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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나라 ‘쿠바’
-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 체 게바라 집을 아름답게 하는 건 그 안에 사는 사람이듯, 한 나라를 아름답게 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 아름다운 사람이 만든 역사. 살사, 시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캐리비언 바다…. 쿠바를 수식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지만 누가 뭐라 해도 쿠바는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나라다. 아바나, 산타클라라, 바라데로, 트리니다드에 이르기까지, 쿠바 전역을 덮고 있는 순수한 열정과 문학적 향기를 찾아 떠나보자. 낡은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빈티지 도시, 아바나!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한 모습이 되어가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195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있으니 바로 쿠바, 그중에서도 아바나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건물들과 빨래가 나풀대는 발코니, 혁명가들의 얼굴이 그려진 벽화들과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거리를 누비는 클래식 카가 어우러진 아바나는 세상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빈티지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사진작가들로부터 열렬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쿠바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과의 화해 무드가 일면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가봐야겠다는 숙제를 안겨준 나라이기도 하다. 주름진 세월이 그대로 내려앉은 올드 아바나 거리와 카리브 해안을 따라 가슴이 탁 트일 듯 시원하게 뻗어 있는 말레콘 방파제는 오늘도 변함없이 자유와 풍요를 꿈꾸는 쿠바인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쿠바의 상징, 체 게바라 본명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훗날 체 게바라(Che Guevara)로 불린 그가 고향 아르헨티나가 아닌 쿠바에서 더 유명해진 것은 11년 동안 쿠바혁명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혁명이 성공한 후 카스트로에게 명예시민권을 받은 그는 한동안 각종 요직을 수행하며 세계를 향해 제국주의의 문제점과 자유에 대한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로움도 잠시, 편안함에 결코 안주할 수 없었던 진정한 혁명가는 모든 영예를 뒤로 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고난의 길을 택했고, 결국 이국땅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39년의 짧고 굵었던 그의 생애는 많은 사람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체 게바라 묘지가 있는 산타클라라 혁명의 도시 산타클라라로 가는 길. 끝없이 넓은 사탕수수밭과 길게 뻗은 길 위로 마차와 쿠바를 상징하는 올드 카, 현대 차, 그리고 모터사이클이 뒤섞여 달린다. 젊은 시절, 체 게바라의 삶을 바꿔버린 여행을 그린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오버랩된다. 그는 이 길을 달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었을까. “고대 전사와 같은 품위 있는 죽음”을 맞기를 원했던 그는 소망대로 산타클라라에 있는 묘지에 묻혔다. 묘지 앞의 흰 꽃다발은 오늘도 생생하게 그를 기리고 있다. 진정한 혁명은 자신을 위한 혁명이며,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쿠바를 가장 쿠바답게 해주는 시가와 커피 전 세계가 지탄해마지 않는 담배도 쿠바에서는 매력 덩어리다. 체 게바라의 상징과도 같은 시가. 화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시가를 입에 문 쿠바인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쿠바 산 에스프레소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에스프레소 마니아라면 1달러(현지 화폐로 1CUC)로 네다섯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쿠바엔 관광객들이 가는 카페와 쿠바인들이 가는 카페가 따로 있다. 관광객들이 가는 카페는 깔끔하지만 아무런 풍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역시 허름하지만 진한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현지인 카페다. 의자도, 커피머신도 없는 작은 공간에서 주인장이 막걸리 주전자처럼 생긴 용기에 커피가루를 넣고 끓인 뒤 평범한 유리잔에 주르륵 따라주면 끝이다. 묘지에서 돌아와 체 게바라의 진한 삶을 되새기며 쿠바인들과 섞여 마신 에스프레소의 맛을 잊을 수 없다. 무례한 카메라 세례에도 친절로 응대해준 묵묵한 쿠바인들에게 1쿡으로 다섯 잔의 커피를 선물했다. 문학도 미술도 혁명 쿠바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헤밍웨이다. 아르헨티나 태생이지만 쿠바에서 더 많은 계기를 맞았던 체 게바라처럼, 미국 태생인 헤밍웨이도 쿠바에서 삶의 전환을 맞는다. 그는 군사독재자 프랑코를 반대하며,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가한 행동파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도 적극 참여했고,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주옥같은 작품을 썼다. 그 때문일까. 헤밍웨이도 쿠바를 좋아했다. 문학도, 미술도 혁명과 다름 아니니까. 태어난 나라에 국한되기엔 너무나 자유롭고 광대한 영혼들이었다.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비굴하게 뒤로 숨지 않고, 초라한 삶에 연연해하지 않고, 열정을 다해 생명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가들의 공통점이니까 말이다. 아바나에서 한 시간 거리, 헤밍웨이가 만난 코히마르 헤밍웨이는 키 웨스트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들른 쿠바의 한 바닷가 마을에 매혹된다. 그 후 무려 20년을 그곳에서 살며 낚시를 하고, 어부들과 친구가 되고, 친구를 모델 삼아 ‘노인과 바다’를 썼다.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받은 그는 어부들에게 상을 바쳤다. 어부들은 그를 기리며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그의 동상을 세워줬다.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라 테라사(La Terraza)에 들러 모히토 한 잔을 마셔본다. 1928년 헤밍웨이가 머물며 ‘노인과 바다’를 썼다고 전해지는 ‘핀카 라 비히아(Finca La Vigía)’는 현재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바나 시내도 헤밍웨이의 자취로 가득하다. 그가 머물며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썼다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Hotel Ambos Mundos) 551호실과 라 플로리디타(La Floridita) 칵테일 바,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까지 보고 나면, 당신의 삶에도 혁명 같은 바람이 불어올지 모르겠다. 파스텔 톤의 동화마을에서 배우는 춤 ‘살사’ 17세기 스페인 통치 시절의 풍경이 가장 잘 남아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도시 트리니다드.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교회와 건물, 돌로 포장된 길이 고풍스런 멋을 더하는 트리니다드는 쿠바에서도 살사의 본고장으로 불린다. 전기를 아껴야 하기에 해가 지면 쿠바의 도시들은 온통 깜깜해진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잠이나 청하려던 차에 갑자기 온 동네가 떠나갈듯 살사음악이 울려퍼진다. 시간을 보니 밤 11시 무렵. 도저히 그냥 잠들기에는 아까운 장면이라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역사박물관과 산티시마 교회가 있는 중앙 광장엔 하바나 클럽이 있다. 밤마다 현지인과 여행자가 어우러져 한바탕 살사 파티가 벌어지는 곳이다. 프로 뺨치는 쿠바인도, 태어나 처음 리듬에 몸을 맡긴 여행자도 흥겨움에 가득 취하는 밤이다. 스페인어로 ‘소스’라는 뜻의 살사는 맛깔스런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소스처럼 격렬하고 화끈하며 율동감이 넘치는 춤이다. 동네 여기저기 붙어 있는 살사 레슨 안내지는 지금 아니면 언제 살사를 배워보겠냐고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망설이던 끝에 결국 살사를 배워보기로 했다. 