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에 올라 도산서원 이정표를 따라 달린다. 도로 오른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이루는 안동호를 끼고 돌다 보면 마치 물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안동호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가르며 마치 신선 물놀이하듯 안개 낀 안동호를 따라 도산서원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가 오는 날은 문화재를 방문하기 좋은 날이다. 평소 왁자지껄한 소음 없이 호젓하게 거닐며 옛 역사를 음미하며 앞으로의 발걸음을 다잡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한 대 없다. 오늘의 방문은 무척 만족스러울 듯하다. 입구로 들어가는 길도 오가는 이 없이 고즈넉하게 우리를 맞았다. 지금에야 이렇게 길이 넓었지 퇴계 이황 선생에게 수학하던 서생들은 좁다란 오솔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학문에 정진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참 편한 세상에 산다는 미안함이 든다.
도산서원 입구 오른쪽 강 건너에 작은 정자가 보인다. 안동호로 흐르는 물길 가운데에 있는 작은 정자다. 섬이라 하기에는 작지만 달리 뭐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이 정자가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는데 시사단(試士壇)이라 불린다. 1792년 음력 3월에 정조가 도산서원에서 치른 과거시험을 기념해 단을 쌓고 전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당시 과거에 응시한 이가 너무 많아 장소를 도산서원으로 하지 못하고 그 아래 낙동강 모래강변에서 시험을 치렀다는데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만 363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 너도나도 몰빵하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시사단으로 가려면 서원 앞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로 건너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배를 운행한다는데 비가 내리는 평일이라 그런지 배는 있는데 사공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서원만 보고 가야 할 듯하다.
소수서원이 평지에 세워졌다면 도산서원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들이 놓여 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동쪽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건축해 학생들을 공부시키던 서당이다. 그 옆 싸리문은 아직도 보존돼 있다. 이황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 이 싸리문을 밀치고 마루에 올랐을 것이다. 이 문은 유정문으로 불리는데 ‘그윽한 곳에서 수도하는 사람은 바르고 길할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부쩍 서원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서원의 핵심 공간이라 할 강학당인 전교당이 현재 보수 중이라 진입이 금지돼 있다. 전교당 현판은 선조의 명령으로 한석봉이 직접 썼다는데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도산서원을 느긋하게 살펴보고 나왔지만 사실 오늘 방문의 주요 목적지는 인근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으로 나오면 퇴계 종택과 이육사 문학관 가는 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육사 본명은 이원록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아래는 두산백과가 이육사를 설명해놓은 글이다.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가 264. 이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썼다. 또한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인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 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고,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 육사 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다.“
이육사가 이황 선생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 배웠던가? 선생의 독립운동 여정을 자세하게 배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되는 ‘청포도’라는 시 구절뿐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빗줄기가 휘몰아쳐 잠시 고민을 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는 문학관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은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2층 건물이다. 잠깐 돌아보고 오자 했던 계획은 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문을 닫을 때까지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머물렀다. 우리 일행은, 격렬했지만 여리고 순수했던 이육사의 삶의 흔적을 느끼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돌아보며 마치 질풍노도의 시대를 보냈던 20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간 듯 흥분하고 목메면서 이육사의 삶을 하나하나 경험했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할머니(80)가 기억하는 아버지 이육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헤어질 때 3세에 불과했으니 기억이 없는 게 당연할 텐데 어떤 한 순간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아버지를 기억한단다. 1943년 아버지가 구속돼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날이었다.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이고 용수(죄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싸리나무로 만든 둥근 통)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푹 가린 아버지가 건넨 마지막 말, "아버지 다녀오마."
올 초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에서 안동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 이옥비 할머니를 인터뷰한 영상이 있다. 유튜브에 이 영상이 남아 있어 가끔 들어가서 본다. 문학관에서 선생의 유품들을 돌아보자니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아이를 용수 속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졌을 아픔이 전해진다.
문학관은 선생의 작품들을 연대기별로 정리하고 전시해놓았지만 작품 활동보다 더 치열했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술도 잘돼 있다. 특히 이육사 선생이 당했던 처참했던 고문 현장과 피로 얼룩진 도포, 감옥 수감 도구들도 전시돼 있어 악랄하고 광폭했던 일본 경찰의 만행을 느낄 수 있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육사의 작품들은 시와 평론, 시나리오까지 다채롭게 정리돼 있다. 마지막까지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이육사. 그를 청포도의 시인으로만 기억해왔던 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안동으로 달려가 그의 문학관을 방문해봐야 한다. 연대기로 서술돼 있는 각종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며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목이 메어오는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될 터이니.
"말도 마. 지난번 네가 조언한 대로 했다가 딸하고 싸워서 요즘 말도 안 해."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가 작정한 듯 하소연을 시작했다.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난 모임 때 황혼육아가 힘들다고 토로하는 그녀에게 딸이 심정을 모를 수도 있으니 솔직히 말해보라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던 해 열한 살 나이 차 나는 남편과 결혼했다. 중매나 마찬가지였는데 친정아버지가 평소에 눈여겨보다가 합격점을 준 사람이란다. 부모님이 생각하는 사윗감의 첫 번째 조건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이었고 그녀의 남편은 당시 안정된 사업체의 대표였다. 스무 살이면 참 어린 나이이지만 그 시절에는 이런 일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남동생만 둘 있던 그녀는 싫다는 말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연년생으로 딸 둘을 낳았다. 그때부터 한 남자의 아내와 두 딸의 엄마로 살았다. 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다 자라 독립하면 그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하면서 살아야지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 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과 대기업에 각각 취직했다. 일이 척척 풀려 무리 없이 둘 다 결혼도 했다. '이제는 자유다!'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곧 손자가 태어났다. 딸의 직장은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 아기가 생겼다고 그만두기엔 너무 아까운 곳이었다. 딸은 당연히 '친정엄마가 봐주겠지' 기대를 했고, 결국 손자 돌보는 일은 그녀 차지가 되었다.
