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동네 친구끼리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그룹은 아니지만, 만나는 김에 한 명 더 참석한다는 것이다. 동네 친구와는 사촌지간이다. 중학교 동창이기도 해서 모르는 사이는 아니다. 지나치게 깔끔을 떨어 ‘깔끔이’라고 부르는 친구이다.
장소를 고속터미널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터미널 안에는 깔끔한 음식점들이 많지만, 식성에도 안 맞고 비싼데다가 음식점이 많아 찾기 어려워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 상가 지하에 있는 한 음식점을 추천했다. 신세계 백화점 맞은편이다. 전철 출구로 나와서 길만 건너면 된다. 그런데 허름한 음식점이라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위치가 안 나왔다. 그러니 출구 번호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모이는 사람들은 필자가 추천하는 음식점이 어디쯤인지는 대강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한 친구가 출구번호가 6번이라는 문자가 왔다. 그래서 전철에서 내려 6번 출구를 찾아가는데 지하 터미널 상가를 거의 다 돌다 시피해서 겨우 찾았다. 그런데 나가보니 6번 출구는 아파트만 있고 주변에 음식점이 없었다. 출구번호를 잘 못 알려준 것이었다.
일단 가장 가까운 상가 건물로 들어갔다. 필자가 추천했던 음식점은 거기서 또 한 참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하에 원래 추천했던 메뉴인 동태찌개를 파는 음식점이 있었다. 그러나 깔끔이가 동태찌개는 먹고 나면 냄새가 나니까 돈까스를 먹자는 것이었다. 노인이 되면 그렇지 않아도 냄새가 나는데 음식 냄새까지 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모인 김에 노인 냄새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술 종류를 정해야 하는데 역시 깔끔이가 제동을 걸고 나왔다. 필자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추천하니 막걸리는 먹고 나면 냄새 나서 안 되고 맥주나 마시자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필자가 폭발했다. 막걸리를 고집한 것이다.
냄새를 풍긴다는 것은 물론 민폐이다. 전철 초기에는 술을 마시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다고 해서 택시를 탄 적이 많다. 그러나 매번 그렇게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모였던 사람들이 대부분 전철역까지 가서 헤어지기 때문이다. 혼자 택시 탄다고 유난을 떠는 것도 보기 흉하다.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어르신 카드가 있어 전철은 공짜인데 굳이 택시를 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술을 자주 마시지만, 매번 전철을 타고 귀가한다. 늦은 저녁 시간이면 술 한 잔 걸친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우리 냄새이다. 너무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다 보면 불편해서 못 산다. 우리 식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깔끔을 떨자면 김치도 먹지 말아야 한다. 해외에 나갔다가 국적기를 타면 입구에서 마늘과 김치 냄새가 진동한다. 그것이 우리 냄새인 것이다. 탑승 전 양치질을 했더라도 몸에서 나는 냄새이다.
그래서 뮌헨에 단 하나 있는 한국 음식점은 마늘을 안 쓰는 조건으로 임차 계약을 했다고 한다. 건물 주인이 마늘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늘을 안 쓴 한국 음식이 맛이 있을 리 없다. 유일한 한국 음식점이라 거기 가지 다른 한국 음식점이 생기면 그 집에 갈 이유가 없다. 옛날만큼 김치를 많이 먹지는 않지만, 굳이 냄새 난다고 김치를 안 먹을 수는 없다. 한국인은 한국인 냄새가 날 수밖에 없다. 전철 안의 술 냄새가 싫다면 취객이 많은 늦은 시간을 피해 다니면 되지 않을까.
고요히 혼자 떠나 볼 수 있는 때다. 물론 둘이, 여럿이도 괜찮다. 온몸에 한기가 엄습하고 찬 이슬이 피부에 촉촉이 느껴지는 저수지의 새벽이다. 일출 이전의 어둠 속에 서서 물체를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혼자만의 충만함, 여럿이 함께 있다 해도 이럴 때는 혼자가 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괴산의 문광저수지에 도착한 것은 새벽 여섯 시가 될 무렵이었다. 동트기 전 어스름 새벽안개의 정적을 느끼며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근처 자동차에서 커피를 꺼내 마시던 분들이 거리낌 없이 한 잔 건네 온다. 따끈한 차 한 잔의 고마움이 더 따스히 온몸에 스민다. 그 동네 사는데 이렇게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물안개가 신비할 때면 자주 나온다고 했다. 보온병에 커피 가득 담아서 나오는 그들의 새벽 나들이가 부럽고 순수하게 차 한 잔 나누어주는 인심이 고맙다.
저수지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낚시꾼들의 수상 좌대의 빨간 지붕들이 이쁜 반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꽂아놓은 듯한 고목들의 무수한 반영들이 저수지의 파문에 아른거리며 비구상 그림을 연상시킨다. 차츰 은행나무길도 노란 색감을 자랑하고 가끔 지나가는 차량들의 바퀴 사이로 은행잎이 회오리치듯 날린다.
마침 그 지역 사진작가협회 회원께서 나와 사진 찍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어 셔터를 누르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리고 괴산만의 맛난 음식점으로 이끌어서 정갈한 나물반찬으로 시골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딜 가나 각자 부담이 확실한데 그분께서 굳이 식사비를 계산하신다. 부담을 드릴 수 없어서 드리는 돈을 한사코 받지 않아 그분의 트렁크에 선물을 실어드렸다. 그리고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안내도 받는 멋진 수확에 감사할 따름이다. 연로하시지만 인자한 모습으로 차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그분의 순박하고 선한 마음씨가 훈훈하다.
어차피 충청북도 지역에 왔으니 대청호를 들릴 일이다.
대청호는 넓다. 충북 청주 옥천, 보은은 물론이고 대전도 걸쳐져 있어서 대청호 오 백 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호수 주변에 작약이 필 때도 있고 자연의 풍광이 시시때때로 다르거나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다른 몇 군데가 있다. 현재 6구간까지의 길이 있어서 가을을 맛보고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번에는 가을바람에 어울리는 갈대습지를 찾았다.
