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둔야학을 함께 다니던 동급생들 중에 남몰래 사모하는 선생님을 한 분씩 숨겨둔 아이가 서너 명 있었다. 우리들은 당시 한창 감수성 예민한 16~17세의 꿈 많은 소녀들이었다. 선생님들도 20대 초반의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으니 그분들을 연모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필자 또한 그들 중의 하나였는데 그 당시의 애탔던 심정을 어찌 말과 글로 다 옮길 수 있으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생들은 하나같이 모두 선하고 순수했다. 지금 사람들에게서는 그 맑고 고운 심성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 그랬을까? 흙은 선하고 정직한 것이니까.
야학 선생님들은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을 가르쳐보겠다고 자신들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서, 또 배우는 학생으로서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우리들의 선생님이 되어준 분들이었다. 그야말로 순수와 열정의 덩어리였다. 정성을 다해 공부를 가르쳐준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소중한 사랑을 알게 해줬다. 부모님들이 생활고 때문에 베풀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보여준 것이다. 필자는 당시 야학 선생님들이 부모님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들은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우리들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친절했다. 필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들을 무척 따르는 아이였는데 서둔야학 선생님들과의 인연은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제까지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최고로 찬란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 야학 선생님들은 필자의 전부였다. 마음을 빼앗기는 정도가 아니라 넋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선생님들이 필자를 뿌리째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필자는 힘든 일이 있어 고민하다가도 야학에 가면 다 잊어버리고 ‘벙글벙글’ 웃었다. 선생님들만 보면 그저 너무 신이 나고 좋았다. 마치 태어난 지 5~6개월이 지난 아기가 엄마 얼굴만 보면 무조건 방긋방긋 웃는 모습과 똑같았다. 이후로 필자는 야학 선생님들보다 더 존경스럽고 마음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갈 때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의미는 상당히 깊고 소중하다. 필자 삶에 있어서 빛깔 고운 첫정을 고스란히 바친 대상은 바로 야학 선생님들이었다. 그 색깔은 때로 파스텔 색조 같은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여름날의 흑장미처럼 강렬한 향기가 나기도 한다. 야학 선생님들은 교사가 아닌 신과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가르쳤다. 교육자로서의 자격은 종이로 만든 증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현직 교사로 근무하는 필자 또한 야학 선생님들의 10분의 1만큼의 사랑도 제자들에게 쏟지 못한다는 자책감이 있다.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어 공부, 수학 공부가 아니라 사랑이다.
모든 교육은 인간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교육자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어 여야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할 자신이 없는 교사들은 스스로 교단에 서 내려와야 한다. 교직을 천직으로 알아야 하고,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임을 인지해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