첫손자가 어느 정도 자라 편해질 무렵 이번엔 손녀가 태어났다. 손녀도 그녀가 맡아 키웠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는 주말에야 겨우 주어졌다. 처음엔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말에도 아이들을 맡기는 상황이 잦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회식이 있거나 볼일이 있으면 밤늦도록 아이들을 돌봐줘야 했다. 친정엄마이니까 편해서 그러겠지. 한동안 이해도 했다. 그러나 두 딸은 차츰 육아를 그녀가 해야 할 당연한 일처럼 생각했다.
어쩌다 한 번씩 친구들 만나는 낙으로 살았는데 손자들 보느라 모임에 나갈 수도 없었다. 손자를 데리고 나가면 민폐란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는 점점 우울해졌다. 육아에 지치고 딸들을 향한 서운한 마음이 깊어져 결국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모임에서 만난 그녀에게 딸과 솔직히 대화를 해보라고 했다. 그러면 딸도 엄마 마음을 이해할 거라고. 그녀는 딸에게 힘든 이야기를 했고 딸은 결국 휴직을 했다. 그러나 친정엄마를 이해하면서 내린 선택이 아니었다. 딸은 아이를 키우며 보내기엔 자기 인생이 너무 아깝다면서 엄마에게 섭섭함을 내비쳤다고 한다. 그 말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그럼 내 인생은?", "내 자식은 내가 키웠으니 네 자식은 네가 키워!" 했단다. 이후 그녀는 자유를 찾았지만 딸하고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그녀는 두 시간 넘도록 하소연을 하더니 조만간 만나서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마치 네 조언을 들어서 생긴 일이니 이 정도 하소연은 들어주라는 것 같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누군가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육아. 시간이 흐르면 딸도 엄마 입장을 이해할 것이다. 당장은 서운하겠지만 혼자 속으로 곪느니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녀는 얼마 후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네 말대로 하길 참 잘한 거 같아!"
한강을 낀 동네에 이사 와 산 지 이제 스무 해가 좀 넘었습니다. 그러니 한강 둔치를 걷는 일도 그 세월만큼 흘렀습니다. 이제 걷는 일은 제 일상입니다. 호흡과 다름이 없습니다.
걷기는 그 이전에도 제 일상이었습니다. 탈 거리가 드물기도 했습니다만 전쟁이 끝나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저는 읍내에서 하숙이나 자취할 여유가 없어 집에서 학교까지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기간이 두 달 남짓했으니 오랜 일은 아닙니다만 새벽 5시에 집을 나서면 8시쯤 학교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파하면 다시 그렇게 걸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하루에 여섯 시간 남짓을 걸은 셈이죠. 신작로는 지루했습니다. 너무 단조로웠죠. 그래서, 지름길이라고 했지만 그리 시간이 단축되었던 것은 아닌데, 저는 산길로 들어서서 오르내리며 그 긴 길을 걸었습니다. 그 길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요즘 차를 타고 내비게이션에 나타나는 거리로 보면 대략 12.3㎞쯤 됩니다.
그러나 그때 걷던 일은, 실은,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헐레벌떡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달려간 것이어서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자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 탓이겠습니다만 저는 걷는 것이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역시 교통비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에 다닐 때도 종로 5가에서 가정교사하던 신설동까지 늘 걸었습니다. 걷는 것이 그냥 좋았습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걸은 것은 오랜 뒤의 일입니다. 나이가 예순에 꽉 차게 이르렀을 때쯤부터 서서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한강 가에 와서 살기 시작했을 즈음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제 걷기가 제법 그럴 듯한 소요(逍遙)는 아니었습니다.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저를 충동했고, 그래서 걷기라기보다 뜀박질로 강 둔치를 달렸습니다. 저는 한강철교에서 시작해 동작대교까지,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출발한 곳까지, 온 힘을 다해 그야말로 질주를 했습니다. 때로는 두 왕복을 하기조차 했습니다. 겨울에도 온몸이 땀에 젖었지만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몸은 낡아갑니다. 얼마 뒤부터 저는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속보를 하게 되었고, 그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거리를 터벅거리며 오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은 아예 어슬렁거립니다. 바야흐로 소요의 경지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겨우 이제 걷기를 하는 셈이죠.
어쩔 수 없습니다. 낡고 쇠해가는 몸이 저리게 느껴집니다. 이래저래 겪는 상실감이 뚜렷하게 진해집니다. 걸음걸이는 늙음을 드러내주는 가장 뚜렷한 표지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늙었는지 확인하려면 걸어보는 일보다 더 효과적인 측정 도구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슬렁거리는 지경에 이르면서 잃은 것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달리기할 때는 보이는 것이 동작대교와 한강철교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복을 끝내면 그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달리기를 그만두고 속보를 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제가 달리는 길이 보였습니다. 옆의 나무들도 실루엣처럼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마저 그만두고 터벅거리게 되자 하늘도 강의 물결도 내 호흡과 더불어 내 안에 안겼습니다. 나는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낯선 세상을 만나면서 놀랍고 경이로웠습니다. 달리기에서 이룬 성취감으로는 짐작하지 못한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슬렁거리는 요즘에는 바람 소리도 들리고 햇빛의 흔들림조차 보입니다. 물결이 일고 꽃이 피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바람과 하늘과 구름과 꽃과 나무와 그늘과 길이 어우러져 자기네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조차 보이고 들립니다. 제가 그 대화에 끼어들기도 합니다. 낡아간다는 것은 잃어간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꿈도 꾸지 못한 많은 것을 새로 얻어간다는 일이기도 합니다. 걷다 보면 그렇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걸음조차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몸을 가진 인간이 안 아프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망발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걷지 못해 얼마간 한강 둔치에 나가 걷는 일상을 접어야 했습니다. 아쉽다 못해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길이, 한강 둔치에 뻗어 있는 긴 길이, 저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너 기억하니? 서쪽을 향해 걸을 적에 만났던 황혼을! 너 그 신비 속에 안기고 싶다고 그러지 않았니? 내 끝이 거기 닿아 있는데 네가 내 위를 걸었던 것을 기억만 해도 나는 너를 그리 데려다줄 거야! 더 내 위를 걷지 못해도!”
