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다방 知音] 눈과 귀를 호강시켜주는 영화음악 10선

기사입력 2015-03-05 18:13 기사수정 2015-03-05 18:13

음악에 취하고 추억에 흔들리고

‘한국영화에 복고 코드가 있다’란 말이 잊힐 만하면 나온다. <말죽거리 잔혹사>, <써니>, <국제시장> 등이 복고 정서를 드러내는 영화인데, 흥행 또한 만만치 않더니 여기에 영화 <쎄시봉>까지 이에 가세했다. 어느 비평가는 이런 현상을 ‘필연’이라며, 그 이유를 거창하게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 많은 사회구조와 연결 짓는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들인 군복, 바싹 처올린 새마을 머리, 청바지, 고고장, 월남치마, 씨레이션 등 시대를 상징하는 풍경과 어휘들의 퇴장이 문화 스펙트럼을 보여 왔다. 영화는 이런 시대의 표정을 정교하게 포착, ‘그 시대의 이야기’로 빚어내는 것이다


김정수 시인 / 문학박사



추억으로 가는 청춘열차 <쎄시봉>

먼저 오늘의 ‘추억영화’를 영화 <쎄시봉>으로 시작할까 한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우중충한 우리의 한 시절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재방(再放)되는 듯하다. 한때 주말 마다 TV로 찾아오던 ‘명화극장’처럼. 성우의 ‘오버 랭귀지(?)’ 더빙으로 더 친숙했던 게리 쿠퍼니, 소피아 로렌이니, 딘 마틴이니, 오드리 햅번처럼 다소 철 지난 그러나 어딘지 살가운 눅눅한 질감의 문화와 추억을 만난다.

어두컴컴한 조명에 궁기마저 보이는 실내 분위기에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지금은 이 바닥에 ‘큰 산‘이 된 앳된 그래서 무모해 보였던 ‘쎄시봉’ 지기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등 자칭 ‘싱어송 라이터’들이 통기타를 뜯으며 노래하고, 걸쭉한 ‘구라’도 날리던 곳이었다.

여기서 잠깐, 오늘의 주제는 <쎄시봉>도, ‘어두웠던 한 철’도 아니다. ‘한 시대의 풍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남아있으며, 이 ‘과거소환’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하며, 거기에서 오늘의 주제인 ‘영화음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일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음악’도 듣고 또 본다. 그러나 결코 이 사건은 당연치 않다. 100년도 채 안된 ‘뉴 테크놀로지’. 1920년대 후반, 무성영화 시대가 발성영화에 밀려나고, 영화에 ‘소리’가 등장했고, 그 소리에 대한 욕구의 정점에 ‘영화 음악’이 꽃 피웠다.

‘영화음악’은 사전적으로는 ‘영화를 위한 작곡·편곡·선곡된 음악’이다. 그러나 이전 무미건조한 뜻풀이에도 불구하고, ‘영화음악’은 무서운 속도로 진화, 발전했다. 영화음악은 필연적으로 영화를 더욱 ‘영화’이게 하는 절대 영역이 됐다.

처음엔 영화음악을 ‘영상의 덧칠’ 정도로 여기다가, 점차 ‘영사의 또 다른 자아’로 신분이 상승한 데 이어, 급기야 ‘영상 너머’까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전쟁마저 기적으로 바꾸는 <피아니스트>

본격적인 ‘영화음악’과 ‘추억’을 풀어볼까 한다. 한 시대를 군림하고, 기어이 문화가 되고, 곰삭은 추억이 되어, 아직도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한 현상을 이야기하려 한다. 혹자들은 늘 ‘이 영화’를 비망록의 첫 자리에 앉히곤 한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Pianist>. 유태계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Wladyslaw Szpilman·1911~2000)’의 실화 영화.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나치에 점령당한 폴란드의 유명 음악가였던 주인공이 단지 유태계라는 이유로, 쫓기고 테러를 당하고, 가두어지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나들다가 탈출했으나, 폐허에 버려져 굶주림과 추위에 쓰러질 즈음, 음악을 좋아하는 독일군 장교를 만나 구사일생 살아남는다는 평이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단순한 서사구조지만 ‘음악’이라는 촉매를 통해 절망과 희망, 휴머니즘과 사랑까지를 말하게 된다. 영화 전편을 차지하는 황량한 폐허 속에서, 헐벗고 굶주려 목숨조차 이을 수 없는 처참한 몰골의 주인공이 언 손을 녹이면서 연주하는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 op. 23’은 서러우면서 환희에 찬 울림으로 감동을 선사한다. 피골이 상접한 스필만을 연기한 애드리안 블로디(Adrian Brody)와 그의 목숨을 구해준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Hosenfelt) 역의 ‘토마스 크레취만(Thomas Kretchmann)의 탁월한 연기는 이 음악 속에서 비로소 완성에 도달한다. 특히 처음 서툴게 음 하나하나를 눌러가다가 곡의 진행에 따라 점차 안정되어 가면서 예전의 기량과 완숙도에 몰입하는 과정은 보는 이들의 감동을 절정으로 몰아가 결국 눈물을 체험하게 한다. 이 연주를 시종 바라보는 호젠펠트의 표정 변화는 완성도 높은 연주와 함께 상승효과를 일으켜 감상자들의 호흡까지 가쁘게 한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폐허 위로 울려 퍼지는 쇼팽의 음악은, 아니 스필만의 연주는 처참한 전쟁의 참사조차 감동의 배경으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었다.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품은 <미션>

롤랑 조페 감독이 1986년 발표한 <미션·The Mission>은, 그 해 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명화다.