레슨 장소인 카사 데 라 무시카(Casa de la Musica)로 가서 근사한 춤 선생을 기다렸다. 그러나 탄탄한 구릿빛 몸매의 섹시남을 기다리던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렇지! 이상과 현실은 다르기 마련이니까. travel info. 항공한국에서 쿠바까지의 직항은 없으므로, 토론토나 멕시코시티를 경유해야 한다. 여행코스 수도인 아바나에서 시작해서→바라데로→산타클라라→트리니다드→산티아고데쿠바가 일반적이다. 언어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여행적기11월부터 2월까지로 낮에도 무덥지 않으며 밤엔 선선하기까지 해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때이다. 치안 사회주의국가라 위험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나라일수록 관광수익이 중요하므로 관광객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중대범죄로 취급되어 오히려 매우 안전하다. 화폐 CUC과 CUP이라는 이중화폐를 사용하고 있어 좀 불편한 점이 있다. 1CUC(쎄우쎄)=1USD, 1CUC(쎄우쎄)=24CUP(쎄우뻬)이며, 외국인이 주로 가는 곳에서는 CUC을, 현지인이 가는 곳은 CUP을 사용한다. 외국인이 CUC으로 계산해도 거스름돈은 CUP(혹은 모네다라고도 함)으로 주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무선인터넷망이 깔려있는 공원/호텔/건물등에서 접속가능하며, 인터넷카드비용은 1시간에 1달러정도이다. 숙소호텔도 좋지만 민박집 까사에 머물기를 권한다. 인심좋은 아침상을 받으며 때묻지 않은 현지인들을 만나는 일은 쿠바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여행전 보고가면 좋은 영화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치코와 리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여행전 보고가면 좋은 책 체게바라 평전, 쿠바의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 2018-12-0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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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의 문화행사
- (전시)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일정 12월 4일~2019년 3월 3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한 특별전. 미국, 영국,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 국외 5개국과 한국이 참여한 이번 전시에서는 고려의 미술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주요 문화재 총 390여 점이 출품된다.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 일정 12월 6일~2019년 1월 27일 장소 아트원씨어터 1관 출연 이순재, 박인환, 손숙, 정영숙 등 강풀 웹툰을 원작으로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던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대학로 연극 무대로 돌아온다. 우유 배달을 하는 ‘김만석’과 파지를 줍는 ‘송이뿐’, 주차관리소에서 일하는 ‘장군봉’과 기억을 잃어버린 ‘조순이’가 서로 인연을 맺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베테랑 연기자 이순재, 박인환, 정영숙 등이 출연한다. (축제) 보성차밭빛축제 일정 12월 14일~2019년 1월 13일 장소 한국차문화공원 일원 차밭 빛물결, 은하수 터널, 빛 산책로, 디지털 차나무, 차밭 파사드 등 아름답게 꾸며진 빛 조형물이 보성의 겨울밤을 장식한다. 주말에는 불쇼, 불꽃, 음악, 레이저 조명이 어우러진 불꽃 공연, 실내정원에서 펼쳐지는 판타지 공연, 해외특별 공연 등이 진행된다. 또 소망카드 달기, 문화장터 등의 상설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영화) 스윙키즈 개봉 12월 19일 출연 도경수, 박혜수, 자레드 그라임스 등 1951년 거제 포로수용소, 탭댄스에 대한 열정으로 뭉친 오합지졸 댄스단 ‘스윙키즈’의 탄생기를 그렸다. 종군기자 베르너 비숍이 포로수용소에서 촬영한 사진 한 장이 모티프가 됐다. (뮤지컬) 마리 퀴리 일정 12월 22일~2019년 1월 6일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김소향, 임강희, 박영수, 조풍래 등 프랑스의 물리학자 마리 퀴리는 방사능 연구를 통해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는 등 새 방사성 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라듐의 유해성을 알게 된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작품에 담았다. (전시) 피카소와 큐비즘 일정 12월 28일~2019년 3월 31일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입체미술 운동의 탄생 배경에서 소멸까지의 흐름을 연대기적 서술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근대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 등 유명 작가의 진품 명화 9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 2018-12-0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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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여신’은 왜 ‘눈가리개’를 하고 있을까
- 유럽의 마을이나 도시를 방문하면 그곳 중심에 광장과 함께 고풍스러운 건물이 우뚝 자리하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대부분 ‘시청 청사’다. 그리고 그 청사 건물 중앙 높은 곳에 있는 한 여인의 조각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劒]을 거머쥐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다. 바로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다. 라틴어 Justitia는 영어 ‘Justice’의 어원이기도 하다. 문헌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 die Göttin der Gerechtigkeit)’는 손에 칼만 쥐고 있다. 그런데 로마시대에 들어와 ‘정의의 여신(Justitia)’상에 ‘칼과 저울’이 등장했고, 이런 형상의 조형물이 유럽 관공서 건축의 외장 조형물로 크게 자리매김했다. 요컨대 정의를 구현하는 데 엄한 힘[權勢]인 칼만 갖고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정성과 공평성을 상징하는 ‘저울’을 여신에게 준 것이다. 아울러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조금이라도 오해를 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듯 ‘눈가리개[眼帶]’도 등장한다(사진 1). 얼마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청 광장인 ‘뢰머 플라츠(Römer Platz)’는 1년여의 보수작업을 마치고 새롭게 ‘정의의 여신상’을 세웠다. 일견 다른 ‘여신상’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조각상이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눈가리개’가 없는 ‘정의의 여신’임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여신’이 시 의회 건물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은 시 의회가 공정하면서도 공평하게 의무를 다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도했다(사진 2). 사실 유럽 고도(古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의의 여신’ 중에는 ‘눈가리개’를 하지 않은 여신상이 더러 있다. 국내 법원이나 법조계 관련 건물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대부분 ‘눈가리개’가 없는, 눈을 뜬 여신상이 주종을 이룬다. 대표적인 예가 대법원 건물에 있는 한국적 ‘정의의 여신’이다. 여기서 ‘한국적’이라 함은 여신이 무엇보다 우리 한복 차림에 강한 집행력을 상징하는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또한 그 ‘여신’은 ‘눈가리개’ 없이 눈을 멀쩡히 뜨고 있다.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조형물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할 때, 국내의 높고 낮은 법정의 판례와 관련해 종종 회자되는 ‘무전유죄 유전무죄’, ‘전관예우’ 같은 표현은 민망하기 그지없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공평성이라는 잣대가 ‘눈 뜨고 내리는 판단’과 ‘눈 감고 내리는 판단’에 따라 다를 수는 없는 법이기에 우리 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 2018-11-2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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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고는 트렌드에 사무친 시니어의 문화 콘텐츠
