와 삼촌, 고모까지 암으로 잃은 터라 공포는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 유인숙씨는 전북지역암센터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투병 후기에 “남편은 암이란 내 말을 듣고 남자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울었다”라고 썼다. “목사인 남편과 함께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회복과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했었는데, 막상 환자가 되고 보니 그 진심과 환자의 본심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어요. 환자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투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그분들을 위해 깊이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위로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죠.” 유씨가 몸에 이상을 느끼게 된 것은 2014년 3월의 어느 날. 여느 유방암 환자들과 비슷하게, 몸에 딱딱한 무언가가 잡혀 병원을 찾게 된다. 당연히 불안했고, 단순한 물혹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5일 만에 돌아온 것은 암이라는 판정이었다. 일부러 다인실 병실 찾아 서로 위로 암 덩어리는 2.4cm 정도 크기로 2기였다. 다행히 다른 장기로의 전이는 없는 상태, 여성성을 유지할 수 있는 유방보존술을 통해 그 덩어리를 제거했다. “그래도 윤 교수님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같은 신앙을 갖고 있어서 안심이 되기도 했고, 손을 잡아주실 때마다 받은 위안은 마치 기도 같았어요. 그래도 큰 수술은 처음이라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 대학생인 첫째 아들과 둘째 딸, 9살짜리 막둥이 아들 걱정이 앞섰죠.” 수술 후 진행되는 항암치료 역시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괴로웠다. 구토는 계속됐고, 머리도 빠졌다. 다시 머리가 나면 예쁜 머리띠를 사겠노라고 다짐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고 나서 우울증이 찾아왔다. “수술 후에는 혼자 있는 것이 싫어 일부러 6인실 병실에서 지냈어요. 그곳에서 다른 암종 환자분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유방암 선배들에게 치료에 대해 이것저것 배울 수 있었죠. 하지만 퇴원 후 집에 혼자 있게 되니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요. 나쁜 생각도 나고. 그래서 의지한 것이 노래입니다.” 주로 불렀던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 그녀가 ‘세상 노래’라고 표현하는 대중가요는 이제 다 잊었다고 했다.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던 터라 노래는 익숙했고, 힘이 돼주었다고 말했다. 유인숙씨는 후에 이 시기에 겪었던 치료 과정을 수기를 통해 이렇게 썼다. “나보다 더 힘들고 더 아프고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약한 신체가 아닌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어서 항암주사를 맞고 힘들었지만 잘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감사했다. 평생 가지 않던 걸음을 지금 암 환자가 되어서 다하고 있다. 암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제는 친구가 되어 나와 함께 가고 있다.” 자연스레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자극적으로 무치거나 끓이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던 전라도식 식단도 간단히 삶아 담백하게 먹게 됐다. 물론 소금도 줄였다. 자동차로 가서 한꺼번에 장을 봤던 것도 이제는 자주 들러 조금씩 장을 보게 됐다. 차를 이용하는 대신 배낭을 짊어지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서 간다. 늘 엄마 몫이었던 설거지와 청소는 다 자란 아들과 딸이 나눠 맡았는데 볼멘소리 한 번 낸 적 없어 고맙다고 했다. 그런 생활의 변화와 극복 과정, 다른 환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아 투병 수기를 썼다. 월간을 통해 등단하고, 본인 이름의 시집까지 출간한 경험이 있는 정식 시인이었던 만큼 글쓰기는 어렵지 않았다. 공모 마감 전날 펜을 잡고 작성한 수기가 전북지역암센터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치료 과정을 담담하게 써 내려갔죠. 무엇보다 다른 환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받고 치료받으라 말하고 싶었어요. 괜히 나약하게 아프다고 하면 되레 가족들에게 짐만 될 뿐이에요. 환자 가족들에게도 24시간 옆에 붙어 어떤 수발을 들까 고민하기보다는 응원이 되는 말 한마디가 힘이 된다는 것도 알리고 싶었죠. 30분짜리 설거지 한 번보다 1분짜리 말 한마디가 환자에겐 훨씬 도움이 됩니다.” 다시 찾아온 암, 다시 시작된 치료 지난해 11월 20일에는 암 극복 수기가 최우수상을 받아 전북지역암센터에서 진행한 시상식에도 참여했다. 그녀의 수기 제목은 였다. 암을 암이라고, 그렇다고 다른 예쁜 이름으로도 붙이지 못한 고민의 결과다. 그렇게 유인숙씨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암입니다. 재발한 것 같습니다.” 의사의 이 말은 유인숙씨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지난해 12월 재발과 전이를 점검하기 위한 추적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유씨는 두 번째 암 판정을 받았다. “OO이가 또 화가 났구나. 담담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첫 번째 암 판정 때와는 다르게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더라고요. 미국에서는 유방암 예방을 위해 유방절제술도 한다는 이민간 동생의 조언에 이번에는 절제를 선택했죠. 병원에서는 재건술을 추천하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겁내지 말고 씩씩하게 치료를 받자고 맘먹었죠.” 그렇게 유 씨는 새해가 되자마자 다시 수술을 받았다. 1기였기 때문에 수술 후 추가적인 방사선 치료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 1월 4일이었다. 