18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 각축을 벌였던 아마존 상류 원주민 마을에서 있었던 선교와 순교라는 다소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아마존의 거대한 원시림과 장쾌한 이구아수 폭포라는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토리 라인이 몰입도를 높이는데 전혀 손색이 없었다.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꼽히는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의 음악성이 한껏 발휘된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와 오보에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는 영화음악을 말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명곡이다.

특히 피도 눈물도 없는 악덕 노예상인에서 신부로 변신, 선과 악을 넘나드는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인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와 엄격한 신행과 아가페적 사랑을 몸 전체로 표출한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의 연기가 음악과 어우러져 영화 전체의 격(格)과 디테일을 살렸다. 침략자들이 총과 화포를 난사하며 학살과 파괴를 자행하는데도 그 한가운데로 묵묵히 행진하는 무리들이 끝내 죽어가며 흩뿌리는 선혈과 비명 사이로 넬라 환타지아가 울려 퍼지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극한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느끼게 했다. 유난히 깡마른 가브리엘 신부가 맨 몸에 십자가를 멘 채 이구아수 폭포로 떨어지는 극적 상황에서의 가브리엘의 오보에는 엑스터시와 눈물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이렇듯 영화음악은 절정의 완숙한 연기와 하나가 되어, 관객의 감성을 절정으로 끌어 올리는 역할을 감당한다.


<쉘부르의 우산> <졸업> <사운드 오브 뮤직>도 보석

이 밖에도 쉬 잊히지 않은 영화와 영화음악이 몇 편 있다.

자크 드미 감독의 <쉘부르의 우산·Les Parapluies de Cherbourg·1964>에서 안타까운 연인들의 눈으로 주고 받는 밀어를 느끼게 해주는 ‘미쉘 르망’의 ‘I will wait for you’는 감정의 잔물결을 보는 듯 애잔했다. 특히 1965년의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의 ‘My favorite things’, ‘도레미송’, ‘에델바이스’ 등은 알프스를 배경으로 낭랑하게 퍼지는 ‘줄리 엔드류스(Julie Andrews)’의 맑은 음색으로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 <졸업·The Graduate>에서는 사이먼(Simon)과 가펑클(Garfunkle)이라는 걸출한 듀엣의 목소리로 ‘Sound of silence’ ‘로빈슨 부인’ ‘스카보로의 추억’ 등의 밀리언셀러를 만들기도 했다.

프랑스의 명감독 뤽 베송 감독의 <레옹·Leon·1994>은 킬러라는 비정한 세계를 한 여자 아이와의 감정선과 교차시키면서, 또 다른 휴머니티를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라스트신에서 킬러가 생전에 아끼던 화분을 땅에 묻는 소녀의 무표정 위로 ‘스팅(Sting)’의 기타 선율의 ‘Shape of my heart’은 ‘아픈 위로’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 줬다.

‘아랑 들롱’의 출세작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는 1960년 르네 끌레망 감독 작품으로, 푸른 지중해와 인간의 탐욕을 교직해, ‘니노 로타(Nino Rota)’의 애절한 트럼펫곡 ‘태양은 가득히’를 감싸 만든 명작이다. 방화도 추억 갈피에서 몇 꺼내본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비 오는 텅 빈 사십 계단을 배경으로 잔잔히 깔리는 ‘비지스’의 ‘홀리데이’는 곧이어 벌어질 잔인한 살인을 예감케 하는 묵시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 몫을 했고, 또 오늘의 박찬욱 감독을 있게 한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이미 작고한 가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선곡, 남과 북의 무거운 체제에 눌려 아파하는 젊은이들의 혼란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에서 가수 이선희의 ‘인연’의 서사적 가사를 영화 감성으로 이입시켰다.

느닷없이 한 음절의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있다. 이 때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 영화 그 음악이 마음에 머물고 감돈다는 것은, 끝내 우리가 교환과 거래가 아닌 공감과 추억이라는 가치를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추억은 늘 일인칭일 수밖에 없다.

추억도 힐링이란다. 모쪼록 꼼꼼하게 쌓아가야 할 일이지 싶다.

‘비지스‘의 할리데이를 자주 들었던 ‘열차집’에 가서 돼지기름에 노릇노릇 부친 빈대떡을 어리굴젓 한 점 얹어 막걸리나 한 주전자 마실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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