- ‘그리움’의 다른 말 ‘復古’ 이경숙 동년기자 조국을 떠난 지 한참 된 사람도 정말 바꾸기 힘든 것이 있다. 울적할 때, 특히 몸이 좋지 않을 때면 그 증세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어려서 함께 먹었던 소박한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식구는 많고 양식은 빈약하던 시절, 밥상에서는 밥만 먹었던 것이 아니었나보다. 둥근 상에 올망졸망 모여 앉아 모자란 음식을 나눌 때 느꼈던 진한 가족애와 혈육의 뿌듯함이 DNA에 녹아들기라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마솥 누룽지, 지겹던 보리밥,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시래기죽도 각자의 추억과 함께 잊히지 않는 음식이 되어 ‘그것만 먹으면 내 병이 다 나을 것’처럼 그리워지는 것 같다. 골목에 있는 만화방 주인은 청년이었다. 가끔 내게 만화방을 맡기고 외출을 하기도 했는데, 대신 보고 싶은 신간 만화를 실컷 볼 수 있어 좋았다. 만화방 앞에는 약간의 학용품이 놓여 있어 그것도 팔아야 했다. 그날도 만화방을 봐준다는 명목으로 독서(?)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툭툭’ 쳐서 보니 군인 아저씨가 물건을 들고 얼마냐고 묻고 있었다. 그렇게 몰두할 만큼 만화책은 너무 재미있었다. 그 만화방엔 안데르센 동화책도 많았다. 울적할 때면, 나는 동물들과 숲속 방앗간 짚 덤불에서 자던 소녀를 떠올리곤 했다. 샘물을 마시고 동물들과 대화하던 맑고 밝은 소녀가 아직도 가슴속에 있다. 지칠 때면 그 소녀가 가만히 내 창을 두드린다. 나팔바지를 입고 집을 나설 때마다 듣던 말이 있다. “동네 다 쓸고 다닐 거니?” 어깨는 각이 지고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딱 맞고 바지통은 아주 넓은 디자인이었다. 그 시절엔 사실 유행이 일률적이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취향을 주장할 만큼 당당하지도, 식견이 풍부하지도 못했다. 개성을 개인적 취향으로 인정해주기보다는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하던 그런 시대였다. 그래서 좀 멋쟁이다 싶으면 일제히 미니스커트, 일제히 맥시스커트를 입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찌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 같았다. 테이블마다 달랑대는 조명등이 달려 있거나, 촛불을 켜는 낭만적인 카페도 많았다. 종종 작은 무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술이 아니더라도 20대는 늘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다. 쉽게 흥분하고 자주 슬펐던 우리들의 20대. 끝도 없는 논쟁으로 밤을 새우고, 모든 게 다 진지하기만 했던 시절.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사랑 얘기를 쉼 없이 되풀이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모두 정의의 순교자라도 되고 싶어 했다. 미팅 땐 생맥줏집, 볼링장, 극장엘 갔다. 애프터 미팅은 카페에서 만나 주로 비원이나 경복궁, 덕수궁을 걸었다. 가난한 젊은 커플들은 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가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추억들에 젖어보기 위해 옛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복고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냥 먹고 마시기만 하자니 심심하고 무미건조해 그리움이라도 불러와 옛 필름들을 다시 돌려보고, 식어버린 가슴을 조금이라도 데워보려는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보물찾기 윤종국 동년기자 “내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엄청 좋아한다. 난 늘 나를 생각한다. 나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작다. 그러나 머리는 크다. 표준 사이즈로 옷을 고르면 거의 맞는 게 없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곳이 있다. 30여 년은 족히 된 듯하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 먼저 알려준다. 바로 ‘벼룩시장’이다. 수백, 수천 가지의 물건이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청계6·7가에 있었고, 지금은 동묘(동대문구) 일대에 시장이 형성돼 있다. 벼룩시장에서 레트로를 본다. 내게는 수만 가지 물건이 레트로 대상이다. 한 달에 두세 번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간다. 내 작은 체구를 잘 알기에 어울리는 옷도 찾아본다. 손에 주로 들리는 옷은 복고풍의 외투다. 벼룩시장에서 입수한 옷은 꼭 수선 집을 거친다. 그래야 진짜 내 것이 된다. 누구나 알고 있듯 없는 게 없는 곳이 벼룩시장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덤빌 곳은 또 아니다. 내게는 오랜 세월의 경험이 있다. 레트로를 사랑하려면 요령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레트로인이 된다. 예를 들면 맘에 드는 복고풍 옷을 하나 발견했다 치자. 구매의사가 있을 경우 먼저 입어보고 가격을 흥정하면 초보자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구매자 몸에 어울린다 싶으면 가격이 달라진다. 가격 매기기는 벼룩시장 주인들만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먼저 가격을 물어본 다음에 흥정을 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설사 맘에 들더라도 그 맘을 들키면 절대 안 된다. 그래야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다. 또 하나의 팁. 다른 물건에 관심이 있는 척하다가 진짜 맘에 드는 물건을 들고 슬쩍 “이건 얼마죠?” 하고 물으면 점포 주인은 대부분 낮은 가격을 부른다. 이것이 지혜롭게 레트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수년 전 딸아이가 벼룩시장이 궁금하다며 따라나섰다. 그날 지나다 발견한 물건은 흙이 묻어 다소 지저분해 보이는 신발이었다. 신을 만해서 단돈 5000원에 손에 넣었다. 집에 와서 닦고 손질해보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고가 브랜드 신발이었다. 딸아이가 좋아라 했다. 내가 벼룩시장 마니아로 인정을 받은 건 사실 그날이었다. 한 달 전 큰손주의 생일이 있었다. 그날을 위해 몇 번이나 벼룩시장을 찾아 헤맸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찾기 위해서다. 신제품도 생각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는 녀석의 발 사이즈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선물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전국, 특히 서울에서 인라인스케이트 붐이 일었다. 그러다가 아파트 내에서 어린이 안전사고가 일어났고 그 충격으로 슬쩍 사라져버렸다. 벼룩시장을 갔던 날, 다행히 손주에게 맞을 것 같은 인라인스케이트를 발견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일단 가격부터 묻고 사이즈를 확인한 뒤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손주 발 사이즈를 물어봤다. 그러면서 주인의 눈치도 살폈다. 발 사이즈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듯 대화를 나눈 뒤 주인과 흥정을 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물건을 손에 넣었다. 이런 요령을 터득해야 비로소 벼룩시장의 프로가 된다.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정비하니 새 물건보다 더 정감이 갔다. 손주 생일에 인라인스케이트를 건네주며 “지금은 키가 부쩍부쩍 크는 나이니까 일단 이것으로 먼저 타는 연습을 하자”라고 말했다. 갖고 싶어 했던 거라 그런지 손주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날 나는 손주바보 할아버지에서 멋진 할아버지로 거듭났다. 옛것들에서 한 수 배우며 사는 삶 육미승 동년기자 “넌 조금만 더 나중에 태어났더라면 뭔가 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심심찮게 이런 말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하지 않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미소를 짓는다. 친구들 말은, 내 패션이나 생각 그리고 사는 방법이 자기들과는 전연 다르다는 의미다. 그도 그럴 것이 레트로가 내 생활이니…. 특히 패션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옷을 살 때 겉옷은 지금 당장 유행을 타는 것들 중 나중에도 입을 수 있고 멋지게 소화해낼 수 있는 디자인을 고른다. 