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자본의 한국 콘텐츠 산업에 대한 투자가 급증했습니다. 근래 들어 연평균 10%대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 콘텐츠 시장이 한국 콘텐츠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중국 레드 머니와 시장의 역습이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윤호진 정책개발팀장은 2016년 콘텐츠 산업을 전망하면서 올해 두드러질 10대 트렌드 중 하나로 ‘레드 머니의 확산과 레드 콘텐츠의 역습’을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중국에서 연출 제작해 후난(湖南) TV가 방송하고 있는 12부작 예능 프로그램 제작비는 한국의 한 지상파 방송사(KBS, MBC, SBS)에서 1년 동안 만드는 모든 예능 프로그램 제작비와 맞먹을 정도로 엄청납니다. 이는 중국 방송 시장의 규모를 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1월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김영희 전 MBC PD의 말이다.
“이번 사건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일인지 본사 스태프도, 어린 쯔위도, 심지어 저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후회스럽고 죄송스럽게 생각됩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다른 나라와 함께 일하는 데 있어 그 나라의 주권, 문화, 역사와 국민 감정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JYP 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 박진영이 지난해 11월,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 쯔위가 방송에서 대만 국기를 흔든 것에 대해 중국인의 비난이 쏟아지고 중국 기업의 트와이스 광고 모델 취소가 잇따르자 공개사과했다.
중국 자본과 시장의 공습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증언들이다. 중국 자본과 시장의 위력이 대단하다. 중국 자본과 시장의 공습은 우선 중국 기업의 국내 제작사와 기획사의 인수 및 투자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한국 인력 및 콘텐츠 중국 진출 봇물, 콘텐츠 제작 관행의 변화, 한국 인력과 노하우가 투입된 중국 콘텐츠의 세계 진출 등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근래 들어 중국 자본의 방송, 영화, 게임 등 한국 콘텐츠 산업에 대한 투자와 기업 인수가 급증하고 있다. 지난 2월 2일 한국 인터넷 음원 사이트의 원조 소리바다가 100억원에 중국 기업 ISPC 리미티드에 넘어갔다. DMG 엔터테인먼트의 방송 콘텐츠 제작사 초록뱀 미디어 인수, 베이징 싱아이 쟈정 인베스트먼트의 연예기획사 겸 제작사 씨그널 엔터테인먼트 인수, 쑤닝 유니버설의 레드로버 인수, 화처 미디어의 영화 투자배급사 NEW에 536억원 투자, 소후닷컴의 연예기획사 키이스트 150억원 투자, 산다게임스의 게임업체 Eyedentity Games에 1112억원 투자, 텐센트 홀딩스의 CJ 게임스에 4877억원 투자 등 중국 자본의 게임 업체, 콘텐츠 제작사, 연예기획사의 인수와 투자가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대증권 윤정선 연구원의 보고서 ‘2016년 응답하라 콘텐츠 산업’에 따르면 2010년 9월부터 2015년 9월까지 5년 동안 한국 콘텐츠 기업 인수와 투자 등에 투입된 중국 자본은 무려 1조92억원에 달한다. 또한, 영화 , 드라마 등 콘텐츠 제작 등에도 막대한 중국 자본이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콘텐츠 및 연예인 에이전시 사업을 펼치고 있는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 배경렬 이사는 “최근 중국 기업의 한국 연예기획사, 제작사에 대한 투자나 인수 작업이 급증하고 있다. 중국 기업을 사칭한 투자 사기가 자주 일어나는 것은 중국 투자의 현주소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 쯔위가 지난해 11월 22일 공개된 MBC 사전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이 대만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극기와 대만기(靑天白日旗)를 함께 흔들었다. 이에 대해 중국인과 중국 매체에서 비판과 비난을 쏟아내고 중국 기업들이 쯔위의 광고 모델 계약을 취소하자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트와이스의 소속사 JYP 엔터테인먼트, 박진영, 쯔위의 공식 사과가 이어졌다. 쯔위 논란은 한류의 가장 큰 시장으로 부상한 중국의 현재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재 한류 콘텐츠가 가장 많이 수출되고 한국 제작진의 진출이 가장 왕성하게 이뤄지는 곳이 중국 시장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게임 전체 수출액 29억7383만 달러 중 중국 수출이 32.2%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게임뿐만 아니다. 등 다양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수출, 등 예능 프로그램 포맷 판매 등 방송 콘텐츠, 웹툰, 캐릭터 등 한국 문화 콘텐츠의 가장 큰 수출 시장이 바로 중국이다.
또한, 이민호, 김수현, 전지현, 송혜교, 송승헌, 비, 김태희 등 한류 스타들의 중국 드라마와 영화 출연이 붐을 이루고 있다. 의 장태유, 의 표민수, 의 신우철 등 드라마 PD와 의 김영희, 의 장혁재, 조효진 등 예능 PD, 곽재용, 허진호, 안병기, 오기환 등 영화감독을 비롯한 한국 제작진의 중국 진출이 급증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국 유명 1인 방송 BJ들도 속속 중국 YY, 롱쥬 같은 1인 방송 서비스 업체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보고서 ‘2016년 콘텐츠 사업 전망’에 따르면 중국의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시장 규모는 2014년 1473억달러로 추산되고 2019년 2421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다. 세계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 8%에서 2019년 11%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규모의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시장으로 급성장했다.