요사이 그녀는 장성한 아들과 딸의 정성에 힘든 줄 모른다고 했다. 원래 신학을 전공했던 큰아들은 군 복무 중에 어머니의 투병을 보면서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 수능에 도전해 방사선과에 합격했다. 어머니와 같은 암 환자들의 치료를 돕는 직업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합격증을 내밀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자세히 묻진 않았지만, 엄마를 위한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 감격했습니다. 요새는 아들의 기타, 딸아이의 피아노, 여기에 막둥이의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찬양하며 노래 부르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요. 암은 우울해 하고 있으면 이길 수 없는 병인 것 같아요. 다른 환자분들도 꼭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OO이가 좀 화가 났구나, 달래줘야겠다. 하며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작성한 수기 마지막 문장은 가족도 의료진도 아닌 OO이에게 보내는 말이었다. “너도 사랑한다. 따뜻함으로 너를 어루만져줄게. 성내지 말고 평안히 쉬렴.”
- 2016-03-11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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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전립선암 환자와 로봇수술로 그를 도운 비뇨기과 전문의의 라뽀
- 의료현장에서 암 예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인자 중 하나로 꼽는 것이 바로 가족력이다. 가족 중 암을 앓았던 환자가 있었는지에 따라 발병 가능성은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울산에서 만난 임군식(林君植·56)씨는 전립선암(前立腺癌)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본인은 그렇게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고 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PSA(전립선특이항원) 수치를 매년 체크하며 살았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울산대학교병원 전상현(全相炫·52) 교수를 통해 새 생명을 얻게 됐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한평생을 한회사를 위해 일 해왔던 그다. 공업도시에서 살고 있는 여느 근로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11월에는 30년 근속을 기념해 금붙이를 한 냥(兩)이나 받았다. 근무하는 KCC 울산공장은 그의 입사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기 때문에 내 손으로 일궜다는 자부심도 컸다. 오랜 세월 성실하게 회사 일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그였기 때문에 갑작스레 전해진 비보의 충격은 적지 않았다. 임군식씨가 건강의 이상을 발견한 것은 지난해 4월. 매년 해오던 혈액검사 수치가 평소보다 매우 높았다. 검진을 했던 병원에서도 의심스럽단 이야기를 했다. “매년 정기적으로 혈액검사를 받았거든요. 평소에는 PSA 수치가 1.8 수준이었는데, 3.8이 넘게 나오더라고요. 많이 놀랐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다른 동네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았는데 수치가 비슷했어요. 의사선생님도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울산대학교병원을 찾았죠.” 그리고 진행된 조직검사에서 그는 전립선암 확진판정을 받게 된다. 다행히 초기단계인 1기 상태였다. “저의 아버님이 전립선암으로 돌아가셨거든요. 8년 전 돌아가시고 나서는 저도 매년 검사를 받게 됐고요. 아버님이 7년 정도 투병을 하신 탓에 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몇 개월 동안은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된 탓에 많이 힘들어 하셨고, 그걸 지켜보는 저 역시 무척 가슴 아팠습니다.” 전립선암 환자의 가족으로서의 생활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본인이 전립선암 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기구하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 충격도 굉장히 컸다고 임군식씨는 회상했다. “깜짝 놀랐죠. 그렇게 염려하고 조심했는데 암이라니. 그것도 전립선암이라니 눈앞이 깜깜해졌죠. 수술할 때까지 두 달 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고, 입맛도 싹 사라지더라고요. 아내는 그럴 리 없다면서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대학생인 아들, 딸 두 자녀에게 숨기려고 했었다. 아직 학생인 아이들에게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술을 앞두고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자녀들에게 털어놓았다. “그때였어요. 아들 녀석이 인터넷 등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더니 전상현 교수님께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우기더라고요. 이미 수술날짜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난감하긴 했지만, 전 교수님이 이 방면에 소문난 명의(名醫)라는 아들 고집에 질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해서 운 좋게도 교수님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상현 교수는 비뇨기과 전문의로 국내에 로봇수술이 도입되던 초창기인 2008년 미국 뉴저지 주립암센터에서 관련 연수를 마치고, 울산대학교병원에 로봇수술 도입을 추진한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 울산지역암센터 센터장과 로봇수술센터 센터장을 겸하고 있다. 전 교수는 임씨를 이렇게 기억했다. “제게 찾아와 먼저 로봇수술로 수술을 받고 싶다고 했던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가족력도 갖고 계셨구요. 