그리고 다른 옷들은 옷장 문을 열어 예전에 신나게 입고 즐겼던 옷들에서 선택한다. 그날의 모임 콘셉트에 맞고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유행에 뒤떨어짐이 없는 은은한 멋을 지닌 그런 의상을 즐기는 거다. 나는 옛것을 너무 좋아한다. 옛것들 버리지 않고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 나를 보고 “어머 얘, 너무 잘 어울린다아~’ 하고 해주는 말들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회상하고 추억에 빠지는 시간은 천천히 꼼꼼하게 내 생각들을 정리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인연이 끝나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음 한구석에 감춰두고 있다. 어느 날 그들과의 추억을 꺼내 감상하는 게 내 취미다. 나는 옛것들은 대부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한다. 가끔은 그동안 읽었던 책 속에서 또는 영화 속에서, 예를 들면 사마의 같은 중국의 책사들에게 한 수 배우길 희망한다. 그 놀라운 생각의 회로를 닮아보려고 혼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젊은이들. 그 두뇌를 못 따라가는 나는 느린 사고방식이 편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싸워보질 못했다. 갈등이 일어날 것 같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게 내 모습이다. 져주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일처리를 할 때도 나를 뺀 모든 관계자들이 편한 쪽으로 해답을 구한다. 어느 면으로 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나를 길들이며 살아왔기에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지인들은 불똥이 내 발 바로 앞에 떨어져도 “이게 뭐지?” 하며 그제야 슬쩍 뒤로 물러날 사람이라며 핀잔 섞인 말을 한다. 그렇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말없이 기다린다. 특히 답이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끝까지 기다린다. 엉망으로 뒤섞여버린 물을 가만히 두면 침전물들이 여러 층으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맨 위로 올라온다. 내 앞의 문제도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마치 무위이화(無爲而化)하듯 저절로 아주 유효하고 명쾌한 답이 나온다. 그 신기함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이것이 바로 레트로의 진가라고 믿는다. 새로운 기술과 기교도 좋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에서 더 많은 답을 찾는다. 레트로는 내 단짝이다.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복고 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패션, 음악, 미술,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을 즐기며 여유작작한 삶을 살아가려 한다. 레트로는 ‘마음의 휴식’이다 손웅익 동년기자 1980년. 그 해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건축과 학생들 중 건축설계에 특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 모인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회원들은 매년 몇 달씩 동아리방에서 합숙을 하며 건축 작품전을 준비했다. 식사는 2학년생들이 돌아가면서 전체 회원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설거지 한 번 안 해본 학생들이 만든 밥은 그야말로 배가 고파서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는 정도의 상태였다. 그런 식사로 몇 달 합숙을 하다 보니 대부분 건강이 나빠졌다. 1980년의 교정은 봄부터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수업도 대부분 휴강이었다. 그렇게 혼란한 상황에서도 건축과 동아리 회원들은 밤낮으로 모여 작품전을 준비했다. 대체로 밤에 설계를 하고 낮에는 잠을 잤는데, 그 와중에도 매일 데모하러 나가는 회원도 있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최고참이라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저녁에 가끔 학교 앞으로 나가 막걸리도 한잔씩 했다. 그날도 4학년 동기들은 동아리방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학교 앞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4학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막걸리를 마시고 난 뒤에는 학교 교문 근처 문방구점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중계를 봤다. 당시 텔레비전은 다 흑백이었다. 그런데 선발대회 중에 화면 아래쪽으로 대학교를 폐쇄하겠다는 자막 뉴스가 떴다. 합숙 중이었던 우리는 얼른 짐을 챙겨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어느새 장갑차가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이었다. 17일에는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5월 18일. 그 해 우리가 준비했던 5월 전시회는 무산되었다.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면서 집회는 일절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회원들 집에서 만나 작품전 준비를 했고 가을에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준비해서 내 임기 중에 전시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또 왔고 어느 날 술친구들이 중국집에 모였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고량주를 마시면서 방송 시작 시간을 기다렸다. 그날은 우리나라 텔레비전 역사상 처음으로 컬러 방송을 하는 날이었다.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니 1980년 12월 22일 이었다. 우리는 컬러로 텔레비전을 보면 중국 영화처럼 피가 난무하는 장면은 너무 살벌할 것 같다는 둥, 연예인들이 옷을 더 화려하게 입을 것 같다는 둥 이런저런 추측성 대화를 나눴다. 그날 그렇게 흑백텔레비전 시대가 종료되었고 내 학창 시절도 저물어갔다. 얼마 전에 영화 ‘로마의 휴일’을 텔레비전에서 다시 봤다. 오래전에 갔던 로마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옛날 영화를 보다 보면 흑백 화면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흑백이라서 불편하거나 아쉬운 점도 없다. 오히려 로마의 유적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상상을 자극하는 것 같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컬러 사진이 보편화하기 전의 흑백 사진들은 그 분위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신비로움이 있다. 흑백 사진을 손에 들면 사진을 찍던 순간으로 순식간에 되돌아가는 듯하다. 흑백이라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복잡하고 바쁘고 혼란스러운 현대인들에게 향수를 자극하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휴식을 주는 것 같다. 현대인들은 현란한 색과 형태 그리고 자극적인 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정보의 홍수와 자극의 파도를 견디려니 모든 감각기능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흑백은 잠시나마 여백의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눈이 편안해지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는 새벽안개를 좋아한다. 특히 두물머리의 새벽안개는 한 폭의 수묵화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에는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변한다. 안개의 농담(濃淡)으로 그려놓은 수묵화는 화려한 가을날의 유화 같은 풍경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다. 그 여백은 흑백 사진처럼 아련한 시간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한다. 요즘 펜화 스케치를 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려놓고 원본의 컬러와 비교하면 흑백이 가진 깊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가끔 의식적으로라도 흑백의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흑백은 레트로다. 나는 레트로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는다.
