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골목길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사람과 돈이 모이는 공간의 비밀을 탐구하는 모종린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그가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것도 이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1년째 골목길과 사랑에 빠지다
빈틈없이 빼곡하게 쌓인 책들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인사하는 모종린 교수의 주전공은 경제학으로 국제관계와 한국 발전론을 연구하고 강의한다. 이런 그가 11년째 골목길과 사랑에 빠진 이유가 궁금했다.
2013년 대기업의 제주도 투자가 이어지면서, 제주 골목골목이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의 성지가 되는 것을 보고 신기해 연구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 그다음 스텝이 문화화입니다. 문화화란 말을 풀면 결국 창조경제 문화 형성이에요. 한국 발전론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니 한국의 지역 발전에 문화적인 접근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죠. 경제학자에게 골목은 단순히 추억을 떠올리는 곳이 아니라 상권이에요. 골목상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이프스타일을 알아야 하니까 자연스레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하게 되죠. 그러면서 골목상권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예측해볼 수 있고요. 이런 변화를 제주도 골목상권에서 발견하고, 골목이 의미 있게 변하는 것을 관찰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골목길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골목에 도시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도시 문화를 주도하는 중심에 소상공인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대표적인 곳이 홍대 피카소거리, 삼청동과 북촌, 신사동 가로수길, 이태원이다. 지역에서는 전주 한옥마을이 시초다.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를 개척하고, 한데 어우러질 수 있었던 것은 소위 말하는 힙한 소상공인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독립 서점, 스페셜 커피 전문점, 공방 등 자기만의 정체성을 담은 가게들이죠. 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무언가를 구매하면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소비자의 욕구가 소상공인과 연결돼 시너지를 내는 거고요.”
직주락(職住樂)이 이끄는 골목상권
일반적으로 지역색과 개성이 강한 상권이나 지역을 로컬이라 부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의미가 좀 다르다. 우리나라는 로컬을 독립된 문화를 창출하는 크리에이터 상권으로 정의한다. 로컬이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 상권에 머물지 않고 소상공인의 성장 동력, 지역 기업 생태계,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플랫폼 등 세 방향으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이에 모 교수는 “작은 동네가 로컬일 수도 있고, 도시 전체가 로컬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이후 귀농·귀촌, 제주 이민, 동네 지향, 장소 지향, 고향 지향 다섯 가지로 ‘로컬 지향’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중 동네 지향은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슬세권(슬리퍼 신고 활동할 수 있는 지역), 스세권(스타벅스 매장 인접 지역), 홈 어라운드 소비(집 주변에서 소비)처럼 동네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서울에서 같은 지역 내에 직장과 거주지가 있는 사람이 50%에 달한다는 수치도 이런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죠. 마포•용산•성동구 지역(이하 마·용·성)의 급부상도 같은 이유고요.”
이런 현상을 모종린 교수는 직주락(職住樂)이라고 설명했다. 직주락이란 일, 주거, 놀이가 근거리에서 이뤄진다는 개념이다. 그는 “도시계획의 관점에서 ‘마·용·성’의 부상이 의미 있는 것은 락(상권)이 이를 견인했다는 데 있다”면서 “홍대, 이태원, 성수동 골목상권이 청년들의 문화지구로 자리매김한 뒤 일자리가 늘고, 실제로 이주하는 락-직-주 순서로 진행됐다”고 이야기했다.
지방 도시 살리는 로컬 브랜드
지방 도시의 소멸을 막고 수도권 집중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골목길을 살리고, 이를 중심으로 핫한 관광지로 개발해야 한다.
모 교수는 “로컬 브랜드가 모이면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하나의 문화로 형성되어 사람들이 찾을 수밖에 없다”면서 로컬 브랜드 개발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로컬 브랜드는 지역에 기반을 두되 전국적으로 유명해야 한다. 대표적인 예로 양양 서핑, 강릉 커피, 제주 환경, 순천 생태 등으로 다른 지역에서 복제할 수 없는 로컬 산업을 창출하고 있다.
