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국가기술자격을 취득하여 재취업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쉽게 만난다. 학원에도 다니고 해설서나 문제집을 사서 독학으로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너무 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시험을 치면 불합격하는 사람이 많다. 나이 많아 외우고 응용하는데 애를 먹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속출한다. 노후준비는 하루라도 빨리하면 할수록 좋다는 말과 같이 공부도 젊어서 해야 양질의 성과를 빠르게 얻을 수 있다.
인터넷으로 재취업에 유망한 자격증을 검색해보면 상위에 전기기사 자격증이 랭크되어있다. 평소 성격이 꼼꼼하고 기술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기기사 자격 취득을 권한다. 자동차운전면허가 있는 사람만이 자동차운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전기도 위험해서 전기 관련 자격증이 있는 사람에게만 전기 설비를 관리할 수 있도록 법으로 허용해준다.
전기 설비가 일정 용량 이상이 되면 의무적으로 전기기사를 고용해야 한다. 빌딩, 아파트, 공장 등 전기기사를 직접 고용해야 하는 하는 곳이 많다. 전기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재취업이 수월하고 보수도 괜찮게 받는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전기기사 자격증이 인기 있는 자격증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 이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한다. 문제는 퇴직 후 또는 퇴직이 임박해서 너무 늦게 도전하기 때문에 자격증 취득이 어렵다는 데 있다.
복잡한 전철 안에서 옆에 앉은 나이 지긋한 분이 무슨 문제집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호기심으로 무슨 공부를 하나하고 곁눈질해보니 ‘전기산업기사’ 수험서다.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볼펜으로 밑 줄 친 곳이 여기저기고 손때가 묻은 책이 너덜너덜하다. 나이 들면 기억력이 감퇴되어 젊었을 때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 반복해서 학습을 해야 한다. 필자도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지금껏 이 일을 하고 있기에 전기계 선배로서 측은한 마음도 들고 무언가 용기를 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공부하는데 어렵지 않으세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보았다. 예기치 않은 질문이었는지 ‘왜 그런 걸 물어봐.’하는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예 저도 전기 일을 하고 있는데 전기 문제집으로 공부를 하는 걸 보고 반가워서요.’ 전기인이라는 내 말에 아군 같은 동질감을 느꼈는지 경계심이 풀어지는 걸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돌아오는 대답이 ‘아 예! 나이 들어 혼자 공부하니 어렵네요.’
전기는 수학을 응용하여 계산하는 문제가 많다. 미적분도 필요하고 삼각함수도 알아야 한다. 학교를 졸업한 지 수 십 년을 흘러 다시 수학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다. ‘젊어서부터 전기 일을 해 오셨어요? 하고 묻자 ’아니에요. 저 공무원 했어요. 아직은 젊은데 집에서 놀기도 뭣하고 전기 자격증을 따면 취업하기가 쉽다고 해서 도전해보는 거예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재취업을 위해 공부하는 분이다. ‘어때요! 공부해보니 할 만해요?’ ‘어려워요. 머리가 녹슬어서 그런지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려요.’ ‘나이 들면 힘들지요 반복해서 자꾸 하는 수밖에 없어요. 기왕 시작한 것 열심히 하셔서 자격증을 꼭 따세요. 그런데 전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으니 실무에 종사할 때는 위험하니 아주 조심해야 됩니다.’
수명 100세 시대를 살려면 새로운 직업을 두세 번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취업을 위해 꼭 전기기사자격증을 취득할 필요는 없지만 의무 고용 제도가 있는 자격증이 좋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자격증 취득을 마음먹었다면 하루라도 빨리 준비해서 도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의무 고용 제도가 취업에 유리하다고만 생각할게 아니라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에 의무 고용 제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동차 운전이 위험하기 때문에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만이 운전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운전면허를 처음 취득하면 운전경험이 없어 서툴고 사고의 위험성도 높기 때문에 운전 영업에 바로 뛰어들 수 없고 운전 경력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전기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해도 전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기 때문에 전문 기술자 밑에서 트레이닝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자격증 취득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미스터트롯’ 선(善) 영탁이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연애하고 싶습니다!”라는 솔직 발언으로 주목 받고 있다. 또한 함께 출연한 임영웅, 이찬원, 장민호의 현재 연애 상태도 공개돼 관심이 집중된다.
다음달 1일 방송되는 MBC ‘라디오스타’는 ‘오늘은 미스터트롯’ 특집으로 꾸며진다. 영탁은 ‘내일은 미스터트롯’에 출연해 ‘막걸리 한 잔’, ‘추억으로 가는 당신’, ‘찐이야’ 등 엄청난 가창력과 리듬 감각으로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었다. ‘탁걸리’, ‘리듬탁’ 등 다양한 별명으로 인기를 얻었고 최종 선(善) 자리까지 올랐다.
방송에서 영탁은 ‘미스터트롯’의 인기 때문에 꿈이 산산조각 났다고 털어놓는다. 그의 꿈이 무엇이었을지 궁금증이 커지는 가운데, 김구라가 “시건방진 꿈이네!”라고 말해 큰 웃음을 줬다는 후문.
영탁은 ‘미스터트롯’ 대박의 숨은 공신이 자신이라고 밝혀 궁금증을 더한다. 과거 ‘스타킹’, ‘히든싱어’에 출연한 경험으로 시청률이 잘 나오는 비법을 터득했다는 그는 대기실을 돌아다니며 한 가지 특별한 행동을 실천했다고 말해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영탁은 “연애하고 싶습니다!”라는 솔직한 발언으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영탁을 포함해 임영웅, 이찬원, 장민호가 출연하는 ‘라디오스타’는 다음달 1일 밤 11시 5분 방송되는 ‘라디오스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새로운 도전을 즐긴다, 인생은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자기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한다.” 중장년을 위한 자기계발서 ‘비바 그레이’의 저자 홍동수(64) 씨가 말하는 액티브 시니어의 공통점이다. 패러글라이딩, 암벽등반, 스쿠버다이빙, 승마, 요트 등 거의 모든 레포츠를 섭렵한 그에게 ‘젊음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 “나이를 느껴본 적이 없다. 고로 나는 매 순간이 젊다.”
