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전증과 난청을 함께 가진 성인이 보청기를 사용할 경우 치매 위험이 낮아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보청기가 치매를 직접 예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난청을 방치하지 않는 것이 뇌 건강 관리에도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연구다.
유럽신경학회는 지난 27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12회 유럽신경학회 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연구가 발표됐다고 밝혔다. 연구에는 스위스 취리히대학병원과 영국 리버풀대 연구진이 참여했다.
뇌전증은 뇌 신경세포의 전기 신호가 갑자기 흐트러지면서 발작이 반복되는 질환으로, 과거에는 ‘간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연구진은 전자의무기록 네트워크인 트라이넷엑스에 포함된 2억5000만 명 이상의 환자 데이터를 분석했다. 난청이 있는 성인 가운데 보청기를 사용한 사람과 사용하지 않은 사람을 비교했다. 전체 난청 인구뿐 아니라 뇌전증, 뇌졸중, 제2형 당뇨병, 만성콩팥병, 심부전, 편두통, 골관절염 등을 함께 가진 사람도 따로 살폈다. 트라이넷엑스는 병원 진료기록을 모아 연구자가 질병과 치료 결과의 관련성을 분석할 수 있도록 한 의료 빅데이터 플랫폼이다.
분석 결과 전체 난청 인구에서는 보청기 사용과 치매 위험 감소 사이에 뚜렷한 관련성이 확인되지 않았다. 뇌졸중, 편두통, 제2형 당뇨병, 만성콩팥병, 심부전, 골관절염을 함께 가진 집단에서도 의미 있는 차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뇌전증과 난청을 함께 가진 성인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 집단에서 보청기를 사용한 사람은 사용하지 않은 사람보다 치매 발생 위험이 23%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5년 기준으로 보면 치매 위험은 2.7%포인트 낮았다. 연구진은 이를 보청기 사용자 37명당 치매 1건이 덜 발생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이 결과를 ‘인지 예비력’과 관련해 해석했다. 인지 예비력은 뇌가 나이가 들거나 질병의 영향을 받더라도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을 뜻한다. 난청이 있으면 말을 듣고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뇌전증 환자는 이미 인지 기능의 여력이 줄어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 난청이라는 추가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났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연구를 이끈 카롤리나 페레이라-아투에스타 박사는 “여러 고위험군에서 작은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대부분의 집단에서는 유의한 관련성이 없었고 뇌전증 집단에서만 일관된 결과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는 “뇌전증은 인지 저하의 가속화와 관련될 수 있고, 측두엽 뇌전증은 청각과 관련된 뇌 영역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뇌전증 환자의 진료 과정에서 청력 확인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뇌전증 환자는 정기적으로 의료기관을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진료 과정에서 난청 여부를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보청기 사용을 안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환자의 경우 난청이 의심된다면 먼저 이비인후과에서 청력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검사 결과에 따라 전문의와 청각장애 등록 가능성을 상담할 수 있고, 청각장애로 등록되면 국민건강보험의 장애인 보조기기 급여를 통해 보청기 구입비 지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처방을 받고 공단 등록 업소에서 보청기를 구입한 뒤, 일정 기간 착용 후 검수확인을 거치면 급여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이번 연구 결과는 보청기를 쓰면 치매가 예방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뇌전증과 난청을 함께 가진 고위험군에서는 청력 저하를 방치하지 않고 보청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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