호숫가의 갈대가 반짝이며 바람에 일렁인다. 갈대가 배경이 되어주는 가을호수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니 호수를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한가로이 벤치가 누군가를 기다린다. 천천히 거닐며 호수에 풍덩 빠져있는 푸른 가을 하늘의 반영에 감탄했다.
그때 벤치에 조용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자분이 "우리 둘 모습 좀 찍어주실래요?" 하며 휴대폰을 내밀기에 가을 풍경에 잘 어울리도록 구도를 잡아 찍어줬다. 그리고 앞모습뿐 아니라 “뒷모습의 분위기가 더 좋아서 한 장 더 찍어드릴게요” 했더니, "어머, 고맙습니다. 우리 둘이 지금 환갑 놀이하는 거예요." 하면서 따뜻한 연륜의 미소를 보여준다.
갈대와 가을 하늘이 넓게 펼쳐진 호숫가 벤치에 앉아 친구와 살아온 시간을 자축하는 모습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환갑이나 무슨 기념일이면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멋들어진 잔치를 했다는 말들을 듣기도 하는데 이분들의 모습이 특별하고 이뻐서 몇 번씩 뒤돌아보곤 했다. 아름다운 정경이 아름다운 가을을 만들어 준다.
가을바람 따라 이름 모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힐링의 시간을 더듬으며 그 분들처럼 따뜻한 차 한 잔이나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잘 나이 먹어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흉흉한 뉴스가 연일 나오는데 가을은 이렇게 눈치 없이 이쁘기만 하다.
작년에 미국에서 사는 친구가 와서 내장산에 갔다 왔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인데 필자와 치킨집 하는 친구가 동참했다. 또 한 명 뺀질이라는 별명의 친구가 있는데 마침 해외출장 중이라 동참하지 못했다. 3명이 일사불란하게 일박 코스를 재미있게 다녀왔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 친구가 또 와 일박 여행을 짜봤다. 이번에는 지난해 동참하지 못했던 친구까지 4명이 동참했다. 그동안 치킨집 하던 친구는 은퇴 후 공기 좋은 곳에 살고 싶다며 용문으로 이사 갔다. 그래서 용문산 등산을 중심으로 계획을 잡았다.
오전 10시에 상봉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뺀질이가 분당에서 출발하면 아침 출근시간이라 너무 붐비니 한 시간 늦게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 친구와 둘이서 출발했다. 상봉역에서 만나 용문역에 도착하니 11시였다. 마침 장날이라 용문에 사는 친구는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고생했다고 했다. 3명이 한 사람을 기다리느라 한 시간 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용문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려면 한 시간쯤 모자랄 것 같았다. 시간 맞춰 오라고 했으나 나이 들어 굳이 정상까지 갈 필요 있냐며 산 밑에서 있다가 오자며 뺀질거렸다. 미국 친구는 다리 성할 때 정상 등정을 해야 나중에 나이 들어 못 걸을 때 후회 안 한다며 산행을 고집했다. 12시에 뺀질이가 도착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로 와야 하는데 용문역 태극기 밑에 있다며 찾으러 오라고 해서 더 화가 났다. 태극기 있는 곳을 또 찾아야 했다. 겨우 뺀질이를 만났다. 그는 히말라야 등정을 해도 충분할 것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산행 준비를 하긴 한 모양이었다.
닭백숙으로 점심을 맞춰놓았다고 했다. 가서 보니 근사한 개울가 펜션이었다. 용문에 사는 친구가 숙소 준비는 자기네 집에서 해놨다고 했다. 하지만 뺀질이는 친구 와이프 고생하니 펜션에서 자자고 우기며 펜션 숙박 회비를 걷었다. 용문에 사는 친구는 이미 며칠 전부터 우리를 위해 준비를 해두었는데 이제 와서 펜션에서 자고 가면 섭섭하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숙소는 용문에 사는 친구 집으로 정했다.
다음 코스는 용문산이었다. 뺀질이는 용문사까지만 갔다가 내려오자며 뺀질거렸다. 친구들은 일단 올라가자고 하고 용문사에 가서는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뺀질이는 계속 투덜댔다. 해가 일찍 떨어지니 그만 내려가자는 것이었다. 결국 정상까지 가지도 못하고 필자만 마당바위까지 갔다 내려왔다. 그때까지 나머지 친구들은 뺀질이의 자기중심적 행동들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용문산 관광단지에서 저녁식사 겸 술 한잔을 해야 하는데 승용차 처리가 문제였다. 용문에 사는 친구가 술을 마시면 대리운전을 시켜야 하는데 워낙 한적한 동네라 대리운전이 힘든 동네였다. 그렇다고 용문에 사는 친구 집에 가서 술을 마시자니 친구 와이프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물론 음식점에서 먹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했다. 고민하고 있던 터에 뺀질이가 자기는 원래 술을 안 마시니 대신 운전을 하겠다고 했다. 단번에 해결책이 나온 셈이다. 뺀질이도 쓸 데가 있었던 것이다.
친구 3명이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작년에는 그랬다. 그러나 4명이 되면 한 명은 왕따가 되기 쉽다. 작년보다 한 명이 늘었을 뿐인데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분분했다. 뺀질이가 집중 난타 대상이 되었다. 나중에 뺀질이는 심장이 좋지 못해 힘든 운동을 자제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제야 뺀질이의 모든 행동이 이해되었다.
사돈은 아주 멀고도 어려운 사이라고 한다. 필자는 아들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사돈댁과 멀리 지내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를 하는 자리에서 필자는 “남들은 사돈이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는 좋은 사돈 사이가 돼서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라고 말해버렸다.
그렇게 서로 격차가 나는 사이도 아니고 장인 장모 될 분들의 인상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쉽게 그 말이 튀어나왔나 보다.
