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2

“생전 정리, 버리는 일 아닌 내 삶의 이야기 남기는 것”

입력 2026-10-22 07:00

[기획] 유품 너머 삶을 정리하는, 스웨덴식 생전 정리의 지혜 #1 - 물건에 깃든 기억을 잇다

[인터뷰]

데스 클리닝 전문가

사가 린드베리

초고령사회 한국에서 ‘생전 정리’는 더 이상 낯선 화두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를 죽음을 앞둔 쓸쓸한 의식이나, 평생 모은 물건을 무작정 버리는 유품 정리로 오해하는 시선이 많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스웨덴식 생전 정리인 ‘데스 클리닝’의 본질을 짚어보기 위해 두 명의 현지 전문가와 나눈 이야기를 차례대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사가 린드베리 (Saga Lindberg·41)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데스 클리닝 강연가이자 정리 조력자. 소호 하우스 스톡홀름, 스톡홀름 농아인 시니어 협회(SDP) 등에서 강연하며 물건을 통해 세대 간 기억을 잇는 스웨덴식 생전 정리 문화를 알리고 있다.

▲스톡홀름 소호 하우스에서 강연 중인 사가 린드베리. 그는 데스 클리닝이 모든 물건을 무작정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잡동사니와 소중한 보물을 구분해 삶의 이야기를 남기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사가 린드베리 제공)
▲스톡홀름 소호 하우스에서 강연 중인 사가 린드베리. 그는 데스 클리닝이 모든 물건을 무작정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잡동사니와 소중한 보물을 구분해 삶의 이야기를 남기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사가 린드베리 제공)

나이가 들수록 집 안의 물건은 주인을 닮아간다. 거실 장식장 한구석의 기념품, 옷장 깊숙이 걸린 외투, 서랍 속 오래된 편지까지. 노년에게 오랜 시간 곁을 지킨 사물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치열하게 일했던 젊은 날의 훈장이자 가족과 함께한 세월의 증거이며, 때로는 내가 살아왔음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 물건을 정리한다는 스웨덴의 ‘데스 클리닝(Döstädning·죽음과 청소의 합성어)’이 한국에 소개됐을 때, 많은 시니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론 거부감을 내비쳤다.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벌써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이냐는 반감, 혹은 내 삶의 흔적을 스스로 지워버리라는 강요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데스 클리닝을 강연하는 사가 린드베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데스 클리닝을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당신의 소중한 삶의 기록이 흩어지고 사라질 위험이 더 크다”고 단언했다. 물건을 무작정 내다 버리는 것과 데스 클리닝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뜻이다.

‘데드 클리닝’이 아닌 ‘데스 클리닝’

한국에서는 데스 클리닝이 스웨덴의 오랜 전통문화처럼 알려져 있지만, 정작 현지 노년층의 반응은 조금 뜻밖이다. 린드베리는 “스웨덴 어르신들은 자신들이 해오던 일에 ‘데스 클리닝’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고, 심지어 스웨덴만의 독특한 현상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라곤 한다”고 전했다.

“많은 분이 ‘원래 나이 들면 세계 어디서나 다 이렇게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으세요. 누군가에게는 은퇴를 맞이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식 같은 일이죠. 스웨덴에서는 이를 사후 유품 정리 서비스인 ‘데드 클리닝(Dödstädning·Dead cleaning)’과 명확히 구분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유족이 일부만 추려내고 업체가 몇 시간 만에 집 안을 싹 비워버리는 것이 데드 클리닝이라면, 데스 클리닝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손으로 직접 물건을 갈무리하는 과정입니다.”

그가 정의하는 데스 클리닝의 목적은 명확하다. 남은 삶을 정돈하는 동시에, 내가 떠난 뒤 남겨질 이들의 짐을 덜어주는 배려다. 슬픔에 잠긴 가족들이 산더미 같은 유품을 일일이 분류하고 가치를 판단하느라 지치지 않도록, 물건의 주인인 내가 최소한 한 번은 삶을 추려두는 것이다.