환자 스스로가 정기점진을 성실하게 해온 덕분에 초기에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수술도 성공적으로 이뤄져서 빠르게 평소생활로 복귀하실 수 있었습니다.” 전 교수가 임씨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전립선과 관련한 신체의 기능적인 면을 고려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전립선은 좁은 골반뼈 사이, 방광 밑에 숨어있기 때문에 수술이 가장 어려운 부위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전립선 수술이 어려운 것은 골반 깊숙이 위치한 해부학적 구조에 전립선에 가깝게 혈관과 신경 괄약근 등이 몰려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수술 후 기능장애가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구요. 소변 조절이 잘 되지 않는 요실금이나 신경 손상으로 발기부전과 같은 성기능 장애가 올 수도 있습니다. 특히 환자의 경우 아직 젊기 때문에 암세포의 확실한 제거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면에 신경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전립선 수술에 로봇수술을 많이 활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변 조직을 다치지 않고 좁은 부위에서 수술을 해내기에 로봇수술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로봇수술도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받게 된다면 전립선암 수술이 첫 번째 수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의료계에서 예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직은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수술비가 800만~1000만원 정도로 부담되는 수준이다. 로봇수술은 의사의 손이 들어가기 어려운 부위에 얇은 막대와 같은 로봇팔을 넣어 수술하는 장비다. 로봇수술 장비의 원형은 1980년대 말, 미 육군과의 계약 하에 前스탠포드 연구소에서 개발됐다. 원래는 전쟁터에서 원격으로 부상병의 수술을 진행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연구가 시작됐다. 로봇수술 기술은 이제 대중화 돼 한국에서도 40곳이 넘는 병원이 사용 중에 있다. 로봇수술 장비는 미국의 인튜이티브서지컬(Intuitive Surgical Ltd,.)이라는 회사가 특허를 가지고 전 세계에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제품명인 다빈치(da Vinci System)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수술은 환자가 수술대에 누워있으면 입체 조직을 잡거나 자를 수 있는 로봇팔(엔도리스트) 3개와 조명과 촬영을 담당하는 로봇팔 1개가 필요한 최소한의 절개를 거쳐 환자 몸에 들어가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집도의는 좀 떨어진 공간에 마련된 조종석(콘솔)에 앉아 카메라가 전해주는 고화질의 입체영상을 보며 로봇을 조종해 수술을 집도한다. 전 교수는 로봇수술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존의 복강경수술에 비해 시야나 기구의 자유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영상의 시야가 확대되어서 환부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고, 로봇팔의 움직임이 사람의 손과 같이 움직여 미세 수술에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로봇수술이 만능은 아닙니다만 특히 전립선암 수술에 있어서는 장점이 있습니다.” 로봇수술이 갖는 장점 중 하나는 절개를 최소화하기 때문에 회복이 빠르다는 점이다. 이런 혜택은 임씨에게도 그대로 적용됐다. 작년 6월 4일 수술을 받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직장에 복귀한 것이 6월 22일이었으니, 보름 만에 일을 시작한 셈이다. “걱정했던 것보다 아프진 않았어요. 흉터도 구멍 몇 개가 있었던 흔적 정도였고요. 직장에 빨리 복귀하니 동료들이 놀라더라고요. 수술 전 몸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8월에는 회사에서 보내주는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을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임군식씨는 조기에 발견한 덕분에 방사선 치료도 필요 없을 정도로 말끔히 치료할 수 있었지만, 전립선암은 마음 놓을 수 없는 위험한 병이라고 전 교수는 경고한다. “전립선암은 비교적 암세포의 성장이 느린 편입니다만, 미국의 경우 유병률 1위 암으로 꼽히고 있고, 한국에서도 남성의 5대 암에 포함될 정도로 발병률이 높아졌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습니다. 전립선암의 원인으로는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때문에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조기 발견하는 것이 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립선암을 조기 발견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 혈액검사를 통한 PSA 수치 측정이 꼽힌다. 혈액 채취만으로 검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내시경이나 CT를 통해 확인해야 하는 다른 암종에 비해 나은 편이다. 하지만 전립선 비대증이나 염증으로도 이 수치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확진은 조직검사를 통해 이뤄진다. 간혹 조직검사 과정에서 암세포를 발견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한 번에 발견된 임군식씨는 운이 좋은 사례라고 전 교수는 설명했다. 전 교수는 “전립선암은 전이가 된 경우 다른 암처럼 화학적 항암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생성을 억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과거에는 고환 절제까지 했어야 했으나 현재는 화학적 거세를 많이 시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발기부전, 성욕감퇴, 골밀도 저하로 인한 골절, 근육량 감소 등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남성으로서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죠. 때문에 꼭 정기적인 검사를 받으시길 당부하고 싶습니다.”
