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의 옛 이름)2학년 다닐 때 까지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월사금(月謝金)이라 하여 정확한 금액은 희미하지만 매월 200환(지금화폐로는 20원)의 돈을 내야 했다. 70여명의 한반에 20여명정도는 가난해서 그 돈마저 내기가 어려웠다. 월사금을 내지 않은 학생들을 선생님이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가도 돈이 없는지 뻔히 아는 아이들이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교실에서 쫓겨나면 엉거주춤 학교운동장 구석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장난이나 철봉대 주위를 맴돌았다. 월사금을 못내는 학생은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했다. 학생의 잘못이 아니지만 선생님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슬슬 선생님을 피하게 된다. 나도 몇 번 이런 경험이 있다.
장관과 한국은행 총제를 역임하신 박승씨도 수업료를 못 내서 학교 기말고사 때만 되면 시험을 못보고 쫓겨났다고 했다. 수업료를 못 내서 쫓겨나는 일은 비일비재하던 시절이다. 난 우리 집이 가난하기 때문이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고 믿었는데 박승 전 총재는 가난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이라고 설파했다. 국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을 세워서 가난을 몰아낸 것만 봐도 개인보다 국가의 잘못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역시 이런 차원이 다른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어 나라를 발전시킨다.
선생님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게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예전에는 학생은 많고 교실은 부족했다. 저학년인 일 이 학년을 대상으로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 수업을 실시했다. 가끔은 운동장에서도 수업이 있었다. 한번은 운동장 야외수업시간에 우리 반 2학년 초등학생이 무슨 잘못을 했다. 화가 난 선생님이 그 학생을 불러내어 다짜고짜 입을 벌리라고 한 후 운동장의 모래를 한주먹 집어서 학생의 입에 뿌렸다. 지금도 충격적인 그 장면이 내 머리에 박혀있다. 한반에 70~80명의 콩나물시루 공부를 하던 시절이니 선생님도 아이들 통솔에 힘이 들고 짜증도 많았으리라 짐작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처사는 지나쳤다. 지금 같으면 아마 교단에서 영구 추방되었을 것이지만 당시의 선생님 권력은 아무도 시비 걸지 못했다.
트라우마는 오래간다.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에 살아남은 사람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당시 사건이 나고 10여년이 지났는데도 지하철 타기가 겁이 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타게 되면 승차장에서 CCTV를 향해 손으로 V자를 그리고 2~3초간 이런저런 행동을 하고서 전철에 오른다고 한다. 혹 잘못되어 사고가 났을 때 내가 전철을 탔다는 증명을 남기기 위함이란다. 10 여년이 흘렀는데도 지하철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어릴 적 기억에 강렬하게 남게 하는 트라우마는 폭력이나 성적 수치심을 주거나 신체 비하적 발언이다. 내가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트라우마로 작용하는지를 모르고 재미로 아무렇지도 않게 잘못을 저지른다. 어릴 때의 트라우마가 참으로 오래간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좋은 말, 용기를 주는 말을 많이 해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