우리 남편은 한술 더 떠서 처음 보는 자리인데도 술을 좋아하시느냐며 자주 만나 술친구가 됐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사돈어른도 술을 몹시 즐기신다며 의기투합으로 화기애애한 자리가 되었다.
필자 주변에서 사돈들끼리 해외여행도 같이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은 적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필자도 사돈이 생기면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싶었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아이들이 결혼한 후에 충청지방에 계시는 사돈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1박 2일동안 계룡과 전주 시내까지 안내받아 여행도 잘하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전주로 가는 길에 들른, 처음 가본 대둔산은 충남 논산시와 전북 완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는 명산으로 멀리 산등성이를 올라가는 케이블카도 보이고 올려다본 하늘이 정말 맑고 푸르러 청정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근처의 수목원에는 이름도 모르는 탐스러운 꽃들과 소박한 야생화가 지천이었고 온통 꽃동산으로 예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계룡시와 전주는 충청도와 전라도로 그리 가까운 곳은 아닌듯한데 전주의 한옥마을 구경도 시켜주시고 유명한 전주비빔밥을 대접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전주에는 막걸리를 주문하면 따라 나오는 안주가 10여 가지가 되는 술집이 유명하다고 한다.
맛집 소개 책에서 보았는데 막걸리 한 주전자를 더 할 때마다 푸짐한 토속안주가 한 상 가득 차려지며 필자가 좋아하는 삭힌 홍어는 기본으로 나온다니 언제든 전주지방 여행을 하면서 꼭 한번 들러야지 마음먹고 있는 곳이었다. 이번엔 사돈댁과의 동행이었으므로 그냥 간판만 보며 지나쳤다.
전주의 한옥마을은 사람들이 많아 너무 혼잡해서 제대로의 모습을 감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옥마을이 생긴 유래를 알고 보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뿌듯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전주의 한옥마을은 일제 강점기 중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데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고 한다.
그림 같은, 기와의 늘어진 곡선이 아름다운 용마루가 즐비한 한옥들이 눈길을 잡았다.
그리고 전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맛있기로 유명하다는 비빔밥집을 찾았다.
이렇게 초대를 받아 1박의 즐거운 여행을 다녀온 터라 그 후로 사돈이 서울에 오실 때면 자연스레 식사 대접을 하게 되었다.
외식도 몇 번 했지만, 집으로 오시게 하는 일이 많았다. 없는 솜씨지만 정성으로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사돈이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올라오셨다.
저녁에 오시라 해서 소박하게 한 상 차려 식사를 같이 했다.
친구들에게 사돈을 초대해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고 하니까 어떻게 집에서 대접을 했느냐며 필자보고 대단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도 대단할 게 없는 게 특별한 요리를 한 것이 아니고 한식으로 불고기 상추쌈에 잡채, 생선구이 등 평소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으로 준비를 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단한 음식을 생각하지 않고 소박하게 정성을 다해서 만든다면 초대가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혹시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은 되지만 "맛있네요" 라는 인사를 들으니 정말 기쁘다.
이렇게 편하게 생각하니 사돈이라고 다 어렵고 불편한 사이는 아닌 것 같다.
필자에겐 하나밖에 없는 사돈댁과의 이런 사이가 너무 좋기만 하다.
와인은 역사상 인류가 가장 오래 즐긴 술로 꼽힌다. 최근에는 미국의 사우스플로리다 대학 연구팀이 학술지를 통해 시칠리아 동굴에서 6000년 된 와인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기존 가설보다 30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우리 조상들도 일찍부터 와인과 접해왔다. 사료에는 중국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사위로 삼은 고려 충렬왕에게 포도주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본격적으로 국내에 와인이 소개된 것은 조선 후기 선교사들을 통해서다. 그런데 오랜 인연에 반해 실생활 속에서 왜 우리 와인은 찾아보기 어려울까. 충북 영동의 한 와이너리를 찾아 우리 와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현재 국산 와인은 충북 영동과 경북 영천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곳 이외에 전북 무주와 경기 포천에도 많은 와이너리가 운영되고 있다. 현재 국내 와이너리는 150여 곳 이상 될 것이라고 업계에선 추산하고 있다.
충북 영동의 대표적 와이너리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컨츄리와인은 3대째 와인을 만들어오고 있는 와이너리다. 컨츄리와인의 시작은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컨츄리와인의 대표 김덕현(金德賢·34)씨의 할아버지인 김문환(金文煥)씨는 일제강점기 미크로네시아로 강제 징용을 떠나게 된다. 한때 스페인의 영토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그곳에서 김문환씨는 스페인 병사와 친분을 쌓게 되고 포도와 와인의 매력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영화 같은 이야기다. 해방 이후 고향인 영동으로 돌아와 포도농사와 포도로 가양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1965년이다.
그리고 그 뜻을 2대 김마정(金摩廷·63)씨가 이어받아 2010년 개인농가로는 최초로 주류제조면허를 취득해 본격적인 와인 생산에 나서게 된다. 현재는 3대인 김덕현씨가 생산과 판매 모두를 책임지고 있다.
한국의 와이너리가 살아가는 법
2대 김마정씨가 혼자 공부해 와인 제조에 뛰어든 독학파라면 3대 김덕현 대표는 정통 학구파라 할 수 있다. 미대를 졸업하고 업계에서 활약하던 디자이너였던 김 대표는 2009년 직장을 그만두고 와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국내 와인스쿨을 통해 기초를 닦은 후 대학 와인발효·식음료서비스학과에서 다시 공부했다. 소믈리에 자격증도 받았다. 이후 프랑스 보르도부터 LA 나파 밸리, 호주 바로사 밸리 등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 국가들 중 컨츄리와인은 어디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까. 의외의 답이 나온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 와인시장의 80% 정도는 자국산 와인이에요. 그만큼 와인의 품질도 높고, 소비자들도 일본 와인을 인정해주죠. 자국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또 스시와 같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일본 음식의 파트너로 세계시장에 많이 소개되어서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그에 반해 우리는 와인시장의 95% 이상이 수입 와인이에요. 국산 와인에 대한 평가도 아직은 낮은 편이고요.”