도움말 홍동수 ‘비바 그레이’ 저자
홍동수 씨와 같은 중장년을 이른바 ‘액티브 시니어’라 부른다. 본래 이 말은 미국 시카고대학교 교수인 버니스 뉴가튼이 처음 사용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소비패턴이 가족 중심에서 여가, 자기계발 등 자기 중심으로 변화한 것에 착안한 용어다. 한국에서도 여가와 취미, 소비를 즐기며 사회생활에도 적극적인 50~60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줄곧 쓰인다. 액티브 시니어의 경우 과거 노인층과는 확실히 구분되며, 육체뿐 아니라 경제적, 정신적 측면에서도 혈기왕성한 성향을 띤다.
‘액티브’(활동적인)라는 의미처럼, 이들은 건강한 신체를 바탕으로 청년 시절보다 더 활발한 여가와 취미를 즐기고 있다. 홍동수 씨는 “레포츠 동호회에서도 직장생활로 바쁜 젊은 세대보다 시간 여유가 있는 시니어들이 반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활동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무엇일까? 첫째, 삶의 행복과 심리적 안정을 준다. 둘째,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해 친밀감과 유대감을 갖고, 이를 기반으로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며 사회적 혜택을 얻는다. 셋째, 신체적 여가활동을 통해 건강을 유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가 뭐래도 즐거워한다.
액티브 어덜트, 더할 나위 없이 놀자!
국내 최초 설악산 대청봉 패러글라이딩 및 샌드 요트 제작, 에베레스트 원정, 초경량 항공기 면허, 스쿠버다이빙 자격 취득, 그룹사운드 INDKY의 베이시스트 등등. 액티브 시니어 홍동수 씨의 활동 이력이다. 젊은이조차 엄두를 못 내는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그는 “오히려 나이가 들면 더 쉽게 도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 덕분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나 신체가 아닌 마음가짐. 물론 취향의 차이는 있다. 시니어 레포츠 전문가인 그에게 사람들은 ‘어떤 액티비티를 즐겨야 좋을지’ 자주 묻는다. 이에 그는 ‘에니어그램’(Enneagram, 성격유형검사)을 기반으로 추천 종목을 정리해뒀다. 온라인이나 앱을 통해 ‘에니어그램’을 검색하면 손쉽게 자신의 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
다음 궁금증, 바로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는 것. 장비의 경우 대부분 대여가 가능하고, 동호회 등을 통해 중고로도 구매할 수 있다. 활동보다는 고가의 장비 수집이 취미인 이들도 있어, 그야말로 자기 나름이다. 홍동수 씨는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마련한 공식(?)을 내놓았다. ‘장비 구입비는 한 달 생활비 정도, 활동비(이용료, 입장료 등 하루 경비)는 하루 생활비 정도’로 계산하라는 것. 그의 경우 장비 구입비는 300만 원 선, 활동비는 하루 10만 원 선으로 보고 있다. 금액 때문에 도전을 망설이지는 않는가? 홍동수 씨는 말한다. “레포츠는 돈보다는 열정과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최근 코로나19 등의 여파로 각종 레포츠 모임이 주춤한 상태다. 그는 이때를 틈타 준비해둘 것이 있다고 조언한다.
“나이를 떠나 레포츠를 즐기려면 어느 정도 근력이 필요합니다. 집에서라도 조금씩 운동하며 기초 체력을 키우길 바랍니다. 건강하고 능력 있는 우리 시니어가 ‘잘 노는 사람’까지 된다면, 드디어 완벽한 인생을 누리는 첫 세대가 아닐까요?”
홍동수 씨가 권하는 상황별 레포츠
◇ 은퇴 후 부부가 함께하려면 ‘산악자전거’
산악자전거가 일반 자전거보다 더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의외로 안전하다. 우리나라는 산마다 임도(산간 도로)가 잘 조성돼 있다. 이 길은 등산로와 다르다. 사륜구동차도 다닐 수 있다. 아내도 산악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건강해졌다. 산악자전거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부부가 함께 전국일주도 가능하다.
◇ 럭셔리한 취미생활을 원한다면 ‘승마’
승마는 귀족 스포츠로 잘 알려져 있지만 말을 구입하지 않으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부유한 이들도 말을 소유한 경우가 극히 드물다. 다양한 승마 체험의 재미가 있는데, 말을 사면 자기 말밖에 탈 수 없고 유지비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또 정적이고 우아한 활동으로 여기기 쉬운데 의외로 격렬하고 체력소모도 심하니, 이 점 고려하자.
◇ 사색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할 땐 ‘패러글라이딩’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 중장년이 꽤 많다. 하늘에 떠서 고요히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기 좋기 때문이다. 조절하기 나름이지만, 길게는 4~5시간도 공중에 떠 있다. 광활한 풍경을 바라보며 성찰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정적인 레포츠다. 잠깐 교육만 받으면 스스로 바람을 살피면서 안전하게 제어가 가능해 누구든 쉽게 배울 수 있다.
음식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았다. 방랑 셰프 임지호님의 자연주의 요리 이야기는 매체를 통해서 많이 보고 듣고 하던 터였다. 영화 시사회 초대를 받고 무조건 가기로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이 뒤숭숭해도 잠깐 숨통 트여보자 싶었다. 지뢰를 피하듯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조심조심 동대문 메가박스까지 다녀온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밥정이든 요리 이야기든 할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저 영화 속 음식들을 들여다보기만 하다가 이제야 그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꺼내본다.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기대를 했었다. 밥정이라는 말도 정겨웠고 자연 속에서 만들어지는 요리에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 요즘은 집에서 밥 한 끼 준비하기가 귀찮을 지경이 됐지만' 한때는 요리의 즐거움에 푹 빠졌던 적도 있었으니까.
밥정은 방랑 식객으로 잘 알려진 임지호 셰프의 이야기다.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삶의 이야기와 요리 철학을 담기 위해 박혜령 감독이 10년에 걸쳐 만들어낸 82분짜리 다큐멘터리다. 그리고 세계 최고 권위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비롯해 각종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된 수작이기도 하다.
방랑 셰프 임지호 선생의 자연주의 요리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서 시작된다.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어머니, 길러주신 어머니, 그리고 떠돌다가 지리산 마을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 세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밥정으로 표현한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죽을 때까지 누군가에게 밥을 해주는 게 나의 책임”이라고 임지호님은 말한다. 들판에 풀 한 포기나 바닷가에 떠다니는 해초만 보아도 맛있는 밥상 차릴 생각에 손길 닿는 대로 채취해서 담는다. 자연의 재료로 두툼하고 거친 손이 만들어 낸다. 흙냄새 바다 냄새나는 음식에 담긴 정이 감동의 맛으로 전해진다. 그 여정 속에 변화하는 사계절의 풍광을 보는 맛도 남다르다.
