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대비 자산관리에는 냉정한 규칙이 하나 있다. 정작 필요해지는 순간에는 대부분의 선택지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치매 대비를 위해 만들어진 신탁, 후견 계약, 보험금 지정대리청구인 제도 등은 모두 본인의 의사능력을 전제로 한다. 판단력을 잃은 뒤에 남는 것은 가정법원의 성년후견 심판 하나뿐이다. 제대로 된 치매 대비 자산관리는 멀쩡한 정신을 전제로 한다.

2025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 치매환자가 보유한 자산(일명 ‘치매머니’)은 약 154조 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6.4% 수준이며, 2050년에는 488조 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2023년 기준 65세 이상 치매환자는 약 124만 명으로 추정되며, 고령층 자산의 75% 이상이 부동산에 묶여 있어 유동성은 더 취약하다.
아무런 대책 없이 치매가 오면 자녀가 부모의 예금으로 병원비조차 낼 수 없다. 은행이 본인 확인을 이유로 인출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성년후견 심판을 청구해도 결정까지 통상 6개월에서 1년이 걸리고, 그 기간에 금융자산은 사실상 동결된다. 십수 년 부어온 치매보험도 지급 사유는 충족됐지만 청구는 본인만 할 수 있어 함께 잠긴다.
그래서 치매가 오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치매 대비를 위한 자산관리는 돈이 많아야만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흔히 신탁이나 후견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먼저 해야 할 것은 비용이 저렴하고 당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단순한 장치들이다.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네 가지
첫째, 보험이 있다면 지정대리청구인 제도부터 등록한다. 이는 피보험자가 보험금을 직접 청구할 수 없을 때 대신 청구할 사람을 미리 정해두는 제도로, 보험상품과 보험사 약관에 따라 요건이 다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계약자·피보험자·수익자가 같은 계약에서 배우자나 일정 범위 내 친족을 지정할 수 있다. 가입한 보험사 콜센터나 앱에서 신청하고, 가족관계증명서 등 필요 서류를 제출하면 된다. 지정대리청구 서비스 특약은 제도성 특약이라 보험료가 붙지 않는다. 절차가 번거롭다는 지적에 금융당국과 보험업계는 신청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보험사에 전화 한 번이면 끝난다고 하나, 실제 소요시간은 보험사와 상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둘째, 여신 거래 안심차단 서비스에 가입한다.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시기에 가장 흔한 피해는 본인도 모르게 실행된 대출이다. 여신 거래 안심차단에 가입하면 즉시 한국신용정보원에 등록돼 금융권의 신규 여신 거래가 실시간으로 차단된다. 은행과 보험, 저축은행, 우체국 등 다수 금융회사가 참여하며, 가입자의 상당수가 60대 이상이다. 거래 중인 금융회사 영업점에 신분증을 들고 방문하면 된다. 오픈뱅킹 안심차단을 더하면 무단 이체까지 막는다. 은행 앱이나 어카운트인포 앱에서 신청 가능하며, 소요시간은 기관과 개인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셋째, 지정인 알림 서비스를 신청해 가족이 바로 알게 한다. 카드 업계와 금융권에서는 고령층을 대상으로 카드론·현금서비스 이용 내역이나 고위험 상품 가입 사실을 지정인에게 알려주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지정인은 가족이 아니어도 되고 본인이 원하는 지인 한 명이면 된다. 다만 알려주는 장치일 뿐, 지정인이 거래를 막을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넷째, 인지선별검사를 받는다. 준비의 시작은 현재 상태를 아는 것이다. 60세 이상은 누구나 주소지 관할 치매안심센터에서 치매 인지선별검사(CIST)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신분증만 있으면 되고, 20분 남짓 걸린다. 66세부터는 국가건강검진에서 2년에 한 번 인지기능 검사가 제공된다. 경도인지장애 단계에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곧 준비기간의 차이다.