- 2016-02-1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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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환자 좋은의사되기] 비인두암, 대장암, 위암과 싸우는 노신사와 종양내과 전문의의 라뽀
- 체력 하나만은 자신 있던 그였다. 한국통신에서 평생을 일하는 동안에도 건강은 자신 있었다. 뜨거웠던 5월 광주의 한가운데에서 시위대로부터 직장을 지키기 위해 기지를 발휘했을 때도 그 바탕에는 체력이 있었다. 즐겨 마시던 소주는 3병쯤 들이켜야 취기가 돌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드리운 암이란 그림자에 그는 잠시 절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규태(金奎太·69)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화순전남대학교병원의 심현정(沈炫廷·39) 교수를 만나 조금씩 이겨나가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지금 “삼암(三癌)을 삼신(三信)이 이겼다”고 이야기한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처음에는 암이란 게 믿기지 않았죠. 증상이 있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의 검진 결과라 더 믿기 힘들었죠.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나 싶기도 했고, 두려움과 공포라는 걸 느꼈습니다.” 정장에 검은 코트를 말끔히 차려입고, 새의 깃털이 달린 페도라로 멋을 낸 김규태씨는 전형적인 점잖은 중년의 신사였다. 하지만 화순전남대학교병원 전남지역암센터에서 만난 그가 조용히 건네는 투병 이야기는 멋들어진 그의 모습과는 달리 치열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증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더라고요. 동네 병원에선 귀에 물이 찼다며 간단한 처치를 해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물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반복하다,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아들 얘기에 동네 병원의 추천으로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귀에 이상이 있어 간 병원이었는데, 의사들은 코에 집중했다. 조직검사라는 것도 했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 후 그는 암 판정을 받았다. 2007년 11월의 일이었다. “비인두암(鼻咽頭癌)이라고 했죠. 평생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죠. 귀가 이상해서 간 병원인데 코에 암이 있다고 하니 쉽사리 수긍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다 한쪽 코가 막히는 일이 많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그것이 암 증상의 하나라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치료를 맡은 심현정 교수는 그를 긍정적 환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비인두암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임파선에도 전이가 된 상태였고요. 부위가 부위이니만큼 수술을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항암화학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병행해야 했는데 잘 버텨주셨습니다. 보통은 항암 동시 방사선치료 과정이 고통스러워 포기하고 병원에 안 오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김 선생님은 치료도 빠지지 않고, 힘들다는 하소연도 병원에 와서 하셨습니다. 그런 성실함이 암과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비인두암의 경우 그 증상이 없거나 있어도 코가 막히거나 분비물이 나오는 정도여서 감기로 오해해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고 심 교수는 경고했다. 상당히 암이 진행된 후에야 심한 두통이나 사물이 겹쳐 보이는 등의 시력이상 증상이 나타난단다. 이 때문에 감기증상이 낫지 않고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면 반드시 병원을 찾아 검진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김씨의 항암치료는 쉽지 않았다. 항암치료를 위해 좋지 않은 치아는 미리 빼야 했다. 무려 11개나 뽑았다. 치료 과정에서 머리는 빠졌고, 방사선이 지나간 자리는 까맣게 타들어갔다. 침샘에 이상이 생겨 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식도에도 영향을 줘 물 한 모금 삼키기 어려웠다. 입맛이 변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사치였다. 물맛도 변할 정도여서 즐거운 식사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 어려웠던 싸움은 2008년 5월 다행히 그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아직 진짜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렇게 치료를 끝내고 3년을 살얼음 걷듯 살았습니다. 5년이 지나면 완치라고 이야기하니까 2년만 더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암을 겪고 나니 귀가 얇아졌습니다. 혹시 재발될까 두려워 암에 좋다는 음식이란 음식은 모두 찾아 먹고, 채식 위주로 생활했습니다. 야채도 직접 텃밭에서 유기농으로 가꿔 먹었습니다. 농약을 쓰지 않아 벌레가 먹고 남은 것들이었지만, 몸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죠. 물론 음식에 소금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그 스트레스는 음식 투정에 불과하다 생각했습니다.” 