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과 14대 후손 이육사

기사입력 2020-07-21 10:03 기사수정 2020-07-21 14:57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에 올라 도산서원 이정표를 따라 달린다. 도로 오른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이루는 안동호를 끼고 돌다 보면 마치 물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안동호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가르며 마치 신선 물놀이하듯 안개 낀 안동호를 따라 도산서원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가 오는 날은 문화재를 방문하기 좋은 날이다. 평소 왁자지껄한 소음 없이 호젓하게 거닐며 옛 역사를 음미하며 앞으로의 발걸음을 다잡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한 대 없다. 오늘의 방문은 무척 만족스러울 듯하다. 입구로 들어가는 길도 오가는 이 없이 고즈넉하게 우리를 맞았다. 지금에야 이렇게 길이 넓었지 퇴계 이황 선생에게 수학하던 서생들은 좁다란 오솔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학문에 정진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참 편한 세상에 산다는 미안함이 든다.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도산서원 입구 오른쪽 강 건너에 작은 정자가 보인다. 안동호로 흐르는 물길 가운데에 있는 작은 정자다. 섬이라 하기에는 작지만 달리 뭐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이 정자가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는데 시사단(試士壇)이라 불린다. 1792년 음력 3월에 정조가 도산서원에서 치른 과거시험을 기념해 단을 쌓고 전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당시 과거에 응시한 이가 너무 많아 장소를 도산서원으로 하지 못하고 그 아래 낙동강 모래강변에서 시험을 치렀다는데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만 363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 너도나도 몰빵하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시사단으로 가려면 서원 앞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로 건너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배를 운행한다는데 비가 내리는 평일이라 그런지 배는 있는데 사공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서원만 보고 가야 할 듯하다.

소수서원이 평지에 세워졌다면 도산서원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들이 놓여 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동쪽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건축해 학생들을 공부시키던 서당이다. 그 옆 싸리문은 아직도 보존돼 있다. 이황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 이 싸리문을 밀치고 마루에 올랐을 것이다. 이 문은 유정문으로 불리는데 ‘그윽한 곳에서 수도하는 사람은 바르고 길할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부쩍 서원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서원의 핵심 공간이라 할 강학당인 전교당이 현재 보수 중이라 진입이 금지돼 있다. 전교당 현판은 선조의 명령으로 한석봉이 직접 썼다는데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도산서원을 느긋하게 살펴보고 나왔지만 사실 오늘 방문의 주요 목적지는 인근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으로 나오면 퇴계 종택과 이육사 문학관 가는 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육사 본명은 이원록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아래는 두산백과가 이육사를 설명해놓은 글이다.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가 264. 이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썼다. 또한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인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 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고,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 육사 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다.“

이육사가 이황 선생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 배웠던가? 선생의 독립운동 여정을 자세하게 배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되는 ‘청포도’라는 시 구절뿐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빗줄기가 휘몰아쳐 잠시 고민을 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는 문학관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은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2층 건물이다. 잠깐 돌아보고 오자 했던 계획은 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문을 닫을 때까지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머물렀다. 우리 일행은, 격렬했지만 여리고 순수했던 이육사의 삶의 흔적을 느끼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돌아보며 마치 질풍노도의 시대를 보냈던 20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간 듯 흥분하고 목메면서 이육사의 삶을 하나하나 경험했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할머니(80)가 기억하는 아버지 이육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헤어질 때 3세에 불과했으니 기억이 없는 게 당연할 텐데 어떤 한 순간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아버지를 기억한단다. 1943년 아버지가 구속돼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날이었다.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이고 용수(죄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싸리나무로 만든 둥근 통)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푹 가린 아버지가 건넨 마지막 말, "아버지 다녀오마."

올 초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에서 안동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 이옥비 할머니를 인터뷰한 영상이 있다. 유튜브에 이 영상이 남아 있어 가끔 들어가서 본다. 문학관에서 선생의 유품들을 돌아보자니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아이를 용수 속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졌을 아픔이 전해진다.

문학관은 선생의 작품들을 연대기별로 정리하고 전시해놓았지만 작품 활동보다 더 치열했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술도 잘돼 있다. 특히 이육사 선생이 당했던 처참했던 고문 현장과 피로 얼룩진 도포, 감옥 수감 도구들도 전시돼 있어 악랄하고 광폭했던 일본 경찰의 만행을 느낄 수 있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육사의 작품들은 시와 평론, 시나리오까지 다채롭게 정리돼 있다. 마지막까지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이육사. 그를 청포도의 시인으로만 기억해왔던 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안동으로 달려가 그의 문학관을 방문해봐야 한다. 연대기로 서술돼 있는 각종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며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목이 메어오는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될 터이니.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사진 이명애 시니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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