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전 1905년 1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으로 만들자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861.7.2~1905.11.30) 등 많은 지사들이 이에 항의하여 순국한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6개월 앞선 이 해 5월 국은(菊隱) 이한응(李漢應·1874.9.21.~1905.5.12)이 만리타향 영국 런던에서 혼자 힘으로 다가올 파국적 운명을 막아보려고 발버둥 치다 순국한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는 구한말 국권상실과 관련한 순국 1호이다.
그의 순국에서는 제갈량이 후출사표에서 북벌의 대의를 저버릴 수 없어 온몸을 바쳐 힘쓸지니 죽은 뒤에나 그만둘 뿐이라는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 死而後已)’와 같은 고귀한 정신이 느껴진다. 영국 외무성 문서에는 <이한응 파일>이란 제목으로 2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그가 오늘날 국제정치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당시의 세계정세와 동아시아의 정세를 꿰뚫고 있었으며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비록 현실성은 희박했지만 탁월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한 국은은 좁게는 한국외교사에, 넓게는 한국근대사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라 할 것이다.
이한응은 유학은 물론 영어를 포함한 신학문을 공부하고 1901년 첫 영국 상주공사로 임명된 민영돈(閔泳敦)을 수행하여 3등 참찬관(오늘날 서기관)으로 임지에 부임한다. 그러나 민씨 일가였던 민영돈이 1904년 초 귀국함에 따라 그는 서리공사(charge d’affaires)로서 혼자 공관을 지키며 이후 약 1년 5개월 동안 구국외교를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1901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함으로써 ‘극동위기’가 야기되며 결국 1904년 초 러일전쟁으로 발전한다. 이한응은 1월 13일 영국 외무성을 방문하여 한반도 정세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긴 메모(memorandum)와 각서(note)를 전달한다. 그리고 1주일 후 이 내용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다면서 메모 두 개를 다시 보낸다. 그 내용은 간단히 말해 일본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영국은 다른 열강들과 ‘양해(understanding)’를 통해 어느 쪽이 전쟁에 승리하든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 및 영토 보존을 위한 ‘새로운 보장(fresh guarantee)’을 해달라고 요망한 것이다.
6장의 도표를 곁들인 국은의 메모는 세계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분석, 그리고 세계적 차원(global level)의 동맹체제를 동아시아 지역 차원(regional level)에서 전개되는 분쟁에 적용하여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려는 아이디어 등으로 신선하기 짝이 없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독립은 동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서쪽(유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력균형의 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최근 들어 협력하고 있다. (3개월 뒤 ‘영불협력’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으나 이들 양국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경쟁하고 있어 균형상태가 건전하지 못하다. 일-러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과 한국이 압력을 받게 될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도 이 분쟁에 휩싸여 범세계적 균형체제가 파괴될 것이며 이들의 이권은 침해받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같은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러-일 양국과 함께 4개국조약(a quadruple treaty)을 체결하여 러-일 간의 불안정한 체제에 ‘못’을 박고 심판관의 자격으로 동아시아 분쟁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도의 분석적인 구상은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영국 외무성은 수일간 그의 메모를 철저히 검토한 끝에 이한응의 메모는 결국 영국이 러시아와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후 그는 1년 이상 본국과의 연락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1902년 영일동맹에 의거한 조선의 독립보장 요구, 경의선 철도 건설 제안 등을 통해 영국정부를 집요하게 설득하지만 영일동맹으로 동아시아 문제를 이미 일본에 일임한 영국으로부터 외면당한다.
동아시아 정세는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과 일본의 잇단 승리로 다음해 11월 17일 을사늑약까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다. 일본은 이에 힘입어 ‘내정개혁’이란 명목으로 조선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는데, 이 중 해외주재 공관을 축소하고 외교관들을 철수시킨 조치는 이한응의 장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1905년 3월 중순 이한응은 영국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만리타향에서 1인 공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이었다. 당연히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었을 것이다. 4월 12일 하이드 파크에 있는 서펜틴(Serpentine)이라는 긴 연못가 벤치에 앉아 있는데 일본인 같은 두 동양인이 위협적인 자세를 보였다면서 영국 정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외무성은 이를 두고 ‘우스꽝스러운(ridiculous) 짓’이라는 논평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1905년 4월 말 병으로 눕는데 5월 10일 랜스다운(Lansdowne) 외상으로부터 빠른 회복을 바란다는 서신을 받는다. 이에 용기를 얻은 듯 외상과의 면담을 신청하며, 외무성이 이를 호의적으로 검토하는데, 국은은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5월 12일 음독, 순국한다.
순국에 즈음하여 이한응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오호라,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이 평등을 잃으니 무릇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진실로 핏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견디어 참으리오?’
영국 외무성은 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논평을 남기지 않았다. 1900년 4월 명예 한국총영사에 임명되어 있던 부유한 영국인 프리처드 모건(Pritchard Morgan)은 국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감회를 피력했다. “이 가련한 젊은이는 극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결과에 크게 실망했으며 외교관으로서 그의 경력이 끝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했음이 틀림없다.” 국은의 죽음을 애국심과 경력 단절이라는 개인적 요소가 복합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을사늑약 후 고종은 이제 외세에 의존한 독립이란 불가능해졌으며 의병과 같은 국민적 봉기만이 일본에 대항하는 길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에 반일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안으로 순국열사들에게 시호와 관직을 추서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국은은 이에 포함된다.
을사늑약 체결 9일 후인 11월 27일 고종은 용인 군수를 국은의 향리로 보내 종2품 가선대부 내부협판(내무부차관)으로 추서하면서 그의 고귀한 희생을 기렸다. 국은의 묘소는 오늘날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 있다.(2015.5.5. 그의 110주기 기일을 앞두고)
구대열 (具汏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삼국통일의 정치학>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