매달 하는 추적검사에선 별다른 소견이 없어 안심하던 시기에 변고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PET(양전자단층촬영)에서 이상 소견이 발견된 것이다. 대장암이었다. “전이된 것이 아니라 대장에서 암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젊을 때 그렇게 마셔댄 술이 사달을 낸 것이겠지요. 마셨다 하면 소주 서너 병은 기본이었고, 1년에 366일을 마셨으니까요. 결국 수술을 했고 대장을 일부 잘라냈죠. 의사 이야기로는 30㎝ 정도라더군요. 위에서도 암이 발견됐습니다. 다행히 위암은 초기여서 복강경 수술로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대장암 수술을 마치고 깨어나 아내의 얼굴을, 그리고 아들과 딸의 모습을 보면서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삼켜야 했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수술 직전에는 차라리 깨어나지 않기를 남몰래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술을 마친 그는 독한 맘을 먹고 그 힘든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치료는 그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비인두암 치료 이후에 그렇게 조심스런 삶을 살았는데, 다시 생겨나는 암을 겪으면서 암을 바라보는 관점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일종의 암에 대한 해탈과 같은 것이었죠. 그렇게 좋다던 차가버섯부터 살구씨, 후코이단(미역이나 다시마의 점액성분), 개똥쑥, 상황버섯까지 모두 큰 효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병원에서 교수님들이 알려주신 대로 아주 짜고, 맵고, 달고, 기름진 것과 술, 담배, 탄 음식 정도를 빼고는 맘껏 먹었습니다. 소금도 적당히 먹고 고기도 열심히 먹었습니다. 산나물이나 야채는 아직도 열심히 먹지만 효소나 즙같이 유난스럽게 만들지 않고 간단하게 반찬으로 해 먹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라면과 삼겹살을 실컷 먹게 된 일은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물론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다. 일과 운동을 놓지 않은 것이다. “비인두암 치료와 추적검사가 어느 정도 지난 후에 체력을 되찾은 시점부터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35년 일한 한국통신에서 퇴직한 이후 발병 때까지 아파트 관리소장 일을 했는데, 항암치료를 받고 2009년 7월부터 다시 시작했죠. 아직까지 일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크지 않은 돈이지만 치료비에 보탬이 돼 정신건강에도 좋고,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에 도움이 돼 체력적으로 좋습니다. 일을 하지 않을 땐 조선대학교 뒷산에 올라 운동을 하기도 하고요.” 심 교수는 이런 그의 모습을 칭찬한다. 정상적인 일상생활과 가정생활을 유지하며 긍정적 마음으로 병과 싸워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암환자들은 항암치료를 받게 되면 일상생활을 중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충분히 통원치료가 가능한데 장기 입원을 하려 한다거나, 요양병원 같은 곳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이죠. 이런 경향은 비용적인 부담뿐만 아니라 우울감을 키워 치료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소중한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 낭비하는 것도 문제죠. 김 선생님은 가족과 생활하며, 일상생활을 유지하셨다는 면에서 모범적인 환자입니다. 선생님처럼 투병에 대한 의지를 자신 있게 이야기하시는 환자가 많지 않을 정도니까요.” 김규태 씨는 화순전남대학교병원 전남지역암센터가 개최한 제1회 ‘암극복 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김씨가 수기를 쓰게 된 것은 아내의 추천이 계기가 되었다. 2010년 KBS 본선에 진출했을 정도의 실력자였기에 글을 쓰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수기를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다른 환우들이 암치료 과정에서 저처럼 시행착오를 겪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특히 음식에서 말이죠. 저염식에 너무 스트레스 받거나 불필요한 건강식품에 휘둘리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골고루 맘껏 먹고, 일을 놓지 않고, 운동을 쉬지 않으면 암을 이기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삼신(三信)으로 삼암(三癌, 비인두암·대장암·위암)을 이겨가고 있다고 썼는데, 삼신은 가족과 교수(병원), 나를 믿는 것을 이야기해요.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오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암은 극복해낼 수 있는 병입니다.” 그의 치료에는 심 교수뿐만 아니라 이비인후과, 방사선종양학과, 대장암과 위암 치료를 위한 외과의 많은 교수진이 참여했기 때문에 신뢰는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 긴 이야기를 풀어낸 뒤 조금 지쳐 보이는 그였지만,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진심이라는 것, 암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의 투병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치료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어본다. 그의 확신을. 그리고 그의 완전한 승리를 기원해본다.
- 2016-01-12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