달리기가 아닌 어슬렁거리는 걸음만으로도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넉넉한 지복(至福)의 경지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지난주부터 저는 다시 한강 둔치를 흐느적거리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황혼의 신비로 이끌어줄 길과 더불어 내가 걷는 일이 이리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친정엄마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창극 ‘춘향’을 관람했다. 종일 비가 내린 날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거동이 불편한 엄마를 떠올리며 괜한 일을 벌였나 잠시 생각했다. 엄마는 무릎 관절이 약해서 짧은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겨워한다. 가까이 있는 계단을 두고 멀리 돌아가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 오는 비가 반가울 리 없다.
‘춘향’을 보러 온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생활 속 거리두기' 시행 중이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어선지 극장 입구에서 손 소독을 하고 발열 체크와 문진표 작성을 했다. 객석도 사이사이 띄어 앉기였다. 엄마와 나도 빈 좌석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창극 ‘춘향’은 국립극장 창설 70주년 기념공연으로 5월 14일부터 24일까지 달오름극장에서 하는 국립창극단 초연작이다. 1962년 ‘춘향전’을 시작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며 ‘춘향가’와 인연을 맺어왔다. 국립창극단 유수정 예술감독은 "창극은 동시대의 의식과 감성에 맞춰 변화하되 뿌리인 판소리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춘향’의 극본과 연출은 서편제에 출연했던 배우 김명곤이 맡았다. 김명곤은 6시간 넘는 국립창극단 최초 완판 장막창극 ‘춘향전’ 공연 대본을 직접 썼다. 국립창극단의 신작을 이끌 만큼 판소리에 조예가 깊다고 한다. 국립극장 극장장과 제8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이히 내 사랑이로다/ 아매도 내 사랑아”
엄마가 웃는다. 춘향과 이몽룡이 퐁당퐁당 주고받는 사랑가가 저리 재미있나?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엄마의 웃음소리. 그 행복이 내게로 온다.
평소 깊이 잠들어있을 시간이라 걱정했던 마음은 기우였다. 엄마는 막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아.. 참 잘했구나! 뿌듯하다. 여든셋 황혼의 엄마가 그네를 타는 춘향이라도 된 듯 수줍게 웃는다.
사실 나는 창극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춘향’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마음이었다. 창극이 뭔지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세상에는 그것 말고도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시간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니 창극이건 ‘춘향’이건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이번에 ‘춘향’을 보게 된 것도 순전히 친정엄마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2년 전 갑자기 쓰러진 엄마는 이후 두 달 가까이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때 알았다. 엄마하고 해본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엄마가 일어나기만 하면 많은 것을 함께 해야지 생각했다. 엄마와 하고 싶은 것들, 엄마가 좋아할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국립창극단의 ‘춘향’도 그런 맥락이었다.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았고 효도 한 번 더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보게 된 ‘춘향’은 기대 이상이었다.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온 힘을 다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창극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춘향의 지고지순하면서 당찬 모습도 나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이 한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땀을 흘렸을까? 마음이 잠시 숙연해졌다.
이소연과 더블 캐스팅된 춘향 김우정의 열연은 저러다 성대가 나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엄마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집으로 돌아올 때 "목이 남아나지 않겠더라" 하고 말했다. 표정에 걱정이 그득하다. 자식이 여섯이나 돼서 그런가. 엄마는 평소에도 소소한 걱정이 많다.
“엄마, 다음에 창극 하면 또 오자. 그리고 영화도 보러 가자” 했더니 끝나기 무섭게 “알았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엄마도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그저 시시 때때 맛있는 밥이나 사드리면 되는 줄 알았다. 하긴 누가 챙기지 않으면 엄마 혼자 어찌 올까.
나는 창극에 대해 평을 할 만큼의 지식이 없다. ‘춘향’의 배우들이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말할 입장이 못 된다. 하지만 분명히 아는 건 있다. 엄마가 행복해하는 것은 확실하다. 엄마와 내가 신나게 웃었으니 무조건 최고다.
춘향을 맡은 김우정도, 이몽룡을 맡은 김준수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동안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하는 배역이 아주 적은 사람들도 다 잘되면 좋겠다.
1972년 선소리 산타령 예능 보유자인 이창배를 사사하면서 국악을 시작해 1974년에 발표한 ‘회심곡’으로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경기민요와 12잡가의 대가 김영임(67). 이후 48년 동안 소리의 길을 걸어온 그녀는 수많은 공연 경험과 자신만의 브랜드 콘서트인 ‘김영임의 소리 孝’를 갖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교육 보조자로서 우리의 소리를 전수하는 데도 열중하고 있다. 케이팝의 세계적 성공과 세대를 뛰어넘은 트로트 붐 등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재, 우리 음악의 대표 주자 국악의 아이콘 중 하나인 김영임을 만나 국악인으로서의 삶, 소리의 존재 이유를 들어봤다.
