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우체통

기사입력 2017-02-08 18:38 기사수정 2017-02-08 18:38

▲무언가 아름다운 사연이 들어있을 것만 같은 우체통(박혜경 동년기자)
▲무언가 아름다운 사연이 들어있을 것만 같은 우체통(박혜경 동년기자)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에 빨간 우체통이 하나 서 있다.

처음 생겼을 땐 산뜻한 빨강으로 깨끗했는데 요즘은 바로 옆에 생긴 쓰레기통 때문인지 좀 어둡고 지저분해 보여 안쓰러운 느낌이 든다.

편지를 넣는 사람이 드무니 더욱 쓸쓸해 보이는 우체통이다.

어떤 사람은 쓰레기를 넣기도 하고 먹다 만 아이스크림을 집어넣어 안의 편지에 얼룩을 남기기도 하는 몰상식한 일도 벌어진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편지는 언제나 생각해도 가슴 떨리는 아련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담고 보낼 곳을 적어 우체통에 넣을 때는 가슴이 떨린다.

이메일이나 휴대폰의 문자를 사용하게 된 후부터 손편지는 거의 쓰지 않게 되었지만, 예전엔 필자도 이 우체통에 종종 편지를 넣어보았다.

애절한 연애편지는 아니어도 대전에 계신 외삼촌께 안부편지를 보낸다거나 모처럼 친한 친구에게 장난처럼, 그리고 잘 되지는 않았지만, 작년 어떤 단체에 이력서를 보낼 때 이용했다.

우표가 잘 붙었는지 확인하고 몇 번씩 쓰다듬으며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체통 속에 편지를 밀어 넣을 때의 기분은 두근두근 설렘이다.

젊었을 때의 편지는 달콤한 러브레터가 주를 이룬다.

어른이 되어 받은 첫 편지는 대학 새내기가 된 어느 날 생애 처음으로 단체 미팅을 한 필자 파트너로부터 받은 것이다.

유능한 우리 과대표 덕에 대학생이 되자마자 첫 미팅을 할 수 있었다.

신촌의 어떤 큰 다방 2층에서 테이블을 길게 연결하고 우유에 커피를 진하게 탄 밀크커피 한잔과 함께 연대 수학과 학생들과 30여 명이 단체로 만났다.

파트너는 필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부터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학교로 편지나 엽서를 보내왔다.

단체미팅이어서 우리 과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교내 우편함에서 “편지 왔다.”하며 친구들이 필자의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답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편지를 받으니 친구들이 좋겠다며 부러워했을 때 좀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편지는 그렇게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도 했던 소통의 수단이었다.

전달해야 할 편지가 너무 적으니 무용지물이라 우체통을 없애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도 있었지만 아직은 버스정류장에 건재한 우리 동네 빨간 우체통이 고맙기만 하다.

요즘 전국 곳곳에 느린 우체국이 생겼다는 소식이다.

느린 우체국은 빠름을 중요시하는 현대에 기다림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에서 추억을 기념할 장소에 설치한 우체통이라 한다.

우체통이 위치한 곳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엽서나 직접 가져온 우편물에 사연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6개월이나 1년 뒤 적어놓은 주소로 배달된다는데 우정사업국에서 운영하는 정식우체통은 아니지만, 그 기능이 독특해 사람들이 벌써 많이 이용하고 있다 한다.

전국 곳곳의 지자체에서 느린 우체통을 운영하는 이유는 관광객들에게 추억을 남겨 다시 찾아오게 하자는 취지가 있다.

여행지에서 그때의 감정을 담아 자신에게 쓸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 친구 누구에게라도 부칠 수 있으니 진솔하게 쓴 편지를 1년 후 받아 볼 수 있다는 건 의미가 깊을 것이다.

빠른 것을 중요시하는 요즘 세태에 오늘 쓰고 1년 후 받아보는 느린 우체통의 존재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고 소중한 추억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느림보 우체통에 파이팅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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