시골길을 따라 걷거나 깊은 산골 마을이나 바닷가를 따라 방랑하는 셰프. 비바람 속에서, 눈보라 치는 들판에서 식재료를 얻는다. 그 길에서 만나는 나물, 이끼, 잡초, 바다풀로 마을 어른에게 밥상을 차려 드린다. 솔방울과 나뭇가지가 멋진 소품이 되어 주기도 한다. 자연에서 나는 것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고 임지호 셰프는 강조한다.
그는 어느 날 안동댐 주변을 지나가는데 이 길에서 자신을 낳아주신 엄마가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생모가 김씨라는 것밖에 모르고 얼굴도 알지 못하지만, 이 길을 갈 때면 눈물이 난다는 말에 그분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전해진다.
2009년 지리산으로 식재료를 구하러 떠났다가 산골 마을의 텃밭에서 나물을 뜯던 김순규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 인연으로 가끔 찾아가 밥을 지어드리거나 과자와 사탕을 전해주며 만남을 이어갔다. 그렇게 7~8년 지내오다가 어느 날 김순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 세 어머니와 이별을 하게 된 마음을 표현하는 108가지의 자연친화적인 음식을 3일 동안 장만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할 수밖에 없다.
밥과 사랑과 그리움은 닮았다. 거기엔 누군가와 이어지는 따스함과 은근한 속정이 함께 한다. 결국엔 그것이 가슴 뭉클하게 하는데 혹시 이것을 밥정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잔뜩 겉멋 부린 요란한 영화들 속에서 냇물에서 세수만 한 듯한 순하고 담백한 영화, 이야기를 예상할 수 있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다만 허기짐을 채워주는 따뜻함이 있다.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있는 듯 평화롭다.
빨리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지기를 고대한다. 지치지 말고 서로 마음 모아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이렇게 봄볕 좋은 날 속정 깊은 누군가와 마주 앉아 마음 놓고 밥정을 나눌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새해 아침, 한 중견 시인의 시집 제목에 마음이 출렁였다. “무슨 끝이 있나요”라는 물음이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인간의 성찰 없는 사랑을 비판하며 “오늘날의 사랑 담론은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이해관계’만 작동하는, 흔해빠진 결판의 스토리만 분분한 탓이다. 세기의 족보에 기록된 저 유명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은 어땠을까. 자기 존재에 대한 결사항전의 나날이 아니었다면 진즉 서로의 손을 놔버렸을 것이다.
51년간 유지된 계약결혼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 20세기의 프랑스 최고 지성 커플로 불리는 이름이다. 규정된 인간이 아닌 행동하는 주체로서 살려고 노력했던 두 사람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 연인이자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의 관계가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성과였다”고 말했고,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 대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 “나의 검열관” 등으로 표현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만난 건 1929년.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 그녀는 그보다 세 살 어렸다. 보부아르는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남다른 모범생이었다. 한마디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반면 사르트르는 160cm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한쪽 눈은 시력을 거의 잃은 사시(斜視)였다. 첫인상은 쉽게 호감이 안 가는 외모였지만 그는 해박한 지식과 유머로 주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요즘 말로 뇌섹남이었다.
어느 날, 밤새 논쟁을 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완벽한 대화 상대자임을 알게 됐다. 지적 반려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신들의 운명을 동시에 꿰뚫어본 것이다. 실제로 보부아르는 아무도 말 걸어오지 않는 상태를 죽음으로 봤다. 사르트르가 죽자 “더 이상 그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매우 슬퍼했다.
이들이 2년간의 계약결혼을 시작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건 까다로운 철학교수 자격시험에서 각각 수석(사르트르)과 차석(보부아르)으로 합격하고 나서였다. 그 후 둘 사이의 계약은 51년간 파기되지 않았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2년 동안은 함께 살면서 둘 중 누구도 자유를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고, 그 후에는 각자의 길을 가며 자유를 누리되 헤어지지는 말 것. 상대가 찾을 때는 반드시 응해줄 것, 강압과 관습에 방해받지 않는 관계가 될 것,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거짓말도 하지 말 것, 각자 경제적으로 독립할 것.”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이 제안을 즉각 받아들였다. 여성의 창조적 본성을 억누르지도 않고 가사노동자로 전락하게 만들지도 않을 이상적 삶의 모델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사랑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훗날 사람들은 두 사람의 특별했던 결혼생활을 관습과 제약에 매이지 않고,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추구한 실험적 사랑이었다고 평가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사르트르가 남긴 이 명언에는,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수많은 선택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르트르와 그의 연인 보부아르도 자신들의 존재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물론 두 삶에 제3의 인물이 끼어들면서 종종 질투와 분노를 일으키고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끝까지 사랑의 총량을 채워나가며 서로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견지했다.
1970년대 초, 사르트르는 시력을 점점 잃어갔고 더 이상 그가 쓴 글을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런데도 1980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가 떠난 후 그의 고통스러운 말년을 기록한 ‘이별의 의식’을 출간했다. 그리고 6년 뒤 그녀도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전부가 되려고 하지 않았기에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르트르와의 관계에서 더 고독했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호사가들은 이들의 삶에 흠집을 내기 위해 두 사람에게 닥쳤던 위기와 다양한 인물들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를 파헤쳤다. 그러나 사랑의 통념들에 저항하기 위해,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 완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이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는지도 알게 됐다.
사르트르와 잠시 헤어져 있던 그녀는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누워 있는 사르트르 곁으로 돌아갔다. “사랑하는 남자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삶이에요!”라고 말했던 보부아르는 늘 ‘여인들’이 끊이질 않아 온전히 독차지할 수 없었던 남자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된 것이다.
그 누구보다 신사다운 이미지의 배우, 어느 장면에 나와도 화면 안에 그만의 안정감을 불어넣는 독보적인 배우라고 하면 홍요섭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경자년(庚子年)인 올해 예순다섯 살, 서글서글한 눈매와 주름이 더 매력적인 남자, 참 묵직한 홍요섭을 만났다.
배우로서의 삶도 어언 40여 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세월 다져진 배우로서의 캐릭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홍요섭은 브라운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배우다. 다작을 하지 않고 겹치기 출연도 사양하며 철저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지향하며 살기 때문이다.
“제대 후 스물여섯쯤 됐을 때였죠. 그 시대가 소위 ‘말하면 잡혀가는 시대’였는데 소극장 공연에서 그 ‘잡혀갈 소리’들을 시원하게 하는 거예요. 원래는 전공이 신문방송학과였는데 그걸 본 이후 연극영화과로 전과하게 됐죠.”