국산 와인이 외산과 경쟁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높은 주세(酒稅)에 있다. 수입 와인은 FTA로 인해 관세가 사라져 저가로 유통이 가능하지만, 국산 와인의 경우 ‘전통주’에 속해 높은 주세를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반면에 전통주의 범주에 속한 만큼 갖게 되는 장점이 있다. 바로 온라인 판매의 허용이다. 그동안 전통주는 우체국 등 제한된 곳에서만 온라인 판매가 가능했다. 하지만 국세청 고시 및 주세사무처리규정 개정안이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되면서 온라인 판매가 허용됐다. 실제로 컨츄리와인 역시 포털 쇼핑몰을 통해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온라인 판매가 허용되면서 우리 와인의 주 고객층이 많이 낮아졌어요. 그간 와서 사가시거나 주문해주시는 분들의 연령은 40~50대가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온라인 판매가 시작되면서 20~30대 고객이 늘었어요. 입소문을 타서인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서울 홍대나 강남에서 저희 와인이 식당을 통해 소개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국산 와인 깔끔한 과일 향이 특징
김 대표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특징을 깔끔한 과일 향으로 정의한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대표적 포도 품종으로는 캠벨 얼리(Cambel Early)가 있어요. 가장 재배가 많이 되는 품종인데, 과일 향이 무척 강해요. 가볍지만 깔끔한 맛이라서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어요. 가벼운 디저트와 잘 어울린다고 평가받죠.”
국내 대표 품종인 캠벨 얼리는 수입 와인과 국산 와인 맛의 차이가 나는 가장 큰 요소로 지목된다. 수입 와인에서 많이 쓰이는 품종은 카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 피노 누아(Pinot Noir), 시라(Syrah), 메를로(Merlot) 등이 있는데 캠벨보다 타닌 성분이 많아 무겁고 떫은 느낌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오히려 이런 맛의 와인 재료로는 국내에서는 포도(캠벨)보다는 산머루가 꼽힌다.
“캠벨과 산머루 와인 모두 또 하나의 특징을 갖는데 바로 단기숙성에 적합하다는 것이에요. 수입 와인에 비교하자면 갓 만들어진 와인을 즐기는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에 가깝죠. 우리 와인으로 장기숙성을 해보면 어떨까 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봤는데, 여러 소믈리에분들이나 와인 애호가분들과 평가를 한 결과 장기숙성엔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컨츄리와인이 1년산과 2년산만 판매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김 대표는 수입 와인에 비해 갖고 있는 경쟁력으로 안전 식품으로서의 가치를 꼽았다. 와인 역시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인 만큼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와이너리의 경우 첨가물에 대단히 관대한 편이에요. 특히 저가 와인일수록 그렇습니다. 와인이 숙성되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산화방지제나 보존제를 많이 쓰죠. 우리 와인의 경우 이런 첨가물을 넣지 않으려고 멸균 작업을 별도로 진행합니다. 파스퇴르 살균법이라고도 불리는 저온 살균법으로 변질을 막고 있어요. 또 포도를 선별하는 과정에서도 철저히 선별하고요. 최종적으로 병입될 때까지 산소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다 보니 한 번에 생산할 수 있는 양에도 한계가 있어요. 대량생산 방식과는 거리가 있죠. 그래도 우리의 고집을 알아주시는 애호가들이 꾸준히 찾아주셔서 자긍심을 갖고 와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국산 와인의 역사는?▲▲
우리가 직접 와인을 만든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다. 포도를 으깨어 설탕과 소주를 부어 가양주(家釀酒)로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 공식적인 최초 와인의 재료는 아이러니하게도 포도가 아니라 사과였다. 1967년에 파라다이스 주식회사가 출시한 ‘애플와인 파라다이스’가 그것. 사과의 고장 대구에 공장을 차려놓고 12도의 사과주를 생산한 것이 시작이다.
포도주로는 1968년 주식회사 한국 산토리가 생산한 선리프트 와인·로제 와인·팸포트 와인이 꼽힌다. 이후 한국 산토리는 해태주조로 매각됐다. 1977년에는 토종 기술과 포도로 만든 ‘마주앙’(구 동양맥주·현 롯데주류)이 나오면서 한국 와인 역사에 새 장이 열린다. 1970년대에 정부가 식량 부족을 이유로 곡주보다는 과일주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 한때 와인은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수입 와인이 소개되면서 국내 와인의 위세는 갈수록 떨어졌다.
국내 최고의 술 전문가가 마침내 세계와 겨룰 명주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재료는 오미자였다. 패스포트, 썸씽스페셜, 윈저12, 윈저17, 골든 블루… 27년 동안 동양맥주에서 한국 위스키 시장의 거의 모든 술에 관여해, 업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불릴 만큼 주류 역사의 산 증인이 된 이종기(李鍾基·62) 오미나라 대표. 오랜 세월 한국 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그는 지금 독립군이 된 심정으로 명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의 술 만드는 흥과 열정, 그리고 잃어버린 술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고군분투의 이야기.
서울대 농화학과 75학번인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를 만나니 대뜸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미자였을까?’
“제가 술로 할 수 있는 재료는 거의 다 해봤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양조용 원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양조를 위한 원료가 없다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맥주는 보리가 주원료다. 우리가 먹는 보리는 육조대맥이라 하여 위에서 보면 알맹이가 육각형으로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양조용 보리는 이조대맥이라는 두 줄짜리 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 심지어 쌀도 마찬가지다.