김영임은 자신만의 브랜드 콘서트를 갖고 있는 드문 국악인이다. 그녀는 매년 5월이 되면 국내 최초의 국악 뮤지컬인 ‘김영임의 소리 孝’ 공연을 한다. 그러나 벌써 20여 년을 훌쩍 넘겨 계속되며 그녀의 브랜드가 된 ‘김영임의 소리 孝’이지만 올해는 볼 수 없다. 코로나19 때문이다.
“50여 년 동안 국악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공백 기간이 긴 건 처음이에요. 5월을 준비하고 시작하다 보면 1년이 금방 가곤 했는데…. 그런데 반대로 보면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저를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공허함이 좀 사그라지더라고요. 넘어진 김에 쉬었다가 간다고 하잖아요.”
트로트에 이어 국악 대세도 오지 않을까
여전히 그녀의 일상을 지켜주는 것은 다름 아닌 소리다.
“전라도 쪽에 ‘편’ 소리가 있듯 경기 소리에는 경기 잡가가 있어요. 장구 하나를 두고 6박 장단으로 부르는 소리인데, 열두 개를 다 하려면 네 시간 정도 걸려요.”
소리를 하고 싶어지면 혼자 방석을 깔고 앉아서 장구를 치며 경기 잡가 열두 바탕의 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최근 화제인 TV의 트로트 프로그램들이 있다.
“요즘 트로트가 대세인데 제가 트로트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잖아요. 이미자, 은방울 자매, 문주란 씨 등등…. 학교 다닐 때 남진 씨 좋아했던 기억도 나고. ‘미스터 트롯’ 보면서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트로트를 잘할 수 있나 싶기도 하고. 옛날에 KBS1 음악 프로그램 ‘빅 쇼’ 무대에서 이미자 씨의 ‘모정’과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를 불렀던 기억도 나고요.”
그녀는 “트로트가 대세이니 앞으로 국악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라며 그런 시간이 조만간에 만들어져서 젊은이들에게 국악도 각광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소리는 운명적으로 다가왔다
김영임과 소리가 만난 것은 꽃다운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처음에는 가족들의 만류로 못하다가 일 년 후 다시 했죠. 많이 반대했어요. 미국에 있는 오빠가 ‘노래는 조금만 하고 미국으로 돌아와서 공부해라. 내가 지원해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에게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구렁텅이로 들어가도 헤쳐 나오겠다’고 말하고 소리를 하게 됐죠. 국악이 너무 좋았으니까요.”
민속경연대회에서 장원을 하고, 스케줄 펑크를 낸 선배 대신 나간 방송 프로그램 PD에게 섭외된 그녀는 국악 드라마 주인공으로도 출연했다. 카메라맨들의 사랑을 받는 미녀 국악인으로서, 지금 시대로 보면 아이돌로서 활동을 하던 그녀는 레코드 회사 섭외를 받아 ‘회심곡’ 음반을 내면서 마침내 대박을 쳤다. 그녀는 그때의 자신을 “행운의 열쇠를 거머쥔 거나 다름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게 무조건 좋은 일만 생기는 게 아니라 했던가. 그런 삶 속에서 그녀의 상처는 점점 쌓여갔다.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마음의 상처가 컸어요. 그런 것도 내 인생의 잊지 못할 일들이죠. 지금은 그런 것들을 다 배움으로 생각해요. 너무 빨리 이름을 얻어서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닐진대….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운 거죠.”
소리꾼의 삶과 한
소리꾼과 한(恨)을 떼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한은 우리 소리의 절절함과 곡절을 그대로 설명해주는 단어이며, 소리꾼이 가진 한이 소리에 담김으로써 그 소리는 완성된다고도 한다. 어린 나이의 성공, 그로 인한 인간관계에서의 상처, 그리고 오랜 시집살이를 해야 했던 전통 사회 여성으로서의 한이 김영임에게는 있는 게 아닐까. 그녀의 남편은 1970년대를 풍미했던 코미디언 이상해 씨. 1979년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그들은 어느새 41년을 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친정에서 일 년 살다가 큰딸이 두 살일 때 시집과 합쳤어요. 그때부터 시어른들과 지냈죠. 저는 장손의 큰며느리였어요. 그런데다 시집 분위기가 가부장적이어서 어른들은 장손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집안 경조사가 있으면 일을 나누지 않았어요. 무조건 큰아들 몫이었어요. 그런 분위기로 인해 우리 부부는 가족들한테 기대지 않고 한 계단 한 계단 열심히 개미같이 일해서 자수성가한 케이스가 됐어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
한은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김영임 또한 그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저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울컥해요. 왠지 모르게 가슴이 텅 빈 것 같아요. 남편과 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럴까, 내 마음을 내가 잘 다스리고 추슬러야겠죠. 저에겐 가야 할 길이 아직 있으니까요.”
그녀가 가야 할 길이란 물론 소리꾼의 길이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자신에 대해 ‘아직까지도 도전하며 뛰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교육 보조자인 그녀가 생각하는 다음 단계는 무형문화재로서의 길이다.
“윗세대 선생님들을 보면 여든이 넘어가면 기력이 안 돼서 노래를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걸 미리 생각하면 너무 두렵잖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싶어요.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며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나이 먹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야겠죠. 그렇게 생각하니 의욕이 사그라지지 않더군요.”
그녀가 지키는 부부의 세계
변치 않는 도전의식을 가지기로 결심한 김영임의 나이는 올해 예순일곱 살, 여덟 살 연상인 남편은 칠순 중반이다. 이제 부부 사이에 알콩달콩한 무언가가 있을 나이는 아니다.
“우리는 어른들과 함께 살아서 스킨십도 못하며 살았어요. 표현도 못하다 보니 그게 굳어졌죠. 기본적으로 남편은 나를 정말 끔찍이 생각하는 거 같아요. 하지만 마음으로 들어와서 편안하게 위로해주는 게 없어요. 나이 먹어서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우습고요.”