- 2018-11-2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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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문화 눈 똑바로 뜨고 보라! 민화 수집가 김세종 평창아트 대표
- 전대미문의 발견이었다. 대작이 전시장에 걸려도, 이번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예술품이라고 소리 높여 말해도 콧방귀도 안 뀌던 전문가 집단이 수군거렸다. 흔하디흔한 골동품이라며, 귀신 붙은 그림이라며 내다버리고 없애버린 민화. 곱게 단장하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 사람들은 바로 무장해제돼 버리고 말았다. 고집불통 깐깐한 개인의 취향에 몰입하며 수많은 민화와 미술품을 수집해온 김세종(金世鍾·62) 평창아트 대표를 만나봤다. 기나긴 세월, 호랑이 눈으로 발견한 가치가 담긴 예술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고리타분한 예술계에 한 방 날리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기자(?)가 내 책에 대해 썼다는 거예요. 난생처음 책이라는 걸 썼는데 사람들이 알아줄지 몰랐어요.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책이 거의 다 나가 또 인쇄한다더군요. 글은 제가 다 썼어요. 이 내용을 쓸 사람이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거든요.” 김세종 대표의 등장을 1990년대 돌풍을 일으켰던 서태지와 견주어도 될까? 새바람처럼 천지개벽 같은 울림이 깊게 파고들었다. 7월 간행된 김세종 대표의 저서 ‘컬렉션의 맛’은 나오자마자 빠르게 각종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특히 김세종 대표가 ‘잘 알지 못하는 기자’라고 언급한 이는 전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출신인 정재숙 신임 문화재청장이었다. 문화계 통(通)으로 불리던 정재숙 청장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보석 같은 예술을 발견했다는 뜻과도 같다. 김세종 대표가 실제로 민화 소장품을 들고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런 현상이 최근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7월 18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판타지아 조선’ 전시 첫날. 기자회견장에 온 기자만도 50명 가까이 됐다. 그간 이름 높기로 유명한 예술가 전시회에 고작 열댓 명 기자가 와서 자리를 해도 성공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자회견장에 의자를 계속 내놓아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 한 통신사 기자가 “현대화랑과 민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의도 아니냐”며 김세종 대표에게 물었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은 김세종 대표의 민화에 대한 강한 집념을 알고 난 뒤 꾸준하게 지원하고 있는 숨은 조력자다. 예술의전당 전시 일주일 전 현대화랑에서는 ‘조선시대 꽃그림_민화, 현대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민화 전시전을 열어 김세종 대표 행보를 알리고 응원했다. 한국 미술계 영향력 1인자로 회자되는 박명자 회장이 합세했다니 기자의 얄궂은 질문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17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민화를 독립운동하듯 찾아 모아온 김세종 대표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어요.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벌써 몇 년인데 우리 것에 대한 정립이 안 됐냐는 말이었죠. 정신 차리고 제대로 똑바로 보자. 외국 사람들은 조형으로 회화로 민화를 바라봐요. 우리는 맨날 귀신으로만 보려 한단 말이에요. 중국 책 찾아서 무슨 뜻이라고 해석하고요. 우리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을 몰라요. 민화는 순수 회화이고 예술이다. 세계 최고다. 기자들이 자꾸 말하라고 해서 평소에 말 잘 안 하는데 마이크 잡고 한 시간 이십 분은 떠든 것 같아요.(웃음)” 다음 날 이례적으로 ‘판타지아 조선’ 전시와 관련해 정성들여 쓴 기사들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왔다. 질문을 했던 기자는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밤새워 기사를 썼다고 김세종 대표에게 전화했다. 책이 나오고 전시가 진행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는 김세종 대표는 물론이고 민화와 관련한 다양한 글과 사진이 쏟아졌다. 전시장을 다녀간 관람객들도 각종 SNS에 사진을 올렸다. 젊은 학생부터 시니어까지 우리 민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나누었다. 김세종 대표는 그저 하루하루가 신기할 뿐이라고. 좋은 민화 작품을 찾아다니고 수집하는 사람에게 문화계가 큰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판타지아 조선’은 8월 말 예술의전당에서 전시 일정을 마무리하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겨 10월 말까지 전시를 이어갔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안 그래도 예술의전당 전시 일정이 좀 짧게 느껴져 서운했는데 기회가 좋았죠. 9월, 10월 전국 여섯 곳에서 국제 비엔날레 행사가 열렸습니다. 외국 작가들이 한국으로 많이 들어올 텐데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의 것을 세계에도 알릴 수 있으니 시기도 좋잖아요. 서울 전시 끝나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으로 넘어가서 순회 전시도 합니다. 민화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얻어지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김세종 대표가 인터넷과 각종 매체를 통해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면면을 보면 한국 미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고수 중 고수임을 알 수 있다. 갑자기 책이 나오고 문턱 높은 전시관 세 곳에 소장 작품을 걸 수 없다. 예리하고 넓은 식견으로 예술품을 바라보고 의미를 찾아가며 미술품을 대한 것만도 40년 세월이다. “중학교 때 충남 보령에서 서울로 혼자 와 하숙을 했는데 춥고 가난해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중국 문학평론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과 펄 벅 소설에 심취하다가 철학에 빠졌어요. 그러다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후 미아리 산동네에서 하숙을 하면서도 인사동 서예학원에 찾아가 청소를 대신 해주며 무료로 붓글씨를 배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는데 어린 김세종 대표가 꿈꾸는 이상과 현실이 많이 달라 힘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다. 그때 해방구가 바로 박물관이었고 미술관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달려가 양질의 그림과 다양한 작품을 꼼꼼히 보며 감각을 익혀갔다. 각 박물관을 천 번 이상은 갔다. 수년을 발품 팔아가며 예술품을 감상했더니 눈썰미가 생겨났다. “서예를 배울 때였는데 학원에서 천재 화가로 불리는 소산(小山) 박대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나한테 들어와서 그림 공부해라’ 그러셔서 한 2년여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학교 들어갈 생각도 못했지. 돈도 없었어요.(웃음)” 군대 전역하고 사회에 나오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는데 그림 그리는 재주는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막노동도 해보고 살아보려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지나게 된 충무로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디자인이었다. 미적 감각도 있었고 서예도 배웠으니 승산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광고계에 뛰어들어 당시 아파트 지면 광고에서 방송 광고까지 손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광고기획을 했다. 업계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업체 대표들을 만나고 다녔던 시기가 20대 후반이었다. 쾌속 질주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취미에 눈뜨기 시작했다. “정적인 걸 좋아해서 20대 중반부터 난초와 수석을 수집했어요. 오랜 시간 모았는데 회의가 들었습니다. 우리 문화가 아니고 중국과 일본 문화였어요. 가만 보고 있자니 화분도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았고요. 몇 년 뒤 한두 개만 남기고 다 남들 나눠줬습니다.” 취미생활을 접은 뒤 그는 무턱대고 미술품 수집에 뛰어들었다. 사기를 당해 집 두 채 값을 날려 먹은 적도 있다고. 때마침 광고기획사 사무실 옆에 한국 고미술 상인 1세대이자 큰손 김재숭 선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그때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미술품에 관한 공부를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일본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책을 접하면서 수집에 대한 이해도 넓혀갔다. “미적인 눈은 야나기 선생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국립박물관 문지방이 닳도록 다니면서 오랜 세월 시각적 관점이 생겼고요. 소산 선생께 그림 수업을 듣고 서예도 배웠습니다. 서른 살 이후부터 김재숭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책에도 썼지만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를 배운 것이죠. 이후에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김환기 화백 작품 등을 수집했습니다.” 서른여섯에 잘하던 광고기획 일을 그만두고 IMF 때까지 미술관으로 가서 작품만 감상하며 살았다. 벌어놓은 돈은 잘도 없어지고 사라졌다. 마음치유를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공기 좋고 시원한 곳에 아지트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종로구 평창동에 들렀다가 지금의 갤러리 공간을 발견했다. 17년 전 작게 화랑 문을 열어 민화와 옹기 등을 모으고 미술과 관련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공력을 쌓았다. “민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화랑을 열기 3년 전부터였어요. 민화가 너무너무 좋은데 왜 이렇게 안 알려진 거야? 어렸을 때부터 수천 번 넘게 미술관, 박물관을 다녔는데 왜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민화는 내가 찾아서 수집해야겠다’ 마음먹고 갤러리를 하게 된 거죠. 나이 먹고 생일잔치하듯 소박하게 한번 해보자. 그렇게 미술품 수집을 하게 됐습니다.” 갤러리에는 종종 예술계 대가들이 찾아와 김세종 대표와 얘기를 나눈다.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해 이곳에 앉아 머리를 맞대기도 한다. 현대화랑은 물론 김한 JB금융지주 회장 등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인사들이 김세종 대표가 추구하는 소위 ‘민화운동’의 지지자이고 후원자다.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닌 김세종 대표의 진정성이 구심점이 됐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화도 그렇고, 지금 우리는 번지수 잘못 잡고 방황하고 있어요. 조형성, 아름다움, 예술성을 머리에 새기고 우리의 미를 바라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품격높은 예술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요.”
