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

기사입력 2017-03-20 14:43 기사수정 2017-03-20 14:43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우산을 펴 들거나 비옷을 꺼내입고 또는 신문으로 머리를 가린 채 걸음을 서두른다. 하지만 작가는 노트와 펜을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그리고 웅덩이를 바라본다. 웅덩이를 채우는 빗물과 가장자리에서 튕기는 물방울을 하나하나 관찰한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다가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라는 소제목을 보고 숨이 멎을 듯이 깜짝 놀랐다.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강력하게 그리운 이름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필자는 해방촌 꼭대기, 어수룩하고 가난한 동네에 자리한 보성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늑하고 정겨운 학교였는데 아침마다 등산하듯 학교를 다녀야 했던 우리들은 불만이 많았다.

미션스쿨이던 학교에는 인자하고 반듯한 선생님이 많이 계셨다. 사랑이 많은 선생님들이었지만 고루하고 답답한 편이었다. 학생부장을 맡은 화학 선생님은 깡마른 체구에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성큼성큼 걸어다니셨다. 긴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복도에서 마주친 학생의 복장을 지적하거나 품행을 바르게 할 것을 요구하셨다. 필자는 그 선생님을 볼 때마다 현진건 소설에 나오는 B사감이 떠올랐다. 다른 선생님들도 화학 선생님처럼 엄격하거나 재미없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선생님들 가운데 유난스런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어느 봄날, 양지 바른 곳부터 목련이 피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마다 푸른 싹이 돋아나고 바람이 불 때 마다 교실에 쳐 놓은 커튼이 살랑거렸다. 봄이 오니 수업을 듣는 우리들 마음이 싱숭생숭 했다. 2교시가 지나자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체육복을 갈아입어야하나 말아야하나 바깥 날씨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때 한 친구가 소리쳤다.

“야, 박호순 좀 봐”

우리는 뭔가 재미난 일이 없을까 하던 차였으므로 눈에 불을 켜고 창가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작은 키에 항상 단발머리를 하고 다니던 국어 선생님을 우리는 박호순이라 불렀다. 순호박을 거꾸로 해서 붙인 짓궂은 별명이었다. 그 박호순 선생님이 목련나무 아래서 비를 맞고 있었다. 교실에선 비난과 야유가 쏟아졌다. 고개를 들어 목련꽃을 쳐다보면서 한 손으론 꽃향기를 맡고 있는 선생님을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선생님을 볼 때 마다 키득거렸다. 국어 선생님은 유치한 나르시스트라고 흉보느라 한동안 신이 났었다.

이 국어 선생님이 바로 <혼불>을 쓴 최명희 작가다. 대하소설인 <혼불>은 한국인의 역사와 정신을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수준을 한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여러분 나는 유명해 질 거예요”

라고 말씀하더니 그 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됐다. 그리고 이듬해 동아일보 공모에 <혼불> 1부가 당선돼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에 들어서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집필에 매진하였다. 선생님은 미완의 <혼불> 한 작품만을 세상에 남기고 갔지만, 한국현대문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쓰거나 신문으로 머리를 가리고 바삐 걸어가지만 작가는 물방울이 어떻게 웅덩이를 채우는지, 또 어떻게 웅덩이를 튕겨나가는지 관찰하여 글로 쓴다. 그러느라 비를 맞는 사람이다. 선생님도 빗속을 걸어 들어가서 하얀 꽃잎에 튕기는 물방울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젖은 땅에서 올라오는 생명의 기운을 언어로 길어내기 위해 기꺼이 비를 맞고 섰던 것이다. 비 내리는 교정에서 비를 맞고 섰던 선생님이 참으로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작가였다는 걸 몰랐던 우리들이 진짜 바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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