그래도 생활의 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며 부드러워진 걸까. 그녀에게 이혼과 졸혼을 선택하는 황혼 부부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어봤다.
“사실 우리 부부도 이혼할 뻔했어요. 그런데 이혼해서 나아질 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자도 여자도 초라해지고…. 그건 아닌 거 같더라고요.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서로가 좀 절충을 해야 하고, 깨지도록 싸워도 끝까지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남편이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그래도 한 가정을 이루고 산 세월이 있잖아요. 해답은 대화에 있다고 봐요. 상대를 존중하는 언행도 굉장히 중요해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니까요. 행복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하죠. 행복하려면 건강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아침 식사는 꼭 내 손으로 만들어서 가족들과 함께 먹고 있어요.”
세월이 흘러가며 더해진 깊이
김영임이 특히 건강에 신경 쓰게 된 계기가 있다. 암이었다.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 때였으니 40대 후반쯤의 일이었죠. 안면마비가 왔고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하고 자궁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일 년에 두 번이나 했어요. 특히 갑상선은 성대 가까이 있어 수술이 여덟 시간이나 걸렸죠.”
어쩌면 소리꾼으로서의 삶을 통째로 잃을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그러나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녀는 되려 수술 후에 너무 감사했다고 말한다. 목소리가 수술 전보다 더 잘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역경, 그리고 굽이굽이 흘려보낸 세월이 그녀의 목소리에 깊이를 더했다.
“20대 때 제가 부른 노래를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꾀꼬리 같은 목소리예요. 서른 조금 지나면서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고… 지금도 20대 시절의 키는 살아 있어요. 그때 불렀던 ‘정선 아리랑’을 그대로 부르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젊은 시절에 대명창들의 노래를 들으면 이해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들의 목소리는 곰삭아서 따라갈 수 없는 소리였다.
“예전에는 못했던 단락 단락 노래의 꾸밈새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되더군요. 이제야 (명창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리는 운명, 노래는 그녀의 멘토
김영임은 살면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첫 번째로 지금까지 놓지 않은 소리를 꼽았다.
“소리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 내 할 탓이다 싶고요. 인간관계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쁜 사람도 좋게 만들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두 번째는 가정을 잘 지킨 거죠.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할머니로서,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내 새끼들은 먹인다’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 거죠.”
그녀는 살면서 친정어머니의 말씀을 두 번이나 어겼다. 소리를 하겠다는 것과 반대한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두 가지 일에서 어머니와 한 약속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노래하면서 잘못 사는 인생은 안 살겠다고 했죠. 그리고 이 남자와 결혼한 뒤 친정에 보따리 싸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어요. 둘 다 지켰죠.”
그녀가 어머니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은 소리의 힘이기도 했다. 50여 년 가까이 만들어진 김영임의 소리는 그녀의 인생과 일맥상통하는 멜로디와 가사가 함께해왔다. 노래는 그녀의 멘토였고 그녀가 잘못 가려 할 때 붙잡아주는 버팀목이었다. 특히 김영임을 대표하는 노래 ‘회심곡’에 담긴 효에 관한 애절한 가사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는 그녀를 느끼게 해준다.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애지중지 기른 정을
사람마다 부모 은공 생각하면
태산이라도 무겁지 않겠습니다.
-‘회심곡’ 가사 중에서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와 내가 마음 쓰는 행동이 틀리면 노래를 버려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럴 수만은 없었죠. 부모한테 후회 없이 효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에요.”
김영임의 소리, 존재의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이 원하는 소리가 될 것
앞으로의 일에 대해 큰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다는 김영임은 공연을 준비하고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결실을 계속 보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티 내고 과시하는 게 싫다는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김영임답게 살아가면서 ‘저 여자 지혜롭게 잘 맞춰서 사는 여자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리고 노래를 하는 사람이기에 ‘대한민국에서 이 사람 소리는 인정할 소리다’라는 말을 듣고 싶죠. 최고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원하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걸 남기고 싶어요. 이 소망이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건 아직 제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요즘 공원, 마트에 가면 아이를 데리고 나온 조부모가 자주 보인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난 데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아이들의 등원, 등교가 늦어지고 학원을 보내기가 꺼려지면서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황혼육아를 하는 조부모는 관절염, 요통과 같은 근골격계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 체중이 4~10㎏에 이르는 아기를 수시로 안아주고, 들어올리고, 씻기는 과정에서 무리한 하중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원래 갖고 있던 질환이 악화되기도 있다.
조부모가 아이를 키운다면 밤에 자주 일어나게 돼 수면에 방해를 받는 일이 많다. 육아로 수면이 부족하고 깊은 잠을 자지 못하면 되면서 고혈압이나 심장질환이 악화되거나, 우울증, 식욕저하, 무기력함일 등 노쇠의 진행이 가속화될 수 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증상이 나타나도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기거나, 자식들이 걱정할까봐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부모님의 건강 점검은 꼭 필요하다.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장일영 교수의 도움으로 부모님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질문을 뽑아봤다.
◇식사는 주로 어떤 걸 드세요?
언뜻 가벼운 안부처럼 들릴 수 있지만 영양관리의 기초가 되는 식사에 대한 질문은 필수다. 특히 아이를 돌보느라 부모님이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아이 음식에는 각별한 신경을 쓰나 정작 본인 식사에선 밥, 김치, 간단한 국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식사의 양이나 질이 좋지 않다면, 꼭 이유를 여쭤보자. 입맛이 없으신 것인지, 씹기가 어려우신지, 삼키기가 어려우신 것인지, 혹은 소화가 안 되는 것인지 확인하자. 약물에 의해 입맛이 없고 경우도 자주 있으니 최근 드시는 약이 많아졌는지 확인하는 게 좋다. 변비도 매우 흔한데, 말씀을 하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시는 어르신이 많다. 변비도 소화불량과 식욕저하의 흔한 원인이니 한 번쯤 여쭤보자.