현대증권 윤정선 연구원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시장은 단연 중국이다. 중국은 전 세계 콘텐츠 시장 규모 10위 국가 중 2018년까지 연평균 11%의 독보적인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되는 나라다. 한국 콘텐츠 기업들이 중국에 주력해야 할 이유다”라고 지적했다.
중국 자본과 시장의 위력은 한국 콘텐츠 제작 시스템의 변화를 초래하는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바로 한국 드라마의 사전 제작제 도입이다. 중국에서는 동영상 사이트나 방송에서 당국의 사전 심의를 받은 드라마나 동영상 콘텐츠만을 내보낼 수 있다. 또한, 중국 방송사와 동영상 업체들은 대부분 한국과 동시에 중국에 방송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최근 사전 제작 드라마가 많아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 드라마는 ‘쪽대본’으로 대변되는 당일치기식 제작 형태가 주류를 이뤘다. 드라마의 초반 3~4회만 제작하고 방송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지만 중국 시장 때문에 등 적지 않은 드라마가 방송 전 제작을 완료하는 사전 제작을 하고 있다.
중국 자본과 시장의 위력은 한국 인력과 콘텐츠 노하우가 투입된 중국 영화나 드라마, 프로그램의 세계 진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송혜교가 출연한 오우삼 감독의 중국 영화 이 칸영화제에 진출한 것을 비롯해 한국 연예인이 출연하거나 한국 PD와 감독이 작업에 참여한 중국 콘텐츠들이 세계 시장에 속속 진출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 CJ E&M과 공동 제작한 영화 등으로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시장에 진출했다. 중국 화이브라더스는 향후 3년간 한국 쇼박스와 최소 6편의 합작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고, 중국 화처 미디어는 한국 NEW와 중국에 공동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한중 합작 영화를 제작 할 계획이다. 한중 합작 영화들은 중국과 한국을 넘어 세계 시장을 겨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중국에서 예능 프로그램 를 제작해 후난 TV에서 방송하고 있는 김영희 PD는 “중국은 엄청난 규모의 콘텐츠 시장이 있다. 뛰어난 콘텐츠만 있으면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다. 중국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해외로 속속 수출되고 있다. 는 오는 4월 열리는 세계 최대 콘텐츠 마켓인 칸 MIP TV 2016에도 진출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 막강한 중국 위안화를 바탕으로 위력을 더해 가고 있는, 한국 콘텐츠 산업에 대한 중국 레드 머니와 시장의 공습에 우려의 시선도 존재한다. 바로 양질의 인력 유출로 인한 국내 콘텐츠 제작 역량의 약화와 중국 콘텐츠의 경쟁력 상승으로 인한 국내 콘텐츠 경쟁력 하락이 그것이다.
또한, 대만처럼 한국 콘텐츠 기업이 중국 자본의 인수와 투자로 인해 중국 콘텐츠 하청업체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국 콘텐츠의 우수 인력이 계속 양성되고 있어 중국 콘텐츠의 하청기지로의 전락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윤호진 정책개발팀장은 “한국 콘텐츠의 중국 시장 의존도가 매우 높은 것은 분명 우려할 만한 문제다. 동남아 등 다른 해외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북유럽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핀란드의 겨울은 아주 길다. 겨울이 일찍 찾아들고 오후 3시만 되어도 어둠컴컴해지는 추운 나라. 추워서 핀란드 사우나를 일상으로 즐기는 이 나라는 한겨울이면 산타클로스, 요정, 루돌프, 오로라, 이글루 등으로 여행객을 유혹한다. 그것보다 더 재밌는 것은 헬싱키~스톡홀름을 잇는 실자라인 크루즈 여행이다.
800년간 스웨덴·러시아 지배받아
핀란드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항구도시로 한반도의 약 1.5배 크기다. 유럽 중에서도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이며, 잘살기로 유명한 나라지만 1914년까지는 약 100년이나 러시아의 속국으로 살았다. 아직도 핀란드에 입국하려면 비자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 지배를 받기 전, 12세기부터 1809년까지 약 700년 동안이나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스웨덴의 지배시절 러시아와의 잦은 전쟁으로 핀란드는 황폐했다.
이후 러시아가 핀란드를 장악하자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이 세운 수도 투르쿠(Turku)를 싫어해 1812년 러시아에 가까운 헬싱키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부터 헬싱키는 급속히 성장했다. 1904년, 러시아 총독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보브리코프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러시아가 러일 전쟁(1904~1905)에서 패배함으로써 강압정책이 다소 완화되었다. 러일 전쟁 패전 이후 러시아 국내 정세가 불안한 상황을 이용해 1906년에 입법기관을 민주적인 단원제 의회로 개혁했다. 그러니까 핀란드가 속국에서 벗어난 것은 110년이 조금 넘어났을 뿐이다.