“쌀로 술을 만들기 좋은 품종이 일본에는 80개가 있고 그중에 유명한 7대 품종이 있어요. 포도도 수천 종 중에서 양조용 품종인 샤르도네, 리슬링 등이 유명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부 생식용이지 양조용 원료가 없어요. 양조학에서 생식용은 아예 양조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걸로 만들어도 술이 되긴 되죠. 그런데 명주가 될 가능성은 제로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쌀을 비롯해서 곡물, 과일, 약재 등으로 술을 만들어봤는데 국제적으로 명주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오미자 이외에는 없었던 거죠.”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 아니다
이 대표가 우리나라 명주를 만들기 위해 원료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다. 그로부터 5년여 후, 그는 한국산 원료로선 오미자 외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오미자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술은 기본적으로 관능미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취하는 거야 술이 아니어도 취할 수 있어요. 그냥 에틸알코올만 마셔도 취하긴 하죠. 술의 주성분은 물이에요. 12도 와인이라면 물이 88%입니다. 그런데 알코올과 물 외에 천분의 일 정도 분량에 수백 가지 다른 요소들이 섞여 있는 거죠. 문제는 그 수백 가지 요소들로 인해 술의 색과 향과 맛 등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술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게 술이죠. 오미자가 그걸 충족해요.”
이 대표에게 있어 술이란 일단 매력이 있어야 한다. 관능미를 충족시키는 매력과 역사 문화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진짜 술이란 것이다. 그에게 술은 사회의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저는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희석식 소주는 일제가 전쟁을 일으켜서 발악할 때 만든 전쟁 보급품이에요. 워낙 우리가 어렵게 살다 보니 제3공화국 때 서민용 술로 보급된 거지. 그런데 희석식 소주가 우리나라 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술과 농업이 전혀 관련 없게끔 괴리가 생겼어요. 술은 농산물의 꽃이고 농업의 가장 오래된 산업이 양조 산업인데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문화 말살을 위해 일제가 만든 적폐
희석식 소주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우리 생활에 관계된 얘기다. 당장 오늘 저녁에만도 그 수많은 식당과 테이블 위에서 몇 병씩 비워질 삶에 밀착된 한 부분 아닌가.
“1909년에 순종이 주세법을 공포했어요. 물론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죠.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가호호든 궁궐이든 술을 만들어 먹었는데 주세법은 그걸 금지시켰어요. 겉으로는 조세를 확보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술은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문화 그 자체였어요. 아예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법도가 있었는데, 직역하면 마을에서 음주하는 예절이라는 의미죠. 정조가 이것을 책으로 수천 부를 만들어서 배포했어요. 술 문화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이 대표는 향음주례의 절차가 일곱 개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술을 권하고 받을 때 세 번 권하고 두 번 사양하라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걸 없애니 문화가 말살된 거죠.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취하려고 술을 털어넣는 문화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술이 살아야 우리 농업이 산다
술은 그 지역에서 농사지은 걸 빚어서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1938년이 되자 일제가 전선을 중국, 동남아, 하와이까지 넓히면서 보급품이 부족하게 됐다. 그때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국가에 있는 모든 자원을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전쟁에 동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 못지않게 술입니다. 그런데 식량은 전쟁물자로 다 나간 상황이죠. 그러니 일제가 열대에서 나는 가장 싸구려 타피오카와 당밀을 섞어 알코올을 만들고 거기에 사카린, 조미료를 타서 보급한 게 오늘날 희석식 소주예요. 술을 음미하고 즐기는 게 아니라 정성과 품이 안 들어간 막술로 변질된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됐죠.”
술은 문화를, 예법을 논하는 일이다. 이 대표는 그런 술의 본연의 성격이 지금은 일종의 도피제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술을 도피제로 전락시킨 것은 정말 저급한 문화죠. 저는 항상 술을 마실 때는 시를 생각해요. 로마네 콩티가 왜 비쌀까요? 한 병에 오백 내지 이천만원에 달할 정도로. 로마네 콩티나 소주나 취하는 건 똑같은데 말입니다. 로마네 콩티에는 그걸 마시고 싶은 스토리,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가격이 싼 희석식 소주를 마시는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10%만 괜찮은 술로 대체가 된다면 그 자체가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어요. 지역 발전과 관광, 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인삼주 혹평에 자존심 상해 명주를 만들기로 작심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려면 우리나라 농산물로 만든 술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물러설 수 없는 지론이었다.
“술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라고 얘기됩니다. 자기 고장의 술을 마시고 영감도 얻고 애환도 달래고 해야 하는데 일제의 보급품을 국주처럼 먹는 건 진짜 적폐죠.”
문득 술은 공동체의 삶이 녹아 있는 문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가양주(家釀酒)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어요. 일제가 전쟁 군수용으로 개발한 소주로 한국의 양조 문화와 술 문화가 떨어진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일제 치하에 있는 문화가 술 문화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 슬픈 일이죠.”
이 대표는 현재 충주에서 세계술문화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5월 1일에 설립하여 올해로 벌써 12년째다.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가 너무 저급하고 전통문화와 지독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두 가지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바로 박물관과 세계 명주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19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를 다니던 1990년 영국 에든버러의 헤리옷 와트 대학원에서 2년간 양조학을 공부했어요. 담당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대표 술을 갖고 시음회를 열자고 했죠. 저는 막걸리를 가져갈 수는 없어서 인삼주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담당교수가 다른 술들을 마시면서는 칭찬을 하더니 인삼주를 마시고는 혹평을 쏟아내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도 구분하지 못하냐’고 말이죠. 여기서 저는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 가져온 로제(rose) 샴페인을 마시고 그 빛과 맛, 향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산 명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오미자로 술을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
2006년 우연히 경북 문경에 있는 농장을 방문하면서 오미자 열매에 꽂혔다.