◇요즘 집에서 아무 일 없었죠?
가장 흔한 치매의 초기 증상은 ‘기억력 장애’다. 증상이 건망증과 비슷해서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치매 초기 증상의 특징은 최근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꾸 깜빡깜빡 했다는 얘기를 하신다면 6개월 이내에 있었던 일을 질문해보는 것이 좋다. 또한 이전과 다르게 성격이 변하거나 판단력이 흐려지는 증상도 치매 초기에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증상이 의심된다면 정확한 검진을 통해 치료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혹시 냄비를 심하게 태웠거나 중요한 외부 약속을 자주 잊게 되면 더 미루지 말고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 검사 후 치매가 아닌 것으로 나와도, 평소 건강관리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최근에 많이 아픈 곳 있어요?
노년층은 살짝 넘어져도 골절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낙상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 바로 집이다. 부모님의 연세가 높은 편이거나 아이를 안고 집안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면 무게중심이 쏠려 넘어지기 쉬우니 각별히 주의하자. 평소에 아프지 않던 허리나 등이 최근에 갑자기 많이 아프다면 골다공증처럼 뼈가 약한 부위가 주저앉아 골절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욕실 바닥은 미끄럽지 않도록 하고 집 안 어두운 곳에는 조명을 설치해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아이를 안고 재우거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자리에서 앉았다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으면 어깨나 무릎관절에도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에 늘 체크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 어떤 약 드시고 계세요?
부모님이 고혈압, 당뇨 등의 만성질환을 갖고 있어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는 경우가 많다면 약을 몇 가지나 복용하는지, 제 시간에 잘 복용했는지, 중복해서 복용하지는 않는지 꼭 질문하는 것이 좋다. 다섯 가지 이상의 약을 복용하실 경우 부작용이 늘어날 확률이 매우 높다. 특히 관절통이나 감기로 약물이 추가되거나 바뀌면서 병이 낫지 않는 것인지, 약물 부작용인지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약이 바뀌고 여러 가지 증상이 더 많아지고 있다면 한번쯤 약물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것이 좋다. 어르신들은 약을 더 많이 드시거나 덜 드시거나 기억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아 더욱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약 봉지에 날짜를 적어놓거나 휴대전화 알람을 맞춰드리면 잊지 않고 제대로 약을 잘 챙겨 드시는 데 도움이 된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김남일 씨(66·가명)는 최근 손자 돌봄을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지난 5월 2일 양재역에서 만난 김 씨는 “은퇴 후 할빠 역할을 한 지난 3년간의 세월은, 은퇴가 아닌 또 다른 노동의 세월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맞벌이 아들의 5살, 2살 손자들을 아내와 같이 돌보러 다녔다. 처음에 아내는 “애들 집에서의 식사와 간식 마련, 청소 등 어려운 일들은 내가 할 테니 당신은 그저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몇 시간 놀아주기만 하면 된다”라고 유혹했다. 그런데 그는 ‘애들과 놀아준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지 몰랐다. 과거 육아 경험이 있던 아내와는 달랐다. “사실 근무시간보다 강도에서 여자들과 차이가 많이 나요. 한 명을 안아주면 또 한 녀석이 울며 보채요. 몇 차례 반복하면 힘이 쏙 빠져요. 달래는 요령도 없고 업는 기술도 부족하니... ” 라고 그는 말했다.
시간 잘 가는 게임이나 TV 시청은 며느리에게 금지 당했으니, 애들과 놀아주는 할빠들의 콘텐츠는 단순할 수밖에 없다. 공놀이, 총싸움, 레슬링 등은 모두 육체적인 활동을 수반한다. 한 시간이면 탈진이 된다. “할빠들을 위한 교육 강좌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거기서 남자들끼리 서로 머쓱하게 마주칠 장면을 상상하니 엄두가 나질 않아요”라고 그는 말했다. 현실과 직결되는 돌봄비도 문제였는데, 며느리가 김 씨의 아내에게 주는 방식이었다.