‘생각도 못한 일’. 홍요섭은 자신이 배우가 된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런 길을 선택한 자신에게 아버지가 한 말은 평생 지침이 되었다.
“너 하고 싶은 거 해라. 다만 네 아내나 친구들 창피하지 않게 해라.”
삶의 철학을 만들어준 아버지
홍요섭을 말하려면 그의 아버지인 홍영의 목사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그의 삶 전반을 지배했던 것은 아버지의 존재와 삶의 태도, 남겨진 말들이다.
“아버지가 독특한 분이셨어요. 교육자이자 목사님이기도 하셨고…. 김일성과 동갑이셨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죠.(웃음)”
故 홍영의 목사는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서자 토지 개혁이 시행되기 전에 일가친척을 다 데리고 나와 해주를 거쳐 인천에 도착했다. 그리고 교육사업을 하고 목사로 일하면서 평생을 나눔에 힘썼다.
“처음엔 참 답답했죠. 우리나 좀 주지.(웃음) 결혼하면서 얼마나 창피했는데요, 가진 게 없었으니. 그런데 아내의 친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었어요. 결혼하기 전 그분이 ‘홍 박사 자식이면 볼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장인도 저희 결혼을 쉽게 결정하시게 됐어요.”
그가 지금 전무이사로 있는 브리지스톤골프 또한 그의 아버지의 신념과 일치하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소위 팔리는 것만 만드는 게 아니라 여성, 아이들 등 보다 다양한 사람을 위해 제품을 만들고 사회공헌 철학이 투철한, 나누는 회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 뭐 있나?”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그와 그의 아버지의 기질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쾌하게 치러진 아버지 장례식
“아버지는 82세에 떠났어요. ‘나 갈 때 됐다’ 하며 ‘화장해서 버려라. 뼈다귀 들고 돌아다니지 말고.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잘해라. 장인·장모님 자주 찾아뵙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라고 말씀하셨죠. 사람들 다 모아놓고 마지막 인사를 받은 후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홍영의 목사의 죽음을 맞이하는 거침없는 말투에서 그 시절 이북 사람다운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그런 태도는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 한마디로 끊어주셨어요. ‘남들이 보기 싫은 거 하지 말고, 아내 될 사람한테 부담 안 가게 해라.’ 그 말을 들으며 ‘아, 이렇게 날 잡는구나’ 싶었죠. 형들은 공수부대도 가고 해병대도 가고 저도 군대를 힘들게 갔다 왔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 신경 안 썼어요. 하나님 다음이 국가였던 분이셨으니까.”
그런 아버지를 둔 집안답게, 장례식도 매우 유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문상객들이 ‘이게 장례식이야?’ 하며 놀랐어요. 우리는 아버지가 좋은 데 가셨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도전정신으로 스쿠버에 더 열중
“알아서 해라. 단, 재밌게 살다 가라”고 말하는 강골과 기백이 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만큼, 홍요섭은 외면의 신사적인 이미지와 내성적인 인상과는 정반대로 단련된 사람이었다. 그가 방송계와 친해질 수 없는 것 또한 자신의 기준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프로그램에는 나갔지만 겹치기 출연은 거절했다. 예전에 예능 프로그램에 한 번 나간 적이 있는데 나가보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오버해야 해서 다시는 안 나갔다. 밤무대도 그의 성정과는 맞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산을 타고 오지 여행을 다니며 다이버가 됐다.
“아버지 말씀을 생각해보니 갇혀 지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이 200년 살면 모를까. 다양한 걸 해봐야지. 팔라우에 조그만 집을 갖고 있었어요. 드라마 제의가 들어와도 다이빙 약속이 있다고 거절할 정도였죠.”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시작했던 그의 다이버 생활은 45세까지 20여 년가량 이어졌다. 그런데 나이가 들자 조금 힘들어졌다. 그때부터 골프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제대로 커리큘럼을 배워보자 하고 미국으로 가서 고덕호 프로와 함께 생활했죠. 시니어 프로 골퍼 자격까지 얻었어요. 그런데 그때 무릎에 문제가 생겼죠.”
골퍼의 삶에 찾아온 좌절
프로 자격까지 획득해 골프 선수로서의 미래도 생각할 수 있었던 시기, 드라마 촬영을 하던 중 무릎이 시큰시큰하더니 확 주저앉는 일이 벌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많이 해서 무릎이 상했기 때문이다. 큰 수술을 한 뒤 재활했지만 골프 선수로서의 미래는 어렵게 되었다.
“회사로부터 2년간 지원을 받기로 했는데, 2년 차에 주저앉은 거죠. 그래서 많이 좌절했어요. 화가 나서 골프대를 쳐다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십자 인대 말썽으로 좌절해 있던 그에게 재활치료 차원에서 의사가 승마를 권했다. 2007년의 일이었다.
“말? 돈 많은 사람이나 타고, 영화에서나 보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죠. 아니라는 거야. 승마는 허리 아프거나 고지혈증이 있는 사람한테 권하기도 한다는 거예요. 알았다 하고 화성 구석으로 가서 시작했어요. 누가 올려주면 올라가고 손잡고 끌어주면 덜렁거리며 가고…. 그런데 승마를 하니 가장 먼저 바뀌는 게 변이었어요. 장이 좋아지고 살이 조금씩 빠지니까 ‘괜찮네,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싶었죠.”
한 번 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집념
그로부터 14년여가 지났다. 그는 여전히 승마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젠 승마 코치이자 마사회 홍보위원으로도 활동한다. 또 누구보다 열정적인 승마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애마 이름은 ‘아줌마’. 올해 열여섯 살로 전성기는 지난, 사람으로 치면 중년쯤 되는 말이다.
“독일에서 승마하는 사람에게서 구했어요. 그 사람이 ‘여자처럼 대하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막막했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당근은 쓰다듬으며 줘야 먹고, 엎드려 있을 때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지도 않아요. 우아한 성격인데, 함께 지내면서 여자가 이렇구나 싶었어요. 말에게서 많이 배웠죠.”
사람들은 말이 제멋대로 움직이면 말에게 문제가 있어 그러는 줄 착각한다. 그러나 그는 말이 잘못 행동하는 건 다 기수 탓이라고 말한다.
“승마는 착석부터 잘해야 해요. 말 위에 타면 겁이 나니 고삐를 잡아당기는데, 앉아 있는 걸 잘해야 말에게 부담을 안 주거든요. 달리기는 한두 달 하면 누구든 할 수 있어요.”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이지만 승마의 진정한 매력은 교감에 있다고 한다.