그가 닥치는 대로 실험을 한 끝에 고르게 된 오미자는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의 복합적인 맛을 내는 재료다. 그 다양한 맛은 오미자의 명주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높게 만들었다. 반면 그런 다채로운 맛의 오미자를 발효시켜 술까지 이르게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7년에 프랑스 연구소를 찾아가서 오미자 발효 여부에 대해 자문을 했습니다. 결론은 오미자는 쓴맛과 매운맛이 강해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효가 안 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걸려도 발효가 분명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의 확신은 2008년에 마침내 현실이 됐다. 그래서 바로 오미자 농가가 많은 경북 문경에 JL크래프트 와이너리와 오미나라, 우리술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JL크래프트의 제품은 네 가지다. 오미자로 만든 스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브랜디, 그리고 사과로 만든 브랜디가 그것이다.
“세계 명주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은 제품은 어느 정도 된 거 같은데 재정이 문제죠. 재정이 취약하니 활동을 할 수가 없어요. 품평회도 열고 해외에서 행사도 할 수 없으니. 그런데 내년 정도면 재정이 상당히 좋아질 것 같아요.”
이 대표는 세계 명주의 기준을 두 가지로 보고 있었다.
“첫째는 이 술이 세계의 다른 어떤 술과 비교해도 열등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적 철학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그가 자랑하는 술은 오미자 증류주인 ‘고운달’이다. 이미 상당한 마니아가 만들어졌다는 자평이다. 물론 신제품도 준비하고 있었다.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을 대상으로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절반 가격으로 대형 유통과 손잡고 내년 하반기부터 스파클링 와인을 출시할 계획이에요.”
좋은 술은 스토리가 많아 더 맛있다
술을 만드는 명인답게 그는 대단한 술꾼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 일 년에 500회는 마셨을 거예요. 거의 매일 마셨던 셈인데, 그것도 하루에 두 번 가까이 마신 거였죠.”
그는 술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으로 술과 함께 먹을 음식을 잘 맞추라고 말했다. 음식과 술의 궁합이 물질적인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술이 가진 스토리와 좋은 사람과의 교감은 정신적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선물용으로 술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 있죠. 우리 저장고에 보면 다양한 술들이 있는데 이 술들은 자기가 오크통을 사고 직접 술을 담가서 숙성을 시키는 거죠. 말하자면 직접 만드는 정성이 담긴 술들입니다. 이런 술이 정말 선물할 가치가 있는 술이 아닐까 싶어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술 세 가지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
“우선 뮌헨 옥토버 페스트에서 나오는 라거 맥주는 정말 맥주가 이렇게 맛있나 놀라게 만듭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가면 도루 강이란 곳이 있는데, 강 양쪽에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들이 있어요. 그곳의 음식과 와인은 정말 대단한 맛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우리나라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해서 런칭한 술이 윈저부터 패스포트까지 이르고, 간접적으로는 조니워커, 발렌타인 시리즈 등을 탄생시켰죠. 그러니 제가 빚은 ‘고운달’을 마셔보면 다른 술하고 비교가 안 돼요(웃음).”
필자는 직업군인으로서 젊은 시절에 전·후방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군대생활을 했다. 따라서 아이들도 필자의 이동에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 부분이 부모로서 늘 미안했다. 그래도 다행히 공부를 곧잘 해 재수, 삼수라는 걸 모르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 아이가 대학 졸업을 불과 한 학기 남겨놓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겠다며 훌쩍 떠나버렸다. 기왕에 어학연수를 목표로 가는 것이니 가급적 교포가 많지 않은 곳으로 가야 목적 달성에 유리하다며 고르고 골라서 간 곳이 미국 콜로라도였다.
2년여의 연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아이는 남은 한 학기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후 보따리를 싸서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군대를 막 제대한 아들놈까지 데리고 가버렸다. 당시에도 한국 사회는 고용불안이 심각했고 이로 인한 청년실업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기지개를 한번 펴보겠다는 자식의 의지를 꺾을 부모는 없다.
빠듯한 월급으로 두 아이의 대학 및 유학 뒷바라지까지 한 필자 부부는 나름 자식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아이들이 미국으로 간 지 1년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딸아이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의 기대를 알고 있던 터라 죄송하다며 엄마에게만 살짝 알렸는데 아내가 필자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한 달이 훌쩍 넘어서야 조심스레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필자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딸아이의 배신에 필자는 몇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도 한국에서 부모 따라 이민 간, 그야말로 불알 두 쪽만 달랑 찬 녀석이 뭐가 그리 좋다고 임신부터 덜컥 했단 말인가?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해도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근본이 되는 일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고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사진이 왔다. 사진 속 손자 녀석은 무럭무럭 잘 크는 듯했고 커갈수록 예쁘기만 했다. 필자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혼수 대신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한 끝에 안정된 주거공간이 필요할 듯해서 집을 사고 ‘블랙카우델리’라는 음식점을 개업하는 데 일정 부분을 도와주었다.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줬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더욱 열심히 노력한 딸네 부부는 사업을 잘 일궈 튼튼한 기반을 잡았고 ‘블랙카우델리 2호점’을 1호점 인근에 또 냈다.
필자는 직장 때문에 딸네 부부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정년퇴직 후에야 미국행을 결정했다. 손자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2년 전 일이다. 미국에 가서 딸아이의 유학생활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 지금은 사위가 된 친구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무사히 유학생활을 마쳤고 이제는 단란한 가정까지 꾸려 행복하게 살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니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필자의 마음도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리고 필자 앞에 늘 죄스러운 마음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사위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열심히 살 것을 당부했다.
원하는 삶을 당당하게 선택하고 자신이 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딸 덕분에 이제는 해외여행도 자주 하고 풍요로운 노년의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혼사가 있을까 자위해본다.
걷기 좋은 골프장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카트를 타고 이동하기보다는 건강을 위해 동료와 수다를 떨며 걸어보자. 대관령의 선선한 바람과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골프장, 알펜시아 700 GC를 소개한다.