애들의 간식비 등, 장 보는 비용도 포함되어 있어 구체적인 액수를 밝힐 수 없다는 아내는, 그것을 자신들의 생활비로 사용한다며 그동안 단 한 푼도 김 씨에게 지불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지쳐 가던 김 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외국 여행 다녀온 사람을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자가 격리를 강력히 시행하면서 적당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았으나, 손자 돌봄 거부 시의 후환이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도 김 씨는 나은 편이다. 서울 구로동의 양주석 씨(64·가명)는 아예 병을 얻은 경우다. 양 씨는 유방암 수술을 한 아내와 함께 세 살배기 외손녀를 돌봐주러 다닌다. 건강이 나쁜 아내를 대신하다 보면, 거의 모든 것이 양 씨의 몫이다. “손녀도 나한테 안기는 게 편하니 나만 찾고, 눈치가 빤하니 모든 사항을 저에게만 요구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다가 교직에 있는 딸의 야근이 잦아지면서 양 씨의 허리에 탈이 났다. 아내와 손녀를 동시에 돌보다 생긴 병이었다. 그래도 그간 마음은 편했었는데, 딸이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갈등까지 생겼다. “종일 딸과 같이 있다 보니까, 혼자 애를 볼 때와는 다르게 평가와 감시를 받는 기분이 들었고 또 실제로 잔소리도 많이 들었죠. 나중에는 유일한 낙인 담배까지 끊으라고 요구당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서 불면증까지 생겼다. 그런데도 앞서의 김 씨와 마찬가지로 보상이 없었다. 역시 딸이 아내에게 돌봄 비를 지불하기 때문이다. 그간 아내에게 항의도 해보고 협상도 해봤지만 실패했다. 사업가였던 그는, 생활비를 주는 데에만 익숙했기 때문이다. “사실 따로 통장 입금을 해 주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한 달에 한두 번 아내 몰래 봉투를 찔러 줬으면 해요”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육아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황혼 육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할빠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들은 체면 때문에 혹은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식들 집으로 향하고 있다. 앞의 예에서 보듯이, 은퇴 후의 남자들이 겪는 가정 내에서의 권력 변화라고 하기에는 가혹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 태업이나 파업도 생각해 보았지만 직장폐쇄로 ‘집 나가면 개고생’ 이기에 그러지도 못한단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일부 악덕 부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악용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 할빠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가를 바라고 손자들을 돌보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저 공정하길 바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이 고착된다면, 전국 할빠 연맹이 결성되어 공동 근로의 대가를 혼자 착취해 가는 부인들을 국세청에 소득세 탈루 혐의로 신고할 수 있다. 이것은 황혼이혼->독거노인->복지예산 증가로 국가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또한 부인들에게만 돈을 지급하는 자식들에게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를 둘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돌봄 비용 지급 경로를 다변화해야 한다. 즉 아들과 사위도 관심을 가지고 할빠들에게 봉투를 얹어 드려야 한다. 지금 할빠는 미래의 그들 모습이기 때문이다. 은퇴 후, 그래도 가정 내에서의 역할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는 선량한 할빠들의 서러운 눈물을 닦아주는 사회적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다. 그래야 국가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전국 할빠 연맹의 출범을 방지할 수 있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이들은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로 논다. 요즘 아이들은 게임하고 카톡을 하면서 주로 비대면으로 혼자 논다. 하지만 1960년대의 아이들은 또래들과 만나서 놀고, 동물들과 놀고, 말장난 수수께끼에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며 놀았다. 장난감이 없던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말이 장난감이었다.
그런데 숫자를 차례로 나열하는 말장난이나 끝말을 이어가면서 약간의 멜로디와 리듬을 붙여 소리치고 다니는 유희,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예를 들면 “애들 모여라, 애들 모여라. 여어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 또는 어려서 아이들이 날 놀려 먹던 노래(?) “순이 순이 철순이, 장가 장가들었다, 누라 누라 마누라, 개다 개다 두 개다.” 이런 거. 나는 요언(謠言)이라고 쓰려 했는데, 찾아보니 사전엔 뜬소문이라는 풀이밖에 없더라.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겠다. 나는 마누라가 두 개가 아니니까.
(여기서 잠깐~! 이쁘고 요리 잘하고 착한 마누라를 얻으려면? 답은 마누라를 셋 얻는 것이다. 마누라가 하나면 한심한 남자, 둘이면 양심적인 남자, 셋이면 세심한 남자라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신소리 헛소리를 하면서 작전타임을 써 봐도 딱 맞는 말을 찾아내지 못하겠다. 그런데 이런 게 바로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동요가 아닐까.)
나는 어려서 못된 말장난을 많이 하고 다녔다(물론 어른들이 못 듣는 데서). “일, 일본 년이 이,……, 삼, 삼밭으로 들어가 사. 사방을 둘러보니 오, 오는 사람이 없어 육, 육시랄 년이 칠,…… 팔, 팔뚝만한 XX로 구, …… 십,…을 하더라.” 이 칠 구의 말줄임표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표시다. 함께 자란 고종사촌형에게 물어봤지만 “난 너무 고상한 사람이라 그런 거 생각 안 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형과 나는 무슨 행진곡인가에 가사를 붙여 “아이고 오줌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이렇게 발맞추어 노래 부르곤 했다. 그러면 안방에 있던 할머니가 “아, 얼렁 뒷간에 가. 오줌 참으면 병나”라고 소리쳤다(사실은 병이 된다는 말인데, 충청도 말 도+ㅑ가 표기되지 않는 게 유감이다).
그 형과 내가 공통적으로 완전하게 기억하는 건 이거다. “야 야 야마싯대가 담뱃대, 대 대 대꼬바리(담배통)가 홀애비짱, 장 장 장돌뱅이가 시리방구, 구 구 구두 신었다구 재지 마, 마 마 마루 밑에 달기똥(닭똥), 똥 똥 똥 싸놓고 도망갔다네, 내 내 냇가에서 놀다가, 가 가 가아련다 떠나려언다….” 무슨 뜻인지 지금도 모르는 말이 몇 개 있다. 네가 내로 바뀌는 대목이 어색하지만, 이 말장난의 끝은 유행가 ‘유정천리’로 이어진다.
1959년 박재홍이 불러 대히트를 한 그 노래의 1절은 이렇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 빛이 젖어드네.”
그런데, 우리 공주 시골동네 청년들은 다르게 불렀다. 가사를 바꾼 노래의 1절과 2절은 다음과 같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간다
천리만리 타국 땅에 객사죽음 웬 말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십오일에 조기 선거 웬 말이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굽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눈이 오네
노래가 발표된 1959년은 4·19 한 해 전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독재가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다. 1956년 5월 15일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민주당의 해공 신익희(1894~1956) 후보가 호남선 열차에서 급서했다. 이어 4년 후인 1960년 3·15 대선 때는 민주당 조병옥(1894~1960) 후보가 미국으로 신병 치료하러 갔다가 선거 한 달 전인 2월 15일에 타계했다. 그 상황에서 대중의 절망과 민주화 열망을 담은 노래가 “가련다 떠나련다”의 개사곡이다. 1960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마을 청년들은 작대기로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이 노래를 참 많이도 불렀다.
