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말은 일이 공교롭게도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서 억울하게 의심을 받을 때 하는 말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악연(惡緣)이라 한다. 악연을 설명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배나무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나무를 박차고 날아오르자 꼭지가 약한 배가 그만 떨어져 버렸다. 불행하게도 땅에 있던 뱀의 머리에 배가 정통으로 떨어져 뱀은 죽고 말았지만 까마귀는 알 리가 없었다. 까마귀는 뱀을 죽일 이유도 없었고 죽은지도 모른 채 제 갈 길을 갔을 뿐이다.
뱀은 다음 생에 멧돼지로 환생했고 까마귀는 꿩으로 환생했다. 봄이 되어 꿩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부화를 위해 품고 있었다. 하필 그 위쪽에서 멧돼지가 먹이를 찾아 해매고 있다가 그만 바위를 건드렸고 구르는 바위는 꿩의 둥지를 덮쳐 꿩은 알과 함께 압사하고 말았다. 다음 생에서 꿩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냥꾼이 되어 늙은 멧돼지를 활로 쏘았다. 이렇게 악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이어진다고 한다. 우리가 모르고 저지르게 되는 악연도 무수히 많지만 말을 잘못해서 참으면 될 것을 참지 못해서 악연을 만들기도 한다. 알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아 상대방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하거나 참고 용서해줄 만한 일도 원칙과 정의감에 사로잡혀 사람을 보지 못하고 남을 사지에 몰아넣는 악연을 만드는 일도 있다.
필자는 군에서 보병대대에서 보급사병을 담당했다. 그 당시는 군수물자가 귀했다. 상급부대에서 군화가 내려왔는데 새 군화를 받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물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직접 군화를 들고 내무반을 돌면서 상태가 아주 나쁜 군화를 바꾸어주라는 상관인 보급관의 지시가 있었다. 당시 내 계급은 일병이었기 때문에 나보다 계급이 위인 상급 병사들이 수두룩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새 군화를 받기위해서는 아니꼽지만 내무반 침상위에 헌 군화를 내 놓고 필자의 심사를 받아야 했다.
필자가 앞쪽에서 현품 심사를 하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상병 한 사람이 헌 군화를 내놓고 새 군화를 슬쩍 훔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것을 못 본 척 묵인하면 질서는 무너진다. 필자는 다짜고짜 뛰어가서 필자보다 상위계급인 상병의 뺨을 후려 갈겼다. 그 자리에는 병장, 하사들도 있었지만 하극상의 내 행위를 어쩌지는 못했다. 자기 잘못이 있지만 뺨을 맞은 상병은 아픔보다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창피했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거기 손대지 말아요! 다 보고 있어요.’하고 소리만 질러도 될 일이었다.
다음해 이 병사는 유격대 조교로 차출되어 전출을 갖고 필자가 소속된 본부중대가 유격훈련을 받는 날이 돌아왔다. 고된 유격훈련에 조교와의 악연이 있으니 보복을 당해 반쯤 죽을 각오를 했다. 마음속으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길 바라고 자기가 맞을 짓을 했다는 것을 인정해주길 바라고 휴가라도 가서 제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불행하게도 유격장에서 마주섰다. 전세는 역전되어 악명 높은 유격조교와 조교의 지시를 따라야하는 훈련병으로 만났다.
붉은 모자의 유격조교는 필자를 정확히 기억하고 앞으로 불러냈다. 그는 이미 유격대의 고참 병장이었고 나에 대한 적개심으로 눈빛이 이글거렸다. 한참을 노려보더니 ‘너 오면 반쯤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널 만나니 그러지 못하겠다. 나는 다른 유격장으로 갈 테니 훈련 잘 받고 가라’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고 다른 유격조교에게 우리 팀을 인계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유격조교인 그가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나를 반쯤 죽일 수 있었다. 그는 통 크게 나를 용서하는 것으로 악연을 끊었다. 만약 그가 지나친 형벌을 내게 가했다면 나 또한 보복의 칼을 갈았을 것이다.
군대이야기 하면 제일먼저 생각나는 이 사건이고 이 사람이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는 있다. 정의감에 불타 잘한 일이라고 한 것이 반대편에서는 너무 억울하고 창피 할 수가 있다. 기계적으로 잘못만 보지 말고 그 뒤의 사람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빵을 훔친 장발장의 행위보다 그의 배고픔을 알아줘야 따뜻한 사회다. 알고는 악연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