2016년 11월, 경기도 광주에서 강원도 원주까지 연결되는 제2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됐다. 덕분에 강원도 골프장으로의 접근이 한결 수월해졌다. 예전엔 강원도 한번 가려면 도로 위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서울에서 평창까지 3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대관령에 위치한 알펜시아 리조트는 동계올림픽 유치와 사계절 복합 관광단지를 조성한다는 목표로 건설됐다. 여름엔 수영, 겨울엔 스키를 즐길 수 있고 잘 관리된 골프장까지 갖추었으니 레저활동을 좋아하는 방문객에겐 안성맞춤이다. 당일치기가 무리라면 알펜시아 리조트 내의 인터컨티넨탈 호텔, 에스테이트, 리조트, 콘도 등 다양한 숙박시설을 이용해보자. 머무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대관령의 아름다운 경치에 흠뻑 빠질 것이다.
국내 최초 레플리카(Replica) 코스
아무리 골프가 좋다고 해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라운딩을 즐기기란 쉽지 않다. 땀에 젖어 딱 달라붙은 옷은 스윙을 불편하게 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는 미간을 저절로 찌푸리게 한다. 이런 날씨에도 쾌적한 라운딩을 즐길 수 있는 골프장이 있다. 바로 대관령 해발 700m에 자리 잡은 알펜시아 700 GC.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낮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쾌적한 라운딩을 즐길 수 있다. 한여름에도 20도를 약간 웃도는 기온과 대관령의 선선한 바람은 이따금 흘러내리는 땀을 식혀준다.
골프 마니아라면 한 번쯤 세계 곳곳의 유명 골프장에서 샷을 날리는 꿈을 꿔봤을 것이다. 알펜시아 리조트 내의 알펜시아 700 GC(72파, 6659야드)는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그 꿈을 실현해주는 특별한 골프장이다. ‘골프의 성지’라 불리는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의 12번 홀, 골프 전문잡지 가 선정한 세계 1위 코스인 파인밸리의 5번 홀,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의 11번 홀 등 이름난 골프장의 시그니처 홀을 재현해 18홀을 구성했다. 이 중에는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코스도 있다. 1998년 박세리가 US오픈에서 맨발 투혼을 펼치며 우승을 거머쥔 블랙울프 런의 2번 홀, 최경주가 한국인 최초 PGA(미국프로골프협회) 투어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 잉글리시 턴 골프클럽의 10번 홀 등이다.
알펜시아 700 GC의 또 다른 매력은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경기장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골프장 관계자는 “11번 홀에선 스키점프대를 바라보며 샷을 할 수 있다”며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홀로 꼽았다. 로열 트룬 골프클럽 7번 홀에서 영감을 얻은 11번 홀은 탁 트인 그린과 알펜시아 리조트의 자랑인 스키점프대가 어우러져 알펜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전경을 연출한다. 국내 유일의 바이애슬론 경기장과 스키점프대 등 동계올림픽 시설물을 바라보며 샷을 할 수 있는 골프장은 알펜시아 700 GC가 유일해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18홀을 모두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시간에서 4시간 반. 큰 언덕이 없고 완만해 산책하듯 라운드하기 좋다. 4번과 14번 홀 앞의 그늘집에선 시원한 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구매할 수 있으니 중간중간 체력을 충전하도록 하자.
이용 정보
주소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솔봉로 325
전화번호 033-339-3711
이용요금 주중 13만원 주말 16만원 (성수기 16만원)
캐디피 10만원/팀
카트피 8만원/대(5인승)
평일에 방문하는 여성 골퍼에게는 그린피를 25% 할인해준다.
셰프가 꼽은 골프장 대표 메뉴 - 맛과 자연을 담은 황태짬뽕
강원도 대관령의 특산물인 황태를 주재료로 한 황태짬뽕(1만3000원)은 알펜시아 700 GC의 대표 메뉴다. 낮엔 따뜻하고 밤에는 추운 대관령의 큰 일교차는 보들보들하고 고소한 황태 만들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이곳의 황태짬뽕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말려진 대관령 황태와 쫄깃한 오징어, 새우, 홍합, 신선한 채소를 곁들여 맵지 않고 부드러운 맛을 담아냈다. 운동 후에 먹는 따끈한 황태짬뽕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총주방장 윤영범씨는 “황태로 우려낸 담백한 맛이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황태는 알코올 해독 능력이 뛰어나 숙취 해소에 좋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기 때문에 시니어에게 좋은 음식”이라 소개했다. 황태짬뽕의 뒤를 잇는 메뉴는 뚝배기 오삼불고기(1만3000원). 자연송이가 들어가 향이 일품인 오삼불고기 한 상이면 허기진 배를 충분히 달랠 수 있다.
필자는 중학교 동창들과 산악회를 만들어서 매달 산행을 하고 있다. 가족과 동반해 해외원정ㆍ서울근교ㆍ원거리 산행도 즐긴다. 땀을 뻘뻘 흘리고 정상에 오르면 하늘을 날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 된다. 빙 둘러앉아 도시락과 간식을 꺼내놓고 푸짐한 음식과 함께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면 우정은 더욱 돈독해진다.
멀리 산행이라도 갈 때는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마치 학창 시절 소풍 갈 때처럼 즐거운 시간이 된다. 그런데 행동은 느리지만 지구력이 대단한 ‘거북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시간 약속을 해도 자주 지각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버스 출발을 조금 늦추면 되지 뭐 하며 기다려줬고 어느 순간 그의 지각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좀 기다려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당사자는 전혀 미안한 표정이 없었다. 부인이 동행할 때는 가끔 시간을 맞출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다른 친구들이 그의 지각을 많이 양해해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은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몇 년 전부터 산행 모임에 변화가 생겼다. 높은 산을 오르기 힘들어진 부인들은 빠지기 시작했고, 시간 여유가 많은 남자들만 남았다. 도시락도 사라지고 하산 후 뒤풀이가 풍성해졌다. 허리띠 풀고 먹고 마시는 시간이 많아지자 친구들은 다른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또 등산이 힘들어진 친구가 하나둘 늘면서 걷기 쉬운 둘레길을 많이 찾았다. 대여섯 시간 산행 시간은 두세 시간으로 확 줄었다. 전철로도 갈 수 있는 경기ㆍ강원 지역 명승지의 둘레길이 우리 나이에 딱 맞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아차렸다.