“말은 타는 것이 아니고 말이 나를 태워주거든요. 말의 컨디션을 살피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말과의 즐거움과 기쁨을 배우고 나니 사람과의 관계, 삶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깨닫게 되더군요. 승마가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욕심을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도 했다고.
“승마는 제 인생의 마지막 스포츠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진짜 운동할 사람만 하게 되었거든요. 5~6년 전부터 말을 탄다는 얘기가 없어졌어요. 대신 운동했느냐고 물어봐요.”
그가 인상적으로 보는 현상은 젊은 부부들이 승마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돈은 꽤 들어도 주말 이틀 동안 승마로 운동을 하면 다른 스포츠를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 중엔 아예 마주가 되려고 말 값을 알아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도중 자신의 말 ‘아줌마’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보여줬다. 걸음걸이에서 다른 말들과는 구별되는 비범함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문외한이 봐도 멋있는 그의 말을 보니 그가 말에 빠져든 이유가 단숨에 체감됐다.
정치 입문 권유도 있었으나…
무릎 수술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 비슷한 시기에, 그의 삶을 바꾼 비사(祕事)가 하나 더 있었다. 정치와 관련된 일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위치의 사람에게 정치계의 유혹이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과거에 국회의원 영입 제안이 왔었죠. 그런데 보니까 정말 황당한 사람들이 국회의원 후보로 나오더라고요. 이건 아닌 거 같다 싶어서 사양했죠. 그런데 제가 무릎을 다쳤을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선출돼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죠. 그때 방송 유세에서 마지막 지지 연사가 저였어요.”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속사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빈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에게 방송에서 지지 연설을 해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정당인이 아니고 정치하는 사람도 아닙니다’라는 전제를 하고, 연설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죠. 그리고 그걸로 녹화를 하기 위해 방송국으로 갔어요.”
그런데 막상 방송국에 도착하니 문제가 생겼다. 논조가 바뀐 원고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읽어보니 완전히 정치인들이나 하는 말들이었다. 녹화 당일이라는 급박한 타이밍에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BBK사건이 터졌기 때문이죠. 상대를 물어뜯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원래 원고대로라면 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걸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거였죠. 그런데 당장 정치인이 될 판이었어요. 함께 온 와이프와 친구에게 보여주니 ‘이거 하면 큰일나겠다’고 걱정을 하더군요.”
그를 섭외한 쪽에서 설득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었다’.
“정치를 할 거면 벌써 했지.(웃음) ‘못합니다’ 하고 돌아왔어요. 나중에 보니 4~5년 속 썩을 뻔했죠. 그래도 BBK사건 전의 원고는 논조가 참 좋았는데, 아쉬워요.”
채운 것들 덜어내며 달관에 이르다
홍요섭에게는 달관한 사람의 넉넉함이 있다. 세계 곳곳의 오지를 여행하고 바다를 사랑한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얻게 된 태도다.
“어지간한 건 탁탁 털어버립니다. 당하기도 많이 당했어요. 변호사 친구들이 난리쳤지만 고발하기 싫어서 넘어간 일도 있죠. 그런데 돌아보니 그게 내 게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죠.”
그 역시 요즘 나이 들면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석모도다.
“인천 석모도에는 강도 있고 낚시도 잘되고 물 좋은 온천 단지도 있어요. 거기에 조그맣게 집 짓고 사는 것도 좋죠. 장어를 키워보고도 싶어요. 난 물을 좋아하니까. 장어를 키우는 게 손이 많이 간답니다. 그럼 계속 일할 수 있으니까, 재밌잖아요? 흙 묻히고 사는 일.”
그는 자신을 아무도 기억 못하면 좋겠다고 담담히 말했다. 자신이 작정한다고 사람들 기억에 남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가 사랑하는 물과 바람처럼, 삶을 사랑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그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그의 시원시원한 대답에는 미련이 없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은 길만을 걸었기에 잘못되지 않았고, 돈과 명예로도 살 수 없는 그 진정한 자유를 즐기는 그가 다시 한번 부러웠다.
주민을 위한 작은 복지관 커뮤니티 센터
지난 12월 23(월) 오후 7시부터 서울시 송파구 위례 신도시 안의 도심형 요양원인 KB 골든라이프케어 위례 빌리지 커뮤니티 센터(주민 사랑방)에서 지역주민을 위한 특강이 있었다.
올해 9월에 개관한 커뮤니티 센터는 1층에 위치한 넓고 채광이 좋은 공간으로 지역사회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개관 후 주민들을 위한 첫 번째 강좌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초, 중, 고생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포커스를 맞추고 초빙 강의를 준비했다. 초빙 강사는 강남대학교 입학 사정관으로 활동 중인 박주용 강사였다.
맞벌이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사는 지역 특성상 주민들의 자녀교육에 관한 관심과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강좌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주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란?
우리는 지금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급변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정보혁명 시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부른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아이들의 바람직한 교육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의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 증권가에서 트레이더들의 대량 해고 사건이 있었다. 평균 연봉이 4억~5억을 호가하는 트레이더들이 하는 영역을 ‘캔쇼’라는 인공지능에 맡겨놓으니 인간 600명이 한 달 걸리는 일을 켄쇼는 혼자서 3시간 20분 만에 끝내버렸다. ‘켄쇼’는 인간보다 더 계산을 빠르게 처리하는 한편 그만큼 비용도 절감되는 효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바둑에서 알파고, 한돌 같은 인공지능이 나타나 한순간에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향후, 전문적인 분야로까지 인공지능이 확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의사보다 인공지능 로봇이 더욱 정확하게 병을 찾아내고 치료 방법까지 제시할 수 있는 시대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학교 교육의 진짜 문제는 상대평가 서열화이다
우리 교육의 현실은 시험점수를 잘 받고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 학생들이 무한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통해 모든 문제에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인생에 있어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즉,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시해야 한다. 부모가 이 문제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세상에 답이 정해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배우지만 현실에서는 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가르쳐 줘야 한다.
그리고 진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진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독서다. 인간의 내면적 가치를 위해서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 ‘희망’을 찾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내면적 가치를 위한 공부는 독서이다
독서가 왜 좋은가? 독서를 통해서 깊은 사고와 문제의 연결방식을 알아갈 수가 있다.
첫째, 독서는 두뇌의 전 영역을 자극해서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다. 워싱턴 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독서는 뇌의 17개 영역을 활성화’ 시킨다고 한다.
