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학교에서 색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들며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에게는 카네이션을 만들어 가슴 한 쪽에 달아드리면 그게 효도라고 말입니다. 나머지 364일은 그저 철없는 자식이었습니다. 속없는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부모님이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사는 형편이 어렵다 생각하시는 부모님은 당신의 무능력 때문에 자식까지 고생한다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자연히 부모님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끝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어느 날 부모님은 안 계셨습니다.
365일 중 하루 5월 8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하자는 날이었죠. 이시대의 젊은이들이 부모의 은혜를 방치하고 저버리고 있음을 방증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국가에서 어버이날을 지정하여 하루만이라도 그 은혜에 감사하자며 강제하고 나섰을까요?
<나이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풀어야 할 본질적인 과제로 ‘나이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천사였고 슈퍼맨이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후원자였습니다. 영원한 내편이었고 인생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돌보지 않은 부모님은 조금씩 병들어 갑니다. 마침내 몸져 누워 자리를 보전한 부모님은 더 이상 천사도 슈퍼맨도 후원자도 아닌 귀찮고 쓸데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제 부모는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아무 것도 혼자서 할 수 없고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자식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생의 크나 큰 의미도 함께 깨닫게 됩니다.
기시미 이치로의 부모님에 대한 애정은 각별합니다. 20대에 뇌경색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학업을 중단하며 간호해야 했고, 50대에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어머니 간호에 지칠 즈음 어머니는 위독해졌고 오래도록 곁에 있었지만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꿈속에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채 깨닫기 전에 아버지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치로는 아버지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스스로도 늙어 가면서 아버지의 노화를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이든 부모님을 간병한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 이상 노령화에 대한 문제를 개인에게 전적으로 맡겨서는 곤란합니다.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지만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내일은 대선일입니다. 많은 대통령 후보가 노령화에 대한 대비책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령화 문제를 국가에 떠넘기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수없이 노인요양 병원을 짓는다 해도 삶에 녹아 있는 가치를 찾지 않고는 모두가 헛될 뿐입니다. 기시미 이치로는 설파합니다. 부모님이 나를 몰라본다 해도 부모님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