헬싱키 랜드 마크는 원로원 광장
헬싱키 시내 여행은 어렵지 않다. 걷거나 트램을 타면 된다. 헬싱키의 가장 중심부는 원로원 광장(세네트 광장, Helsinki Senate Square)이다. 스웨덴의 지배가 끝나고 러시아의 속박이 시작된 1818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독일 건축가 카를 루트비히 엥겔(Carl Ludvig Engel)에 의해 이 광장이 조성된다. 넓은 광장에는 약 40만개의 화강암 포석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의 동상이 있다. 핀란드를 하나의 독립국가로 인정해 의회의 구성과 핀란드어 사용을 허용했던 황제다. 이곳에 핀란드를 상징하는 대표 건축물인 루터란 대성당(Tuormiokirkko)이 있다. 왕궁 스타일로 지은 이 건물은 바다에서 바라볼 때 한층 더 아름답다.
그 주변에는 사우멘 판키(Suomen Pankki, 1812년 설립)라는 중앙은행이 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은행이다. 건물 앞에는 핀란드의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철학자이며 정치인이었던 요한 빌헬름 스넬만(1806~1881)의 동상이 있다.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핀란드의 독자적인 화폐 발행(1860)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앞 1891년에 귀족의 집으로 건립된 사아티탈로는 현재 핀란드 정부기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려한 건축 양식이 눈길을 끈다.
또 카우파토리(Kaupatori) 광장 앞쪽으로는 대통령관저 및 집무실, 헬싱키 시청, 스웨덴 대사관이 있다. 대통령관저 및 집무실은 근위병이 보초를 서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 바닷가 옆 길을 따라 가면 러시아 정교회인 우스펜스키 성당(Uspenskin Cathedral)이다. 이 성당은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1868년, 러시아 건축가 알렉세이 고르노스타예프(Aleksei Gornostaev)가 19세기에 비잔틴 슬라브 양식으로 세운 곳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교회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그리스도와 12사도의 그림, 돔탑, 파이프오르간 등이 있다. 안온한 느낌이 드는 성당 내부다.
영화 에서 주인공들이 순록고기를 사러 간 하카니에미 마켓(Hakaniemi Market)도 걸어갈만한 거리다. 2층짜리 벽돌건물 안에는 식품코너 말고도 아울렛과 구제숍, 공예품 숍이 있다.
헬싱키 중앙역 주변 볼거리 가득
헬싱키 중앙역 주변에도 볼거리가 산재해 있다. 중앙역사의 건물이 예사롭지 않다. 공모전에서 우승한 핀란드 건축가 엘리엘 사리넨(Eliel Saarinen, 1873~1950)이 설계해 1919년에 완공된 역사다. 아르누보 양식이 가미된 적갈색 화강암 건물로 정문의 멋진 대형 아치와 높이 49미터의 시계탑, 벽면에는 램프를 들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다. 19개의 승강장을 갖추고 있는 초고속 열차 노선인 펜돌리노(Pendolino)를 비롯해 다양한 등급의 열차가 있다. 역사 지하에는 헬싱키 지하철, 라우타티엔토리 역(1982년 완공)이 있다.
중앙역 주변으로도 멋진 건축물이 즐비하다. 그중 1902년에 개관한 핀란드 국립극장의 건축물이 눈길을 끌어 당긴다. 건축가 온니 타르야네(Onni Tarjanne)가 설계했으며, 당대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국가적 낭만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국립극장의 시작은 핀란드 극장(1872년 설립)에서 비롯되었다. 핀란드에 설립된 최초의 핀란드어(Suomi) 연극 전문 극장이었다.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의 오랜 지배에 저항하는 핀란드 민족주의 문화운동의 일환이었다. 1954년과 1976년에 소극장 시설이 추가되었다. 855석 규모의 대극장과 2개의 소극장, 스튜디오, 회의실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영화거장 카우리스마키 흔적없어 아쉬워
극장 앞에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가 알렉시스 키비(Aleksis Kivi)의 동상이 있다. 알렉시스 키비는 누르미야르비 출생으로 가난한 시골 양복점 아들로 태어났다. 헬싱키 대학에 입학했으나, 대학도 중퇴하고 일생 동안 심장병과 정신병으로 고통을 겪다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겨우 10년간의 창작활동밖에 하지 않았지만, 핀란드 문학의 창시자로 인정받고있다. 그의 작품은 핀란드 문학사상 최초의 고전이 되었다. 대표작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소설 가 있다. 핀란드에서는 다음으로 치는 고전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 필자는 핀란드의 영화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의 영화 포스터가 눈에 띄길 바랐다. 국내 영화 마니아들은 이 감독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는 칸영화제를 비롯 많은 상을 휩쓸었다. 그 외에도 가 있고 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에는 항상 그만의 특유의 스타일이 존재한다. 인물들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무성영화를 연상시키듯 대화가 없는 장면이 부지기수다. 얼굴이 익숙한 유명 배우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만든 작품속에는 카티 오우티넨(Kati Outinen)이라는 여배우가 등장한다. 결코 예쁘지 않고, 차라리 못생긴 편에 드는 이 여배우는 감독과 늘 함께 한다. 비록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으나 그가 숨쉬고 있는 이 도시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그 외에도 주변에는 아테네움 미술관, 키아스마 현대 미술관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나무로 만든 캄피(Kamppi)교회도 주목할 만하고 암석교회(Temppeliaukio Kirkko)도 유명하다.