둘째, 간접경험을 통해 다양한 관점
➀ 뇌의 측두엽은 언어의 습득 및 1차 감각을 감지한다. 즉 뇌의 신경세포는 실제
일어나지 않아도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➁ 소설을 읽고 마치 주인공의 마음을 느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공감할 수 있다.
➂ 단순히 공감을 넘어,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셋째, 언어발달과 사고의 틀이 형성된다.
➀ 독해력 향상 : 글자가 아닌 글을 읽는 능력을 키워주고 의미 있는 언어를 습득
함으로써 그만큼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진다.
상호 질문 및 토론시간
위례신도시 내에서 자그마한 도서관 관장을 하고 있으며 고2 자녀를 둔 학부모인 김경이씨는 “위례신도시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신도시임에도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 많이 살고 있어 자녀교육에 대한 고민이 깊다”고 하였다. 아이가 좋아하는 바둑을 허락하면서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IT 관련 업무를 하고 있다는 초등학교 3, 5학년 자녀를 둔 직장인 김동희 씨는 IT 기술의 가장 핫한 분야는 딥 러닝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아이들이 어떤 쪽으로 공부를 해야 보다, 좋은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6학년 딸이 책을 너무 안 봐서 걱정이라는 김경아씨 부부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독서를 권유했지만 별 효과가 없어 그 방법이 궁금했다고 질문했다.
박주용 강사는 답변을 통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책인 ‘해리포터’를 같이 읽으면서 중간중간 궁금증을 유발할 만한 대목에서 멈추면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방법”도 좋은 방법의 하나라고 제시했다.
저녁 7시에 시작한 강의와 토론은 9시까지 분위기가 후끈할 정도로 가열되어 토론이 이어졌다. 이구동성으로 모두가 유익한 강의였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도 유익한 강좌가 주민 사랑방에서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먹는다는 게 요즘처럼 소란스러웠을 때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방송마다 먹방이 지천이고 숱한 맛집 정보와 요리 프로그램이 판을 친다. 셰프들이 방송 채널만 돌리면 나타난다.
연말이 가까워져 오니 요리 얘기가 더욱 늘어난다. 지난 가을 코엑스몰 메가박스에서 봤던 세계적인 셰프의 영화가 떠올랐다.
... ‘알랭 뒤 카스: 위대한 여정’ ....
이 영화의 주인공 알랭 뒤 카스는 프랑스의 셰프다. 요리 프로그램으로 많이 알려진 박준우 셰프의 말을 빌리자면 “프랑스와 양식 문화를 얘기할 때 ‘알랭 뒤 카스’를 빼놓고는 진행할 수 없는 큰 존재”란다.
‘최연소 미슐랭 3스타 획득’, ‘최초 트리플 3스타 달성’ 등 화려한 미슐랭 스타 이력만 보아도 호기심이 당겨지는 인물이다.
최정상에 올라서도 요리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와 세상의 모든 맛을 보려는 집착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스 남부 농가에서 태어난 알랭 뒤카스는 요리 재료 본연의 맛, 자연주의를 지향한다.
최고의 요리를 시식한 후 그는 말한다. "완벽하다. 그러나 그 완벽을 넘어서는 맛을 내야만 한다... 맛의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하다. 디테일이 모여 전부가 된다" 라고 촌철살인의 평가를 한다. 최고는 완벽함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완벽을 뛰어넘는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만족하지 못하는 장인 정신이 깃든 그의 선구자적 집념은 날마다 고군분투하며 산다.
2015년 9월 프랑스 정부가 베르사유 궁전을 두고 호텔 사업자 공모전을 열었다. 프랑스 국내외에서 20여 개 업체가 참여했고 호텔 레스토랑 운영권은 ‘알랭 뒤카스’에게 돌아갔다. 셰프 필생의 프로젝트를 맡게 된 알랭 뒤카스는 2년간의 준비에 돌입한다.
자연 가까이에서 구한 로컬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그는 영화 속에서 최고의 재료로 맛있는 추억을 선사하는 ‘파인 다이닝’을 선보이고자 미식 로드 트립을 떠난다.
런던, 홍콩, 베이징, 도쿄, 마닐라, 파리, 뉴욕, 리오, 몽골 등 미식 여행의 행보가 다양하다. 그 여정 중에 그의 철학과 예술적 표현, 미식 탐험의 집념을 보여주는 요리 천재의 면모를 보게 된다.
텃밭에서 들판에서 바닷가에서 제철 식재료를 즉시 냄새를 맡고 질감을 느끼고 날 것을 그대로 씹어먹어 보며 세상의 모든 맛을 본다. 더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자연 풍경이 힐링 미식 여행으로 데려가 주는 볼거리이기도 하다. 그렇게 직접 경험을 통해 가치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요리의 거장답게 세계적인 수뇌부들과 함께 있어도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아우라가 있다. 대통령과 함께 있어도 밀리지 않는 당당한 모습이 멋지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프로페셔널은 거장이라는 호칭이 잘 맞는다
날카로운 칼로 철갑상어의 배를 가르며 복권을 긁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요리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다. 또한, 누구도 감히 가 볼 수 없는 세계 최고 식당의 건축현장을 보는 건 마치 궁전을 짓든 지나칠 정도로 거창하다.
이 영화에서 아쉬웠던 부분. 알랭 뒤 카스의 사생활을 가려준 것은 그렇다고 쳐도 셰프의 이야기인 만큼 요리와 요리하는 모습과 맛있게 먹는 화면이 적어서 조금 아쉬웠다. 기대한 것이 많아서인지 80분은 너무 짧았다.
그런 아쉬움이 있어도 여전히 그 화면들이 내내 떠오른다. 여운이 긴 영화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육개장은 ‘오래된’ 전통음식일까? 전통음식이지만 ‘오래된’ 음식은 아니다. 육개장의 역사는 불과 100년 남짓이다. 늘려 잡아도 200년이 되지 않는다.
“육개장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다수설이다. 그럴까? 부분적으로는 맞다. “육개장을 외부 공간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대구의 식당 혹은 시장통이었다”는 표현이 맞다. 이미 민간에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그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 등지에서 처음으로 상업화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육개장은 ‘우육(牛肉, 쇠고기)+개장국[狗醬羹, 구장갱, 개고깃국]’이다. ‘우육개장국’이 육개장이 된 것이다. 원래 된장 등을 푼 물에 개고기를 넣고 국을 끓였다. ‘구장갱’ 혹은 ‘구장’, ‘개장’, ‘개장국’이라 불렸다. 그러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고 마치 개장국처럼 끓였다. 그래서 육개장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개장국 대용품이다. 이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으로 나온 것이 바로 지금의 육개장이다.
