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과 낡음, 한 획 차이

기사입력 2020-01-02 08:19 기사수정 2020-01-02 08:26

[커버스토리 웰컴, 에이징] PART 1. 나이 듦의 미학

▲한 세기를 살아온 한국 철학계의 1세대 교육자이자 베스트셀러 수필가인 김형석 교수는 “현명하게 나이 들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해라, 그중 봉사하는 삶이 가장 행복하다. 무엇이든 배워라. 그리고 취미를 가져라”라고 강조했다.(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한 세기를 살아온 한국 철학계의 1세대 교육자이자 베스트셀러 수필가인 김형석 교수는 “현명하게 나이 들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해라, 그중 봉사하는 삶이 가장 행복하다. 무엇이든 배워라. 그리고 취미를 가져라”라고 강조했다.(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곱게 늙어가는 이들을 만나면 세상이 참 고와 보입니다. 늙음 속에 낡음이 있지 않고 이채로운 새로움이 있습니다. 험한 한세상 곱디곱게 살아온 이들은 늙어도 낡지 않습니다. 늙음과 낡음은 글자로는 불과 한 획의 차이밖에 없지만, 그 품은 뜻은 남북의 극지(極地)만큼이나 서로 멉니다. 늙음과 낡음이 함께 만나면 허무의 절망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늙음이 곧 낡음뿐이라면, 삶은 곧 죽어감에 다름 아닙니다. 낡은 것 꼭 거머쥔 주먹을 종내 펴지 못해 너저분한 구멍에서 손을 빼내지 못하는 노추(老醜), 세차게 불어오는 시대의 새 바람을 눈 질끈 감고 애써 거스르는 어리석음… ‘수구(守舊) 먹통’이라 조롱당해도 쌉니다. 늙은 나이에도 젊은 마음이 있습니다. 옛것과 새것을 한품에 아우르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은은한 지혜입니다. 보수이니 진보이니 하는 어설픈 잣대를 들고 함부로 폄훼의 혀끝을 놀릴 수 없습니다. 연면히 흘러온 역사의 가치, 애환(哀歡)의 삶 속에 켜켜이 박힌 연륜의 무게를 ‘참을 수 없는 젊음의 가벼움’으로 감히 비웃지 못합니다. 젊은 나이에도 낡은 마음이 있습니다. 도그마에 사로잡힌 젊음, 현란한 이벤트에 넋이 빠져 우상의 상징 조작에 스스로를 묶어버린 젊음, 오래 묵혀진 삶의 지혜에 두 귀 꽉 막아버린 젊음이라면, 나이는 젊었어도 낡은 인격입니다. 자유를 갈구하면서도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한갓 정신적 노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직된 분별의 이념에 묶이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도예가 양승호 선생 (주민욱 프리랜서 minwook19@hanmail.net)
▲도예가 양승호 선생 (주민욱 프리랜서 minwook19@hanmail.net)

▲화가 김봉준 선생(주민욱 프리랜서 minwook19@hanmail.net)
▲화가 김봉준 선생(주민욱 프리랜서 minwook19@hanmail.net)


막히고 닫힌 젊음이나 낡고 닳아빠진 늙음에게는 진보도 보수도, 개혁도 전통도 모두 허위의 우상일 뿐입니다. 우상이 약속하는 자유 속에는 흐려진 노안(老眼)이나 철없이 젊은 눈이 쉬 알아채지 못하는 새로운 억압 장치의 속임수가 감춰져 있습니다. ‘늙어도 낡지 않는 삶’은 나날이 신선합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과 인격은 날마다 경이롭습니다. 껍데기 진보보다 더 앞선 깨우침, 입술의 개혁보다 더 싱그러운 에너지가 삶의 물길에 풍성하게 출렁입니다. 겉은 낡아가도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아름다운 늙음이요, 겉이 늙어갈수록 속은 더욱 낡아가는 것이 추한 늙음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란 없다. 이미 있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지금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니, 신은 지나간 것을 다시 찾는다.”(구약 전도서) 지혜로운 연륜의 가르침입니다. 기껏해야 시대의 한 단면을 서로 찢어 피 터지게 영역 다툼하는 보수와 진보의 칼날들을 유장(悠長)한 역사의 물줄기는 한낱 웃음거리로 휩쓸어갈 따름입니다. 어제의 진보가 오늘의 보수로 쇠락하고, 오늘의 보수가 내일엔 개혁의 새 날갯짓을 하다가 어느새 다시금 끝 모를 수구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역사의 눈길은 숱하게 지켜봐 왔습니다. 아니, 지금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역사를 들먹이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서로의 덧없는 삿대질을….


▲화가 유휴열 선생(주민욱 프리랜서 minwook19@hanmail.net)
▲화가 유휴열 선생(주민욱 프리랜서 minwook19@hanmail.net)


“가장 낡은 것 속에 가장 새로운 것이 있다.” 장장 16년에 걸쳐 티베트 고원 라다크 마을의 원시적 삶을 몸소 체험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 여사가 쓴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의 주제입니다. 머나먼 과거(ancient)를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future)와 합쳐놓은 이 책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과거와 미래의 두 시간적 영역을 하나의 장(場)으로 엮어낸 우주적 통찰입니다.


▲화가 류준화 (왼쪽) -시인 홍일선(위) -사진가  이창수(아래)(주민욱 프리랜서 minwook19@hanmail.net)
▲화가 류준화 (왼쪽) -시인 홍일선(위) -사진가 이창수(아래)(주민욱 프리랜서 minwook19@hanmail.net)


나이 먹는 일 겁내지 않는다

“라다크 사람들은 나이 먹는 일을 겁내지 않는다. 삶의 각 단계는 그 나름대로 각기 좋은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늙어도 낡지 않는 지혜를 라다크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의 옛 지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만나는 것마다 옛것이 아니니, 어찌 빨리 늙지 않을 수 있겠는가(所遇無故物 焉得不速老).” 송나라 때의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실린 왕효백(王孝伯)의 글입니다.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은 옛것이 아니라 새것’이라는 말이니, 이런 당착(撞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 묵혀진 옛것들 속에 오롯이 녹아 있는 근원적인 삶의 바탕자리를 되찾는 일이야말로 ‘오래된 새로움’(The ancient newness), 그 역설의 비의(秘義)일 수 있습니다.

현대의 새로운 철학들이 수천 년 전의 노장(老莊)사상에서 신선한 깨달음을 얻고, 까마득한 천지창조의 옛일을 기록한 성서가 세계의 종말(終末)을 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는 이유입니다. “젊음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밋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뜻한다.”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이 노래하는 청춘(youth)입니다. 옛것이 늘 옛것 아니고 새것이 언제나 새것 아니니, 서로 다툰들 무슨 보람 있으랴. 사랑으로 서로 감싸 안느니만 못한 것을….


▲등반가 정승권(주민욱 프리랜서 minwook19@hanmail.net)
▲등반가 정승권(주민욱 프리랜서 minwook19@hanmail.net)


해가 바뀌어 나이 한 살 또 먹으면 더 늙었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네들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낡아가는 것입니다. 새해를 보지 못한 채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이가 많습니다. 저들이 그토록 바라다가 끝내 만나지 못한 새해를 우리가 어찌 탄식하며 어영부영 맞을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삶을 탄식으로 맞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낡아가는 일일 터…. 늙음은 은총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 감사가 늙어도 낡지 않는 비결입니다. 늙음과 낡음… 글자 한 획의 차이가 삶의 미추(美醜)를, 지혜와 어리석음을 가릅니다. 글자 한 획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삶이 다르고, 인격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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