또 국립박물관(Kansallismuseo)과 핀란디아 홀(Finlandia Hall), 올림픽 스타디움도 관광 목록에 빠지지 않는다. 또 유명한 관광지가 시벨리우스 공원(Sibelius Park)이다. 민족음악파인 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를 기리기 위해 만든, 600개의 철제 파이프로 제작한 기념비가 있다.
실자리안 나이트 클럽 체험 잊지 못해
여행의 백미는 헬싱키~스톡홀름으로 떠나는 선상 여행이다. 오후 3시 30분 경, 올림피아 터미널에는 사람들이 몰려 든다. 실자라인(siljaline) 여객선은 어마어마한 크기다. 1991년에 건조한 이 배는 약 6만 톤으로 선상에서의 높이만도 6층이다. 자동차 400대와 버스 60대를 탑재 할 수 있으며 탑승인원은 3000명에 육박한다. 2002년에 새롭게 리모델링한 배다. 배 안으로 들어서면 신천지다. 3인조 젊은 클래식 밴드가 연주하면서 환영한다. 일반 식당 여러 개, 뷔페 식당, 면세점, 옷가게, 바와 가라오케, 카지노, 나이트클럽, 사우나 등. 오후 5시에 출발한 배는 그 다음날 오전 9시 30분경에 스웨덴 스톡홀름에 도착한다. 이 선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체험은 나이트 클럽이다. 환히 불이 켜진 무대에서는 올드 팝송이 울려 퍼진다. 목소리가 흐느적거리는 에릭 클랩튼의 ‘원더풀 투나잇', 이럽션(Eruption)의 노래지만 우리나라 가수 방미가 불렀던 ‘원 웨이 티켓’, 일본인들이 많이 타는지 일본 노래도 부른다.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다 노년층이다. 플로어에서는 나이든 커플이 춤을 춘다. 넓은 무대에 새로운 무희와 가수가 등장하면 조명은 더 화려해진다. 밤이 깊어가도 클럽을 떠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이 발산되는 곳. 분명코 어느 누구라도 이 크루즈 여행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핀에어(www.finnair.com/kr)가 인천~헬싱키 구간에 직항 편을 운항 중이다. 소요시간은 약 9시간 30분으로, 오전 10시 20분에 인천에서 출발하면, 당일 오후 2시에 헬싱키에 도착한다.
현지교통 핀란드 교통카드를 이용하면 된다. 장거리 여행을 하려면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운행 시각이 정확하며 열차 환승도 편리하다.
예약사이트 www.tallinksilja.com, 한국사이트: www.siljaline.co.kr
통화 유로 전압 220v
언어 핀란드어와 스웨덴어가 공용어, 어디서든 거의 영어로 대화 가능.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서머타임 적용 시에는 6시간 느리다.
기온 헬싱키는 12월~3월 평균 기온이 영하 5도를 웃돈다. 때로는 4월 초까지 눈이 내리기도 하며 매서운 바람이 불기도 한다.
물가 헬싱키의 물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의 국가들 중 가장 낮다. 특히 헬싱키 카드와 ‘가족 요금 제도(Family Tickets)’는 핀란드 배낭여행의 부담을 줄여주는 좋은 제도다.
쇼핑 정보 헬싱키의 주요 쇼핑지역은 에스플라나디 공원, 알렉산터린카, 구시가지 등이며 상점은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음식 정보 헬싱키 에스플라나디 광장과 원로원 광장 근처에 레스토랑과 카페가 많다. 헬싱키 마켓광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생선요리를 맛볼 수 있다. 살미아키(salmiakki)라는 투명한 검은색의 단단한 젤리가 나름 유명. 단, 특유의 암모니아 향 때문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숙박 정보 요금과 운영기간이 시즌마다 천차만별이다. 단 헬싱키의 호스텔은 시트비를 따로 받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주변 볼거리 시간이 많다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라플란드(Lapland) 이발로(ivalo)나 산타 마을 로바니에미(Rovaniemi)를 찾아도 좋을 것이다. 그 외 사우나의 본고장에서 리얼 사우나 체험도 해 봄직하다. 핀란드에는 약 250만여 개의 사우나가 있다고 한다. 사우나 카페, 사우나 바, 사우나 아일랜드, 사우나 버스 그리고 심지어 곤돌라 사우나까지 있다.