“지방 도시를 살리려면 동네 콘텐츠를 산업화하는 로컬 크리에이터가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만드는 로컬 문화에는 그들만의 포인트가 있거든요. 이런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콘텐츠가 자리 잡으면서 동네를 살리는 겁니다.”
로컬 크리에이터는 지역만의 독특한 콘텐츠로 차별화를 꾀하는 창작자로, 이들을 통한 로컬 산업이 육성되어야만 경제가 활성화된다. 다시 말해 로컬의 핵심은 로컬이 아니고 크리에이터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크리에이터 디스트릭트(Creative District), 문화지구’라고 하면 예술인마을을 만들고 미술관, 박물관을 먼저 떠올립니다. 엘리트 문화에 젖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정작 지역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골목상권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골목상권을 이끄는 사람들은 온라인 콘텐츠 크리에이터, 온라인 셀러,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로컬 크리에이터 세 그룹입니다. 이들을 지원하고 육성할 별도의 컨트롤타워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모 교수의 말에 따르면 상권이 문화지구가 되고 문화지구가 상권이 되는 세상이다. 결국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동네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동네다움’인 셈이다. 전주 한옥마을, 경주 황리단길, 강릉 안목해변 커피거리처럼 말이다.
로컬 크리에이터가 있어야 골목상권이 살아난다고 하지만 경리단길을 비롯해 ‘O리단길’은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모종린 교수는 단호하게 “아니다. 애초에 동네 문화를 소비하겠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평가”라고 말했다.
“골목 골목이 어떻게 같아요? 다 달라요.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도 다르고, 역사도, 건축물도 다르죠. 우리가 소비하는 건 단순히 음식, 제품이 아니라 그 동네의 분위기예요. 황리단길만 봐도 그래요. 대고분이 감싼 골목길과 한옥은 황리단길만의 복제 불가능한 콘텐츠입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황리단길과 같은 골목길은 없어요. 완전히 색다른 경험을 하는 거죠.”
귀농•귀촌 대신 귀로컬
모종린 교수는 “우리는 점점 크리에이터 시대로 나아가야 하는데 은퇴하면 왜 죄다 귀농•귀촌으로 할 일을 국한하는지 모르겠다”며 “이제는 귀로컬 시대”라고 강조했다. 이어 “베이비부머들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자기 콘텐츠 제작 능력이다. 이들에게 크리에이터 재교육을 시키고 귀로컬을 유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모 교수가 주장하는 귀로컬은 은퇴 후 살고 싶은 지방 도시가 꼭 고향일 필요는 없다. 그는 자신도 교수 은퇴 후 귀로컬을 준비 중이라며, 후보지를 물색 중이라고 밝혔다.
“귀농•귀촌은 난이도도 높고 노동량이 높아 베이베부머들에게 추천하지 않습니다. 은퇴 후에도 큰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귀농해도 다시 도시로 돌아오기 마련이에요. 일본의 노후설계사 요코테 쇼타도 ‘60세가 되면 연 수입은 절반으로 줄고, 일은 신입 사원급이면 적당하다’고 했듯이, 최저임금 정도 벌면서 여유롭게 일하고 싶은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는 귀로컬이 딱이에요(웃음).”
전국 3500여 개의 읍•면•동에 홍대, 이태원, 성수동같이 기업 생태계로 전환된 골목상권이 생겨나길 바라는 모종린 교수는 동네를 사랑하는 일이 결국 나를 사랑하는 일과 일맥상통한다고 이야기했다.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를 만드는 건 모든 사람이 직면한 문제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의존할 것은 나다움과 동네 문화죠. 동네 빵집, 동네 카페, 동네 밥집, 동네 서점 등 동네 가게를 많이 이용하고 사랑해주세요. 기술의 발전, AI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키워드는 로컬 문화이고, 그걸 성장시키는 건 우리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