- 2018-11-1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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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오만(傲慢) 속에 핀 아름다운 마음
- ▲독일황제제국 선포식 겸 빌헬름 1세 대관식이 1871년 1월 18일 파리에서 거행됐다. 독일 역사에서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 1898)의 비중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유명한 여행지에서 크고 작은 동상은 물론 광장이나 거리에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역사적 입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영국의 미술사학자 닐 맥그리거(Neil MacGregor, 1946~)가 자신의 책 ‘독일: 한 나라의 기억들(Deutschland: Erinnerungen einer Nation, 우리나라에서는 ‘독일사 산책’으로 번역되었다)’에서 ‘빌헬름 1세(Kaiser Wilhelm I)’와 비스마르크가 중심이 되는 대형 기록화에 대한 설명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했다. 저자 맥그리거가 언급한 대형 유화는 1871년 독일 제국의 탄생 현장을 기록한 역사적인 그림으로 독일인들이 ‘끔찍’하게 사랑하고 자랑하는 유화이며, 독일 제국의 통일 또는 비스마르크를 다루는 영상 자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록화이기도 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독일 제국의 군대가 이웃 나라 프랑스와의 전쟁 당시, 전쟁이 채 끝나기 전인 1871년 1월 18일, 점령국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그것도 프랑스인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워하는 베르사유 궁의 가장 화려한 ‘거울의 방(Mirror Hall)’에서 독일황제제국선포식(Proklamierung des Deutschen Kaiserreiches)과 함께 빌헬름 1세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다(독일황제제국은 1918년까지 존속했다). 화가 안톤 폰 베르너(Anton von Werner, 1843~1915)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대형 유화에 담았다. 그런데 완성된 작품을 본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모습이 ‘여러 참석자’ 사이에 파묻혀 잘 알아볼 수 없다며 다시 그릴 것을 화가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다시 그려진 그림에서 비스마르크는 흰색 유니폼을 착용해 주변 참석자들 사이에서 확연히 눈에 띈다(원래는 진한 감색). 또한 비스마르크가 주변 인물에 가려지지 않도록 중앙에 빈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빌헬름 1세’는 이렇게 제작된 대기록물을 비스마르크 가족들에게 하사했다(사진 1). 그런데 베르사유 궁에서 거행한 제국 선포식을 담은 유화는 전란에 없어져 흑백 기록사진으로만 남아 있다(사진 2). 반면 황제의 하사품은 비스마르크의 고향인 북부 독일 프리드릭스루(Friedrichsru) 소재 그의 기념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필자는 그 역사기록화에 담긴 오만 속에 핀 아름다운 마음을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 2018-10-2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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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여성인권선언 ‘여권통문’ 선언 120주년에 바쳐
- 오래전부터 학교에서, 사회에서 배워야 했지만 모르고 지나쳤던 우리 어머니들, 여성들의 출중한 운동 역사가 있다.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이었던 ‘여권통문’이다. 늦었지만 이 순간 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시는 분들은 참 다행이다. 120년 전인 1898년 9월 1일,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이소사, 김소사의 이름으로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始通文)’ 이른바 ‘여권통문(女權通文)’, 즉 여성권리를 명시한 문서를 발표했다. 당시 뜻을 같이한 여성들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황성신문, 독립신문, 제국신문은 전한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 선언으로 근대적 여권운동의 시작이며, 세계여성의 날이 촉발된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보다 10년이나 앞선 역사적 사건이다. 필자는 2012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여권통문을 접한 그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그 후 훌륭하신 선각자 여성 선배님들께 감사와 존경심을 지니게 됐고 여성사에 대한 깊은 관심 아래 국립여성사박물관 건립 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전 세계 60여 개국에 있는 여성 박물관들이 부러웠고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번듯한 여성사 박물관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고 부끄러웠다. 웅녀의 단군신화 이래 우리나라의 발전 역사는 5000년 세월, 헌신과 희생으로 점철된 훌륭한 어머니들과 언니, 누이들인 대단한 여성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립여성사 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이 시대 남녀 모두의 역사적 사명이다. ‘여권통문(女權通文)’. 이 여성인권선언문은 ‘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정치참여권(참정권, 정치권), 노동권(경제활동 참여권, 직업권), 교육권 등 크게 3가지 권리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특히 남녀평등권으로서 교육권을 강조한다. 남녀동등권의 관점에서 여성 억압과 성 역할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워 남성과 동등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에 참여하며, 부부 사이에도 여성이 남성에게 통제받지 않고 존중받을 것을 주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선언이다. 세 가지 권리 중에서도 교육받을 권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직업권, 정치권은 교육으로 많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종에게 관립 여학교 설치를 상소도 하며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처음 주장은 북촌의 양반 부인들이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일반 서민층 부녀와 기생들도 참여했고, 남성들도 가담했다. 그 결실이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여학교인 ‘순성여학교’였다. 또한 여권통문 발표 이후 여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조직된 찬양회는 최초의 여성 단체로 기록된다. 여권통문은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시작하며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 스스로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여학교(순성여학교)를 설치한 그 실천력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교장은 여권통문 발표 시 김소사인 김양현당이다. 순성여학교는 초등과정 학교로서 서울의 느릿골(지금의 연지동으로 추정)에서 30명 정원으로 개교했다. 그러나 1903년 김양현당이 사망한 후 재정 등 여러 가지 제약으로 안타깝게도 소멸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여권통문 발표에서 시작된 여권운동의 맥은 면면히 이어지며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때로는 여성교육운동, 농촌운동, 항일투쟁,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여성투표권, 평등교육권 등은 여성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실천해온 여권운동 결과다. 1970년대만 해도 여성은 남자 형제의 대학 공부를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이나 직업전선에서 일해 학비를 보태는 것이 사회적 현상이었다. 과연 120년 이후의 우리들, 2018년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 여성은 현재 어떤 삶의 한가운데 있는 것일까? 여러 중요 척도 중 ‘여권통문’과 관련 있는 교육, 노동, 정치 참여 3가지만 살펴보려 한다. ‘2018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자료를 주로 참고하고 다른 필요한 통계자료도 인용한다. 첫째, 교육 척도 2005년 여학생의 대학교 진학률은 남학생의 대학교 진학률을 0.4%포인트 추월했다. 놀라운 약진이다. 2017년에는 여학생 대학교 진학률이 72.7%로 남학생(65.3%)보다 7.4%포인트 높다. 이런 현상이 14년간 계속되었으니 분명 33세 미만의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고등교육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이전에는 남녀 모두 비슷한 대학교 진학률을 보였고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역전 상황이 14년을 지속했으므로 이제 우리 사회의 여성들의 고학력 현상은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상이자 사실이 지금의 사회현상과 앞으로 전개될 사회 변화에 미칠 영향은 지대하다. 여성에 대한 고려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 현실을 모두 직시하면 좋겠다. 그러나 현재, 직업전선에서의 여성들이 받는 대우는 민주주의 사회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 둘째, 경제 분야 여성 고용률이 조금씩 증가하고 생애주기별, 즉 나이별 등 여러 이유가 있는 고용현장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2017년 ‘직업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90.2%인데 실제 여성 고용률은 50.8%다. 남성 고용률 71.2%에 비하면 그 차이가 20.4%포인트나 된다. 여성 월평균 임금도 남성 임금의 67.2% 수준이다. 남녀 동일임금은 요원하다는 의미다. 국제사회와 비교해볼 때 우리나라 여성의 경제·고용상황은 하위에서 맴돈다. 