글·사진 이신화(의 저자, www.sinhwada.com)
사람은 자신의 피리어드(period) 대로 역사를 생각한다. 70의 인생을 아직 겪지 않은 사람에겐 한국영화의 지난 70년은 인식과 학습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198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는 현재 대부분이 망자(亡者)의 것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유현목 감독과 그의 영화 ‘오발탄’같은 것이 그렇다. 거목 유현목은 갔지만 아직 이 영화에 대한 명성과 그에 대한 기억은 계속된다. 은 언제 봐도 늘 놀랍도록 ‘현재적’이라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명화(名畵)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것.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영화 ‘오발탄’은 지난 70년 한국 영화의 역사에 있어 우리 시대의 크나 큰 정치사회적 문제가 해결의 수순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한 발자국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있고, 또 그럴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유현목의 영화적 예감은, 마치 뛰어난 마법사의 그것처럼, 적중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직도 오발탄의 분단, 오발탄으로 인한 정치적 분쟁, 오발탄 때문에 생겨 버린 경제적 불평등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언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1990년대 후반 임권택을 위시한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김지운, 허진호, 류승완 등이 일궈 낸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코리안 뉴 시네마’의 기수들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계에 있어 진짜 르네상스는 신상옥 감독과 그의 키드(kid)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년대이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그야말로 빅뱅(big bang)이었다.
신상옥의 1961년작 는 죽은 남편의 친구가 인근 학교의 선생이 되어 사랑방의 객으로 머무는 동안 안주인과 미묘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는 이야기다. 특이한 것은 두 남녀의 은근한 ‘밀당’이 미망인의 딸 옥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욕정은 늘 이성의 벽을 넘어서려 하지만 그 담장 어귀에 서서 항상 머뭇대기 십상이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두근대는 가슴의 소리를 듣는 것만큼 에로틱한 것은 없다. 단 한 번의 입맞춤 혹은 부둥키고 얽히는 섹스 없이 이처럼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다. 그렇게 얘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거장 신상옥 감독이 생전에 만든 등 주옥같은 80여 편의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영화적으로 원대한 꿈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위용을 떨쳤던 신상옥의 영화사 ‘신 필름’과 관련해서는 굳이 비교를 하자면 1980년대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뤄 낸 신화를 한국적으로 치환시키면 이해가 빨라진다. 현대화된 한국 장르영화의 시작은 신상옥이 이루어낸 것이었다는 말은 정확한 기술에 속한다.
그 이후에는 이른바 신상옥의 후예들이 나왔는데 예컨대 199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 역시 신상옥 감독처럼 연출과 제작, 투자, 배급을 동시에 진행하며 화제작, 흥행작을 양산해 냈다. 모두 ‘아버지’’ 신상옥에게서 배우고 물려받은 것이다.
한국영화의 제1 르네상스기에서 이만희를 빼놓을 수 없다. 젊은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는 김태용의 작품으로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원래 이 영화는 이만희의 소실된 명화 중 하나이다. 1967년에 만들었지만 지금 그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김수용 감독이 1981년에 리메이크한 것은 어쩌면 이만희에 대한 오마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복역하다 잠시 휴가를 나온 여인 문정숙은 기차 안에서 위조 지폐범으로 쫓기고 있는 남자 신성일을 만나 하루살이 나방 같은 연정을 불태운다. 그 사랑 참 쓸쓸하고 허무하며 가슴이 아프다. 1960년대라면 여전히 독재의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발칙한 상상력이 동원된 러브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작가의 상상력은 첨단기술로 포장된 지금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이었다. 마치 예리한 칼날이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건 짜릿하지만 위험한 일이다.
이만희의 수많은, 그리고 화려한 작품들, 곧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7인의 여포로’ ‘삼포 가는 길’ 등은 신상옥과 달리 그가 리얼리즘 계보의 작가였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신상옥이 시류라는 서핑을 잘 탄 인물이었다면 이만희는 올곧은 지식인의 표정을 지닌 채 살아가려 했던 감독이었다 이만희는 한마디로 위험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에 걸려 구속되기도 했던 그의 이력은 이를 잘 설명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천재는 불우한 법이다. 이만희는 1975년 4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한국 영화의 리얼리즘 역사는 이만희의 죽음과 함께 한동안 사구(砂丘)에 묻히는 신세가 됐다. 2000년대 초반 이창동의 등장은 어쩌면 이만희의 부활과 같은 것으로 해석됐다.
너무나 많은 기억들, 작품들
70년사의 갈 길은 멀다. 중간중간 떠오르고 명멸하는 감독들, 제작자들, 배우들의 면면이 길고도 길다. 그중에서 이장호-배창호-이명세로 이어지는 혈맥 아닌 혈맥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계보에 속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바로 이들의 시대였다.