또 하나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 해공 급서 이후 민주당의 당가처럼 불린 가요가 있다. 작사자 손로원, 작곡자 박춘석은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해공이 타계하기 석 달 전에 나온 노래였는데도 해공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거라는 오해를 받아 경찰에 소환당하며 시달렸다. 5월 5일 어제가 해공의 64주년 기일이었다.
사람은 가고 노래는 남았다. 그러나 가사를 바꾸거나 곡조도 없는 노래로 만든 말장난 동요는 불러본 사람들만의 것이어서 전승되지 않는다. 동시대의 사람들이라도 잘 알지 못한다. 악보상의 노래와 달리 기억 속의 동요는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스스로 만들어 노래유희를 하는 아이들도 이제는 보기 어렵다.
데뷔 45년차 가수 혜은이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공개된다.
오늘(29일) 밤 10시에 방송되는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는 무대에선 그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던 혜은이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975년 ‘당신은 모르실거야’로 데뷔해 국민 여동생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혜은이는 2년 만에 ‘당신만을 사랑해’로 가수왕에 오르고, CF 모델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혜은이는 무대 위 화려한 조명 아래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이 가장이 됐고, 온갖 루머에 시달리며 가수생활을 이어왔다. 스승이었던 작곡가 고 길옥윤과의 수많은 루머로 은퇴까지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다.
이날 방송에서 혜은이는 50년 인연 전영록을 만나러 강원도 평창에 있는 전영록 박물관으로 향한다. 혜은이의 열혈 팬이자 절친한 두 동생인 가수 남궁옥분과 민해경과의 만남도 그려진다.
또 방송에서 혜은이는 지난해 7월 배우 김동현과 결혼생활 30년 만에 합의 이혼하게 된 속사정도 꺼낸다. 적극적인 구애로 재혼해 화제를 모았지만, 파경에 이르는 과정 등을 털어놓을 예정이다.
앞서 혜은이는 2017년 방송된 ‘마이웨이’에서 “남편 김동현의 사기로 빚 200억 원을 10년간 갚았다”고 말한 바 있다. 김동현은 억대 사기 혐의로 법정 구속돼 실형을 살기도 했다.
세월이 참 쏜살같습니다. 화창한 봄 가곡 ‘동무 생각’을 부르던 누이들 얼굴엔 어느덧 주름이 깊게 파이고 흰머리 가득한 할머니들이 되었습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들녘을 나비처럼 사뿐사뿐 날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설익은 앵두처럼 풋풋했던 황혼의 누이들이 가만가만 속삭입니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 유자효의 시 ‘인생’ 중에서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온 산이 풀빛으로 물들어가는 강원도 삼척의 고갯길을 지나다 갑자기 들려오는 웅장한 교향악 소리에 멈춰 섰습니다. 그 옛날 누이들이 입을 모아 합창하던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듯한 환청을 들었습니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관악기가 봄날의 환희를 노래하는 듯한 천상의 교향악을 들었습니다. 숱한 수가 한꺼번에 울리니 그 소리는 산과 계곡을 압도합니다. 숲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주인공은 바로 유별난 생김새를 무기로 단번에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등칡의 꽃입니다.
나뭇가지를 휘감으며 최대 10m까지 길게 뻗는 줄기뿐만 아니라 10~26cm로 제법 큰 데다 하늘을 뒤덮을 듯 풍성하게 나는 심장형 잎이 칡을 빼닮았고, 무성한 가지마다 잎겨드랑이에서 꽃송이를 숱하게 늘어뜨린 것이 등나무를 닮았다고 해서 등칡이라 불리는 덩굴식물입니다. 그런데 누에고치 집을 U자형으로 구부려 놓은 듯한 길이 10㎝ 안팎의 꽃이 참 독특하니 매력적입니다. 4~5월에 피는 꽃의 구조는 단순해, 지름 18㎜ 정도인 꼬부라진 통부(筒部)와 3개로 갈라진 꽃가장자리로 되어 있습니다.
꽃 색은 다소 평범해 통부 입구의 꽃가장자리는 연한 노란색, 통부는 밝은 연녹색, 안쪽 중앙부는 연갈색이며, 밑에는 검은 자주색, 윗부분엔 보랏빛의 갈색 반점이 있는 등 전체적으로 황록색을 띱니다. 하지만 꽃 모양은 오묘해서 대개는 “앗, 색소폰을 닮았네”라는 첫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한술 더 떠 통부를 옆에서 보면 남성의 상징을, 정면에서 보면 여성의 국부를 연상하게 된다며 “애들은 가라”라는 우스갯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선에 대해 식물학자들은 말합니다. “꽃은 곱건 밉건 다음 세대를 만들기 위한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꽃 색이 대부분 황색인 것은 수분을 돕는 꿀벌 등 곤충이 가장 잘 식별하는 색이 황색이기 때문이다.” 꽃 구조가 야릇해 마주보기가 민망한 게 어쩌면 당연하다는 말이겠지요. 실제 등칡의 생식기관인 꽃 안으로 벌이나 파리가 일단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아 새끼손가락만 한 통부 안에서 발버둥을 치다가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잔뜩 옮겨 수분을 돕게 된다고 합니다.
Where is it?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중국 및 극동 러시아, 그리고 함경북도에서 강원도까지 분포한다. 강원도 이북에서 많이 자란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남으로 경북 청송의 주왕산, 경남 거제도까지 개체 수는 많지 않지만, 널리 분포한다. 서울 등 수도권의 야생화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곳은 경기도 가평과 강원도 화천의 경계에 있는 화악산. 강원도 삼척 일대 계곡과 너덜지대에서는 등칡의 꽃이 줄줄이 달려 천상의 교향악을 울리는 장관을 만날 수 있다. 울산의 재약산에선 수령 300년 된 노거수 등칡 2그루가 발견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