역사는 100년 남짓
왜 대구일까?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효율적인 한반도 약탈을 위해 경부철도를 건설했다. 만주의 물자를 한반도를 세로로 질러 부산항에 운반해 배로 일본으로 보냈다. 군산, 목포, 여수, 부산이 모두 만주 혹은 한반도의 목재, 쌀, 밀 등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항구들이다. 대구는 경부철도의 주요 거점 도시다. 철도와 더불어 도시가 커지면서 시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을 위한 식사 공간이 필요해졌다. 식당이나 허름한 천막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驛院) 제도와 주막(酒幕)이 있었다. 역원은 초기부터 있었던 공식 숙박 시설이다. 사용자는 공무원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원 제도를 통해 공무원의 이동을 도왔다.
주막은 사설 기관이다. ‘막(幕)’은 집이 아니다. 주막의 시작은 정식 건물이 아니다. 비바람을 가리려고 천막을 쳤다. 임시, 가설 시설이다. 이곳에서 목을 축일 만큼만 술을 팔았다. 사설, 불법 시설물이다. 조선시대 후기, 숙종시대를 거치며 이들 주막이 슬슬 공식화(?)된다. 공무원들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역원을 이용한다. 민간 여행자들은 이용할 공간이 없다. 결국, 주막이다. 주막은 조선시대 후기 ‘탈법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눈감아주는’ 정도의 공간이 확대된다.
역원과 주막에서 개장국을 내놓았다. 유교는, 사람이 여섯 가지 가축을 먹도록 허용했다.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 소는 금육(禁肉)이다. 농사의 도구라 식육을 엄하게 금했다. 살아 있는 말의 가격은 도축한 말고기 값보다 비쌌다. 말을 도축할 일은 없었다. 교통, 통신의 수단이지 고기로 먹을 일이 아니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돼지도 마찬가지. 한반도의 춥고 건조한 기후는, 습하고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돼지와 맞지 않는다. 돼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과 ‘먹이’를 두고 다툰다. 사람이 먹는 걸 먹는다. 사람이 먹을 것도 귀했던 시절이다. 돼지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개, 닭이 만만했다. 닭은 개체가 적다. 여러 사람이 몰려드는 역원, 주막에서 닭은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개다. 개고기, 개장국은 보양식이 아니라 늘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육개장의 전신 개장국
조선시대 후기. 역원과 주막에서 널리 사용했던 개고기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중국 청나라 때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 식용을 피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개의 지위(?) 때문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수렵, 기마민족이다. 개는 사냥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인간은 동반자, 동료를 먹지 않는다. 유목, 기마민족의 청나라가 개고기 식용을 피한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청나라를 세운 태조와 개의 인연 때문이다. 청나라(후금)를 세운 이는 누르하치(Nurh achi, 努爾哈赤, 1559~1626)다. 개가 누르하치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줬다고 전해진다. 청나라의 통치자는 만주족이다. 이들이 개를 먹지 않자 피지배자인 중국 한족들도 따른다.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피한 이유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1637)을 겪으며 조선은 견디지 못할 치욕과 약탈을 당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증오, 멸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 등 명군들은 청나라를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바꿨다. 서양 문물들이 급격히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사절단으로 중국에 간 조선 사신단은 발전한 중국과 서양의 문물을 중국, 북경에서 본다. 북학파도 생긴다. 명나라에 대한 막연한 호감,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엷어지고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 흠모가 생긴다.
‘문명 개화된 중국,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의 짓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유원(1814~1888)은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남겼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은 19세기 후반, 고급 관리의 시각으로 본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상이다. ‘임하필기’에 조선시대 후기,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연경(북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두 사람이 등장한다. 심상규와 이종성이다. 심상규는 개고기 식용론자이고, 이종성은 식용 반대론자다. 두 사람 모두 이유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이종성은 심상규보다 더 앞선 시대 사람이다. 그는 개고기가 먹을 음식이 아니라 하고 심상규는 복날에 삶아 올리라 했다. 영조, 정조시대를 지나며 조선시대의 사회는 개고기 식용과 반대가 뒤섞여 있었다. 민간도 마찬가지. 문제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의 음식이다.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맞이에 음식은 필수다.
혼례와 제사에도 국수가 필수적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언제 결혼하느냐?” 대신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라고 묻는 이유다. 일반 인들은 결혼식에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喪)’을 당했을 때는 음식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급작스럽게 닥치지만, 손님맞이 음식은 필요하다. 지금도 상가에서 늘 육개장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시작은 개장국인데 피하는 이들이 늘어나 어느 날부터인가 육개장으로 바뀐 것이다.
대구 시장통에 등장한 ‘육개장’
‘대구가 육개장의 시작’은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 민간에서 꾸준히 육개장을 먹었다. 이 음식이 처음 식당에 등장한 것이 ‘대구 육개장’이다.
사족 하나. “왜 육개장은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쓰고 붉을까?”에 대한 엉터리 대답 둘.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색 음식을 만들었다! 엉터리다. 상가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셔서 먼 길 떠나기 전에 대접하는 자리다.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 ‘벽사(辟邪)’의 붉은색이다? 도대체 상가에서 혼령을 모시자는 건가, 아니면 혼령을 쫓자는 건가?
또 하나 엉터리. “대구는 분지라서 춥다. 그래서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쓴다?” 틀린 말이다. 대구보다 추운 지방은 훨씬 많다. 남쪽치고는 추운 편이지만 서울 이북보다는 춥지 않다. 분지? 대구만 분지도 아니다. 다른 지역에도 추운 분지 많다.
육개장의 붉은 고춧가루는 개장국의 영향이다. 개장국은 누린내가 심해 매운맛으로 감춘다. 향신료 사용량도 많다. 개장국이 육개장으로 발전하면서 고춧가루, 붉은색을 본뜬 것이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캠핑카 혹은 카라반을 직접 끌면서 여행하는 것이 당장 어렵다면 편안하게 카라반 캠핑을 체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캠핑의 참맛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훌쩍 떠난 곳은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여주 카라반’. 그런데 하필 비올 확률이 100%. 제13호 태풍 링링의 영향권에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망설였으나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카라반에 들어가 체험하는 것도 신나는 일이기에. 때론 100% 비 소식에도 맑은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의 진미. 하늘의 이치인 듯 상황에 적응하며 즐겨봤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카라반이나 캠핑카 등 바퀴 달린 것을 가지고 하는 캠핑을 알빙(RVing)이라고 부른다.‘카라반’은 주거시설을 갖춘 컨테이너를 차에 견인해서 끌고 다니는 것이고, ‘캠핑카’는 자동차 안에 캠핑을 할 수 있게 꾸민 것. 정식 명칭은 모터홈(Motorhome)이다.