이장호 감독이 이루어 낸 70년 영화 역사의 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가 만든 ‘바람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 ‘바보선언’ 등 일련의 영화들은 천재적 영감을 지닌 감독이 시대의 어둠과 어떻게 조우하고 또 스러져 가는가를 보여준다. 그중 ‘바보선언’은 탈(脫)정치적인 척, 사실은 1980년대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한 영화적 지식인의 깊은 정치적 좌절과 그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소매치기와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가는 저지대형(低地帶型) 인간 동철이 가짜 여대생 혜영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사실은 콜걸이자 창녀라는 것을 알게 되고 좌충우돌 끝에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다. 바보가 아니면 살 수가 없었던 시절, 당시 우리 사회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의 시선을 통해 삶의 가닥을 이어 가려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바보선언’은 시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을 견뎌 내려는 영악한 이야기 꾼이 의도적으로 꾸며냈던 자기 모멸적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980년대의 흉포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배창호는 어두운 멜로드라마로 시대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려 했던 인물이다. 배창호는 이장호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꼬방동네 사람들’ 처럼 사회파적 시선을 자신의 작품에 강하게 투영시켰다. 그러나 곧 ‘도의 꽃’과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으로 1980년대의 젊은이들이 ‘앵그리 영 맨’ 혹은 ‘비트 제너레이션’의 세대임을 갈파한다. 배창호는 한국영화계에 ‘스타일’을 들여 놓았다. 영화는 결국 빛과 어둠의 예술이라는 점을 그는 명명백백하게 낙인찍어 놓았다. ‘적도의 꽃’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배창호가 이루려고 했던 영화적 스타일은 그의 조감독 출신인 이명세에서 빛을 발한다. 이명세는 영화보다 그림을 그리려는 쪽이다. 그가 만든 영화는 회화적이면서 키치(kitch)적이다. 영화라고 하기보다는 한 컷의 사진들을 이어 붙인 동영상의 예술에 가깝다. ‘첫사랑’과 ‘남자는 괴로워’ ‘지독한 사랑’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계보는 한국영화가 스타일에 있어 한 움큼의 큰 성과를 거둬 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
1999년 이명세가 로 새로운 좌표를 찍을 무렵 한국영화계의 한쪽에서는 목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로 ‘뉴 코리안 시네마’의 바람이다. 여기에는 홍상수와 박찬욱, 김기덕 감독 등이 주축을 이뤘는데 이들은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에 대거 진출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이뤄냈다. 당시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은 경쟁부문에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등 2편이, 또 다른 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Uncertain Regard)’에는 김의석 감독의 이 올랐다. 2002년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의 신작 역시 경쟁부문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나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다.
한국영화의 당시 칸 진출이 유독 눈길과 화제를 모았던 것은 해외 영화계, 특히 예술영화에 대한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유럽 영화 권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작가적 경향에 한 관심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3~4년 전부터 한국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유럽 평단들의 시선은 여전히 한국영화 하면 신상옥, 김수용, 임권택, 박광수, 장선우 등 구세대급 감독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당시 칸 영화제 진출은 한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유럽 영화계 내에서 공식적인 발판을 마련한다는 면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새로운 감독들’로서는 흔히들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허진호, 김지운 등 당시 40대 감독들이 거론돼 왔으며 그 뒤를 이어 봉준호, 장준환, 류승완 등 30대 감독들까지 포함해 이들을 일컬어 충무로에서는 일명 ‘뉴 코리안 시네마 운동’의 기수들로 분류했다.
유럽 칸 영화제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영화작가들이 부상하게 된 것은 마치 1990년대에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이 이를 통해 대거 해외무대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위상을 급격하게 올려 놓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됐다. 당시 유럽영화계는 첸 카이거와 장 이모우 등 북경대학 출신의 일명 ‘5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집중 소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세계화를 이루어 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뉴 코리안 시네마’ 감독들의 특징은 모두가 ‘전후 세대’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돼 있지 않으며 분단문제, 민족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이들은 1970~1980년대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한 후 영화예술이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문제에 대해 다양하고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던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고도화된 산업화 시대의 영향과 혜택으로 인해 MTV 스타일의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영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20~30대 젊은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심층적인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때론 유머러스하며, 때론 폭력적이고, 때론 공상과학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었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 ‘달콤한 인생’,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등이 대표적이다.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게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새로운 70년사를 위하여
새로움은 늘 오래된 것으로 대체된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10년을 돌진하듯 활동해 왔던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도 그렇다. 이들 모두 이제 ‘올드 보이’가 됐다. 50대를 훌쩍 넘긴 감독이 됐다.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피를, 새로운 ‘피의 혁명’을 요구하는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 그것에 호응하는 듯 2010년대에는 새로운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 ‘도희야’의 정주리 감독, ‘가시꽃’의 이돈구 감독, ‘명왕성’의 신수원 감독 등등.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아직 지난 70년의 기나긴 역사의 시간에 눌려 완전히 개화한 상태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곧 이들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은 모두가 감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인생이 그렇듯, 영화도 다 그런 것이다. 바뀌고, 잊히고, 새로 기억되며, 그래서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영원히 살아 남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길을 7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때론 영광스럽고, 때론 팍팍하며, 때론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또 때로는 한참이나 참담한 심정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70년을 영화 혼자서 버텨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지금의 감독과 배우가 있기까지 그 전의 감독과 배우가 있었고, 또 다시 그전의 감독과 배우, 제작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건 일직선의 끈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머리와 꼬리가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박찬욱과 김기덕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70년 전사(全史)의 영화를 보라는 것은 가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 봤자 일별에 불과한 일이 될 것이다. 단, 기억하는 자만이 미래를 점지해 나갈 것이다. 분명한 일 하나는 과거의 영화들이 지금의 영화세상을 만들어 나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운명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간다면 세상은 언젠가 꼭, 영화처럼 될 것이다.
