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 넘어 마을 조손까지” 황혼육아,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입력 2026-02-08 07:00

황혼육아 공동체가 좋은 이유

▲지난해 서울 서초구 가족센터에서 진행된 황혼육아 교실 ‘황혼육아 마스터 클래스’ 현장. (서초구 가족센터)
▲지난해 서울 서초구 가족센터에서 진행된 황혼육아 교실 ‘황혼육아 마스터 클래스’ 현장. (서초구 가족센터)

지자체를 중심으로 공동육아에 나서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이 흐름은 조부모 세대에서도 뚜렷하다. 할머니·할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황혼육아 교실’이 잇따라 생겨나며, 조부모들은 이곳에서 육아를 배우고 서로의 경험을 나눈다. 기쁨과 고충을 공유하고,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회복해간다. 더 나아가 실제 조부모·손주 관계를 넘어, 지역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 ‘확장된 조손 감각’이 새로운 돌봄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서울 서초구 가족센터에서 진행된 황혼육아 교실 ‘황혼육아 마스터 클래스’ 현장. (서초구 가족센터)
▲지난해 서울 서초구 가족센터에서 진행된 황혼육아 교실 ‘황혼육아 마스터 클래스’ 현장. (서초구 가족센터)

함께 배우는 황혼육아가 필요해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할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이른바 ‘황혼육아 교실’과 자조 모임은 지자체 가족센터와 종합사회복지관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과거에는 참여자 대부분이 할머니였지만, 최근에는 손주 돌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할아버지도 눈에 띄게 늘었다. 황혼육아가 세대 전체의 과제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변화다.

황혼육아 교실은 일회성 특강에 머물지 않는다. 1~3개월에 걸친 과정형 교육으로 운영된다. 영유아 발달 단계 이해, 놀이 방법, 동화책 읽어주는 법, 식습관 지도 등 실질적인 육아 내용을 다룬다. 여기에 조부모의 태도와 역할을 점검하는 이론 교육도 함께 이뤄진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 이론 교육이 황혼육아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입을 모은다.

부모 교육과 조부모 교육을 함께 진행해온 임영주 부모교육연구소 대표는 황혼육아의 출발점으로 ‘관계 재정립’을 꼽는다. 그는 “황혼육아에서 가장 많은 갈등은 손주와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와 조부모 사이에서 발생한다”며 “돌봄의 범위와 역할, 양육비 기준을 사전에 정하지 않으면 어떤 육아 기술도 소용없다”고 설명했다.

임 대표는 또한 “조부모의 역할은 훈육이 아니라 돌봄”이라며 “부모가 아이를 직접 양육하기 어려운 공백을 메워주는 존재이지, 주 양육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혼육아 교실의 또 다른 특징은 교육 대상을 분리해 운영한다는 점이다. 조부모끼리만 모여 자신의 감정과 역할을 점검하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조부모와 손주가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도 병행한다. 전자는 경험을 나누고 위로받는 ‘소통의 장’에 가깝고, 후자는 놀이와 활동을 통해 관계를 쌓아가며 ‘함께하는 시간’이다.

▲전라남도 고흥군 ‘조손놀이방’ 풍경.(고흥군청)
▲전라남도 고흥군 ‘조손놀이방’ 풍경.(고흥군청)

이 같은 공동체 교육의 흐름은 실제 공간으로도 구현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전라남도 고흥군에서는 조부모와 손주가 함께 머물며 배우고 노는 ‘조손놀이방’을 운영하고 있다. 고흥군은 2024년 기준 전국에서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높은 지역에 속하며, 손주를 양육하는 조부모 가정의 부담을 지역 차원에서 함께 나누기 위해 이 공간을 마련했다. 2019년 고흥군여성지원센터 내에 1호점을 개소한 데 이어, 2023년에는 도양노인복지타운 내에 2호점을 추가로 열었다.

조손놀이방은 만 5세 이하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 가정을 대상으로 놀이와 돌봄, 조부모 역할 교육을 함께 제공하는 공간이다. 평일 상시 개방하는 이곳에서 조부모는 양육 부담을 덜고, 아이들은 안정적인 돌봄 환경 속에서 정서적 교감을 쌓는다. 고흥군은 조손놀이방을 통해 돌봄을 버텨내는 일이 아닌 함께 웃고 배우는 일상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공동체 형성이 중요할까. 임영주 대표는 황혼육아가 개인의 몫으로 남을 경우, 조부모가 정서적으로 고립되기 쉽다고 지적한다. 그는 “육아는 누구에게나 힘들고 외로운 일인데, 시니어는 나이 듦에 대한 불안까지 더해져 우울감이 커질 수 있다”며 “밖으로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고 감정이 환기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서적 안정은 조부모 개인에 그치지 않고, 손주와의 관계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는 황혼육아 교실을 단순한 돌봄 공간이 아닌 조부모의 삶을 지탱하는 커뮤니티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손주를 키운다는 것은 다음 세대를 양성하는 사회적 역할”이라며 “황혼육아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사회가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부모가 육아 교육을 받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이 지속적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충청북도 증평군,  ‘마을 손주돌봄 추진단’ 발대식.(증평군청)
▲충청북도 증평군, ‘마을 손주돌봄 추진단’ 발대식.(증평군청)

혈연을 넘어선 공동체 조손 관계의 등장

이 같은 흐름은 좀 더 적극적인 공동체 돌봄 모델로도 확장되고 있다. 인구 3만 8000명의 소규모 지자체인 충청북도 증평군에서는 ‘마을 손주 돌봄 추진단’은 지난해 출범했다. 지역 어르신들이 손주를 돌보듯 마을 아이들을 보살피는 지역 공동체 돌봄 모델이다. 경로당과 돌봄 공간을 물리적으로 연결해, 세대가 자연스럽게 오가며 만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할머니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정서적 교감을 쌓고, 어르신들은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활력을 되찾는다. 놀이 활동과 책 읽기, 안전 지도는 물론 한자·일본어 등 재능 기부까지 함께 지원한다. 특히 맞벌이 가정과 한부모 가정의 돌봄 공백을 메우며, 평일은 물론 주말까지 돌봄을 제공해 가정의 부담을 실질적으로 덜어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재영 증평군수는 “경로당이라는 기존 마을 인프라에 돌봄 기능을 결합해, 공동체가 스스로 아이를 키우는 지속 가능한 돌봄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세대가 함께 성장하는 이 모델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지역 공동체 안에서 조부모 세대가 아이를 돌보는 방식은 해외에서 이미 제도화된 사례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위탁 조부모(Foster Grandparent Program)’가 대표적이다. 위탁 조부모 프로그램은 55세 이상 시니어가 혈연관계가 없는 아이들의 ‘지역 할아버지·할머니’가 되어 정서적·교육적 지원을 제공하는 제도다.

참여 시니어들은 학교와 어린이집, 방과 후 돌봄 시설 등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책을 읽어주고 학습을 돕는 한편, 사회성과 정서 발달을 지원하는 멘토 역할을 맡는다. 참여자들은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생겼다”,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삶의 의미를 되찾게 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돌봄의 주체가 가족에서 공동체로 넓어질 때 아이는 더 많은 어른을 만나고, 어르신은 다시 사회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확장된 조손 관계는 초고령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돌봄 해법이자, 세대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연결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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