통계가 말해주듯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매우 냉담하다. 셋째, 정치 참여 점점 참정권을 행사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여성 투표율(76.4%)이 남성(74.8%)보다 높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남녀 투표율이 57.2%로 같았으나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자 55.7%에 비해 여성은 53.1%였고,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다시 여성 투표율(77.3%)이 남성(76.2%)보다 높았다. 2018년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60.2%였다. 아직 성별 집계는 발표되지 않았다. 여성 선거참여율의 추이는 물론 우리 사회 여성의 동향을 잘 분석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으며 미래 예측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성관리자 비율이 미미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선거 참여는 높으나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대의정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국회 및 지방의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 중 여성 비율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아직 30%에도 못 미치고 남녀 동수로 가는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017년 행정부 국가직 공무원 중 여성 비율이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여성 법조인은 26.1%, 의료 분야의 여성 비율(의사 25.4%, 치과의사 27.0%, 한의사 21.0%, 약사 64.0%)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아직 먼 여정이지만 여성들은 분명 약진하고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여성 권리 획득이 그냥 어느 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선각자들의 각성과 희생적 노력 덕분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여성인권선언인 ‘여권통문’ 등 120년 전의 역사적 사건들과 여성들의 선구자적 운동의 힘이다.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여성인권선언서다. ‘국립여성사박물관추진협의회’,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가 2012년 발족한 이래로 여성사학회,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여권통문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 여권통문이 발표된 날을 기려왔다. 여성계를 넘어 국가 차원의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움직임도 있어왔다. 올해 신용현 의원 대표발의로 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의 날’로 기념하고 여권통문의 날부터 1주간을 ‘여성인권주간’으로 정해 기념함으로써 여권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려는 양성평등기본법 개정안 발의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여권통문’을 선언한 지 120주년 되는 2018년, 놀랍게도 여러 분야에서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올해, 민주주의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성평등, 양성평등의 획기적 전기가 되기 바란다. 베트남이나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얀마 등 여러 나라들이 세계여성의 날(3월 8일)과 각국 고유의 여성의 날을 모두 기념한다. 우리나라도 자랑스러운 우리 여성인권선언일을 기념하면 좋겠다. 9월 1일 국회에서 ‘여권통문’ 선언 12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여권통문에 대한 연구 세미나도 함께한다. 더욱이 여성교육 수혜의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여류 미술작가 120인들이 여권통문 120주년을 기념하면서, 대한민국에도 자랑스러운 ‘국립여성사박물관’이 건립되기를 촉구하는 전시회를 10월 내내 국회에서 연다. 우리 모두 축하하고 ‘여권통문’을 영원히 기렸으면 한다.
- 2018-09-27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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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색무광(無色無光)의 깊은 아름다움
- 언젠가 ‘한국 미술을 몇 마디로 집약하는 표현은 무엇일까’라는 화제(話題)가 떠오른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서슴지 않고 ‘검이불루 화이불치(檢而不陋 華而不侈)’를 꼽았다. 그의 근작 ‘안목(眼目)’의 첫 대목도 그렇게 시작한다. 얼마 전 필자는 일본 최고의 명품관임을 자랑하는 도쿄 와코(和光)백화점에서 일본 도예가 이노우에 만지(井上萬二)의 작품 전시를 우연히 관람한 적이 있다. 전시회에서 내건 화제가 ‘잡스러움이 없는 명품 도자기(名陶無雜)’라서 필자의 흥미를 더욱 자아냈다. 널찍한 공간은 다양한 도예 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울러 흰색이 전시장 전체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잡티 없는 것’을 추구한 작가의 예혼(藝魂)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했다. 방문객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전시장을 나오며 필자는 왠지 ‘아쉬움을 남기는 작품전’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화려한 작품으로 가득한, ‘흰빛 넘치는 공간’이 오히려 무겁기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 문득 ‘달항아리’의 자태가 떠올랐다. 상기 전시 제목이 말하는 ‘잡것 없는 백자’와 우리네 ‘잡것 없는 백자’에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을까? 둘을 비교하다 보니 자연스레 대부분의 우리네 국보급 백자 ‘달항아리’는 흰색이면서도 광채를 배제한 무색(無色)이라는 게 생각났다. 이것이야말로 둘의 ‘작지만 큰 차이’인 듯싶었다. 우리의 옛 도공은 흰 빛깔(光體)도 ‘무잡(無雜)’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나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말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기원전 4년) 기사에 나오는 걸 보면 이는 면면이 이어온 우리 민족의 오랜 ‘예술적 정서’임이 분명하다.
- 2018-09-25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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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여성인권선언 ‘여권통문’ 선언 120주년에 바쳐
- 오래전부터 학교에서, 사회에서 배워야 했지만 모르고 지나쳤던 우리 어머니들, 여성들의 출중한 운동 역사가 있다.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이었던 ‘여권통문’이다. 늦었지만 이 순간 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시는 분들은 참 다행이다. 120년 전, 1898년 9월 1일,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이소사, 김소사의 이름으로 ‘여학교 설시 통문(女學校設始通文)’ 이른바 ‘여권통문(女權通文)’, 즉 여성권리를 명시한 문서를 발표했다. 당시 뜻을 같이한 여성들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황성신문, 독립신문, 제국신문은 전한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 선언으로 근대적 여권운동의 시작이며 세계여성의 날이 촉발된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보다 10년이나 앞선 역사적 사건이다. 필자는 2012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여권통문을 접한 그날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그 후 훌륭하신 선각자 여성 선배님들께 감사와 존경심을 지니게 됐고 여성사에 대한 깊은 관심 아래 국립여성사박물관 건립 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전 세계 60여 개국에 있는 여성 박물관들이 부러웠고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번듯한 여성사 박물관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고 부끄러웠다. 웅녀의 단군신화 이래 우리나라의 발전 역사는 5,000년 세월, 헌신과 희생으로 점철된 훌륭한 어머니들과 언니, 누이들인 대단한 여성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립여성사 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이 시대 남녀 모두의 역사적 사명이다. ‘여권통문(女權通文)’, 이 여성인권선언문은 ‘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정치참여권(참정권, 정치권), 노동권(경제활동 참여권, 직업권), 교육권 등 크게 3가지 권리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특히 남녀평등권으로서 교육권을 강조한다. 남녀동등권의 관점에서 여성 억압과 성 역할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워 남성과 동등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에 참여하며, 부부 사이에도 여성이 남성에게 통제받지 않고 존중받을 것을 주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선언이다. 세 가지 권리 중에서도 교육받을 권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다른 직업권, 정치권도 교육으로 많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종에게 관립여학교 설치를 상소도 하며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처음 주장은 북촌의 양반 부인들이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일반 서민층 부녀와 기생들도 참여했고, 남성들도 가담했다. 그 결실이 1899년 한국인 최초의 사립 여학교인 ‘순성여학교’였다. 또한 여권통문 발표 이후 여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조직된 찬양회는 최초의 여성 단체로 기록된다. 