△ 오동진(吳東振) 영화평론가
문화일보,연합뉴스,YTN 기자를 거쳐 영화전문지 FILM2.0 편집위원과 동의대학교 초빙교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EBS 시네마 천국 MC, YTN 시네24 MC를 역임했다. 현재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과 마리끌레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강화도 초지대교 지나 해안대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작은 섬 하나가 연결되어 있다. 5000만평의 세계 3대 갯벌이 신비롭게 펼쳐져 있는 ‘동검도’란 섬이다.
조용했던 동검도가 최근 ‘영화의 섬’으로 불리우며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갯벌 앞 섬마을에서 희귀 영화를볼 수 있는 특별함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흔히 접하기 힘든 세계고전, 예술영화, 작가주의 영화를 365일 상영하는 예술극장이 오픈했다. 도시에서도 사라지고 있는 예술극장을 섬에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그를 만나기 위해 동검도로 영화여행을 떠나보자.
글 김미숙 객원기자 mebranding@naver.com 사진 이형용 MeBranding 이사
얼굴을 들면 탁트인 갯벌과 하늘, 내려다 보면 구불구불 시골길… 섬 풍경 가운데 현대적인 건축물이 한 프레임에 담긴 조화가 인상적이다. ‘DRFA 365 예술극장 & 조나단의 커피’ 감각적인 하얀 입간판에 먼저 눈길이 간다. 건물에 들어서면 벽에 걸린 걸작영화 포스터, 세계 유명 감독들의 흑백사진들, 진한 커피향과 잔잔한 음악까지. 마치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간 기분이다.
서너명의 중년남성들이 편안한 웃음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도시의 일반극장에선 보기 힘든 스태프 구성이다. 그리고 한 남자가 친절하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덥수룩한 수염, 순수하고 털털한 인상이 섬 촌장님 같다. 그가 바로 DRFA 365 예술극장의 조나단 유(본명 유상욱, 51세) 대표다.
“누구신가요?” 첫 질문에, 0.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라이터이자 동검도 DRFA 365 예술극장 대표인 조나단 유입니다. ” 당당히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은 외모와 전혀 다른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극장 안 카페에서 동검도에 극장을 지은 이유부터 오직 영화 한 길을 걸어온 삶, 그리고 新청춘(중년)들과 나누고픈 영화 & 힐링문화에 대한 생각까지 그와의 담론이 시작됐다.
#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다
이 극장이 생긴 취지는 소중한 세계 고전영화, 제3세계, 예술영화의 복원과 상영을 위해서라 했다. 1999년 DRFA(Digital Remastering Film Archive)란 동호회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보여줄 좋은 작품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조나단 유 시나리오 스쿨과 DRFA 회원들은 영화 복원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공유할 극장 마련에 힘썼다 . 그리고 마침내 2년여 준비 끝에 접근성 좋고, 천혜자연의 동검도에 DRFA 365 예술극장을 설립하게 됐다.
유 감독은 시나리오 스쿨을 함께 운영 중이다. 젊은 작가들은 물론 작가를 꿈꿨던 시니어들에게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고, 작품과 감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계속해서 작가들을 발굴하고, 좋은 작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해외 희귀 작품을 번역하고, 본인 스스로도 30년째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뼛속까지 영화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사장될 뻔한 훌륭한 고전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세상에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한다. 우리는 그로 인해 좋은 영화를 경험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됐다. 영화 저작권을 15000편이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익이 생길 때마다 또다시 영화 번역과 디지털 복원, 저작권 구입 등 재투
자하는 그의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 중년의 청춘 감성 일깨워
동검도 DRFA 365 예술극장의 주 관객층은 50~60대 중년여성층이다. 최근 들어 10대 학생들부터 70대 장년까지 남녀노소 관객층이 다양해졌다. 그래도 이곳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꽃누나 언니들’이다. 그 이유는 중년 감성을 깨워주는 유 감독만의 섬세함과 배려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영화 전문가로 영화와 시나리오 외에도 재주가 참 많다.
하루 두 번 영화가 시작되기 전 직접 피아노를 연주한다. 영화 OST나 상영될 영화와 관련 음악을 선곡해 연주하고, 영화배경과 감독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가 시작 전부터 이미 중년 여성관객들로 하여금 젊은 날의 추억과 로맨스로 빠져들게 한다.
