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 부작용, ‘장수경제’로 해법 찾아야”

기사입력 2025-05-13 08:43 기사수정 2025-05-13 08:43

주명룡 KARP 회장… “은퇴자 삶 위해 쿠키까지 팔았죠”

(이준호 기자)
(이준호 기자)

노인 인구 1000만 명 돌파, 초고령사회 진입,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 우리 사회의 고령화와 관련한 수식어는 그 어느 국가보다 자극적이다. 여기에 우리가 노인을 존중하는 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하면, 시니어가 중심에 선 단체들의 활약이나 위세는 대단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KARP) 회장의 20여 년간의 분투기는 우리 사회 고령자 권익 보호의 실상을 말해주는 듯했다.

대한은퇴자협회(이하 KARP)는 의외의 장소에서 시작됐다. 바로 미국 뉴욕. 1996년 주명룡 뉴욕한인회장은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활동에 매진하다 고령 이민자들을 위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민 1세대의 노년을 보살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어요. 고국에 돌아가기도 마땅치 않고. 이들을 위해 한인 커뮤니티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하다 발견한 것이 미국은퇴자협회(이하 AARP)였습니다. 여전히 영어 능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사회복지나 관련 지원제도 같은 것을 한국어로 안내해 혜택을 받게 했던 거죠.”

고국에 AARP 생겼으면

AARP와 협업하면서 주명룡 회장은 자연스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고국에도 이런 단체가 있었으면 좋겠다.’

2001년 그는 이 생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이미 기반을 닦아놓은 미국 생활을 중단한다. 그리고 두 달 후인 2002년 1월 15일 KARP가 설립된다.

“시작은 아주 거창했죠. 당시 AARP 회장도 한국에 초대해서 설립 기념행사를 치렀어요. 마포에 으리으리한 사무실을 빌려 정부나 기업, 사회 곳곳의 명사들을 초대했어요.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장관도 만났죠. 청와대도 다녀왔어요. 당시 국내에선 고령자 권익에 관한 인식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이야기를 생소하게 생각했죠.”

당시 고령화에 대한 국내의 위기의식은 높지 않았다. 급속한 고령화의 기미만 있었을 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겼다. 주명룡 회장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까스로 노무현 정부의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고령화에 대한 제도적 대비의 필요성을 강조해 첫 시작을 이끌어냈다. ‘고령사회대책 및 사회통합기획단’이 그것이다. 이 기관은 이후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회’로 확대·개편되었고,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수립의 기틀이 됐다.

AARP 제도를 벤치마킹해 KARP가 국내 제도에 영향을 준 것은 더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제정과 주택연금제도 도입이다.

“초창기 KARP의 주된 정책과제가 이 두 가지였어요. 나이를 이유로 기업에서 근로자를 쫓아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고, 은퇴자들이 노후에 안정된 삶을 유지하려면 주택을 바탕으로 안정된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시행되고 있는 제도였죠. 이를 위해서 국회도 내 집처럼 들락거렸어요.”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연령차별금지법은 2009년에 시행을 시작했고, 주택연금제도는 2007년 도입됐다.

(이준호 기자)
(이준호 기자)

AARP 모델 도입의 실패

주명룡 회장이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를 모델 삼아 고령자를 위한 제도 개선을 하나둘씩 이뤄나가는 동안 KARP도 함께 승승장구했을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주 회장은 AARP 모델을 국내에 그대로 도입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AARP는 사실 은퇴자들이 모인 단체이면서 보험회사예요. 그 시작도 미국 내 교사를 위한 단체(전미은퇴교사협회)였죠. AARP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다양한 사업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여러 보험회사들과 제휴해 큰 매출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국에서도 비슷한 형식으로 접근하고자 전화기 100대를 설치하고, 회원 가입자를 확보하기 위해 영업을 했지만 쉽지 않았어요.”

AARP는 약 3800만 명이 가입돼 있는 비영리단체지만, 보험회사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의료보험, 장기요양보험, 생명보험, 종신보험, 자동차보험, 주택보험 등을 판매한다. 고령자를 위한 유통 플랫폼인 셈이다.

하지만 그 모델을 그대로 들여오기에는 국내 풍토가 너무나 달랐다. ‘사보험’ 제도가 익숙한 미국과 달리 국내에선 공공복지가 모두 정부 주도 서비스를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특히 의료계의 사보험에 반감도 컸다. 또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 정부 제도를 보완하는 역할을 인정받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특히 보험업계의 폐쇄성도 한몫했다. 이미 대기업 재벌들이 차지하고 있는 보험 시장에 미국에서 막 들어온 ‘이방인’이 차지할 공간은 없었다.

“제도적 한계도 있었죠. 보험회사 설립은 쉽지 않고 대리점 정도만 할 수 있다는데, 그것으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어요.”