지금은 수도권 전철을 많이 이용한다. 경춘ㆍ중앙ㆍ경강선을 타면 가는 곳마다 산행 명승지다. 차가 막혀서 기다리는 일도 없고, 비용도 얼마 들지 않아서 안성맞춤이다. 전철은 편리하지만 운행시각이 엄격하게 적용된다.
그런데 상봉역 집결지에 늦게 나타나는 거북이 친구 때문에 산통이 다 깨져버렸다. “친구야 같이 가자.” 지난날 버스 창문을 두드리던 버릇으로 전철을 향해 아무리 손을 흔들어봐야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차 한 번 놓치면 수십 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몇십 명 친구들이 거북이를 위해 출발을 늦추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몇 번은 친구들이 기다려줬지만 시간이 갈수록 용납이 되지 않았다. “저 친구 좀 뺄 수 없나?” 친구들의 불평이 하늘을 찔렀다. 50년지기가 아니면 참기 어려운 장면과 함께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꿩도 매도 다 놓칠 위기가 닥쳤다. 이 나이에 본인의 의식 변경은 매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야말로 ‘거북이 일병 구하기’ 작전이 시작됐다.
먼저 당일 전화와 문자로 약속시간을 알렸다. 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문자를 보지 않았다.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친구들이 한마디씩 했다. 지금은 빛의 속도를 따라야 사는 시대, 운동경기도 수백ㆍ수천분의 1초에 승부가 갈리는 세상이다.
2단계로는 몇 년 전까지 산행을 같이 했던 친구 부인을 설득했다. 산행 안내 공지사항을 친구와 부인에게 함께 보냈다., 당일 전화와 문자도 친구 대신 친구 부인에게 보냈다. 눈을 비비고 나오면서라도 지각하지 않는 거북이 일병을 상상하면서….
“으이구 주책이야, 거북이 일병! 제발 같이 가자!”
지난해 4월 어느 주말 오후, 느닷없이 필자의 주책이 시작되었다. 주말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1990년대 대중문화의 한 획을 긋고 해체된 1세대 아이돌 그룹을 다시 불러 모아 콘서트하는 과정을 방송했다. 그들이 해체된 후 16년이 지났건만 당시의 아이템(팬덤을 상징하는 색깔의 우비와 풍선)을 장착한 팬들이 체육관을 가득 채웠고 가수와 팬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당연히 필자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시절 철없던 소녀들은 한때의 추억이 아닌 더 깊은 마음으로 가수를 응원했고 그들의 16년 전 활동에서부터 콘서트 영상까지 다 찾아 보면서 애정 어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필자도 그렇게 아이돌 그룹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시쳇말로 ‘이모팬’이 된 것이다. 아마 최고령 팬이 아닐까 싶다. 누구한테 말하기에게는 살짝 민망할 때가 있는 걸 보니 주책임이 틀림없다.
몇 년 전 후배가 집에 보온병이 남아나질 않는다는 말을 했다. 좋아하는 가수에게 몸에 좋은 차와 음식을 만들어 보내서란다. 명품 셔츠를 사서 보내고 자기도 같은 옷을 입고는 그와 커플룩을 입었다며 뿌듯해하곤 했다. 필자는 사회적 지위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행동을 십분 이해한다.
필자도 그들이 바빠지거나 얼굴이 야위면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되고, 그들의 노래가 좋은 성과를 내면 필자의 일처럼 기쁘고 마치 자식이 성공한 것처럼 뿌듯하다. 물론 팬으로서 할 수 있는 일도 다 한다. 플레이어도 없는데 소장용으로 새 앨범을 사고, 대형 서점에 찾아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형 서점에서 사야 새 앨범 판매 실적에 반영이 되기 때문이다.
길에서 그들의 노래가 나오면 걸음을 멈추고 다 끝날 때까지 미소를 짓다가 가던 길을 간다. 이제는 웬만한 랩도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들 덕분에 힙합, 랩이 특기라고 소개할 수 있는 시니어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 새 노래 나왔다. 한번 들어봐라” 하며 홍보한다. 물론 그들이 속으로 ‘아이고 저 주책~’이란 말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필자도 처음엔 그들의 노래가사 한마디에 위로받고 눈물까지 흘리는 스스로의 모습에 당혹스러웠으므로.
가족들은 ‘으이그 저 빠순이’ 하며 놀리기도 하지만 기꺼이 응원해준다. “어딘가에 맹목적으로 빠지는 네 열정이 부럽다”고 말해주는 친구도 있다.
아무렴 어떠랴. 주책이라면 또 어떤가. 시니어는 클래식이나 트로트만 좋아해야 하나? 아이돌 음악도 엄연한 대중예술의 한 장르다. 또 그들의 음악인 K-POP은 한류의 대표 상품으로 엄청난 외화벌이의 효자 문화 콘텐츠 아닌가.
필자가 응원하는 가수도 곧 해외 진출을 한다고 한다. 그들이 해외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서 국제적인 아이돌이 되면 좋겠다. 한류 수출의 기수가 되길 팬으로서 항상 응원하고 있다.
순수하고 긍정적인 팬심에 나이라는 변수가 왜 필요한가. 필자는 작년에 너무 가고 싶었던 콘서트엘 못 갔다. 주책 떠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가지 못했는데 너무 후회스럽다. 올해 콘서트가 열리면 당당하게 가서 노래도 따라 부르고 더 적극적으로 즐겨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