“물건 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는 오직 주인만 알고 있어요. 무엇이 가치 있어서 팔 수 있는지, 무엇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박물관에 보내야 하는지, 그리고 언뜻 평범해 보이는 어떤 물건에 우리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어 대대로 물려줘야 하는지 말입니다. 데스 클리닝이라는 말을 처음 세상에 알린 마가레타 망누손의 말처럼 ‘모두가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물려받고 싶어 하지만, 그 누구도 모든 것을 물려받고 싶어 하지는 않으니까요.’”

보물과 잡동사니를 가르고, ‘이야기’를 입히다

그렇다면 평생 모은 물건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 정체성이나 역사가 지워지지는 않을까. 이런 우려에 대해 린드베리는 “가장 큰 오해는 일상에서 당장 쓰는 물건만 남기고 모든 것을 내다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핵심은 모든 것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보물’과 무가치한 ‘잡동사니’를 분리하는 데 있다. ‘언젠가 쓸지 몰라서’ 둔 일상용품이나 아무런 감흥 없이 공간만 차지하는 물건을 덜어내야 진짜 소중한 보물이 드러난다는 논리다. 그는 물건이 줄어든 자리에 ‘이야기’를 채워 넣으라고 조언하며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얼마 전 제 마흔한 번째 생일에 아흔넷이 된 할머니께서 포장된 선물을 들고 찾아오셨어요. 할머니 집에서 가져온 물건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하니 풀기 전부터 설레더군요. 상자를 열었더니 당장 쓸 수 있는 하얀 초 두 개와 함께 반짝이게 닦아놓은 앤티크 황동 촛대가 들어 있었습니다. 불을 붙이는 동안 할머니는 칠순 생일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절친한 의사 친구분께 그 촛대를 선물 받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덕분에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할머니의 칠순 잔치 이야기를 나누며 따뜻한 시간을 보냈죠.”

그의 딸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1920년대에 자신의 부모님이 구입해 물려주셨던 작은 크리스털 소금·후추 병을 증손녀에게 선물했다. 장식장 안에서 먼지만 쌓이기보다 실제로 쓰이길 바랐던 할머니의 마음 덕분에, 그 작은 크리스털 그릇은 현재 십 대 소녀의 방에서 반지와 귀걸이를 담는 보석함으로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 선물을 건네는 자리에서 아흔 넘은 할머니가 증손녀에게 자신의 소녀 시절을 들려주며 깊은 유대감을 나눈 것은 물론이다.

“데스 클리닝을 하면 물건과 함께 그 안에 담긴 내 삶의 이야기를 온전히 전할 수 있습니다. 식탁 하나도 그냥 두면 평범한 가구에 불과하지만, ‘100년 전 증조할아버지가 고향 마을의 나무를 베어 손수 만드신 식탁’이라는 이야기를 알고 나면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니까요.”

▲아흔넷이 된 할머니(오른쪽)와 함께한 사가 린드베리. 할머니는 손녀와 증손녀의 생일마다 자신이 평생 아껴온 물건을 하나씩 건네며 그 안에 담긴 가족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물려주고 있다.(사가 린드베리 제공)
▲아흔넷이 된 할머니(오른쪽)와 함께한 사가 린드베리. 할머니는 손녀와 증손녀의 생일마다 자신이 평생 아껴온 물건을 하나씩 건네며 그 안에 담긴 가족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물려주고 있다.(사가 린드베리 제공)

소비의 시대를 살아온 베이비부머의 딜레마

물론 스웨덴이라고 해서 모든 시니어가 기꺼이 물건을 비워내는 것은 아니다. 린드베리는 강연 현장에서 만난 시니어들의 반응을 전하며 흥미로운 세대 차이를 짚어냈다. 현재 80~100세에 이른 고령층보다, 이른바 ‘베이비부머’ 세대가 데스 클리닝에 훨씬 더 큰 주저함과 저항감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고도성장과 대량소비 시대를 거쳐온 한국의 새로운 노년층에게도 적용되는 대목이다.