쉽지 않은 독립과 현실 사이

주명룡 회장은 또 다른 모델이 필요했다. 독립된 단체로 활약하려면 수익모델이 필요했다. 미국에서 밑천 삼아 가져온 자금은 슬슬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포춘 쿠키(점괘가 들어 있는 미국식 과자)였어요. 미국에서는 중국 식당을 중심으로 이 과자가 꽤 인기여서, 한국에서도 잘 팔릴 거라 생각했죠. 비싼 기계를 들여와 사업을 시작했는데, 예상과 달랐어요. 일시적으로 흥미 삼아 사가는 곳은 있어도, 꾸준히 판매를 이어주는 곳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죠.”

유혹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편에 서주길 바라는 곳도 있었고, 정부 사업을 통해 연명하는 방법도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은 국내 모든 NGO, 사회복지 단체가 겪는 구조적 어려움이다. 정부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사각지대를 개선해나가는 것이 이들의 사명이다. 그러나 대부분 민간보다는 정부 주도 사업으로 이뤄지다 보니, 운영 자체를 정부 예산에 기대게 된다. 이는 이들 단체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실패가 반복됐지만 주명룡 회장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단체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 보조금이나 위탁사업 참여도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주 회장은 회원들의 회비와 개인 사비로 어렵게 협회를 운영해야 했다. 번화가의 수백 평 사무실은 주택가의 작은 사무실로 바뀌었다. 사무실 한켠에는 화려했던 시절의 물건들이 유물처럼 쌓여 있다.

“어떤 단체든 정부 돈을 받으면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유지해야 합니다. 어려운 길이지만, 그 길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숫집도 해보고 도시락도 팔아봤죠. 하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사장이란 사람이 매일 국회를 들락거리고 다른 일에 눈이 팔려 있는데 수익이 날 리 만무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려 했던 것은 우리의 원칙이었습니다.”

(이준호 기자)
(이준호 기자)

고령화 해법으로 ‘장수 경제’ 검토해야

이 과정을 통해 주명룡 회장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는 장수 경제의 도입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20년 전 처음 문제를 제기했을 때보다 훨씬 심각해졌어요. 지금 같은 상황을 그냥 방치하면 노인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기업들은 생산성을 잃게 됩니다. 결국 고령 세대가 생산에 참여할 수 있어야 지금 같은 인구구조에서도 국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어요. 고령자들을 잠재 노동력으로 보고 젊은 세대와 일터에서 공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해요. 지금의 월 30만 원 내외 공공형 노인 일자리 제도는 문제가 많아요. 노인의 소득 개선 효과도 적고 생산성도 떨어지죠. 기업과 연계해 노인이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서, 적어도 150만 원 정도 월수입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해요.”

주명룡 회장은 노인이 단순한 복지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며 능동적 참여자라는 철학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노인을 단순히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만 보지만, 사실 많은 노인이 경험과 지혜를 갖춘 사회적 자산입니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노인이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함께 일하며, 서로에게 배우는 ‘배벌사(배우며, 벌며, 사는 사회)’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노인이 일자리를 갖고 소득을 창출하면 사회적 고립도 줄고, 노인 빈곤 문제도 완화할 수 있습니다. 노인에게 필요한 건 돈만이 아니라 사회적 소속감과 역할이에요.”

KARP는 쇄신 준비 중

주명룡 회장은 KARP 차원에서 ‘시니어 시티즌 데이’ 도입을 적극 제안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매년 8월 21일을 시니어 시티즌 데이로 지정해 노인의 사회적 공헌을 기념합니다. 우리도 노인들이 사회적 존중과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기념일을 만들어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해야 합니다. KARP에서는 이런 뜻을 알리기 위해 3년 전부터 시니어 시티즌 데이 행사를 개최하고 있어요.”

KARP의 향후 계획도 분명하다. 그는 협회의 이미지 쇄신과 세대교체가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KARP는 좀 더 친근하고 현대적인 이미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충분히 오래 활동했고, 이제는 젊고 역동적인 리더가 등장할 때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죠.”

주명룡 회장은 현재 KARP의 쇄신을 위해 새로운 인물을 찾고 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이 단체를 맡아줄 회장감을 물색하고 있다. 후계자를 찾는 셈이다.

“이제 저도 나이가 많아서 과거처럼 열정적으로 활동하기엔 어려움이 있어요. 좀 더 젊은 사람이 와서 전력을 다해 협회의 활동을 맡아주었으면 해요. 대중적인 인지도도 있고, 회원들과 소통도 잘 되면서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능력과 열정이 있었으면 해요. 사회적 책임감을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방송이나 언론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고령사회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철학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역량은 필수예요. 적합한 인물이 나타나면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주 회장은 은퇴를 앞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을 응원했다.

“많은 사람이 퇴직을 인생의 끝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은퇴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배움과 참여, 나눔으로 가득 찬 인생 3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KARP는 이러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는 모든 시니어를 위한 플랫폼이 되고자 합니다. 함께 더 의미 있는 삶을 준비하고 지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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