피아노 선율은 영화에 몰입도를 높여주고, 닫혔던 마음을 열어주는 사랑의 묘약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 감독은 영화와 음악 외에도 음식학-사상체질학 등에도 조예가 깊다. 관객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살피고, 각 개인에 체질에 맞는 차나 음식을 권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본 이후 영화 주제 뿐 아니라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커피,영화, 소통을 즐기면 저절로 행복한 표정이 된다.
1. 김미숙 객원기자와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나단 유 감독
2. 갯벌 풍경이 내려다 보이는 극장 2층의 카페 공간 내부
3. 1층 벽면, ‘피아노 치는 조나단 유’ 감독의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4. 1층 ‘조나단의 커피’ 내부.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영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5. ‘DRFA 365 예술극장 &조나단의 커피’ 입간판 및 극장 건물 외관 밤 풍경
6. 1층 벽 한 켠에 걸려 있는 조나단 유 감독의 환영 인사말
7. 조나단 유 감독이 영화 상영 전에 작품 배경, 감독성향, 제작 배경 등 영화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한편 “인간의 삶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51번 읽었는데 매번 새롭더라구요.”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다양한 삶의 모습에 관심이 많다. 자신의 콘텐츠와 장점을 최대한 발휘해 서비스하는 모습 역시 그의 또 다른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관객들은 동검도에서 그의 섬세한 배려와 서비스 정신이 영화의 감동과 함께 깊은 인간적인 여운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동검도를 다시 찾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될 정도로 말이다.
# 영화와 공유로 새로운 문화 창조
오후 3시. 오후 6시 하루 두 번 영화가 상영된다. 해질녁 동검도 갯벌의 노을 빛에 젖어 있노라면, 피아노 연주가 들리고, 영화 시작을 알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60~70대 여성관객들이 많았던 날. 노년이지만 여전히 청춘인 두 자매의 로맨스를 그린 ‘라벤더의 여인들(영국,2004)’이 상영됐다. 누가봐도 관객들의 취향, 스타일을 고려한 영화다.
영화가 끝난 후,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는 사람, 잃었던 감성을 다시 찾은 느낌이라며 유 감독에게 감사를 전하는 사람, 다섯 번 봐도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답다는 사람 등 어느 대형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목격됐다. 모두가 영화 주인공들처럼 소녀 감성으로 돌아간 청춘들의 모습이었다.
유 감독은 DRFA 365 예술극장은 35개 좌석의 소극장이지만, 최고의 사운드 시설을 설치했다고 했다. 영화를 최상의 컨티션으로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하고 프로그래밍한다며. ‘영화’를 매개체로 공감할 수 있는 소통공간이 영화인으로써 늘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이제 이 공간은 더 이상 제가 주인이 아닙니다. 관객이 6000원을 내고 6000원의 가치를 함께 소유하고 있는 공유 공간이 됐습니다.”
개관 후 꾸준히 관객들을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종교, 여성, 다문화가정 단체 등 관객층도 다양해졌다. 관객 다양화는 극장의 활용도 마저 바꿔놓았다고 한다. 심야영화제, 여성영화제, 이달의 감독전 등 유감독이 기획하는 프로그램 외에도 관객 스스로 영화를 매개로 하는 힐링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안한다. 극장 이상의 놀이터, 새로운 문화가 꽃피는 ‘아이디어 창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도시의 기업형 예술극장도 경영상 어려움으로 사라지는 이때, 문화 소외지인 섬에 있는 예술극장 관객수와 프로그램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 꿈과 낭만이 흐르는 섬, 동검도
마지막으로, 그에게 꿈을 물었다. “동검도에 제2예술극장과 작가들을 위한 창작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지금처럼 영화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봉사하며 살고싶은 게 개인적인 비전입니다.”
이것은 유 감독만의 꿈은 아닐 게다. 요즘처럼 몇 백만이 들었는가가 우선시되는 시대. 극장을 나오면 제목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상업영화 홍수 속에서 우직하게 영화의 작품성과 순기능을 지키는 DRFA 365예술극장의 자원봉사자들, 후원자들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순수 관객 모두의 꿈일 것이다.
동검도에는 꿈이 흐른다.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영화는 물론 5000만평의 갯벌, 억새풀밭, 하와이안 코나 커피, 백만불짜리 산소를 선물 받는다. 잊혀질 예술영화를 살리고, 잃었던 청춘의 낭만이 되살아나 더욱 행복하다.
아름다운 영화의 섬 동검도로 좋은 사람들과 시네마기행을 떠나보자. 동검도 영화 인생, 조나단 유 감독이 당신의 영화여행의 매력적인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영화감독·시나리오 작가 조나단 유
MBC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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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2년 연속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 수상
대종상
시나리오상 수상
◆김미숙/브라보 마이 라이프 객원기자-퍼스널 브랜딩 큐레이터
-미브랜딩(MeBranding) 대표
-브랜딩 컨설턴트, 강사, 카피라이터, 커리어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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