“현재 80대 이상 어르신들은 삶이 행복하기 위해 그리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계십니다. 반면 그 뒤를 이은 베이비부머 세대는 오늘날처럼 본격적인 소비를 즐긴 첫 세대예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쇼핑을 했고, 당시 물건들은 요즘 생산되는 것보다 품질도 꽤 좋아서 지금까지도 멀쩡하죠. 사실상 ‘수집가’ 세대인 셈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이 소유한 물건의 시장 가치를 과대평가하거나, 자신이 아끼는 만큼 물건의 가치를 온전히 알아줄 ‘완벽한 주인’을 찾으려다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의 강연을 들은 한 시니어 여성은 1980년대 그리스 여행에서 산 앤티크 기념품 화병 때문에 수년째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자녀들은 원하지 않고, 스톡홀름의 지중해 박물관에 문의해 봐도 관심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과거엔 기쁨을 주던 물건이 이제는 ‘제대로 된 곳에 보내야 한다’는 책임감 탓에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도 여기서 비롯된다. 부모는 소중한 물건을 자녀가 물려받길 원하지만, 따로 사는 성인 자녀는 단호하게 “필요 없다”고 손을 젓는다. 부모 입장에서는 단순히 물건을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억을 부정당한 것처럼 서운할 수밖에 없다.

“거절당하는 기분은 데스 클리닝 과정에서 겪는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자녀에게는 ‘아니오’라고 말할 권리가 있고, 부모에게는 실망할 권리가 있어요. 이럴 때는 주방 등 한 공간을 정리하면서 내놓을 물건들을 모아두고 젊은 가족들을 초대해 보세요. 작은 벼룩시장처럼 각자 삶에 쓸모 있는 물건을 직접 고르게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더라도 서로 부담을 덜 수 있고, 자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물건이 있다면 돌아가신 뒤가 아니라 지금 당장 주세요. 내 물건이 자녀의 집에서 새로운 기쁨이 되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습니다.”

▲데스 클리닝 전문가, 사가 린드베리.(사가 린드베리 제공)
▲데스 클리닝 전문가, 사가 린드베리.(사가 린드베리 제공)

삶의 마무리 언제 그리고 누구와 시작할 것인가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60대부터 데스 클리닝을 시작하는 것이 자칫 수십 년 남은 노년의 삶을 너무 일찍 ‘죽음’에 매몰시키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린드베리는 “특정한 나이보다 인생의 계절과 속도에 맞춰 접근하라”고 조언했다.

조금 일찍 시작하면 더 나은 체력과 기억력, 그리고 추억을 함께 나눌 배우자가 곁에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당장 다시 쓰지 않을 스포츠용품이나 낡은 가전, 오래된 서류, 맞지 않는 옷부터 가볍게 덜어내고 나머지는 나중으로 미뤄두면 된다. 반면 너무 늦게 시작하면 체력과 기력이 떨어져 타인의 손에 의지해야 하고, 기억마저 흐려질 위험이 크다.

정리의 주도권은 철저히 물건의 주인에게 있어야 한다. 가족과 함께하면 추억을 나누는 즐거움이 있지만, 결정이 느리다고 재촉하거나 반대로 너무 빨리 버린다며 말리는 통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혼자만의 속도로 진행하거나, 아무런 편견 없이 두 손과 경험을 빌려주는 전문 정리사의 도움을 시간제로 받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인터뷰 말미, 한국에서는 부모에게 “나중에 이 물건들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는 것 자체가 부모의 죽음을 재촉하는 불효처럼 여겨져 대화를 꺼내기조차 쉽지 않다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조언했다.

“죽음을 입에 올리는 두려움 때문에 대화를 시작조차 못 하는 마음은 어느 문화권이나 비슷합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나이가 들면 누구나 죽음을 예감하게 되고, 그 문제를 혼자서만 곱씹어야 한다면 그곳은 너무 외로운 자리가 됩니다. 만약 부모님이 늙어가는 몸의 고단함이나 먼저 떠나보낸 친구들에 대한 슬픔,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죽음에 대해 사실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신다면 어떨까요? 자주 전화해 안부를 묻고, 그런 주제가 나왔을 때 화제를 돌리지 말고 그 감정 옆에 가만히 머물러 주세요. 그렇게 신뢰와 이해가 쌓이면 사후의 일이나 물건에 대한 대화도 자연스럽게 열릴 겁니다. 무엇보다 데스 클리닝은 당신과 가족에게 안도감을 주기 위한 것이지, 스트레스나 죄책감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내가 사랑하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행복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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