여권통문은 한국이 근대화를 시작하며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 스스로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여학교(순성여학교)를 설치한 그 실천력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교장은 여권통문 발표 시 김소사인 김양현당이다. 순성여학교는 초등 과정 학교로서 서울의 느릿골(지금의 연지동으로 추정)에서 30명 정원으로 개교했다. 그러나 1903년 김양현당이 사망한 후 재정 등 여러 가지 제약으로 안타깝게도 소멸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여권통문 발표에서 시작된 여권운동의 맥은 면면히 이어지며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때로는 여성교육운동, 농촌운동, 항일투쟁,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여성투표권, 평등교육권 등은 여성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실천해온 여권운동 결과다. 1970년대만 해도 여성은 남자 형제의 대학 공부를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이나 직업전선에서 일해 학비를 보태는 것이 사회적 현상이었다. 과연 120년 이후의 우리들, 2018년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 여성은 현재 어떤 삶의 한가운데 있는 것일까? 여러 중요 척도 중 ‘여권통문’과 관련 있는 교육, 노동, 정치 참여 3가지만 살펴본다. ‘2018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자료를 주로 참고하고 다른 필요한 통계자료도 인용한다. 첫째 교육 척도. 2005년 여학생의 대학교 진학률은 남학생의 대학교 진학률을 0.4%p 추월했다. 놀라운 약진이다. 2017년에는 여학생 대학교 진학률이 72.7%로 남학생(65.3%)보다 7.4%p 높다. 이런 현상이 14년간 계속되었으니 분명 33세 미만의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고등교육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이전에는 남녀 모두 비슷한 대학교 진학률을 보였고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역전 상황이 14년을 지속했으므로 이제 우리 사회의 여성들의 고학력 현상은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상이자 사실이 지금의 사회현상과 앞으로 전개될 사회 변화에 미칠 영향은 지대하다. 여성에 대한 고려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 현실을 모두 직시하시면 좋겠다. 그러나 현재, 직업전선에서의 여성들이 받는 대우는 민주주의 사회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 둘째 경제 분야. 여성 고용률이 조금씩 증가하고 생애주기별, 즉 나이별 등 여러 이유가 있는 고용현장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2017년 ‘직업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90.2%인데 실제 여성 고용률은 50.8%다. 남성 고용률 71.2%에 비하면 그 차이가 20.4%p나 된다. 여성 월평균 임금도 남성 임금의 67.2% 수준이다. 남녀 동일임금은 요원하다는 의미다. 국제사회와 비교해볼 때 우리나라 여성의 경제·고용상황은 하위에서 맴돈다. 통계가 말해주듯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매우 냉담하다. 셋째, 정치 참여에 관한 부분이다. 점점 참정권을 행사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여성 투표율(76.4%)이 남성(74.8%)보다 높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남녀 투표율이 57.2%로 같았으나.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자 55.7%에 비해 여성은 53.1%였고,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다시 여성 투표율(77.3%)이 남성(76.2%)보다 높았다. 2018년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60.2%였다. 아직 성별 집계는 발표되지 않았다. 여성 선거참여율의 추이는 물론 우리 사회 여성의 동향을 잘 분석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으며 미래 예측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성관리자 비율이 미미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선거 참여는 높으나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대의정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국회 및 지방의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 중 여성 비율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아직 30%에도 못 미치고 남녀 동수로 가는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017년 행정부 국가직 공무원 중 여성 비율이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여성 법조인은 26.1%, 의료 분야의 여성 비율(의사 25.4%, 치과의사 27.0%, 한의사 21.0%, 약사 64.0%)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아직 먼 여정이지만 여성들은 분명 약진하고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여성 권리 획득이 그냥 어느 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선각자들의 각성과 희생적 노력 덕분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여성인권선언인 ‘여권통문’ 등 120년 전의 역사적 사건들과 여성들의 선구자적 운동의 힘이다.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여성인권선언서다. ‘국립여성사박물관추진협의회’, (사)역사·여성·미래가 2012년 민간에서 발족한 이래로 여성사학회,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여권통문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 여권통문이 발표된 날을 기려왔고, 여성계를 넘어 국가 차원의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움직임도 있어왔다. 올해 신용현 의원 대표발의로 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의 날’로 기념하고 여권통문의 날부터 1주간을 ‘여성인권주간’으로 정해 기념함으로써 여권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려는 양성평등기본법 개정안 발의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여권통문’을 선언한 지 120주년 되는 2018년, 놀랍게도 여러 분야에서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올해, 민주주의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성평등, 양성평등의 획기적 전기가 되기 바란다. 베트남이나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얀마 등 여러 나라들이 세계여성의 날(3월 8일)과 각국 고유의 여성의 날을 모두 기념한다. 우리나라도 자랑스러운 우리 여성인권선언일을 기념하면 좋겠다. 9월 1일 국회에서 ‘여권통문’ 선언 12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여권통문에 대한 연구 세미나도 함께한다. 더욱이 여성교육 수혜의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여류 미술작가 120인들이 여권통문 120주년을 기념하고, 대한민국에도 자랑스러운 ‘국립여성사박물관’이 건립되기를 촉구하는 전시회를 10월 내내 국회에서 연다. 우리 모두 축하하고 ‘여권통문’을 영원히 기렸으면 한다.
- 2018-09-0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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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어제와 오늘
-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년 작 추정)’를 처음 만난 것은 1960년 초였으니 필자가 의과 대학생 시절이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가 거장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북유럽의 모나리자’로서 미술 애호가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았다. 필자는 피부과학을 전공한 후 미술품에, 그중에서도 특히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증상을 찾아내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미(歐美)의 여러 미술관을 섭렵하며 다니던 중 다시 그 작품을 보게 됐을 때 순간 그림 속 ‘소녀’가 ‘전신무모증(全身無毛症, alopecia totalis)’ 환자라는 사실을 ‘진단’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겉눈썹은 물론 속눈썹도 없는 소녀였다. 문득 그 ‘소녀’가 너무나 안쓰럽게 다가왔다. 작가 베르메르가 그린 다른 여인에게서는 예외 없이 머리카락이 있는 것을 보면, 필자의 이런 ‘진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게 된다(참조: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이성낙, 눌와, 2018). 근래 인터넷에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패러디한 캐릭터를 종종 보게 된다. 그중 국내의 한 젊은 작가(Kyung Eun Miriam Lee, 1995)가 그린 작품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화제는 ‘요하네스 베르메르를 존경하며(Homage to Johannes Vermeer)’(Color pencil on paper, 21×15cm, 2018). 작가는 원작이 갖고 있는 중요 특징인 ‘특유한 터번’, ‘진주 귀고리’, ‘의상’과 함께 ‘없는 눈썹’을 잘 표현했다. 특히 ‘눈’, ‘코’, ‘입’은 작가 나름대로 새롭게 ‘현대적 풀이’를 했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다른 메시지를 본다. “역사는 그 시대의 산물이며, 그 시대를 말할 뿐”이라는 관점이다. 요컨대 오늘의 관점은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665년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와 그로부터 350년이 지난 오늘의 그 ‘소녀’는 결코 같아서도 안 되고, 같을 수도 없다. 이런 사실을 떠올리며, 작금의 ‘역사 풀이 현상’을 돌아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소멸하는 시간을 증명하는 목격자다.”
- 2018-09-04 0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