국가가 관리하는 재산, 치매안심재산관리서비스 시범 사업
2026년 4월 22일부터 시작된 치매안심재산관리서비스는 보건복지부가 추진하고 국민연금공단이 수탁자로 참여하는 공공신탁 시범 사업이다. 신탁계약을 맺으면 공단이 의료비와 요양비·생활비 지출을 관리한다. 대상은 자산관리 위험이 있는 치매환자와 경도인지장애 진단자 중 기초연금 수급권자이며, 65세 미만 조기 발병 치매환자 중 저소득자도 해당될 수 있다. 기초연금 수급자는 시범 사업 기간에 이용료가 없으며, 수급권이 없는 65세 이상은 위탁 재산의 연 0.5%를 부담하면 된다. 신청은 국민연금공단 지역본부를 방문하거나 치매안심센터 등의 의뢰로 시작된다.
민간 신탁과 다른 지점은 감독 장치다. 정기 지출은 계좌이체로 자동 집행되지만, 계획에 없던 특별 지출이나 계약 해지는 외부 전문가가 과반수 참여하는 치매안심재산관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공단은 지출 내역을 상시 모니터링하고 반기마다 최소 한 번 직접 방문해 점검한다.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위탁 가능한 재산은 현금성 자산과 임대차보증금 반환 채권, 주택연금으로 한정되고, 상한은 10억 원이다. 부동산과 주식, 펀드는 아직 맡길 수 없다. 시범 사업이라 대상도 제한적이다. 정부는 2년간 운영과 평가를 거쳐 2028년부터 본 사업 도입을 추진할 계획이다.

자산 규모가 크다면, 민간 신탁과 임의후견
공공신탁의 문턱에 걸린다면 민간 상품이 대안이다. 유언대용신탁이 사후 자산 승계에 초점을 둔다면, 치매안심신탁은 생전 인지능력 저하에 대비해 병원비와 요양비 지급 조건을 미리 정해두는 방식이다. 최소 1000만 원, 만 40세 이상이면 가입할 수 있는 상품도 있다. 다만 유언대용신탁도 법정상속인의 유류분 권리는 침해할 수 없고, 은행마다 수탁 재산 범위와 수수료가 다르므로 비교가 필요하다.
임의후견은 판단 능력이 온전할 때 장래의 후견인과 재산관리 원칙을 스스로 정해두는 계약이다. 내가 후견인을 고른다는 점이 법정 성년후견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다만 후견 계약은 공정증서로 체결하고 후견 등기를 마쳐야 하며, 효력은 가정법원이 임의후견 감독인을 선임한 때부터 발생한다.

판단력이 남아 있을 때 챙겨야
첫째, 무료 서비스부터 챙기자. 신탁 상담을 받기 전에 지정대리청구인부터 지정하는 것이 순서다. 공짜로 즉시 효력이 생기는 장치를 비워둔 채 비싼 제도부터 검토하는 것은 기둥 없이 지붕을 얹는 격이다.
둘째, 계약할 능력이 있을 때 챙기자. 치매 진단을 받은 후 뒤늦게 맺은 계약은 나중에 효력 자체를 다투는 분쟁의 씨앗이 된다.
셋째, 배우자도 함께 챙기자. 부부가 비슷한 시기에 취약해지는 상황은 드물지 않다. 공공신탁 사례에도 부부가 함께 인지기능 저하를 겪는 가구가 등장한다.
넷째, 편리함은 일부 포기하자. 안심차단은 해제하려면 영업점을 방문해야 하고, 신탁은 내 돈을 마음대로 꺼내 쓰기 어렵다. 결함이 아니라 제도의 설계 목적이다. 자산 보호란 결국 나중의 내가 내릴 잘못된 판단을 지금의 내가 미리 막아두는 일이다.
다섯째, 준비한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자. 아무도 모르는 대비는 없는 것과 같다. 가입한 보험과 대리청구인, 신탁계약서 보관 장소, 주거래 금융기관을 종이 한 장으로 정리해 배우자와 자녀가 아는 곳에 두어야 한다.
치매 대비를 미루는 가장 흔한 이유는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제도는 하나같이 건강할 때만 선택할 수 있고, 필요해진 순간에는 이미 목록에서 사라진다. 정신이 맑을 때 미리 준비하는 것보다 더 좋은 치매 대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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