카라반 파크와 카라반 체험장
외국의 경우 사막 혹은 너른 대지를 관통하는 도로 구간에 카라반 파크가 있다. 카라반, 캠핑카를 몰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여장을 푸는 곳 말이다. 카라반에서 장기투숙하면서 인근에서 일하는 사람, 그곳에 생활 터전을 잡고 대가족을 이뤄 사는 이들도 있다. 카라반에 관한 통상적인 경험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많이 한다. 그것도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총격 신 배경에 자주 카라반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30대 초반 3~4개월 정도 카라반에서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호주 퀸즐랜드 주의 농장이 많은 칠더스라는 곳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일하던 때 ‘슈가볼’이라는 카라반 파크에서 살았다. 구식이었지만 카라반에는 화장실 시설을 제외하고 소파와 주방, 개별적으로 분리된 침실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인데 한국에서는 카라반 구경이 쉽지 않았다. 살면서 접해보지 않았을뿐더러 즐겨 보던 영화의 배경이기도 했으니 늘 궁금증은 하늘을 찔렀다. 상상해보지 않았던 생활이었기에 그때의 카라반 생활은 낭만적인 풍경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도 카라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여주 카라반은 외국의 사례처럼 오토캠핑족(차를 가지고 다니는 캠핑족)을 위한 장소는 아니고 말 그대로 카라반이 궁금한 이들에게 호기심을 해소해주고 이색적인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해주는 체험 장소다. 4000여 평 규모의 대지에 평수와 형태가 다른 다양한 종류의 카라반이 초록빛 잔디와 나무가 둘러싸인 곳에 줄지어 서 있다. 나름 카라반 파크 현장을 우리 실정에 맞게 재현해놓았으며 각각의 카라반에 개별적으로 데크와 어닝도 장착했다.
카라반을 이용해보고 마음에 들면 구매도 가능하다고. 어쨌거나 카라반 여행을 꼭 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니 마음 편하게 분위기를 즐기면 그만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체험을 떠나 일생일대의 결정을 할 수도 있는 중요 장소인 셈. 카라반을 엇비슷하게 본떠서 만든 카라반형 숙소 ‘아크하우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도로 위를 달릴 수 있는 카라반이다.
여주 카라반은 미국의 포레스트리버 사의 카라반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들여왔다. 가장 큰 평수로 알려진 12평 규모의 ‘체로키 39KR’과 두 번째 규모인 ‘체로키 Q2’는 이곳이 아니면 체험하기 어렵다.
기자와 지인들이 묵었던 ‘체로키 Q2’에는 샤워장이 딸린 화장실이 앞뒤로 두 개나 있다. 일단 이곳에서는 이동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카라반 내에서 설거지나 샤워를 할 때 불편함은 없다. 뒤쪽 샤워장은 작게나마 욕실도 꾸며져 있지만 사우나를 즐길 만큼의 규모는 아니다. 퀸 사이즈 침대는 물론 대형 TV, 냉장고, 소파와 주방까지 알차게 들어차 있다.
간이 주거시설이라는 느낌을 넘어 가정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 4인 이상의 가족이 함께 와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카라반 안에는 곳곳에 수납장이 마련돼 있어 요긴하게 쓰인다. 특히 도로를 달릴 때 흔들림을 생각해 수납장 안에 꼼꼼하게 물건들을 챙겨 넣으면 떨어져 깨지거나 흩어질 일이 없다. 이곳 카라반의 수납장은 여닫이문을 달았지만 호주에서 이용했던 카라반 수납장 문은 미닫이였다. 차량 이동 시 충격에 의해 문이 열릴 수 있어 미닫이문으로 돼 있는 거라고 영국 친구가 설명해줬다. 체험장에 있는 시설은 불편함을 덜기 위해 여닫이문을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비와 바비큐가 제법 잘 어울린 밤
주룩주룩 한없이 비가 내리던 그날, 카라반에 비치된 밥솥에 밥을 짓고 캠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바비큐는 실외에서 준비했다. 실내에서 연기를 피우면 경보장치가 울리기 때문에 내부에서는 굽는 요리를 할 수 없다고. 다행히 카라반 입구 앞 너른 공간을 어닝으로 가려줘 비를 피하면서 바비큐를 할 수 있었다.
카라반 체험을 함께한 지인이 숯불에 구워 먹을 고기와 쌈 채소 등을 알뜰하게 준비해와 고마웠다. 곧 갖가지 채소와 구운 고기가 상 위에 올랐고, 우리는 못다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듣고, 각자의 새로운 관심사에 귀 기울였다. 공기 맑은 장소에서 좋은 사람과 빗소리를 들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잔잔히 흘러갔다.
10년 전에 캠핑카로 미국 여행을 한 적이 있다는 지인은 “화장실 변기통을 비우고 물관, 전기 연결 등등 캠핑장에 도착하면 귀찮은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 불편함을 없애고 시설을 업그레이드해서 한국형 캠핑카로 변환한 점이 좋은 아이디어 같고 생각 이상으로 편하고 깔끔해서 놀랐다”고 덧붙였다.
피하지 않고 즐겼을 뿐인데 더 따뜻하고 아늑한 저녁시간이었다고나 할까. 비에 옷과 신발이 많이 젖었지만 카라반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운치마저 느껴졌다. 태풍 걱정은 어느새 잊고 비의 낙차가 카라반 외벽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특별한 화음을 밤새 즐겼다.
카라반 생활 경험자가 본 여주 카라반
개인적으로 카라반은 내부 공간이 좁아도 괜찮을 듯싶다. 좀 더 캠핑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집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편안함을 기대한다면 집 밖을 나와 여행할 이유가 없다. 여행자는 자연이라는 더 넓은 공간에 눈을 빼앗겨야 한다. 그래야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주에서 경험한 카라반은 호주에서 이용했던 것에 비하면 호화로웠다. 카라반 내부를 돌아다니는 작은 도마뱀과 독거미, 운동화 속에 숨어 자는 생쥐가 없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외국의 카라반 파크처럼 넓게 쓰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카라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특별했다. 돌아오던 날 아침, 100%의 비올 확률을 뚫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